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특호_각론4] 페미니즘

논쟁과 토론의 중심에 설 학생회의
 중단 없는 실험으로
페미니즘을 공동체의 원동력으로 만들자!


 


0. 들어가며

올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몇 가지 사건들을 떠올려보자. 여자 연예인의 특정 신체 부위를 지칭하는 차마 입에 담기도 민망한 신종 단어가 유행어처럼 나돌기도 하고, 끔찍한 아동 성폭력을 저지른 가해자에게 내려진 12년이라는 형량이 너무 적다며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기도 했던 일들을 들 수 있겠다. 여성들이 ‘꿀벅지’라는 단어가 성적인 불쾌감을 주기 때문에 성희롱이라고 제기하자 남성들은 ‘초콜릿복근’에 대해서는 아무도 그런 방식으로 제기하지 않는데 왜 유독 여성의 신체부위를 지칭하는 단어만 성희롱이라고 하냐며 이것은 남성들에 대한 역차별이라고 공격을 해오기도 했다. 그러면서 ‘도대체 무엇이 성희롱이냐’에 대한 논쟁이 인터넷 게시판을 뒤덮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한 개그 프로에는 ‘남성인권보장위원회’라는 이름의 코너까지 등장했다. 그동안 여성들이 성차별이라고 제기해왔기 때문에 남성들이 드러낼 수 없었던 애환(?)을 소재로 한 이 코너는 첫 방송에서부터 큰 호응을 얻으며 회를 더 해갈수록 남성에 대한 역차별을 부각시키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아동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사회적으로 성폭력을 차단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법제도를 더욱더 강력하게 바꿔야 한다는 지점에서만 논쟁이 형성되고 있다. 이 사회의 어떠한 구조와 인식지형이 끊임없이 성폭력이 발생하도록 만드는지에 대한 고찰이나 반성은 간데없다. 성폭력 사건의 구체적인 경위를 선정적으로 드러내며 이런 가해자에게 12년은 너무 적으니 무기징역이나 화학적 거세 등의 외국 사례를 본받아야 한다는 주장만 되고 있다.
 
이런 이슈들 사이에서 페미니즘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소위 ‘꿀벅지vs초콜릿복근 논쟁’에서 페미니스트들은 ‘꿀벅지’가 왜 여성에게 성적 수치심을 주는 단어이고 ‘초콜릿복근’은 어떤 맥락에서 성희롱이라고 불리지 않는 것인지에 대한 입장을 못 만들어가고 있다. 이런 제기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으레 페미니스트들의 억지라고 일축했으며 페미니즘은 역시 여성들만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는 인식을 더욱더 단단히 굳혔다. 어쩌다 ‘여성의 인권을 보장하라는 드센 여성들의 요구에 밀려 남성의 인권이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고 당당히 외치는 개그맨들이 뜨거운 호응을 받는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일까?

2010년 학생회 선거 페미니즘 각론에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주체화되는 방식을 살펴보며 여성들이 불만을 느끼는 지점이 어디이고 그러한 불만들이 어떤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는지를 분석한다. 2010년대를 살아가는 여대생들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이며, 하기에 지금 대학사회에 필요한 페미니즘은 무엇인지를 담고자 한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인권만을 보장하라는 것이 아니며 남vs여의 구도를 만들어 불평등한 사회에서 여성이 더 많이 가지게 만들기 위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번 학생회 선거를 통해 분명히 말하자. 선거에 임하는 모두가 페미니즘이 이 시대의 보편적인 해방을 만들어가기 위한 필수적인 권리임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기 위하여 이 각론이 풍부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1. 시대분석_ 여성들은 어떻게 주체화되고 있는가?

…현재 대한민국의 20~30대 여자들의 대부분은 ‘일하는 여자’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살아간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일하는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만큼 녹록치 않다. 분야를 막론하고 여자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부딪칠 수밖에 없는 다양한 고민과 속마음, 남성 중심의 한국사회에서 인내하고 스스로 해결책을 찾을 수밖에 없는 여자들만의 문제, 행복한 직장생활을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노하우를 담은 책… -“대한민국에서 일하는 여자로 산다는 것” 책 소개 中

사회가 남성 중심적으로 구조화되어있기 때문에 여성들이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고 있는 사실이다. 직장에서 여성으로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 이 사회가 일하는 여성에 대한 배려가 너무 없다는 것, 그렇다고 일 안하고 집에만 있다고 해서 편한 것도 아니라는 것, 내조의 여왕이 될 것인가 커리어우먼이 될 것인가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병행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사회가 정말 불합리하다는 것 등은 거의 모든 여성들의 불만이자 여성 관련 계발서들이 서두에 담는 내용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계발서들이 이에 대해 내놓는 해답은 하나같이 ‘개인의 능력을 키우라’는 것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여성 관련 계발서들이 담고 있는 내용은 옷 잘 입는 여자가 일도 잘 한다거나, 인맥지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립서비스는 최고의 커뮤니케이션 기술이라며 상사 대하는 법을 알려주기도 하고, 상전처럼 구는 남자 부하직원 다루는 스킬도 알려준다. 또한 자신의 직업에 만족하는 방법,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 등 개인적인 성찰을 요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처럼 사회는 여성들에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할 수 있는 자신만의 전략을 만들라고 하는데, 많은 여성들이 이를 받아들인다. ‘여성’이라는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고 남성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기 위해 열심히 스펙을 쌓지만 결국 대부분의 여성들이 ‘최고의 스펙은 남성’이라는 벽 앞에 좌절한다. 결코 여성들이 덜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없는 문제이지만 사회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좀 더 뛰어난 능력자가 되라고 주문하며 여성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많은 여성들이 현실의 불합리함을 알고 있지만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안으로서 자기계발을 택한다는 것이다.
경기가 장기 침체로 접어들면서 꼭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경제위기를 체감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고,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는 여성들의 자기계발은 ‘알파걸’과 ‘골드미스’가 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생존 자체를 위한 조건이다. 많은 여성들은 롤모델로 제시되는 여성들의 삶이 능력 있는 몇몇 여성들만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지만, 고생 끝에 합당한 만족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한 줄기 희망을 품고 다시 이를 악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여성들의 삶을 힘들게 만드는지, 사회에 일어나야 하는 변화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변화를 가능하게 만들 것인지는 적극적으로 토론되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여성의 취업률이 늘었다는 통계가 발표되고 있는데, 올 2월 대졸 여성의 59.4%가 7월까지 일자리를 구해 2007년 46.4%, 2008년 54.7%에 이어 3년째 취업률 증가세를 기록했다고 한다. 그에 비해 대졸 남성의 경우 취업률이 낮아지고 있다는데, 그럼 정말 여성들이 더 취업 잘 되는 세상이 온 것일까? 주목할 것은 증가하는 퍼센티지가 아니라 일자리의 질이다. 올해 취업한 여성 대졸자 가운데 임금근로자는 15만 2000명이었는데, 이 중 상용직 취업자는 절반 남짓(7만 7000명)에 불과했다. 많은 여성들이 눈높이를 낮춰 임시·일용직으로 취업하기를 선택하고 있기 때문에 취업률이 올라간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계속해서 일자리의 질이 낮아지는 가운데 여성들이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정부의 기조는 사회서비스시장화정책이나 경력단절여성들의 재취업을 위한 여성새로일하기센터 등에서 집약적으로 나타난다. 성별 분업과 생계를 부양하는 일차적인 의무가 남성에게 있다는 이데올로기는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정부의 정책들은 여성의 노동권을 보장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일하는 여성들의 권리가 보장된다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며 노동권을 쟁취하기 위한 적극적인 운동들을 축소시키기도 한다.

