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여성의 날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기념일들 중에는 민중들의 싸움을 통해 생긴 날들이 많습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만든 3.1절, 치열하게 싸운 학생들의 독립운동을 기리는 학생의 날(11월 3일), 광주 민중들의 저항을 잊지 않기 위한 5.18과 같은 날들이 대표적이지요.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역시, 누군가가 하사한 날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타올랐던 여성들의 투쟁으로 쟁취한 날입니다. 기념의 의미가 ‘뜻 깊은 일이나 훌륭한 인물 등을 오래도록 마음에 간직하고 잊지 않는 것’이라면, 아직은 여성의 날을 기념할 수만은 없습니다. 102년 전 그녀들이 외친 여성의 권리는 아직 세상에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여성들의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성의 날을 마음에 간직하고 기념하기에는 현실에서 계속되는 여성들의 싸움이 너무나도 간절합니다.



여성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고, 더 크게 벌여내야 헙니다


2007년, ‘아줌마’라는 말 대신 ‘투사’로 불렸던 그녀들이 있었습니다. 비정규직으로 노동자들이 고통 받지 않는 세상과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이 없는 사회를 그리며 저항한 이랜드 여성 노동자들입니다. 보통 여성들은 출산을 기점으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하다가 자녀들이 어느 정도 자란 후 다시 취업을 하게 되는데 이 때 여성들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임금이 낮고 비정규직인 일자리가 대부분입니다. 이랜드 여성 노동자들의 경우처럼 대형마트의 캐셔(계산원)를 그 예로 들 수 있겠지요.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더욱 힘든 노동 환경에 처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대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미화 노동자들도 또 하나의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대부분이 고령의 여성인 대학교 내 미화 노동자들은 최저임금에도 미달하는 임금을 받으면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꼬박 일합니다. 게다가 휴식공간이나 식비마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그래서 대학교의 미화 노동자들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여기저기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이화여대의 미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기도 하였지요. 하지만 대학 미화 노동자들의 경우에도 노동조합 활동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당한 현실에 맞서 싸울 권리조차 빼앗기고 있는 것이 지금의 여성들의 삶인 것입니다.

  이러한 여성들의 현실을 은폐하며 이명박 정부는 여성들이 더 많이 일할 수 있게 하겠다며 퍼플잡이라는 오묘한 이름의 정책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퍼플잡은 지금도 불안정한 여성들의 일자리를 더욱 규칙 없게 만드는 것을 정당화하는 조악한 포장지일 뿐입니다. 여기에 더해 저출산을 해결해야 한다며 여대생들에게 출산을 서약시키고, 낙태 단속을 강화하며 여성들에게 출산할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잊을 만하면 터지는 성폭력 사건을 비롯한 일상적인 성폭력까지…. 이렇게 아직도 여성들은 고된 하루하루의 연속선에 놓여있습니다.

  1908년에 하루 10시간만 일하겠다고, 임금을 인상하라고, 노동조합 결정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그녀들의 말이 102년이 지난 지금도 거리에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여성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을 멈추지 맙시다.


           

대학생들이 나서서 페미니즘을 말합시다!


여성들의 싸움이 소리 없이 계속되고 있는 시대에, 대학생들의 실천이 소중합니다. 대학생은 아직 사회인이라고 하기에도,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위치에 놓여있죠. 하지만 대학이 사회와 분리된 무결한 공간이 아니기에 사회의 문제들이 대학에서는 어떻게 드러나는지, 대학생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아가 대학에서부터 페미니즘이 시작되는 102주년 3.8 세계 여성의 날을 만들어봅시다. 여성의 날을 앞두고 많은 대학생들과 페미니즘을 고민하고 싶어 뉴스레터를 발간합니다. 뉴스레터를 통해 궁금증이 해소되고 고민이 시작되기를 바랍니다. 또, 건강한 토론을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번 뉴스레터는 네 개의 꼭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3.8 세계 여성의 날의 역사>에서는 여성의 날을 만들게 한 여성들의 투쟁이야기를 담았습니다. 102년 전 그녀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이명박 정부의 ‘퍼플잡’을 비판한다!>에서는 현 정부가 여성들에게 제시하는 것들이 얼마나 한계적인지 비판했습니다. <페미니즘이 시작되는 곳_ 여기는 대학입니다.>는 대학에서 왜 페미니즘을 고민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대학에 페미니즘이 필요한 이유, 대학생들이 앞장서서 페미니즘으로 세상을 바꿔야 하는 이유를 담았습니다. <새내기들과 함께 하는 3.8 주간>은 대학에서 3.8을 맞아 해볼 수 있는 여러 아이템을 제안합니다. 전국의 각 대학들에서 여성의 날을 맞아 페미니즘의 씨를 뿌리는 화창한 봄날을 만들어가기를 바랍니다. 페미니즘의 열매가 전국에 주렁주렁 열리기를 고대하며 전국학생행진도 치열하게 살겠습니다!




여성에게 위기를 전가하지 말라!

세상을 바꾸는 싸움을 대학에서부터!

다시, 페미니즘이다!


Posted by 행진

2010/02/21 06:02 2010/02/21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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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이 시작되는 곳,
여기는 대학입니다



페미니즘? 여성 우월주의?


 ‘페미니즘’하면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여성 vs 남성 대결구도, 드세거나 피해의식에 가득 찬 여자, 여성부… 등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살면서 페미니즘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페미니즘은 남성 vs 여성을 상정해놓고 조금이라도 남성의 영역을 더 차지하려는 여성들의 논리가 아니다. 오히려 페미니즘은 이 세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상식을 뒤집는 새로운 관점, 그러면서도 명쾌한 관점을 제공한다.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즘은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충격적이고,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유용할 수 있다. 페미니즘은 하나의 새로운 세계관이자 현실을 분석하는 이론이기에 이것을 통해서 대학생활에서 보이지 않았던 부분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가 부대끼며 살아가는 공동체부터, 취업의 문제까지 페미니즘의 눈을 통해 새롭게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



“원래 다 그래”가 누군가에게 폭력이 되는 순간

어떤 대학생활을 해야 할까 가슴 설레는 시기 누군가는 핑크빛 연애를, 누군가는 술 먹고 밤새 노는 일을, 누군가는 푸른 잔디밭에서 토론하는 문화를 마음에 품고 대학에 들어왔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지만 대학에서의 과/반/학회/동아리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마음의 고향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고향이라고 해서 항상 행복하리라는 법은 없는 법.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면서 누군가는 상처받고 누군가는 소리 없이 떠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생각해보면 모두가 즐거울 수 있는 공동체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사실이다.  그렇다면 무조건 즐거울 것만 같은 대학생활에서 무엇이 문제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술자리 문화

 한꺼번에 수많은 선배, 후배들이 만나며 웃고 떠들고 친해지는 3월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술이다. 술 마시고 과실에서 뻗기, 술 마시고 수업 째기, 술 마시고 집기 부수기 등 술과 관련한 온갖 에피소드들이 학기 초 공동체를 가득 채운다. 술자리에서는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최대한 술을 많이 먹고 먹이고, 큰 소리로 FM과 응원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속에서 누군가는 재밌게, 누군가는 불편하게 사람들과 어울린다. 그런데 단순히 개인의 취향에 따라 술자리가 좋고 싫은 것이 아니라 술자리 문화가 남성 중심적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불편해지는 거라면 이것은 개인의 취향을 넘어서는 문제로 사고되어야 한다.





술자리가 남성 중심적이라는 것은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일반적으로 술자리에서 ‘잘 논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남성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다. 때문에 술자리를 주도하는 사람은 그것이 남학우든 여학우든 상관없이 사회적으로‘남성적’이라고 생각되는 면모를 발휘함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보호해주는 사람 없이 만취하는 것이 금기시되고, 통금이 있는 여학우들의 경우 술자리에서 오래 남기 힘들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술자리에서 인간 대 인간으로서 인적네트워크를 쌓는 사람들은 남성적 정체성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여성도 여기에 낄 수는 있지만 결코 ‘여성’으로서 함께하는 것은 아니다. 예쁜 여학우가 남자선배들한테 이쁨 받는 분위기, 같은 과/반 여학우의 외모에 대한 평가 등이 술자리나 과실에서 공공연하게 시작되면 공동체 문화의 남성중심성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특히, 술자리에서의 원치 않는 스킨쉽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점은 남성 중심적인 술자리문화에서 남/녀의 관계가 주로 연애대상으로 생각되는 분위기가 여학우를 성적으로 대상화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동체 운영하기 

 새터, 개강파티, 세미나, 동아리 활동 등 공동체가 굴러가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대학생들이 스스로 꾸려나가는 자치활동 속에서도 여러 가지 역할이 성별화되어서 나타난다. 사람들을 이끌고 분위기를 주도하고 선배들과의 접대, 단체 연락을 담당하는 역할과 술집 예약/과티 제작/술 취한 사람 챙기기/뒷정리 등의 실무 역할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겠다. 그런데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알리는 대표자 역할과 실무 역할이 분리되어 한쪽에게 몰리는 경우가 많다. 학회를 예로 들어본다면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들어주는 선배와 개인적인 고민이나 연애 상담을 들어주는 선배가 나뉘기도 한다.

 이는 마치 가족 내에서 어머니/아버지의 역할 분담을 떠올리게 한다. 사회적으로 여성과 남성에게 요구되는 역할이 대학에서도 적용되면서 알게 모르게 여선배가 공동체에서 일정 이상의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게 만들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누군가에게 고의로 상처를 주려고 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전체 사회에서 보편적인 문화가 남성 중심적이기 때문에 이것이 대학사회에서 그대로 투영된 것일 뿐이다. 이렇게 페미니즘의 눈을 통해서 우리에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그 자체로서 성별 권력관계를 내포할 수 있다는 인식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모두가 행복한 공동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여성 남성을 갈라서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공간 또한 권력관계가 작동하는 공간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해결해나가기 위한 노력을 ‘함께’ 시작하는 것이다!




 관계맺음에도 고민과 토론이 필요하다! : 반성폭력 자치규약의 의미


우리가 속한 공간에서도 알게 모르게 성별 권력관계가 작동하고 있었다면, 이것이 개인 잘잘못의 문제를 넘어 우리 사회의 문제라면, 이것을 바꿔나가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변화는 일상의 관계맺음에서부터 고민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와 공동체 문화도 ‘원래 그랬고 당연한 것’이 아니라 ‘구성되어 온 것’으로 다시 인식하는 과정이자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경계를 흐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선배들이 만들어왔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반성폭력 자치규약’이다. 반성폭력 자치규약이란 새터나 엠티, 농활 등 남/녀가 압축적으로 함께 지내는 활동에서 성폭력적인 상황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 구성원들이 합의하는 자치규약이다. 자치규약은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는 금기가 아니라 그것을 구성원들이 공동으로 만들고 합의하는 데 가장 큰 의미가 있다. 공동체에 자치규약이 왜 필요한지, 알게 모르게 누군가에게 폭력이 되는 일들이 일어나지는 않았는지,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일상적인 문화였는지를 이야기하는 데에 가장 큰 의미가 있다. 


<반성폭력 자치규약 예시>

* 여/남은 성차별적 언행이나 서로를 대상화하는 언행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있습니다.

* 성적 소수자는 성차별적 언행이나 성적 소수자를 적대시하는 언행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있습니다.

* 여성은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여성다움’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가집니다.

* 여성은 불쾌한 신체접촉을 당하지 않을 권리를 가집니다.

* 여성은 여/남이 함께 즐거운 술자리를 즐길 권리가 있습니다.

* 여/남은 성적 고정관념과 성역할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있습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합시다.

- 누군가에게 술 취한 사람을 보살피는 역할, 술자리 준비와 뒤처리를 전담시키지 맙시다.

* 성폭력을 목격하거나 성차별적 언행을 보았을 때, 분위기에 편승하거나 방관하지 말고 누구나 이의를 제기합시다. 이의제기는 과민반응이 아니라 모두가 성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하는 당연한 권리입니다.

* 상대방의 싫다는 표현을 진지하게 받아들입시다. 더불어 성폭력, 성차별로 인한 불쾌감은 그 자리에서 분명하게 표현합시다.

* 여/남의 최소한의 독립된 공간을 보장합시다.



 여대생에게 취업과 결혼

 그렇다면 이제 대학생활에서 더 시야를 넓혀보자. 알파걸․골드미스 등 이제 여성우위시대가 도래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많이 들려오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해서 사회로 나갈 때 여성들은 가장 절실하게 ‘여성’인 자신을 느끼게 된다. 같은 스펙을 가지고도 더욱 취업하기 어렵고, 여러 가지 취업 준비 중에 성형수술이 한 축을 차지하기도 한다.


여성 고용차별 여전...입사때 정규직 남성보다 9%↓

비정규직은 '임신진단서=해고통지서'


 한 때는 여대생이 취직이 잘 안 되는 것이 불합리하기는 하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 아니겠냐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기도 했다. 똑같은 비용을 들여서 고용을 해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여성도 직업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시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여성들에게 가정을 꾸리는 것과 직장 일을 하는 것은 대립되는 것처럼 여겨지고, 여러 가지 이유로 여전히 여성은 노동시장에서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여성에게 일과 가정은 어떤 의미일까?


 출산서약

 저출산이 사회적인 문제로 떠오르면서 성신여대에서는 저출산 관련 특강을 열며 여대생들이 저출산 문제 해결의 일주체가 될 것을 서약하게 하는 일이 있었다.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증가하면서 출산율은 더욱 낮아지고 있는데 이것은 여성이 직장 일을 하면서는 가족 내에서 여성이 수행했던 육아나 가사노동을 병행하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여성의 경제활동참가 패턴을 보면 M자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30대 초반을 전후해 경제활동참가율이 갑자기 떨어지고 30대 후반 이후 다시 증가하는 양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출산과 육아가 집중되는 연령대(1990년대 후반까지는 20대 후반, 2000년대 이후에는 30대)에서는 경제활동참가율이 급격히 떨어졌다가 이후에 다시 상승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곧 여성은 출산과 동시에 노동시장에서 이탈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일과 가정이 대립되는 현재의 상황은 이미 전 사회적인 문제인데 출산서약은 저출산의 원인을 여성들이 이기적이거나 의식수준이 낮기 때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결심하면 저출산이 해결될 것처럼 대학이 앞장서서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취집

 한편, 지난 해 사상 최대의 취업난 속에서 ‘취집’이라는 신조어가 유행했다. 이는 집에 취업한다는 뜻으로 힘겹게 취업하는 준비할 게 아니라 결혼이자 하자는 자조석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보면서 여성은 가족 부양의 부담도 적고 참 좋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성도 일을 하지 않고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조건에서 가장이 아니기 때문에 부담이 적을 수 있겠지만 또한 가장이 아니어서 취업하기도, 해고되기도, 정규직이 되기도 힘든 것이 여성의 현실이다.


일과 가정을 함께 꾸릴 수 있는 진정한 방법

 최근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도록 전일제가 아닌 파트타임, 재택근무와 같은 형태의 고용형태를 늘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거세게 제기되고 있다. 이는 일자리를 늘리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국 정규직을 줄이고 불안정한 일자리를 늘리는 명분이라는 비판 또한 거세다. 그렇다면 대체 진정한 문제 해결의 방법은 무엇일까. 가정을 꾸려야 하는 여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불안정한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성만이 가정을 꾸리는 데 필요한 노동을 해야 한다는 관념을 깨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일을 하면서 제대로 대우받고, 가정을 꾸릴 수 있는 방식으로 사회가 변화해야 한다.



대학에서부터 다시 페미니즘을 시작하자!

 

  이렇게 대학의 일상생활에서부터 대학졸업 이후의 노동까지 여전히 함께 해결해야할 문제가 많이 남아있다. 대학생활이나 취업 등의 문제에서 여대생은 다른 경험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여성의 문제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단순히 여성만의 문제를 넘어 전체 사회의 문제로 이야기되어야 한다. 그러나 남성중심적 공동체 문화나 여성의 노동에 대한 권리가 대학에서 화두가 되거나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별로 존재하지는 않은 것이 현실이다.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유명한 정치가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발 딛은 대학에서부터, 일상에서부터 고민하고 토론하는 것으로부터 변화의 첫걸음을 시작하자!




