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지방선거, 무엇을 남겼나?


지방선거 결과 스케치_북풍 누른 노풍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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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류언론들과 여론조사 모두 한나라당 대세론을 이야기 했지만, 투표결과는 예상과 전혀 달랐다. 개표 전 기세등등하게 대거 당선을 예상한 한나라당은 참담한 표정이었다. 서울시장에서 오세훈 후보가 간발의 차로 당선된 것부터 시작해서 전체 기초단체장 당선자 수에서 민주당이 앞선 것까지 사실상 ‘이변’이 일어났다. 많은 언론들은 '북풍을 누른 노풍의 승리'라고 떠들어댔다. 언론은 안희정과 이광재, 김두관을 두고 노무현의 '좌희정', '우광재' 그리고 '리틀 노무현'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천안함 사건 이후 그 원인을 북한의 어뢰 공격에 의한 것이라고 공식 발표하면서 시작된 강경 대북제재는 ‘북풍’을 불어오기는커녕 한나라당에게 ‘역풍’으로 돌아왔다.

 진보정당들도 성적이 크게 나쁘지는 않다. 야권연대를 적극 추진했던 민주노동당의 경우 이번 선거에서 기초단체장 3명(창당 이후 첫 수도권 기초단체장), 광역·기초 의원 139명을 당선시키면서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뒀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현재 야권 단일 후보가 당선된 인천과 강원, 경남 등 3곳 광역단체와 서울 강서와 경기, 성남 등 28곳의 기초단체에서 민주당과 공동지방정부를 실험하기로 한 것에 기대를 걸고 있다. 진보신당의 경우 25명의 지방의원을 당선시켰다. 창당 2년이 지나지 않았다는 점과 1만 5천명 정도에 불과한 당세를 감안한다면 선전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심상정 경기도지사 후보 사퇴 사건으로 혼란이 가중된 것을 비롯하여 중앙당의 불명확한 선거 전략으로 명분과 실리 모두를 얻지 못하는 불만족스러운 선거 결과에 대한 내부 평가가 지속될 전망이다.


반MB 표심의 확대, 국민의 선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번 지방선거 결과는 현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다. 15년 만에 처음으로 54.5%라는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특히 청년층의 투표율이 증가했다. 선거과정에서 화두가 되었던 천안함 침몰 사건과 관련한 한반도 전쟁위협의 고조와 이명박 정권의 독단적 국정운영에 대한 반감을 ‘투표’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상대적으로 분열된 보수층에 비해 진보ㆍ민주진영의 후보 단일화 전술이 효과를 발휘했음도 부정할 수 없다. 현 정권을 견제할 수 있는 현실적인 세력을 선택하려는 국민들의 심리를 후보 단일화라는 틀이 흡수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의 성격을 가진 선거에서 여당이 패배한 것은 비단 이번 선거만의 일은 아니다. 2006년에는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에게 큰 차이로 패배했다. 엄밀히 말해 이번 지방선거결과를 한나라당의 참패라고 보기 어려운 부분도 존재한다. 정당지지율로는 여전히 한나라당이 민주당에 뒤지지 않고 있고, 수도권 지역만 보더라도 한나라당이 여전히 안정적인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한나라당 패배-민주당 승리라는 표면적인 결과 이면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자세하게 분석할 것을 요구한다. 한나라당에 대한 심판 여론을 단순히 ‘민심의 진보화’ 혹은 ‘계급의식의 확대’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국민들의 ‘정권심판’ 요구는 탄탄한 토대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대부분의 국민들은 민주당을 자신들을 대표할 수 있는 진정한 대안세력이라기보다는 집권 정당에 대한 현실적인 견제세력으로 사고하고 있다. 정당을 지지하는 기준이 집권 정당에 대한 반발에 머무는 한 언제든 상황은 역전될 수 있다는 것을,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의 역사가 이미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여당과 다르지 않은 야당이라는 여론이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순간, 지지는 한 순간에 사라지고 말 것이다.

 때문에 현실의 모순을 근원적으로 해결하려는 진보진영은 대중들의 분노와 불만을 동원하여 선거에서 승리하려는 안일함을 넘어, 전반적인 삶의 불안정화와 비민주적 상황에 맞서는 확고한 이념과 대안을 모색하려는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 여-야 할 것 없이 서민중심과 일자리 창출을 이야기 했지만 국민들에게 선거기간 반짝하는 공약 이상의 진지한 대안으로 받아들여졌을지는 의문이다. 선거 막바지로 갈수록, 타 정당에 대한 비난이나 후보이미지로 표심을 잡으려는 모습이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지금 당장은 이명박 정권에 대한 분노로 인해, 범야권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한 국면이 펼쳐지고 있지만,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무능력한 모습을 보인다면 대중들은 곧 등을 돌리게 될 것이다. 진보진영은 현 정권에 대한 ANTI 세력으로 머물기보다는 경제위기와 불안정노동, 저임금과 불평등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세력으로 아래로부터 힘을 키워야 한다.

 그러나 이번 지방선거에서 진보정당들은 현 정권에 대한 불만을 동원하는 것과 정치공학을 통한 자리 얻기에만 열을 올렸다. 반MB연대에 대한 환상으로 진보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들의 우경화는 선거 이후 더욱 강화되고 있다.

정체성을 상실한 진보정당 운동 

 이명박 정권을 심판하기 위해 야권연대를 추구해야 한다는 ‘민주대연합’의 핵심은 민주당 주도의 후보단일화 전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은 이에 적극적으로 힘을 실었다. 민주노동당은 서울시장과 경기도 지사를 비롯한 수도권 지역 기초단체장 선거에서 민주당을 적극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로 민주당으로부터 구청장 후보 등을 양보 받아 당선되는 성과를 내기도 했는데, 이것을 마냥 ‘승리’로 평가하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다. 민주당 집권 10년은 이명박 정권이 실행하는 정책의 토대를 닦은 기간이었다. 금산분리 완화, 한미 FTA 추진, 자본시장통합, 각종 기업에 대한 해외매각 등 한국 사회를 신자유주의로 깊숙하게 편입시킨 것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작품이었다. 이들이 이제와 ‘왼쪽’으로 노선을 선회한 것처럼 선전하는 것은 아주 기회주의적인 모습이다. 이러한 이들의 본질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연합을 추진하는 민주노동당의 모습은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전술적 판단이라고 하기에는 도가 지나쳤다. 선거 이후 민주노동당의 행보는 더욱 우려스럽다. 이번 선거결과를 발판삼아 2012년 민주당과의 공동 집권과 공동내각을 구상하겠다는 이야기를 공개석상에서 서슴지 않고 내뱉고 있다. 일각에서는 진보세력과 자유주의세력이 당내에 공존하는 ‘미국 민주당 모델’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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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진보신당은 원칙 없는 반MB연합에 반대한다고 하면서도 5+4회의에 참가하고 지역별로 야권연대에 동의하는 등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결국에는 5월 30일에 경기도지사 후보였던 심상정 후보가 국민참여당 후보였던 유시민 후보를 지지하면서 사퇴를 공식선언하는 일이 생겼다.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한 노회찬 후보는 끝까지 입장을 고수했는데, 오세훈 후보가 간발의 차이로 한명숙 후보를 제치고 당선하자 단일화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많은 질타를 받았다. 선거 과정에서 보인 여러 가지 한계들로 인해 진보신당 내부에서는 중앙당의 방침과 대표들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표출되었고, 선거 이후 이를 수습하기 위한 방안들을 마련하는 중이다. 진보신당이 선거기간동안 여러 가지로 좌충우돌했던 것은 지방선거의 의의와 목표를 명확하게 설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대연합이 아닌 독자 행보를 하겠다고 호언장담 했으되, 진보신당의 정책이나 방향은 민주당의 그것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반신자유주의와 경제위기 책임전가 반대 등의 입장을 분명하게 내세운다기보다는 ‘복지확대’에만 초점을 맞추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선거 전략으로는 ‘진보정당’으로서의 명확한 위치를 확보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진보정당에 대한 사표심리를 더욱 부추길 뿐이다. 한나라당 심판을 위해 일단 민주당을 찍으라고 주장하는 진보정당들은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력과의 단절 없이는 민중들의 정치가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정치적 이해관계를 위해 이 같은 이념을 희생시키는 것은 ‘진보정치’가 아니다.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라는 목표 자체가 반MB연대에 의해 희미해지고 있는 상황, 대중운동들로부터 대안세력을 만들어가는 노력보다는 표심을 잡기에 급급한 모습의 진보정당은 대중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신자유주의에 맞선 노동자-민중의 저항을 엄호하는 진보세력의 재정비가 필요하다!

 민주당이 지방자치단체장에 많이 당선됐다고 해서 민중들의 삶을 억압하고 빈곤을 확산하는 신자유주의가 역전될 리 만무하다. 한나라당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하반기 이명박 정권의 정책기조는 변화하지 않을 예정이다. 소리 소문 없이 생존권과 노동권을 박탈당하는 이들이 전국 곳곳에 존재하고, 이에 저항하는 노동자-민중의 투쟁을 억압하는 폭력의 강도도 더욱 높아질 것이다. 소위 ‘국민의 힘으로 당선되었다는’ 민주당은 노동자-민중과 같은 길을 걸을 수 없다. 정부여당의 국정운영에 대한 견제역할 정도는 수행할 수 있지만, 큰 틀에서 현재 경제위기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을 관리해야하는 이해관계는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현실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상층중심의 야권연대를 통해 타협과 합의를 이어나가는 방식이 지속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실리적인 이익을 찾으며, 잘못 잡은 손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 친다면 진보의 미래는 없다. 초유의 경제위기 하에서 어렵더라도 대중적 투쟁을 엄호하면서, 장기적 전망을 가지고 분열을 넘어 단결을 구축하려는, 그야말로 ‘재정비’가 필요하다. 다시금 진보정당의 역할에 대한 원칙과 이념을 바로 세울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더 이상 진보정당들만의 과제가 아니다.

Posted by 행진

2010/06/23 22:21 2010/06/23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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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 선언 10주년, 6.15 남북공동선언이 한반도 평화의 해법이 될 수 있는가?



  최근 천안함 사건으로 인해 한반도 평화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남한과 북한 정권은 군사적 대응까지 고려하고 있고 국제 사회는 북한에게 엄정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으면서, 많은 국민들이 이러다가 전쟁 나는거 아니냐며 우려하기도 했다.



  우리에게 익숙할지도 모르는 남북 위기 국면이 다시 도래한 것이다. 왜 한반도는 계속해서 전쟁의 위협에 시달릴 수 밖에 없을까? 이런 대결구도를 끝내고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일차적인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통일’이다. 하지만 이 ‘통일’이라는 한 단어에는 수많은 쟁점들이 존재한다. 심지어 이명박 대통령도 ‘통일을 염두에 둔 안보전략을 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또한 2000년 당시 6.15 남북공동선언(이하 6.15 선언)을 크게 반겼던 세력들은 6.15 선언을 이행하는 것이 통일 및 한반도 평화에 핵심적이라고 말한다.(올해는 6.15 선언 1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과연 한반도의 평화가 이명박 대통령이 주장한 ‘통일을 염두에 둔 안보전략’이나 일부 세력들이 한반도 평화에 핵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6.15 선언’으로 올 수 있을까? 6.15 선언 10주년, 그리고 천안함 사건을 맞아 한반도 평화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고자 한다.


햇볕정책과 6.15 남북공동선언

  6.15 선언의 성격에 대해 분석하기 전에 짧게 6.15 남북공동선언이 무엇인지 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1990년대 미국의 대북 전략은 정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봉쇄와 접촉’, ‘당근과 채찍’ 등으로 집약될 수 있는데(페리보고서의 이중경로 전략) 특히 클린턴 때는 북한정권의 급격한 붕괴를 상정하기보다는 유화국면 속에서 신자유주의 체제에 걸림돌이 되는 북한의 불안정성을 제거하고 북한에 대한 경제 개방을 이끄는 것을 단기적 목표로 하였다. 이 과정에서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6.15 선언이 있게 된다.

  남한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평양에서 만나 정상회담을 했다. 이것은 김대중 대통령이 후보 시절부터 꾸준히 이야기한 ‘햇볕정책’의 일환으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남북 정상들은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회담이 서로의 이해를 증진시키고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며 평화통일을 실현하는데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하고 총 5가지의 합의사항을 발표한다. 이 내용은 남북통일의 원칙(자주적 통일, 남한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의 공통성 인정 등), 이산가족 문제, 비전향장기수 문제, 남북 경제와 문화 협력, 김정일 위원장의 남한 방문 등의 내용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이 선언은 당시 세계적으로도 중대한 계기로 인식되면서 남한과 북한에 곧 항구적인 평화가 찾아올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6.15 선언으로 상징되는 유화적 흐름 속에서 체결된 ‘북미공동코뮤니케’는 곧 미국이 북한의 미사일을 문제삼으며 파기되었고, 2001년 미국의 ‘악의 축’ 발언으로 남북관계는 다시 위기로 치닫게 되었다.



6.15 남북공동선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많은 세력들이 남북이 매우 평화롭게 보였던 시기인 2000년을 떠올리며 ‘6.15 합의 이행’을 주장하고 있다. 올해는 특히 1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행사도 성대하게 치러지는 등 6.15 선언이 더욱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앞서 서술했듯이 이 선언이 남북의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 지는 미지수이다. 6.15 선언이 어떠한 국제적 정세속에서 맺어진 협정인지, 그것을 용인한 미국의 의도는 무엇이었는지 를 자세히 살펴본다면 6.15 선언의 성격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 수 있다.

 김대중 정권의 가장 큰 업적, 바로 6.15 선언이다. 이 6.15 선언은 그 당시 ‘햇볕정책’이라 이름 붙여진 남북한 화해와 관련된 흐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햇볕 정책은 큰 틀에서 미국이 구상하는 동아시아 전략에 공조하는 것이었다. 앞서 서술했던 것처럼 남북관계는 미국의 태도와 정책기조에 따라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

  미국은 계속되는 재정적자와 무역적자에도 불구하고, 세계경제의 헤게모니 국가로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동아시아 지역에서 강력한 군사력으로 경제력을 뒷받침했다. 이 과정에서 북한이라는 ‘변수’를 관리하는 다양한 방식이 등장했던 것이다. 미국의 포용정책은 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리저리 바뀔 수 있는 일시적이고 종속적인 성격일 뿐이다.

  이런 포용정책은 본질적으로 통일정책이 아니라 분단관리정책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평화공존을 위해서는 미군(군인은 전쟁을 수행하는 사람들이며 전쟁의 전제조건이라는 것을 명확히 인지해야 한다!) 철수라는 조건이 우선적으로 충족되어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신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미국 주둔의 필요성을 설득했다고 자랑하기도 하는데, 한반도에 미군이 주둔하는 것 자체가 평화공존의 모순이다. 그런데 많은 세력들은 이런 포용정책에 대해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입장을 제출해왔다.