대학의 모습은 어떠한가. 학내 페미니즘 운동이 만들어놓은 틀이 더 이상 확장되지 못하면서 페미니즘은 제도로, 여학생들의 편의만을 요구하는 이기주의라는 오해로, 대학생이라면 이미 지키고 있는 기본 에티켓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성폭력이나 성차별이라는 단어가 케케묵은 무언가를 다시 들춰내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여자 대학생’은 대학이라는 공간 안에서 자유롭게 관계 맺고 자신의 능력대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주체적인 존재로 서있는 듯하다. 하지만 여전히 강의실에서 여성비하 발언으로 불쾌감을 주는 교수들이 있으며 과/반이나 동아리에서도 성폭력적인 상황들이 사라졌다고 보기 힘들다. 이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공론화할 수 있는 공동의 움직임이 사라졌을 뿐이다. 예를 들어, 여자 연예인의 특정 신체부위를 성애적으로 표현한 단어를 들었을 때 불쾌하다고 느낀 사람들이 그런 감정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사라졌다. 한 여고생이 여성부 게시판에 그런 표현은 성희롱에 해당되니 사용하지 말자고 글을 올린 것에 네티즌들은 성희롱이다 아니다 갑론을박하기도 했지만 많은 여성들이 자신도 불쾌함을 느꼈다고 반응하기도 했다. 이처럼 어떤 문제에 대하여 불만이나 불쾌감을 느낀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감정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밝히고 그것이 개인의 불편함이 아니라는 것을 교감할 수 있는 공간이 대학에 남아있는가 했을 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대학에서 페미니즘은 공동체를 바꾸는 운동으로 인식되었으며 언제나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대학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진 반성폭력 운동의 성과는 무엇을 성폭력이라고 하는지,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어떠한 원칙을 가지고 해결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에 대해서 공동체 안에서 논쟁을 이끌어내고 구성원들이 직접 반성폭력 학칙을 제정하기도 하며 대학생들의 인식과 문화에 큰 변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페미니즘이 대안적인 공동체를 위한 원동력으로 인식되지 못한다. 반성폭력 운동의 소중한 성과들이 개별적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축소되거나, 공동체에서 페미니즘을 말하는 것이 ‘남성들의 권리와 대치되는 무언가를 요구하고 딴죽 거는 여자들의 투정’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페미니즘이 논쟁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비생산적인 싸움을 일으키거나 오해만을 낳고 있는 것이다.
여대생으로서 공부를 하고, 취업준비를 하고,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고,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몰성적으로 돌아가는 사회 속에서 자신들의 노력이 온전히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과 불안감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불만과 불안감은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해프닝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작년 촛불투쟁 이후 인터넷 상에서 소위 ‘배운 여자’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많은 젊은 여성들이 정치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현안에 대한 의견도 적극적으로 개진하면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경제위기에 대해 나름대로 분석해보기도 하고 취업이 잘 안 되는 현실을 한탄하기도 한다. 여성문제건 사회문제건 대안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일회성 촛불시위를 기획하거나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리는 것에서 더 나아가지 못 한다. 적당히 진보적인 개인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여성들에게 이 시대의 대안은 현실에 조응해서 자기계발 열심히 하거나 완전한 일탈을 꿈꾸며 여행을 떠난다든지 소비하는 것 외에는 없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2. 페미니즘으로! 공동체에서 논쟁과 토론을 재개하자!

여대생들은 여성이 남성에 비해 취업하기 힘들다는 것, 취업이 된다 해도 노력에 비해 만족스럽지 못한 직장이거나 직장 안에서 여러 가지 차별적인 상황과 맞닥뜨리게 될 것을 잘 알고 있다. 지금의 경제위기나 정부 정책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운동’이라는 이름이 아니어도 개별적으로 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들의 불만은 인터넷 게시판에서나 이념 없이 특정 사안마다 일어나는 촛불시위에서 휘발성 강한 모습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사회에 대한 불만을 자기만족적으로나마 표출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기계발에 몰두하면서 애써 현실을 외면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실에 반격을 가하기 위해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불만을 느끼는 지점들에 대하여 운동주체들이 속 시원히 이야기해줄 수 있어야 한다. 여성들은 노력 여하에 관계없이 취업이 잘 되지 않는 현실, 취업이 된다 해도 사회의 전통적인 성별분업 이데올로기와 남성 중심적인 구조가 가져오는 차별들에 불만을 느끼고 있다. 여기에 더해 여성의 신체가 성적대상화 되면서 외모를 가꿔야 한다는 압박도 끊임없이 받고 있다. 여성의 몸을 부각시키는 각종 미디어의 영향 속에서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가꿔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사회적인 분위기가 있다. 하지만 사회가 왜 여성에게 이런 것들을 강요하게 되었는지 제대로 밝히지 못하면서 남성의 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성희롱이라는 공격에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사회의 문제를 인식하고는 있지만 개별적으로 해결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집단적으로 무언가를 해본 경험이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람들의 불만과 불안감을 설명하고 공동의 실천이 활발히 이루어지기에는 대학사회의 조건이 과거와는 너무 많이 변해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학 페미니즘 운동이 만들어왔던 많은 것들이 학생들에게는 더 이상 유의미한 고민을 던지지 못한 채 학교 당국의 제도권으로 빨려들어 가거나, 학내에서 페미니즘을 말하는 것이 여성들의 이기주의로 받아들여지는 모습, 대학의 문화가 양성평등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기층 공동체에서 기본적인 반성폭력 내규조차 토론되기 어려워지는 대학의 모습과 마주하고 있는 지금,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페미니즘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시금 페미니즘을 ‘공동체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언어’로 만드는 것이다. 페미니즘을 고민하는 것이 몇몇 주체들의 몫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논쟁과 토론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하며 대학사회에 정치를 복원하기 위한 집단적 저항의 키워드로 페미니즘을 세워내자!


3. 페미니즘이 집단적 저항의 언어가 되기 위하여

대학사회에 페미니즘이 왜 필요한지를 설득할 수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시작할 수 없을 것이다. 왜 대학사회가 페미니즘으로 재구조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는지 스스로에게 되물어보자. 페미니즘을 고민하지 못하는 공동체는 어떤 구성원에게 불합리하거나 폭력적인 상황이 생겨도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거나 인지조차 할 수 없게 된다. 대학사회는 사회의 구조와 지배적인 문화가 투영되는 공간이기에 사회가 ‘정상’이라고 이야기하는 남성 중심적인 문화를 고스란히 받아 안게 되며 그것은 결국 배제되는 사람들을 낳을 수밖에 없게 된다. 페미니즘을 공동체가 작동할 수 있게 만드는 연료, 즉 ‘보편적인 윤리’로 만들지 못하면 여성과 남성의 차이가 고려되지 못한 채 남녀의 평등이 관념으로만 남아서 오히려 차별을 은폐하는 결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차이를 고려하지 못하는 공동체에서는 권력을 가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확연히 구분되고, 사람들이 관계 맺는 방식이 누군가에게는 억압이 될 수도 있고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공존할 수 있는 구조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페미니즘이다. 성적 차이로 인해서 차별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누군가에게 폭력이 되는 공동체(사회)를 바꿔내기 위해서는 다양하고 끈질긴 실천들이 필요한 것이다.
사회가 분명히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대학생들이 페미니즘을 보편적인 권리로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운동을 기획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에 다시금 페미니즘이라는 화두를 던지고 거기에 뛰어들어 적극적으로 논쟁하는 것이 필요하다. 페미니즘을 공동체의 보편적인 운영 원리로 만들기 위해서 지금 당장 나의, 우리의 공동체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실사하고 분석하여 함께 대안을 만들어가야 한다. 또한, 반성폭력 운동의 한계를 말했던 것이 이제는 반성폭력 운동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면 구체적으로 공동체의 상황과 구성원들의 인식 양태를 분석하여 지금 시기에 필요한 실천을 기획할 수 있어야 한다. 학생회 자체가 이것을 추동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사회에서 ‘꿀벅지’와 같은 쟁점이 형성될 때 이를 대중적인 논쟁의 장으로 끌고 나올 주체가 없고 공간이 없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공동체의 페미니즘적 재구성’은 페미니즘이 발언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공간과 주체가 유실되었기 때문에 학생회를 통해 페미니즘을 공동체의 윤리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내에서 성폭력이 일어나지 않게 만드는 것은 성폭력 상담소가 아니라 결국에는 공동체가 어떠한 원리로 운영되는가에 달려있다. 대학사회가 페미니즘으로 재구성될 수 있기 위해서는 이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논쟁을 촉발시킬 수 있는 주체가 필요한데 학생회가 이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3-1. 반성폭력 운동의 목표를 재설정하자: 공동체에서 논쟁을 다시 시작하자!