 

Posted by 행진

2010/02/21 05:05 2010/02/21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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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지환 2010/02/21 13:50 # M/D Reply Permalink

    전국학생행진은 애당초 잘못된 전제를 바탕으로 젠더(Gender) 문제와 관련된 논의를 진전시키고 있습니다. “이제는 여성도 직업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시대”, “여성도 일을 하지 않고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조건”이라는 주장은, 우리 사회의 현실을 여성 편향적으로 바라본 결과일 뿐입니다. 제가「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에서 소개한 통계자료와 뉴스클리핑 게시판에 올린 언론보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남성의 전통적인 책임을 당연시하는 전통적인 성별 이데올로기로 인해 여성에게 요구되는 가족부양의 책임은 여전히 미미한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전국학생행진의 논리대로라면, 오늘날 남성도 돌봄 노동을 일정 정도 분담한다는 사실을 내세워 “남성이 일과 가정의 양립을 강요받고 있다”는 주장도 충분히 가능할 것입니다. 즉 예나 지금이나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가 강요한 성적(性的) 억압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남녀 모두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일과 가정의 양립’과 관련해 “진정한 문제 해결의 방법은 (…) 가정을 꾸려야 하는 여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불안정한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성만이 가정을 꾸리는 데 필요한 노동을 해야 한다는 관념을 깨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물론 그 동안 젠더 문제를 논하며 물질적 구조에만 얽매어 온 일부 회원들의 편협한 태도를 고려할 때, 임지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의 말처럼 “은밀하게 고무된 담론이야말로 그 어떤 검열 제도보다 더 효과적인 통제 수단이라는 점”을 전국학생행진이 지적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남성에게 가족부양의 1차적 책임이 요구되는 현실 속에서, 남녀가 ‘돌봄 노동’을 균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남성에게 불합리한 이중(二重) 부담을 지우려는 시도로 비추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국학생행진의 주장은, 바깥에서 더 많은 시간을 일하고 더 무거운 부담감과 책임감을 느껴야하는 남편이 가정에서 아내와 돌봄 노동을 똑같이 분담해야 한다는 말로 해석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젠더 문제를 공정하고 균형적인 시각에서 다루고자 한다면, 여성을 억압하는 성별 이데올로기의 이면에 남성을 억압하는 또 다른 성별 이데올로기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번 뉴스레터를 읽어보면, 전국학생행진은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 하에서의 남성 억압을 일부 인정하는 듯하지만, 여전히 남성에게 요구된 치사적 역할(致死的 役割, lethal role)과 여성에게 허락된 면책권을 논함에 있어 공정한 시각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 ‘세계 여성의 날’ 행사를 진행함에 있어서는 그 동안의 편파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보다 공정하고 균형적인 시각을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덧붙여서, 합당한 이유 없이 댓글을 삭제하는 몰지각한 행동은 더 이상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만약 불가피한 사정으로 댓글을 삭제해야 한다면 공지를 통해 삭제 여부와 그 이유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2. rlgl 2010/03/05 00:41 # M/D Reply Permalink

    한지환님의 댓글을 읽고 몇글자 적어봅니다.
    위 댓글을 읽어보니 과연 본문을 읽고 쓰신 댓글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위 글 어디에도 '여성이 억압받는 현실은 남성 때문이다'라는 말은 없는데다가 돌봄노동에 대해서도 남녀가 균등하게 나눠서 하면 된다는 말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여성 남성을 갈라서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공간 또한 권력관계가 작동하는 공간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해결해나가기 위한 노력을 ‘함께’ 시작하는 것이다!' 이 문구만 봐도 나와있고...
    위 글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성별 권력관계'에 대해서 지적하고 그것이 여성에게 폭력적으로 가해지는 방식을 설명해 놓은 것이라고 저는 이해했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ㅎㅎ

    1. 한지환 2010/03/05 12:40 # M/D Permalink

      제가 주장하려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신 것은 오히려 귀하인 것 같군요. 물론 전국학생행진은 여성 억압을 ‘남성’의 탓이라고 주장하지 않았고, 저 역시 그와 관련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전국학생행진의 입장을 비판한 이유는, 전국학생행진이 젠더(Gender) 문제를 다루면서 전통사회가 남성에게 가한 성적(性的) 억압과 여성에게 허락한 면책권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전통사회에서의 남녀관계를 ‘성별 권력관계’로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즉 전국학생행진의 생각과 달리, 여성주의자들이 ‘가부장제’라 규정한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는 남성에게 일방적인 권력을 허락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여성에게만 폭력적으로 적용된 시스템도 아니었다는 것이 제가 주장하려는 바입니다. ‘절름발이 페미니즘’에 얽매이지 않는 공정하고 균형적인 시각에서 전통사회에서의 남녀관계를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전국학생행진은 남녀가 돌봄 노동을 균분해야 한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른바 ‘일과 가정의 양립’과 관련해 “여성만이 가정을 꾸리는 데 필요한 노동을 해야 한다는 관념을 깨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전국학생행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여성에게 돌봄 노동의 1차적 책임을 지우는 전통적인 성별 이데올로기를 비판한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는 여성을 일방적으로 희생시킨 것이 아니라 남녀 모두에게 각자 정해진 성역할만을 강요했으며, 따라서 남녀 모두는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의 피해자임과 동시에 수혜자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전통사회에서 돌봄 노동과 관련해 남성에게 허락된 면책권은 그들이 부담해야 했던 ‘치사적 역할(致死的 役割, lethal role)’에 따른 반대급부였으며, 따라서 전통사회가 남성에게 가한 성적 억압에 대한 고찰 없이 여성에게 요구되는 돌봄 노동의 1차적 책임만을 문제 삼는 것은 불공평한 처사라는 것입니다.

      저도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제대로 읽지 않고 댓글을 적을 만큼 경솔한 사람은 아닙니다. 저는 자유주의적 남성운동가로서 전통적인 남녀관계를 지배와 피지배, 억압과 피억압의 관계로 규정하는 여성주의의 이분법적인 틀 자체에 이의를 제기한 것입니다. 보아하니 귀하께서는 저의 주장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신 것 같은데,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자유게시판에 올린「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3. rlgl 2010/03/07 05:10 # M/D Reply Permalink

    한지환님이 무슨 말씀 하시는지 잘 알았고, 다시 답변드리고 싶어서 글을 씁니다.
    그런데 글을 쓰면서 한가지 주의하셔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한지환님께서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이야기 하실때 '절름발이 페미니즘'이라는 표현과 함께 '공정하고 균형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 표현은 상당히 주관적인 의견인 것 같습니다.
    한지환님이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남성 여성에게 모두 억압적인 가부장제를 반대하자'라면 그 입장을 이어나가 페미니즘에 대한 심도있는 공부와 함께 입장을 발전시킬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라 단순히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을 가하기 위한 논쟁이라면 아무리 이야기가 진행된다 하더라도 그다지 생산적인 논쟁이 될 수 없을 것 같네요.
    님의 글을 읽고 생각나는 구절이 있어 첨부해 봅니다.
    '... 모든 여성이 이 사회의 피해자만은 아니며, 젠더만이 아니라 결혼 여부, 계급, 세대, 인종, 민족, 국가 같은 다양한 맥락에서 다양한 섹슈얼리티를 구성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섹슈얼리티 강의 두번째 中
    위에 인용한 구절이 한지환님이 남기신 댓글에 대한 대답이 어느정도는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저도 읽어보시면 좋을만한 책 몇 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새 여성학 강의, 동녘, 한국여성연구소, 2005
    섹슈얼리티 강의 두번째, 동녘, 한국성폭력상담소 기획/변혜정 편저, 2006

    이 두가지는 페미니즘 입문서 격인 책이니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 한지환 2010/03/07 11:01 # M/D Permalink

      몇몇 여성주의자들이 전통사회에서의 남성 억압에 대해 거론하기는 하지만, 그들 역시 남성 억압을 ‘여성 억압의 부산물’ 정도로 간주할 뿐입니다. 페미니즘을 앞세워 저의 주장을 비판하신 귀하께서도, 앞서 전통사회에서의 남녀관계가 ‘성별 권력관계’였으며, 그러한 권력관계가 여성에게 폭력적으로 적용되었다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즉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를 ‘가부장제’라 지칭하고 전통사회에서의 남녀관계를 ‘지배와 피지배의 권력관계’로 규정하는 급진적 페미니즘을 비롯한 여성학 이론의 틀을 깨뜨리지 않는 한, 남성 억압은 여성 억압과 결코 동등하게 다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여성학 이론에 바탕을 둔 편파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젠더(Gender) 문제를 객관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릴 수 있는 ‘남성학(男性學, Men's Studies)’, 나아가 여성학과 남성학을 아우르는 ‘성학(性學, Gender Studies)’ 이론을 계발해야 한다는 것이 제가 주장하려는 바입니다. 제가「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에서도 지적했듯이, 기존의 여성학 이론만 가지고는 우리 사회의 젠더 문제를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아울러 남성주의(男性主義, Masculism)와 관련해 보다 구체적이고 자세한 설명을 원하신다면 다음 책들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젠더 문제를 다룸에 있어 좋은 참고가 되리라 믿습니다.

      『남성의 역사』(솔, 2001)
      『남자 만세 : 여자가 정말 모르는 남자에 대한 진실과 거짓』(예담, 2002)
      『남자의 이미지 : 현대 남성성의 창조』(문예출판사, 2004)
      『페미니즘에 대한 남성학과 남성운동』(원미사, 2007)

      그리고 알려주신 책들은 기회가 되면 꼭 읽어보겠습니다.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4. rlgl 2010/03/08 01:02 # M/D Reply Permalink

    한지환님께 다시 답변드립니다.
    한지환님의 말씀대로라면 페미니즘이 편파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성학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이 말은 님이 말씀하신 논리와도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님의 논리대로라면 어느 한 성을 중심으로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이 편파적이라는 건데 그건 남성학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보여집니다.
    또 한가지 더 이야기 하고 싶은 점은 한지환님과 댓글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느낀 점인데 계속 이야기가 '여성과 남성의 경쟁'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고 이는 분명 주의해야 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 억압의 원인이 남성 자체 때문은 아닌것이고,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남성 억압의 원인이 페미니즘이 아니라는 사실은 공감하실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한지환님도 글에서 말씀하셨듯 한지환님이 생각하시는 남성 억압의 원인이 '성별 이데올로기'라면 그 비판의 초점은 페미니즘이 아닌 '성별 이데올로기'에 맞춰져야 할 것입니다.
    또한 사회적으로 퍼져있는 성별 이데올로기가 한지환님 말씀대로 남성에게도 폭력적일 수 있다는 점은 사실일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여성이냐 남성이냐'하는 이분법적 기준을 넘어서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사회, 경제적 문제들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한지환님이 글에서 언급하신 페미니즘에 대한 의견이나 어느 페미니스트들의 입장들이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페미니즘과, 그리고 제가 알고 있는 행진의 페미니즘과 다른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1. 한지환 2010/03/08 11:44 # M/D Permalink

      저의 글을 제대로 읽지 않으신 것 같은데, 남성학(男性學, Men's Studies)이나 여성학(女性學, Women's Studies)만으로는 우리 사회의 젠더(Gender) 문제를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젠더 연구가들은 궁극적으로 이 둘을 아우르는 ‘성학(性學, Gender Studies)’을 추구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날 적지 않은 이들이 여성주의를 젠더 문제를 다루는 유일한 방편으로 여기며,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에 대한 여성주의자들의 편파적인 해석을 객관적인 진리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이것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에 대한 여성주의자들의 해석이 편파적이라는 저의 지적에 동의하실 수 없다면 여기에 대해서는 좀 더 이야기를 나누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귀하께서도 앞서 전통사회에서의 남녀관계를 ‘여성에게 폭력적으로 적용되는 성별 권력관계’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실제로 여성주의의 여러 노선들은 귀하와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젠더 문제와 관련된 논의를 진전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아는 여성주의’와 ‘귀하께서 알고 계신 여성주의’가 다른 것 같다는 지적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귀하께서 이 분야에 얼마나 오래 천착하신 분인지는 모르지만, 저도 이 분야에 대해 귀하나 이곳 회원들 못지않게 공부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저라고 해서 여성주의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섣불리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는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의 대화가 ‘여성과 남성 간의 경쟁’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성운동 혹은 여성운동이라는 것 자체가 남녀 각자에게 합당한 몫을 나누어주려는 사회적 움직임이고, 그로 인해 이를 놓고 대화를 나누다보면 그렇게 느끼는 이들이 종종 있지만, 그것은 참으로 쓸데없는 걱정일 것입니다.

      그리고「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을 읽어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제가 궁극적으로 깨뜨리려 하는 것은 ‘가부장제’라고 불리는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와 그에 따른 성별 이데올로기이며, 이 점에 있어서는 여성주의자들과 입장을 같이합니다. 저도 여성주의가 남성 억압의 원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여성주의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에 반대하지도 않는다는 것이지요.
      누차 강조하지만, 제가 여성주의를 비판하는 이유는 그러한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에 대해 여성주의자들이 잘못된 해석을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전통사회에서의 남녀관계를 ‘여성에게 폭력적으로 적용되는 성별 권력관계’로 섣불리 규정하거나, 전통사회에서의 남성 억압에 대한 언급 없이 여성 억압만을 문제 삼는 여성주의자들의 태도는 자유주의적 남성운동가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위 글에서 전국학생행진은 여성에게 요구되는 돌봄 노동의 책임을 문제 삼았지만, 그러한 책임이 남성 가장(家長)에게 요구되는 가족부양의 책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문제라는 사실을 간과한 채 “여성만이 가정을 꾸리는 데 필요한 노동을 해야 한다는 관념을 깨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라는 것입니다. 또한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남성 억압이 뿌리 깊게 남아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이제는 여성도 직업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시대”, “여성도 일을 하지 않고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조건”이라고 섣불리 단정 짓는 것은 우리 사회의 현실을 여성 편향적으로 바라본 결과일 뿐입니다. 이런 잘못된 인식을 깨뜨리지 않는 한, 남성 억압은 여성 억압과 동등하게 다루어질 수 없으며, 나아가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를 깨뜨려는 노력도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둘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쭉 훑어보면, 귀하께서는 한편으로는 전통사회에서의 남녀관계를 ‘여성에게 폭력적으로 적용되는 성별 권력관계’라고 말씀하시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남녀 모두가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의 피해자’라고 말씀하시는데, 엄밀히 말해 이 두 주장은 병립할 수 없는 주장입니다. 전자와 같은 인식을 깨뜨리지 않는 한, 남성 억압은 기껏해야 ‘여성 억압의 부산물’로 간주될 수밖에 없습니다. 급진적 페미니즘에서 이야기하는 남성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계급, 세대, 인종 등을 막론하고 ‘여성’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권리와 혜택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는 여성을 일방적으로 희생시킨 것이 아니라, 남녀 모두에게 각자 정해진 성역할만을 강요하고 그에 따른 반대급부를 제공했으며, 따라서 전통사회를 ‘가부장제 사회’ 혹은 ‘남성 중심적 사회’라고 규정하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라는 저의 지적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셨으면 합니다.
      아울러 제가 알려드린 책들은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귀하께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5. rlgl 2010/03/09 13:25 # M/D Reply Permalink

    마지막으로 정리격의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한지환님께서 말씀하신 성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여성 남성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전제 하에 가능하겠죠? 물론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바도 궁극적으로는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일겁니다.
    또한 저는 물론 성별 이데올로기 속에서 여성과 남성 모두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는 분명히 말했으나 그 착취의 방식과 정도가 같다고 이야기 한 적은 없습니다.
    이점은 분명히 이해하셔야 할 부분이구요.
    또한 한지환님께서 여태까지의 글에서 거듭 말씀하시는 '여성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권리와 혜택'이라는 것이 '남자는 밖에서 돈벌어오지 않느냐'류의 경제적 종속에 관한 이야기를 예로 드시는 것 같은데 '대부분의 가정에서 남성 수입을 가지고 여성들을 먹여살릴 수 있다'는 관념이 실제 사회에서도 적용되고 있는지에 대한 조사를 더 해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남성의 경제력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것이 과연 혜택일지에 대해서도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1. 한지환 2010/03/09 17:26 # M/D Permalink

      말씀하신 ‘남녀의 동등한 권리(혹은 의무)’는 성학의 전제가 아니라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성학 역시 ‘남녀의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기는 하지만, 문제는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에 대해 그들이 잘못된 해석을 내리고 있으며, 그로 인해 기존의 여성학 이론만으로는 우리 사회의 젠더 문제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 하에서 정당한 권리를 박탈당한 것은 비단 여성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벌써 여러 차례 지적한 줄로 압니다.
      그리고 “남성과 여성에 대한 착취의 방식과 정도가 같지 않다”는 말씀은 결국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 하에서의 여성 억압이 남성 억압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라는 뜻 아닙니까? 저를 비롯한 자유주의적 남성운동가들은 그러한 인식 자체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귀하께서 남성주의에 대해 더 공부하실 필요가 있다고 말씀드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가정에서 남성들의 수입을 가지고 여성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관념이 실제 사회에서도 적용되고 있느냐”고 물으셨는데, 결국 귀하께서도 여느 여성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맞벌이’를 거론하시는군요. 이것은 앞서「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에서 상세히 다룬 문제이며, 지난 2월 21일에 남긴 첫 번째 댓글에서도 지적한 내용입니다.
      「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에서 소개한 각종 통계자료와 언론보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 사회에서 남성 전업주부는 여전히 15만 명 남짓한 데에 반해, 전업주부로 일하는 여성은 600만 명이 훨씬 넘습니다. 설령 맞벌이 부부라 해도 여전히 남성의 생계 기여도가 여성의 그것보다 훨씬 더 높으며, 근로시간 역시 남성이 여성에 비해 눈에 띄게 긴 것이 현실입니다. 즉 맞벌이 가구라 할지라도 여성은 여전히 2차적 가족부양자 및 보조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흔히 ‘Gold Miss’라 불리는)조차 자신보다 높은 경제력과 지위를 갖춘 남성만을 배우자감으로 고려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지요.
      즉 남성의 ‘치사적 역할’과 이를 뒷받침하는 성별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있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맞벌이’를 내세우며 남성의 전통적인 경제적 책임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젠더 문제를 여성 편향적으로 해석한 결과일 뿐입니다. 이는 오늘날 남성도 돌봄 노동을 일정 정도 분담한다는 이유로 여성에게 가해지는 돌봄 노동의 부담을 부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리고 남성의 전통적인 책임과 관련해 여성에게 허락된 면책권과 이른바 ‘이성(異性)에 의해 보호받을 권리’를 권리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가사와 육아를 비롯한 돌봄 노동과 관련해 남성에게 허락된 면책권 역시 권리가 아니라는 주장도 가능할 것입니다. 여성의 전통적인 성역할이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가 여성에게 허락한 권리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최근 대두되고 있는 ‘돌봄의 권리’라는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지 L. 모스 박사의 지적처럼, 여성은 남성의 전통적인 책임에 얽매임 없이 자신들의 고정된 역할과 ‘어머니와 교육자’라는 확고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반면 남성은 자신의 능력과 적성에 관계없이 그러한 성역할을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는 남녀 모두에게 각자 정해진 성역할만을 강요하고 그에 따른 반대급부를 지급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바입니다. 남성에게 주어진 반대급부는 권리인 데에 반해, 여성의 그것은 권리로 간주할 수 없다는 식의 편파적인 주장은 결국 ‘절름발이 페미니즘’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 역시「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에서 자세히 설명한 내용이며, 제가 소개해드린 책의 저자들도 비중 있게 다룬 문제입니다. 시간 있으실 때 저의 글과 제가 소개해드린 책들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rlgl님. 저는 귀하께서 저의 글을 꼼꼼히 읽어보셨다고 생각하고 대화를 나누었던 것인데, 이제 보니 저의 글을 한 번도 훑어보지 않으신 것 같군요. 상대가 주장하려는 내용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어떻게 생산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먼저 저의 글을 찬찬히 읽어보신 뒤, 그래도 미진한 부분이나 하실 말씀이 있다면 또 댓글을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6. 2010/03/17 20:13 # M/D Reply Permalink

    한지환/
    당신은 지금 대화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당신은 이미 당신의 절대적 옳음을 정해놓았고 그걸 바꿀 생각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여기에 당신의 주장에 무릎을 꿇으라는거지요. 그래서 당신의 주장에 반박하는 rlgl에 대해 "당신은 내 글을 읽지 않았다"고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엔 두분 사이 논쟁의 문제는 '이해'의 문제가 아닙니다. 일단 한지환님은 페미니즘 이론의 전제 자체의 폐기를 요청하고 있는데 제가 보기에 그건 사회학적, 인류학적 무지에서 비롯된 억지에 불과하고, 도리어 '현실'에 대해 표피적으로만 환기시키며 자신의 주장을 동어반복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한지환씨는, 페미니즘 논쟁의 전제 자체에 대해 숙지를 하고와서, 진정한 형이상학적 논쟁의 장으로 오셔야, 논쟁을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여기서 확실히 필요한건 '현실'이니, '전통'이니 어쩌구하는 땡깡이 아니라, 이론적 논쟁이며, 이론적 논쟁에는 1차 텍스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전제되어있어야 합니다. 한지환씨는 지금 억지만 부리고 있으며, 도리어 저는 한지환씨가 마지막에 뱉은, "상대가 주장하려는 내용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어떻게 생산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라는 말을 한지환씨에게 묻고 싶군요. 남성으로서 한 말씀드리자면 한지환씨의 '남성주의'는 사회학적 논쟁 토대에서 전혀 발도 들여놓지 못한 땡깡에 가깝습니다. 차라리 쇼펜하우어적이고 유심론적인 마초이스트라고 주장하십시오! 그럼 대충 인정이라도 할텐데 말이죠. 논쟁의 기본적인 자세조차 되어있지 못해보입니다. 자유주의 남성주의라니. 순수사회학 이론가들조차 '남성주의'에 대해서는 토대조차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게 뭐 껍데기라도 있기라도 한다면, 이미 '남성주의'는 자유주의 안에도 포함되지 못함을 아셔야 할 것 같습니다. 고작해야 근세기적 전통주의이론에 엉덩이 붙일 수 있을까요? 그러나 만야 그렇다면 정말 재미없네요. 그게 바로 사람들이 이렇게 열성적인 한지환씨에게 댓글을 잘 달아주지 않는 이유입니다. 이론적으로도 전혀 위협적이지 않고 또 재미도 없으니까요.

