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영호(고려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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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마르크스주의: 이념과 운동'는 저학년때부터 활동가 선배들로부터 한번은 꼭 읽어봐야 한다고 추천을 받았던 책이다. 가끔씩 선배들이 이 책을 읽었는지에 대해서 체크를 하곤했고, 그럴때마다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던 책이다. 그리고 그만큼 경외심을 가지고 대할 수 밖에 없었던 책이다. 최근인 2007년 겨울방학 때야 이 책을 읽을 수 있었고(토론과 자료 부분을 제외하고), 이 책과 관련된 경험들과 함께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들은 체계적으로 정리된 '구체의 세계'가 아닌 하나의 뭉뚱그려진 '추상의 세계'일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감히 서평이라 적지 못하고 단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된다.

이 책은 2003년 활동가들을 대상으로한 강의를 계기로하여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 '평의회 마르크스주의', '대안세계화 운동'을 정리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와 관련된 각종 쟁점들을 정리하며 출발하고 있는 이 책의 첫번째 주제는 '소련사회성격 논쟁'을 검증하며 이행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그리고 4가지의 역사적 공산주의를 정리하면서, 그 과정에서 있었던 각종 쟁점들을 다루고 있다. 역사적인 실천들과 이론의 계기들 속에서 숱한 쟁점들은, '평의회 마르크스주의', '대안 세계화 운동', '성차의 페미니즘'으로 귀결되는 양상을 보이고 현재의 운동들의 방향들을 짚으며 책을 마치고 있다.

풍부한 책의 내용을 이런식으로 정리한다는 것은 또한 무지의 소치일 것이다. 기독교적 공산주의 시절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논쟁의 내용들과 활동가 및 이론가들의 이름은 불친절하게 넘어가고 있고, 수용를 하던 나로서는 그저 맥락들을 따라가기에 바빴다. 물론 이런 내용의 책을 읽는 것이 학습의 과정에 있어서 모든 논쟁의 내용을 잘 알게 된 사후의 일로 치부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쟁점들에 대해서 훑어보고 그러한 맥락들을 알게 된다는 것은 이 책이 지닌 하나의 강점일 것이다. 또는 그 동안 활동에 있어서 흩어져 있던 개념이나 내용들을 그리고 역사적인 맥락과 순서들에 대해서 정리를 해주고 있다는 것 또한 하나의 강점일 것이다. 이러한 강점에도 불구하고 또한 이 책을 읽는 것은 학습에 있어서 상당한 전략을 필요로 하는 책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학습의 의욕을 떨어뜨리거나, 갖가지 가능성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공산주의자들에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교조주의로 빠져들거나, 실천과 분리된 활동가 아닌 활동가로 전락할 가능성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갖가지 가능성을 경계하면서 책에 대한 단상들을 몇가지 적어보도록 하겠다.

첫번째로 드는 생각은 저자 혹은 강의자인 윤소영 선생에 대한 생각이다. 정운영 선생 이후에 PD의 대표적인 이론가(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로서 '과천연구실'이라는 세미나 팀을 운영하고 있는 윤소영 선생은 정말 박식하다. 그는 척박했던 한국의 토양에 알튀세르 마르크스주의를 도입한 대표적인 인물이자, 꾸준한 이론 생산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을 발전 시키는 인물이다. 그의 이름으로 나오는 책들, '공감이론신서'의 시리즈들은 그 무미건조한 편집들에도 불구하고 모두 읽어볼만한 책들이다. 그러나 그는 그만큼 대중적인 이론가는 아니고, 또한 활동가는 더더욱 아니다. 또한 약간은 독설적인 그의 스타일은 책을 읽는 와중에도 몇 부분들에서 약간의 거부감을 갖게 하기 충분했다. 페미니즘과 관련된 부분에서 'RF'들의 공적에 대해 지나치게 비하한다고 느낀 부분이 있었고, 충분히 공감은 가지만 운동의 조직형태인 당이나 노동조합에 대해서도 좀 과한 비판이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또한 역사적인 운동의 형태들에서 평의회 마르크스주의의 범주들이 애매할 수 있고, 한 때 선풍적인 바람을 몰고 왔던 '자율주의'(책에 네그리에 대한 비판 부분이 나와있음에도)운동들과의 구별점이 명확히 서지 않는다는 점들도 있다.

물론 한 이론가를 비판한다는 것, 그리고 갖가지 쟁점들에 대해 논리적인 수용이나 비판이 아닌 감각을 갖는다는 것은 '무지의 소치'를 반증하는 또 하나의 경로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윤소영 선생에 대한 나의 생각은 '경외'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론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만큼, 존경하면서도 경계하는 태도. 그 극단으로 생각을 몰아 '난점과 공백'들에 탐구할 수 있는 태도. 이것이 권위있는 이론가를 대하는(마르크스주의의 위기 이후 전화의 과정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까?