  현재 악화되고 있는 남북관계를 두고 ‘이명박 정부가 남북관계 10년을 되돌리고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김대중-노무현 10년이 지금보다 괜찮았다고 평가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문민정부 이후 ‘통일’은 국가 정책의 일환으로 흡수되면서 봉쇄정책(적극적 대결)이냐 포용정책(분단 관리)이냐의 양자택일의 문제로 변질되고 있을 뿐 진정 한반도 평화를 위한 정책을 펼쳤던 정권은 단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김대중 정권은 평화 대통령으로 인식되었다. 결국 포용정책은 김대중 정권 시절 민중들의 삶이 벼랑으로 내몰리는 것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배달호, 최옥란 등의 열사들을 잊게하고 김대중을 평화의 수호자/민주의 수호자로 만들어버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미국의 대외전략은 세계자본주의의 질서에 거스르는 국가와 세력에 대한 제재와 공격을 강화한다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 목적은 종국에 이들을 금융세계화로 편입하든 말살하든 간에 현재의 금융세계화 체제를 안정적으로 보장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6.15선언 합의 이행 구호로 달성될 수 있는 것은 현 상태 유지 이상 이하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6.15선언 합의 이행과 같은 구호가 아니라 현 체제가 양산하는 전쟁위기에 맞서 민중들의 평화권을 되찾기 위한 활동, 그리고 금융-군사세계화를 주도하는 미국과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있는 남한 정권에 대해 비판을 전면화해야 한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원칙

  위에서 대략적으로 6.15 선언을 바라보는 관점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방향을 살펴보았다. 이제는 (한반도 전쟁위기가 고조되는 지금) 좀 더 구체적으로 ‘평화’를 위해 우리가 견지해야 할 원칙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이명박 정권의 대북 봉쇄정책 및 대결기조 철회가 선차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명박 정권은 재임 초기부터 북한에 대해 꾸준히 대결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고, 군사적 도발을 서슴지 않고 있다. 이것은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 PSI 참여 등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최근 천안함 사태에서는 조사 결과가 발표되기 전부터 북한을 염두에 둔 발언을 하기도 했고, 조사 결과 발표 후에는 마치 군사적 보복이 해결책이라도 되는양 북한을 자극하고 북한에 대해 대결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이렇게 북한을 군사적 대결 대상으로만 보고, ‘보복외교, 도발외교’를 일삼는 이명박 정권의 대북 태도는 결국 군사적 위기를 불러올 뿐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면서 이명박 정권의 대북정책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천안함 관련 북한 제재/봉쇄정책 즉각 철회하라!
- PSI 참여 중단하라!

  둘째, 한-미-일 군사동맹 해체를 요구하자!

  하지만 문제는 이명박 정권이 대북 대결기조를 철회한다고 해서 끝나지 않는다. 김대중ㆍ노무현 정권 시기에는 북한에 대해 포용정책을 취했지만 그것이 결국 진정한 한반도 평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바로 미국의 동아시아 관리정책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는 아시아-태평양을 연결하는 신흥시장으로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속에서 미국 주도 하에 경제통합의 구상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다. 지역적 수준의 군사강국이 분명치 않으나, 여러 가지 불안정성이 존재하고 있어 대규모 군사적 경쟁의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는 지역이다. 잠재적으로 미국에게 군사적 도전국이 될 중국의 부상을 제어하고, 아시아-태평양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군사벨트를 형성하고자 했을 때, 동북아의 한-미-일 삼각동맹은 지역동맹으로 확장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미국의 군사전략에 전극 편승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는 기존의 한-미동맹을 한반도와 동북아를 넘어 국제 평화에 기여하는 전략동맹으로 발전시키겠다고 하고 있다. 기존의 한-미동맹이 반공이념과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면, 전략동맹은 이를 넘어 정치ㆍ경제ㆍ사회 등 모든 제반 분야에서 상호 신뢰확대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보았듯 이러한 전략은 한-미 및 한-미-일의 공조강화를 통해 미국중심의 동북아시아 지역 안보구도를 고착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미동맹관계를 강화하는 것은 남한이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경제 통합과정을 보다 철저히 이행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에 따르는 위험으로서 한반도의 전쟁 가능성을 높이는 효과를 낳는다. 우리는 한-미동맹은 바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질서와 이에 조응하는 미국의 군사세계화를 공고히 하는 것이라는 것을 낱낱이 폭로해 가며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주범은 바로 한-미-일동맹에 있다는 것을 알리고 한-미-일동맹 폐기를 외쳐야 한다.
- 주한미군 철수하라!
- 키리졸브/팀스피리트 등 한미합동 군사훈련 즉각 중단하라!
- 침략전쟁에 이로울 뿐인 ‘전략적 유연성’ 반대한다!
- 군사동맹이 아닌 평화동맹을!

셋째, 일방적으로 남한이 군비 및 군대 규모를 축소해야 한다!

  전 세계가 무한 군사경쟁을 펼치고 있었던 냉전 시기를 살펴보자. 냉전이 가장 첨예해진 시기에도 미국과 소련은 군비 축소를 위한 다양한 형태의 협상이 지속되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몇몇 제한적 합의가 이뤄지기도 했지만 그것이 실제적으로 획기적인 군비축소나 핵폐기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역사를 돌이켜보더라도 전쟁 위기와 냉전 체제가 종결된 것은 협상에서의 화해, 협력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냉전 체제의 종결은 비로소 소련이 붕괴하고 난 후에야 이루어졌다.

  즉, 양국간의 협상이 군비를 억제하기보다는 오히려 군비증강의 변명이나 눈가리개로 주로 기능했다는 것이다. 이에 평화운동 집단은 미-소 협상을 통한 상호 군축합의를 넘어서, 자국 정부에 의한 일방적ㆍ단독적 군비축소(unilateralism)를 촉구하는 운동으로 나아갔다. 특히 1980년대 초 정점에 이른 유럽의 반핵평화운동은 핵실험의 중단, 군사기지의 제거, 특정 군사전략의 폐기 등 자국정부의 일방주의적 행동을 촉구했다. 일방주의적 행동을 위한 요구는 원칙적으로 정부에 대한 대중의 압력을 통해 쟁취될 수 있으며, 정부의 행동은 뉴스 미디어와 여론에 의해 감시될 수 있다. 반면 운동이 다자간, 양자간 국가적 협상을 요구한다면 협상과정을 자세히 파악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우며, 협상 과정을 신뢰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협상의 실패에 대한 비난은 상대편에 대한 책임 전가로 이어질 수 있다.

  군비축소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이는 없다. 원칙적으로 ‘전쟁’을 바라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이명박 대통령도 전쟁을 원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문제는 ‘어떻게 군비를 축소할 것이냐’이다. 유효한 군비 축소란 ‘일방적’일 수 밖에 없다. 상대방이 하면 나도 하겠다는 ‘포괄적’ 군비축소는 사실상 군비축소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즉 현재의 남북간 군사 긴장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으로 남한이 먼저 군비축소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군대나 군비 축소를 위한 국가 간 협상에 기대하기에 앞서 남한에서부터 일방적인 군비 및 군대 규모가 축소될 수 있도록 하여 남북 평화의 돌파구를 열어야 할 것이다. 국가간의 합의는 언제나 불안정했고, 여기에 민중들의 평화적 열망이 담기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 합의가 현실로 이어지기란 만무하기 때문이다.
- 군비의 증가가 아닌 민중들의 삶에 대한 지원을!
- 천안함 사건 빌미로 한 전력증강 발표 철회하라!


  위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한 원칙과 요구들을 살펴보았다. 이 원칙들을 전제로 하여, 진정 한반도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은 신자유주의 정권의 사탕발린 수사도, 단순한 정권간의 합의도 아니라는 것을 널리 알려나갈 수 있도록 하자. 정권에서는 해마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6.25 ‘전쟁’을 상기시키며 은근히 북한의 군사적인 측면을 부각시킨다. 더군다나 올해는 6.25 전쟁이 60주년이어서 더욱 그 흐름이 눈에 띄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북한 역시 군사 도발에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보복’ 논리로 또다시 북한을 자극하는 것이 진정 남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인지는 차근히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2010년 6월을, 민중들의 적극적인 문제제기와 직접행동을 통해 정권이 광고하는 호국보훈의 달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평화의 달로 만들어가자!


Posted by 행진

2010/06/23 11:55 2010/06/23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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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박한 의료민영화, 어떻게 맞설 것인가?


 

본 글은 보건의료학생 [매듭]에서 기고한 글입니다.
건강한 세상, 더 큰 연대를 위한 보건의료학생 [매듭]은 현재 2010년 여름 건강현장활동(7/19-25)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http://knotforhealth.tistory.com/97을 방문하세요.



의료민영화, 이대로 현실화?

  의료민영화가 현실화되고 있다. 참여정부 때부터 '의료산업화' 혹은 '의료선진화'라는 거짓이름으로 시작된 의료민영화는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인수위 시절부터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였다. 남한 의료의 체계를 송두리째 바꿔놓을 당연지정제 폐지(당연지정제는 모든 의료기관과 국민건강보험과의 계약을 강제하는 제도로서, 공공병원의 비율이 10% 이하인 남한에서 공공보건의료체계를 유지시켜주는 필수적인 제도이다)까지 논의 테이블에 올랐다가 2008년 촛불의 여파로 인해 잠잠해진다. 2009년 다시 '서비스산업 선진화 방안'이라는 정책 속에 포함되어 흐름을 타던 의료민영화 시도는 12월에 발표된 KDI(한국개발연구원)와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의 영리의료법인(현재 남한의 모든 의료기관은 비영리법인이어야만 하며, 자본의 출입과 이윤 배당을 금지하고 있으며 이윤은 병원에 재투자된다) 도입 필요성에 대한 연구용역 보고서가 각기 다른 결론을 내며 모순에 부딪히면서 표류하고 만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2009년 12월 10일 관계부처합동 명의로 발표한 <2010년 경제정책방향과 과제>를 보면 정부가 제시하는 경제정책 6개 분야 주요과제 중 ‘서비스산업 선진화’가 핵심으로 들어가 있다. 서비스산업 선진화는 경제자유구역에서 외국교육기관이나 외국의료기관의 설립과 운영에 관한 특별법 제ㆍ개정, 투자개방형 의료법인(영리병원) 도입이 핵심 요지다. 아니나 다를까, 2010년 상반기 임시 국회에는 어김없이 의료민영화 5대 악법(의료법 개정안, 의료채권법, 보험업법 개정안, 경제자유구역 특별법, 제주도 특별법)이 모두 상정되었다. 또한 지난 5월 17일에는 치료를 제외한 검진, 예방, 관리에 관련된 의료서비스는 모두 민영화시키는 법안인 ‘건강관리서비스법안’이 국회에 상정되었다. 진보적 보건의료 및 사회운동단체가 7년여 시간동안 맞서오던 의료민영화가 단 몇 달 사이에 국회를 통과할지도 모르는 매우 긴박한 상황이다.


  물론 아직까지 의료민영화에 찬성하기보다는 반대하는 국민이 많은 상황에서 정부도 쉽사리 움직이지는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예상 외로 고전하며 민주당에게 일시적으로 주도권을 빼앗긴 상황에서 6월 국회에서 의료민영화를 밀어붙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낙관적인 상황은 아니다. 민주당 및 친노 세력 역시 궁극적으로 의료민영화 찬성 쪽에 힘을 싣기 때문이다(물론 의료민영화에 반대하는 소수의 의원들이 있긴 하지만, 사회운동단체들의 수차례 요구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의료민영화 반대를 당론으로 택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이명박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의료민영화 정책들의 대부분은 과거 노무현의 참여정부 시절 현재의 민주당과 친노세력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이른바 반MB 연합의 맹목성이 잘 드러난다). 지방선거 결과로 인해 조금 늦춰질 뿐, 의료민영화는 하반기부터 신속하게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지난 6일 청와대가 보건복지비서관으로 정상혁 교수를 내정한 일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당연지정제 폐지와 민간의료보험 활성화를 주장하며 의료민영화의 첨병 역할을 해왔던 정상혁 교수를 그런 자리에 앉힌다는 것은 당연지정제 폐지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던 이명박 정부의 변명이 거짓임을 드러낸다. 또한 의료민영화 추동 세력 중 가장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기획재정부의 장관 윤증현이 지난 5월 31일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영리의료법인 도입에 대해 보건복지부와 함께 실무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다시 협의를 시작했다."라고 밝힌 것만 보아도 곧 의료민영화가 시작될 것이라는 것은 명확하다.

  의료민영화의 두 축 중 하나인 영리의료법인 도입(다른 하나는 민간의료보험 활성화)이 구체적인 정책안으로 도출될 경우, 이 문제는 올 하반기 G20과 함께 가장 큰 이슈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영리 의료법인은 미국 베스트 병원 순위에서 10위권 안에 드는 곳이 하나도 없으며(낮은 질), 비영리법인에 비해 사망률은 2% 가량 높고 병원비는 19% 가량 비싼 것으로 나타났다(높은 비용). 또한 영리 의료법인 도입은 단순히 의료공급체계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뿐만 아니라 당연지정제 폐지, 민간의료보험 활성화 등과 긴밀히 연관되어 사실상 의료를 시장화시키고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하는 데 있어 단초가 될 가능이 크다. 이미 시장주의적 의료가 지배하고 있는 미국의 사례를 살펴보면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금방 알 수 있다.

  미국의 평균 수명은 OECD 국가 중 24위, 천 명당 영아사망률은 27위로 건강수준은 매우 낮다. 또 전 국민의 15.3%(4,570만 명, 2007년)가 의료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으며 이로 인해 보험 미적용으로 추가로 사망하는 사람이 1년에 18000여명으로 추정된다. 미국에서는 의료비 부담으로 매년 2백만 명이 개인 파산하며, 이는 미국 전체 개인 파산의 50%에 달한다(파산자의 75%는 의료보험 가입자이다). 반면 총의료비 지출은 2007년 기준 GDP의 16.0%로 매우 높다(OECD 평균 9.1%). 이 중 대부분이 보험자본과 의료자본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제는 의료민영화에 맞서는 강력한 대중운동이 필요한 때이다. 하지만 최근 일각에서 의료민영화에 대한 대안으로 제출되고 있는 ‘건강보험 하나로 OK’ 정책안은 많은 난점들과 위험을 안고 있다. 함께 살펴보자.

'건강보험 하나로 OK',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지난 6월 9일, 국민 1인당 월평균 1만1천원의 국민건강보험료를 더 내면 선택진료비, 병실 차액, 초음파, MRI, 각종 검사의 의약품, 노인틀니 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OK’ 시민회의 준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들은 먼저 비용부담 방식의 변화를 꾀하여 현재 국민 1인당 월 평균 보험료 약 1만1천원을 더 내면 보장률을 90% 이상 수준으로 일시에 끌어올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는 민중의 생존권을 위해서도, 병원 영리법인화와 민간의료보험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이 보건의료체계에 대한 현 상황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현행 한국의 보건의료체계는 전국민건강보험을 통한 공적 의료재정체계와 민간중심의 의료공급체계(공공병원 비율 10% 이하)로 구성된다. 민간중심 공급구조는 행위별 수가제(진료 행위당 수가를 지급하는 제도로 과잉진료를 유발한다)가 결합되어 의료공급자의 영리추구행위를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1.5배의 재정확충을 통해서 보장률을 90% 이상으로 확대할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다. 2002년부터 2007년까지 5년간 건강보험 재정은 82%, 1인당 보험료는 79% 상승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장성 강화는 5.2%에 불과했으며, 연간 가계직접부담액은 43% 증가하여 물가상승률을 훨씬 상회했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영리추구적 공급체계를 건드리지 못하는 재정확충을 통한 보장성 강화는 필연적으로 의료시장의 팽창을 가져올 것이며, 영리추구적 의료공급자만 배불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또 '건강보험 하나로 OK' 안에는 보험자본과 제약자본에 대한 통제방안이 없다. 우리는 미국의 사례를 통해 민간보험자본과 제약자본에 대한 통제 없는 의료체계 개혁은 한계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오바마는 당초 건강보험 개혁안에서  공공의료보험을 만들어 민간의료보험과 경쟁시키려고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 조항은 빠지고 보험 미가입자를 의무적으로 민간의료보험에 가입시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결국 보험자본에게 더 큰 시장을 열어준 셈인데, 여기에 있어 보험자본의 로비와 압력이 상당했을 것이라 예측된다). 보건의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행위자이며, 신자유주의적 재편과정을 통해 더욱더 중심적 위치를 점하는 보험자본과 제약자본에 대한 인식이 없는 대안은 오히려 호랑이새끼에게 먹이를 주는 꼴이 될 수 있다.

  보험료를 (우선적으로) 인상하여 재정을 확충하자는 제안 또한 문제가 있다. 이미 현재의 보험료 수준도 감당하지 못하는 체납인구가 상당한 규모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중들이 보험료 인상안을 받아들일 것인지 낙관할 수 없다. 또 정말 보험료를 적게 내서 보장성이 낮은 것인지에 대해서 검토가 필요하다. 유럽 복지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소득 대비 보험료 부담비율이 낮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와 동시에 기업과 국고 지원의 부담비율이 낮은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보장성 강화를 위한 재정확충은 국가와 자본의 부담을 늘리는 방식을 요구해야 하지 민중들이 적정한 부담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내야 한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국가와 자본의 부담을 확대하는 것은 제도 개선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계급역관계의 변화를 통해서만 쟁취할 수 있다. 계급역관계를 역전시켜내는 투쟁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단순한 보험료 인상에 그치는 수준으로 왜곡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더욱이 만약 의료민영화가 전면화 된다면 보장성이 강화된 건강보험도 무용지물이 된다. 민중의 건강을 심각하게 파괴할 의료민영화를 목전에 두고 있는 지금 썩은 동아줄에 매달리기보다는, 보다 날카롭고 거센 의료민영화 저지 투쟁의 기치 아래 모든 노동자-민중이 결집해야 한다.

