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 4.9총선을 바라보며 잃어버린 10년을 다시 생각한다 -



작년 대선, 한나라당은 ‘잃어버린 10년’을 이야기했다. 김대중과 노무현이라는 두 친북 좌파가 집권한 지난 10년 동안 우리나라는 경제성장과 선진국 도약의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명박은 역대 최대 득표율로 대통령이 되었다. 노무현의 실정에 대한 심판과 경제성장에 대한 전 국민적 열망의 표현이다. 이 정도 되면 퇴임하는 노무현은 국민들에게 짱돌이라도 맞으면서 물러가야 정상이다. 그러나 봉화마을로 내려간 노무현은 전 국민적 스타가 되었다. 서민들과 친근하게 들녘을 거니는 모습을 보며 많은 사람들은 ‘정치적 논쟁’에서 벗어난 그의 이미지가 좋다고들 한다.

한편 이명박 정부는 출범 3개월만에 최악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강부자 내각, 대운하 강행, 영어몰입교육 등이 민심이반을 부추겼다. 혹자는 “이명박 정부가 이렇게 설쳐대는게 참 피곤하다. 지난 3달이 노무현 정부 5년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듯 새로운 대통령과 ‘전’ 대통령의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그리고 며칠 뒤면 우리는 또 선거를 치러야 한다. 국민들은 혼란스럽다. 부자정부가 서민경제를 살리겠다는 말은 영 믿을 수가 없지만, 그렇다고 지난 5년간 민생경제를 파탄내고 비정규직을 확산시킨 정당을 찍을 수도 없다. 그래서 온갖 여론조사에서 ‘지지정당 없음’ 또는 ‘무응답’이 25%를 상회하고 있다. 지난 대선의 기록을 깨는 역대 최저 투표율이 예상되고 있다. 정치에 대한 냉소와 허무주의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무엇이 한국 정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 “독재타도! 민주쟁취!”를 외치던 이들의 비판의식과 뜨거운 함성은 다 어디로 갔는가?



87년 이후 20년이 남긴 것 - ‘정치적 대리주의’의 환상

현재 드러나고 있는 정치적 허무주의는 87년 6월 항쟁의 부정적 결과에 기원을 둔다. 이는 혹자들이 말하듯이 “정치적 민주주의는 달성되었는데, 경제적 민주주의가 달성되지 못했다”는 정도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 제한된 정치적․절차적 민주주의의 함정이 대중의 더 많은 민주주의를 차단하는 역설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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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의 한 축을 이루고 있던 보수야당은 당시의 모든 사회경제적 쟁점들을 ‘직선제 개헌’이라는 단일한 법․제도적 이슈로 소급시켜버리고, 이를 벗어나는 요구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외면했다. 이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신군부세력과 6.29협약(pact)을 맺고 곧장 대선 준비모드로 전환했다. 즉 이들은 사회변혁에 대한 대중적 열망을 스스로 잠재우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문제는 많은 민주․진보진영에서도 이런 흐름에 편승해 갔다는 것이다. 권력이 가히 초법적, 카리스마적 통치에 의존했던 87년 이전의 상황에서 사회운동들은 굳이 투쟁의 적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87년을 경유하면서 권력은 일정한 수준에서 대중들이 요구하던 제도적 틀을 양보했다. 그런 면에서 직선제는 마치 국가가 전 국민에게 권력을 1/n로 똑같이 나누어 주는 듯한 환상을 유포했다. 국가권력은 이제 이 1/n의 권리를 어떻게 써먹을지 논의하는 정도까지만을 사회운동의 활동 영역으로 허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은폐하고 있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더욱 심화된 신자유주의적 흐름에 따라 국내 재벌들은 초민족적 금융자본과 손잡고 노동자의 권리를 더욱 탄압하면서, n/n 아니 2n/n, 3n/n 이상의 권리들을 누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국가권력은 대중들이 이 허구적인 1/n의 권리 이상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탄압으로 일관했다. 이제 사회운동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낙천낙선운동 또는 공정선거감시활동 정도 뿐이다. 그 결과 우리의 대표가 군인에서 민간인으로 그리고 다시 진보인사로 바뀌었지만, 그 ‘대표’들이 갈수록 심화되는 신자유주의와 비정규직 확산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을 대변해 주지 않았다. 정치의 주체가 되어야 할 노동자와 농민 등 대다수의 서민들은 여전히 배제되어 있다. 그들에겐 오로지 투표소 안에서만, 그것도 답을 잘 모르는 객관식 문항에 답을 체크하는 것처럼 불안하고 신뢰할 수 없는 자유만이 주어진 것이다.



정치의 상품화??

물론 직선제는 87년 항쟁의 소중한 성과다. 문제는 직선제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쟁취하는 과정이고 내용이다. 그것이 국가권력에 의해 심각하게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18대 총선은 미디어와 상업주의가 결합되면서 대중정치의 장(場)이 되어야 할 선거의 의미를 또 한번 왜곡시키고 있다.

2000년 이후 선거에서는 옥외 연설회가 금지되고 미디어를 통한 선거광고가 늘어났다. 특히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돌아다니다 보면 플래시 광고가 눈에 많이 띤다. 그런데 당명을 지우고 본다면 어떤 당의 광고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한 내용의 문구들로 가득하다. 또한 언제부턴가 공직자 선거에 눈에 띄게 연예인들이 많이 따라붙고 있다. 기업이 CF모델을 섭외하듯이 정당을 홍보하는 선전도구로 연예인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선거에서 대중의 능동적 참여가 배제되고 단지 표 찍는 기계가 되어버리면서, 선거운동은 갈수록 더 많은 표를 벌기 위한 ‘정치상품’ 판촉행사가 되어가고 있다. 전국의 어떤 편의점에 가도 똑같은 상품이 진열되어 있는 것처럼, ‘정치의 상품화’로 인해 전국에 어떤 선거구에 가더라도 ‘개발’과 ‘성장’이라는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공약들뿐이다. 한나라당의 대운하 공약을 맹비난하고 있는 민주당에서 이명박의 청계천 공사를 연상시키는 ‘도림천을 관광특구로’라는 공약을 내건 것만 봐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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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만고만한 저질 정치상품들의 범람은 정치의 주체여야 할 대중들을 객체로 전락시킨다. 특히 이번에 민주노동당이 내건 <88만원세대특별보호법>을 보면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호’해 주겠답시고 이들의 권리를 박탈한 <비정규직보호법>이 연상되기도 한다. <88만원세대>라는 책은 분명 “20대여, 토플책을 덮고 바리케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는 말로 선동하고 있다. 그런데 이 뒤틀린 선거판이 <88만원세대>담론을 제 멋대로 가져다 쓰면서 20대를 정치의 객체로, 보호받아야만 하는 나약한 존재로 만들고 있다.



지난 10년, 잃어버린 것은 ‘대중정치’다!!

부실하게 획득된 직선제의 가장 비극적인 결말은 더 이상 1인1표제의 원칙마저도 지켜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재 일용직, 비정규직 노동자가 많은 사업장의 대부분은 공휴일로 지정된 선거일에도 쉬지 않는다. 이런 사업장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러는 사이 가진자들의 구미에 맞는 공약들만 쏟아져 나온다. 선거일에 쉬지 않는 노동자들과 저질 정치상품들에 질려서 투표를 포기한 사람들을 배제한 채, 부자들만을 위한 투표가 버젓이 진행되고, 그렇게 뽑힌 사람들이 금배지를 단다. 그러나 새우깡이라는 불량식품에서 생쥐머리가 나오듯이 이런 불량 정치상품들에서는 필연적으로 부정부패, 비리, 노동탄압, 생태파괴가 나올 수밖에 없다. 이것은 진보정당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지난 10년간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과연 무엇인가? 정확한 지표상으로 경제성장은 지체되지 않았다. 재벌들은 국경을 넘나들면서 부를 축적하는 새로운 경제성장의 터전을 닦았다. 반면 수많은 대중들이 실업자가 되고, 사회적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87년 이후 획득된 허울 좋은 직선제의 평등담론이 이런 모순을 가리고 있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경제성장이 아니라 바로 부조리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다. 87년 6월 그렇게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 외쳤던 대중들의 힘. 그 잃어버린 힘을 다시 되찾아야 한다. 이제 선거라는 ‘제한된 권리’를 넘어선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할 때다.

Posted by 행진

2008/04/01 03:50 2008/04/01 0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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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08/04/01 18:29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2. 비밀방문자 2008/04/01 18:48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1. 행진(건) 2008/04/01 23:59 # M/D Permalink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다 득표'라는 말은 "최다 득표율"로 고치면 되겠군요.
      그리고 '마담'이라는 말에 대해 지적해주신 것도 동의합니다.
      수정하겠습니다.

      그리고 생쥐머리가 나온 새우깡은 불량식품이 맞는 것 같습니다.ㅎㅎ

  3. 보스코프스키 2008/04/06 20:52 # M/D Reply Permalink

    우리의 대표가 군인에서 민간인으로 그리고 다시 진보인사로 바뀌었지만 ===> 우리의 대표가 군인에서 민간인으로 그리고 다시 자유주의 인사로 바뀌었지만 이렇게가 맞지 않나요. 민간인인 김영삼을 민간 극우주의자로 볼 때 이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더 지적하자면 민주․진보진영이 아니라 민주․자유진영이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아울러 사진 중엔 심상정 - 문소리의 선거운동사진인데 반해서 비판은 민주노동당 것 만 있습니다. 진보신당의 사회연대전략에 대한 비판도 있는 데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수고 하십시요.

  4. 행진 2008/04/09 00:44 # M/D Reply Permalink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진보, 자유 등과 관련된 개념들에 대해서는 엄밀한 규정을 사용하지 않고 써서 세심하게 글을 읽으시면 그런 차이가 드러날 수도 있었겠네요. 김영삼 정권이 '문민정부'를 들고나왔다는 점에서 시기규정의 도구로 사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또한 우리가 흔히 '진보진영'이라 부르는 세력들도 직선제에 대한 환상을 공유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것 같습니다.

    그리고 심상정-문소리 사진은 바로 위에서 설명하고 있는 '정치의 상품화'라는 측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실었습니다. 최근 진보신당의 선거운동이라는 것이 (김석준 대표도 인정했듯이) 스타마케팅에 의존하고 있는 경향이 있죠.

    그리고 사회연대전략에 대한 비판이 있다고 하셨는데, 어떤부분을 두고 말씀하신 건가요? 딱히 그런 부분을 지적하진 않았는데요...

  5. 금복주 2008/04/23 16:33 # M/D Reply Permalink

    진보신당 당원으로서 뭐 그냥 가려다 한마디 하고 적고 가렵니다.
    글에서 풍기는 노린내를 참을수가 없군요....

