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_이슈&입장1] 스포츠는 정치적이다

 

스포츠는 정치적이다

(‘스포츠 행사에 경례를!’과 ‘재벌들은 체육 연맹을 좋아해’는
각각 한겨레 21 761호와 793호 기사를 일부 인용했습니다.)



벤쿠버 동계 올림픽이 17일 간의 일정을 마치고 3월 1일 폐막했다. 인생 역경을 이겨낸 선수들의 메달 소식은 고단한 서민들의 삶에 잠시나마 활력을 불어넣었고, 많은 사람들은 그/녀들의 결과에 대해 메달 여부에 관계없이 축하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두고 한국인들의 시민의식이 높아져서 결과만을 중시하지 않게 된 거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예상외 선전을 거둔 이번 올림픽이었기에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평가가 관대해 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번의 일본처럼 한국 대표팀이 역대 최악의 성적을 내놓았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할지는 앞으로 두고 볼 일이나, 결과나 평가가 어떻든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스포츠는 단순한 오락거리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정치 등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적인 맥락과 구체적인 상황, 주체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이 권력의 정체를 개념적으로 명료하게 규정짓기는 물론 어렵다. 다만 지난 시간 속에서 스포츠 행사들이 누구에 의해 ‘사용’되고 어떤 효과를 낳았는지, 현재의 모습은 어떤지 살펴보는 것은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다양한 요소를 정치화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스포츠와 통치, 자본의 전략과 우리의 삶은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스포츠행사에 경례를!


인기 있는 국제 스포츠 경기는 선수 개인들 간의 기량을 겨루는 것으로 인식되기 보다는 흔히 국가 간, 민족 간의 대결로 이해된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은 평소 스포츠에 관심이 없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종목의 경기가 아니더라도, 다른 나라와의 큰 경기가 있을 때면 마치 기다린 것처럼 경기를 관람하고 자국 선수들을 응원한다. 전 국민이 같은 경험을 공유하게 되는 과정에서 사회적 통합력은 증진되기 마련인데, 이처럼 스포츠 행사가 갖는 위대한 힘을 독재자들은 일찍이 인식하고 있었다.

지구촌이 4년마다 들썩이는 월드컵에는 아픈 과거가 있다. 1934년 제2회 월드컵은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의 야심으로 이탈리아가 유치했다. 남미 국가들은 독재정권에 대한 항의 표시로 2진급 선수들을 내보냈다. 이 바람에 8강에는 모두 유럽 팀들이 올랐다. 결승전에서 파시스트식 경례가 선보일 정도로 정치색이 짙은 대회였다. 이탈리아는 결승전에서 “우승하지 못하면 모두 사형”이라는 무솔리니의 협박 속에 체코를 2-1로 꺾고 정상에 올랐다. 체코의 골키퍼 안타 자보는 “졌지만 우리 11명은 살았다”는 말로 당시의 살벌한 분위기를 전하기도 했다. 체코는 이 대회 준결승에서 독일을 3-1로 꺾었는데, 아돌프 히틀러는 체코한테 지고 귀국한 독일 선수들을 모조리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무솔리니를 따라서 2년 뒤 베를린 올림픽을 개최했다.





1930년대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스포츠를 통한 통치 기법은 1970~80년대 남미와 아시아 독재자들에게는 하나의 지침서가 됐다. 아르헨티나의 독재자 호르헤 비델라가 유치한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이 대표적이다. 당시 월드컵에 참가하려던 각 나라는 아르헨티나 정세가 너무 혼란스럽자 개최지 변경을 요구했다. 네덜란드의 축구 영웅 요한 크루이프는 비델라 정권을 공개 비판하면서 불참했다. 비델라 정권은 민심을 사로잡을 승리를 따내기 위해 편파 판정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강호 헝가리와 맞붙은 조별 리그에서 상대 선수 2명을 퇴장시키면서 2-1로 억지로 이겼다. 2차 조별 리그는 조 편성을 일방적으로 했다. 전 대회 우승팀 서독과 준 우승팀 네덜란드를 한쪽으로 몰아버린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페루를 6-0으로 대파하는 바람에 브라질을 골득실 차로 제치고 결승에 올랐다. 비델라 대통령이 페루와의 경기 전 페루의 부채 5천만 달러를 탕감해주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지기도 했다. 아르헨티나는 결국 결승에서 요한 크루이프가 빠진 네덜란드를 3-1로 꺾고 기어이 우승을 차지했다. 권력자의 의도에 따라 스포츠를 통치의 기제로 활용한 사례는 한국에도 있다. 전두환 정권은 1981년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고 1982년 프로야구를 탄생시켜 국민들의 눈과 귀를 스포츠에 쏠리게 했다. 아시다시피, 프로야구는 대표적인 3S(스포츠·스크린·섹스) 정책 중 하나다.

