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저항-연대의 가치로
대학사회를 다시 세워내는 실험을 지속하자!
0. 들어가기
지난 해 ‘미국 발 금융위기’는 예고가 아닌 현실로 닥쳐왔다. 그 이후 나타난 남한의 경제위기, 용산참사, 쌍용차 투쟁 등 일련의 사태를 거치면서 우리는 수많은 경험과 교훈, 평가의 지점을 얻었다. 문제가 없는 곳은 없고 그 농도는 짙기만 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위기의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겐 해야 할 일이 매우 많다. 광범위한 이명박 정권에 대한 민심이반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불만, 정권에 대한 불만은 반역으로 폭발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주노동자에 대한 적대, 여성에 대한 폭력, 더 많은 경쟁의 내면화로 귀결되고 있다. 거대하게 결집했던 촛불은 각 공간으로 흩어져 대안적 힘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렇듯 대안을 창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을 알고 있고, 대안을 희망하고 있는 우리가 한발 앞서 고민하지 않는다면 변혁은 더욱 요원하다는 것을 명심하자. 경찰과 법의 권력, G20 개최와 경제위기 극복이라는 발전주의 전망의 살포로 더욱 더 강력한 통치성을 유지하고자 투쟁하는 지배계급에 맞서기 위해서는 당장 내년 한해, 가장 구체적으로 ‘융합 가능한 대안’을 만들어내기 위한 첫걸음을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해야만 할 것이다.
대중과의 융합의 태세를 준비한다는 것은 한방의 가장 멋진 정책을 만들어내자는 뜻은 아니다. 융합의 조건은 항시적인 긴장감과 노력 속에 창출되는 것이며 한 발 앞선 대중으로 사는 헌신적인 활동가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기에 이번 학생사회 각론에서는 학생회라는 쟁점을 중심으로 학생사회의 정치의 방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학생회라는 공간이 최근 몇 년간 어떻게 비/반권 세력에 의해 규정되어 왔는지에 대해 분석하고 작년과 올해를 경유하며 그것이 변화했던 양상, 2010년 우리가 주목해야 할 바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이 안의 목표이다.
1. 2009 학생사회
2009년 남한사회의 키워드는 죽음과 생존이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숱한 연예인, 유명인사의 죽음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수장을 했었다던 사람도 죽음을 택했다. 이 죽음에 열렬히 자신의 삶을 투영시켰던 많은 사람들은 그 웅장하고도 슬픈 하나의 내러티브를 위로하고 삶으로 돌아선다. 그러나 돌아선 삶의 모습은 또 다시 죽음, 혹은 생존이라는 팍팍한 선택지였다. 공존을 외쳤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택배노동자를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해달라던 박종태 열사의 외침은 죽음과 죽음보다 더 한 폭력으로 답변 받았다.
경제위기의 출구를 벗어났다고 샴페인의 터트리는 신문과 기업인들의 말이 더 이상 달콤한 위로가 되지 않는 것은 우리 모두의 삶을 통한 학습이었다. 인간의 역사이래, 민중이 고달프지 않았던 시간이야 정도를 달리할 뿐 없던 적이 있겠냐고 질문하겠지만,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박탈당한 사람의 몫은 피로가 아닌 절망이었다.
1.1 2010의 새로운 비전을 외치며 달려왔던 대학들. 21세기 들어 변화한 대학의 발전주의 이데올로기는 어디로 가고 있나?