    당신들이 말하는 정치적 상상력이라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가요? 대중정치를 말하지만 실제적인 실천을 어떻게 하는가가 중요하고 고민되어야 하고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선거는 그러한 고민들을 대중에게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장입니다. 그러고 그런 설천의 장이 선거때에만 매몰되어지지 않고 일상적인 정치활동의 공간으로 지역에서 실천되어져야 합니다. 그러한 예는 민주노동당시절 활동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이랜드 투쟁을 촉발한 단위는 당신들이 더럽다고 참여하지 않았던 정당의 당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주말마다, 금요일마다 집회에 참여하고 대중에게 선전하고 있는 많은 당원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것들이 정당정치의 참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많은 진보신당 당원들이 만들어 가고 싶은 정치의 모습이기도 하고요..(물론 지금은 둘로 쪼개져서 활동하고 있지만...ㅎㅎ), 물론 학생단위들의 열혈적인 연대에도 눈물겹게 고마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민들을 대중에게 선전할 수 있는 선거라는 공간과 그것에 대응하기 위한 당원들의 모임을 이렇게 폄하 할 수 있는 겁니까? 오히려 그것을 비켜가는 당신들의 모습이 비겁해 보입니다.

    진보정당 운동은 이러한 고민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정치가 더럽다고 발에 진흙을 붙치지 않겠다는 당신들의 지난 과거를 한번 돌아보십시요..

    학생운동은 정당운동이 갖는 틀에서 벗어나 좀더 자유로운 모습으로, 실천적 활동으로 빛을 발하기를 희망하는 한사람이지만 이런식으로 정당운동을 폄하하는 글을 볼때 화가 치밀어 오름을 느낍니다.

    또하나..
    위 사진의 문소리씨나 김부선씨, 하리수씨등은 타의에 의해서 동원된 스타들이 아닙니다. 그건 당신도 알고 활동하는 당원이며 모두 아는 사실입니다.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와 가장 근접한 정당의 선거운동을 스스로 자청해서 참여한 운동원입니다. 진보신당이 무슨 돈이 있어 그들을 동원한 것이라 생각하시지는 않겠지요?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적극적으로 선전하는 당원이고 당신이 말한 잃어버린 대중정치를 스스로 찾으려고 하는 대중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사진을 정치의 상품화라는 제목의 글에 끼워넣어야 합니까?

3.8여성의 날 Review

페미니즘으로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신자유주의가 야기하는 ‘고용 없는 성장’과 ‘노동의 불안정화’, ‘빈곤의 극심화’ 속에서 대다수의 여성이 노동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여전히 뿌리 깊은 “가족임금 이데올로기”로 인해 여성의 노동은 남성 생계부양자의 노동에 대한 ‘보충물’로 간주되면서 저임금이 정당화 됩니다. 정부는 오히려 가족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저출산 정책, 사회서비스 정책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대다수의 여성이 저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와 가정 내 재생산노동의 이중부담을 전가 받고 있지만, 사회는 ‘알파걸’ ‘골드미스’ 등 소수의 성공한 여성에게 주목하며 ‘개인이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유포하면서 오늘날 여성의 문제가 사회구조적인 문제임을 은폐합니다.

신자유주의 여성활용전략 반대! 여성노동권 쟁취! 페미니즘으로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기조로 학생기획단을 꾸려 3.8 여성의 날 투쟁을 진행했습니다. 3.8 투쟁을 준비하는 여러 학교에서 모여 기조를 논의하고, 고민을 나누고, 다양한 실천을 기획했습니다. 학내 여러 단위들과 실천단을 꾸리거나, 새내기들과 실천단을 꾸리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3.8 여성의 날의 역사와 의의에 대해 토론을 진행하고, 학내에서 선전전, 광장사업을 벌였습니다.

여러 사회단체와 노조와 함께 <3.8 세계여성의 날 100주년 투쟁 기획단>을 꾸려서 그동안 별개의 실천이 되어왔던 여성권-노동권의 결합을 위해 노력하면서 투쟁하는 여성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3.8을 만들었습니다. 3월 3일은 기념하는 3.8이 아니라 투쟁하는 3.8로 만들 것을 결의하고 알리는 기자회견을 갖기도 하고, 여성 노동자들이 직접 삶과 투쟁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야기마당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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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6일에는 학생기획단에서 여성 노동자와의 간담회 <신자유주의와 불안정노동에 맞선 여성들의 투쟁>을 진행했습니다. 연세대 미화 노동자, 기륭 노동자들이 어떻게 투쟁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 여성노동자분들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회서비스 시장화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의 최예륜 동지는 정부가 시행하는 사회서비스 시장화 정책의 문제점과, 사회서비스는 누구나 당연히 누릴 수 있는 보편적인 권리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쉽게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학생기획단의 지인 동지의 발제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여성 인력이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와 ‘여성발전담론’이 실제 여성의 삶을 은폐하고 있음을 분석하고, 여성들의 저항과 연대로 투쟁하는 100주년 3.8을 만들어가자는 내용이 담겨있었습니다. 토론은 길게 진행되지 못했지만 여성노동권 쟁취의 실내용은 어떠해야 하는지 고민을 나눌 수 있는 계기였습니다. 간담회가 끝나고, 기륭과 연세대 분회에 드릴 플랑에 연대의 메시지를 쓰면서 결의를 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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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울 7일에는 신촌에서 있었던 <이랜드-뉴코아 대학생 공동 불매운동> 기자회견과 선전전에 참가했습니다. 계속해서 교섭을 거부하며 노조를 해고하는 이랜드는 중국법인 수익을 배수진으로 삼고, 노조 말살을 목표로 마지막 버티기에 전략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랜드-뉴코아 노조는 이랜드 중국법인이 홍콩증시에 상장되는 것을 저지하는 싸움을 벌이고 있고, 대학생들은 이에 연대하여 이랜드그룹 소속 의류브랜드 불매를 선언하며 이를 알려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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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8일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서울지역 여성노동자 한마당이 열렸습니다. 많은 예산을 들여 준비한 주류여성운동의 기념행사와는 대비되는, 여성노동권을 중심으로 여성운동의 현실과 과제를 이야기하는 자리였습니다. 이주, 학교 비정규직, 이랜드, 뉴코아, 보육 노동자 등 각기 다른 조건과 상황에 처해있지만, 신자유주의 하에서 박탈되는 여성의 권리를 쟁취하고자 하는 여성노동자들의 감동적인 발언이 이어졌고, 학생들도 퍼포먼스, 몸짓 공연이 있었습니다. 이후 전국여성노동자대회에 참가하고 문화제로 오는 길에 성신여대 입구역에서 성신여대 정문까지 걸어오며 3.8 여성의 날을 알리고, 여성의 권리를 이야기하는 선전전을 진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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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8일 저녁에는 성신여대에서 문화제 <100 To The Future>가 열렸습니다. 문화제가 시작하기 전, 부대행사로 각자의 소망을 담는 100피스 퍼즐 맞추기와 이랜드 불매운동 선언, 여성운동네트워크(준) 풀씨가입 등이 있었습니다. 알파걸인 ‘오로라’와 쌍둥이 오빠인 ‘오마르’가 100년 전 ‘루시’의 메시지를 발견하면서, 타임머신 주전자와 함께 시간을 여행하며 일상을 돌아보게 되는 줄거리였습니다. 100년 전 여성들이 노동의 권리를 외며 거리로 뛰쳐나오는 재현극은 중앙대 새내기들의 열연이 돋보였죠^^ 학교에서 겪게 되는 남성 중심적 술자리 문화에 대한 고민, 가정에서 엄마가 일과 가사의 이중부담을 겪는 상황, 학교에서 학내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와의 마주치는 상황을 고대, 성균관대, 성신여대에서 재기발랄한 상황극으로 만들었습니다. 모두의 소망을 담아 종이 비행기를 날렸는데, 성신여대 미화 여성노동자분이 쓴 메시지가 무대로 날아들었어요. 홍대에서 이랜드-뉴코아 여성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담은 자작곡 공연이 있었고, 마지막으로 학생기획단 단장 지인 동지가 3.8 투쟁을 돌아보며 느낀 것들에 대해 발언하고, 3.8이 끝이 아닌, 여성의 권리 쟁취를 위한 싸움의 시작으로 만들자는 결의문을 낭독했습니다. 많은 예산을 들이거나, 전문가들이 준비한 것이 아니라 미흡한 점도 있었지만, 학생들이 모여 컨셉에서 전체 극 내용, 상황극, 영상, 소품까지 함께 고민하고 만든 소중한 자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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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으로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종이비행기와 100피스 퍼즐에 담겼던 소망, 3.8 투쟁을 진행하며 느꼈던 감동을 아직 기억하고 있죠? 또 다른 세계를 가능하게 할 우리의 페미니즘,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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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행진

2008/04/01 03:27 2008/04/01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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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행진에서 보낸 편지]


사발식이 여성주의랑 무슨 관련이 있냐구?


관악 보람



·8 여성의 날 문화제에서 사발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었습니다. 누군가는 사발식이 왜 여성주의랑 관련이 있는지 의문을 가졌을 것 같습니다. ‘남자지만 사발식을 싫어하는 남자’도 ‘여자지만 사발식을 즐기는 여자’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여성주의를 생물학적인 성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두 사례를 한 번 비교해봅시다. 저에게는 자기 자신의 외모에 아주 관심이 많고, 목소리 톤이 다른 남자들에 비해 높은 남자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 그런 그 친구는 ‘남자 아이가 왜 그러냐?’, ‘차라리 ‘여자’로 태어났어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식의 말을 종종 듣게 됩니다. 반대로 목소리도 크고 운동에도 관심이 많고 늦게 까지 남아서 잘 노는 여자 친구도 있습니다. 이 친구는 여자이지만 다른 친구들 사이에서 ‘남자’라고 놀림을 받습니다. 사회에서 규정하고 만들어낸 여/남이 가져야 할 특성(‘여성성’과 ‘남성성’)이 여/남의 성격에 많은 영향을 주지만, 실제로 여/남이 가지고 있는 성격․취향과 같지는 않습니다.

