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뭐라 해도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어렵기만 하다.

 처음 마르크스를 알게 된 것은 중 3때였던 것 같다. 친구가 들고 있었던 공산당 선언이( 물론 읽지는 않았다.) 느낌만으로도 좋은 책이란 것을 알 수 있었고, 그 후 마르크스에 대한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몇 년 뒤 대학을 들어오고 나름 머리가 컸으니 하고 싶은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을 때는 나의 사랑 마르크스는 할배로 변하고 말았다. 도대체 마르크스 할배는 왜 이런 걸 적었단 말인가. 혼자서 이를 갈면서 오기로 쉬운 해설서부터 시작해볼까 하고 마음먹은 후 지난 학기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원숭이도 이해시킬 수 있다는 제목에 혹해 책을 봤지만 결국 다 읽지 못하고 책장을 덮고 말았다.(결코 필자가 원숭이 보다 지능이 낮은 건 아니다.) 사실 지난해 경제 위기 이후 자본주의의 위기다 뭐다 해서 자본론에 대한 쉬운 해설서를 표방하고 있는 책들이 시중에 간간이 나오곤 했지만 정작 대중들을 만족시킬 만한 해설서는 부족했다. 그런 의미에서 강상구씨의 책 「Hi, 마르크스 Bye, 자본주의」는 추천할 만한 책이다. 물론 해설서 한 권을 읽음으로써 심오하고도 오묘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이해했다 하는 것은 오만의 극치이다. 하지만 책 한권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가 어떠한 메커니즘을 가지고 돌아가는지 조금이라도 이해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을 읽는다 해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모두 알았다 할 순 없지만 정신없이 읽는 사이에 우리는 사람들의 노동력이 착취 받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무서운 사실만은 확실히 깨닫게 될 것이다.

노동자에게 노예와 같은 삶을 강요하는 자본주의 사회

 책에서 정의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을 중심으로 생산이 이루어지며, 자본 주변에 사람이 모여서 인간관계를 맺고 생산하는 사회이다. 즉, 인간의 삶이 자본에 종속되어 돌아가는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특징은 생산의 목적이 이윤 추구에 있다는 점이다. 이윤 추구의 목적 속에 인간이 향유하기 위해 노동력으로 만든 생산물은 모두 상품이 되어 소비되고 자신이 만든 생산물을 사기 위해 인간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화 시켜 팔 수밖에 없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은 이뿐만이 아니다. 화폐를 사용하는 이유는 교환의 편이성 때문이지만 겉모습으로만 보기에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지금의 세상은 돈에 신적인 지위를 부여했고, 사람들은 돈을 수단이 아닌 인생을 살아가는 목적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이를 마르크스는 화폐의 물신성이라 한다. 비본질적인 것이 본질적인 것을 지배하는 현상,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돈에 구속되는 것은 인간이 인간의 생산물에 구속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노동의 결과물에 대해 낯설어 진다는 것인데, 자신의 의지와 운동의 결과물이 생산물라면 당연히 자신의 일부로 받아 들여 져야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생존을 담보로 자신의 노동을 팔수밖에 없는 현실에 처한다. 문제는 여기에서 자신의 노동을 판매한다는 것이 단순히 노동의 대가로 임금을 받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자는 임금을 받는 과정에 있어서 노동을 하는 주체 즉 인격을 판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격이 가질 수 있는 재산(소유)을 포기하고 인격으로서의 자유의지를 포기한다. 노동의 대가는 당연히 노동을 실천한 사람의 것이지만 빵에 대한 대가로 자신의 인격을 판매 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는 소유의 주체가 아니게 되었으므로 그 행위의 결과는 그의 것이 아니게 된다. 이는 노예제에서의 노예의 인격성 부인과 그에 따른 재산권 박탈과 유사하다.

자본은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피와 오물을 뒤집어 쓰고 태어난다.

 “자본은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피와 오물을 뒤집어 쓰고 태어난다.” 이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한 말이다. 자본주의는 나쁜 거였어. 사람보다 돈이 우선되는 사회는 분명 잘못된 거야. 이는 개발 이익을 노린 무분별한 개발 때문에 벌어졌던 용산 참사에서도 주주들의 이익을 보전하기 위해 회사의 위기를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떠넘긴 쌍용 자동차 사태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노동이 모든 가치를 창조한다고 한다. 자본주의 생산의 3대 요소라 불리는 토지, 자본, 노동 중 인간의 노동이 없다면 다른 것이 아무리 많다하더라도 무용지물이다. 상품 생산의 본질적 부분인 노동력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가치 창조의 핵심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폭력과 착취의 야만성을 교묘히 감춘 채 돌아가고 있는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되는가? 우리는 지금의 화려한 자본주의를 지탱하고 있는 근간이 유명한 CEO나 기업주가 아닌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동력이라는 것을 말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자와 민중은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우리는 집 한 채 가지기 위해서 수십년을 일해야 하고 언제 해고될지 몰라 불안에 떨어야 한다. 자본주의가 가진 잘못은 확실하다. 부동산이다 주식이다 서점을 가득 메운 돈 불리는 방법에만 열중하는 사람들에게 확실히 말하자. 당신들이 하루 아침에 버는 돈은 노동자들의 피와 땀의 대가라는 것을 말이다. 화려함 속에 감추어진 자본주의 착취의 더러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책.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현재에도 유효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자본론이 너무 어려워 읽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의 지적 수준을 부끄러워 하지 말고 쉬운 것부터 시작해보자. Right Now~

Posted by 행진

2009/11/24 20:02 2009/11/24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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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건의료와 관련된 문제들

요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는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는 몇 달째 사람들에게 공포로 다가오고 있는 신종 인플루엔자(이하 ‘신종플루’) 때문이다. 지난 8월 15일 한국에서 신종플루로 첫 사망자가 발생한 이후에 계속해서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다. 게다가 시간이 갈수록 고위험군으로 분류하지 않았거나 백신을 접종한 사람 중에서도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신종플루의 변종이 만들어졌다는 보도도 나왔으며, 애완동물에게도 신종플루의 증상이 감지되었다. 11월이 되고 날씨가 추워지면서 한국뿐만 아니라 북반구에 있는 나라들에서도 신종플루로 몸살을 앓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 사망자의 수는 늘어나고 있다. 심각성에 대응하여 ‘중앙재난 안전대책 본부’가 국가전염병재난단계를 ‘심각’으로 격상시켰다.

하지만 여전히 정부의 미진한 대책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다. 신종플루의 대유행은 한국 공공의료가 부실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전반적인 한국 의료체계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하였다. 그런데 정부는 오히려 의료의 공공성을 줄이는 ‘의료서비스선진화’ 방안을 추진하고 있으며, 경쟁원리를 도입하여 서비스의 질을 상승시키겠다고 말하고 있다. 의료법인 경영지원회사(MSO) 설립, 병원채권 발행, 병ㆍ의원 간 합병, 경제자유구역 내 외국 의료 기관 설립과 같은 것들이 의료 서비스를 선진화한다며 나온 정책들이다. 하지만 의료 부문에서 이러한 정책들을 이전부터 사용한 미국과 같은 나라의 의료 실상은, 영화 ‘Sicko’를 비롯해 여러 대중매체들을 통해서 알려진바 있다. 그리고 정부가 의료 선진화 방안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정보를 누락시키거나, 객관적인 자료를 제시하지 못하는 등 추진과정에서의 문제점도 드러나고 있다.

우리들의 건강을 둘러싼 위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우리는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일정한 지식과 실습을 갖추지 않은 보건의료 ‘비전문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저 질병이 자신은 비껴가주기를 바라기만 할 수도 있고, 정부를 압박하여 더욱 많은 의료적 지원을 확대하게 할 수도 있다. 이를 뛰어넘을 수 있는 좀 더 근본적인 대책은 없는 것인가? 여기에서는 ‘바이러스의 체내 침투 → 발병 → 바이러스의 제거 → 치료’로만 생각되는 보건의료 문제에서, 이를 넘어서 좀 더 고민하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우리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실천들을 논의하겠다.

2. 문제의 원인은 무엇인가?

신종플루로 인한 사망자들이 다시 증가하고 북반구의 겨울은 신종플루로 인한 공포의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런데 신종플루가 전염성이 강하기는 하지만, 치사율은 독감보다 낮고 아프리카 등 제 3세계 국가들이 겪고 있는 말라리아의 공포에 비하면 아주 큰 위험은 아니다. 그럼에도 신종플루는 몇 가지 지점에서 보건/의료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전 세계적으로는 식량을 대량생산하기 위해 돼지를 집단사육하고, 생태계의 파괴를 초래하면서 새로운 전염병이 나타났다는 점에서, 광우병 파동에 이어 자본주의적 식량 생산체계의 위험성을 확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신종플루는 ‘빈곤병’이라고 불릴 정도로 사회 질서가 혼란에 빠지고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 지역에서 유행하였다. 이는 신종플루에 대한 항생제인 타미플루와 라렌자를 생산하는 로슈사가 지적재산권을 행사하며, 공급을 제한하고 있다는 점과도 연결된다. 한국에서는 신종플루의 유행이 보건의료체계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1, 2, 3차로 나누어지는 의료체계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신종플루의 검진-치료를 어디에서 받아야 할 것인지 혼란이 생겼다. 이는 신종플루의 위험을 사전에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았던 정부의 안일한 태도도 한 몫을 한다. 그렇지만 ‘저공급-저수가-저보장’을 특징으로 하는 한국 보건의료체계가 근본적인 문제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위와 같이 신종플루가 전 세계적인 위협이 되고 한국에서도 사회적 문제가 된 과정을 살펴보면, 이것이 개인의 신체에 대한 바이러스의 예방과 치료를 넘어서는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근대 자본주의가 태동할 때부터 탄생했던 대규모의 유행병은 기존에 겪어왔던 건강에 대한 위협과는 다른 것이었다. 도시와 농촌이 분리되면서 대규모 단종 경작에 따르는 생태계 취약성의 증가, 도시와 인구 규모가 성장함에 따라 바이러스가 창궐할 조건이 만들어진 것, 전 세계적인 무역과 이동이 증가함에 따라 질병이 퍼져나간다는 점 등에서 그러하다. 대규모 유행병과 질병이 사회-생태적인 문제를 통해서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주류적인 보건의료는 '생의학적 모델'에 기초하고 있었다. 즉 질병은 개인의 몸에 침투한 바이러스의 작용으로 발생하고, 이에 대한 치료법은 역시 개인의 몸에 대한 항바이러스를 투입함으로서 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개인의 몸에 바이러스가 침투하는 것이 조건이 되는 질병을 '감염성 질병'이라고 부른다. 1970년대 보건의료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생명공학기술과 의학의 발달로, 인류가 감염성 질병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선언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후 더욱 강력한 내성과 복잡한 구조를 가진 바이러스들이 출현하였고, 종간 교차로 인해 발생하는 바이러스 역시 증가하였다. 지난 10년간 조류독감, SARS, 신종플루와 같은 세계적인 유행성 질병이 10차례나 발생하며 공포를 겪어야 했다. 물론 의학 기술과 공중 보건이 발달한 지역에서는 이것으로 인해 대규모 사망사태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경제 수준이 낮고 이로 인해 의료적 자원에 대한 접근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많은 지역에서는 고질적인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다. 그렇지 않은 지역이라고 할지라도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새로운 보건의료 문제로 인해 불안에 떨 수밖에 없다.

한편 1970년대 이후 전 세계적인 경제 불황 속에서 보건의료는 새로운 문제에 맞부딪히게 된다. 자본주의적 노동 통제가 심화되고 이에 따른 스트레스와 육체적 부담은, 현대병과 각종 비감염성 질병의 위험을 한층 상승시켰다. 이에 따라 의료비용이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이는 경제위기와 결합하여 '보건의료의 위기'로 가시화된다. 이에 대해 신자유주의자들은 의료 체계의 비효율성이 문제였음을 지적하며, 보건의료 부문에 대해 기업의 원리를 도입함으로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에 따라 공적 비용이 투입되던 보건의료 부문이 사적인 투자로 대체되어가고, 외부에 있는 금융자본이 개입하기 시작한다. 제약ㆍ병원 등 사적 의료자본은 세계적 인수ㆍ합병과 직접 투자를 통해 수익성을 최대화하는 전략을 채택하고, 수익을 얻을 수 있는 분야를 다면화하기 위해서 다양한 결합상품들을 개발해낸다. 그리고 보험자본과 같은 금융자본의 영향이 증대하며, 이른바 '보건의료의 금융화 현상'이 나타난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한국에서도 '의료서비스 선진화 방안'이 추진되며, 의료분야에서의 공적 책임이 약화되고, 금융자본이 침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 이는 그간 나타났던 한국사회 보건의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인 해결책으로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신종플루 사태에서 보았듯이 공적 의료 체계 아래에서 정부는,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양의 타미플루조차 확보하지 못한 채, 로슈사에게 휘둘려야만 했다. 의료 민영화가 추진되고 공적 의료 체계가 붕괴한다면, 새로운 질병의 위험에 대해 제대로 대응조차 하지 못할 가능성이 커진다. 신종플루 사태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나라가 의료 민영화가 상당한 정도로 추진된 미국과 멕시코였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3. 보건의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

지금까지 이야기한 바와 같이 현재 보건의료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새로운 질병의 위험이 출현한다는 점, 공적의료체계가 붕괴하며 의료 민영화 현상이 강화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보건의료의 문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는, 각종 사회-생태적인 쟁점들을 함의하고 있다는 것을 밝혔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응하여 어떤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불행하지만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별로 없어 보인다. 보건의료 영역의 문제는 이 분야에 정통한 전문가들이 하는 일로 인식되기 쉽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손쉽게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건의료 문제에 대해 사회-생태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현재 나타나는 문제들에 대한 올바른 인식, 바뀌어야 할 방향에 대해 인식하는 것으로도 상당한 진전을 이룰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인식을 학생사회와 같이 우리가 있는 곳에서 확산시키려는 노력을 통해, 건강권을 쟁취하기 위한 집단적인 움직임, 그리고 보건의료 부문에서의 대안을 만들 수 있다. 어떤 지점들에서 어떤 인식을 공유해야 할 것인가?

대규모 유행병으로 인한 재앙은 민중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이지만, 초민족적 제약 자본들에게는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무역관련 지적 재산권에 관한 협정’(TRIPs)은 의약품 제조과정과 의약품 자체에 대한 특허권을 출원한 날부터 20년 동안 독점할 수 있다고 명기하고 있다. 이렇게 지적 재산권에 따른 지식과 상품의 독점은, 자연스럽게 상품의 가격까지도 초민족적 자본의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한다. 신종플루로 인해 로슈사가 엄청난 이득을 얻은 것, 말라리아에 대한 치료제를 개발하는 비용이 매우 낮음에도 불구하고 제약 자본이 이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약을 생산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적 재산권의 성격을 확연히 보여준다. 우리는 정당화 되어 있는 초민족적 자본의 특허권과 지적 재산권에 대하여 문제제기를 하고, 민중들을 위해 쓸 수 있는 지식을 확산시켜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노력만이 제약자본의 횡포를 막고, 의료적 자원에 대한 접근권을 확대시킬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는 모든 부문에서 금융자본이 배타적인 이윤을 추구할 수 있도록, 사회 체계 전반의 변화를 초래한다. 보건의료 부문 역시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 없고, 이것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의료 민영화이다. 효율성의 논리로 포장하며 추진하고 있는 의료 민영화 정책이, 민중들의 건강에 어떤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의료법인 경영지원회사(MSO), 거대 병원의 탄생, 병원 채권 발행 등은 보건의료 부문에 기업의 원리를 도입하는 것이다. 즉 보건의료 기관은 지금까지 당위적일지라도 천명해오던 민중들의 건강보다는, 이윤추구를 제 1의 목적으로 하게 될 것이다. 현재 추진되고 있는 '의료서비스 선진화 방안'에 대한 명확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다양한 방식으로 의료적 지원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는 신자유주의에 맞서야 한다.

우리는 현재 어떠한 체제 아래에서 살고 있는가? 자본주의 체제는 지난 수만 년간 인류가 경험하지 못했던, 거대한 생산력의 발전을 땅 속으로부터 끄집어내었다.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체제는 거대한 인구의 증가와 이에 따른 도시화를 가져왔으며, 이를 부양하기 위해 사회와 자연이 맺는 관계를 변화시켰다. 이는 효율성에 바탕을 둔 대량생산체제였고, 가장 대표적으로는 단종 경작이나 대규모 축산 공장과 같은 자본주의적 식량 생산 방식을 가져왔다. 그런데 지금까지 대규모 질병이 발생했던 사례들은, 이러한 식량생산 방식이 생태계와 자연의 면역성을 파괴시키며 바이러스에 취약하게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즉 자연과 사회가 맺는 유기적인 물질순환 메커니즘으로서 신진대사가 자본주의적 식량생산 아래에서 파괴되었고, 이 과정에서 민중들의 건강이 파괴되기도 하였다.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이는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묵과될 것이고, 자연과 사회의 관계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계획은 마련되지 않고 있다. 자본주의적 식량생산 방식을 변화시킬 방법을 마련하고, 자연과 사회의 유기적인 물질 대사가 이루어지는 신진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인류의 건강을 위해 요긴한 일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이것이 지금까지 인류가 쌓아올린 모든 성과들을 파괴하고, 원시 시절로 돌아가자는 것은 절대 아니다. 사회가 자연이 맺는 관계는 필연적으로 인류의 시각에서 구성될 수밖에 없지만, 이것이 꼭 현재와 같은 자본주의적 방식일 필요는 없다. 새로운 관계를 마련할 사회-생태적인 인식과 전략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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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행진

2009/11/24 16:19 2009/11/24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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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특호_입장2] 반전평화 - 아프간 전쟁

확대되는 '아프팍' 전쟁 - 이것이 노벨평화상 수상자 오바마의 New Style!

어느 월요일, 백악관 앞에서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에 반대하는 전쟁 반대 시위가 있었다.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채 나오기도 전, 시위의 시작과 함께 60명의 시민들과 평화 활동가들은 연행되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전쟁 중단의 목소리를 입막음하려고 했던 그 나라의 대통령은 며칠 후 바로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지목되었다.
오바마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여한 이유는 그의 대화와 타협을 통한 국제분쟁해결의 노력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인 동시에 아직 실질적인 성과를 내지는 못했을지라도 핵 없는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이라는 데에 대한 격려의 의미라고들 한다. 실제로 백악관은 대통령의 수상을 계기로 북한과 이란의 핵문제, 러시아와의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1) 후속 협정 등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전쟁광 부시를 비판하며 평화를 약속하는 오바마의 모습에 한 표를 던졌던 사람들의 기대는 드디어 현실화 되는 것일까?

살인 로봇 ‘프레데터’에 숨죽이는 아프가니스탄 마을

이라크로부터 철군을 약속했던 오바마 정부도 ‘철군’으로 포장한 ‘점령 연장 계획’을 예정대로 추진하고 있다. 이미 전쟁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믿고 싶지 않을 만큼 늘어가고 있음에도, 전쟁을 확대하기 위한 세련된 논리들은 새롭게 재탄생을 거듭하고 있다. 아프간에서만 이미 2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죽어갔고,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 사망자도 1,400명이 넘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민간인 피해를 줄이겠다던 미군 사령관은 병력을 대도시로 집중하고, 그 외 지역은 무인정찰 폭격기인 프레데터를 확대 운용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프레데터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조이스틱’ 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무기이다. 군인도 아닌 사설 용역 기업이 관리하며 논란이 되기도 했으며 이를 원격 조정하는 군인들은 안전하지만 민간인 피해는 속출할 수밖에 없다. 이미 아프가니스탄은 ‘거대한 무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강도 높은 공격을 더해가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기어이 아프간 재파병, 전쟁 지원에 팔 걷어 부치는 이명박 정부

최근 이명박 정부는 아프간 재건팀(PRT)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한국군의 아프간 재파병을 추진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민생과 민주주의 파탄으로도 모자라 국민의 목숨까지 담보로 잡으면서 한미 동맹을 굳건히 하겠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국익이 무엇일까? 한국 정부가 전 국민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산․동의부대를 파병했던 것의 대가는 윤장호 하사와 샘물교회 교인들의 생명을 잃은 것이었다. 그렇게 철군을 결정한지 3년도 되지 않아 재파병을 검토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파병한다는 정부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평화’와 ‘재건’을 표방하지만 아프간 민중들에게는 점령군의 일부로 인식될 뿐이다. 진정 평화를 염원하는 우리는 즉각 PRT를 철수할 것과 ‘파병’이 아닌 ‘전쟁 중단’을 요구한다! 이명박 정부는 경제위기 상황에서 ‘군비 증가’와 ‘전쟁 지원’ 대신 복지와 민중들의 삶에 대한 지원에 힘써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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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행진

2009/11/24 16:18 2009/11/24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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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특호_입장1] 이주-국제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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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회용 노동자 ’
이주노동자가 등록, 미등록과 상관없이 사업장에서 차별과 언어적, 신체적 폭력에 노출
이주노동자 2008년 산업재해 사망자는 117명으로 2007년보다 34% 증가
같은 기간 한국노동자의 산업재해 사망은 4.7% 증가
E-6 예술흥행비자로 입국한 많은 여성들이 성희롱과 성폭행을 당함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수치심을 참으며 업소에 남거나 도망을 쳐 ‘불법체류자’가 됨

이주노동자가 부당해고 같은 착취와 인권침해에 취약한 이유 :
고용허가제가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이동을 3회
구직기간을 2개월 이내로 제한

[국제 엠네스티] - 이주노동자 인권보고서



버려지는 일회용품, 그/녀들은 이주노동자

정부는 지난 10월 12일부터 ~ 12월까지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집중단속을 시작했다. 법무부와 노동부를 포함한 7~8개의 정부 부처가 합동단속에 함께 하고 있으며 이주노동조합에 대한 불법사찰 및 이주노조 활동가에 대한 표적단속을 시도하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미디어활동가이자 음악인인 네팔인 미누씨가 체포되어 23일 강제 추방당하였다. 그리고 일요일 단 하루 만에 경기도에서는 100여명에 달하는 미등록 노동자가 단속되었다. 마치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씨를 말리려는 듯 가택 무단침입, 옷을 벗긴 채, 아이가 있는 임산부들도 무자비하게 단속하는 불법적인 방법, 인간적으로 행해질 수 없는 방법은 기본이다. 또한 수도 없는 폭력으로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의 심리적 압박감은 자살기도를 할 만큼에 다다르고 있다. 심지어는 등록 노동자든 미등록 노동자든 상관없이 모든 이주노동자들을 타깃으로 단속을 일삼고 있다.
벌써 상반기에 2만 명에 달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단속되었고 전국적으로 경쟁을 하듯 할당량을 두어 단속을 감행하는 등 가게에서 사고픈 물건을 집어오듯이 이주노동자들을 단속하고 있는 것이다. 남한에서는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은 2008년 12월 말 현재 국내 취업 중인 이주노동자는 약 70만 명으로 국내 총 취업자의 3%, 국내 임금노동자의 4.4%를 차지하고 있다. 합법적 체류자격을 가진 이주노동자는 전체의 73.5%, 미등록 상태의 이주노동자는 전체 이주노동자의 26.5%이며 이주여성이 전체 외국인의 42.1%이고 이주노동자의 성별 현황은 남성이 67%, 여성이 33%이다.
기억을 떠올려보자면 몇 년 전만해도 이주노동자들은 내국인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존재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외국인, 이주민들을 소재로 한 tv프로그램이 등장하고, 이주민들이 사회 속에서 그/녀들의 존재를 보이기 시작했다. 여성은 결혼이주여성으로, 남성들은 이주노동자로 대표되는 것 같다. 결혼 이주여성은 남아선호사상으로 정주 여성이 부족하고 혼인의 시기를 놓치거나 하지 못한 남한 남성들의 동반자가 되어 출산율을 높이는 존재, 남성 이주노동자들은 땀을 흘리며 정주노동자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왜 이명박 대통령은 경제위기가 오니 이주노동자들을 축출하자고 이야기 했던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한국의 중소기업들은 정주노동자가 아닌 이주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것일까? 이는 정부의 고용허가제라는 정책으로 이주노동자를 도입하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 기본적으로는 정주노동자들이 3D업종에서 일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주노동자를 고용함으로 내국의 구인난으로부터 비교적 3년이라는 안정적인 고용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주노동자를 고용함으로 인해 저임금을 주면서 인건비를 절감할 수 있다. 잔업 및 초과노동 등 사측의 명령에 고분고분 잘 따르는 유순한 노동력으로 비정규직이라는 굴레에도 다가가기 힘든 조건에 위치해있다는 것에 이주노동자들을 고용하는 이유가 있다.
이렇게 이주노동자들은 한국 사회에서 그 누구보다 먼저 경제위기 속에서 자신들의 일자리를 정주노동자에게 내어주는 희생양이 되고 가장 먼저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경제적으로 남한보다 못사는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로 차별과 착취, 편견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아야 하는, 남한보다 못사는 고국(故國)을 숨 쉬게 하는 존재다.