    1. 한지환 2010/03/18 01:55 # M/D Permalink

      우선 쇼펜하우어적이라느니 마초(Macho)적이라느니 페미니즘 이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다느니 하는 말들은 터무니없는 중상이라 여기고 그냥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제가 쓴 글의 내용 가운데 어느 부분을 근거로 그런 결론을 내리신 것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그리고 ‘페미니즘 논쟁의 전제’를 운운하셨는데, 자유주의적 관점을 비롯한 남성주의의 여러 노선들은 페미니즘 이론의 그러한 전제 자체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기존의 페미니즘 이론으로는 젠더 문제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으며 이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설명을 드렸습니다. 현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이론을 내세우며 이를 덮어놓고 믿으라고 하는 것은 이른바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특히 우리 사회의 비주류라고 할 수 있는 힘없는 학생단체인 전국학생행진이 그런 오류를 범하는 것은 ‘누워서 침 뱉기’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경솔하고 어리석은 행동일 것입니다.

      또한 저의 주장은 비단 저 혼자만의 사견이 아닙니다. 제가 주장한 내용들은 이미 1960~70년대부터 서구의 수많은 남성학자와 남성운동가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한 내용들이며, 거기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제가 소개해드린 책들을 읽어보시면 알 수 있으실 것입니다. “순수사회학 이론가들조차 남성주의에 대해서는 토대조차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는데, 대체 어느 순수사회학 이론가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는 것인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물론 여성학과 여성운동에 비해 남성학과 남성운동이 상대적으로 후발주자인 것은 사실이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학문 내지 사회운동을 귀하 혼자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존재가 부인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귀하께서 남성학과 남성운동에 대해 얼마나 공부를 하셨다고 이런 식으로 함부로 말씀하시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이런 유치한 행동은 결국 귀하의 한계를 보여줄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셨으면 합니다.

  7. imperator 2010/03/29 11:04 # M/D Reply Permalink

    저는 한지환씨의 주장에 더 공감이 가는군요.
    대한민국 남성으로서 품어왔던 의문점들을 잘 파헤쳐주셨네요. 여성 입장에서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주장이구요.
    저도 주위에서 진보적이란 소릴 듣는 20대 민주당 지지자지만 이 문제에 대해선 학생행진과 회원들이 무리수를 두고 있단 생각이 듭니다.
    글 잘 읽고 갑니다.

연세대


* 연세대 3.8 여성의 날 실천단 기조

- 성폭력은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 일상의 변화로, 성폭력 없는 공동체를 만들자!

- 여대생의 이름으로, ‘일과 가사의 양립’ 퍼플잡 반대한다!

- 페미니즘으로, 대학을 다시금 움/직/이/자/!


* 실천단 계획


● 2월 마지막 주

- 2월 28일 실천단 초동주체모임(광장사업 준비, 자료집 기획, 실천단 첫 교양 기획을 논의합니다.)


3월 첫 주

- 실천단 자료집을 발간합니다.

- 3월 3일 저녁에 실천단 사전 교양을 진행하고, 광장사업 자보를 함께 만듭니다.

- 3월 4,5일 낮에 중도 앞에서 광장사업을 진행합니다.

- 3월 8일 102주년 여성의 날 문화제 참석합니다. 각 과/반에서 새내기학교 일정으로 넣어서 많은 새내기들과 함께 참여할 예정입니다. 여성의 날 장소에는, 광장사업 때 활용했던 자보들을 게시합니다.


3월 둘째 주

- 실천단 차원의 강연회를 진행합니다. (연사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 과/반에서 페민스쿨(여성주의 토크박스)을 진행합니다.








성균
관대




Posted by 행진

2010/02/20 22:47 2010/02/20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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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특호_각론4] 페미니즘

논쟁과 토론의 중심에 설 학생회의
 중단 없는 실험으로
페미니즘을 공동체의 원동력으로 만들자!


 


0. 들어가며

올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몇 가지 사건들을 떠올려보자. 여자 연예인의 특정 신체 부위를 지칭하는 차마 입에 담기도 민망한 신종 단어가 유행어처럼 나돌기도 하고, 끔찍한 아동 성폭력을 저지른 가해자에게 내려진 12년이라는 형량이 너무 적다며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기도 했던 일들을 들 수 있겠다. 여성들이 ‘꿀벅지’라는 단어가 성적인 불쾌감을 주기 때문에 성희롱이라고 제기하자 남성들은 ‘초콜릿복근’에 대해서는 아무도 그런 방식으로 제기하지 않는데 왜 유독 여성의 신체부위를 지칭하는 단어만 성희롱이라고 하냐며 이것은 남성들에 대한 역차별이라고 공격을 해오기도 했다. 그러면서 ‘도대체 무엇이 성희롱이냐’에 대한 논쟁이 인터넷 게시판을 뒤덮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한 개그 프로에는 ‘남성인권보장위원회’라는 이름의 코너까지 등장했다. 그동안 여성들이 성차별이라고 제기해왔기 때문에 남성들이 드러낼 수 없었던 애환(?)을 소재로 한 이 코너는 첫 방송에서부터 큰 호응을 얻으며 회를 더 해갈수록 남성에 대한 역차별을 부각시키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아동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사회적으로 성폭력을 차단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법제도를 더욱더 강력하게 바꿔야 한다는 지점에서만 논쟁이 형성되고 있다. 이 사회의 어떠한 구조와 인식지형이 끊임없이 성폭력이 발생하도록 만드는지에 대한 고찰이나 반성은 간데없다. 성폭력 사건의 구체적인 경위를 선정적으로 드러내며 이런 가해자에게 12년은 너무 적으니 무기징역이나 화학적 거세 등의 외국 사례를 본받아야 한다는 주장만 되고 있다.
 
이런 이슈들 사이에서 페미니즘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소위 ‘꿀벅지vs초콜릿복근 논쟁’에서 페미니스트들은 ‘꿀벅지’가 왜 여성에게 성적 수치심을 주는 단어이고 ‘초콜릿복근’은 어떤 맥락에서 성희롱이라고 불리지 않는 것인지에 대한 입장을 못 만들어가고 있다. 이런 제기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으레 페미니스트들의 억지라고 일축했으며 페미니즘은 역시 여성들만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는 인식을 더욱더 단단히 굳혔다. 어쩌다 ‘여성의 인권을 보장하라는 드센 여성들의 요구에 밀려 남성의 인권이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고 당당히 외치는 개그맨들이 뜨거운 호응을 받는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일까?

2010년 학생회 선거 페미니즘 각론에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주체화되는 방식을 살펴보며 여성들이 불만을 느끼는 지점이 어디이고 그러한 불만들이 어떤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는지를 분석한다. 2010년대를 살아가는 여대생들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이며, 하기에 지금 대학사회에 필요한 페미니즘은 무엇인지를 담고자 한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인권만을 보장하라는 것이 아니며 남vs여의 구도를 만들어 불평등한 사회에서 여성이 더 많이 가지게 만들기 위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번 학생회 선거를 통해 분명히 말하자. 선거에 임하는 모두가 페미니즘이 이 시대의 보편적인 해방을 만들어가기 위한 필수적인 권리임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기 위하여 이 각론이 풍부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1. 시대분석_ 여성들은 어떻게 주체화되고 있는가?

…현재 대한민국의 20~30대 여자들의 대부분은 ‘일하는 여자’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살아간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일하는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만큼 녹록치 않다. 분야를 막론하고 여자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부딪칠 수밖에 없는 다양한 고민과 속마음, 남성 중심의 한국사회에서 인내하고 스스로 해결책을 찾을 수밖에 없는 여자들만의 문제, 행복한 직장생활을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노하우를 담은 책… -“대한민국에서 일하는 여자로 산다는 것” 책 소개 中

사회가 남성 중심적으로 구조화되어있기 때문에 여성들이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고 있는 사실이다. 직장에서 여성으로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 이 사회가 일하는 여성에 대한 배려가 너무 없다는 것, 그렇다고 일 안하고 집에만 있다고 해서 편한 것도 아니라는 것, 내조의 여왕이 될 것인가 커리어우먼이 될 것인가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병행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사회가 정말 불합리하다는 것 등은 거의 모든 여성들의 불만이자 여성 관련 계발서들이 서두에 담는 내용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계발서들이 이에 대해 내놓는 해답은 하나같이 ‘개인의 능력을 키우라’는 것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여성 관련 계발서들이 담고 있는 내용은 옷 잘 입는 여자가 일도 잘 한다거나, 인맥지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립서비스는 최고의 커뮤니케이션 기술이라며 상사 대하는 법을 알려주기도 하고, 상전처럼 구는 남자 부하직원 다루는 스킬도 알려준다. 또한 자신의 직업에 만족하는 방법,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 등 개인적인 성찰을 요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처럼 사회는 여성들에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할 수 있는 자신만의 전략을 만들라고 하는데, 많은 여성들이 이를 받아들인다. ‘여성’이라는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고 남성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기 위해 열심히 스펙을 쌓지만 결국 대부분의 여성들이 ‘최고의 스펙은 남성’이라는 벽 앞에 좌절한다. 결코 여성들이 덜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없는 문제이지만 사회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좀 더 뛰어난 능력자가 되라고 주문하며 여성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많은 여성들이 현실의 불합리함을 알고 있지만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안으로서 자기계발을 택한다는 것이다.
경기가 장기 침체로 접어들면서 꼭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경제위기를 체감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고,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는 여성들의 자기계발은 ‘알파걸’과 ‘골드미스’가 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생존 자체를 위한 조건이다. 많은 여성들은 롤모델로 제시되는 여성들의 삶이 능력 있는 몇몇 여성들만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지만, 고생 끝에 합당한 만족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한 줄기 희망을 품고 다시 이를 악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여성들의 삶을 힘들게 만드는지, 사회에 일어나야 하는 변화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변화를 가능하게 만들 것인지는 적극적으로 토론되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여성의 취업률이 늘었다는 통계가 발표되고 있는데, 올 2월 대졸 여성의 59.4%가 7월까지 일자리를 구해 2007년 46.4%, 2008년 54.7%에 이어 3년째 취업률 증가세를 기록했다고 한다. 그에 비해 대졸 남성의 경우 취업률이 낮아지고 있다는데, 그럼 정말 여성들이 더 취업 잘 되는 세상이 온 것일까? 주목할 것은 증가하는 퍼센티지가 아니라 일자리의 질이다. 올해 취업한 여성 대졸자 가운데 임금근로자는 15만 2000명이었는데, 이 중 상용직 취업자는 절반 남짓(7만 7000명)에 불과했다. 많은 여성들이 눈높이를 낮춰 임시·일용직으로 취업하기를 선택하고 있기 때문에 취업률이 올라간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계속해서 일자리의 질이 낮아지는 가운데 여성들이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정부의 기조는 사회서비스시장화정책이나 경력단절여성들의 재취업을 위한 여성새로일하기센터 등에서 집약적으로 나타난다. 성별 분업과 생계를 부양하는 일차적인 의무가 남성에게 있다는 이데올로기는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정부의 정책들은 여성의 노동권을 보장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일하는 여성들의 권리가 보장된다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며 노동권을 쟁취하기 위한 적극적인 운동들을 축소시키기도 한다.

대학의 모습은 어떠한가. 학내 페미니즘 운동이 만들어놓은 틀이 더 이상 확장되지 못하면서 페미니즘은 제도로, 여학생들의 편의만을 요구하는 이기주의라는 오해로, 대학생이라면 이미 지키고 있는 기본 에티켓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성폭력이나 성차별이라는 단어가 케케묵은 무언가를 다시 들춰내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여자 대학생’은 대학이라는 공간 안에서 자유롭게 관계 맺고 자신의 능력대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주체적인 존재로 서있는 듯하다. 하지만 여전히 강의실에서 여성비하 발언으로 불쾌감을 주는 교수들이 있으며 과/반이나 동아리에서도 성폭력적인 상황들이 사라졌다고 보기 힘들다. 이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공론화할 수 있는 공동의 움직임이 사라졌을 뿐이다. 예를 들어, 여자 연예인의 특정 신체부위를 성애적으로 표현한 단어를 들었을 때 불쾌하다고 느낀 사람들이 그런 감정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사라졌다. 한 여고생이 여성부 게시판에 그런 표현은 성희롱에 해당되니 사용하지 말자고 글을 올린 것에 네티즌들은 성희롱이다 아니다 갑론을박하기도 했지만 많은 여성들이 자신도 불쾌함을 느꼈다고 반응하기도 했다. 이처럼 어떤 문제에 대하여 불만이나 불쾌감을 느낀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감정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밝히고 그것이 개인의 불편함이 아니라는 것을 교감할 수 있는 공간이 대학에 남아있는가 했을 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대학에서 페미니즘은 공동체를 바꾸는 운동으로 인식되었으며 언제나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대학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진 반성폭력 운동의 성과는 무엇을 성폭력이라고 하는지,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어떠한 원칙을 가지고 해결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에 대해서 공동체 안에서 논쟁을 이끌어내고 구성원들이 직접 반성폭력 학칙을 제정하기도 하며 대학생들의 인식과 문화에 큰 변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페미니즘이 대안적인 공동체를 위한 원동력으로 인식되지 못한다. 반성폭력 운동의 소중한 성과들이 개별적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축소되거나, 공동체에서 페미니즘을 말하는 것이 ‘남성들의 권리와 대치되는 무언가를 요구하고 딴죽 거는 여자들의 투정’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페미니즘이 논쟁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비생산적인 싸움을 일으키거나 오해만을 낳고 있는 것이다.
여대생으로서 공부를 하고, 취업준비를 하고,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고,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몰성적으로 돌아가는 사회 속에서 자신들의 노력이 온전히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과 불안감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불만과 불안감은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해프닝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작년 촛불투쟁 이후 인터넷 상에서 소위 ‘배운 여자’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많은 젊은 여성들이 정치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현안에 대한 의견도 적극적으로 개진하면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경제위기에 대해 나름대로 분석해보기도 하고 취업이 잘 안 되는 현실을 한탄하기도 한다. 여성문제건 사회문제건 대안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일회성 촛불시위를 기획하거나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리는 것에서 더 나아가지 못 한다. 적당히 진보적인 개인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여성들에게 이 시대의 대안은 현실에 조응해서 자기계발 열심히 하거나 완전한 일탈을 꿈꾸며 여행을 떠난다든지 소비하는 것 외에는 없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2. 페미니즘으로! 공동체에서 논쟁과 토론을 재개하자!

여대생들은 여성이 남성에 비해 취업하기 힘들다는 것, 취업이 된다 해도 노력에 비해 만족스럽지 못한 직장이거나 직장 안에서 여러 가지 차별적인 상황과 맞닥뜨리게 될 것을 잘 알고 있다. 지금의 경제위기나 정부 정책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운동’이라는 이름이 아니어도 개별적으로 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들의 불만은 인터넷 게시판에서나 이념 없이 특정 사안마다 일어나는 촛불시위에서 휘발성 강한 모습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사회에 대한 불만을 자기만족적으로나마 표출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기계발에 몰두하면서 애써 현실을 외면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실에 반격을 가하기 위해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불만을 느끼는 지점들에 대하여 운동주체들이 속 시원히 이야기해줄 수 있어야 한다. 여성들은 노력 여하에 관계없이 취업이 잘 되지 않는 현실, 취업이 된다 해도 사회의 전통적인 성별분업 이데올로기와 남성 중심적인 구조가 가져오는 차별들에 불만을 느끼고 있다. 여기에 더해 여성의 신체가 성적대상화 되면서 외모를 가꿔야 한다는 압박도 끊임없이 받고 있다. 여성의 몸을 부각시키는 각종 미디어의 영향 속에서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가꿔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사회적인 분위기가 있다. 하지만 사회가 왜 여성에게 이런 것들을 강요하게 되었는지 제대로 밝히지 못하면서 남성의 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성희롱이라는 공격에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사회의 문제를 인식하고는 있지만 개별적으로 해결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집단적으로 무언가를 해본 경험이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람들의 불만과 불안감을 설명하고 공동의 실천이 활발히 이루어지기에는 대학사회의 조건이 과거와는 너무 많이 변해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학 페미니즘 운동이 만들어왔던 많은 것들이 학생들에게는 더 이상 유의미한 고민을 던지지 못한 채 학교 당국의 제도권으로 빨려들어 가거나, 학내에서 페미니즘을 말하는 것이 여성들의 이기주의로 받아들여지는 모습, 대학의 문화가 양성평등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기층 공동체에서 기본적인 반성폭력 내규조차 토론되기 어려워지는 대학의 모습과 마주하고 있는 지금,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페미니즘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시금 페미니즘을 ‘공동체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언어’로 만드는 것이다. 페미니즘을 고민하는 것이 몇몇 주체들의 몫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논쟁과 토론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하며 대학사회에 정치를 복원하기 위한 집단적 저항의 키워드로 페미니즘을 세워내자!


