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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화되는 재정적자,
위기의 도화선이 될 것인가?




지방정부의 빚잔치

지난 7월 12일 경기도 성남시 이재명 시장은 LH공사와 국토해양부에 갚아야 할 5200억 원이 없다며 채무지급유예(모라토리엄)를 선언했다. 경기도에서 재정 자립도가 가장 높아 이른바 ‘부촌’으로 불리던 도시에서 발생한 일이었던 만큼 사람들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성남시 발전연합회는 시장이 시민의 불안감을 조성하는 정치쇼를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행정안전부 역시 성남시 상황은 ‘과대포장’된 것이라며 시장의 ‘섣부른 행동’을 공식 비판했다. 여기저기에서 성남시 시장의 충격적 선언에 맞대응했지만 충격적 사실 그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성남시의 빚은 여전히 5천억 원이며, 성남시는 현재로서 그 빚을 갚을 능력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성남시뿐이 아니다.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들이 성남시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한 부채문제를 겪고 있다. 제 2, 3의 모라토리엄 선언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10년 현재 전국 지자체들의 부채 규모는 거의 100조 원 가량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는 국가 전체 예산의 3분의 1을 넘어서는 막대한 액수이다. 특히 인천시 같은 경우는 부채가 거의 3조까지 늘어나 예산규모의 30%에 육박하여 제 2의 성남시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지방 공기업의 부채 문제도 만만치 않다. 지방 부채 중 지방공기업의 부채는 약 42조 정도이며 이는 공기업 전체 예산의 140%에 달하는 금액이다. 더군다나 지방공기업 세 곳 중 하나는 부채비율이 300%가 넘어선다.
지방자치단체들의 재정자립도 수치는 더욱 가관이다. 전국 지방자치단체들 중 80% 가량이 재정자립도 50%를 넘고 있지 못한 상황이다. 지자체로서는 예산의 반 이상을 지원받거나 빌려오지 않는 이상 운영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특히 군 단위는 열에 아홉이 30%에도 못 미치는 재정자립도를 보이고 있다. 심지어 전라남도 내 지자체 자립도는 평균 11%에 불과하다. 게다가 지자체들의 재정자립도가 1997년 이후로 지속적인 하락 추세 놓여 ‘자치단체’로서 지속 가능성을 위협받을 수 있는 도시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자료 : 행정안전부, “지방자치단체 예산개요"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가?

보다시피, 지방재정의 경향적 부실화와 지역 간 재정 불균형 현상은 이미 우려의 수준을 넘어섰다. 이 쯤 되었으면 어쩌다 지방정부가 이 모양이 되었는지 따져봄 직도 하다. 대다수의 재정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지방정부의 방만한 재정운영과 비전 없는 지자체 운영으로 현재의 위기가 발생했다고 이야기 한다. 공무원들이 해외 탐방이랍시고 호화여행을 다녀온다거나, 청사신축에 수천억 원을 쏟아 붓는다거나, 공약 지키겠다고 온갖 선심성 행정을 남발하는 행태들이 바로 방만한 재정운영의 예이다. 비전 없는 지자체 운영이란 낮은 재정자립도를 극복하려는 지자체만의 특화된 전략 없이 관성적인 행정운영만 반복하는 지방 관료들의 행태를 말한다. 요컨대 돈을 벌어들여 재정자립도를 향상시킬 고민은 하지 않고 해외탐방이니 업무환경개선이니 하며 돈만 계속해서 축낸다면 재정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이들은 철저한 긴축관리를 통한 세출 절감 및 감시제도 도입과, 지역별 특성화 사업을 통한 세출 증대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문제의 원인이 수입 없이 지출만 했기 때문이라면, 역으로 문제의 해결은 쓰는 돈을 줄이고 벌어들이는 돈을 늘리자는 나름 그럴듯한 발상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현재의 지방정부 부채위기의 뒤에는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을 것 같은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라는 거대한 괴물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통념과는 달리, 금융세계화는 고삐 풀린 자본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민중을 착취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제국주의 시대의 서구 열강들이 노동력, 자원, 시장을 찾아 지구 구석구석을 찾아다녔던 것에 반해, 그리고 냉전 시기의 미국이 철의 장막 이편의 나라들을 모두 자본주의화 시키기 위해 온갖 공작을 일삼았던 것에 반해, 현재의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는 몇몇 세계도시(Cosmopolis)만을 쓸모 있는 공간으로 여길 뿐 지구 대부분의 지역들에는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요구에 따라 지역체계는 점차 재편된다. 한 국가 안에서, 깔끔한 국제공항과 회의 시설, 그리고 금융/통신/법률서비스로 무장한 세계도시가 형성되고 그 외의 도시들은 이로부터 분리된다. 전자는 후자와 운명을 공유하지 않는다.


금융세계화에 급속하게 편입 중인 한국 역시 마찬가지이다. 서울과 몇몇 수도권 도시들은 정보화/서비스화를 통해 나름의 세계도시적 자태변환을 시도하고 있는 반면에 그 외의 거의 대부분의 지역들은 이러한 흐름에서 배제되어 도태되고 있다. 세계도시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유무역지구와 같은 반민중적 정책 등을 통해) 외자 유치에 어느 정도 성공한 경우가 간혹 있기도 하지만, 그 역시 매우 일부일 뿐 대다수 도시들은 활로를 찾지 못하고 쩔쩔매는 상황이다. 노무현 정부의 행정수도 이전과 지역 혁신 클러스터, 이명박 정부의 혁신 도시 등이 제기된 이유도 정확히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도태되고 있는 지방 도시들의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중앙정부 차원에서 제시한 나름의 해결책이 행정수도 이전을 통한 지역 균형 발전이나, 지방 특성화 사업을 통한 재정자립도 확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자는 실패했고 후자는 ‘나비도시’ 함평과 같은 소수의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배제된 자들의 경쟁으로서) 지역 발전 이데올로기는 남아있지만 지역 현실에 맞는 중장기적 발전을 위한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각 지방정부가 택한 방법은 단기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보일 수 있는 사업에 돈을 쏟아 붓는 것이었다. 지방자치단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토목-건설 사업이나 전시행정을 경쟁적으로 수행하게 된 것도, 그리고 이로 인해 막대한 부채를 짊어지게 된 것도 이러한 사정에 기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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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뿐만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흐름 속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금융위기는 현재 지방정부의 재정건전성에 결정타를 날렸다. 2007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지방정부는 침체된 경기를 회복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쏟아 부었다. 대부분의 경기부양 자금들은 건설-토목 사업을 대폭 늘리는데 사용되었다. 부동산 시장을 활성화시켜 경기부양을 하겠다는 의도였다. 전국 14개 광역자치단체 산하의 도시개발공사가 발행한 채권 규모는 2007년 8000억에서 2008년 14조 8000억으로 1년 새에 약 14배 늘어났다. 특히 인천도시개발공사 같은 경우는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약 2년 사이에 3조 3천억 원 규모의 채권을 신규 발행했다. 이는 2008년 1600억 원 이었던 채권 발행 잔액보다 20배 이상 많은 액수였다. 게다가 이러한 막대한 세출은 경기부양을 위한 감세정책과 함께 이루어졌다. 2009년 한 해에만 지자체의 세출이 12조 2000억 원 증가한 반면, 세입은 7조원이나 감소했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사실 건설-토목 사업을 대폭 늘려 부동산 시장이 활성화되고 경기가 부양되어 투자되었던 돈이 회수될 수 있다면 그만이다. 인천도시개발공사도 토지 및 아파트 분양수익으로 차입금을 갚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 정반대로 굴러가고 있다. 심각한 경기침체 국면은 벗어났다고 하나 부동산 시장은 낙엽이 나풀나풀 떨어지듯 살며시 낙하하고 있는 중이다. 인천도시개발공사가 착공한 송도국제도시 내 ‘웰카운티 3차’ 분양은 외국인 전용 120가구에 단 1가구만 청약이 들어온 상태이다. 성공을 장담한 것 치고는 결과가 너무 초라하다. 이제 지방정부로서는 정말로 빠져나갈 구멍이 없게 되었다. 성남시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것도, 인천이 제 2의 성남시가 될 것이라는 예측도, 그리고 소수의 몇몇 도시를 제외하고는 지방 대부분의 도시들이 재정위기로 인해 심각한 곤란을 겪으리라는 예측도 모두 이러한 상황에 근거를 둔 것이다. 미래는 그리 밝지 않다. 




투쟁의 정당함, 투쟁의 유효함

상황이 이러니 누가되었든 해법을 내놓기는 내놓아야 한다. 보수주의자들처럼 전통적인 ‘작은 정부’론에 입각하여 공기업 민영화나 사회보장축소를 주장하건, 소위 재정전문가들처럼 수줍게 지역 특성화 전략과 세출감시제도를 제안하건, 우리에게는 솔직하게 위기를 인정하고 해결을 모색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조금 억울한 감이 있다. 우리는 현재의 금융위기/재정위기가 모두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기인한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신자유주의라는 것이 곧 돈 있는 자들의 아욕과 탐욕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다. 지구 대다수의 지역이 ‘무방비도시’가 되고 인간의 삶에 ‘잔혹’이 일상화되어도, 코스모폴리스만 안전할 수 있다면 태평천국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신자유주의자들에 대한 단죄 없이 위기 비용을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우리는 절대로 저들이 만들어 낸 위기에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We won't pay for their crisis!”). 그리스 노동자들이 사회보장제도를 후퇴시키는 긴축정책에 반대하여 벌이고 있는 투쟁과, 남한의 노동자들이 위기 비용 전가에 반대하면서 생존권 보장과 고용ㆍ성장 정책을 요구하는 투쟁이 그 어떤 해법보다 정당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요구가 정당하다는 것이 곧 유효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신자유주의의 파괴적 몸부림을 제어할 합리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생존권 투쟁에만 머무른다면, 후안무치한 신자유주의자들과 무지한 재정전문가들을 넘어설 수 없다. 특히나 현재 재정위기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국가의 재정지출확대(‘서민경제 살리기’, 사회보장제도의 양적 확대 등)만을 요구한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경제적 파산과 정치적 혼란뿐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사회보장 축소나 공기업 민영화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누진과세 확대를 통해 과세를 증대하거나 혹은 과세를 개혁하는 등 재정운용을 효율화하여 평등주의적인 정책을 쓸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많이 있다. 중요한 점은 노동자민중의 투쟁이 생존권 투쟁을 넘어 현재 금융위기와 재정위기의 메커니즘을 변혁할 수 있어야 하는 투쟁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 그래서 투쟁의 정당함과 투쟁의 유효함이 서로 만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자체이다. 그렇다면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이 행해져야 하고 행해질 수 있는가? 답변의 시간은 많이 남지 않았다.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를 무엇으로 생각하건 관계없이, 이 주제를 토론하며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그들의 몫이다. 발리바르의 말처럼 “실패한다면, 어떠한 변명도 필요 없을 것이다.”

Posted by 행진

2010/08/07 17:07 2010/08/07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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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G20 투쟁을 전개하자!




4차 캐나다 회의 결과

6월 28일 캐나다 토론토에서 막을 내린 주요 G20 4차 정상회의에서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재정건전성 강화를 위해 선진국들이 2013년까지 재정적자를 절반으로 줄이고 2016년까지 GDP 대비 부채비중을 줄이기로 합의했다. 이는 남부유럽금융위기에 직면하여 재정건전성에 주력해야 한다는 유럽의 의견을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공식발표문에는 "재정적자 감축 노력이 경기 회복을 더디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는 문구가 들어가 남부재정위기를 해소하기위해 재정긴축이 시급한 유럽과 하루빨리 세계경제를 재편해야 자국경제의 붕괴를 막을 수 있는 미국이 재정정책을 두고 대치하고 있다. 또한 은행세에 대한 선진국과 신흥국 간의 갈등 역시 해결되지 못하고 있으며 은행세 안건자체가 폐기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이외에도 글로벌 무역 균등화, 중국 위안화 절상 등의 민감한 사안들이 거론되었지만 효력 없는 합의만 있을 뿐 실질적으로 진행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런 현실은 G20을 통한 국제적공조로 경제위기해소, 금융을 규제하겠다는 저들의 선전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지난해까지 주요국 정부들은 ‘전례 없는 국제 공조’에 따른 공격적 경기 부양으로 경제위기를 물리칠 수 있었다며 득의만만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이제는 찾아볼 수 없다. 지난 3차 회의 때만 하더라도 출구전략을 논의하던 지배계급들은 당장 터진 위기 앞에서 당황하며 출구전략 논의를 미루고 결정한 것이 고작 재정건전성확보, 재정긴축이 필요하다는 합의가 고작이었다. 캐나다 토론토에 모인 G20 정상회의도, 그리고 IMF도 ‘이제는 누가 뭐라 해도 재정건전성을 위해 힘쓸 때’입니다. 라며 해결책도 의지도 없이 그저 말뿐인 선언만 되풀이 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저들은 지금까지 선언된 것들이 5차 서울회의에서 그동안 회의를 통해 합의된 결과물들의 구체적 방안이 도출될 것이라며 온갖 수사를 갖다 붙이고 있다.  하지만 벌써 4번이나 회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위기해소와 금융규제를 위한 제대로 된 합의조차 이뤄내지 못한 G20이 갑자기 5차 회의에서 ‘선언’이상의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또한 각국들의 자국의 이익을 두고 팽팽한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5차 회의가 진행되는 11월 즈음 이 상황이 극적으로 타개될 것이란 희망을 품는다면 이는 공상일 뿐이다. 이와 같이 G20은 어떤 것도 해결해주지 못하고 있지만 각 정권은 G20에 목을 매며 밑도 끝도 없이 G20만이 우리의 살길이라며 전 국민들이 G20을 올림픽처럼 환영해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들이 이토록 G20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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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20을 통해 노리는 것

각 정권은 G20정상회의가 경제위기를 비롯하여 모든 위기와 문제의 해결사인 마냥 홍보하지만 이는 환상일 뿐이라는 것은 지난회의 결과들이 증명하고 있다. 허나 더 큰 문제는 금융규제안에 대해서 내놓는 각 국의 안들이, 현재 위기의 원인인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억압하고 규제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진전시키려는 방향 속에서 설정되고 딱 그 수준에서 각 국의 이해를 도모하는 방식으로 대립하고 있다는 데 있다. 때문에 그 합의가 무엇이든 금융이윤을 보장하기 위한 저들의 기만은 계속될 것이며 한국에서 진행되는 5차 G20을 성대히 마친다면 우리에게 돌아올 것은 파국일 수밖에 없다. 그들이 말하는 위기극복이란 위기전가와 다를 바 없다. 지난 2차 런던 회의에선 ‘경기부양’이 핵심적으로 논의되면서 신흥개도국들을 지원하기 위한 1조 1천억 달러 출자가 합의되었고 이중 7천5백 불이 IMF에서 확충되었다. 즉 IMF를 통해 신흥개도국들에게 지원을 해주겠다는 것이다. 이는 기존에 IMF의 구제금융을 받았던 나라들이 대부분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된 사실들만 보더라도 ‘지원’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가 결국에는 G20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세계경제 재편의 질서를 신흥개도국들에게 제시하면서 모든 고통을 ‘전가’하겠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없는 것을 우리는 97년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또한 국제금융기구 개혁 등의 구체적인 사안들이 IMF와 기존 국제기구들에게 맡겨졌으며 이는 결국 국제금융기구의 자본과 기능을 강화를 하겠다는 것 그 이상 그이하도 아니다. 더불어 5차 G20정상회의 의장국인 한국은 스스로를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의 ‘가교’로서 역할을 설정하면서, 개도국과 신흥국의 입장을 대변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이렇듯 의장국의 체면상 중립을 표방하고는 있지만, 사실 한국의 역할은 미국이 계획하고 있는 세계경제질서 재편 과정에서 미국의 입장으로 개도국을 잘 달래주는 것에 불과하다. 즉 G20으로 금융을 앞세운 국경 없는 수탈을 이름만 바꾼 채 계속 해나가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3차 피츠버그 정상회의에서부터는 논의된 ‘지속가능한 균형성장’을 위해서 위기 극복 이후에도 글로벌 거버넌스로서 G20을 활용하는 것에 대해 각 국의 정상들이 한 치의 거리낌조차 없이 동의하는 이유이다. 이와 같은 G20의 5차 회의를 성대히 진행해야할 한국정부는 적극적으로 거리의 노점상을 몰아내 디자인 서울로서의 면모를 다지고, 이주노동자들을 단속하며 추악한 한국의 노동현실을 가리려 하고 있다. 또한 한국경제가 안정기에 접었으니 ‘금리인상’을 하라는 IMF와 OECD의 요구까지 모범국가답게 열심히 받아들이면서 서울회의 이전에 이를 추진할 예정이며, 지방선거가 끝나자마자 온갖 공공요금을 인상시키며 노동자민중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물론 이렇듯 G20 스스로가 자신들의 기만성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G20에 자신의 삶을 맡기고 희망을 거는 사람들이 있다. 거센 금융위기에 몸살을 앓았지만 그래도 국민들이 ‘해내야 한다.’는 정부의 이데올로기 공세 역시 만만치가 않기 때문이다.