내부 - 계획적인 ‘선 긋기’

정부는 이미 고용허가제라는 정책을 통해 이주노동자들의 사업장 이동과 구직기간을 제한하는 것에서부터 문제로 제기되었던 정책에 더해 올 초 작년 하반기 경제위기가 가시화, 장기화될 전망이 제기되자 경기침체로 인한 내국인 실업자 증가에 대한 대응 및 국내 취업 중인 이주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보호한다는 기조로 2009년 이주노동정책을 발표하였다. <내국인 인력대체 지원>, <건설산업 취업허가제 도입>, <신규 이주노동자 도입 중단 및 2009년 도입규모 축소>, <숙식비용 최저임금 산입>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은 정작 실업과 일자리 양산에 대한 해결책 없이 정주노동자들이 꺼리는 직업을 굳이 이주노동자들을 축출해 내국 인력으로 채우려는 ‘눈 가리고 아웅’ 식의 구멍난 정책이 아닐 수 없다.
다문화사회, 이미 몇 년 후면 남한의 낮아진 출산율을 결혼여성이주민이 높여주고, 거기서 태어난 고국의 인력을 잘 키워낼 교육과 사회에 대비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 이외에 다문화사회에 포함시킬 다른 벽은 너무도 높다. 합법(결혼여성이민자, 외국인 투자자, 등록 이주노동자) vs 불법(혼인빙자 이주여성, 미등록 이주노동자, 불법체류자)라는 선을 긋고 합법과 불법이라는 모순적인 틀로 이주민들을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이주민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합법이어야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무엇이 그/녀들을 불법으로 만들까? 불법과 합법의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 사람이라는 존재가 불법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불법사람은 사람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에 불법이 된다. 즉 이 사회가 등록 이주노동자는 합법,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불법이라고 규정하기 때문에 합법과 불법사이에 선이 생기고 그 선을 뛰어넘기엔 너무도 높은 벽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집중단속이 강화되면서 정부는 이주노동자를 다르게 규정하고 갈등을 유발시키는 것을 넘어 더욱 높은 벽을 만들고 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타깃으로 삼아 단속을 정당화 하기위해서 외국인 범죄 전담반과 지문날인 부활을 통해 이주노동자들을 불법체류자, 범죄자, 테러집단으로 몰아간다. 이것은 정부가 내국인들에게 이주민에 대한 제노포비아를 부추기며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며 다문화사회라는 얼굴에 침을 뱉고 있는 것과 다름 아니다.
 
외부 - 누구를 위한 세계화 인가?‘자본의 횡포’

 [인도]  ‘포스코’
 2005년 6월 22일 인도의 오릿사 주정부와 1200만 톤 규모의 제철소 건설에 합의하는 투자양해각서(MoU)를 체결. 제철소 건설부지 주민들이 강제이주에 저항. 2007년 4월, 9월, 11월에는 주정부와 주민들 간의 폭력사태가 계속 발생 - 지역으로 이어지는 진입로 다리의 주요 검문소를 지키고 있던 지역 주민들이 100명의 무장괴한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 무장괴한들은 사제폭탄을 시위텐트를 향해서 던지고 항의하는 주민들을 구타했으며, 대부분 여성으로 이뤄진 시위대를 성적으로 희롱했고 이 과정에서 약 50여명의 주민들이 부상당하고, 그 중 15명이 중상을 입었다.

 [콜롬비아] ‘현대’
 남미 콜롬비아에서는 농민, 활동가들이 정부군과 친정부적인 준군사조직에 의해 무자비하게 납치되고 살해되는 등 심각한 위협과 탄압에 노출되어 있다. 2007년 5월 18일 만쿠소는 공청회에서 전임 지도자인 카를로스 카스타뇨가 직접 현대의 콜롬비아 지사장인 카를로스 마토스를 만나 현대에게 헬리콥터 지원을 요청했고, 현대는 이를 거절하는 대신 연간 4대의 택시를 지원. 현대가 기증한 택시들은 ACVC와 같은 단체의 활동가들을 위협하고 살해하는 데 직접 동원되었다.

 [인도] ‘현대자동차’
 지난 7월 인도 현지법인 현대자동차 노조 간부 2인을 한국으로 초청했지만, 한국 정부가 '아국 기업체 내에서 불법활동을 한 혐의'와 '이들의 입국이 국익에 바람직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비자 발급을 거부했다. 한국의 대기업 현대자동차 사측이 합법적인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핵심 간부들을 강제 전보, 해고, 정직 등의 징계 조치와 작업안전관리 상의 부실 및 그에 따른 산업재해, 사업장에 있던 힌두신상을 철거 등 종교적 권리 침해하고 노동자를 개로 묘사한 게시물을 만드는 인권침해를 저질렀다.

남한의 큰 기업들은 생산의 거점을 세계로 진출한 수많은 자본을 투자해 돈을 벌고 있다. 사회적 공헌을 많이 하는 기업 포스코(POSCO)는 인도 정부와 주민의 동의 없이 체결된 협약을 밀어 붙이며 평생을 터전으로 살던 지역에서 주민들을 몰아내고, 초국적기업인 현대가 콜롬비아의 정부에 제공한 택시는 사람을 죽이는 수단으로 쓰이고, 인도의 현대자동차는 노동자를 '자본의 개'로 명명하며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을 착취, 학살하고 있다. 큰 기업들의 진출만 봐도 지금 지구는 국제사회, 세계화 사회라 부를 수 있다. 특히 자본은 세계의 내부와 외부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노동자들을 탄압, 착취하며 더 값싼 노동력을 얻기 위해 곳곳으로 이동하며 돈을 벌고 있다. 그러나 자본의 이동, 일자리의 양산을 따라서 이동하는 이주노동자들은 각 나라의 정부와 자본들이 이동을 제한하고 정책적으로 탄압을 일삼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현실이다.

편견과 차이 그리고 위기를 넘어

올 여름을 더욱 뜨겁게 달궜던 쌍용자동차 투쟁에서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목숨 건 투쟁에 함께 일했던 정규직노동자들이 구사대가 되어버린 참혹한 투쟁에서 정부와 자본은 끝끝내 노동자들을 분할하려 시도했고, 쌍용자동차를 필두로 대기업 노동자들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할하고 노동자들의 투쟁을 산산이 부숴버리려던 지배계급의 계략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정주노동자와 이주노동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정부의 기만적인 정책 속에서 현재 내국인들 사이에서 이주노동자 단속에 지지적인 분위가 형성되는 것에 동요되어서는 안 된다. 바로 정부와 자본이 원하는 것은 한국사회와 이주를 분할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주노동자들을 단속하고 축출하여 일자리를 늘리는 것은 최저임금도 못 받는 이주노동자들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을 뿐만 아니라 전체 노동자의 일자리 질을 낮추는 것과 다름 아니다. 오히려 경제위기를 빌미로 노동의 질을 낮추고 노동자들을 분할하여 더욱 값싸고, 강도 높고 유연한 노동의 분위기를 조장하려 미등록이주노동자에 대한 단속과 추방을 강행하는 것이다. 이는 곧 자본이 만들어낸 위기를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
전 세계가 구조적으로 발전국가가 저발전국가의 자원과 인력을 갉아먹고 착취한다. 저발전 국가는 키워낸 자국의 인력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줄 수 없어 발전국가로 노동자들을 송출하고 가족의 생계와 자국의 경제를 책임지러 떠나온 이주노동자들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멈추어 지지 않는 한 끊임없이 존재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본의 세계화가 한나라를 넘어 움직이고 노동자의 이동 역시 지금의 체제 안에서 구조적으로 나타나는 문제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의 사회가 국제적인 것에서부터 지역적인 것까지 연결된 하나의 고리라는 것을 다시금 기억하자.

진정 지구가 세계화, 다문화 된 사회가 되고 있다고 한다면 평등한 자유, 노동자들의 이동도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자본의 노예로 착취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문화, 종교, 인종, 계급에 대한 차별과 착취를 뛰어넘자. 경제위기의 책임을 전가하는 정부와 자본에 대한 저항을 발붙이며 생활하는 학생사회에서부터 시작하자!

Posted by 행진

2009/11/24 16:14 2009/11/24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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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특호_각론4] 페미니즘

논쟁과 토론의 중심에 설 학생회의
 중단 없는 실험으로
페미니즘을 공동체의 원동력으로 만들자!


 


0. 들어가며

올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몇 가지 사건들을 떠올려보자. 여자 연예인의 특정 신체 부위를 지칭하는 차마 입에 담기도 민망한 신종 단어가 유행어처럼 나돌기도 하고, 끔찍한 아동 성폭력을 저지른 가해자에게 내려진 12년이라는 형량이 너무 적다며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기도 했던 일들을 들 수 있겠다. 여성들이 ‘꿀벅지’라는 단어가 성적인 불쾌감을 주기 때문에 성희롱이라고 제기하자 남성들은 ‘초콜릿복근’에 대해서는 아무도 그런 방식으로 제기하지 않는데 왜 유독 여성의 신체부위를 지칭하는 단어만 성희롱이라고 하냐며 이것은 남성들에 대한 역차별이라고 공격을 해오기도 했다. 그러면서 ‘도대체 무엇이 성희롱이냐’에 대한 논쟁이 인터넷 게시판을 뒤덮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한 개그 프로에는 ‘남성인권보장위원회’라는 이름의 코너까지 등장했다. 그동안 여성들이 성차별이라고 제기해왔기 때문에 남성들이 드러낼 수 없었던 애환(?)을 소재로 한 이 코너는 첫 방송에서부터 큰 호응을 얻으며 회를 더 해갈수록 남성에 대한 역차별을 부각시키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아동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사회적으로 성폭력을 차단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법제도를 더욱더 강력하게 바꿔야 한다는 지점에서만 논쟁이 형성되고 있다. 이 사회의 어떠한 구조와 인식지형이 끊임없이 성폭력이 발생하도록 만드는지에 대한 고찰이나 반성은 간데없다. 성폭력 사건의 구체적인 경위를 선정적으로 드러내며 이런 가해자에게 12년은 너무 적으니 무기징역이나 화학적 거세 등의 외국 사례를 본받아야 한다는 주장만 되고 있다.
 
이런 이슈들 사이에서 페미니즘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소위 ‘꿀벅지vs초콜릿복근 논쟁’에서 페미니스트들은 ‘꿀벅지’가 왜 여성에게 성적 수치심을 주는 단어이고 ‘초콜릿복근’은 어떤 맥락에서 성희롱이라고 불리지 않는 것인지에 대한 입장을 못 만들어가고 있다. 이런 제기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으레 페미니스트들의 억지라고 일축했으며 페미니즘은 역시 여성들만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는 인식을 더욱더 단단히 굳혔다. 어쩌다 ‘여성의 인권을 보장하라는 드센 여성들의 요구에 밀려 남성의 인권이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고 당당히 외치는 개그맨들이 뜨거운 호응을 받는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일까?

2010년 학생회 선거 페미니즘 각론에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주체화되는 방식을 살펴보며 여성들이 불만을 느끼는 지점이 어디이고 그러한 불만들이 어떤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는지를 분석한다. 2010년대를 살아가는 여대생들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이며, 하기에 지금 대학사회에 필요한 페미니즘은 무엇인지를 담고자 한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인권만을 보장하라는 것이 아니며 남vs여의 구도를 만들어 불평등한 사회에서 여성이 더 많이 가지게 만들기 위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번 학생회 선거를 통해 분명히 말하자. 선거에 임하는 모두가 페미니즘이 이 시대의 보편적인 해방을 만들어가기 위한 필수적인 권리임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기 위하여 이 각론이 풍부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1. 시대분석_ 여성들은 어떻게 주체화되고 있는가?

…현재 대한민국의 20~30대 여자들의 대부분은 ‘일하는 여자’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살아간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일하는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만큼 녹록치 않다. 분야를 막론하고 여자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부딪칠 수밖에 없는 다양한 고민과 속마음, 남성 중심의 한국사회에서 인내하고 스스로 해결책을 찾을 수밖에 없는 여자들만의 문제, 행복한 직장생활을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노하우를 담은 책… -“대한민국에서 일하는 여자로 산다는 것” 책 소개 中

사회가 남성 중심적으로 구조화되어있기 때문에 여성들이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고 있는 사실이다. 직장에서 여성으로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 이 사회가 일하는 여성에 대한 배려가 너무 없다는 것, 그렇다고 일 안하고 집에만 있다고 해서 편한 것도 아니라는 것, 내조의 여왕이 될 것인가 커리어우먼이 될 것인가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병행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사회가 정말 불합리하다는 것 등은 거의 모든 여성들의 불만이자 여성 관련 계발서들이 서두에 담는 내용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계발서들이 이에 대해 내놓는 해답은 하나같이 ‘개인의 능력을 키우라’는 것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여성 관련 계발서들이 담고 있는 내용은 옷 잘 입는 여자가 일도 잘 한다거나, 인맥지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립서비스는 최고의 커뮤니케이션 기술이라며 상사 대하는 법을 알려주기도 하고, 상전처럼 구는 남자 부하직원 다루는 스킬도 알려준다. 또한 자신의 직업에 만족하는 방법,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 등 개인적인 성찰을 요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처럼 사회는 여성들에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할 수 있는 자신만의 전략을 만들라고 하는데, 많은 여성들이 이를 받아들인다. ‘여성’이라는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고 남성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기 위해 열심히 스펙을 쌓지만 결국 대부분의 여성들이 ‘최고의 스펙은 남성’이라는 벽 앞에 좌절한다. 결코 여성들이 덜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없는 문제이지만 사회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좀 더 뛰어난 능력자가 되라고 주문하며 여성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많은 여성들이 현실의 불합리함을 알고 있지만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안으로서 자기계발을 택한다는 것이다.
경기가 장기 침체로 접어들면서 꼭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경제위기를 체감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고,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는 여성들의 자기계발은 ‘알파걸’과 ‘골드미스’가 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생존 자체를 위한 조건이다. 많은 여성들은 롤모델로 제시되는 여성들의 삶이 능력 있는 몇몇 여성들만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지만, 고생 끝에 합당한 만족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한 줄기 희망을 품고 다시 이를 악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여성들의 삶을 힘들게 만드는지, 사회에 일어나야 하는 변화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변화를 가능하게 만들 것인지는 적극적으로 토론되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여성의 취업률이 늘었다는 통계가 발표되고 있는데, 올 2월 대졸 여성의 59.4%가 7월까지 일자리를 구해 2007년 46.4%, 2008년 54.7%에 이어 3년째 취업률 증가세를 기록했다고 한다. 그에 비해 대졸 남성의 경우 취업률이 낮아지고 있다는데, 그럼 정말 여성들이 더 취업 잘 되는 세상이 온 것일까? 주목할 것은 증가하는 퍼센티지가 아니라 일자리의 질이다. 올해 취업한 여성 대졸자 가운데 임금근로자는 15만 2000명이었는데, 이 중 상용직 취업자는 절반 남짓(7만 7000명)에 불과했다. 많은 여성들이 눈높이를 낮춰 임시·일용직으로 취업하기를 선택하고 있기 때문에 취업률이 올라간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계속해서 일자리의 질이 낮아지는 가운데 여성들이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정부의 기조는 사회서비스시장화정책이나 경력단절여성들의 재취업을 위한 여성새로일하기센터 등에서 집약적으로 나타난다. 성별 분업과 생계를 부양하는 일차적인 의무가 남성에게 있다는 이데올로기는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정부의 정책들은 여성의 노동권을 보장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일하는 여성들의 권리가 보장된다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며 노동권을 쟁취하기 위한 적극적인 운동들을 축소시키기도 한다.

대학의 모습은 어떠한가. 학내 페미니즘 운동이 만들어놓은 틀이 더 이상 확장되지 못하면서 페미니즘은 제도로, 여학생들의 편의만을 요구하는 이기주의라는 오해로, 대학생이라면 이미 지키고 있는 기본 에티켓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성폭력이나 성차별이라는 단어가 케케묵은 무언가를 다시 들춰내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여자 대학생’은 대학이라는 공간 안에서 자유롭게 관계 맺고 자신의 능력대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주체적인 존재로 서있는 듯하다. 하지만 여전히 강의실에서 여성비하 발언으로 불쾌감을 주는 교수들이 있으며 과/반이나 동아리에서도 성폭력적인 상황들이 사라졌다고 보기 힘들다. 이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공론화할 수 있는 공동의 움직임이 사라졌을 뿐이다. 예를 들어, 여자 연예인의 특정 신체부위를 성애적으로 표현한 단어를 들었을 때 불쾌하다고 느낀 사람들이 그런 감정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사라졌다. 한 여고생이 여성부 게시판에 그런 표현은 성희롱에 해당되니 사용하지 말자고 글을 올린 것에 네티즌들은 성희롱이다 아니다 갑론을박하기도 했지만 많은 여성들이 자신도 불쾌함을 느꼈다고 반응하기도 했다. 이처럼 어떤 문제에 대하여 불만이나 불쾌감을 느낀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감정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밝히고 그것이 개인의 불편함이 아니라는 것을 교감할 수 있는 공간이 대학에 남아있는가 했을 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대학에서 페미니즘은 공동체를 바꾸는 운동으로 인식되었으며 언제나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대학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진 반성폭력 운동의 성과는 무엇을 성폭력이라고 하는지,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어떠한 원칙을 가지고 해결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에 대해서 공동체 안에서 논쟁을 이끌어내고 구성원들이 직접 반성폭력 학칙을 제정하기도 하며 대학생들의 인식과 문화에 큰 변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페미니즘이 대안적인 공동체를 위한 원동력으로 인식되지 못한다. 반성폭력 운동의 소중한 성과들이 개별적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축소되거나, 공동체에서 페미니즘을 말하는 것이 ‘남성들의 권리와 대치되는 무언가를 요구하고 딴죽 거는 여자들의 투정’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페미니즘이 논쟁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비생산적인 싸움을 일으키거나 오해만을 낳고 있는 것이다.
여대생으로서 공부를 하고, 취업준비를 하고,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고,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몰성적으로 돌아가는 사회 속에서 자신들의 노력이 온전히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과 불안감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불만과 불안감은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해프닝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작년 촛불투쟁 이후 인터넷 상에서 소위 ‘배운 여자’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많은 젊은 여성들이 정치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현안에 대한 의견도 적극적으로 개진하면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경제위기에 대해 나름대로 분석해보기도 하고 취업이 잘 안 되는 현실을 한탄하기도 한다. 여성문제건 사회문제건 대안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일회성 촛불시위를 기획하거나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리는 것에서 더 나아가지 못 한다. 적당히 진보적인 개인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여성들에게 이 시대의 대안은 현실에 조응해서 자기계발 열심히 하거나 완전한 일탈을 꿈꾸며 여행을 떠난다든지 소비하는 것 외에는 없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2. 페미니즘으로! 공동체에서 논쟁과 토론을 재개하자!

여대생들은 여성이 남성에 비해 취업하기 힘들다는 것, 취업이 된다 해도 노력에 비해 만족스럽지 못한 직장이거나 직장 안에서 여러 가지 차별적인 상황과 맞닥뜨리게 될 것을 잘 알고 있다. 지금의 경제위기나 정부 정책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운동’이라는 이름이 아니어도 개별적으로 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들의 불만은 인터넷 게시판에서나 이념 없이 특정 사안마다 일어나는 촛불시위에서 휘발성 강한 모습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사회에 대한 불만을 자기만족적으로나마 표출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기계발에 몰두하면서 애써 현실을 외면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실에 반격을 가하기 위해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불만을 느끼는 지점들에 대하여 운동주체들이 속 시원히 이야기해줄 수 있어야 한다. 여성들은 노력 여하에 관계없이 취업이 잘 되지 않는 현실, 취업이 된다 해도 사회의 전통적인 성별분업 이데올로기와 남성 중심적인 구조가 가져오는 차별들에 불만을 느끼고 있다. 여기에 더해 여성의 신체가 성적대상화 되면서 외모를 가꿔야 한다는 압박도 끊임없이 받고 있다. 여성의 몸을 부각시키는 각종 미디어의 영향 속에서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가꿔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사회적인 분위기가 있다. 하지만 사회가 왜 여성에게 이런 것들을 강요하게 되었는지 제대로 밝히지 못하면서 남성의 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성희롱이라는 공격에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사회의 문제를 인식하고는 있지만 개별적으로 해결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집단적으로 무언가를 해본 경험이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람들의 불만과 불안감을 설명하고 공동의 실천이 활발히 이루어지기에는 대학사회의 조건이 과거와는 너무 많이 변해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학 페미니즘 운동이 만들어왔던 많은 것들이 학생들에게는 더 이상 유의미한 고민을 던지지 못한 채 학교 당국의 제도권으로 빨려들어 가거나, 학내에서 페미니즘을 말하는 것이 여성들의 이기주의로 받아들여지는 모습, 대학의 문화가 양성평등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기층 공동체에서 기본적인 반성폭력 내규조차 토론되기 어려워지는 대학의 모습과 마주하고 있는 지금,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페미니즘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시금 페미니즘을 ‘공동체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언어’로 만드는 것이다. 페미니즘을 고민하는 것이 몇몇 주체들의 몫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논쟁과 토론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하며 대학사회에 정치를 복원하기 위한 집단적 저항의 키워드로 페미니즘을 세워내자!


3. 페미니즘이 집단적 저항의 언어가 되기 위하여

대학사회에 페미니즘이 왜 필요한지를 설득할 수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시작할 수 없을 것이다. 왜 대학사회가 페미니즘으로 재구조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는지 스스로에게 되물어보자. 페미니즘을 고민하지 못하는 공동체는 어떤 구성원에게 불합리하거나 폭력적인 상황이 생겨도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거나 인지조차 할 수 없게 된다. 대학사회는 사회의 구조와 지배적인 문화가 투영되는 공간이기에 사회가 ‘정상’이라고 이야기하는 남성 중심적인 문화를 고스란히 받아 안게 되며 그것은 결국 배제되는 사람들을 낳을 수밖에 없게 된다. 페미니즘을 공동체가 작동할 수 있게 만드는 연료, 즉 ‘보편적인 윤리’로 만들지 못하면 여성과 남성의 차이가 고려되지 못한 채 남녀의 평등이 관념으로만 남아서 오히려 차별을 은폐하는 결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차이를 고려하지 못하는 공동체에서는 권력을 가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확연히 구분되고, 사람들이 관계 맺는 방식이 누군가에게는 억압이 될 수도 있고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공존할 수 있는 구조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페미니즘이다. 성적 차이로 인해서 차별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누군가에게 폭력이 되는 공동체(사회)를 바꿔내기 위해서는 다양하고 끈질긴 실천들이 필요한 것이다.
사회가 분명히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대학생들이 페미니즘을 보편적인 권리로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운동을 기획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에 다시금 페미니즘이라는 화두를 던지고 거기에 뛰어들어 적극적으로 논쟁하는 것이 필요하다. 페미니즘을 공동체의 보편적인 운영 원리로 만들기 위해서 지금 당장 나의, 우리의 공동체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실사하고 분석하여 함께 대안을 만들어가야 한다. 또한, 반성폭력 운동의 한계를 말했던 것이 이제는 반성폭력 운동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면 구체적으로 공동체의 상황과 구성원들의 인식 양태를 분석하여 지금 시기에 필요한 실천을 기획할 수 있어야 한다. 학생회 자체가 이것을 추동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사회에서 ‘꿀벅지’와 같은 쟁점이 형성될 때 이를 대중적인 논쟁의 장으로 끌고 나올 주체가 없고 공간이 없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공동체의 페미니즘적 재구성’은 페미니즘이 발언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공간과 주체가 유실되었기 때문에 학생회를 통해 페미니즘을 공동체의 윤리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내에서 성폭력이 일어나지 않게 만드는 것은 성폭력 상담소가 아니라 결국에는 공동체가 어떠한 원리로 운영되는가에 달려있다. 대학사회가 페미니즘으로 재구성될 수 있기 위해서는 이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논쟁을 촉발시킬 수 있는 주체가 필요한데 학생회가 이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3-1. 반성폭력 운동의 목표를 재설정하자: 공동체에서 논쟁을 다시 시작하자!

