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여성의 날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기념일들 중에는 민중들의 싸움을 통해 생긴 날들이 많습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만든 3.1절, 치열하게 싸운 학생들의 독립운동을 기리는 학생의 날(11월 3일), 광주 민중들의 저항을 잊지 않기 위한 5.18과 같은 날들이 대표적이지요.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역시, 누군가가 하사한 날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타올랐던 여성들의 투쟁으로 쟁취한 날입니다. 기념의 의미가 ‘뜻 깊은 일이나 훌륭한 인물 등을 오래도록 마음에 간직하고 잊지 않는 것’이라면, 아직은 여성의 날을 기념할 수만은 없습니다. 102년 전 그녀들이 외친 여성의 권리는 아직 세상에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여성들의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성의 날을 마음에 간직하고 기념하기에는 현실에서 계속되는 여성들의 싸움이 너무나도 간절합니다.



여성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고, 더 크게 벌여내야 헙니다


2007년, ‘아줌마’라는 말 대신 ‘투사’로 불렸던 그녀들이 있었습니다. 비정규직으로 노동자들이 고통 받지 않는 세상과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이 없는 사회를 그리며 저항한 이랜드 여성 노동자들입니다. 보통 여성들은 출산을 기점으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하다가 자녀들이 어느 정도 자란 후 다시 취업을 하게 되는데 이 때 여성들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임금이 낮고 비정규직인 일자리가 대부분입니다. 이랜드 여성 노동자들의 경우처럼 대형마트의 캐셔(계산원)를 그 예로 들 수 있겠지요.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더욱 힘든 노동 환경에 처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대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미화 노동자들도 또 하나의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대부분이 고령의 여성인 대학교 내 미화 노동자들은 최저임금에도 미달하는 임금을 받으면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꼬박 일합니다. 게다가 휴식공간이나 식비마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그래서 대학교의 미화 노동자들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여기저기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이화여대의 미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기도 하였지요. 하지만 대학 미화 노동자들의 경우에도 노동조합 활동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당한 현실에 맞서 싸울 권리조차 빼앗기고 있는 것이 지금의 여성들의 삶인 것입니다.

  이러한 여성들의 현실을 은폐하며 이명박 정부는 여성들이 더 많이 일할 수 있게 하겠다며 퍼플잡이라는 오묘한 이름의 정책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퍼플잡은 지금도 불안정한 여성들의 일자리를 더욱 규칙 없게 만드는 것을 정당화하는 조악한 포장지일 뿐입니다. 여기에 더해 저출산을 해결해야 한다며 여대생들에게 출산을 서약시키고, 낙태 단속을 강화하며 여성들에게 출산할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잊을 만하면 터지는 성폭력 사건을 비롯한 일상적인 성폭력까지…. 이렇게 아직도 여성들은 고된 하루하루의 연속선에 놓여있습니다.

  1908년에 하루 10시간만 일하겠다고, 임금을 인상하라고, 노동조합 결정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그녀들의 말이 102년이 지난 지금도 거리에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여성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을 멈추지 맙시다.


           

대학생들이 나서서 페미니즘을 말합시다!


여성들의 싸움이 소리 없이 계속되고 있는 시대에, 대학생들의 실천이 소중합니다. 대학생은 아직 사회인이라고 하기에도,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위치에 놓여있죠. 하지만 대학이 사회와 분리된 무결한 공간이 아니기에 사회의 문제들이 대학에서는 어떻게 드러나는지, 대학생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아가 대학에서부터 페미니즘이 시작되는 102주년 3.8 세계 여성의 날을 만들어봅시다. 여성의 날을 앞두고 많은 대학생들과 페미니즘을 고민하고 싶어 뉴스레터를 발간합니다. 뉴스레터를 통해 궁금증이 해소되고 고민이 시작되기를 바랍니다. 또, 건강한 토론을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번 뉴스레터는 네 개의 꼭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3.8 세계 여성의 날의 역사>에서는 여성의 날을 만들게 한 여성들의 투쟁이야기를 담았습니다. 102년 전 그녀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이명박 정부의 ‘퍼플잡’을 비판한다!>에서는 현 정부가 여성들에게 제시하는 것들이 얼마나 한계적인지 비판했습니다. <페미니즘이 시작되는 곳_ 여기는 대학입니다.>는 대학에서 왜 페미니즘을 고민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대학에 페미니즘이 필요한 이유, 대학생들이 앞장서서 페미니즘으로 세상을 바꿔야 하는 이유를 담았습니다. <새내기들과 함께 하는 3.8 주간>은 대학에서 3.8을 맞아 해볼 수 있는 여러 아이템을 제안합니다. 전국의 각 대학들에서 여성의 날을 맞아 페미니즘의 씨를 뿌리는 화창한 봄날을 만들어가기를 바랍니다. 페미니즘의 열매가 전국에 주렁주렁 열리기를 고대하며 전국학생행진도 치열하게 살겠습니다!




여성에게 위기를 전가하지 말라!

세상을 바꾸는 싸움을 대학에서부터!

다시, 페미니즘이다!


Posted by 행진

2010/02/21 06:02 2010/02/21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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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_교양] 3.8 여성의 날의 유래와 의의

 

3.8 여성의 날의 유래와 의의




만약 우리가 남성과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면,

노동조합을 만들고 가입할 수 있다면,

산전산후 휴가를 받고 아이를 탁아소에 맡길 수 있다면,

모든 투표에 참여할 수 있다면,

우리의 성(Sexuality)과 수태를 조정할 권리가 있다면

이것 모두는 바로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의 피나는 투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10년 코펜하겐에서 열렸던 3‧8여성의 날 기념대회 연설 中




1908년 3월 8일 루저스 광장, 미국의 방직공장에서 일하던 1만 5천여 명의 여성노동자들은 무장한 군대와 경찰에 맞서
"임금을 인상하라!", "10시간만 일하자!",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보장하라!",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달라!"고 외쳤습니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동시적으로 발생한 경제공황 속에서 미국의 여성노동자들은 쉬지 않고 일하며 국가경제에 이바지할 것을 요구받았지만, 그녀들은 정작 인간이자 노동자, 시민으로서 그 어떤 권리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여성들의 봉기는 비단 미국 뿐 아니라 유럽대륙으로도 퍼져나갔습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 물가가 오르자 '주부들의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여성노동자들은 처음엔 악독한 상인들을 위협하거나 시장의 상품 진열대를 부수기도 했지만, 곧 그런 행동들만으로는 생계비용을 내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정부의 정책을 변화시키는 정치적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여성의 참정권이 필수적임을 깨닫게 되었죠.


여성노동자들의 저항을 기억하고 전 세계 여성들의 연대를 강화하고자, 1910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국제여성노동자회의에서 독일 사회주의자이자 여성운동가인 클라라 제트킨(Clara Zetkin)의 제안으로 '세계 여성노동자의 날'을 정하기로 하였습니다. 세계 여성의 날은 20세기 산업국가에서 열악한 노동현실에 분노한 여성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와 투쟁했던 것을 기억하고 전 세계 여성들의 연대를 도모하고자 여성운동진영이 의식적으로 노력한 성과인 것입니다.

그 후 1년이 지난 1911년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부터 여성의 날이 준비되었습니다. 언론에서는 정부와 사회에서의 여성의 평등에 대한 문제들을 분석했습니다. 드디어 첫 번째 여성의 날,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수많은 여성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바다를 이루었습니다. 거리 곳곳에서는 시위가 열렸고 그를 막으려는 경찰들과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세계 여성의 날은 여성들의 집단적인 저항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여성해방 운동의 역사와 여성의 날


어떤 사람들은 여성의 날에 가장 중요하게 요구한 것은 여성의 투표권이었다고 이야기하면서 지금은 이런 요구들이 달성되었으니 여성의 날은 여성을 위해 이벤트를 열고 선물을 하는 기념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성의 날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면 그런 이야기들은 아주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여성의 날은 전 세계 여성들이 함께 투쟁하고 연대하는 날이며, 그 의미가 여성의 참정권 요구로만 그친 적은 없었습니다.


역사적으로 3․8 여성의 날 참정권 요구만이 아니라 여성들의 지위향상과 남녀차별 철폐, 여성빈곤 타파, 전쟁 반대 등 당시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모든 억압에 맞서 함께 연대하며 투쟁한 날이었습니다. 1915년 멕시코와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 반대 및 물가안정 운동, 오스트리아․에스파냐에서 일어난 군부독재 반대운동, 1943년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무솔리니 반대시위를 비롯해, 1979년 칠레의 군부정권 반대시위, 1981년 이란 여성들의 차도르 반대운동, 1988년의 필리핀 독재정권 타도 촛불시위 등이 그 대표적인 투쟁입니다.





특히 1917년 여성의 날은 러시아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첫날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더욱 뜻 깊은 날이 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식량 구입을 위해 줄을 서 있던 한 여성이 빵 가게의 유리창에 돌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되었는데, 기나긴 줄을 서 있던 여성노동자들과 병사 부인들이 시위대가 되어 페트로그라드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행렬은 또 다른 곳에서 여성의 날 집회를 하고 있던 여성노동자들과 동맹파업자들과 합류했고, 전쟁과 그로 인한 물가 인상, 노동자들의 비참함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회주의 여성 활동가들은 열악한 여성들의 현실을 적극적으로 알려냈을 뿐만 아니라 여성노동자와 병사아내들 스스로가 조직되어 자신들의 요구를 위해 싸울 수 있는 공간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노동자운동이 여성해방을 자신의 과제로 삼고 이를 위해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 것을 주장했고,
혁명과 여성운동의 결합을 시도했습니다.


이처럼 3․8 여성의 날은 여성해방을 앞당기는 투쟁의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여성들 만의’ 사안과 요구를 넘어서, 민중을 억압하는 폭력에 맞서 전 사회적인 문제제기가 이루어진 저항과 연대의 날이었습니다. 그 시대가 만들어낸 사회적 조건에서 가장 착취 받고 박해 받았던 여성들이 직접적인 행동에 나섰을 때 역사가 바뀌어왔다는 것은 그 동안의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여성, 그리고 사회가 바뀌길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여성의 날의 역사가 말해주는 것은 결코 작지 않죠.



연대의 원리로 투쟁하는 여성의 날을 만들어갑시다!


지금과 같은 신자유주의와 전쟁의 시대에서 여성들은 더욱 빈곤해지고, 더욱 많은 폭력에 노출되고 있습니다. 불안정한 일자리가 늘어나는 가운데, 여성들 대부분은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리면서도 기본적인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그리고 일이 끝나고 난 뒤에는 피곤한 몸을 쉴 틈도 없이 여성이 ‘집안 일’을 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에 시달려야 하죠. 복지와 공공서비스는 축소되거나 그마저도 돈을 주고 사야하는 일이 되었고, 사회가 보장하지 않는 복지의 공백은 다시 여성들의 희생으로 채워집니다. 값 싸게 고용할 수 있고, 쉽게 해고되며, 사회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복지 서비스를 가정에서 무료로 제공하고 있는 여성! 만약 그녀들이 멈춘다면 세계가 어떻게 될까요?


드러나지 않게 세상을 지탱하고 있었던 여성들은, 이제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움직이려 하고 있습니다. 3월 8일 여성의 날을 기점으로 전 세계의 여성들이 그녀들 스스로의 힘으로 국제적인 연대를 시작한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 아래로부터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여성들의 네트워크인 ‘세계여성행진’(World March of Women)은 2005년에 지구를 횡단하는 릴레이 행진에 나섰습니다. 상파울루에서 3만 여명의 여성들이 ‘인류를 위한 여성의 지구적 헌장’을 선포하며 벌인 대규모 시위는 몇 달 동안 지구촌 50여 개 국을 거쳐 부르키나파소까지 도달했습니다. 다양한 인종과 민족, 각기 다른 직업, 신체적 특징, 성적 지향을 지닌 그녀들은 전 세계를 행진하면서 자신들을 억압하는 다양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국경을 넘는 연대가 가능하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었습니다. ‘세계여성행진’은 올해에도 3‧8 여성의 날에 맞춰 제 3회 국제 행동을 준비하고 있는데, 처음보다 더 많은 국가와 도시에서 전 지구적인 행동에 동참 할 것을 밝혔습니다. 한국 역시 세계의 여성들과 함께하는 행진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2010년에도 신자유주의 속에서 억압받는 전 민중들과 함께 힘차게 투쟁하는 3‧8 세계 여성의 날을 만들어 갑시다!!









Posted by 행진

2010/02/21 05:56 2010/02/21 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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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계 여성의 날! 여성들의 세상을 위하여~

    Tracked from 그린비출판사 2010/03/08 13:47 Delete

    오늘은 3월 8일, 여성의 날입니다. 언뜻 들으면 여성부에서 급조하여 만들어 낸 날처럼 생각될 수 있으나~, 절대 그렇게 만들어진 날이 아니라는 거, 우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900년대 초반엔 다들 아시겠지만, 노동 환경이 참으로 열악한 시기였습니다. 지금 같은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여성이기 때문에 오히려 임금은 적게 받던 시기였죠(가족을 부양하는 사람은 아버지라고 생각해 남성의 임금이 훨씬 많았기도 했구요, 여...

 

 

이명박 정부의
 
‘퍼플잡’을 비판한다!


 



보라색은 희망일까?


작년 가을, 여성부는 여성들의 경력단절 예방 및 일자리 창출, 여성 경제활동참가 확대 및 지위 향상을 이야기하며 퍼플잡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각각 여성과 남성을 상징하는 빨강과 파랑이 섞인 보라색(purple)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일과 가정의 조화와 남녀평등을 표방하는 퍼플잡(purple job)은 출산과 육아로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던 여성들이 재취업에 나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직업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도 여건에 따라 근무시간과 형태를 조절할 수 있게 하겠다는 유연근무제도이다. 유연근무제도는 단시간 근로, 시차출퇴근제, 집중근무시간제, 요일근무제, 재택근무 등 육아 및 가사노동을 직장일과 병행할 수 있도록 하는 탄력적인 근무형태를 말한다. 시간제 근무 공무원에 대한 시범실시, 단시간 일자리 확산을 위한 기업 지원 등을 통해 유연근무제를 확대하기 위한 계획들이 제출되고 있다.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꾸준히 증가하는 가운데 출산율은 사상 최저치로 떨어지고 있다. 직업을 가지면서도 출산과 육아의 책임을 저버리기가 쉽지 않은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퍼플잡은 과연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여성_ 일도 하고 가정도 돌보고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증가할수록 출산율은 낮아지고 있는데, 이것은 기존의 가족(특히 여성)이 수행하던 돌봄을 더 이상 가족 내에서 해결하기 힘들어지는 상황과 연관이 있다. 또한 여성의 경제활동참가 패턴을 보면 M자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30대 초반을 전후해 경제활동참가율이 갑자기 떨어지고 30대 후반 이후 다시 증가하는 양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출산과 육아가 집중되는 연령대(1990년대 후반까지는 20대 후반, 2000년대 이후에는 30대)에서는 경제활동참가율이 급격히 떨어졌다가 이후에 다시 상승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곧 여성은 출산과 동시에 노동시장에서 이탈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다시 노동시장에 복귀하면 대부분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일하게 된다. 시간제, 파트타이머 등으로 불리는 단시간 노동은 남성에 비해 여성에게 더 적합한 일자리로 여겨지는데 이는 여성이 수행하는 노동에 대해서 남성의 노동을 보조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남성의 노동만으로는 가정을 유지하기 어려운 조건에서 여성의 역할은 재생산 노동의 일차적인 책임자와 가정의 2차 소득원으로만 인식되는 사회구조의 결과이다.