의료민영화 저지 투쟁의 의미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의료민영화 의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를 막아내는 싸움에 함께 해야 하는 당위성은 너무도 명백하다. 영리 의료법인 도입은 단순히 의료를 이윤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의료채권법, 병원경영지원회사(MSO) 등과 결합해 금융 자본에게 병원을 통째로 넘겨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금융세계화의 모순이 곳곳에서 체제를 뒤흔들고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 상황에서 의료마저 금융화시킨다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일이다. 더욱이 오바마의 건강보험 개혁이 공공보험 설립안이 빠진 채 보험 자본에게 시장만 키워주는 반쪽짜리가 되어버린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한번 보험 자본에게 넘어간 우리의 건강을 되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또한 되돌린다 하더라도 많은 대가가 필요하다(2009년 폴란드는 의료민영화를 철회하는 대가로 투자보호협정에 따라 네덜란드계 보험 자본인 Eureko에게 18억 유로를 지불해야만 했다).


  유럽발 재정위기가 몰아치고 있는 상황에서 자본의 이데올로기 공격 역시 거세다. 남유럽 국가들의 재정위기의 원인을 복지로 몰아세우며 민중의 생존권을 박탈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맞서는 투쟁으로서, 생존권 투쟁을 모아내는 싸움으로서, 의료민영화 저지 투쟁에 힘을 쏟아야 할 시기이다.


Posted by 행진

2010/06/23 11:48 2010/06/23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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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_발간사] 김예슬씨에게 보내는 편지


김예슬씨에게 보내는 편지




얼마 전에 고려대를 자퇴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얼핏 들었습니다.

기사를 검색해보니 당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더군요.

작지 않은 결정을 내린 뒤라 이래저래 심란할 것 같은데,
새로운 출발을 하는 당신에게 힘내라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고려대 게시판에 붙은 대자보 내용을 찾아서 읽어봤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담아 쓴 것이었지만 우리 모두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언론이 당신의 행동을 주목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겠지요.

그 대자보에는 우리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어릴때부터 시작되었지만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닌 경쟁이었습니다.

친구들은 성적표에 숫자로 표시되었고,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였지요.

시험공부는 나에게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답을 주지 않았고

대학에 가서 나이 더 먹으면 그래도 뭔가 보일 거라 생각했지만

세상은 우리에게 앞으로 더 힘들고 잔인한 길을 걸어가라 강요할 뿐입니다.


당신 말대로 대학은 자본에 필요한 부품을 제공하는 공장이 되었습니다.

수업을 듣는 이유는 학점과 졸업장으로 내 품질을 보증해야 하기 때문이지,

한 명의 인간으로서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기 위함은 아닙니다.

토익 공부해라, 성적 관리하고 자격증 따라는 말만 들리는 현실에 있다 보니

“꿈을 찾는 게 꿈이 되었다”는 부분은 슬프기도 하면서 처절하게 느껴졌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이 모든 일을 감당해야 하는 건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를 두려워할 자유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세계를 무대로 자신감 있게 당당히 경쟁해야 하는 G세대니까요.

4000원 짜리 알바해서 외국으로 어학연수 가는 글로벌한 세대입니다.



한편으로는

당신의 외침이 사람들에게 자조와 염세로만 남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상황이 암울하다는 것을 계속 확인하는 이유는

그만큼 사회가 잘못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겠지요.

시대가 너무 암울해서 아무것도 바뀔 수 없는 것처럼 보일 때일수록

저항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온 지난 역사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저항에 보탬이 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는 이 편지를 만듭니다.

뉴스레터의 크기는 사회라는 거대한 탑 앞에 깔려 있는 돌멩이 하나 정도겠지만

잘못된 구조로 위태롭게 서 있는 그 탑이 언젠가는 무너져 내릴 것을 알기에

우리는 더 단단해져야 하고, 더 많은 돌멩이들을 모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회 구조의 모순을 제기하고 바꾸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고 있으니

당신도 자신의 용기 있는 선택에 대해 자부심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서로가 물러지지 않는다면 언젠가 탑 앞에서 돌멩이로 만날 수 있겠지요.


아무튼 자퇴를 축하드립니다.










글 다운 받으실 때 파일이름을 적으시고 마지막에 .hwp를 붙이세요~

Posted by 행진

2010/03/15 21:29 2010/03/15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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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_이슈&입장1] 스포츠는 정치적이다

 

스포츠는 정치적이다

(‘스포츠 행사에 경례를!’과 ‘재벌들은 체육 연맹을 좋아해’는
각각 한겨레 21 761호와 793호 기사를 일부 인용했습니다.)



벤쿠버 동계 올림픽이 17일 간의 일정을 마치고 3월 1일 폐막했다. 인생 역경을 이겨낸 선수들의 메달 소식은 고단한 서민들의 삶에 잠시나마 활력을 불어넣었고, 많은 사람들은 그/녀들의 결과에 대해 메달 여부에 관계없이 축하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두고 한국인들의 시민의식이 높아져서 결과만을 중시하지 않게 된 거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예상외 선전을 거둔 이번 올림픽이었기에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평가가 관대해 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번의 일본처럼 한국 대표팀이 역대 최악의 성적을 내놓았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할지는 앞으로 두고 볼 일이나, 결과나 평가가 어떻든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스포츠는 단순한 오락거리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정치 등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적인 맥락과 구체적인 상황, 주체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이 권력의 정체를 개념적으로 명료하게 규정짓기는 물론 어렵다. 다만 지난 시간 속에서 스포츠 행사들이 누구에 의해 ‘사용’되고 어떤 효과를 낳았는지, 현재의 모습은 어떤지 살펴보는 것은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다양한 요소를 정치화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스포츠와 통치, 자본의 전략과 우리의 삶은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스포츠행사에 경례를!


인기 있는 국제 스포츠 경기는 선수 개인들 간의 기량을 겨루는 것으로 인식되기 보다는 흔히 국가 간, 민족 간의 대결로 이해된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은 평소 스포츠에 관심이 없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종목의 경기가 아니더라도, 다른 나라와의 큰 경기가 있을 때면 마치 기다린 것처럼 경기를 관람하고 자국 선수들을 응원한다. 전 국민이 같은 경험을 공유하게 되는 과정에서 사회적 통합력은 증진되기 마련인데, 이처럼 스포츠 행사가 갖는 위대한 힘을 독재자들은 일찍이 인식하고 있었다.

지구촌이 4년마다 들썩이는 월드컵에는 아픈 과거가 있다. 1934년 제2회 월드컵은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의 야심으로 이탈리아가 유치했다. 남미 국가들은 독재정권에 대한 항의 표시로 2진급 선수들을 내보냈다. 이 바람에 8강에는 모두 유럽 팀들이 올랐다. 결승전에서 파시스트식 경례가 선보일 정도로 정치색이 짙은 대회였다. 이탈리아는 결승전에서 “우승하지 못하면 모두 사형”이라는 무솔리니의 협박 속에 체코를 2-1로 꺾고 정상에 올랐다. 체코의 골키퍼 안타 자보는 “졌지만 우리 11명은 살았다”는 말로 당시의 살벌한 분위기를 전하기도 했다. 체코는 이 대회 준결승에서 독일을 3-1로 꺾었는데, 아돌프 히틀러는 체코한테 지고 귀국한 독일 선수들을 모조리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무솔리니를 따라서 2년 뒤 베를린 올림픽을 개최했다.





1930년대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스포츠를 통한 통치 기법은 1970~80년대 남미와 아시아 독재자들에게는 하나의 지침서가 됐다. 아르헨티나의 독재자 호르헤 비델라가 유치한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이 대표적이다. 당시 월드컵에 참가하려던 각 나라는 아르헨티나 정세가 너무 혼란스럽자 개최지 변경을 요구했다. 네덜란드의 축구 영웅 요한 크루이프는 비델라 정권을 공개 비판하면서 불참했다. 비델라 정권은 민심을 사로잡을 승리를 따내기 위해 편파 판정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강호 헝가리와 맞붙은 조별 리그에서 상대 선수 2명을 퇴장시키면서 2-1로 억지로 이겼다. 2차 조별 리그는 조 편성을 일방적으로 했다. 전 대회 우승팀 서독과 준 우승팀 네덜란드를 한쪽으로 몰아버린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페루를 6-0으로 대파하는 바람에 브라질을 골득실 차로 제치고 결승에 올랐다. 비델라 대통령이 페루와의 경기 전 페루의 부채 5천만 달러를 탕감해주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지기도 했다. 아르헨티나는 결국 결승에서 요한 크루이프가 빠진 네덜란드를 3-1로 꺾고 기어이 우승을 차지했다. 권력자의 의도에 따라 스포츠를 통치의 기제로 활용한 사례는 한국에도 있다. 전두환 정권은 1981년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고 1982년 프로야구를 탄생시켜 국민들의 눈과 귀를 스포츠에 쏠리게 했다. 아시다시피, 프로야구는 대표적인 3S(스포츠·스크린·섹스) 정책 중 하나다.

이처럼 정치가 불안정한 나라일수록 독재자가 스포츠를 내세워 국민적 화합을 꾀하고 자신에 대한 지지를 높이는 수단으로 활용해 왔다. 이는 한국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렇다면 형식적인 민주화가 이루어진 지금의 조건에서 스포츠는 드디어 ‘순수한’ 것이 되었을까?



재벌들은 체육 연맹을 좋아해


한국의 재벌들은 오래 전부터 체육계에 관심이 많았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은 서울올림픽 유치의 일등공신으로 알려져 있고, 1982년부터 2년간 대한체육회 회장을 지냈다. 이명박 대통령도 현대건설 사장 재직 시절 대한수영연맹 회장(1981∼92)을 지낸 바 있고, ‘양궁의 대부’로 불리는 정몽구 회장은 네 번이나 대한양궁협회장을 맡았다. 지금은 아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 대한양궁협회를 이끌고 있다. 월드컵 유치 당시에는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의 지시로 현대중공업 인사들이 별도의 팀을 만들어 월드컵 유치전에 뛰어들기도 했다. 대한축구협회 사무총장을 지낸 고 남광우씨와 김동대씨 등이 대표적인 현대중공업 출신 인사다.

대한체육회 임원진을 보면, 박용성 회장 아래 이건희 전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대한핸드볼협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대한탁구협회장),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대한레슬링협회장) 등이 이사진으로 포진해 있다. 박용성·최태원·조양호 회장 모두 IOC 위원을 노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정희준 교수는 “현재 체육회 이사회 명단을 보면 마치 전경련을 그대로 가져다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라며 “고 정주영 전 회장과 정몽준 회장이 올림픽과 월드컵이라는 메가 이벤트를 유치하면서 국가에 기여했다는 점을 앞세워 대권에 도전했거나 앞으로 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얼마 전에 있었던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사면에 대해 이명박 정부는 ‘경제인 이건희’보다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이건희’에 대한 사면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비리 경제인들은 사면 대상에서 빼고 오직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를 위해 이 전 회장에 대해서만 단독으로 특별사면을 단행했다는 얘기다. 삼성은 ‘꿈의 자리’라는 IOC 위원에 이건희 전 회장의 이름을 올리기 위해 1990년대 초부터 집요하게 작업해왔다. 1996년 이 전 회장이 대한레슬링협회장을 발판으로 IOC 위원으로 선정되자마자 이듬해 올림픽 공식 파트너(스폰서)로 참여했다. 체육계에서는 삼성전자 이재용 부사장이 이 전 회장에 이어 스포츠 외교 쪽에서 상당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스포츠평론가 정윤수씨는 “이재용씨 개인은 야구를 좋아하는데, 그룹 참모들이 ‘야구는 글로벌 스포츠가 아니라서 활동하는 데 제약이 따르므로 축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서 대한축구협회장 자리까지 염두고 두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축구협회장이 되면 이 자격을 발판으로 아버지에 이어 IOC 위원을 노릴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건희 전 회장은 2004년 아테네올림픽 때 이재용 부사장을 자크 로게 IOC 위원장 등 국제 스포츠계 주요 인사들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정리해보면, 재벌들은 체육계에 발을 걸치며 자신들의 정치력 확장을 꾀하는 듯하다. 정몽준처럼 정치권에 직접 뛰어들어 실력발휘를 하는 경우도 있고, 이건희처럼 삼성이 구설수에 오르거나 자신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스포츠를 활용하기도 한다. 특히 이건희 사면 사태에서 보듯 스포츠는 때로 국가의 운영과 사법 질서에 영향을 미친다. 위법을 자행하며 부를 축적하는 것쯤은 국가적 대업을 위해 쿨하게 면죄되는 것이다. 체육회 임원진들의 명단이 재벌 회장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 역시 주목해서 봐야할 부분이다. 이는 재벌들 개인의 취향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한국에서 체육이 이루어지는 방식 자체가 자본과 밀접한 연관을 맺을 수밖에 없음을 나타낸다. 만약 지금과 같은 조건이 혁신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스포츠에 대한 대중적 열망은 여러 장치들을 통해 마지막엔 자본의 권력 증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정치적 스포츠와 소외된 ‘정치’


생산과 소비가 세계화 된 이후 자본들에게 마케팅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지구촌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국제적인 스포츠 행사는 세계로의 확장을 시도하는 기업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홍보 수단이다. 기업들은 월드컵, 올림픽에 공식 파트너 이름을 올리는 대가로 천문학적인 액수를 지불하고 ‘글로벌’한 이미지를 구매한다.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모여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가리는 것보다 더 글로벌하고 경쟁력 있는 느낌을 주는 행사는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자본들은 초민족적인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민족 자본으로서의 이미지 역시 강화한다. 국내의 스포츠 서포터스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과 관련한 이벤트 상품들, ‘태극전사들을 응원 합니다’ ‘대한의 딸 힘내라’와 같은 구호는, 결국 스포츠를 통해 국내 소비자들과 민족적 동일성을 구축함으로써 세계 시장으로 뻗어나가기 위해 안정적으로 자국의 점유율을 유지하려는 자본의 마케팅 전략이다.

그리고 스포츠 행사를 통해 세계의 주목을 받는 것은 한편으로 가진 것 없고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사람들을 더 가혹한 처지로 내모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군부 정권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가난한 대외 이미지를 쇄신하고자 경기장을 비롯한 서울 곳곳의 노점상, 판자촌 주민들을 몰아냈다. 스포츠가 계기였던 것은 아니지만, 작년에 있었던 용산참사를 정점으로 서울시가 하고 있는 ‘디자인 서울’, ‘한강 르네상스’ 역시 마찬가지다. 서울의 저개발 된 지역을 없애고 휘황찬란한 고층 빌딩을 건설한다는 계획은, 평범한 서울 주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련된 서울의 이미지를 통해 외국인 투자자들을 유혹하기 위한 겉치장에 다름 아니었다. 스포츠 행사가 열리면 자연히 개최 도시도 많은 관심을 받게 될 텐데, 조명되는 것은 화려한 겉모습이지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솔직한 모습이 아니다. 물론 이런 행사들을 없애거나 외면하는 방식은 결코 대안이 될 수 없을 테지만, 중요한 것은 ‘국가 브랜드 홍보’, ‘외국인 유치’, ‘국가 품격 상승’ 이란 말들 속에 감춰진 폭력과 소외를 인식하는 것이다.