G20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때문에 G20에 대응하는 우리의 투쟁은 그 목표와 방향이 명확해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요구를 병렬적으로 나열하는 방식으로 투쟁을 진행한다거나, 독재, 반민주와 같이 현 정권의 정책에 대한 일반적 비판이나 G20회의테이블이 약소국 배제하는 절차와 체계를 비판하는 운동으로 G20투쟁의 내용을 채워갈 벌여선 안 될 것이다. 현재 국격 상승과 경제위기 해결을 내걸어 민중들에게 환상을 심으며 본질인 금융세계화 심화를 은폐하고 있는 G20의 본질적인 성격과 그 모순에 대한 비판을 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G20 정부의 이데올로기 공세 속에서 국민들의 희망을 망치고 국익에 반하는 적으로 몰려 고립될 수밖에 없으며 G20의 본질을 흐리고 대응을 지지부진하게 만들뿐이다. G20이 정당성의 확보를 위해 여러 의제를 가져다 붙이고는 있지만 결국 자본과 정권 자신들이 몰고 온 금융위기의 비용을 세계적으로 전가시킴과 동시에, 금융시장을 더욱 더 탄탄하게 만들고 확장시키기 위해 만들어졌음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즉 위기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자신들에게 수많은 이익을 가져다 준 금융세계화의 연명만을 논의하고 있는 곳이 바로 G20인 것이다. 이를 명확히 파악하고 운동을 만들 때 비로소 우리는 G20에 대항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민중운동진영 내에서의 G20대응투쟁은 금융세계화반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G20을 ‘계기’로 투쟁을 벌여낸다는 것은 단순히 G20이 포괄하는 수많은 의제별로 대응하여 따낼 것은 따내고 반대할 것은 반대하자는 이야기부터 사람들이 분노할만한 내용으로 투쟁하자는 대중추수적인 논의들 그리고 11월 투쟁 중간에 거치는 일정정도로 G20을 사고하는 모습 등을 보이고 있다. 이는 아직 운동진영 내에서 G20에 대한 공동대응이 필요하다는 합의 이상의 논의가 진행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G20에 맞선 공동대응을 말하고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의제에만 매몰되거나 G20의 핵심이 금융세계화 심화, 세계경제구조 재편에 있다는 사실을 간과된 채 각자 고립된 실천을 하려는 현재의 양상은 금융세계화에 대한 인식이 부재한 것에서 기인한다. 때문에 의제별로 잘 대응하는 것 말고 왜 G20에 맞서서 ‘공동’의 대응이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합의나,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로 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G20에 맞선 투쟁의 지지부진함이 지속된다면, 운동진영은 결코 민중들의 요구와 융합할 수 없으며 한 발 더 퇴보할 수밖에 없다.


금융세계화 비판을 핵심으로 두고 G20에 반대하는 강고한 투쟁이 필요하다!

G20정상회의로 세계경제질서를 좌지우지하려는 지배계급들의 새로운 판짜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저들의 금융규제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만약 성공한다 하더라도 이는 구조조정, 양극화와 같이 민중들을 더욱 착취하는 구조로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이는 현재 노조탄압, 이주민․노점상등의 탄압이 심화와 같은 형태로 강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응하는 우리의 연대와 전략은 생각보다 강고하지 못하다. 만일 G20에 맞선 투쟁이 일회성으로만 그친다거나, G20반대투쟁의 의미를 잘 밝혀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국격상승을 해치는 자들로서 공격당하며 또 다시 한 발 ‘뒤로’ 물러나야 할 판이다. 또한 G20을 두고 개입이냐 혹은 반대냐 혼란 속에서 우리의 선택은 G20에서 저들이 이루려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자체를 반대하는 투쟁을 벌여내는 것이 G20에 대한 올바른 개입이라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더 이상 노동자민중에게 물러설 곳은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 걸음이라도 더 내딛을 수 있는 투쟁과 이를 뒷받침해줄 강고한 연대의 끈이다. 때문에 지금부터 우리는 G20에 맞서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어떠한 실천을 만들어 나갈지, 또 어떠한 쟁점을 만들고 어떻게 대답을 내릴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신자유주의금융세계화에 반대하는 공동의 합의와 계획을 통해 곧 다가올 G20을 예비해야만 한다. 초민족적 자본의 수탈과 이를 옹호하는 G20이 고용없는 성장 속에서 전세계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고 빈곤층을 확산시킬 것임을 폭로하면서, 자본과 정권의 유지를 위한 ‘저들만의’ 협상에 반기를 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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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행진

2010/08/07 16:52 2010/08/07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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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유연화 심화시키는
파견확대시행을 중단하라!


 지난 6월 24일 윤증현 기획부장관은 ‘하반기 경제운영정책’을 발표하였다. 여기에는 파견범위를 조정하겠다는 내용과 함께 알선수수료 상한제 개선, 고용지원센터와 구직정보 공유, 위탁단가 현실화 등 민간고용서비스 규제 완화와 대형화, 전문화에 대한 계획을 담고 있다. 이를 두고 파견범위 조정이 아니라 확대시행이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으며 곳곳에서 이번 발표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이 진행되기도 하였다. 그러면 이처럼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파견확대와 관련하여 그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면서 문제점들을 짚어보자.

 우리나라에서는 1997년 IMF 이후 파견법이 시행되었다. 이름은 ‘근로자파견법’이지만 파견노동자들을 보호하기는커녕 불법파견과 위장도급 형태의 불법, 편법적인 노동자파견을 급속히 확산시켜 법제정 이유가 곧바로 무색하게 됐다. 간접 고용노동자들을 저임금으로 활용하면서도 사용자로서의 법적 책임까지 간단하게 회피할 수 있는 이 같은 악법은 13년째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결국 기업들의 효율적인 운영과 탄력적인 노동력 사용을 위해 시작된 파견법의 결과는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인한 해고와 대부분의 일자리가 비정규직으로 채워지는 형태로 드러났다. 그런데 이런 파견법의 범위를 현재 제조업과 건설업을 제외한 32개의 업종에서 홍보도우미와 단순 제조업무, 종사원, 택시운전원, 전기전자 부품조립원 등 최대 17개 업무에서도 파견이 추가로 확대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하반기 경제운영계획 발표 이후,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와 고용서비스발전위원회는 ‘공공고용서비스 강화 및 민간고용서비스 활성화를 위한 합의문’을 채택하였다. 합의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공공부문에 2012년까지 통합일자리정보망을 구축하여 여러 곳에 산재해 있는 공공부문 일자리 정보를 한 곳에서 통합 검색 할 수 있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민간부문에서는 ‘종합인재서비스업’을 활성화하여 구인구직-직업정보제공-직업훈련 등 상호 밀접한 연관이 있는 고용서비스들을 원스톱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하겠다는 계획이다. 2012년까지 사회복지 통합망과 고용정보망의 연계가 추진될 경우 고용·복지의 통합서비스가 가능해지고 업무 효율화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2011년부터 구인기업에 대한 직업소개요금을 자율화하고 구직자로부터의 요금징수를 금지함으로써, 민간 직업소개 시 발생하는 비용의 현실성을 반영해 구직자들에게 발생할 수 있는 경제적 부담을 방지될 수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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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정부의 이같은 방침에 대해 파견법‘확대’ 시행을 ‘조정’이라고 말하며 말장난을 하고있다는 반응들도 많다. 또한 정부의 이번 발표에는 공공연하게 제조업까지 파견을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담고 있어 정책에 대한 반발이 더욱 거세지고 있다. 지금도 곳곳에서 불법파견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의 이와 같은 발표는 불법파견을 합법적으로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결국 자본의 편에서 노동력을 그들이 원하는 수준만큼 더욱 탄력적으로 유연하게 이용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어 주겠다는 것이다.

 고용선진화 방안 역시도 정부가 선전하는 것만큼의 효과를 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들은 규제를 대폭 풀어 민간고용서비스업을 활성화하고 이를 통해 시장을 선도하는 고용서비스 기업이 육성되면 산업 전체가 활성화되고 고용촉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고용서비스 산업이 발달하려면 직업소개 수수료를 높이거나 많은 노동자들이 사업장 이동을 해야 고용 서비스업이 돈을 벌기 때문에 고용구조는 더욱 왜곡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구직자가 소개수수료를 내지 않도록 하겠다고 하고 있으나 기업은 이윤을 더 남기기 위해 채용 시 드는 비용이 결국 노동자 임금저하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일자리 창출의 중간과정이 클수록 중간착취는 더 커지기 때문에 정부의 이같은 발표는 눈가리고 아웅하는 격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민간고용서비스 산업의 활성화는 일자리 불안정성을 확대하면서도 기업은 안정적인 인력을 공급받는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것이며 이러한 계획안에는 노동자의 안정된 일자리와 그들의 권리는 없다.

 지금까지 위장도급=불법파견=사내하청=간접고용의 무차별 확산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면서 불법, 탈법을 밥 먹듯이 해온 사용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데 앞장서온 정부가 계속해서 저임금에 불안정한 일자리를 창출하면서 마치 이것이 지금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인 양 말하는 것은 기만이다.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극대화하고 노동시장전체를 비정규직 일자리로 가득채운 형태로 재편할 파견업종 확대 시도 및 민간고용서비스산업 육성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불법·편법을 횡행하며 노동자들의 일할 권리를 빼앗아 가고 있는 파견법 자체에 대한 근원적 성찰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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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7 16:41 2010/08/07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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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지방선거, 무엇을 남겼나?


지방선거 결과 스케치_북풍 누른 노풍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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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류언론들과 여론조사 모두 한나라당 대세론을 이야기 했지만, 투표결과는 예상과 전혀 달랐다. 개표 전 기세등등하게 대거 당선을 예상한 한나라당은 참담한 표정이었다. 서울시장에서 오세훈 후보가 간발의 차로 당선된 것부터 시작해서 전체 기초단체장 당선자 수에서 민주당이 앞선 것까지 사실상 ‘이변’이 일어났다. 많은 언론들은 '북풍을 누른 노풍의 승리'라고 떠들어댔다. 언론은 안희정과 이광재, 김두관을 두고 노무현의 '좌희정', '우광재' 그리고 '리틀 노무현'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천안함 사건 이후 그 원인을 북한의 어뢰 공격에 의한 것이라고 공식 발표하면서 시작된 강경 대북제재는 ‘북풍’을 불어오기는커녕 한나라당에게 ‘역풍’으로 돌아왔다.

 진보정당들도 성적이 크게 나쁘지는 않다. 야권연대를 적극 추진했던 민주노동당의 경우 이번 선거에서 기초단체장 3명(창당 이후 첫 수도권 기초단체장), 광역·기초 의원 139명을 당선시키면서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뒀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현재 야권 단일 후보가 당선된 인천과 강원, 경남 등 3곳 광역단체와 서울 강서와 경기, 성남 등 28곳의 기초단체에서 민주당과 공동지방정부를 실험하기로 한 것에 기대를 걸고 있다. 진보신당의 경우 25명의 지방의원을 당선시켰다. 창당 2년이 지나지 않았다는 점과 1만 5천명 정도에 불과한 당세를 감안한다면 선전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심상정 경기도지사 후보 사퇴 사건으로 혼란이 가중된 것을 비롯하여 중앙당의 불명확한 선거 전략으로 명분과 실리 모두를 얻지 못하는 불만족스러운 선거 결과에 대한 내부 평가가 지속될 전망이다.


반MB 표심의 확대, 국민의 선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번 지방선거 결과는 현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다. 15년 만에 처음으로 54.5%라는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특히 청년층의 투표율이 증가했다. 선거과정에서 화두가 되었던 천안함 침몰 사건과 관련한 한반도 전쟁위협의 고조와 이명박 정권의 독단적 국정운영에 대한 반감을 ‘투표’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상대적으로 분열된 보수층에 비해 진보ㆍ민주진영의 후보 단일화 전술이 효과를 발휘했음도 부정할 수 없다. 현 정권을 견제할 수 있는 현실적인 세력을 선택하려는 국민들의 심리를 후보 단일화라는 틀이 흡수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의 성격을 가진 선거에서 여당이 패배한 것은 비단 이번 선거만의 일은 아니다. 2006년에는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에게 큰 차이로 패배했다. 엄밀히 말해 이번 지방선거결과를 한나라당의 참패라고 보기 어려운 부분도 존재한다. 정당지지율로는 여전히 한나라당이 민주당에 뒤지지 않고 있고, 수도권 지역만 보더라도 한나라당이 여전히 안정적인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한나라당 패배-민주당 승리라는 표면적인 결과 이면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자세하게 분석할 것을 요구한다. 한나라당에 대한 심판 여론을 단순히 ‘민심의 진보화’ 혹은 ‘계급의식의 확대’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국민들의 ‘정권심판’ 요구는 탄탄한 토대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대부분의 국민들은 민주당을 자신들을 대표할 수 있는 진정한 대안세력이라기보다는 집권 정당에 대한 현실적인 견제세력으로 사고하고 있다. 정당을 지지하는 기준이 집권 정당에 대한 반발에 머무는 한 언제든 상황은 역전될 수 있다는 것을,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의 역사가 이미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여당과 다르지 않은 야당이라는 여론이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순간, 지지는 한 순간에 사라지고 말 것이다.

 때문에 현실의 모순을 근원적으로 해결하려는 진보진영은 대중들의 분노와 불만을 동원하여 선거에서 승리하려는 안일함을 넘어, 전반적인 삶의 불안정화와 비민주적 상황에 맞서는 확고한 이념과 대안을 모색하려는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 여-야 할 것 없이 서민중심과 일자리 창출을 이야기 했지만 국민들에게 선거기간 반짝하는 공약 이상의 진지한 대안으로 받아들여졌을지는 의문이다. 선거 막바지로 갈수록, 타 정당에 대한 비난이나 후보이미지로 표심을 잡으려는 모습이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지금 당장은 이명박 정권에 대한 분노로 인해, 범야권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한 국면이 펼쳐지고 있지만,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무능력한 모습을 보인다면 대중들은 곧 등을 돌리게 될 것이다. 진보진영은 현 정권에 대한 ANTI 세력으로 머물기보다는 경제위기와 불안정노동, 저임금과 불평등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세력으로 아래로부터 힘을 키워야 한다.

 그러나 이번 지방선거에서 진보정당들은 현 정권에 대한 불만을 동원하는 것과 정치공학을 통한 자리 얻기에만 열을 올렸다. 반MB연대에 대한 환상으로 진보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들의 우경화는 선거 이후 더욱 강화되고 있다.

정체성을 상실한 진보정당 운동 

 이명박 정권을 심판하기 위해 야권연대를 추구해야 한다는 ‘민주대연합’의 핵심은 민주당 주도의 후보단일화 전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은 이에 적극적으로 힘을 실었다. 민주노동당은 서울시장과 경기도 지사를 비롯한 수도권 지역 기초단체장 선거에서 민주당을 적극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로 민주당으로부터 구청장 후보 등을 양보 받아 당선되는 성과를 내기도 했는데, 이것을 마냥 ‘승리’로 평가하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다. 민주당 집권 10년은 이명박 정권이 실행하는 정책의 토대를 닦은 기간이었다. 금산분리 완화, 한미 FTA 추진, 자본시장통합, 각종 기업에 대한 해외매각 등 한국 사회를 신자유주의로 깊숙하게 편입시킨 것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작품이었다. 이들이 이제와 ‘왼쪽’으로 노선을 선회한 것처럼 선전하는 것은 아주 기회주의적인 모습이다. 이러한 이들의 본질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연합을 추진하는 민주노동당의 모습은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전술적 판단이라고 하기에는 도가 지나쳤다. 선거 이후 민주노동당의 행보는 더욱 우려스럽다. 이번 선거결과를 발판삼아 2012년 민주당과의 공동 집권과 공동내각을 구상하겠다는 이야기를 공개석상에서 서슴지 않고 내뱉고 있다. 일각에서는 진보세력과 자유주의세력이 당내에 공존하는 ‘미국 민주당 모델’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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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진보신당은 원칙 없는 반MB연합에 반대한다고 하면서도 5+4회의에 참가하고 지역별로 야권연대에 동의하는 등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결국에는 5월 30일에 경기도지사 후보였던 심상정 후보가 국민참여당 후보였던 유시민 후보를 지지하면서 사퇴를 공식선언하는 일이 생겼다.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한 노회찬 후보는 끝까지 입장을 고수했는데, 오세훈 후보가 간발의 차이로 한명숙 후보를 제치고 당선하자 단일화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많은 질타를 받았다. 선거 과정에서 보인 여러 가지 한계들로 인해 진보신당 내부에서는 중앙당의 방침과 대표들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표출되었고, 선거 이후 이를 수습하기 위한 방안들을 마련하는 중이다. 진보신당이 선거기간동안 여러 가지로 좌충우돌했던 것은 지방선거의 의의와 목표를 명확하게 설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대연합이 아닌 독자 행보를 하겠다고 호언장담 했으되, 진보신당의 정책이나 방향은 민주당의 그것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반신자유주의와 경제위기 책임전가 반대 등의 입장을 분명하게 내세운다기보다는 ‘복지확대’에만 초점을 맞추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선거 전략으로는 ‘진보정당’으로서의 명확한 위치를 확보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진보정당에 대한 사표심리를 더욱 부추길 뿐이다. 한나라당 심판을 위해 일단 민주당을 찍으라고 주장하는 진보정당들은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력과의 단절 없이는 민중들의 정치가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정치적 이해관계를 위해 이 같은 이념을 희생시키는 것은 ‘진보정치’가 아니다.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라는 목표 자체가 반MB연대에 의해 희미해지고 있는 상황, 대중운동들로부터 대안세력을 만들어가는 노력보다는 표심을 잡기에 급급한 모습의 진보정당은 대중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신자유주의에 맞선 노동자-민중의 저항을 엄호하는 진보세력의 재정비가 필요하다!