그간 대학 페미니즘은 기존의 인식을 깨뜨리는 성정치 담론과 반성폭력 운동의 실천으로 대학사회에 변화를 일으키며 발전해왔다. 사회적으로 금기시 되던 성폭력의 문제를 대학사회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발언하며 학내 구성원들과 함께 운동을 만들어 왔던 페미니스트들의 전성기는 학생운동이 수세기에 접어들면서 함께 소멸되어갔다. 반성폭력 운동의 성과라고 할 수 있는 반성폭력 규약/학칙은 그 자체만으로 성과가 아니라,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그것이 왜 필요하고 어떤 것들을 담으려고 하는지를 설득하기 위한 치열한 고민이 있었고 그로 인해 구성원들의 기존 사고방식을 깰 수 있었기 때문에 성과인 것이다. 그런 고민들이 확장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페미니즘이 대학사회에 제시해 왔던 담론과 정책들-예를 들어 반성폭력 학칙이나 여학생 휴게실 등-이 이제 더 이상 대학사회를 변화시키는 대안으로 인식되지 못하고 단지 학칙이나 제도로서 금지주의적이고 처벌주의적인 방식으로 인식된 것이라고 우리는 평가해왔다.
지금 대학사회에서 정치를 복원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공동체의 논쟁을 다시 살리는 것이다. 과거 대학사회에서 사람들이 성폭력이라고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을 성폭력이라고 이름 붙이는 과정은 얼마나 충격적이고 논쟁적이었겠는가. 지금의 문제는 페미니즘을 가지고 아무런 논쟁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은 많은 대학에 성폭력 상담소나 여학생 지원센터 등의 공간이 생겼지만 이것은 반성폭력 운동이 제기했던 문제의식들이 학생사회에 남아서 ‘운동’이 되지 못하고 그것의 형태만 학교의 제도로 편입된 것이다. 학교의 성폭력 상담소는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가해자를 징계/재교육하고 피해자를 보호/치유하는 역할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제도 자체가 대중공간에서의 논의를 촉발시키는 역할을 하지는 않기 때문에 제도가 잘 마련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본래의 문제의식을 더욱더 풍부하게 발전시켰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제도들을 한계적이라고만 규정해버릴 수는 없다. 성폭력 문제의 해결이 제도화된 것은 반성폭력 운동의 성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성폭력이 제대로 인식조차 되지 못했던 때에 성폭력을 정의하고 사건 해결의 원칙들을 마련하고 합의하는 것은 당시 반성폭력 운동의 목표였을 것이다. 학칙도 있고 상담소도 학교마다 생긴 현재의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반성폭력 운동의 목표를 새롭게 세우는 것이다.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할까? 
사건이 발생했을 때 잘 처리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지만 이것 자체가 운동이 될 수 있는 조건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반성폭력 운동은 단지 성폭력 사건이 우리의 눈앞에서 사라지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단지 사건을 잘 해결하는 것만도 아니다. 공동체의 어떠한 인식구조가 성폭력을 발생시키는지 분석하는 것이고 이것을 위해서는 학습과 논쟁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과/반/동아리에서 새내기 여학생이 으레 연애의 대상으로 보여 지는 상황들이 우리의 공동체에는 없는지, 대학생들이 연애를 바라보는 관점은 어떠한지, 성차를 고려하지 않는 공동체의 문화는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등을 점검해보고 실태에 맞는 실천들을 기획해보자. 이런 과정이 없으면 크고 작은 성폭력은 언제나 발생할 것이고 사람들은 어쩌면 그것을 인지조차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내 주변의 조건을 바꾸는 운동, 공동체에 논쟁을 제기하고 거기에서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주체화될 수 있는 반성폭력 운동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현재 반성폭력 운동의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3-2. 노동권을 페미니즘의 원리로 재구성하자

우리는 현재 여성들의 불만이 어디에서 시작하는지를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사람들에게서 노동권을 박탈하고, 여성에게 남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권의 박탈이 성별화된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는 것은 가정과 일터 모두에서 여성을 착취하는 성별 분업과 가족 이데올로기의 도움 없이는 지속될 수 없는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보다 적극적으로 대학사회 안에서 밝혀가자는 것이다. 여성들의 불만 지점이 취업과 외모라고 해서 ‘면접 때 먹히는 메이크업 강좌’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말이다. 여성들의 불만이 신자유주의가 규정하는 문제들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면 이것에 대한 우리의 대안은 여성들이 노동할 수 있는 권리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신자유주의가 가속화되면서 대학사회 내에 침투해 있는 이데올로기는 대학 간, 계급 간 다양한 형태로 분할되면서 여성이라는 자체만으로 동일성을 형성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여성들만이 가질 수 있는 피해감을 중심으로 전개했던 예전의 페미니즘 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분할되어 있는 지금 시대의 여대생들의 삶에 침투하여 신자유주의가 야기하고 있는 여성발전담론 등과 같은 이데올로기와 대립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시대의 보편적 권리로서 노동권을 제기하고, 불안정노동이 일반화되는 가운데 그것이 여성들에게 차별이 되어 돌아오는 이유가 신자유주의 때문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이에 대한 집단적인 저항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다 명확히 제기하는 것이 2010년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을 주체화할 수 있는 페미니즘의 핵심이다. 집단적 저항을 위한 여성들의 무기는 그때그때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한 개별적인 불만 표출이 아니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페미니즘으로 재구조화하고 공동의 대안을 고민하는 것이다.

4. 정책적 제안

4-1. 여성 노동권 적극적으로 발언하자!