한편, 스포츠 행사와 스타들에게 비춰지는 스포트라이트를 이용하는 세력과 그로 인해 부차화 되는 정치적인 쟁점들 역시 언제나 존재해 왔다. 이번에 좋은 성적을 거둔 올림픽 선수단이 돌아왔을 때 정치권은 어느 때보다 재빠르게 움직이며 이들의 인기를 정치로 ‘승화’시키려 했다. 선수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선글라스까지 껴가며 김연아를 웃게 한 이명박 대통령의 행동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그는 “점프할 때 눈을 감았다가 떠 보니 성공 했더라”는 말 한 마디로 올림픽 기간에 벌어진 MBC 낙하산 사건에 대한 정치적 부담을 상당히 덜어냈다. 정권의 언론 장악과 선수들과의 오찬은 전혀 별개의 문제고 연관성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민주당 정세균 대표가 이야기한대로 “메달 따면 지지율 오르는” 게 정치와 스포츠의 관계다. 국가와 자본은 민족적 동일성 형성으로 인한 사회 갈등의 은폐, 국민적 인기를 영유함으로써 지지율 높이기, 이미지 전략과 마케팅 등 자신의 필요에 따라 선수들 개인과 노력의 결실 등을 모두 정치화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들의 삶에 있어 소중한 것들,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하고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들은 오히려 정치화되지 못한 채 축소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성황리에 올림픽을 마친 벤쿠버 시가 경비 예산 초과로 결국 복지 예산을 감축했다는 소식이 들려와 어쩐지 씁쓸하다.




스포츠는 더 ‘정치화’되어야 한다


이번 올림픽에서 언론의 가장 많은 조명을 받은 스타는 단연 김연아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금메달 소식과 함께 실리는 다른 기사들이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국가 이미지 0.5% 상승효과, 김연아 금메달 값어치는?」「‘김연아 금메달’, 삼성 현대차 광고 효과 ‘대박’」등 김연아로 인한 국가와 자본의 이득을 분석한 기사를 흔하게 접할 수 있다. 의류․패션 광고 모델로 제격이라는 설문조사 결과도 있고, 국민은행에서 내놓은 ‘연아 적금’ 상품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스포츠 스타에 대한 관심이야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큼이나 스포츠-국가-자본의 연결고리는 우리들 사이에서 이미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됐다.

대부분의 언론에서는 예전 선수들이 ‘민족’이나 ‘국가’에 얽매여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한 것에 비해, 이번의 대표팀은 승패에 연연하지 않으며 유쾌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 ‘새롭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큰 틀에서 바뀐 것은 없다. 스포츠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은 여전히 민족 담론 속에서 국가와 자본의 이해관계가 관철되고 있으니까. 새로운 것은 오히려, 사람들이 이제야 스포츠를 ‘순수하게’ 즐길 줄 알게 되었다고 평가하며 정치와 스포츠를 분리시켜 사고하는 현상이다. 군부독재 시절의 대학생들은 야구를 대놓고 즐길 수 없었다. 스포츠가 정치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야구를 좋아하는 행위가 결과적으로 정권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효과를 낳지 않을까 고민한 것이다. 금메달을 딴 뒤 꼭 눈물을 흘리며 대통령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만 정치와 스포츠가 연관 맺고 있음을 증명하는 게 아니다. 사회 인식이 바뀐 만큼 스포츠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들도 서로 조정되고 변화해 왔다. 이를 인식하지 못한 채 스포츠에서 마침내 정치를 덜어냈다고 성급하게 선언하는 순간, 스포츠가 지배체계 유지에 기여하는 다양한 역할들에 대해선 사고하지 못하게 된다. 

스포츠를 좋아하는가? 앞으로는 이런 쪽으로도 한 번 생각해보자. 내가 보태는 열망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소비되는지를. 인간이 만든 사회에서 스포츠는 다른 것들과 무관한 채 순수하게 남아 있을 수 없다. 스포츠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다양한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 스포츠가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포츠는 지금보다 더 많이 ‘정치화’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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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5 21:24 2010/03/15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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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얼마 전 그리스에서 온 소식이 신문경제지면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나타나는 이 ‘위기’는 유럽을 포함한 모두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총리부터 그리스의 국민들까지, 그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앞으로의 세계경제의 향방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이기에 세계는 그리스를 주목할 수밖에 없다.

이미 그리스에서는 위기 비용을 뒤집어 써야 할 노동자들이 생존을 건 총파업을 시작했다. 3월 3일, 그리스 정부의 재정긴축안 발표에 따른 노동자들의 봉기이다. △부가가치세 인상(19%→21%) △공무원의 특별보너스 30% 삭감 및 복지수당 삭감폭 확대(10%→12%) △2010년 연금 동결 △유류세·담뱃세·주류세 추가 인상 등을 담은 추가 긴축안이 발표된 이후, 각 50만명과 200만명을 조합원으로 둔 그리스 공공노조연맹(ADEDY)과 노동자총연맹(GSEE) 등 양대 노총은 정부의 재정 긴축안에 반대하며 총파업에 나섰다. 아테네의 시내버스, 전차, 지하철, 교외철도 등 대중교통은 24시간 멈추었고, 교사들이 파업에 참여했다. 병원 역시 비상근무 체제로 운영됐고, 중앙·지방정부의 대민 서비스 업무도 오후부터 중단됐다. 그리스 인구 5명 중 1명이 일손을 멈추었다. 위기를 해결한다며 긴축재정을 하려는 그리스 정부의 모습에 최고 수위의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파업, 그리고 이러한 파업의 시초인 그리스 위기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인가? 그리고 이 위기가 내포하고 있는 함의는 어떤 것이기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인가?






그리스 위기의 시작


유럽 내에서의 경제통합이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것으로 보일 때, 그리스는 유럽의 외톨이가 되지 않기 위해 무리한 과정을 밟으면서 유로존에 합류했다. 국가 안의 재정적자와 부채의 규모를 숨기면서 단일화폐동맹을 맺기 위해 투기 세력들과의 연합을 꾀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과 블룸버그에 따르면 그리스는 2001년 100억달러의 달러 및 엔화표시 채권을 발행하는 방법으로 채무를 졌는데, 이 채무는 국가부채로 잡히지 않았다. 그리스가 들어온 원금 100억달러로 골드만삭스와 통화스왑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는 약 10억 달러의 이익을 본 것으로 알려졌다. 골드만삭스는 이 계약으로 그리스 정부로부터 3억 달러나 받았다고 계약에 정통한 은행가들이 전했다. 그리스 정부는 골드만삭스와 같은 국제 금융회사의 도움을 받아 첨단 금융상품과 회계기법으로 국가 장부와 통계를 조작하면서 재정적자나 공공부채의 규모를 속이고 유로존에 가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로존의 ‘환상’을 쫒아 유로단일통화권에 가입함으로 인해 그리스는 국가 차원의 통화정책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단일통화인 유로화에 매여 있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조치는 고작 정부 지출을 줄이고 세금을 높이는 일 뿐이다.








이러한 와중에 골드만삭스의 주도로 파생상품 전문가들이 그리스 사태를 활용해 돈을 버는 상황도 생겨났다. 상호 정보교환 등으로 그리스 경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예측한 그들은 2008년 이후 그리스 국채에 대한 CDS(대표적인 신용파생상품인 신용부도 스왑. 투자 상품의 부도 시 손실 보상을 받기 위해 지급하는 일종의 보험료)를 엄청나게 사들였다. 그리스 국채 CDS는 당시만 해도 0.2%에 불과한 헐값이었는데, 그리스 위기가 불거지면서 CDS를 매입하려는 채권자들이 폭증하여 CDS는 3%에 다다랐다. 한편으로는 CDS를 고가에 팔고 한편으로는 헐값에 쏟아지는 국채를 매입하는 전략으로 돈방석에 앉은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담합을 통해 보험 성격의 CDS를 투기적 거래에 활용하여 그리스의 위기를 더욱더 증폭시킨 사례이다.




<CDS(신용부도스와프(Credit Default Swap))이란, 국가나 기업이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채권을 발행하면 투자자들이 채권의 부도 위험을 피하기 위해 매입하는 보험증서라고 보면 된다. CDS를 판매한 금융회사들은 수수료를 받지만 부도가 발생할 경우 손실을 보전해줘야 한다. 거래되는 CDS의 프리미엄(가산금리)은 국가와 기업의 부도 리스크를 반영하는 신용등급과 동일하게 인식된다. 자세한 것은 전국학생행진 일반자료실『2009 경제위기대응 자료집』을 참고하시길.>




현재 그리스 정부는 긴축재정과 동시에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국채발행을 실시하고 있다. 해외 금융기관들이 선뜻 그리스 국채를 매입하게 하기 위하여 3월 4일, (독일 국채금리보다 무려 3% 높은) 6~7%의 높은 금리에 50억 유로 국채를 발행하였다. 그리스 정부는 그렇게 조달한 자금으로 기존 부채의 이자를 상환해야 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국채가 또다시 ‘투기’의 위험을 불러오고 있는데, 이러한 위험성에 그리스 정부는 국채입찰 당시 '헤지펀드 금지령'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자산운용사, 연기금, 생명보험사 등의 기관투자자들은 국채를 장기 보유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반면 헤지펀드들은 단기 차익을 노리는 경우가 많아 채권 가격의 급격한 변동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최근 헤지펀드들은 그리스 재정 위기에 대한 불안감을 키웠다는 비판 여론에 직면한 상태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리스 정부가 헤지펀드 투자 금지령을 내렸다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자태변환하며 이익을 내려는 투기세력들에게는 무용지물이다. 헤지펀드 투자금지만으로는 ‘투기’를 막을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 없으며, 이는 위기를 전가 받는 민중들에 대한 기만일 뿐이다.



문제는 금융세계화이다!


한편 일각에서는 ‘공공부문의 비대화’를 그리스 위기의 원인이라 보는 시각이 있다. 사회보장비의 과다한 지출이 재정을 악화시키는 주된 요인이라는 것이다. 복지비용으로 지출되는 비용을 줄여 국가 재정을 확충하면 경제가 다시 되살아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진짜 그럴까? 사실관계를 따져보면 경제위기는 국가의 재정구조에만 의지하지 않는다. 경제위기는 시장의 자율이 중시되는 신자유주의 국가에서도, 사회보장 망이 잘 구축되어있는 국가에서도 일어난다. 공공복지의 확대가 한 국가를 위기로 몰고 갔다는 분석은 (복지를 인기몰이에 활용한다는)포퓰리즘이라는 오명을 앞세운 보수진영의 책임전가일 뿐이다. 오히려 국가와 사회의 책임을 축소시키고 시장의 자율성을 확대시켜 ‘투기’가 활성화될 때,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도미노처럼 경제위기가 몰아친다. 기초적인 생활조건의 하나인 ‘집’이 없어 빚을 내어 집을 구해야만 했던 미국의 가난한 사람들이 파산당하고 금융시장에서의 혼란이 최고로 가중되었던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대표적인 예이다.

더불어 이러한 시각 하에 그리스위기 해결책의 하나로 제시되고 있는 공기업 민영화 역시 위험한 논리이다. 공기업을 팔아서 이로 인해 발생하는 이득으로 국가위기를 해결해야한다는 주장은 오히려 공공부문이 책임졌던 민중의 기본권을 포기하는 것이며 더욱더 철저한 자본의 논리로 대다수 민중의 삶을 파괴시키는 것이다. 이는 온전히 ‘자본’을 살리기 위한 해결책으로만 가능할 뿐, 전 민중을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대안을 향한 움직임은 이미 시작되었다!


지난 달 말, 그리스가 지구 어느 편에 붙어있는지 모른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한마디에 또 한 번 누리꾼들이 조소를 흘렸다. 유럽발 금융위기와 관련해 이명박 대통령은 "이제 세계는 하나다. 그리스가 들어보기는 했지만 지구상 어디 붙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 나라가 문제 생겨도 우리 주가가 떨어진다"면서 "외국이 도와주고 싶어도 노조가 반대하니 나라는 어려워지고, 이것 때문에 (우리) 주가가 떨어진다"며 "우리나라는 직접 관계가 없다. 금융 거래도 없고 상품 파는 것 얼마 없다. 그래도 영향을 미친다"고 언급하면서 세계가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렇다. 금융세계화는 모든 것을 초월하여 ‘위기’를 조성하고, 이러한 ‘위기’를 담보로 자신의 이윤을 챙기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반복되는 위기와 위기의 지연 속에 제 2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제 3의 그리스 위기가 우후죽순으로 폭발할 것이라는 것은 예상 가능한 일이다.

현재 그리스에서는 경제위기가 지속되면서 ‘고통감내 이데올로기’가 강하게 유포되고 있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이 말했듯이 그리스의 자본 역시 ‘노동조합의 투쟁’이 경제위기의 원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경제위기를 불러온 것은 열심히 일한 노동자들이 아니라 자본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리스의 젊은 그래픽 디자이너인 조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5백 유로[약80만원]세대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 정도밖에 벌지 못합니다. 우리는 먹고살기도 빠듯합니다. 그런데 이제 정부는 우리가 가져갈 돈을 더 줄이려 합니다. 유럽연합은 우리한테 경제 위기의 대가를 지불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런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시위 참가자들은 소리치고 있다.
“우리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마라! 부자들이 위기의 대가를 치르도록 하라!”


지금 그리스에서 노동자들이 만들어가고 있는 ‘투쟁’은 바로 새로운 사회를 향한 움직임이다. 자본이 만들어 놓은 위기와 그것의 책임전가를 거부하고,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노동자 스스로가 제시하고 실천하고 있다. 투기자본의 이윤추구에 노동자가 희생될 수 없다. 그리스 노동자민중이 소리치고 있듯이, 우리도 정당한 권리를 되찾기 위한 그들의 싸움에 지지의 목소리를 보내자.
“노동자에게 경제위기의 책임을 전가하지 말라!”

Posted by 행진

2010/03/15 21:12 2010/03/15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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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두헌 2010/04/06 18:55 # M/D Reply Permalink

    글씨체 알아보기 어려워요; 그리고 글씨도 좀 작은거 같아요;

 


낙태논쟁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



보이지 않는 두려움들이 한국사회를 휩쓸고 있다. 6-70년대 경찰과 군대를 앞세운 군부정권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고 호환, 마마가 휩쓰는 그런 것도 아니다. 여성들에게만 찾아오는 그 두려움은 ‘저출산 정책’이라는 이름하에, ‘생명존중’이라는 이름하에 소리소문 없이 가해지는 폭력이다. 여성들은 자신의 절박한 상황을 주위에 알리지도 못 하며, 오히려 ‘불법’이라는 이유로 진실을 숨겨야 한다.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들은 이제 더 이상 불법 시술은 안 된다는 산부인과 병원들의 대답을 들으며 한 번 좌절하고, 낙태 위험비용이라 하여 400~600만원으로 치솟은 수술비에 또 한 번 좌절하게 되었다. 여성들은 이제 출산율을 적극적으로 낮추는 정책을 시행중인 중국으로 가서 시술을 받는다. 한국에서 600만원을 들여 하는 시술이 안전할지 중국에서 싼값에 하는 시술이 안전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낙태를 금지시켰던 옛 루마니아에서 수십만 명의 여성들이 안전하지 못한 낙태시술로 죽어갔던 일들, 낙태를 하기위해 전 세계를 떠돌 수밖에 없었던 일들이 남한에서도 똑같이 재현되려 하고 있다


낙태를 할 수 없는 두려움. 하지만 진짜 두려움은 낙태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현실을 ‘이야기할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그 절박함 속에는 ‘생명을 죽이기 싫은 마음, 아무에게도 말을 할 수 없는 수치스러움, 내 뱃 속에서 자란 생명이기 때문에 꼭 키우고 싶다는 소망, 포기해야 하는 젊은 인생, 이 생명을 수 개월 더 길러 낳으면 아이나 자신이나 정말 불행한 인생을 살 것이라는 불안한 예감’ 등 너무나 복잡한 마음들이 교차함에도 이런 구체적인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그저 여성들만이 가입할 수 있는 커뮤니티에서, 포털사이트의 익명 게시판에서만 폭발적으로 이야기될 뿐 당당한 여성의 목소리로 나올 틈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이들의 목소리를 막고 있나


최근 낙태논란의 시작을 만든 프로라이프 의사회는 태아 생명 보호를 명분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임신과 출산, 육아를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껏 할 수 있는 사회토양을 만들어 주어야 하며, 산부인과 의사들에게는 낙태시술을 하지 않고도 걱정없이 소신껏 병원운영을 할 수 있는 정상적인 의료환경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낙태근절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에게 핵심은 ‘생명’이고 누구도 개인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 또한 낙태 근절을 위해 미혼모와 사생아, 기형아와 장애아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 제거, 공공 및 사설 보육시설의 확충, 직장 내 임산부와 워킹맘에 대한 처우 개선, 청소년 임신의 경우 남성의 책임 문제, 대국민 성교육과 피임교육 및 낙태 폐해 교육, 생명경시 풍조와 개인주의 제고 등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들 주장의 중심은 생명이기에 그 이외의 여성이 처한 사회경제적인 조건과 권리는 결국 부차적인 것이 된다.





