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여성의 국제결혼, 희망의 땅 코리아로?
이주여성에게 온전한 삶의 권리를!
세계화되는 여성에 대한 착취와 성상품화를 반대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지난 4월 21자 조선일보에서는 ‘베트남처녀, 희망의 땅 코리아로’라는 제목으로 베트남 여성들이 한국 남성과 결혼하는 과정을 반인권적으로 묘사한 기사를 내보냈다. 모니터를 통해 가슴에 번호표를 단 여성들을 보고 신부 감을 점 찍는 과정, 대화도 거의 없이 속전속결로 진행되는 결혼,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예비신부를 보며 답답해하는 예비신랑의 모습 등 베트남 여성들이 마치 ‘진열된 상품’처럼 한국 남성에 의해 선택되는 상업화된 국제결혼 과정을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한국의 왕자님들, 우리를 데려가주오”와 같은 문구와 함께 저급한 흥미성 기사로 내보냈던 것이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각종 몇몇 언론단체 및 여성단체, 한국에 있는 베트남 유학생들이 ‘여성을 상품화하는 베트남 여성의 국제결혼’에 반기를 들었다. 지난 5월 20일 대학로에서는 베트남 여성들과 여성단체들이 모여 ‘여성을 상품화하는 국제결혼광고 반대캠페인’을 진행하였다. 그/녀들은 베트남 여성을 노골적으로 상품화하고 있는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 ‘아이를 낳아도 몸매가 변하지 않아요.’라는 문구 등의 국제결혼광고가 주는 반여성적이고 베트남 비하적인 모욕감을 토로했다. 확실히, 요즘 거리 곳곳에서 너무도 쉽게 볼 수 있는 이 광고들은 너무나 모욕적이다. 하지만, 이 광고들보다 훨씬 더 모욕적인 것은, 마치 물건처럼 이 땅에 들어와 살아가야 하는 이주여성들의 삶일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신자유주의가 양산하는 이주의 여성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이주노동을 발생시키는 가운데 이주여성의 비율은 이미 2000년에 49%에 육박하는 등 이주의 여성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다. 과거 여성의 이주는 주로 남성노동의 이주에 따른 것이었다. 즉, 남성이주노동자의 가정유지를 위한 형태로, 대규모의 남성이주에 뒤따라 이루어지면서 이주가정 내의 재생산노동을 담당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처럼 가족단위가 아닌 노동을 목적으로 하는 여성이주가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이후부터인데, 이러한 현상은 바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기인한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을 소수의 첨단 금융 산업과 대량의 가정부, 보모와 같은 재생산노동, 시설관리, 청소 등 하층노동으로 분할했고, 하층노동에 ‘값싸고 순종적인’ 이주여성들이 대거 투입되었다. 또한, 중심부 국가 여성들의 노동시장진출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그녀들이 담당했던 재생산노동의 빈자리에 이주여성들이 대거 투입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서비스산업을 유례없이 팽창시키고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상품화하는 성산업을 그 중심에 위치시키고 있는데, 한 국가의 범위를 넘어서 전세계적으로 확대된 성산업을 비롯한 서비스산업 역시 여성이주를 확대하는 주요 원인이다. 또한, 주로 중개업체를 통해 경제적 불안정과 빈곤으로 인해 배우자를 구하기 힘든 소외계층 남성과의 국제결혼으로 유입되는 여성이주가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여성이주의 증가는 여성의 빈곤화와도 맞닿아 있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는 불안정노동의 일반화, 공공영역의 축소로 대다수 민중을 빈곤화하고 있는데, 특히 여성들은 더 많은 빈곤의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 생산-재생산노동의 위계적인 분리와 여성이 재생산노동의 담당자라는 이데올로기는 여성들의 노동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하고, 때문에 여성들은 해고순위 일순위이면서 저임금의 불안정노동을 감수해야 하는 현실을 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여성들이 생산-재생산노동의 이중부담을 떠안아야 하는 현실은 여성의 노동조건을 더욱 불안정하게 하고 여성을 빈곤의 악순환에 빠지게 한다. 이미 전 세계 빈곤인구의 70%가 여성으로, 이러한 여성들은 더 나은 삶과 노동조건을 찾아 국경을 넘나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변부 국가의 여성들이 물건처럼 거래되는 국제결혼의 확대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다.