이처럼 정치가 불안정한 나라일수록 독재자가 스포츠를 내세워 국민적 화합을 꾀하고 자신에 대한 지지를 높이는 수단으로 활용해 왔다. 이는 한국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렇다면 형식적인 민주화가 이루어진 지금의 조건에서 스포츠는 드디어 ‘순수한’ 것이 되었을까?



재벌들은 체육 연맹을 좋아해


한국의 재벌들은 오래 전부터 체육계에 관심이 많았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은 서울올림픽 유치의 일등공신으로 알려져 있고, 1982년부터 2년간 대한체육회 회장을 지냈다. 이명박 대통령도 현대건설 사장 재직 시절 대한수영연맹 회장(1981∼92)을 지낸 바 있고, ‘양궁의 대부’로 불리는 정몽구 회장은 네 번이나 대한양궁협회장을 맡았다. 지금은 아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 대한양궁협회를 이끌고 있다. 월드컵 유치 당시에는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의 지시로 현대중공업 인사들이 별도의 팀을 만들어 월드컵 유치전에 뛰어들기도 했다. 대한축구협회 사무총장을 지낸 고 남광우씨와 김동대씨 등이 대표적인 현대중공업 출신 인사다.

대한체육회 임원진을 보면, 박용성 회장 아래 이건희 전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대한핸드볼협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대한탁구협회장),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대한레슬링협회장) 등이 이사진으로 포진해 있다. 박용성·최태원·조양호 회장 모두 IOC 위원을 노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정희준 교수는 “현재 체육회 이사회 명단을 보면 마치 전경련을 그대로 가져다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라며 “고 정주영 전 회장과 정몽준 회장이 올림픽과 월드컵이라는 메가 이벤트를 유치하면서 국가에 기여했다는 점을 앞세워 대권에 도전했거나 앞으로 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얼마 전에 있었던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사면에 대해 이명박 정부는 ‘경제인 이건희’보다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이건희’에 대한 사면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비리 경제인들은 사면 대상에서 빼고 오직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를 위해 이 전 회장에 대해서만 단독으로 특별사면을 단행했다는 얘기다. 삼성은 ‘꿈의 자리’라는 IOC 위원에 이건희 전 회장의 이름을 올리기 위해 1990년대 초부터 집요하게 작업해왔다. 1996년 이 전 회장이 대한레슬링협회장을 발판으로 IOC 위원으로 선정되자마자 이듬해 올림픽 공식 파트너(스폰서)로 참여했다. 체육계에서는 삼성전자 이재용 부사장이 이 전 회장에 이어 스포츠 외교 쪽에서 상당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스포츠평론가 정윤수씨는 “이재용씨 개인은 야구를 좋아하는데, 그룹 참모들이 ‘야구는 글로벌 스포츠가 아니라서 활동하는 데 제약이 따르므로 축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서 대한축구협회장 자리까지 염두고 두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축구협회장이 되면 이 자격을 발판으로 아버지에 이어 IOC 위원을 노릴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건희 전 회장은 2004년 아테네올림픽 때 이재용 부사장을 자크 로게 IOC 위원장 등 국제 스포츠계 주요 인사들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정리해보면, 재벌들은 체육계에 발을 걸치며 자신들의 정치력 확장을 꾀하는 듯하다. 정몽준처럼 정치권에 직접 뛰어들어 실력발휘를 하는 경우도 있고, 이건희처럼 삼성이 구설수에 오르거나 자신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스포츠를 활용하기도 한다. 특히 이건희 사면 사태에서 보듯 스포츠는 때로 국가의 운영과 사법 질서에 영향을 미친다. 위법을 자행하며 부를 축적하는 것쯤은 국가적 대업을 위해 쿨하게 면죄되는 것이다. 체육회 임원진들의 명단이 재벌 회장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 역시 주목해서 봐야할 부분이다. 이는 재벌들 개인의 취향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한국에서 체육이 이루어지는 방식 자체가 자본과 밀접한 연관을 맺을 수밖에 없음을 나타낸다. 만약 지금과 같은 조건이 혁신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스포츠에 대한 대중적 열망은 여러 장치들을 통해 마지막엔 자본의 권력 증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정치적 스포츠와 소외된 ‘정치’