생명존중이라는 말은 당연한 말 같지만 그것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태아도 생명이다’(생명권)라는 말을 앞세워 ‘낙태는 살인이다’라 주장하고 있다.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된 이후부터 생명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명권에 대한 원칙론적 입장은 극단적 결론을 만들어내며 생물학적인 측면으로 논의를 한정짓는다. ‘수정란이 생명이라면, 생명의 맹아를 지닌 정자와 난자가 생명이 아닌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자위를 통해 정자를 배출하는 행위 또한 살인으로서 처벌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명을 죽이는 것이 문제라면 왜 강간에 의한 임신은 처벌받지 않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이들은 쉽게 답할 수 없다. 사회적으로 ‘생명을 헤쳐서는 안 된다’라는 윤리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진지한 고민을 해보지도 않은 채로 여성의 권리를 이에 하위에 있는 것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최근 낙태와 관련된 논쟁은 결국 ‘태아의 생명을 지키자(생명권) vs 여성의 결정권이 먼저다(여성의 임신,출산에 대한 결정권)’라는 좁은 틀로 갇혀버렸다. 이는 여성의 결정권이 ‘내 몸의 문제니까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정도의 이기적인 논리로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여성들이 낙태를 결정하는 이유가 그렇게 단순한 이유일까. 60년대 이후 여성이 인구조절정책의 일환으로 국가의 도구, 출산의 도구로 읽혀졌던 기나긴 역사들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단순히 여성의 결정권을 이기적인 주장만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 동안 여성들의 의견, 여성들의 사회경제적 조건들은 고려하지 않은 상황, 자신의 몸의 일임에도 한 번도 그것에 결정권을 제대로 가져본 적 없던 여성들의 주장을 ‘생명에 대한 책임감이 없는 사람’의 것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그 동안 한 번도 제대로 주목하지 않았던 여성에게 고유한 성욕, 임신, 출산의 문제를 진지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이들은 여성 개인만이 책임져서는 안 될 ‘사회적, 국가적인 문제이지만 무한대로 신성화된 생명권의 압박은 그녀들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듣는 것조차 허용하고 않기 때문이다.


최근 낙태단속을 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주체 중에 생명권에 대한 주창자들도 있지만 정부 또한 빠질 수 없다. 하지만 6-70년대 인구조절정책을 실시하며 낙태를 권장했던 정부가 갑자기 ‘불법낙태’를 단속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최근 프로라이프의사회의 낙태병원 고발이 힘을 받고, 주류 언론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체로 주목할 현상이라서가 결코 아니다. 대통령 직속 산하의 미래기획위원회는 작년 11월 저출산 대책의 일환으로 ‘낙태단속 강화’를 운운했다가 엄청난 논란을 일으킬 뻔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발이 심할 것으로 예상을 한 것인지 실제 제출된 저출산 대책은 ‘여성이 일과 가사를 양립할 수 있는 지원책’으로 한정 되었다. 그런데 올해 2월 프로라이프의사회가 낙태병원을 고발하고 사회적인 파장을 일으키자 이를 명목으로 3월 1일 ‘불법인공임신중절예방 종합대책’을 발표한 것이다.


최근 낙태논란의 근저에 깔려있는 정부와 지배권력들의 핵심은 결국 여기에 있다. 저출산 현상과 여성이 출산을 할 수 없는 조건은 IMF이후 노동자들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에 의해 발생한 가족해체의 위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수많은 여성들이 빈곤해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사회로 진출했고 이로 인해 여성은 집안일에 더해서 바깥일까지 담당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가정을 책임지지 않으면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되는 사회적인 조건은 결국 가정에서 여성이 부담해야 하는 일들을 줄이도록 만들었고, 이로 인해 저출산 현상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회적인 문제를 자신의 책임이 아닌 여성들의 책임으로 교묘하게 돌려놓기 위해 정부관료, 주류언론은 저출산이라는 사회-경제적인 조건에 의한 문제를 ‘개인의 도덕성의 부재’라는 문제로 환원하며 여성을 압박하고 있다. 즉 ‘국가발전을 가로막는 이기적인 여성들에 의한 저출산’이라는 담론으로는 부족하자 이제는 ‘고귀한 생명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는 여성’이라는 논지로 여성들에게 출산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은 성욕, 출산, 양육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기본적인 여성의 목소리들이 ‘생명존중’, ‘저출산의 위기’라는 극단화된 논리 앞에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는 현실. 이제 극단화된 색안경을 잠시 벗어두고 여성에게 반드시 주어져야 할 고유한 권리에 대해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한 번도 주목받지 못하고 국가의 출산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권리, 그래서 제대로 말 한 번 못했지만 이 시대를 만들었고, 사회가 발전하는데 너무나도 필요한 노동을 해왔던 당당한 여성들의 권리를 살펴보자. 그리고 그 권리들이 보장받기 위한 사회적인 장치들은 어떤 모습들일지 알아보자.


낙태논란이 일고 있는 요즘 여성의 권리는 ‘낙태할 수 있는 권리’로만 읽히고 있는 것 같다. 낙태를 여성의 권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그렇게 단순한 논리가 아님에도 ‘여성은 생명에 대한, 사회적 위기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말에 다소 무력하기도 하다. 그래서 ‘낙태의 위험성’, ‘낙태를 하지 못했을 때의 위험성’들을 더욱더 강조하는 방식으로만 대응하기도 한다. 출산과 관련된 낙태라는 쟁점은 결코 출산만으로 묶이지 않는 여성만이 가져야 하는 고유한 권리로서 ‘성욕, 출산, 양육’이라는 문제를 함께 가져온다. 그 세 가지가 단순히 ‘여성’의 것이기 때문에 ‘여성의 권리’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으면 섹스하지 마라’, ‘즐기는 여성은 당연히 그에 따르는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는 말은 성욕과 출산이 여성에게 부당하게 전가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양육이라는 사회적인 일을 10개월간 아이를 뱃속에서 키우며 생겨난 모성으로 견뎌내야 한다는 사회적인 압박은 출산과 양육이 여성의 선택권 안에 들어오지 않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세 가지를 현재 여성이 온전히 선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의 성욕은 이전만큼 억압되어 있지는 않지만 출산을 위한 한도 내에서만 허용되거나, 남성의 성욕에 대한 대상으로서 상품화되거나 대상화된다. 양육 또한 여성이 갖춰야할 덕목으로 여겨진다. 사회적으로 이미 결정된 내용들 속에 여성의 개인적인 선택권은 온대간대 없다. 핵심은 여성의 문제가 끊임없이 ‘모성’, ‘어머니’, ‘가족’이라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의미부여를 통해 공적인 일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분명 출산과 양육, 그것과 밀접하게 관계 맺는 여성의 성욕이라는 문제는 사회적인 권력임에도 그것은 끝없이 개인화되어 가족 속으로, 여성 혼자 감당할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낙태논란 속에서 정부는 여성이 출산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준다고 지원책을 내놓고 있지만 ‘출산이 여성의 책임’이라는 말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 말을 포기하게 되는 것은 출산을 할 수 있는 여성이 그 결정권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욕에서 시작해서 양육까지 이어지는 그 ‘사회적 과정’을 여성의 개인적인 책임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여성의 선택권이 포함되지 않은 ‘성욕, 출산, 양육’의 문제라고 한다면 아무리 그것이 사회적 과정이라고 하지만 반쪽만을 위한 과정일 수밖에 없다. 하기에 우리는 그 과정 하나하나에 여성의 선택권을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모든 권리들은 여성의 삶과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결정권을 지니지만 현재 중요한 것은 오히려 모호하게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뭉쳐있는 성욕, 출산, 양육 각각에 여성의 특수한 권리들을 부여하는 것이다. 또한 그 선택들을 위한 사회적인 장치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성욕이라는 여성의 자유는 스스로의 성욕을 긍정할 수 있는 자유뿐만 아니라 상품화되거나 남성의 성욕의 대상이 되지 않을 자유를 포함해야 한다. 성욕이 온전히 여성의 권리가 되기 위해서는 출산으로 이어지지 않는 성관계가 긍정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 당당히 여성이 피임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야 한다. 또한 당연하게 그 모든 관계로부터 철수할 수 있는 권리 또한 있어야 한다.

또한 여성에게 출산에 대한 권리가 추가되어야 한다. 그것은 여성의 몸속에 또 하나의 생명이 자라나게 할 것인지, 아닐지를 결정할 권리이며 낙태를 할지, 출산을 할지를 결정할 권리이다. 낙태 또한 여성의 선택권 하에 있어야 하지만 출산을 여성이 선택하는 이유에 주목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성이 출산을 선택할 때는 태아의 생명에 대한 것이 가장 크다. 여성은 자신이 임신을 생명의 출산으로 연장시킬 권리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조건 양육에 대한 책임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양육이란 사회적으로 책임질 일이지 여성이 반드시 책임질 이유는 없다.

앞의 두 권리가 온전히 여성의 권리가 되기 위해서는 양육에 대한 선택권을 여성이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양육이 여성만의 책임이 되지 않고, 사회적으로 책임져져야 하는 이유는 여성에게 출산만 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무조건 산모로부터 아이를 분리시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선택권을 여성 산모에게 주고, 출산과 양육 사이에 어떤 선택이든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적인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10개월간 뱃속에서 자란 아이를 스스로 키울 수 있는 권리가 진정으로 여성의 자유로운 선택권에 의해 결정되기 위해서는 양육을 하는 여성이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특별하게 ‘모성’을 더 지녔고, 더 올바른 여성이라는 사회적인 편견을 제거해야 하며, 그것이 실현될 수 있기 위해 양육하는 여성을 위한 사회적인 조건이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원하지 않는 임신을 피하기 위한 피임에 실패했을 때의 상황으로 보자면 여성의 의사에 따라 낙태의 권리, 출산만 할 권리, 양육까지 함께 할 권리들이 모두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원치 않는 임신의 경우 안전하게 낙태할 수 있는 합법적인 지원이 보장되어야 한다. 원치 않는 임신이었지만 출산하고자 하는 여성에 대해 출산한 여성만이 온전히 양육을 책임지지 않을 수 있는 보육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또한 자신이 양육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육아휴직 기간에 대한 보장이 필요하겠다.



지금 바로! 낙태단속을 멈춰야 한다!


최근 각종 언론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낙태논쟁은 결코 생명의료윤리 수업시간에 주어지는 토론쟁점이 아니다. 바로 지금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이고, 수많은 여성들이 아무 목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 폭력을 감내하고 있다. 정부는 ‘낙태단속 센터’까지 설립해가며 강경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저출산의 위기를 여성에게 전가하기 위해 ‘생명존중’의 이름을 빌어 낙태를 단속하고 있는 이명박 정권의 반 인권적-반 여성적인 정책에 우리는 당당히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흩어져 있는 불만들을 한 곳으로 모아 지금의 흐름을 저지할 수 있는 실질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내야 한다.





또한 이러한 행동 뿐만 아니라 여성이 원치 않는 임신을 중단할 낙태에 대한 권리를 박탈하는 현 상황을 바라보며 그 권리 속에 담긴 더 많은 여성의 권리들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는 ‘여성의 권리라고 하는 것들을 다 들어주고 마음대로 하게 해주면 세상이 엉망이 될 것이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성의 문제만이 아닌 모든 문제들과 저항하며 싸우는 세계의 수많은 여성들이 이 말을 행동으로 반박하고 있다. 오히려 또 다른 세상이란 마치 여성에게도 그렇듯이 자신의 몸, 노동, 감정과 욕구 그 모든 것이 세상 속에서 자유롭지만 그것이 결코 전체에게 해롭지 않은 세상이 아닐까. 우리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거부하는 동시에 이를 통해 그 ‘또 다른 세상’을 조금 더 풍부하게 상상할 수 있어야겠다.

Posted by 행진

2010/03/15 20:54 2010/03/15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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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0/03/20 11:44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1. 행진 2010/03/21 13:19 # M/D Permalink

      네!^^ 참고가 되신다니 반가운 일이네요. 편하게 활용하세요.

[뉴스레터 34호] 발간사

자아도취에 빠진 정권에 맞서는 2010년


“어둠 속에서 새로운 밝음을 찾아냈습니다.”

2010년 1월 1일, 이명박 대통령은 작년의 간략한 평가와 올해의 의지가 담긴 짧은 신년사를 발표했습니다. 역대 대통령들이 형식적으로라도 새해에는 자신의 과오를 고쳐나가겠다는 식으로 발표한 것과는 달리, 그의 메시지에는 오히려 ‘자신감’이 묻어나왔습니다. 이명박 정권은 예전부터 그랬듯이 올 한해도, 설사 전 국민적 반발을 사는 일이 있어도 ‘자신감’을 갖고 세계로 뻗어나가는 선진적인 국정 운영을 해 나가겠지요. 그의 말대로 G20 정상회의 의장국이자 주최국이 되고, 원자력 발전소 수출의 길을 열어 한국이 선진 일류국가로 도약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날이 갈수록 사회양극화가 심화되고 불안정노동이 확대되는 우리 사회의 서민들이 과연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이명박 정권에게 ‘밝음’은 선진화고, 일류국가겠지만 이를 근거로 추진하려는 정책들은 우리의 삶을 어둡게 할 것임이 분명합니다. 단적인 예지만, 국가 품격을 높이기 위해 노사화합을 강요하면서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희생을 전가하기도 하고, 공기업선진화를 내세우며 각종 사회서비스의 질을 떨어뜨리고 비용을 높일 수도 있습니다. 국가를 앞세운 담론들은 역사적으로 양극화를 심화시키면서 가진 자들을 더 배부르게 만든 것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말한 선진화/일류국가 담론의 숨은 의의를 잘 경계하면서 2010년을 시작했으면 합니다.

이번 뉴스레터는 올해의 첫 발간호인만큼, 이명박 정권이 새해 벽두부터 포부를 밝힌 선진화 담론을 주목하면서 올 한해를 넓게 바라보자는 취지로 기획되었습니다. 정세동향으로는 중앙대에서 진행되려 하는 메가톤급 대학 구조조정에 대한 분석을 실었습니다. ‘백화점식 학과 재편’, ‘경쟁력 없는 학과 퇴출’을 이야기하며 계획되는 구조조정의 목적은 ‘일류대학’이었습니다. 대통령이 ‘일류국가’를 이야기하는 논리와 매우 비슷합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대학이 어떤 곳으로 기능하고 있는지, 우리에게 교육과 학문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의견을 담았습니다. 중앙대에서 구조조정이 성공적으로(?) 완료된다면 다른 학교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데, 이번에 실린 정세동향을 참고하면서 이후의 상황을 슬기롭게 대비합시다.
이어서 연초부터 정신없이 일어난 여러 사건들에 대해 입장을 담았습니다. 일단 서두에 언급한 대통령 신년사와 연설을 토대로 이 정권이 지금의 상황을 평가한 것과 향후 방향을 밝힌 부분을 정리해 봤습니다. 올 한해를 관통할 정부의 기만적 담론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으니 확인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새해 첫 날에 통과된 노조법 개악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고민한 내용을 실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에 대한 권리가 어째서 중요할 수밖에 없는지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마지막으로, 극적으로 타결되어 얼마 전 장례를 치른 용산참사에 대한 입장을 담았습니다. 총리가 유감 표명을 했지만 정부가 진심으로 이 사건을 책임지려는 것은 아닙니다. 용산참사가 어째서 끝나지 않은 싸움인지, 우리가 앞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일로영일’(一勞永逸, 지금의 노고를 통해 오래 안락을 누린다)이란 말을 하며 일류국가 도약을 위해 서로 노력하자고 했습니다. ‘혹세무민’(惑世誣民,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미혹하게 하여 속임)이란 이런 상황을 이야기하는 걸까요. 가진 자들을 위한 서민들의 노고를 이제는 멈춰야 합니다. 우리를 더 불행하게 할 선진화 담론에 맞서 보편적인 권리를 쟁취하는 싸움을 2010년 학생사회에서부터 힘차게 만들어 갑시다!!