 
이렇듯 출산과 육아, 가사노동의 부담으로 경제활동을 포기해야만 했던 수많은 여성들의 현실을 어느 정도 해결해줄 것이라 기대되는 퍼플잡은 일견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심각한 저출산-고령화 사회로의 진입과 함께 여성인력이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등장하였고, 이와 동시에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가 꾸준히 증가하는 가운데 정부의 여성정책의 핵심적인 화두는 일과 가정의 양립을 어떻게 가능하게 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정부의 일-가정 양립정책의 내용과 추진 과정은 여성들의 취업과 출산․양육의 이중부담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기보다는 발생하는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조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양육․돌봄과 직장일을 둘러싼 문제에서 여성에게 제시되어온 선택지는 ‘직장을 그만두고 집안일을 할 것인가’와 ‘직장일과 집안일을 병행할 것인가’였을 뿐이다. 재생산 노동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이 가족, 특히 여성에게 부여되는 현실의 본질과 문제점을 건드리지 못한 결과이다. 이러한 정부의 정책은 여성이 갈수록 저임금에 불안정한 과 턱없이 지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가정을 모두 책임져야 하는 사회적 강요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여성에게 전가되는 재생산 노동의 책임 문제를 전혀 건드리지 않은 채 ‘노동시간 유연화’를 통해서 여성노동 문제를 해결하려하는 일-가정양립 정책(퍼플잡)은 여성에게 이중부담을 강화하고 여성의 일자리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퍼플잡, 뭐가 문제일까?


재생산의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한다


정부가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이 여성들의 출산과 양육으로 인해 경제활동이 단절되는 것이라면 정말로 건드려야 하는 것은 재생산 노동의 책임이 온전히 여성의 몫으로 돌아가는 것의 문제이다. ‘재생산 노동’의 의미에 대해서는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며 여기서는 간단하게만 보도록 하자.

‘생산’이 한 사회의 부를 생산하는 과정을 의미한다면 ‘사회적 재생산’은 단지 그 사회 성원들의 생물학적 재생산뿐만 아니라 그 사회를 유지하는 사회적 행위의 재생산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경제 체제는 재화 및 서비스의 생산과정과 그러한 생산자로서의 인구(노동력)의 사회적 재생산 과정 사이의 특정한 관계를 전제로 하는데, 자본주의 체제는 자본주의적 노동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던 19세기에 숙련 남성노동자 중심의 고용구조를 확립하며 여성, 아동을 비롯한 그 밖의 노동력 취약 계층을 가족으로 돌려보냈다. 이는 기존의 자급자족적 가계로부터 생계수단을 박탈하여 노동시장에 생계를 전적으로 의존하도록 하는 과정인 동시에, 국가 주도 하에 노동 인구의 재생산에 대한 관리와 통제를 강화하려는 시도였다.

생산과 재생산은 특정한 관계를 맺고 생산체제를 지탱하고 있지만, 자본주의 하에서는 이를 분리시킴으로써 재생산 영역을 비가시적이게 만들었다. 즉, 재생산 노동은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수행해야 하며, 누군가 그 비용을 지불해야 하지만 이것을 마치 저절로 주어지는 것처럼 간주해 버렸다는 것이다. 재생산 노동은 엄청난 시간과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필수적인 노동이지만 국가의 경제, 통계에 전혀 반영되지도 않으며, 아무나 적당히 할 수 있는 노동으로 평가절하 되어왔다. 이와 같이 재생산 노동이 무급으로 수행되는 것은 자본에게는 생산비용인 ‘임금’으로부터 그 비용을 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 남성생계부양자모델의 해체에도 불구하고 재생산 노동은 여전히 여성의 책임으로 남아있다. 아니, 오히려 더욱 많은 부담을 전가 받는다. 가계의 실질소득 감소는 추가적인 성원, 특히 여성을 노동시장에 참가하도록 하며, 여성은 주로 저임금의 일자리나 더욱 조건이 열악한 비공식 부문에 참가하게 된다. 또한 여성은 줄어든 가계예산으로 자신과 가족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재생산 노동을 강화한다. 의료, 교육, 주거 등 사회서비스 관련 예산의 삭감은 여성에게 더 많은 돌봄 노동을 수행하게 한다. 구조조정의 효율성 증대란 실상 공적 영역에서 이뤄지던 것을 가계로의 비용 전가를 통해 가능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여성은 더 오래, 더 열심히 가계 안팎에서 일함으로써 구조조정의 충격을 흡수하는 ‘충격흡수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연구들은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을 증가시키고, 사회적 갈등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현재의 발전모델이 지속가능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재생산의 위기’ 차원에서 지속가능성을 문제 삼는다. 현재의 발전모델은 여성의 희생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으며, 여성이 인내할 수 없을 정도의 추가적인 노동을 요구함으로써 결국 재생산의 기반을 무너뜨릴 것이다. 현재의 위기는 구조조정이 기초적 재생산과 갈등적이며, 이러한 갈등이 발전과정 자체를 위협할 정도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재생산의 위기’로 규정된다. 이러한 구조조정은 여성의 노동을 무한하게 탄력적인 것으로 가정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여성의 저임금, 불안정 노동을 확대할 것이다


여성의 노동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용하는 정책을 확대할 것을 주장하는 이들의 가장 기본적인 논리는 한국의 고용구조가 남성들에게 적합한 전일제-장시간노동에 기초해 있으며, 그러한 고용구조로 인해 여성의 노동시장 진입이 어렵고 경력단절 문제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여성노동시장이 확장되었고 남성생계부양자모델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피부양자의 지위에 머무르며 양육을 전담해왔던 여성이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왜냐하면 실제로 작동하지도 않는 남성생계부양자모델은 사회에 이데올로기적으로 아주 단단하게 뿌리내려서 여성의 노동을 남성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한다. 여성의 노동이 부차화되기에는 총체적인 경제위기 속에서 남성의 노동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어진 수많은 여성들이 이미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노동을 수행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성이 일차적인 생계부양자라는 이데올로기는 여성들의 일자리를 대부분 저임금의 불안정한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남성생계부양자모델에 대한 비판은 이로 인해 여성노동자들이 처한 저임금, 불안정노동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더 이상 남성의 노동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으니 여성들도 일해야 한다→하지만 여성들이 남성처럼 풀타임으로 빡세게 일하기에는 가정도 돌봐야 하니 유연한 근로형태를 제시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정책들은 가사와 육아의 일차적 전담자로서의 여성의 역할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더욱 고착화시키는데 기여할 것이라는 점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정책이 확대되면 남성이 여성에 비해 가지고 있는 상대적인 고용과 임금의 안정성이 여성노동의 수준으로 하향화될 가능성이 있다. 보라색을 남녀평등의 색깔이라고 하면서 퍼플잡이 여성고용정책이라는 것을 강조하지만 이것이 남성 여성을 가리지 않고 또 다른 형태의 비정규직을 양산하게 될 것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노동의 형태를 유연하게 한다는 말은 결국 노동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겠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필요한 것은 더 유연한(불안정한!) 노동형태가 아니라 여성이 가정의 모든 일의 일차적인 책임자가 되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재생산 노동을 사회화한다는 것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만들기 위한 논쟁과 대안이다.




퍼플에 레드카드를 던진다!


최근 저출산 문제가 또다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면서 이번에는 여성들의 낙태를 엄격히 단속하겠다는 사람들이 나오는 등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인구가 늘어나던 시절에는 나라에서 여성들에게 낙태를 적극적으로 권장하며 피임도구도 공짜로 줬다던데, 인구가 줄어드니 일차적으로 관리 대상이 되는 것은 또다시 여성의 몸이다. 여성의 몸은 언제나 시대의 필요에 따라 관리되고 강요당해온 것이다.

여성의 노동력도 마찬가지이다. 사상초유의 경제위기 속에서 가장 먼저 그 충격을 완화하고 국가와 사회가 책임지지 않는 재생산 노동까지 책임지며 저임금의 불안정 노동을 강요받는 사람들은 역시 여성들이다. 사실 지금 퍼플잡이 추구하는 여성의 노동은 이미 전부터 진행 중이었다. 여성의 문제에 대해, 재생산 노동의 사회화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들을 이야기하지 못하면 앞으로도 패치워크 하듯이 각종 정책들을 덧대고 포장하는 정부의 논리에 밀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묘한 퍼플에 단호하게 레드카드를 던져야 한다.









Posted by 행진

2010/02/21 05:19 2010/02/21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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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이 시작되는 곳,
여기는 대학입니다



페미니즘? 여성 우월주의?


 ‘페미니즘’하면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여성 vs 남성 대결구도, 드세거나 피해의식에 가득 찬 여자, 여성부… 등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살면서 페미니즘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페미니즘은 남성 vs 여성을 상정해놓고 조금이라도 남성의 영역을 더 차지하려는 여성들의 논리가 아니다. 오히려 페미니즘은 이 세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상식을 뒤집는 새로운 관점, 그러면서도 명쾌한 관점을 제공한다.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즘은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충격적이고,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유용할 수 있다. 페미니즘은 하나의 새로운 세계관이자 현실을 분석하는 이론이기에 이것을 통해서 대학생활에서 보이지 않았던 부분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가 부대끼며 살아가는 공동체부터, 취업의 문제까지 페미니즘의 눈을 통해 새롭게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



“원래 다 그래”가 누군가에게 폭력이 되는 순간

어떤 대학생활을 해야 할까 가슴 설레는 시기 누군가는 핑크빛 연애를, 누군가는 술 먹고 밤새 노는 일을, 누군가는 푸른 잔디밭에서 토론하는 문화를 마음에 품고 대학에 들어왔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지만 대학에서의 과/반/학회/동아리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마음의 고향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고향이라고 해서 항상 행복하리라는 법은 없는 법.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면서 누군가는 상처받고 누군가는 소리 없이 떠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생각해보면 모두가 즐거울 수 있는 공동체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사실이다.  그렇다면 무조건 즐거울 것만 같은 대학생활에서 무엇이 문제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술자리 문화

 한꺼번에 수많은 선배, 후배들이 만나며 웃고 떠들고 친해지는 3월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술이다. 술 마시고 과실에서 뻗기, 술 마시고 수업 째기, 술 마시고 집기 부수기 등 술과 관련한 온갖 에피소드들이 학기 초 공동체를 가득 채운다. 술자리에서는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최대한 술을 많이 먹고 먹이고, 큰 소리로 FM과 응원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속에서 누군가는 재밌게, 누군가는 불편하게 사람들과 어울린다. 그런데 단순히 개인의 취향에 따라 술자리가 좋고 싫은 것이 아니라 술자리 문화가 남성 중심적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불편해지는 거라면 이것은 개인의 취향을 넘어서는 문제로 사고되어야 한다.





술자리가 남성 중심적이라는 것은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일반적으로 술자리에서 ‘잘 논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남성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다. 때문에 술자리를 주도하는 사람은 그것이 남학우든 여학우든 상관없이 사회적으로‘남성적’이라고 생각되는 면모를 발휘함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보호해주는 사람 없이 만취하는 것이 금기시되고, 통금이 있는 여학우들의 경우 술자리에서 오래 남기 힘들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술자리에서 인간 대 인간으로서 인적네트워크를 쌓는 사람들은 남성적 정체성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여성도 여기에 낄 수는 있지만 결코 ‘여성’으로서 함께하는 것은 아니다. 예쁜 여학우가 남자선배들한테 이쁨 받는 분위기, 같은 과/반 여학우의 외모에 대한 평가 등이 술자리나 과실에서 공공연하게 시작되면 공동체 문화의 남성중심성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특히, 술자리에서의 원치 않는 스킨쉽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점은 남성 중심적인 술자리문화에서 남/녀의 관계가 주로 연애대상으로 생각되는 분위기가 여학우를 성적으로 대상화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동체 운영하기 

 새터, 개강파티, 세미나, 동아리 활동 등 공동체가 굴러가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대학생들이 스스로 꾸려나가는 자치활동 속에서도 여러 가지 역할이 성별화되어서 나타난다. 사람들을 이끌고 분위기를 주도하고 선배들과의 접대, 단체 연락을 담당하는 역할과 술집 예약/과티 제작/술 취한 사람 챙기기/뒷정리 등의 실무 역할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겠다. 그런데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알리는 대표자 역할과 실무 역할이 분리되어 한쪽에게 몰리는 경우가 많다. 학회를 예로 들어본다면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들어주는 선배와 개인적인 고민이나 연애 상담을 들어주는 선배가 나뉘기도 한다.

 이는 마치 가족 내에서 어머니/아버지의 역할 분담을 떠올리게 한다. 사회적으로 여성과 남성에게 요구되는 역할이 대학에서도 적용되면서 알게 모르게 여선배가 공동체에서 일정 이상의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게 만들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누군가에게 고의로 상처를 주려고 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전체 사회에서 보편적인 문화가 남성 중심적이기 때문에 이것이 대학사회에서 그대로 투영된 것일 뿐이다. 이렇게 페미니즘의 눈을 통해서 우리에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그 자체로서 성별 권력관계를 내포할 수 있다는 인식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모두가 행복한 공동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여성 남성을 갈라서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공간 또한 권력관계가 작동하는 공간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해결해나가기 위한 노력을 ‘함께’ 시작하는 것이다!




 관계맺음에도 고민과 토론이 필요하다! : 반성폭력 자치규약의 의미


우리가 속한 공간에서도 알게 모르게 성별 권력관계가 작동하고 있었다면, 이것이 개인 잘잘못의 문제를 넘어 우리 사회의 문제라면, 이것을 바꿔나가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변화는 일상의 관계맺음에서부터 고민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와 공동체 문화도 ‘원래 그랬고 당연한 것’이 아니라 ‘구성되어 온 것’으로 다시 인식하는 과정이자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경계를 흐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선배들이 만들어왔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반성폭력 자치규약’이다. 반성폭력 자치규약이란 새터나 엠티, 농활 등 남/녀가 압축적으로 함께 지내는 활동에서 성폭력적인 상황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 구성원들이 합의하는 자치규약이다. 자치규약은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는 금기가 아니라 그것을 구성원들이 공동으로 만들고 합의하는 데 가장 큰 의미가 있다. 공동체에 자치규약이 왜 필요한지, 알게 모르게 누군가에게 폭력이 되는 일들이 일어나지는 않았는지,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일상적인 문화였는지를 이야기하는 데에 가장 큰 의미가 있다. 


<반성폭력 자치규약 예시>

* 여/남은 성차별적 언행이나 서로를 대상화하는 언행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있습니다.

* 성적 소수자는 성차별적 언행이나 성적 소수자를 적대시하는 언행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있습니다.

* 여성은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여성다움’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가집니다.

* 여성은 불쾌한 신체접촉을 당하지 않을 권리를 가집니다.

* 여성은 여/남이 함께 즐거운 술자리를 즐길 권리가 있습니다.

* 여/남은 성적 고정관념과 성역할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있습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합시다.

- 누군가에게 술 취한 사람을 보살피는 역할, 술자리 준비와 뒤처리를 전담시키지 맙시다.

* 성폭력을 목격하거나 성차별적 언행을 보았을 때, 분위기에 편승하거나 방관하지 말고 누구나 이의를 제기합시다. 이의제기는 과민반응이 아니라 모두가 성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하는 당연한 권리입니다.

* 상대방의 싫다는 표현을 진지하게 받아들입시다. 더불어 성폭력, 성차별로 인한 불쾌감은 그 자리에서 분명하게 표현합시다.

* 여/남의 최소한의 독립된 공간을 보장합시다.



 여대생에게 취업과 결혼

 그렇다면 이제 대학생활에서 더 시야를 넓혀보자. 알파걸․골드미스 등 이제 여성우위시대가 도래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많이 들려오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해서 사회로 나갈 때 여성들은 가장 절실하게 ‘여성’인 자신을 느끼게 된다. 같은 스펙을 가지고도 더욱 취업하기 어렵고, 여러 가지 취업 준비 중에 성형수술이 한 축을 차지하기도 한다.


여성 고용차별 여전...입사때 정규직 남성보다 9%↓

비정규직은 '임신진단서=해고통지서'


 한 때는 여대생이 취직이 잘 안 되는 것이 불합리하기는 하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 아니겠냐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기도 했다. 똑같은 비용을 들여서 고용을 해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여성도 직업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시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여성들에게 가정을 꾸리는 것과 직장 일을 하는 것은 대립되는 것처럼 여겨지고, 여러 가지 이유로 여전히 여성은 노동시장에서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여성에게 일과 가정은 어떤 의미일까?


