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육]79-80경제위기와 노동자 투쟁

 

0. 들어가며

2009년 5월 현재, 우리는 5월 18일을 앞두고 광주 순례단을 떠나게 됩니다. 29년 전 오월혁명의 그 날을 눈앞에 두고, 다시 한 번 역사적인 사건들을 되돌아보고, 광주에서 싸웠던 사람들의 흔적을 느껴보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선 이런 의미 때문에 올해에도 광주로 발길을 향합니다. 그런데 현재 오월혁명에 무장폭동에서 ‘민주화 운동’으로 ‘공식적인’ 지위가 승격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오월혁명을 기억하고 그 흔적을 느끼고 있습니다. 대통령 후보자나 당선자가 묘역에 방문하여 “나는 1980년 광주를 기억하고 있다.”라고 알리는 것은 하나의 통과의례처럼 되었습니다. 이런 추모의례를 통해서 지배계급들은 과거의 아픔을 잊고 상생의 길로 나아가자, 분란을 없애고 경제를 살리는데 온 힘을 모아달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단지 오월혁명을 기념하거나 의례화하는 것을 넘어, 어떤 의미를 가지고 광주를 기억해야 하는 것일까요? 오월혁명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그 정신을 계승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을 구하는 것이 우리가 2009년 광주를 가면서 얻어야할 것입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 지금까지의 민주화 성과들마저 후퇴시키는, 각종 반동적인 행태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촛불집회에 대한 탄압과 용산참사, 그리고 ‘MB 악법’이라고 불리는 각종 악법 제정에서 보여 지듯이, 그들에게 남은 것은 폭력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反 MB 정서가 대중적으로 깊숙하게 퍼져 있는 상황에서 정권의 반동적인 모습들에 초점을 맞춰, ‘민주주의 쟁취’라는 구호가 공공연하게 등장하고, 현재의 상황을 이전의 군부독재정권과 유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80년대와 같은 광범위한 사회운동이 펼쳐져, 비민주적이고 폭력적인 정권의 행동을 막아내고자 하는 열망이 존재합니다. 광범위한 사회운동의 매개체였던 오월혁명을 돌아보는 것은 이런 것을 살펴봄으로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오월혁명을 통해 보고자 하는 또 하나의 정세는 79-80년 경제위기입니다. 사실 70년대에 박정희 정권이 60년대와 비교하여 유신체제ㆍ9차례에 걸친 긴급조치와 같은 비정상적인 수단을 쓴 것은, ‘독점강화ㆍ종속심화’라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던 중화학 공업화 정책, 그리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통치성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후 70년대 말부터 시작된 경제위기는 경제성장 그 자체에 내포되어 있었고, 광범위한 민심이반과 맞물려 정권의 몰락까지 이어집니다. 당시의 경제위기와 분출하던 대중운동에 대한 대응으로 ‘신보수주의적 정책’이 쓰이고, 군부독재정권이 창출됩니다. 이것이 오월혁명이 일어나게 되는 정세였고, 그것은 다시 80년대의 광범위한 대중운동과 그 이념을 만드는 촉매제가 됩니다.

오월혁명을 보며 교훈을 추출하는 것은 단순히 ‘현재에는 없는 어떤 것’을 확인하고 감탄한다거나, ‘망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함만은 아닙니다. ‘오월혁명정신계승’을 외치며 약 30년 전 당시의 경제성장ㆍ위기와 정권에 대한 다양한 불만들이 각자 소진하지 않고, 광범위한 하나의 흐름으로 만들질 수 있었던 그 과정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제시하면 계속 싸워나갔던 주체가 형성되었고, 대중들을 움직일 수 있었던 이념이 만들어진 과정입니다. 물론 경제위기의 성격을 제대로 분석하는 것은 과정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전제입니다. 아래의 글을 통해 79-80년 경제위기와 노동자-민중의 투쟁을 살펴보며, 오월혁명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논의해봅시다.