사발식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학적이고 폭력적입니다. 누군가를 취하게 하려고 술을 엄청 마시게 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폭력적입니다. 그리고 사발식이 가지는 폭력성은 남성 중심적인 문화가 가지는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흔히 여성들은 집단에 충성하지 않는, 분열적인 존재로 여겨지고 남성은 집단에 충성하고 헌신하는 존재로 여겨집니다. 함께 같은 술을 마시고 비우면서 동질감을 내면화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사발식은 그런 의미에서 집단적 폭력의 현장임과 동시에 소위 ‘남성적’ 문화의 재생산 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소위 말하는 병샷을 하는 남학우들에게 우리는 ‘남자답다’라는 수식어를 쉽게 가져다붙입니다. 즉, ‘남자다운’ 병샷, 사발식을 하는 학우들을 띄우고 칭찬하는 사발식 분위기는 은연중에 ‘집단에 충성하는 남성성’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발식은 그 자체가 가지는 폭력성과 사발식 문화가 존재하는 공간의 폭력성과 배제성 때문에 여성주의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남성 중심적인 문화 속에서 남학우와 여학우가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과정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남자’라고 놀림 받는 여학우들은 희화화되기도 하지만, 공동체 내에서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기 위해 힘들어도 술도 잘 마시고 술자리에서 오래 남아 있고, 강하고, 활발한 성격 등을 내면화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내면화된 여성들이 실제로 공동체 내에서 ‘잘’, 그리고 ‘오래’ 남을 수 있습니다. 조신하고 얌전한 ‘여성성’을 가르치는 사회에서 자신도 모르는 와중에 그런 ‘여성성’을 내면화해온 여학우들은 이러한 분위기에서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활발하고 분위기를 띄워야하되 너무 지나치지 않게(밤을 새서 남는, 술을 잘 마시는 여학우에 대해 발생하는 뒷담화를 생각해보세요.) 행동해야 한다는 모순적인 명제 사이에서 여학우는 술자리에서의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신경 쓸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남성 중심적인 (술자리) 문화에서 여성들은 잘 놀면서도 사회가 여성들에게 요구하는 아름답고 연약한 여성이 되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반면 남학우가 ‘여성적’일 경우 거의 희화화되면서, 공동체 내에서도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남성이 다 잘 나서고 분위기를 띄우는 활발한 성격은 아닌데도, 술이 약하고 술자리에서 얌전한 남학우는 ‘에이, 남자가 이것도 못하냐.’와 같은 뜻 모를 비난을 받게 됩니다.(하는 사람들은 장난으로 하겠지만 생각해보면, 정말 ‘이유 없이’, 사회가 만들어낸 ‘남성성’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발식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접해 있는 공간과 우리가 즐기는 놀이문화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남성과 여성에게는 공동체 내에서 관계맺음 할 시간(기회)에서도 차이가 존재합니다. 남성과 여성이 공동체 대부분의 술자리에서 오래 남아 있는 여성이 남성보다 적습니다. 밤에 돌아다니는 것이 안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혹은 (직장 내의 회식 자리에서) 기혼여성의 경우에는 보살펴야 하는 가정이 있기 때문에 오래 남아 있지 못합니다. 또한 흔히 아무렇지도 않은 많은 이야기나 행동들 속에서 여성을 배제하거나 상대화하는 말이나 행동들이 많습니다. 여/남이 함께 놀고 있는 자리에서 여학우들은 잘 알지 못하는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하거나, 옆에 지나가는 여성을 보고 ‘너랑 비교된다며’ 놀리는 남성들의 모습은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도대체 남성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라는 한 남성의 질문에 “당연하지요. 세상에는 그것밖에는 없으니까요.”라고 대답했다는 여성철학자의 말은 여전히도 유효합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들리지 않았던 여성의 목소리를 들어내는 것을 시작으로 여/남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공간과 놀이문화에 대한 고민을 이어나갑시다.

Posted by 행진

2008/04/01 03:09 2008/04/01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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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등하는 등록금을 어찌할 것인가?

- 진보진영의 등록금 정책을 비판한다 -




지난 3월 28일, 시청 앞 광장은 등록금 인상을 규탄하는 목소리들로 가득 찼다. 이 날 투쟁을 위해 각 대학별로는 학생총회가 열리기도 하고, 교대위 총학생회장단들은 삭발농성을 하기도 하였다. 물론 대학 등록금이 브레이크를 상실한 채 몸집을 불려온 것이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니지만, 올 해는 특히 이명박 정권의 출범과 함께 “등록금 1,000만원 시대”라는 말이 현실화 된 상황인지라 그 불만의 수위가 한층 더 높아진 듯 하다. 전 세계적인 곡물가격․유가상승이 현재 붉어지고 있는 물가상승의 주요 원인이라 하지만, 전체 소비자 물가 상승의 2배를 상회한다는 교육물가 상승을 빼놓고는 이 문제를 이야기할 수 없다. 이제 전반적인 교육비용의 상승은 단지 학생들만의 고민을 넘어서 학부모와 교육노동자들의 고민으로 확장되고 있으며, 이번 4.9총선에 임하는 웬만한 정당들이 등록금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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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운데 진보진영 내에서 등록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몇 가지 정책대안들이 제시되고 있다. 교수노조 등에서 줄기차게 주장해 왔던 등록금 후불제부터 시작해서, 이제 민노당 교육공약의 슬로건이 된 학자금 무이자 대출과 등록금 상한제가 그것이다. 진보신당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300대 기업이 등록금 책임져라”는 요구를 하고 나섰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위와 같은 구호들은 당장에 터져 나오는 등록금 폭등에 대한 불만을 지연시키고 관리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 문제 해결에는 조금도 기여할 수 없는 방안들이다. 등록금 후불제, 학자금 무이자 대출, 등록금 상한제, 등록금에 대한 기업 책임 등 일견 대안적인 것처럼 보이는 등록금 정책들은 사실 전반적인 맥락에서 “교육의 소비자주권”이라는 지배적인 논리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이러한 류의 비판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지라 어쩌면 식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도「학자금대출 무이자 청원운동의 정치학」이라는 글이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 홈페이지에 올라오면서 뜨거운 논쟁거리가 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글이 주장하는 바에 대체적으로 동의하면서, 중요한 지점 한 가지를 더 추가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학자금대출 무이자 청원운동의 정치학」에서도 주장하듯이 이와 같은 운동들이 “등록금을 사실상 인정하는 한계”를 지닌다는 점과 관련된다. 다르게 표현하면 이런 요구는 이명박 교육정책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그림자’와 싸우겠다는 것이다.

진보진영에서는 “이명박의 반값 등록금 정책은 사기”라고 말한다. 그렇다. 그것은 분명히 ‘사기’이다. 그러나 등록금 폭등의 원인을 문제 삼지 않는 한 진보진영의 대안도 ‘사기’일 수밖에 없다. 왜 그런지 진보진영의 등록금 정책을 이명박의 등록금 정책과 비교해 보면서 살펴보자.




등록금 150만원 vs 반값 등록금

진보진영은 이명박 정부에게 대선 때 공약으로 내걸었던 ‘반값 등록금’ 정책을 당장 이행하라고 요구한다. 대운하, 영어교육, 노동정책 등 이명박의 정책 모든 분야에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진보진영이 유독 등록금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태도가 다르다. 대체 이명박의 반값 등록금 정책이 무엇이길래 그러는 걸까?

학자금 융자제도 맞춤형 전환 및 다양한 장학제도 활성

- 소득 5분위 대학생까지 등록금 무이자 융자
- 다양한 학자금 융자제도를 마련해 개별 학생의 필요에 맞게 제공
  ° 대출받은 학자금을 졸업 후 소득과 연계하여 상환해 나가는 소득연계형 융자제도
      (income contingency loans)로 전환

[대학강국 프로젝트], 한나라당 이주호 의원 홈페이지, 2007.11.25


위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민주노동당이 그간 주장해 오던 학자금 무이자 대출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소득분포에서 하위 5분위 까지만 적용되는 것이어서 전면 무이자를 주장했던 민주노동당의 입장과는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소득 상위계층이 학자금대출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점을 생각해 봤을 때, 이 정도면 전면 무이자나 다름없다. 또한 졸업 후 소득과 연계해 대출금을 상환하는 융자제도가 실현된다면 사실상 ‘대학 졸업 후 일정 소득 이상이 되면 장기 저리로 등록금을 상환’하는 방식으로 제안되고 있는 등록금 후불제와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2) 대학 기부금 세액공제로 교내 장학금 대폭 확대

정치인 후원금제도와 유사한 제도를 도입하여, 개인의 대학기부금에 대해 10만원까지 세액 공제하도록 하고, 이를 교내 장학금으로 사용하도록 함
     - 매해 대학별로 20~40억 한도 설정

[대학강국 프로젝트], 한나라당 이주호 의원 홈페이지, 2007.11.25


위와 같은 정책은 이미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이 등록금 정책의 향후 과제로서 제시했던 내용(세액공제 제도 등 대학 기부금 확대를 위한 대책 마련)과도 일치한다.
(민주노동당 등록금특별위원회, 『등록금 고통해소, 민주노동당-학생대표단 간담회』, 3p) 이런 주장들은 대학에 대한 재정지원이 그 동안 너무 부족했고, 그래서 다양한 방식으로 재정확보의 활로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교육비용에 대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대학 기부금 문화 조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등록금 문제 해결을 위해 대학의 수익용 자산을 늘려야 한다거나, 진보신당이 주장하는 “300대 기업이 등록금 책임져라”는 요구도 사실 이와 같은 맥락에 서 있다.

또한 등록금 상한제 요구는 △등록금 금액상한제(가계 연소득의 특정범위를 넘을 수 없게 책정 또는 가계 연소득의 1/12을 넘지 못하게 책정) △등록금 인상률 상한제(물가범위 이상으로 등록금을 못 올리게 하는 제도) △등록금 차등 책정제(각 가계의 소득 수준에 맞게 등록금 책정) 와 같이 세부적으로 제시되는데, 이 중 등록금 인상률 상한제의 경우, 물론 인상 제한 폭이 많이 차이 나지만, 기존 정당들에서도 내놓았던 정책이다. 한나라당의 경우 등록금을 소비자 물가 상승률의 2배 이상 올리는 대학에 대해서는 세액공제 혜택을 주지 않는 계획을 내놓았고, 구 열린우리당에서도 2006년에 등록금 인상 폭을 소비자 물가 상승률의 1.5배 이하로 제한하는 법안을 발의했었다.(최순영 의원은 여기에 동의서명을 했다.) 물론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진보진영이 상한제를 요구하는데 있어서의 핵심은 금액상한제(가계 연소득의 1/12를 평균내면 149만원이 나오고, 그래서 이번 총선에서 민노당의 핵심 구호가 “등록금 150만원”이다.)이지만, 이것 또한 폭등하는 등록금에 일정한 규제를 가하고자 하는 수다한 ‘산수놀이’ 중에 하나일 뿐이다.

이렇게 진보진영이 주장하는 등록금 정책과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등록금 정책의 밑바탕이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제시하는 수치와 규제 범위가 다를 뿐이다. 그러니 진보진영이 당당하게 이명박을 향해 ‘반값 등록금’ 정책을 당장 시행하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양 쪽의 등록금 정책에서 공통분모만 모아서 그 논지의 핵심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대학 등록금 부담이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원인은 취약한 대학 재정구조에 있다

게다가 장학제도까지 부실하다

소득 수준에 따른 다양한 등록금 감면 혜택
(등록금 차등 책정 / 학자금 무이자 대출)

민간 재정 활용을 통한 대학재정 확충
(기업의 등록금 부담 / 대학 기부금 세액 공제)

이런 논의 구조 속에서는 당장의 등록금 부담 덜기 위한 즉흥적 정책 제시만 있지, 그렇게 걷힌 등록금과 대학재정 등이 어떻게, 무엇을 위해서 쓰이는지에 대한 분석과 비판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등록금 투쟁에서 “대학의 기업화”에 대한 비판이 사라지고 있다!!

그렇다면 왜 등록금 상한제와 같은 규제책들이 위기의 지연, 아니 위기의 은폐에 불과한가? 이는 최근 대학들의 구조개편 양상을 뜯어보면 금세 답이 나온다. 아래 근거들에 비추어 미리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명박의 반값 등록금 정책은 실현되면 더 문제다!”

최근 많은 대학들의 구조조정 양상을 살펴 볼 때 가장 큰 특징은 대학이 산업체 등과의 계약에 의해 학과를 설치, 운영하는 ‘계약학과’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계약학과는 협약기관의 요청에 따라 맞춤형 교과과정을 편성할 수 있고 수업방식이나 시간도 조정할 수 있다. 게다가 이를 기업 소속 직원의 재교육 현장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 전문대의 경우에는 ‘산업체위탁교육’이라는 형태로 비슷한 형태의 학과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신규 노동자를 채용할 때마다 재교육을 해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다는 면에서 그야말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그런데 이 계약학과들의 특징은 바로 학생들은 등록금을 50%정도만 내면 되고, 나머지 50%는 학교와 기업이 부담한다는 것이다. 계약학과의 사례를 몇 가지만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성결대학교와 계약학과 신․편입생 모집 ((주)KT와 계약)

▶지원자격
KT수도권강남본부, KT수도권서부본부 및 산하기관에서 재직하는 자.
② 신입과정 : 고등학교졸업(예정)자 및 동등학력 인정자.
③ 편입과정 : 전문대졸업(예정)자, 정규4년제 대학 2학년 이수자 및 동등학력 인정자.
(※단, 학업 중 (주)KT를 퇴사할 경우, 학위수여 불가함.)