 출산서약

 저출산이 사회적인 문제로 떠오르면서 성신여대에서는 저출산 관련 특강을 열며 여대생들이 저출산 문제 해결의 일주체가 될 것을 서약하게 하는 일이 있었다.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증가하면서 출산율은 더욱 낮아지고 있는데 이것은 여성이 직장 일을 하면서는 가족 내에서 여성이 수행했던 육아나 가사노동을 병행하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여성의 경제활동참가 패턴을 보면 M자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30대 초반을 전후해 경제활동참가율이 갑자기 떨어지고 30대 후반 이후 다시 증가하는 양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출산과 육아가 집중되는 연령대(1990년대 후반까지는 20대 후반, 2000년대 이후에는 30대)에서는 경제활동참가율이 급격히 떨어졌다가 이후에 다시 상승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곧 여성은 출산과 동시에 노동시장에서 이탈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일과 가정이 대립되는 현재의 상황은 이미 전 사회적인 문제인데 출산서약은 저출산의 원인을 여성들이 이기적이거나 의식수준이 낮기 때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결심하면 저출산이 해결될 것처럼 대학이 앞장서서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취집

 한편, 지난 해 사상 최대의 취업난 속에서 ‘취집’이라는 신조어가 유행했다. 이는 집에 취업한다는 뜻으로 힘겹게 취업하는 준비할 게 아니라 결혼이자 하자는 자조석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보면서 여성은 가족 부양의 부담도 적고 참 좋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성도 일을 하지 않고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조건에서 가장이 아니기 때문에 부담이 적을 수 있겠지만 또한 가장이 아니어서 취업하기도, 해고되기도, 정규직이 되기도 힘든 것이 여성의 현실이다.


일과 가정을 함께 꾸릴 수 있는 진정한 방법

 최근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도록 전일제가 아닌 파트타임, 재택근무와 같은 형태의 고용형태를 늘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거세게 제기되고 있다. 이는 일자리를 늘리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국 정규직을 줄이고 불안정한 일자리를 늘리는 명분이라는 비판 또한 거세다. 그렇다면 대체 진정한 문제 해결의 방법은 무엇일까. 가정을 꾸려야 하는 여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불안정한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성만이 가정을 꾸리는 데 필요한 노동을 해야 한다는 관념을 깨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일을 하면서 제대로 대우받고, 가정을 꾸릴 수 있는 방식으로 사회가 변화해야 한다.



대학에서부터 다시 페미니즘을 시작하자!

 

  이렇게 대학의 일상생활에서부터 대학졸업 이후의 노동까지 여전히 함께 해결해야할 문제가 많이 남아있다. 대학생활이나 취업 등의 문제에서 여대생은 다른 경험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여성의 문제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단순히 여성만의 문제를 넘어 전체 사회의 문제로 이야기되어야 한다. 그러나 남성중심적 공동체 문화나 여성의 노동에 대한 권리가 대학에서 화두가 되거나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별로 존재하지는 않은 것이 현실이다.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유명한 정치가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발 딛은 대학에서부터, 일상에서부터 고민하고 토론하는 것으로부터 변화의 첫걸음을 시작하자!




 

Posted by 행진

2010/02/21 05:05 2010/02/21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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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List

  1. 한지환 2010/02/21 13:50 # M/D Reply Permalink

    전국학생행진은 애당초 잘못된 전제를 바탕으로 젠더(Gender) 문제와 관련된 논의를 진전시키고 있습니다. “이제는 여성도 직업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시대”, “여성도 일을 하지 않고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조건”이라는 주장은, 우리 사회의 현실을 여성 편향적으로 바라본 결과일 뿐입니다. 제가「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에서 소개한 통계자료와 뉴스클리핑 게시판에 올린 언론보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남성의 전통적인 책임을 당연시하는 전통적인 성별 이데올로기로 인해 여성에게 요구되는 가족부양의 책임은 여전히 미미한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전국학생행진의 논리대로라면, 오늘날 남성도 돌봄 노동을 일정 정도 분담한다는 사실을 내세워 “남성이 일과 가정의 양립을 강요받고 있다”는 주장도 충분히 가능할 것입니다. 즉 예나 지금이나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가 강요한 성적(性的) 억압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남녀 모두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일과 가정의 양립’과 관련해 “진정한 문제 해결의 방법은 (…) 가정을 꾸려야 하는 여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불안정한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성만이 가정을 꾸리는 데 필요한 노동을 해야 한다는 관념을 깨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물론 그 동안 젠더 문제를 논하며 물질적 구조에만 얽매어 온 일부 회원들의 편협한 태도를 고려할 때, 임지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의 말처럼 “은밀하게 고무된 담론이야말로 그 어떤 검열 제도보다 더 효과적인 통제 수단이라는 점”을 전국학생행진이 지적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남성에게 가족부양의 1차적 책임이 요구되는 현실 속에서, 남녀가 ‘돌봄 노동’을 균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남성에게 불합리한 이중(二重) 부담을 지우려는 시도로 비추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국학생행진의 주장은, 바깥에서 더 많은 시간을 일하고 더 무거운 부담감과 책임감을 느껴야하는 남편이 가정에서 아내와 돌봄 노동을 똑같이 분담해야 한다는 말로 해석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젠더 문제를 공정하고 균형적인 시각에서 다루고자 한다면, 여성을 억압하는 성별 이데올로기의 이면에 남성을 억압하는 또 다른 성별 이데올로기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번 뉴스레터를 읽어보면, 전국학생행진은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 하에서의 남성 억압을 일부 인정하는 듯하지만, 여전히 남성에게 요구된 치사적 역할(致死的 役割, lethal role)과 여성에게 허락된 면책권을 논함에 있어 공정한 시각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 ‘세계 여성의 날’ 행사를 진행함에 있어서는 그 동안의 편파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보다 공정하고 균형적인 시각을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덧붙여서, 합당한 이유 없이 댓글을 삭제하는 몰지각한 행동은 더 이상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만약 불가피한 사정으로 댓글을 삭제해야 한다면 공지를 통해 삭제 여부와 그 이유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2. rlgl 2010/03/05 00:41 # M/D Reply Permalink

    한지환님의 댓글을 읽고 몇글자 적어봅니다.
    위 댓글을 읽어보니 과연 본문을 읽고 쓰신 댓글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위 글 어디에도 '여성이 억압받는 현실은 남성 때문이다'라는 말은 없는데다가 돌봄노동에 대해서도 남녀가 균등하게 나눠서 하면 된다는 말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여성 남성을 갈라서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공간 또한 권력관계가 작동하는 공간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해결해나가기 위한 노력을 ‘함께’ 시작하는 것이다!' 이 문구만 봐도 나와있고...
    위 글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성별 권력관계'에 대해서 지적하고 그것이 여성에게 폭력적으로 가해지는 방식을 설명해 놓은 것이라고 저는 이해했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ㅎㅎ

    1. 한지환 2010/03/05 12:40 # M/D Permalink

      제가 주장하려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신 것은 오히려 귀하인 것 같군요. 물론 전국학생행진은 여성 억압을 ‘남성’의 탓이라고 주장하지 않았고, 저 역시 그와 관련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전국학생행진의 입장을 비판한 이유는, 전국학생행진이 젠더(Gender) 문제를 다루면서 전통사회가 남성에게 가한 성적(性的) 억압과 여성에게 허락한 면책권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전통사회에서의 남녀관계를 ‘성별 권력관계’로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즉 전국학생행진의 생각과 달리, 여성주의자들이 ‘가부장제’라 규정한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는 남성에게 일방적인 권력을 허락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여성에게만 폭력적으로 적용된 시스템도 아니었다는 것이 제가 주장하려는 바입니다. ‘절름발이 페미니즘’에 얽매이지 않는 공정하고 균형적인 시각에서 전통사회에서의 남녀관계를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전국학생행진은 남녀가 돌봄 노동을 균분해야 한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른바 ‘일과 가정의 양립’과 관련해 “여성만이 가정을 꾸리는 데 필요한 노동을 해야 한다는 관념을 깨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전국학생행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여성에게 돌봄 노동의 1차적 책임을 지우는 전통적인 성별 이데올로기를 비판한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는 여성을 일방적으로 희생시킨 것이 아니라 남녀 모두에게 각자 정해진 성역할만을 강요했으며, 따라서 남녀 모두는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의 피해자임과 동시에 수혜자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전통사회에서 돌봄 노동과 관련해 남성에게 허락된 면책권은 그들이 부담해야 했던 ‘치사적 역할(致死的 役割, lethal role)’에 따른 반대급부였으며, 따라서 전통사회가 남성에게 가한 성적 억압에 대한 고찰 없이 여성에게 요구되는 돌봄 노동의 1차적 책임만을 문제 삼는 것은 불공평한 처사라는 것입니다.

      저도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제대로 읽지 않고 댓글을 적을 만큼 경솔한 사람은 아닙니다. 저는 자유주의적 남성운동가로서 전통적인 남녀관계를 지배와 피지배, 억압과 피억압의 관계로 규정하는 여성주의의 이분법적인 틀 자체에 이의를 제기한 것입니다. 보아하니 귀하께서는 저의 주장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신 것 같은데,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자유게시판에 올린「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3. rlgl 2010/03/07 05:10 # M/D Reply Permalink

    한지환님이 무슨 말씀 하시는지 잘 알았고, 다시 답변드리고 싶어서 글을 씁니다.
    그런데 글을 쓰면서 한가지 주의하셔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한지환님께서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이야기 하실때 '절름발이 페미니즘'이라는 표현과 함께 '공정하고 균형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 표현은 상당히 주관적인 의견인 것 같습니다.
    한지환님이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남성 여성에게 모두 억압적인 가부장제를 반대하자'라면 그 입장을 이어나가 페미니즘에 대한 심도있는 공부와 함께 입장을 발전시킬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라 단순히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을 가하기 위한 논쟁이라면 아무리 이야기가 진행된다 하더라도 그다지 생산적인 논쟁이 될 수 없을 것 같네요.
    님의 글을 읽고 생각나는 구절이 있어 첨부해 봅니다.
    '... 모든 여성이 이 사회의 피해자만은 아니며, 젠더만이 아니라 결혼 여부, 계급, 세대, 인종, 민족, 국가 같은 다양한 맥락에서 다양한 섹슈얼리티를 구성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섹슈얼리티 강의 두번째 中
    위에 인용한 구절이 한지환님이 남기신 댓글에 대한 대답이 어느정도는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저도 읽어보시면 좋을만한 책 몇 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새 여성학 강의, 동녘, 한국여성연구소, 2005
    섹슈얼리티 강의 두번째, 동녘, 한국성폭력상담소 기획/변혜정 편저, 2006

    이 두가지는 페미니즘 입문서 격인 책이니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 한지환 2010/03/07 11:01 # M/D Permalink

      몇몇 여성주의자들이 전통사회에서의 남성 억압에 대해 거론하기는 하지만, 그들 역시 남성 억압을 ‘여성 억압의 부산물’ 정도로 간주할 뿐입니다. 페미니즘을 앞세워 저의 주장을 비판하신 귀하께서도, 앞서 전통사회에서의 남녀관계가 ‘성별 권력관계’였으며, 그러한 권력관계가 여성에게 폭력적으로 적용되었다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즉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를 ‘가부장제’라 지칭하고 전통사회에서의 남녀관계를 ‘지배와 피지배의 권력관계’로 규정하는 급진적 페미니즘을 비롯한 여성학 이론의 틀을 깨뜨리지 않는 한, 남성 억압은 여성 억압과 결코 동등하게 다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여성학 이론에 바탕을 둔 편파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젠더(Gender) 문제를 객관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릴 수 있는 ‘남성학(男性學, Men's Studies)’, 나아가 여성학과 남성학을 아우르는 ‘성학(性學, Gender Studies)’ 이론을 계발해야 한다는 것이 제가 주장하려는 바입니다. 제가「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에서도 지적했듯이, 기존의 여성학 이론만 가지고는 우리 사회의 젠더 문제를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아울러 남성주의(男性主義, Masculism)와 관련해 보다 구체적이고 자세한 설명을 원하신다면 다음 책들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젠더 문제를 다룸에 있어 좋은 참고가 되리라 믿습니다.

      『남성의 역사』(솔, 2001)
      『남자 만세 : 여자가 정말 모르는 남자에 대한 진실과 거짓』(예담, 2002)
      『남자의 이미지 : 현대 남성성의 창조』(문예출판사, 2004)
      『페미니즘에 대한 남성학과 남성운동』(원미사, 2007)

      그리고 알려주신 책들은 기회가 되면 꼭 읽어보겠습니다.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4. rlgl 2010/03/08 01:02 # M/D Reply Permalink

    한지환님께 다시 답변드립니다.
    한지환님의 말씀대로라면 페미니즘이 편파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성학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이 말은 님이 말씀하신 논리와도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님의 논리대로라면 어느 한 성을 중심으로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이 편파적이라는 건데 그건 남성학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보여집니다.
    또 한가지 더 이야기 하고 싶은 점은 한지환님과 댓글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느낀 점인데 계속 이야기가 '여성과 남성의 경쟁'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고 이는 분명 주의해야 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 억압의 원인이 남성 자체 때문은 아닌것이고,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남성 억압의 원인이 페미니즘이 아니라는 사실은 공감하실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한지환님도 글에서 말씀하셨듯 한지환님이 생각하시는 남성 억압의 원인이 '성별 이데올로기'라면 그 비판의 초점은 페미니즘이 아닌 '성별 이데올로기'에 맞춰져야 할 것입니다.
    또한 사회적으로 퍼져있는 성별 이데올로기가 한지환님 말씀대로 남성에게도 폭력적일 수 있다는 점은 사실일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여성이냐 남성이냐'하는 이분법적 기준을 넘어서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사회, 경제적 문제들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한지환님이 글에서 언급하신 페미니즘에 대한 의견이나 어느 페미니스트들의 입장들이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페미니즘과, 그리고 제가 알고 있는 행진의 페미니즘과 다른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1. 한지환 2010/03/08 11:44 # M/D Permalink

      저의 글을 제대로 읽지 않으신 것 같은데, 남성학(男性學, Men's Studies)이나 여성학(女性學, Women's Studies)만으로는 우리 사회의 젠더(Gender) 문제를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젠더 연구가들은 궁극적으로 이 둘을 아우르는 ‘성학(性學, Gender Studies)’을 추구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날 적지 않은 이들이 여성주의를 젠더 문제를 다루는 유일한 방편으로 여기며,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에 대한 여성주의자들의 편파적인 해석을 객관적인 진리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이것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에 대한 여성주의자들의 해석이 편파적이라는 저의 지적에 동의하실 수 없다면 여기에 대해서는 좀 더 이야기를 나누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귀하께서도 앞서 전통사회에서의 남녀관계를 ‘여성에게 폭력적으로 적용되는 성별 권력관계’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실제로 여성주의의 여러 노선들은 귀하와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젠더 문제와 관련된 논의를 진전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아는 여성주의’와 ‘귀하께서 알고 계신 여성주의’가 다른 것 같다는 지적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귀하께서 이 분야에 얼마나 오래 천착하신 분인지는 모르지만, 저도 이 분야에 대해 귀하나 이곳 회원들 못지않게 공부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저라고 해서 여성주의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섣불리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는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의 대화가 ‘여성과 남성 간의 경쟁’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성운동 혹은 여성운동이라는 것 자체가 남녀 각자에게 합당한 몫을 나누어주려는 사회적 움직임이고, 그로 인해 이를 놓고 대화를 나누다보면 그렇게 느끼는 이들이 종종 있지만, 그것은 참으로 쓸데없는 걱정일 것입니다.