 

1. 70년대 한국의 중화학 공업화

한국은 對 사회주의권에 대한 자본주의의 최전선 방어지역으로서, 자본주의 세계체계에 밀접하게 포섭될 필요가 있는 지역이었다. 이에 따라 1960년대부터 외국에서 제공되는 차관으로 강력한 발전주의 정책을 추진한 한국은, 세계 자본주의에 대한 종속이 심해지고 독점자본이 성장해갔다. 외자는 수입 대체적 중화학공업화에 투자되어 한국에서 경제성장을 가져왔지만, 노동력을 제외한 모든 생산요소를 초민족적 기업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한국에서는, 원리금 상환을 위한 외한을 얻기 위해 수출을 우선적으로(무조건)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1달러의 수출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평균 1.5달러의 비용이 들어가는 출혈 수출이 이루어졌고, 1960년대 말에 이르면 내적 모순이 심화되고 경제위기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특히 수입대체 중화학부문에서 위기가 발생하는데 차관도입을 둘러싼 무분별한 자본 경쟁으로 인해 과잉생산의 현상을 보이고, 55개사가 은행관리로 넘어가고 10개사가 상환을 이행하지 못하는 대불사태에 빠진다.

60년대 말의 위기에 대응하여 지배계급은 국가에 의한 개입을 강화한다. 60년대 말 부실기업 정리와 국가기업의 민영화를 통해 기업의 합병ㆍ인수를 추진하여 자본의 집중을 이루었고, 수입대체공업화를 넘어 수출지향적인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게 된다. 국가는 독점자본과 적극적이고 체계적으로 결합하였으며, 경제에 대한 폭력적인 개입을 행했다. 우선 70년대 ‘관치금융’이라는 말이 널리 퍼졌듯이 금리와 세제상에서 독점자본은 광범위한 혜택을 받게 된다. 이는 1972년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8.3조치)으로 대표되는데, 주요 내용은 기업사채의 동결과 금리의 대폭적인 인하, 특별금융채권의 발행에 의한 저리대환 및 저금리의 산업합리화자금의 공급이었다. 당시 사채사용량의 60%이상을 점했던 600여개 대기업은 엄청난 특혜를 얻었고, 산업합리화자금은 72-73년 448억 원에 달했다. 이외에도 세제면에서도 특혜가 주어졌는데 이런 식으로 기업이 제공받게 되는 금융특혜는 연간 약 1028억 원에 달했다. 이렇듯 국가는 산업합리화라는 이름으로 자본의 가치파괴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함으로서, 독점자본의 위기를 해소하고 축적을 지속하게 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독점자본은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당시 한국을 둘러싸고 벌어진 내외 정세의 변화가 맞물려 있었다. 69년 닉슨 독트린과 데땅뜨적 분위기에서 냉전체제가 와해되어 가고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가 감소하게 된다. 