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_발간사] 김예슬씨에게 보내는 편지


김예슬씨에게 보내는 편지




얼마 전에 고려대를 자퇴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얼핏 들었습니다.

기사를 검색해보니 당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더군요.

작지 않은 결정을 내린 뒤라 이래저래 심란할 것 같은데,
새로운 출발을 하는 당신에게 힘내라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고려대 게시판에 붙은 대자보 내용을 찾아서 읽어봤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담아 쓴 것이었지만 우리 모두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언론이 당신의 행동을 주목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겠지요.

그 대자보에는 우리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어릴때부터 시작되었지만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닌 경쟁이었습니다.

친구들은 성적표에 숫자로 표시되었고,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였지요.

시험공부는 나에게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답을 주지 않았고

대학에 가서 나이 더 먹으면 그래도 뭔가 보일 거라 생각했지만

세상은 우리에게 앞으로 더 힘들고 잔인한 길을 걸어가라 강요할 뿐입니다.


당신 말대로 대학은 자본에 필요한 부품을 제공하는 공장이 되었습니다.

수업을 듣는 이유는 학점과 졸업장으로 내 품질을 보증해야 하기 때문이지,

한 명의 인간으로서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기 위함은 아닙니다.

토익 공부해라, 성적 관리하고 자격증 따라는 말만 들리는 현실에 있다 보니

“꿈을 찾는 게 꿈이 되었다”는 부분은 슬프기도 하면서 처절하게 느껴졌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이 모든 일을 감당해야 하는 건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를 두려워할 자유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세계를 무대로 자신감 있게 당당히 경쟁해야 하는 G세대니까요.

4000원 짜리 알바해서 외국으로 어학연수 가는 글로벌한 세대입니다.



한편으로는

당신의 외침이 사람들에게 자조와 염세로만 남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상황이 암울하다는 것을 계속 확인하는 이유는

그만큼 사회가 잘못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겠지요.

시대가 너무 암울해서 아무것도 바뀔 수 없는 것처럼 보일 때일수록

저항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온 지난 역사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저항에 보탬이 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는 이 편지를 만듭니다.

뉴스레터의 크기는 사회라는 거대한 탑 앞에 깔려 있는 돌멩이 하나 정도겠지만

잘못된 구조로 위태롭게 서 있는 그 탑이 언젠가는 무너져 내릴 것을 알기에

우리는 더 단단해져야 하고, 더 많은 돌멩이들을 모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회 구조의 모순을 제기하고 바꾸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고 있으니

당신도 자신의 용기 있는 선택에 대해 자부심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서로가 물러지지 않는다면 언젠가 탑 앞에서 돌멩이로 만날 수 있겠지요.


아무튼 자퇴를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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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행진

2010/03/15 21:29 2010/03/15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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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_이슈&입장1] 스포츠는 정치적이다

 

스포츠는 정치적이다

(‘스포츠 행사에 경례를!’과 ‘재벌들은 체육 연맹을 좋아해’는
각각 한겨레 21 761호와 793호 기사를 일부 인용했습니다.)



벤쿠버 동계 올림픽이 17일 간의 일정을 마치고 3월 1일 폐막했다. 인생 역경을 이겨낸 선수들의 메달 소식은 고단한 서민들의 삶에 잠시나마 활력을 불어넣었고, 많은 사람들은 그/녀들의 결과에 대해 메달 여부에 관계없이 축하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두고 한국인들의 시민의식이 높아져서 결과만을 중시하지 않게 된 거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예상외 선전을 거둔 이번 올림픽이었기에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평가가 관대해 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번의 일본처럼 한국 대표팀이 역대 최악의 성적을 내놓았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할지는 앞으로 두고 볼 일이나, 결과나 평가가 어떻든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스포츠는 단순한 오락거리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정치 등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적인 맥락과 구체적인 상황, 주체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이 권력의 정체를 개념적으로 명료하게 규정짓기는 물론 어렵다. 다만 지난 시간 속에서 스포츠 행사들이 누구에 의해 ‘사용’되고 어떤 효과를 낳았는지, 현재의 모습은 어떤지 살펴보는 것은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다양한 요소를 정치화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스포츠와 통치, 자본의 전략과 우리의 삶은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스포츠행사에 경례를!