여성의 노동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여성에게 일과 가정 모두를 책임져야 한다고 강요하는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폭로하자. 시대가 변함에 따라서 변해왔던 가족의 역사를 분석하며 가족이 내포하는 체제의 모순과 성적 차이에 기반한 차별이 역사적으로 어떠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왔는지를 보는 것도 지금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할 것이다.
또한 투쟁하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의 싸움에 연대하며 학생사회에 알려내자. 경제위기가 지속되면서 해고가 만연해졌고 여성들은 경제위기의 공격을 가장 먼저 받게 되었다. 기업이 어려워 해고를 선포하면 가장 먼저 해고되어 가정으로 돌려보내지는 것이 여성이지만 전반적으로 노동이 불안정해지면서 여성도 일하지 않으면 생계를 꾸리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여성들은 또다시 임시직 같은 불안정한 일자리로 내몰린다. 이렇듯 여성의 노동권이 불안의 악순환 속에 놓여 있음을 발언하며 여성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여성 스스로의 힘으로 가능하며 이것은 타자에 대한 시혜가 아니라 상호 동시적인 해방을 향한 ‘연대’로 가능함을 이야기하자.
취업 문제로 자신감을 잃어가는 여성들에게 이러한 현실은 개인의 노력으로 돌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에 강조점을 찍자. 여성의 문제에 포커스를 맞추어 경제위기를 풀어내는 기획도 시도해볼 수 있다. 학생회에서 단위의 여학생들이 취업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고 어떤 부분에서 어려움을 느끼는지 등을 조사하고 모여서 포럼과 같은 형식으로 여성의 노동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인식되는지 현실을 함께 되짚어보는 등의 계기를 통해 ‘취업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노동의 권리’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획들을 다양하게 시도해보자.       

4-2. 페미니즘 스쿨을 통해 공동체에서 페미니즘을 말하자!

페미니즘은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고 인식 구조를 변화시키는 운동이기 때문에 당위적인 언어만으로는 변화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공동체에서 페미니즘을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대중들이 지금의 공동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먼저 아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문제의식이 중단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렇게 페미니즘을 고민할 수 있는 토론의 장을 열고 대중들이 처한 상황과 인식 양태에 맞는 언어와 실천을 발굴하는 것이 현재 학생회의 역할이다. 페미니즘 스쿨과 같은 기획을 통해 공동체의 페미니즘을 진단하고 고민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자. 단위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드러내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개별적이고 분절적인 감정들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학생회에서 단위의 상황을 분석할 수 있는 설문조사를 진행하고 이를 토대로 프로그램을 기획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감정을 교류하거나 공동체의 지배적인 문화를 변화시키는 실천 외에도 페미니즘을 학습할 수 있는 기획도 꼭 필요하다. 페미니즘의 역사나 여성노동권에 대해서 학습할 수 있는 공부방을 기획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사전에 기획단을 구성하여 페미니즘으로 주체화될 수 있는 경로를 확장하는 계기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4-3. 공동체의 반성폭력 자치규약을 재개정하자!

반성폭력 자치규약을 가지고 있는 단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단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규약이 수년간 토론되지 못하여 지금의 상황을 잘 반영하지 못하는 규약이 되거나 구성원들에게 그 필요성을 인정받지 못 하는 경우가 많다. 설문조사를 통해서 여성들이 불편하게 느끼는 성폭력이 무엇인지, 그리고 남학우들을 대상으로 기존의 자치규약에서 느끼는 것들이 무엇인지 등을 조사해서 규약을 재개정 해보는 것이 공동체에서 페미니즘을 발언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반성폭력 내규는 새터나 현장활동을 떠나기 전에 ‘확인’하는 것이 전부였다면 주체들의 논의로 한정시키지 말고 대중적으로 논의할 수 있도록 기획해보자. 현장활동 주체학교를 열어 현장활동에서 왜 페미니즘을 고민해야 하는지 토론해볼 수 있을 것이고, 새터를 떠나기 전에 2학년들을 모아 새내기들에게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이유와 어떤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을지 토론하는 것도 좋다. 이를 단위의 반성폭력 규약을 만들거나 재개정하는 흐름으로 이어가보자.   

4-4. 성폭력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기획해보자!

최근 아동 성폭력 사건이 이슈로 떠오르면서 극단적 성폭력을 어떻게 예방할 수 있으며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되고 있다. 그러한 논쟁이 가해자 처벌 법안을 강력하게 개정하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문제라고 앞서 지적한 바 있다. 학교 근처 자취방들이 모여 있는 지역에서 “성폭력 없는 00동” 캠페인을 기획해보자. 최근 들어 부쩍 젊은 여성이 납치되는 사건이나 대학 근처 자취촌에 강도강간 사건이 많이 보도되고 있는데, 가로등이 없거나 인적이 뜸한 골목길이 여성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설명하는 전단지나 스티커를 만들어 골목마다 붙여놓을 수 있겠다. 학생회가 주민들과 만나서 가로등이 없는 골목에 가로등을 설치하는 문제를 이야기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캠페인의 과정과 결과를 게시하여 단위에 문제의식을 환류시키는 것도 잊지 말자. 
이런 사업이 뜬금없이 골목에 전단지를 붙이거나 비/반권의 여성 정책처럼 단지 가로등을 설치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이 사업을 왜 하는 것인지 설득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여성의 몸에 대한 폭력으로서의 극단적 성폭력이 왜 발생하는 것이고, 그것이 발생하지 않게 만들려면 사회적으로 여성이 성적 대상화 되는 문제나 폭력의 대상이 되는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겠다.

Posted by 행진

2009/11/24 13:14 2009/11/24 13:14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Comments List

  1. 한지환 2009/11/25 07:26 # M/D Reply Permalink

    매우 주관적이고 편파적인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꿀벅지 논란’과 관련하여 말씀드리자면, 성희롱이라는 것은 명백한 범죄행위이며, 범죄행위는 법률에서 규정하는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행위이어야 합니다. 현행 법률에 따르면 성희롱은 친고죄에 해당합니다. 즉 피해자가 가해자의 행동에 대해 불쾌감을 느껴 이에 대한 처벌을 호소했을 때에야 비로소 성희롱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꿀벅지 논란’의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여성 연예인들 중 어느 누구도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았고, ‘꿀벅지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유이 양의 경우 오히려 자신의 외모를 높이 평가해준 네티즌들에게 감사를 표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꿀벅지’라는 단어의 사용을 성희롱이라 섣불리 단정 짓는 것은 오히려 성희롱이 가지고 있는 범죄성을 희석시킬 수 있는 경솔한 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부도 이와 관련해 “피해 당사자가 인권위에 제기해야 할 개인적인 문제”라는 유권해석을 내린 것입니다.
    다만 이것이 여성의 신체에 대한 ‘대상화’라는 데에는 동의하며, 따라서 양성평등의 입장에서 이를 비판하는 데에는 저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최근 시끄러웠던 ‘루저(looser) 논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남성 역시 경제적 능력, 사회적 지위, 성적(性的) 능력, 신장 따위를 기준으로 자신의 인격을 평가받으며 ‘대상화’되어왔다는 사실입니다. 즉 여성주의자들이 ‘가부장제’, ‘남성 중심적 사회’라고 일방적으로 단정 지은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 하에서 ‘대상화’되어 온 것은 비단 여성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성 고용 불평등을 논함에 있어 여성이 겪어온 불이익만을 일방적으로 문제 삼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라는 것은, 제가 이곳 자유게시판을 통해 누차 지적한 문제입니다. 윗글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남성을 ‘1차적 가족부양자’로 여기는 성별 이데올로기가 팽배해있고, 그로 인해 남성은 여성보다 긴 근로시간과 무거운 가족부양의 책임에 짓눌려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더 무거운 책임을 부담하고 있는 남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에게 동등한 고용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뉴스클리핑 게시판에 올린 게시물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조차 자신보다 더 나은 조건의 상대를 택하는 남고여저(男高女低)의 결혼을 고집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경제력을 갖추면 남성을 억압하는 남녀문화가 저절로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입니까? 전국학생행진은 여성이 ‘일과 가정에서의 양립’을 강요받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것은 여성에게 지워지는 가족부양의 책임이 여전히 남성의 그것보다 훨씬 가볍다는 사실을 외면한 불합리하고 편파적인 주장입니다. 결국 전국학생행진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름없는 구태의연한 주장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자유게시판에 올린 글「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2. 먼소린지 2009/11/27 01:31 # M/D Reply Permalink

    두번째 문단에서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더 무거운 책임을 부담하고 있는 남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에게 동등한 고용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말입니까? " 당연한거 아닙니까? 고용의 기회는 성별이 아니라 능력의 차이를 근거로 주어져야 하는것 아닙니까? 너무 당연한것을 아니라고 주장하시네요.