▶특전
저렴한 수업료 : 일반대학생 수업료의 50%
② 학생들의 업무를 감안한 수업 및 학사 운영
③ (주)KT 및 학생의 요구에 의한 주문식 교과과정 편성
④ 성결대학교 대학원 진학시 수업료 50%의 장학금 지원

성균관대학교 2006년부터 삼성전자와 계약 하에 반도체학과 신입생 모집

산업현장에서 바로 활용할 수 있는 반도체 관련 첨단 고급 기술을 다룰 수 있는 전문인력을 양성을 목표로 함.

▶구체적 특전
1) 4년 등록금 전액 면제
2) 졸업시 희망자 전원 삼성전자 취업 기회 제공
3) 반도체 분야에서 최고 권위를 인정받는 관련 학과 교수들을 비롯하여 삼성전자의 박사급 전문인력과 최고경영자 등을 교수진으로 활용
4) KAIST를 비롯한 학.석사 연계 프로그램 지원(5년만에 석사학위까지 취득 가능)

“이렇게 무릎을 꿇으면 되나요?”
25일 영남이공대 관광계열 ‘아웃백스테이크대학’ 수업현장. 아웃백스테이크 대구 황금점 직원 유은영(23)씨가 학생들에게 고객접대 자세인 ‘Puppy Dog(강아지가 무릎을 꿇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자세)’을 가르쳤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취업할 곳의 선배직원 강의에 진지하게 강의를 듣고 지시에 따라 동작을 반복했다.
수강생 이미지(20)씨는 “자주 가보는 매장의 매니저와 언니들이 교육해 생동감이 넘치고 졸업 후 100% 취업이 보장되는 과정이어서 더 열심히 배운다”고 했다.
기업체들은 효과적인 주문식 교육을 위해 교과과정 편성 때부터 학교 측과 협의, 수업 전 과정을 기업체에서 필요한 과정으로 짜고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이 들어가는 실습기자재나 장비까지 지원해준다.
롯데관광의 경우 영남이공대에 30억 원 상당의 여행관련 소프트웨어를 기증하기도 했다. 또 취업보장은 물론 장학금까지 지급하고 있다.

- 매일신문, 2005.03.28.


이런 사례들을 보면, ‘기업들이 등록금을 부담’해서, ‘반값 등록금’을 달성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최근에 개정된 '산업교육 진흥 및 산학협력 촉진에 관한 법'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많은 대학들이 기업과의 긴밀한 산학협력 속에서 이명박 정부의 ‘반값 등록금’ 정책을 이미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차원에서 말이다. 그래서 사실 교육과정의 구체적 내용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 민주노동당의 ‘등록금 상한제’와 진보신당의 ‘대학 등록금의 기업 책임’ 정책은 위와 같은 산학협력을 강화하는 형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기업들이 손해보는 장사를 할리는 없지 않나?

산학협력을 통해 대학은 그야말로 기업을 위한 노동력 양성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하고 있다. 특히나 지금의 산학협력은 거의 ‘산-학 융합’에 가까운 것으로서 대학과 기업의 경계를 허물어 서로가 서로를 침투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는 영남이공대 아웃백스테이크학과와 성균관대 반도체공학과의 간극이 드러내는 것처럼 곧바로 직업 간 서열화와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위의 성결대학교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산학협력이 기업체 직원연수 프로그램의 형태로 진행되는 경우에는 퇴사는 곧 ‘학위수여 불가’로 연결된다. 산업체위탁교육을 시행하고 있는 명지전문대학의 경우에도 ‘위탁교육을 의뢰한 산업체의 장이 제적처리를 요구하는 경우 / 재학기간 동안 본인의 의사에 따라 해당 산업체를 퇴직하는 경우’에는 제적 처리된다. 교육에 대한 권리가 기업의 이해관계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꼴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위의 사례들을 통해 대충 눈치 챌 수 있듯이 지금의 대학 구조개편은 단지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한 ‘20살 새내기’들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핵심은 ‘평생학습체제로의 전환’이다.(한나라당 교육정책에서도 ‘평생학습계좌제’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기업에 취직한 노동자들도 끊임없는 재교육으로 자신의 직업능력을 발달시켜 생산성을 향상해야 한다. 이것은 개별 노동자의 자발적 욕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살인적인 노동시장의 경쟁구조에 의한 것이다.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서 너도 나도 평생에 걸쳐 학습하려 한다. 물론 평생학습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자본의 이익에 철저하게 봉사하는 불안정노동의 구조 속에서 강화되는 평생학습은 자기욕구에 기인한 것도 아닐 뿐더러, 학력 인플레이션을 심화시키고, ‘평생에 걸친 교육비용의 문제’를 야기 시킨다. 이제 민중들에게 자녀 사교육비 걱정에 더해 ‘성인교육비’의 문제가 다가오고 있는 셈이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등록금 후불제를 시행한다면? 전 생애에 걸쳐 부과되는 대학교육비용을 과연 국가가 감당할 의지와 능력이 있을까? 등록금을 상환 받지 못하는 제도 시행 초기단계에서는 국채를 발행해서 등록금을 대체하겠다는 계획에 따른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결국엔 등록금 후불제 또한 조금 다른 형태의 학자금 대출제도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학자금 무이자 대출 제도는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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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은 급기야 3.28기자회견에서 '학원비 낮추기'라는 공약을 들고 나왔다.>




등록금 폭등의 원인은 바로 “대학의 기업화, 금융투자”에 있다!!

그렇다면 전국을 강타한 대학 등록금 폭등의 원인은 대체 무엇인가? 아래 서강대의 사례가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다.

상아탑마다 돈벌이… '대학의 기업화' 바람 거세진다

서강대는 3일 국내 대학 최초의 기술지주회사인 '서강 미래기술 클러스터(SIAT, Sogang Institute of Advanced Technology·'씨앗'으로 발음)를 설립키로 했다고 밝혔다. SIAT는 연구소 중심의 자유전공 대학원 프로그램과 기술지주회사, 벤처금융회사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산학 클러스터 형태다. (…)

SIAT는 메디컬솔루션, 에너지·환경, 반도체 설계, 정보통신 및 소프트웨어 융합, 디자인공학, 기술경영의 7개 중점 연구과정으로 구성돼 있다. 모든 과정이 공학, 순수과학, 경영학 등 다양한 전공의 교수진에 의해 운영되는 국내 최초의 실질적 융합기술 전공으로 평가된다. (…)

이에 따라 SIAT의 7개 융합기술연구소에서 개발된 기술은 기술지주회사인 '서강테크노홀딩스'에 공급되며, 기술지주회사는 기술과 사업성 심사 후 개별기업에 사업화를 의뢰하거나 자회사를 설립한다.

서강대는 SIAT의 기술사업화를 위해 벤처금융회사 '알바트로스 인베스트먼트'에 대학자금 25억원을 출자할 계획이다. '알바트로스 펀드'에는 서강 동문 벤처기업 5~6개사가 최소 75억원을 투자하기로 해 초기 자본금만 1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

서강대 공학부 유기풍 학장은 "100억원의 초기자본금을 바탕으로 총 400억원 규모의 투자펀드를 조성할 계획"이라며 "이미 1차 기술사업화 과제가 발굴돼 SIAT 연구소에서 제품화 개발이 진행중"이라고 밝혔다.

- 조선일보, 2008.03.05.

앞에서 이야기 한 '산업교육 진흥 및 산학협력 촉진에 관한 법'이 올 해 개정되면서 대학이 기술지주회사를 설립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서강대 외에도 한양대, 서울대, 경희대, 연세대 등도 비슷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 기술지주회사는 계약학과 정도의 산학협력과는 차원이 다르다. 기술지주회사는 대학 자체가 하나의 기업이 되어 기술개발과 판매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활발한 금융투자를 할 수 있는 형태이다. 여기에 대학원생들이 기술개발인력으로 바로바로 활용될 수 있다.

여기서 서강대가 대학자금 25억원을 바로 벤처금융회사에 출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국내 사립대의 재정구조에서 등록금 의존비율이 80%에 이르는 상황에서 이와 같은 대학자금은 바로 등록금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수도권 사립대학들이 매년 법인자산으로 100억원 이상씩 적립해 왔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학의 영리기업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자 한 사립대 관계자는 "정부가 어느 정도 가이드 라인을 정해두고 대학이 자체적으로 투자에 나선다면 그 수익이 학생들에게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조선일보, 같은 기사) 그러나 지금과 같이 불안정한 금융시장에 대학재정을 내맡겨 놓은 상황에서 손실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만약 손실이 발생하게 되면 또 다시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채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등록금 인상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대학원의 우수인력들이 대학기업의 단기적인 기술개발 요구에 따라 불안정하게 교육받고 일하는 구조가 심화될 것이다. 이는 이미 대덕연구단지 등에 만연한 ‘비정규직 과학기술노동자’들의 모습만 봐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게다가 대학의 연구성과에 대한 권리가 곧바로 기업의 특허권으로 이어지게 되면서, 과학기술의 기업독점이 심해지고 그 혜택이 특정계층에게 편중될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대학이 기업을 만들고, 학생들의 학업과 연구성과는 그대로 기업의 지식독점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렇게 대학들이 급속도로 기업화되고 있다. 그런데 대학들은 ‘특성화’, ‘산학협동’을 빌미로 몇 개 학과만 딱 찍어서 등록금 감면 혜택을 주고, 나머지 학과에는 거의 등록금 폭탄을 날리고 있다. 이른바 ‘선택과 집중’이다. 선택받은 학과에만 재정지원이 몰리고 그렇지 못한 학과는 자연 도태 되도록 하는 것이다. 한나라당이 대학교육에 대한 평가․인증․퇴출 시스템을 도입하겠다는 것도 바로 이런 취지에서이다. 이런 산학협동과정에 대한 비판 없이는 절대 등록금 문제를 이야기 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진보정당들의 화살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비판은 커녕 오히려 기업들에게 읍소하고 있지 않는가?




등록금 인상에 반대한다면,
“대학의 기업화 / 금융투자 반대!”를 외치자!!