3. 페미니즘이 집단적 저항의 언어가 되기 위하여

대학사회에 페미니즘이 왜 필요한지를 설득할 수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시작할 수 없을 것이다. 왜 대학사회가 페미니즘으로 재구조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는지 스스로에게 되물어보자. 페미니즘을 고민하지 못하는 공동체는 어떤 구성원에게 불합리하거나 폭력적인 상황이 생겨도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거나 인지조차 할 수 없게 된다. 대학사회는 사회의 구조와 지배적인 문화가 투영되는 공간이기에 사회가 ‘정상’이라고 이야기하는 남성 중심적인 문화를 고스란히 받아 안게 되며 그것은 결국 배제되는 사람들을 낳을 수밖에 없게 된다. 페미니즘을 공동체가 작동할 수 있게 만드는 연료, 즉 ‘보편적인 윤리’로 만들지 못하면 여성과 남성의 차이가 고려되지 못한 채 남녀의 평등이 관념으로만 남아서 오히려 차별을 은폐하는 결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차이를 고려하지 못하는 공동체에서는 권력을 가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확연히 구분되고, 사람들이 관계 맺는 방식이 누군가에게는 억압이 될 수도 있고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공존할 수 있는 구조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페미니즘이다. 성적 차이로 인해서 차별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누군가에게 폭력이 되는 공동체(사회)를 바꿔내기 위해서는 다양하고 끈질긴 실천들이 필요한 것이다.
사회가 분명히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대학생들이 페미니즘을 보편적인 권리로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운동을 기획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에 다시금 페미니즘이라는 화두를 던지고 거기에 뛰어들어 적극적으로 논쟁하는 것이 필요하다. 페미니즘을 공동체의 보편적인 운영 원리로 만들기 위해서 지금 당장 나의, 우리의 공동체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실사하고 분석하여 함께 대안을 만들어가야 한다. 또한, 반성폭력 운동의 한계를 말했던 것이 이제는 반성폭력 운동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면 구체적으로 공동체의 상황과 구성원들의 인식 양태를 분석하여 지금 시기에 필요한 실천을 기획할 수 있어야 한다. 학생회 자체가 이것을 추동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사회에서 ‘꿀벅지’와 같은 쟁점이 형성될 때 이를 대중적인 논쟁의 장으로 끌고 나올 주체가 없고 공간이 없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공동체의 페미니즘적 재구성’은 페미니즘이 발언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공간과 주체가 유실되었기 때문에 학생회를 통해 페미니즘을 공동체의 윤리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내에서 성폭력이 일어나지 않게 만드는 것은 성폭력 상담소가 아니라 결국에는 공동체가 어떠한 원리로 운영되는가에 달려있다. 대학사회가 페미니즘으로 재구성될 수 있기 위해서는 이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논쟁을 촉발시킬 수 있는 주체가 필요한데 학생회가 이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3-1. 반성폭력 운동의 목표를 재설정하자: 공동체에서 논쟁을 다시 시작하자!

그간 대학 페미니즘은 기존의 인식을 깨뜨리는 성정치 담론과 반성폭력 운동의 실천으로 대학사회에 변화를 일으키며 발전해왔다. 사회적으로 금기시 되던 성폭력의 문제를 대학사회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발언하며 학내 구성원들과 함께 운동을 만들어 왔던 페미니스트들의 전성기는 학생운동이 수세기에 접어들면서 함께 소멸되어갔다. 반성폭력 운동의 성과라고 할 수 있는 반성폭력 규약/학칙은 그 자체만으로 성과가 아니라,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그것이 왜 필요하고 어떤 것들을 담으려고 하는지를 설득하기 위한 치열한 고민이 있었고 그로 인해 구성원들의 기존 사고방식을 깰 수 있었기 때문에 성과인 것이다. 그런 고민들이 확장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페미니즘이 대학사회에 제시해 왔던 담론과 정책들-예를 들어 반성폭력 학칙이나 여학생 휴게실 등-이 이제 더 이상 대학사회를 변화시키는 대안으로 인식되지 못하고 단지 학칙이나 제도로서 금지주의적이고 처벌주의적인 방식으로 인식된 것이라고 우리는 평가해왔다.
지금 대학사회에서 정치를 복원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공동체의 논쟁을 다시 살리는 것이다. 과거 대학사회에서 사람들이 성폭력이라고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을 성폭력이라고 이름 붙이는 과정은 얼마나 충격적이고 논쟁적이었겠는가. 지금의 문제는 페미니즘을 가지고 아무런 논쟁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은 많은 대학에 성폭력 상담소나 여학생 지원센터 등의 공간이 생겼지만 이것은 반성폭력 운동이 제기했던 문제의식들이 학생사회에 남아서 ‘운동’이 되지 못하고 그것의 형태만 학교의 제도로 편입된 것이다. 학교의 성폭력 상담소는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가해자를 징계/재교육하고 피해자를 보호/치유하는 역할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제도 자체가 대중공간에서의 논의를 촉발시키는 역할을 하지는 않기 때문에 제도가 잘 마련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본래의 문제의식을 더욱더 풍부하게 발전시켰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제도들을 한계적이라고만 규정해버릴 수는 없다. 성폭력 문제의 해결이 제도화된 것은 반성폭력 운동의 성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성폭력이 제대로 인식조차 되지 못했던 때에 성폭력을 정의하고 사건 해결의 원칙들을 마련하고 합의하는 것은 당시 반성폭력 운동의 목표였을 것이다. 학칙도 있고 상담소도 학교마다 생긴 현재의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반성폭력 운동의 목표를 새롭게 세우는 것이다.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할까? 
사건이 발생했을 때 잘 처리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지만 이것 자체가 운동이 될 수 있는 조건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반성폭력 운동은 단지 성폭력 사건이 우리의 눈앞에서 사라지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단지 사건을 잘 해결하는 것만도 아니다. 공동체의 어떠한 인식구조가 성폭력을 발생시키는지 분석하는 것이고 이것을 위해서는 학습과 논쟁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과/반/동아리에서 새내기 여학생이 으레 연애의 대상으로 보여 지는 상황들이 우리의 공동체에는 없는지, 대학생들이 연애를 바라보는 관점은 어떠한지, 성차를 고려하지 않는 공동체의 문화는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등을 점검해보고 실태에 맞는 실천들을 기획해보자. 이런 과정이 없으면 크고 작은 성폭력은 언제나 발생할 것이고 사람들은 어쩌면 그것을 인지조차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내 주변의 조건을 바꾸는 운동, 공동체에 논쟁을 제기하고 거기에서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주체화될 수 있는 반성폭력 운동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현재 반성폭력 운동의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3-2. 노동권을 페미니즘의 원리로 재구성하자

우리는 현재 여성들의 불만이 어디에서 시작하는지를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사람들에게서 노동권을 박탈하고, 여성에게 남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권의 박탈이 성별화된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는 것은 가정과 일터 모두에서 여성을 착취하는 성별 분업과 가족 이데올로기의 도움 없이는 지속될 수 없는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보다 적극적으로 대학사회 안에서 밝혀가자는 것이다. 여성들의 불만 지점이 취업과 외모라고 해서 ‘면접 때 먹히는 메이크업 강좌’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말이다. 여성들의 불만이 신자유주의가 규정하는 문제들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면 이것에 대한 우리의 대안은 여성들이 노동할 수 있는 권리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신자유주의가 가속화되면서 대학사회 내에 침투해 있는 이데올로기는 대학 간, 계급 간 다양한 형태로 분할되면서 여성이라는 자체만으로 동일성을 형성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여성들만이 가질 수 있는 피해감을 중심으로 전개했던 예전의 페미니즘 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분할되어 있는 지금 시대의 여대생들의 삶에 침투하여 신자유주의가 야기하고 있는 여성발전담론 등과 같은 이데올로기와 대립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시대의 보편적 권리로서 노동권을 제기하고, 불안정노동이 일반화되는 가운데 그것이 여성들에게 차별이 되어 돌아오는 이유가 신자유주의 때문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이에 대한 집단적인 저항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다 명확히 제기하는 것이 2010년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을 주체화할 수 있는 페미니즘의 핵심이다. 집단적 저항을 위한 여성들의 무기는 그때그때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한 개별적인 불만 표출이 아니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페미니즘으로 재구조화하고 공동의 대안을 고민하는 것이다.

4. 정책적 제안

4-1. 여성 노동권 적극적으로 발언하자!

여성의 노동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여성에게 일과 가정 모두를 책임져야 한다고 강요하는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폭로하자. 시대가 변함에 따라서 변해왔던 가족의 역사를 분석하며 가족이 내포하는 체제의 모순과 성적 차이에 기반한 차별이 역사적으로 어떠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왔는지를 보는 것도 지금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할 것이다.
또한 투쟁하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의 싸움에 연대하며 학생사회에 알려내자. 경제위기가 지속되면서 해고가 만연해졌고 여성들은 경제위기의 공격을 가장 먼저 받게 되었다. 기업이 어려워 해고를 선포하면 가장 먼저 해고되어 가정으로 돌려보내지는 것이 여성이지만 전반적으로 노동이 불안정해지면서 여성도 일하지 않으면 생계를 꾸리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여성들은 또다시 임시직 같은 불안정한 일자리로 내몰린다. 이렇듯 여성의 노동권이 불안의 악순환 속에 놓여 있음을 발언하며 여성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여성 스스로의 힘으로 가능하며 이것은 타자에 대한 시혜가 아니라 상호 동시적인 해방을 향한 ‘연대’로 가능함을 이야기하자.
취업 문제로 자신감을 잃어가는 여성들에게 이러한 현실은 개인의 노력으로 돌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에 강조점을 찍자. 여성의 문제에 포커스를 맞추어 경제위기를 풀어내는 기획도 시도해볼 수 있다. 학생회에서 단위의 여학생들이 취업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고 어떤 부분에서 어려움을 느끼는지 등을 조사하고 모여서 포럼과 같은 형식으로 여성의 노동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인식되는지 현실을 함께 되짚어보는 등의 계기를 통해 ‘취업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노동의 권리’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획들을 다양하게 시도해보자.       

4-2. 페미니즘 스쿨을 통해 공동체에서 페미니즘을 말하자!

페미니즘은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고 인식 구조를 변화시키는 운동이기 때문에 당위적인 언어만으로는 변화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공동체에서 페미니즘을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대중들이 지금의 공동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먼저 아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문제의식이 중단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렇게 페미니즘을 고민할 수 있는 토론의 장을 열고 대중들이 처한 상황과 인식 양태에 맞는 언어와 실천을 발굴하는 것이 현재 학생회의 역할이다. 페미니즘 스쿨과 같은 기획을 통해 공동체의 페미니즘을 진단하고 고민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자. 단위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드러내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개별적이고 분절적인 감정들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학생회에서 단위의 상황을 분석할 수 있는 설문조사를 진행하고 이를 토대로 프로그램을 기획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감정을 교류하거나 공동체의 지배적인 문화를 변화시키는 실천 외에도 페미니즘을 학습할 수 있는 기획도 꼭 필요하다. 페미니즘의 역사나 여성노동권에 대해서 학습할 수 있는 공부방을 기획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사전에 기획단을 구성하여 페미니즘으로 주체화될 수 있는 경로를 확장하는 계기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4-3. 공동체의 반성폭력 자치규약을 재개정하자!

반성폭력 자치규약을 가지고 있는 단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단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규약이 수년간 토론되지 못하여 지금의 상황을 잘 반영하지 못하는 규약이 되거나 구성원들에게 그 필요성을 인정받지 못 하는 경우가 많다. 설문조사를 통해서 여성들이 불편하게 느끼는 성폭력이 무엇인지, 그리고 남학우들을 대상으로 기존의 자치규약에서 느끼는 것들이 무엇인지 등을 조사해서 규약을 재개정 해보는 것이 공동체에서 페미니즘을 발언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반성폭력 내규는 새터나 현장활동을 떠나기 전에 ‘확인’하는 것이 전부였다면 주체들의 논의로 한정시키지 말고 대중적으로 논의할 수 있도록 기획해보자. 현장활동 주체학교를 열어 현장활동에서 왜 페미니즘을 고민해야 하는지 토론해볼 수 있을 것이고, 새터를 떠나기 전에 2학년들을 모아 새내기들에게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이유와 어떤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을지 토론하는 것도 좋다. 이를 단위의 반성폭력 규약을 만들거나 재개정하는 흐름으로 이어가보자.   

4-4. 성폭력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기획해보자!

최근 아동 성폭력 사건이 이슈로 떠오르면서 극단적 성폭력을 어떻게 예방할 수 있으며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되고 있다. 그러한 논쟁이 가해자 처벌 법안을 강력하게 개정하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문제라고 앞서 지적한 바 있다. 학교 근처 자취방들이 모여 있는 지역에서 “성폭력 없는 00동” 캠페인을 기획해보자. 최근 들어 부쩍 젊은 여성이 납치되는 사건이나 대학 근처 자취촌에 강도강간 사건이 많이 보도되고 있는데, 가로등이 없거나 인적이 뜸한 골목길이 여성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설명하는 전단지나 스티커를 만들어 골목마다 붙여놓을 수 있겠다. 학생회가 주민들과 만나서 가로등이 없는 골목에 가로등을 설치하는 문제를 이야기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캠페인의 과정과 결과를 게시하여 단위에 문제의식을 환류시키는 것도 잊지 말자. 
이런 사업이 뜬금없이 골목에 전단지를 붙이거나 비/반권의 여성 정책처럼 단지 가로등을 설치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이 사업을 왜 하는 것인지 설득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여성의 몸에 대한 폭력으로서의 극단적 성폭력이 왜 발생하는 것이고, 그것이 발생하지 않게 만들려면 사회적으로 여성이 성적 대상화 되는 문제나 폭력의 대상이 되는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겠다.

Posted by 행진

2009/11/24 13:14 2009/11/24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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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지환 2009/11/25 07:26 # M/D Reply Permalink

    매우 주관적이고 편파적인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꿀벅지 논란’과 관련하여 말씀드리자면, 성희롱이라는 것은 명백한 범죄행위이며, 범죄행위는 법률에서 규정하는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행위이어야 합니다. 현행 법률에 따르면 성희롱은 친고죄에 해당합니다. 즉 피해자가 가해자의 행동에 대해 불쾌감을 느껴 이에 대한 처벌을 호소했을 때에야 비로소 성희롱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꿀벅지 논란’의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여성 연예인들 중 어느 누구도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았고, ‘꿀벅지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유이 양의 경우 오히려 자신의 외모를 높이 평가해준 네티즌들에게 감사를 표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꿀벅지’라는 단어의 사용을 성희롱이라 섣불리 단정 짓는 것은 오히려 성희롱이 가지고 있는 범죄성을 희석시킬 수 있는 경솔한 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부도 이와 관련해 “피해 당사자가 인권위에 제기해야 할 개인적인 문제”라는 유권해석을 내린 것입니다.
    다만 이것이 여성의 신체에 대한 ‘대상화’라는 데에는 동의하며, 따라서 양성평등의 입장에서 이를 비판하는 데에는 저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최근 시끄러웠던 ‘루저(looser) 논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남성 역시 경제적 능력, 사회적 지위, 성적(性的) 능력, 신장 따위를 기준으로 자신의 인격을 평가받으며 ‘대상화’되어왔다는 사실입니다. 즉 여성주의자들이 ‘가부장제’, ‘남성 중심적 사회’라고 일방적으로 단정 지은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 하에서 ‘대상화’되어 온 것은 비단 여성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성 고용 불평등을 논함에 있어 여성이 겪어온 불이익만을 일방적으로 문제 삼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라는 것은, 제가 이곳 자유게시판을 통해 누차 지적한 문제입니다. 윗글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남성을 ‘1차적 가족부양자’로 여기는 성별 이데올로기가 팽배해있고, 그로 인해 남성은 여성보다 긴 근로시간과 무거운 가족부양의 책임에 짓눌려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더 무거운 책임을 부담하고 있는 남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에게 동등한 고용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뉴스클리핑 게시판에 올린 게시물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조차 자신보다 더 나은 조건의 상대를 택하는 남고여저(男高女低)의 결혼을 고집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경제력을 갖추면 남성을 억압하는 남녀문화가 저절로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입니까? 전국학생행진은 여성이 ‘일과 가정에서의 양립’을 강요받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것은 여성에게 지워지는 가족부양의 책임이 여전히 남성의 그것보다 훨씬 가볍다는 사실을 외면한 불합리하고 편파적인 주장입니다. 결국 전국학생행진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름없는 구태의연한 주장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자유게시판에 올린 글「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2. 먼소린지 2009/11/27 01:31 # M/D Reply Permalink

    두번째 문단에서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더 무거운 책임을 부담하고 있는 남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에게 동등한 고용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말입니까? " 당연한거 아닙니까? 고용의 기회는 성별이 아니라 능력의 차이를 근거로 주어져야 하는것 아닙니까? 너무 당연한것을 아니라고 주장하시네요.

    그리고 당신 말대로라면 오히려 더 여성에게 고용의 기회를 많이 줘야 할텐데요. 그래야 당신이 말하는 남성이 생계를 책임지는 사회에서 벗어날테니까요.
    참고로 전 남성입니다.

  3. 먼소린지 2009/11/27 01:35 # M/D Reply Permalink

    좀 징징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사회에서 가정의 생계를 남성이 책임지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은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여 취업의 기회가 남성에게 우선적으로 있어야 하는것은 아닙니다. 왜 그래야 되는데요?

    학연 혈연 지연 그런것들을 타파하고 오로지 능력과 인성이 평가의 잣대가 되어야 그게 정상적인 사회인것이지. 남성이 가장인 경우가 많다고 하여 남성에게 우선적으로 취업-고용 기회를 주자니요? 아니 뭐 직장이 남성 동호회인가요?

    1. 한지환 2009/11/27 07:45 # M/D Permalink

      귀하의 주장대로라면, “똑같은 권리와 기회가 주어진 사회구성원임에도 불구하고, 왜 남성이 여성보다 더 무거운 책임과 의무를 부담해야 하는가?” 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족부양의 1차적 책임을 강요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남녀 불평등이며 남성 억압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 하에서 남성이 누렸던 권리는 그들이 부담했던 각종 책임과 의무의 반대급부였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남성 억압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 없이는 여성 억압도 근본적으로 개선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외면하기 때문에 기존의 페미니즘이 ‘절름발이’라는 비난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지적에 대한 답변은 그동안 여러 차례 지적한 줄로 압니다. 여성에게 보다 많은 고용의 기회를 보장하여 여성의 경제력이 증대하면, 남성이 자연히 전통적인 책임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남성해방의 정의를 오해하신 것 같은데, 남성해방이라는 단순히 ‘맞벌이’를 통해 가족부양에 대한 남성의 부담이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남성해방이란, 말 그대로 남성이 전통적인 성별 이데올로기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피부양자’에서 ‘단독 가족부양자’에 이르기까지 원하는 성역할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나아가 그에 따른 책임의 분담을 상대 이성(異性)에게 요구하는 것을 뜻합니다. 귀하의 말씀대로라면,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조차 자신보다 더 나은 조건의 상대를 택하는 남고여저(男高女低)의 결혼을 고집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오늘날 대다수의 여성들이 자신보다 우월한 제반조건을 갖춘 남성만을 배우자감으로 고려하는 이유가, 단순히 그들이 먹고 살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결론적으로 말해, 남성을 1차적 가족부양자로 간주하는 남녀문화가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한, 물질구조의 개선만으로는 남성해방은 물론 진정한 양성평등을 이룰 수 없습니다. 남성 억압과 여성 억압은 물질구조라는 좁은 틀에서 벗어나, ‘문화’라는 보다 거대한 틀 속에서 해석해야 하는 문제라는 것이지요. 귀하의 주장은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를 여성의 시각에서만 해석하며 남성 억압을 여성 억압의 부산물 정도로 여기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에 따른 오류일 뿐입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제가 쓴「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왜 남의 글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은 채 함부로 이야기를 하십니까?