인기 있는 국제 스포츠 경기는 선수 개인들 간의 기량을 겨루는 것으로 인식되기 보다는 흔히 국가 간, 민족 간의 대결로 이해된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은 평소 스포츠에 관심이 없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종목의 경기가 아니더라도, 다른 나라와의 큰 경기가 있을 때면 마치 기다린 것처럼 경기를 관람하고 자국 선수들을 응원한다. 전 국민이 같은 경험을 공유하게 되는 과정에서 사회적 통합력은 증진되기 마련인데, 이처럼 스포츠 행사가 갖는 위대한 힘을 독재자들은 일찍이 인식하고 있었다.

지구촌이 4년마다 들썩이는 월드컵에는 아픈 과거가 있다. 1934년 제2회 월드컵은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의 야심으로 이탈리아가 유치했다. 남미 국가들은 독재정권에 대한 항의 표시로 2진급 선수들을 내보냈다. 이 바람에 8강에는 모두 유럽 팀들이 올랐다. 결승전에서 파시스트식 경례가 선보일 정도로 정치색이 짙은 대회였다. 이탈리아는 결승전에서 “우승하지 못하면 모두 사형”이라는 무솔리니의 협박 속에 체코를 2-1로 꺾고 정상에 올랐다. 체코의 골키퍼 안타 자보는 “졌지만 우리 11명은 살았다”는 말로 당시의 살벌한 분위기를 전하기도 했다. 체코는 이 대회 준결승에서 독일을 3-1로 꺾었는데, 아돌프 히틀러는 체코한테 지고 귀국한 독일 선수들을 모조리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무솔리니를 따라서 2년 뒤 베를린 올림픽을 개최했다.





1930년대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스포츠를 통한 통치 기법은 1970~80년대 남미와 아시아 독재자들에게는 하나의 지침서가 됐다. 아르헨티나의 독재자 호르헤 비델라가 유치한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이 대표적이다. 당시 월드컵에 참가하려던 각 나라는 아르헨티나 정세가 너무 혼란스럽자 개최지 변경을 요구했다. 네덜란드의 축구 영웅 요한 크루이프는 비델라 정권을 공개 비판하면서 불참했다. 비델라 정권은 민심을 사로잡을 승리를 따내기 위해 편파 판정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강호 헝가리와 맞붙은 조별 리그에서 상대 선수 2명을 퇴장시키면서 2-1로 억지로 이겼다. 2차 조별 리그는 조 편성을 일방적으로 했다. 전 대회 우승팀 서독과 준 우승팀 네덜란드를 한쪽으로 몰아버린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페루를 6-0으로 대파하는 바람에 브라질을 골득실 차로 제치고 결승에 올랐다. 비델라 대통령이 페루와의 경기 전 페루의 부채 5천만 달러를 탕감해주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지기도 했다. 아르헨티나는 결국 결승에서 요한 크루이프가 빠진 네덜란드를 3-1로 꺾고 기어이 우승을 차지했다. 권력자의 의도에 따라 스포츠를 통치의 기제로 활용한 사례는 한국에도 있다. 전두환 정권은 1981년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고 1982년 프로야구를 탄생시켜 국민들의 눈과 귀를 스포츠에 쏠리게 했다. 아시다시피, 프로야구는 대표적인 3S(스포츠·스크린·섹스) 정책 중 하나다.

이처럼 정치가 불안정한 나라일수록 독재자가 스포츠를 내세워 국민적 화합을 꾀하고 자신에 대한 지지를 높이는 수단으로 활용해 왔다. 이는 한국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렇다면 형식적인 민주화가 이루어진 지금의 조건에서 스포츠는 드디어 ‘순수한’ 것이 되었을까?



재벌들은 체육 연맹을 좋아해


한국의 재벌들은 오래 전부터 체육계에 관심이 많았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은 서울올림픽 유치의 일등공신으로 알려져 있고, 1982년부터 2년간 대한체육회 회장을 지냈다. 이명박 대통령도 현대건설 사장 재직 시절 대한수영연맹 회장(1981∼92)을 지낸 바 있고, ‘양궁의 대부’로 불리는 정몽구 회장은 네 번이나 대한양궁협회장을 맡았다. 지금은 아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 대한양궁협회를 이끌고 있다. 월드컵 유치 당시에는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의 지시로 현대중공업 인사들이 별도의 팀을 만들어 월드컵 유치전에 뛰어들기도 했다. 대한축구협회 사무총장을 지낸 고 남광우씨와 김동대씨 등이 대표적인 현대중공업 출신 인사다.