남한의 모든 대학들은 학교발전 이데올로기를 공세적으로 퍼붓는데 여념이 없다. 발전주의 이데올로기의 실체는 등록금을 더 올릴 구실, 학생들의 불만을 잠재울 플랜, 대학 배치표에 좀 더 위 칸에 위치하고자 것일 뿐이었다. 대학들은 교육이 상품임을 자신 있게 천명하고 있으며, ‘더 질 좋은 교육이라는 상품을 더 많은 돈을 주고 사는 게 뭐가 나쁘냐?’는 말이 이제 어색하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2010년의 비전을 각자 앞세우며 성과를 내겠노라고 미래의 희망을 팔았던 대학들의 성적표는 그리 좋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일어난 학과 구조조정, 기초학문의 파괴, 교수들의 성향분석을 통한 학풍마저 바꿔 버리기만으로도 각 대학은 일정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였는데, 앞으로 더욱 심화될 신자유주의 교육 구조조정의 조건을 확립한 것이다. 이것은 지배계급의 단결을 더욱 도모하게 해줬고 장기적으로 남한사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것 이다. 나름의 ‘공공성’과 ‘사회적 책무’를 갖고 있던 대학의 신자유주의 교육 재편으로 드러나는 이후의 폐해는 민중들의 삶에 고스란히 이전될 것 인데, 현재 측정되지 않는 위협의 종류는 다양하다. 오른 등록금으로 인해 빚더미에 앉아 사회로 나간 청년들과 가계를 탕진한 가정들 역시 그 위협의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대학의 발전주의 이데올로기는 계속될 전망이다. 각 학교의 캠퍼스 신설, 학과 구조조정과 재배치, 대학 통폐합이 지속될 전망이다. 서울대를 시작으로 본격 궤도에 오르게 될 국립대 법인화는 이제 각 지역의 국립대에게 더 이상 선택지가 아니다. 법인화에 따른 경쟁에 참여하는 것은 도태되지 않기 위한 필수 과정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각 학교는 더욱 더 효과적이고 간편한 학교 내 구조조정을 달성하기 위해 학생들의 자치를 탄압할 수 있는 계획을 적극적으로 내고 있는데 이들의 목적은 학내 학생들의 자치활동,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자치 동아리나 학생회에 대한 지원은 줄어가고 학생들을 위한 지원은 학과 내의 취업동아리, 학교가 지원하거나 멘토 교수님과 함께하는 공모전 동아리들 뿐 이다. 성균관대의 경우는 3년 전부터 학교와 농협이 주최하는 농촌봉사활동에 지원금을 주고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농민학생 연대활동을 정치활동이라는 이름으로 탄압하고 있다. 성신여대의 경우에는 외부 단체에서 강의실을 빌릴 수 없게 하는 것은 물론 학교의 학생들이 대여하는 경우에도 외부인이 한명이라도 참가할 시 사용료를 지불하게 할 방침이라고 한다. 중앙운영위원회나 총투표를 통해 발의되거나 가결된 안은 학교의 일방적인 통보에 따라 무시당하기 일쑤고 몇 해 전부터 ‘개인정보 보호’라는 이름으로 새로배움터에 참가해야 하는 새내기들의 연락처도 주지 않는 일이 부지기수다. 과를 통폐합하고 축소하면서 이전의 과방을 열람실로 변경하거나 없애버리는 것, 밴드의 연습공간을 소음을 이유로 폐쇄하는 일들이 각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다. 학교의 이러한 행태는 교육의 상업화를 위한 구조조정과 이를 저지하려는 학생들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기 위한 플랜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를 막아내는 투쟁 벌이지 않고는 학내 정치는 그 운신의 폭을 계속해서 좁혀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마어마한 돈을 투입해 새로운 캠퍼스를 만들고 학사제도를 개편하고 학과를 구조조정하는 과정에는 학생들의 교육에 대한 보편적인 권리, 자치와 연대의 공동체는 발붙일 곳이 없다. 하기에 적극적으로 학교의 발전주의와 대결하는 것, 대안을 만들어 내는 것은 늦출 수 없는 과제가 되어가고 있다. 단지 학교의 계획을 저지하는 것을 넘어서 대안과 희망이 되어야 할 것이다.
1.2 시지프스의 하루, 하지만 우리에게도 꿈은 있습니다.
지금의 대학생들이 스무 살이 되자마자 들었던 이야기는 88만원 세대라는 호칭이었다. 시대인식이 없고 책임감이 떨어지는 세대, 인내가 부족한 세대... 어른들에게 이런 말을 듣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입시교육, 조기교육에 지쳐있는 세대에게 더 빨리 자라라는 어른들의 투정은 이미 익숙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호탕하게 세상을 호령하던 세대도, 미래에 대한 걱정과 의심이 없던 세대도 지금 이 시대의 청년은 아니다.