      그리고「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을 읽어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제가 궁극적으로 깨뜨리려 하는 것은 ‘가부장제’라고 불리는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와 그에 따른 성별 이데올로기이며, 이 점에 있어서는 여성주의자들과 입장을 같이합니다. 저도 여성주의가 남성 억압의 원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여성주의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에 반대하지도 않는다는 것이지요.
      누차 강조하지만, 제가 여성주의를 비판하는 이유는 그러한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에 대해 여성주의자들이 잘못된 해석을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전통사회에서의 남녀관계를 ‘여성에게 폭력적으로 적용되는 성별 권력관계’로 섣불리 규정하거나, 전통사회에서의 남성 억압에 대한 언급 없이 여성 억압만을 문제 삼는 여성주의자들의 태도는 자유주의적 남성운동가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위 글에서 전국학생행진은 여성에게 요구되는 돌봄 노동의 책임을 문제 삼았지만, 그러한 책임이 남성 가장(家長)에게 요구되는 가족부양의 책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문제라는 사실을 간과한 채 “여성만이 가정을 꾸리는 데 필요한 노동을 해야 한다는 관념을 깨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라는 것입니다. 또한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남성 억압이 뿌리 깊게 남아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이제는 여성도 직업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시대”, “여성도 일을 하지 않고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조건”이라고 섣불리 단정 짓는 것은 우리 사회의 현실을 여성 편향적으로 바라본 결과일 뿐입니다. 이런 잘못된 인식을 깨뜨리지 않는 한, 남성 억압은 여성 억압과 동등하게 다루어질 수 없으며, 나아가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를 깨뜨려는 노력도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둘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쭉 훑어보면, 귀하께서는 한편으로는 전통사회에서의 남녀관계를 ‘여성에게 폭력적으로 적용되는 성별 권력관계’라고 말씀하시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남녀 모두가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의 피해자’라고 말씀하시는데, 엄밀히 말해 이 두 주장은 병립할 수 없는 주장입니다. 전자와 같은 인식을 깨뜨리지 않는 한, 남성 억압은 기껏해야 ‘여성 억압의 부산물’로 간주될 수밖에 없습니다. 급진적 페미니즘에서 이야기하는 남성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계급, 세대, 인종 등을 막론하고 ‘여성’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권리와 혜택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는 여성을 일방적으로 희생시킨 것이 아니라, 남녀 모두에게 각자 정해진 성역할만을 강요하고 그에 따른 반대급부를 제공했으며, 따라서 전통사회를 ‘가부장제 사회’ 혹은 ‘남성 중심적 사회’라고 규정하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라는 저의 지적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셨으면 합니다.
      아울러 제가 알려드린 책들은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귀하께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5. rlgl 2010/03/09 13:25 # M/D Reply Permalink

    마지막으로 정리격의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한지환님께서 말씀하신 성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여성 남성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전제 하에 가능하겠죠? 물론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바도 궁극적으로는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일겁니다.
    또한 저는 물론 성별 이데올로기 속에서 여성과 남성 모두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는 분명히 말했으나 그 착취의 방식과 정도가 같다고 이야기 한 적은 없습니다.
    이점은 분명히 이해하셔야 할 부분이구요.
    또한 한지환님께서 여태까지의 글에서 거듭 말씀하시는 '여성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권리와 혜택'이라는 것이 '남자는 밖에서 돈벌어오지 않느냐'류의 경제적 종속에 관한 이야기를 예로 드시는 것 같은데 '대부분의 가정에서 남성 수입을 가지고 여성들을 먹여살릴 수 있다'는 관념이 실제 사회에서도 적용되고 있는지에 대한 조사를 더 해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남성의 경제력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것이 과연 혜택일지에 대해서도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1. 한지환 2010/03/09 17:26 # M/D Permalink

      말씀하신 ‘남녀의 동등한 권리(혹은 의무)’는 성학의 전제가 아니라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성학 역시 ‘남녀의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기는 하지만, 문제는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에 대해 그들이 잘못된 해석을 내리고 있으며, 그로 인해 기존의 여성학 이론만으로는 우리 사회의 젠더 문제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 하에서 정당한 권리를 박탈당한 것은 비단 여성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벌써 여러 차례 지적한 줄로 압니다.
      그리고 “남성과 여성에 대한 착취의 방식과 정도가 같지 않다”는 말씀은 결국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 하에서의 여성 억압이 남성 억압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라는 뜻 아닙니까? 저를 비롯한 자유주의적 남성운동가들은 그러한 인식 자체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귀하께서 남성주의에 대해 더 공부하실 필요가 있다고 말씀드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가정에서 남성들의 수입을 가지고 여성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관념이 실제 사회에서도 적용되고 있느냐”고 물으셨는데, 결국 귀하께서도 여느 여성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맞벌이’를 거론하시는군요. 이것은 앞서「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에서 상세히 다룬 문제이며, 지난 2월 21일에 남긴 첫 번째 댓글에서도 지적한 내용입니다.
      「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에서 소개한 각종 통계자료와 언론보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 사회에서 남성 전업주부는 여전히 15만 명 남짓한 데에 반해, 전업주부로 일하는 여성은 600만 명이 훨씬 넘습니다. 설령 맞벌이 부부라 해도 여전히 남성의 생계 기여도가 여성의 그것보다 훨씬 더 높으며, 근로시간 역시 남성이 여성에 비해 눈에 띄게 긴 것이 현실입니다. 즉 맞벌이 가구라 할지라도 여성은 여전히 2차적 가족부양자 및 보조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흔히 ‘Gold Miss’라 불리는)조차 자신보다 높은 경제력과 지위를 갖춘 남성만을 배우자감으로 고려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지요.
      즉 남성의 ‘치사적 역할’과 이를 뒷받침하는 성별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있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맞벌이’를 내세우며 남성의 전통적인 경제적 책임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젠더 문제를 여성 편향적으로 해석한 결과일 뿐입니다. 이는 오늘날 남성도 돌봄 노동을 일정 정도 분담한다는 이유로 여성에게 가해지는 돌봄 노동의 부담을 부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리고 남성의 전통적인 책임과 관련해 여성에게 허락된 면책권과 이른바 ‘이성(異性)에 의해 보호받을 권리’를 권리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가사와 육아를 비롯한 돌봄 노동과 관련해 남성에게 허락된 면책권 역시 권리가 아니라는 주장도 가능할 것입니다. 여성의 전통적인 성역할이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가 여성에게 허락한 권리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최근 대두되고 있는 ‘돌봄의 권리’라는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지 L. 모스 박사의 지적처럼, 여성은 남성의 전통적인 책임에 얽매임 없이 자신들의 고정된 역할과 ‘어머니와 교육자’라는 확고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반면 남성은 자신의 능력과 적성에 관계없이 그러한 성역할을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는 남녀 모두에게 각자 정해진 성역할만을 강요하고 그에 따른 반대급부를 지급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바입니다. 남성에게 주어진 반대급부는 권리인 데에 반해, 여성의 그것은 권리로 간주할 수 없다는 식의 편파적인 주장은 결국 ‘절름발이 페미니즘’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 역시「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에서 자세히 설명한 내용이며, 제가 소개해드린 책의 저자들도 비중 있게 다룬 문제입니다. 시간 있으실 때 저의 글과 제가 소개해드린 책들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rlgl님. 저는 귀하께서 저의 글을 꼼꼼히 읽어보셨다고 생각하고 대화를 나누었던 것인데, 이제 보니 저의 글을 한 번도 훑어보지 않으신 것 같군요. 상대가 주장하려는 내용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어떻게 생산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먼저 저의 글을 찬찬히 읽어보신 뒤, 그래도 미진한 부분이나 하실 말씀이 있다면 또 댓글을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6. 2010/03/17 20:13 # M/D Reply Permalink

    한지환/
    당신은 지금 대화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당신은 이미 당신의 절대적 옳음을 정해놓았고 그걸 바꿀 생각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여기에 당신의 주장에 무릎을 꿇으라는거지요. 그래서 당신의 주장에 반박하는 rlgl에 대해 "당신은 내 글을 읽지 않았다"고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엔 두분 사이 논쟁의 문제는 '이해'의 문제가 아닙니다. 일단 한지환님은 페미니즘 이론의 전제 자체의 폐기를 요청하고 있는데 제가 보기에 그건 사회학적, 인류학적 무지에서 비롯된 억지에 불과하고, 도리어 '현실'에 대해 표피적으로만 환기시키며 자신의 주장을 동어반복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한지환씨는, 페미니즘 논쟁의 전제 자체에 대해 숙지를 하고와서, 진정한 형이상학적 논쟁의 장으로 오셔야, 논쟁을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여기서 확실히 필요한건 '현실'이니, '전통'이니 어쩌구하는 땡깡이 아니라, 이론적 논쟁이며, 이론적 논쟁에는 1차 텍스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전제되어있어야 합니다. 한지환씨는 지금 억지만 부리고 있으며, 도리어 저는 한지환씨가 마지막에 뱉은, "상대가 주장하려는 내용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어떻게 생산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라는 말을 한지환씨에게 묻고 싶군요. 남성으로서 한 말씀드리자면 한지환씨의 '남성주의'는 사회학적 논쟁 토대에서 전혀 발도 들여놓지 못한 땡깡에 가깝습니다. 차라리 쇼펜하우어적이고 유심론적인 마초이스트라고 주장하십시오! 그럼 대충 인정이라도 할텐데 말이죠. 논쟁의 기본적인 자세조차 되어있지 못해보입니다. 자유주의 남성주의라니. 순수사회학 이론가들조차 '남성주의'에 대해서는 토대조차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게 뭐 껍데기라도 있기라도 한다면, 이미 '남성주의'는 자유주의 안에도 포함되지 못함을 아셔야 할 것 같습니다. 고작해야 근세기적 전통주의이론에 엉덩이 붙일 수 있을까요? 그러나 만야 그렇다면 정말 재미없네요. 그게 바로 사람들이 이렇게 열성적인 한지환씨에게 댓글을 잘 달아주지 않는 이유입니다. 이론적으로도 전혀 위협적이지 않고 또 재미도 없으니까요.

    1. 한지환 2010/03/18 01:55 # M/D Permalink

      우선 쇼펜하우어적이라느니 마초(Macho)적이라느니 페미니즘 이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다느니 하는 말들은 터무니없는 중상이라 여기고 그냥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제가 쓴 글의 내용 가운데 어느 부분을 근거로 그런 결론을 내리신 것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그리고 ‘페미니즘 논쟁의 전제’를 운운하셨는데, 자유주의적 관점을 비롯한 남성주의의 여러 노선들은 페미니즘 이론의 그러한 전제 자체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기존의 페미니즘 이론으로는 젠더 문제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으며 이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설명을 드렸습니다. 현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이론을 내세우며 이를 덮어놓고 믿으라고 하는 것은 이른바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특히 우리 사회의 비주류라고 할 수 있는 힘없는 학생단체인 전국학생행진이 그런 오류를 범하는 것은 ‘누워서 침 뱉기’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경솔하고 어리석은 행동일 것입니다.

      또한 저의 주장은 비단 저 혼자만의 사견이 아닙니다. 제가 주장한 내용들은 이미 1960~70년대부터 서구의 수많은 남성학자와 남성운동가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한 내용들이며, 거기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제가 소개해드린 책들을 읽어보시면 알 수 있으실 것입니다. “순수사회학 이론가들조차 남성주의에 대해서는 토대조차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는데, 대체 어느 순수사회학 이론가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는 것인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물론 여성학과 여성운동에 비해 남성학과 남성운동이 상대적으로 후발주자인 것은 사실이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학문 내지 사회운동을 귀하 혼자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존재가 부인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귀하께서 남성학과 남성운동에 대해 얼마나 공부를 하셨다고 이런 식으로 함부로 말씀하시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이런 유치한 행동은 결국 귀하의 한계를 보여줄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셨으면 합니다.

  7. imperator 2010/03/29 11:04 # M/D Reply Permalink

    저는 한지환씨의 주장에 더 공감이 가는군요.
    대한민국 남성으로서 품어왔던 의문점들을 잘 파헤쳐주셨네요. 여성 입장에서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주장이구요.
    저도 주위에서 진보적이란 소릴 듣는 20대 민주당 지지자지만 이 문제에 대해선 학생행진과 회원들이 무리수를 두고 있단 생각이 듭니다.
    글 잘 읽고 갑니다.

연세대


* 연세대 3.8 여성의 날 실천단 기조

- 성폭력은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 일상의 변화로, 성폭력 없는 공동체를 만들자!

- 여대생의 이름으로, ‘일과 가사의 양립’ 퍼플잡 반대한다!

- 페미니즘으로, 대학을 다시금 움/직/이/자/!


* 실천단 계획


● 2월 마지막 주

- 2월 28일 실천단 초동주체모임(광장사업 준비, 자료집 기획, 실천단 첫 교양 기획을 논의합니다.)


3월 첫 주

- 실천단 자료집을 발간합니다.

- 3월 3일 저녁에 실천단 사전 교양을 진행하고, 광장사업 자보를 함께 만듭니다.

- 3월 4,5일 낮에 중도 앞에서 광장사업을 진행합니다.

- 3월 8일 102주년 여성의 날 문화제 참석합니다. 각 과/반에서 새내기학교 일정으로 넣어서 많은 새내기들과 함께 참여할 예정입니다. 여성의 날 장소에는, 광장사업 때 활용했던 자보들을 게시합니다.


3월 둘째 주

- 실천단 차원의 강연회를 진행합니다. (연사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 과/반에서 페민스쿨(여성주의 토크박스)을 진행합니다.








성균
관대




Posted by 행진

2010/02/20 22:47 2010/02/20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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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주년 3.8 세계 여성의 날에
함께하고 싶다면?


3.8 여성의 날까지 다양한 행사들이 예정되어 있지만 주요하게 함께할 수 있는 일정들을 소개하려 합니다. 이외의 일정들은 추후에 소개드리겠습니다!




3월 6일 (토)


"이명박정부의 여성 정책 반대!
여성의 권리로 여는 102주년 3.8 전국여성대회"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다양한 부스행사와 문화제가 진행됩니다!

-장소: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사전행사

돌봄노동자 희망대회_ 오후 1시

 : 여성의 재생산 노동을 강요하는 것에 더해 이를 시장화하고, 여성의 노동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드는 사회서비스 정책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모아냅시다! 돌봄노동자들이 겪는 차별과 문제들에 대해 생생한 증언을 듣고, 돌봄노동자들의 노동권을 보장하기 위한 실천을 모아낼 수 있도록 합니다. 또한 여성에게 가해지는 돌봄노동의 부담을 사회화 할 수 있는 요구들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돌봄노동자 희망대회'에 함께합시다!


부스행사 _  오후 1시 부터 쭉~

 : ‘퍼플잡이 아닌 안정된 일자리에서 일할 권리를!(가)’ 퍼플잡 반대 선언운동을 비롯해서 기념품과 자료집을 판매합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부스행사가 준비됩니다!


기자회견 _ 오후 2시 30분
"출산강요반대! 퍼플잡 반대! 여성에게 일과 가정의 양립을 강요하는
이명박 정권 규탄! 대학생기자회견"이 진행됩니다!




102주년 3.8 세계여성의 날 전국여성대회_ 오후 3시


지난해 이명박 정부는 “일자리 창출 및 여성들의 경력 단절 예방”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퍼플잡'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여성에게 일과 가정을 양립할 것을 강요함과 동시에 노동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드는 정책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또한 저출산 해결을 명목으로 여성들의 출산을 통제하려는 정권의 태도는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를 박탈하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저출산 문제의 원인은 출산과 양육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해왔기 때문임을 밝혀야 합니다. 이제 여성들이 출혈적으로 수행해오던 재생산 노동에 가치를 부여하고, 이것을 사회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구조를 고민해야함을 이야기 합시다. 많은 시민들과 함께 다양한 공연을 보면서 여성들의 노동의 권리와 재생산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즐거운 실천을 만들어 갑시다!


*여성대회 주요요구*

- 여성 노동유/연화 강화시키는 유연근무제ㆍ여성해고반대!
   여성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일자리 확충!

- 사회서비스 시장화 저지! 돌봄노동의 사회적 책임 강화!

- 4대강 예산 반대! 축소된 민생 복지 예산 확보 및 강화!

- 낙태단속강화 반대! 출산 강요 반대! 여성의 몸에 대한 자기결정권 쟁취!

- 보육ㆍ교육 공공성 강화!

- 생산의 주체, 여성농민의 권리는 식량주권 보장으로!

- 장애여성, 이주여성, 성소수자, HIV-AIDS 감염인의 노동권 보장!

-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 2010 지방선거, 여성의 권리 실현하는 여성정치 세력화!




3월 8일 (월)


102주년 3.8 여성의날 문화제
_ 오후 6시






Posted by 행진

2010/02/20 20:01 2010/02/20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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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35호 _ 발간사


「글로벌 경제 위기와 대책 없는 다보스포럼」


최근 ‘글로벌 백수’가 2억 명을 돌파했다고 합니다. 1991년 통계를 시작한 이래로 최악의 수치라고 하던데, 동유럽이나 중남미 말고도 특히 서유럽/미국/일본 같은 ‘선진’국가들에서 매우 심각한 상황이라네요.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모든 나라들에서 기업들이 더 많은 이윤을 획득하고 국가의 경제성장률이 올라가도 안정된 직장은 늘어나기는커녕 오히려 줄어들고 있습니다. ‘고용 없는 성장’은 이제 중심부, 주변부를 가리지 않고 지구촌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는 글로벌한 현상이 되었지요.