희망의 띵 코리아로? 처참한 국제결혼의 현실


얼굴색과 문화는 다르지만 ‘순박’한 베트남처녀가 농촌에 시집와서 소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환상이 말해주지 않는 국제결혼의 현실은 너무나 처참하다. 유입과정에서부터 여성은 원하지 않는 성관계, 성폭력의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으며, 사실상 이주여성에게는 결혼여부와 배우자를 결정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국제결혼중개업체들은 대부분 1,2회의 만남에서 성관계를 유도하며, 한국남성의 한 두 번의 방문으로 결정되는 결혼에서 여성이 거부할 경우 모든 비용을 여성이 배상해야 하는 등 온갖 폭력과 횡포가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국제결혼을 한 한국남성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이주여성은 일상적으로 경제적 빈곤에 시달린다. 특히, 이주여성은 가족 내에서 무급가정부, 간병인, 성적 서비스 제공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데, 이는 신자유주의 하의 가족제도가 여성에게 부과하는 일반적인 지위와 일치한다. 신자유주의는 재생산노동을 무한히 탄력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위기를 개별 가정에 전가시킴으로써 해결하려고 하는데, 이때 극도로 강화되는 것은 바로 여성의 재생산노동일 수밖에 없다. 점점 축소되는 복지서비스, 가계소득의 감소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공백은 더욱 강화된 여성의 무급 재생산노동으로 메꾸어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주여성은 문화, 언어, 민족적 차이를 악용한 언어, 정서적인 학대를 당하기 일쑤이며, 그녀들이 ‘이주자’로서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전적으로 남편에게 있기 때문에 이주여성은 결혼생활에서 어떠한 불평등과 폭력을 당하더라도 참을 수밖에 없다. 어떤 사유든지간에 결혼이 해소되면 이주여성은 불법체류자가 되고, 결혼 2년 후에 취득할 수 있는 국적 또한 남편의 ‘신원보증’을 필요로 한다. 이렇듯, 이주여성은 ‘여성’과 ‘이주자’로써의 이중의 곤란을 감내할 것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이주여성들의 온전한 삶의 권리를 옹호하자!


이처럼 ‘여성’과 ‘이주자’의 이중의 굴레에 놓여있는 이주여성들에게는 시민권이 없다. 신자유주의는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이주노동을 발생시키지만, 인간을 국적에 따라 차별하고 배제시키며 이러한 분할을 활용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4월 26일, 정부는 국제결혼중개업을 관리하는 내용을 담을 법률을 2007년까지 제정하고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수급권자에 포함되는 국제결혼 이주여성의 폭을 확대하고 이주여성에 대한 보건 서비스를 확대하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에 들어온 이주여성들을 대한 종합 지원 대책을 내놨지만, 이주여성들의 권리 보장의 측면이라기보다는 한국사회 유지에 복무하는 구성원들만을 골라서 ‘관리’하겠다는 측면이 강하다. 이러한 지원대책은 혼인상태를 유지하는 이주여성, 한국인 자녀를 양육하는 이주여성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베트남여성 문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려 하는 목소리들 가운데에서도, 이를 이주여성들의 권리 문제로 바라보기보다는 ‘국가적 자존심’, ‘못 사는 나라에 대한 무시’ 등으로 이야기하는 관점이 존재한다. 이러한 목소리에는 지금 여성의 권리가 어떻게 침해되고 있는지, 이주여성들이 ‘물건’처럼 ‘거래’되어야 하는 현실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동안 ‘매매혼’에 가까운 국제결혼을 외화유입의 통로로써 암묵적으로 묵인․동조해온 베트남정부가 ‘국가적 치욕, 자존심’ 운운하며 문제삼는 것은 베트남여성들의 권리가 아닌, 이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조선일보의 몇 글자 기사일 뿐이다. 지난 5월 20일 대학로 집회 옆에 붙어있었던, ‘한국처녀와 결혼하세요’라는 문구의 국제결혼광고를 패러디한 현수막은 여성에 대한 각종 구조적인 폭력은 문제삼지 않은 채, 단지 한국여성과 베트남여성을 ‘동등’하게 ‘억압’하자는 메세지를 전할 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따라서, 이주여성들의 시민권을 옹호하고 그녀들의 ‘인간’으로써, ‘여성’으로써, ‘이주자’로써의 모든 권리를 옹호하는 싸움이 필요하다. 이는 빈곤의 여성화, 이주의 여성화를 양산하고 여성에 대한 착취와 상품화를 세계화하는 신자유주의와 그에 복무하는 가족제도를 반대하는 가운데, 이주자로써 자유롭고 안전한 이주의 권리, 정주의 권리, 노동의 권리를 요구하는 싸움이 되어야 할 것이다.

Posted by 행진

2006/04/24 05:21 2006/04/24 05:21
, ,
Response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RSS :
http://stulink.jinbo.net/blog/rss/response/3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