생산과 소비가 세계화 된 이후 자본들에게 마케팅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지구촌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국제적인 스포츠 행사는 세계로의 확장을 시도하는 기업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홍보 수단이다. 기업들은 월드컵, 올림픽에 공식 파트너 이름을 올리는 대가로 천문학적인 액수를 지불하고 ‘글로벌’한 이미지를 구매한다.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모여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가리는 것보다 더 글로벌하고 경쟁력 있는 느낌을 주는 행사는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자본들은 초민족적인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민족 자본으로서의 이미지 역시 강화한다. 국내의 스포츠 서포터스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과 관련한 이벤트 상품들, ‘태극전사들을 응원 합니다’ ‘대한의 딸 힘내라’와 같은 구호는, 결국 스포츠를 통해 국내 소비자들과 민족적 동일성을 구축함으로써 세계 시장으로 뻗어나가기 위해 안정적으로 자국의 점유율을 유지하려는 자본의 마케팅 전략이다.

그리고 스포츠 행사를 통해 세계의 주목을 받는 것은 한편으로 가진 것 없고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사람들을 더 가혹한 처지로 내모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군부 정권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가난한 대외 이미지를 쇄신하고자 경기장을 비롯한 서울 곳곳의 노점상, 판자촌 주민들을 몰아냈다. 스포츠가 계기였던 것은 아니지만, 작년에 있었던 용산참사를 정점으로 서울시가 하고 있는 ‘디자인 서울’, ‘한강 르네상스’ 역시 마찬가지다. 서울의 저개발 된 지역을 없애고 휘황찬란한 고층 빌딩을 건설한다는 계획은, 평범한 서울 주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련된 서울의 이미지를 통해 외국인 투자자들을 유혹하기 위한 겉치장에 다름 아니었다. 스포츠 행사가 열리면 자연히 개최 도시도 많은 관심을 받게 될 텐데, 조명되는 것은 화려한 겉모습이지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솔직한 모습이 아니다. 물론 이런 행사들을 없애거나 외면하는 방식은 결코 대안이 될 수 없을 테지만, 중요한 것은 ‘국가 브랜드 홍보’, ‘외국인 유치’, ‘국가 품격 상승’ 이란 말들 속에 감춰진 폭력과 소외를 인식하는 것이다.





한편, 스포츠 행사와 스타들에게 비춰지는 스포트라이트를 이용하는 세력과 그로 인해 부차화 되는 정치적인 쟁점들 역시 언제나 존재해 왔다. 이번에 좋은 성적을 거둔 올림픽 선수단이 돌아왔을 때 정치권은 어느 때보다 재빠르게 움직이며 이들의 인기를 정치로 ‘승화’시키려 했다. 선수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선글라스까지 껴가며 김연아를 웃게 한 이명박 대통령의 행동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그는 “점프할 때 눈을 감았다가 떠 보니 성공 했더라”는 말 한 마디로 올림픽 기간에 벌어진 MBC 낙하산 사건에 대한 정치적 부담을 상당히 덜어냈다. 정권의 언론 장악과 선수들과의 오찬은 전혀 별개의 문제고 연관성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민주당 정세균 대표가 이야기한대로 “메달 따면 지지율 오르는” 게 정치와 스포츠의 관계다. 국가와 자본은 민족적 동일성 형성으로 인한 사회 갈등의 은폐, 국민적 인기를 영유함으로써 지지율 높이기, 이미지 전략과 마케팅 등 자신의 필요에 따라 선수들 개인과 노력의 결실 등을 모두 정치화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들의 삶에 있어 소중한 것들,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하고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들은 오히려 정치화되지 못한 채 축소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성황리에 올림픽을 마친 벤쿠버 시가 경비 예산 초과로 결국 복지 예산을 감축했다는 소식이 들려와 어쩐지 씁쓸하다.