‘청년들은 너무 자주 미래에 의해 방해 받는다’
더 나은 미래, 더 나은 살림,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발버둥 쳐야하지만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약속은 없는 것이 우리 사회의 냉정한 현실이다. 끊임없이 경쟁을 내면화하고 초중고 시절 내내 사교육으로 교육받고, 대학에 들어와서도 토익학원부터 각종 자격증 학원을 뺑뺑이 돌며 한편으로는 과외선생님으로서 사교육 시장의 한 축이 되는 대학생들은 꿈조차 사랑조차 사치스럽다고 이야기한다. 생산적인 어떠한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잉여인간’으로 자신을 재빨리 규정하고 패배감을 내면화하며, 언제나 무언가를 하고 있어야만 마음이 편한 지금의 청년들은 꽤나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20대에게 한 평의 집도, 괜찮은 미래도 쉽게 약속하지 않는다. 심지어 촛불이라는 정치적 반란의 시기도 시작은 10대에게 마무리는 386에게 빼앗긴 20대는 통째로 이 사회의 아웃사이더인 것 같기도 하다. 동아리도 ‘스펙’을 위해 선택해야 하는 시대, 야망은 적고 상처는 많다.
이러한 좌절과 상처 속에서도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2009년 청년들의 모습은 그리스신화의 시지프스를 떠올리게 한다. 끊임없이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끊임없이 산 위로 올려놓는 노동을 반복하는 시지프스, 21세기의 시지프스들에게 다른 점이 있다면 오를 산과 바위를 고르고, 바위를 굴리는 방법을 학습하고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위안 삼으며 좀 더 좋은 산, 바위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할 수 있다는 점일까. 복잡한 세상을 살고 있는 시지프스들은 스스로를 ‘중립’으로 규정지으며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투여된 노력만큼의 분명한 성과를 끊임없이 구별할 것을 교육받았다. 자신의 삶에 대한 더 많은 개입으로부터 셔터를 내리고 외로운 사회에서 자신의 공간을 찾고 인정받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으며 모두에게 이것은 선택의 여지없이 살아가야만 하는 ‘일상’일 뿐 이다.
하기에 세상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듯한 청년의 모습만 눈앞에 보일 지라도 청년들은 세상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세계화의 거대한 피해자가 누구고 누가 전쟁으로 돈을 벌고 누가 생명을 잃는지에 대해서 모두 알고 있으며 그것을 바꾸고자 하는 열망은 어디에나 숨어있다. 때가 아니라고 포기하기 쉬운 때일수록 지금 여기서 시작하는 마음과 계획이 절실하다. 혼자만의 시도와 좌절이 아닌 곁에 있는 이들과 함께, 현실에 맞추어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발 딛고 있는 삶의 조건을 다시 구성해 나가는 행동이 지금 이곳에 필요하다.
2. 학생회를 둘러싼 쟁점과 전망
2.1 학생회를 둘러싼 쟁점
비/반권의 자태변환
소위 촛불 정국, 시국선언 정국을 맞이하며 2000년대 초반부터 우경화 혹은 소멸로 수렴되어가던 학생회의 모습에 반전적인 모습이 드러났다. 총투표를 거쳐야 하니, 말아야하니 말도 많았지만 비/반권 학생회들이 깃발을 들고 거리에서 학생들과 함께 달렸고 교수들의 시국선언에 동참하며 ‘준엄한 목소리’로 시대를 타일렀던 것이다. 깃발을 들고 거리를 달리며 대표를 자임하는 학생회는 권력적이며 편협하다고 말하던 그들이, 더 많은 숫자의 의견을 대변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주장했던 그들이 학교 바깥을 향해 발언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비/반권의 자태변환에 대해 한 쪽에서는 섣부른 기대를 걸기도 했고, 한 쪽에서는 냉소를 보내며 ‘니네도 별 수 없더냐’는 눈길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와 복지를 이분화 했던 그들의 정치학이 틀렸음을 확인하는 것을 넘어 왜 이들이 거리로 나와야겠다고 생각했는지, 학우들은 왜 학생회에 이것을 요구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비권’을 표방하던 학생회가 이야기하던 정치와 복지의 구분, 학내 사안과 학외 사안의 구분이 허구적이었으며, 학생사회 역시 남한 사회의 모순이 투영되는 공간이기에 캠퍼스 밖 사회와 학생들의 이익이 분리될 수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학교 운동장을 유명 연예인의 콘서트 장으로는 사용하는 것은 용인하면서 노동자들의 집회장소로 사용 것에는 반대해 왔던 그들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며 그들이 기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경계를 우리는 ‘폭발적인 정세’ 속에서 가로질렀다. 그러나 이러한 자태변환은 학생들의 요구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또한 기억해야만 한다. 학생들은 학생회가 해야 되는 역할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했고 비/반권 학생회는 그/녀들의 이러한 요구를 수행해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비/반권 학생회는 이러한 정치적 행위를 ‘대리’하는 것 이상으로 하지 않았는데 지속적으로 싸움을 만들어가는 것, 정치의 결실을 다시 학생사회의 공동체에 축적해 나가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학우들은 거리에 나섰고 지신의 입장을 개진했지만 정치의 공간은 실제로 확장되지 않으며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의 원동력은 학생사회에 지속되지 않고 논쟁과 투쟁은 하나의 국면이 지나자 증발되었다. 반면 역사적으로 있었던 변혁의 성과는 공동체에 남아 구성원들의 인식과 삶을 재구성하며 축적되었다. 하기에 우리는 이 쟁점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서, 학우들이 직접 할 수 있는 실천을 던지기 위해 노력했었고 더 많은 사람과 논쟁하기 위해서 노력했으나, 이들은 학우들의 요구만을 받아 안는 액션만을 취할 뿐 근본적이고 집단적인 정치를 외면하고 ‘한방의 시국선언과 가장 큰 촛불 집회로의 규합’ 으로 요구를 마무리 지었던 것이다.