    그리고 당신 말대로라면 오히려 더 여성에게 고용의 기회를 많이 줘야 할텐데요. 그래야 당신이 말하는 남성이 생계를 책임지는 사회에서 벗어날테니까요.
    참고로 전 남성입니다.

  3. 먼소린지 2009/11/27 01:35 # M/D Reply Permalink

    좀 징징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사회에서 가정의 생계를 남성이 책임지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은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여 취업의 기회가 남성에게 우선적으로 있어야 하는것은 아닙니다. 왜 그래야 되는데요?

    학연 혈연 지연 그런것들을 타파하고 오로지 능력과 인성이 평가의 잣대가 되어야 그게 정상적인 사회인것이지. 남성이 가장인 경우가 많다고 하여 남성에게 우선적으로 취업-고용 기회를 주자니요? 아니 뭐 직장이 남성 동호회인가요?

    1. 한지환 2009/11/27 07:45 # M/D Permalink

      귀하의 주장대로라면, “똑같은 권리와 기회가 주어진 사회구성원임에도 불구하고, 왜 남성이 여성보다 더 무거운 책임과 의무를 부담해야 하는가?” 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족부양의 1차적 책임을 강요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남녀 불평등이며 남성 억압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 하에서 남성이 누렸던 권리는 그들이 부담했던 각종 책임과 의무의 반대급부였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남성 억압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 없이는 여성 억압도 근본적으로 개선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외면하기 때문에 기존의 페미니즘이 ‘절름발이’라는 비난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지적에 대한 답변은 그동안 여러 차례 지적한 줄로 압니다. 여성에게 보다 많은 고용의 기회를 보장하여 여성의 경제력이 증대하면, 남성이 자연히 전통적인 책임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남성해방의 정의를 오해하신 것 같은데, 남성해방이라는 단순히 ‘맞벌이’를 통해 가족부양에 대한 남성의 부담이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남성해방이란, 말 그대로 남성이 전통적인 성별 이데올로기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피부양자’에서 ‘단독 가족부양자’에 이르기까지 원하는 성역할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나아가 그에 따른 책임의 분담을 상대 이성(異性)에게 요구하는 것을 뜻합니다. 귀하의 말씀대로라면,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조차 자신보다 더 나은 조건의 상대를 택하는 남고여저(男高女低)의 결혼을 고집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오늘날 대다수의 여성들이 자신보다 우월한 제반조건을 갖춘 남성만을 배우자감으로 고려하는 이유가, 단순히 그들이 먹고 살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결론적으로 말해, 남성을 1차적 가족부양자로 간주하는 남녀문화가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한, 물질구조의 개선만으로는 남성해방은 물론 진정한 양성평등을 이룰 수 없습니다. 남성 억압과 여성 억압은 물질구조라는 좁은 틀에서 벗어나, ‘문화’라는 보다 거대한 틀 속에서 해석해야 하는 문제라는 것이지요. 귀하의 주장은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를 여성의 시각에서만 해석하며 남성 억압을 여성 억압의 부산물 정도로 여기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에 따른 오류일 뿐입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제가 쓴「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왜 남의 글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은 채 함부로 이야기를 하십니까?

  4. 먼소린지 2009/11/27 14:00 # M/D Reply Permalink

    남성해방이라니요? 이 무슨 허튼소리입니까?

    노동해방 민족해방 이라는 구호가 전제하는것은 각자가 대상으로 하는 집단이 피억압 상태라는것을 전제로 합니다. 노동자계급은 자본가계급에 의해서, 피억압 민족은 제국주의에 의해서, 억압당하고 착취당하기에 해방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남성해방이라니요? 남성은 여성과 마찬가지로 단일한 집단이 아닙니다. 남성중에는 자본가도 있고 용산 철거민도 있지요. 여성도 마찬가지고. 따라서 남성해방이라는건 개념상 존재할수 없습니다. 여성해방도 마찬가지입니다. 있다면 여성 노동자 농민의 해방 이 있는거지요.

    실제 사회에서의 억압, 차별, 착취 구조를 보지 못하고 그것을 보려고 하는것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는것이 남성학의 목적인가보지요? 참 대단합니다.

  5. 먼소린지 2009/11/27 14:01 # M/D Reply Permalink

    그리고 남성이 생계를 부담하는 이유가 많은것은 남성에 대한 차별이 있어서가 아니라 여성에 대한 차별이 있어서입니다. 말은 똑바로 하셔야지

    그동안 여성들이 사회로 진출할 권리가 오랜시간동안 부정당해왔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시간이 흐르니 당연히 남성이 생계를 더 많이 부담하는거 아닙니까?

  6. 먼소린지 2009/11/27 14:02 # M/D Reply Permalink

    아 실수 모르고 열폭남성들의 허튼소리를 '남성학'이라고 해버렸네
    남성학은 무슨 개뿔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도 남자입니다.

    1. 한지환 2009/11/27 16:08 # M/D Permalink

      이야기를 나누기에 앞서「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을 읽어달라고 말씀드린 이유는, 귀하께서 남성학(男性學, Men's Studies)과 남성운동(男性運動, Men's Movement)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남성학과 남성운동은 1970년대 미국에서 처음 시작된 사회적 움직임으로, 남성운동의 여러 노선 가운데 제가 몸담고 있는 노선은 자유주의적 관점의 남성운동입니다. 자유주의적 남성운동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이분법적인 틀, 즉 전통적인 남녀관계를 억압 및 착취의 관계로 바라보며 남성을 ‘억압자 및 착취자’로, 여성을 ‘피억압자 및 피착취자’로 해석하는 근시안적이고 편협한 틀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움직임이지요. 다시 말해, 그동안 주목되어 왔던 피해자로서의 여성의 모습은 물론, 전통사회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피해자로서의 남성의 모습, 그리고 수혜자로서의 여성의 모습까지 주목하는 남성운동 노선입니다.

      가족부양의 책임을 비롯한 남성 억압이 여성 고용 불평등을 비롯한 물질적인 영역에서의 여성 억압의 부산물일 뿐이라고 주장하셨는데, 귀하의 말씀대로라면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경제력을 갖추게 되면 가족부양에 대한 남성의 부담은 자연히 사라져야 합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조차 자신보다 더 나은 조건의 상대를 택하는 남고여저(男高女低)의 결혼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빈부 차별과 학력 차별의 희생자로,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경제적 여건이 열악한 저소득층 남성들(농어업 종사자, 단순노무직 종사자, 중소기업체 근로자, 하위직 공무원 등)의 상당수가 아무런 경제적 기반이 없는 개발도상국 여성들과 결혼해 가족부양의 1차적 책임을 부담하고 있음에도 말이지요. 귀하의 말씀대로라면,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오늘날 대다수의 여성들이 자신보다 우월한 제반조건을 갖춘 남성만을 배우자감으로 고려하는 이유가, 단순히 그들이 먹고 살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귀하의 주장은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를 여성의 시각에서만 해석하며 전통적인 남녀관계를 억압 및 착취의 관계로만 바라보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에 따른 오류일 뿐입니다. 물론 우리 사회의 남녀문화와 관련해 여성들의 경제적 여건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기는 하나, 그것만으로는 남녀문화 전반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시다면, 우선 저의 글을 찬찬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7. 먼소린지 2009/11/27 20:36 # M/D Reply Permalink

    먼저 "학" 자 붙인다고 해서 아무거나 학문이 되지 않는다는 점 부터 말하고 싶습니다. 남성을 착취자, 여성을 피착취자 라고 보는것에서 벗어난다고 하는데 그렇게 보는거나 역으로 보는거나 다 허튼소리 아닌가요?