 민주당이 지방자치단체장에 많이 당선됐다고 해서 민중들의 삶을 억압하고 빈곤을 확산하는 신자유주의가 역전될 리 만무하다. 한나라당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하반기 이명박 정권의 정책기조는 변화하지 않을 예정이다. 소리 소문 없이 생존권과 노동권을 박탈당하는 이들이 전국 곳곳에 존재하고, 이에 저항하는 노동자-민중의 투쟁을 억압하는 폭력의 강도도 더욱 높아질 것이다. 소위 ‘국민의 힘으로 당선되었다는’ 민주당은 노동자-민중과 같은 길을 걸을 수 없다. 정부여당의 국정운영에 대한 견제역할 정도는 수행할 수 있지만, 큰 틀에서 현재 경제위기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을 관리해야하는 이해관계는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현실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상층중심의 야권연대를 통해 타협과 합의를 이어나가는 방식이 지속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실리적인 이익을 찾으며, 잘못 잡은 손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 친다면 진보의 미래는 없다. 초유의 경제위기 하에서 어렵더라도 대중적 투쟁을 엄호하면서, 장기적 전망을 가지고 분열을 넘어 단결을 구축하려는, 그야말로 ‘재정비’가 필요하다. 다시금 진보정당의 역할에 대한 원칙과 이념을 바로 세울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더 이상 진보정당들만의 과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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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3 22:21 2010/06/23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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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 선언 10주년, 6.15 남북공동선언이 한반도 평화의 해법이 될 수 있는가?



  최근 천안함 사건으로 인해 한반도 평화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남한과 북한 정권은 군사적 대응까지 고려하고 있고 국제 사회는 북한에게 엄정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으면서, 많은 국민들이 이러다가 전쟁 나는거 아니냐며 우려하기도 했다.



  우리에게 익숙할지도 모르는 남북 위기 국면이 다시 도래한 것이다. 왜 한반도는 계속해서 전쟁의 위협에 시달릴 수 밖에 없을까? 이런 대결구도를 끝내고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일차적인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통일’이다. 하지만 이 ‘통일’이라는 한 단어에는 수많은 쟁점들이 존재한다. 심지어 이명박 대통령도 ‘통일을 염두에 둔 안보전략을 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또한 2000년 당시 6.15 남북공동선언(이하 6.15 선언)을 크게 반겼던 세력들은 6.15 선언을 이행하는 것이 통일 및 한반도 평화에 핵심적이라고 말한다.(올해는 6.15 선언 1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과연 한반도의 평화가 이명박 대통령이 주장한 ‘통일을 염두에 둔 안보전략’이나 일부 세력들이 한반도 평화에 핵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6.15 선언’으로 올 수 있을까? 6.15 선언 10주년, 그리고 천안함 사건을 맞아 한반도 평화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고자 한다.


햇볕정책과 6.15 남북공동선언

  6.15 선언의 성격에 대해 분석하기 전에 짧게 6.15 남북공동선언이 무엇인지 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1990년대 미국의 대북 전략은 정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봉쇄와 접촉’, ‘당근과 채찍’ 등으로 집약될 수 있는데(페리보고서의 이중경로 전략) 특히 클린턴 때는 북한정권의 급격한 붕괴를 상정하기보다는 유화국면 속에서 신자유주의 체제에 걸림돌이 되는 북한의 불안정성을 제거하고 북한에 대한 경제 개방을 이끄는 것을 단기적 목표로 하였다. 이 과정에서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6.15 선언이 있게 된다.

  남한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평양에서 만나 정상회담을 했다. 이것은 김대중 대통령이 후보 시절부터 꾸준히 이야기한 ‘햇볕정책’의 일환으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남북 정상들은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회담이 서로의 이해를 증진시키고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며 평화통일을 실현하는데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하고 총 5가지의 합의사항을 발표한다. 이 내용은 남북통일의 원칙(자주적 통일, 남한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의 공통성 인정 등), 이산가족 문제, 비전향장기수 문제, 남북 경제와 문화 협력, 김정일 위원장의 남한 방문 등의 내용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이 선언은 당시 세계적으로도 중대한 계기로 인식되면서 남한과 북한에 곧 항구적인 평화가 찾아올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6.15 선언으로 상징되는 유화적 흐름 속에서 체결된 ‘북미공동코뮤니케’는 곧 미국이 북한의 미사일을 문제삼으며 파기되었고, 2001년 미국의 ‘악의 축’ 발언으로 남북관계는 다시 위기로 치닫게 되었다.



6.15 남북공동선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많은 세력들이 남북이 매우 평화롭게 보였던 시기인 2000년을 떠올리며 ‘6.15 합의 이행’을 주장하고 있다. 올해는 특히 1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행사도 성대하게 치러지는 등 6.15 선언이 더욱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앞서 서술했듯이 이 선언이 남북의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 지는 미지수이다. 6.15 선언이 어떠한 국제적 정세속에서 맺어진 협정인지, 그것을 용인한 미국의 의도는 무엇이었는지 를 자세히 살펴본다면 6.15 선언의 성격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 수 있다.

 김대중 정권의 가장 큰 업적, 바로 6.15 선언이다. 이 6.15 선언은 그 당시 ‘햇볕정책’이라 이름 붙여진 남북한 화해와 관련된 흐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햇볕 정책은 큰 틀에서 미국이 구상하는 동아시아 전략에 공조하는 것이었다. 앞서 서술했던 것처럼 남북관계는 미국의 태도와 정책기조에 따라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

  미국은 계속되는 재정적자와 무역적자에도 불구하고, 세계경제의 헤게모니 국가로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동아시아 지역에서 강력한 군사력으로 경제력을 뒷받침했다. 이 과정에서 북한이라는 ‘변수’를 관리하는 다양한 방식이 등장했던 것이다. 미국의 포용정책은 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리저리 바뀔 수 있는 일시적이고 종속적인 성격일 뿐이다.

  이런 포용정책은 본질적으로 통일정책이 아니라 분단관리정책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평화공존을 위해서는 미군(군인은 전쟁을 수행하는 사람들이며 전쟁의 전제조건이라는 것을 명확히 인지해야 한다!) 철수라는 조건이 우선적으로 충족되어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신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미국 주둔의 필요성을 설득했다고 자랑하기도 하는데, 한반도에 미군이 주둔하는 것 자체가 평화공존의 모순이다. 그런데 많은 세력들은 이런 포용정책에 대해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입장을 제출해왔다.

  현재 악화되고 있는 남북관계를 두고 ‘이명박 정부가 남북관계 10년을 되돌리고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김대중-노무현 10년이 지금보다 괜찮았다고 평가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문민정부 이후 ‘통일’은 국가 정책의 일환으로 흡수되면서 봉쇄정책(적극적 대결)이냐 포용정책(분단 관리)이냐의 양자택일의 문제로 변질되고 있을 뿐 진정 한반도 평화를 위한 정책을 펼쳤던 정권은 단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김대중 정권은 평화 대통령으로 인식되었다. 결국 포용정책은 김대중 정권 시절 민중들의 삶이 벼랑으로 내몰리는 것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배달호, 최옥란 등의 열사들을 잊게하고 김대중을 평화의 수호자/민주의 수호자로 만들어버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미국의 대외전략은 세계자본주의의 질서에 거스르는 국가와 세력에 대한 제재와 공격을 강화한다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 목적은 종국에 이들을 금융세계화로 편입하든 말살하든 간에 현재의 금융세계화 체제를 안정적으로 보장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6.15선언 합의 이행 구호로 달성될 수 있는 것은 현 상태 유지 이상 이하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6.15선언 합의 이행과 같은 구호가 아니라 현 체제가 양산하는 전쟁위기에 맞서 민중들의 평화권을 되찾기 위한 활동, 그리고 금융-군사세계화를 주도하는 미국과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있는 남한 정권에 대해 비판을 전면화해야 한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원칙

  위에서 대략적으로 6.15 선언을 바라보는 관점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방향을 살펴보았다. 이제는 (한반도 전쟁위기가 고조되는 지금) 좀 더 구체적으로 ‘평화’를 위해 우리가 견지해야 할 원칙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이명박 정권의 대북 봉쇄정책 및 대결기조 철회가 선차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명박 정권은 재임 초기부터 북한에 대해 꾸준히 대결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고, 군사적 도발을 서슴지 않고 있다. 이것은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 PSI 참여 등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최근 천안함 사태에서는 조사 결과가 발표되기 전부터 북한을 염두에 둔 발언을 하기도 했고, 조사 결과 발표 후에는 마치 군사적 보복이 해결책이라도 되는양 북한을 자극하고 북한에 대해 대결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이렇게 북한을 군사적 대결 대상으로만 보고, ‘보복외교, 도발외교’를 일삼는 이명박 정권의 대북 태도는 결국 군사적 위기를 불러올 뿐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면서 이명박 정권의 대북정책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천안함 관련 북한 제재/봉쇄정책 즉각 철회하라!
- PSI 참여 중단하라!

  둘째, 한-미-일 군사동맹 해체를 요구하자!

  하지만 문제는 이명박 정권이 대북 대결기조를 철회한다고 해서 끝나지 않는다. 김대중ㆍ노무현 정권 시기에는 북한에 대해 포용정책을 취했지만 그것이 결국 진정한 한반도 평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바로 미국의 동아시아 관리정책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는 아시아-태평양을 연결하는 신흥시장으로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속에서 미국 주도 하에 경제통합의 구상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다. 지역적 수준의 군사강국이 분명치 않으나, 여러 가지 불안정성이 존재하고 있어 대규모 군사적 경쟁의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는 지역이다. 잠재적으로 미국에게 군사적 도전국이 될 중국의 부상을 제어하고, 아시아-태평양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군사벨트를 형성하고자 했을 때, 동북아의 한-미-일 삼각동맹은 지역동맹으로 확장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미국의 군사전략에 전극 편승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는 기존의 한-미동맹을 한반도와 동북아를 넘어 국제 평화에 기여하는 전략동맹으로 발전시키겠다고 하고 있다. 기존의 한-미동맹이 반공이념과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면, 전략동맹은 이를 넘어 정치ㆍ경제ㆍ사회 등 모든 제반 분야에서 상호 신뢰확대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보았듯 이러한 전략은 한-미 및 한-미-일의 공조강화를 통해 미국중심의 동북아시아 지역 안보구도를 고착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미동맹관계를 강화하는 것은 남한이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경제 통합과정을 보다 철저히 이행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에 따르는 위험으로서 한반도의 전쟁 가능성을 높이는 효과를 낳는다. 우리는 한-미동맹은 바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질서와 이에 조응하는 미국의 군사세계화를 공고히 하는 것이라는 것을 낱낱이 폭로해 가며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주범은 바로 한-미-일동맹에 있다는 것을 알리고 한-미-일동맹 폐기를 외쳐야 한다.
- 주한미군 철수하라!
- 키리졸브/팀스피리트 등 한미합동 군사훈련 즉각 중단하라!
- 침략전쟁에 이로울 뿐인 ‘전략적 유연성’ 반대한다!
- 군사동맹이 아닌 평화동맹을!

셋째, 일방적으로 남한이 군비 및 군대 규모를 축소해야 한다!

  전 세계가 무한 군사경쟁을 펼치고 있었던 냉전 시기를 살펴보자. 냉전이 가장 첨예해진 시기에도 미국과 소련은 군비 축소를 위한 다양한 형태의 협상이 지속되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몇몇 제한적 합의가 이뤄지기도 했지만 그것이 실제적으로 획기적인 군비축소나 핵폐기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역사를 돌이켜보더라도 전쟁 위기와 냉전 체제가 종결된 것은 협상에서의 화해, 협력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냉전 체제의 종결은 비로소 소련이 붕괴하고 난 후에야 이루어졌다.

  즉, 양국간의 협상이 군비를 억제하기보다는 오히려 군비증강의 변명이나 눈가리개로 주로 기능했다는 것이다. 이에 평화운동 집단은 미-소 협상을 통한 상호 군축합의를 넘어서, 자국 정부에 의한 일방적ㆍ단독적 군비축소(unilateralism)를 촉구하는 운동으로 나아갔다. 특히 1980년대 초 정점에 이른 유럽의 반핵평화운동은 핵실험의 중단, 군사기지의 제거, 특정 군사전략의 폐기 등 자국정부의 일방주의적 행동을 촉구했다. 일방주의적 행동을 위한 요구는 원칙적으로 정부에 대한 대중의 압력을 통해 쟁취될 수 있으며, 정부의 행동은 뉴스 미디어와 여론에 의해 감시될 수 있다. 반면 운동이 다자간, 양자간 국가적 협상을 요구한다면 협상과정을 자세히 파악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우며, 협상 과정을 신뢰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협상의 실패에 대한 비난은 상대편에 대한 책임 전가로 이어질 수 있다.

  군비축소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이는 없다. 원칙적으로 ‘전쟁’을 바라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이명박 대통령도 전쟁을 원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문제는 ‘어떻게 군비를 축소할 것이냐’이다. 유효한 군비 축소란 ‘일방적’일 수 밖에 없다. 상대방이 하면 나도 하겠다는 ‘포괄적’ 군비축소는 사실상 군비축소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즉 현재의 남북간 군사 긴장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으로 남한이 먼저 군비축소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군대나 군비 축소를 위한 국가 간 협상에 기대하기에 앞서 남한에서부터 일방적인 군비 및 군대 규모가 축소될 수 있도록 하여 남북 평화의 돌파구를 열어야 할 것이다. 국가간의 합의는 언제나 불안정했고, 여기에 민중들의 평화적 열망이 담기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 합의가 현실로 이어지기란 만무하기 때문이다.
- 군비의 증가가 아닌 민중들의 삶에 대한 지원을!
- 천안함 사건 빌미로 한 전력증강 발표 철회하라!


  위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한 원칙과 요구들을 살펴보았다. 이 원칙들을 전제로 하여, 진정 한반도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은 신자유주의 정권의 사탕발린 수사도, 단순한 정권간의 합의도 아니라는 것을 널리 알려나갈 수 있도록 하자. 정권에서는 해마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6.25 ‘전쟁’을 상기시키며 은근히 북한의 군사적인 측면을 부각시킨다. 더군다나 올해는 6.25 전쟁이 60주년이어서 더욱 그 흐름이 눈에 띄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북한 역시 군사 도발에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보복’ 논리로 또다시 북한을 자극하는 것이 진정 남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인지는 차근히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2010년 6월을, 민중들의 적극적인 문제제기와 직접행동을 통해 정권이 광고하는 호국보훈의 달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평화의 달로 만들어가자!


Posted by 행진

2010/06/23 11:55 2010/06/23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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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박한 의료민영화, 어떻게 맞설 것인가?


 

본 글은 보건의료학생 [매듭]에서 기고한 글입니다.
건강한 세상, 더 큰 연대를 위한 보건의료학생 [매듭]은 현재 2010년 여름 건강현장활동(7/19-25)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http://knotforhealth.tistory.com/97을 방문하세요.



의료민영화, 이대로 현실화?