연세대 총학생회의 경우를 보자. ‘학생을 향합니다, 연세 36.5+’를 걸고 ‘학생권 학생회’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당선된 그들은 오직 학생만을 위한 학생회를 만들겠다고 했었다. 이렇게 학생운동에 대한 선긋기에 여념이 없던 그들이 연세대 총학생회가 지난 노무현 추모국면에 추모 촛불 집회에 참가, 추모 콘서트를 학교 안에서 개최하려다가 학교와 충돌을 빚기도 했다. 이들의 이러한 행보는 특정 정세 안에서 그들이 스스로를 분리시키던 ‘운동권’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실제 학교의 몇몇 학생들은 ‘너희가 운동권과 다른게 뭐냐, 왜 학교를 소란스럽게 만드냐’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에 대한 답변으로 이들은 추모 콘서트를 개최하는 것은 ‘비정치’적이고 ‘순수한’ 추모 활동이라고 강변했다. 하지만 정치는 정당이 관계 되었나 아닌가, 정치인이 참석 하는가, 그렇지 않나가 아니다. 이미 이것은 통속적 의미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정치’라고 보여 졌을 뿐만 아니라, 정치란 우리가 생각하고 발언하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발언해야 하는 것은 이 정치적 콘서트의 개최를 막았던 연세대 대학 본부의 ‘정치적 입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비판하고 논쟁하는 것이었다. 연세대 총학생회가 추모 콘서트의 ‘비정치성’을 부각시키는 순간 오히려 연세대 학생들의 ‘정치적 입장’은 설 자리를 잃었고, 추모 콘서트에 참여하고 제 자리로 돌아가는 행위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한정지어야만 했다. 바로 이것이 공동체의 정치를 허물어트린, 오히려 민주주의의 진짜 실현을 가로 막은 ‘정치적 행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는 시국선언을 한 몇몇 교수님들, 순수한 총학생회장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가 역시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결론의 전부는 아니다. 계속해서 진행되던 학생회, 학생사회의 비가역적인 해체가 촛불 투쟁을 겪으며 학생회의 역할에 대한 기대의 변화를 가져왔고, 운동권/비반권 학생회로 역할 구분을 하던 2000년대 초중반의 프레임과는 달라졌다. 우리는 학생회를 통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재진단할 수 있었다. 학우들이 학생회를 통한 집단적인 문제해결을 다시 호출하기 시작했다면 우리는 자치, 연대, 저항이라는 가치를 통해 그 동안 어떠한 세력도 하지 못해 온 학생사회 정치의 복원을 아래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민주/비민주, 복지/정치
학내 민주주의의 표상이며 저항, 자치, 연대를 구현한다던 학생회는 학생사회의 비가역적 해체 이후 학우들에게 비민주, 심지어 권력 집단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인식에 기여한 것은 시대의 흐름, 그리고 그 흐름에 대응하지 못하던 운동세력뿐만 아니라 조직화된 비/반권의 움직임이 있었다. 비/반권은 2000년대 초반부터 대학 내에서 ‘탈정치’, ‘학생만을 위한’, ‘복지중심’ 학생회를 만들겠다고 선동했고 이러한 정치와 복지의 이분화는 학우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공감을 얻어갔다. 정치적 입장을 강변하는 학생회가 아니라 제대로 된 복지서비스를 학생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이 진짜 학우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민주적’인 학생회라는 것이었다.