이에 한국에서는 자주국방과 군수산업 육성이 추진되었는데, 이는 중화학공업화의 중요한 추진 동기가 되었다. 한편 70년대 중심부의 초민족적 자본은 미국을 중심으로 노동생산성 하락과 유가인상에 대응하여 해외로 생산거점을 이동하려 했고, 70년대 이후 스태그플레이션(실업률과 물가의 동시 상승)으로 생산의 고도화를 꾀하고 있었다. 이에 동아시아의 네 마리 용(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이라고 불리는 신흥공업국(NICs)에서 중화학공업부문의 노동집약적 공정을 담당하게 되고, 거기에서 생산된 부품과 반제품을 미국 본국으로 재수출하는 전략이 나타났다. 박정희 정권은 1973년 8월 ‘중화학공업화계획’을 발표해 이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였고, ‘중동 건설’호황을 계기로 기계ㆍ전자ㆍ철강ㆍ비철금속ㆍ석유화학ㆍ조선 등 6개 부문을 전략 산업으로 육성한다. 또한 국민투자기금 전체의 약 68%를 중화학공업부문에 할당했으며, 73~80년 사이 제조업에 대한 산업은행 대출의 약 80%가 중화학공업부문에 투자된다. 이외에도 각종 세제혜택과 ‘수출자유지역’을 설치하여 직접투자를 활성화하려 하였다. 이렇듯 1970년대의 중화학 공업화는 국가지원으로 독점이 성장하는 동시에, 초민족적 자본의 이해에 따라 국제분업체계에 깊숙이 편입해 들어감으로서 종속이 심해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종속은 1960년대에 이어 출혈수출을 강요받는 메커니즘으로 자리 잡는다. 중화학 공업의 생산수단을 도입하기 위해 화폐자본의 수입을 강제받고, 이 과정에서 대외채무의 상환 부담이 더욱 커진다. 이는 대외채무를 갚기 위해 수출을 증가할수록, 역으로 무역수지 적자가 구조화되는 악순환을 초래하고, 금융적ㆍ기술적ㆍ시장적 종속은 더욱 커져간다. 한편 생산수단의 고도화에 따라 70년대 중반부터 기술도입이 급속도로 증가하는데, 이는 원자재에 대한 해외의존과 기술지대를 중심으로 잉여가치의 해외유출을 가속화시키는 것이었다. 한국의 자본은 독점가격 설정과 중동건설 붐으로 들어오는 외회유출, 그리고 노동자ㆍ민중에 대한 수탈체계를 통해 구조적 불안정성이 지속되었다. 그것은 중화학공업화에 따른 자본의 유기적 구성 상승과 이를 이윤량 증대로 극복하려는 자본의 시도와 맞물려, 중화학 공업에 대한 과잉중복투자가 계속되고, 경공업과의 비례관계가 끊기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물가와 실업률의 동시 상승이라는 스태그플레이션 정세가 70년대 계속되었고, 유가 인상은 구조적인 위기를 더 한층 부추겼다. 점차 대외의존도를 높여나갔던 한국에서는 이것이 직접적인 타격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었고, 79년 초유의 경기 위축이 나타나게 되었다. 정부의 중점 육성 사업들에서 가동률이 저하하고, 적자에 빠져들게 되는데, 이에 따라 해외자본의 차입을 갚기 위해 막대한 금융비용이 요구되었다.