두 번째로 드는 단상은 활동 및 대중운동과 이론과의 관계이다. 모든 이론을 활동으로부터 찾으려는 경험주의나 논리의 극단으로 활동의 정방향을 찾으려는 논리주의의 양극단은 언제나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이론과 실천이라는 것은 언제나 변증법적으로 발전하고, 양자 중에서 어느 것 하나를 절대화시키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다. 이 말은 아마도 진리이고, 또한 활동가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명증한 진리일 수록 그것이 나타나기란 쉽지 않다. 활동의 경험들 속에서 진리효과가 창출되는 때는 드물고,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양자 중 하나에 빠져버리거나 회의에 빠져버리는 때가 있다. 또한 이 양자의 긴장이 무너지는 사태가 극에 달하면 좋지 않은 편향을 가지고 활동을 그만두거나 하는 사태들도 발생한다.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이론에 대한 검증을 하고, 또한 실천에 대한 평가들을 진행하지만 진리의 자명함을 주장하기란 난점이 많다.

책에서도 그러한 긴장에 대해 언급하는 몇 가지 부분들이 있다. 특히 자유 토론 주제의 하나로 제시되었던 활동가와 이론가 사이의 관계라는 부분은 특히나 눈여겨볼만하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위기 그리고 그후에 있었던 사후복수들은 여러가지 편향들을 가져왔고, 이론과 실천의 긴장이 붕괴되는 것은 그러한 하나의 징후들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의 사후복수가 가져왔던 199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 조류의 범람은 뼈져린 경험이었다. 물론 이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러한 긴장이 유지되어야 하는 학습과 실천의 연속들, 그리고 이론과 실천의 긴장들을 다시 한번 밝히는 것으로 이에 대한 단상을 마치려고 한다.

이 책의 첫 번째 주제는 사실상 '이행'에 대한 문제였다. 무엇이 이행을 이룰 수 있는가? 또 이행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혹은 어떠해야 했는가? 그리고 이행의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 따라서 세 번째로 드는 단상은 바로 이행의 문제이다.

사실 좌에서 우를 막론한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회과학에서 이행은 가장 중요한 쟁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행 자체에 대한 관점을 버리는 것에서부터 기술진보나 인간 정신의 발전, 민족해방, 계급투쟁까지 이행에 대한 셀 수 없이 많다. 그리고 이 책에서 보이듯이 마르크스주의 안에서도 이행에 대한 수많은 관점이 있고, 따라서 이행의 문제는 마르크스주의 안에서도 수많은 조류를 만들어 낸다. 책에서도 소개된 1950년대의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대한 논쟁'이 왜 아직까지도 회자되며 다른 논쟁들을 만들어내는지만 보아도 이행에 대한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이행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적인 분석과 현 시기에 일어나고 있는 대중운동 및 이데올로기의 양태일 것이다. 단순히 자본주의의 계급모순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이행의 문제들에 대해서 밝히고 찾아내는 것. 이것은 활동가라면 변혁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결코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되는 문제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드는 단상은 이행 후에 어떤 사회가 오는가에 대한 것이다. 발리바르 식으로 말하자면 '공산주의 이후의 공산주의'는 무엇인가라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것은 대안 세계화 운동에 있어서 '대안'이라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활동가들에게 있어서 가장 답하기 어려운 문제이며, 또한 위험한 문제이기도 하다. 만드려고 하는 사회의 모습이 구체적이고, 그것을 위해서 활동하는 경우 자칫하다가는 자칫 목적론적이고 교조적으로 활동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또는 그 목적이 이행에 대한 현시기의 정세들을 놓치게 함으로서 개량적인 활동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너무나 많은 사례들, 이 책에 나와있는 사례들을 포함하여 너무나도 많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행 후의 사회에 대한 모습을 그리지 못하는 것은 무능하며, 대중들에게 어떤 이데올로기도 만들지 못한다. '공산주의란 현재를 지양하는 운동의 총체'라는 정의는 정당하지만, 또한 가끔은 무능한 효과를 내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민중들의 운동을 '대안 세계화'의 실체라고 보는 것은 위의 정의에 적합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또한 생존을 담보할 수는 없다. 하나의 공동체를 꾸리고 살아가는 것은 대안을 만들 수는 있지만, 이행과 변혁을 담보할 수 없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무기력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으며 어떠한 마르크스주의 서적을 보거나 활동을 하더라도 풀리지 않을 문제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현재의 모순들을 밝히고 지양하는 운동과 또한 어떤 것이 있어야 하는가?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이 고민을 털어놓으며 마지막 단상을 마치려 한다.

서로의 층위가 다른 4가지 단상이라는 형태로 이 서평을 정리하려고 한다. 현재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수많은 양태로 나타나게 될 '역사적 마르크스주의: 이념과 운동'에 대해서 변혁과 이행의 전망을 밝히면 좋겠다는 다분히 의지적인 말로 서평을 마무리 하려 한다. 또한 나도 그 속에 함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Posted by 행진

2007/05/27 19:35 2007/05/27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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