대한체육회 임원진을 보면, 박용성 회장 아래 이건희 전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대한핸드볼협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대한탁구협회장),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대한레슬링협회장) 등이 이사진으로 포진해 있다. 박용성·최태원·조양호 회장 모두 IOC 위원을 노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정희준 교수는 “현재 체육회 이사회 명단을 보면 마치 전경련을 그대로 가져다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라며 “고 정주영 전 회장과 정몽준 회장이 올림픽과 월드컵이라는 메가 이벤트를 유치하면서 국가에 기여했다는 점을 앞세워 대권에 도전했거나 앞으로 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얼마 전에 있었던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사면에 대해 이명박 정부는 ‘경제인 이건희’보다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이건희’에 대한 사면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비리 경제인들은 사면 대상에서 빼고 오직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를 위해 이 전 회장에 대해서만 단독으로 특별사면을 단행했다는 얘기다. 삼성은 ‘꿈의 자리’라는 IOC 위원에 이건희 전 회장의 이름을 올리기 위해 1990년대 초부터 집요하게 작업해왔다. 1996년 이 전 회장이 대한레슬링협회장을 발판으로 IOC 위원으로 선정되자마자 이듬해 올림픽 공식 파트너(스폰서)로 참여했다. 체육계에서는 삼성전자 이재용 부사장이 이 전 회장에 이어 스포츠 외교 쪽에서 상당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스포츠평론가 정윤수씨는 “이재용씨 개인은 야구를 좋아하는데, 그룹 참모들이 ‘야구는 글로벌 스포츠가 아니라서 활동하는 데 제약이 따르므로 축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서 대한축구협회장 자리까지 염두고 두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축구협회장이 되면 이 자격을 발판으로 아버지에 이어 IOC 위원을 노릴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건희 전 회장은 2004년 아테네올림픽 때 이재용 부사장을 자크 로게 IOC 위원장 등 국제 스포츠계 주요 인사들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정리해보면, 재벌들은 체육계에 발을 걸치며 자신들의 정치력 확장을 꾀하는 듯하다. 정몽준처럼 정치권에 직접 뛰어들어 실력발휘를 하는 경우도 있고, 이건희처럼 삼성이 구설수에 오르거나 자신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스포츠를 활용하기도 한다. 특히 이건희 사면 사태에서 보듯 스포츠는 때로 국가의 운영과 사법 질서에 영향을 미친다. 위법을 자행하며 부를 축적하는 것쯤은 국가적 대업을 위해 쿨하게 면죄되는 것이다. 체육회 임원진들의 명단이 재벌 회장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 역시 주목해서 봐야할 부분이다. 이는 재벌들 개인의 취향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한국에서 체육이 이루어지는 방식 자체가 자본과 밀접한 연관을 맺을 수밖에 없음을 나타낸다. 만약 지금과 같은 조건이 혁신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스포츠에 대한 대중적 열망은 여러 장치들을 통해 마지막엔 자본의 권력 증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정치적 스포츠와 소외된 ‘정치’


생산과 소비가 세계화 된 이후 자본들에게 마케팅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지구촌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국제적인 스포츠 행사는 세계로의 확장을 시도하는 기업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홍보 수단이다. 기업들은 월드컵, 올림픽에 공식 파트너 이름을 올리는 대가로 천문학적인 액수를 지불하고 ‘글로벌’한 이미지를 구매한다.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모여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가리는 것보다 더 글로벌하고 경쟁력 있는 느낌을 주는 행사는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자본들은 초민족적인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민족 자본으로서의 이미지 역시 강화한다. 국내의 스포츠 서포터스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과 관련한 이벤트 상품들, ‘태극전사들을 응원 합니다’ ‘대한의 딸 힘내라’와 같은 구호는, 결국 스포츠를 통해 국내 소비자들과 민족적 동일성을 구축함으로써 세계 시장으로 뻗어나가기 위해 안정적으로 자국의 점유율을 유지하려는 자본의 마케팅 전략이다.