 

2. 군부독재정권과 민심이반

1970년대에 국가는 금융적ㆍ세제적 특혜와 각종 정책을 통해 독점자본이 형성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말했다. 국가가 독점자본의 형성에 개입하는 또 다른 방식은 노동자ㆍ민중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여, 발전주의적 성장에 내포되어 있는 모순이 제반의 사회운동과 만나는 것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1972년 10월에 선포된 유신헌법은 노동운동을 비롯한 제반 민중운동에 대한 독점자본가 계급의 억압을 강화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이는 무엇보다 노동에 대한 국가의 통제 강화로 특징지어지는데, 70년 ‘외국인 투자기업의 노동조합 및 노동쟁의 조정에 관한 임시특례법’이 제정되고, 71년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으로 단초를 마련하였다. 이후 대통령의 권한으로 “헌법상의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인 긴급조치가 9차례에 걸쳐 행해졌고, 사회 전체에 대해 준전시상황을 조성하였다.

한국경제는 1970~79년의 10년간에 걸쳐서 연평균 9.4%라는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여, 1960년대의 8.5% 성장률보다 더욱 높은 수치를 나타냈지만, 오히려 민심이반은 가속화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급속한 자본축적과정에서 노동자와 농민이 강요받았던 희생은 1970년대에도 나아질지 몰랐고, 급속도로 양산된 도시빈민들의 정치적 진출이 철저히 억압당했다. 노동자들의 수는 양적으로 크게성장하였는데, 전체 취업자 중 임금노동자의 비율은 1960년 21.8%에서 1980년에는 43.0%로 크게 증가하였다. 중화학 공업의 성장에 따라 1970년대 말에 이르면, 전체 공장노동자의 약 75%가 중화학공업에 종사하였다. 출혈수출을 감내하기 위한 자본의 전략은 폭력적인 노동통제에 기반하여 저임금ㆍ장시간 노동을 계속 감내하게 하는데, 포드주의적 작업방식의 일반화를 통해서 노동에 대한 착취를 증대시키고, 병영적 노동통제를 강화한다. 1970 ~ 81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노동생산성 증가율은 11.1%에 달하지만 실질임금 상승률은 7.8%에 불과해, 가족구성원 모두가 일하지 않고서는 생계를 보조받지 못했다. 그리고 노동자의 주당 평균노동시간은 52.9시간에 달해 절대적인 착취를 당하고 있었다. 이 시기 농민들에 대해서도 60년대 저임금을 위한 저곡가체제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농촌 새마을운동을 통해 유신체제가 정당성을 획득하고, 독점자본이 농업에 침투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후 정권의 주된 농업정책은 농산물 수입개방정책으로 전환된다.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전략 변화와 그에 연동한 한국 자본주의의 자태변환 속에서, 국가는 독점자본의 형성을 지원하기 위해 ‘비정상적’인 통치 행태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경제성장에 따라 민중들의 생활조건이 나아지고 있었을지라도, 여전히 출혈적인 착취방식과 이를 위한 통제는 민중들의 불만을 자극하였다. 곳곳에서 민심이반의 징후들이 나타났고, 점점이 켜진 불만의 목소리들은 이후 한국 사회운동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3. 한국 사회운동의 이념과 양상

1970년대 이후 정권에 대한 민심이반이 광범위하게 나타나면서 다양한 사회운동들이 진출하기 시작한다. 1960년대에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1964년 6.3 투쟁이 조직된 이후,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정권의 3선 개헌 반대 투쟁, 부정시위 반대 투쟁이 조직되었다. 하지만 주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이념에 기반을 둔 학생운동은, 이를 넘어서 자본주의 체계와 노동자ㆍ민중에 대한 착취에 대한 인식을 갖지 못했다. 대중적인 투쟁은 거의 만들어지지 못했고, 학생운동은 써클 형태의 조직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신민당 등 자유주의의 색채를 띤 야당은, 공화당을 매국정당이라고 비판하며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간다. 자유주의자들이 정권에 대한 대안으로 인식되었고, 사상계를 펴낸 장준하, 신민당의 정치인인 김대중‧김영삼, 각종 재야인사들이 혁신적인 인물로 떠오른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의 공간을 열어낸 또 다른 운동의 흐름은 노동자운동이었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재단사인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고 외치며 산화한 이후에, 발전주의적 성장 아래에서 고통 받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전면에 떠오르게 되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1971년에는 파업건수가 전년도에 비해 10배정도 늘어난 1656건을 기록했으며, ‘민중생존권’의 기치를 내걸은 투쟁들이 나타난다.