    이해하지 못하는게 아니라 관심조차 가지고 싶지 않습니다.

    남성은 착취자 혹은 피 착취자 여성은 착취자 혹은 피 착취자 이런것은 성립될수 없습니다. 그러한 관점은 남성주의든 여성주의든간에 현실에서 일어나는 억압과 착취를 은폐하고 대중의 인식을 오도하는것입니다.

    그리고 "남고여저" 현상이라고 하는데 높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조건과 동등하거나 상대적으로 높은 조건을 가지고 싶은 사람과 혼인하려고 하는것은 남자든 여자든 차이가 없습니다.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사실관계 자체가 그러하다는 겁니다. 다만 여성의 경우가 더 심한것은 제가 앞서 말한것처럼 오랜시간동안 고용의 불평등 각종 기회의 불평등으로 인해 조성된 차별에 기인하는것이지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경제력을 가진다구요? 개별적인 사례가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말입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지요.

  8. 먼소린지 2009/11/27 20:39 # M/D Reply Permalink

    남자는 밖에 나가서 돈을 벌고 여자는 집안일을 한다.

    아직도 이런 인식이 광범위하고 한국사회에서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뭐지요? 오랜시간동안 여성에 대한 차별(이것이 억압이나 착취라고는 볼수없슴)이 있어왔기 때문아닌가요? 그리하여 사회가 기형적으로 성장하였기 때문에 님이 말하는 남성생계 어쩌고 저쩌고 하는 현상이 있는거지요.

    님의 얘기를 보면 마치 성차별이 없는 사회에서 억지로 성차별 담론을 들고 나온다는거 같습니다. 성차별이라는것이 전혀 없는 사회에서 남성이 생계를 부양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 때문에 남성이 억압당한다? 허튼 소리의 연속입니다.

    1. 한지환 2009/11/28 07:40 # M/D Permalink

      한 편으로는 여성이 억압과 착취를 당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여성이 일방적으로 차별을 받아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 아닐까요? 여전히 자유주의적 남성운동과 관련된 기본적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은데, 전통적인 남녀문화는 여성을 일방적으로 억압하거나 착취한 것이 아니라 남녀에게 각자 정해진 성역할만을 강요하고 그에 따른 반대급부를 제공했으며, 따라서 남녀 모두는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의 피해자임과 동시에 수혜자라는 것이 자유주의적 남성운동가들의 공통된 주장입니다. 즉 전통사회에서의 여성 억압은 남성 억압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는 문제이며, 따라서 이를 여성에 대한 일방적인 차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시장의 동향에 대해 잘 모르고 계신다는 생각이 듭니다.「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에서 소개한 참고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남성은 일반적으로 배우자의 경제력이 자신보다 높은 것을 특별히 선호하지 않으며, 오히려 꺼려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는 결혼정보회사 듀오가 최근 주간동아, 한국경제신문과 함께 실시한 조사결과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맞벌이를 원하는 남성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면 여전히 남성은 배우자의 경제력과 관련해 여성과는 정반대되는 양상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남녀 각자의 제반조건과 상관없이 대다수 사회구성원들이 남고여저(男高女低)의 결혼을 당연시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지요. 이는 결혼정보회사 선우의 대표이사이자 한국결혼문화연구소 소장인 결혼문화 전문가 이웅진 선생도 지적한 내용입니다.
      남성들은 자신의 제반조건과 관계없이 여고남저(女高男低)의 결혼을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왜 여성들은 자신의 제반조건과 무관하게 남고여저의 결혼을 고집하는 것일까요? 나아가 귀하의 말씀처럼 전통적인 남녀문화가 여성을 일방적으로 차별해온 것이라면,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경제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은 스스로 차별의 굴레를 선택했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러한 것을 물질구조라는 좁은 틀 속에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것은 ‘문화’라는 보다 큰 틀 속에서 설명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귀하께서 생각하시는 바와 달리, 저는 여성 억압의 존재를 결코 부정하지 않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우리 사회의 남녀문화와 관련해 여성들의 경제적 여건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데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남녀문화 전반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제가 주장하려는 바입니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어난다 해도, 남성을 억압하는 남녀문화가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한, 남성은 가족부양의 부담에서 해방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남성해방과 여성해방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남성이 전통적인 책임에서 해방되지 못한다면 여성해방도 결국에는 걸림돌에 걸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9. 먼소린지 2009/11/28 12:37 # M/D Reply Permalink

    착취와 차별의 개념은 다른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부연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이 정도 구별을 못하시면 논쟁을 하실 자격이 없습니다.

    한 사회의 문화, 사상은 물질구조에 기반을 둡니다. 물질구조와 무관한 사상, 문화는 없습니다. 한지환씨가 말하는 현상들은 남녀차별이 고착화된 사회, 그런 기형적인 사회에서의 현상으로 이해해야 하지 그런 사회적 기반과 무관한 문화라고 하는것은 허튼소리의 연타일뿐입니다.

    1. 한지환 2009/11/28 17:16 # M/D Permalink

      물론 차별과 착취가 다른 단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귀하께서 내세우시는 마르크주의 페미니즘에서는 여성 차별을 곧 여성에 대한 경제적 착취로 간주합니다. 즉 귀하께서 이 둘을 따로 구분해서 이야기하시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질생활의 생산양식이 인간의 존재를 일방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은 이른바 ‘실패한 실험’인 마르크시즘의 오류일 뿐입니다. 이러한 마르크시즘을 남녀관계에 무리하게 적용하려 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으로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물론 남녀문화와 관련해 경제적 여건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기는 하나, 이것만으로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저의 주장에 동의하기 힘드시다면, 저의 질문에 대답해주시기 바랍니다. 귀하의 말씀대로 가족부양의 책임을 비롯한 남성 억압이 여성 억압의 부산물일 뿐이라면, 앞서 말씀드린 우리 사회의 결혼양태를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10. 먼소린지 2009/11/28 19:14 # M/D Reply Permalink

    마르크스주의적 페미니즘? 내 댓글 어디에 그런 말이 있나요? 한지환씨가 저한테 씌우려는 올가미일뿐이지 난 한번도 내가 마르크스주의적 페미니스트라고 한적이 없는데요? 마르크스주의적 페미니즘이라는게 성립될수있는지 그 여부도 모르고 그러한 관점이 여성에 대한 차별을 착취라고 보는지 모르나 나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풍차를 괴물이라고 외치며 돌진하는 돈키호테를 보는거 같군요.

    물질생활의 생산양식이 인간의 존재를 일방적으로 결정? 내가 언제 그렇게 얘기했나요?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고 했지. 아마 님이 말하는건 하부구조 상부구조 얘기인거 같은데 이게 언제 실패하였지요?(그리고 이 분석에 왜 실패라는 용어를 갖다 대는지? 굳이 따진다면 맞냐 틀리냐 이런 얘기 여야 하는거 아닌가?) 소련이 실패해서? 소련의 실패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교조 때문이 아니라 일탈 때문이지만 그런건 차치하고서라도 소련이 실패했다고 해서 마르크스주의가 부정당할 필요는 없는데요?