그리고 스포츠 행사를 통해 세계의 주목을 받는 것은 한편으로 가진 것 없고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사람들을 더 가혹한 처지로 내모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군부 정권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가난한 대외 이미지를 쇄신하고자 경기장을 비롯한 서울 곳곳의 노점상, 판자촌 주민들을 몰아냈다. 스포츠가 계기였던 것은 아니지만, 작년에 있었던 용산참사를 정점으로 서울시가 하고 있는 ‘디자인 서울’, ‘한강 르네상스’ 역시 마찬가지다. 서울의 저개발 된 지역을 없애고 휘황찬란한 고층 빌딩을 건설한다는 계획은, 평범한 서울 주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련된 서울의 이미지를 통해 외국인 투자자들을 유혹하기 위한 겉치장에 다름 아니었다. 스포츠 행사가 열리면 자연히 개최 도시도 많은 관심을 받게 될 텐데, 조명되는 것은 화려한 겉모습이지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솔직한 모습이 아니다. 물론 이런 행사들을 없애거나 외면하는 방식은 결코 대안이 될 수 없을 테지만, 중요한 것은 ‘국가 브랜드 홍보’, ‘외국인 유치’, ‘국가 품격 상승’ 이란 말들 속에 감춰진 폭력과 소외를 인식하는 것이다.





한편, 스포츠 행사와 스타들에게 비춰지는 스포트라이트를 이용하는 세력과 그로 인해 부차화 되는 정치적인 쟁점들 역시 언제나 존재해 왔다. 이번에 좋은 성적을 거둔 올림픽 선수단이 돌아왔을 때 정치권은 어느 때보다 재빠르게 움직이며 이들의 인기를 정치로 ‘승화’시키려 했다. 선수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선글라스까지 껴가며 김연아를 웃게 한 이명박 대통령의 행동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그는 “점프할 때 눈을 감았다가 떠 보니 성공 했더라”는 말 한 마디로 올림픽 기간에 벌어진 MBC 낙하산 사건에 대한 정치적 부담을 상당히 덜어냈다. 정권의 언론 장악과 선수들과의 오찬은 전혀 별개의 문제고 연관성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민주당 정세균 대표가 이야기한대로 “메달 따면 지지율 오르는” 게 정치와 스포츠의 관계다. 국가와 자본은 민족적 동일성 형성으로 인한 사회 갈등의 은폐, 국민적 인기를 영유함으로써 지지율 높이기, 이미지 전략과 마케팅 등 자신의 필요에 따라 선수들 개인과 노력의 결실 등을 모두 정치화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들의 삶에 있어 소중한 것들,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하고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들은 오히려 정치화되지 못한 채 축소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성황리에 올림픽을 마친 벤쿠버 시가 경비 예산 초과로 결국 복지 예산을 감축했다는 소식이 들려와 어쩐지 씁쓸하다.




스포츠는 더 ‘정치화’되어야 한다


이번 올림픽에서 언론의 가장 많은 조명을 받은 스타는 단연 김연아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금메달 소식과 함께 실리는 다른 기사들이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국가 이미지 0.5% 상승효과, 김연아 금메달 값어치는?」「‘김연아 금메달’, 삼성 현대차 광고 효과 ‘대박’」등 김연아로 인한 국가와 자본의 이득을 분석한 기사를 흔하게 접할 수 있다. 의류․패션 광고 모델로 제격이라는 설문조사 결과도 있고, 국민은행에서 내놓은 ‘연아 적금’ 상품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스포츠 스타에 대한 관심이야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큼이나 스포츠-국가-자본의 연결고리는 우리들 사이에서 이미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됐다.