그간 대학 페미니즘은 기존의 인식을 깨뜨리는 성정치 담론과 반성폭력 운동의 실천으로 대학사회에 변화를 일으키며 발전해왔다. 사회적으로 금기시 되던 성폭력의 문제를 대학사회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발언하며 학내 구성원들과 함께 운동을 만들어 왔던 페미니스트들의 전성기는 학생운동이 수세기에 접어들면서 함께 소멸되어갔다. 반성폭력 운동의 성과라고 할 수 있는 반성폭력 규약/학칙은 그 자체만으로 성과가 아니라,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그것이 왜 필요하고 어떤 것들을 담으려고 하는지를 설득하기 위한 치열한 고민이 있었고 그로 인해 구성원들의 기존 사고방식을 깰 수 있었기 때문에 성과인 것이다. 그런 고민들이 확장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페미니즘이 대학사회에 제시해 왔던 담론과 정책들-예를 들어 반성폭력 학칙이나 여학생 휴게실 등-이 이제 더 이상 대학사회를 변화시키는 대안으로 인식되지 못하고 단지 학칙이나 제도로서 금지주의적이고 처벌주의적인 방식으로 인식된 것이라고 우리는 평가해왔다.
지금 대학사회에서 정치를 복원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공동체의 논쟁을 다시 살리는 것이다. 과거 대학사회에서 사람들이 성폭력이라고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을 성폭력이라고 이름 붙이는 과정은 얼마나 충격적이고 논쟁적이었겠는가. 지금의 문제는 페미니즘을 가지고 아무런 논쟁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은 많은 대학에 성폭력 상담소나 여학생 지원센터 등의 공간이 생겼지만 이것은 반성폭력 운동이 제기했던 문제의식들이 학생사회에 남아서 ‘운동’이 되지 못하고 그것의 형태만 학교의 제도로 편입된 것이다. 학교의 성폭력 상담소는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가해자를 징계/재교육하고 피해자를 보호/치유하는 역할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제도 자체가 대중공간에서의 논의를 촉발시키는 역할을 하지는 않기 때문에 제도가 잘 마련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본래의 문제의식을 더욱더 풍부하게 발전시켰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제도들을 한계적이라고만 규정해버릴 수는 없다. 성폭력 문제의 해결이 제도화된 것은 반성폭력 운동의 성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성폭력이 제대로 인식조차 되지 못했던 때에 성폭력을 정의하고 사건 해결의 원칙들을 마련하고 합의하는 것은 당시 반성폭력 운동의 목표였을 것이다. 학칙도 있고 상담소도 학교마다 생긴 현재의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반성폭력 운동의 목표를 새롭게 세우는 것이다.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할까? 
사건이 발생했을 때 잘 처리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지만 이것 자체가 운동이 될 수 있는 조건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반성폭력 운동은 단지 성폭력 사건이 우리의 눈앞에서 사라지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단지 사건을 잘 해결하는 것만도 아니다. 공동체의 어떠한 인식구조가 성폭력을 발생시키는지 분석하는 것이고 이것을 위해서는 학습과 논쟁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과/반/동아리에서 새내기 여학생이 으레 연애의 대상으로 보여 지는 상황들이 우리의 공동체에는 없는지, 대학생들이 연애를 바라보는 관점은 어떠한지, 성차를 고려하지 않는 공동체의 문화는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등을 점검해보고 실태에 맞는 실천들을 기획해보자. 이런 과정이 없으면 크고 작은 성폭력은 언제나 발생할 것이고 사람들은 어쩌면 그것을 인지조차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내 주변의 조건을 바꾸는 운동, 공동체에 논쟁을 제기하고 거기에서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주체화될 수 있는 반성폭력 운동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현재 반성폭력 운동의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3-2. 노동권을 페미니즘의 원리로 재구성하자

우리는 현재 여성들의 불만이 어디에서 시작하는지를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사람들에게서 노동권을 박탈하고, 여성에게 남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권의 박탈이 성별화된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는 것은 가정과 일터 모두에서 여성을 착취하는 성별 분업과 가족 이데올로기의 도움 없이는 지속될 수 없는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보다 적극적으로 대학사회 안에서 밝혀가자는 것이다. 여성들의 불만 지점이 취업과 외모라고 해서 ‘면접 때 먹히는 메이크업 강좌’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말이다. 여성들의 불만이 신자유주의가 규정하는 문제들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면 이것에 대한 우리의 대안은 여성들이 노동할 수 있는 권리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신자유주의가 가속화되면서 대학사회 내에 침투해 있는 이데올로기는 대학 간, 계급 간 다양한 형태로 분할되면서 여성이라는 자체만으로 동일성을 형성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여성들만이 가질 수 있는 피해감을 중심으로 전개했던 예전의 페미니즘 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분할되어 있는 지금 시대의 여대생들의 삶에 침투하여 신자유주의가 야기하고 있는 여성발전담론 등과 같은 이데올로기와 대립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시대의 보편적 권리로서 노동권을 제기하고, 불안정노동이 일반화되는 가운데 그것이 여성들에게 차별이 되어 돌아오는 이유가 신자유주의 때문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이에 대한 집단적인 저항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다 명확히 제기하는 것이 2010년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을 주체화할 수 있는 페미니즘의 핵심이다. 집단적 저항을 위한 여성들의 무기는 그때그때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한 개별적인 불만 표출이 아니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페미니즘으로 재구조화하고 공동의 대안을 고민하는 것이다.

4. 정책적 제안

4-1. 여성 노동권 적극적으로 발언하자!

여성의 노동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여성에게 일과 가정 모두를 책임져야 한다고 강요하는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폭로하자. 시대가 변함에 따라서 변해왔던 가족의 역사를 분석하며 가족이 내포하는 체제의 모순과 성적 차이에 기반한 차별이 역사적으로 어떠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왔는지를 보는 것도 지금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할 것이다.
또한 투쟁하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의 싸움에 연대하며 학생사회에 알려내자. 경제위기가 지속되면서 해고가 만연해졌고 여성들은 경제위기의 공격을 가장 먼저 받게 되었다. 기업이 어려워 해고를 선포하면 가장 먼저 해고되어 가정으로 돌려보내지는 것이 여성이지만 전반적으로 노동이 불안정해지면서 여성도 일하지 않으면 생계를 꾸리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여성들은 또다시 임시직 같은 불안정한 일자리로 내몰린다. 이렇듯 여성의 노동권이 불안의 악순환 속에 놓여 있음을 발언하며 여성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여성 스스로의 힘으로 가능하며 이것은 타자에 대한 시혜가 아니라 상호 동시적인 해방을 향한 ‘연대’로 가능함을 이야기하자.
취업 문제로 자신감을 잃어가는 여성들에게 이러한 현실은 개인의 노력으로 돌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에 강조점을 찍자. 여성의 문제에 포커스를 맞추어 경제위기를 풀어내는 기획도 시도해볼 수 있다. 학생회에서 단위의 여학생들이 취업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고 어떤 부분에서 어려움을 느끼는지 등을 조사하고 모여서 포럼과 같은 형식으로 여성의 노동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인식되는지 현실을 함께 되짚어보는 등의 계기를 통해 ‘취업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노동의 권리’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획들을 다양하게 시도해보자.       

4-2. 페미니즘 스쿨을 통해 공동체에서 페미니즘을 말하자!

페미니즘은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고 인식 구조를 변화시키는 운동이기 때문에 당위적인 언어만으로는 변화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공동체에서 페미니즘을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대중들이 지금의 공동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먼저 아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문제의식이 중단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렇게 페미니즘을 고민할 수 있는 토론의 장을 열고 대중들이 처한 상황과 인식 양태에 맞는 언어와 실천을 발굴하는 것이 현재 학생회의 역할이다. 페미니즘 스쿨과 같은 기획을 통해 공동체의 페미니즘을 진단하고 고민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자. 단위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드러내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개별적이고 분절적인 감정들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학생회에서 단위의 상황을 분석할 수 있는 설문조사를 진행하고 이를 토대로 프로그램을 기획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감정을 교류하거나 공동체의 지배적인 문화를 변화시키는 실천 외에도 페미니즘을 학습할 수 있는 기획도 꼭 필요하다. 페미니즘의 역사나 여성노동권에 대해서 학습할 수 있는 공부방을 기획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사전에 기획단을 구성하여 페미니즘으로 주체화될 수 있는 경로를 확장하는 계기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4-3. 공동체의 반성폭력 자치규약을 재개정하자!

반성폭력 자치규약을 가지고 있는 단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단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규약이 수년간 토론되지 못하여 지금의 상황을 잘 반영하지 못하는 규약이 되거나 구성원들에게 그 필요성을 인정받지 못 하는 경우가 많다. 설문조사를 통해서 여성들이 불편하게 느끼는 성폭력이 무엇인지, 그리고 남학우들을 대상으로 기존의 자치규약에서 느끼는 것들이 무엇인지 등을 조사해서 규약을 재개정 해보는 것이 공동체에서 페미니즘을 발언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반성폭력 내규는 새터나 현장활동을 떠나기 전에 ‘확인’하는 것이 전부였다면 주체들의 논의로 한정시키지 말고 대중적으로 논의할 수 있도록 기획해보자. 현장활동 주체학교를 열어 현장활동에서 왜 페미니즘을 고민해야 하는지 토론해볼 수 있을 것이고, 새터를 떠나기 전에 2학년들을 모아 새내기들에게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이유와 어떤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을지 토론하는 것도 좋다. 이를 단위의 반성폭력 규약을 만들거나 재개정하는 흐름으로 이어가보자.   

4-4. 성폭력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기획해보자!

최근 아동 성폭력 사건이 이슈로 떠오르면서 극단적 성폭력을 어떻게 예방할 수 있으며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되고 있다. 그러한 논쟁이 가해자 처벌 법안을 강력하게 개정하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문제라고 앞서 지적한 바 있다. 학교 근처 자취방들이 모여 있는 지역에서 “성폭력 없는 00동” 캠페인을 기획해보자. 최근 들어 부쩍 젊은 여성이 납치되는 사건이나 대학 근처 자취촌에 강도강간 사건이 많이 보도되고 있는데, 가로등이 없거나 인적이 뜸한 골목길이 여성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설명하는 전단지나 스티커를 만들어 골목마다 붙여놓을 수 있겠다. 학생회가 주민들과 만나서 가로등이 없는 골목에 가로등을 설치하는 문제를 이야기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캠페인의 과정과 결과를 게시하여 단위에 문제의식을 환류시키는 것도 잊지 말자. 
이런 사업이 뜬금없이 골목에 전단지를 붙이거나 비/반권의 여성 정책처럼 단지 가로등을 설치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이 사업을 왜 하는 것인지 설득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여성의 몸에 대한 폭력으로서의 극단적 성폭력이 왜 발생하는 것이고, 그것이 발생하지 않게 만들려면 사회적으로 여성이 성적 대상화 되는 문제나 폭력의 대상이 되는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겠다.

Posted by 행진

2009/11/24 13:14 2009/11/24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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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지환 2009/11/25 07:26 # M/D Reply Permalink

    매우 주관적이고 편파적인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꿀벅지 논란’과 관련하여 말씀드리자면, 성희롱이라는 것은 명백한 범죄행위이며, 범죄행위는 법률에서 규정하는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행위이어야 합니다. 현행 법률에 따르면 성희롱은 친고죄에 해당합니다. 즉 피해자가 가해자의 행동에 대해 불쾌감을 느껴 이에 대한 처벌을 호소했을 때에야 비로소 성희롱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꿀벅지 논란’의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여성 연예인들 중 어느 누구도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았고, ‘꿀벅지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유이 양의 경우 오히려 자신의 외모를 높이 평가해준 네티즌들에게 감사를 표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꿀벅지’라는 단어의 사용을 성희롱이라 섣불리 단정 짓는 것은 오히려 성희롱이 가지고 있는 범죄성을 희석시킬 수 있는 경솔한 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부도 이와 관련해 “피해 당사자가 인권위에 제기해야 할 개인적인 문제”라는 유권해석을 내린 것입니다.
    다만 이것이 여성의 신체에 대한 ‘대상화’라는 데에는 동의하며, 따라서 양성평등의 입장에서 이를 비판하는 데에는 저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최근 시끄러웠던 ‘루저(looser) 논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남성 역시 경제적 능력, 사회적 지위, 성적(性的) 능력, 신장 따위를 기준으로 자신의 인격을 평가받으며 ‘대상화’되어왔다는 사실입니다. 즉 여성주의자들이 ‘가부장제’, ‘남성 중심적 사회’라고 일방적으로 단정 지은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 하에서 ‘대상화’되어 온 것은 비단 여성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성 고용 불평등을 논함에 있어 여성이 겪어온 불이익만을 일방적으로 문제 삼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라는 것은, 제가 이곳 자유게시판을 통해 누차 지적한 문제입니다. 윗글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남성을 ‘1차적 가족부양자’로 여기는 성별 이데올로기가 팽배해있고, 그로 인해 남성은 여성보다 긴 근로시간과 무거운 가족부양의 책임에 짓눌려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더 무거운 책임을 부담하고 있는 남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에게 동등한 고용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뉴스클리핑 게시판에 올린 게시물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조차 자신보다 더 나은 조건의 상대를 택하는 남고여저(男高女低)의 결혼을 고집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경제력을 갖추면 남성을 억압하는 남녀문화가 저절로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입니까? 전국학생행진은 여성이 ‘일과 가정에서의 양립’을 강요받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것은 여성에게 지워지는 가족부양의 책임이 여전히 남성의 그것보다 훨씬 가볍다는 사실을 외면한 불합리하고 편파적인 주장입니다. 결국 전국학생행진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름없는 구태의연한 주장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자유게시판에 올린 글「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2. 먼소린지 2009/11/27 01:31 # M/D Reply Permalink

    두번째 문단에서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더 무거운 책임을 부담하고 있는 남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에게 동등한 고용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말입니까? " 당연한거 아닙니까? 고용의 기회는 성별이 아니라 능력의 차이를 근거로 주어져야 하는것 아닙니까? 너무 당연한것을 아니라고 주장하시네요.

    그리고 당신 말대로라면 오히려 더 여성에게 고용의 기회를 많이 줘야 할텐데요. 그래야 당신이 말하는 남성이 생계를 책임지는 사회에서 벗어날테니까요.
    참고로 전 남성입니다.

  3. 먼소린지 2009/11/27 01:35 # M/D Reply Permalink

    좀 징징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사회에서 가정의 생계를 남성이 책임지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은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여 취업의 기회가 남성에게 우선적으로 있어야 하는것은 아닙니다. 왜 그래야 되는데요?

    학연 혈연 지연 그런것들을 타파하고 오로지 능력과 인성이 평가의 잣대가 되어야 그게 정상적인 사회인것이지. 남성이 가장인 경우가 많다고 하여 남성에게 우선적으로 취업-고용 기회를 주자니요? 아니 뭐 직장이 남성 동호회인가요?

    1. 한지환 2009/11/27 07:45 # M/D Permalink

      귀하의 주장대로라면, “똑같은 권리와 기회가 주어진 사회구성원임에도 불구하고, 왜 남성이 여성보다 더 무거운 책임과 의무를 부담해야 하는가?” 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족부양의 1차적 책임을 강요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남녀 불평등이며 남성 억압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 하에서 남성이 누렸던 권리는 그들이 부담했던 각종 책임과 의무의 반대급부였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남성 억압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 없이는 여성 억압도 근본적으로 개선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외면하기 때문에 기존의 페미니즘이 ‘절름발이’라는 비난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지적에 대한 답변은 그동안 여러 차례 지적한 줄로 압니다. 여성에게 보다 많은 고용의 기회를 보장하여 여성의 경제력이 증대하면, 남성이 자연히 전통적인 책임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남성해방의 정의를 오해하신 것 같은데, 남성해방이라는 단순히 ‘맞벌이’를 통해 가족부양에 대한 남성의 부담이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남성해방이란, 말 그대로 남성이 전통적인 성별 이데올로기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피부양자’에서 ‘단독 가족부양자’에 이르기까지 원하는 성역할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나아가 그에 따른 책임의 분담을 상대 이성(異性)에게 요구하는 것을 뜻합니다. 귀하의 말씀대로라면,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조차 자신보다 더 나은 조건의 상대를 택하는 남고여저(男高女低)의 결혼을 고집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오늘날 대다수의 여성들이 자신보다 우월한 제반조건을 갖춘 남성만을 배우자감으로 고려하는 이유가, 단순히 그들이 먹고 살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결론적으로 말해, 남성을 1차적 가족부양자로 간주하는 남녀문화가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한, 물질구조의 개선만으로는 남성해방은 물론 진정한 양성평등을 이룰 수 없습니다. 남성 억압과 여성 억압은 물질구조라는 좁은 틀에서 벗어나, ‘문화’라는 보다 거대한 틀 속에서 해석해야 하는 문제라는 것이지요. 귀하의 주장은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를 여성의 시각에서만 해석하며 남성 억압을 여성 억압의 부산물 정도로 여기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에 따른 오류일 뿐입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제가 쓴「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왜 남의 글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은 채 함부로 이야기를 하십니까?

  4. 먼소린지 2009/11/27 14:00 # M/D Reply Permalink

    남성해방이라니요? 이 무슨 허튼소리입니까?

    노동해방 민족해방 이라는 구호가 전제하는것은 각자가 대상으로 하는 집단이 피억압 상태라는것을 전제로 합니다. 노동자계급은 자본가계급에 의해서, 피억압 민족은 제국주의에 의해서, 억압당하고 착취당하기에 해방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남성해방이라니요? 남성은 여성과 마찬가지로 단일한 집단이 아닙니다. 남성중에는 자본가도 있고 용산 철거민도 있지요. 여성도 마찬가지고. 따라서 남성해방이라는건 개념상 존재할수 없습니다. 여성해방도 마찬가지입니다. 있다면 여성 노동자 농민의 해방 이 있는거지요.

    실제 사회에서의 억압, 차별, 착취 구조를 보지 못하고 그것을 보려고 하는것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는것이 남성학의 목적인가보지요? 참 대단합니다.

  5. 먼소린지 2009/11/27 14:01 # M/D Reply Permalink

    그리고 남성이 생계를 부담하는 이유가 많은것은 남성에 대한 차별이 있어서가 아니라 여성에 대한 차별이 있어서입니다. 말은 똑바로 하셔야지

    그동안 여성들이 사회로 진출할 권리가 오랜시간동안 부정당해왔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시간이 흐르니 당연히 남성이 생계를 더 많이 부담하는거 아닙니까?

  6. 먼소린지 2009/11/27 14:02 # M/D Reply Permalink

    아 실수 모르고 열폭남성들의 허튼소리를 '남성학'이라고 해버렸네
    남성학은 무슨 개뿔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도 남자입니다.

    1. 한지환 2009/11/27 16:08 # M/D Permalink

      이야기를 나누기에 앞서「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을 읽어달라고 말씀드린 이유는, 귀하께서 남성학(男性學, Men's Studies)과 남성운동(男性運動, Men's Movement)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남성학과 남성운동은 1970년대 미국에서 처음 시작된 사회적 움직임으로, 남성운동의 여러 노선 가운데 제가 몸담고 있는 노선은 자유주의적 관점의 남성운동입니다. 자유주의적 남성운동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이분법적인 틀, 즉 전통적인 남녀관계를 억압 및 착취의 관계로 바라보며 남성을 ‘억압자 및 착취자’로, 여성을 ‘피억압자 및 피착취자’로 해석하는 근시안적이고 편협한 틀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움직임이지요. 다시 말해, 그동안 주목되어 왔던 피해자로서의 여성의 모습은 물론, 전통사회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피해자로서의 남성의 모습, 그리고 수혜자로서의 여성의 모습까지 주목하는 남성운동 노선입니다.

      가족부양의 책임을 비롯한 남성 억압이 여성 고용 불평등을 비롯한 물질적인 영역에서의 여성 억압의 부산물일 뿐이라고 주장하셨는데, 귀하의 말씀대로라면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경제력을 갖추게 되면 가족부양에 대한 남성의 부담은 자연히 사라져야 합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조차 자신보다 더 나은 조건의 상대를 택하는 남고여저(男高女低)의 결혼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빈부 차별과 학력 차별의 희생자로,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경제적 여건이 열악한 저소득층 남성들(농어업 종사자, 단순노무직 종사자, 중소기업체 근로자, 하위직 공무원 등)의 상당수가 아무런 경제적 기반이 없는 개발도상국 여성들과 결혼해 가족부양의 1차적 책임을 부담하고 있음에도 말이지요. 귀하의 말씀대로라면,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오늘날 대다수의 여성들이 자신보다 우월한 제반조건을 갖춘 남성만을 배우자감으로 고려하는 이유가, 단순히 그들이 먹고 살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귀하의 주장은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를 여성의 시각에서만 해석하며 전통적인 남녀관계를 억압 및 착취의 관계로만 바라보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에 따른 오류일 뿐입니다. 물론 우리 사회의 남녀문화와 관련해 여성들의 경제적 여건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기는 하나, 그것만으로는 남녀문화 전반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시다면, 우선 저의 글을 찬찬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7. 먼소린지 2009/11/27 20:36 # M/D Reply Permalink

    먼저 "학" 자 붙인다고 해서 아무거나 학문이 되지 않는다는 점 부터 말하고 싶습니다. 남성을 착취자, 여성을 피착취자 라고 보는것에서 벗어난다고 하는데 그렇게 보는거나 역으로 보는거나 다 허튼소리 아닌가요?

    이해하지 못하는게 아니라 관심조차 가지고 싶지 않습니다.

    남성은 착취자 혹은 피 착취자 여성은 착취자 혹은 피 착취자 이런것은 성립될수 없습니다. 그러한 관점은 남성주의든 여성주의든간에 현실에서 일어나는 억압과 착취를 은폐하고 대중의 인식을 오도하는것입니다.

    그리고 "남고여저" 현상이라고 하는데 높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조건과 동등하거나 상대적으로 높은 조건을 가지고 싶은 사람과 혼인하려고 하는것은 남자든 여자든 차이가 없습니다.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사실관계 자체가 그러하다는 겁니다. 다만 여성의 경우가 더 심한것은 제가 앞서 말한것처럼 오랜시간동안 고용의 불평등 각종 기회의 불평등으로 인해 조성된 차별에 기인하는것이지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경제력을 가진다구요? 개별적인 사례가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말입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지요.

  8. 먼소린지 2009/11/27 20:39 # M/D Reply Permalink

    남자는 밖에 나가서 돈을 벌고 여자는 집안일을 한다.

    아직도 이런 인식이 광범위하고 한국사회에서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뭐지요? 오랜시간동안 여성에 대한 차별(이것이 억압이나 착취라고는 볼수없슴)이 있어왔기 때문아닌가요? 그리하여 사회가 기형적으로 성장하였기 때문에 님이 말하는 남성생계 어쩌고 저쩌고 하는 현상이 있는거지요.

    님의 얘기를 보면 마치 성차별이 없는 사회에서 억지로 성차별 담론을 들고 나온다는거 같습니다. 성차별이라는것이 전혀 없는 사회에서 남성이 생계를 부양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 때문에 남성이 억압당한다? 허튼 소리의 연속입니다.

    1. 한지환 2009/11/28 07:40 # M/D Permalink

      한 편으로는 여성이 억압과 착취를 당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여성이 일방적으로 차별을 받아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 아닐까요? 여전히 자유주의적 남성운동과 관련된 기본적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은데, 전통적인 남녀문화는 여성을 일방적으로 억압하거나 착취한 것이 아니라 남녀에게 각자 정해진 성역할만을 강요하고 그에 따른 반대급부를 제공했으며, 따라서 남녀 모두는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의 피해자임과 동시에 수혜자라는 것이 자유주의적 남성운동가들의 공통된 주장입니다. 즉 전통사회에서의 여성 억압은 남성 억압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는 문제이며, 따라서 이를 여성에 대한 일방적인 차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시장의 동향에 대해 잘 모르고 계신다는 생각이 듭니다.「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에서 소개한 참고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남성은 일반적으로 배우자의 경제력이 자신보다 높은 것을 특별히 선호하지 않으며, 오히려 꺼려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는 결혼정보회사 듀오가 최근 주간동아, 한국경제신문과 함께 실시한 조사결과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맞벌이를 원하는 남성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면 여전히 남성은 배우자의 경제력과 관련해 여성과는 정반대되는 양상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남녀 각자의 제반조건과 상관없이 대다수 사회구성원들이 남고여저(男高女低)의 결혼을 당연시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지요. 이는 결혼정보회사 선우의 대표이사이자 한국결혼문화연구소 소장인 결혼문화 전문가 이웅진 선생도 지적한 내용입니다.
      남성들은 자신의 제반조건과 관계없이 여고남저(女高男低)의 결혼을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왜 여성들은 자신의 제반조건과 무관하게 남고여저의 결혼을 고집하는 것일까요? 나아가 귀하의 말씀처럼 전통적인 남녀문화가 여성을 일방적으로 차별해온 것이라면,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경제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은 스스로 차별의 굴레를 선택했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러한 것을 물질구조라는 좁은 틀 속에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것은 ‘문화’라는 보다 큰 틀 속에서 설명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귀하께서 생각하시는 바와 달리, 저는 여성 억압의 존재를 결코 부정하지 않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우리 사회의 남녀문화와 관련해 여성들의 경제적 여건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데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남녀문화 전반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제가 주장하려는 바입니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어난다 해도, 남성을 억압하는 남녀문화가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한, 남성은 가족부양의 부담에서 해방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남성해방과 여성해방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남성이 전통적인 책임에서 해방되지 못한다면 여성해방도 결국에는 걸림돌에 걸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9. 먼소린지 2009/11/28 12:37 # M/D Reply Permalink

    착취와 차별의 개념은 다른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부연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이 정도 구별을 못하시면 논쟁을 하실 자격이 없습니다.

    한 사회의 문화, 사상은 물질구조에 기반을 둡니다. 물질구조와 무관한 사상, 문화는 없습니다. 한지환씨가 말하는 현상들은 남녀차별이 고착화된 사회, 그런 기형적인 사회에서의 현상으로 이해해야 하지 그런 사회적 기반과 무관한 문화라고 하는것은 허튼소리의 연타일뿐입니다.

    1. 한지환 2009/11/28 17:16 # M/D Permalink

      물론 차별과 착취가 다른 단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귀하께서 내세우시는 마르크주의 페미니즘에서는 여성 차별을 곧 여성에 대한 경제적 착취로 간주합니다. 즉 귀하께서 이 둘을 따로 구분해서 이야기하시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질생활의 생산양식이 인간의 존재를 일방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은 이른바 ‘실패한 실험’인 마르크시즘의 오류일 뿐입니다. 이러한 마르크시즘을 남녀관계에 무리하게 적용하려 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으로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물론 남녀문화와 관련해 경제적 여건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기는 하나, 이것만으로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저의 주장에 동의하기 힘드시다면, 저의 질문에 대답해주시기 바랍니다. 귀하의 말씀대로 가족부양의 책임을 비롯한 남성 억압이 여성 억압의 부산물일 뿐이라면, 앞서 말씀드린 우리 사회의 결혼양태를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10. 먼소린지 2009/11/28 19:14 # M/D Reply Permalink

    마르크스주의적 페미니즘? 내 댓글 어디에 그런 말이 있나요? 한지환씨가 저한테 씌우려는 올가미일뿐이지 난 한번도 내가 마르크스주의적 페미니스트라고 한적이 없는데요? 마르크스주의적 페미니즘이라는게 성립될수있는지 그 여부도 모르고 그러한 관점이 여성에 대한 차별을 착취라고 보는지 모르나 나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풍차를 괴물이라고 외치며 돌진하는 돈키호테를 보는거 같군요.

    물질생활의 생산양식이 인간의 존재를 일방적으로 결정? 내가 언제 그렇게 얘기했나요?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고 했지. 아마 님이 말하는건 하부구조 상부구조 얘기인거 같은데 이게 언제 실패하였지요?(그리고 이 분석에 왜 실패라는 용어를 갖다 대는지? 굳이 따진다면 맞냐 틀리냐 이런 얘기 여야 하는거 아닌가?) 소련이 실패해서? 소련의 실패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교조 때문이 아니라 일탈 때문이지만 그런건 차치하고서라도 소련이 실패했다고 해서 마르크스주의가 부정당할 필요는 없는데요?

