P2P 사이트·소라넷·텔레그램. 예정된, 그러나 새로운 디지털 성폭력
지금이 바로 폭력의 악순환을 끝낼 때
디지털 성폭력은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 보는자도 공범이다!
페미니즘의 힘으로 디지털 성폭력을 끊어내자!
몰래카메라, 리벤지 포르노에서 텔레그램 N번방으로. 디지털 성폭력은 반복되고 있다.
40년 전 포르노그래피 논쟁에 참여했던 선배 페미니스트들은 ‘텔레그램 N번방 사건’ 같은 극단적인 디지털 여성폭력이 등장하리라고 예상했을까. 텔레그램 N번방 사건 자체는 새롭지만, 동시에 예정된 것이기도 했다. 법이 디지털 성폭력을 규제하지 못하고 있을 때, 휴대가 가능해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스마트폰이 악용될 여지가 있을 때, 그리고 여전히 디지털 성폭력 영상을 사람들이 유흥거리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때,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었다.
1990년대 후반 인터넷 네트워크가 보급되고 유명인의 성행위 동영상이 온라인에서 유통되자, 익명으로 디지털 성폭력에 참여하는 이들의 범위가 폭증했다. 디지털 성폭력이 사회적 논쟁거리가 되자 1998년에는 「성폭력 처벌법」에 카메라등이용촬영죄가 신설되었고, 2006년에는 유포 행위에 대한 처벌도 규정되었다. 그러나 불법 촬영물의 생산·(재)유포·소비가 범죄라는 인식은 희박해, 사회적 비판도 처벌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2015년 개정된「전기통신사업법」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가관이었다. 이 법은 온라인 서비스 제공자가 불법 촬영물 검색을 제한하는 필터링 시스템을 의무적으로 구축하게 하고 그것의 유통을 내버려 두면 사업자의 처벌이 가능하도록 한 법이다. 남성 중심 커뮤니티들은 이 법을 ‘딸통법’(자위 통제 법률)이라 부르며 반발했다. 개인 성행위 동영상의 유포·유통·소비가 범죄라는 인식 자체가 부재한 상황에서, 이를 막는 최소한의 시도는 야유받고 별 효과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무규제 상태가 오늘에 이르렀다.
소비와 생산의 경계가 무너진 디지털 성폭력에서는 보는 자도 공범이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에서 알 수 있듯, 최근 디지털 성폭력은 메신저 프로그램을 통해 이루어진다. 반쯤 익명화된 SNS를 활용해 불법 촬영물이 게시되면, 이에 대한 의견 개진과 상호 비평을 통해 성 표현물의 소비·변형·창작이 공동으로 이루어진다. 불법 촬영물의 개별적 소비와 시공간을 초월한 디지털 성폭력에의 집단적 참여가 동시에 진행된다. ‘지인능욕’과 단톡방 성폭력은 ‘보는 자’가 생산과 유포에 어떻게 가담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디지털 공간의 익명성과 영속성, 빠른 공유가 가능한 특성은 상황을 악화한다. 생산과 소비가 불분명한 익명의 공간은, 피해자를 향해 평가절하·비하·모욕과 단죄를 시공간의 제약 없이 집단적으로 퍼붓는 효과를 낸다. 이 때문에 디지털 성폭력은 실제로 본 사람의 숫자와 상관없이 피해자에게 영속적인 모욕을 준다. 어떤 상품이 사람을 영속적으로 모욕하는가! 디지털 성폭력에서는 명백히 보는 자도 공범이다.
일상과 폭력이 결합하는 디지털 성폭력은 여성을 향한 극단적인 폭력이다!
‘지인능욕’이나 ‘리벤지 포르노’에 따라붙는 피해자의 신상, 텔레그램 N번방에서 공유하는 피해자의 일상은 그 자체로 성적 행위 속에 놓여있지 않으나, 디지털 성폭력 영상과 엮이면서 성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소비된다. 이로 인해 피해자의 몸과 일상생활 전체, 나아가 피해자의 인격 모두가 오직 피해자의 성으로만 환원되고, 음란한 것으로서만 의미화된다. 자신의 일상이 ‘음란한 것’으로 환원된 피해자들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사생활의 자유가 박탈되고 일상 전반이 제약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디지털 성폭력은 기존의 성폭력 대처 방법을 무력화한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이다. 무한한 가해자가 존재하기에 피해자-가해자 분리 같은 피해자를 보호하는 조처를 하기 어렵다. 영상을 모두 지우기 전까진 피해가 계속된다. 일상과 폭력이 결합하기에 피해자가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기 어렵다. 일상과 결합한 디지털 성폭력은 공동체를 바꾸기 위한 시도를 좌절시킨다는 점에서 여성에 대한 극단적인 폭력이다.
바로 지금이 디지털 성폭력 악순환을 끝낼 때, 불법 촬영물의 배포, 유통, 소비를 처벌하라!
2017년에 발표된 「디지털 성범죄 피해 방지 종합 대책」은 불법 촬영물의 재유포 행위에 대한 처벌 방침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았다. 불법 촬영물의 유포를 방지·규제하는 「전기통신사업법」은 음란성을 근거로 작동하기에 재유포 행위의 심각성이 간과되고 규제의 공백이 야기되었다. 이달 초 「텔레그램 N번방 방지법」으로서 만들어진 「성폭력처벌법 개정 법률안」 역시 영상편집으로 성적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딥페이크(인공지능을 이용해 영상의 얼굴을 조작) 행위만을 처벌 대상에 포함하는 데 그쳤다.
범죄자의 신상이 공개된 오늘을 시작으로, 디지털 성폭력을 막을 수 있는 수사 시스템 개선, 국제 공조 수사, 소비자와 유통자에 대한 처벌, 피해자 재활을 논의해야 한다. 조주빈 같은 괴물만을 처벌하기 위해 법이 개정되면, 정작 평범한 사람들의 유통과 소비 때문에 디지털 성폭력이 확산하는 현실은 바꾸지 못할 수 있다. 디지털 성폭력은 한 명의 소비조차도 피해자에게 큰 피해를 주나 이를 막을 법 제도는 미비하다. 우리는 불법 촬영물의 배포, 유통, 소비를 집단 성폭력 개념을 적용해 형법상 처벌할 것을 요구한다.
다시는 여성이 여성이어서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페미니즘의 힘으로 디지털 성폭력을 끊어내자!
가해자들은 피해자의 부모와 친구에게 불법 촬영물 영상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하며 가학 행위를 저질렀다. 불법 행위인 디지털 성폭력을 불법 행위인 유포 협박으로 덮는 기가 막힌 상황이 벌어졌다. 참극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디지털 성폭력을 더 강하게 규제하는 것과 함께, 피해자가 어떻게 디지털 성폭력에 연루되었든 상관없이, 피해자의 조속하고 안전한 공동체 복귀를 돕는 새로운 성 윤리가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는 ‘나부터 디지털 영상을 보지 않겠다’는 선언이 법 개정만큼 절실히 필요하다. ‘내 주변 사람이 영상을 유포할 경우 바로 유통 고리를 끊어내겠다’는 결의가, 피해자의 공동체 복귀를 위한 빠르고 효과적인 시도가 절실하다. 소라넷을 폐지했던 것도,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유흥거리가 아닌 사회문제로 바꿔낸 것도, 페미니스트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아직 이 사회에는 더 많은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신자유주의를 넘어 대안세계화로!
2020년 3월 24일
전국학생행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