총선을 앞두고 등록금과 관련된 온갖 정치상품들이 난무하고 있다. 진보진영이든 보수진영이든 할 것 없이 모두다 등록금 문제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근본적으로 교육의 상품화를 비판하지 않는다. 자본의 논리에 종속되지 않는 보편적인 민중의 권리로서 교육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반값이네, 150만원이네, 인상률 제한이네 하는 식의 흥정만이 난무한다. 150만원 등록금으로 받는 교육으로 인해 150만원짜리, 아니 88만원짜리 일자리밖에 얻지 못하는 불합리 한 구조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학의 기업화로 인해 지식생산이 왜곡되고, 자본의 지식독점이 강화되는 것에 대해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저기 ‘교육시장화’라는 닭이 지나간다. 그런데 모두들 ‘등록금 인상’이라는 깃털만 뽑고 있다. 그나마도 다 뽑는 것도 아니고 하나 두개씩 찔끔찔끔 뽑고 있다. 한 두번씩 그렇게 찔끔거리면 닭도 눈치가 있어서 푸닥거리를 하며 도망치기 마련이다. 아니 아예 지붕 위로 올라가 우리를 조롱하게 될지도 모른다. ‘닭 쫓던 개’ 신세가 되고 싶지 않다면 정신 차리고 똑바로 하자. 명심하라. 닭을 잡을 때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야 한다. 닭을 잡겠다고 깃털이나 뽑고 있는 바보 짓을 하지 말자. 등록금 인상에 반대한다면 “대학의 기업화 / 금융투자”라는 모가지를 비틀자!!

Posted by 행진

2008/04/01 03:04 2008/04/01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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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물티슈 2008/04/03 16:51 # M/D Reply Permalink

    글 잘보았습니다.
    매우 적절한 비판이라고 생각하고 많은 부분 동감합니다.
    그런데, 맨 마지막 단락은 좀..........
    아쉽습니다.
    꼭 저렇게까지 안써도 될텐데, 암튼 그렇다구요.

  2. 음.. 2008/04/04 12:17 # M/D Reply Permalink

    지나가다 글을 보고 느낀점은...
    여전히 구호와 담론에 머무르고 있다는 생각..
    대학의 기업화와 금융투자 반대를 외친다고 뭐가 달라지나.

    어쨌든 파열구를 만들어내는게 일차적일텐데.
    그런식의 주장이나 외침이 최소한 대학사회내에서 얼마나 반향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소수 활동가들의 주장에 머무르고 말듯.
    매년 반복되는 등록금 문제와 함께.

경제 문맹 탈출 프로젝트 >>


최근의 경제위기와 인플레이션 사태 분석




남한에서 한 끼 식사를 가장 저렴하게 할 수 있는 라면. 지난 2월 말, 그 라면값이 50원 인상되었다. 그리고 인상 전, 라면 사재기가 일어났다. 물론 라면 한 개의 50원이 모이면 그렇게 작은 돈은 아니겠고, 몇 년 사이 500원에서 1000원에 더 가까워진 라면 가격에서 50원이 더 오른다는 것은 심리적으로도 더 크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 사회가 좀 더 여유로운 곳이었다면 이렇게 50원에 치열해져 미리 최대한 라면을 많이 사놓기 위해 머리를 쓰고 날짜에 맞춰 마트에 가는 일은 적지 않았을까. 라면을 미리 사놓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이 사회를 ‘알뜰한 소비자가 많은 곳’ 으로는 도저히 볼 수가 없는 것이 지금 한국의 현실이다.

한국 밖으로 눈을 돌려보면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농산물 가격 폭등으로 인해 농민들이 전국 곳곳에서 시위를 벌였고 이집트에서는 배급되는 빵을 받으려 줄을 서는 과정에서 싸움이 나거나 쓰러져 사망자가 발생했다. 우울한 것은 세계식량농업기구(FAO)가 이러한 식품 값 상승세가 10년은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직후 밀 값에 이어 쌀값도 하루만에 30%가 가격이 오르는 등, 인플레이션은 점점 빠르게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인플레이션의 진짜 원인?!!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보자. 라면 가격이 50원, 100원씩 슬금슬금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예전의 소비자 물가가 완만히 오르는 것과 지금의 인플레이션은 확실히 그 성격이 다른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농산물과 그에 따른 식료품 가격 인상을 중심으로 한 인플레이션(이를 애그플레이션이라 한다. 애그플레이션은 농업(agriculture)과 인플레이션(inflation)의 합성어로, 농산물 가격 급등으로 일반 물가가 상승하는 현상을 뜻하는 말이다.)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고, 한국에서 상황이 이 정도일 뿐, 세계체계 속에서 이러한 인플레이션에 취약한 경제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곳들은 훨씬 상황이 좋지 않다. 한국에서 IMF의 구제금융 이후에 인플레이션과 관련된 대대적인 보도가 나왔던 적은 거의 처음인데, 그만큼 지금의 인플레이션으로 드러나는 경제 위기가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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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인플레이션의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꼽히고 있는데, 언론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이유를 들면 ① 아시아 신흥국을 중심으로 한 곡물 소비 증가 ② 바이오 연료 붐으로 에탄올 원료인 옥수수 가격 상승 ③ 지구온난화, 기상악화, 경작지 감소로 인한 생산량 감소의 세 가지로 압축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원인들은 분명 사실이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 원인 만으로 하루 만에 쌀값이 30%나 인상되고, 이렇게 단 기간에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최근의 현상의 원인 중 어디에서나 ‘맨 마지막에’ ‘잠깐’ 언급되는 ‘유동성 증가에서 비롯된 투기자본의 유입’ 이라는 원인을 제대로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곡물 재고량이 최저라고 하지만, 정말로 지금 이 ‘재고량 부족’ 이 지금 지구에 60억 명 분의 식량이 필요한데, 50억 명분 밖에 없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거대곡물회사인 카길이 남은 곡물을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곡물의 상품성을 유지하기 위해 바다에 버리고 있다는 끔찍한 사실을, 지금 이 지구에서 무려 120억 명 분의 식량을 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진짜 ‘주된’ 원인은 제대로 이야기되지 않고 있다.



‘유동성 증가에서 비롯된 투기자본의 유입’이 의미하는 바

매우 짧은 말이지만, 그리고 몇몇 경제에 밝은 사람들에게는 매우 간단한 말일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이 말은 하나의 암호와도 같다. 대체 ‘유동성’ 은 뭔가? 유동성은 왜 증가하고 있는 것인가? 투기자본은 어디로 유입하고 있다는 말인가? 등등. 이것을 차근차근 풀어가 보자.

-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 암호를 풀기 위해서는 최소한 작년에 일어났던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뉴스를 잘 챙겨보는 사람이라면 이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경제 위기의 시작점이 된 사건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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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주택담보 대출(모기지대출)은 개인 신용등급에 따라 660점 이상은 프라임(Prime), 660점 미만 620점 이상은 알트-에이(Alt-A), 620점 미만은 서브 프라임(Sub-prime) 이렇게 3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이렇듯 서브프라임 모기지론(Sub-prime mortgage loan)은 신용조건이 가장 낮은 사람들을 상대로 집 시세와 비슷한 수준으로 대출을 해주는 대신 금리가 높은 미국의 대출 프로그램이다. 문제는 ‘고금리’ 인 이 프로그램에 전 세계 투자 기관들이 돈을 많이 묻어놓았었다는 것, 그리고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인플레이션을 우려한 금리 인상 정책으로 미국의 부동산 투기 붐이 급격히 꺼졌다는 점이다. 은행에서 돈을 빌려 부동산 투기를 했던 이들이 고금리가 부담이 되어 미국 부동산 시장에서 손을 뗀 것이고, 그러자 주택 가격이 폭락하였다. 이에 따라, 서브 프라임 등급의 대출자들이돈을 빌릴 당시의 집의 시세보다 훨씬 떨어지게 되었고 이들은 집을 팔아도 빚을 갚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흑인, 히스패닉을 중심으로 한 서브 프라임 대출자들은 집을 잃었고, 투자 기관과 서브 프라임 모기지 회사는 손해 분을 감당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모기지 사태는 2007년 8월, 급락한 주택 시세로 인해 투자분을 회수하지 못한 미국 10위권인 아메리카 홈 모기지 인베스트먼트(America Home Mortgage Investment)가 파산보호를 신청하면서 시작되었다. 이것이 전 세계적인 위기가 된 것은 모기지 업체 - 전 세계 투자기관 - 동네 은행의 고수익 펀드로 이어지는 연쇄 구조로 지금의 세계 경제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렇게 금융경제로 온 세계가 연결되어 있는 지금의 상황은 이윤율 저하 경향을 극복하기 위해 자본이 금융적 팽창을 하고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짚고 넘어가자.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바로 이 사태의 여파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다음으로 넘어가면 되겠다.

- 미국의 금리 정책

세계 자본주의의 헤게모니 국가인 미국의 통화정책은 전 세계 경제에 영향을 미친다. 다른 나라들이 아무리 자국의 금리를 조정해도 미국의 통화정책에 비해 그 영향력은 미미하다. 지난 몇 년간 한국은 미국에 비해 콜금리를 계속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하였는데 이도 금리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2001년 IT 버블 붕괴로 인해 2003년까지 저금리 정책을 도입했으나, 2004년 6월부터 경기가 회복되고 있다는 판단과 함께 1.00 % 였던 금리를 서서히 올려 2006년 6월 5.25% 까지 올린 이후 1년 동안 변동 없이 고금리 정책을 유지해왔다. (앞서 말했듯 이 고금리 때문에 부동산 투기 붐이 꺼졌다.) 그러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직후인 2007년 9월부터 미국은 공격적인 금리 인하 정책을 취하고 있는데, 이전 금리 변동폭은 보통 0.25% 였는데 비해, 지금은 한번에 0,50% 혹은 0.75%씩 금리를 내리고 있다. 3월 18일에 다시 금리를 0.75% 인하하여 현재 미국의 기준금리는 2.25%이다. 이를 1.5%까지 내리는 것이 미국 FRB의 현재 목표이다.

미국의 공격적인 금리인하로 인해 통화량이 급격히 늘어났는데 (기본적으로 고금리는 통화량을 줄이기 위해, 저금리는 통화량을 늘리기 위해 취해진다! - 금리가 높으면 돈이 은행으로 몰리고 금리가 낮으면 돈을 은행에서 더 빌려가겠죠? ^^) 바로 이를 ‘유동성의 증가’ 혹은 ‘과잉유동성’ 이라고 한다. 보통 통화량이 이렇게 늘어나면 수요가 늘어나서 인플레이션이 일어난다는 것이 경제학의 보통 이론이다. 또한 이 미국의 저금리 정책으로 인한 통화량 증대 - 과잉유동성 확대가 바로 현재의 인플레이션의 원인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니다. 아직 암호는 반밖에 풀리지 않았다. 계속 가보자.

- 달러 약세

달러 약세는 2003년부터 지속되고 있으며, 그 이유는 미국의 경기 침체 때문이다. 수출을 위해 일부러 달러 약세를 부추기기도 하고, 미국경제의 신뢰도가 약화되어 달러 가치가 떨어지기도 한다. 최근엔 공격적인 금리 인하가 달러 약세를 가속화하고 있다. 금리를 인하하면 투기 자본은 더 높은 이자를 찾아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게 되는데,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팔고 다른 나라의 화폐를 사고자 하므로 달러 가치가 더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달러 약세가 원자재 가격 (석유, 금 , 농산물)의 상승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달러 약세가 지속되면 달러화에 픽스되어 있는 상품들의 가격이 상승하기 때문이다. 달러가 약세인데다 인플레이션이 계속 되면 달러를 계속 가지고 있는 것이 손해이므로 투기 자본은 달러를 팔고 다른 곳에 투기를 하기 마련인데, 바로 지금 투기 자본들에게 가장 좋은 투자처는 달러 가치가 떨어질수록 상대적으로 가격이 올라가는 석유, 금, 농산물인 것이다. 이것이 애그플레이션, 또는 인플레이션을 가속화시키는 가장 큰 원인이다.