    소련이 실패했기 때문에 이론으로서 학문으로서 마르크스주의도 자동적으로 폐기된다는 그런 주장은 역시 허튼소리의 연속입니다.

    마지막으로 님의 질문에는 이미 대답했잖아요.

    제 댓글을 다시 보세요. 이해를 못하시나?

  11. 먼소린지 2009/11/28 19:23 # M/D Reply Permalink

    님과의 논쟁은 이 댓글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먼저 저는 전국학생행진과 어떤 연계도 없습니다. 아마도 한지환씨는 전국학생행진을 마르크스주의적 페미즘에 기반을 둔 집단으로 규정하고 댓글을 다는 나를 그렇게 본거 같지만 내가 그렇게 주장한바 없고 철저하게 님의 편견과 착각일 뿐입니다.

    착취와 차별은 다르기에 나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여성에 대한 착취를 동일시 한적이 없습니다. 님이 모순이라고 주장하는것 역시 언제까지나 님의 착각일뿐입니다.

    소련 실패의 문제에 있어서는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소련 실패가 마르크스주의의 일탈로부터 비롯된것임을 설득력있게 논증하고 있는 책이니 한지환씨의 소련에 대한 무지와 오해가 풀릴수있을꺼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와 별개로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규정하는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으시다면 그에 대한 반론을 내세워야지 소련 실패 운운해서는 안될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수차례 설명하였지만 님이 의기양양하게 내세운 남고여저 라는 현상도 결국은 "남자는 돈벌고 여자는 집안일 한다" 라는 인식이 사람들 머리속에 있기 때문인데 그건 왜 그렇습니까? 여성에 대한 차별 때문에 사회가 기형적으로 성장하였기 때문 아닙니까? 이해가 안되시나요?

    1. 한지환 2009/11/28 23:20 # M/D Permalink

      귀하께서 옹호하시는 마르크시즘으로 남녀의 역학 관계를 해석하는 것이 바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입니다. 이 둘을 별개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덧붙여서, 귀하께서 생각하시는 ‘차별’과 ‘착취’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현실에서 마르크시즘이 실패했다는 것은 비단 저 혼자만의 주장이 아닙니다. 인간은 경제적 요소만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은 동구와 소련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체제의 붕괴를 통해 이미 입증되었습니다. 물론 마르크시즘 이론이 가지고 있는 역사 이론으로서의 가치는 부정하지 않지만, 이를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려 드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태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말과 ‘물질생활의 생산양식이 인간의 존재를 결정한다’는 말은 기본적으로 같은 의미입니다.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분이 이런 말조차 이해하지 못한다니 당혹스럽군요. 아울러 앞으로 글을 쓸 때는 ‘무지’, ‘오해’ 같은 극단적인 표현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이 분야와 관련된 지식은 제가 귀하보다 결코 못하지 않을 것입니다.

      귀하께서「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을 읽어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는 남성에게 ‘이성(異性)을 보호할 책임’을 부여했고, 남성에게 지워지는 가족부양의 책임은 이러한 책임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귀하의 주장과 달리, 여성 차별의 결과 남성이 전통적인 책임을 부담하게 된 것이 아니라, 남성의 전통적인 책임 자체가 전통적인 성별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여성에 대한 차별로 인해 사회가 기형적으로 성장하였기 때문에” 남성이 가족부양의 책임을 강요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를 원하신다면 워렌 패럴 박사의『남자 만세(Women Can't Hear What Men Don't Say : Destroying Myths, Creating Love)』와 조지 L. 모스 박사의『남자의 이미지(The Image of Man)』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족을 부양하기 충분한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이 남고여저(男高女低)의 결혼을 고집하는 현실을 귀하의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느냐는 저의 질문에 대해, 귀하께서는 제대로 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답을 하기는 했으나 적절한 답이 아니었지요.
      ‘자신보다 제반조건이 우월한 배우자를 원하는 것은 남녀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귀하의 주장에 대해서는 근거자료를 제시하여 반박했습니다. 결혼시장에서 자신보다 제반조건이 우월한 배우자를 원하는 현상은 남녀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결코 아닙니다. 남녀 각자의 제반조건과 관계없이 대다수 사회구성원들은 남고여저의 결혼을 선호하고 있지요.
      또한 이것이 ‘물질적 영역에서의 남녀 불평등 탓’이라는 주장은 애당초 성립할 수 없습니다. 평범한 서민 여성들만 놓고 보았을 때에는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나, 평범한 서민 남성들 이상의 제반조건을 갖춘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이 남고여저의 결혼을 고집하는 것을 경제적 여건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귀하의 생각과 달리, 그들이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서’ 남고여저의 결혼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이 남고여저의 결혼을 고집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귀하의 말씀대로 단순히 여성 고용 불평등 때문에 남성이 가족부양의 1차적 책임을 부담하게 된 것이라면,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의 대다수가 남고여저의 결혼을 고집하는 현상은 일어날 수 없는 현상입니다. 또한 전통적인 남녀문화가 여성을 일방적으로 차별해온 것이라면,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경제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은 스스로 차별의 굴레를 선택했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물질구조라는 좁은 틀 속에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문제이며, 그렇기 때문에 남녀문화라는 보다 큰 틀 속에서 설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추신 : 읽어달라고 부탁드렸던 저의 글은 제대로 읽어보셨습니까?

  12. 먼소린지 2009/11/28 23:19 # M/D Reply Permalink

    1.

    경제적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고 할때의 상부구조는 이데올로기적, 철학적, 문화적, 기타 등 ,경제적 기반으로 부터 생기는 여러 구조물을 의미합니다. 당췌 한지환씨가 말하는 '인간의 존재' 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한지환씨는 제가 적은 구절을 어디선가 본듯하나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 멋대로 적으신거 같습니다. 책의 구절이나 문구를 정확하게 외워야 할 의무같은것은 없기에 트집 잡힐일은 아니나 그러면서 본인이 무지하지 않다고 주장하는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이처럼 문구 하나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한지환씨가 마르크스주의를 재단한다는것은 그냥 코메디입니다. 물론 누구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찬반을 얘기할수 있으나 옳으냐 그르냐 적합하냐 부적합하냐를 논하는건 아무나 해서는 안되지요.

    (그리고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할때 상부구조가 하부구조에 영향을 미칠수 있음을 맑스는 염두에 두었습니다. 한지환씨의 '일방적' 이라는 말 역시 무지로 인해 비롯된 오해인것입니다.)

    2.

    한지환씨 말처럼 소련의 실패를 마르크스주의의 실패와 동일시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한국에서도 언론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조중동 이하 극우언론을 비롯하여 각 대학의 교수들까지 그런 논리를 설파하고있는 사람은 한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공주의자들의 시야협착증일따름입니다.

    무엇보다 소련의 패배의 원인에 대해서 공부를 하시고 '시대착오적' 운운하시기 바랍니다. 소련의 패배는 단 한가지 원인으로 인해 발생한 결과가 아닌 만큼 과학적인 연구가 지속적으로 요구되고 있는 사안입니다. 제국주의 국가의 압박과 봉쇄 등과 같은 외적 요인을 제외한 내적 요인으로 설명되고 있는 일명 코시킨 개혁,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에서 일탈한 수정주의-개량주의적 흐름입니다.

    소련을 비롯한 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패배,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배워야할것이 분명히 있을것이고 약간의 변화도 필요할지 모르지만 맑스-레닌주의 자체를 무효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서도 안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한지환씨든 누구든 맑스주의의 무효화를 선언하고 싶다면 보다 새로운 과학적 이론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이론에 근거해 맑스주의를 논파해야 할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말입니다

  13. 먼소린지 2009/11/28 23:25 # M/D Reply Permalink

    3

    한지환씨가 줄기차게 주장하시는 남고여저 현상에 대해서 저는 충분히 제 의견을 밝혔으나 이해하지 못하시기에 쉽게 풀어서 설명드립니다.

    일단 모든 여성이 그러한 경향을 가지고 있는것은 아니라는점부터 전제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분명 그런 현상이 없다고는 할수 없을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것이냐?

    한국사회에서, 아니 비단 한국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성차별이 광범위하게 사회의 구석구석에 존재해왔습니다. 여성의 취업률 등은 그중 하나일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회는 어떠한 사회입니까?

    남성에게 좀 더 많은 고용과 취업, 양질의 일자리를 얻을수 있는 기회 등이 보장된 사회입니다. 여성에게는 그렇지 않고 말입니다. 한국사회는 거기에다가 유교의 잔재까지 남아있어 더 심하다고 볼수 있겠지요.

    그러면 이러한 사회에서는 어떤 인식이 생겨나게 됩니까?

    남성은 일하고 여성은 집안일을 한다 이거 아닙니까?

    이런 사회에서 여성이 자신의 생계를 확실히 보장해줄수있는 남성과 결혼하려고 하는 현상이 생길수 있는거지요. 이까지 이해가 되십니까?

    그리고 한지환씨가 여전히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에 대한 논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걸 알수있는게 생산양식은 좁은것으로 문화는 큰 틀로 주장하시는것을 보고 알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이데올로기 문화 등이 생산양식을 기반으로 하는것인데 말이지요. 이에 대한 이해가 없으니까 양자택일식으로 선택하려 드는거 아닙니까?

  14. 먼소린지 2009/11/28 23:29 # M/D Reply Permalink

    이제 정말 논쟁을 마무리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아주 무의미한 논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무엇보다 남성학이니 남성주의니 하는 학문의 범주에 포함될수 없는 무가치한것들과 목소리를 높이며 싸웠다는 사실이 제 자신을 부끄럽게 할 뿐입니다. 사회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하는 많은 학문이 있습니다. 철학도 그럴것이고 정치학도 그럴것이고 경제학도 그럴것이고 제가 모르는것도 있을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성주의? ....

    ps.

    한지환씨가 읽어보라고 추천해주신것은 하나도 읽지 않았고 하나도 읽을 생각이 없습니다. 진짜 학문을 공부할 시간도 부족한데 가짜 까지 보는것은 저 자신에 대한 자해가 아닐까 해서요.

    1. 한지환 2009/11/29 00:31 # M/D Permalink

      ‘물질생활의 생산양식이 인간의 존재를 결정한다’는 말은 물질생활의 생산양식, 즉 하부구조가 인간 삶의 전반을 결정한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말과 ‘물질생활의 생산양식이 인간의 존재를 결정한다’는 말은 기본적으로 같은 의미라는 것입니다. 저도 뜻을 모르는 말을 함부로 인용할 만큼 경솔한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일방적’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쓴 것은 저의 실수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책에도 ‘물질생활의 생산양식이 인간의 존재를 결정한다’고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귀하께서는 저의 질문을 계속 회피하고 계십니다. 저는 귀하께 평범한 서민 여성들이 아닌, 그들과 전혀 다른 여건에 놓여있는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의 결혼양태에 대해 물었습니다. 생계를 유지할 목적으로 남고여저(男高女低)의 결혼을 택한 서민 여성들에 대해 물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물론 남성보다 열악한 노동환경에 놓여있는 서민 여성들만 놓고 본다면 귀하처럼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의 경우, 그들이 남고여저의 결혼을 고집하는 현실을 물질구조라는 틀 속에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남고여저의 결혼을 고집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자기 자신과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경제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이 남고여저의 결혼을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귀하의 말씀대로라면, 우리 사회의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한 경제적 지위를 갖추게 될 경우, 그들이 자신보다 열등한 제반조건을 갖춘 남성을 배우자로 맞이해 가족부양의 1차적 책임을 부담할 것이라는 말씀입니까? 오늘날 결혼시장의 동향을 살펴볼 때, 그것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기대라는 것이 제가 지적하려는 바입니다. 즉 ‘여성 고용 불평등이 해소된다면 남성도 자연히 전통적인 책임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지금까지 이야기가 계속 겉돌았던 이유는 제가 귀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귀하께서 제가 던진 질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성학과 남성운동을 함부로 폄하하셨는데, 귀하께서 남성학과 남성운동에 대해 얼마나 아신다고 그렇게 함부로 말씀하시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보아하니 사회 이슈를 제대로 다룰 자세가 안 되어 있는 분인 것 같은데, 귀하의 이런 행동은 귀하의 한계를 보여줄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5. 구름 2010/03/09 23:32 # M/D Reply Permalink

    재밌네요 ㅋㅋㅋ
    먼소린지님이 정리 잘 해주신 것 같은데...
    계속 같은 얘기 하시는 듯.

    1. 한지환 2010/03/10 08:01 # M/D Permalink

      먼소린지님과 마찬가지로 듣고 싶은 말만 들으시는 것 같은데, 먼소린지님은 저의 핵심 되는 지적을 계속 회피하셨고 그 바람에 대화가 겉돌았던 것입니다. 남성의 전통적인 책임을 설명함에 있어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이 사회ㆍ문화적 기제로서 이른바 ‘가부장제’라 규정한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를 무시할 경우, 우리 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저의 지적이었습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먼소린지님은 이른바 ‘남고여저’의 결혼문화와 그로 인한 전통사회에서의 남성 억압이 순전히 물질적 구조의 탓이라고 주장하셨고, 저는 거기에 대해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경제력을 갖춘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이 여전히 ‘남고여저’의 결혼을 포기하지 않은 현실을 물질적 구조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반박했습니다. 먼소린지님의 주장은 남녀 간의 물질적 역학관계가 뒤바뀌어 남성이 경제적 책임에서 해방될 경우, 여성을 억압하는 성별 이데올로기 역시 자연히 사라져 그들이 외모지상주의의 굴레나 돌봄 노동의 부담으로부터 저절로 해방될 것이라는 주장만큼이나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는 것이지요.
      덧붙여서 말씀드리자면, 먼소린지님은 ‘문화’라는 것을 예술이나 사상 같은 정신문화에 국한시켜 생각하셨는데, 여기서 ‘문화’는 인류가 이룩해낸 물질적ㆍ정신적 소득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물질문화와 정신문화를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먼소린지님의 주장에 멋도 모르고 부화뇌동하신 것이 아니라면, 귀하께서 먼소린지님을 대신해 저의 지적에 답해주시기 바랍니다. 전통사회에서의 성적(性的) 억압의 원인이 남녀 간의 물질적 역학구조에 있다면, 경제적 측면에서 남성과 대등한 권리와 기회를 누리고 있는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이 여전히 전통적인 결혼양태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또 비록 소수이기는 하나, 가족의 생계를 전적으로 책임지는 여성가구주들이 돌봄 노동의 부담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을 남녀 간의 물질적 역학구조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선특호_각론3] 교육

2010년 대학교육의 쟁점과 투쟁과제


0. 들어가며

현재 대학의 변화는 자본주의 체계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척도이다.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이 가장 빠르고 신속하게 진행된 공간이 대학이었고, 이에 따라 대학에서 배우는 내용ㆍ대학의 운영방식 및 자금조달 체계ㆍ학생들에 대한 통제 방식 등이 변화하였다. 이명박 정권에 들어와서도 대학교육의 변화는 자본과 정권이 추진하는 정책들과 궤를 같이하며 진행된다. 그렇지만 여전히 가장 비판적인 지식을 생산하고 있는 공간 역시 대학이며, 한국사회를 변혁하기 위한 실험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곳 역시 대학이다. 고등교육의 확대를 이뤘던 힘은 단순히 자본주의의 발전만으로 설명할 수 없고, 한편으로는 지식권을 얻고자 했던 민중들의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학이 자본의 이해에 편입되는 경향을 제어하고, 민중들에게 지식을 제공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교육투쟁의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교육투쟁을 만들기 위해서 자본주의와 대학의 본질에 대해서 연구하였고, 신자유주의 시대 한국 대학의 중요한 특징인 대중대학의 설립과 과잉교육-과소교육의 양립을 분석해왔다. 이런 분석을 바탕으로 시민교육을 통해 민중의 지식권을 확장하고, 지적차이를 줄이는 투쟁의 내용을 고민해왔다. 하지만 교육투쟁의 내용을 학생대중들의 불만과 결합하고 상승시킬 수 있는 요구와 대중정책이 부족하였고, 우리의 교육투쟁은 매우 앙상한 수준으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교육투쟁의 내용이 부실해지며 학내 정치활동의 내용과 실천 역시 함께 앙상해졌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2010년대를 맞이하여 지금까지의 교육투쟁을 돌아보고, 대중정치활동으로서 교육투쟁을 만드는 기획이 요구되고 있다.
 

1. 최근 교육투쟁의 양상과 과제

이전까지 학원자율화와 학생자치권력 증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교육투쟁은, 1990년대에 들어와 높은 교육비용의 문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학교본부에 대한 투쟁과 협상으로 이루어졌던 교육투쟁은, ‘개나리 투쟁’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대학인들의 주요한 3-4월 싸이클로 자리 잡게 되었다. 대학인들은 집단적인 저항을 경험할 수 있었고, 대학의 높은 등록금 문제를 전 사회적 이슈로 만들 수 있었다. 한편 3월 말, 4월 초에 배치되었던 ‘대학인 총궐기’와 같은 투쟁은 대학인들이 공동으로 대사회적인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계기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등록금 의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집단적인 저항으로서 교육투쟁은, 이런 방식이 등록금을 낮추거나 동결시키기에 유용한 방법이냐는 의문이 대중들에게서 형성되었다. 즉 학교본부와 합리적으로 협상을 잘 하거나, 높은 등록금을 내는 만큼 질 좋은 교육상품을 소비할 수 있다면 되는 것이 아니냐는 담론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상황은 대학의 자치 공동체들이 파괴되며 집단적인 저항을 경험할 수 있는 골간이 무너지고, 교육투쟁에 소수의 주체들만 나서게 되면서 대중적 투쟁보다는 대학당국으로부터 몇 가지 실리를 얻는데 초점을 맞추게 된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행진에서는 교육투쟁의 방향 전환을 위한 계획들을 세워왔다. 대학의 신자유주의적 교육재편이 한국사회의 불안정 노동과 대학인들의 주체화 양식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하고, 대학의 기업화ㆍ상업화에 대한 문제를 꾸준히 제기해왔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교육담론인 ‘소비자 중심주의’와 ‘학교ㆍ학과 발전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며, 대중들의 이데올로기적 전변을 꾀하려 시도했다. 07년 한미 FTA 반대, 08년 이명박 정권에 맞서는 투쟁의 포문, 09년 경제위기의 민중 책임전가에 맞서는 투쟁으로서 교육투쟁을 만들면서, 정세를 알려내는 투쟁으로서 교육투쟁을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한편 이런 과제를 학내에서 뿐만 아니라, 학생운동 세력들의 공동 교육투쟁 기구였던 교육대책위원회(교대위)에 개입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하지만 행진의 시도는 대학인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바탕으로 한국사회 전체의 모순을 함께 인식하고, 불만을 상승시켜 낼 수 있는 기획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오히려 등록금 사안을 넘어서는 쟁점을 형성하려 했던 우리의 시도는, 대중들에게 ‘등록금 문제를 우회한’ 세력으로서 비춰지기도 하였으며, 이후의 투쟁들과 연결고리를 잘 발견하지 못하였다.
한대련과 같은 세력은 학생운동단체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등록금투쟁을 과제로 설정하였고, ‘등록금 넷’과 같은 시민ㆍ정책 단체와의 공동행보와 정책청원 운동을 중시하게 되었다. 이런 행보 속에서 교대위가 사실상 기능을 정지하였으며, 진보적 교육운동단체가 생산한 정책을 학생들의 대중동원을 통해 관철시키는 전략이 주된 교육투쟁의 흐름이 되었다. 물론 이들의 투쟁이 등록금 문제를 전체 사회적인 이슈로 만들었으며, 당장 대중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대안을 생산하였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교육과 연결된 수다한 쟁점들을 간과하고 등록금 투쟁을 교육운동의 모든 것으로 표상시켰다는 점이나, 입법 가능한 정책대안을 중심으로 교육투쟁이 대중운동을 질곡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는 점도 비판할 수 있다. 한편 대학공간을 무리하게 생산현장과 유비시키며 교육투쟁을 무리하게 노동자 운동과 유비시키려는 세력도 존재하였다.
2010년대 교육투쟁의 방향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우선 대학교육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현황들을 살피고, 이것이 한국사회 전체의 정세와 연결되는 지점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교육투쟁의 방향을 도출하고 과제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이야기가 공허한 외침이 되지 않기 위해서, 실질적인 교육투쟁의 흐름을 만들 수 있는 계획과 실천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학생대중들을 움직일 수 있는 대중정책으로서 교육투쟁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교육투쟁 각론을 통하여 그 가능성을 현실화 시킬 수 있는 방안을 도출해야 할 것이다.
 

2. 대학교육의 현황과 쟁점

○ 이명박 정권 시대 교육부문의 변화와 대학
이명박 정권의 취임 초기에 정권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은, ‘영어 몰입교육’ 파동이었다. 이후 이명박 정권은 초중등 부문에 대해 경쟁과 획일화, 그리고 계층 재생산을 핵심으로 하는 교육부문의 개악을 시도하였다. 전교조 탄압ㆍ교원 평가제 도입ㆍ영어수업 인증제ㆍ일제고사 실시ㆍ자립형 사립고등학교 및 학교 선택제 등의 교육정책은, 초중등 교육에서부터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경쟁을 강화시키고 있다. 2009년에 들어와서는 초중등 교육의 국민공통기본교육과정을 현행 10년에서 9년으로 축소하고, 국민공통 기본 교과 일부와 학기당 이수과목수를 줄이는 것(초교 10→7, 중·고교 13→8개)을 골자로 하는 ‘미래형교육과정’을 추진하고 있다. 대통령은 이를 통해 과외 없이도 대학 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말했지만, 창의성ㆍ다양성이라는 이름 아래 공통교육의 내용을 줄임으로서 오히려 대중들의 과소교육과 지적차이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한편 지난 9월 10일 안민석 민주당 의원이 공개한 교육과학기술부의 '2008 회계연도 16개 시·도교육청별 예산 절감 현황 및 절감 예산 사용 실적'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시ㆍ도교육청에서는 중앙정부의 지시로 5053억 5521만 원의 예산을 절감했다. 이 가운데 4942억1362만 원의 예산이 영어 교육 강화 정책과 고교 다양화 300 프로젝트, 그리고 기숙형 공립고 설립 등에 쓰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예산을 절감하는 과정에서 공교육 내실화와 교육환경 개선 예산, 특수교육 진흥 사업과 저소득 계층 지원금이 축소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공교육이 축소되면서 계급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는 교육의 기능은 초중등 부문으로까지 확산되었고, 학교 수업으로 채워지지 않는 교육의 내용을 보충하기 위해 사교육은 오히려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등교육의 내용ㆍ운영방식ㆍ체계ㆍ성격이 초중등 교육의 그것을 위치 짓는 현대 교육제도의 특성상, 이명박 정권이 펼치고 있는 교육재편의 내용은 지난 김대중ㆍ노무현 시절 대학 구조조정의 연장선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초중등 교육의 변화는 역으로 고등교육의 이후 변화를 예상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 줄 것이다. 현재 대학부문에 대해서도 개혁이라는 이름아래 각종 정책이 추진되고 있는데, 그 큰 틀은 지난 시기 신자유주의적 대학재편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달라진 계급투쟁의 조건 속에서, 고등교육의 변화 양상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를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즉 금융ㆍ경제위기의 가능성이 상존해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대학의 역할, 이명박 정권의 특질, 교육투쟁 주체들의 조건 등을 고려하며 향후의 전망을 모색해야 한다.

○ 최근 대학 구조조정 양상의 의미
정권은 특정 대학과 학과에 대한 지원과 집중을 강화하고 대학교육의 공공성을 해체시키고 있고, 이전과 다른 점은 전체 대학과 대학인의 수를 줄이려고 하고 있다. 지난 6월 교육인적자원부는 2009년 11월에 ‘부실 사립대’ 30여 곳의 명단을 발표하고, 이런 대학들을 퇴출시킨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것의 근거는 고교졸업생의 대학진학률이 84%에 육박하는 현재, 전국 198개 4년제 대학 중 신입생 충원율이 70%에 미치지 못하는 대학이 20여 곳이 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학교ㆍ학과 간 경쟁과 함께 퇴출되지 않는 대학의 유사학과와 통폐합을 유도하고, 2010년부터 사립대학 법인을 해산 할 때 잔여재산으로 공익법인 설립을 가능하게 한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는 국공립대학의 변화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정부 예산을 지원 받아오던 대학들을 줄이며 운영 체계를 재편하고 통폐합을 유도하는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지난해 3월 1일 제주교대가 제주대와 통폐합 되었고, 지난 4월에는 교대가 인근 국립대와 통폐합 할 경우 250억 원 가량의 자금을 지원해주겠다는 방침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지역의 교대를 자기 대학에 유치하려는 국ㆍ공ㆍ시립 대학들의 경쟁이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지난 3월 정부는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울산과학기술대학교를 법인으로 새로 설립하였다. 인천대는 인천전문대와의 통합을 추진하며 인천 송도캠퍼스로의 이전이 마무리된 상황이고, 서울대는 2011년 3월까지 법인화 전환을 마무리한다는 계획 아래 국회통과를 준비하고 있다.
우리는 지난 시기 대학 구조조정 양상의 하나로 ‘대학설립 자율화 정책’과 대학-대학인의 수가 급증한 것을 살펴보았다. 현재 대학인의 수를 감소하려고 하는 교육정책의 내용이, 신자유주의적 교육 양상과 다른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본질은 똑같다. 즉 대학 및 학과들 간의 경쟁을 강화시켜 구조조정의 명분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한편 이와 비슷한 성격의 재편 중 하나가 학부제의 폐지와 학과제로의 전환이다. 학부제는 신자유주의적 대학 구조조정과 자치 공동체 파괴의 상징처럼 여겨졌었다. 연세대는 2010년 바로 학과제 전환이 이루어지며, 건국대ㆍ경희대ㆍ고려대ㆍ서울대ㆍ한국외국어대ㆍ한양대 등에서도 학과제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학부제 전환 이후 교수집단을 비롯한 많은 곳에서 학과제로의 재전환 요구가 있었지만, 최근의 변화가 이런 의견을 수렴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학과제로 전환하는 목적은 학과마다 합격 평균 점수와 지원자 수를 비교하여, 그것이 작은 과일수록 패널티를 주는 것이다. 이는 인기 학과와 비인기 학과 간의 차이를 뚜렷하게 하고 경쟁을 유발하여, 학과 구조조정의 명분을 제공할 가능성이 높다.