  의료민영화가 현실화되고 있다. 참여정부 때부터 '의료산업화' 혹은 '의료선진화'라는 거짓이름으로 시작된 의료민영화는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인수위 시절부터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였다. 남한 의료의 체계를 송두리째 바꿔놓을 당연지정제 폐지(당연지정제는 모든 의료기관과 국민건강보험과의 계약을 강제하는 제도로서, 공공병원의 비율이 10% 이하인 남한에서 공공보건의료체계를 유지시켜주는 필수적인 제도이다)까지 논의 테이블에 올랐다가 2008년 촛불의 여파로 인해 잠잠해진다. 2009년 다시 '서비스산업 선진화 방안'이라는 정책 속에 포함되어 흐름을 타던 의료민영화 시도는 12월에 발표된 KDI(한국개발연구원)와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의 영리의료법인(현재 남한의 모든 의료기관은 비영리법인이어야만 하며, 자본의 출입과 이윤 배당을 금지하고 있으며 이윤은 병원에 재투자된다) 도입 필요성에 대한 연구용역 보고서가 각기 다른 결론을 내며 모순에 부딪히면서 표류하고 만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2009년 12월 10일 관계부처합동 명의로 발표한 <2010년 경제정책방향과 과제>를 보면 정부가 제시하는 경제정책 6개 분야 주요과제 중 ‘서비스산업 선진화’가 핵심으로 들어가 있다. 서비스산업 선진화는 경제자유구역에서 외국교육기관이나 외국의료기관의 설립과 운영에 관한 특별법 제ㆍ개정, 투자개방형 의료법인(영리병원) 도입이 핵심 요지다. 아니나 다를까, 2010년 상반기 임시 국회에는 어김없이 의료민영화 5대 악법(의료법 개정안, 의료채권법, 보험업법 개정안, 경제자유구역 특별법, 제주도 특별법)이 모두 상정되었다. 또한 지난 5월 17일에는 치료를 제외한 검진, 예방, 관리에 관련된 의료서비스는 모두 민영화시키는 법안인 ‘건강관리서비스법안’이 국회에 상정되었다. 진보적 보건의료 및 사회운동단체가 7년여 시간동안 맞서오던 의료민영화가 단 몇 달 사이에 국회를 통과할지도 모르는 매우 긴박한 상황이다.


  물론 아직까지 의료민영화에 찬성하기보다는 반대하는 국민이 많은 상황에서 정부도 쉽사리 움직이지는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예상 외로 고전하며 민주당에게 일시적으로 주도권을 빼앗긴 상황에서 6월 국회에서 의료민영화를 밀어붙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낙관적인 상황은 아니다. 민주당 및 친노 세력 역시 궁극적으로 의료민영화 찬성 쪽에 힘을 싣기 때문이다(물론 의료민영화에 반대하는 소수의 의원들이 있긴 하지만, 사회운동단체들의 수차례 요구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의료민영화 반대를 당론으로 택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이명박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의료민영화 정책들의 대부분은 과거 노무현의 참여정부 시절 현재의 민주당과 친노세력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이른바 반MB 연합의 맹목성이 잘 드러난다). 지방선거 결과로 인해 조금 늦춰질 뿐, 의료민영화는 하반기부터 신속하게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지난 6일 청와대가 보건복지비서관으로 정상혁 교수를 내정한 일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당연지정제 폐지와 민간의료보험 활성화를 주장하며 의료민영화의 첨병 역할을 해왔던 정상혁 교수를 그런 자리에 앉힌다는 것은 당연지정제 폐지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던 이명박 정부의 변명이 거짓임을 드러낸다. 또한 의료민영화 추동 세력 중 가장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기획재정부의 장관 윤증현이 지난 5월 31일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영리의료법인 도입에 대해 보건복지부와 함께 실무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다시 협의를 시작했다."라고 밝힌 것만 보아도 곧 의료민영화가 시작될 것이라는 것은 명확하다.

  의료민영화의 두 축 중 하나인 영리의료법인 도입(다른 하나는 민간의료보험 활성화)이 구체적인 정책안으로 도출될 경우, 이 문제는 올 하반기 G20과 함께 가장 큰 이슈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영리 의료법인은 미국 베스트 병원 순위에서 10위권 안에 드는 곳이 하나도 없으며(낮은 질), 비영리법인에 비해 사망률은 2% 가량 높고 병원비는 19% 가량 비싼 것으로 나타났다(높은 비용). 또한 영리 의료법인 도입은 단순히 의료공급체계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뿐만 아니라 당연지정제 폐지, 민간의료보험 활성화 등과 긴밀히 연관되어 사실상 의료를 시장화시키고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하는 데 있어 단초가 될 가능이 크다. 이미 시장주의적 의료가 지배하고 있는 미국의 사례를 살펴보면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금방 알 수 있다.

  미국의 평균 수명은 OECD 국가 중 24위, 천 명당 영아사망률은 27위로 건강수준은 매우 낮다. 또 전 국민의 15.3%(4,570만 명, 2007년)가 의료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으며 이로 인해 보험 미적용으로 추가로 사망하는 사람이 1년에 18000여명으로 추정된다. 미국에서는 의료비 부담으로 매년 2백만 명이 개인 파산하며, 이는 미국 전체 개인 파산의 50%에 달한다(파산자의 75%는 의료보험 가입자이다). 반면 총의료비 지출은 2007년 기준 GDP의 16.0%로 매우 높다(OECD 평균 9.1%). 이 중 대부분이 보험자본과 의료자본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제는 의료민영화에 맞서는 강력한 대중운동이 필요한 때이다. 하지만 최근 일각에서 의료민영화에 대한 대안으로 제출되고 있는 ‘건강보험 하나로 OK’ 정책안은 많은 난점들과 위험을 안고 있다. 함께 살펴보자.

'건강보험 하나로 OK',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지난 6월 9일, 국민 1인당 월평균 1만1천원의 국민건강보험료를 더 내면 선택진료비, 병실 차액, 초음파, MRI, 각종 검사의 의약품, 노인틀니 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OK’ 시민회의 준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들은 먼저 비용부담 방식의 변화를 꾀하여 현재 국민 1인당 월 평균 보험료 약 1만1천원을 더 내면 보장률을 90% 이상 수준으로 일시에 끌어올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는 민중의 생존권을 위해서도, 병원 영리법인화와 민간의료보험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이 보건의료체계에 대한 현 상황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현행 한국의 보건의료체계는 전국민건강보험을 통한 공적 의료재정체계와 민간중심의 의료공급체계(공공병원 비율 10% 이하)로 구성된다. 민간중심 공급구조는 행위별 수가제(진료 행위당 수가를 지급하는 제도로 과잉진료를 유발한다)가 결합되어 의료공급자의 영리추구행위를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1.5배의 재정확충을 통해서 보장률을 90% 이상으로 확대할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다. 2002년부터 2007년까지 5년간 건강보험 재정은 82%, 1인당 보험료는 79% 상승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장성 강화는 5.2%에 불과했으며, 연간 가계직접부담액은 43% 증가하여 물가상승률을 훨씬 상회했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영리추구적 공급체계를 건드리지 못하는 재정확충을 통한 보장성 강화는 필연적으로 의료시장의 팽창을 가져올 것이며, 영리추구적 의료공급자만 배불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또 '건강보험 하나로 OK' 안에는 보험자본과 제약자본에 대한 통제방안이 없다. 우리는 미국의 사례를 통해 민간보험자본과 제약자본에 대한 통제 없는 의료체계 개혁은 한계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오바마는 당초 건강보험 개혁안에서  공공의료보험을 만들어 민간의료보험과 경쟁시키려고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 조항은 빠지고 보험 미가입자를 의무적으로 민간의료보험에 가입시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결국 보험자본에게 더 큰 시장을 열어준 셈인데, 여기에 있어 보험자본의 로비와 압력이 상당했을 것이라 예측된다). 보건의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행위자이며, 신자유주의적 재편과정을 통해 더욱더 중심적 위치를 점하는 보험자본과 제약자본에 대한 인식이 없는 대안은 오히려 호랑이새끼에게 먹이를 주는 꼴이 될 수 있다.

  보험료를 (우선적으로) 인상하여 재정을 확충하자는 제안 또한 문제가 있다. 이미 현재의 보험료 수준도 감당하지 못하는 체납인구가 상당한 규모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중들이 보험료 인상안을 받아들일 것인지 낙관할 수 없다. 또 정말 보험료를 적게 내서 보장성이 낮은 것인지에 대해서 검토가 필요하다. 유럽 복지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소득 대비 보험료 부담비율이 낮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와 동시에 기업과 국고 지원의 부담비율이 낮은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보장성 강화를 위한 재정확충은 국가와 자본의 부담을 늘리는 방식을 요구해야 하지 민중들이 적정한 부담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내야 한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국가와 자본의 부담을 확대하는 것은 제도 개선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계급역관계의 변화를 통해서만 쟁취할 수 있다. 계급역관계를 역전시켜내는 투쟁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단순한 보험료 인상에 그치는 수준으로 왜곡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더욱이 만약 의료민영화가 전면화 된다면 보장성이 강화된 건강보험도 무용지물이 된다. 민중의 건강을 심각하게 파괴할 의료민영화를 목전에 두고 있는 지금 썩은 동아줄에 매달리기보다는, 보다 날카롭고 거센 의료민영화 저지 투쟁의 기치 아래 모든 노동자-민중이 결집해야 한다.

의료민영화 저지 투쟁의 의미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의료민영화 의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를 막아내는 싸움에 함께 해야 하는 당위성은 너무도 명백하다. 영리 의료법인 도입은 단순히 의료를 이윤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의료채권법, 병원경영지원회사(MSO) 등과 결합해 금융 자본에게 병원을 통째로 넘겨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금융세계화의 모순이 곳곳에서 체제를 뒤흔들고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 상황에서 의료마저 금융화시킨다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일이다. 더욱이 오바마의 건강보험 개혁이 공공보험 설립안이 빠진 채 보험 자본에게 시장만 키워주는 반쪽짜리가 되어버린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한번 보험 자본에게 넘어간 우리의 건강을 되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또한 되돌린다 하더라도 많은 대가가 필요하다(2009년 폴란드는 의료민영화를 철회하는 대가로 투자보호협정에 따라 네덜란드계 보험 자본인 Eureko에게 18억 유로를 지불해야만 했다).


  유럽발 재정위기가 몰아치고 있는 상황에서 자본의 이데올로기 공격 역시 거세다. 남유럽 국가들의 재정위기의 원인을 복지로 몰아세우며 민중의 생존권을 박탈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맞서는 투쟁으로서, 생존권 투쟁을 모아내는 싸움으로서, 의료민영화 저지 투쟁에 힘을 쏟아야 할 시기이다.


Posted by 행진

2010/06/23 11:48 2010/06/23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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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행진

2010/06/22 14:11 2010/06/22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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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_발간사] 김예슬씨에게 보내는 편지


김예슬씨에게 보내는 편지




얼마 전에 고려대를 자퇴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얼핏 들었습니다.

기사를 검색해보니 당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더군요.

작지 않은 결정을 내린 뒤라 이래저래 심란할 것 같은데,
새로운 출발을 하는 당신에게 힘내라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고려대 게시판에 붙은 대자보 내용을 찾아서 읽어봤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담아 쓴 것이었지만 우리 모두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언론이 당신의 행동을 주목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겠지요.

그 대자보에는 우리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어릴때부터 시작되었지만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닌 경쟁이었습니다.

친구들은 성적표에 숫자로 표시되었고,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였지요.

시험공부는 나에게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답을 주지 않았고

대학에 가서 나이 더 먹으면 그래도 뭔가 보일 거라 생각했지만

세상은 우리에게 앞으로 더 힘들고 잔인한 길을 걸어가라 강요할 뿐입니다.


당신 말대로 대학은 자본에 필요한 부품을 제공하는 공장이 되었습니다.

수업을 듣는 이유는 학점과 졸업장으로 내 품질을 보증해야 하기 때문이지,

한 명의 인간으로서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기 위함은 아닙니다.

토익 공부해라, 성적 관리하고 자격증 따라는 말만 들리는 현실에 있다 보니

“꿈을 찾는 게 꿈이 되었다”는 부분은 슬프기도 하면서 처절하게 느껴졌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이 모든 일을 감당해야 하는 건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를 두려워할 자유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세계를 무대로 자신감 있게 당당히 경쟁해야 하는 G세대니까요.

4000원 짜리 알바해서 외국으로 어학연수 가는 글로벌한 세대입니다.



한편으로는

당신의 외침이 사람들에게 자조와 염세로만 남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상황이 암울하다는 것을 계속 확인하는 이유는

그만큼 사회가 잘못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겠지요.

시대가 너무 암울해서 아무것도 바뀔 수 없는 것처럼 보일 때일수록

저항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온 지난 역사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저항에 보탬이 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는 이 편지를 만듭니다.

뉴스레터의 크기는 사회라는 거대한 탑 앞에 깔려 있는 돌멩이 하나 정도겠지만

잘못된 구조로 위태롭게 서 있는 그 탑이 언젠가는 무너져 내릴 것을 알기에

우리는 더 단단해져야 하고, 더 많은 돌멩이들을 모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회 구조의 모순을 제기하고 바꾸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고 있으니

당신도 자신의 용기 있는 선택에 대해 자부심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서로가 물러지지 않는다면 언젠가 탑 앞에서 돌멩이로 만날 수 있겠지요.


아무튼 자퇴를 축하드립니다.










글 다운 받으실 때 파일이름을 적으시고 마지막에 .hwp를 붙이세요~

Posted by 행진

2010/03/15 21:29 2010/03/15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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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_이슈&입장1] 스포츠는 정치적이다

 

스포츠는 정치적이다

(‘스포츠 행사에 경례를!’과 ‘재벌들은 체육 연맹을 좋아해’는
각각 한겨레 21 761호와 793호 기사를 일부 인용했습니다.)



벤쿠버 동계 올림픽이 17일 간의 일정을 마치고 3월 1일 폐막했다. 인생 역경을 이겨낸 선수들의 메달 소식은 고단한 서민들의 삶에 잠시나마 활력을 불어넣었고, 많은 사람들은 그/녀들의 결과에 대해 메달 여부에 관계없이 축하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두고 한국인들의 시민의식이 높아져서 결과만을 중시하지 않게 된 거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예상외 선전을 거둔 이번 올림픽이었기에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평가가 관대해 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번의 일본처럼 한국 대표팀이 역대 최악의 성적을 내놓았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할지는 앞으로 두고 볼 일이나, 결과나 평가가 어떻든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스포츠는 단순한 오락거리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정치 등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적인 맥락과 구체적인 상황, 주체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이 권력의 정체를 개념적으로 명료하게 규정짓기는 물론 어렵다. 다만 지난 시간 속에서 스포츠 행사들이 누구에 의해 ‘사용’되고 어떤 효과를 낳았는지, 현재의 모습은 어떤지 살펴보는 것은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다양한 요소를 정치화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스포츠와 통치, 자본의 전략과 우리의 삶은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스포츠행사에 경례를!


인기 있는 국제 스포츠 경기는 선수 개인들 간의 기량을 겨루는 것으로 인식되기 보다는 흔히 국가 간, 민족 간의 대결로 이해된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은 평소 스포츠에 관심이 없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종목의 경기가 아니더라도, 다른 나라와의 큰 경기가 있을 때면 마치 기다린 것처럼 경기를 관람하고 자국 선수들을 응원한다. 전 국민이 같은 경험을 공유하게 되는 과정에서 사회적 통합력은 증진되기 마련인데, 이처럼 스포츠 행사가 갖는 위대한 힘을 독재자들은 일찍이 인식하고 있었다.

지구촌이 4년마다 들썩이는 월드컵에는 아픈 과거가 있다. 1934년 제2회 월드컵은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의 야심으로 이탈리아가 유치했다. 남미 국가들은 독재정권에 대한 항의 표시로 2진급 선수들을 내보냈다. 이 바람에 8강에는 모두 유럽 팀들이 올랐다. 결승전에서 파시스트식 경례가 선보일 정도로 정치색이 짙은 대회였다. 이탈리아는 결승전에서 “우승하지 못하면 모두 사형”이라는 무솔리니의 협박 속에 체코를 2-1로 꺾고 정상에 올랐다. 체코의 골키퍼 안타 자보는 “졌지만 우리 11명은 살았다”는 말로 당시의 살벌한 분위기를 전하기도 했다. 체코는 이 대회 준결승에서 독일을 3-1로 꺾었는데, 아돌프 히틀러는 체코한테 지고 귀국한 독일 선수들을 모조리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무솔리니를 따라서 2년 뒤 베를린 올림픽을 개최했다.