대부분의 언론에서는 예전 선수들이 ‘민족’이나 ‘국가’에 얽매여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한 것에 비해, 이번의 대표팀은 승패에 연연하지 않으며 유쾌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 ‘새롭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큰 틀에서 바뀐 것은 없다. 스포츠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은 여전히 민족 담론 속에서 국가와 자본의 이해관계가 관철되고 있으니까. 새로운 것은 오히려, 사람들이 이제야 스포츠를 ‘순수하게’ 즐길 줄 알게 되었다고 평가하며 정치와 스포츠를 분리시켜 사고하는 현상이다. 군부독재 시절의 대학생들은 야구를 대놓고 즐길 수 없었다. 스포츠가 정치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야구를 좋아하는 행위가 결과적으로 정권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효과를 낳지 않을까 고민한 것이다. 금메달을 딴 뒤 꼭 눈물을 흘리며 대통령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만 정치와 스포츠가 연관 맺고 있음을 증명하는 게 아니다. 사회 인식이 바뀐 만큼 스포츠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들도 서로 조정되고 변화해 왔다. 이를 인식하지 못한 채 스포츠에서 마침내 정치를 덜어냈다고 성급하게 선언하는 순간, 스포츠가 지배체계 유지에 기여하는 다양한 역할들에 대해선 사고하지 못하게 된다. 

스포츠를 좋아하는가? 앞으로는 이런 쪽으로도 한 번 생각해보자. 내가 보태는 열망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소비되는지를. 인간이 만든 사회에서 스포츠는 다른 것들과 무관한 채 순수하게 남아 있을 수 없다. 스포츠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다양한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 스포츠가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포츠는 지금보다 더 많이 ‘정치화’되어야 한다.


Posted by 행진

2010/03/15 21:24 2010/03/15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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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논쟁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



보이지 않는 두려움들이 한국사회를 휩쓸고 있다. 6-70년대 경찰과 군대를 앞세운 군부정권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고 호환, 마마가 휩쓰는 그런 것도 아니다. 여성들에게만 찾아오는 그 두려움은 ‘저출산 정책’이라는 이름하에, ‘생명존중’이라는 이름하에 소리소문 없이 가해지는 폭력이다. 여성들은 자신의 절박한 상황을 주위에 알리지도 못 하며, 오히려 ‘불법’이라는 이유로 진실을 숨겨야 한다.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들은 이제 더 이상 불법 시술은 안 된다는 산부인과 병원들의 대답을 들으며 한 번 좌절하고, 낙태 위험비용이라 하여 400~600만원으로 치솟은 수술비에 또 한 번 좌절하게 되었다. 여성들은 이제 출산율을 적극적으로 낮추는 정책을 시행중인 중국으로 가서 시술을 받는다. 한국에서 600만원을 들여 하는 시술이 안전할지 중국에서 싼값에 하는 시술이 안전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낙태를 금지시켰던 옛 루마니아에서 수십만 명의 여성들이 안전하지 못한 낙태시술로 죽어갔던 일들, 낙태를 하기위해 전 세계를 떠돌 수밖에 없었던 일들이 남한에서도 똑같이 재현되려 하고 있다


낙태를 할 수 없는 두려움. 하지만 진짜 두려움은 낙태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현실을 ‘이야기할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그 절박함 속에는 ‘생명을 죽이기 싫은 마음, 아무에게도 말을 할 수 없는 수치스러움, 내 뱃 속에서 자란 생명이기 때문에 꼭 키우고 싶다는 소망, 포기해야 하는 젊은 인생, 이 생명을 수 개월 더 길러 낳으면 아이나 자신이나 정말 불행한 인생을 살 것이라는 불안한 예감’ 등 너무나 복잡한 마음들이 교차함에도 이런 구체적인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그저 여성들만이 가입할 수 있는 커뮤니티에서, 포털사이트의 익명 게시판에서만 폭발적으로 이야기될 뿐 당당한 여성의 목소리로 나올 틈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이들의 목소리를 막고 있나


최근 낙태논란의 시작을 만든 프로라이프 의사회는 태아 생명 보호를 명분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임신과 출산, 육아를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껏 할 수 있는 사회토양을 만들어 주어야 하며, 산부인과 의사들에게는 낙태시술을 하지 않고도 걱정없이 소신껏 병원운영을 할 수 있는 정상적인 의료환경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낙태근절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에게 핵심은 ‘생명’이고 누구도 개인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 또한 낙태 근절을 위해 미혼모와 사생아, 기형아와 장애아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 제거, 공공 및 사설 보육시설의 확충, 직장 내 임산부와 워킹맘에 대한 처우 개선, 청소년 임신의 경우 남성의 책임 문제, 대국민 성교육과 피임교육 및 낙태 폐해 교육, 생명경시 풍조와 개인주의 제고 등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들 주장의 중심은 생명이기에 그 이외의 여성이 처한 사회경제적인 조건과 권리는 결국 부차적인 것이 된다.