  4. 먼소린지 2009/11/27 14:00 # M/D Reply Permalink

    남성해방이라니요? 이 무슨 허튼소리입니까?

    노동해방 민족해방 이라는 구호가 전제하는것은 각자가 대상으로 하는 집단이 피억압 상태라는것을 전제로 합니다. 노동자계급은 자본가계급에 의해서, 피억압 민족은 제국주의에 의해서, 억압당하고 착취당하기에 해방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남성해방이라니요? 남성은 여성과 마찬가지로 단일한 집단이 아닙니다. 남성중에는 자본가도 있고 용산 철거민도 있지요. 여성도 마찬가지고. 따라서 남성해방이라는건 개념상 존재할수 없습니다. 여성해방도 마찬가지입니다. 있다면 여성 노동자 농민의 해방 이 있는거지요.

    실제 사회에서의 억압, 차별, 착취 구조를 보지 못하고 그것을 보려고 하는것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는것이 남성학의 목적인가보지요? 참 대단합니다.

  5. 먼소린지 2009/11/27 14:01 # M/D Reply Permalink

    그리고 남성이 생계를 부담하는 이유가 많은것은 남성에 대한 차별이 있어서가 아니라 여성에 대한 차별이 있어서입니다. 말은 똑바로 하셔야지

    그동안 여성들이 사회로 진출할 권리가 오랜시간동안 부정당해왔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시간이 흐르니 당연히 남성이 생계를 더 많이 부담하는거 아닙니까?

  6. 먼소린지 2009/11/27 14:02 # M/D Reply Permalink

    아 실수 모르고 열폭남성들의 허튼소리를 '남성학'이라고 해버렸네
    남성학은 무슨 개뿔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도 남자입니다.

    1. 한지환 2009/11/27 16:08 # M/D Permalink

      이야기를 나누기에 앞서「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을 읽어달라고 말씀드린 이유는, 귀하께서 남성학(男性學, Men's Studies)과 남성운동(男性運動, Men's Movement)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남성학과 남성운동은 1970년대 미국에서 처음 시작된 사회적 움직임으로, 남성운동의 여러 노선 가운데 제가 몸담고 있는 노선은 자유주의적 관점의 남성운동입니다. 자유주의적 남성운동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이분법적인 틀, 즉 전통적인 남녀관계를 억압 및 착취의 관계로 바라보며 남성을 ‘억압자 및 착취자’로, 여성을 ‘피억압자 및 피착취자’로 해석하는 근시안적이고 편협한 틀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움직임이지요. 다시 말해, 그동안 주목되어 왔던 피해자로서의 여성의 모습은 물론, 전통사회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피해자로서의 남성의 모습, 그리고 수혜자로서의 여성의 모습까지 주목하는 남성운동 노선입니다.

      가족부양의 책임을 비롯한 남성 억압이 여성 고용 불평등을 비롯한 물질적인 영역에서의 여성 억압의 부산물일 뿐이라고 주장하셨는데, 귀하의 말씀대로라면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경제력을 갖추게 되면 가족부양에 대한 남성의 부담은 자연히 사라져야 합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조차 자신보다 더 나은 조건의 상대를 택하는 남고여저(男高女低)의 결혼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빈부 차별과 학력 차별의 희생자로,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경제적 여건이 열악한 저소득층 남성들(농어업 종사자, 단순노무직 종사자, 중소기업체 근로자, 하위직 공무원 등)의 상당수가 아무런 경제적 기반이 없는 개발도상국 여성들과 결혼해 가족부양의 1차적 책임을 부담하고 있음에도 말이지요. 귀하의 말씀대로라면,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오늘날 대다수의 여성들이 자신보다 우월한 제반조건을 갖춘 남성만을 배우자감으로 고려하는 이유가, 단순히 그들이 먹고 살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귀하의 주장은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를 여성의 시각에서만 해석하며 전통적인 남녀관계를 억압 및 착취의 관계로만 바라보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에 따른 오류일 뿐입니다. 물론 우리 사회의 남녀문화와 관련해 여성들의 경제적 여건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기는 하나, 그것만으로는 남녀문화 전반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시다면, 우선 저의 글을 찬찬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7. 먼소린지 2009/11/27 20:36 # M/D Reply Permalink

    먼저 "학" 자 붙인다고 해서 아무거나 학문이 되지 않는다는 점 부터 말하고 싶습니다. 남성을 착취자, 여성을 피착취자 라고 보는것에서 벗어난다고 하는데 그렇게 보는거나 역으로 보는거나 다 허튼소리 아닌가요?

    이해하지 못하는게 아니라 관심조차 가지고 싶지 않습니다.

    남성은 착취자 혹은 피 착취자 여성은 착취자 혹은 피 착취자 이런것은 성립될수 없습니다. 그러한 관점은 남성주의든 여성주의든간에 현실에서 일어나는 억압과 착취를 은폐하고 대중의 인식을 오도하는것입니다.

    그리고 "남고여저" 현상이라고 하는데 높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조건과 동등하거나 상대적으로 높은 조건을 가지고 싶은 사람과 혼인하려고 하는것은 남자든 여자든 차이가 없습니다.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사실관계 자체가 그러하다는 겁니다. 다만 여성의 경우가 더 심한것은 제가 앞서 말한것처럼 오랜시간동안 고용의 불평등 각종 기회의 불평등으로 인해 조성된 차별에 기인하는것이지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경제력을 가진다구요? 개별적인 사례가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말입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지요.

  8. 먼소린지 2009/11/27 20:39 # M/D Reply Permalink

    남자는 밖에 나가서 돈을 벌고 여자는 집안일을 한다.

    아직도 이런 인식이 광범위하고 한국사회에서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뭐지요? 오랜시간동안 여성에 대한 차별(이것이 억압이나 착취라고는 볼수없슴)이 있어왔기 때문아닌가요? 그리하여 사회가 기형적으로 성장하였기 때문에 님이 말하는 남성생계 어쩌고 저쩌고 하는 현상이 있는거지요.

    님의 얘기를 보면 마치 성차별이 없는 사회에서 억지로 성차별 담론을 들고 나온다는거 같습니다. 성차별이라는것이 전혀 없는 사회에서 남성이 생계를 부양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 때문에 남성이 억압당한다? 허튼 소리의 연속입니다.

    1. 한지환 2009/11/28 07:40 # M/D Permalink

      한 편으로는 여성이 억압과 착취를 당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여성이 일방적으로 차별을 받아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 아닐까요? 여전히 자유주의적 남성운동과 관련된 기본적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은데, 전통적인 남녀문화는 여성을 일방적으로 억압하거나 착취한 것이 아니라 남녀에게 각자 정해진 성역할만을 강요하고 그에 따른 반대급부를 제공했으며, 따라서 남녀 모두는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의 피해자임과 동시에 수혜자라는 것이 자유주의적 남성운동가들의 공통된 주장입니다. 즉 전통사회에서의 여성 억압은 남성 억압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는 문제이며, 따라서 이를 여성에 대한 일방적인 차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시장의 동향에 대해 잘 모르고 계신다는 생각이 듭니다.「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에서 소개한 참고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남성은 일반적으로 배우자의 경제력이 자신보다 높은 것을 특별히 선호하지 않으며, 오히려 꺼려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는 결혼정보회사 듀오가 최근 주간동아, 한국경제신문과 함께 실시한 조사결과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맞벌이를 원하는 남성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면 여전히 남성은 배우자의 경제력과 관련해 여성과는 정반대되는 양상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남녀 각자의 제반조건과 상관없이 대다수 사회구성원들이 남고여저(男高女低)의 결혼을 당연시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지요. 이는 결혼정보회사 선우의 대표이사이자 한국결혼문화연구소 소장인 결혼문화 전문가 이웅진 선생도 지적한 내용입니다.
      남성들은 자신의 제반조건과 관계없이 여고남저(女高男低)의 결혼을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왜 여성들은 자신의 제반조건과 무관하게 남고여저의 결혼을 고집하는 것일까요? 나아가 귀하의 말씀처럼 전통적인 남녀문화가 여성을 일방적으로 차별해온 것이라면,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경제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은 스스로 차별의 굴레를 선택했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러한 것을 물질구조라는 좁은 틀 속에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것은 ‘문화’라는 보다 큰 틀 속에서 설명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귀하께서 생각하시는 바와 달리, 저는 여성 억압의 존재를 결코 부정하지 않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우리 사회의 남녀문화와 관련해 여성들의 경제적 여건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데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남녀문화 전반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제가 주장하려는 바입니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어난다 해도, 남성을 억압하는 남녀문화가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한, 남성은 가족부양의 부담에서 해방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남성해방과 여성해방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남성이 전통적인 책임에서 해방되지 못한다면 여성해방도 결국에는 걸림돌에 걸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9. 먼소린지 2009/11/28 12:37 # M/D Reply Permalink

    착취와 차별의 개념은 다른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부연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이 정도 구별을 못하시면 논쟁을 하실 자격이 없습니다.

    한 사회의 문화, 사상은 물질구조에 기반을 둡니다. 물질구조와 무관한 사상, 문화는 없습니다. 한지환씨가 말하는 현상들은 남녀차별이 고착화된 사회, 그런 기형적인 사회에서의 현상으로 이해해야 하지 그런 사회적 기반과 무관한 문화라고 하는것은 허튼소리의 연타일뿐입니다.

    1. 한지환 2009/11/28 17:16 # M/D Permalink

      물론 차별과 착취가 다른 단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귀하께서 내세우시는 마르크주의 페미니즘에서는 여성 차별을 곧 여성에 대한 경제적 착취로 간주합니다. 즉 귀하께서 이 둘을 따로 구분해서 이야기하시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질생활의 생산양식이 인간의 존재를 일방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은 이른바 ‘실패한 실험’인 마르크시즘의 오류일 뿐입니다. 이러한 마르크시즘을 남녀관계에 무리하게 적용하려 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으로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물론 남녀문화와 관련해 경제적 여건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기는 하나, 이것만으로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저의 주장에 동의하기 힘드시다면, 저의 질문에 대답해주시기 바랍니다. 귀하의 말씀대로 가족부양의 책임을 비롯한 남성 억압이 여성 억압의 부산물일 뿐이라면, 앞서 말씀드린 우리 사회의 결혼양태를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10. 먼소린지 2009/11/28 19:14 # M/D Reply Permalink

    마르크스주의적 페미니즘? 내 댓글 어디에 그런 말이 있나요? 한지환씨가 저한테 씌우려는 올가미일뿐이지 난 한번도 내가 마르크스주의적 페미니스트라고 한적이 없는데요? 마르크스주의적 페미니즘이라는게 성립될수있는지 그 여부도 모르고 그러한 관점이 여성에 대한 차별을 착취라고 보는지 모르나 나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풍차를 괴물이라고 외치며 돌진하는 돈키호테를 보는거 같군요.

    물질생활의 생산양식이 인간의 존재를 일방적으로 결정? 내가 언제 그렇게 얘기했나요?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고 했지. 아마 님이 말하는건 하부구조 상부구조 얘기인거 같은데 이게 언제 실패하였지요?(그리고 이 분석에 왜 실패라는 용어를 갖다 대는지? 굳이 따진다면 맞냐 틀리냐 이런 얘기 여야 하는거 아닌가?) 소련이 실패해서? 소련의 실패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교조 때문이 아니라 일탈 때문이지만 그런건 차치하고서라도 소련이 실패했다고 해서 마르크스주의가 부정당할 필요는 없는데요?

    소련이 실패했기 때문에 이론으로서 학문으로서 마르크스주의도 자동적으로 폐기된다는 그런 주장은 역시 허튼소리의 연속입니다.

    마지막으로 님의 질문에는 이미 대답했잖아요.

    제 댓글을 다시 보세요. 이해를 못하시나?

  11. 먼소린지 2009/11/28 19:23 # M/D Reply Permalink

    님과의 논쟁은 이 댓글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먼저 저는 전국학생행진과 어떤 연계도 없습니다. 아마도 한지환씨는 전국학생행진을 마르크스주의적 페미즘에 기반을 둔 집단으로 규정하고 댓글을 다는 나를 그렇게 본거 같지만 내가 그렇게 주장한바 없고 철저하게 님의 편견과 착각일 뿐입니다.

    착취와 차별은 다르기에 나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여성에 대한 착취를 동일시 한적이 없습니다. 님이 모순이라고 주장하는것 역시 언제까지나 님의 착각일뿐입니다.

    소련 실패의 문제에 있어서는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소련 실패가 마르크스주의의 일탈로부터 비롯된것임을 설득력있게 논증하고 있는 책이니 한지환씨의 소련에 대한 무지와 오해가 풀릴수있을꺼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와 별개로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규정하는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으시다면 그에 대한 반론을 내세워야지 소련 실패 운운해서는 안될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수차례 설명하였지만 님이 의기양양하게 내세운 남고여저 라는 현상도 결국은 "남자는 돈벌고 여자는 집안일 한다" 라는 인식이 사람들 머리속에 있기 때문인데 그건 왜 그렇습니까? 여성에 대한 차별 때문에 사회가 기형적으로 성장하였기 때문 아닙니까? 이해가 안되시나요?

    1. 한지환 2009/11/28 23:20 # M/D Permalink

      귀하께서 옹호하시는 마르크시즘으로 남녀의 역학 관계를 해석하는 것이 바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입니다. 이 둘을 별개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덧붙여서, 귀하께서 생각하시는 ‘차별’과 ‘착취’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현실에서 마르크시즘이 실패했다는 것은 비단 저 혼자만의 주장이 아닙니다. 인간은 경제적 요소만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은 동구와 소련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체제의 붕괴를 통해 이미 입증되었습니다. 물론 마르크시즘 이론이 가지고 있는 역사 이론으로서의 가치는 부정하지 않지만, 이를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려 드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태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말과 ‘물질생활의 생산양식이 인간의 존재를 결정한다’는 말은 기본적으로 같은 의미입니다.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분이 이런 말조차 이해하지 못한다니 당혹스럽군요. 아울러 앞으로 글을 쓸 때는 ‘무지’, ‘오해’ 같은 극단적인 표현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이 분야와 관련된 지식은 제가 귀하보다 결코 못하지 않을 것입니다.

      귀하께서「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을 읽어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는 남성에게 ‘이성(異性)을 보호할 책임’을 부여했고, 남성에게 지워지는 가족부양의 책임은 이러한 책임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귀하의 주장과 달리, 여성 차별의 결과 남성이 전통적인 책임을 부담하게 된 것이 아니라, 남성의 전통적인 책임 자체가 전통적인 성별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여성에 대한 차별로 인해 사회가 기형적으로 성장하였기 때문에” 남성이 가족부양의 책임을 강요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를 원하신다면 워렌 패럴 박사의『남자 만세(Women Can't Hear What Men Don't Say : Destroying Myths, Creating Love)』와 조지 L. 모스 박사의『남자의 이미지(The Image of Man)』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족을 부양하기 충분한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이 남고여저(男高女低)의 결혼을 고집하는 현실을 귀하의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느냐는 저의 질문에 대해, 귀하께서는 제대로 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답을 하기는 했으나 적절한 답이 아니었지요.
      ‘자신보다 제반조건이 우월한 배우자를 원하는 것은 남녀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귀하의 주장에 대해서는 근거자료를 제시하여 반박했습니다. 결혼시장에서 자신보다 제반조건이 우월한 배우자를 원하는 현상은 남녀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결코 아닙니다. 남녀 각자의 제반조건과 관계없이 대다수 사회구성원들은 남고여저의 결혼을 선호하고 있지요.
      또한 이것이 ‘물질적 영역에서의 남녀 불평등 탓’이라는 주장은 애당초 성립할 수 없습니다. 평범한 서민 여성들만 놓고 보았을 때에는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나, 평범한 서민 남성들 이상의 제반조건을 갖춘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이 남고여저의 결혼을 고집하는 것을 경제적 여건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귀하의 생각과 달리, 그들이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서’ 남고여저의 결혼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이 남고여저의 결혼을 고집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귀하의 말씀대로 단순히 여성 고용 불평등 때문에 남성이 가족부양의 1차적 책임을 부담하게 된 것이라면,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의 대다수가 남고여저의 결혼을 고집하는 현상은 일어날 수 없는 현상입니다. 또한 전통적인 남녀문화가 여성을 일방적으로 차별해온 것이라면,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경제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은 스스로 차별의 굴레를 선택했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물질구조라는 좁은 틀 속에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문제이며, 그렇기 때문에 남녀문화라는 보다 큰 틀 속에서 설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추신 : 읽어달라고 부탁드렸던 저의 글은 제대로 읽어보셨습니까?

  12. 먼소린지 2009/11/28 23:19 # M/D Reply Permalink

    1.

    경제적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고 할때의 상부구조는 이데올로기적, 철학적, 문화적, 기타 등 ,경제적 기반으로 부터 생기는 여러 구조물을 의미합니다. 당췌 한지환씨가 말하는 '인간의 존재' 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한지환씨는 제가 적은 구절을 어디선가 본듯하나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 멋대로 적으신거 같습니다. 책의 구절이나 문구를 정확하게 외워야 할 의무같은것은 없기에 트집 잡힐일은 아니나 그러면서 본인이 무지하지 않다고 주장하는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이처럼 문구 하나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한지환씨가 마르크스주의를 재단한다는것은 그냥 코메디입니다. 물론 누구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찬반을 얘기할수 있으나 옳으냐 그르냐 적합하냐 부적합하냐를 논하는건 아무나 해서는 안되지요.

    (그리고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할때 상부구조가 하부구조에 영향을 미칠수 있음을 맑스는 염두에 두었습니다. 한지환씨의 '일방적' 이라는 말 역시 무지로 인해 비롯된 오해인것입니다.)

    2.

    한지환씨 말처럼 소련의 실패를 마르크스주의의 실패와 동일시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한국에서도 언론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조중동 이하 극우언론을 비롯하여 각 대학의 교수들까지 그런 논리를 설파하고있는 사람은 한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공주의자들의 시야협착증일따름입니다.