○ 대학의 기업화-상업화 현상
대학의 기업화-상업화 현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대학 자체가 기업의 운영과 목적에 닮아가는 현상과 대학에서 생산한 지식이 자본의 이해에 걸맞은 방식으로 바뀌어 가는 현상이다. 물론 이 두 가지 현상은 따로 떨어뜨릴 수 없다. 전자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현상은 대학기술지주회사의 설립이다. 대학에서 보유한 기술을 사업화하기 위해 자본금의 50% 이상을 기술로 출자해 대학 내에 기업을 설립할 수 있게 하는 대학기술지주회사는, 대학이 연구성과를 직접 활용하여 수익을 수 있게 한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지난 2008년 2월 ‘산업교육진흥 및 산학협력촉진에 관한 법률’이 통과된 이후, 많은 대학에서 대학기술지주회사가 설립하고 있다. 작년 2월 한양대의 ‘HYU홀딩스’가 첫 매출을 기록한 이후, 2008년 삼육대의 ‘SU홀딩스’, 서울대의 ‘서울대기술지주주식회사’, 서강대 ‘SGU홀딩스’ 등이 대학기술 지주회사를 설립했다. 최근에는 고려대학교에서 자본금 100억 원을 들여 고려대 기술지주회사를 설립하였다. 이미 대학은 산학협력이라는 이름 아래 노골적으로 제휴를 강화해왔고, 기업의 이름을 딴 건물이 버젓이 학교에 들어오거나 각종 연구소가 대학 안에 설립되었다. 대학기술지주회사는 대학과 기업 연계의 심화를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후자의 경우에서 대표적인 것은 대학 안에서는 계약학과가 증가하고 있는 현상이다. 이는 기업 혹은 정부기관과의 계약을 통해 ‘실무형 고급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운영된다. 계약학과는 학생선발부터 커리큘럼 개발, 강사진 운영과 졸업생 채용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기업과 대학이 공동으로 기획 운영한다. 성균관대 대학원 과정에 있는 '초고층·장대교량학과'와 ‘임베디드소프트웨어학과’는 계약학과의 사례이다. 서울대 역시 첫 계약학과인 ‘E-MBA’를 경영전문대학원 안에 신설하였다. 학부과정에서도 2009년 로스쿨로 법대 신입생을 뽑지 않게 된 이후에 ‘자유전공학부’ 등을 신설하여, 각종 국가고시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하는데 각종 지원을 집중하고 있다. 이공계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지식의 상업화 경향은, 사회과학ㆍ인문과학에도 더욱 침투할 예정이다. 이런 과정에서 돈이 되지 않는 학문은 다른 분야에 통폐합되거나, 더욱 기업의 입맛에 맞추는 지식을 생산하게 된다. 한편 인천경제자유구역 송도 지구에 캠퍼스가 설립됨에 따라, 연세대에서는 2010년 3월 개교를 인천대는 전체 이전을 계획하고 있다. 송도캠퍼스에 이전하려는 주요한 목적은 규제조치가 덜한 곳에서, 학교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약학과나 BT 계열의 특정학과를 설립하는 것이다.
대학의 기업화-상업화 현상이 나타나며 민중들은 자신들이 지녀야 할 지식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학은 단 한번도 ‘진리의 상아탑’인적이 없었지만, 최소한 시민들이 가져야 할 권리를 알려줬고, 비판적이고 진보적인 지식을 생산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대학이 노골적으로 기업에 연계하면 할수록 시민들을 위한 교육의 내용은 사라져가고, 모든 교육은 기업이 원하는 기술교육으로 대체되어 간다. 현재 대학에서 만들어지는 지식은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본래의 의미가 아닌, 학벌과 빈곤 그리고 계층을 재생산하는데 모두 맞춰져 있다.
 
○ 불안정노동과 빈곤은 대학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대학은 현대의 어느 조직보다도 거대하고 복잡한 체계를 가지고 있고, 수많은 구성원들을 포함하고 있다. 대학의 운영과정은 그 자체로 한국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고, 한국사회의 경향인 불안정노동과 빈곤의 양상이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우선 1989년 대학이 등록금을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한 정책이 실시된 이후, 해마다 치솟은 등록금은 대사회적인 문제로 되었다. 2008년 한국교육개발원의 조사에 따르면 대학생이 대학교육을 받기 위해 지출하는 비용은, 등록금을 비롯해 교재비ㆍ생활비ㆍ사교육비 등을 합해 연평균 1000만원에 이른다. 현 시기 대학의 등록금이 올라가는 이유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대학의 기업화-상업화 경향 속에서 대학의 운영이 ‘자율’에 맡겨지고, 대학자금에 대한 운영과 수익관리가 주요한 항목으로 떠오른다. 이 과정에서 손실이 생긴다면 가장 쉽게 자금을 충당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등록금이다.
등록금 마련을 보조하기 위해 시행하고 있는 학자금 대출제도는, 오히려 제때 원리금을 갚지 못해 2009년 1만 3800여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신용불량자로 전락시켰다. 이에 정부에서는 7월 30일 친 서민정책의 일환으로 ‘취업 후 상환 학자금 대출제도’를 2010년부터 도입한다고 발표하였다. 학자금을 대출받은 이후 재학기간 동안에는 원리금 상환 부담이 없이 학업에 전념하게 하고, 졸업 후 소득이 발생한 시점부터 대출금을 분할하여 상환하는 제도이다. 하지만 이 제도는 정권의 생색내기 정책일 가능성이 크다. 기초수급자 및 소득 1~7분위(연간 가구소득 인정금액 4839만 원 이하)에 적용되는데 철저하게 수요자 중심 교육원칙에 따르고 있으며, 그간 기초수급 생활자와 차상위 계층에게 제공되던 무상장학금의 지원이 중단된다. 그리고 취업 후 상환이라는 명목으로 등록금을 인상시킬 수 있는 명분을 마련한다. 한편 연평균 1조 5000억 원에 달하는 재원이 필요한데, 어디에서 예산을 확보할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정부는 채권 발행을 통해 재원을 마련한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에 우리는 미국에서 부동산 시장에 몰렸던 금융자본이 새로운 투자처의 하나로서 학자금대출에 집중 투자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정부의 정책에 따라 학자금대출을 담당하는 기관은 정부가 보증하는 ‘한국장학재단’으로 일원화 되는데, 이는 금융자본이 안정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거점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한편 노동정책이 변화하게 됨에 따라 나타나는 대학의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대학가에서 ‘공시족’이라는 신조어를 낳을 정도로, IMF 이후 한국사회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일자리와 임금을 보장받았던 직종은 공무원이었다. 교원 역시 일종의 공무원이고 교원을 양성하는 교/사대에 대한 경쟁률이 높아졌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최근 정부는 인턴교사제를 시행하여 1600여명에 이르는 인력을 모집하겠다고 발표하였고, 교원임용의 경쟁률을 높이는 한편, ‘교원 평가제’를 실시하여 취업 이후에도 끊임없이 평가 시스템을 가동시키겠다고 하였다. 이런 현상은 비단 교사대의 대학생들에게만 해당하는 현실이 아니다. 청년인턴제가 공공부문에서 점차 민간 기업에 확대 시행되면서 한시적 일자리만 많아지고 있는데, 이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여겨지던 전문 직종 학과의 학생들에게도 해당하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대학에서는 전문 직종 학과의 학생들이 인턴을 하는 등 직종경험을 쌓는 것을 필수 커리큘럼으로 만들고 있는데, 이는 예비적 인력들을 활용하여 임금을 낮추고 취업노동자와 예비노동자들을 분할시키는 기제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은 한국사회의 실업률을 관리하는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경제위기가 심화되면서 숙명여대를 시작으로 '학사 후 과정(Post-Bachelor Program)'이 점차 증가하며, 예비실업자를 학교에 묶어놓는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이는 비단 학생들뿐만 아니라 전 민중에 대해서 적용되고 있다. 최근 교육과학기술부는 ‘2009년 평생학습 중심대학 육성사업’의 지원 대상으로 41개 대학을 선정하고, 학교당 1억 원 이상 총 53억 원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선정 대학들은 여성 재취업ㆍ청년 실업자 취업ㆍ소외계층 창업 등 다양한 취업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하지만 이런 프로그램을 이수하여도 청년인턴제ㆍ희망근로프로젝트의 확대 속에 불안정 노동에 편입될 수밖에 없다.

○ 대학본부가 구성원들을 통제하는 방식
대학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그 안에 있는 구성원들의 삶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되고, 대학은 변화에 저항하는 구성원들을 배제하거나 포섭한다. 대학은 다양한 방식으로 대학구성원들을 통제하는데, 경쟁 이데올로기를 통해 졸업준비요건ㆍ필수과목지정ㆍ학칙 등 학사과정의 엄정화를 강제하고, 이에 대한 저항을 봉쇄하기 위해서 자치권을 축소시킨다. 그리고 학내에 있는 노동자들에게 불안정 노동을 강요하고, 재계약을 위한 노동자들 간의 경쟁을 통해 구성원들 간의 적대와 분할을 조장한다. 지난 시기 신자유주의적 대학재편이 이루어지며 구성원들을 통제하기 위해 널리 사용한 방법은 대학 당국이 앞장서 학교발전 이데올로기를 내세우고, 대학 구성원들이 이를 내면화하게 함으로써 가능했었다. 이 과정에서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세력은 학교의 발전을 가로막는다고 하여 ‘마녀사냥’에 가까운 공격을 당했고, 대학인들의 자치권은 점차 파괴되어 갔다. 학내 공간과 게시판 사용이 제한되었고 ‘정치적 색깔’을 가진 모든 행사는 불허통보가 내려졌다.
이런 모습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대학당국의 통제는 더욱 강화되어만 간다. 그런데 지난 김대중-노무현의 인민주의 정권 시절과 달리 이명박 정권에 들어와서는, 좀 더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대학 구성원들의 삶에 개입하려 한다. 학내 게시판을 비롯한 언론에 대한 통제를 통해서 구성원들의 입을 막고, 학교에 대해 명예훼손을 하면 학생들에게 징계까지 내리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지난 8월 중앙대에서 진중권 교수의 재임용을 거부한 것에 대해 항의하는 학생들에게, 징계를 내린 사례는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예술종합대학은 정권에서 직접 커리큘럼에 개입(이론 수업의 축소)하고 총장 선임과 같은 운영에도 개입하고 있다. 한예종의 사례는 대학 전체의 기업화ㆍ상업화 경향으로 포괄할 수 없는 것으로, 지식을 생산하는 과정이 민주주의적 방식과 멀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학내 노동자들에게는 해고의 위험으로 이들을 통제하는데 명지대 행정조교의 대량해고 사태, 고려대학교에서는 88명의 비정규 강사를 해고한 사건 등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대학 당국의 통제력이 증가하는 것에 맞서 학생 자치 역량을 증대시키는 것은, 단지 교육부문의 변화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운동세력들의 주체적 역량을 고려해야 하는 문제이다. 하지만 대학의 변화가 무매개적으로 대학의 뜻대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할 때, 우리는 위와 같은 통제력의 증가가 갖는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정권의 통치방식이 대학의 운영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3. 2010년 교육투쟁의 방향과 과제

대학의 변화에 대해 섣불리 찬반의 입장을 내놓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다. 예를 들면 대학ㆍ대학인의 수가 줄어들고, 학과제로의 대대적인 전환이 추진되는 최근 움직임에 대해 섣불리 찬반의 입장을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우선 대학의 변화가 민중들의 삶과 지식 그리고 노동과정 전반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하고, 이것이 한국사회 전체의 변화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민중들이 고통 받는 근본원인을 제거하는 투쟁 속에서, 우리의 교육투쟁을 배치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제시하는 교육투쟁의 큰 틀과 방향은, 지난 시기 신자유주의적 대학재편을 막아내기 위해 내걸었던 바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정세적 조건을 고려하며 어느 부분에 맞추어 알려낼 것이고, 이를 달성할 수 있는 대학인들의 요구안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현재 대학의 기능과 변화에 대해 비판하고 교육투쟁의 주체들을 움직일 수 있는 과제들을 찾아보자.

○ 교육비용 민중전가 저지: 등록금 인하, 취업 후 상환제 반대
2009년 금융-경제 위기 아래에서 많은 대학들이 등록금을 동결하였지만, 2010년에는 경기회복설과 ‘취업 후 상환 학자금 대출제도’의 전면시행으로 등록금이 상승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교육비용의 상승은 교육에 대한 접근 자체를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수다한 교육의 문제 중에서 가장 쉽게 체감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리고 불안정노동이 일상화되고 경제위기가 지속되는 조건 속에서, ‘지배계급의 경제위기 민중전가’에 맞설 수 있는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교육비용 문제를 해결하라는 요구를 내걸고 교육투쟁의 주체들을 조직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높은 교육비용 그 자체에 대해서만 발언하기 보다는, 그런 교육비용이 책정되는 원인과 맥락에 대해 분석하고, 이에 맞설  수 있는 싸움을 조직해야 한다.
대학의 기업화-상업화가 심화되면서 학생들에 대한 교육 외에 다른 곳에 대한 투자ㆍ사용이 증가하고, 여기에서 생긴 손실을 메울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부분은 학생들의 등록금이다. 대학의 기업화-상업화가 심해지는 과정이 오히려 등록금이 올라가는 중요한 기제라는 것을 설득시켜내자. 한편 대학에서 등록금을 올리며 사용했던 주된 논거는 교육의 질을 높여 대학과 개별학생들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 대학-학과를 나와도 불안정 노동을 피해갈 수 없고, 높은 등록금은 낮은 임금 및 해고위험과 함께 민중들을 착취하는 기제로 함께 활용될 뿐이다. 이렇듯 등록금이 올라가는 이유에 대해 명확히 밝히며, 교육비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을 만들어야 한다.

○ 대학의 기업화-상업화 저지: 민중의 지식권 쟁취, 대학기술지주회사 반대, 대학의 금융투기 중단, 기만적 기본이수 과목 재정립, 졸업인증제도 전환 촉구
고등교육은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며 여기에 걸맞은 노동력을 수급하기 위한 과정에서 확대되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민중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권리를 확장하고, 시민적 주체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지식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게 되었고, 고등교육이 대중들에게 확대되었다. 현재 대학의 운영과 대학에서 생산하는 지식의 내용이 기업화-상업화 되어가며, 대학이 자본의 이해에 더욱 긴밀하게 편입되고 있는 상황이다. 대학에서 발전이데올로기와 같은 지배계급의 공세가 거세이지면서 대학의 구성원들 역시, 대학의 기업화-상업화 경향에 대해 적극적으로 찬동하고 있다. 학우들이 내면화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전변시키며, 대중들의 지식권ㆍ교육권을 확장하기 위한 방식으로 대학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는 대학의 기업화-상업화가 대학인들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대학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확장할 수 있는 지식을 배우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자.
대학운영이 자본의 이해에 종속되는 것은 대학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혹자는 대학이 시대의 요구에 발맞추기 위해서, 자신의 브랜드 가치와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방식으로 운영을 하는 것이 문제가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대학에서 수익을 창출하여 발전을 위하여 쓴다면 무엇이 문제일 것이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학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것이 곧바로 각 개인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으로 등치할 수는 없다. 자본의 운영원리가 적용된다는 것은 곧 대학 안에서부터 차별과 배제의 원리가 내재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이것은 학과 통폐합이나 학사과정의 재편과 같은 집단적인 구조조정 과정을 동반하게 되며, 대학을 다니는 것이 계속 불안정화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극단적으로 자기 과가 언제 없어질지 모른다!) 한편 대학자금을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쓰는 것은 대학의 불안정성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손실은 고스란히 교육비용의 증가를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알려내도록 하자.
대학 운영과정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대학에서 생산되는 지식의 기업화-상업화 경향을 야기한다. 이는 지식이 대학에서 생산하는 가장 중요한 상품이 되고, 대학에서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만들려고 하는 경향과 관련된다. 그런데 대학에서 생산되는 지식의 기업화-상업화 경향을 막아내자는 설득을 하는 것은, 운영과정의 기업화-상업화를 비판하는 것보다 좀 더 어려운 일이다. 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사회에서(기업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다면 좋다는 반론이 제기되고, 특히 가치중립적인 지식이라고 여겨지는 이공계열에서는 기업 기술로 바로 쓰일 수 있는 지식을 만드는 것이 사회에 공헌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 사회에서 대학이 어떠한 역할을 했고, 우리가 배우는 지식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민중들이 차별과 불평등 그리고 착취에 맞서 자신들의 권리를 외칠 수 있었던 것은,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지식을 배움으로서 가능했고 이를 배울 수 있는 공간 역시 대학이라는 점을 설득하자. 대학이 ‘테크노크라트’적 기술수련 기관이 되며 기업에서 체득해야 할 지식을 대학에서 배우는 것은, 기업이 지불해야 할 교육비용을 대학에 전가한다는 것을 알려낼 수 있어야 한다. 기업화-상업화 된 지식이 과연 전 민중에게 보편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인지도 질문해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생명공학분야에서 개발하는 GMO 관련 지식이, 오히려 초민족적 농업 자본에게만 이득이 될 뿐이고, 생태를 파괴하는 메커니즘이 되어간다는 것을 알려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지식의 기업화-상업화에 대한 문제제기를 통해 기본이수 과목 재지정ㆍ수업에 대한 개입과 같은 것을 대학본부에 요구하며, 대학이 자본에 편입되어가는 현재의 경향을 제어하기 위한 투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 불안정노동 경향을 제어할 수 있는 교육투쟁
우리는 교육투쟁의 방향을 설정하는데 있어 대학이 한국사회의 전체 변화와 연결되는 지점을 살피고, 이에 적합한 요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였다. 이를 위해 대학인들이 습득하는 지식과 삶의 모습; 대학의 모습이, 졸업 후 그/녀들의 삶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밝힐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대학의 교육비용이나 기업화-상업화 현상에 대해서도 좀 더 설득력 있게 비판할 수 있다. 한국 사회 전체의 불안정노동 경향이 심해지고, 특히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인들이 인턴과 같은 한시적인 일자리를 거쳐야 하는 것은 필수가 되어간다. 대학이 아무리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기업과 같은 방식으로 운영하고, 기업에 들어가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지식을 생산한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이런 식의 구조조정을 위해 등록금을 아무리 높인다고 하더라도 한국 사회 전체의 불안정노동은 피해갈 수 없다.
오히려 대학이 금융화 양상에 걸맞게 변해가면 갈수록 불안정 노동은 더욱 심화되어 간다. 대학에서 생산하는 지식이 기업의 입맛에 맞게 바뀌어가면서, 취업을 하더라도 끊임없이 자신의 노동력을 갱신하기 위한 '평생교육'을 받아야 하며, 이 과정에서 도태되지 않도록 불안에 떨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안정적인 직종과 이를 보장해주는 학과도 사라져 가는 추세이다. 우리는 위에서 '4개월짜리' 인턴교사가 대폭 늘어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호텔경영학부와 같이 전문직을 보장해준다고 여겨지는 학과를 나온다 하더라도, 청년인턴과 같이 한시적 일자리로 취업할 확률이 더욱 높아진다. 한편 대학과 불안정노동의 관계는 단지, 대학 안에 있는 대학인을 비롯한 구성원들의 문제로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계속 언급하고 있듯이 사회에서 지식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곳이 대학이라는 것을 유념한다면, 대학에서 생산되는 지식은 민중들의 불안정노동과 빈곤을 정당화하고, 더욱 많이 착취하는 도구로 활용될 것이다.
지식에 대한 권리를 얻기 위한 싸움은 항상 그 지식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동반해야 한다. 특히 대학에서 배우는 지식과 생활관습들이 어떻게 사회적 노동으로 전화되는지를 살펴봐야 하며, 지식에 대한 권리는 항상 노동에 대한 권리를 쟁취하는 가운데에만 온전하게 습득될 수 있다는 것을 알리자. 현재 대학의 지식과 노동 문제가 가장 대표적으로 연결되는 지점인, 청년실업과 정부가 뉴딜정책이랍시고 내놓는 한시적 일자리 정책들을 매개로 교육투쟁의 요구를 만들 수 있다. 현재 노동에 대한 권리가 급격하게 파괴되고 20대에 대한 담론이 활발하게 제기되고 있다. 지식권과 교육권을 연결하는 활동들을 만들고, 대학과 대학인의 삶이 어때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우리는 대학인으로서 ○○○한 노동'을 하기를 원한다는 구체적인 요구나, 정부정책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를 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전체 노동자ㆍ민중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이슈들을, 대학인들의 삶과 연결 짓는 '의식적'인 노력이 좀 더 많아야 할 것이다. 이런 활동을 통해 민중들의 이데올로기를 전변시켜내는 활동은, 당연하게 3~4월이라는 기간을 넘어 좀 더 장기적인 계획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


4. 나가며

대학에 다니고 있는 우리들은 대학의 모습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자신이 대학에 다니는 의미나, 대학의 본질을 잘 알고 학교를 마치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학의 모습이란, 실제로는 자신이 속해 있는 과나 단과대에 한정된 특수한 모습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대학인들은 자신이 어떠한 처지에 처해 있고, 대학이 한국 사회 전체의 변화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다. 하지만 이를 언어화하여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바꿔내야 하는지 알지 못하며, 사회와 대학이 강요하는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고 살아가기 쉽다. 교육투쟁의 구체적인 계획과 발언의 얼개를 세우고, 함께 지식에 대한 권리를 쟁취할 수 있는 기획을 만들도록 하자. 한 순간 실리를 따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장기적인 안목을 통해 지배계급에게 점유당하고 있는 대학과 지식을, 민중들의 손으로 되찾아 올 수 있는 교육투쟁을 만들자!

Posted by 행진

2009/11/24 12:56 2009/11/24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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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List

  1. test 2010/01/02 21:15 # M/D Reply Permalink

    울산과기대는 신생 국립대학교입니다. 울산대학교는 사립대학이고 울산과기대와는 전혀 상관 없는 학교입니다.

  2. 행진 2010/01/03 15:29 # M/D Reply Permalink

    수정하였습니다^^

[선특호_각론2] 불안정노동

불안정노동을 강요하는
금융화의구조적 위기를 폭로하며
 대학사회에서 노동권을
보편적인 권리로 알려내자!



0. 들어가며

얼마 전, 한국노동연구원 원장은 “노동 3권(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헌법에서 빼야 하고 모든 노동자를 비정규직화하는 것이 소신이다”라는 말을 국정감사에서 뻔뻔스러운 얼굴로 내뱉었다. 자본연구원장도 아니고 노동연구원장이라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황당한 궤변이었다. 전경련에서는 1인당 GNI(국민총소득) 대비 대졸초임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훨씬 높다라며 조작된 수치로 밝혀진 초임비교 분석표를 내세우며 초임삭감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펼치기도 했다.

2009년을 돌아보자. 대한통운 화물노동자들의 투쟁, 쌍용차 정리해고에 맞선 영웅적인 77일간의 파업 투쟁, 금호타이어 투쟁, 비정규악법, 최저임금법 투쟁 등 올 한해 곳곳에서 노동자․민중의 싸움은 끊임없이 진행되었다. 08년,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경제위기가 닥친 이후 계속되는 지배계급의 위기전가의 칼바람은 2009년에도 어김없이 여느 곳 하나 가리지 않고 매섭게 불어 닥쳤고 이에 맞선 노동자․민중의 투쟁은 너무나 정당했다. 지금의 위기는 자본이 스스로 만들어 낸 덫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위기를 노동자 민중에게 뒤집어씌우며 극복하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2009년 우리의 싸움은 어떠했는가? 경제위기 책임전가에 맞서는 투쟁들은 하나의 전선으로 모아져 상승작용 했다기보다는 뿔뿔이 흩어져 별개의 문제들처럼 투쟁을 할 수 밖에 없었고 무더기 대량해고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이, 최저임금을 낮추려는 지배계급에 맞서는 투쟁이 모두의 문제로 인식되지 못하고 흩뿌려져 버렸다.

지배계급은 경제위기가 더 이상 하향곡선을 그리지 않고 다시 날개를 치며 하늘로 오르고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을 담보로 한 경제위기 회복인지 우리는 똑똑히 알고 있다. 바로 노동자들의 임금삭감과 정리해고다. 그리고 이 같은 일들은 더욱 강한 강도로 더욱 교묘한 수법을 통해서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거세지는 그들의 공격에 우리는 어떻게 맞서야 할까?