한 달 전에 열린 세계경제포럼(WEF : World Economic Forum)에서 이명박 대통령도 ‘일자리는 전 지구적인 문제’라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세계 경제의 질서를 수립하는 사람들에게도 일자리와 빈곤의 문제가 중대한 사안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모인 이들이 지구촌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거론할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전 지구적인 실업과 빈곤의 문제는 당사자들의 스펙이나 게으름 탓으로 돌릴 수 없습니다. 이는 개인을 벗어나는 사회 구조의 문제고, 세계 어디에나 통용되는 절대 권력인‘자본’의 문제니까요. WEF와 G20은 그런 자본이 별다른 규제 없이 지구를 돌아다니며 이윤을 획득할 수 있도록 지켜준 수호자들입니다. 지금은 뻔뻔하게도 금융 개혁이나 일자리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들이 제시하는 ‘방안’들은 자본의 위기를 은폐하고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시킬 뿐입니다.

이제, 세계 경제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이들이 결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집시다. 자본의 세계화를 유지하고 강화할 뿐인 WEF와 G20의 방안은 지금의 문제를 더욱 심화할 것이라는 걸 이야기해야 합니다. 뉴스레터 35호가 야만에 맞서서 진정한 대안을 모색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Posted by 행진

2010/02/16 20:51 2010/02/16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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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_후기] 2010 전국대학생대회

  지난 2월 9, 10일 이틀에 걸쳐 중앙대학교에서 "전국대학생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교육투쟁, 정세전망, 대중운동사례발표, 새내기마당, 페민스쿨, 문예마당 등 총 6개의 다채로운 주제로 열린 이번 대학생대회에 전국에서 수백명의 대학생들로 강의실은 발디딜 틈이 없었답니다.^^ 참가자들이 각 주제 별로 참가 후기를 보내주셨으니 그 뜨거웠던 토론의 현장을 직접 느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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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마다 학기 초가 되면 등록금 투쟁으로 온 학교가 떠들썩하지요. 물론 등록금 문제는 이 땅의 서민들을 힘들게 하는 교육비에 대한 문제제기로 의미가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공약도 한 만큼, 살인적으로 치솟는 등록금 문제를 정부가 가장 앞장서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공감해요.
  하지만 대학을 둘러싼 사회의 변화는 단지 등록금만을 문제로 만드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다니는 중앙대만 하더라도 경쟁력 없는 학과를 퇴출시키고 오로지 우리 사회에서 '돈이 될' 것 같은 학문 만을 육성시키는 대학 구조조정이 진행 중이거든요.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하기 위해 열심히 학교를 다닌 것 뿐인데, 학교는 경쟁력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멀쩡한 학과를 없애버리고 있습니다. 너무 억울하다고 이야기하는 학우들을 곁에서 지켜보며 저도 마음 한구석이 편하지 않았지만, 그런 제 마음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서 뭐가 잘못 되었는지 잘 깨닫고 있진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번 대학생대회 교육투쟁마당에 함께 하면서 제가 평소에 고민하면서 답답했던 부분이 뻥~ 뚫린 것 같았어요. 학교 측의 일방적인 행정 때문에 분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대학이 어떤 역할을 요구받고, 또 교육을 어떻게 상품화하는지 보다 체계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달까?^^; 그래서인지 이제는 다른 학우들에게 대학 구조조정을 이야기할 때, '이래저래서 우리가 하는 일이 정당한거야'라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등록금 문제를 넘어서서 모든 사람들에게 '교육'이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하는지 새로운 고민이 들기도 했구요. 이번에 배운 걸 바탕으로 올 한해 중앙대 대학 구조조정 반드시 막아낼거예요~!!!




  올해도 들뜬 마음으로 전국대학생대회에 전일참가 했습니다! 작년, 그러니까 2009년 전국대학생대회에서 얻었던 ‘아, 대중운동은 이렇게 하는 거구나!’ 라는 느낌, 제가 활동하고 있는 공간에서 사업계획을 짤 때 09년 자료집을 뒤적뒤적거리며 마스터플랜을 짜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나면서 올해도 역시 부푼 기대를 안고 달려갔습니다!

  전국대학생대회가 진행되는 이틀 동안 날씨는 흐리고 비가 왔었고, 중앙대학교는 학과 구조조정 때문에 학내 곳곳에 플랑이 나붙어있었습니다. 2010년의 시작이 이만큼 어둡고 답답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메인마당인 정세토론에서 나왔던 자세한 설명들을 통해 저의 이러한 느낌을 비교적 잘 정리해 볼 수 있었습니다. 6월 지방선거가 다가오는데... 지겹게 들었던 “그래 알았다. 그래서 투표할거야? 안 할 거야?”라는 질문. 바로 그 지점에서 ‘운동’의 프레임을 확장할 수 있는 의회주의에 대한 시각이 가장 와 닿았습니다. 시민운동에 관한 이야기는 다소 어려웠지만, 그곳에서 오갔던 어떤 거대한 이야기들은 사실 바로 ‘내가 몸담은 학생사회, 즉 과/학회/동아리에서부터 친구들과 함께 학습하고 토론하며 정치를 복원해나가자!’는 것이었고,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뿌리 깊은 질문에 어느 정도 답해줄 수 있었습니다.



  대중운동 사례발표에서 나왔던 조건과 상황이 각각 다른 3개 대학의 사례들을 보는 것이 현재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내용을 정리해보는 것은 필연적인 것 같습니다. 09년 각 캠에서의 대중운동들을 통해서 과거의 문제의식과 실천들을 돌아보며 현재의 상황에 맞는, 그리고 과거의 편향성을 경계하면서 만들어져가야 할 새로운 운동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또한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서 모범적이고 긍정적인 사례들을 단순히 되풀이하거나 반복하는 것이 대중운동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는 전제하에 각 사례들에 대한 명확한 진단과 전망들을 도출해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각 3학교의 대중운동 사례 모두 중요하지만 특히 눈여겨보았던 것은 성균관대의 사업이었습니다. 이는 대구대 캠의 사회과학대학과 비슷한 상황이라는 동질감이기도 했지만, 박제화되고 침체되고, 형식적인 ‘학술제’에 대한 실망과 함께 훌륭한 자극이 되었습니다. 팀을 구성하고 단 학회 단위별로 제안하고 충분한 참여를 이끌어 낸 것 또한 대구대 캠의 흐름을 만들어 내는 좋은 롤모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후 학내에서의 교육투쟁, 페미니즘, 대학사회라는 의제를 기반으로 한 사업들을 통해서 경제위기의 원인에 대한 진단, 학내 반성폭력 운동의 동의지반, 자유주의적 각 개편들에 대해서 대중들과 소통되고 함께 기획될 수 있는 장을 만들어내는데 있어 여러 가지 가능성등을 모색할 수 있는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연세대 문과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진영이라고 합니다! ^-^
지난 9,10일 처음으로 전국대학생대회에 참여했습니다. 많은 것을 배워가고 싶다는 생각에 무척 설레는 마음으로 왔지만, 아직 많이 부족한 저에게 첫날 2010 교육투쟁과 정세토론은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제 2학년으로 올라가는 만큼 단순히 자신에게 주어진 내용을 학습하는 것뿐만 아니라 본격적으로 대중운동 실력을 쌓고 활동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대중운동실력쌓기 텀을 기대하며 두근두근했습니다. 페민스쿨과 문예마당도 정말 참여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ㅠㅠ; 한 가지밖에 택할 수 없기에 2학년이 되는 활동가들에게 가장 필요할 것 같은 <새내기를 맞이하는 2010가지 방법>에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학내에서 속해 있는 단위들에서 새내기맞이 준비를 한창 하고 있는 중이기는 하지만, '활동가'로서 새내기를 맞이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 제게 2010가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새내기맞이에 대해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 주는 시간이었습니다.

  사실 막연히 '밥 좀 사주고 같이 놀아주고 예뻐해 주다보면 어떻게든 되려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새내기맞이의 A부터 Z까지 시기별로 정~말 상세히 설명해 놓은 자료집과 발제를 통해 비로소 방향이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써있는 대로만 하면 진짜 잘 될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노력도 정말 많이 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
  발제 후 자유롭게 생각을 발언하는 시간에서는, 전국에서 온 동지들의 수많은 고민과 상황 공유가 이뤄졌습니다. 각자 자신이 속한 단위에서 겪은 어려움, 느꼈던 희망, 앞으로의 계획을 함께 나눴습니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고민에 어느 정도 해답을 얻어 가고, 앞으로의 활동의 비전을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양한 사례를 들을 수 있어서 과/반/동아리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 노력하는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조금은 딱딱했던 공통마당, 메인마당에 비해 좀더) 소박하게 서로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중간에 논의가 산으로 가버린 아까운 시간을 보냈던 대중운동 사례 발표 시간의 아쉬움도 풀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새내기를 맞이하는 2010가지 방법>을 통해 많은 것을 얻긴 했지만, 그래도 새내기들을 맞이하는 일은 분명 무척 험난한 길일 거란 생각이 드네요. 많이 부딪히고 속상한 일도 많이 겪겠지만, 올 한 해 정말 열심히 살아가려 합니다. 2007년에는 연세대에서 자기 혼자서만 반 신자유주의 선봉대에 전참했는데 2년 만에 이렇게 많은 동지들이 함께 하고 있는 걸 보라고, 너도 더 많은 사람과 함께 할 수 있게 노력해 나가라고 말했던 같은 캠 선배의 말이 자주 생각나는 요즘입니다. 점점 사람들이 떠나고 약해지고 있는 기층단위들을 다시 세우려고 매일 바쁘게 살아가는 삶에서 크게 보람을 느끼고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역시 걱정보다도 토끼 같은 새내기들을 만날(♡), 그리고 이제 정말로 선배가 될 기대와 설렘이 훨씬 큰 것 같습니다:) 함께 하는 모든 동지들과 함께, 힘차게 달려가는 2010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09년에 처음 새내기를 만나면서, 제일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 페미니즘이었습니다. 새내기들 3명이 모두 재수생 남자아이들이었고, 덕분에 동아리 구성원들은 전체적으로 비상이 걸렸었습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 당시 페미니즘을 09학번들에게 어떻게든 '각인'시키려는 노력은 너무 강압적으로 진행되었고, 덕분에 새내기들은 페미니즘에 대한 필요성은 알겠어도 페미니즘을 삶으로서 접하기보다는 너무 어렵고 까다로운 것으로 기억하게 된 듯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번 페민스쿨은 '미리 접했더라면...'하고 생각할 만큼, 잘 짜여져 있었습니다. 09년도에 저의 페미니즘은 <'사적인 페미니즘'='일상' Vs. '공적인 페미니즘'='연대와 학습'>라는 부당한 대립각 속에서 많은 질곡을 겪곤 했습니다. 이번 페민스쿨은 그 대립각을 적절히 깨는 내용으로 이루어져있었습니다.

  그 동안 페미니즘과 관련된 기획이 '세미나'나 '회의'에서 그치고, 일상에서의 '이야기'로 보충되어왔던 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페민스쿨은 일상의 것을 어떻게 공론화하여 개인에 대한 지탄이 아닌 전체 공동체가 같이 사고해야 할 고민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다양한 방법에 대하여 적절한 예시를 보여주었습니다. 가족과 노동의 경우, 어렵다고 판단되어질 수도 있겠지만, '변혁의 무기로서의 페미니즘'으로 여타 페미니즘의 의제들을 포괄하며 활동에 대한 의욕이 있는 새내기들에게는 다른 부분보다 더 쉽게 페미니즘을 접하게 되는 출발점이 됩니다. 특히 제가 만난 남자 새내기들의 경우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을 가족과 노동을 통해 확장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연애' 와 관련된 부분은 특히 신선하게 다가왔는데, 현재의 공동체가 암묵적으로 규정하는 공동체 내 연애에 대한 '금지'나 '두려움'이 아니라, 어떻게 포괄적인 페미니즘적 인식 속에서 어떻게 대안적인 연애를 만들어가는 공동체가 될 지에 대한 기획들을 제안하는 글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페민스쿨은 다양한 기획과 논의를 제안함으로써 새내기를 페미니즘으로 만나는 것이 어렵고 까다로운 일이 아니라 즐겁고 기대되는 일로 만들어주었던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좀 더 활기차게 페미니즘을 활동 속에 녹여내서, 내년에 페미니즘을 즐겁게 사고하는 새로운 새내기들과 함께 페민스쿨에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10 대학생 대회의 대중운동 실력 기르기 마당은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새내기를 맞이하는 방법, 페민스쿨, 그리고 문화제 기획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캠에서 문화제의 기억이 많지가 않았고, 그것을 기획하는 것에는 어떤 과정들이 필요하며, 어떤 아이디어들을 펼칠 수 있을지 궁금해서 문화제 마당에 갔었습니다. 새내기 마당이나 페민스쿨에 비해서 사람은 적었지만, 소수 정예로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발제를 듣고, 모여서 나름의 기획 회의들도 했었답니다.
  왜 문화운동만이 아니고, 문화와 예술이 같이 들어가 있는 문화예술운동인지에 대한 내용부터 문화제 기획의 실제와 예시가 결합된 것을 보면서, 어떤 생각으로 계획을 내야 하는지 살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서로가 겪었던 문화제의 기억들을 공유도 해보고, 좋았던 기억들뿐만 아니라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야기해보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마지막에는 실제로 문화제 마당에 있는 우리가 기획해보는 기회도 만들었었는데, 20~30분에 모든 계획을 다 하려고 하니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고, 무엇부터 해야 할지 머리가 하얗게 되기도 했었습니다. 3.8 문화제, 해오름제, OO인의 밤 등등 여러 문화제 소스들이 있었고, 그 중에서 하나씩 택하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서로 모여서 기획 의도, 목적, 마스터플랜, 심지어는 문화제 외의 사업들(문화제의 기억들을 모을 수 있는 것)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번 마당을 겪으면서 배우고 생각했던 것은 문화제 기획은 거창하지 않고, 기본적인 부분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진행하는 사업들을 하는데 앞서 가장 먼저 하는 목적을 세우는 것, 의도는 무엇인지 고민하는 부분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겁니다. 문화제 기획을 통해서 문화예술운동이란 무엇이며, 문화제를 통해서 많은 건강한 기억들을 남기는 데에 자신감이 붙은 것 같아서, 대학생 대회 시작할 때 많은 무기들을 만들어 가자는 이야기 중 어느 정도는 달성했다고 봅니다. 모두 그 날 배우고 느꼈던 것으로 대중운동의 바다에 뛰어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행진

2010/02/16 19:32 2010/02/16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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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더 나은 세계’인가?
 : 다보스포럼을 통해 본 세계경제




1. 들어가며 : 다보스포럼과 이명박은 세계 경제를 구원해줄 수 있을까?