생명존중이라는 말은 당연한 말 같지만 그것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태아도 생명이다’(생명권)라는 말을 앞세워 ‘낙태는 살인이다’라 주장하고 있다.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된 이후부터 생명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명권에 대한 원칙론적 입장은 극단적 결론을 만들어내며 생물학적인 측면으로 논의를 한정짓는다. ‘수정란이 생명이라면, 생명의 맹아를 지닌 정자와 난자가 생명이 아닌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자위를 통해 정자를 배출하는 행위 또한 살인으로서 처벌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명을 죽이는 것이 문제라면 왜 강간에 의한 임신은 처벌받지 않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이들은 쉽게 답할 수 없다. 사회적으로 ‘생명을 헤쳐서는 안 된다’라는 윤리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진지한 고민을 해보지도 않은 채로 여성의 권리를 이에 하위에 있는 것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최근 낙태와 관련된 논쟁은 결국 ‘태아의 생명을 지키자(생명권) vs 여성의 결정권이 먼저다(여성의 임신,출산에 대한 결정권)’라는 좁은 틀로 갇혀버렸다. 이는 여성의 결정권이 ‘내 몸의 문제니까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정도의 이기적인 논리로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여성들이 낙태를 결정하는 이유가 그렇게 단순한 이유일까. 60년대 이후 여성이 인구조절정책의 일환으로 국가의 도구, 출산의 도구로 읽혀졌던 기나긴 역사들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단순히 여성의 결정권을 이기적인 주장만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 동안 여성들의 의견, 여성들의 사회경제적 조건들은 고려하지 않은 상황, 자신의 몸의 일임에도 한 번도 그것에 결정권을 제대로 가져본 적 없던 여성들의 주장을 ‘생명에 대한 책임감이 없는 사람’의 것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그 동안 한 번도 제대로 주목하지 않았던 여성에게 고유한 성욕, 임신, 출산의 문제를 진지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이들은 여성 개인만이 책임져서는 안 될 ‘사회적, 국가적인 문제이지만 무한대로 신성화된 생명권의 압박은 그녀들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듣는 것조차 허용하고 않기 때문이다.


최근 낙태단속을 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주체 중에 생명권에 대한 주창자들도 있지만 정부 또한 빠질 수 없다. 하지만 6-70년대 인구조절정책을 실시하며 낙태를 권장했던 정부가 갑자기 ‘불법낙태’를 단속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최근 프로라이프의사회의 낙태병원 고발이 힘을 받고, 주류 언론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체로 주목할 현상이라서가 결코 아니다. 대통령 직속 산하의 미래기획위원회는 작년 11월 저출산 대책의 일환으로 ‘낙태단속 강화’를 운운했다가 엄청난 논란을 일으킬 뻔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발이 심할 것으로 예상을 한 것인지 실제 제출된 저출산 대책은 ‘여성이 일과 가사를 양립할 수 있는 지원책’으로 한정 되었다. 그런데 올해 2월 프로라이프의사회가 낙태병원을 고발하고 사회적인 파장을 일으키자 이를 명목으로 3월 1일 ‘불법인공임신중절예방 종합대책’을 발표한 것이다.