1930년대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스포츠를 통한 통치 기법은 1970~80년대 남미와 아시아 독재자들에게는 하나의 지침서가 됐다. 아르헨티나의 독재자 호르헤 비델라가 유치한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이 대표적이다. 당시 월드컵에 참가하려던 각 나라는 아르헨티나 정세가 너무 혼란스럽자 개최지 변경을 요구했다. 네덜란드의 축구 영웅 요한 크루이프는 비델라 정권을 공개 비판하면서 불참했다. 비델라 정권은 민심을 사로잡을 승리를 따내기 위해 편파 판정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강호 헝가리와 맞붙은 조별 리그에서 상대 선수 2명을 퇴장시키면서 2-1로 억지로 이겼다. 2차 조별 리그는 조 편성을 일방적으로 했다. 전 대회 우승팀 서독과 준 우승팀 네덜란드를 한쪽으로 몰아버린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페루를 6-0으로 대파하는 바람에 브라질을 골득실 차로 제치고 결승에 올랐다. 비델라 대통령이 페루와의 경기 전 페루의 부채 5천만 달러를 탕감해주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지기도 했다. 아르헨티나는 결국 결승에서 요한 크루이프가 빠진 네덜란드를 3-1로 꺾고 기어이 우승을 차지했다. 권력자의 의도에 따라 스포츠를 통치의 기제로 활용한 사례는 한국에도 있다. 전두환 정권은 1981년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고 1982년 프로야구를 탄생시켜 국민들의 눈과 귀를 스포츠에 쏠리게 했다. 아시다시피, 프로야구는 대표적인 3S(스포츠·스크린·섹스) 정책 중 하나다.

이처럼 정치가 불안정한 나라일수록 독재자가 스포츠를 내세워 국민적 화합을 꾀하고 자신에 대한 지지를 높이는 수단으로 활용해 왔다. 이는 한국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렇다면 형식적인 민주화가 이루어진 지금의 조건에서 스포츠는 드디어 ‘순수한’ 것이 되었을까?



재벌들은 체육 연맹을 좋아해


한국의 재벌들은 오래 전부터 체육계에 관심이 많았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은 서울올림픽 유치의 일등공신으로 알려져 있고, 1982년부터 2년간 대한체육회 회장을 지냈다. 이명박 대통령도 현대건설 사장 재직 시절 대한수영연맹 회장(1981∼92)을 지낸 바 있고, ‘양궁의 대부’로 불리는 정몽구 회장은 네 번이나 대한양궁협회장을 맡았다. 지금은 아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 대한양궁협회를 이끌고 있다. 월드컵 유치 당시에는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의 지시로 현대중공업 인사들이 별도의 팀을 만들어 월드컵 유치전에 뛰어들기도 했다. 대한축구협회 사무총장을 지낸 고 남광우씨와 김동대씨 등이 대표적인 현대중공업 출신 인사다.

대한체육회 임원진을 보면, 박용성 회장 아래 이건희 전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대한핸드볼협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대한탁구협회장),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대한레슬링협회장) 등이 이사진으로 포진해 있다. 박용성·최태원·조양호 회장 모두 IOC 위원을 노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정희준 교수는 “현재 체육회 이사회 명단을 보면 마치 전경련을 그대로 가져다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라며 “고 정주영 전 회장과 정몽준 회장이 올림픽과 월드컵이라는 메가 이벤트를 유치하면서 국가에 기여했다는 점을 앞세워 대권에 도전했거나 앞으로 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얼마 전에 있었던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사면에 대해 이명박 정부는 ‘경제인 이건희’보다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이건희’에 대한 사면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비리 경제인들은 사면 대상에서 빼고 오직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를 위해 이 전 회장에 대해서만 단독으로 특별사면을 단행했다는 얘기다. 삼성은 ‘꿈의 자리’라는 IOC 위원에 이건희 전 회장의 이름을 올리기 위해 1990년대 초부터 집요하게 작업해왔다. 1996년 이 전 회장이 대한레슬링협회장을 발판으로 IOC 위원으로 선정되자마자 이듬해 올림픽 공식 파트너(스폰서)로 참여했다. 체육계에서는 삼성전자 이재용 부사장이 이 전 회장에 이어 스포츠 외교 쪽에서 상당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스포츠평론가 정윤수씨는 “이재용씨 개인은 야구를 좋아하는데, 그룹 참모들이 ‘야구는 글로벌 스포츠가 아니라서 활동하는 데 제약이 따르므로 축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서 대한축구협회장 자리까지 염두고 두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축구협회장이 되면 이 자격을 발판으로 아버지에 이어 IOC 위원을 노릴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건희 전 회장은 2004년 아테네올림픽 때 이재용 부사장을 자크 로게 IOC 위원장 등 국제 스포츠계 주요 인사들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정리해보면, 재벌들은 체육계에 발을 걸치며 자신들의 정치력 확장을 꾀하는 듯하다. 정몽준처럼 정치권에 직접 뛰어들어 실력발휘를 하는 경우도 있고, 이건희처럼 삼성이 구설수에 오르거나 자신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스포츠를 활용하기도 한다. 특히 이건희 사면 사태에서 보듯 스포츠는 때로 국가의 운영과 사법 질서에 영향을 미친다. 위법을 자행하며 부를 축적하는 것쯤은 국가적 대업을 위해 쿨하게 면죄되는 것이다. 체육회 임원진들의 명단이 재벌 회장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 역시 주목해서 봐야할 부분이다. 이는 재벌들 개인의 취향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한국에서 체육이 이루어지는 방식 자체가 자본과 밀접한 연관을 맺을 수밖에 없음을 나타낸다. 만약 지금과 같은 조건이 혁신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스포츠에 대한 대중적 열망은 여러 장치들을 통해 마지막엔 자본의 권력 증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정치적 스포츠와 소외된 ‘정치’


생산과 소비가 세계화 된 이후 자본들에게 마케팅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지구촌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국제적인 스포츠 행사는 세계로의 확장을 시도하는 기업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홍보 수단이다. 기업들은 월드컵, 올림픽에 공식 파트너 이름을 올리는 대가로 천문학적인 액수를 지불하고 ‘글로벌’한 이미지를 구매한다.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모여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가리는 것보다 더 글로벌하고 경쟁력 있는 느낌을 주는 행사는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자본들은 초민족적인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민족 자본으로서의 이미지 역시 강화한다. 국내의 스포츠 서포터스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과 관련한 이벤트 상품들, ‘태극전사들을 응원 합니다’ ‘대한의 딸 힘내라’와 같은 구호는, 결국 스포츠를 통해 국내 소비자들과 민족적 동일성을 구축함으로써 세계 시장으로 뻗어나가기 위해 안정적으로 자국의 점유율을 유지하려는 자본의 마케팅 전략이다.

그리고 스포츠 행사를 통해 세계의 주목을 받는 것은 한편으로 가진 것 없고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사람들을 더 가혹한 처지로 내모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군부 정권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가난한 대외 이미지를 쇄신하고자 경기장을 비롯한 서울 곳곳의 노점상, 판자촌 주민들을 몰아냈다. 스포츠가 계기였던 것은 아니지만, 작년에 있었던 용산참사를 정점으로 서울시가 하고 있는 ‘디자인 서울’, ‘한강 르네상스’ 역시 마찬가지다. 서울의 저개발 된 지역을 없애고 휘황찬란한 고층 빌딩을 건설한다는 계획은, 평범한 서울 주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련된 서울의 이미지를 통해 외국인 투자자들을 유혹하기 위한 겉치장에 다름 아니었다. 스포츠 행사가 열리면 자연히 개최 도시도 많은 관심을 받게 될 텐데, 조명되는 것은 화려한 겉모습이지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솔직한 모습이 아니다. 물론 이런 행사들을 없애거나 외면하는 방식은 결코 대안이 될 수 없을 테지만, 중요한 것은 ‘국가 브랜드 홍보’, ‘외국인 유치’, ‘국가 품격 상승’ 이란 말들 속에 감춰진 폭력과 소외를 인식하는 것이다.





한편, 스포츠 행사와 스타들에게 비춰지는 스포트라이트를 이용하는 세력과 그로 인해 부차화 되는 정치적인 쟁점들 역시 언제나 존재해 왔다. 이번에 좋은 성적을 거둔 올림픽 선수단이 돌아왔을 때 정치권은 어느 때보다 재빠르게 움직이며 이들의 인기를 정치로 ‘승화’시키려 했다. 선수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선글라스까지 껴가며 김연아를 웃게 한 이명박 대통령의 행동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그는 “점프할 때 눈을 감았다가 떠 보니 성공 했더라”는 말 한 마디로 올림픽 기간에 벌어진 MBC 낙하산 사건에 대한 정치적 부담을 상당히 덜어냈다. 정권의 언론 장악과 선수들과의 오찬은 전혀 별개의 문제고 연관성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민주당 정세균 대표가 이야기한대로 “메달 따면 지지율 오르는” 게 정치와 스포츠의 관계다. 국가와 자본은 민족적 동일성 형성으로 인한 사회 갈등의 은폐, 국민적 인기를 영유함으로써 지지율 높이기, 이미지 전략과 마케팅 등 자신의 필요에 따라 선수들 개인과 노력의 결실 등을 모두 정치화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들의 삶에 있어 소중한 것들,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하고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들은 오히려 정치화되지 못한 채 축소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성황리에 올림픽을 마친 벤쿠버 시가 경비 예산 초과로 결국 복지 예산을 감축했다는 소식이 들려와 어쩐지 씁쓸하다.




스포츠는 더 ‘정치화’되어야 한다


이번 올림픽에서 언론의 가장 많은 조명을 받은 스타는 단연 김연아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금메달 소식과 함께 실리는 다른 기사들이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국가 이미지 0.5% 상승효과, 김연아 금메달 값어치는?」「‘김연아 금메달’, 삼성 현대차 광고 효과 ‘대박’」등 김연아로 인한 국가와 자본의 이득을 분석한 기사를 흔하게 접할 수 있다. 의류․패션 광고 모델로 제격이라는 설문조사 결과도 있고, 국민은행에서 내놓은 ‘연아 적금’ 상품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스포츠 스타에 대한 관심이야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큼이나 스포츠-국가-자본의 연결고리는 우리들 사이에서 이미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됐다.

대부분의 언론에서는 예전 선수들이 ‘민족’이나 ‘국가’에 얽매여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한 것에 비해, 이번의 대표팀은 승패에 연연하지 않으며 유쾌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 ‘새롭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큰 틀에서 바뀐 것은 없다. 스포츠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은 여전히 민족 담론 속에서 국가와 자본의 이해관계가 관철되고 있으니까. 새로운 것은 오히려, 사람들이 이제야 스포츠를 ‘순수하게’ 즐길 줄 알게 되었다고 평가하며 정치와 스포츠를 분리시켜 사고하는 현상이다. 군부독재 시절의 대학생들은 야구를 대놓고 즐길 수 없었다. 스포츠가 정치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야구를 좋아하는 행위가 결과적으로 정권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효과를 낳지 않을까 고민한 것이다. 금메달을 딴 뒤 꼭 눈물을 흘리며 대통령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만 정치와 스포츠가 연관 맺고 있음을 증명하는 게 아니다. 사회 인식이 바뀐 만큼 스포츠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들도 서로 조정되고 변화해 왔다. 이를 인식하지 못한 채 스포츠에서 마침내 정치를 덜어냈다고 성급하게 선언하는 순간, 스포츠가 지배체계 유지에 기여하는 다양한 역할들에 대해선 사고하지 못하게 된다. 

스포츠를 좋아하는가? 앞으로는 이런 쪽으로도 한 번 생각해보자. 내가 보태는 열망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소비되는지를. 인간이 만든 사회에서 스포츠는 다른 것들과 무관한 채 순수하게 남아 있을 수 없다. 스포츠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다양한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 스포츠가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포츠는 지금보다 더 많이 ‘정치화’되어야 한다.


Posted by 행진

2010/03/15 21:24 2010/03/15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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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얼마 전 그리스에서 온 소식이 신문경제지면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나타나는 이 ‘위기’는 유럽을 포함한 모두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총리부터 그리스의 국민들까지, 그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앞으로의 세계경제의 향방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이기에 세계는 그리스를 주목할 수밖에 없다.

이미 그리스에서는 위기 비용을 뒤집어 써야 할 노동자들이 생존을 건 총파업을 시작했다. 3월 3일, 그리스 정부의 재정긴축안 발표에 따른 노동자들의 봉기이다. △부가가치세 인상(19%→21%) △공무원의 특별보너스 30% 삭감 및 복지수당 삭감폭 확대(10%→12%) △2010년 연금 동결 △유류세·담뱃세·주류세 추가 인상 등을 담은 추가 긴축안이 발표된 이후, 각 50만명과 200만명을 조합원으로 둔 그리스 공공노조연맹(ADEDY)과 노동자총연맹(GSEE) 등 양대 노총은 정부의 재정 긴축안에 반대하며 총파업에 나섰다. 아테네의 시내버스, 전차, 지하철, 교외철도 등 대중교통은 24시간 멈추었고, 교사들이 파업에 참여했다. 병원 역시 비상근무 체제로 운영됐고, 중앙·지방정부의 대민 서비스 업무도 오후부터 중단됐다. 그리스 인구 5명 중 1명이 일손을 멈추었다. 위기를 해결한다며 긴축재정을 하려는 그리스 정부의 모습에 최고 수위의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파업, 그리고 이러한 파업의 시초인 그리스 위기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인가? 그리고 이 위기가 내포하고 있는 함의는 어떤 것이기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인가?






그리스 위기의 시작


유럽 내에서의 경제통합이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것으로 보일 때, 그리스는 유럽의 외톨이가 되지 않기 위해 무리한 과정을 밟으면서 유로존에 합류했다. 국가 안의 재정적자와 부채의 규모를 숨기면서 단일화폐동맹을 맺기 위해 투기 세력들과의 연합을 꾀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과 블룸버그에 따르면 그리스는 2001년 100억달러의 달러 및 엔화표시 채권을 발행하는 방법으로 채무를 졌는데, 이 채무는 국가부채로 잡히지 않았다. 그리스가 들어온 원금 100억달러로 골드만삭스와 통화스왑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는 약 10억 달러의 이익을 본 것으로 알려졌다. 골드만삭스는 이 계약으로 그리스 정부로부터 3억 달러나 받았다고 계약에 정통한 은행가들이 전했다. 그리스 정부는 골드만삭스와 같은 국제 금융회사의 도움을 받아 첨단 금융상품과 회계기법으로 국가 장부와 통계를 조작하면서 재정적자나 공공부채의 규모를 속이고 유로존에 가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로존의 ‘환상’을 쫒아 유로단일통화권에 가입함으로 인해 그리스는 국가 차원의 통화정책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단일통화인 유로화에 매여 있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조치는 고작 정부 지출을 줄이고 세금을 높이는 일 뿐이다.








이러한 와중에 골드만삭스의 주도로 파생상품 전문가들이 그리스 사태를 활용해 돈을 버는 상황도 생겨났다. 상호 정보교환 등으로 그리스 경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예측한 그들은 2008년 이후 그리스 국채에 대한 CDS(대표적인 신용파생상품인 신용부도 스왑. 투자 상품의 부도 시 손실 보상을 받기 위해 지급하는 일종의 보험료)를 엄청나게 사들였다. 그리스 국채 CDS는 당시만 해도 0.2%에 불과한 헐값이었는데, 그리스 위기가 불거지면서 CDS를 매입하려는 채권자들이 폭증하여 CDS는 3%에 다다랐다. 한편으로는 CDS를 고가에 팔고 한편으로는 헐값에 쏟아지는 국채를 매입하는 전략으로 돈방석에 앉은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담합을 통해 보험 성격의 CDS를 투기적 거래에 활용하여 그리스의 위기를 더욱더 증폭시킨 사례이다.