 얼마 전 스위스 다보스에서 세계경제포럼이 열리는 기간 동안 [한국 대통령이 다보스서 제일 먼저 연설한 이유], [‘자유시장주의 철옹성’ 다보스 무너지다!] 등의 세계경제와 다보스포럼에 관련된 기사들이 연일 신문들에 주요하게 다뤄지며 보도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다보스에서의 이명박 대통령의 행보를 다룬 인터넷 포털 싸이트 기사들 아래에는 어김없이 네티즌들의 비난 리플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어이없게 다보스포럼에 이명박 대통령이 자신의 큰딸과 손녀를 데리고 갔다더라’ ‘한국에서처럼 국정수행을 졸속적으로 처리하고 왔다더라’ ‘국제무대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외모가 부끄럽다’는 등의 내용들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번 사안에 관련된 기사들에 대한 반응은 기존의 이명박 대통령과 관련된 다른 기사들에 대한 반응과는 확연하게 다른 지점들이 있었다. 가장 많이 찬성을 받은 리플은 대체로 ‘세계경제위기의 심각함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한국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그런 중요함도 모르면서 그저 이명박 대통령을 비난하는 무지한 네티즌들을 나무라는 식이었다. 물론 누구나 인지하듯 현재 세계경제는 정말로 위기이지만, (비록 비난의 내용이 올바르지는 않았다하더라도)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불만과 그로 인한 비난은 잘못된 것이었을까? 그리고 이명박 정부와 다보스포럼의 각국 정부들은 정말 세계 경제를 구원하려는 것일까? 경제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세계정상들은 수많은 노동자 서민들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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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에 들어가기에 앞서 결론부터 밝히자면, 2010년 다보스포럼에서 다뤄진 방향으로는 세계경제의 위기를 극복할 가능성이 무척 낮다는 것이고, 설령 극복이 가능하더라도 상층부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수많은 사람들이 경제위기 극복 시도 속에서 희생양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 글은 다보스포럼에 이어, 11월 서울 G20 회의에서도 다뤄질 (한국을 비롯한) 세계정상국가들의 위기극복전략이 어떠한 것인지 알아보고, 그것을 적확하게 비판하기 위해서 쓰였다. 아무쪼록 이 글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 정부와 다보스포럼, 그리고 앞으로 G20 등에서 다뤄지는 ‘그들만을 위한’ 경제위기극복전략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공유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리고 그를 기반으로 앞으로 더 많은 이들과 함께 ‘대안’을 토론하고 이야기해나갈 수 있었으면 한다.




2. 2010년 다보스포럼에서의 ‘금융규제 논의’와 ‘이명박 대통령의 특별 연설’


2.1. 2010 세계경제포럼의 가장 큰 화두 : 금융규제

 얼마 전, 1월 27일부터 31일까지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은 ‘더 나은 세계: 다시 생각하고, 다시 디자인하고, 다시 건설하자’라는 슬로건 하에서 진행되었다. 학계․정계․재계의 유명인사들 2500여명이 참가한 올 해 ‘다보스포럼’의 핵심의제는 금융규제방안이었다. 특히 정치권 인사들을 중심으로 금융규제에 대한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개막연설에서 “은행가의 할 일은 투기가 아닌 기업대출로 경제성장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하는 것”이라며 “금융업계가 과도한 이윤 추구와 보너스를 지급하는 것에 대해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국제 금융 시스템을 개편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특별연설을 해서 이슈가 되었던 이명박 대통령도 금융기관들의 대마불사(바둑에서 대마는 결국은 살길이 생겨 쉽게 죽지 않는 일, 부실한 금융기관들이 인수합병을 진행하며 규모를 키워 살아남게 되는 일)에 대한 비판과 함께 글로벌 금융안전망을 구축해야 함을 이야기했다. 정치권 인사들뿐 아니라 금융계에서 엄청난 부를 쌓은 소로스 회장(소로스 펀드 매니지먼트)도 금융계를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며, “구체제는 깨졌다. 국제공조를 할 수 있는 글로벌 금융 시스템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금융위기를 사전에 예측해서 유명세를 탔던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도 “금융기관들의 이른바 대마불사 신화는 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과거 다보스포럼에 참석해서 크게 주목을 받아왔던 미국계 초국적 금융기업의 수장들은 대부분 다보스에 아예 오지도 않았다.

 반면 영국 금융기관 로이즈 로드 레빈 회장은 “금융규제 개선은 필요하지만 더 이상 규제는 안 된다”며 금융기관의 입장을 표명했다. 영국 바클레이스 은행장인 로버트 다이아몬드 역시 “은행을 규제하고 은행 업무를 축소하는 것이 글로벌 금융 시스템을 개선시킬 수 있다는 근거는 찾아볼 수 없다”며 금융규제 강화 의견에 반대했다. 구체적인 성과는 없었다. 비공개로 이루어진 회담에서도 새로 만들어질 규제가 전 세계적으로 균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원칙만 확인했을 뿐이다. 그 외에 주제에는 선진국과 개도국의 균형 발전,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줄기차게 이야기했던 아이티 재건을 지원하는 사안, 전 세계적인 실업률 상승, 경기회복 둔화 등이 다루어졌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가장 큰 화두는 금융규제에 대한 발언들과 그에 반발한 금융기관의 입장들의 충돌로 볼 수 있다. 다보스포럼에 참가는 하지 않았지만 오바마 미국 대통령 또한 얼마 전 강력한 은행 규제책을 시사하며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분리를 해야 한다고 발언했고 실제로 정책적으로 옮기려고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2010년 세계경제에서 앞으로 가장 큰 화두는 금융규제에 대한 논의가 될 것으로 보인다.


2.2. 다보스포럼에서 이명박의 단독특별연설 : G20과 글로벌 금융안전망 구축

 아시아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올해 11월 G20 정상회의 의장을 맡게 된 이명박은 ‘서울 G20 정상회의, 주요 과제와 도전’이란 제목의 연설을 통해 서울 G20 정상회의의 3대 기본방향을 제시했다. 그와 동시에 일명 조중동을 비롯해서 수많은 일간지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스위스에서 한국의 국위선양을 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에 알려내느라 분주했다. 언론들은 한국이 아시아 최초의 G20의장국이 되었기에 한국 대통령 최초의 다보스포럼 단독특별연설이 가능했다는 것 등을 부각해서 보도하며, G20과 함께 세계적으로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다며 자축했다. (모 경제신문에서 말했듯) 이제 정말 한국은 아시아의 맹주에 올라갈 수 있을 만큼 급이 올라간 국가가 된 것일까? 일단 이명박 대통령이 행한 특별 연설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연설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1. 지난 세 차례 G20 정상회의에서 합의한 사항의 철저한 이행 2. 글로벌 금융안전망(GFSN) 구축 3. 비회원국을 대상으로 한 G20 범위 확장이 그 내용이다.



앞으로
G20 합의사항을 철저히 이행하겠다는 것은 G20에서 단순히 논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세계경제에 대한 강력한 법칙을 만들어내는 곳으로 G20의 위상을 위치 짓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기존 G8 정상회의로는 금융위기에 대한 극복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아시아 및 신흥개도국을 포함해서 세계경제를 이끌어갈 주요한 테이블로서 G20 정상회의를 사고하게 된 현실을 나타내준다. 그러므로 앞으로 G20에서 논의되는 내용들은 G20에 포함 되는 국가를 넘어 실제로 전 세계 경제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고, 이는 앞으로 G20의 논의가 세계의 수많은 노동자 서민들의 삶에도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비회원국을 대상으로 한 G20 범위 확장을 시도하겠다는 것도 실제로 G20에서 논의되는 내용들이 세계경제에 가지는 큰 파급효과를 고려해보았을 때 (비회원국에 대한 포섭과 함께)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 글로벌 금융안전망 구축은 08년 금융위기 이후 상시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된 세계금융시장에 안전망을 만들겠다는 것인데, 이는 얼마 전 오바마 대통령의 강력한 은행규제책에 대한 발언과 비슷한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그러나 국가를 넘어 고도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세계금융시장에서 안전망 구축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실현가능성은 차치하더라도) 금융위기극복을 위해서 미국의 루비니와 같은 경제학자들은 은행들의 겸업화를 일정부분 해체하고 국유화하자는 방향을 냈으나, 오바마 정부에서 현재 실행하고 있는 방향은 앞의 방향에도 미달한다. 현재 오바마 행정부의 개혁 방안은 위기를 불러온 금융자본의 지배구조 자체에 대한 변화가 아니라, 위기에 처한 금융자본에 대한 지원책에 불과하다는 평이다.1) 앞으로 이러한 오바마 정부의 개혁방안에 대해서 더 주시해보아야겠지만,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를 비롯해서 한국의 이명박 정부 등이 G20 정상회의에서 제기 할 글로벌 금융안전망 구축은 자본주의 경제의 총체적인 위기 속에서 그리 큰 효과를 내지 못할 것으로 예측된다. 분명 G20이라는 세계경제를 움직이게 될 큰 배에 이명박 정부가 타게 된 것은 맞지만, 문제는 그 배가 대체 어떤 배냐는 것이다. 과연 이 배가 서서히 침몰하고 있는 배인지, 아니면 앞으로 잘 나아가게 될 배인지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3. 현재 세계 경제는 어떠한 상황인가?


 다보스포럼에 모인 이들은 대체로 세계경제위기에 대해 ‘느린 회복’을 전망했다. 그러나 헤게모니 국가인 미국의 경제회복은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다. 작년 한 해 동안 집중적으로 경기부양책을 편 효과로 미약하나마 회복세를 보이고 있지만, 여기에는 여러 부정적인 변수들이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쌍둥이 적자의 문제가 있다. 동아시아 수출달러 환류-발권이익 메커니즘2)을 통해 소비와 투자를 늘릴 수 있었던 미국은 과도한 부채에 시달리면서 수입을 줄이고 있는데, 미국 이외의 국가들의 경제는 미국보다 더 나빠져 대외수출 역시 줄어들고 있다. 최근 정부지출이 늘어나면서 재정적자 역시 심각한 상황이다. 경기부양책이 경제성장률에 미치는 효과가 감소하는 2010년 후반이 특히 위험할 것이다. 미국 연준은 올해 경제가 완만하게 성장할 것이라 했고, IMF는 더블딥의 위험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폴 크루그먼과 같은 경제학자들도 더블딥 위험이 결코 작지 않다고 경고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 이유로 신규 일자리 창출이 늦춰지면서 소비가 약화되는 점, 신용경색으로 여전히 자본 투자가 많지 않은 점, 과도한 재정적자에 따른 경기부양책 지속 여부 불투명 등을 꼽았다. 작년 금융위기의 여파는 아직 가시지 않았다. 결국 경제가 V자형태로 신속하고 활발하게 회복될 가능성은 별로 없고, U자형(느린 회복), L자형(장기침체), W자형(더블딥) 중의 하나이거나 이들의 조합이 될 것이다. 최근 주택담보 대출금을 갚지 못하는 사태가 늘고 있고, 우량 담보대출의 경우에도 제때 상환하지 못해 집을 압류당한 비율이 지난 3분기에 무려 10%에 달하고 있다. 여기에 역사상 최악의 실업사태까지 겹쳐지면서 장기침체에 가까운 느린 회복과정을 밟을 것이다. 기업이윤이 획기적으로 증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러한 불안요인들이 겹쳐지고, 기업과 금융기관들의 추가부실까지 더해지면, 2차 금융위기가 도래하고 이것이 더블딥으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 현재 대형은행 부실 이후 중소규모 은행의 부도가 이어지고 있고, 미 연방예금보험공사가 문제은행으로 지목하고 있는 은행만도 500개 이상으로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3) 물론 단기간 안에 더블딥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겸업은행체제(상업은행+투자은행)의 성행, 정보기술산업과 최근 주목받고 있는 녹색산업에서, 또 주택시장에서 거품이 형성되고 붕괴될 경우 결코 만만치 않은 경제위기로 돌아올 것임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이러한 전 세계적인 불안은 얼마 전 그리스에서 발발한 정부 재정위기가 글로벌 더블딥의 기폭제로 작용할 수 있다는 예상들이 제출되며 더욱 증폭되고 있다. 그리스를 비롯한 스페인, 이탈리아 등 일부 유로존 국가의 재정악화 문제는 심각한 상황인데, 재정적자뿐 아니라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에 허덕이는 이들 국가의 국채를 가장 많이 보유한 것이 프랑스 독일 등 유로 지역 선진국 금융회사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 등이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선언하면 유럽 지역 은행들까지도 동반 부실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유럽 전역을 공포에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이는 금융위기 및 경기침체에 대응하기 위한 재정 지출 확대와 경기침체로 인한 조세 수입 감소 등으로 09년 이후 유럽 각국의 재정수지가 급격히 악화되었을 때 이미 점쳐진 현상으로 전 세계 경제 상황에 엄존하는 불안요소를 방증한다.

 세계 경제의 침체와 동요는 전반적인 현상이지만 아시아와 남미 등 신흥국에서는 지난 금융위기로 인한 타격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고, 이후에 경기하강속도가 완화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G20 정상회담이 프리미어 포럼(가장 중요한 논의의 장)으로 격상된 것 역시 세계경제에서 신흥국이 차지하는 위치가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로 세계경제를 위기에서 구원할 ‘동력’이 될 수 있을까? 초민족적 투기자본의 대규모 이동이 아무런 규제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현재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신흥국들의 경제 역시 언제 어떻게 무너질지 알 수 없다.4) ‘해외투자’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가려진 ‘투기자본’이 더욱 활개를 치게 되면 기업에 대한 인수합병, 구조조정을 일삼다가, 이윤이 더 이상 나지 않으면 내다버리는 일이 반복될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 노동자들의 권리는 위기관리라는 명분하에 가장 먼저 양보되어야 하는 것으로 취급받을 것이며 이 같은 방식은 금융화 시대가 요구하는 가장 일반적인 경향이 될 것이다. 이번 다보스포럼에서 논의되었던 사안 중 하나가 바로 휴먼 리세션인데, 무고용 경기 회복과 청년실업에 대한 것을 말한다. 당장 미국에서는 25세~54세 미국인 중 5분의 1이 실업 상태이고, 유럽 또한 청년실업이 심각하다. 단적으로 스페인은 14세~25세 인구 중에 42%가 일자리가 없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실업자가 400만 명에 육박하게 되었다. 그러나 금융화 시대의 이러한 일반적 경향을 제어할 해결방안을 다보스포럼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4. 나가며 : 이제 공은 서울 G20회의로 넘어왔다!


 이번에 다보스포럼에서 논의한 내용은 포럼이라는 특성 상 실제로 전 세계 국가에 어떠한 정책적 강제 등으로 작용할 수는 없는 듯하다. 그러나 이명박 한국 대통령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다보스에서의 연설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제 이를 실물화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테이블은 바로 앞으로 6월(캐나다)과 11월(한국)에 열릴 G20 정상회의이다. 이는 G20에서의 논의가 향후 세계 경제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수행할 것을 이미 각 국의 지배자들은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들은 위기 극복을 위해서라면 고용 없는 경제 성장과 더불어 수많은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임금을 삭감하고, 노동조건을 악화시키는 것을 별로 개의치 않고 자행해갈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말하는 경제위기 극복은 수많은 노동자 서민들을 위한 ‘더 나은 세계’가 아니라, G20에 속하는 각 국가의 지배자들과 소수 투기금융자본, 그리고 그 수혜를 받는 자들만을 위한 ‘더 나은 세계’임이 분명하다.

 수많은 노동자 서민들이 G20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중요한 테이블, 혹은 나와는 상관없는 세계 각 국의 대통령들만의 테이블 정도로만 바라보고 있는 지금,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가 중요한 시기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분초를 다퉈가며 다보스 포럼에서 열심히 한국의 국위선양을 하고 있다며 많은 보수신문들에서는 극찬을 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명박은 졸속 국정수행이 아니라, 한국의 지배세력을 위해 더 나은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싸움을 분초를 다퉈가며 살아가고 있다. 서울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가 앞으로 9개 월 가량 남은 지금, 지금이야말로 우리들은 당장 다보스포럼과 G20 정상회의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비판적인 지식을 습득하고, 주위의 더 많은 사람들과 이 사실들을 공유해야하지 않을까.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는 그들만을 위한 ‘더 나은 세계’보다는, 노동자 서민들과 함께 더 많은 이들을 위한 ‘다른 세계’를 만들어가자고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Posted by 행진

2010/02/14 21:43 2010/02/14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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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없는 자본이 정말 우리의
‘삶’을 발전시켜 줄 수 있을까?

- 초민족적 외국투기자본의 노동권 파괴


들어가며


 요즘 한국에서 외국기업의 이름을 듣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 외국에서 한국 기업의 이름을 보는 일도 이제는 흔한 일이 되었다. 그만큼 요즘 기업들과 자본들에게는 국적이 없다. 국경과 지역을 넘나들면서 전 세계에서 자유롭게 기업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의 정부들은 외국 기업이 자유롭게 전 세계에서 기업 활동을 하는 것, 특히 자국에 들어와 투자활동을 벌이는 것을 매우 반갑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경제의 발전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로 우리의 ‘삶’을 발전시켜주었는지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배층들이 만들어놓은 신자유주의 질서 속에서 기업들은 세계 곳곳에서 이윤을 뽑아내지만, 그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처지는 참담하다. 이윤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장이 폐쇄되면서 일자리를 잃고, 기술만 쏙 빼내가고 아무런 투자도 하지 않는 기업 때문에 한꺼번에 몇 천 명이 해고당하기도 하며, 주식시장에서 기업 가치를 올리기 위해 생산비용을 절감하려는 기업주 때문에 임금이 삭감되기도 한다.

