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제언]

5-6월 정세에 대응하는

대중운동을 만들어나가기 위하여


 

1. 어떤 방향의 운동을 만들어야 할 것인가?

430-메이데이-촛불 1주년으로 이어졌던 지난 4월의 투쟁이 일단락되고 5월이 되었습니다. 현재 각종 경제수치상으로만 보면 경제는 오히려 회복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배계급의 공세가 전면화 되면서 노동자ㆍ민중의 고통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쌍용자동차에 대한 구조조정 계획이 발표되자 회사의 주식이 뛴 사례에서 보이듯이 경제위기의 책임전가를 통해 자본이 살길을 찾는 사례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구조조정의 핵심은 지배계급이 선동하는 것처럼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조금 더 비싼 값에 부실기업을 팔아넘기기 위한 것 입니다. 금융화의 특징인 ‘고용없는 성장’이 지난 상반기에도 계속되었고, 실업의 증가와 불안정노동의 양상은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향후 몇 달간 경제위기의 책임전가 양상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으로 예상되는데, 국회에 계류 중인 비정규법 개악과 최저임금삭감 시도, 쌍용자동차ㆍGM 대우ㆍ위니아만도ㆍ철도에서 나타난 구조조정에 맞서는 투쟁을 힘 있게 조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430-메이데이-촛불 1주년 투쟁을 통해서 확인했듯이 이명박 정권의 공안탄압은 더욱 거세지고 있고, 특히 용산 참사가 각계각층의 연대투쟁으로 벌어지지 않도록 탄압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정권이 극단적인 폭력을 통해 정치의 공간 자체를 축소시키는 지금, 민중들의 정치 공간을 열어젖히는 싸움도 절실히 필요합니다. 6월 10일 민중항쟁을 현재적 의미로 되살리는 투쟁을 대중단위에서부터 기획합시다. 오월 광주 순례단 -> 5.28 - 6월 노동자 총궐기 승리를 위한 서울지역 결의대회 및 서울 민중대회의 흐름을 통해 6월 10일을 전 민중의 투쟁의 날로 만들어갑시다.

 

1 - 1) 비정규직법 개악 & 최저임금법 개악에 맞서 싸웁시다!

5 ~ 6월 중에 처리될 것으로 예상되는 악법 가운데 가장 파급력이 클 것으로 예상되는 것은 비정규직 개악법과 최저임금법 개악입니다. 4월에는 민주당의 반발로 잠시 주춤하긴 했지만, 4월 29일 재보선이 끝난 만큼 조속히 물살을 타고 통과될 것이 예상됩니다. 비정규직 개악안을 반대하는 발언의 주된 얼개가 비정규직으로 고용되는 기간이 2년에서 4년으로 연장되니, 비정규직이 더욱 늘어날 것이라는 추측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배계급의 논리에 말려들지 않고, 대중들에게 문제의 본질을 보다 쉽고 정확하게 알리려면 비정규직 개악안의 구체적인 내용/쟁점/추이와 앞으로의 전개 등등을 예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비정규직법 개악안은 기간제와 파견 노동자의 고용 기간을 현행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하고, 차별신청 기간을 현행 3개월에서 6개월로 연장하는 내용입니다. 한나라당이 내놓은 ‘4년 유예안’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이 법안에 따르면 2년 동안 비정규직으로 일한 이후 4년 동안 비정규직 보호법 적용을 유예할 수 있는 것이라 사실상 6년간 비정규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정부의 ‘4년 연장’이든 한나라당의 ‘4년 유예’든 ‘정규직 채용 종료법’이라는 측면에서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6년 간 비정규직으로 사람을 쓸 수 있는데 굳이 정규직으로 채용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고, 2년마다 해고하고 신규채용하고 교육하는 비용도 줄일 수 있어서 그야말로 ‘비지니스 프렌들리’인 것입니다. 결국 2년이냐, 4년이냐, 6년이냐는 ‘고용안정’과 하등 상관없는 쟁점이며, 문제는 언제든 해고될 수 있는 불안정한 노동양태가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파견허용업무가 늘어난다는 것이 문제인데 오히려 이 같은 것은 쟁점이 안 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한편, ‘벼룩의 간을 빼먹는’ 것도 모자라 최저임금을 삭감하려는 시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임금격차는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단결을 가로막고 있는 여러 가지 장벽 중 하나입니다. 그 중에서도 최저임금은 전 사회적 빈곤의 확산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2009년 최저임금투쟁은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최저임금이 인상되면 재벌들이 자신의 손실을 하청·용역노동자에 떠넘기려는 시도가 그만큼 제한됩니다. 임금삭감 시도 자체가 저지되는 효과도 있습니다. 최저임금 인상은 삭감된 임금을 회복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최저임금 현실화 투쟁은 노동자들이 함께 공동의 목표로 삼는 임금삭감 저지투쟁이 되어야 하고, 생활임금 쟁취 혹은 최저임금 현실화라는 구호를 학생운동의 요구로 받아 안아 함께 제기해야 할 것입니다. 6월 최저임금 위원회의 최저임금결정 시점에 맞추어 반짝 집회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실천을 통해 전 사회적 이슈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여성노동자들은 비정규직법과 최저임금법 개악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될 것입니다. IMF 때와 같이 여성중심의 우선해고를 여성들만의 문제로 둔다면 이는 노동자 전체의 권리 축소로 이어질 것입니다. 자본의 공격은 다양한 차이를 차별로 만드는 분할선들을 타고 옵니다. 페미니즘과 국제주의를 노동자 운동의 이념으로 하여 승리를 약속하는 강고한 연대를 만듭시다.