스포츠는 더 ‘정치화’되어야 한다


이번 올림픽에서 언론의 가장 많은 조명을 받은 스타는 단연 김연아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금메달 소식과 함께 실리는 다른 기사들이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국가 이미지 0.5% 상승효과, 김연아 금메달 값어치는?」「‘김연아 금메달’, 삼성 현대차 광고 효과 ‘대박’」등 김연아로 인한 국가와 자본의 이득을 분석한 기사를 흔하게 접할 수 있다. 의류․패션 광고 모델로 제격이라는 설문조사 결과도 있고, 국민은행에서 내놓은 ‘연아 적금’ 상품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스포츠 스타에 대한 관심이야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큼이나 스포츠-국가-자본의 연결고리는 우리들 사이에서 이미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됐다.

대부분의 언론에서는 예전 선수들이 ‘민족’이나 ‘국가’에 얽매여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한 것에 비해, 이번의 대표팀은 승패에 연연하지 않으며 유쾌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 ‘새롭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큰 틀에서 바뀐 것은 없다. 스포츠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은 여전히 민족 담론 속에서 국가와 자본의 이해관계가 관철되고 있으니까. 새로운 것은 오히려, 사람들이 이제야 스포츠를 ‘순수하게’ 즐길 줄 알게 되었다고 평가하며 정치와 스포츠를 분리시켜 사고하는 현상이다. 군부독재 시절의 대학생들은 야구를 대놓고 즐길 수 없었다. 스포츠가 정치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야구를 좋아하는 행위가 결과적으로 정권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효과를 낳지 않을까 고민한 것이다. 금메달을 딴 뒤 꼭 눈물을 흘리며 대통령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만 정치와 스포츠가 연관 맺고 있음을 증명하는 게 아니다. 사회 인식이 바뀐 만큼 스포츠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들도 서로 조정되고 변화해 왔다. 이를 인식하지 못한 채 스포츠에서 마침내 정치를 덜어냈다고 성급하게 선언하는 순간, 스포츠가 지배체계 유지에 기여하는 다양한 역할들에 대해선 사고하지 못하게 된다. 

스포츠를 좋아하는가? 앞으로는 이런 쪽으로도 한 번 생각해보자. 내가 보태는 열망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소비되는지를. 인간이 만든 사회에서 스포츠는 다른 것들과 무관한 채 순수하게 남아 있을 수 없다. 스포츠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다양한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 스포츠가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포츠는 지금보다 더 많이 ‘정치화’되어야 한다.


Posted by 행진

2010/03/15 21:24 2010/03/15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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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자본과 산업의 결탁, 가려지는 쟁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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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3일 화요일은 토고와 대한민국 경기가 있던 날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평택 전쟁기지 건설 반대! 촛불 문화제는 진행되었다. 어디서? 월드컵 경기 응원 인파가 광화문을 다 장악할 것이 분명하고 촛불문화제를 진행하기 불가능하다는 판단아래 광화문 열린시민공원 안에 있는 한미 FTA 반대 농성장에서 진행을 하였다. 50여일을 꼬박 채우고 있는 촛불 문화제는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대추리에서 촛불 문화제를 진행하고 있을 주민들을 생각하며 평택 투쟁을 알려가기 위해 쉼이 없었다. 그런데, 붉은 옷을 입은 수십만 명의 사람들로 인해 옮겨간 것이다. 월드컵은 6월이면 끝이 난다. 평택 투쟁도 6월말 계고장이 날아온다. 한미 FTA 협상도 이미 1차 협상을 마무리 했고 2차 협상은 7월 초이다. 6월은 월드컵을 열심히 응원하고 7월부터 투쟁하자고 할 텐가? KTX 여승무원 동지들의 투쟁도, 기륭전자 동지들의 투쟁도 모두 7월부터 생각해보자고 할 것인가?