1. 금융화의 위기와 경제위기 책임전가 : 임금삭감과 정리해고

1-1. 금융화 먹이사슬 1단계, 노동자 쥐어짜기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는 자본 편향적인 기술진보로 야기되는 유기적 구성의 상승, 그리고 장기적으로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으로부터 나타난다. 자본주의의 대응은 자본의 과잉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곧 금융우위의 축적구조가 확립되는 금융화이다. IMF 이후 한국에서의 10년은 곧 금융화의 진행과 금융세계화로의 적극적인 편입과정이었다. 즉, 사회의 모든 요소들이 금융적 이익의 추구가 가능한 형태로 재편되었다는 것이다. 주식시장을 자유화함으로써, 기업과 은행을 주식시장에서 거래 가능한 형태로 전환시켰고, 주식시장을 개방하여 초민족적인 자본 거래가 가능토록 하였으며, 주주와 투자자의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정리해고, 노동유연화가 대대적으로 진행해왔다. 금융화에 동반한 혹은 그 결과인 인구의 과잉이 나타나는데 이는 상대적 과잉인구(실업자)를 창출, 즉 ‘궁핍화’이다. 따라서 실업률이 계속 증가할 수밖에 없고 더욱 큰 문제는 실업률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비경제활동인구는 훨씬 많다는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비경제활동인구가 1632만 3000명에 달해, 관련 통계를 작성한 이후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체 인구의 40%에 육박하는 비율이다.
한편 실업자가 대량 양산되는 것뿐만 아니라 기존에 있던 노동자들에게 공격이 자행된다. 경제위기 이후 많은 중소기업들이 도산하며 노동자들이 조금씩 잘려나갔고 최근에는 대기업이나 대규모사업장에서도 구조조정이 자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경제위기가 시작된 08, 09년을 경유하며 경제위기를 극복하겠다며 지배계급이 행했던 일은 가관이었다. 경제위기 고통을 함께 나누자며 노·사·민·정 합의를 강조하며 노동자들의 투쟁을 이기적인 것으로 만들고 저항하는 세력에 대해서 철저히 고립시키고 탄압을 했는데 이는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쌍용차 노동자들의 처절한 싸움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최저임금위원장은 최저임금 수준이 너무 높으면 고용감소가 발생할 수 있다며 고용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것처럼 여론을 만들며 최저임금 삭감을 시도하였다. 비정규보호법이 올 해 2년째를 맞이하면서 정규직으로 전환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자 다시 정부와 한나라당은 지금과 같은 경제위기 상황에서 비정규보호법이 시행되는 것은 오히려 더 많은 실업자를 만들어내는 상황을 발생시킨다는 '100만 실업대란설'을 유포하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계속해서 비정규직으로 쉽게 고용하고, 해고할 수 있도록 하기위한 제도들을 안착화 시키기에 혈안이 되었다. 경제위기로 인해,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착취받고 고통받아온 노동자들의 현실을 외면한 채 이명박 정권과 자본은 최저임금을 깎아야 경제가 산다며, 비정규직이라도 좀 더 오래 일할 수 있는 것이 어디냐며 경제위기에 대한 책임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잘, 잘못은 덮어버리고 자신들이 내놓은 대안만이 경제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그 길엔 너희의 희생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만 반복했다. 뿐만 아니라 지금의 위기를 만들어온 금융을 통제하기는커녕 금융선진화라는 이름으로 자본시장통합법을 시행하고 금산분리 완화를 시행하면서 금융자본의 이동을 더욱 자유롭게 만들어주며 불안정성을 확대하고 구조적 위기를 전가 시키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1-2. 09년, 자본의 위기 전가에 맞선 투쟁

앞에서 살펴보았듯 지배계급은 지금의 위기를 불러 온 원인은 숨긴 채, 위기의 순간을 함께 지혜롭게 극복하자는 이야기만 할 뿐이다. 아니 오히려, 함께 극복하자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민중에게 위기를 떠넘기려 했다. 위기 극복을 오롯이 민중들에게 전가하려는 모습에 맞서 노동권과 생존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그 어느 해보다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경제위기를 빌미로 계속되는 지배계급의 노동권에 대한 공격에 맞선 투쟁이 절실 할 수밖에 없는 한 해였기 때문에 그것은 더욱 중요했다. 하지만 09년 민중들의 생존권을 쟁취하기 위한 처절한 투쟁들이 반MB 정서와 함께 가면 더 크게 상승 작용할 것이라는 환상에 젖었던 세력들은 오로지 이명박 정권에 맞서기 위한 하나의 전술로서 노동권을 사고했고 결국, 중요하게 밝혀내고 알려야할 '노동권'은 반MB라는 이름 속에서 희석되어져 버렸다. 반MB투쟁 역시도 중요하지만 무엇으로 반MB투쟁을 만들 것인가가 더 중요했다. 그 핵심은 바로 모든 민중의 보편적 권리, 노동권의 문제를 대중적으로 더욱 확산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대중들의 반MB정서에 묻어 가려했던 민주당의 모습에서도 확연히 드러났다. 반MB법으로 전국이 떠들썩했을 때, 그들은 미디어 법에는 강경지조로 대응했지만 비정규 법에 대해서는 협상의 여지를 열어두며 반MB 전선을 당의 지지율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을 뿐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제기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노동의 권리를 외치는 것이 보편적인 사회적 문제로 제기되지 못한 모습은 쌍용차 투쟁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세계적으로 경제성장속에서 자동차 산업은 경쟁적으로 설비투자를 늘려가면서 금융투기에도 동참해 왔다. 그런데 설비확장에 투자된 자본회수가 늦어지자 자동차산업의 수익성이 하락하고 전 세계적인 경제침체와 함께 자동차 산업 역시도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쌍용차의 파산위기와 이로 인한 정리해고도 이러한 맥락에 이어져 있었다. 쌍용자동차에 파산위기가 오자 사측이 선택한 카드는 과도한 인건비와 강성노조 때문에 회사가 어렵다는 이유를 들며 2646명의 정리해고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태의 책임은 명백하게 정부와 자본에 있었다. 쌍용자동차는 IMF 경제위기 당시, 매각과 구조조정을 거듭하며 상하이자동차에 매각이 되었고 그 후 쌍용차는 인수비용을 제외하고는 한 푼도 투자하지 않은 채 기술 유출과 구조조정에만 전념해왔다. 그러던 중, 또 다시 세계적인 경기침체로 자금 유동성이 악화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기술이전을 완료한 상하이자동차는 정상운영을 위한 자금 투입이 아닌 법정관리신청을 택했다. 또한 정부는 상하이자본에 매각하는 것을 반대해 온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묵살한 채, 오히려 초국적 자본에 쌍용차를 팔아넘기는데 앞장섰고 그 끝은 정리해고로 나타났다. 이런 부당한 정리해고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정당한 투쟁은 77일의 옥쇄파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쌍용차 투쟁은 초국적 자본과 정부의 책임을 명시적으로 제기하였다는 의의를 가졌다. 특히, 해외매각의 문제, 고용과 노동자 생존의 문제가 분출된 계기였고 이를 통해 생존권을 위협하는 인력구조조정과 해외 매각에 대한 여론을 일정 형성할 수 있었다. 우리는 쌍용차 투쟁에 연대하며 정부가 책임져야하는 것은 초민족자본과 이를 지원한 채권단이 아니라 공장에서 묵묵히 열심히 노동해온 노동자들의 고용과 생존권이라는 것을 발언해 왔다. 하지만 투쟁에서 보인 한계들과 아쉬움도 존재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쌍용차 투쟁을 시작으로 해외매각과 정리해고에 대한 문제는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환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여론 환기의 차원을 뛰어 넘어 경제위기 시대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 쟁취라는 정세적인 요구로 논의를 확대하는 데는 한계가 존재했다. 쌍용차 노사 간의 최종합의로 정리해고 비율이 확정되자 산업은행의 1300억 공적자금 지원이 확정되었는데 지원금의 대부분은 정부의 입장대로(구조조정을 전제로 한 공적자금 투입) 정리해고자 퇴직금 등의 구조조정 자금으로 지출되고 기업회생, 고용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용되고 마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또 정리해고의 문제가 쌍용차만의 문제로 인식되면서 구조조정이 불가피한 것이라는 여론을 벗어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지배계급의 공세적인 공격에 맞서는 투쟁은 곳곳에서 이루어졌지만 산발적으로 흩어진 채 고전을 면치 못했고 보편적인 투쟁으로 확장·상승하지 못하면서 지배계급의 경제위기 책임전가에 맞서는 집단적인 저항이 미약한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2. 경제위기와 불안정노동이 대학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불안정노동의 심화는 대학인들의 삶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IMF 이후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하기 쉽지 않게 되자 대학은 일종의 ‘취업 학원’으로 변해가고 많은 대학인들의 최대 관심사는 더 좋은 직장을 구하는 것이 되었다. 최근 경제위기가 더욱 심해지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강화되었고 대학교 1학년 때부터 학점관리, 토익점수관리, 경력관리와 같이 길고 긴 스펙관리에 들어간다. 현재 대학인들은 자기계발의 환상과 도태의 공포 속에서 적극적으로 자기의 노동력을 경영하고 관리하며 열심히 사는 대학생으로 자신의 투자가치를 높이고 있다.

불안정노동의 심화로 인해서 대학인들은 취업준비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지만 높은 실업률로 인해 취직은 더욱 어려워지는 현실에 직면한다. 턱없이 높아만 가는 취업의 벽 앞에서 대학인들은 피곤함을 느끼고 불만을 느끼지만 이러한 모습은 저항으로 이어지기 보다는 또다시 스펙 쌓기에 몰두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노동자들의 문제를 자신의 모습과 일치시키지 않기도 했다. 쌍용차 노동자들의 공장점거 파업투쟁을 보면서 쌍용차 투쟁 자체에 대해 자체입장을 가지지 못하고 노사가 벌이는 극단적 폭력에만 반대하거나 대규모로 집단적인 투쟁을 만드는 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거부감을 표하기도 했다. 대공장을 점거하고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평범한 노동자들과 다르다는 이데올로기가 퍼지기도 했으며, 불안정 노동에 규정당하고 있는 자신들의 삶을 노동자들의 그것에 투영시키지 못하기도 했다. 취업난이 심할수록 이를 만드는 현실에 저항하기보다는, 현실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공감하면서도 자신의 경제생활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인턴으로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노동권이 권리로 인식되기 보다는 지금은 감내해야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런 감내를 통해서 미래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불만과 불안이 깔려있는 모순된 생활을 하고 있다.  최근 이명박 정권의 실정이나 민주주의가 역행하고 있다고 하는 데는 공감하고 발언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취업의 문제에서 만큼은 개개인들의 문제로 바라보면서 스스로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로 인식한다.

2-1. 대학에서 청년실업과 불안정노동의 확산을 말하는 이유

 IMF 이후, 가파르게 치솟는 실업률을 보며 많은 운동단위들은 실업을 주제로 한 운동의 전망에 기대를 걸었었다. 좌파 학생운동 역시 청년실업운동본부 등의 실천을 벌여왔다. 하지만 불안정한 취업전망을 선전하는 것만으로는 즉각 대중들의 분노가 조직되지 않음을 평가하며 청년 실업운동의 목표로서 조직적 성과를 염두에 둔 실천은 한계적임을 확인한 바 있다. 관련 주제에 대한 한대련의 실천 역시 맹점이 있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실천적으로 그들의 투쟁은 학생운동의 장점, 즉 전체 운동을 아우르며 전민중적 문제를 제기하고 부문 이해에 갇히지 않는 사회적 문제에 선도적인 제기를 해왔던 역할을 포기함에 다름 아니었다. 그들의 등록금 투쟁, 청년고용할당제 투쟁은 자신들의 운동 과제 중에서 정세적으로 발언되어야할 모든 민중적인 의제를 압도하는 양상이었는데, 이러한 방식으로 청년실업을 제기하는 것은 당장에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주어줄 수 있게 되고 학대중들의 공감을 얻어냈을지언정, 전체 실업문제를 제기하는 데에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오히려 신자유주의의 위기관리 전략인 민중들의 분할 통치- 즉 계층 간에 차별적으로 적용되는 노동 불안정화의 양상과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대 간의 갈등을 유발할 수도 있는 한계점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점에 대한 반성적인 평가에 이어, 청년실업의 문제를 구조적 문제로 보지 않고 당사자의 문제로 보면서 해결하려는 접근 방식에 대한 경계를 강조해왔다. IMF이후 찾아온 10년만의 경제위기에 또 다시 실업문제가 대두되는 속에, 경제위기에 맞선 대학생 공동행동의 주요 기조로 청년인턴제 폐기를 기조로 제시했다. 그러나 상반기 용산, 쌍용차 투쟁과 같은 굵직한 정세에 학생운동이 주요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두드러지는 실천으로 만들어내지 못했다.
우리를 포함한 많은 운동 단위가 넘어서지 못한 한계들처럼, 청년 실업을 발언하는 것은 여러 가지 난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시기 청년층의 실업에 대한 적극적인 주목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실업, 특히 청년실업의 문제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이 문제가자본주의 안에서는 절대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경제위기의 심화와 더불어 실업의 문제가 더욱 확산되고 있는 것은 정부와 자본에게도 역시 부담스러운 상황일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제시할 수 있는 그들의 카드란 금융화의 심화일 뿐이었다. 금융자본 중심의 경제구조에 깊숙이 편입된 한국의 경제는 마치 금융을 육성하면 선진국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금융은 절대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는 영역이 아니다. 따라서 금융시장을 육성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더 많이 고용할 수 있지도 않으며 그저 외국인 투자자들의 행위에 따라 주식의 허구적인 가치가 상승/하강할 뿐이다. 바로 고용 없는 성장이 바로 금융화의 모습인 것이다. 게다가 최근 경제위기의 양상은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이 실물자본에까지 옮겨가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고 고용되어 있던 노동자들도 해고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실업은 개개인의 능력 없는 탓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단순히 눈높이를 낮추는 것으로 해결 할 수도 없다. 대학인들도 ‘고용 없는 성장’ 속에서 노동시장에 편입되지 못하여 실업인구는 계속해서 늘어만 갈 뿐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실업의 문제 특히, 청년실업의 문제는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게 되었다. 실업의 문제를 해결할 수없는 지배계급은 실업을 조금이나마 해소해 보기 위해 청년인턴제나 잡 셰어링을 통해 대졸초임을 깎고 신규인력을 창출하려는 미봉책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 역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최근에는 경기가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고 연일 보도하며 더 이상의 위기는 없을 것처럼 선전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올해 청년실업률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지배계급에게도 실업의 만연은 위협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에 대해 제시하는 기만적인 해결책들의 대다수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적극 알려내면서 은폐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폭로해 가야 한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가속화되는 지난 몇 년간, 청년실업의 문제는 적극 사회화 되었다. 그렇게 만들기 위한 운동 주체들의 적극적인 역할이 있었다기 보다는 사실상 누가 설명할 것 없이 대중들이 가장 먼저 느끼는, 그들의 삶을 강하게 규정하는 요소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청년 실업의 문제를 사회적인 문제로 인식하게 된 데에는 ‘한창 일할 나이인 청년들이 노는 것’에 대해 더욱 민감하게 느끼는 정서나 공감대가 있기도 했다. 곳곳의 드라마, 개그프로의 소재로 사용될 만큼 청년실업의 문제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다. 실제로 실업률을 살펴보면 청년실업률(15~29세)은 8.4%로 전체실업률인 3.9%보다 두 배 이상 높은 수준이며 유사실업자를 포함할 경우 체감 청년실업률은 20%에 달한다. 그러다 보니 현재 대학인들의 사회적 위치와 이데올로기를 가장 많이 규정하고 있는 것은, 노동 시장으로의 진입일 수밖에 없다. 끝없이 실업률이 높아지며 이에 대한 공포가 대학인들에게 내면화되고, 노동시장에 진입하기 위한 끊임없는 경쟁은 대학인들이 몸소 경제위기를 체감하게 하는 대목이다. 취업경쟁과 만연한 실업에 대한 불만은 개인들이 정치적 지향을 뛰어넘어 공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2-2. 어떻게 발언할 것인가

향후 경제위기의 진행 양상에 따라 실업이 더욱 큰 사회 문제로 대두되겠지만, 우리가 관련한 투쟁을 고려할 때는 지난 시기의 난점을 인지하면서, 전체 학생운동의 실천에서 청년층의 불안정 노동의 문제는 정세적으로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대학생인들의 규합할 수 있는 요구가 거기서만 머물지 않고 전 사회/전 민중에 대한 대안적인 전망을 제시할 수 있는 실천이 되어야한다. 결국 청년 실업의 문제는 이미 확인 된바와 같이 신자유주의가 야기하는 빈곤과 불안정 노동에 대한 다양한 실천 중 하나로 문제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벌어지는 임금삭감과 정리해고의 부당함에 대해 무매개적으로 강의실에서 외칠 것이 아니라면, 즉 대학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 노동현장의 투쟁을 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대학인의 삶과 어떻게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지를 밝히는 과정으로서 제시할 수 있는 투쟁과제가 청년층의 실업인 것이다.

우리는 청년실업의 문제에 대해, 청년층을 특수집단화한 후 그 당면 이해로서 실업의 해결을 촉구하는 방식이 아니라 전 민중의 문제로서 실업의 문제라는 식으로 제기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구조적인 위기’에 대한 대안은 개인이 감내한다고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님을, 연대와 집단적인 저항을 통해 가능함을 설득하면서 이데올로기에 균열을 낼 수 있어야 한다.
경제회복이 되고 있다는 그들의 말대로 라면 계속해서 고용이 늘어나야 하지만 여전히 실업자의 수는 증가세를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 중 청년실업자 수는 더욱 증가하고 있다. 결국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경제회복이라는 것은 그저 말뿐이라는 것, 경제위기가 극복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장 창출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경제위기가 잠시 잠깐 왔다가는 소나기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고 바로 지금의 위기는 지배계급, 경제학자들이 제시하는 갖가지 정책으로는 극복 될 수 없는 구조적위기인 것이다. 이를 우리는 선전·선동 할 수 있어야 한다. 만연한 실업에 대한 학대중의 인식은 다소 갈등적인데, 자신의 삶을 강하게 규정짓는 취업과 생존의 압박이 사회 구조적 문제와 연결되는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해명하지는 못하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다. 지금의 위기는 결코 극복될 수 없는 위기라는 것을 폭로하면서 학생대중들이 자본의 위기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럴 때만이 청년실업의 문제를 발언 해 내는 것이 변혁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한계로 지적했던 부문운동의 이해만을 대변하는 방식의 선동과는 실천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될 수 있다.
 

3. 학생운동의 임무

3-1. 학우대중에게 보편적인 권리로서의 노동권을 알려내자!

청년실업의 문제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고 하지만, 학대중 개인의 조건에 따라 불안정 노동이나 실업의 문제는 다르게 인식되기도 한다. 소위 명문대나 취업하기 좋은 과를 다니는 대학생의 경우 ‘실업’ 자체, 즉 구직의 실패에 대한 공포는 그리 많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불안정노동의 양상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의 현실이 될 수밖에 없다. 대학생들이 가장 동경한다는 금융권직장에서도 경제위기의 여파로 출근시간이 당겨지며 실질적 근무시간이 연장된다던가, 튼튼해 보이는 대기업도 정년이 점점 단축되는 상황에서 평생직장이 될 수 없다는 현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불안정 노동의 칼바람은 사회의 빈곤층에만 불어 닥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 노동하는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보편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학생회라는 공간에서 노동권을 발언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앞서 총론에서 정치를 복원해야한다고 말한 바 있다. 정치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삶에 개입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을 변화시켜내고 다양한 권리를 밝히면서 그 권리를 쟁취해 가는 것이 정치일 것이다. 역사적으로든 지금의 시대적으로든 노동권은 보편적 권리로 이해되지 않지만 이러한 보편적 권리를 제기하지 않고서는 온전한 정치를 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사실, 예비노동자라는 호명이 대학인들을 규정하기에는 불완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대학인들이 어떻게 노동을 인식하고 있고 어떤 노동자로 살아갈 것인지, 현재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관점은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결정 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대학에서 받고 있는 정규교육장치들은 그러한 내용을 담보해 내지 못하므로 '시민'을 만드는, '시민'으로 재사회화하는 공간으로서 대학이라는 공간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럴 때만이 보편적 권리의 노동권을 인식하는 시민을 대학에서 길러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대학 안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관계맺음과 지식, 혹은 정세적 투쟁 등으로 구성될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대학 내에서 그를 추동할 수 있는 공간이 학생회가 되어야 한다. 보편적인 권리로서 노동권을 학생사회에서 학생회가 발언하자!

3-2. 불안정노동과 실업에 대한 정치폭로를 강화하자!
 
2010년을 준비하는 선거기간을 통해 앞서 밝힌 대로 허구적인 실업대책과 노동관리 정책의 무능함을 폭로하며 불안정 노동의 구조적 원인에 대한 인식의 틀을 확장 시킬 수 있게 해야 한다. 현재의 경제를 움직인다는 금융업계에서 열심히 일했지만 해고될 수밖에 없었던 코스콤 비정규직 노동자들, 계약해지로 200여명의 노동자들을 해고한 KBS 노동자들의 투쟁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고 스펙을 쌓아서 꿈의 직장인 금융업계와 공영방송사에 취업을 했지만 개인의 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사회적 틀 앞에서 그들은 해고의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의 노동자들의 삶을 알려내자. 자기발전을 위해 노력해서 스펙을 열심히 쌓고 취업을 한다고 해도 안정적인 일자리가 보장될 수 있는지는 절대 장담할 수 없는 현실의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적극적으로 폭로해 내자! 


Posted by 행진

2009/11/24 12:50 2009/11/24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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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특호_각론1] 학생회/학생사회

자치-저항-연대의 가치로
대학사회를 다시 세워내는 실험을 지속하자!



0. 들어가기

 지난 해 ‘미국 발 금융위기’는 예고가 아닌 현실로 닥쳐왔다. 그 이후 나타난 남한의 경제위기, 용산참사, 쌍용차 투쟁 등 일련의 사태를 거치면서 우리는 수많은 경험과 교훈, 평가의 지점을 얻었다. 문제가 없는 곳은 없고 그 농도는 짙기만 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위기의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겐 해야 할 일이 매우 많다. 광범위한 이명박 정권에 대한 민심이반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불만, 정권에 대한 불만은 반역으로 폭발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주노동자에 대한 적대, 여성에 대한 폭력, 더 많은 경쟁의 내면화로 귀결되고 있다. 거대하게 결집했던 촛불은 각 공간으로 흩어져 대안적 힘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렇듯 대안을 창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을 알고 있고, 대안을 희망하고 있는 우리가 한발 앞서 고민하지 않는다면 변혁은 더욱 요원하다는 것을 명심하자. 경찰과 법의 권력, G20 개최와 경제위기 극복이라는 발전주의 전망의 살포로 더욱 더 강력한 통치성을 유지하고자 투쟁하는 지배계급에 맞서기 위해서는 당장 내년 한해, 가장 구체적으로 ‘융합 가능한 대안’을 만들어내기 위한 첫걸음을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해야만 할 것이다.
 대중과의 융합의 태세를 준비한다는 것은 한방의 가장 멋진 정책을 만들어내자는 뜻은 아니다. 융합의 조건은 항시적인 긴장감과 노력 속에 창출되는 것이며 한 발 앞선 대중으로 사는 헌신적인 활동가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기에 이번 학생사회 각론에서는 학생회라는 쟁점을 중심으로 학생사회의 정치의 방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학생회라는 공간이 최근 몇 년간 어떻게 비/반권 세력에 의해 규정되어 왔는지에 대해 분석하고 작년과 올해를 경유하며 그것이 변화했던 양상, 2010년 우리가 주목해야 할 바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이 안의 목표이다.


1. 2009 학생사회

 2009년 남한사회의 키워드는 죽음과 생존이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숱한 연예인, 유명인사의 죽음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수장을 했었다던 사람도 죽음을 택했다. 이 죽음에 열렬히 자신의 삶을 투영시켰던 많은 사람들은 그 웅장하고도 슬픈 하나의 내러티브를 위로하고 삶으로 돌아선다. 그러나 돌아선 삶의 모습은 또 다시 죽음, 혹은 생존이라는 팍팍한 선택지였다. 공존을 외쳤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택배노동자를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해달라던 박종태 열사의 외침은 죽음과 죽음보다 더 한 폭력으로 답변 받았다.
 경제위기의 출구를 벗어났다고 샴페인의 터트리는 신문과 기업인들의 말이 더 이상 달콤한 위로가 되지 않는 것은 우리 모두의 삶을 통한 학습이었다. 인간의 역사이래, 민중이 고달프지 않았던 시간이야 정도를 달리할 뿐 없던 적이 있겠냐고 질문하겠지만,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박탈당한 사람의 몫은 피로가 아닌 절망이었다.

1.1 2010의 새로운 비전을 외치며 달려왔던 대학들. 21세기 들어 변화한 대학의 발전주의 이데올로기는 어디로 가고 있나?