Posted by 행진

2010/01/15 01:58 2010/01/15 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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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 메가톤급 구조조정,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중앙대 메가톤급 구조조정안이 지난 12월 29일에 발표됐다. 18개 단과대학을 10개로, 77개 학과(학부)를 40개로 줄이는 한국 대학 사상 초유의 대규모 학과 구조조정안을 두고 시대의 흐름에 따른 바람직한 또는 어쩔 수 없는 변화다, 기업의 논리로 학문의 다양성을 침해한다는 찬/반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를 바라보는 대학교들은 중앙대 뿐만 아니라 모든 대학들이 장기적으로 추구해야할 방향임이 틀림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고, 어떻게든 대학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에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이것이 중앙대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시작되었고 앞으로 거세어질 대학의 거대한 변화,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계열별 경쟁을 유도하는 5계열 책임부총장제

"일류 대학을 만들고 싶은데 지금처럼 백화점식 학과를 갖고 어떻게 경쟁하겠나? 너무 다양해 선택과 집중이 안 되고, 시대 흐름에 뒤처지는 분야도 있으니 중앙대 특성에 맞게 구조조정하자는 것이다. 힘들더라도 일부 손대는 차원이 아니라 미래를 보고 백지 위에 다시 그려야 제대로 된 개혁이 된다고 보았다. 그동안 많은 준비를 해왔다. 단과 대학별 구조조정위원회도 구성했고, 본부 구조조정위도 가동했다. 심지어 외부 컨설팅 회사에 외국 대학들과 비교해 미래 지향적 대학 모델을 만들어달라고 해 그 의견도 이번 안에 담았다."
- 중앙대 박범훈 총장 인터뷰

선택과 집중을 통한 경쟁력 강화, 행정적 편의 개선. 이것이 중앙대학교에서 말하는 주된 구조조정의 이유다. 이를 위해 핵심적으로 현재 단과대 체제가 5계열 책임부총장제로 재편된다. 각 학과에 대한 평가를 통해 집중육성학과 7개, 개편대상학과 26개, 통폐합대상 28개 학과를 선정하여 18개인 단과대를 10개로 줄인다. 이를 ▲인문·사회·사범 ▲자연·공학 ▲의·약학 ▲경영·경제 ▲예·체능 등 5개의 계열별로 묶어 5명의 '책임 부총장'이 예산과 교원임용, 인사, 교육, 연구지원 등 모든 권한을 가지게 된다. 그 목표는 ‘명품학과 12~15개를 집중육성하기 위한 자율 경쟁체제 도입’이라 한다. 학교본부가 그 이상을 공개하고 있지 않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각 계열 간/학과 간에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라는 정도는 누구든 예상할 수 있다.

"기업이든 대학이든 투입한 자원에 비해 가장 큰 효과를 내는 것이 경영이다. (대학과 기업은) 다를 게 없다."
- 박용성 이사장 인터뷰 中 [조선일보, "대학이 문화센터냐… 학과 완전히 다시 짜겠다.", 2009.06.09]

 학교본부가 제시한 이번 구조조정안의 핵심은 ‘평가’이다. 평가를 통해서 학과 통폐합을 이끌어내고, 평가를 통해서 학과 간 경쟁을 유발하며, 평가를 통해서 학과를 죽이고 살리는 학교 ‘경영원리’가 구조조정 혹은 학문단위 조정으로 표현된 것일 뿐이다. 그 중심에 5계열 책임부총장제가 있다. 각각의 부총장이 예산 및 연구지원을 차등화해서 단위별 경쟁을 시키기 위해서는 ‘상시적인 평가’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이들 학과/학문을 평가할 것인가? 소위 잘 나가는 경쟁력 있는 학과는 대폭적인 재정지원을 받고 이외의 학과들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당장에 폐과시킬 경우 예상할 수 있는 강력한 반발을 최소화하면서 합법적으로 도태시키겠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경쟁력 있는 학과라는 것은 곧 취직에 유리한 학과, 기업이 원하는 지식을 가르치는 학과를 의미한다. 대학에서 생산하고 유통하는 지식을 이윤추구를 중심으로 재편시키는 힘, 상시적인 평가는 대학의 기업화를 추동할 것이다.

 사실 현재 발표된 구조조정안 자체만 보아서는 각 과가 어떻게 변화할지 제대로 예측할 수 없고, 노골적으로 경쟁력 있는 학과만 남기겠다는 의도를 투명하게 읽기는 어렵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위에서 말한 것들이 대학교의 운영원리 자체를 바꾼다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앞으로 어떤 식으로 이 대학이 변화할 지를 예측가능하게 해준다. 즉, 당장의 구조조정 계획안에서 살아남은 과도 이러한 시스템 하에서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될 시에 충분히 ‘사실상 포기학과’가 될 수 있다는 것이고, 오히려 지금 제출된 구체적인 안 자체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아니, 5계열 책임부총장제라는 대학 운영원리가 의미하는 바를 통해서만 구체적인 학과 개편의 맥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시대에 따른 학문 수요의 변화, 대학 기업화는 필연인가

“비싼 등록금 받고 사회에 나가서 써먹지도 못하는 지식을 가르치는 것은 죄 받을 일이다. 교수들 스스로 뒤떨어진 것 인정하고 매달려야지, 그렇지 않고 예전처럼 안일하게 가르쳐 졸업생을 실업자로 만들어 놓으면 학문 분야도 손해가 된다.”
- 중앙대 박범훈 총장 인터뷰

그렇다면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경쟁력 없는 학과가 도태되는 것이 문제인가? 이러한 질문은 학문과 교육이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인재를 생산하는 데 가장 큰 목적이 있다는 관점을 기반으로 한다. 즉, 학문의 수요자가 기업과 사회라는 것이다. 일면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대학을 나와도 취직하기가 어렵다’는 불만과 ‘대학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은 얼핏 보면 같은 것이지만 전혀 다른 것이다. 대학을 나와도 취직하기 어렵다는 것은 대학에서 실용적인 학문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또한 대학이 너무 많기 때문도 아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고용 없는 성장이 지속되고 있는 이 사회 전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대학에서 아무리 기업에서 써먹기 좋은 실용적인 지식을 가르친다 해도, 너도 나도 그러한 변화를 꾀하는 가운데 대학을 나와도 취직하기 어렵다는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학교가 아닌, 내가 다니는 학교만 기업이 원하는 방식으로 재편될 때 내가 더 좋은 곳에 취직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이에 비해 대학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은 전 사회적인 문제로 여겨지지만 사실 정확히 ‘기업만’의 문제이다. 금융화되는 사회에서는 소수의 고급지식노동자가 필요한 한편, 그 외의 모든 일자리가 불안정해지는 가운데 이에 적응할 수 있는 노동자가 필요하다. 이러한 노동자를 만들어내는 것은 기업과 정부에게 굉장히 중요한 일인데 이를 담당하는 것이 교육체계, 그 중에서도 고등교육기관인 대학인 것이다. 때문에 대학의 변화는 변화된 산업구조에 맞는 노동력을 생산하기 위한 필수조건이 된다. 대학구조조정이 ‘시대의 변화에 따른 학문수요의 변화’라는 말로 포장되어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회 전반적인 문제인 실업을 개인의 스펙 부족으로 정당화하고, 대학의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가운데 대학은 조금 더 기업이 원하는 노동력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배출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지식과 교육은 이윤추구를 위한 것으로만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학문수요는 결국 기업경영에 필요한 지식이고, 사회가 요구하는 교육은 일상적으로 평가받고, 잘리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를 계발하는 것을 당연한 삶의 원리로 삼는 수 많은 노동자군을 생산할 수 있는 교육을 말하는 것이다.
대학의 기업화는 시대의 흐름에 따른 어쩔 수 없는 변화가 아니라, 명확하게 기업의 입장에서 필요한 대학의 변화다.


대학 위기의 원인

 대학구조조정이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는 배경은 교육에 대한 위와 같은 관점이 밑거름이 되는 한편, 실제로 많은 대학들이 입학정원을 채우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립학교의 비대화․부실화는 사학 자본들의 난립과 경쟁으로 인해 심화․확대되었으며, 경쟁력 이데올로기가 학생, 교직원사회에 퍼지면서 대학과 학문이 죽어가고 있다. 이러한 대학의 위기는 어디에서부터 왔을까. 한국에서 대학은 과거 산업 자본의 수요 충족과 대중들의 계층상승 욕구가 결합하여 양적인 팽창을 거듭했다. 고도의 산업성장과정에서 대학은 국가와 자본에게 고급 노동력의 공급을, 개인에게는 부와 지위의 획득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줌으로 해서 양적팽창의 정당성을 확보해왔다. 하지만 불황으로 인해 이제 대학에서 양산한 노동력을 모두 수용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제 대학은 ‘과잉노동력’을 양산하며 계층상승은커녕 안정적인 일자리조차 보장해주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1980년대까지 정부는 고등교육의 확대를 제어하는 방향으로 일관하다가 5공화국 들어 이른바 7․30교육개혁조치로 대학의 문호를 개방한다. 이후로 꾸준하게 대학의 규모가 증가하다 90년대 중반에 또 한 차례의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95년 5․31교육개혁조치의 일환으로 대학설립준칙주의가 도입되면서 96년도 이후부터 사립대학을 중심으로 대학정원과 대학수가 증가했고, 1990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약 10년 만에 대학생 수가 2배 가까이 늘어났다. 대학의 양적 팽창은 산업성장과정에서 시장의 필요와 정부의 정책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 대학의 변화는 필연이 아니라, 자본과 정부의 ‘선택’이었다.

 때문에 현재 대학의 위기라고 불리는 상황은 자본과 정부의 선택이 이제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게 된 것일 뿐이고, 때문에 새로운 재편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대학이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점점 기업의 입맛에만 맞는 지식을 생산하고 그것을 이 사회에 필요한 지식과 동일시하는 현상, 서로가 서로를 밟고 올라서기 위해서 경쟁하는 천편일률적인 ‘인재’만을 길러내는 것이 진정한 대학의 위기 아닐까. 

우리에게 교육과 학문은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학문의 수요자는 기업인가? 아니, 학문에 공급자와 수요자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관점 자체가 이미 기업의 시선으로 교육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교육은 기업이 원하는 노동자로 자라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삶을 내가 통제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 즉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지식을 얻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대학의 구조조정이 위험한 이유는 결국 모든 교육과정이, 세상에서 ‘지식’이라고 인정받는 것들이 모두 ‘기업이 원하는 노동자’가 되기 위해서만 존재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지금 중앙대학교에서는..

 12월 29일의 구조조정안 발표는 중앙대학생들에게 충격적이었다. 08년 때부터 조금씩 구조조정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이에 학생대표자들이 총장님께 사실 확인을 요구했는데 총장님의 대답은, ‘허위사실 유포하는 자를 데려오라’였다. 시간이 지난 지금, 어떠한 이야기도 듣지 못했던 학생들에게 날벼락 같은 학과통폐합 계획안이 언론을 통해 뿌려진 것이다. 일찍부터 학생들은 학교에 구조조정에 대한 계획을 함께 논의하고자 수차례 요구했다. 그런 요구를 무시하고 특히 구성원들이 학교에 없는 ‘방학’기간에 구조조정 계획안을 발표한다는 것은 대화하겠다는 의지조차 사라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개편 대상 학과를 평가하는 기준도 명확하게 공개하지 않았고, 학우들에게 돌아온 것은 평가된 ‘결과’일 뿐이었다. 학교는 방학동안 의견수렴 기간을 거쳐 3월에 최종안을 결정한다는 입장이지만 방학 기간을 통해 그것이 얼마나 가능할지 의문이다.
 대학 자체를 뒤바꾸는 대규모 구조조정계획에 대해 중앙대 학생들은 ‘구조조정에 맞선 학생대책위원회’를 꾸리고 긴급 토론회, 질의서 발송, 학생 요구안 수합, 확대운영위원회 개최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번 구조조정계획이 어떤 변화를 의미하는 것인지 학내 구성원들이 ‘정보’를 알 수 있고, 토론할 수 있도록 각 과별 간담회 등을 기획하고 있다.

더욱 본격화될 대학구조조정에 맞서, 대학 기업화의 진실을 폭로하자!

 “향후 10년간 대학과 기업의 불편한 동거가 아니고 찰떡 궁합의 행복한 상생이 될 것입니다.
10년을 지켜보신 후에 이와 관련된 글 하나를 써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 드립니다.”

-경향신문 기사 ‘대학과 기업의 불편한 동거’에 대한 반박, 중앙대학교 이사장 박용성

  중앙대학교 이사장은 자신만만하다. 개혁의 결과는 기업 개혁의 결과와 같이 실적으로 증명하겠다는 것이다. 그 실적은 중앙대의 대학서열 상승, 취업률 등으로 나타날 것이다. 중앙대 구조조정은 앞으로 대학이, 교육기관의 발전이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어떤 대학이 필요한지 대중들에게 강력하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때문에 이 싸움은 중앙대 학우들만의 문제가 아니며 모든 대학생,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문제다. 우리 모두, 우리들에게 필요한 학문과 교육에 대한 논쟁을 시작할 때다!   



[참고자료]

1. 인문/사회계열
1.1. 인문대학
민속학과가 폐지되고 역사학과에 통폐합 될 예정이다. 아시아문화학부, 유럽문화학부가 기존 학과들의 통합을 통해 신설되었다. 아시아문화학부 내에는 인도문화가 신설되었다. 이번 구조조정에서 기초학문분야인 인문학을 육성하겠다고 학교 본부는 천명했고, 실제로 완전폐지의 경우는 거의 없었다.

1.2. 사회과학대학
낮은 평가를 받은 복지계열학과가 사회복지학부로 통합되었고 신문방송학과와 광고홍보학과가 합쳐진 미디어홍보학부가 생겨났다. 공공인재학부 역시 이곳으로 배치되었으며 도시계획․부동산학과가 안성 캠퍼스의 도시 및 지역계획학과에서 변경되었다. 심리학과, 문헌정보학과, 사회학과는 좋은 평가를 받아 학과체제로 존속되었지만 정치외교학과/국제관계학과는 낮은 평가를 받았다는 이유로 폐과대상이 되었다.

인문대학과 사회과학대학의 대부분의 학과들이 학부제 모집으로 통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번 구조조정안에서 전반적으로 학부제 모집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유독 인문/사회계열, 자연계열에서 저평가를 받은 것으로 짐작되는 학과들이 학부제로 묶이는 경향을 보였다. 학교 측은 ‘기초학문분야 육성을 위해’ 학문단위 광역화를 실시한다고 하지만 뚜렷한 목표나 전략이 없이 단지 비슷하기에, 또는 행정적인 편의라는 이유로 묶는 학부 광역화는 걱정되는 부분들이 많다.

1.3. 사범대학
체육교육과와 가정교육과가 폐지되었다. 그 이유는 평가안에서 ‘下’ 등급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신 국어교육과, 수학교육과가 신설. 교육학과의 경우는 낮은 평가를 받았지만 1년 간 유예기간이 주어졌다고 한다.

2. 경영/경제계열
경제학과, 경영학과, 통계학과가 한데 묶였다. 또 글로벌지식학부가 신설되었다. 글로벌지식학부의 경우 총 정원이 145명이며 교육과학기술부와 중앙대가 처음으로 도입한 학과이다. 실업계 고교 출신 직장인들 중 3년 이상 일한 사람들에 한해 수능성적 없이 입학할 수 있게 한 제도. ‘학사MBA’라 불리고 있으며 경영학을 배우며 평일 야간, 주말 등에 주로 운영된다.