미디어의 농락- 온통 월드컵 특집 방송


5월 4일 대추초등학교에는 전국의 방송들이 다 모였다. 마치 전쟁 속보라도 올리듯이 긴장이 팽배했다. 그래, 언론이라면 저런 정신이 있어야지 했다. 그러면 월드컵이 시작되고 나서 방송 편성표를 보자. 언론이라는 말이 부끄럽게도 3대 메이저 방송사의 편성표는 “축구”를 빼고는 무엇도 찾아볼 수 없다. 한국전이 펼쳐진 지난달 18·22·25일 메인뉴스 시간의 월드컵 관련 보도 비율이 SBS 100%, MBC 96%, KBS 94%에 이르는 등 월드컵 기간 내내 TV뉴스가 파행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국민들의 귀와 눈을 가리는 그 편성표에는 월드컵 뿐, 긴박한 평택도 FTA도 비정규직 노동자도 없었다. 축구가 방송가를 싹쓸이 한 지금, 한미 FTA 협상은 마무리되어 가고 도두리에는 전경들이 상주하고 KTX 노동자들은 100일 투쟁을 축하하였고 투쟁을 열심히 하시던 장애인 동지는 지하철에 투신을 하셔서 돌아가셨다. 토고전이 있던 그날 밤, 같은 시각, KBS 1TV에서는 평택 미군기지확장에 관한 국방부와 범대위의 대 토론회가 있었다. 계속 토론회를 거부하던 국방부가 잡은 그 시간. 이렇게 중요한 논의를 과연 몇 명의 사람들이 보고 있을지 우려를 표한다는 사회자의 말에 적극 공감하며 미디어와 국가가 월드컵으로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국민을 농락한다는 생각을 씻을 수 없었다. 이날의 대 토론회야 말로 월드컵 방송국인 3개 메이저 방송사의 특별!특집!방송이어야 했었다. 언론이 왜 존재하는가? 우리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방송사들은 국민이 한국사회의 쟁점들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국민의 눈과 귀가 되는 공공적 역할을 담보해야한다. 또한 문화를 선도하고 형성하는 일 주체로서 언론은 존재한다. 그 중에 여론을 형성하는 몫은 가장 큰 책임이라 할 수 있겠다. 지금의 언론은 자신들이 선도적으로 한국 사회 다양한 쟁점들을 덮어버리고 있다. 언론이 축구에 올인하는 동안, 스스로의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동안, 오프사이드는 알아도 세이프가드는 몰라도 되는 것처럼, 다음 국가대표 감독이 누가 되는지는 빠삭해도 평택은 내일 모레 퇴거명령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은 몰라도 되는 것처럼 한국사회 또한 축구 광풍이 불고 있다.