이렇게 초민족적인 투기자본들, 그리고 그 기업들이 전 세계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해주는 지금의 체제와 환경은 기업의 주인들과 ‘가진 자’들에게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대다수 노동자들에게는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 노동자들의 삶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왜 그런 일이 생기게 되었고, 여기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어떻게 되어야 할지 고민해보도록 하자.





노동자들이 LA, 파리로 간 이유


 지난 1월 세계 최대 악기박람회인 남쇼(NAMM SHOW)가 열리는 미국 애너하임 컨벤션센터 앞마당에는 전단지를 돌리며 메마른 ‘투쟁가’를 토해내는 콜트악기와 콜텍 노동자들이 있었다. “노동자가 없으면 음악이 없고, 음악이 없으면 삶도 없다!”가 장단 맞춰 쇳소리로 터져 나온다. 인간의 본능을 처절하게 대변하는 음악들이다. 이 노동자들의 일터는 실상 2007년(콜텍 대전 공장)과 2008년(콜트 경기 부평 공장)에 문을 닫았다. 실직자들이 이역만리를 가는 까닭엔, 12시간 비행 거리만큼이나 긴 설명이 필요하다.

1970년대 세워진 콜트 악기와 자회사 콜텍은 세계 기타 생산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거대했지만, 2006년에 당기순손실을 입는다. 흑자경영 10년만이다. 2007~2008년 사이 국내 공장도 모두 문을 닫는다. 당시 콜트악기 쪽은 “경영적자와 노사 갈등 때문에 폐업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지만, 이에 대해 ‘위장폐업’이 아니냐는 사회적 여론이 거세다. 중앙노동위원회가 해고가 부당하다고 2008년 결정하고 2009년 법원 판결도 쏟아진다. 콜트의 해고 무효 확인 행정소송(2심)에서 노동자들이 승소하고, 민사소송(1심)에서도 “해고가 무효하며 원직 복직시킬 때까지 월평균 임금 등을 지급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판결이 나왔다. 콜텍 역시 지난해 11월 해고가 부당하다는 항소심 판결을 받았다. 복직투쟁 1100일이 다 되어가지만 회사는 뻔뻔하게도 모든 판결에 대해 항소 ․ 상고했다. 결국 회사의 노동자들은 20년 기타 제조 남성 숙련공의 한 달 치 월급을 훌쩍 넘는 200만 원 짜리 왕복 미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이런 ‘원정투쟁’은 급히 유행이 된다. 또 다른 무리가 1월 19일 프랑스 파리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발레오공조코리아(충남 천안) 해고 노동자들이다. 이들의 일터도 지난해 말 사라졌다. 프랑스에 본사를 둔 세계 3대 자동차 부품업체 발레오가 그룹 차원에서 결정한 사항이다. 그리고 이들이 돌아오는 2월엔 승림카본(경기 안산) 해고 노동자들이 한국을 떠난다. 회사 경영권을 쥐고 있는 독일의 다국적 자본 ‘슁크’가 노조와 갈등을 거듭하다 2007년 직장을 폐쇄한 것이다. 우유팩 제조업체인 페트라팩(경기 여주) 해고 노동자들도 2007년 스위스로 원정투쟁을 떠나 석 달간 천막농성, 단식투쟁을 한 적이 있다.

위에서 본 여러 노동자들의 사연은 다른 것 같아도 어딘지 닮아 있다. 자본 철수 이후, 생계는 물론이거니와 책임 ․ 윤리 경영 따위의 호소는 경영진의 귓등에도 닿지 않는다. 무엇보다 국내 경영진은 문제 해결 의지가 없거나 결정권이 없다. 권한 있는 경영진은 만날 수조차 없다. 그림자도 없는 ‘허깨비 자본’은 노동자를 철저히 무력화한다. 그 때문에 발레오공조 ․ 승림카본 노동자들은 결정권 없는 국내 경영진을 넘어 그들의 ‘주인’과 직접 만나고자 한다. 국내 자본인 콜트 ․ 콜텍의 노동자들은 외국의 거래처나 고객을 직접 만나 호소하려 한다. 국경을 넘는 자본의 이동이 자유로워질수록, 근로빈곤층(working poor)의 피할 수 없는 세계 여행도 일반화된다.



외국투기자본, 그게 뭐야?


 수십 명의 구속자와 수천 명의 해고자를 발생시킨 작년의 쌍용차 구조조정은, 외국 투기자본(줄여서 ‘외투자본’이라고 하기도 한다)의 문제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했다. 2004년 쌍용차를 인수한 상하이자동차는 투자는 외면한 채 기술 유출에만 몰두하다 경제위기를 빌미로 회사를 부도내 버렸고, 이후 법정 관리인에 의해 대규모 정리해고가 단행되었다. 상하이 자동차는 이후 검찰 조사에서 기술 유출 등의 범죄 사실이 확인되었지만, 한국 정부가 상하이자동차를 상대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현재 쌍용차는 인수자를 찾기 위해 저비용 생산 구조(저임금 고강도 노동 시스템)를 갖추기 위한 구조조정을 계속 진행하고 있다.

쌍용차만큼 여론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캐리어, 발레오공조, 위니아만도 등 초민족자본이 투자한 제조업 기업들에서 현재 자본 철수가 진행 중이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정리해고의 피해를 겪고 있다. 미국계 초민족 자본인 유티씨의 계열사인 캐리어는 몇 년째 시설투자는 하지 않은 채 수백 명의 노동자를 정리해고하며 영업망만을 유지한 자본 철수 절차에 돌입했고, 프랑스계 자동차 부품 업체인 발레오의 한국 계열사인 발레오공조는 아예 공장 폐쇄를 단행했으며, 초민족적 사모펀드 씨브이씨의 소유인 위니아만도는 자본철수 협박 속에서 노동자를 정리해고 중이다. 현재 구조조정에 대해 투쟁하는 곳 대다수가 초민족자본 투자 기업일 정도로 한국에서 초민족 자본의 문제는 심각한 상태이다.

자본의 자유로운 세계적 이동 때문에, 초민족자본은 한 나라에서 노동자들의 저항을 무력화하는데 유능하다. 노동자들이 정당한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면, 초민족자본은 떠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대응한다. 이들은 세계적 수준의 생산 네트워크를 보유함으로써 한 공장에서 문제가 생기더라도 다른 공장에서 생산을 대체해 버릴 수 있다. 기업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한다. 제어할 고삐가 없는 외투자본들은 밑바닥 경주(race to the bottom)를 벌이며 노동자들에 대한 공격을 전 세계적으로 확대한다. 기준이 엄격한 곳에서 저임금과 해고가 자유로운 곳으로 옮겨 다닐 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권리를 총체적 파괴하고 축소시키며 열악한 조건을 직접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외투자본은 국제적 경제 여건에 따라 공장 폐쇄와 이전을 아주 자유롭게 감행한다. 2008~2009년 세계경제위기에서도 볼 수 있었던 초민족 자본의 국제적 이동은 경제 조건이 어려운 지역에서는 과감하게 공장을 폐쇄하고, 새로운 시장이 열리는 곳에서는 현지에서 자본을 조달하고 본사의 자원을 집중하여 공격적으로 인수 합병을 하고 신규 공장을 건설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본 철수 협박 및 신규 투자 등을 조건으로 노동자들의 권리를 크게 빼앗는 것은 물론이다.

경제위기 과정에서 나타난 초민족 자동차 기업들의 사례를 보면 이들 기업은 하나같이 생산이 감소하는 곳에서는 정리해고 공장폐쇄 등의 구조조정을 감행하며 동시에 시장이 확대될 가능성이 있는 지역에서는 대규모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도요타, 지엠, 폴크스바겐, 혼다, 닛산, 포드, 피아트 등의 자동차기업을 비롯해 최근 국내에서 대규모 해고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캐리어 에어컨, 발레오공조 등도 앞에서는 위기인척, 뒤에서는 새로운 투자를 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더군다나 외국투기기업들은 충분하게 저임금 노동을 이용하며 노동법에 대해서도 특혜를 누린다. 바로 각국 정부들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다. 한국의 경제자유구역(FEZ), 아시아 및 남미의 수출가공구역(EPZ)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지역에서 기업들은 정부의 각종 자금 혜택은 물론 노동법을 면제받기도 한다. 한국에서 2002년에 제정된 경제자유구역법은 구역 내 초민족 기업들에 근로기준법과 파견법의 일부 조항들을 무시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으며, 도미니카공화국, 멕시코, 필리핀 등의 국가에서는 노조활동 탄압, 최저임금 이하의 임금 지불 등에 대해 정부가 눈을 감는다.

이와 관련해 남한 정부는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 ‘인베스트 코리아(Invest KOREA) 본부’를 설치해 개별 외국 자본이 투자하면 어떤 인센티브와 얼마만큼의 지원을 받게 되는지를 구체적으로 산정해 미리 알려주고 있다. 외국인 투자촉진법에 따르면 ‘외국 투자자가 출자한 기업’에 대해 조세․현금․입지 지원 등 각종 파격적인 인센티브가 주어진다.

지식경제부의 외국인 투자기업 정보에 따르면, 1월 현재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투기업은 1만7580개다. 이렇게 많은 외투기업에 관해 남한 정부는 무한한 지원만 제공할 뿐, 자본 철수 등에 뒤따르는 고용 문제 등에는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있다. 투자 유치에는 열심인 정부가 일방적으로 공장을 철수하고 떠나는 외투기업 현황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지식경제부 투자정책과 쪽은 “국내에 들어오는 외국인 투자 자본은 (각종 세제 혜택 등이 주어지기 때문에) 100% 신고하고 있고, 이를 분기별로 발표하고 있다”며 “그러나 자본 철수의 경우에 따로 신고하는 외국 자본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저 짐을 싸서 떠나버리면 그만인 셈이다.

이제 문제를 좀 더 근본적으로 생각해보자. 앞에서도 서술했듯이 많은 사람들은 외투기업들이 자국에 들어오는 것을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 이유가 뭘까? 바로 정부 및 지배층들이 유포하는 ‘경제 살리기’의 해법이 바로 투기자본들이 자유롭게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기업 활동을 하는 것이라는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 08-09 금융위기와 쌍용자동차 사태를 거치면서 그것이 해법이 아님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투기자본들이 자유롭게 전 세계에서 기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지금의 금융구조/금융화가 작년의 위기를 불러온 것이고, 자신의 이윤만을 위해 기술 유출만 하고 발을 빼버린 투기자본 때문에 2500여명의 쌍용차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발레오공조코리아, 페트라팩, 콜트․콜텍, 캐리어 에어컨 등등 수많은 기업들의 노동자들이 각각의 외투기업에 대항해서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작년 쌍용자동차 투쟁도 ‘상하이’라는 초민족적 투기자본에 맞선 싸움이었다. 이런 일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좀처럼 노동자들의 권리가 보장되는 방향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할까?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면서 많은 노동자들의 단결이 필요하다. 각각의 기업주에 맞서서 싸우는 것 뿐 아니라 전 세계 노동자들의 노동권과 생존권을 빼앗아가고 있는 외국투기자본 전반, 외국투기자본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지금의 신자유주의 금융화 체제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흐름을 만들어가야만 진짜 해결을 이루어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11월, 서울에서 G20정상회담이 열린다고 한다. 결국 이 회의는 심각한 문제들을 만들고 있는 투기자본들이 더욱더 활발하게 기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금의 위기상황에 맞는 새로운 시스템과 구조를 만들 것이다. 이렇게 계속되는 규제완화, 시스템 개선 등으로 결국 투기자본들이 더욱 활개 치게 된 것이다. 이 G20을 적극 유치하고 홍보하고 있는 정부, 그리고 이 기회로 우리 경제가 한 발 도약해야 한다며 환영의 손길을 보내고 있는 자본에 맞서서 지금의 금융화 질서에 대한 문제제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나가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앞서 나온 원정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문제, G20에서 논의될 사항 등을 지금 우리의 삶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으로 여긴다면 큰 오산이다. 갈수록 외국투기자본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가 나중에 근무하게 될 기업이 외국투기자본의 기업이 될 지도 모르는 일이고, 갈수록 심화되는 금융화 속에서 투기자본들의 이윤만 보장되고 우리의 권리는 야금야금 없어져 갈 것이다. 우리의 노동의 권리, 안정적인 삶을 살아갈 권리를 원한다면! 지금의 자리에서부터 실천을 시작해나가자.

투기자본들의 횡행,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G20-금융화 체제는 노동자서민의 권리는 안중에도 없이 현 체제의 체질개선을 통해 더욱 안정적으로 이윤을 보장하기 위한 체제에 불과하다. 기업들이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세계화가 아니라 투쟁하는 노동자,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대다수 서민들의 목소리가 반영되고 그/녀들의 권리가 보장되는 아래로부터의 세계화가 바로 우리의 대안이다. 초민족적 투기자본들이 노동자들의 노동권을 보장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만들고, 기업이 철수했을 때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보장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현재 시급한 과제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외국투기자본의 문제점과 외투자본이 노동자들의 권리를 파괴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자신의 공동체에서부터 알려나가고 주변 사람들을 설득해 나가는 것이 일차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Posted by 행진

2010/02/14 21:27 2010/02/14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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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의 무수한 죽음들을 ‘기억’하며

- 당대비평,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 서평 -

                                             


 노무현에 대한 대대적인 애도가 가리키는 것


 2009년 5월, 전 대통령의 자살이라는 사건은 한국 사회에 유례없는 충격과 반향을 가져왔다. 곧 광장과 학교, 지역마다 주요 역의 입구에 분향소가 차려졌다.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 그와 그의 정책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노무현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그가 부족한 게 있었다고 하더라도 상대적으론 존경할만한 대통령이었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노무현의 집권기에 죽어갔던 수많은 농민·노동자들을 기억한다면, 그 때 노무현을 비판했던 진보진영마저 무비판적으로 애도의 물결에 동참하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후자의 입장은 상대적으로 소수였고, 전자에 의해 죽음 앞에서 원칙만을 고수하는 냉혈한으로 비난받기도 하였다. 이 간극을 해결하기 위하여 ‘정치인 노무현’과 ‘인간 노무현’을 분리하여, 전자가 잘못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후자는 기릴 만 하다고 얘기하는 이들도 있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시기적 구분으로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을 가속화한 대통령 재임기의 노무현’과 ‘대통령 집권 이전에 노무현이 추구하였고, 지금 대중들이 그에게 투영하고 있는 가치들’을 구분하여 후자의 의미로 그를 애도하자는 주장도 존재했다.