3. 자연/공학계열
흑석캠퍼스의 자연대학과 안성캠퍼스의 응용생명과학부가 통합되어 자연과학대학이 되고 공과대학이 같은 계열로 묶이게 되었다.

3.1. 공과대학
공과대학은 신설되는 학과가 많고 그만큼 없어지는 과도 많다. 건축학부만이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고, 건설환경공학과, 도시공학과가 폐과되며 건설플랜트공학과가 신설된다. 건설플랜트공학은 건설환경공학과 도시공학의 성격과는 전혀 다른, 공학 인프라 구축-해외 담수시설, 원전 플랜트 공사 등- 을 주되게 연구한다. 두산건설, 두산인프라코어 등의 존재를 생각했을 때 대학에서 생산된 지식이 두산 계열사에 직접적으로 제공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기계공학부와 신설학과가 합쳐져 E/S공학부가 신설된다. 추가되는 전공은 로봇공학, 의료공학으로서 기계공학부의 세부전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3가지 전공이 동등한 지위로 설정이 되어있다. 전자전기공학부와 컴퓨터공학부가 합쳐지고 인공지능 전공이 신설되어 IT공학부가 생겨난다. 마지막으로 화학신소재공학부와 신설된 에너지환경공학의 구성으로 에너지공학부가 탄생한다. 공과대학은 그 어느 단과대학보다 학과 통폐합-재배치가 많은데 이는 ISB계열을 주력사업에 둔 두산그룹이 공과대학을 많이 신경 쓰고 있다는 이야기다. 특히 건설플랜트공학과, E/S학부, 에너지공학부 등의 신설에서 두산그룹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즉 두산그룹의 사정에 따라, 또는 시장상황에 따라 앞으로도 학과 재조정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불안정성에 처할 가능성이 높을 수 있다.

3.2. 자연과학대학
지난 10월 19일 문제의 한국일보 기사에서 ‘사실 상 포기’대상에 들어갔었던 자연과학대학이 공과대학과 같은 계열로 묶이게 되었다. 수학과와 물리학과가 합쳐져 수학물리학부를 신설되고, 99년 정경대에서 적을 옮겼던 통계학과는 또다시 자연과학대학에서 나와 경제․경영 계열로 가게 되었다. 또한 화학과와 생명과학과를 합쳐 화학생물학부를 만든다. 2캠퍼스의 산업과학대학/생활과학대학의 과들이 응용생명과학부로 재편되는데, 생명공학과를 통합시켜 의생명공학 전공을 새로이 두게 되었다. 앞서도 지적했다시피, 자연과학대학 역시 ‘순수학문 육성을 위해 학부제로 광역모집’되는 주된 단위가 되었다.

4. 예체능계열
4.1. 예술대학
공연영상창작학부와 디자인학부, 미술학부, 음악학부, 전통예술학부로 구성된다. 이 중 공연영상창작학부는 문예창작, 연극, 영화, 사진, 현대무용 전공으로 나뉜다. 연극, 영화전공의 경우 이미 3년 전에 미디어공연영상대학으로 바뀐 적 있는 연극영화학부가 다시 분리되어 구조조정되는 다소 어이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2006년 당시 학교 측은 정경대 신문방송학과와 예술대 연극학과, 영화학과 3과를 통합하여 미디어공연영상대학을 만들었다. 당시 미공영대는 연극․영화학과가 수도권 대학 특성화 사업에 선정되면서 받은 정부지원 121억 원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창조적 융합 교육을 위해’, ‘공연 영상 중심의 교육을 통한 차세대 전문 인력 육성’이 그 목표였다고 한다. 그러나 3년 만에 계획은 뒤바뀌어 신문방송학과는 사회계열로, 연극․영화학과는 예술대로 재편성되었다.

4.2. 체육대학
안성 캠퍼스의 사회체육학부와 흑석 캠퍼스 사범대학 체육교육과가 통합되어 체육학부 단일 학부 대학으로 구성된다. 사회체육학과의 성격이 강할 것으로 보이며 체육교육과의 특성은 거의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Posted by 행진

2010/01/15 01:54 2010/01/15 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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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신년연설을 통해 본 2010년 예상도


■“2009년, 우리가 얻은 것은 자신감입니다.”

  집권 3년차를 맞는 이명박 대통령은 4일 신년연설에서 '더 큰 대한민국'을 내세우며 2010년 국정운영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구체적으로 보면, 올해 3대 국정운영기조로 ▲글로벌 외교 강화 ▲경제 활력 제고 및 선진화 개혁 ▲친서민 중도실용을, 5대 국정과제로 ▲경제회생 ▲교육개혁 ▲정치선진화 개혁 ▲전방위 외교 및 남북관계 변화를 각각 제시했다.

  지난 해 신년연설의 기조 및 과제와 비교해보면 내용에 있어서 큰 틀에서는 차이가 없었으나, 지난 해 연설에서 '위기'를 29차례나 언급하면서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기 위한 국민들의 고통분담 강조에 중점을 두었다면, 올해 연설은 '대한민국'을 14차례, '변화'를 13차례 언급하면서 2010년을 향한 긍정적, 희망적인 비전을 중점적으로 전달했다. '세계 최초로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G20 정상회의 2010년 개최국', '원자력 수출 협정 체결'은 대한민국의 변화된 위상을 보여주었고, '선진 일류국가'라는 브랜드에 '외환보유고 6위', 사상최대 무역흑자, 내년 경제 성장률 4.5% 예상' 등 희망적인 수치들을 새겨 넣었다.


■  “올해 우리 정부는 '일자리 정부'로 자리매김하겠습니다.”

  여러 정책 중에서 이명박 정부는 일자리 창출에 중점을 두면서 스스로를 ‘일자리 정부’라 명명하며 특히 이 부분을 강조했다. 그러나 실제 조사에 따르면 2010년 정부가 창출하는 일자리의 월평균 임금은 최저임금(83만6천원. 2009년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며 초단기 일자리가 대부분이어서 2010년에도 정부의 일자리 정책은 결국 더 많은 불안정 노동을 양산할 것으로 예상된다. 일자리를 20만개 창출하겠다고 발표하고 있으나 수치만 높여서 강조할 뿐, 실제로는 올해에도 작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자리 정책이 시행될 것이라고 예상되고 있다.

  작년을 돌이켜보면, 정부에서 일자리 정책 중 매우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청년인턴 사업은 이로 인해 6만 6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혜택을 봤지만 몇 개월이 지나고 곧 다시 일자리를 잃었다. 이러한 땜질식 일자리 대책으로 일시적으로 공식 실업자 수를 낮추면서 정부는 경제 위기 속에서도 OECD국가 중 실업률이 매우 낮은 편에 속한다고 선전하지만, 공식 실업자 수에 취업준비생이나 구직단념자 등을 포함한 ‘사실상 실업자’는 지난 11월 300만 명을 넘어서고 있어 사실상 실업률이 12.6%를 기록했다. 정부가 발표하는 공식 실업률(3.3%)의 4배 가까이 되는 실업률이 은폐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용 없는 성장’ 속에서 정부가 추진하는 일자리 정책은 결국 당장 실업률을 끌어내리기 위한 불안정 일자리 만들기에 불과했다.

  올해 연설에서 추가적으로 실업 해결책이라고 제시한 ‘직업 훈련 체제 강화’나 ‘노동력 수요-공급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한 통합정보망 구축’ 등 어느 것도 궁극적인 원인에 대한 처방을 비껴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신년 연설에서 실업과 단기적 취업을 오갈 수밖에 없는 현재 사람들의 불안정한 상황을 ‘복수 직업 시대’라 포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평생 하나의 직장만 갖는다는 고루한(!) 생각에서 벗어나 일자리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 경제 수단이 아닌 ‘자아실현’ 수단으로서 일자리를 바라볼 것을 당부하지만, 자아실현은커녕 경제 수단에도 미달하는 것이 현재 사람들의 일자리이다.


■ “'일로영일(一勞永逸)'의 자세로 선진 일류국가로 가는 초석을 확실히 다지겠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신년 연설에서 드러나는 자신감은 지지율 상승에 힘입은 것이다. 올해는 임기중반을 통과하는 해로 초기의 지지율을 다시 되찾기 위한 이미지 쇄신을 꾀하고 있다. 그 결과 촛불집회,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사태이래로 급격히 하락했던 국정 수행에 대한 지지율은 50%대를 회복했으며, 모 언론사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70%에 가까운 사람들이 내년 우리 경제가 좋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일로영일의 마음으로 나라의 기초를 튼튼히 닦겠’다고 말하면서 신년화두를 ‘일로영일’로 삼았다. 청와대가 올해의 사자성어로 뽑은 ‘일로영일(一勞永逸)’이란 ‘지금의 노고를 통해 이후 오랫동안 안락을 누린다’라는 뜻이 담긴 것으로, 정책을 택함에 있어서 지금 당장의 효과도 중요하지만 먼 미래 후손의 안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뜻에서 이 사자성어를 택했다고 청와대는 그 취지를 밝혔다. 마치 이명박 대통령 스스로는 당장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후대의 경제번영까지 생각할 줄 아는 ‘현인’으로 승격시켰으며, 이에 대조하여 생존권을 지켜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사람들을 당장의 잇속밖에 차릴 줄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로 격하했다. 올해에도 다시 한 번 어떠한 저항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밀어붙이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올해는 또 어디서 용산에서와 같은 불꽃이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갈지, 쌍용자동차 공장에서처럼 매캐한 최루액이 쏟아져 내릴지 모를 일이다. 분명한 것은 ‘잘 살기’ 위해 추진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경제성장 정책이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짓밟을 것이라는 것이다.

  당장의 노고와 어려움은 고통분담으로 함께 이겨내자고 말한다. 신년 연설에서 ‘세계에서 경제위기를 가장 잘 극복한’ 것은 ‘고통을 분담하려는 정부의 정책에 국민들이 너무도 잘 참고 잘 호응해’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2년 연속 임금 동결을 감내해준 공무원들에게 감사의 말까지 보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처럼 과대 포장된 2010년 경제성장률을 마치 고통을 분담하여 대한민국 특유의 저력으로 경제위기를 잘 이겨낸 결과 얻어진 것으로 만들면서, 더 큰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올해에도 아낌없는(!) 고통분담을 주문했다. 그러나 최근 5년간 경제위기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국내 기업의 매출이 꾸준히 증가했던 것에 반해, 평균 임금인상률은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최저 수준으로 1.7%(물가상승률을 적용하면 사실상 ‘삭감’이다)에 머물렀다는 점을 볼 때, 그토록 지난 해 호소했던 ‘고통분담’이 민중에 대한 일방적인 책임 전가에 불과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 우리 목을 조여 올‘선진화’라는 환상을 벗어던지자!

  신년을 맞이하여 모 언론사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10년 안에 선진국 대열에 진입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이 과반수에 이르렀다. G20 개최, 원자력 수출 등 지난 해 쏟아져 나왔던 몇몇 상징들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선진 일류 국가’로서의 이미지에 사로잡히게 했다. 그러나 이처럼 정부에서 유포하는 ‘선진국’이라는 이미지에 집단적으로 도취되어 있다면 정부에서는 끊임없이 이러한 환상을 부추기면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당장의 고통 감내, 즉 ‘일로영일’ 정신을 내세워 우리의 생존권을 공격해 올 것이다.

  출구전략에 대한 논의가 곳곳에서 쏟아져 나오지만 여전히 전세계적으로 경기 침체는 계속되고 있고 더블딥 가능성까지 점쳐지고 있는 상황에서 세계 경제와 연동되어 작동되고 있는 우리나라가 유일하게 경제위기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얼마간은 경제위기가 계속될 것인데, 경기 침체의 장기화는 실업, 부채 증가 등 사람들이 삶의 질을 점점 더 악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선진화’, ‘선진화’를 외치면서 더 악화된 삶의 조건마저 장밋빛 미래를 위해 감내하게 만들 것이고 이에 대한 저항은 ‘생각, 행동양식의 선진화’를 내세우면서 다시 억압당할 것이다.

  “오늘 소담스런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으며 새해의 시작을 축복하는 듯합니다.”라는 말로 시작된 신년 연설에서처럼 그날은 유례없이 많은 눈이 내렸던 하루였다. 새해 첫 근무일에 예상치 못한 폭설로 서울의 온 교통은 마비되었지만 어쨌든 눈은 그러한 세상사에는 초연한 듯 쏟아져 내렸다. 이처럼 생존권을 보장하라고 외치는 우리의 목소리 위에도 ‘선진국’이라는 새하얀 이미지가 뒤덮으려 하고 있다. 정부는 지금 당신의 고통은 대한민국이 아직 선진화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처럼 이야기하면서 경제성장에 방해가 되는 어떤 걸림돌도 제거할 기세이지만 ‘선진국’이라는 이미지는 언젠가는 녹아 없어져버릴 환상일 뿐이다. 경제 위기 시기 어느 때보다도 거세질 노동에 대한 공격에 맞서 진짜 우리의 삶을 선진화시켜낼 수 있는 대안을 이야기하자. 경제위기에 따른 고통분담을 명분으로 노동자들의 탄압이 정당화될 수 없음을, 정부의 일자리 정책이 사실상 단기간, 저임금 일자리 양산에 불과함을 적극 알려내자. 우리의 생존권은 선진화 정책에 의해 오히려 억압될 것임을 폭로해내는 2010년을 만들어가자.


Posted by 행진

2010/01/15 01:46 2010/01/15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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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에도 멈추지 않는 노동자 탄압
- 노조법 통과에 부쳐-



1. 신년과 함께 찾아온 노조법 통과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꿈을 안겨줘야 할 2010년 1월 1일, 새해가 밝기도 전에 우리는 노조법 날치기 소식을 전해 들어야 했다. 개정은 없을 것이라던 임태희 노동부장관이 하루 만에 입장을 바꿔 노조법을 꼭두새벽에 통과시킨 것이다. 이번 노조법 개정안처리과정에서는 노동부장관의 말 바꾸기부터 자기당위원의 출입을 막은 환노위 회의까지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들이 벌어졌다. 정권에게 있어선 이번개정안 통과는 더 이상 법의 테두리에는 노동자들이 있을 곳은 존재치 않는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개정안에는 복수노조 시행 유예, 타임오프제, 복수노조 단일창구화, 노조전임자임금 지급 금지를 골자로 하고 있다. 본 개정안이 시행될 경우 민주노조는 그 존립마저 위기에 처하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정권과 여당, 경영계는 전임자임금지급이 노조의 자율성을 훼손하고 노사관계를 망친다며 지급 금지를 강도 높게 주장 해왔다. 이번 개정안 날치기통과로 전임자임금 지급금지는 올해 7월 1일로 시행되게 된다. 하지만 지난 96년 제정된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는 그동안 노동계 및 학계 등의 강력한 반발과 폐지요구 속에 13년 동안 계속 유예되었던 조항이다. 사용자와 노동자의 불평등한 권력관계 속에서 노동자들이 자신들에게 보장된 권리들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장선이 노동조합이다. 더욱이 한국은 고강도 장시간노동이 일반화되어 있고 300인 이하사업장 노조가 전체노조의 90%를 차지하는 열악한 상황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일을 하며 노조활동까지 병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노조전임자는 노조운영, 노무관리 외에도 민주노조로서 정치적 활동과 조합원 조직, 교육활동에 있어 없어선 안 될 존재이다. 게다가 정부의 주장과는 달리 대부분의 노조전임자 급여는 투쟁과 단체협상의 결과물로 쟁취해왔던 권리이다. 민주노조 와해와 같은 목적이 있지 않은 이상 회사가 나서서 전임자 임금을 지급하는 경우는 드물다. 설령 회사의 개입이 있다 하더라도 이는 부당노동행위로 현행법상에서도 처벌이 가능하다. 하지만 정권과 여당은 이런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향후 7월부터 전임자 임금지급이 금지된다면 노조는 전임자임금부담으로 인해 운영에 있어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소속노조의 노동조합비로 운영되는 상급단체 역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자연스레 노동조합 전체의 무력화로 이어질 것이다. 또한 전체 노조전임자 임금이 노동조합비보다 많은 상황이라는 점에서 노조의 약화는 피할 수 없다. 이런 정황들을 보더라도 정권은 겉으로는 법과질서 노조의 자율성을 말하지만 노조에 경제적 압박을 가하여 활동을 축소하고 약화시키겠다는 것이 속셈임을 보여주고 있다.