 남한의 모든 대학들은 학교발전 이데올로기를 공세적으로 퍼붓는데 여념이 없다. 발전주의 이데올로기의 실체는 등록금을 더 올릴 구실, 학생들의 불만을 잠재울 플랜, 대학 배치표에 좀 더 위 칸에 위치하고자 것일 뿐이었다. 대학들은 교육이 상품임을 자신 있게 천명하고 있으며, ‘더 질 좋은 교육이라는 상품을 더 많은 돈을 주고 사는 게 뭐가 나쁘냐?’는 말이 이제 어색하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2010년의 비전을 각자 앞세우며 성과를 내겠노라고 미래의 희망을 팔았던 대학들의 성적표는 그리 좋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일어난 학과 구조조정, 기초학문의 파괴, 교수들의 성향분석을 통한 학풍마저 바꿔 버리기만으로도 각 대학은 일정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였는데, 앞으로 더욱 심화될 신자유주의 교육 구조조정의 조건을 확립한 것이다. 이것은 지배계급의 단결을 더욱 도모하게 해줬고 장기적으로 남한사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것 이다. 나름의 ‘공공성’과 ‘사회적 책무’를 갖고 있던 대학의 신자유주의 교육 재편으로 드러나는 이후의 폐해는 민중들의 삶에 고스란히 이전될 것 인데, 현재 측정되지 않는 위협의 종류는 다양하다. 오른 등록금으로 인해 빚더미에 앉아 사회로 나간 청년들과 가계를 탕진한 가정들 역시 그 위협의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대학의 발전주의 이데올로기는 계속될 전망이다. 각 학교의 캠퍼스 신설, 학과 구조조정과 재배치, 대학 통폐합이 지속될 전망이다. 서울대를 시작으로 본격 궤도에 오르게 될 국립대 법인화는 이제 각 지역의 국립대에게 더 이상 선택지가 아니다. 법인화에 따른 경쟁에 참여하는 것은 도태되지 않기 위한 필수 과정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각 학교는 더욱 더 효과적이고 간편한 학교 내 구조조정을 달성하기 위해 학생들의 자치를 탄압할 수 있는 계획을 적극적으로 내고 있는데 이들의 목적은 학내 학생들의 자치활동,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자치 동아리나 학생회에 대한 지원은 줄어가고 학생들을 위한 지원은 학과 내의 취업동아리, 학교가 지원하거나 멘토 교수님과 함께하는 공모전 동아리들 뿐 이다. 성균관대의 경우는 3년 전부터 학교와 농협이 주최하는 농촌봉사활동에 지원금을 주고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농민학생 연대활동을 정치활동이라는 이름으로 탄압하고 있다. 성신여대의 경우에는 외부 단체에서 강의실을 빌릴 수 없게 하는 것은 물론 학교의 학생들이 대여하는 경우에도 외부인이 한명이라도 참가할 시 사용료를 지불하게 할 방침이라고 한다. 중앙운영위원회나 총투표를 통해 발의되거나 가결된 안은 학교의 일방적인 통보에 따라 무시당하기 일쑤고 몇 해 전부터 ‘개인정보 보호’라는 이름으로 새로배움터에 참가해야 하는 새내기들의 연락처도 주지 않는 일이 부지기수다. 과를 통폐합하고 축소하면서 이전의 과방을 열람실로 변경하거나 없애버리는 것, 밴드의 연습공간을 소음을 이유로 폐쇄하는 일들이 각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다. 학교의 이러한 행태는 교육의 상업화를 위한 구조조정과 이를 저지하려는 학생들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기 위한 플랜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를 막아내는 투쟁 벌이지 않고는 학내 정치는 그 운신의 폭을 계속해서 좁혀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마어마한 돈을 투입해 새로운 캠퍼스를 만들고 학사제도를 개편하고 학과를 구조조정하는 과정에는 학생들의 교육에 대한 보편적인 권리, 자치와 연대의 공동체는 발붙일 곳이 없다. 하기에 적극적으로 학교의 발전주의와 대결하는 것, 대안을 만들어 내는 것은 늦출 수 없는 과제가 되어가고 있다. 단지 학교의 계획을 저지하는 것을 넘어서 대안과 희망이 되어야 할 것이다.

1.2 시지프스의 하루, 하지만 우리에게도 꿈은 있습니다.

 지금의 대학생들이 스무 살이 되자마자 들었던 이야기는 88만원 세대라는 호칭이었다. 시대인식이 없고 책임감이 떨어지는 세대, 인내가 부족한 세대... 어른들에게 이런 말을 듣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입시교육, 조기교육에 지쳐있는 세대에게 더 빨리 자라라는 어른들의 투정은 이미 익숙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호탕하게 세상을 호령하던 세대도, 미래에 대한 걱정과 의심이 없던 세대도 지금 이 시대의 청년은 아니다.
 
‘청년들은 너무 자주 미래에 의해 방해 받는다’

 더 나은 미래, 더 나은 살림,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발버둥 쳐야하지만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약속은 없는 것이 우리 사회의 냉정한 현실이다. 끊임없이 경쟁을 내면화하고 초중고 시절 내내 사교육으로 교육받고, 대학에 들어와서도 토익학원부터 각종 자격증 학원을 뺑뺑이 돌며 한편으로는 과외선생님으로서 사교육 시장의 한 축이 되는 대학생들은 꿈조차 사랑조차 사치스럽다고 이야기한다. 생산적인 어떠한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잉여인간’으로 자신을 재빨리 규정하고 패배감을 내면화하며, 언제나 무언가를 하고 있어야만 마음이 편한 지금의 청년들은 꽤나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20대에게 한 평의 집도, 괜찮은 미래도 쉽게 약속하지 않는다. 심지어 촛불이라는 정치적 반란의 시기도 시작은 10대에게 마무리는 386에게 빼앗긴 20대는 통째로 이 사회의 아웃사이더인 것 같기도 하다. 동아리도 ‘스펙’을 위해 선택해야 하는 시대, 야망은 적고 상처는 많다.
 이러한 좌절과 상처 속에서도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2009년 청년들의 모습은 그리스신화의 시지프스를 떠올리게 한다. 끊임없이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끊임없이 산 위로 올려놓는 노동을 반복하는 시지프스, 21세기의 시지프스들에게 다른 점이 있다면 오를 산과 바위를 고르고, 바위를 굴리는 방법을 학습하고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위안 삼으며 좀 더 좋은 산, 바위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할 수 있다는 점일까. 복잡한 세상을 살고 있는 시지프스들은 스스로를 ‘중립’으로 규정지으며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투여된 노력만큼의 분명한 성과를 끊임없이 구별할 것을 교육받았다. 자신의 삶에 대한 더 많은 개입으로부터 셔터를 내리고 외로운 사회에서 자신의 공간을 찾고 인정받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으며 모두에게 이것은 선택의 여지없이 살아가야만 하는 ‘일상’일 뿐 이다.
 하기에 세상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듯한 청년의 모습만 눈앞에 보일 지라도 청년들은 세상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세계화의 거대한 피해자가 누구고 누가 전쟁으로 돈을 벌고 누가 생명을 잃는지에 대해서 모두 알고 있으며 그것을 바꾸고자 하는 열망은 어디에나 숨어있다. 때가 아니라고 포기하기 쉬운 때일수록 지금 여기서 시작하는 마음과 계획이 절실하다. 혼자만의 시도와 좌절이 아닌 곁에 있는 이들과 함께, 현실에 맞추어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발 딛고 있는 삶의 조건을 다시 구성해 나가는 행동이 지금 이곳에 필요하다.    


2. 학생회를 둘러싼 쟁점과 전망

2.1 학생회를 둘러싼 쟁점

비/반권의 자태변환
 소위 촛불 정국, 시국선언 정국을 맞이하며 2000년대 초반부터 우경화 혹은 소멸로 수렴되어가던 학생회의 모습에 반전적인 모습이 드러났다. 총투표를 거쳐야 하니, 말아야하니 말도 많았지만 비/반권 학생회들이 깃발을 들고 거리에서 학생들과 함께 달렸고 교수들의 시국선언에 동참하며 ‘준엄한 목소리’로 시대를 타일렀던 것이다. 깃발을 들고 거리를 달리며 대표를 자임하는 학생회는 권력적이며 편협하다고 말하던 그들이, 더 많은 숫자의 의견을 대변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주장했던 그들이 학교 바깥을 향해 발언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비/반권의 자태변환에 대해 한 쪽에서는 섣부른 기대를 걸기도 했고, 한 쪽에서는 냉소를 보내며 ‘니네도 별 수 없더냐’는 눈길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와 복지를 이분화 했던 그들의 정치학이 틀렸음을 확인하는 것을 넘어 왜 이들이 거리로 나와야겠다고 생각했는지, 학우들은 왜 학생회에 이것을 요구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비권’을 표방하던 학생회가 이야기하던 정치와 복지의 구분, 학내 사안과 학외 사안의 구분이 허구적이었으며, 학생사회 역시 남한 사회의 모순이 투영되는 공간이기에 캠퍼스 밖 사회와 학생들의 이익이 분리될 수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학교 운동장을 유명 연예인의 콘서트 장으로는 사용하는 것은 용인하면서 노동자들의 집회장소로 사용 것에는 반대해 왔던 그들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며 그들이 기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경계를 우리는  ‘폭발적인 정세’ 속에서 가로질렀다. 그러나 이러한 자태변환은 학생들의 요구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또한 기억해야만 한다. 학생들은 학생회가 해야 되는 역할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했고 비/반권 학생회는 그/녀들의 이러한 요구를 수행해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비/반권 학생회는 이러한 정치적 행위를 ‘대리’하는 것 이상으로 하지 않았는데 지속적으로 싸움을 만들어가는 것, 정치의 결실을 다시 학생사회의 공동체에 축적해 나가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학우들은 거리에 나섰고 지신의 입장을 개진했지만 정치의 공간은 실제로 확장되지 않으며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의 원동력은 학생사회에 지속되지 않고 논쟁과 투쟁은 하나의 국면이 지나자 증발되었다. 반면 역사적으로 있었던 변혁의 성과는 공동체에 남아 구성원들의 인식과 삶을 재구성하며 축적되었다. 하기에 우리는 이 쟁점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서, 학우들이 직접 할 수 있는 실천을 던지기 위해 노력했었고 더 많은 사람과 논쟁하기 위해서 노력했으나, 이들은 학우들의 요구만을 받아 안는 액션만을 취할 뿐 근본적이고 집단적인 정치를 외면하고 ‘한방의 시국선언과 가장 큰 촛불 집회로의 규합’ 으로 요구를 마무리 지었던 것이다.

 연세대 총학생회의 경우를 보자. ‘학생을 향합니다, 연세 36.5+’를 걸고 ‘학생권 학생회’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당선된 그들은 오직 학생만을 위한 학생회를 만들겠다고 했었다. 이렇게 학생운동에 대한 선긋기에 여념이 없던 그들이 연세대 총학생회가 지난 노무현 추모국면에 추모 촛불 집회에 참가, 추모 콘서트를 학교 안에서 개최하려다가 학교와 충돌을 빚기도 했다. 이들의 이러한 행보는 특정 정세 안에서 그들이 스스로를 분리시키던 ‘운동권’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실제 학교의 몇몇 학생들은 ‘너희가 운동권과 다른게 뭐냐, 왜 학교를 소란스럽게 만드냐’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에 대한 답변으로 이들은 추모 콘서트를 개최하는 것은 ‘비정치’적이고 ‘순수한’ 추모 활동이라고 강변했다. 하지만 정치는 정당이 관계 되었나 아닌가, 정치인이 참석 하는가, 그렇지 않나가 아니다. 이미 이것은 통속적 의미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정치’라고 보여 졌을 뿐만 아니라, 정치란 우리가 생각하고 발언하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발언해야 하는 것은 이 정치적 콘서트의 개최를 막았던 연세대 대학 본부의 ‘정치적 입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비판하고 논쟁하는 것이었다. 연세대 총학생회가 추모 콘서트의 ‘비정치성’을 부각시키는 순간 오히려 연세대 학생들의 ‘정치적 입장’은 설 자리를 잃었고, 추모 콘서트에 참여하고 제 자리로 돌아가는 행위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한정지어야만 했다. 바로 이것이 공동체의 정치를 허물어트린, 오히려 민주주의의 진짜 실현을 가로 막은 ‘정치적 행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는 시국선언을 한 몇몇 교수님들, 순수한 총학생회장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가 역시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결론의 전부는 아니다. 계속해서 진행되던 학생회, 학생사회의 비가역적인 해체가 촛불 투쟁을 겪으며 학생회의 역할에 대한 기대의 변화를 가져왔고, 운동권/비반권 학생회로 역할 구분을 하던 2000년대 초중반의 프레임과는 달라졌다. 우리는 학생회를 통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재진단할 수 있었다. 학우들이 학생회를 통한 집단적인 문제해결을 다시 호출하기 시작했다면 우리는 자치, 연대, 저항이라는 가치를 통해 그 동안 어떠한 세력도 하지 못해 온 학생사회 정치의 복원을 아래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민주/비민주, 복지/정치
 학내 민주주의의 표상이며 저항, 자치, 연대를 구현한다던 학생회는 학생사회의 비가역적 해체 이후 학우들에게 비민주, 심지어 권력 집단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인식에 기여한 것은 시대의 흐름, 그리고 그 흐름에 대응하지 못하던 운동세력뿐만 아니라 조직화된 비/반권의 움직임이 있었다. 비/반권은 2000년대 초반부터 대학 내에서 ‘탈정치’, ‘학생만을 위한’, ‘복지중심’ 학생회를 만들겠다고 선동했고 이러한 정치와 복지의 이분화는 학우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공감을 얻어갔다. 정치적 입장을 강변하는 학생회가 아니라 제대로 된 복지서비스를 학생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이 진짜 학우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민주적’인 학생회라는 것이었다.
민주주의, 과연 학생사회의 민주주의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학생회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자치를 통한 학생권력의 획득, 만인이 정치의 주체일 수 있는 것, 논쟁이 기능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에 있다. 현재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대의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최고형태가 될 수 없음을 인식하며 학생회라는 자치공동체가 만들어졌고 학생회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학습하는 공간이었다. 본디 민주주의는 확장적인 개념이다. 민주주의는 특정 형태와 결합하며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합의를 만들어가는 ‘논쟁’ 그리고 그 논쟁이 생동할 수 있는 ‘공동체’가 살아있는 것이 첫 번째 조건이다.
 바로 이것이 학생회, 학생사회가 지향하던 자치의 원리였다면 비/반권 학생회에 2000년대 초반 이에 대응하는 방식은 정 반대의 방향이었다. 학생회가 함께해야 하는 것은 ‘일반 학우’의 이해라고 주장했다.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고 인정하는 사업이 아니면 대표를 맡고 있는 학생회는 수행하지 않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이러한 비/반권 학생회의 행보는 학생사회의 해체를 가속화 시키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최근 촛불이라는 국면 속에서도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거나 학생회의 정치적 입장을 대리주의에 가두는 편향은 학우대중의 분노를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해결하고 오히려 잠정적 표류국면을 쉽게 형성함으로써 논쟁의 조건을 허물어버렸다. 공동체는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일순간 결집하는 듯 보였다가 사라지며 허물어졌다. 이러한 경험은 결국 ‘우리는 힘이 없다’는 패배적 교훈을 안겨주었다. 거리가 만, 삼만, 오만, 십만의 촛불로 그 세를 불리는 동안 보였던 잠깐의 희망, 스스로의 힘에 대한 감동은 ‘그리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더 큰 패배감으로 돌아왔다. 공동체의 정치는 좀 더 많은 힘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적극적으로 ‘입장’을 개진할 수 있어야 하고 행동을 유발할 수 있어야만 입장은 힘을 갖는다. 모든 의견을 존중하나 가장 보편적인 ‘일반학우’를 존중해야 한다는 애매한 정치적 다원주의의 표방은 사실 침묵보다 더 지독히 현실을 은폐했으며 정치의 공간을 파괴했다.
 이러한 비판의 대상은 비/반권 학생회만이 아닐 것이다. 대중이데올로기와의 융합의 계획을 내지 않는 순간 공동체의 정치와 저항을 이야기하는 우리 역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최근 몇 해 간 한국대학생연합은 이 지점에서 복지와 정치의 이분법으로 수렴되어가는 우려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는데, 일단 ‘대학생들의 공동의 이해와 요구’를 중심으로 투쟁하고 이후 다른 쟁점으로 이동하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명심해야 하는 것은 앞에서 밝혔듯 복지와 정치의 분리가 허구적이라는 것, 정치적 대리주의는 공동체의 정치를 질식시키는 효과를 낳는 다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전 사회적인 연대에 기반 하지 않고 당사자들의 이해에 착목해 벌이는 운동은 지배이데올로기에 균열을 내기보다는 자기사안에 갇힐 가능성을 내포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남한사회의 모순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이를 통해 현 시기 가장 필요한 정세적 투쟁이 무엇인지 판단하는데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일반학우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 진짜 학생회라고 소리 높였던 학생회들이 있었으나 일반학우라는 언명은 사실 정체가 없는 슬로건에 불과했다. 정치/복지의 이분법이 허구적이듯 비/일반의 학우로 나뉠 수 있다는 것 역시 허구였다. 학생회라는 것, 학생이라는 것은 ‘대학’이라는(경계 지을 수 없는) 울타리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모두가 사회의 한 조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의 입장으로 통일이 가능하다는 것이 환상에 가깝다. 입장의 차이는 차이가 있는 부분을 채택하지 않고 발언하지 않음으로써 존중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차이를 부각시키고 토론할 수 있어야만 민주주의는 그 이념에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 단지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허구적인 선언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부딪히며 ‘입장’을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요구해야 하는 진짜 민주주의다.

2.2 논쟁의 공간, 정치의 공간을 여는 학생회

 비/반권들도 그들의 정치학에 따른 입장과 계획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자기 활동을 펼치고 있지만 그것은 정치가 아니라고 강변하는 모순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정치를 안 하겠다’는 말이 정치로부터 그들을 자유롭게 해주지도, 정치적 책임으로부터 면죄부를 주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즉, 입장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되 어떠한 ‘입장’을 가질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어떠한 입장과 태세로 학생회를 준비할 것인가?
 많은 학생들은 정치로부터 자신의 과소 참여시키고 있으며 정치는 박근혜, 이명박, 노무현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비정규직 법안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바꾸고, 부자감세, 대운하 사업은 우리의 삶으로 깊숙이 전달된다. 등록금 문제는 우리 가정 경제 문제나 학교와의 협상문제가 아니라 전 사회적인 문제이며 전 사회적인 차원에서 발언되지 않으면 해결 역시 가능하지 않다. 이렇게 정치는 이름 있는 정치인들의 이전투구가 아니라 우리의 삶 가장 깊숙한 곳으로 침투하고 개입하는 문제이며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 바라는 사회, 발언하고 표현하는 모든 것에 녹아들어 있다. 하기에 공동체가 논의하고 논쟁하고 함께 해결해야 하는 진짜 문제는 학교 주변 상점에서 할인받을 수 있는 카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청년들을 실업자로 만들고 가난하게 만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 등록금에 대해서, 재개발에 대해서 논쟁하는 것이다. 논쟁의 공간을 연다는 것은 하나의 결과물, 한 번의 자리를 만드는 것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서울대 법인화 문제와 관련하여 총학생회는 총투표를 발의하고 진행했으나 적극적으로 집단적 논쟁을 만들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총투표 결과 79%의 학생들이 법인화에 반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지금의 학생회는 이 결과를 가지고 정치의 공간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학우들의 요구가 있을 때마다 그것을 대리하며 움직이는 학생회가 아니라 대중들의 고민과 요구를 받아 안아 논쟁의 공간을 열고, 집단적으로 문제 해결의 과정을 만들어 나가는 학생회다. 논쟁과 갈등을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학생회를 만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논쟁의 공간을 여는 것뿐만 아니라 논쟁이 가능한 조건을 만드는 것이 바로 그 역할일 것이다. 논쟁이 가능한 기층 공동체의 복원에 복무하고 지적 차이를 감소시키기 위한 노력, 중요한 사안이 더 많이 학우들에게 인식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총체적인 과정이 필요하다. 이것이 학생사회 안에서 학생회가 해야 하는 역할이다. 현실의 침묵을 깨뜨리는 정치, 그것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진정 오늘 날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각개분산하지 않고 규합될 수 있는 집단적 저항을 창출하는 것, 그리고 그 힘으로 서로가 서로를 배반하는 경쟁이 아니라 대안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몇몇 사람들의 돈 놀음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생존의 위협에 내몰렸던 금융화, 노동자와 여성, 이주민에 대한 차별, 돈을 생명보다 소중히 여기는 전쟁에 반대해야 한다. 공동체를 통한 정치, 연대의 가치는 바로 이것에서 출발한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와 정치에 대한 입장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입장’을 통한 학생회, 더 많은 민주주의를 스스로 구현하는 학생회를 통해 정치의 복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3. 학생사회 재구조화를 향한 헌신, 그리고 새로운 실험!

학생회의 표상을 다시 세워내고 자치의 원리를 구현하자!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더욱 더 폭압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정세와 빠르게 자신의 준거점을 이동시키는 대중이데올로기 사이에서 예각화 된 실천 전략이 필요하다. 무엇을 발언하고 무엇을 제안할 것인가, 무엇과 대결하고 무엇에 저항할 것인가?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양면적이고 돌출적이다. 대중운동 활동가라면 비단 선거기간이 아니라 언제나 대중과의 융합의 준비를 해야 한다. 특히 선거라는 집중적인 정치의 장이 열리는 시기엔 어떠한 입장과 정책으로 학생사회와 공동체의 재건을 제안할 것인지 원칙을 확인하고 각급 단위와 학생대중이데올로기에 맞게 실천 방향을 짜나가자.

학교는 광장이 되어야 한다.
 지난 6월, 연세대 정문은 거대한 셔틀버스로 막혔다. ‘사법고시 시험준비를 하는 학생들을 위해 콘서트를 불허’한다는 학교의 입장에 따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 콘서트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성신여대에서는 모든 행사에 강의실 대여료 매기겠다는 계획을 제출했다. 담장없는 대학을 지향하고 대학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논하던 대학은 상업적인 공간으로 스스로를 자임하는데 익숙해져가고 있다. 이러한 학교의 계획은 대학의 상업화, 학생 공동체의 파괴와 그 궤를 함께 하고 있다. 하지만 대학은 ‘광장’이 되어야 한다. 모든 공간과 지식이 돈에 의해 점유되고 있는 시대에 노동자와 빈민에게 대학이 문을 닫는다면 연대와 대안은 더 멀어져가게 될 것이다. 평등하게 열린 공간으로서 대학을 사수하고 학내 자치와 민주주의를 바로세우는 싸움을 시작하자. 모든 기층 단위 학생회의 자치권을 보호하고 학교의 담장을 높이려는 본부의 상업적 계획을 저지하며 자치-연대-저항의 원리를 실현시키자.

기층 공동체를 재건하는데 복무하자!
 기층 공동체의 재건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다. 정치 재건의 조건이 될 수 있는 기층 공동체의 복원이 절실하다. 기층 공동체의 복원은 각급의 단위마다 그 위상과 목표를 달리할 수 있을 것이며 각자의 위상과 목표에 걸맞는 계획을 제출할 수 있을 것이다. 단위학생회가 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방식에 대해서 지금까지도 많은 실험을 해왔다. 소식지 발간과 소리통, 운영위원회와 집행부 운영의 정상화 등이 지금까지 제기되고 노력했던 것들이었을 것이다. 각급 단위 학생회에서 낼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계획을 장기적인 안목 속에 배치하며 단위의 자치, 자활력에 복무할 수 있는 활동을 지속하자.

학교발전 이데올로기와 적극적으로 대결하자!
 발전주의는 다양한 형태의 이데올로기와 만나며 권리를 포기하거나 폭력을 정당화 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연세대 송도캠퍼스 이전, 서울대 법인화, 중앙대와 동국대 등에서 활발히 벌어지고 있는 학과 구조조정은 학교발전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다. 많은 학생들은 이것이 자신에게 ‘더 나은 교육’을 보장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대안이 없다’는 것 때문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을 보류하고 있다.
  공세적으로 학교발전 이데올로기를 살포하고 있는 학교본부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중앙운영위원회 의결, 총투표 정도의 계획으로는 부족하다. 현재 학생사회의 물질적 조건 상 이것만으로 담보할 수 있는 정치의 공간은 넓지 않기 때문이다. 총토론회, 만민공동회와 같은 좀 더 포괄적이고 적극적인 기획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앞에서 주지했던 원칙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계획은 한 번의 기획, 한 번의 자리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자. 지속적으로 쟁점을 추동하고 다양한 급에서 학우들과의 접면을 넓히는 계획 속에 학교발전 이데올로기, 넓게는 발전주의 이데올로기와 대결하며 대안을 찾아나가자.

사회적 문제에 대한 집단적 인식, 논쟁의 공간을 열자!
 ‘대학’이라는 공간이 대안 담론, 대안 교육, 다른 목소리를 발언하는 집단이자 공동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로 문을 활짝 열고, 민중들과 연대해왔기 때문이었다. 사회문제에 대한 집단적 인식이라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대학이라는 새로운 담론이 있는 열린 공간에서 논쟁하고 토론하며 만들어져왔던 결과물이었다. 최근 몇 해간, 학내 집회나 문화제 등이 ‘학생들의 학습권을 침해 한다’등의 논리로 개최가 금지되고 있는 양상은 매우 우려할만한 수위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기회도, 모일 수 있는 장소도 없는 노동자, 빈민, 농민들에게 대학이라는 공간이 열리는 것은 대학의 사회적 책무인 동시에 대안적인 담론, 논쟁의 공간을 여는 행위이기도 하다.
 학교의 담장이 높아져가고 사회문제에 대한 ‘대학생’이라는 공동체의 집단적 인식이 부재한 지금, 대학이라는 공간을 통해 지향해야하는 가치와 인식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제기하자. 왜 대학생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하는지, 왜 노동자 민중, 빈민들과 연대해야 하는지, 왜 구조조정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고 금융화에 반대해야 하는지, 여성의 문제가 왜 우리 사회의 주요 쟁점이 되어야 하는지 말해야 한다. 대학이 단지 전공과목을 공부하고 사회에 나가기 전 ‘스펙’을 쌓는 공간이 아니라 삶의 다양한 영역을 이해하고 관점과 입장을 키우며 그를 통해 논쟁할 수 있는 공간임을 학우들과 함께 실험해나가자.


Posted by 행진

2009/11/24 12:42 2009/11/24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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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계급의 위기 전가!
 집단적 시대인식-집단적 실천으로
대학의 정치를 복원할 학생회를 건설하자!



■ 2009년, 현 시대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1. 금융위기 1년, 위기 전가에 맞선 ‘정치’가 부족했다

1-1. 경기회복론은 노동자 민중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졌다!