민주주의, 과연 학생사회의 민주주의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학생회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자치를 통한 학생권력의 획득, 만인이 정치의 주체일 수 있는 것, 논쟁이 기능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에 있다. 현재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대의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최고형태가 될 수 없음을 인식하며 학생회라는 자치공동체가 만들어졌고 학생회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학습하는 공간이었다. 본디 민주주의는 확장적인 개념이다. 민주주의는 특정 형태와 결합하며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합의를 만들어가는 ‘논쟁’ 그리고 그 논쟁이 생동할 수 있는 ‘공동체’가 살아있는 것이 첫 번째 조건이다.
바로 이것이 학생회, 학생사회가 지향하던 자치의 원리였다면 비/반권 학생회에 2000년대 초반 이에 대응하는 방식은 정 반대의 방향이었다. 학생회가 함께해야 하는 것은 ‘일반 학우’의 이해라고 주장했다.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고 인정하는 사업이 아니면 대표를 맡고 있는 학생회는 수행하지 않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이러한 비/반권 학생회의 행보는 학생사회의 해체를 가속화 시키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최근 촛불이라는 국면 속에서도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거나 학생회의 정치적 입장을 대리주의에 가두는 편향은 학우대중의 분노를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해결하고 오히려 잠정적 표류국면을 쉽게 형성함으로써 논쟁의 조건을 허물어버렸다. 공동체는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일순간 결집하는 듯 보였다가 사라지며 허물어졌다. 이러한 경험은 결국 ‘우리는 힘이 없다’는 패배적 교훈을 안겨주었다. 거리가 만, 삼만, 오만, 십만의 촛불로 그 세를 불리는 동안 보였던 잠깐의 희망, 스스로의 힘에 대한 감동은 ‘그리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더 큰 패배감으로 돌아왔다. 공동체의 정치는 좀 더 많은 힘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적극적으로 ‘입장’을 개진할 수 있어야 하고 행동을 유발할 수 있어야만 입장은 힘을 갖는다. 모든 의견을 존중하나 가장 보편적인 ‘일반학우’를 존중해야 한다는 애매한 정치적 다원주의의 표방은 사실 침묵보다 더 지독히 현실을 은폐했으며 정치의 공간을 파괴했다.
이러한 비판의 대상은 비/반권 학생회만이 아닐 것이다. 대중이데올로기와의 융합의 계획을 내지 않는 순간 공동체의 정치와 저항을 이야기하는 우리 역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최근 몇 해 간 한국대학생연합은 이 지점에서 복지와 정치의 이분법으로 수렴되어가는 우려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는데, 일단 ‘대학생들의 공동의 이해와 요구’를 중심으로 투쟁하고 이후 다른 쟁점으로 이동하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명심해야 하는 것은 앞에서 밝혔듯 복지와 정치의 분리가 허구적이라는 것, 정치적 대리주의는 공동체의 정치를 질식시키는 효과를 낳는 다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전 사회적인 연대에 기반 하지 않고 당사자들의 이해에 착목해 벌이는 운동은 지배이데올로기에 균열을 내기보다는 자기사안에 갇힐 가능성을 내포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남한사회의 모순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이를 통해 현 시기 가장 필요한 정세적 투쟁이 무엇인지 판단하는데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일반학우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 진짜 학생회라고 소리 높였던 학생회들이 있었으나 일반학우라는 언명은 사실 정체가 없는 슬로건에 불과했다. 정치/복지의 이분법이 허구적이듯 비/일반의 학우로 나뉠 수 있다는 것 역시 허구였다. 학생회라는 것, 학생이라는 것은 ‘대학’이라는(경계 지을 수 없는) 울타리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모두가 사회의 한 조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의 입장으로 통일이 가능하다는 것이 환상에 가깝다. 입장의 차이는 차이가 있는 부분을 채택하지 않고 발언하지 않음으로써 존중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차이를 부각시키고 토론할 수 있어야만 민주주의는 그 이념에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 단지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허구적인 선언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부딪히며 ‘입장’을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요구해야 하는 진짜 민주주의다.
2.2 논쟁의 공간, 정치의 공간을 여는 학생회
비/반권들도 그들의 정치학에 따른 입장과 계획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자기 활동을 펼치고 있지만 그것은 정치가 아니라고 강변하는 모순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정치를 안 하겠다’는 말이 정치로부터 그들을 자유롭게 해주지도, 정치적 책임으로부터 면죄부를 주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즉, 입장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되 어떠한 ‘입장’을 가질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어떠한 입장과 태세로 학생회를 준비할 것인가?