한국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나

모기지론 사태로 당연히 동네 은행의 투자 상품에 투자를 했던 한국의 사람들도 피해를 봤다는 것, 그리고 애그플레이션의 영향 역시 앞서 이야기 하였다.

여기에서 최근 요동치고 있는 환율 이야기도 잠깐 짚고 넘어가자. 이것도 앞서 설명한 것과 모두 연결이 되어 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미국 경제가 금융위기에 빠져들면서 달러 유동성 부족 사태에 직면했고, 때문에 시장에 돈을 풀기 위해 저금리 정책을 취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외국 시장의 달러들을 다시 미국으로 가져가는 작업을 하고 있다. 앞에서도 계속 나왔던 용어이지만 이 ‘유동성’은 기업의 자산을 필요한 시기에 손실 없이 화폐로 바꿀 수 있는 ‘안정성’을 의미하는 경제학 용어이다. 즉 유동성이 부족하다는 것은 투자 대상을 바로바로 현금으로 바꿀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여기서, 글을 읽으며 각 사안들의 연결고리를 잘 찾고 그림을 제대로 그려온 사람이라면,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다. 분명 미국의 저금리 정책 때문에 ‘과잉유동성’ 상황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유동성의 부족 때문에 위기가 일어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문제는 통화량이 부족해서 유동성의 위기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부동산 가격 급락으로 인한 모기지 사태, 이를 이은 베어스턴스 부도로 갑자기 유동성 위기가 일어나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자본들이 이를 구제하기 위해 돈을 푸는 것이 아니라 다른 투기처로 이동할 뿐이고, 베어스턴스 등의 구제를 위한 미 정부의 저금리 정책이 역시 통화량이 심각하게 부족한 상태가 아닌데도 돈을 시장에 푸는 것이 되므로 과잉유동성이 확대되는 것이다.)

문제는 미국 내 부족한 달러를 어디에서 메꿀까, 라고 했을 때 한국이라는 신흥 시장이 가장 만만한 곳이라는 것! 이것이 세계적인 달러 약세에도 불구하고 한국 내에서는 달러 강세 - 원 약세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것이 미국 발 금융위기에 매우 빠르게 한국에도 영향을 미치는 이유이기도 하다. 외국 투기 자본이 갑자기 원을 대규모로 팔고 달러를 사들여 최근의 환율급등이 일어났고, 이러한 급격한 환율변동으로 인해 한국 금융시장의 변동성도 확대되었다.

이렇게 주식시장에서 외자 철수가 있지만, 또한 채권시장에서는 외국인들이 그 몫을 늘리고 있는데, 그 이유는 미국과 한국의 금리 차가 벌어져 그 사이의 재정거래를 통해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달러화의 변동은 이 자금의 철수를 야기할 수 있고, 이러한 급격한 철수는 채권가격을 하락시키고 이자율을 급등시킬 수 있다. 최근 재정부는 금리 인하, 한국은행은 최소한 금리 유지로 물가안정을 도모해야 한다며 금리 정책에 대한 의견 차이로 대립 중이다.



그들의 위기 극복 전략.

인플레이션을 동반한 경제 위기는 한국의 이명박 정부의 인기를 하락시키고 있기도 하지만, 역시 전세계적으로 보면 식량위기에 처해 있는 나라들은 지배계급 또한 최대의 위기에 처해있다. 지배계급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민중들이 굶는 것’ 이 아니다. ‘민중들이 배고픔으로 인해 일으키는 소요’ 가 그들에게는 가장 큰 공포이다. 앞서 예를 든 아르헨티나, 이집트뿐만이 아니다. 예멘에서는 수도에서 수천명의 시민들이 물가안정을 잡지 못한 정부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였고 아프리카 짐바브웨는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에 의해 28년 동안 독재를 해왔던 여당의 지지율이 하락,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커다란 위기는 아니지만 미국에서도 대선 주자들간에 서브프라임 해법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을 정도로 지금의 사태는 쉽게 지배계급이 우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경제 살리기’ 하나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명박 정부로서는 이런 대외적 조건을 어떻게 극복하고 경제 성장 6%를 달성하느냐가 큰 고민일 것이다. 우선 물가안정책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한 이명박 정부는 ‘생필품 52개 품목 집중관리’ 와 ‘곡물 ․사료 등 수입 원자재 관세 폐지’ 등을 그 해결책으로 내놓았다. 모든 언론에서 ‘실효성 없을 것’ 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생필품 집중 관리’ 와 평상시 시행했다면 농민들의 반발에 부딪혔을 ‘곡물 관세 인하’를 해결책으로 제시한 뒤 결국은 현재의 인플레이션을 자신의 정책 기조와 맞게끔 활용할 수 있게끔 하는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는데 주력하고 있다. “물가안정이 7% 성장이나 일자리 창출보다 시급해진 상황” 이라는 발언은 마치 자신의 기존 정책기조를 바꾼 듯한 느낌을 주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이명박은 23일 세계 4대 경제지와의 기자회견에서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기업과 근로자들이 화합해 생산성을 높이는 것 뿐” “민간이 더 잘할 수 있는 것은 과감히 역할을 줘야 한다는 관점에서 민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고 입장을 밝혔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돌이켜보았을 때 “기업과 근로자들의 화합” 은 생존권을 위한 노동자들의 파업을 억누르기 위함이었음을, “민영화를 통한 위기극복” 은 엄청난 구조조정을 통해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임금을 삭감하기 위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생각해보라. 자본의 저항은 엄청나고 이미 올린 가격을 기업이 다시 내리지는 않는다. 결국 임금동결이 인플레를 막는 가장 쉬운 방법이며, 이미 많은 기업에서 올해 임금동결 조치를 취하고 있다. 결국 이명박 정부를 비롯한 지배계급은 경제위기를 또 다시 민중들에게 전가하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앞에 서민들이 주로 사는 생필품을 관리해주겠다는 허울 좋은 정책을 방패로 한 채로 말이다.



기를 올곧게 분석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이 이 위기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위기’ 에는 누가 그 고통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지도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경제 상황이 좋을 때 우리에게 피부로 크게 와 닿지는 않지만, 경제 상황이 조금만 나빠지면 크게 타격을 받아 온 것을 떠올리면 답은 쉽게 나온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때, 수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었지만 지배계급은 집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보다 파산한 금융회사에 대한 지원 대책을 세웠다. 이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는 회사 하나 파산하면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지 않냐, 금융위기는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라는 것이었을 것이다.

노무현 집권기에 느리지만 국민 총생산이 서서히 증가했고, 결국 최근 누구나 잘 살게 될 거라는 기준처럼 여겨졌던 ‘국민소득 2만불’을 넘어섰지만 이상하게도 돈이 없어 식료품을 훔친 이들의 가슴 아픈 뉴스는 더 자주 인터넷 뉴스에 뜨는 것만 같다. 그렇게 느껴진다면 지금의 경제 상황에, 경제 정책에, 의문을 가져보자.

뉴스의 헤드라인에 ‘경제 성장보다 물가 안정을 중요시’ 한다고 떠도 내용을 들여다보니 결국은 그렇게나 비판받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지배계급이 위기를 어떤 식으로 전가하고자 하는지를 알 수 있다. FTA투쟁이 전국적으로 벌어졌을 때 ‘맞아, 다른 건 둘째치고 농민문제는 정말 심각하지’ 라고 생각했던 많은 사람들이 현재 ‘물가안정을 위한 관세인하’ 가 농민들을 다 죽이는 정책이라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이쪽과 저쪽문제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으로 지배계급은 어떨 땐 농민에게, 또 어떨 땐 소위 도시 중산층에게, 점점 위기를 전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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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를 비판하든 안 하든 결국엔 펀드 투자를 권하며 민중들을 모두 금융세계화 질서에 포섭시키는 것이 모든 경제뉴스나 경제지가 하는 일이고 그 속에서 서브프라임 - 미국의 저금리 정책 - 달러 약세 - 인플레이션 - 위기 전가의 방법을 제대로 분석해주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러한 경제기사에서 선동하는 ‘펀드 하면 누구나 잘 살 수 있다’ 는 것의 ‘누구나’ 가 왠지 뻥인 것 같다고 느껴진다면, 그들이 하는 이야기 속에서 도대체 어디가 거짓말인지를 찾아보자. 그러면 지금의 인플레이션의 진짜 주된 원인이 결국은 ‘투기 자본’ 이 농산물에 몰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투기 자본이 자신의 이윤을 증대시켜나가는 것이 경제 위기를 초래하고, 그 위기는 또 다시 지배계급이 아니라 민중들 개개인에게 전가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배계급의 만든 무수한 눈가리개를 걷어내고 이 구조를 온전히 볼 수 있을 때, 올바른 방향으로의 저항은 시작된다.

Posted by 행진

2008/04/01 02:10 2008/04/01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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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해방전후사

- 4. 3 제주항쟁을 맞이하여 -


잠들지 않는 남도

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녁의 땅

어둠 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

검붉은 저녁 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리아 ~

아 ~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






0. 들어가며

1945년 조선의 해방부터 1953년 한국전쟁의 종전까지, 8년간의 기간을 보통 해방전후사라고 부릅니다. 8년 간의 기간이지만 이 시기는 한국 현대사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쟁점을 제공합니다. 진보적인 역사학계의 출현의 상징으로 1980년에 출판된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언급하고, 뉴라이트 부상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출판이 있습니다. 이처럼 해방전후사를 바라보는 시각, 그리고 그것을 대중에게 이야기하고 학습해 왔던 관점 자체가 이데올로기 투쟁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해방전후사는 ‘혁명의 광장’이었을 만큼, 치열한 계급투쟁의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식민주의 시기에 은폐된 형태로 조직되었던 각종 이념들이 폭발하는 시기가 해방전후이기 때문이지요.