  지난해 9월 세계 금융위기를 몰고 온 리먼 브라더스 파산사태 이후 1년, 금융위기에서 촉발되어 실물경제에 불어 닥친 후폭풍은 그야말로 거셌다. 수많은 모기지 업체가 파산하였고 메릴린치, AIG 같은 투자은행과 보험회사가 줄줄이 매각되거나 국유화되고, 미국경제를 선도했던 GM, GE의 주가 폭락으로 경제위기는 더욱 심화되었다. 복잡한 그물망으로 연결된 파생금융상품을 타고 위기는 세계 곳곳으로 급격히 전염되었다. 많은 국가들이 단지 주가 폭락하여 개미투자가, 기관투자가 등이 거금의 돈을 공중에서 날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거시적 차원에서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각국 정부는 금리를 대폭 낮추고 수천억 규모의 달러를 공급하는 경기부양책을 내놓으며 활활 타오르는 경제위기의 불을 끄기 위해 난리법석을 피웠다.
  최근 세계 경제상황이 호전되고 있다는 보고서와 발표들이 잇따르고 있다. 이들은 지난 1년의 제 조치들에 대한 다양한 평가와 이후 전망을 낙관적으로 그리고 있다. 물론 작년의 금융위기를 예견해 '닥터 둠'으로 불리는 루비니 같은 비관론자들은 경제가 '더블딥'(경기 상승후 재하강) 위험에 직면해 있다는 어두운 전망을 밝히기도 한다. 한국역시 급락세는 일단 진정되었으나 성장세를 확신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분석이 주를 이루지만 전 세계적 경기 반등의 영향으로 한국 경제 역시 지난 상반기를 지나면서 경상수지가 흑자로 돌아서고 주식시장이 급등하는 등 경제 지표가 안정화 국면에 들어섰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한국 경제의 회복이 가능했던 이유의 첫 번째는 자본시장의 거품에 다시 의존하였기 때문이고 둘째는 환율 상승으로 인한 수입 감소로 경상수지가 흑자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2009년 8월 현재 수출은 작년 동기 대비 20% 하락했지만, 수입은 32% 하락하였다. 이 때문에 ‘불황형 흑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심지어 수출 중심의 재벌기업들은 경제 위기 영향을 덜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제 위기로 더욱 많은 이익을 보았다. 시가총액 상위 100개사의 영업이익은 올해 46조 원에 이를 전망인데, 이는 사상 최대 규모의 영업이익을 낸 2004년 53조 원에 버금가는 수치이다.
  이렇게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재벌 기업들의 이익이 급등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노동자들의 희생을 강요함으로써 생산비용을 감소시켰고, 정부의 경기부양책의 효과를 톡톡히 보았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했고 부품업체들에 대한 납품단가를 인하함으로써 삭감한 생산비용이 매출액 감소분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한편 상반기 정부의 경기부양책은 대기업들의 소비를 적극적으로 보조해주었다. 국내 노동자들의 소비 감소로 내수를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대기업들의 내수는 약간 늘어나거나 크게 줄지 않을 수 있었다. 재벌기업들이 임금을 삭감하고 그 대신 정부가 노동자들의 세금으로 임금 삭감에 따른 소비 축소를 만회해주며, 재벌기업들의 배를 불려준 것이다. 이것이 정부가 말하는 ‘재정지출 확대하고 조기집행을 서두르면서 경기회복 발판을 마련하였다’는 평가의 진실이다.
  최근 여론조사에서도 현재의 경제상황에 대한 기업과 일반 국민의 시각은 엇갈렸는데, 기업들은 바닥을 지난 회복세로 돌아섰다고 말한 반면 국민들은 속도는 줄었지만 아직 경기침체가 이어지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환율 등 수출 환경 개선으로 기업 실적은 좋아졌지만 국민들의 체감 경기는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경기회복과 함께 민중들의 삶은 동반상승하지 않았다. 내년 G20 회의 개최에 대해 "대한민국은 지금 국운 상승의 기회"라며 자화자찬하는 이명박 정부에게 박수칠 수 없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1-2. 위기 전가, 그러나 우리의 정치는 부족했다.

  노무현, 김대중 두 대통령의 갑작스런 죽음에 노동자, 농민, 여성, 학생 등 수많은 시민들로 이루어진 추모행렬은 저 세상으로 가는 마지막 길을 성대히 배웅하였다. 겉으로는 ‘민주주의’, ‘개혁’, ‘진보’라는 수사를 달았지만 실제로는 전 세계의 금융세계화에 적극 편입해 들어가면서 더욱 경제의 불안정성을 심화시켜나갔으며 이와 동시에 불안정노동을 확대시켜 노동자 민중에게 참혹한 삶의 굴레로 몰아넣었던 두 ‘신자유주의 전도사’들은 ‘민주’, ‘평화’, ‘인권’ 등의 화려한 훈장을 받아갔다. 반면, 주주와 경영진의 문제로 파산에 몰린 쌍용자동차의 대대적인 정리해고 시행에 맞서 이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노동자들에 대해 정부와 주요 보수언론들은 ‘집단 이기주의’로 그들을 몰아세우며 여론을 압박해갔고, 목숨을 걸고 평택 공장을 지켰던 쌍용차 노동자들의 투쟁은 ‘당사자’들만의 투쟁으로 초라하게 일단락되었다.
  결국 정리해고와 임금삭감 등 경제 위기의 책임을 우리에게 떠넘기는 것은 노동자 민중 스스로의 삶의 조건을 크게 변화시킬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변변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삶의 문제에 있어서는 개개인의 능력과 노력으로 해결해야할 문제이지 함께 부당함에 맞설 생각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여기서 다시 정치/경제, 시민/노동자의 분리도식은 재생산되었다.


2. 2009년을 사는 대학생과 정치의 위기

2-1. 자기계발의 양가성에 내포된 반역의 가능성

  대학의 변모: ‘정치의 공간’에서 ‘취업준비기관’으로
  2009년을 살아가고 있는 대학생들을 표현하는 말을 딱 한 가지만 꼽으라면 '불안'일 것이다. 매일 신문과 뉴스에서 코스피 지수가 올랐다느니 환율이 안정됐다느니 하는 얘기가 나오지만 대학생들이 생활에서 체감하고 있는 경제위기는 여전하다. 사회 전체적으로 비정규직, 정리해고, 청년실업이라는 말이 일상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청춘'들이 푸른 꿈을 펼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불확실한 미래의 시대, 강요되는 위기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대학인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학이 자치단위 등의 공동체들과 그 내부에서의 활발한 자치활동을 담보하는 ‘정치의 공간’에서 ‘취업준비기관’으로 전락한 것은 꽤 오래전부터 익숙한 풍경이다. 예전에 학생사회는 누군가 나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치(自治)를 통해 직접 발언하고 행동하며 집단적으로 문제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정치의 역량을 강화해 왔다. 대학 내에 다양한 공동체(학생회, 동아리 등 자치단위)내에서 저항을 위한 지식과 실천을 담보해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저항의 경험은 새로운 구성원들에게도 계승될 수 있었다. 하지만 불안정한 노동이 사회 전체로 확산되고 그 결과로서 빈곤이 확산됨으로 인해 대학교육을 훌륭한 성적으로 이수한다고 해도 바로 취업이 되지 않는 상황은 고등교육의 근간 자체를 흔드는 요인이 되었다. 취업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대학인들에게 자신을 돌보는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삶의 양식은 미덕이 되고, 끝을 모르는 경쟁마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소위 ‘멀티족’이라 불리며 영어학원, 헬스, 영화감상, 학점관리 등의 스케줄이 다이어리에 빼곡하게 적혀있는 ‘열심히 사는 대학생’이 그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러한 삶의 양식인 ‘자기계발’은 신자유주의 시대 불안정한 노동/유연한 노동이라는 자본의 요구에 걸맞은 ‘다용도성’을 기르는 것을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라 생각하여 끊임없이 다방면의 지식과 경험을 쌓는 것을 중요한 삶의 자세라 여겨진다. 그리고 대학에서 생산되는 지식이 자본에 적합한 기술로 전락하고, 자치 공동체와 학생운동이 소실된 상황에서 대학인들의 공통의 경험과 지식은 사라지고 있다. 지금까지 구축해왔던 대학인들의 동일성은 해체되고, 대학 안에서도 나이별ㆍ성별ㆍ지역별ㆍ학과별 차이에 따라 분절화ㆍ파편화되어 간다. ‘집단’의 문제를 ‘집단적으로’ 해결하는 법을 모르고, 그 전통이 점차 유실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대학인의 내면적 갈등: 자기계발의 양가성
  그러나 이렇게 자기계발에 힘쓰는 대학인 내면에는 모순이 발생한다. 스펙 쌓기로 빡빡한 삶을 잘 살다가도 ‘이게 아니다!’라며 지금 이렇게 굴러가는 사회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불만과 마주치는 것이다. 영어학원, 헬스, 학점관리 등으로 빡빡한 삶의 궤도에서 약간만 벗어난 취미생활과 같은 활동을 하더라도 자기 스스로를 ‘잉여인간’이라 칭하며 한숨 섞인 체념을 하는 정서나, 엄친아/엄친딸이 떵떵거리며 다닌다는 삼성에 취업하고 싶어 하면서도 새벽같이 출근해서 자정이 다되어서야 퇴근하는 그런 삶을 비인간적이라며 고개를 가로젓는 모습. 이는 신자유주의가 강요하는 자기계발의 삶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양가적이다. 대학인의 진보적인 열망을 찾을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여기인데, 자기계발의 한계에 맞닥뜨릴 때 “그렇다면 어떤 자기계발이어야 하는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는 것이며 유의미한/가치 있는 삶에 대한 통찰이 이뤄지게 된다.
  이런 가운데 대학인들의 자기계발은 단지 자기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자기계발이 아니라 소위 ‘진보적인 것’에 대한 자기계발까지 포함하고 있다. 사회적 기업, 아름다운 가게, 공정무역 상품의 소비, 진보적 지식인에 대한 희구, 환경/생태 문제에 대한 관심 등이 이런 것일 텐데, 그럼에도 이것이 개인의 일상 속의 실천 혹은 지식이나 의식 정도로 그치게 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적 삶의 굴레를 벗어던지게 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자기계발 담론으로 흡수되어 ‘박제화된 진보’로 남는다.

2-2. 대학의 정치는 부재중, 해답은 어디에?

  ‘집단적 저항’의 경험 부재ㆍ불신과 ‘정치의 공간’의 형해화
  이명박 정권에 들어와 신자유주의적 정책들은 한 겹 포장도 하지 않은 채 ‘경쟁’과 ‘시장’을 중심으로 추진되는 한편 모든 국민의 입에는 재갈을 물리고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틀 안에서 공권력을 최대한도로 발동시키고 있다. 너무나 상식적으로, 이런 시대일수록 우리들의 정치와 집단적 저항이 더욱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인들이 저항하지 않는 이유는 집단적 저항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거나, 집단적 저항으로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대학 내 정치의 공간이 축소되거나 유실된 결과라는 측면이 크다. 작년 촛불집회 때 언론에서는 대학생들이 취업과 자기이해에 매몰되어 거리로 나오지 않는다고 비아냥대듯 말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촛불이 켜질 때부터 꺼질 때까지 많은 시민들과 함께 광장을 지켰지만 이전의 모습과 달리 학생회 등의 단위로 묶이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 사례가 거듭 상기시키는 것은 바로, 08-09년 대학은 ‘정치의 공간’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가슴 아픈 현실이다. 정치의 공간이 인터넷 댓글, NGO 활동 등 ‘학교 밖’으로 이동한 상황이다.
  집단적 경험의 유실이 정치의 공간을 축소시키고, 이것이 다시 경험을 더욱 왜소하게 만드는 상황. 이 악순환을 이제 끊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대학인들은 진보적 삶에 대한 열망을 표출하고 이것이 대학에서의 자치의 활성화로 수렴되어야 한다.

  ‘모두’가 살아남기 위한 집단적 저항이 필요하다!
  최근에 벌어진 KBS 비정규직은 누구 못지않은 자기계발을 통해 부푼 희망을 안고 언론사에 취직하여도 아무 이유 없이(자본의 위기를 전가하기 위해!) 잘려나가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지금의 청년실업, 비정규직의 문제 등의 위기는 개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구조적 문제이기 때문에 개인의 노력, 행위로는 일정 해소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극복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자기계발은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돌보고 자신의 삶과 일상을 규정하는 조건, 문제를 집단적으로 해결하는 과정을 해체시키는 대신에 취업/승진할 때 기업으로부터 더 높은 점수를 따고 인정받기 위하여 자기자신을 끊임없이 경영해야할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삶의 양식을 내면화시킨다. 이런 과정에 따라 우리의 삶의 문제는 개인 혹은 가족 정도의 바운더리 안에서의 노력을 해결될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 체념하게 만든다.
  그러나 앞선 자기계발의 양면성은 자기계발 속에서도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개인적 욕망과 사회적 기여를 하고자 하는 진보에 대한 열망이 혼합되어 있다고 했다. 자기계발하는 삶의 한계성, 나아가 이것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불만과 부정을 통한 ‘어떤 자기계발을 할 것인가?’라는 내면적 고민에 우리는 주목하고 이 열망이 개별적인 실천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집단적인 토론과 실천의 장에서 함께 함으로써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집단적 저항’은 대규모의 대학생, 군중이 지금당장 거리로 뛰쳐나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의 시대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과 합의를 만들어 나가는 토론(집단적 인식과 집단적 토론)을 모두가 함께 해나가는 과정, 그리고 그 결과로서 서로의 삶이 함께 변하는 것이어야 한다. 집단적 저항이 대학의 정치를 복원시키기 위한 핵심적 과제이다. 이를 통해서만 다양한 기제를 통해 개개인으로 분할착취, 관리되고 있는 노동자 민중 그리고 학생. 이러한 자본의 전략에 맞서 연대할 수 있다.

  ‘여기’가 살아나기 위한 정치의 복원이 필요하다!
  지금 대학은 정치가 실종된 상태이다. 대학 내에서 집단적인 고민, 논쟁과 실천이 부족하다보니 소속 학과가 사라지는데도, 성차별적 문제가 횡행하는데도 어떠한 움직임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대학/학생사회는 공동체의 다양한 문제를 토론하고 논쟁하면서 해결해나가는 정치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쟁점들에 대해 개인의 진보적 활동에 그칠 것이 아니라 문제에 직면해있는 구성원들과 함께 하는 ‘정치의 장’을 복원시키는 것에서부터 민주주의와 진보는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를 개별적으로 학습한다고 사회가 민주화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 등 이념을 함께 공유하고 토론하면서 이를 구체적인 현실에 적용하는 실천해야 한다.
  특히 대학(교육)이라는 공간은 인터넷 동호회 등과 달리 이데올로기 재생산이 이뤄지는, 즉 계급투쟁이 이뤄지는 곳이라 할 때 대학 내 정치의 복원은 대학을 넘어 전 사회적인 정치의 위기를 완화시킬 수 있는 파급력을 가진 (여전히) 유효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다시금 대학이 ‘정치의 공간’으로, 정치의 공간이 생겨날 수 있도록 하자! 물론 이런 과정이 하루 이틀 사이 큰 성과로 나타날 수 없다. 학생회, 그리고 이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장’을 만들고 이런 논쟁과 저항의 경험을 축적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학생회 선거는 이런 기획의 시작에 있다. 선거에서부터 논쟁의 장을 열어나가자!


■ 2010년대를 예비하는 대학인의 실천전략 : 정치의 복원

  금융위기 1년, 어찌하였든 위기는 봉합되었다. 지배계급의 위기를 일시적으로나마 벗어나기 위한 전략은 경제 위기의 책임과 비용을 노동자 민중에게 떠넘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추진되고 있는 (위기의 원인인) 금융화에 기댄 위기 극복이라는 아이러니한 해결책으로 지금의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를 결코 극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계속적으로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은행의 위기나, 달러의 위상 하락과 같은 문제가 여전히 잠복해있고 이것이 이후 더욱 큰, 더욱 파괴적인 위기의 양상으로 표출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지배계급은 위기 전가에 대한 불만과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동자, 여성, 학생 등 분할하여 관리하고 있는데, 여기에 맞서는 주체들의 대응은 각각 ‘이해 당사자’로 분리되어 서로 개별적인 문제해결에 급급하고 있는 것이다. 정권에 대한 불만 또한 광범위하게 존재하지만 한번 타고 사그라지는 촛불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특히  대학이 ‘정치의 공간’으로서의 성격이 탈각되어 있는 조건에서, 대학인들은 자기계발적 삶의 한계 속에서 진보적 실천을 꿈꾸지만 개별화된 실천을 함으로써 기존의 강력한 자기계발의 담론의 벽을 쉽게 넘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의 대안이다!
  단발적인 촛불 그리고 시대에 대한 개별화된 불만과 저항으로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도, 지배계급의 공세를 막아낼 수도 없다. 신자유주의가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민중들의 삶의 문제 그리고 그것이 필연적으로 배태하는 민주주의의 후퇴에 맞서기 위해 우리에게는 어떤 전략과 전술이 있어야 하는가? 특정 개인에 대한 증오나 그리움으로 대체될 수 없는 노동권, 지식권/교육권, 여성권, 평화권 등과 같은 권리를 매개로 우리 스스로의 삶에 대한 발언권, 결정권, 통제권을 요구해야 한다. 또한 지금의 집단적인 저항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조건을 복구하기 위한 대학인 모두의 행동이 요구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노동자 민중들의 삶을 빈곤하게 만들고 불만을 가중시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들을 함께 논하고 밝히면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나갈 ‘우리의 힘’을 키워나는 것이야 말로 이명박 시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다.

▷집단적 시대인식을 하는 학생회!
  시대를 과학적으로 인식하며 정권과 자본의 폭력성에 대항하는 지식을 함께 학습하자! 이것은 현 시대의 빈곤과 경쟁, 각종 폭력이 발생하는 우리 일상을 제대로 분석하고, 이에 맞선 저항하기 위한 기본 중 기본이다. 대학인들이 개별적으로 책, 인터넷 활동 등을 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학생회 활동을 하는 몇 몇의 사람들만 학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위기를 고민하고 걱정하는 이들 모두가 함께 시대인식을 공유하고 토론하는 계기, 공간을 열 수 있어야 한다.
ㅇ청년실업
 : 청년실업의 문제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이 문제가 자본주의 안에서는 절대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지배계급이 제시하는 기만적인 해결책들(금융화를 비롯한 청년실업 해결을 이야기하는 정책/제도)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적극 알려내면서 은폐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폭로해 가야한다.
ㅇ대학의 금융화
 : 대학 또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흐름에 조응하며 자태변화한 지 오래되었다. 금융화가 요구하는 지식과 노동력에 맞게 대학의 운영원리, 교육과정 등을 총체적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이러한 대학의 변화에 주목하여 금융화의 문제를 폭로해야 한다.

▷집단적 토론과 논쟁을 기획하는 학생회!
  정치를 복원하기 위해 ‘집단화’하는 기획이 중요하다. 현재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대중들의 불만을 한 곳으로 수렴하며 발전시켜 나갈 공간을 건설하는 것은 정치의 조건을 쌓아나가는 주춧돌이 될 것이다. 또한 토론과 논쟁을 가능하게 할 전제로서 정보와 지식의 공유가 중요하다. 이러한 집단적 토론/논쟁을 학생회가 주도해나가자!
ㅇ대항공간을 만드는 학생회!
 : 빈곤과 억압, 착취의 폭력에 불만을 느끼는 대학인들을 집단화시켜야 한다. 각 사안/의제에 대한 다양한 쟁점들을 함께 토론하는 공동체를 건설하자.
ㅇ대항담론을 가져오는 학생회!
 : 대항공간에 함께 하는 모든 이들이 학습하고 고민하는데 필요한 각종 정보와 지식이 공유될 수 있어야 토론과 자치의 실험은 활성화될 수 있다.

▷집단적 저항의 키워드로서 페미니즘을 실현하는 학생회!
  ‘페미니즘’은 여성들의 자기계발 방법론이 아니다. 공동체를 재건하고 정치를 복원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 원리 원칙이다. 여/남간의 성적 차이를 긍정하며 이런 차이를 고려한 공동체를 만드는 ‘정치학’이 바로 페미니즘일 것이다. 왜냐하면 여성에게 불합리하거나 폭력적인 상황을 발생케 하는 것, 결국 여성을 배제하는 남성중심적 문화 속에서 공동체는 결코 온전히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적 차이가 권력의 차이로 연결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관계맺음 방식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이를 위해 페미니즘은 우리가 다시금 되찾아야 할 저항의 언어/해답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ㅇ여성노동권을 적극 발언하자!
 : 여성의 노동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여성에게 일과 가정 모두를 책임져야 한다고 강요하는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폭로하자. 또한 투쟁하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의 싸움에 연대하며 학생사회에 알려내자.
ㅇ공동체에서 페미니즘을 함께 고민하고 논쟁할 수 있는 기획을 마련하자!
 : 페미니즘을 고민할 수 있는 토론의 장을 열고 대중들이 처한 상황과 인식 양태에 맞는 언어와 실천을 발굴하고 이를 공유하고 토론하는 계기를 마련하자. 관련한 학습할 수 있는 공부방 등 구체적인 형태의 사업을 기획하자.
ㅇ여성에 대한 폭력으로서 성폭력에 반대하자!
 : 수년간 잊힌 반성폭력 규약을 재개정하는 등의 계기를 마련하여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서 성폭력, 특히 최근 이슈화되는 극단적 폭력의 형태가 발생하기 않게 하려면 사회적으로 여성이 성적 대상화 되는 문제나 폭력의 대상이 되는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Posted by 행진

2009/11/24 12:18 2009/11/24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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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한국사회를 바라보며
 
 
  지난 해 세계를 뒤흔들었던 금융위기는 다 해결된 듯 세계 경제가 회복되고 있다고 하고, 한국도 주가가 연중 최고를 갱신하고, 경상수지 누적 흑자가 사상최대를 기록하며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연일 뉴스에 나옵니다. 지난해 촛불 투쟁을 거치며 정상적인 국정운영이 불가능할 정도로 국민적 신임도가 떨어졌던 이명박 대통령은 ‘취업 후 학자금 상환제’, ‘보금자리주택 공급 조기 확대’ 등 기만적인 친서민 행보에 박차를 가하며 하반기 들어 지지율 상승에 성공하였습니다. 이에 더해 대통령 특별기자회견까지 열며 내년 G20정상회의 유치가 한국이 세계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는 의미라고 선전하면서 국민들에게 ‘장밋빛 희망’을 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이들이 말하는 발전전망은 우리들의 정당한 권리를 짓밟고 노동자 민중의 삶을 더욱 벼랑 끝으로 내몰며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구를 위한 개발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는 가진 자들만의 위한 재개발로 인해 철거민들이 돌아가신지 벌써 300일 다 되어갑니다. 추석 때 정운찬 총리의 방문은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용산참사의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하려는 의지를 정권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철거민에게 중형을 내리고, 시민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경찰의 방패로 막으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경제위기를 빌미로 노동자들은 해고와 임금삭감의 광풍을 맞아야만 했고 이에 맞서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건 싸움을 펼쳐야만 했습니다. 비정규직법안은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지 의미를 잊은 채 국회를 떠돌고 있고 최저임금 삭감 시도, 기만적인 청년인턴제 도입 등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또 다시 피와 땀을 흘려야만 하는 착취와 폭력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항-연대로 생동하는 학생사회의 복원을 위한 학생회 선거투쟁을 결의합시다! 
 
노무현, 김대중 전직 대통령의 죽음에 노동자, 농민, 학생 등 많은 시민들이 ‘민주주의’, ‘평화’, ‘개혁’이라는 수사를 달면서 추모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리해고제 도입, 한미 FTA추진, 평택미군기지 이전 등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적극 편입해 가며 한국 경제의 불안정성을 심화시키고 노동자 민중을 참혹한 삶의 굴레로 몰아넣었던 ‘신자유주의 전도사’들이 더 이상 우리의 희망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명박 정권에 대한 대중적인 불만이 또 다른 정치세력, 좀 더 민주적이고 서민적으로 보이는 몇몇 정치인에게 수렴되는 것은 또 다시 우리의 삶을 우리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한편 정권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을 받아 안아 광범위한 반MB투쟁을 외치며 지난 10여 년 간 쌓아온 반신자유주의 투쟁을 동요시키고 또 다시 민주 vs 반민주의 전선으로 회귀하려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직 대통령 사망 정국에서 그들이 보여준 모습에서 확인했듯 정세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내용 없는 정권 반대투쟁은 대중들의 분노와 열망을 급진화 시켜나갈 수 없으며 또 다시 무기력을 남길 것입니다. 진보적인 세력의 연합과 같은 외연의 확장만이 아니라 反이명박 전선의 내용을 채워나갈 보편적인 저항이데올로기를 밝혀나가고, 기층에서부터 ‘정치의 공간’을 확장시켜 대중들의 운동으로 상승시켜나가야 함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학생회 선거에서 복지와 이미지를 남발하며 학생사회의 자치와 연대의 가치를 파괴하고 붕괴를 더욱 가속화하는 이들과도 학생회의 역할이 무엇인지 대중적 쟁점을 던지며 학생사회가 나가야 할 방향에 대해 단호하게 논쟁해야만 합니다.

  대학이 ‘취업준비기관’으로 변모하고, 대학생들은 불확실한 미래로 오늘의 삶을 자기계발에 투여해야만 하는 현실 속에서 학생사회는 집단적으로 문제를 논의하고 해결하면서 시대의 모순에 저항해온 투쟁의 기억을 잊고 반MB, 청년실업, 등록금 등 사회에 대한 불만과 미래에 대한 고민을 각 자 개별적인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민하고 해결하려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흩어져있는 대중들의 분노를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학생사회 안에서 모아내고 집단적으로 분석하고 논쟁하면서 실천을 만들어 나가는 정치의 기획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2010년 학생회 선거에서 학우들에게 더 이상 자기의 미래와 희망을 누군가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 가자고 이야기합시다!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이 곳, 학생사회를 구성하는 자치공간을 정치의 공간으로 끊임없이 전화시켜 나가고 그 안에서 혼자만의 자기계발로는 해결할 수 없는, 분노의 합력을 창출하지 않고서는 넘어설 수 없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야기하는 배제와 착취의 모순을 적극적으로 선동합시다! 집단적인 논쟁과 실천태를 학우들에게 제안하고 저항과 연대의 가치로 다시금 생동하는 학생사회를 2010년 힘차게 만들어 나갑시다!

Posted by 행진

2009/11/24 12:05 2009/11/24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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