 그러나 그 중 어떤 입장도 우리 앞에 벌어진 상황을 충분히 설명해 주지는 못했다. 사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이후에 만들어진 추모의 분위기 속에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과잉’이 존재했다. 한 필자의 표현대로 “실제로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그런 대통령 노무현을 대중들은 마치 갖고 있었다가 지금 막 상실한 것처럼 애도했다(정용택, 117p.).” 혹은 노무현과 자신의 처지를 동일시하며,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펑펑 흘렸다. 마치 마음껏 울 계기가 필요했다는 듯이 말이다. 나는 당시에 그의 죽음 자체보다도 죽음 이후에 있던 ‘거대한 울음의 행렬’에 더 놀랐다. 추모에 동참하고 있는 사람들 스스로도 예상치 못했고, 온전히 이해할 수 없던 흐름이었다. 그 추모의 열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시점(2009년 12월)에 출간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의 열 명 남짓한 필자들은 다시금 찬찬히 그 죽음과 추모의 의미를 되짚고 있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어떤 죽음이 대대적으로 애도될 때, 그것은 단지 죽은 자의 사회적 지위 탓으로 돌릴 수 없는 애도하는 자의 정치적 욕망이 투여”(서동진, 20p.)되어 있는 법이다. 그렇기에 이 행위가 옳은지 옳지 않은지를 따지기 이전에 ‘대체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지’를 돌아보는 것이 우리 사회가 위치한 자리와 나아갈 자리를 가늠하기 위해 더 유의미한 시도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노무현의 죽음 앞에서 ‘인간 노무현’에게 정서적 동질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2002년 대선 당시 그는 기존 한국 정당 정치에 대한 환멸의 정서를 대변했다. 상고 졸업, 농촌 출신, 민주화 운동, 인권 변호사, 통기타를 치며 상록수를 부르던 모습 등에서 대중은 기존 정치인과 다른 노무현의 ‘비주류 정서’에 공감을 표하며 ‘변화’를 기대했다. 그는 늘 그의 신념이나 정책 그 자체보다도 탈권위주의적인 언행으로 주목받아 왔다. 그리고 노무현에 대한 추모 분위기 속에서 부각되는 것도 다른 어떤 것이기보다는 이런 노무현 개인의 ‘통치 스타일’이었다. 때문에 ‘정치인 노무현(신자유주의자)’과 ‘인간 노무현(탈권위주의와 진정성)’을 분리해서 보려는 시도가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김원의 지적처럼 노무현의 이 두 가지 측면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노무현의 죽음 이후 인간 노무현과 정치인 노무현을 분리하자고 말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수준은 강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노무현 죽음 이후에도 반복되고 있다. 노무현이 내세운 정치 스타일은 (····) 한국 정치 위기의 다른 면이었다. 기존 보수 정치에 대한 불만과 반감을 지닌 대중은 한나라당과 민주당 보수 양당의 대안 이념 부재, 무능력과 부패 등에 부단히 실망했다. 그 실망의 틈에 등장했던 것이 노무현이었다. 하지만 그가 내세웠던 지역주의와 분열주의 반대, 도덕성, 서민성, 권위주의 역사 청산 등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대안적 정치 이데올로기로 작동할 수 없었다.

- 김원, <우리는 노무현을 지키지 못해 미안해야 하나?> 중에서, 65p.


 노무현 집권기의 실패는 노골적인 경제 대통령 이명박의 당선으로 귀결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명박 역시 나의 불안한 삶을 책임져줄 수는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집권 초기부터 이명박 정권이 보여주는 무능함과 치졸함, 몰상식함에 누구나 극도로 지쳐 있었다. 사람들에게 목 놓아 울 계기가 절실했다는 것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 시점에 갑자기 들이닥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은 ‘내가 붙잡을 수 있는 대안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막막함이자 울음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달라 보이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사람들을 움직인 것은 결국엔 모두 같은 원리였다.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는 현실 정치(때로는 노무현이었고, 때로는 이명박이었던)에 대한 반(反)경향’ 말이다. 다시 말해, 노무현의 죽음과 그에 대한 애도가 가리키는 것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시대에 한국 정치가 봉착한 ‘어떤 한계지점’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금 노무현의 인간적 스타일을 대체할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건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한계지점’을 넘어설 방책이 필요한 것일 텐데, 당장은 누구도 시원하게 그것을 제시해줄 수 없다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 그리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 국면 속에서도, 이 한계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애도의 공동체 속에 배제되고, 망각되는 이들은 누구인가?


 사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 이전에도 다른 무수히 많은 ‘죽음’들이 존재했다. 가장 눈에 띄는 사건은 2009년 초, 서울 한복판에서 공권력의 진압에 의해 여섯 사람이 불에 타 목숨을 잃었던 ‘용산 철거민 참사’일 것이다. 『아무도···죽음』은 용산참사의 기억을 불러와 전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비교하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우리는 두 죽음의 비교를 통해, 노무현에 대한 애도(나아가 김대중에 대한 애도까지도)가 갖는 성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2009년의 광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잠시 2008년 5-7월의 촛불의 기억을 떠올려보아야 한다. 촛불은 그 이전에 있었던 어떤 집단적인 저항의 모습과도 달랐다. 그것은 저항의 새로운 주체와 방식의 발견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성격이 매우 모호한 것이기도 했다. 이른바 ‘개혁 세력’의 집권기 동안 대중들은 역설적이게도 스스로를 주체화할 정치적 언어들을 잃어버렸다. “민주, 개혁, 진보, 노동··· 신성한 기표들의 훼절을 겪고 벌거숭이로 남겨진 대중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김성태, 141p.)” 촛불을 든 대중들은 ‘반MB’라는 모호한 정체성으로 묶여 있었고, 결국 몇 달 간의 집회 끝에도 이렇다 할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다시 뿔뿔이 흩어져갔다. 그리고 2009년 1월 20일의 용산참사. 김성태는 이 사건이 ‘촛불이 어디로 갈 것인가’를 가름하는 시험대(리트머스지)가 될 만한 것이었다고 얘기한다.


 그럼 용산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어떠했나? 참사 당일 저녁부터,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현장으로 달려가 가두시위를 벌였다. 촛불이 잦아든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론도 철거민 쪽에 우호적이었다.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희생된 이들이 매도당하지 않고, 공감해야 할 사회적 고통의 일부로 인지되고 받아들여진다는 것에서 ‘일단’ 안도(김성태, 145p.)”할 만 했다. 그러나 그것은 전 대통령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리며 광장으로 나왔던 사람들에는 한참 미달하는 것이었으며,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운동이 되지는 못했다. 그 이유에 대한 필자들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하나는, “그 불타는 몸은 너무 강렬하기에 시민이 공유할 수 없어서”라는 것이다. 일종의 축제이자 퍼포먼스였던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와 비교했을 때, 죽음에 직면한 결사 항전은 너무나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무엇에서든 유머를 필요로 하게 된 몸들이 되어버린 ‘개그적 소비 사회’의 시민들에게 쾌락 없는 투쟁이란 ‘참아줄 수 없는 진지함’에 다름 아니었다는 것이다.(김진호, 266p.)” 다른 하나는, ‘사유재산’이라는 자본주의의 질서, 혹은 ‘뉴타운’이라는 사람들의 욕망의 대상을 근본적으로 건드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절규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저런 희생은 질서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엄기호, 37p.)”이라는 인식이 용산에 대한 적극적 애도를 어렵게 만들었다.


 즉, “대중들은 용산을 의도적으로 애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외려 그것을 애도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부채감과 상실감은 무의식적으로 남아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노무현·김대중에 대한 추모 행위를 두고 “마땅히 애도되어야 할 대상이 애도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엉뚱하게도 바로 옆의 것이 누가 봐도 너무 과하게 애도되고 있다면, 그 과열된 애도 행위의 배후에는 정작 애도해야 할 것을 애도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슬픔이 감춰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김진호, 101p.)”고 분석하는 것은 (약간은 ‘과장’처럼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의미심장하다.


 책은 주로 용산참사와 노무현, 김대중, 그리고 그 죽음들에 대한 ‘사회적 기억의 비대칭성’을 다루고 있지만, 조금 더 크게 본다면 다른 것들도 눈에 들어오게 된다. 그러고 보면 2009년에는 참 많은 죽음이 있었다. 용산의 철거민들, 투쟁 중에 목을 맨 대한통운 특수고용 노동자 박종태 열사, 쌍용자동차 파업 중에 목숨을 끊었던 여러 노동자와 그 가족들... 그리고 다른 한 편에는 김수환 추기경·노무현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이라는 세 명의 지도자들. 전자의 죽음과 후자의 죽음에 사람들은 많이 다르게 반응했다. 이름도 권력도 가지지 못한, 진정으로 ‘평범한 사람’이었던 이들의 죽음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채로 빠르게 잊혀 갔다.


 사실 노무현 추모 정국 속에서 이처럼 애도되고 있지 못한 ‘다른 이들’의 죽음을 불러오려는 시도들도 존재했다. 엄기호는 이를 ‘초혼의 정치’라 명명한다. 죽은 자에 대한 애도 앞으로 같이 애도되어야 하는 죽은 자들을 불러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는 성공회대 교수의 이광일이 당시 참세상에 기고한 글이 그런 논지에서 쓰인 글이었다.


민주주의는 과거의 경력을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살아 움직이는 지금 이 순간의 부당한 관계들을 문제시하고 그것을 넘고자 하는 실천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죽은 노무현을 잡고 기억하는 것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 고통 받는 용산을, 특수고용 노동자들을, 이주노동자들을, 소수자를, 수탈 받는 환경과 생태의 아픔을 안고 함께 싸우는 것이 진정 그를 살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 이광일, <한 편의 ‘희극’이 ‘비극’으로 끝나다> 중에서, 2009년 6월 1일, 참세상


그러나 전 대통령들의 추모 의례는 이 죽음을 최대한 ‘충돌이 아닌 정상화(‘화해’라는 모호한 이름의)’로 수습하려는 경향이 더욱 컸고, 불편한 다른 죽음들, 평범한 이들의 죽음들은 초대받지 못한 채였다. 이 사실은 지금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준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책마저도 매우 비대칭적으로 죽음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책의 제목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임에도, 대부분의 필자들은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과잉된 애도’가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하는 데에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물론 그만큼 그 추모의 분위기는 놀라운 것이었으며,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불러오기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다. 많은 논쟁이 애매모호하게 마무리된 속에서, 노무현 추모정국을 이렇게 해석하려는 것은 매우 유의미한 시도이다. 그러나 ‘용산’보다도 더 기억되지 못한 다른 죽음들. 2009년에 죽어가야 했던 노동자, 농민들... 2009년 이전에도, ‘민주화 되었다던’ 그 시절, 노무현 정부의 집권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나 곧 잊혔던 수많은 이들.. 그 죽음들을 불러오는 것, 그들의 죽음이 왜 이렇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렸는지를 성찰하는 것, 그 과정이 부족해서 아쉬움이 남는다.



 정치를 만드는 데에 끊임없이 실패하는 우리들


 앞에서 짚은 한계와 연결되어 있는 또 하나의 쟁점은, 이 광범위한 애도의 행위가 참가한 사람들을 ‘정치적 주체’로 만드는 데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엄기호에 따르면 두 전직 대통령과 용산의 죽음을 가르는 그 ‘경계’야말로 우리 사회가 필사적으로 감추고 회피하려는 정치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경계를 넘는 것에 끊임없이 실패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사회에서 정치란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질서를 지키는 것-치안, 혹은 신자유주의 법치라 불리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문학 비평가인 권명아의 시선은 이 ‘광장에서의 애도’에서부터 올해 베스트셀러였던 책과 영화, 『엄마를 부탁해』와 『해운대』에까지 가서 머문다. (다른 필자인 정용택이 영화 『워낭소리』의 흥행에 관해 갖는 입장도 이와 비슷하다는 사실이 인상적이다) 그녀는 “죽음의 책임이라는 모티프가 촛불과 광장과 조문 행렬에서 극장가와 서점가로 이동”했다고 보고 있는데, 이것이 “삶에 대한 새로운 의식이나, 타자의 죽음과 나의 생존의 불가피한 의존과 관계성, 삶의 취약성에 대한 윤리적 의식의 자리를 만들지 못하고 있”(권명아, 74p.)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 매체들에서 각각 죽음을 다루는 방식이 ‘청소’를 통한 삶의 정상화(영화 『해운대』), ‘피붙이’의 죽음에만 감응하는 것(소설 『엄마를 부탁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상실감과 애도가 이처럼 정치적 주체화의 자리가 아닌 ‘다른 자리’에서 수행될 때, 우리는 무력할 수밖에 없으며, 폭력 시스템은 지속된다.


 신학 연구자인 정용택은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대중을 ‘우울증적 주체’로 명명한다. “우울증적 주체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알지 못하면서 그것에 대한 상실감에 시달린다.” 사실상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민주주의의 표상을 노무현에게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중들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잃어버린 노무현이 아니라 실은 민주주의의 부재” 그 자체이다. 문제는 이러한 우울증적 충동이 촛불집회나 추모 행렬과 같은 집합 의례의 형식으로만 남아, 현실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정도로까지 힘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는 2009년의 애도의 광장에 ‘종교’만 남았을 뿐, ‘정치’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124p.)


 필자들의 공통된 문제의식은 놀라울 정도로 과열되어 있었던 대중들의 ‘집단적 애도·추모 의례’가, 이상하리만치 ‘정치’로 이어지지는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마치 2008년 촛불집회 때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리고 나아가 2009년의 수많은 죽음들을 가르는 ‘경계’를 가리킴으로써, 우리의 실패가 무엇 때문인지를 밝히고 있다. 여기가 바로 죽음들에 대한 ‘사회적 기억의 비대칭성’이 연유하는 지점이다. 우리를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어쩌면, 2003년, 잇따른 노동자들의 죽음 앞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던졌던 말, “분신으로 투쟁하는 시대는 갔다. 이제는 민주화된 시대가 아니냐.”하는 논리인 것은 아닐까? 20년에 걸친 ‘민주화 시대’와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의 교직(김성태)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87년의 그 자리에 멈추어 방황하고 있다. 대안 없는 위기의 시대, 여전히 ‘또 다른 구원자’나 ‘대변자’를 갈구하는 눈물을 흘리면서(김원) 말이다.



 이 불안한 세상을 바꾸기 위해 필요한 과정들


 『당비의 생각』 시리즈가 매번 그렇듯이, 이 책 한 권 안에도 통일될 수 없는 다양한 입장들이 존재한다. “(앞으로)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에 있어서는 특히 그렇다. 그 중에서도 가장 구체적으로 진보진영이 해야 할 바를 서술하고 있는 것은 박동천의 글인 <노무현 이후의 한국 정치를 생각한다>라고 하겠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이 말하는 바가, 앞의 다른 글들이 열심히 분석한 것들과 묘하게 어긋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우선은 그의 ‘진보진영’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명박·한나라당으로 표상되는)보수진영’ 대 ‘(노무현·김대중을 포함하는)개혁진영’으로 틀지어져 있다는 것이 그렇다. 이러한 오래 된 구도 속에는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애도가 과연 무얼 말했던 것이고, 무엇을 말하지 못했던 것인지에 대한 성찰은 보이지 않는다.


 “현재 한국의 진보에는 대안이 없는 것이 탈이 아니라 너무나 많은 것이 문제”라는 말에는 나도 동감한다. 그러나 바로 이어, 그렇기 때문에 이제 “무수히 불거져 나와 있는 제안과 묘안과 비책과 처방들을 어떻게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엮어 낼 것인가(박동천, 257p.)”가 중요하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힘들다. 인물 중심의 정치로 국회의원 선거에 대비하자는 것도 그렇다. 다른 필자들이 짚고 있는 맥락에서 보았을 때,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더 정교한 정책 대안’이나 ‘서민을 대리해 줄 다수의 국회의원들’은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수많은 물음들이다. 민주화 20년이 이명박 정부의 탄생으로 귀결되었고, 이명박 역시도 대안이 아님이 판명되었다면, 이제는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가? 무엇이 바뀌어야 내 삶이 나아질 수 있는가? 08-09년 그렇게 많은 이들이 광장에 나왔음에도, 왜 그 경험이 스스로의 삶을 바꾸고 세상을 흔드는 ‘정치’가 되는 데에는 실패하고 있는가? ‘정치’를 만들기 위해 나는 나의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 등등..


 우리의 아픔이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지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지금 우리에게 부족하다. 손쉽게 대안을 만들어내는 일보다도, 이 아픔의 ‘보편성’을 설명할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더욱 절실하다. 노무현을 ‘아름다운 순교자’나 ‘서민의 대변자’로 불렀듯이 또 다른 구원자나 대변자를 필요로 할 때에 그 시도는 필연적으로 실패에 이를 것이다. “진정 필요한 건 구원자가 아니라, 새로운 정치를 구성하기 위한 자기 조직화이다.(김원, 67p.)” 그리하여 '진짜 평범한 사람들'의 죽음을 우리의 아픔으로 느끼며, ‘이제 그만!’이라고 외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에게 다른 세계가 가능해질 것이다.


 2009년, 우리는 한 시대의 종언을 목도했다. 그러나 어떤 세계가 시작될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이 폐허 같이 불안한 세상에 ‘맨몸’으로 각자 부딪히며 살아야 하는 걸까? 그런 삶은 서러운 울음을 동반하는 것이거나, 어떤 계기가 오기까지 울음을 꾹꾹 눌러 참는 그런 것 밖에는 될 수 없지 않을까? 『아무도··죽음』은 이 불안한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인상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2010년대를 시작하며,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Posted by 행진

2010/02/14 21:11 2010/02/14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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