‘일본 놈들이 쫓겨나가고, 미국 놈들이 들어와서 해방인 줄 알았는데 그놈이 그놈이더라~’

이 노래가사는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지만, 한국의 해방 전후사를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할 수는 없습니다. 이 노래가사는 일본이 미국으로 바뀌는 것을 단지 ‘똑같은 놈’(제국주의 세력)이 지배를 한다는 식으로 해석하며, 세계적인 국면의 전환을 인식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한국의 해방전후사 기간은 전쟁 이후 미국 헤게모니의 부상에 따라 자본축적 및 세계적 통치성의 국면이 바뀌는 시기였습니다. 그것은 완결된 형태로 짜여진 것이 아닌 커다란 부침을 겪으며 생성중인 것이었고, 때문에 해방전후사를 일관된 시각으로 바라보기가 어려워집니다. 또한 한국이라는 위치 자체가 미국헤게모니 성립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전략적 위치이기 때문에, 한국을 거점으로 하여 동아시아 전체에서 공산주의의 이식을 막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됩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발전주의로의 기틀 짜기가 시작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 헤게모니의 새판짜기가 진행됨에 따라서, 한국의 지배계급들의 동향이 뒤바뀝니다. 이는 한반도에서 좌-우 연합정부의 처음의 계획이, 미국의 전략에 따라 반공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보수주의적 세력의 단독집권으로 바뀌는 일련의 과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지배계급들이 통치를 위한 물질성을 마련하는 과정입니다. 식민지 시기에 착취를 자행했던 민족자본가와 관료들이 했던 방식과, 국가장치들이 행했던 역할들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특히 경찰과 군대와 같은 폭력적 국가장치들은 단순한 억압을 넘어서, 전후 남한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해방 전후사는 가히 민중정치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와 각종 지역위원회, 공장 점거 운동과 대중운동 단위로서 전평/전농 운동, 남로당의 결성과 빨치산 운동... 탁치 논쟁을 둘러싼 치열한 대중운동의 전개,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 4. 3 항쟁과 여순사건 등등. 해방 전후사는 계급역관계가 우위에 있던 시기부터 시작합니다. 하지만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지배계급들은 미군정을 등에 업게 되고, 이를 통해서 계급연관계는 역전되기 시작합니다. 물론 계급역관계가 역전되던 조건들을 단순히 지배계급들의 탄압만으로는 돌릴 수 없습니다. 계급투쟁의 패배는 혁명전략에 있어서 소련이라는 국가의 역할과, 북한의 성립이라는 다른 축의 헤게모니 성립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좌파들이 행했던 전술들에서의 패배가, 계급역관계의 역전을 가져오는 데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패배는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 계급정치와 좌파가 거의 소멸하다시피 하는 조건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계급투쟁에 있어서 또 하나 주목할 수 있는 측면은, 각 분파들 간의 연대연합 전술에 대한 평가입니다. 이런 연대연합과 관련된 논쟁들은 현재의 정치 지형 혹은 민중운동 지형의 동향을 파악할 때에도 충분히 되새겨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특히 해방전후사를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데 있어서는 ‘한국현대사를 만나다’의 총론에서 제시했던 방식으로만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해방전후사 시기는 전 세계적으로 일종의 과도기, 새판짜기의 시기였기 때문에 일관된 흐름으로 역사를 바라보기가 어려워집니다. 따라서 해방전후사는 각 시기별 사실의 순서를 정확히 알아가는 것이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사건 하나하나의 정확한 인과관계의 파악이 아닌, 어떤 구조와 정세들 속에서 사건이 과잉결정 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해방 전후사에서 4.3 제주항쟁은 계급투쟁과 단일국가 수립이라는 ‘민족적’인 목표가 결정적으로 좌절되는 사건입니다. 특히 10월 인민항쟁 이후에도 단선 반대투쟁의 형태로 간헐적으로 진행되던 대중투쟁이 막을 내리고, 유격대 형태의 투쟁이 전개되는 계기입니다. 이 사건은 민중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을 보여주며, 지배계급들이 폭력적 국가장치의 위력을 ‘과시’했습니다. 그리고 4. 3 항쟁은 당해 10월에 있었던 여순 사건과 더불어, 반공주의를 강화하며 민족 안 경계긋기를 강화한 시기입니다. 이러한 경계 긋기의 과정들로 5월의 선거와 제 1공화국의 출범이 가능하게 됩니다.

한국현대사에 있어서 해방 전후사는 가장 역동적이고, 아쉬운 부분이 많은 역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해방전후사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실과 관점을 살펴봐야만 합니다. 물론 우리의 글에서 해방전후사의 모든 사건들과 쟁점들을 다룰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해방부터 4. 3 제주항쟁이 일어나기까지의 약 3년간의 역사를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총론에서 보았던 방법을 위주로 해전사를 바라보는 방식들을 서술할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해방전후사와 그 시기에 있었던 사건들이 갖는 의미를 좀 더 명확히 추출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론적인 해석을 넘어서, 현재의 계급투쟁에 기여하는 역사해석을 만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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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과 저승 사이 - 강요배>


 

(분량이 많은 관계로 첨부하는 파일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행진

2008/04/01 02:06 2008/04/01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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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 유혈사태를 어떻게 볼 것인가?

- ‘종족적 민족주의’를 넘어, 대안세계화-국제주의로.



 

- 회원 LSH




‘선량한 시민’의 관점으로는 티벳 문제를 명확히 바라볼 수 없다.

우리는 지난 3월 10일 티벳 라싸에서 독립봉기 49주년 기념일을 맞아 일어난 시위가 확산되었다가, 14~15일경 중국 정부의 무력진압에 의해 최대 100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비극적인 소식을 접했다. 이러한 참사 이후 대규모의 봉기는 일단 잦아들었지만, 인도에 망명 중인 티벳인들이 8월 개막될 베이징 올림픽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반대운동을 펼치겠다고 밝히고 있는 상황에서, 갈등은 언제고 다시 폭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지난 50여 년 동안 티벳 민중들에 대해 행한 압제와 폭력이 야만적인 것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1959년 독립봉기를 진압한 이후부터 전면적인 통치를 시작한 중국은 티벳을 ‘시짱(西藏) 자치구’로 영내에 편입시키고 불교(라마교) 탄압정책, 동화정책 등을 펼쳤다.(티벳 문제 및 중국의 對 티벳 정책에 대한 개괄적 소개는 다음을 참조하라. 이동률, 「중국의 티베트 정책: 현황과 전망」) 이러한 역사를 돌이켜볼 때, 티벳 민중들의 저항과 독립 또는 자치 요구는 당연히 정당한 것이며, 티벳의 ‘운명’에 대한 결정권이 1차적으로 티벳의 그/녀들에게 있음 역시 당연하다. 마찬가지로, 중국의 티벳 지배에는 어떠한 근거도 있을 수 없으며, 우리가 근간 한국에서도 논란을 일으킨 동북공정(동북공정에 대한 분석으로는 다음을 참조하라. 백승욱, 「중국의 동북공정과 고구려사를 둘러싼 한-중의 대립을 보면서」 중국은 이미 1980년대 중반 이후, 티벳의 중국역사로의 편입을 내용으로 하는 ‘서남공정’을 강행한 바 있다.) 등에서 드러나는 ‘중화민족주의’에 반대해야함 역시 자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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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제는 위와 같이 단순한 관점, ‘선량한’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적 입장으로는 실제로 이번 티벳 사태와 같은 민족적 갈등을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인권’을 운운하며 중국 정부를 비판하는 부시, 사르코지 등의 위선과, 티벳인들의 시위를 ‘제국주의의 책동’과 ‘분리주의’로 비판하고 탄압정책을 지지하는 북한이나 차베스 등의 터무니없는 주장은 일단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현재 티벳 문제로 불거진 중국 내 민족 (어떤 면에서는 차라리 ‘종족’(참고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서) ‘citizen'(시민)은 국가에 대해서 ’people'(인민/국민)을 구성하고, 인류에 대해서는 ‘nation'(민족)을 구성한다. 나아가 ’ethnos'(종족)는 ‘nation'의 언어적/문화적 특징을 강조하고, ’race'(인종)는 언어적/문화적 특징과 함께 유전적/육체적 특징을 강조한다.) 간, 종교 간 갈등에 대한 입장을 마련할 때, 우리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중국의 세계경제로의 편입과 통치성(governability)의 문제

현재의 중국, 즉 개혁/개방 이후 사회주의적 전망과 단절한 일종의 ‘후발 자본주의 국가’로서 중국의 소수민족 억압/통치정책은 세계경제로의 급속한 편입과 그것을 지지하기 위한 ‘통치성’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30년은 주지하다시피 고속성장의 기간이었다. 그리고 대외개방형 시장경제를 지향한 중국의 발전전략의 일정한 ‘성공’은 무엇보다도 노동력에 대한 과잉착취에 따른 이윤율 상승에 기인하는 것이다. 종신고용의 해체, 성과급체계 도입 등 신자유주의적인 노동신축화에 따른 빈곤 문제, 사회적 보호틀의 붕괴에 따른 도농분리 및 격차 심화 등의 문제는 노동자, 빈민들의 대규모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더불어, 1997~98년 동아시아 외환위기 및 2001년 WTO가입 이후, 중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흐름에 더욱더 편입되어왔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금융시장의 점진적 개방에 따라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유입규모는 거대해졌으며, 아직 (對미국) 소비재 수출을 중심으로 하는 발전주의적 전략을 완전히 폐기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차스닥’(중국판 나스닥) 출범이나 적극적인 국영기업 구조조정 및 인수합병 등에서 나타나듯이, 중국 경제는 주식시장 (또한 부동산시장) 중심의 금융화로 변모해가고 있는 중이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중국 사회에 그 동안 누적되어온 빈곤과 차별이 더욱 심화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특히 금융세계화의 동학이란 기본적으로 초민족적 자본의 투자처가 될 만한 지역, 주식시장을 부양하는 데에 필요한 지역만을 선별적으로 포섭하고, 나머지 지역은 배제하는 것이다. 중국의 경우, 이러한 위계화된 분할은 베이징-칭다오-상하이-홍콩 등 이른바 ‘연해(沿海)지역’에 금융/부동산 투자와 제조업이 집중되고 내륙지방과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또한 내륙지방에서도 소위 ‘중원’ 바깥의 변방지역, 특히 소수민족들이 살아가는 지역은 경제성장으로부터 어떠한 수혜도 누리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이처럼 지역적/종족적 분할과 위계가 낳는 불평등은 격심한 불만과 저항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2005년 파리 근교에서의 아랍계 이주자들의 봉기는 최근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비롯되는 대립과 갈등은 필연적으로 종족/민족, 인종, 종교, 문화와 같은 ‘동일성’들 간의 적대라는 모습을 띠곤 한다. 우리는 그간 이를 금융세계화의 세계적 ‘통치성’을 유지하기 위한 군사세계화로서, 또한 탈냉전 시대의 전쟁을 특징짓는 ‘비대칭적 전쟁’, ‘새로운 전쟁’으로서 분석해온 바 있다.(이에 대해서는 전국학생행진 일반자료실에 있는 2007년 7월의 「대안세계화 학생포럼」 자료집 중 반전/반핵/평화 포럼 내용을 참고하라.)

티벳의 경우 역시 개혁/개방 이후 중국정부는 지배정책을 그간의 이데올로기적/문화적 동화전략에서 경제개발전략 중심으로 변경하고, 대규모의 재정투입과 한족이주정책을 펼쳤다. 그동안 지배의 근거였던 티벳지역의 지정학적/군사안보적 중요성과 더불어, 개발과 투자의 대상으로서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하지만 투입된 재정은 경제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에너지, 교통 등 산업인프라 구축에 쓰였고, 따라서 대부분이 목축과 농업에 종사하는 티벳 민중들에게 이러한 지원이란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오히려 티벳 선주민들과 한족이주자들 사이의 불평등이 격화되고, 자원의 수탈과 경제적 종속이 심화되며, 티벳인들 고유의 전통과 문화, 자연환경이 파괴되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국가이미지 제고’로 표현되듯이 해외 금융투자 활성화 및 주식시장 부양을 주요한 목표로 하는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벌어진 티벳 봉기에 대해 중국정부가 극도로 강경한 진압에 나선 것은 필연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티벳 뿐만 아니라 최근 위구르 독립운동세력들이 비행기 납치를 기도한 것을 기화로 삼아, 중국정부는 올림픽을 앞두고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겠다고 공표한 상황에서 중국 내 소수민족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은 더욱 극심해질 수 있다.