○ 노동자 민중의 투쟁

1970년대 독점자본을 지원하기 위한 국가의 개입은 노동자ㆍ민중의 권리를 삭감함으로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고, 위에서 보는 것과 같이 각종 악법을 통해 노동자의 단결권과 쟁의활동을 부정하였다. 유신헌법 제 29조에서는 노동 3권을 법률로써 유보시킬 수 있게 했고, 1973년 3월에는 노동관계법을 전면 개정한다. 한편 ‘노사협조주의’를 유포시키며 회사와 노동자들이 공동운명체임을 강조하였고, 유신이 선포된 이후 한국노총은 유신체제 지지를 유도하는 전국 유세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자본과 정권의 노동자들에 대한 공격, 그리고 저임금 및 극한적인 노동조건에 맞서 1970년대 초반에는 산발적인 투쟁이 나타났다. 특히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소규모ㆍ영세사업장을 중심으로 분신사건이 잇따라 일어나는데, 1971년 서울 한국회관 김차오 분신자살 기도, 1973년 서울 조일철강 최재형 자살 기도 사건, 1974년 대구 신철공업사 정세달 자살 사건 등이다. 이런 투쟁은 노동자들의 상태를 사회적으로 알려가는데는 유용했지만, 지속적으로 조직된 힘을 발휘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후 노동운동은 주로 자주적인 민주노동조합을 만들려는 민주노조운동으로, 신흥 민주노조를 결성하는 것과 어용노조를 민주화하는 것이 투쟁의 방향이 되었다. 1972년 5월에는 인천에 있는 동일방직에서 최초의 여성지부장 탄생과 함께 기존의 어용 노조가 민주노조로 바뀌게 되었고, 8월에는 서울의 한국모방(원풍모방) 지부가, 1973년에는 콘트롤데이타지부가, 1974년에는 반도상사 지부가, 1975년에는 YH무역 지부가 신규 민주노조로 속속 결성되었다. 1976년 남성노동자들이 민주노조를 부수려고 할 때 여성노동자들이 농성과 단식투쟁으로 맞선 것은, 주로 경공업과 중소기업 여성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벌어진 1970년대의 민주노조운동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당시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노동공동체’들은 민주노조운동을 위한 조직과 학습을 위한 기본단위로 활용되었고, 투쟁의 성과로 2500개의 노조가 만들어졌다.

이런 투쟁은 생존권을 넘어 정권 및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나아갔고, 당시 성장하고 있던 종교단체나 학생운동과의 연계도 점차 강화되고 있었다. 야학모임에서 성장한 소규모의 정치모임들이 만들어지며, 이후의 운동을 선동하고 학습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1970년대 이후 학생운동에서 노동현장으로 들어가는 활동방식이 일반화되었다. 이런 양상은 농님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1972년 가톨릭농민회가 만들어지며 농민운동이 활성화되었고, 농민운동 활동가를 만들어내는 단체들도 활동하였다. 1976~78년 함평 고구마피해 보상투쟁은 가장 대표적인 농민운동으로, 관료적인 농민지배에 대응한 준법투쟁과 피해보상투쟁이 주된 내용이었다.

 

○ 학생운동

학생운동은 국가의 병영적 대학 통제에 반대하는 1971년의 교련철폐투쟁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런 투쟁이 각 대학으로 번져나가자 정권은 군인들을 학교에 진주시키고, 이후 파쇼정권에 대해 반대하는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의 투쟁을 긴급조치 등을 발동하며 탄압하였다. 1974년에는 개별 대학의 투쟁을 지양하고 전국적 투쟁조직인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을 조직했고, 다른 부문의 운동들과 연관을 맺었다. 학생운동의 성격을 민중적ㆍ민족적ㆍ민주적 운동으로 규정하며 선도적인 투쟁을 벌인 민청학련은, 이후 정권의 탄압을 받아 1000여명이 검거되고 일부에게는 사형과 무기징역까지 퍼져나갔다. 공안은 민청학련의 배후에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가 있다고 지목되었고, 이후 23명을 구속하고 8명에 대한 사형을 언도하였다. 1978년 6월에는 선도적인 광화문 도심시위를 벌이기도 하지만, 당시의 학생운동은 공안탄압 속에서 비공개 이념 써클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학생운동은 민중운동과 결합하기 시작하며 현장 진출이 본격화되었고, 사회 구조에 대한 이론을 학습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이론은 사회전반의 구조적 변혁을 선도할만한 수준이 되지는 못하였으며, 아직 낭만적인 수준에 머물렀다고 평가할 수 있다.