최근 낙태논란의 근저에 깔려있는 정부와 지배권력들의 핵심은 결국 여기에 있다. 저출산 현상과 여성이 출산을 할 수 없는 조건은 IMF이후 노동자들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에 의해 발생한 가족해체의 위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수많은 여성들이 빈곤해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사회로 진출했고 이로 인해 여성은 집안일에 더해서 바깥일까지 담당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가정을 책임지지 않으면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되는 사회적인 조건은 결국 가정에서 여성이 부담해야 하는 일들을 줄이도록 만들었고, 이로 인해 저출산 현상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회적인 문제를 자신의 책임이 아닌 여성들의 책임으로 교묘하게 돌려놓기 위해 정부관료, 주류언론은 저출산이라는 사회-경제적인 조건에 의한 문제를 ‘개인의 도덕성의 부재’라는 문제로 환원하며 여성을 압박하고 있다. 즉 ‘국가발전을 가로막는 이기적인 여성들에 의한 저출산’이라는 담론으로는 부족하자 이제는 ‘고귀한 생명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는 여성’이라는 논지로 여성들에게 출산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은 성욕, 출산, 양육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기본적인 여성의 목소리들이 ‘생명존중’, ‘저출산의 위기’라는 극단화된 논리 앞에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는 현실. 이제 극단화된 색안경을 잠시 벗어두고 여성에게 반드시 주어져야 할 고유한 권리에 대해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한 번도 주목받지 못하고 국가의 출산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권리, 그래서 제대로 말 한 번 못했지만 이 시대를 만들었고, 사회가 발전하는데 너무나도 필요한 노동을 해왔던 당당한 여성들의 권리를 살펴보자. 그리고 그 권리들이 보장받기 위한 사회적인 장치들은 어떤 모습들일지 알아보자.


낙태논란이 일고 있는 요즘 여성의 권리는 ‘낙태할 수 있는 권리’로만 읽히고 있는 것 같다. 낙태를 여성의 권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그렇게 단순한 논리가 아님에도 ‘여성은 생명에 대한, 사회적 위기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말에 다소 무력하기도 하다. 그래서 ‘낙태의 위험성’, ‘낙태를 하지 못했을 때의 위험성’들을 더욱더 강조하는 방식으로만 대응하기도 한다. 출산과 관련된 낙태라는 쟁점은 결코 출산만으로 묶이지 않는 여성만이 가져야 하는 고유한 권리로서 ‘성욕, 출산, 양육’이라는 문제를 함께 가져온다. 그 세 가지가 단순히 ‘여성’의 것이기 때문에 ‘여성의 권리’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으면 섹스하지 마라’, ‘즐기는 여성은 당연히 그에 따르는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는 말은 성욕과 출산이 여성에게 부당하게 전가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양육이라는 사회적인 일을 10개월간 아이를 뱃속에서 키우며 생겨난 모성으로 견뎌내야 한다는 사회적인 압박은 출산과 양육이 여성의 선택권 안에 들어오지 않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세 가지를 현재 여성이 온전히 선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의 성욕은 이전만큼 억압되어 있지는 않지만 출산을 위한 한도 내에서만 허용되거나, 남성의 성욕에 대한 대상으로서 상품화되거나 대상화된다. 양육 또한 여성이 갖춰야할 덕목으로 여겨진다. 사회적으로 이미 결정된 내용들 속에 여성의 개인적인 선택권은 온대간대 없다. 핵심은 여성의 문제가 끊임없이 ‘모성’, ‘어머니’, ‘가족’이라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의미부여를 통해 공적인 일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분명 출산과 양육, 그것과 밀접하게 관계 맺는 여성의 성욕이라는 문제는 사회적인 권력임에도 그것은 끝없이 개인화되어 가족 속으로, 여성 혼자 감당할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낙태논란 속에서 정부는 여성이 출산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준다고 지원책을 내놓고 있지만 ‘출산이 여성의 책임’이라는 말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 말을 포기하게 되는 것은 출산을 할 수 있는 여성이 그 결정권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욕에서 시작해서 양육까지 이어지는 그 ‘사회적 과정’을 여성의 개인적인 책임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여성의 선택권이 포함되지 않은 ‘성욕, 출산, 양육’의 문제라고 한다면 아무리 그것이 사회적 과정이라고 하지만 반쪽만을 위한 과정일 수밖에 없다. 하기에 우리는 그 과정 하나하나에 여성의 선택권을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모든 권리들은 여성의 삶과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결정권을 지니지만 현재 중요한 것은 오히려 모호하게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뭉쳐있는 성욕, 출산, 양육 각각에 여성의 특수한 권리들을 부여하는 것이다. 또한 그 선택들을 위한 사회적인 장치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성욕이라는 여성의 자유는 스스로의 성욕을 긍정할 수 있는 자유뿐만 아니라 상품화되거나 남성의 성욕의 대상이 되지 않을 자유를 포함해야 한다. 성욕이 온전히 여성의 권리가 되기 위해서는 출산으로 이어지지 않는 성관계가 긍정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 당당히 여성이 피임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야 한다. 또한 당연하게 그 모든 관계로부터 철수할 수 있는 권리 또한 있어야 한다.