    무엇보다 소련의 패배의 원인에 대해서 공부를 하시고 '시대착오적' 운운하시기 바랍니다. 소련의 패배는 단 한가지 원인으로 인해 발생한 결과가 아닌 만큼 과학적인 연구가 지속적으로 요구되고 있는 사안입니다. 제국주의 국가의 압박과 봉쇄 등과 같은 외적 요인을 제외한 내적 요인으로 설명되고 있는 일명 코시킨 개혁,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에서 일탈한 수정주의-개량주의적 흐름입니다.

    소련을 비롯한 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패배,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배워야할것이 분명히 있을것이고 약간의 변화도 필요할지 모르지만 맑스-레닌주의 자체를 무효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서도 안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한지환씨든 누구든 맑스주의의 무효화를 선언하고 싶다면 보다 새로운 과학적 이론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이론에 근거해 맑스주의를 논파해야 할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말입니다

  13. 먼소린지 2009/11/28 23:25 # M/D Reply Permalink

    3

    한지환씨가 줄기차게 주장하시는 남고여저 현상에 대해서 저는 충분히 제 의견을 밝혔으나 이해하지 못하시기에 쉽게 풀어서 설명드립니다.

    일단 모든 여성이 그러한 경향을 가지고 있는것은 아니라는점부터 전제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분명 그런 현상이 없다고는 할수 없을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것이냐?

    한국사회에서, 아니 비단 한국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성차별이 광범위하게 사회의 구석구석에 존재해왔습니다. 여성의 취업률 등은 그중 하나일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회는 어떠한 사회입니까?

    남성에게 좀 더 많은 고용과 취업, 양질의 일자리를 얻을수 있는 기회 등이 보장된 사회입니다. 여성에게는 그렇지 않고 말입니다. 한국사회는 거기에다가 유교의 잔재까지 남아있어 더 심하다고 볼수 있겠지요.

    그러면 이러한 사회에서는 어떤 인식이 생겨나게 됩니까?

    남성은 일하고 여성은 집안일을 한다 이거 아닙니까?

    이런 사회에서 여성이 자신의 생계를 확실히 보장해줄수있는 남성과 결혼하려고 하는 현상이 생길수 있는거지요. 이까지 이해가 되십니까?

    그리고 한지환씨가 여전히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에 대한 논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걸 알수있는게 생산양식은 좁은것으로 문화는 큰 틀로 주장하시는것을 보고 알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이데올로기 문화 등이 생산양식을 기반으로 하는것인데 말이지요. 이에 대한 이해가 없으니까 양자택일식으로 선택하려 드는거 아닙니까?

  14. 먼소린지 2009/11/28 23:29 # M/D Reply Permalink

    이제 정말 논쟁을 마무리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아주 무의미한 논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무엇보다 남성학이니 남성주의니 하는 학문의 범주에 포함될수 없는 무가치한것들과 목소리를 높이며 싸웠다는 사실이 제 자신을 부끄럽게 할 뿐입니다. 사회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하는 많은 학문이 있습니다. 철학도 그럴것이고 정치학도 그럴것이고 경제학도 그럴것이고 제가 모르는것도 있을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성주의? ....

    ps.

    한지환씨가 읽어보라고 추천해주신것은 하나도 읽지 않았고 하나도 읽을 생각이 없습니다. 진짜 학문을 공부할 시간도 부족한데 가짜 까지 보는것은 저 자신에 대한 자해가 아닐까 해서요.

    1. 한지환 2009/11/29 00:31 # M/D Permalink

      ‘물질생활의 생산양식이 인간의 존재를 결정한다’는 말은 물질생활의 생산양식, 즉 하부구조가 인간 삶의 전반을 결정한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말과 ‘물질생활의 생산양식이 인간의 존재를 결정한다’는 말은 기본적으로 같은 의미라는 것입니다. 저도 뜻을 모르는 말을 함부로 인용할 만큼 경솔한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일방적’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쓴 것은 저의 실수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책에도 ‘물질생활의 생산양식이 인간의 존재를 결정한다’고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귀하께서는 저의 질문을 계속 회피하고 계십니다. 저는 귀하께 평범한 서민 여성들이 아닌, 그들과 전혀 다른 여건에 놓여있는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의 결혼양태에 대해 물었습니다. 생계를 유지할 목적으로 남고여저(男高女低)의 결혼을 택한 서민 여성들에 대해 물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물론 남성보다 열악한 노동환경에 놓여있는 서민 여성들만 놓고 본다면 귀하처럼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의 경우, 그들이 남고여저의 결혼을 고집하는 현실을 물질구조라는 틀 속에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남고여저의 결혼을 고집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자기 자신과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경제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이 남고여저의 결혼을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귀하의 말씀대로라면, 우리 사회의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한 경제적 지위를 갖추게 될 경우, 그들이 자신보다 열등한 제반조건을 갖춘 남성을 배우자로 맞이해 가족부양의 1차적 책임을 부담할 것이라는 말씀입니까? 오늘날 결혼시장의 동향을 살펴볼 때, 그것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기대라는 것이 제가 지적하려는 바입니다. 즉 ‘여성 고용 불평등이 해소된다면 남성도 자연히 전통적인 책임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지금까지 이야기가 계속 겉돌았던 이유는 제가 귀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귀하께서 제가 던진 질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성학과 남성운동을 함부로 폄하하셨는데, 귀하께서 남성학과 남성운동에 대해 얼마나 아신다고 그렇게 함부로 말씀하시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보아하니 사회 이슈를 제대로 다룰 자세가 안 되어 있는 분인 것 같은데, 귀하의 이런 행동은 귀하의 한계를 보여줄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5. 구름 2010/03/09 23:32 # M/D Reply Permalink

    재밌네요 ㅋㅋㅋ
    먼소린지님이 정리 잘 해주신 것 같은데...
    계속 같은 얘기 하시는 듯.

    1. 한지환 2010/03/10 08:01 # M/D Permalink

      먼소린지님과 마찬가지로 듣고 싶은 말만 들으시는 것 같은데, 먼소린지님은 저의 핵심 되는 지적을 계속 회피하셨고 그 바람에 대화가 겉돌았던 것입니다. 남성의 전통적인 책임을 설명함에 있어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이 사회ㆍ문화적 기제로서 이른바 ‘가부장제’라 규정한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를 무시할 경우, 우리 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저의 지적이었습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먼소린지님은 이른바 ‘남고여저’의 결혼문화와 그로 인한 전통사회에서의 남성 억압이 순전히 물질적 구조의 탓이라고 주장하셨고, 저는 거기에 대해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경제력을 갖춘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이 여전히 ‘남고여저’의 결혼을 포기하지 않은 현실을 물질적 구조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반박했습니다. 먼소린지님의 주장은 남녀 간의 물질적 역학관계가 뒤바뀌어 남성이 경제적 책임에서 해방될 경우, 여성을 억압하는 성별 이데올로기 역시 자연히 사라져 그들이 외모지상주의의 굴레나 돌봄 노동의 부담으로부터 저절로 해방될 것이라는 주장만큼이나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는 것이지요.
      덧붙여서 말씀드리자면, 먼소린지님은 ‘문화’라는 것을 예술이나 사상 같은 정신문화에 국한시켜 생각하셨는데, 여기서 ‘문화’는 인류가 이룩해낸 물질적ㆍ정신적 소득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물질문화와 정신문화를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먼소린지님의 주장에 멋도 모르고 부화뇌동하신 것이 아니라면, 귀하께서 먼소린지님을 대신해 저의 지적에 답해주시기 바랍니다. 전통사회에서의 성적(性的) 억압의 원인이 남녀 간의 물질적 역학구조에 있다면, 경제적 측면에서 남성과 대등한 권리와 기회를 누리고 있는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이 여전히 전통적인 결혼양태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또 비록 소수이기는 하나, 가족의 생계를 전적으로 책임지는 여성가구주들이 돌봄 노동의 부담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을 남녀 간의 물질적 역학구조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쟁점1] 


경제위기가 남성과 여성에게 다른 이유




1. 경제위기와 여성의 관계

너는 아직도 페미니즘 얘기하니?
요즘 세상에 여자가 어디서 차별받는다고.

알파걸, 골드미스가 판을 친다는 세상에도 차별받는 여성들이 있을까? 있다. 단지 ‘몇몇이 있을’ 뿐 아니라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러하며 앞으로 그러할 가능성을 갖고 있다. 특히 경제위기는 여성에게 이중, 삼중의 고통을 안겨주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기는지에 대해서 함께 알아보는 것이 이번 글의 주제이다.

<잠깐 질문>

그러기에 앞서 첫 번째 질문을 던지자면, 우리는 왜 여성이 ‘더’ 착취 받는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하는 것일까? 절대 ‘더 불쌍한 사람’을 가려내기 위한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역사가 인간의 권리를 확장시켜왔지만 많은 경우에 이것은 ‘여성’의 권리를 확장시키는 것과는 별개로 존재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투표권이 그러하다. 우리는 투표권이 여성에게도 주어졌을 때 비로소 투표권은 ‘평등’해 졌다고 얘기할 수 있었다. 이렇듯 결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권리라는 것은 없는데, 경제위기 하에서 성별 간에 다른 방식으로 착취가 진행되고 있다면 그 내용에 대해서 정확히 알아야만 경제위기 하에서 발생하는 착취와 동시에 여성에게 더욱 부과되는 착취를 함께 없앨 수 있다. 경제위기만 극복하면 여성에 대한 착취가 자연스럽게 없어진다고 믿는다던지 경제위기부터 해결하고 여성에 대한 또 다른 착취를 없애겠다는 것은 별로 믿지 못 할 얘기가 아닐까?

여성 노동의 신화

사실 자본주의 아래서 여성이 ‘부수적인 노동력’으로 취급받은 역사는 매우 길다. 생산력이 급격히 높아진 자본주의 하에서 많은 노동력 없이도 충분한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는데 이때 생산의 바깥으로 가장 먼저 밀려난 사람들은 여성이었다. 이와 동시에 여성은 집에서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하는 사람으로 정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여성은 자본주의 시장구조에서 담보되지 않는 ‘재생산’의 영역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노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어머니의 숭고한 역할이자 여자에게 잘 어울리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에 생물학적인 근거를 들이대기도 하는데, 세계 대전 당시에 많은 공장과 일터에서는 여성들만이 일했었다는 사실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이것이 ‘생물학적 차이’의 결과라는 것은 아직까지 제대로 밝혀진 바가 없다. 즉, ‘힘이 세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은 아빠’, ‘연약하고 늘 모든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람은 엄마’라는 것은 환상일 가능성이 클 것이다.

이런 배경은 경제위기 하에서 여성들이 더욱 착취받기 쉬운 빌미를 제공한다. 이후에 사례를 통해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여성에겐 특수한 역할이 있다는 환상이 있는 사회 속에서 늘 ‘더’ 요구 받는 것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번의 경제위기 이전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IMF만 생각해보더라도 여성들은 직장에서 우선해고 1순위였고, 그 이유는 언제나 ‘경제가 어려우니 집으로 돌아가라’였다. 경제가 호황일 때는 여성 취업률이 높아지지만 나빠지면 가장 먼저 여성 취업률이 떨어지는 상황, 과연 자연스러운 차이에 의한 것일까? 그럼 이제 구체적으로 어떤 사례를 살펴보자.


2. 여성, 어디서 일하고 있나?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에 의한 대량 실업이 발생했다. 연일 뉴스와 신문에서는 ‘고개 숙인 아버지’ 이야기가 나왔고 한 광고에서는 '아빠, 힘내세요‘라는 노래를 불렀다. 경제위기 아래 수많은 여성들이 우선해고 대상에 오르고 직장을 잃고 다시 가정경제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피땀을 흘렸음에도 응원 받는 사람은 단지 ’가계를 책임‘진다는 남성 노동자 뿐 이었다. 경제위기와 함께 가장 빠르게 증가하는 것은 실업자, 반대로 이야기하면 직장이 필요한 사람이다. 최근 많은 50대 이상 여성들이 직장을 갖기를 희망 한다. 사람들은 중년, 고령의 여성들이 직장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속된말로 ‘애들 학원비나 벌’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이러한 사람들의 판단은 임금수준으로 고스란히 드러난다.

특출난 직능이 없는 50대 여성이 구할 수 있는 직장은 어떠한 것이 있을까? 대형 할인매장, 청소업무, 보험판매사, 주방보조 등이 떠오른다. 앞서 열거한 대부분의 직업은 기본급이 없거나 봉급이 최저임금의 수준을 유지한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정당한 노동을 수행함에도 불구하고 낮은 임금을 받는 것은 여성이 맡는 역할에 대한 사회적 편견 때문이다. 때문에 여성들이 종사하는 일자리는 어느 곳보다 빠르게 비정규직화, 외주화 되어 왔고 가장 저렴하고 쉽게 자를 수 있는 노동력으로 고령의 여성노동자들이 활용되고 있다.

여성의 섬세함이 21세기형 리더십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대부분의 여성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은 참담하다. 2004년 OECD에서 실시한 국가별 남녀 임금격차를 보면 한국의 남녀 임금격차는 40%로 OECD국가 평균 20%를 훌쩍 웃도는 수준이다. 분위별로 보면 소득의 상위 20% 남녀 임금격차는 30%이하인데 이것은 평균이하의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일수록 성별간의 임금 차별이 더 심각하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현상은 ‘차이’일까 ‘차별’일까? 동일한 생산성을 갖고 있음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더 낮은 임금을 받는다면 차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생산성’을 확인받을 수 있어야 할 텐데 한국노동연구원의 ‘여성인력과 생산성’(2000)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성별 임금격차 가운데 38% 정도만 생산성 격차로 설명되고 나머지 62%는 설명되지 못하고 있다. 즉 62% 정도의 여성들은 단지 성별에 의해 차별받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여성 노동자의 70%가 비정규직이고, 비정규직의 70%가 여성노동자’라는 집계를 통해서도 여성이 더욱 취약하고 열악한 업종에 분포되어 있으며, 이는 여성의 노동이 저평가된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기에 많은 여성노동자들은 ‘최저임금’을 임금으로 받고 있다. 최소한의 임금이 왜 열심히 일한 사람의 전체 임금이 되어야 할까? 심지어 많은 사업장에서는 이조차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데 지킨다 할지라도 그 임금은 별로 현실적이지 않다. 청소 업무를 하는 많은 여성노동자들은 용역업체에 근무하며 한주 5일, 공식/비공식 노동을 포함해 하루 10시간 이상의 일을 한다 해도 많은 경우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80여만 원의 돈을 받는다. 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80만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병원에 가야 한다 던지 급전이라도 생길라치면 어떻게도 여유를 만들기 힘든 돈이다. 충분히 일하고도 살만큼 받지 못하는 것, 일을 하면서도 빈곤할 수밖에 없는 많은 노동자들의 현실이다.

이렇게 비현실적인 최저임금은 그 비현실성이 인정되어 몇 년간 인상을 시켜왔는데, 최저임금을 임금으로 받고 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이것을 수포로 돌리려는 일이 있으니 최근 최저임금법이 개악된다는 소식이다. 지금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최저임금에 대한 준수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고 각 지역이나 나이에 따라 다르게 구성할 수 있다는 등의 내용을 갖는데, 이는 실제로 최저임금조차 앞으로는 더욱 보장하지 않겠다는 말일 뿐이다. 앞으로 최저의 임금선을 갖고 있는 노동자들의 삶은 어떻게 더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3. 우리는 일하고 싶다!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많은 여성들은 경제위기 아래서 더욱 극심한 착취에 노출되어 있다. 여대생의 삶 역시 결코 화려하지만은 않은데 최근 경제위기와 함께 취직 대신 결혼을 고려하고 있는 여대생이 늘고 있다는 뉴스를 보아도 그렇다. ‘취집’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는 지금, 여성에게 결혼과 취직이 동일시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언젠가부터 여성들에겐 꽤나 많은 평등이 주어진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형식적인 평등이 확립된 것처럼 보이는 사회에서 왜 아직도 여성들은 차별받고 있는가? 우리는 이에 대해서 고민해 보아야만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출산과 육아를 여성노동자만 걱정하지 않는 세상, 여성노동이 저평가 되지 않는 세상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경제위기는 소수 몇몇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생사의 경계로 몰아넣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여성은 그 충격을 줄이는 완충망 역할을 사회와 가정 양쪽에서 기대 받으며 갖가지 요구를 강요당하고 있다. 자본의 무한 증식 속에서 만들어진 오늘의 경제위기는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 그 답은 더 많은 사람들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데 있다. 더 많은 이윤, 더 많은 효율로는 누구의 삶도 나아지지 않는다. 여성이 경제위기 하에서 더 착취 받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우리의 대안이다.

Posted by 행진

2009/03/11 13:36 2009/03/11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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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특호_각론3]페미니즘



일과 가사의 양립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위기관리 전략에 맞서 여성노동권 쟁취!
지배계급의 여성발전담론 이데올로기에 맞서 페미니즘 운동의 한계를 넘어
   보편적 권리로서 페미니즘을 제기하자!

 

1. 들어가며

신자유주의 자본축적의 위기 속에서 드러난 재생산의 위기, 가족의 위기 속에서 여성들은 일과 가사의 양립을 요구받고 있다. 일도 하면서 자식도 잘 키워야 하는 ‘워킹맘 신드롬’이 이러한 현실을 잘 보여주는데, 워킹맘 신드롬과 맞물려 지배계급들은 여성들을 적극 활용할 정책들을 쏟아내고 있다. 다른 한 편으로는 ‘골드미스’,‘알파걸’이라는 이름으로 여성들을 여성발전 이데올로기를 유포하며 여성들을 환상에 빠지게 한다.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일과 가사의 양립을 강요하며 이중, 삼중의 착취를 강요하는 반면, 여성발전이데올로기를 통해 소수 몇 명의 성공한 여성들의 사례를 이야기하면서 여성들에게 환상을 심어주고 있는 지배계급의 전략에 따라 여성들의 분할과 경쟁은 더욱더 가속화되고 있다. KTX, 기륭, 이랜드-뉴코아와 같은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위기관리 속에서 드러난 필연적인 결과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여성들은 연대해서 같이 싸울 것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인 것이다. 이는 대학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신자유주의의 원리나 운영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드러나는 대학사회에서 스스로 자기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조건들에 의해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자기계발 이데올로기가 만연해있고, 여기에 여대생들은 특히 더 자유롭지 않으면서 경쟁과 분할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와 맞물려 기존에 있었던 페미니즘 운동의 한계를 뛰어넘는 운동들을 기획하지 못하며, 정체되어 있는 페미니즘 운동은 대학사회 내에서 페미니즘 담론의 위기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신자유주의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맞서 페미니즘이 적극적으로 대립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대학사회의 조건인 것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2009년 무엇을 해야 하는가? 3중의 위기 시대에 위기를 돌파해 나갈 전략적 핵심으로서 페미니즘, 여성발전담론과 맥을 같이 하는 지배계급의 페미니즘이 아니라 위기에 맞서 연대를 가능하게 할 전략으로서 보편적 권리로서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여성들의 분할이 아닌 연대로 신자유주의가 여성들에게 강요하는 구조적 모순들을 끊어내고 보편적 권리로서 여성권을 쟁취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신자유주의 위기관리 전략으로 여성친화적 일자리, 사회서비스 시장화 전략 등을 통해 여성들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현 시기 대학사회와 대학인들의 삶은 어떠한지 알아보고, 올해에 어떤 것들을 중심으로 투쟁을 전개할 것인지 투쟁방향에 대해 서술하였다. 이를 통해 페미니즘은 어떠해야 하며, 앞으로 페미니즘 운동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2. 시대인식 - 여성들은 어떻게 착취받고 있는가
  1) 일과 가사의 양립, 여성친화적 일자리 창출 비판
  2) 여성인력활용전략과 사회서비스 시장화
  3) 비정규악법 시행 1년, 더욱더 심화된 여성의 불안정노동화
  4) 2008년 대학사회, 흔들리는 페미니즘

3. 지속불가능한 신자유주의를 멈출 키워드, 페미니즘!
  1) 보편적 권리로서 페미니즘을 제기하자
  2) 그간 페미니즘 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페미니즘을 보편적 권리로 표상시키자

4. 학생운동의 임무 - 무엇을 할 것인가
  1) 일과 가사의 양립을 강요하는 여성인력활용에 맞서 여성노동권 쟁취로!
  2) 그간 페미니즘 운동의 한계를 극복하며, 학생사회를 페미니즘으로 무장하자!
  3) 교육권, 지식권으로서 페미니즘을 대중들에게!