이런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해설하면서 우리의 요구를 확장시켜 나갑시다. 비정규직 법안 자체를 폐기하고, 해고에 대한 금지와 고용안정을 위한 방안을 마련하고, 최저임금을 현실화 하라는 것으로 초점이 맞추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실업대책을 위해 실시한다는 청년인턴제/공공근로 확대 등의 내용을 함께 연결하여, 노동자들의 문제로만 여겨지는 비정규법/최임법 개악이 실은 대학생 모두의 현재이자 미래임을 이야기하며, 대학생들이 공동으로 투쟁해야 함을 선동합시다.

 

1 - 2) 해고와 구조조정, 임금삭감에 맞서 싸웁시다!

GM대우는 2008년 8천 7백억 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는데, 이 엄청난 손실의 원인은 매출 감소가 아니라 파생상품거래였습니다. GM대우의 미국 경영진들은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파생상품거래를 통해 약 2조 원의 손실을 만들었습니다. 파생상품거래로 인해 생겨난 GM대우 자산 손실분만큼 GM의 자산이 늘어나는 오묘한 시스템을 통해서 자신들의 위기를 극복하려 하고 있습니다. GM 계열사들과 거래한 매출채권(수출하고 받지 못한 대금) 역시 일종의 간접적 자본유출입니다. 초민족적 자본의 부당거래와 수탈로 인해 정상적인 경영이 불가능해지는 상황에서 최악의 구조조정이 생겨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주의적 감상으로 GM대우 살리기 운동 같은 것이 실효성을 가질리 없습니다. GM의 사례에서 보듯이 해고와 구조조정이 국제적인 생산연관에 따라, 전략적으로 필요가 없는 지역들에서는 공장공동화현상도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 이명박 정부는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과 기업의 도산을 막기 위해 공적자금 투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규모의 공적자금은 일차적으로 은행을 중심으로 금융기관에 투입되고 있으며, 한국경제의 금융화를 주도하고 막대한 이윤을 해외로 빼돌린 장본인들에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IMF 환란 이후 국내은행은 배당금으로 엄청난 자금을 해외로 유출했는데, 2008년 5월 유가증권 외국인 배당총액 상위 10대 기업 가운데 국민은행, 외환은행, 신한지주회사가 포함되었습니다. 특히 2위를 기록한 국민은행은 한 해에만 6,700억원을 외국인에게 배당하였고, 이익은 자본에게 손실은 노동자에게 전가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 경제위기 속에서 자본의 수탈도 더욱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저들이 내놓는 정책들이 노동자들을 무력하게 만들기 위한 적극적인 계급투쟁이라면, 이를 반전시킬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민중은 이론가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의 죽음이 세상을 바꿀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최소한 화물연대 조직이 깨져서는 안 된다는 것, 힘없는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린 지 43일이 되도록 아무 힘도 써보지 못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호소하기 위해 선택한 것입니다. (중략)날고 싶어도 날 수 없고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가 행복하고 서로 기대며 부대끼며 살아가길 빕니다. 복잡합니다. 동지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면서 그 속에 저도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박종태 열사의 유서 중 -

