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는 정치적이다
(‘스포츠 행사에 경례를!’과 ‘재벌들은 체육 연맹을 좋아해’는
각각 한겨레 21 761호와 793호 기사를 일부 인용했습니다.)
벤쿠버 동계 올림픽이 17일 간의 일정을 마치고 3월 1일 폐막했다. 인생 역경을 이겨낸 선수들의 메달 소식은 고단한 서민들의 삶에 잠시나마 활력을 불어넣었고, 많은 사람들은 그/녀들의 결과에 대해 메달 여부에 관계없이 축하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두고 한국인들의 시민의식이 높아져서 결과만을 중시하지 않게 된 거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예상외 선전을 거둔 이번 올림픽이었기에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평가가 관대해 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번의 일본처럼 한국 대표팀이 역대 최악의 성적을 내놓았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할지는 앞으로 두고 볼 일이나, 결과나 평가가 어떻든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스포츠는 단순한 오락거리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정치 등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적인 맥락과 구체적인 상황, 주체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이 권력의 정체를 개념적으로 명료하게 규정짓기는 물론 어렵다. 다만 지난 시간 속에서 스포츠 행사들이 누구에 의해 ‘사용’되고 어떤 효과를 낳았는지, 현재의 모습은 어떤지 살펴보는 것은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다양한 요소를 정치화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스포츠와 통치, 자본의 전략과 우리의 삶은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스포츠행사에 경례를!
인기 있는 국제 스포츠 경기는 선수 개인들 간의 기량을 겨루는 것으로 인식되기 보다는 흔히 국가 간, 민족 간의 대결로 이해된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은 평소 스포츠에 관심이 없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종목의 경기가 아니더라도, 다른 나라와의 큰 경기가 있을 때면 마치 기다린 것처럼 경기를 관람하고 자국 선수들을 응원한다. 전 국민이 같은 경험을 공유하게 되는 과정에서 사회적 통합력은 증진되기 마련인데, 이처럼 스포츠 행사가 갖는 위대한 힘을 독재자들은 일찍이 인식하고 있었다.
지구촌이 4년마다 들썩이는 월드컵에는 아픈 과거가 있다. 1934년 제2회 월드컵은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의 야심으로 이탈리아가 유치했다. 남미 국가들은 독재정권에 대한 항의 표시로 2진급 선수들을 내보냈다. 이 바람에 8강에는 모두 유럽 팀들이 올랐다. 결승전에서 파시스트식 경례가 선보일 정도로 정치색이 짙은 대회였다. 이탈리아는 결승전에서 “우승하지 못하면 모두 사형”이라는 무솔리니의 협박 속에 체코를 2-1로 꺾고 정상에 올랐다. 체코의 골키퍼 안타 자보는 “졌지만 우리 11명은 살았다”는 말로 당시의 살벌한 분위기를 전하기도 했다. 체코는 이 대회 준결승에서 독일을 3-1로 꺾었는데, 아돌프 히틀러는 체코한테 지고 귀국한 독일 선수들을 모조리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무솔리니를 따라서 2년 뒤 베를린 올림픽을 개최했다.
1930년대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스포츠를 통한 통치 기법은 1970~80년대 남미와 아시아 독재자들에게는 하나의 지침서가 됐다. 아르헨티나의 독재자 호르헤 비델라가 유치한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이 대표적이다. 당시 월드컵에 참가하려던 각 나라는 아르헨티나 정세가 너무 혼란스럽자 개최지 변경을 요구했다. 네덜란드의 축구 영웅 요한 크루이프는 비델라 정권을 공개 비판하면서 불참했다. 비델라 정권은 민심을 사로잡을 승리를 따내기 위해 편파 판정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강호 헝가리와 맞붙은 조별 리그에서 상대 선수 2명을 퇴장시키면서 2-1로 억지로 이겼다. 2차 조별 리그는 조 편성을 일방적으로 했다. 전 대회 우승팀 서독과 준 우승팀 네덜란드를 한쪽으로 몰아버린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페루를 6-0으로 대파하는 바람에 브라질을 골득실 차로 제치고 결승에 올랐다. 비델라 대통령이 페루와의 경기 전 페루의 부채 5천만 달러를 탕감해주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지기도 했다. 아르헨티나는 결국 결승에서 요한 크루이프가 빠진 네덜란드를 3-1로 꺾고 기어이 우승을 차지했다. 권력자의 의도에 따라 스포츠를 통치의 기제로 활용한 사례는 한국에도 있다. 전두환 정권은 1981년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고 1982년 프로야구를 탄생시켜 국민들의 눈과 귀를 스포츠에 쏠리게 했다. 아시다시피, 프로야구는 대표적인 3S(스포츠·스크린·섹스) 정책 중 하나다.
이처럼 정치가 불안정한 나라일수록 독재자가 스포츠를 내세워 국민적 화합을 꾀하고 자신에 대한 지지를 높이는 수단으로 활용해 왔다. 이는 한국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렇다면 형식적인 민주화가 이루어진 지금의 조건에서 스포츠는 드디어 ‘순수한’ 것이 되었을까?
