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행진에서 보낸 편지]


사발식이 여성주의랑 무슨 관련이 있냐구?


관악 보람



·8 여성의 날 문화제에서 사발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었습니다. 누군가는 사발식이 왜 여성주의랑 관련이 있는지 의문을 가졌을 것 같습니다. ‘남자지만 사발식을 싫어하는 남자’도 ‘여자지만 사발식을 즐기는 여자’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여성주의를 생물학적인 성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두 사례를 한 번 비교해봅시다. 저에게는 자기 자신의 외모에 아주 관심이 많고, 목소리 톤이 다른 남자들에 비해 높은 남자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 그런 그 친구는 ‘남자 아이가 왜 그러냐?’, ‘차라리 ‘여자’로 태어났어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식의 말을 종종 듣게 됩니다. 반대로 목소리도 크고 운동에도 관심이 많고 늦게 까지 남아서 잘 노는 여자 친구도 있습니다. 이 친구는 여자이지만 다른 친구들 사이에서 ‘남자’라고 놀림을 받습니다. 사회에서 규정하고 만들어낸 여/남이 가져야 할 특성(‘여성성’과 ‘남성성’)이 여/남의 성격에 많은 영향을 주지만, 실제로 여/남이 가지고 있는 성격․취향과 같지는 않습니다.

사발식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학적이고 폭력적입니다. 누군가를 취하게 하려고 술을 엄청 마시게 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폭력적입니다. 그리고 사발식이 가지는 폭력성은 남성 중심적인 문화가 가지는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흔히 여성들은 집단에 충성하지 않는, 분열적인 존재로 여겨지고 남성은 집단에 충성하고 헌신하는 존재로 여겨집니다. 함께 같은 술을 마시고 비우면서 동질감을 내면화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사발식은 그런 의미에서 집단적 폭력의 현장임과 동시에 소위 ‘남성적’ 문화의 재생산 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소위 말하는 병샷을 하는 남학우들에게 우리는 ‘남자답다’라는 수식어를 쉽게 가져다붙입니다. 즉, ‘남자다운’ 병샷, 사발식을 하는 학우들을 띄우고 칭찬하는 사발식 분위기는 은연중에 ‘집단에 충성하는 남성성’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발식은 그 자체가 가지는 폭력성과 사발식 문화가 존재하는 공간의 폭력성과 배제성 때문에 여성주의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남성 중심적인 문화 속에서 남학우와 여학우가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과정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남자’라고 놀림 받는 여학우들은 희화화되기도 하지만, 공동체 내에서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기 위해 힘들어도 술도 잘 마시고 술자리에서 오래 남아 있고, 강하고, 활발한 성격 등을 내면화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내면화된 여성들이 실제로 공동체 내에서 ‘잘’, 그리고 ‘오래’ 남을 수 있습니다. 조신하고 얌전한 ‘여성성’을 가르치는 사회에서 자신도 모르는 와중에 그런 ‘여성성’을 내면화해온 여학우들은 이러한 분위기에서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활발하고 분위기를 띄워야하되 너무 지나치지 않게(밤을 새서 남는, 술을 잘 마시는 여학우에 대해 발생하는 뒷담화를 생각해보세요.) 행동해야 한다는 모순적인 명제 사이에서 여학우는 술자리에서의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신경 쓸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남성 중심적인 (술자리) 문화에서 여성들은 잘 놀면서도 사회가 여성들에게 요구하는 아름답고 연약한 여성이 되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반면 남학우가 ‘여성적’일 경우 거의 희화화되면서, 공동체 내에서도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남성이 다 잘 나서고 분위기를 띄우는 활발한 성격은 아닌데도, 술이 약하고 술자리에서 얌전한 남학우는 ‘에이, 남자가 이것도 못하냐.’와 같은 뜻 모를 비난을 받게 됩니다.(하는 사람들은 장난으로 하겠지만 생각해보면, 정말 ‘이유 없이’, 사회가 만들어낸 ‘남성성’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발식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접해 있는 공간과 우리가 즐기는 놀이문화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남성과 여성에게는 공동체 내에서 관계맺음 할 시간(기회)에서도 차이가 존재합니다. 남성과 여성이 공동체 대부분의 술자리에서 오래 남아 있는 여성이 남성보다 적습니다. 밤에 돌아다니는 것이 안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혹은 (직장 내의 회식 자리에서) 기혼여성의 경우에는 보살펴야 하는 가정이 있기 때문에 오래 남아 있지 못합니다. 또한 흔히 아무렇지도 않은 많은 이야기나 행동들 속에서 여성을 배제하거나 상대화하는 말이나 행동들이 많습니다. 여/남이 함께 놀고 있는 자리에서 여학우들은 잘 알지 못하는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하거나, 옆에 지나가는 여성을 보고 ‘너랑 비교된다며’ 놀리는 남성들의 모습은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도대체 남성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라는 한 남성의 질문에 “당연하지요. 세상에는 그것밖에는 없으니까요.”라고 대답했다는 여성철학자의 말은 여전히도 유효합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들리지 않았던 여성의 목소리를 들어내는 것을 시작으로 여/남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공간과 놀이문화에 대한 고민을 이어나갑시다.

Posted by 행진

2008/04/01 03:09 2008/04/01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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