또한 여성에게 출산에 대한 권리가 추가되어야 한다. 그것은 여성의 몸속에 또 하나의 생명이 자라나게 할 것인지, 아닐지를 결정할 권리이며 낙태를 할지, 출산을 할지를 결정할 권리이다. 낙태 또한 여성의 선택권 하에 있어야 하지만 출산을 여성이 선택하는 이유에 주목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성이 출산을 선택할 때는 태아의 생명에 대한 것이 가장 크다. 여성은 자신이 임신을 생명의 출산으로 연장시킬 권리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조건 양육에 대한 책임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양육이란 사회적으로 책임질 일이지 여성이 반드시 책임질 이유는 없다.

앞의 두 권리가 온전히 여성의 권리가 되기 위해서는 양육에 대한 선택권을 여성이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양육이 여성만의 책임이 되지 않고, 사회적으로 책임져져야 하는 이유는 여성에게 출산만 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무조건 산모로부터 아이를 분리시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선택권을 여성 산모에게 주고, 출산과 양육 사이에 어떤 선택이든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적인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10개월간 뱃속에서 자란 아이를 스스로 키울 수 있는 권리가 진정으로 여성의 자유로운 선택권에 의해 결정되기 위해서는 양육을 하는 여성이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특별하게 ‘모성’을 더 지녔고, 더 올바른 여성이라는 사회적인 편견을 제거해야 하며, 그것이 실현될 수 있기 위해 양육하는 여성을 위한 사회적인 조건이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원하지 않는 임신을 피하기 위한 피임에 실패했을 때의 상황으로 보자면 여성의 의사에 따라 낙태의 권리, 출산만 할 권리, 양육까지 함께 할 권리들이 모두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원치 않는 임신의 경우 안전하게 낙태할 수 있는 합법적인 지원이 보장되어야 한다. 원치 않는 임신이었지만 출산하고자 하는 여성에 대해 출산한 여성만이 온전히 양육을 책임지지 않을 수 있는 보육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또한 자신이 양육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육아휴직 기간에 대한 보장이 필요하겠다.



지금 바로! 낙태단속을 멈춰야 한다!


최근 각종 언론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낙태논쟁은 결코 생명의료윤리 수업시간에 주어지는 토론쟁점이 아니다. 바로 지금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이고, 수많은 여성들이 아무 목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 폭력을 감내하고 있다. 정부는 ‘낙태단속 센터’까지 설립해가며 강경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저출산의 위기를 여성에게 전가하기 위해 ‘생명존중’의 이름을 빌어 낙태를 단속하고 있는 이명박 정권의 반 인권적-반 여성적인 정책에 우리는 당당히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흩어져 있는 불만들을 한 곳으로 모아 지금의 흐름을 저지할 수 있는 실질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내야 한다.





또한 이러한 행동 뿐만 아니라 여성이 원치 않는 임신을 중단할 낙태에 대한 권리를 박탈하는 현 상황을 바라보며 그 권리 속에 담긴 더 많은 여성의 권리들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는 ‘여성의 권리라고 하는 것들을 다 들어주고 마음대로 하게 해주면 세상이 엉망이 될 것이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성의 문제만이 아닌 모든 문제들과 저항하며 싸우는 세계의 수많은 여성들이 이 말을 행동으로 반박하고 있다. 오히려 또 다른 세상이란 마치 여성에게도 그렇듯이 자신의 몸, 노동, 감정과 욕구 그 모든 것이 세상 속에서 자유롭지만 그것이 결코 전체에게 해롭지 않은 세상이 아닐까. 우리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거부하는 동시에 이를 통해 그 ‘또 다른 세상’을 조금 더 풍부하게 상상할 수 있어야겠다.

Posted by 행진

2010/03/15 20:54 2010/03/15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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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0/03/20 11:44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1. 행진 2010/03/21 13:19 # M/D Permalink

      네!^^ 참고가 되신다니 반가운 일이네요. 편하게 활용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