재벌들은 체육 연맹을 좋아해
한국의 재벌들은 오래 전부터 체육계에 관심이 많았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은 서울올림픽 유치의 일등공신으로 알려져 있고, 1982년부터 2년간 대한체육회 회장을 지냈다. 이명박 대통령도 현대건설 사장 재직 시절 대한수영연맹 회장(1981∼92)을 지낸 바 있고, ‘양궁의 대부’로 불리는 정몽구 회장은 네 번이나 대한양궁협회장을 맡았다. 지금은 아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 대한양궁협회를 이끌고 있다. 월드컵 유치 당시에는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의 지시로 현대중공업 인사들이 별도의 팀을 만들어 월드컵 유치전에 뛰어들기도 했다. 대한축구협회 사무총장을 지낸 고 남광우씨와 김동대씨 등이 대표적인 현대중공업 출신 인사다.
대한체육회 임원진을 보면, 박용성 회장 아래 이건희 전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대한핸드볼협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대한탁구협회장),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대한레슬링협회장) 등이 이사진으로 포진해 있다. 박용성·최태원·조양호 회장 모두 IOC 위원을 노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정희준 교수는 “현재 체육회 이사회 명단을 보면 마치 전경련을 그대로 가져다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라며 “고 정주영 전 회장과 정몽준 회장이 올림픽과 월드컵이라는 메가 이벤트를 유치하면서 국가에 기여했다는 점을 앞세워 대권에 도전했거나 앞으로 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얼마 전에 있었던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사면에 대해 이명박 정부는 ‘경제인 이건희’보다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이건희’에 대한 사면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비리 경제인들은 사면 대상에서 빼고 오직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를 위해 이 전 회장에 대해서만 단독으로 특별사면을 단행했다는 얘기다. 삼성은 ‘꿈의 자리’라는 IOC 위원에 이건희 전 회장의 이름을 올리기 위해 1990년대 초부터 집요하게 작업해왔다. 1996년 이 전 회장이 대한레슬링협회장을 발판으로 IOC 위원으로 선정되자마자 이듬해 올림픽 공식 파트너(스폰서)로 참여했다. 체육계에서는 삼성전자 이재용 부사장이 이 전 회장에 이어 스포츠 외교 쪽에서 상당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스포츠평론가 정윤수씨는 “이재용씨 개인은 야구를 좋아하는데, 그룹 참모들이 ‘야구는 글로벌 스포츠가 아니라서 활동하는 데 제약이 따르므로 축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서 대한축구협회장 자리까지 염두고 두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축구협회장이 되면 이 자격을 발판으로 아버지에 이어 IOC 위원을 노릴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건희 전 회장은 2004년 아테네올림픽 때 이재용 부사장을 자크 로게 IOC 위원장 등 국제 스포츠계 주요 인사들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정리해보면, 재벌들은 체육계에 발을 걸치며 자신들의 정치력 확장을 꾀하는 듯하다. 정몽준처럼 정치권에 직접 뛰어들어 실력발휘를 하는 경우도 있고, 이건희처럼 삼성이 구설수에 오르거나 자신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스포츠를 활용하기도 한다. 특히 이건희 사면 사태에서 보듯 스포츠는 때로 국가의 운영과 사법 질서에 영향을 미친다. 위법을 자행하며 부를 축적하는 것쯤은 국가적 대업을 위해 쿨하게 면죄되는 것이다. 체육회 임원진들의 명단이 재벌 회장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 역시 주목해서 봐야할 부분이다. 이는 재벌들 개인의 취향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한국에서 체육이 이루어지는 방식 자체가 자본과 밀접한 연관을 맺을 수밖에 없음을 나타낸다. 만약 지금과 같은 조건이 혁신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스포츠에 대한 대중적 열망은 여러 장치들을 통해 마지막엔 자본의 권력 증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정치적 스포츠와 소외된 ‘정치’
생산과 소비가 세계화 된 이후 자본들에게 마케팅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지구촌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국제적인 스포츠 행사는 세계로의 확장을 시도하는 기업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홍보 수단이다. 기업들은 월드컵, 올림픽에 공식 파트너 이름을 올리는 대가로 천문학적인 액수를 지불하고 ‘글로벌’한 이미지를 구매한다.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모여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가리는 것보다 더 글로벌하고 경쟁력 있는 느낌을 주는 행사는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자본들은 초민족적인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민족 자본으로서의 이미지 역시 강화한다. 국내의 스포츠 서포터스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과 관련한 이벤트 상품들, ‘태극전사들을 응원 합니다’ ‘대한의 딸 힘내라’와 같은 구호는, 결국 스포츠를 통해 국내 소비자들과 민족적 동일성을 구축함으로써 세계 시장으로 뻗어나가기 위해 안정적으로 자국의 점유율을 유지하려는 자본의 마케팅 전략이다.
