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장기요양보험은 정말 효도정책일까? 


 

대안세계를 향한 여성행진(club.cyworld.com/womenmarch)


 

올해 7월부터 65세 이상의 노인이나 노인성 질병(치매, 중풍, 파킨슨 병)으로 수발이 필요한 노인을 대상으로 신체활동 또는 가사지원 등의 장기요양급여를 제공하는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실시된다고 한다.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는 방문요양, 방문간호, 방문목욕, 주야간보호, 단기보호, 취사, 조리, 세탁 등의 방식 혹은 노인요양시설에 직접 들어가서 생활하는 방식의 서비스로 이루어져있다.


이름부터 쉽지 않은(!) 이 제도는 7월 시행을 앞두고 신자유주의시대에 국가가 내놓은 하나의 효도방안처럼 곳곳에서 선전되고 있다. 며칠 전 방영되었던 해피투게더3에서의 “부모님 치매로 고생하는 가족들은 노인장기요양보험 신청을 하세요♬ (보험신청 후 1~3등급 판정받으면 장기요양 서비스 제공)”라는 노래 가사나, 동사무소 앞에 걸린 ‘노인장기요양보험 신청하세요!’ 라는 플랜카드는 금방이라도 노인과 가족의 부담을 덜어줄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노인장기요양보험을 신청해서 혜택을 받는 일만 남은 것일까? 가족의 어려움을 국가가 나서서 함께 책임지겠다고 이야기하는 이 제도는 과연 우리에게 장밋빛미래를 선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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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의 대상자는 전체 노인인구의 3.1%인 17만 명에 불과하고 서비스 대상자가 이용할 수 있는 시설 충족률은 60%를 겨우 넘는다. 전체 국민의 1%도 안 되는 극소수의 서비스 이용대상 뿐만 아니라 협소한 급여범위(치매, 중풍, 파킨슨 병)의 한계는 명확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제도가 시행되는 오는 7월부터 전체 국민의 건강보험료가 약4% 인상되며, 조만간 적용 대상자가 확대되고 소요되는 재정이 증대되면 보험료 부담은 더욱더 빠른 속도로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정부는 본인부담률(시설급여의 20%, 재가급여의 15%)이 일본이나 독일에 비하여 높은 편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협소한 급여범위 하에서 급여를 받지 못하는 항목은 본인이 부담해야 하는 상황은 본인 부담률이 큰 부담으로 돌아올 것임을 충분히 예상해 볼 수 있다. 거기에 더해 장기요양보험제도가 보장해주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사보험에 가입하는 것도 필수로 여겨지고 있는데, 실제로 신청자 접수와 함께 관련한 보험/금융 상품들이 부각되고 있으며, 노인요양서비스 시장을 노리고 재가요양서비스에 대한 프랜차이즈 사업 제안도 눈에 띈다.


이러한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의 한계가 나타남에도 정부는 직접 나서서 문제 해결을 하기 보다는 시장화만을 유일한 대안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제 정부는 기존에 공적 영역이라 여겨졌던 분야에 대한 사유화, 시장화뿐만 아니라 비공식 부문에서 가시화되지 않았던 재생산 노동의 영역까지 적극적으로 시장화를 추진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발생되는 문제는 민중에게 전가되고 있다.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또한 결국에는 건강보험료, 서비스 이용료, 민간 보험료의 삼중 부담을 오롯이 민중이 떠안아야 하는 셈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편, 노인요양서비스의 시장화는 해당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악화문제와도 직결된다. 많은 이윤을 남기기 어려운 사업인 요양시설은 100% 민간위탁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이윤만을 추구하는 자본의 논리 하에, 결국 비용 삭감과 효율성 증대라는 명목으로 노동자들에게 장시간 근무와 저임금 등의 열악한 처우를 강요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회서비스 일자리는 가족 내에서 ‘여성이 무급으로 수행하는 쉬운 일’이라는 인식하에 저임금을 정당화하며 거의 대부분이 여성노동자들로 채워지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사랑의 마음으로 수행해야 하는 노동이라는 인식하에 여성노동자들은 끊임없는 감정노동을 요구받고 있으며 한 명의 노동자로서 노동자성을 인정받는 것조차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시범운영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여성노동자들은 서비스 이용자들로부터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 보다는 ‘일하러온 며느리/딸’로 여겨져 제공하기로 되어있던 서비스 이외에 각종 집안일 또한 요구받는 상황에 종종 놓이게 된다. 


정부는 사회서비스 전략을 통해 사회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을 사회가 책임지는 것과 더불어 여성의 일자리를 마련하겠다고 이야기 하고 있지만 가족 내에서 여성이 수행해야 하는 역할은 전혀 변하지 않았고, 이제 각 가정의 주부들은 ‘사회서비스 이용자’라는 규정 속에서 자신의 가사와 돌봄 노동을 보조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정부 지원을 통해 돈을 주고 이용하는 사용자의 위치도 갖게 되었을 뿐이다. 결국 맞벌이 부부든, 한 부모 가정이든, 자식들의 돌봄이 없는 독거노인이든 여성의 역할에 빈자리가 있는 가족을 다른 여성의 노동으로 채워주는 양상이다. 지금껏 가족 내에서 여성의 일로 간주되어 온 노인에 대한 보살핌 노동을 떠올린다면 노인장기요양보험도 사회서비스 전략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민중들은 빈곤의 심화로 인해 아프고 늙어가는 것에 대해 더욱 큰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나이가 들거나 병으로 인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 그 책임이 개인에게 혹은 한 가족에게만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함께 책임지고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시장화의 방식으로 민중에게 부담을 전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사회화를 통해 더 많은 개인과 가족이, 보다 안정된 서비스 공급을 고르게 받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돌봄 노동과 가사노동 등의 재생산 노동이 여성들이 하는 쉬운 일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하나의 노동으로서 재평가 받을 수 있어야 하며 이는 사회서비스에 종사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저임금-고강도의 불안정한 노동에서 벗어나 당당한 노동자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바탕이 될 것이다.