>>글 전문을 보시려면 첨부파일을 다운로드 받으세요.

Posted by 행진

2008/10/30 16:47 2008/10/30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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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촛불문화제에 관한 몇 가지 단상

 

촛불문화제에 관한 몇 가지 단상


성균관 학생행진 회원 P



 매일 저녁 시민들의 촛불이 시청광장을 넘어서 광화문까지 번져가고 있다. 시청광장을 꽉 채웠을 때만 하더라도 정말 많이 모였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현충일부터는 도로를 소위 도로교통법상 불법적으로 점거하지 않으면 안될정도로 10만여 명의 시민들이 모이고 있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부부부터 4.19혁명때 고등학생이었다는 할아버지, 교복을 입고 삼삼 오오 나오고 있는 중고등학생들과 자신의 소속을 나타내는 깃발을 들고나오는 대학생등... 이 촛불집회에는 그 누구도 종잡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참가하고 있다. 사실 이런 최대규모 집회를 처음 가보는 관계로 이런 사람들과 바로 옆에서 함께 촛불에 불을 붙이고 같은 구호를 외친다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감동이었다. 그리고 이 글에서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하지만 어쩌면 어느 공간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고민을 하게 했던 촛불문화제의 단면들은 그 감동을 그저 감동만으로 느낄 수 없게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서울대에 다니고 있는 한 학생이 전경이 과잉진압을 한 동영상을 인터넷에서 또는 대중매체의 뉴스에서 한두 번쯤 보았을 것이다. 본인 역시도 그 집회에 있었던 터라 그 다음날에 바로 인터넷 기사를 훑어보고 있었고 충격적인 여러 동영상 가운데서도 그 동영상을 보면서 참으로 분개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우린 여기서 한 가지 큰 사실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동영상을 보고 정말 21세기에도 이런 폭력이 일어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분노하기에 앞서서 어쩌면 이 동영상의 당사자는 하루에도 엄청난 속도로 퍼져나가고 있는 이 영상을 보면서 어떠한 생각이 들었을까라고 생각해볼 수는 없었을까? 실제로 행진 자유게시판 5156번 글을 보면 이에 대한 서울대 26대 인문대 학생회의 성명서가 있다. 길지 않기 때문에 전부 내용을 실어보고자 한다.


언론의 무분별한 실명공개에 항의하며, 익명으로 교체할 것을 요구한다!


 서울대 한 학우가 5월 31일부터 6월 1일 새벽에 걸친 시위 현장에서, 전경의 군홧발로 구타당한 현장이 제보되어 화제가 되었다. 인터넷을 통해 동영상이 퍼지면서 국내의 유명 언론사에서는 이 학우에 관해 계속해서 취재를 요청해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 학우는 스스로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 언론의 보도에 의해 피해자의 신원이 모두 드러났다. 당사자의 말에 의하면, 어느 언론사에서도 신원 공개의 여부에 대해 보도 전에 당사자에게 합의를 구하지 않았다고  한다.

 수많은 메이저 언론사와 포탈을 통해, 실명이 공개된 기사 및 인터넷 동영상이 확산되면서 이 학우의 동영상은 공권력의 ‘피해자’로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 ‘보여지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끊임없이 대상화되고 있다. 또한, 무분별한 실명 공개로 인해 징계를 받을 경찰에 의해 보복 행위가 있을지 모른다는 압박감과 더불어 일반인으로서 언론에 신원이 노출되어 겪을 수밖에 없는 심리적 압박감이 이 학우를 2차, 3차의 가해로 몰아넣고 있다.

 이에 피해자의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가십거리로서 선정적으로 여론화하고 있는 언론사에 강력히 항의하며, 언론에서는 현재 보도되고 있는 모든 기사에 서울대 학우의 이름을 익명으로 교체해줄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 멈출 수 없는 변혁의 심장  26대 인문대 학생회


 사실 이 성명서를 보았을 때 아~ 그 사람이 서울대였어? 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를 했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피해자공개로 인한 제2,제3차 피해 역시 직접적인 폭력보다 더 무서운 간접적인 폭력일수 있다. 그리고 이 영상이 퍼져나가면서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자 “대한민국 남성들이여! 우리 함께 나가서 여성분들 대신 물대포를 맞읍시다” 류의 피해자 여성보호론이 들끓었다. 물론 자발적으로 이미 나오기 시작했지만 군복을 입은 예비군들이 각 학교에서 함께 모여서 가자는 등의 이야기가 각 학교 자게에 올라오고 촛불소녀를 지키는 예비군 오빠들 이라는 기사들이 신문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예비군으로 촛불시위대와 전경 사이에 일어날지 모르는 폭력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설 것을 자처하고 군복을 입고 집단적으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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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읽으면서 당신이 언제 어디서 어떠한 느낌으로 군복을 입은 예비군들을 만났는지를 떠올려보라. 내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넥타이 부대에 이어 군복 부대까지? 라는 느낌에 처음에는 무척이나 신선했다. 그들 역시도 새로운 집회문화에 등장한 아이콘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카메라를 터뜨려가면서 그들의 등장을 놀라워했다. 그런데 그 날 바로 앞에 있는 같은 학교 학우를 따라가기 위해서 뛰어가던 도중에 뛰지 마세요 라면서 막았던 예비군을 보았다.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전체가 뛰면 못 따라가는 사람도 있겠거니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물대포가 쏟아졌던 새벽에 여자들은 뒤로 가라고 하면서 남자들을 앞에 내세우는 모습은 그냥 고개를 갸웃거리기에는 너무 확연한 남성 중심적인 집회모습이었다. 애써 무시하고 우리학교는 다 같이 행동하자라는 판단이 있었기에 같이 싸우고 같이 빠지고 그렇게 집회에 참여를 했다. 하지만 여자분이 ‘남자분들 앞으로 나오세요~’라고 외치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참으로 혼란스러웠다. 그냥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앞으로 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뒤로 가면 되는거 아닌가. 다들 똑같은 결의가지고 자발적으로 나오는건데 성별로 꼭 나눠야 하나?


나 뿐만이 아니라 벌써 이러한 고민을 진보넷 블로그에 올린 분들도 있었는데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러한 고민에 대한 네티즌들의 반응이었다. 예비군이었다는 분은 “힘이 빠지네요”라는 반응은 평범한 편이었고 “직접 곤봉에 맞아봐야 아픈줄 알겠냐”식의 폭력적인 주장도 서슴지 않았다. 물론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인터넷이 이번 촛불문화제를 알리는데 가장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앞에서 말한 동영상에 대한 반응이나, 분명 집회 현장에서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고 있는 여성들의 고민을 담은 글에 이렇게 폭력적인 반응을 서슴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인터넷이 가진 ‘양날의 칼’을 느낄 수 있었다. “여자분들 뒤로 가세요”라는 말로 함께 싸우기 위해 나온 사람들 중 누군가를 배제하고 보호 받아야 할 존재로 만들기 보다는 이들도 안전하게 싸울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아보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지 않을까?


그래서 ‘온라인’이 아니라 ‘오프라인’에 주목하기로 했다. 사실 대치가 길어지면 곳곳에서 자유발언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 자리에서 구구절절히 모든 상황을 다 이야기할 수 없겠지만 우리가 고민해 온 집회문화의 남성중심성에 관해서 용기 내어 말해볼 수 있지는 않을까? 그것이 어렵다면 적어도 이번 촛불문화제에 함께 오는 정말 다양한 학우들과 오는 길에라도 이와 같은 고민을 함께 나누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 같다.

Posted by 행진

2008/06/10 17:08 2008/06/10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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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장기요양보험은 정말 효도정책일까? 


 

대안세계를 향한 여성행진(club.cyworld.com/womenmarch)


 

올해 7월부터 65세 이상의 노인이나 노인성 질병(치매, 중풍, 파킨슨 병)으로 수발이 필요한 노인을 대상으로 신체활동 또는 가사지원 등의 장기요양급여를 제공하는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실시된다고 한다.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는 방문요양, 방문간호, 방문목욕, 주야간보호, 단기보호, 취사, 조리, 세탁 등의 방식 혹은 노인요양시설에 직접 들어가서 생활하는 방식의 서비스로 이루어져있다.


이름부터 쉽지 않은(!) 이 제도는 7월 시행을 앞두고 신자유주의시대에 국가가 내놓은 하나의 효도방안처럼 곳곳에서 선전되고 있다. 며칠 전 방영되었던 해피투게더3에서의 “부모님 치매로 고생하는 가족들은 노인장기요양보험 신청을 하세요♬ (보험신청 후 1~3등급 판정받으면 장기요양 서비스 제공)”라는 노래 가사나, 동사무소 앞에 걸린 ‘노인장기요양보험 신청하세요!’ 라는 플랜카드는 금방이라도 노인과 가족의 부담을 덜어줄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노인장기요양보험을 신청해서 혜택을 받는 일만 남은 것일까? 가족의 어려움을 국가가 나서서 함께 책임지겠다고 이야기하는 이 제도는 과연 우리에게 장밋빛미래를 선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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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의 대상자는 전체 노인인구의 3.1%인 17만 명에 불과하고 서비스 대상자가 이용할 수 있는 시설 충족률은 60%를 겨우 넘는다. 전체 국민의 1%도 안 되는 극소수의 서비스 이용대상 뿐만 아니라 협소한 급여범위(치매, 중풍, 파킨슨 병)의 한계는 명확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제도가 시행되는 오는 7월부터 전체 국민의 건강보험료가 약4% 인상되며, 조만간 적용 대상자가 확대되고 소요되는 재정이 증대되면 보험료 부담은 더욱더 빠른 속도로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정부는 본인부담률(시설급여의 20%, 재가급여의 15%)이 일본이나 독일에 비하여 높은 편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협소한 급여범위 하에서 급여를 받지 못하는 항목은 본인이 부담해야 하는 상황은 본인 부담률이 큰 부담으로 돌아올 것임을 충분히 예상해 볼 수 있다. 거기에 더해 장기요양보험제도가 보장해주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사보험에 가입하는 것도 필수로 여겨지고 있는데, 실제로 신청자 접수와 함께 관련한 보험/금융 상품들이 부각되고 있으며, 노인요양서비스 시장을 노리고 재가요양서비스에 대한 프랜차이즈 사업 제안도 눈에 띈다.


이러한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의 한계가 나타남에도 정부는 직접 나서서 문제 해결을 하기 보다는 시장화만을 유일한 대안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제 정부는 기존에 공적 영역이라 여겨졌던 분야에 대한 사유화, 시장화뿐만 아니라 비공식 부문에서 가시화되지 않았던 재생산 노동의 영역까지 적극적으로 시장화를 추진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발생되는 문제는 민중에게 전가되고 있다.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또한 결국에는 건강보험료, 서비스 이용료, 민간 보험료의 삼중 부담을 오롯이 민중이 떠안아야 하는 셈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편, 노인요양서비스의 시장화는 해당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악화문제와도 직결된다. 많은 이윤을 남기기 어려운 사업인 요양시설은 100% 민간위탁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이윤만을 추구하는 자본의 논리 하에, 결국 비용 삭감과 효율성 증대라는 명목으로 노동자들에게 장시간 근무와 저임금 등의 열악한 처우를 강요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회서비스 일자리는 가족 내에서 ‘여성이 무급으로 수행하는 쉬운 일’이라는 인식하에 저임금을 정당화하며 거의 대부분이 여성노동자들로 채워지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사랑의 마음으로 수행해야 하는 노동이라는 인식하에 여성노동자들은 끊임없는 감정노동을 요구받고 있으며 한 명의 노동자로서 노동자성을 인정받는 것조차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시범운영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여성노동자들은 서비스 이용자들로부터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 보다는 ‘일하러온 며느리/딸’로 여겨져 제공하기로 되어있던 서비스 이외에 각종 집안일 또한 요구받는 상황에 종종 놓이게 된다. 


정부는 사회서비스 전략을 통해 사회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을 사회가 책임지는 것과 더불어 여성의 일자리를 마련하겠다고 이야기 하고 있지만 가족 내에서 여성이 수행해야 하는 역할은 전혀 변하지 않았고, 이제 각 가정의 주부들은 ‘사회서비스 이용자’라는 규정 속에서 자신의 가사와 돌봄 노동을 보조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정부 지원을 통해 돈을 주고 이용하는 사용자의 위치도 갖게 되었을 뿐이다. 결국 맞벌이 부부든, 한 부모 가정이든, 자식들의 돌봄이 없는 독거노인이든 여성의 역할에 빈자리가 있는 가족을 다른 여성의 노동으로 채워주는 양상이다. 지금껏 가족 내에서 여성의 일로 간주되어 온 노인에 대한 보살핌 노동을 떠올린다면 노인장기요양보험도 사회서비스 전략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민중들은 빈곤의 심화로 인해 아프고 늙어가는 것에 대해 더욱 큰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나이가 들거나 병으로 인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 그 책임이 개인에게 혹은 한 가족에게만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함께 책임지고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시장화의 방식으로 민중에게 부담을 전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사회화를 통해 더 많은 개인과 가족이, 보다 안정된 서비스 공급을 고르게 받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돌봄 노동과 가사노동 등의 재생산 노동이 여성들이 하는 쉬운 일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하나의 노동으로서 재평가 받을 수 있어야 하며 이는 사회서비스에 종사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저임금-고강도의 불안정한 노동에서 벗어나 당당한 노동자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바탕이 될 것이다.

Posted by 행진

2008/05/31 16:53 2008/05/31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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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여성의 날 Review

페미니즘으로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신자유주의가 야기하는 ‘고용 없는 성장’과 ‘노동의 불안정화’, ‘빈곤의 극심화’ 속에서 대다수의 여성이 노동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여전히 뿌리 깊은 “가족임금 이데올로기”로 인해 여성의 노동은 남성 생계부양자의 노동에 대한 ‘보충물’로 간주되면서 저임금이 정당화 됩니다. 정부는 오히려 가족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저출산 정책, 사회서비스 정책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대다수의 여성이 저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와 가정 내 재생산노동의 이중부담을 전가 받고 있지만, 사회는 ‘알파걸’ ‘골드미스’ 등 소수의 성공한 여성에게 주목하며 ‘개인이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유포하면서 오늘날 여성의 문제가 사회구조적인 문제임을 은폐합니다.

신자유주의 여성활용전략 반대! 여성노동권 쟁취! 페미니즘으로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기조로 학생기획단을 꾸려 3.8 여성의 날 투쟁을 진행했습니다. 3.8 투쟁을 준비하는 여러 학교에서 모여 기조를 논의하고, 고민을 나누고, 다양한 실천을 기획했습니다. 학내 여러 단위들과 실천단을 꾸리거나, 새내기들과 실천단을 꾸리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3.8 여성의 날의 역사와 의의에 대해 토론을 진행하고, 학내에서 선전전, 광장사업을 벌였습니다.