그리고 스포츠 행사를 통해 세계의 주목을 받는 것은 한편으로 가진 것 없고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사람들을 더 가혹한 처지로 내모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군부 정권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가난한 대외 이미지를 쇄신하고자 경기장을 비롯한 서울 곳곳의 노점상, 판자촌 주민들을 몰아냈다. 스포츠가 계기였던 것은 아니지만, 작년에 있었던 용산참사를 정점으로 서울시가 하고 있는 ‘디자인 서울’, ‘한강 르네상스’ 역시 마찬가지다. 서울의 저개발 된 지역을 없애고 휘황찬란한 고층 빌딩을 건설한다는 계획은, 평범한 서울 주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련된 서울의 이미지를 통해 외국인 투자자들을 유혹하기 위한 겉치장에 다름 아니었다. 스포츠 행사가 열리면 자연히 개최 도시도 많은 관심을 받게 될 텐데, 조명되는 것은 화려한 겉모습이지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솔직한 모습이 아니다. 물론 이런 행사들을 없애거나 외면하는 방식은 결코 대안이 될 수 없을 테지만, 중요한 것은 ‘국가 브랜드 홍보’, ‘외국인 유치’, ‘국가 품격 상승’ 이란 말들 속에 감춰진 폭력과 소외를 인식하는 것이다.
한편, 스포츠 행사와 스타들에게 비춰지는 스포트라이트를 이용하는 세력과 그로 인해 부차화 되는 정치적인 쟁점들 역시 언제나 존재해 왔다. 이번에 좋은 성적을 거둔 올림픽 선수단이 돌아왔을 때 정치권은 어느 때보다 재빠르게 움직이며 이들의 인기를 정치로 ‘승화’시키려 했다. 선수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선글라스까지 껴가며 김연아를 웃게 한 이명박 대통령의 행동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그는 “점프할 때 눈을 감았다가 떠 보니 성공 했더라”는 말 한 마디로 올림픽 기간에 벌어진 MBC 낙하산 사건에 대한 정치적 부담을 상당히 덜어냈다. 정권의 언론 장악과 선수들과의 오찬은 전혀 별개의 문제고 연관성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민주당 정세균 대표가 이야기한대로 “메달 따면 지지율 오르는” 게 정치와 스포츠의 관계다. 국가와 자본은 민족적 동일성 형성으로 인한 사회 갈등의 은폐, 국민적 인기를 영유함으로써 지지율 높이기, 이미지 전략과 마케팅 등 자신의 필요에 따라 선수들 개인과 노력의 결실 등을 모두 정치화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들의 삶에 있어 소중한 것들,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하고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들은 오히려 정치화되지 못한 채 축소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성황리에 올림픽을 마친 벤쿠버 시가 경비 예산 초과로 결국 복지 예산을 감축했다는 소식이 들려와 어쩐지 씁쓸하다.
스포츠는 더 ‘정치화’되어야 한다
이번 올림픽에서 언론의 가장 많은 조명을 받은 스타는 단연 김연아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금메달 소식과 함께 실리는 다른 기사들이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국가 이미지 0.5% 상승효과, 김연아 금메달 값어치는?」「‘김연아 금메달’, 삼성 현대차 광고 효과 ‘대박’」등 김연아로 인한 국가와 자본의 이득을 분석한 기사를 흔하게 접할 수 있다. 의류․패션 광고 모델로 제격이라는 설문조사 결과도 있고, 국민은행에서 내놓은 ‘연아 적금’ 상품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스포츠 스타에 대한 관심이야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큼이나 스포츠-국가-자본의 연결고리는 우리들 사이에서 이미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됐다.
대부분의 언론에서는 예전 선수들이 ‘민족’이나 ‘국가’에 얽매여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한 것에 비해, 이번의 대표팀은 승패에 연연하지 않으며 유쾌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 ‘새롭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큰 틀에서 바뀐 것은 없다. 스포츠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은 여전히 민족 담론 속에서 국가와 자본의 이해관계가 관철되고 있으니까. 새로운 것은 오히려, 사람들이 이제야 스포츠를 ‘순수하게’ 즐길 줄 알게 되었다고 평가하며 정치와 스포츠를 분리시켜 사고하는 현상이다. 군부독재 시절의 대학생들은 야구를 대놓고 즐길 수 없었다. 스포츠가 정치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야구를 좋아하는 행위가 결과적으로 정권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효과를 낳지 않을까 고민한 것이다. 금메달을 딴 뒤 꼭 눈물을 흘리며 대통령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만 정치와 스포츠가 연관 맺고 있음을 증명하는 게 아니다. 사회 인식이 바뀐 만큼 스포츠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들도 서로 조정되고 변화해 왔다. 이를 인식하지 못한 채 스포츠에서 마침내 정치를 덜어냈다고 성급하게 선언하는 순간, 스포츠가 지배체계 유지에 기여하는 다양한 역할들에 대해선 사고하지 못하게 된다.
스포츠를 좋아하는가? 앞으로는 이런 쪽으로도 한 번 생각해보자. 내가 보태는 열망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소비되는지를. 인간이 만든 사회에서 스포츠는 다른 것들과 무관한 채 순수하게 남아 있을 수 없다. 스포츠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다양한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 스포츠가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포츠는 지금보다 더 많이 ‘정치화’되어야 한다.
Posted by 행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