 

○ 재야 및 종교ㆍ지식인의 활동

한국에서 ‘재야’라고 불리는 세력들의 운동은 반유신ㆍ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중심으로 발전해간다. 1973년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은 유신체제 비판에 대한 대중적인 지지를 모을 수 있었고, 이후 긴급조치 1호가 발동하여 탄압을 받게 된다. 이후 1974년 11월에는 ‘민주회복 국민회의’가 만들어졌고, 1976년에는 박정희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3ㆍ1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저명한 야당의 정치인이나 종교계 인사가 중심이 되어 유신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고, 성명을 발표하는 것은 당시 재야운동의 특징이었다. 194년 동아일보와 한국일보에서 노조가 결성된 이후 언론노조운동이 나타나고, 1975년 3월 ‘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만들기도 했다. 종교계와 지식인들도 크게 이 흐름에 포괄될 수 있는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나 재임용에서 탈락한 교수들이 만든 ‘해직교수협의회’의 활동이 대표적이다.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소위 ‘중간계층’의 운동은 형식적 민주주의조차 지키지 않는 정권에 대한 반대투쟁의 성격을 띠었고, 1970년대의 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이 되었다. 이런 상황은 폭발적인 대중운동이 벌어진 1980년대에도 계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투쟁 역시 1970년대에 중요한 흐름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사후적으로 보았을 때 이들이 대중운동의 실질적인 표상으로 자리 잡으며, 87년 이후의 계급투쟁 지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1970년대는 각 부문에서의 투쟁을 통해 운동주체들이 형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운동을 하나의 흐름으로 만들 수 있는 이념과 계기가 마련되는데에는 미달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노골적인 착취가 점점 더 가시화되고 정권의 독재정권의 통치형태가 문제가 되며, ‘민주화’가 모든 운동의 과제로 떠오르게 된다. 그러나 민주화라는 요구가 단지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과정으로 환원될 수 없다면, 이 요구를 통해서 한국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디이며, 어떤 방식으로 계승해나갈 것인지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의 그것은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여지고, 다양한 운동 간에 연대의 시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4. 79-80년 경제위기와 사회운동들의 만남

70년대 말은 경제위기와 정치위기가 동시에 심화되는 시간이었다. 세계 자본주의에 대한 종속을 토대로 독점화가 강화되고 있던 당시의 한국경제는, 출혈적 수출구조로 인해서 중복투자에 따른 과잉자본이 누적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적으로 이자율/달러가치/유가가 오르는 ‘3高’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고, 외채 누적에 따라 ‘외채 위기’가 폭발하게 된다. 이에 따라 70년대 내내 20~30%의 증가율을 보이던 산업생산지수가 1979년 11.7%로 떨어지고, 80년에는 -1.8%를 기록하게 되었다. 제조업 가동률 지수 역시 두 해에 각 7%와 10% 감소하고, 중화학 공업은 1979년 13% 성장에서 80년에는 -3.9%로 축소된다. 박정희 정권은 79년 4월 기존의 성장정책과는 질이 다른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을 시행하게 된다. 이는 수출 지향적 공업화와 재벌 중심적 중화학 공업화의 괴리에 의해 미시적 산업-무역 구조가 왜곡되어 거시적 불안정을 초래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에 따라 거시적인 경제안정화를 위해 인플레이션을 잡고, 임금삭감 및 구조조정으로 당시의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런 정책은 세계적으로 79년 볼커반혁명을 비롯한 ‘신보수주의적 정책’과 기조를 같이하는 것이었으며, 한국에서는 6대 중화학 공업 이외의 산업들이 축소되기 시작한다. 이는 한국경제에서 경제국면이 바뀌는 것을 의미하였고, 발전주의를 토대로 한 자본성장 전략이 이후 신자유주의적 정책으로 바뀌게 된다.