    소련이 실패했기 때문에 이론으로서 학문으로서 마르크스주의도 자동적으로 폐기된다는 그런 주장은 역시 허튼소리의 연속입니다.

    마지막으로 님의 질문에는 이미 대답했잖아요.

    제 댓글을 다시 보세요. 이해를 못하시나?

  11. 먼소린지 2009/11/28 19:23 # M/D Reply Permalink

    님과의 논쟁은 이 댓글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먼저 저는 전국학생행진과 어떤 연계도 없습니다. 아마도 한지환씨는 전국학생행진을 마르크스주의적 페미즘에 기반을 둔 집단으로 규정하고 댓글을 다는 나를 그렇게 본거 같지만 내가 그렇게 주장한바 없고 철저하게 님의 편견과 착각일 뿐입니다.

    착취와 차별은 다르기에 나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여성에 대한 착취를 동일시 한적이 없습니다. 님이 모순이라고 주장하는것 역시 언제까지나 님의 착각일뿐입니다.

    소련 실패의 문제에 있어서는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소련 실패가 마르크스주의의 일탈로부터 비롯된것임을 설득력있게 논증하고 있는 책이니 한지환씨의 소련에 대한 무지와 오해가 풀릴수있을꺼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와 별개로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규정하는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으시다면 그에 대한 반론을 내세워야지 소련 실패 운운해서는 안될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수차례 설명하였지만 님이 의기양양하게 내세운 남고여저 라는 현상도 결국은 "남자는 돈벌고 여자는 집안일 한다" 라는 인식이 사람들 머리속에 있기 때문인데 그건 왜 그렇습니까? 여성에 대한 차별 때문에 사회가 기형적으로 성장하였기 때문 아닙니까? 이해가 안되시나요?

    1. 한지환 2009/11/28 23:20 # M/D Permalink

      귀하께서 옹호하시는 마르크시즘으로 남녀의 역학 관계를 해석하는 것이 바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입니다. 이 둘을 별개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덧붙여서, 귀하께서 생각하시는 ‘차별’과 ‘착취’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현실에서 마르크시즘이 실패했다는 것은 비단 저 혼자만의 주장이 아닙니다. 인간은 경제적 요소만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은 동구와 소련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체제의 붕괴를 통해 이미 입증되었습니다. 물론 마르크시즘 이론이 가지고 있는 역사 이론으로서의 가치는 부정하지 않지만, 이를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려 드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태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말과 ‘물질생활의 생산양식이 인간의 존재를 결정한다’는 말은 기본적으로 같은 의미입니다.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분이 이런 말조차 이해하지 못한다니 당혹스럽군요. 아울러 앞으로 글을 쓸 때는 ‘무지’, ‘오해’ 같은 극단적인 표현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이 분야와 관련된 지식은 제가 귀하보다 결코 못하지 않을 것입니다.

      귀하께서「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을 읽어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는 남성에게 ‘이성(異性)을 보호할 책임’을 부여했고, 남성에게 지워지는 가족부양의 책임은 이러한 책임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귀하의 주장과 달리, 여성 차별의 결과 남성이 전통적인 책임을 부담하게 된 것이 아니라, 남성의 전통적인 책임 자체가 전통적인 성별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여성에 대한 차별로 인해 사회가 기형적으로 성장하였기 때문에” 남성이 가족부양의 책임을 강요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를 원하신다면 워렌 패럴 박사의『남자 만세(Women Can't Hear What Men Don't Say : Destroying Myths, Creating Love)』와 조지 L. 모스 박사의『남자의 이미지(The Image of Man)』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족을 부양하기 충분한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이 남고여저(男高女低)의 결혼을 고집하는 현실을 귀하의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느냐는 저의 질문에 대해, 귀하께서는 제대로 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답을 하기는 했으나 적절한 답이 아니었지요.
      ‘자신보다 제반조건이 우월한 배우자를 원하는 것은 남녀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귀하의 주장에 대해서는 근거자료를 제시하여 반박했습니다. 결혼시장에서 자신보다 제반조건이 우월한 배우자를 원하는 현상은 남녀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결코 아닙니다. 남녀 각자의 제반조건과 관계없이 대다수 사회구성원들은 남고여저의 결혼을 선호하고 있지요.
      또한 이것이 ‘물질적 영역에서의 남녀 불평등 탓’이라는 주장은 애당초 성립할 수 없습니다. 평범한 서민 여성들만 놓고 보았을 때에는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나, 평범한 서민 남성들 이상의 제반조건을 갖춘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이 남고여저의 결혼을 고집하는 것을 경제적 여건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귀하의 생각과 달리, 그들이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서’ 남고여저의 결혼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이 남고여저의 결혼을 고집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귀하의 말씀대로 단순히 여성 고용 불평등 때문에 남성이 가족부양의 1차적 책임을 부담하게 된 것이라면,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의 대다수가 남고여저의 결혼을 고집하는 현상은 일어날 수 없는 현상입니다. 또한 전통적인 남녀문화가 여성을 일방적으로 차별해온 것이라면,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경제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은 스스로 차별의 굴레를 선택했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물질구조라는 좁은 틀 속에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문제이며, 그렇기 때문에 남녀문화라는 보다 큰 틀 속에서 설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추신 : 읽어달라고 부탁드렸던 저의 글은 제대로 읽어보셨습니까?

  12. 먼소린지 2009/11/28 23:19 # M/D Reply Permalink

    1.

    경제적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고 할때의 상부구조는 이데올로기적, 철학적, 문화적, 기타 등 ,경제적 기반으로 부터 생기는 여러 구조물을 의미합니다. 당췌 한지환씨가 말하는 '인간의 존재' 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한지환씨는 제가 적은 구절을 어디선가 본듯하나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 멋대로 적으신거 같습니다. 책의 구절이나 문구를 정확하게 외워야 할 의무같은것은 없기에 트집 잡힐일은 아니나 그러면서 본인이 무지하지 않다고 주장하는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이처럼 문구 하나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한지환씨가 마르크스주의를 재단한다는것은 그냥 코메디입니다. 물론 누구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찬반을 얘기할수 있으나 옳으냐 그르냐 적합하냐 부적합하냐를 논하는건 아무나 해서는 안되지요.

    (그리고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할때 상부구조가 하부구조에 영향을 미칠수 있음을 맑스는 염두에 두었습니다. 한지환씨의 '일방적' 이라는 말 역시 무지로 인해 비롯된 오해인것입니다.)

    2.

    한지환씨 말처럼 소련의 실패를 마르크스주의의 실패와 동일시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한국에서도 언론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조중동 이하 극우언론을 비롯하여 각 대학의 교수들까지 그런 논리를 설파하고있는 사람은 한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공주의자들의 시야협착증일따름입니다.

    무엇보다 소련의 패배의 원인에 대해서 공부를 하시고 '시대착오적' 운운하시기 바랍니다. 소련의 패배는 단 한가지 원인으로 인해 발생한 결과가 아닌 만큼 과학적인 연구가 지속적으로 요구되고 있는 사안입니다. 제국주의 국가의 압박과 봉쇄 등과 같은 외적 요인을 제외한 내적 요인으로 설명되고 있는 일명 코시킨 개혁,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에서 일탈한 수정주의-개량주의적 흐름입니다.