Posted by 행진

2008/05/31 16:53 2008/05/31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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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행진에서 보낸 편지]


사발식이 여성주의랑 무슨 관련이 있냐구?


관악 보람



·8 여성의 날 문화제에서 사발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었습니다. 누군가는 사발식이 왜 여성주의랑 관련이 있는지 의문을 가졌을 것 같습니다. ‘남자지만 사발식을 싫어하는 남자’도 ‘여자지만 사발식을 즐기는 여자’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여성주의를 생물학적인 성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두 사례를 한 번 비교해봅시다. 저에게는 자기 자신의 외모에 아주 관심이 많고, 목소리 톤이 다른 남자들에 비해 높은 남자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 그런 그 친구는 ‘남자 아이가 왜 그러냐?’, ‘차라리 ‘여자’로 태어났어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식의 말을 종종 듣게 됩니다. 반대로 목소리도 크고 운동에도 관심이 많고 늦게 까지 남아서 잘 노는 여자 친구도 있습니다. 이 친구는 여자이지만 다른 친구들 사이에서 ‘남자’라고 놀림을 받습니다. 사회에서 규정하고 만들어낸 여/남이 가져야 할 특성(‘여성성’과 ‘남성성’)이 여/남의 성격에 많은 영향을 주지만, 실제로 여/남이 가지고 있는 성격․취향과 같지는 않습니다.

사발식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학적이고 폭력적입니다. 누군가를 취하게 하려고 술을 엄청 마시게 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폭력적입니다. 그리고 사발식이 가지는 폭력성은 남성 중심적인 문화가 가지는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흔히 여성들은 집단에 충성하지 않는, 분열적인 존재로 여겨지고 남성은 집단에 충성하고 헌신하는 존재로 여겨집니다. 함께 같은 술을 마시고 비우면서 동질감을 내면화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사발식은 그런 의미에서 집단적 폭력의 현장임과 동시에 소위 ‘남성적’ 문화의 재생산 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소위 말하는 병샷을 하는 남학우들에게 우리는 ‘남자답다’라는 수식어를 쉽게 가져다붙입니다. 즉, ‘남자다운’ 병샷, 사발식을 하는 학우들을 띄우고 칭찬하는 사발식 분위기는 은연중에 ‘집단에 충성하는 남성성’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발식은 그 자체가 가지는 폭력성과 사발식 문화가 존재하는 공간의 폭력성과 배제성 때문에 여성주의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남성 중심적인 문화 속에서 남학우와 여학우가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과정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남자’라고 놀림 받는 여학우들은 희화화되기도 하지만, 공동체 내에서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기 위해 힘들어도 술도 잘 마시고 술자리에서 오래 남아 있고, 강하고, 활발한 성격 등을 내면화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내면화된 여성들이 실제로 공동체 내에서 ‘잘’, 그리고 ‘오래’ 남을 수 있습니다. 조신하고 얌전한 ‘여성성’을 가르치는 사회에서 자신도 모르는 와중에 그런 ‘여성성’을 내면화해온 여학우들은 이러한 분위기에서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활발하고 분위기를 띄워야하되 너무 지나치지 않게(밤을 새서 남는, 술을 잘 마시는 여학우에 대해 발생하는 뒷담화를 생각해보세요.) 행동해야 한다는 모순적인 명제 사이에서 여학우는 술자리에서의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신경 쓸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남성 중심적인 (술자리) 문화에서 여성들은 잘 놀면서도 사회가 여성들에게 요구하는 아름답고 연약한 여성이 되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반면 남학우가 ‘여성적’일 경우 거의 희화화되면서, 공동체 내에서도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남성이 다 잘 나서고 분위기를 띄우는 활발한 성격은 아닌데도, 술이 약하고 술자리에서 얌전한 남학우는 ‘에이, 남자가 이것도 못하냐.’와 같은 뜻 모를 비난을 받게 됩니다.(하는 사람들은 장난으로 하겠지만 생각해보면, 정말 ‘이유 없이’, 사회가 만들어낸 ‘남성성’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발식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접해 있는 공간과 우리가 즐기는 놀이문화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남성과 여성에게는 공동체 내에서 관계맺음 할 시간(기회)에서도 차이가 존재합니다. 남성과 여성이 공동체 대부분의 술자리에서 오래 남아 있는 여성이 남성보다 적습니다. 밤에 돌아다니는 것이 안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혹은 (직장 내의 회식 자리에서) 기혼여성의 경우에는 보살펴야 하는 가정이 있기 때문에 오래 남아 있지 못합니다. 또한 흔히 아무렇지도 않은 많은 이야기나 행동들 속에서 여성을 배제하거나 상대화하는 말이나 행동들이 많습니다. 여/남이 함께 놀고 있는 자리에서 여학우들은 잘 알지 못하는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하거나, 옆에 지나가는 여성을 보고 ‘너랑 비교된다며’ 놀리는 남성들의 모습은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도대체 남성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라는 한 남성의 질문에 “당연하지요. 세상에는 그것밖에는 없으니까요.”라고 대답했다는 여성철학자의 말은 여전히도 유효합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들리지 않았던 여성의 목소리를 들어내는 것을 시작으로 여/남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공간과 놀이문화에 대한 고민을 이어나갑시다.

Posted by 행진

2008/04/01 03:09 2008/04/01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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