한편 경제위기가 심화되면서 정권의 통치 역시 극단으로 치달아간다. 1978년 9대 대통령선거는 2578명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가운데 1명의 표만이 무효처리되었고(체육관 선거), 78년 12월에 진행된 10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야당이었던 신민당의 지지율이 공화당의 그것을 앞서게 되었다. 정권에 대한 반대 운동은 다양한 곳에서 터져나오게 되었고, 79년 8월 YH무역 노동자들의 투쟁은 정권의 도덕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게 되었다. 사측의 일방적인 공장폐업에 맞서 회사 정상화를 요구하며 진행된 투쟁은,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시작하여 여론의 초점이 되었다. 이에 대해 정권은 강경대응을 하였고, 8월 11일 새벽에 군사작전을 방불케하는 강제해산에 돌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여공이었던 김경숙이 목숨을 잃게 되었고, 이후 김영삼의 당총재 자격과 의원직을 빼앗았다. 이런 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가두시위가 연이어졌고, 다양한 사회운동이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경제위기와 정치위기가 동시에 진행되는 가운데 각 부문의 사회운동 조류들이 모여서 폭발적인 투쟁을 만들어 낸 사건이 바로 ‘부마항쟁’이었다. 80년 경공업 설비투자는 79년의 절반 수준으로 위축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마산ㆍ창원ㆍ부산 등 남해안 일대를 따라 이어졌던 철강ㆍ군수공업에 대한 구조조정이 나타난다. 당시 부산지역에서는 78년 말에 비해 79년 8월 현재에는 제조업체 평균 노동자 수가 27% 줄었고, 각종 산업에서 임금체불과 어음부터 문제도 더욱 심각하게 실시되었다. 이 지역에서 학생운동은 강력한 투쟁을 만들어 내고 있었고, 79년 10월 15일 학생들의 가두투쟁으로 부마항쟁이 시작되었다. 이런 시위는 경남 지역에서 심화된 경제위기와 맞물려 전 민중적 투쟁으로 발전하였고, 경찰서 등 국가기관에 대한 파괴와 방화로 시위의 양상이 더욱 가격해진다. 부산에서 시작한 투쟁은 이후 마산ㆍ창원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수출자유지역의 노동자들과 합세하게 되었다. 부마항쟁은 10월 20일 위수령을 통해서 진압당했지만, 투쟁의 물결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이에 대한 지배계급 내부분파들의 갈등으로 인해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하게 된다.

79-80년 지속된 경제위기와 정치위기는 70년대 성장했던 운동들이 서로 만나고 폭발적인 힘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민주화에 대한 요구는 다양한 사회운동이 거대한 전선운동을 만들 수 있는 ‘이념’이었고, 오월혁명 역시 정세적 계기를 통한 사회운동들의 접합이라는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지배계급의 대응은 반동적ㆍ폭력적인 통치형태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었다. 12ㆍ12 쿠데타를 통해 다시 전두환을 비롯한 군부세력들은, 국력신장과 북한의 위협 그리고 사회적 혼란 일소를 명분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대중운동의 힘이 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더욱 극단적인 폭력을 채택했고, 80년 민주화에 대한 광범위한 요구가 분출했던 ‘서울의 봄’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한 지역을 대상으로 국가의 무시무시한 힘을 보여주는 전략을 택한다. 5월 17일에 시행된 ‘비상계엄전국확대조치’를 실시한 이후 다음날인 5월 18일에 광주에서 작전이 시작된다. 신군부는 공화당 정치인들마저 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이런 상황을 유리하게 재편하기 위해, 시간이 지날수록 전국적으로 분출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각 계층의 민주화 요구를 한 지역에서 압살시키는 방법을 취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발전주의 시대에 소외된 지역으로서, 그리고 군부의 제거대상이었던 김대중이 근거지로 삼고 있었던 호남 지역이 적격지였다.