<CDS(신용부도스와프(Credit Default Swap))이란, 국가나 기업이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채권을 발행하면 투자자들이 채권의 부도 위험을 피하기 위해 매입하는 보험증서라고 보면 된다. CDS를 판매한 금융회사들은 수수료를 받지만 부도가 발생할 경우 손실을 보전해줘야 한다. 거래되는 CDS의 프리미엄(가산금리)은 국가와 기업의 부도 리스크를 반영하는 신용등급과 동일하게 인식된다. 자세한 것은 전국학생행진 일반자료실『2009 경제위기대응 자료집』을 참고하시길.>




현재 그리스 정부는 긴축재정과 동시에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국채발행을 실시하고 있다. 해외 금융기관들이 선뜻 그리스 국채를 매입하게 하기 위하여 3월 4일, (독일 국채금리보다 무려 3% 높은) 6~7%의 높은 금리에 50억 유로 국채를 발행하였다. 그리스 정부는 그렇게 조달한 자금으로 기존 부채의 이자를 상환해야 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국채가 또다시 ‘투기’의 위험을 불러오고 있는데, 이러한 위험성에 그리스 정부는 국채입찰 당시 '헤지펀드 금지령'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자산운용사, 연기금, 생명보험사 등의 기관투자자들은 국채를 장기 보유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반면 헤지펀드들은 단기 차익을 노리는 경우가 많아 채권 가격의 급격한 변동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최근 헤지펀드들은 그리스 재정 위기에 대한 불안감을 키웠다는 비판 여론에 직면한 상태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리스 정부가 헤지펀드 투자 금지령을 내렸다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자태변환하며 이익을 내려는 투기세력들에게는 무용지물이다. 헤지펀드 투자금지만으로는 ‘투기’를 막을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 없으며, 이는 위기를 전가 받는 민중들에 대한 기만일 뿐이다.



문제는 금융세계화이다!


한편 일각에서는 ‘공공부문의 비대화’를 그리스 위기의 원인이라 보는 시각이 있다. 사회보장비의 과다한 지출이 재정을 악화시키는 주된 요인이라는 것이다. 복지비용으로 지출되는 비용을 줄여 국가 재정을 확충하면 경제가 다시 되살아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진짜 그럴까? 사실관계를 따져보면 경제위기는 국가의 재정구조에만 의지하지 않는다. 경제위기는 시장의 자율이 중시되는 신자유주의 국가에서도, 사회보장 망이 잘 구축되어있는 국가에서도 일어난다. 공공복지의 확대가 한 국가를 위기로 몰고 갔다는 분석은 (복지를 인기몰이에 활용한다는)포퓰리즘이라는 오명을 앞세운 보수진영의 책임전가일 뿐이다. 오히려 국가와 사회의 책임을 축소시키고 시장의 자율성을 확대시켜 ‘투기’가 활성화될 때,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도미노처럼 경제위기가 몰아친다. 기초적인 생활조건의 하나인 ‘집’이 없어 빚을 내어 집을 구해야만 했던 미국의 가난한 사람들이 파산당하고 금융시장에서의 혼란이 최고로 가중되었던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대표적인 예이다.

더불어 이러한 시각 하에 그리스위기 해결책의 하나로 제시되고 있는 공기업 민영화 역시 위험한 논리이다. 공기업을 팔아서 이로 인해 발생하는 이득으로 국가위기를 해결해야한다는 주장은 오히려 공공부문이 책임졌던 민중의 기본권을 포기하는 것이며 더욱더 철저한 자본의 논리로 대다수 민중의 삶을 파괴시키는 것이다. 이는 온전히 ‘자본’을 살리기 위한 해결책으로만 가능할 뿐, 전 민중을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대안을 향한 움직임은 이미 시작되었다!


지난 달 말, 그리스가 지구 어느 편에 붙어있는지 모른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한마디에 또 한 번 누리꾼들이 조소를 흘렸다. 유럽발 금융위기와 관련해 이명박 대통령은 "이제 세계는 하나다. 그리스가 들어보기는 했지만 지구상 어디 붙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 나라가 문제 생겨도 우리 주가가 떨어진다"면서 "외국이 도와주고 싶어도 노조가 반대하니 나라는 어려워지고, 이것 때문에 (우리) 주가가 떨어진다"며 "우리나라는 직접 관계가 없다. 금융 거래도 없고 상품 파는 것 얼마 없다. 그래도 영향을 미친다"고 언급하면서 세계가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렇다. 금융세계화는 모든 것을 초월하여 ‘위기’를 조성하고, 이러한 ‘위기’를 담보로 자신의 이윤을 챙기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반복되는 위기와 위기의 지연 속에 제 2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제 3의 그리스 위기가 우후죽순으로 폭발할 것이라는 것은 예상 가능한 일이다.

현재 그리스에서는 경제위기가 지속되면서 ‘고통감내 이데올로기’가 강하게 유포되고 있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이 말했듯이 그리스의 자본 역시 ‘노동조합의 투쟁’이 경제위기의 원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경제위기를 불러온 것은 열심히 일한 노동자들이 아니라 자본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리스의 젊은 그래픽 디자이너인 조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5백 유로[약80만원]세대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 정도밖에 벌지 못합니다. 우리는 먹고살기도 빠듯합니다. 그런데 이제 정부는 우리가 가져갈 돈을 더 줄이려 합니다. 유럽연합은 우리한테 경제 위기의 대가를 지불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런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시위 참가자들은 소리치고 있다.
“우리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마라! 부자들이 위기의 대가를 치르도록 하라!”


지금 그리스에서 노동자들이 만들어가고 있는 ‘투쟁’은 바로 새로운 사회를 향한 움직임이다. 자본이 만들어 놓은 위기와 그것의 책임전가를 거부하고,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노동자 스스로가 제시하고 실천하고 있다. 투기자본의 이윤추구에 노동자가 희생될 수 없다. 그리스 노동자민중이 소리치고 있듯이, 우리도 정당한 권리를 되찾기 위한 그들의 싸움에 지지의 목소리를 보내자.
“노동자에게 경제위기의 책임을 전가하지 말라!”

Posted by 행진

2010/03/15 21:12 2010/03/15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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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두헌 2010/04/06 18:55 # M/D Reply Permalink

    글씨체 알아보기 어려워요; 그리고 글씨도 좀 작은거 같아요;

 


낙태논쟁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



보이지 않는 두려움들이 한국사회를 휩쓸고 있다. 6-70년대 경찰과 군대를 앞세운 군부정권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고 호환, 마마가 휩쓰는 그런 것도 아니다. 여성들에게만 찾아오는 그 두려움은 ‘저출산 정책’이라는 이름하에, ‘생명존중’이라는 이름하에 소리소문 없이 가해지는 폭력이다. 여성들은 자신의 절박한 상황을 주위에 알리지도 못 하며, 오히려 ‘불법’이라는 이유로 진실을 숨겨야 한다.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들은 이제 더 이상 불법 시술은 안 된다는 산부인과 병원들의 대답을 들으며 한 번 좌절하고, 낙태 위험비용이라 하여 400~600만원으로 치솟은 수술비에 또 한 번 좌절하게 되었다. 여성들은 이제 출산율을 적극적으로 낮추는 정책을 시행중인 중국으로 가서 시술을 받는다. 한국에서 600만원을 들여 하는 시술이 안전할지 중국에서 싼값에 하는 시술이 안전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낙태를 금지시켰던 옛 루마니아에서 수십만 명의 여성들이 안전하지 못한 낙태시술로 죽어갔던 일들, 낙태를 하기위해 전 세계를 떠돌 수밖에 없었던 일들이 남한에서도 똑같이 재현되려 하고 있다


낙태를 할 수 없는 두려움. 하지만 진짜 두려움은 낙태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현실을 ‘이야기할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그 절박함 속에는 ‘생명을 죽이기 싫은 마음, 아무에게도 말을 할 수 없는 수치스러움, 내 뱃 속에서 자란 생명이기 때문에 꼭 키우고 싶다는 소망, 포기해야 하는 젊은 인생, 이 생명을 수 개월 더 길러 낳으면 아이나 자신이나 정말 불행한 인생을 살 것이라는 불안한 예감’ 등 너무나 복잡한 마음들이 교차함에도 이런 구체적인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그저 여성들만이 가입할 수 있는 커뮤니티에서, 포털사이트의 익명 게시판에서만 폭발적으로 이야기될 뿐 당당한 여성의 목소리로 나올 틈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이들의 목소리를 막고 있나


최근 낙태논란의 시작을 만든 프로라이프 의사회는 태아 생명 보호를 명분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임신과 출산, 육아를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껏 할 수 있는 사회토양을 만들어 주어야 하며, 산부인과 의사들에게는 낙태시술을 하지 않고도 걱정없이 소신껏 병원운영을 할 수 있는 정상적인 의료환경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낙태근절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에게 핵심은 ‘생명’이고 누구도 개인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 또한 낙태 근절을 위해 미혼모와 사생아, 기형아와 장애아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 제거, 공공 및 사설 보육시설의 확충, 직장 내 임산부와 워킹맘에 대한 처우 개선, 청소년 임신의 경우 남성의 책임 문제, 대국민 성교육과 피임교육 및 낙태 폐해 교육, 생명경시 풍조와 개인주의 제고 등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들 주장의 중심은 생명이기에 그 이외의 여성이 처한 사회경제적인 조건과 권리는 결국 부차적인 것이 된다.





생명존중이라는 말은 당연한 말 같지만 그것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태아도 생명이다’(생명권)라는 말을 앞세워 ‘낙태는 살인이다’라 주장하고 있다.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된 이후부터 생명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명권에 대한 원칙론적 입장은 극단적 결론을 만들어내며 생물학적인 측면으로 논의를 한정짓는다. ‘수정란이 생명이라면, 생명의 맹아를 지닌 정자와 난자가 생명이 아닌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자위를 통해 정자를 배출하는 행위 또한 살인으로서 처벌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명을 죽이는 것이 문제라면 왜 강간에 의한 임신은 처벌받지 않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이들은 쉽게 답할 수 없다. 사회적으로 ‘생명을 헤쳐서는 안 된다’라는 윤리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진지한 고민을 해보지도 않은 채로 여성의 권리를 이에 하위에 있는 것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최근 낙태와 관련된 논쟁은 결국 ‘태아의 생명을 지키자(생명권) vs 여성의 결정권이 먼저다(여성의 임신,출산에 대한 결정권)’라는 좁은 틀로 갇혀버렸다. 이는 여성의 결정권이 ‘내 몸의 문제니까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정도의 이기적인 논리로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여성들이 낙태를 결정하는 이유가 그렇게 단순한 이유일까. 60년대 이후 여성이 인구조절정책의 일환으로 국가의 도구, 출산의 도구로 읽혀졌던 기나긴 역사들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단순히 여성의 결정권을 이기적인 주장만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 동안 여성들의 의견, 여성들의 사회경제적 조건들은 고려하지 않은 상황, 자신의 몸의 일임에도 한 번도 그것에 결정권을 제대로 가져본 적 없던 여성들의 주장을 ‘생명에 대한 책임감이 없는 사람’의 것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그 동안 한 번도 제대로 주목하지 않았던 여성에게 고유한 성욕, 임신, 출산의 문제를 진지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이들은 여성 개인만이 책임져서는 안 될 ‘사회적, 국가적인 문제이지만 무한대로 신성화된 생명권의 압박은 그녀들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듣는 것조차 허용하고 않기 때문이다.


최근 낙태단속을 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주체 중에 생명권에 대한 주창자들도 있지만 정부 또한 빠질 수 없다. 하지만 6-70년대 인구조절정책을 실시하며 낙태를 권장했던 정부가 갑자기 ‘불법낙태’를 단속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최근 프로라이프의사회의 낙태병원 고발이 힘을 받고, 주류 언론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체로 주목할 현상이라서가 결코 아니다. 대통령 직속 산하의 미래기획위원회는 작년 11월 저출산 대책의 일환으로 ‘낙태단속 강화’를 운운했다가 엄청난 논란을 일으킬 뻔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발이 심할 것으로 예상을 한 것인지 실제 제출된 저출산 대책은 ‘여성이 일과 가사를 양립할 수 있는 지원책’으로 한정 되었다. 그런데 올해 2월 프로라이프의사회가 낙태병원을 고발하고 사회적인 파장을 일으키자 이를 명목으로 3월 1일 ‘불법인공임신중절예방 종합대책’을 발표한 것이다.


최근 낙태논란의 근저에 깔려있는 정부와 지배권력들의 핵심은 결국 여기에 있다. 저출산 현상과 여성이 출산을 할 수 없는 조건은 IMF이후 노동자들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에 의해 발생한 가족해체의 위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수많은 여성들이 빈곤해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사회로 진출했고 이로 인해 여성은 집안일에 더해서 바깥일까지 담당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가정을 책임지지 않으면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되는 사회적인 조건은 결국 가정에서 여성이 부담해야 하는 일들을 줄이도록 만들었고, 이로 인해 저출산 현상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회적인 문제를 자신의 책임이 아닌 여성들의 책임으로 교묘하게 돌려놓기 위해 정부관료, 주류언론은 저출산이라는 사회-경제적인 조건에 의한 문제를 ‘개인의 도덕성의 부재’라는 문제로 환원하며 여성을 압박하고 있다. 즉 ‘국가발전을 가로막는 이기적인 여성들에 의한 저출산’이라는 담론으로는 부족하자 이제는 ‘고귀한 생명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는 여성’이라는 논지로 여성들에게 출산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은 성욕, 출산, 양육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기본적인 여성의 목소리들이 ‘생명존중’, ‘저출산의 위기’라는 극단화된 논리 앞에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는 현실. 이제 극단화된 색안경을 잠시 벗어두고 여성에게 반드시 주어져야 할 고유한 권리에 대해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한 번도 주목받지 못하고 국가의 출산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권리, 그래서 제대로 말 한 번 못했지만 이 시대를 만들었고, 사회가 발전하는데 너무나도 필요한 노동을 해왔던 당당한 여성들의 권리를 살펴보자. 그리고 그 권리들이 보장받기 위한 사회적인 장치들은 어떤 모습들일지 알아보자.


낙태논란이 일고 있는 요즘 여성의 권리는 ‘낙태할 수 있는 권리’로만 읽히고 있는 것 같다. 낙태를 여성의 권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그렇게 단순한 논리가 아님에도 ‘여성은 생명에 대한, 사회적 위기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말에 다소 무력하기도 하다. 그래서 ‘낙태의 위험성’, ‘낙태를 하지 못했을 때의 위험성’들을 더욱더 강조하는 방식으로만 대응하기도 한다. 출산과 관련된 낙태라는 쟁점은 결코 출산만으로 묶이지 않는 여성만이 가져야 하는 고유한 권리로서 ‘성욕, 출산, 양육’이라는 문제를 함께 가져온다. 그 세 가지가 단순히 ‘여성’의 것이기 때문에 ‘여성의 권리’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으면 섹스하지 마라’, ‘즐기는 여성은 당연히 그에 따르는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는 말은 성욕과 출산이 여성에게 부당하게 전가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양육이라는 사회적인 일을 10개월간 아이를 뱃속에서 키우며 생겨난 모성으로 견뎌내야 한다는 사회적인 압박은 출산과 양육이 여성의 선택권 안에 들어오지 않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세 가지를 현재 여성이 온전히 선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의 성욕은 이전만큼 억압되어 있지는 않지만 출산을 위한 한도 내에서만 허용되거나, 남성의 성욕에 대한 대상으로서 상품화되거나 대상화된다. 양육 또한 여성이 갖춰야할 덕목으로 여겨진다. 사회적으로 이미 결정된 내용들 속에 여성의 개인적인 선택권은 온대간대 없다. 핵심은 여성의 문제가 끊임없이 ‘모성’, ‘어머니’, ‘가족’이라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의미부여를 통해 공적인 일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분명 출산과 양육, 그것과 밀접하게 관계 맺는 여성의 성욕이라는 문제는 사회적인 권력임에도 그것은 끝없이 개인화되어 가족 속으로, 여성 혼자 감당할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낙태논란 속에서 정부는 여성이 출산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준다고 지원책을 내놓고 있지만 ‘출산이 여성의 책임’이라는 말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 말을 포기하게 되는 것은 출산을 할 수 있는 여성이 그 결정권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욕에서 시작해서 양육까지 이어지는 그 ‘사회적 과정’을 여성의 개인적인 책임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여성의 선택권이 포함되지 않은 ‘성욕, 출산, 양육’의 문제라고 한다면 아무리 그것이 사회적 과정이라고 하지만 반쪽만을 위한 과정일 수밖에 없다. 하기에 우리는 그 과정 하나하나에 여성의 선택권을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모든 권리들은 여성의 삶과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결정권을 지니지만 현재 중요한 것은 오히려 모호하게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뭉쳐있는 성욕, 출산, 양육 각각에 여성의 특수한 권리들을 부여하는 것이다. 또한 그 선택들을 위한 사회적인 장치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성욕이라는 여성의 자유는 스스로의 성욕을 긍정할 수 있는 자유뿐만 아니라 상품화되거나 남성의 성욕의 대상이 되지 않을 자유를 포함해야 한다. 성욕이 온전히 여성의 권리가 되기 위해서는 출산으로 이어지지 않는 성관계가 긍정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 당당히 여성이 피임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야 한다. 또한 당연하게 그 모든 관계로부터 철수할 수 있는 권리 또한 있어야 한다.