나아가, 금융세계화가 낳는 극도의 차별과 맞물린 종족적 또는 종교적 갈등은 민족국가 자체를 붕괴시킬 수 있고, 1990년대 내내 이어진 내전 끝에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된 것이 그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다종족 국가인 중국의 경우에게도 잠재적인 위협으로 다가오는 문제이다. 중국 정부는 명시적으로 이와 같은 사례에 경계심을 표한 바 있고, 티벳에 대한 투자와 대규모 한족이주정책을 내용으로 하는 ‘서부 대계발 계획’의 경우 1998년 코소보사태 직후 적극 추진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예방’정책은 상술한 바와 같이, 티벳인들의 삶을 오히려 더욱 파괴하며 ‘실패’했고, 집적된 민중들의 불만은 지난 50년의 압제의 기억과 함께 최근의 대규모 시위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앞으로 티벳인들의 저항이 더욱 격화된다면, (유고내전에서 벌어졌던 ‘인종청소’와 같은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에 못지않은!) 극단적인 폭력으로 또다시 탄압에 나서리라는 점을 예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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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족적 민족주의’를 넘어, 대안세계화-국제주의로.

따라서 티벳민중들에 대한 중국민중들의 연대가 사활적인 문제로 보인다. 이 문제를 풀지 않고서는, 중심부 국가들의 허울뿐인 ‘인도주의적 개입’(예컨대, 중국이 ‘대미수출’과 ‘달러환류’를 축으로 하여 미국 주도의 세계경제에 포섭되어있는 상황에서, 중-미 간의 관계는 ‘상보적’이라 할 수 있으며, 마찰은 표면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언론플레이 용으로만 티벳 문제를 제기하고 달라이라마를 이용할 뿐이다.)은 물론이며, ‘제3국’ 민중들의 지지연대 역시 별다른 개입력을 가질 수 없다. 대부분의 ‘한족민중’들 자신이 이를 지지하고, 심지어는 스스로가 티벳인을 비롯한 소수민족들에 대한 증오와 원한을 재생산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에게 모든 종류의 개입은 ‘제국주의적 외압’일 따름일 것이다.

이는 개혁/개방 이후 ‘부활’하는 ‘종족적 민족주의’(민족주의의 기원은 미국혁명, 프랑스혁명 및 나폴레옹 전쟁을 기원으로 하여 이탈리아/독일의 민족통일 등에 이르는 일련의 역사들로 볼 수 있다. 민족자결과 인민주권을 강조하는 시민적 민족주의와 달리, 종족적 민족주의는 현대 이전의 민족에 주목하면서 종족적 신화와 상징이 민족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서양의 경우 전자의 예로는 자유주의적 전통이 강한 프랑스, 미국, 후자의 예로는 자유주의가 취약하고 보수주의가 강한 독일, 이탈리아를 들 수 있다. 윤소영, 「민족주의 비판」,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의 쟁점들』, 2006. 참조.)로서 ‘중화주의’를 극복함으로써 해결해야할 문제다. 다만 현재의 중국민족주의는 현대 이전의 상, 또는 사회주의 시기의 상과 다르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현대 이전에 관해서는 윤소영, 앞의 책. 사회주의 시기에 관해서는 백승욱, 「동아시아 속의 민족주의-한국과 중국」,『문화과학』07년 겨울. 참조.) 이는 곧 사회주의 시기, 또는 현대 이전시기의 문제와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종족적 민족주의의 문제를 발전주의적 전망의 소실과 정치의 위기 및 민족국가의 위기라는 현 시기의 정세적 특징과 연결시켜 바라보지 못한다면, 또한 동아시아 전반의 문제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중국민족주의에 반정립하는 ‘한민족주의’, ‘일본민족주의’ 사이의 대결과 같은 ‘원한의 정치’로 빠져들 뿐이다.

따라서 금융화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중국 내의 문제, 동아시아 전체의 문제에 대한 역사적 반성과 평가 역시 중요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동아시아 티벳과 중국, 그리고 동아시아 민중들을 분열시키는 과잉결정된 요인들을 조금씩 바꿔나가야 한다. 금융세계화가 낳는 착취와 배제에 맞서는 동아시아 민중들 사이에서 대안세계화 운동의 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추상적으로 들리지는 몰라도, 가장 근본적이고 현실적인 관점일 것이다.

Posted by 행진

2008/04/01 02:01 2008/04/01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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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젠장 2008/04/14 22:05 # M/D Reply Permalink

    뭘하자는건가? <<따라서 금융화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중국 내의 문제, 동아시아 전체의 문제에 대한 역사적 반성과 평가 역시 중요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동아시아 티벳과 중국, 그리고 동아시아 민중들을 분열시키는 과잉결정된 요인들을 조금씩 바꿔나가야 한다>> 어떻게? 대안을 세계화해서? 할말이 없다...

  2. 참.. 2008/04/18 08:11 # M/D Reply Permalink

    참...
    '어떻게'?
    떠먹여줘야 하나;

현대의 우울에 대항하는 우리들의

바람직한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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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 사르트르의 이 소설의 원제는 바로 우울이다. 사실 구토라는 제목이 더욱 강렬하고 비일상적인 느낌을 주는데, 구토로 제목을 바꾸면서 출판이 허가 되었다는 사실이 일견 아이러니하다. 형식면에서도 일반적인 소설과는 궤를 달리하는 이 글이 우울이라는 명제를 가지게 되면 그 시대 사회인들에게 지나친 우울을 전파시킬 것을 우려한 탓이었을까, 비록 과격하고 혐오스럽지만 강한 느낌이 드는 구토라는 제목이 편집부의 마음에 들게 된 것은.

이 책을 읽었던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글을 현대인들에게 추천해줄 이유는 확실한 듯하다. 실존과 본질의 사이의 그림자에서 방황하는 이 시대 인간들에게 방향성의 답은 제시해 주지 않으나, 그 현실에 대한 자각을 유도해 주는 것이 구토인 것이다.

이 소설의 서술은 지극히 혼란스럽고, 때로는 선정적이며, 때로는 너무나도 덤덤한 서술과 격정적인 서술을 오가면서 보는 독자에게 구토감을 일으키는 묘한 힘이 있다. 하지만 그런 느낌을 배제하고 일기를 써나가는 앙투안 로캉탱의 자세처럼 무덤덤하게 서술된 시간의 흐름을 역시 같은 태도로 읽어나가다 보면 전체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작가가 이 글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바임을 곧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인간은 대체적으로 본질의 틀과 무관하게 행동할 수 있는 열린 실존적 존재이며, 고정된 범주 안에서 작동하는 본질과는 다르게 끊임없이 약동하는 실존의 모습은 그것을 자각한 자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한 모습으로 다가오며, 다시 그 구토감을 소화하고 난 뒤의 독자는 이제 실존의 세상에서 본질을 깨닫고, 실존과 본질의 관계를 정립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본질과 실존을 오가면서 그것을 느끼지 못한 채로 삶을 살아간다. 또한 그것이 이제까지 인간들의 모습이며 사회의 모습이었고,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현대는 과거와 같으나 조금 다르다. 표면에 대두되는 실존이 압도적으로 본질에 선행하며, 그 실존의 모습은 끊임없이 형태를 달리하며 지각을 혼란시킨다. 하물며 그 자체로 존재할 뿐인 돌멩이와 셔츠의 모습조차도 자각한 자에게는 낯섦과 불안함, 공포심에 가까운 감정을 유발했는데 현대인들이 보는 실존의 모습은 어떠하겠는가.

대오각성은 일순에 찾아 올 수도 있다. 로캉탱이 바로 그러하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던 그는 어느 순간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 속의 실존에 치밀어오는 구토를 삼키게 된다. 또한 각성은 점진적이다. 깨달은 자는 또 다른 깨달음의 벽에 부딪히게 되고, 그것을 한 계단씩 나아가며 좀 더 깊고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은 괴로움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현대인들 또한 어느 순간 존재의 참맛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맛이라는 것은 언어뿐 아니라 심상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혀 끝에서 무한한 환희와 매혹의 덩어리와 함께 끊이지 않는 악도 함께 느끼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밝음에 가려 어두움을 보지 못하거나 혹은 그 반대의 실수를 저지름으로써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 만약 지각자의 감각이 어둠에 묻혔다면 범죄나 자살 등의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에도 지나친 낙관주의나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해지는 등의 결과를 낳을 수 있으며, 이 양자는 어느 한 순간에 역전되는 것도 가능하다.

요는, 그 중심을 잘 유지하는 것이다. 그림자와 빛 사이에는 항상 회색공간이 존재하는데, 우리 존재의 발 끝을 그 아슬아슬한 공간에 위치시키는 것이 존재 사이에서 표류하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자세인 것이다. 중도라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중도는 표면적 의미대로 중간에 위치함이 아니다. 약동하는 실존과 본질의 흐름 속에서 시대에 필요한 구심점을 찾아내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중도이다.

다음으로 실존의 홍수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재즈음악처럼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소재는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글 속의 재즈음악이란 필연적인 것이고, 진부한 것이며, 질서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틀 속에 갇혀 있는 존재이다. 즉, 향수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기실 이러한 단어적 사용은 유아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느낌을 제대로 전달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본질과 실존의 괴리가 이 서평을 읽는 이들에게 나름의 생각을 제각기의 표현으로 배출해 낼 계기가 된다면 그것 또한 좋을 것이다.

세상 속에 던져져 있는 자신을 자각하는 순간부터 철학은 시작될 것이다. 철학의 시작은 여러 곳에서 일어날 수 있지만 그 중 나는 자신으로부터의 철학을 추천하고 싶다. 또한 철학은 지극히 어렵고, 너무나 쉬운 것이다. 한 뼘의 글에도 자신의 생각이 담긴다면 그것이 철학이며, 진심이 담긴 몸짓 하나도 철학이다. 실존과 그 위에 덧붙여진 실존의 허위를 고발하는 장 폴 사르트르의 이 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존을 만들어 내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으로 끝이 난다. 어찌 보면 이는 작가가 계속 서술해온 내용에 반대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본질은 우리의 감각 속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므로 실존을 통해서 표현될 수 밖에 없다. 그 한계를 깨닫는 순간 우리는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고, 작가가 찾은 방법은 존재 자체를 초월하려는 노력을 통해 존재를 지각시키고자하는 역설적인 방법인 것이다.

우리의 삶 또한 마찬가지이다. 타인의 평가뿐만 아니라 본인의 평가마저도 본질을 표현하지는 못한다. 그 실존과 본질의 거리가 어떠하든 결국 본질이 되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삶을 멈춰서야 되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본질이 시키는 대로 행위하면 되고, 그것이 어떤 허위 없이도 우리의 본질과 존재를 부각시킨다. 그것을 깨달은 자의 삶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 고통스러움의 끝에는 선구자로서의 기쁨이 있을 것이고 우리의 존재가 사라지더라도 우리의 행위는 또 다른 존재로 남을 것이다.

글이란 읽는 자에게 어떤 감흥과 변화를 불러일으킬 때 좋은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 이 소설 구토는 그러한 힘을 가진 글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하다못해 언어로 표현되지 못하는, 언어의 벽을 넘지 못하는 사유의 흐름을 한번이라도 따라갈 수 있다면, 또 본인의 사고 또한 그런 흐름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는다면, 마지막으로 세상이 가진 실존의 홍수에 미소를 한번 보내줄 여유를 가지게 된다면 그것으로 이 글의 역할은 족하지 않나 싶다.



건국대 김우리나라

Posted by 행진

2008/04/01 01:14 2008/04/01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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