 

5. 오월혁명의 위상: 역사를 배우며 추출하는 현재의 과제

광주순례단을 떠나기 전에 우리는 오월혁명을 통해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오월혁명을 만들었던 정세적인 조건과 그 보편적인 결과에 대해 좀 더 과학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70년대 한국 자본주의에 내재한 모순에서 발현되었던 79-80년 경제위기와 정권의 반동적인 재편과정, 이런 정세 속에서 70년대 각 사회운동에서 형성된 주체들의 만남을 오월혁명의 정세로 볼 수 있다. 오월혁명에 대해 다루면서 여전히 지역의 대표적인 정치인이었던 김대중에 대한 정치적인 탄압을 그 원인으로 다루는 경우가 있다. 혹은 영화 ‘화려한 휴가’가 보여주는 것처럼 민중들의 자생적인 투쟁만을 예찬하며, 낭만적으로 오월혁명을 다루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오월혁명이 발생하기 이전의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정치의 공간을 열어내고 이를 영속적인 투쟁으로 만들려고 했던 다양한 사회운동들이 존재했고, 다양한 방식의 개입을 통해서 서로 합력을 창출했던 역사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오월혁명은 운동주체들이 79-80년 경제-정치의 위기에 대해 개입하며, 대중들의 민심이반과 융합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오월혁명은 이후 80년대 운동의 이념을 정초했던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오월혁명은 한국사회에 내재해 있던 다양한 모순이 드러났던 투쟁이었고, 자본주의의 모순과 국가권력의 본질을 드러내었다. 한국의 우방으로 인식되었던 미국이 신군부의 등장을 방기하고, 오월혁명을 묵과한 것이 알려지면서 ‘반미’ 감정이 나타나게 되었다. 60~70년대 박정희 정권 기간에 형성되었던 민주주의라는 보편적인 이념은,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인식이나 미국을 바라보는 시각의 과학성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사회운동의 이념으로 들어온 것이나, 주체사상이 빠르게 보급되었던 것도 오월혁명이 남긴 직간접적인 유산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민주화에 대한 과학적 이념) 한편 이후 ‘민주 대 반민주’ 전선의 형성에 있어서 오월혁명은 운동주체들의 공통의 경험과 부채의식으로 남게 되었고, 따라서 전선운동을 매개하는 투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30년이 가까이 되어가는 역사적 사건을 오늘날 돌아보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70년대 말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도입되었던 신자유주의적 정책은, 이제 한 순환을 마감하며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에 따른 경제위기와 이에 따른 노동자ㆍ민중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거세어지고 있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본질적인 전환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시점이다. 또한 이명박 정권은 비정상적인 통치형태를 보이며 경찰력과 공안을 중심으로 하는 억압적 국가장치에 기대고 있으며, 민심이반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는 형국이다. 하지만 이런 국면을 끝내고 대안세계를 만들 수 있는 대중운동의 주체, 합력을 창출할 수 있는 매개로서 이념의 형성은 요원하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경제-정치-운동의 위기라는 ‘3중의 위기’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월혁명의 정신을 계승하고 광주에 떠나면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정세를 매개로 사회를 변혁하기 위한 대중운동을 만들었던 힘을 살펴보는 것이다. 이 힘은 위기에 대한 민중들의 즉자적인 불만을 넘어 이를 긍정적인 방향의 투쟁으로 만들 수 있었던, 주체와 이념의 형성에 있을 것이며, 이것은 2009년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6. 나아가며

지금까지 ‘오월혁명 정신 계승! 경제위기의 책임전가에 맞서자!’라는 2009년 ‘오월혁명 광주순례단’의 기치를 역사적으로 풀어내기 위해, 79-80년 경제위기와 노동자-민중의 투쟁을 살펴보았다. 단순히 한국현대사의 비극적인 사건을 체험하거나 기념하기 위해 광주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면, 당시의 정세를 통해 현재적 교훈을 추출하려는 노력이 어느 때 보다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오월혁명을 가져왔던 이념은 어떻게 대중들의 이데올로기와 융합했으며, 어떻게 과학적으로 정초되었는가? 이것은 비단 오월혁명 광주순례단을 떠나는 것 뿐만 아니라, 이후 현실의 모순을 바꿔내기 위한 투쟁의 과정에서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행진

2009/05/15 01:13 2009/05/15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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