여러 사회단체와 노조와 함께 <3.8 세계여성의 날 100주년 투쟁 기획단>을 꾸려서 그동안 별개의 실천이 되어왔던 여성권-노동권의 결합을 위해 노력하면서 투쟁하는 여성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3.8을 만들었습니다. 3월 3일은 기념하는 3.8이 아니라 투쟁하는 3.8로 만들 것을 결의하고 알리는 기자회견을 갖기도 하고, 여성 노동자들이 직접 삶과 투쟁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야기마당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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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6일에는 학생기획단에서 여성 노동자와의 간담회 <신자유주의와 불안정노동에 맞선 여성들의 투쟁>을 진행했습니다. 연세대 미화 노동자, 기륭 노동자들이 어떻게 투쟁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 여성노동자분들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회서비스 시장화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의 최예륜 동지는 정부가 시행하는 사회서비스 시장화 정책의 문제점과, 사회서비스는 누구나 당연히 누릴 수 있는 보편적인 권리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쉽게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학생기획단의 지인 동지의 발제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여성 인력이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와 ‘여성발전담론’이 실제 여성의 삶을 은폐하고 있음을 분석하고, 여성들의 저항과 연대로 투쟁하는 100주년 3.8을 만들어가자는 내용이 담겨있었습니다. 토론은 길게 진행되지 못했지만 여성노동권 쟁취의 실내용은 어떠해야 하는지 고민을 나눌 수 있는 계기였습니다. 간담회가 끝나고, 기륭과 연세대 분회에 드릴 플랑에 연대의 메시지를 쓰면서 결의를 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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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울 7일에는 신촌에서 있었던 <이랜드-뉴코아 대학생 공동 불매운동> 기자회견과 선전전에 참가했습니다. 계속해서 교섭을 거부하며 노조를 해고하는 이랜드는 중국법인 수익을 배수진으로 삼고, 노조 말살을 목표로 마지막 버티기에 전략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랜드-뉴코아 노조는 이랜드 중국법인이 홍콩증시에 상장되는 것을 저지하는 싸움을 벌이고 있고, 대학생들은 이에 연대하여 이랜드그룹 소속 의류브랜드 불매를 선언하며 이를 알려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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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8일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서울지역 여성노동자 한마당이 열렸습니다. 많은 예산을 들여 준비한 주류여성운동의 기념행사와는 대비되는, 여성노동권을 중심으로 여성운동의 현실과 과제를 이야기하는 자리였습니다. 이주, 학교 비정규직, 이랜드, 뉴코아, 보육 노동자 등 각기 다른 조건과 상황에 처해있지만, 신자유주의 하에서 박탈되는 여성의 권리를 쟁취하고자 하는 여성노동자들의 감동적인 발언이 이어졌고, 학생들도 퍼포먼스, 몸짓 공연이 있었습니다. 이후 전국여성노동자대회에 참가하고 문화제로 오는 길에 성신여대 입구역에서 성신여대 정문까지 걸어오며 3.8 여성의 날을 알리고, 여성의 권리를 이야기하는 선전전을 진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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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8일 저녁에는 성신여대에서 문화제 <100 To The Future>가 열렸습니다. 문화제가 시작하기 전, 부대행사로 각자의 소망을 담는 100피스 퍼즐 맞추기와 이랜드 불매운동 선언, 여성운동네트워크(준) 풀씨가입 등이 있었습니다. 알파걸인 ‘오로라’와 쌍둥이 오빠인 ‘오마르’가 100년 전 ‘루시’의 메시지를 발견하면서, 타임머신 주전자와 함께 시간을 여행하며 일상을 돌아보게 되는 줄거리였습니다. 100년 전 여성들이 노동의 권리를 외며 거리로 뛰쳐나오는 재현극은 중앙대 새내기들의 열연이 돋보였죠^^ 학교에서 겪게 되는 남성 중심적 술자리 문화에 대한 고민, 가정에서 엄마가 일과 가사의 이중부담을 겪는 상황, 학교에서 학내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와의 마주치는 상황을 고대, 성균관대, 성신여대에서 재기발랄한 상황극으로 만들었습니다. 모두의 소망을 담아 종이 비행기를 날렸는데, 성신여대 미화 여성노동자분이 쓴 메시지가 무대로 날아들었어요. 홍대에서 이랜드-뉴코아 여성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담은 자작곡 공연이 있었고, 마지막으로 학생기획단 단장 지인 동지가 3.8 투쟁을 돌아보며 느낀 것들에 대해 발언하고, 3.8이 끝이 아닌, 여성의 권리 쟁취를 위한 싸움의 시작으로 만들자는 결의문을 낭독했습니다. 많은 예산을 들이거나, 전문가들이 준비한 것이 아니라 미흡한 점도 있었지만, 학생들이 모여 컨셉에서 전체 극 내용, 상황극, 영상, 소품까지 함께 고민하고 만든 소중한 자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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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으로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종이비행기와 100피스 퍼즐에 담겼던 소망, 3.8 투쟁을 진행하며 느꼈던 감동을 아직 기억하고 있죠? 또 다른 세계를 가능하게 할 우리의 페미니즘,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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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행진

2008/04/01 03:27 2008/04/01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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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재생산의 위기, 그리고 여성의 삶

우리는 자본주의가 야기하는 모순에 주목한다. 신자유주의를 반대하고, 한미FTA를 비판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체제에 비판적이라는 소위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조차 종종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생산양식의 배후에 있는 ‘사회적 노동력의 재생산영역’이다.

자본주의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노동력’이라는 특수한 상품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면서, 많은 사회구성원들은 노예/농노제의 ‘인격적 예속’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여기서 ‘자유롭다’는 것은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즉 ‘법적’으로 자유로운 동시에 ‘생산수단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것이다.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들(즉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 상품을 판매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만이 비로소 노동을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 노동에 대한 대가(즉 임금)을 받는다. 그리고 그 돈으로 의식주와 관계된 상품들을 구입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여기서 노동자들이 노동을 하면서 생산한 가치와, 자신의 노동력 상품을 판매함으로써 받은 대가 사이에는 ‘근원적인 격차’가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적 착취의 원천인 ‘잉여가치’이다. 여기까지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고전적인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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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착취의 장소가 있다. 그것이 바로 종종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치부되는 ‘자본주의적 재생산양식’ 영역이다. 노동력 상품은 한 번 쓰고 버리는 소모품이 아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재생산’되어야 한다. 즉 음식물을 충분히 섭취하고 잠을 충분히 자야 한다. 또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양육되어야 하며, 교육받아야 하며,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아프면 병간호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참혹한 노동현장에서 받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바로 이러한 재생산 과정이 이루어지는 곳이 ‘자본주의적 재생산영역’이며, 그것을 전담하는 사람들이 바로 가정주부들, 즉 여성들인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여성들의 이러한 재생산노동은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도 못했을 뿐더러 충분한 대가를 받지도 못해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착취의 메커니즘이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위와 같이 ‘상품의 생산과정’‘노동인구의 사회적 재생산 과정’ 사이의 ‘분리’를 전제로 한다. 전자의 장소가 공장/사업장이라면, 후자의 장소가 바로 가정인 것이다. 이러한 분리는 여성들만이 가지는 고유한 생계적 불안정성, 경제적 종속, 성별 분업을 야기한다.

사실 과거 농업사회는 이와는 다른 모습을 띠었다. 즉, 생산과 재생산이 거의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물론 이 때도 성별 분업과 관련된 갈등이 존재하였지만, 가정과 작업장 사이에서 지금과 같은 뚜렷한 구별은 없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 들어와, 생산과 재생산은 별개의 영역으로 분할된다. 그리고 이에 따라 “임금노동”과 “무임금 가사노동”으로 노동 또한 이분화된다.

이러한 재생산노동, 즉 무임금 가사노동은 자본축적에서 막대한 영역을 차지한다. 예를 들면, UNDP의 1995년 인간개발보고서를 보면 1993년 세계경제에서 여성들의 가구노동의 가치는 11조 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물론 이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은 적은 없다.) 따라서 여성들의 재생산노동을 ‘통제’하는 것은 자본과 국가에게 사활적인 일이 된다. 특히 ‘출산’이나 ‘정서적인 보살핌(care)'은 노동의 재생산과정에서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여성의 육체와 감정은 특히 강력하고 특수한 사회적 억압에 의해 통제되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역사적으로 엄청난 이데올로기적/물리적 폭력이 가해졌다.

다들 ‘인클로저 운동’이라는 것에 대해서 들어봤을 것이다. 큰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양모의 생산을 늘리고자, 많은 귀족과 지주들은 소작인들을 모두 쫓아내고 농토를 목축지로 바꾸었다. 인클로저 정책으로 인해 많은 농부들이 선대부터 살던 고향을 떠나 객지로 떠돌게 되었고,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이것은 프롤레타리아가 태동한 역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렇듯 ‘노동력 상품’이라는 존재는 아주 폭력적인 방식을 통해 형성되었다. 그렇다면, ‘무임금 재생산노동자’는 어떠한 역사 속에서 형성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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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보면, 국가는 이미 15,16세기부터 인구,육체,섹슈얼리티,결혼,가족 등에 주목하고 그것들을 통제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한 통제 과정의 폭력성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과거 유럽 전역의 ‘마녀사냥’이다. 출산/낙태/피임에 관한 지식에 관심을 기울인 여성들, 남편에게 반역한 여성들, 결혼을 거부하고 혼외정사를 한 여성들은 모두 마녀로 낙인찍히고 종교재판을 통해 고문, 처형당했다.

이러한 통제가 이루어진 주요 장소는 역시 ‘가족’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가족을 비판할 수 있다. 가족은 전 민중의 ‘사회적 연대’를 ‘사적 유대’로 대체하고 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를 구성원들에게 교육시키는 장소이다. 동시에 여성들의 성별 분업, 그리고 성차별적 이데올로기의 생산이 근원적으로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를 변혁하기 위해서는 가족을 변혁해야 한다. 반면 지배계급으로서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국가장치를 지키는 것이 관건적인 일이다. 단적인 예로, 20세기 복지국가는 가족의 역할을 강화하려는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진행하였다. 이러한 캠페인은 가사노동을 가족과 민족을 위한 사랑의 노동으로 상징시켜냈다. 국가는 사회 서비스를 통해 가내 서비스를 위한 표준을 설정하고자 하였고, 가정에 들어가 주부의 가사노동을 직접 훈련시키고 통제할 목적으로 사회사업가의 네트워크를 창설하였다. 이 시기에 들어 가계를 위한 건강 소책자들이 널리 유통되었고, 보건 관료들은 가사노동의 질을 체크하도록 요구받았다.

기계화/도시화가 가속화되면서, 생산과 재생산은 이제 완전히 별개의 영역으로 확립된다. (‘공장’과 ‘가정’이라는 형태로…) 그리하여 여성들 입장에서는 ‘임금노동’과 ‘재생산노동’을 조화시키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다. 여성들은 점차 노동시장에서 퇴출되어 육아와 가사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생계를 위해 남성 가계부양자에게 경제적으로 더욱 종속되었다. 막대한 양의 가사노동과 자발적인 사랑의 노동이 여성에게 요구되었다. 그리고 가정 내의 종속적 관계로 인해 종종 발생하는 가정폭력은 ‘가족의 프라이버시’라는 베일 속에서 개인적 문제로 간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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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재생산영역의 메커니즘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제 자본의 위기 속에서 재생산이 어떻게 위기에 처하게 되는지, 그리고 그것은 여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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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가 ‘재생산의 위기’라 부르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핵가족의 위기’이다. 20세기 미국 헤게모니 아래에서 노동자계급에까지 보편화되었던 ‘아메리카적 핵가족’이,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 속에서 덩달아 위기에 처한 것이다.

20세기의 지배적인 가족 형태인 ‘아메리카적 핵가족’ 형태는 과거의 ‘영국적 빅토리아 가족’을 대체하면서 태동하였다. 아메리카적 핵가족을 지탱하는 주요 요소로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 번째는 바로 ‘가족임금(family wage)’이다.(핵가족의 물질적 토대) 남성 가계부양자가 가족 구성원들 전체를 먹여살릴 수 있는 임금분(즉 가족임금)을 받는 대신 여성은 가사일과 소비에만 전념하는 것이 바로 ‘가족임금’으로 유지되는 핵가족의 형태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크게 떠올라 수십 년 동안 잠깐 황금기를 누린) 미국 자본주의 체제는, ‘넉넉하지는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은’ 가족임금 협약을 노동자계급에까지 대대적으로 제안하였다. 그리고 대다수의 노동자들도 이를 적극 받아들였다. “여성들이 노동시장에서 철수하면 노동 공급이 감소할 것이다. 그리하여 가장들의 임금이 인상될 것이다. 이는 여성들을 참혹한 노동현장으로부터 ‘보호’할 수도 있을 것이다.”라는 식의 논리 때문이었다. 가족임금은 현장에서 싸워온 여성노동자들을 가정주부로 전화시켰다. 가족임금은 노동자운동의 전반적인 쇠퇴와 개량화를 이야기함에 있어서도 빼놓을 수 없는 화두이다.

두 번째 주요요소는 ‘동반자적 결혼(companionate marriage)’이라는 개념이다.(핵가족의 이데올로기적 토대) 쉽게 말해, 빅토리아 가족에서 일반적이었던 『오만과 편견』 식의 ‘성장소설 연애결혼’에서 헐리우드 영화 식의 ‘데이트 결혼’으로 사랑과 결혼의 형태가 변화한 것이다. 이는 ‘1차 性혁명’에 따른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性이 뭔가 엄숙하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존재였던 것에 반해, 새로운 性혁명은 구애 행위(‘자동차데이트’를 한 번 떠올려보길)와 성적 친밀성을 새롭게 정의하였다. 물론 이는 성을 일부일처식 결혼제도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킨 것은 아니었다. 1차 성혁명은 가부작정 권력의 중심축을 아버지로부터 남자친구·남편으로 이동시켰다.

아메리카 핵가족은 2차 대전 이후 자본주의의 황금기 속에서 전성기를 맞이한다. ‘마이 홈’, ‘마이 카’로 상징되는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이 만인의 꿈으로 자리잡게 된다. 하지만 황금기가 끝난 후, 70년대부터 미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와 이윤율의 저하가 다시 시작하면서 앞에서 서술한 두 가지 주요요소들이 모두 위기를 맞게 된다. 그리하여 ‘재생산의 위기’, ‘핵가족의 위기’가 시작된다.

그 위기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일단 첫 번째 요소인 ‘가족임금’이 해체된다. 자본축적의 위기 속에서 남성 1인이 가족구성원 모두를 위한 생활임금을 획득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해진다. 신자유주의가 야기하는 ‘고용 없는 성장’과 ‘노동의 불안정화’, ‘빈곤의 극심화’ 속에서 이제 대다수 여성들이 노동시장에서 일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게 되었다.

‘2차 성혁명’의 개시로 두 번째 요소인 ‘1차 성혁명’이 해체된다. 1차 성혁명이 결혼/출산/육아의 의미를 ‘낭만적 사랑’으로 재구성한데 비해, 2차 성혁명은 아예 결혼·출산과 性을 완전히 분리시킨다. 피임 기술의 발달로 인해 “성교 = 출산”이라는 등식이 깨졌고, 여러 가지 사회적·문화적 변화 속에서 섹슈얼리티(sexuality)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바야흐로 ‘성해방’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1990년대 이후의 남한의 모습이 이 시기 미국의 모습과 흡사하다.) 하지만 2차 성혁명이 야기한 ‘성해방’은 여성에게 진정으로 해방적인 측면으로만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성해방’을 빌미로 해서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는 흐름이 소비문화의 붐을 타고 범람했으며, 성적 자유주의(Free Sexism)에 따른 남성들의 교묘한 성적 착취 또한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성해방은 여성에게 해방적인가 억압적인가”가 이 시기 페미니즘의 중심적인 이슈였다.

이상이 ‘핵가족의 위기’ 현상이 나타난 배경이다. 물론 재생산의 장소인 가족이 흔들리는 것을 지배계급이 가만히 두고 볼리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신자유주의가 만개한 이후, 가족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가족의 재발견’ 식의 수사들이 난무하게 된다. 현재 한국에서도 정부는 틈만 나면 ‘저출산’을 언급하면서 가족을 지키자고, 사회를 위해 애를 낳자고 호소하고 있지 않는가? 신자유주의로 인한 빈곤의 극심화 속에서, 쇠퇴하는 사회적 유대를 ‘사생활’과 ‘사적 유대’로 보충하고, 또 재생산과정을 다시금 통제하는 데에는, 역시 ‘가족을 강화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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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지배계급의 전략 속에서 고통받는 것은 역시 여성들이다. 현재 ‘핵가족의 위기’ 속에서 여성들은 딜레마에 직면해있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가족임금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여성들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임금노동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가족임금의 보장 여부와 상관없이) 여전히 뿌리깊은 가족임금 ‘이데올로기’로 인해 여성의 노동은 항상 ‘부수적’인 것, 즉 남성생계부양자의 노동에 대한 ‘보충물’로 간주된다. 이는 여성들을 저임금·장시간노동의 늪에 빠뜨린다. 이렇게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출은 여차해서 늘어나지만, 육아와 가사부담이 여성의 책임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또 크게 변화하지 않는다! (이것이 가장 큰 딜레마이다.)

‘가족의 위기’라고 해서 또 다시 과거의 가족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당연히 아닐 것이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재생산양식 모두에서 차별받고 착취받는 여성들의 삶이라고 했을 때, 이 양자의 관계를 재구조화하면서 여성의 삶 전반을 보다 해방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체제는 여성들을 ‘최후의 복지 제공자(last welfare-provider)’로 여기면서, 무임금 재생산 노동자인 여성들의 착취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실제로 여성들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따르는 부담을 전가받는 ‘충격 흡수자(shock absorber)’의 위치에 처해 있다. 구조조정으로 인해 감소한 가계 소득을 보충하기 위해 여성들은 자신의 소비를 줄이고 노동을 더 많이 해야 한다. 또 사회복지가 감소하고 교육, 의료와 같은 서비스가 민영화됨에 따라, 그녀들은 자신의 재생산노동(간병·보육 등 보살핌노동을 포함한 가사노동 전반)을 끊임없이 증가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가사노동 부담의 증가는, 여성들의 가사 외 노동을 ’비정규직‘ 혹은 ’비공식적 고용형태‘로 더욱 주변화할 수밖에 없다.(즉 가정주부라는 이유로 또 노동시장에서 차별받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악순환에 또 악순환이 거듭된다.

물론 이러한 출혈적 착취에는 한계가 있다. 현재 끊임없이 진행되는 구조조정은, 여성이 제공하는 재생산노동이 무한히 ‘탄력적’인 것으로 가정한다. 그리고 여성에게 인내할 수 없는 수준의 노동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이는 결국 재생산노동의 기반 자체를 붕괴시킬 것이다. 현재의 ‘젠더편향적’인 신자유주의적 발전모델은 결코 지속가능하지 않다!

그 동안 재생산영역은 비가시적인 노동이 이루어지는 영역으로 치부되면서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 영역은 무임금 노동이 무한하게 탄력적으로 이루어지는, 대표적인 착취의 영역이었다. 이제 생산과 재생산 사이의 상호연관성을 충분히 인지하면서, 여성들의 삶을 제약하는 조건 전반을 변혁해나가야 한다. 이는 신자유주의의 야만에 맞서 평등-자유-연대의 대안세계를 건설하겠다는 우리의 지향을 이루기 위한, 가장 관건적인 과제이다.

재생산노동과 가족에 대한 고려 없이 여성들의 노동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캐롤 페이트만이 정식화한 것처럼 ‘울스턴크래프트의 딜레마’, 즉 ‘평등과 보호의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여성들은 남성들과 평등하게 되기 위해 자신의 재생산노동을 은폐하거나, 아니면 그것에 대한 보호를 요구해야 한다. 즉 그녀들은 노동시장에서의 형식적 평등을 추구하면서 수퍼우먼이 되거나, 아니면 ‘파트타임직’과 같은 보호조치들을 받아들여서 노동시장에서 주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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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페미니스트로서, 여성의 일을 비가시화하는 현 체제에 맞서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관점을 강하게 견지해야 한다. 그리고 여성권을 쟁취해나가야 한다. 지금도 한미 FTA 등 신자유주의의 폭력이 여성들의 인간다운 삶을 박탈해가고 있다. 대다수의 여성들이 비정규직으로 전락하고, 사회서비스의 유실과 출혈적 구조조정에 따른 ‘충격흡수자’의 역할을 강요받는 상황에서, 사회를 변혁하고 여성해방을 쟁취해나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투쟁하는 여성들이 있기에, 우리는 좌절하지 않는다. ‘정치에 대한 권리’, ‘투쟁할 수 있는 권리’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존엄한 권리이자, 모든 사회변혁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여성해방을 향한 대장정’은 결코 나중으로 미룰 수 없는 현재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여성의 목소리로, 그녀들의 투쟁으로, 세상을 바꾸자!

Posted by 행진

2006/10/13 14:00 2006/10/1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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