많은 학생들은 정치로부터 자신의 과소 참여시키고 있으며 정치는 박근혜, 이명박, 노무현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비정규직 법안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바꾸고, 부자감세, 대운하 사업은 우리의 삶으로 깊숙이 전달된다. 등록금 문제는 우리 가정 경제 문제나 학교와의 협상문제가 아니라 전 사회적인 문제이며 전 사회적인 차원에서 발언되지 않으면 해결 역시 가능하지 않다. 이렇게 정치는 이름 있는 정치인들의 이전투구가 아니라 우리의 삶 가장 깊숙한 곳으로 침투하고 개입하는 문제이며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 바라는 사회, 발언하고 표현하는 모든 것에 녹아들어 있다. 하기에 공동체가 논의하고 논쟁하고 함께 해결해야 하는 진짜 문제는 학교 주변 상점에서 할인받을 수 있는 카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청년들을 실업자로 만들고 가난하게 만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 등록금에 대해서, 재개발에 대해서 논쟁하는 것이다. 논쟁의 공간을 연다는 것은 하나의 결과물, 한 번의 자리를 만드는 것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서울대 법인화 문제와 관련하여 총학생회는 총투표를 발의하고 진행했으나 적극적으로 집단적 논쟁을 만들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총투표 결과 79%의 학생들이 법인화에 반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지금의 학생회는 이 결과를 가지고 정치의 공간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학우들의 요구가 있을 때마다 그것을 대리하며 움직이는 학생회가 아니라 대중들의 고민과 요구를 받아 안아 논쟁의 공간을 열고, 집단적으로 문제 해결의 과정을 만들어 나가는 학생회다. 논쟁과 갈등을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학생회를 만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논쟁의 공간을 여는 것뿐만 아니라 논쟁이 가능한 조건을 만드는 것이 바로 그 역할일 것이다. 논쟁이 가능한 기층 공동체의 복원에 복무하고 지적 차이를 감소시키기 위한 노력, 중요한 사안이 더 많이 학우들에게 인식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총체적인 과정이 필요하다. 이것이 학생사회 안에서 학생회가 해야 하는 역할이다. 현실의 침묵을 깨뜨리는 정치, 그것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진정 오늘 날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각개분산하지 않고 규합될 수 있는 집단적 저항을 창출하는 것, 그리고 그 힘으로 서로가 서로를 배반하는 경쟁이 아니라 대안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몇몇 사람들의 돈 놀음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생존의 위협에 내몰렸던 금융화, 노동자와 여성, 이주민에 대한 차별, 돈을 생명보다 소중히 여기는 전쟁에 반대해야 한다. 공동체를 통한 정치, 연대의 가치는 바로 이것에서 출발한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와 정치에 대한 입장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입장’을 통한 학생회, 더 많은 민주주의를 스스로 구현하는 학생회를 통해 정치의 복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3. 학생사회 재구조화를 향한 헌신, 그리고 새로운 실험!
학생회의 표상을 다시 세워내고 자치의 원리를 구현하자!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더욱 더 폭압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정세와 빠르게 자신의 준거점을 이동시키는 대중이데올로기 사이에서 예각화 된 실천 전략이 필요하다. 무엇을 발언하고 무엇을 제안할 것인가, 무엇과 대결하고 무엇에 저항할 것인가?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양면적이고 돌출적이다. 대중운동 활동가라면 비단 선거기간이 아니라 언제나 대중과의 융합의 준비를 해야 한다. 특히 선거라는 집중적인 정치의 장이 열리는 시기엔 어떠한 입장과 정책으로 학생사회와 공동체의 재건을 제안할 것인지 원칙을 확인하고 각급 단위와 학생대중이데올로기에 맞게 실천 방향을 짜나가자.
학교는 광장이 되어야 한다.