자본-국가-월드컵 / 언니 좋고 형부 좋고 나도 좋은 삼각관계


올해 들어 힘들어하는 활동가들을 많이 보았다. 몸을 손오공처럼 여러 개로 나누어 투쟁했으면 좋겠다고 상상도 해보곤 했다. 어느 한 해 그렇지 않은 해가 없었지만 한미 FTA투쟁, 평택 전쟁기지 건설저지투쟁, 비정규직투쟁, 교육투쟁에 그야말로 숨돌릴 틈 없이 민중들은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다. 물론 민중들은 강고하게 투쟁하고 있다. 어느 하나 정세적으로, 역사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투쟁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저항의 움직임을 살짝 잠재우고 대한민국에 사는 민중들의 공감과 저항의 세력화를 막기 위해선 월드컵만큼 좋은 게 없다. 기업들은 덩달아 신이 났다. 2002년의 자발적인 붉은 악마들의 거대한 움직임을 보고 돈이 된다는 판단아래 광고부터 시작하여 급기야 서울시청 앞 광장을 사기까지 하지 않는가. 하나가 되자며 응원을 독려하는 것은 기본이다. 기업들이 월드컵을 위해서, 국위 선양을 위해서 봉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벤트로는 개인정보가 새나가고 있는 것이며, 그들의 상품 광고를 억지로라도 한 번 더 보게 만든다. 2002년에는 무료로도 배포하고 싼값에 살 수 있었던 티셔츠는 이제 전 의류기업들에서 독점을 행하고 있다. 월드컵 특수! 자발적으로 기업의 이윤을 올려주니, 기업들은 정말 이 같은 호재가 없다. 여기에 더불어 제3세계 어린이들의 노동문제는 2002년에도 제기되어왔지만 여전히 달라진 것이 없다. 월드컵 공식 축구공을 만들기 위해 실명하는 파키스탄의 어린 노동자나, 몇 억에 판매되는 베컴의 축구화를 푼돈을 받고 만드는 동남아의 어린 노동자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민족-국가주의와 축구경기. 이 두 가지를 이용하여 자본은 돈을 벌고 정부는 불만을 무화시키고 언론은 그 가운데서 어색하지 않게 당연히 응원의 인파로 흘러가도록 중간다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지금의 월드컵을 결코 유쾌하게 즐기기만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월드컵은 부메랑이다


우리 2002년을 잊지 말자. 월드컵 뉴스 속에 방송도 되지 못하고 인터넷 뉴스 한 끄트머리에 겨우 간략하게만 나왔던 효순이, 미선이의 죽음. 그 때 얼마나 투쟁하기 힘들었던가. 언론의 외면을 받았지만 투쟁으로 조금씩 조금씩 일어나며 촛불을 켜드는 그 동안, 거리에는 월드컵 승리 기쁨의 인파들이 쏟아져 나왔었다. 월드컵이 끝나고 한참 지나고서야 그 투쟁은 간신히 살아나게 되었다. 시기를 놓친 투쟁에 대한 방기는 2006년 칼이 되어 우리 목전을 겨누고 있다. 바로 한미FTA와 평택 전쟁기지 건설, 그리고 비정규직 문제이다. 지금 이 투쟁 또한 힘을 잃을 때, 2010년 월드컵 응원의 붉은 함성은 민중들의 절규로 붉은 티셔츠는 민중들의 피로 물들지 그 누가 알겠는가.

신호등 신호에 따라서만 다니던 길을 자유롭게 다니고 모르는 사람과 하나가 되어 흥분하는 즐거움! ‘우리나라’가 이기기라도 하면 더 기쁘다. 내 힘든 삶도 잊을 수 있고 오랜만에 ‘쾌감, 해방감’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의 모순을 해결할 수 없기에, 현실을 잊기 위해 스포츠와 축제에 열광하도록 조작당하고 있는 거라면, 우리의 일시적인 쾌감은 분노를 담은 것인지도 모른다. 거짓된 해방감을 인식하고 투쟁으로 진정한 해방을 쟁취할 수 있도록 칼끝을 벼려야 할 때인 것이다. 자본과 정권이 조장하는 월드컵 열기에 휩쓸려가는 사이, 누구에게 저항하자고 하고 연대투쟁하자 말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하나씩 둘씩 고립되어 잊혀지고 쓰러지는, 투쟁하는 민중들을 더 이상 잃을 수 없다. 해방 세상을 향해 민중으로서 이 세계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청년학생들이라면, 지금의 월드컵 세상을 그대로 즐기기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자본과 정권이 적극 이용하는 월드컵, 이용되는 것은 부메랑이 되어 월드컵을 넘어선다. 축구국가대표의 경기 승리, 그리고 패배 이후 국가주의의 기억과 텅 빈 거리를 남길 것인가, 아니면 민중들의 승리로 해방의 거리를 다시 한 번 만들 것인가. 지금이 바로, 정세를 열어젖히는 선도적이고 헌신적인 투쟁을 시작할 때이다.

Posted by 행진

2006/06/28 06:20 2006/06/28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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