또한 여성에게 출산에 대한 권리가 추가되어야 한다. 그것은 여성의 몸속에 또 하나의 생명이 자라나게 할 것인지, 아닐지를 결정할 권리이며 낙태를 할지, 출산을 할지를 결정할 권리이다. 낙태 또한 여성의 선택권 하에 있어야 하지만 출산을 여성이 선택하는 이유에 주목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성이 출산을 선택할 때는 태아의 생명에 대한 것이 가장 크다. 여성은 자신이 임신을 생명의 출산으로 연장시킬 권리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조건 양육에 대한 책임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양육이란 사회적으로 책임질 일이지 여성이 반드시 책임질 이유는 없다.

앞의 두 권리가 온전히 여성의 권리가 되기 위해서는 양육에 대한 선택권을 여성이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양육이 여성만의 책임이 되지 않고, 사회적으로 책임져져야 하는 이유는 여성에게 출산만 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무조건 산모로부터 아이를 분리시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선택권을 여성 산모에게 주고, 출산과 양육 사이에 어떤 선택이든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적인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10개월간 뱃속에서 자란 아이를 스스로 키울 수 있는 권리가 진정으로 여성의 자유로운 선택권에 의해 결정되기 위해서는 양육을 하는 여성이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특별하게 ‘모성’을 더 지녔고, 더 올바른 여성이라는 사회적인 편견을 제거해야 하며, 그것이 실현될 수 있기 위해 양육하는 여성을 위한 사회적인 조건이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원하지 않는 임신을 피하기 위한 피임에 실패했을 때의 상황으로 보자면 여성의 의사에 따라 낙태의 권리, 출산만 할 권리, 양육까지 함께 할 권리들이 모두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원치 않는 임신의 경우 안전하게 낙태할 수 있는 합법적인 지원이 보장되어야 한다. 원치 않는 임신이었지만 출산하고자 하는 여성에 대해 출산한 여성만이 온전히 양육을 책임지지 않을 수 있는 보육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또한 자신이 양육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육아휴직 기간에 대한 보장이 필요하겠다.



지금 바로! 낙태단속을 멈춰야 한다!


최근 각종 언론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낙태논쟁은 결코 생명의료윤리 수업시간에 주어지는 토론쟁점이 아니다. 바로 지금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이고, 수많은 여성들이 아무 목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 폭력을 감내하고 있다. 정부는 ‘낙태단속 센터’까지 설립해가며 강경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저출산의 위기를 여성에게 전가하기 위해 ‘생명존중’의 이름을 빌어 낙태를 단속하고 있는 이명박 정권의 반 인권적-반 여성적인 정책에 우리는 당당히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흩어져 있는 불만들을 한 곳으로 모아 지금의 흐름을 저지할 수 있는 실질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내야 한다.





또한 이러한 행동 뿐만 아니라 여성이 원치 않는 임신을 중단할 낙태에 대한 권리를 박탈하는 현 상황을 바라보며 그 권리 속에 담긴 더 많은 여성의 권리들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는 ‘여성의 권리라고 하는 것들을 다 들어주고 마음대로 하게 해주면 세상이 엉망이 될 것이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성의 문제만이 아닌 모든 문제들과 저항하며 싸우는 세계의 수많은 여성들이 이 말을 행동으로 반박하고 있다. 오히려 또 다른 세상이란 마치 여성에게도 그렇듯이 자신의 몸, 노동, 감정과 욕구 그 모든 것이 세상 속에서 자유롭지만 그것이 결코 전체에게 해롭지 않은 세상이 아닐까. 우리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거부하는 동시에 이를 통해 그 ‘또 다른 세상’을 조금 더 풍부하게 상상할 수 있어야겠다.

Posted by 행진

2010/03/15 20:54 2010/03/15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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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0/03/20 11:44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1. 행진 2010/03/21 13:19 # M/D Permalink

      네!^^ 참고가 되신다니 반가운 일이네요. 편하게 활용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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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황두완 2010/03/18 14:17 # M/D Reply Permalink

    대학은 직업훈련소가 아니라 사람을 만드는 곳이다. 바꾸어 말하면 인격들 도야하고 이나라 역군이 되어

    이나라를 완잔한 민주국가로 만들고 우리 민중의 자내 깨나 염원인 남북 평화통일을 완성하라는 지상명명 배움의 터다. 여러 학생들이 MB철학 부재로 좁디 좁은 한국 땅에서 노가다 사업 즉 흙파는 공사로 젊으과들취업난이 가중되고 잇을 뿐입니다. MB의 아집과 독선으로 젊으니들 취업이 난관에 봉착하엿습니다. 지난 민주정부 10연간 계획하여왓던 러이사와 중국 대륙을 통한 구라파 실크로등와

    러시아와 시베리아 공동개발, 러시아의 값싼 가스는 북한을 통과하고 남한이 물류센터로 발전하면 한국이 동남아 하브로 부상하여 동남아 각국은 한국을 통해 값싼 가스와 값 비싼 해상을 이용치 않고 한국을 통해 구하파로 물품을 보낼것입니다.

    여러분, 즉 학생들이 탈 정치라는 마술에 중독되어 현실도피애 허우적 거리다가 오늘날 무서운, 총체적 위기에 직면한것입니다. 앞으로 이나라 운명을 좌우할 학생들이 정치 도피면, 이나라 앞날은 볼장 다 볼것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정치란 투표로 결정될 문제입니다.
    우리 같은 내일 모래면 90인데 무슨 개인적 희망이 잇겟습니다.
    그러나 여러 학생들은 앞날이 청청합니다. 우리 촌로가 바라는 것은 다만 후손에게 평화를 물러주는것이 유일한 소망입니다.
    여라분은 조국의 위기를 방관만 할것이 아니라, 적극 참여하여 MB도당의 사기정책에 부레크를 걸고

    11년 전의 민주정부로 환원하는것입니다. 곧 닥처올 6.2지자체 선거에서 야권 단일 후보(야5+4)

    면 전국 16개 광역단체장 전부를 석권할 뿐만 아니라 기초단체장 80% 이상을 석권할 수 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줌 밖에 안되는 소위 진보를 가장한 진보신당 족속들 즉 노희찬, 심상정, 울산

    출신 국회의원 조가놈들 네마리가 수도권 광역단체장 한곳을 양보하고 호남에서 전북이나 전남에서

    후보 출마포기를 전제조건을 네세워 결국 야5+4의 회담 자체를 무산시키려고 취후발악도 서슴지

    않고 잇습니다. 문제는 노희찬, 심상정을 서울과 경기 광역단체 후보로 내새우면

    그쪽 정서가 이치들 받아 주겟습니까? 선거 결과 어부지리는 역적 찌꺼기당 한나라당으로 귀착

    될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일찍이 강기갑 대표는 만노당은 기초단체장 세곳과 이희정의원은 16개 광역단체장 중 울산 한곳 요구는 가장 합리적이며 현실성이 잇는 제안입니다. 선거는 이상만 갖이고 결정될 문제가 아니며, 엊그네 야5+4 회의에서 66개 수권 기초단체장 선정에세 민주당이 강남,중구, 광진,중량,양천, 성동,등 서울지역 6개 구청장과 오산, 하남등 5개 시장 후보를 다른 야당과 시민단체 추천 후보에게 내주는 절충안에 부천, 안산등은 경쟁방식으로 선출하는 방식에 합의에 도달한데, 진보신당 노희찬대표도당은 민주당에 사실상 광역단체장을 몰아준다고 야권 단일 후보안을 전면 거부한다. 노대표는 87년, 92년 대선에서 노태우와 얼간이 YS로 부터

    팔짜 고칠 수십억대를 받아챙긴 희대의 사기한이며 대선 부로커인 백모놈의 대선 사무장을 자낸자라고 유력한 시민단체 고문이 전한다. 이치들을은 승산도 없으면서 무엇을 빨야고 서울이나 경기를 원하고 잇는가! 자기들 상정인 역적찌거딩으로 부터 대박을 노리고 잇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노희찬도당의 한나라당 용병의삼가는 역적 해위를 숙지하고 잇음에도 민형사상 책임문제로 기피하고 잇을뿐이다. 그러니 여러학생들은 무엇이 두렵단 말인가? 여러분들이 총궐기하여 이치들 파렴치범들의 선거 판도 파괴행위를 규탄만아 아치들 선거 부로커들의 파렴치행위를 막을 수 잇다.

    다음은 어떻게 하면 선거 기피증에 중독된 학생들을 선거에 투표관심을 갖게하는가?

    97년 12월18일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11월 초 각대학 선거 분위기를 분위기를 알여고

    여러 대학에 가보앗더니 대학에 모의 대선 판이 붙엇는데, 처음에는 별로 참가자가 많지

    않앗으나 차즘 모의 투표자 증가에 DJ당선을 확신할 수 잇엇다. 권영길 후보 보다 DJ투표자가 앞도하기 때문이다. 2002년 12월 19일 대선에서도 권영길 후보 보다 노무현 후보가

    압도으로 많앗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4월 경 부터 모의 투표 계신판 설치면 생소한 신참 투표자들도 호기심 반으로 투표하면, 그동안 투표기피증에 중독된 학생들도 대거 이에 동참하리라 본다. 좋으면 빨리하여라! the sooner, the better 라는 격언이 잇듯이 앞으로

    이나라 운명은 여러분의 선거 참가에 잇다고 하여도 지니친 말이 아니다.

    야러분들의 대거 참여면 총체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잇기때문이다. 가자 투표장으로!



    민주화운공기념사업회, 시민주권, 노모현 재단,한겨레 신문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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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성의 날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기념일들 중에는 민중들의 싸움을 통해 생긴 날들이 많습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만든 3.1절, 치열하게 싸운 학생들의 독립운동을 기리는 학생의 날(11월 3일), 광주 민중들의 저항을 잊지 않기 위한 5.18과 같은 날들이 대표적이지요.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역시, 누군가가 하사한 날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타올랐던 여성들의 투쟁으로 쟁취한 날입니다. 기념의 의미가 ‘뜻 깊은 일이나 훌륭한 인물 등을 오래도록 마음에 간직하고 잊지 않는 것’이라면, 아직은 여성의 날을 기념할 수만은 없습니다. 102년 전 그녀들이 외친 여성의 권리는 아직 세상에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여성들의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성의 날을 마음에 간직하고 기념하기에는 현실에서 계속되는 여성들의 싸움이 너무나도 간절합니다.



여성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고, 더 크게 벌여내야 헙니다


2007년, ‘아줌마’라는 말 대신 ‘투사’로 불렸던 그녀들이 있었습니다. 비정규직으로 노동자들이 고통 받지 않는 세상과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이 없는 사회를 그리며 저항한 이랜드 여성 노동자들입니다. 보통 여성들은 출산을 기점으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하다가 자녀들이 어느 정도 자란 후 다시 취업을 하게 되는데 이 때 여성들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임금이 낮고 비정규직인 일자리가 대부분입니다. 이랜드 여성 노동자들의 경우처럼 대형마트의 캐셔(계산원)를 그 예로 들 수 있겠지요.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더욱 힘든 노동 환경에 처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대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미화 노동자들도 또 하나의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대부분이 고령의 여성인 대학교 내 미화 노동자들은 최저임금에도 미달하는 임금을 받으면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꼬박 일합니다. 게다가 휴식공간이나 식비마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그래서 대학교의 미화 노동자들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여기저기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이화여대의 미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기도 하였지요. 하지만 대학 미화 노동자들의 경우에도 노동조합 활동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당한 현실에 맞서 싸울 권리조차 빼앗기고 있는 것이 지금의 여성들의 삶인 것입니다.

  이러한 여성들의 현실을 은폐하며 이명박 정부는 여성들이 더 많이 일할 수 있게 하겠다며 퍼플잡이라는 오묘한 이름의 정책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퍼플잡은 지금도 불안정한 여성들의 일자리를 더욱 규칙 없게 만드는 것을 정당화하는 조악한 포장지일 뿐입니다. 여기에 더해 저출산을 해결해야 한다며 여대생들에게 출산을 서약시키고, 낙태 단속을 강화하며 여성들에게 출산할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잊을 만하면 터지는 성폭력 사건을 비롯한 일상적인 성폭력까지…. 이렇게 아직도 여성들은 고된 하루하루의 연속선에 놓여있습니다.

  1908년에 하루 10시간만 일하겠다고, 임금을 인상하라고, 노동조합 결정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그녀들의 말이 102년이 지난 지금도 거리에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여성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을 멈추지 맙시다.


           

대학생들이 나서서 페미니즘을 말합시다!


여성들의 싸움이 소리 없이 계속되고 있는 시대에, 대학생들의 실천이 소중합니다. 대학생은 아직 사회인이라고 하기에도,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위치에 놓여있죠. 하지만 대학이 사회와 분리된 무결한 공간이 아니기에 사회의 문제들이 대학에서는 어떻게 드러나는지, 대학생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아가 대학에서부터 페미니즘이 시작되는 102주년 3.8 세계 여성의 날을 만들어봅시다. 여성의 날을 앞두고 많은 대학생들과 페미니즘을 고민하고 싶어 뉴스레터를 발간합니다. 뉴스레터를 통해 궁금증이 해소되고 고민이 시작되기를 바랍니다. 또, 건강한 토론을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번 뉴스레터는 네 개의 꼭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3.8 세계 여성의 날의 역사>에서는 여성의 날을 만들게 한 여성들의 투쟁이야기를 담았습니다. 102년 전 그녀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이명박 정부의 ‘퍼플잡’을 비판한다!>에서는 현 정부가 여성들에게 제시하는 것들이 얼마나 한계적인지 비판했습니다. <페미니즘이 시작되는 곳_ 여기는 대학입니다.>는 대학에서 왜 페미니즘을 고민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대학에 페미니즘이 필요한 이유, 대학생들이 앞장서서 페미니즘으로 세상을 바꿔야 하는 이유를 담았습니다. <새내기들과 함께 하는 3.8 주간>은 대학에서 3.8을 맞아 해볼 수 있는 여러 아이템을 제안합니다. 전국의 각 대학들에서 여성의 날을 맞아 페미니즘의 씨를 뿌리는 화창한 봄날을 만들어가기를 바랍니다. 페미니즘의 열매가 전국에 주렁주렁 열리기를 고대하며 전국학생행진도 치열하게 살겠습니다!




여성에게 위기를 전가하지 말라!

세상을 바꾸는 싸움을 대학에서부터!

다시, 페미니즘이다!


Posted by 행진

2010/02/21 06:02 2010/02/21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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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_교양] 3.8 여성의 날의 유래와 의의

 

3.8 여성의 날의 유래와 의의




만약 우리가 남성과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면,

노동조합을 만들고 가입할 수 있다면,

산전산후 휴가를 받고 아이를 탁아소에 맡길 수 있다면,

모든 투표에 참여할 수 있다면,

우리의 성(Sexuality)과 수태를 조정할 권리가 있다면

이것 모두는 바로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의 피나는 투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10년 코펜하겐에서 열렸던 3‧8여성의 날 기념대회 연설 中




1908년 3월 8일 루저스 광장, 미국의 방직공장에서 일하던 1만 5천여 명의 여성노동자들은 무장한 군대와 경찰에 맞서
"임금을 인상하라!", "10시간만 일하자!",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보장하라!",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달라!"고 외쳤습니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동시적으로 발생한 경제공황 속에서 미국의 여성노동자들은 쉬지 않고 일하며 국가경제에 이바지할 것을 요구받았지만, 그녀들은 정작 인간이자 노동자, 시민으로서 그 어떤 권리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여성들의 봉기는 비단 미국 뿐 아니라 유럽대륙으로도 퍼져나갔습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 물가가 오르자 '주부들의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여성노동자들은 처음엔 악독한 상인들을 위협하거나 시장의 상품 진열대를 부수기도 했지만, 곧 그런 행동들만으로는 생계비용을 내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정부의 정책을 변화시키는 정치적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여성의 참정권이 필수적임을 깨닫게 되었죠.


여성노동자들의 저항을 기억하고 전 세계 여성들의 연대를 강화하고자, 1910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국제여성노동자회의에서 독일 사회주의자이자 여성운동가인 클라라 제트킨(Clara Zetkin)의 제안으로 '세계 여성노동자의 날'을 정하기로 하였습니다. 세계 여성의 날은 20세기 산업국가에서 열악한 노동현실에 분노한 여성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와 투쟁했던 것을 기억하고 전 세계 여성들의 연대를 도모하고자 여성운동진영이 의식적으로 노력한 성과인 것입니다.