지난 6월, 연세대 정문은 거대한 셔틀버스로 막혔다. ‘사법고시 시험준비를 하는 학생들을 위해 콘서트를 불허’한다는 학교의 입장에 따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 콘서트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성신여대에서는 모든 행사에 강의실 대여료 매기겠다는 계획을 제출했다. 담장없는 대학을 지향하고 대학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논하던 대학은 상업적인 공간으로 스스로를 자임하는데 익숙해져가고 있다. 이러한 학교의 계획은 대학의 상업화, 학생 공동체의 파괴와 그 궤를 함께 하고 있다. 하지만 대학은 ‘광장’이 되어야 한다. 모든 공간과 지식이 돈에 의해 점유되고 있는 시대에 노동자와 빈민에게 대학이 문을 닫는다면 연대와 대안은 더 멀어져가게 될 것이다. 평등하게 열린 공간으로서 대학을 사수하고 학내 자치와 민주주의를 바로세우는 싸움을 시작하자. 모든 기층 단위 학생회의 자치권을 보호하고 학교의 담장을 높이려는 본부의 상업적 계획을 저지하며 자치-연대-저항의 원리를 실현시키자.
기층 공동체를 재건하는데 복무하자!
기층 공동체의 재건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다. 정치 재건의 조건이 될 수 있는 기층 공동체의 복원이 절실하다. 기층 공동체의 복원은 각급의 단위마다 그 위상과 목표를 달리할 수 있을 것이며 각자의 위상과 목표에 걸맞는 계획을 제출할 수 있을 것이다. 단위학생회가 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방식에 대해서 지금까지도 많은 실험을 해왔다. 소식지 발간과 소리통, 운영위원회와 집행부 운영의 정상화 등이 지금까지 제기되고 노력했던 것들이었을 것이다. 각급 단위 학생회에서 낼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계획을 장기적인 안목 속에 배치하며 단위의 자치, 자활력에 복무할 수 있는 활동을 지속하자.
학교발전 이데올로기와 적극적으로 대결하자!
발전주의는 다양한 형태의 이데올로기와 만나며 권리를 포기하거나 폭력을 정당화 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연세대 송도캠퍼스 이전, 서울대 법인화, 중앙대와 동국대 등에서 활발히 벌어지고 있는 학과 구조조정은 학교발전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다. 많은 학생들은 이것이 자신에게 ‘더 나은 교육’을 보장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대안이 없다’는 것 때문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을 보류하고 있다.
공세적으로 학교발전 이데올로기를 살포하고 있는 학교본부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중앙운영위원회 의결, 총투표 정도의 계획으로는 부족하다. 현재 학생사회의 물질적 조건 상 이것만으로 담보할 수 있는 정치의 공간은 넓지 않기 때문이다. 총토론회, 만민공동회와 같은 좀 더 포괄적이고 적극적인 기획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앞에서 주지했던 원칙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계획은 한 번의 기획, 한 번의 자리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자. 지속적으로 쟁점을 추동하고 다양한 급에서 학우들과의 접면을 넓히는 계획 속에 학교발전 이데올로기, 넓게는 발전주의 이데올로기와 대결하며 대안을 찾아나가자.
사회적 문제에 대한 집단적 인식, 논쟁의 공간을 열자!
‘대학’이라는 공간이 대안 담론, 대안 교육, 다른 목소리를 발언하는 집단이자 공동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로 문을 활짝 열고, 민중들과 연대해왔기 때문이었다. 사회문제에 대한 집단적 인식이라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대학이라는 새로운 담론이 있는 열린 공간에서 논쟁하고 토론하며 만들어져왔던 결과물이었다. 최근 몇 해간, 학내 집회나 문화제 등이 ‘학생들의 학습권을 침해 한다’등의 논리로 개최가 금지되고 있는 양상은 매우 우려할만한 수위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기회도, 모일 수 있는 장소도 없는 노동자, 빈민, 농민들에게 대학이라는 공간이 열리는 것은 대학의 사회적 책무인 동시에 대안적인 담론, 논쟁의 공간을 여는 행위이기도 하다.
학교의 담장이 높아져가고 사회문제에 대한 ‘대학생’이라는 공동체의 집단적 인식이 부재한 지금, 대학이라는 공간을 통해 지향해야하는 가치와 인식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제기하자. 왜 대학생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하는지, 왜 노동자 민중, 빈민들과 연대해야 하는지, 왜 구조조정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고 금융화에 반대해야 하는지, 여성의 문제가 왜 우리 사회의 주요 쟁점이 되어야 하는지 말해야 한다. 대학이 단지 전공과목을 공부하고 사회에 나가기 전 ‘스펙’을 쌓는 공간이 아니라 삶의 다양한 영역을 이해하고 관점과 입장을 키우며 그를 통해 논쟁할 수 있는 공간임을 학우들과 함께 실험해나가자.
Posted by 행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