- 유급근로시간면제제도(타임오프제)
이번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시행될 타임오프제는 노조전임자의 업무시간에 있어 노조활동 시간을 보장해주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얼핏 보면 전임자임금이 금지되는 와중에 전임자의 임금지급이 가능한 활동시간을 보장해줌으로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 보인다. 하지만 타임오프제는 전임자의 ‘기업의 노무관리를 대행하는 활동’ 에 있어서만 인정되며 전임자의 노조 교육 및 정치활동을 배제하고 있다. 이는 노조전임자의 역할을 노무관리수준으로 제약하고 있어 전임자임금만 금지되었을 현행법보다 더 후퇴한 것이다. 수많은 워크샵에서도 타임오프제가 노조의 자율성을 훼손할 치명적인 제도임이 지적되었다. 게다가 개악안이 통과한 것도 모자라 시행령 예고안에는 노조전임자수 제한규정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는 전임자의 활동자체와 그 숫자를 법적으로 규제하여 노조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겠다는 정권과 여당의 의도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
 복수노조 자체는 노조결성의 자유라는 차원에서 보장되어야 할 기본적 권리다. 군사정권 하에서는 민주노조 설립을 막기 위해 법적으로 단일노조를 강제되어왔다. 민주화이후 노동계는 복수노조를 강력히 요구해왔다. 하지만 정권과 사측은 이를 노조 전임자임금지급 문제와 연동시켜 노사 간 타협과 흥정거리로 전락시켜왔다. 13년 동안 이를 유예시키며 버텨온 정권은 복수노조 허용시기가 가까워 오자 이를 무력화 시키고자 교섭창구 단일화라는 카드를 들고 나온 것이다. 복수노조가 있어도 교섭권을 한 창구로 만드는 교섭창구 단일화는 교섭권을 두고 노노간 싸움을 야기하여 실질적으로 복수노조를 허용치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자율적 단일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과는 달리 노조의 권리를 보장하겠다고 하지만 노조 간 경쟁 상황에서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단일화 실패 시 조합원 수 산정 시점까지 약 1달의 여유동안 사측은 언제든 어용노조를 만들 수 있게 하는 조항까지 담고 있어 노조탄압을 부추기고 있다. 현안대로 시행될 시 노조 간의 이해가 상충될 때 힘과 규모가 약할 수밖에 없는 비정규, 여성과 같은 소수노조의 발언권 자체가 소멸될 위험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창구단일화는 노사 간 교섭에 노조의 참여를 막고 있어 노동3권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에 다름없다. 이번 개악안에 의해 복수노조허용은 그 실질적 효과를 잃게 될 수밖에 없으며 오히려 노동자들 간의 경쟁, 대립과 어용노조의 난립으로 이어질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2. 현 정권의 노골적인 노조 말살정책

 비단 이번 날치기뿐만이 아니다. 정권은 작년 통합공무원노조가 민주노총에 가입하자 정치활동을 벌이는 노조에 가입했기 때문에 공무원노조를 불법이라 규정하였다. 이후 노동조합설립을 반려하였으며 사무실압수수색/폐쇄 등 수단을 가리지 않고 노조를 탄압하였다. 철도파업에서도 다를 바는 없었다. 공사의 일방적인 협약에 맞서 철도노조가 파업은 합법적인 절차를 거친 준법투쟁이었다. 하지만 정권은  공공부분 선진화정책에 반대하는 정치적 파업이기 때문에 이를 불법파업으로 규정하였다. 여론과 대통령은 철도파업을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한 이기적인 불법파업이라며 철도노조를 몰아세웠다. 공무원, 철도의 사례에서 보여주듯이 공공부분선진화 노조의 파업을 공권력으로 탄압하는 것을 넘어 노조자체를 와해시키려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더 이상 자신들의 국가정책에 적극적인 방해요소가 될 수 있는 민주노조자체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의지를 보여준다. 전태일의 분신부터 시작된 노동운동자체를 사회적 악으로 규정하고 파업과 같은 활동부분의 통제를 넘어 노조자체를 와해시키려 하는 현 정권의 탄압은 더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번 신년연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명박 대통령은 노동자들이 참고 노력하면 경제위기가 해결되고 좋은날이 온다며 ‘일로영일’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주장은 지난 97년 IMF당시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IMF 고통분담 속에서 기업과 주주들은 민중들의 고통위에 살아남았지만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노동권의 전반적인 후퇴와 전 국민의 빈곤화, 실업대란이었다. 정권은 지난 97년IMF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이익보장을 위해 민주노조의 투쟁을 말살하고 민중들에게 고통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97년의 파괴된 서민경제가 회복되지 않은 만큼 민중들의 삶은 더 나락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한 민중들의 불만 관리는 정권의 최우선 목표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기만적인 서민정책과 함께 더 강도 높은 노조말살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3. 노조가 노동권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것은 정당한 권리이다.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만드는 것이며 국가는 노조의 권리를 보장하고 노동자들의 노동권을 보장할 의무를 지닌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이와 같은 의무를 지켰던 정권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전태일의 분신 이후 본격화된 노동운동과 민중들의 투쟁은 항상 정권의 모진 탄압을 받아 왔다. 자본과 정권의 힘 앞에 미약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노동이 보장되기 위해선 연대와 단결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현실 속에서 연대와 단결을 모아내는 노동자들의 공간이 바로 노조였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은 좋아졌다고 이정도면 된 것 아니냐고 한다. 하지만 정권은 시기별로 파견법, 비정규직보호법, 노조법개정안 등 계속해서 노조와 노동운동을 탄압해왔다. 이는 작년 말부터 더욱 심화되어 이젠 노골적으로 노조를 말살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노조의 시작이 노동권의 시작이었듯이 노동권에 대한 말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때문에 노동자들의 파업은 단순히 그들만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넘어 이 사회 전체 노동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인 것이다.

4. 연대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우리에게 노동권이라는 말은 아직도 어색한 말이다. 노동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회에서 노동권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 그 이상 그 이하일 수도 없다. 하지만 정권과 여론은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노동자들의 파업과 투쟁을 집단이기주의, 불법폭력행위로 몰아가면서 자신들의 정책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을 사회저해세력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들이 조장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노동권을 빼앗기고 있으며 우리의 노동권을 지킬 수 있는 방법들을 점점 더 잃어가고 있다. 850만 명이 비정규직인 사회, 경제위기속에서 기업의 이윤을 지키기 위해 노동자들부터 해고되는 사회에서 정부의 反노동정책에 맞선 노조의 투쟁은 노조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권의 노조공격은 노동권 일반에 대한 공격이며 이에 맞선 노조의 투쟁은 이 땅 노동권의 최후 보루이다. 정권의 탄압이 완성될 경우 우리의 노동은 더 이상 권리가 아닌 고역으로 전락 될 수밖에 없다. 시작부터 파행을 거듭하고 있는 2010년, 우리의 내일은 어둡기만 하다. 하지만 넋 놓고 구경하고 있다간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생존조건에도 미달하는 열악한 저질의 일자리 일수 밖에 없다. 돌아오는 7월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를 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누군가의 권리가 아닌 우리 모두의 노동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노동권의 최후보루인 노동조합을 지키는 싸움에 우리 모두 함께하자!!!


Posted by 행진

2010/01/15 01:36 2010/01/15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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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를 치러도
용산참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355일 만이다. 삶의 터전을 떠날 수 없어 망루에 올랐지만 살아서 내려올 수 없었던 그 철거민들의 장례를 치르는데 꼬박 일 년이 걸렸다. 언제나 회피하려고만 했던 정부가 자신의 책임을 일부 인정하면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던 용산참사는 이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당연한 권리를 박탈당한 채 외로움 싸움을 벌이다 산화한 고인들의 장례를 늦게나마 치를 수 있게 된 건 분명 다행인 일이다. 냉동고에 있는 아버지, 남편의 주검을 곁에 두고 장례식장에서 일 년을 지낸 유가족의 고통도 조금은 덜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용산참사는 자본의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 내달리는 우리 사회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하지만 시민들의 주거권을 축소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던 뉴타운/재개발의 문제를 고발하는 대가는 결코 적지 않았다. 정부의 거듭된 탄압을 견디면서도 이 문제의 해결을 바란 양심 있는 사람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총리의 불만족스런 유감 표명을 끌어내는 일조차 난망했을 것이다. 이렇듯 용산 문제가 다른 궤도에 접어든 데에는 많은 시민들의 지지와 성원의 힘이 컸다. 다만 서울시가 연말에 갑자기 태도를 달리하며 협상을 요구한 일은 어딘지 미심쩍다. 일 년 가까이 아무런 진전도 없었던 데서 볼 수 있듯 용산참사를 망각시키려는 정부의 의지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달라진 것처럼 보이는 서울시와 정부의 태도 이면에 숨겨진 계산법은 무엇일까.


선거를 앞둔 서울시의 이미지 관리

서울시와 용산범대위는 작년 수차례 대화를 진행했지만 번번이 정부 사과 부분에서 막혔다. 사과 얘기가 나올 때마다 서울시는 "우리 소관이 아니다"라며 문제를 회피하기에 급급했다. 용산참사는 돈 없는 사람들을 내쫒으면서 도시를 '디자인'하는 정부가 빚어낸 학살이기 때문에, 정부에게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하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서울시의 퇴짜로 대화는 번번이 결렬되었고, 그 동안에도 용산과 관련된 기자회견․캠페인․문화제는 불법으로 간주되어 참가자들이 연행당하는 등 정부의 탄압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연말이 되자 서울시는 갑자기 용산범대위와 물밑 접촉을 하며 대화 재개를 요구했다.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서울시의 '협조적'인 자세는 정부가 그토록 기피하려 애쓰던 책임 인정의 문제를 이끌어냈다. 갑자기 진행된 대화에서 일 년을 두고 싸웠던 핵심 사안 중 하나가 합의된 것이다. 어딘가 변한 것처럼 보이는 서울시의 달라진 태도는 올해 그들이 생각하는 '중요한 일정'과 관련이 있다. 6월에 예정된 지방 선거에서 서울시장에 출마하는 경쟁자들의 상호견제가 벌써부터 뜨거워지는 가운데 현 서울시장인 오세훈의 마음은 조급하다. 만약 용산참사가 해를 넘겨 올해까지 사회적으로 쟁점화 된다면, 쟁쟁한 라이벌과의 선거 경쟁에서 오세훈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장례를 치른 것을 이유로 용산 문제가 더 이상 불거지지 않기를 소망하고 있다. 그리고 한 술 더 떠서 서울시가 도움을 주려 노력했기 때문에 고인의 장례나마 치를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일관되게 용산 문제를 억압해왔던 서울시는 정부 사과를 제외한 다른 핵심 쟁점을 오히려 무마시키면서 자신이 해결에 앞장섰다는 거짓말로 추락한 이미지를 개선시키려 한다. 오세훈과 서울시가 진심으로 사건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면 일 년 동안의 숱한 탄압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번 협상으로 유가족에게 마치 자선사업이라도 한 것처럼 광고하는 서울시의 의도는 지방선거 재선을 위한 이미지 만들기에 다름 아니다. 장례 하루 전 처음으로 빈소를 찾아가 유족들에게 "유사한 사례가 발생되지 않도록 …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한 오세훈의 속내는 따로 있었다.


살인 재개발은 계속 된다

핵심 쟁점이었던 정부의 사과는 받아냈지만 용산범대위가 요구한 다른 문제들의 해결은 아직 요원하기만 하다. 용산 범대위는 △대통령 사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특별검사제 도입 △명예 회복 및 정신적, 물질적 피해에 대한 배상을 위한 특별법 제정 △재개발 관련 법제도 개선 △전철연과 범대위에 대한 공안 탄압 중단 등을 요구했다. 대통령이 아닌, 그것도 참사가 일어날 당시에 임기가 아니었던 총리의 사과가 정부의 완전한 책임을 공표했다고 보긴 어렵다. 더욱이 '떼잡이', '도심 테러리스트' 운운하며 구속한 용산의 철거민들에게 징역 *년의 중형을 선고하는 등 철거민들에 대한 정부의 탄압은 계속되고 있다. 재개발 법안(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도 11군데 개정하긴 했지만 보상을 조금 늘리거나 집행력이 없는 분쟁 조정 기구를 세우는 등 실효성이 없고 형식만 갖춘 것이라며 전문가들에게 비판받고 있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제 2, 제 3의 용산참사를 불러올 '살인 재개발'이 지금도 버젓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작년과 올해 주요 건설사들이 재개발하며 분양하는 지역만 봐도 서초구, 동대문구 제기동/답십리, 옥수, 동작구 흑석동, 성동구 금호동, 마포구 아현동 등으로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여기에 서울시가 5년 이후를 보며 계획하는 재개발 지구까지 포함한다면 사실상 도시 전체에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용산이 분명하게 보여주었듯이 개발을 통해 이득을 얻는 자, 그리고 얻어맞고 쫓겨나도 하소연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 개발이익을 둘러싼 가진 자들의 동맹은 삼성물산․대림건설․포스코 같은 자본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직접 개발에 투자하거나 승인/감독하며 계획을 세우는 지자체, 용역깡패의 불법적 행위를 묵인하고 동조하는 경찰, 사법적으로 이 모든 과정을 비호하는 검찰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을 포함한다. 있던 곳에서 묵묵히 삶을 일궈온 사람들을 내몰고 세워진 휘황찬란한 건물에 그 평범한 사람들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돈이 없어 살던 곳을 잃고, 다시 형편에 맞는 집을 찾아 헤매다 어딘가 정착할 그곳도 결국은 재개발이다. 주거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다면,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절박한 심정으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무엇을 위한 개발인가?

4일에 있었던 대통령의 신년연설은 “잘 될 것”이라는 자화자찬과 추상적 의지만 가득했다. 그가 이야기 한 ‘일로영일(一勞永逸, 지금의 노고를 통해 오래 안락을 누린다)’이란 말에는 우리가 먼 훗날엔 마치 안락을 누릴 수 있을 것처럼 믿게 만드는 환각효과가 있다. 그리고 기약할 수 없는 미래를 담보로 현실의 고통을 정당화한다. 지금도 경제 위기 하에서 대기업들의 영업이익은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지만, 노동자 서민들은 실업과 구조조정, 실질임금 하락, 복지예산 감축 등으로 삶이 피폐해지고 있다. 고생하는 사람과 안락을 누리는 사람은 서로 일치되지 않는다. 서울시가 이야기하는 재개발 담론은 집을 빼앗기는 사람과 그럼으로써 이익을 얻는 자를 만드는 구조를 은폐한다는 점에서 대통령의 연설과 닮았다.
장례를 치른 이후 건설자본과 서울시는 그 동안 중단된 용산 재개발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보수 언론에서는 철거민들의 보상 문제로 몰아가지만, 용산이 제기하는 것은 철거 당사자나 보상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용산참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답게 산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묻는 것과 같다. 우리는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권리들을 보장받고 있는가. “올 부동산투자 이렇게 하세요”(2010.01.01, 머니투데이), “한강변 재개발․재건축 최고 블루칩”(2009.12.31, 해럴드경제) 같은 기사를 보며 돈 벌 궁리를 하는 사람들에게 집은 곧 자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집은 곧 생활이며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하는 보편적인 권리로서 주거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용산참사는 보상금을 둘러싼 철거민들만의 문제로 남고, 집은 사는(Buy) 것이 된다. 보상금이 합의 된 지금, 정부와 개발사들은 용산 문제가 완전히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용산범대위는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했다. 장례를 치렀어도 용산참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인들은 이제 없지만, 자본을 위한 재개발은 없어지지 않았다. 2010년에도 멈추지 않을 살인 재개발에 맞서, 끝나지 않은 용산참사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알려 나가자!!



Posted by 행진

2010/01/15 01:14 2010/01/15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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