그 후 1년이 지난 1911년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부터 여성의 날이 준비되었습니다. 언론에서는 정부와 사회에서의 여성의 평등에 대한 문제들을 분석했습니다. 드디어 첫 번째 여성의 날,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수많은 여성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바다를 이루었습니다. 거리 곳곳에서는 시위가 열렸고 그를 막으려는 경찰들과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세계 여성의 날은 여성들의 집단적인 저항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여성해방 운동의 역사와 여성의 날


어떤 사람들은 여성의 날에 가장 중요하게 요구한 것은 여성의 투표권이었다고 이야기하면서 지금은 이런 요구들이 달성되었으니 여성의 날은 여성을 위해 이벤트를 열고 선물을 하는 기념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성의 날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면 그런 이야기들은 아주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여성의 날은 전 세계 여성들이 함께 투쟁하고 연대하는 날이며, 그 의미가 여성의 참정권 요구로만 그친 적은 없었습니다.


역사적으로 3․8 여성의 날 참정권 요구만이 아니라 여성들의 지위향상과 남녀차별 철폐, 여성빈곤 타파, 전쟁 반대 등 당시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모든 억압에 맞서 함께 연대하며 투쟁한 날이었습니다. 1915년 멕시코와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 반대 및 물가안정 운동, 오스트리아․에스파냐에서 일어난 군부독재 반대운동, 1943년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무솔리니 반대시위를 비롯해, 1979년 칠레의 군부정권 반대시위, 1981년 이란 여성들의 차도르 반대운동, 1988년의 필리핀 독재정권 타도 촛불시위 등이 그 대표적인 투쟁입니다.





특히 1917년 여성의 날은 러시아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첫날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더욱 뜻 깊은 날이 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식량 구입을 위해 줄을 서 있던 한 여성이 빵 가게의 유리창에 돌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되었는데, 기나긴 줄을 서 있던 여성노동자들과 병사 부인들이 시위대가 되어 페트로그라드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행렬은 또 다른 곳에서 여성의 날 집회를 하고 있던 여성노동자들과 동맹파업자들과 합류했고, 전쟁과 그로 인한 물가 인상, 노동자들의 비참함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회주의 여성 활동가들은 열악한 여성들의 현실을 적극적으로 알려냈을 뿐만 아니라 여성노동자와 병사아내들 스스로가 조직되어 자신들의 요구를 위해 싸울 수 있는 공간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노동자운동이 여성해방을 자신의 과제로 삼고 이를 위해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 것을 주장했고,
혁명과 여성운동의 결합을 시도했습니다.


이처럼 3․8 여성의 날은 여성해방을 앞당기는 투쟁의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여성들 만의’ 사안과 요구를 넘어서, 민중을 억압하는 폭력에 맞서 전 사회적인 문제제기가 이루어진 저항과 연대의 날이었습니다. 그 시대가 만들어낸 사회적 조건에서 가장 착취 받고 박해 받았던 여성들이 직접적인 행동에 나섰을 때 역사가 바뀌어왔다는 것은 그 동안의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여성, 그리고 사회가 바뀌길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여성의 날의 역사가 말해주는 것은 결코 작지 않죠.



연대의 원리로 투쟁하는 여성의 날을 만들어갑시다!


지금과 같은 신자유주의와 전쟁의 시대에서 여성들은 더욱 빈곤해지고, 더욱 많은 폭력에 노출되고 있습니다. 불안정한 일자리가 늘어나는 가운데, 여성들 대부분은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리면서도 기본적인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그리고 일이 끝나고 난 뒤에는 피곤한 몸을 쉴 틈도 없이 여성이 ‘집안 일’을 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에 시달려야 하죠. 복지와 공공서비스는 축소되거나 그마저도 돈을 주고 사야하는 일이 되었고, 사회가 보장하지 않는 복지의 공백은 다시 여성들의 희생으로 채워집니다. 값 싸게 고용할 수 있고, 쉽게 해고되며, 사회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복지 서비스를 가정에서 무료로 제공하고 있는 여성! 만약 그녀들이 멈춘다면 세계가 어떻게 될까요?


드러나지 않게 세상을 지탱하고 있었던 여성들은, 이제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움직이려 하고 있습니다. 3월 8일 여성의 날을 기점으로 전 세계의 여성들이 그녀들 스스로의 힘으로 국제적인 연대를 시작한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 아래로부터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여성들의 네트워크인 ‘세계여성행진’(World March of Women)은 2005년에 지구를 횡단하는 릴레이 행진에 나섰습니다. 상파울루에서 3만 여명의 여성들이 ‘인류를 위한 여성의 지구적 헌장’을 선포하며 벌인 대규모 시위는 몇 달 동안 지구촌 50여 개 국을 거쳐 부르키나파소까지 도달했습니다. 다양한 인종과 민족, 각기 다른 직업, 신체적 특징, 성적 지향을 지닌 그녀들은 전 세계를 행진하면서 자신들을 억압하는 다양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국경을 넘는 연대가 가능하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었습니다. ‘세계여성행진’은 올해에도 3‧8 여성의 날에 맞춰 제 3회 국제 행동을 준비하고 있는데, 처음보다 더 많은 국가와 도시에서 전 지구적인 행동에 동참 할 것을 밝혔습니다. 한국 역시 세계의 여성들과 함께하는 행진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2010년에도 신자유주의 속에서 억압받는 전 민중들과 함께 힘차게 투쟁하는 3‧8 세계 여성의 날을 만들어 갑시다!!









Posted by 행진

2010/02/21 05:56 2010/02/21 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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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계 여성의 날! 여성들의 세상을 위하여~

    Tracked from 그린비출판사 2010/03/08 13:47 Delete

    오늘은 3월 8일, 여성의 날입니다. 언뜻 들으면 여성부에서 급조하여 만들어 낸 날처럼 생각될 수 있으나~, 절대 그렇게 만들어진 날이 아니라는 거, 우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900년대 초반엔 다들 아시겠지만, 노동 환경이 참으로 열악한 시기였습니다. 지금 같은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여성이기 때문에 오히려 임금은 적게 받던 시기였죠(가족을 부양하는 사람은 아버지라고 생각해 남성의 임금이 훨씬 많았기도 했구요, 여...

 

 

이명박 정부의
 
‘퍼플잡’을 비판한다!


 



보라색은 희망일까?


작년 가을, 여성부는 여성들의 경력단절 예방 및 일자리 창출, 여성 경제활동참가 확대 및 지위 향상을 이야기하며 퍼플잡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각각 여성과 남성을 상징하는 빨강과 파랑이 섞인 보라색(purple)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일과 가정의 조화와 남녀평등을 표방하는 퍼플잡(purple job)은 출산과 육아로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던 여성들이 재취업에 나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직업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도 여건에 따라 근무시간과 형태를 조절할 수 있게 하겠다는 유연근무제도이다. 유연근무제도는 단시간 근로, 시차출퇴근제, 집중근무시간제, 요일근무제, 재택근무 등 육아 및 가사노동을 직장일과 병행할 수 있도록 하는 탄력적인 근무형태를 말한다. 시간제 근무 공무원에 대한 시범실시, 단시간 일자리 확산을 위한 기업 지원 등을 통해 유연근무제를 확대하기 위한 계획들이 제출되고 있다.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꾸준히 증가하는 가운데 출산율은 사상 최저치로 떨어지고 있다. 직업을 가지면서도 출산과 육아의 책임을 저버리기가 쉽지 않은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퍼플잡은 과연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여성_ 일도 하고 가정도 돌보고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증가할수록 출산율은 낮아지고 있는데, 이것은 기존의 가족(특히 여성)이 수행하던 돌봄을 더 이상 가족 내에서 해결하기 힘들어지는 상황과 연관이 있다. 또한 여성의 경제활동참가 패턴을 보면 M자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30대 초반을 전후해 경제활동참가율이 갑자기 떨어지고 30대 후반 이후 다시 증가하는 양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출산과 육아가 집중되는 연령대(1990년대 후반까지는 20대 후반, 2000년대 이후에는 30대)에서는 경제활동참가율이 급격히 떨어졌다가 이후에 다시 상승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곧 여성은 출산과 동시에 노동시장에서 이탈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다시 노동시장에 복귀하면 대부분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일하게 된다. 시간제, 파트타이머 등으로 불리는 단시간 노동은 남성에 비해 여성에게 더 적합한 일자리로 여겨지는데 이는 여성이 수행하는 노동에 대해서 남성의 노동을 보조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남성의 노동만으로는 가정을 유지하기 어려운 조건에서 여성의 역할은 재생산 노동의 일차적인 책임자와 가정의 2차 소득원으로만 인식되는 사회구조의 결과이다.




 
이렇듯 출산과 육아, 가사노동의 부담으로 경제활동을 포기해야만 했던 수많은 여성들의 현실을 어느 정도 해결해줄 것이라 기대되는 퍼플잡은 일견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심각한 저출산-고령화 사회로의 진입과 함께 여성인력이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등장하였고, 이와 동시에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가 꾸준히 증가하는 가운데 정부의 여성정책의 핵심적인 화두는 일과 가정의 양립을 어떻게 가능하게 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정부의 일-가정 양립정책의 내용과 추진 과정은 여성들의 취업과 출산․양육의 이중부담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기보다는 발생하는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조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양육․돌봄과 직장일을 둘러싼 문제에서 여성에게 제시되어온 선택지는 ‘직장을 그만두고 집안일을 할 것인가’와 ‘직장일과 집안일을 병행할 것인가’였을 뿐이다. 재생산 노동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이 가족, 특히 여성에게 부여되는 현실의 본질과 문제점을 건드리지 못한 결과이다. 이러한 정부의 정책은 여성이 갈수록 저임금에 불안정한 과 턱없이 지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가정을 모두 책임져야 하는 사회적 강요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여성에게 전가되는 재생산 노동의 책임 문제를 전혀 건드리지 않은 채 ‘노동시간 유연화’를 통해서 여성노동 문제를 해결하려하는 일-가정양립 정책(퍼플잡)은 여성에게 이중부담을 강화하고 여성의 일자리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퍼플잡, 뭐가 문제일까?


재생산의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한다


정부가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이 여성들의 출산과 양육으로 인해 경제활동이 단절되는 것이라면 정말로 건드려야 하는 것은 재생산 노동의 책임이 온전히 여성의 몫으로 돌아가는 것의 문제이다. ‘재생산 노동’의 의미에 대해서는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며 여기서는 간단하게만 보도록 하자.

‘생산’이 한 사회의 부를 생산하는 과정을 의미한다면 ‘사회적 재생산’은 단지 그 사회 성원들의 생물학적 재생산뿐만 아니라 그 사회를 유지하는 사회적 행위의 재생산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경제 체제는 재화 및 서비스의 생산과정과 그러한 생산자로서의 인구(노동력)의 사회적 재생산 과정 사이의 특정한 관계를 전제로 하는데, 자본주의 체제는 자본주의적 노동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던 19세기에 숙련 남성노동자 중심의 고용구조를 확립하며 여성, 아동을 비롯한 그 밖의 노동력 취약 계층을 가족으로 돌려보냈다. 이는 기존의 자급자족적 가계로부터 생계수단을 박탈하여 노동시장에 생계를 전적으로 의존하도록 하는 과정인 동시에, 국가 주도 하에 노동 인구의 재생산에 대한 관리와 통제를 강화하려는 시도였다.

생산과 재생산은 특정한 관계를 맺고 생산체제를 지탱하고 있지만, 자본주의 하에서는 이를 분리시킴으로써 재생산 영역을 비가시적이게 만들었다. 즉, 재생산 노동은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수행해야 하며, 누군가 그 비용을 지불해야 하지만 이것을 마치 저절로 주어지는 것처럼 간주해 버렸다는 것이다. 재생산 노동은 엄청난 시간과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필수적인 노동이지만 국가의 경제, 통계에 전혀 반영되지도 않으며, 아무나 적당히 할 수 있는 노동으로 평가절하 되어왔다. 이와 같이 재생산 노동이 무급으로 수행되는 것은 자본에게는 생산비용인 ‘임금’으로부터 그 비용을 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 남성생계부양자모델의 해체에도 불구하고 재생산 노동은 여전히 여성의 책임으로 남아있다. 아니, 오히려 더욱 많은 부담을 전가 받는다. 가계의 실질소득 감소는 추가적인 성원, 특히 여성을 노동시장에 참가하도록 하며, 여성은 주로 저임금의 일자리나 더욱 조건이 열악한 비공식 부문에 참가하게 된다. 또한 여성은 줄어든 가계예산으로 자신과 가족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재생산 노동을 강화한다. 의료, 교육, 주거 등 사회서비스 관련 예산의 삭감은 여성에게 더 많은 돌봄 노동을 수행하게 한다. 구조조정의 효율성 증대란 실상 공적 영역에서 이뤄지던 것을 가계로의 비용 전가를 통해 가능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여성은 더 오래, 더 열심히 가계 안팎에서 일함으로써 구조조정의 충격을 흡수하는 ‘충격흡수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연구들은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을 증가시키고, 사회적 갈등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현재의 발전모델이 지속가능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재생산의 위기’ 차원에서 지속가능성을 문제 삼는다. 현재의 발전모델은 여성의 희생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으며, 여성이 인내할 수 없을 정도의 추가적인 노동을 요구함으로써 결국 재생산의 기반을 무너뜨릴 것이다. 현재의 위기는 구조조정이 기초적 재생산과 갈등적이며, 이러한 갈등이 발전과정 자체를 위협할 정도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재생산의 위기’로 규정된다. 이러한 구조조정은 여성의 노동을 무한하게 탄력적인 것으로 가정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여성의 저임금, 불안정 노동을 확대할 것이다


여성의 노동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용하는 정책을 확대할 것을 주장하는 이들의 가장 기본적인 논리는 한국의 고용구조가 남성들에게 적합한 전일제-장시간노동에 기초해 있으며, 그러한 고용구조로 인해 여성의 노동시장 진입이 어렵고 경력단절 문제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여성노동시장이 확장되었고 남성생계부양자모델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피부양자의 지위에 머무르며 양육을 전담해왔던 여성이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왜냐하면 실제로 작동하지도 않는 남성생계부양자모델은 사회에 이데올로기적으로 아주 단단하게 뿌리내려서 여성의 노동을 남성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한다. 여성의 노동이 부차화되기에는 총체적인 경제위기 속에서 남성의 노동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어진 수많은 여성들이 이미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노동을 수행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성이 일차적인 생계부양자라는 이데올로기는 여성들의 일자리를 대부분 저임금의 불안정한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남성생계부양자모델에 대한 비판은 이로 인해 여성노동자들이 처한 저임금, 불안정노동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더 이상 남성의 노동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으니 여성들도 일해야 한다→하지만 여성들이 남성처럼 풀타임으로 빡세게 일하기에는 가정도 돌봐야 하니 유연한 근로형태를 제시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정책들은 가사와 육아의 일차적 전담자로서의 여성의 역할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더욱 고착화시키는데 기여할 것이라는 점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정책이 확대되면 남성이 여성에 비해 가지고 있는 상대적인 고용과 임금의 안정성이 여성노동의 수준으로 하향화될 가능성이 있다. 보라색을 남녀평등의 색깔이라고 하면서 퍼플잡이 여성고용정책이라는 것을 강조하지만 이것이 남성 여성을 가리지 않고 또 다른 형태의 비정규직을 양산하게 될 것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노동의 형태를 유연하게 한다는 말은 결국 노동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겠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필요한 것은 더 유연한(불안정한!) 노동형태가 아니라 여성이 가정의 모든 일의 일차적인 책임자가 되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재생산 노동을 사회화한다는 것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만들기 위한 논쟁과 대안이다.




퍼플에 레드카드를 던진다!


최근 저출산 문제가 또다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면서 이번에는 여성들의 낙태를 엄격히 단속하겠다는 사람들이 나오는 등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인구가 늘어나던 시절에는 나라에서 여성들에게 낙태를 적극적으로 권장하며 피임도구도 공짜로 줬다던데, 인구가 줄어드니 일차적으로 관리 대상이 되는 것은 또다시 여성의 몸이다. 여성의 몸은 언제나 시대의 필요에 따라 관리되고 강요당해온 것이다.

여성의 노동력도 마찬가지이다. 사상초유의 경제위기 속에서 가장 먼저 그 충격을 완화하고 국가와 사회가 책임지지 않는 재생산 노동까지 책임지며 저임금의 불안정 노동을 강요받는 사람들은 역시 여성들이다. 사실 지금 퍼플잡이 추구하는 여성의 노동은 이미 전부터 진행 중이었다. 여성의 문제에 대해, 재생산 노동의 사회화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들을 이야기하지 못하면 앞으로도 패치워크 하듯이 각종 정책들을 덧대고 포장하는 정부의 논리에 밀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묘한 퍼플에 단호하게 레드카드를 던져야 한다.









Posted by 행진

2010/02/21 05:19 2010/02/21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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