    소련을 비롯한 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패배,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배워야할것이 분명히 있을것이고 약간의 변화도 필요할지 모르지만 맑스-레닌주의 자체를 무효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서도 안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한지환씨든 누구든 맑스주의의 무효화를 선언하고 싶다면 보다 새로운 과학적 이론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이론에 근거해 맑스주의를 논파해야 할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말입니다

  13. 먼소린지 2009/11/28 23:25 # M/D Reply Permalink

    3

    한지환씨가 줄기차게 주장하시는 남고여저 현상에 대해서 저는 충분히 제 의견을 밝혔으나 이해하지 못하시기에 쉽게 풀어서 설명드립니다.

    일단 모든 여성이 그러한 경향을 가지고 있는것은 아니라는점부터 전제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분명 그런 현상이 없다고는 할수 없을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것이냐?

    한국사회에서, 아니 비단 한국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성차별이 광범위하게 사회의 구석구석에 존재해왔습니다. 여성의 취업률 등은 그중 하나일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회는 어떠한 사회입니까?

    남성에게 좀 더 많은 고용과 취업, 양질의 일자리를 얻을수 있는 기회 등이 보장된 사회입니다. 여성에게는 그렇지 않고 말입니다. 한국사회는 거기에다가 유교의 잔재까지 남아있어 더 심하다고 볼수 있겠지요.

    그러면 이러한 사회에서는 어떤 인식이 생겨나게 됩니까?

    남성은 일하고 여성은 집안일을 한다 이거 아닙니까?

    이런 사회에서 여성이 자신의 생계를 확실히 보장해줄수있는 남성과 결혼하려고 하는 현상이 생길수 있는거지요. 이까지 이해가 되십니까?

    그리고 한지환씨가 여전히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에 대한 논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걸 알수있는게 생산양식은 좁은것으로 문화는 큰 틀로 주장하시는것을 보고 알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이데올로기 문화 등이 생산양식을 기반으로 하는것인데 말이지요. 이에 대한 이해가 없으니까 양자택일식으로 선택하려 드는거 아닙니까?

  14. 먼소린지 2009/11/28 23:29 # M/D Reply Permalink

    이제 정말 논쟁을 마무리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아주 무의미한 논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무엇보다 남성학이니 남성주의니 하는 학문의 범주에 포함될수 없는 무가치한것들과 목소리를 높이며 싸웠다는 사실이 제 자신을 부끄럽게 할 뿐입니다. 사회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하는 많은 학문이 있습니다. 철학도 그럴것이고 정치학도 그럴것이고 경제학도 그럴것이고 제가 모르는것도 있을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성주의? ....

    ps.

    한지환씨가 읽어보라고 추천해주신것은 하나도 읽지 않았고 하나도 읽을 생각이 없습니다. 진짜 학문을 공부할 시간도 부족한데 가짜 까지 보는것은 저 자신에 대한 자해가 아닐까 해서요.

    1. 한지환 2009/11/29 00:31 # M/D Permalink

      ‘물질생활의 생산양식이 인간의 존재를 결정한다’는 말은 물질생활의 생산양식, 즉 하부구조가 인간 삶의 전반을 결정한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말과 ‘물질생활의 생산양식이 인간의 존재를 결정한다’는 말은 기본적으로 같은 의미라는 것입니다. 저도 뜻을 모르는 말을 함부로 인용할 만큼 경솔한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일방적’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쓴 것은 저의 실수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책에도 ‘물질생활의 생산양식이 인간의 존재를 결정한다’고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귀하께서는 저의 질문을 계속 회피하고 계십니다. 저는 귀하께 평범한 서민 여성들이 아닌, 그들과 전혀 다른 여건에 놓여있는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의 결혼양태에 대해 물었습니다. 생계를 유지할 목적으로 남고여저(男高女低)의 결혼을 택한 서민 여성들에 대해 물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물론 남성보다 열악한 노동환경에 놓여있는 서민 여성들만 놓고 본다면 귀하처럼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의 경우, 그들이 남고여저의 결혼을 고집하는 현실을 물질구조라는 틀 속에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남고여저의 결혼을 고집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자기 자신과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경제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이 남고여저의 결혼을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귀하의 말씀대로라면, 우리 사회의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한 경제적 지위를 갖추게 될 경우, 그들이 자신보다 열등한 제반조건을 갖춘 남성을 배우자로 맞이해 가족부양의 1차적 책임을 부담할 것이라는 말씀입니까? 오늘날 결혼시장의 동향을 살펴볼 때, 그것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기대라는 것이 제가 지적하려는 바입니다. 즉 ‘여성 고용 불평등이 해소된다면 남성도 자연히 전통적인 책임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지금까지 이야기가 계속 겉돌았던 이유는 제가 귀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귀하께서 제가 던진 질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성학과 남성운동을 함부로 폄하하셨는데, 귀하께서 남성학과 남성운동에 대해 얼마나 아신다고 그렇게 함부로 말씀하시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보아하니 사회 이슈를 제대로 다룰 자세가 안 되어 있는 분인 것 같은데, 귀하의 이런 행동은 귀하의 한계를 보여줄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5. 구름 2010/03/09 23:32 # M/D Reply Permalink

    재밌네요 ㅋㅋㅋ
    먼소린지님이 정리 잘 해주신 것 같은데...
    계속 같은 얘기 하시는 듯.

    1. 한지환 2010/03/10 08:01 # M/D Permalink

      먼소린지님과 마찬가지로 듣고 싶은 말만 들으시는 것 같은데, 먼소린지님은 저의 핵심 되는 지적을 계속 회피하셨고 그 바람에 대화가 겉돌았던 것입니다. 남성의 전통적인 책임을 설명함에 있어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이 사회ㆍ문화적 기제로서 이른바 ‘가부장제’라 규정한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를 무시할 경우, 우리 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저의 지적이었습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먼소린지님은 이른바 ‘남고여저’의 결혼문화와 그로 인한 전통사회에서의 남성 억압이 순전히 물질적 구조의 탓이라고 주장하셨고, 저는 거기에 대해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경제력을 갖춘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이 여전히 ‘남고여저’의 결혼을 포기하지 않은 현실을 물질적 구조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반박했습니다. 먼소린지님의 주장은 남녀 간의 물질적 역학관계가 뒤바뀌어 남성이 경제적 책임에서 해방될 경우, 여성을 억압하는 성별 이데올로기 역시 자연히 사라져 그들이 외모지상주의의 굴레나 돌봄 노동의 부담으로부터 저절로 해방될 것이라는 주장만큼이나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는 것이지요.
      덧붙여서 말씀드리자면, 먼소린지님은 ‘문화’라는 것을 예술이나 사상 같은 정신문화에 국한시켜 생각하셨는데, 여기서 ‘문화’는 인류가 이룩해낸 물질적ㆍ정신적 소득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물질문화와 정신문화를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먼소린지님의 주장에 멋도 모르고 부화뇌동하신 것이 아니라면, 귀하께서 먼소린지님을 대신해 저의 지적에 답해주시기 바랍니다. 전통사회에서의 성적(性的) 억압의 원인이 남녀 간의 물질적 역학구조에 있다면, 경제적 측면에서 남성과 대등한 권리와 기회를 누리고 있는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이 여전히 전통적인 결혼양태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또 비록 소수이기는 하나, 가족의 생계를 전적으로 책임지는 여성가구주들이 돌봄 노동의 부담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을 남녀 간의 물질적 역학구조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Previous : 1 : ... 34 : 35 : 36 : 37 : 38 : 39 : 40 : 41 : 42 : ... 236 : 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