 

대한통운에서 택배기사 78명을 집단 해고한 일에 절규하며 돌아가신 故 박종태 열사의 뜻을 이어받는 투쟁을 전국적으로 벌여냅시다. 손실을 만들고 있는 것은 자본인데, 그것의 피해는 열심히 일한 노동자들에게 돌아오는 현실에 대한 발본적인 문제제기를 합시다. 경제위기라 하여 헌법에 보장된 기본적인 권리인 노동권이 축소되어야 하는가, 노동자들 내에서 고통을 분담하라는 저들의 요구는 ‘정당’한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학우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토론합시다. IMF때처럼 해고와 구조조정, 임금삭감에 ‘순응’하지 않을 수 있도록 날카로운 논리와 언어를 대중에게 돌려줍시다. 한시적 해고중단 및 고용안정 특별법 제정을 매개로 경제 살리기는 노동자-서민 살리기여야 한다는 ‘상식’을 유포합시다.

 

1 - 3) 용산참사 100일을 돌아보며, 민중의 생존권과 저항권을 지켜내는 투쟁을 벌입시다!

폭력적인 진압에 의해 5명의 철거민이 돌아가신 지 100여일이 지났지만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부는 사과는 하지 못할지언정,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유가족들을 ‘불법 집단’으로 매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용산참사와 관련된 모든 집회를 탄압하고, 용산범대위 관련자와 여러 운동 단체들에 집단 소환장을 보내는 등 어이없는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었지만 죽인 사람은 없습니다.” 라는 유가족의 절규가 아직도 지속되고 있고, 9일부터 또 다시 농성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농성장을 치면 경찰이 와서 부수어 버리고, 그 자리에 또 다시 농성장을 치는 일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학생운동도 이를 보위하기 위한 투쟁에 함께 해야 할 것입니다.

있던 집을 부수고, 멀쩡한 집을 없애고 그 자리에 가진 자들만을 위한 건물을 새로 짓는 것이 재개발 정책의 본질입니다. 이를 통해 이익을 얻는 것은 건설자본과 부동산 투기, 금융투기를 일삼는 자들일 뿐입니다. 용산 참사 해결 없이는 재개발을 할 수 없다는, 가진 자만을 위한 재개발이 아니라 더욱 살만한 공간을 위한 재개발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우리의 투쟁을 더욱 더 힘 있게 모아야 할 때입니다. 이 투쟁이 아무도 모르게 막을 내리는 것이 지배계급의 바람이기 때문에, 이 투쟁의 불씨가 꺼지지 않게 모든 투쟁하는 민중들이 연대해야 합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 죽음을 강요받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용산 투쟁에서 함께 모아질 수 있도록 합시다.

 

1 - 4) “해고금지! MB악법저지! 용산참사 해결!”을 기치로 6.10 전 민중 항쟁으로 달려가자!

5월 28일, 민주노총 서울본부에서 제안한 “6월 노동자 총궐기 성사를 위한 간부 결의대회”가 있고 이후 ‘민중대회’가 이어집니다. 서울지역 집행간부와 현장간부를 합치면 약 4000명 정도 된다고 하는데, 이 사람들이 조퇴를 기본으로 하여 앞장서서 나서고, 조합원들에게도 함께 거리로 나오자고 제안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 취지입니다. 민주노총에서 6월 10일 총파업과 전 민중항쟁을 선언했지만 이것이 ‘선언’한다고 해서 성사되는 것은 아니기에 서울지역에서부터 기층 조직화에 힘쓰겠다는 계획이고, 이를 노조 이외 운동진영에도 너르게 제안한 상황입니다. 4.30-5.1-.5.2를 디딤돌로, 5월 28일 민중대회를 중간 다리로 하여 6월 10일 광범위한 투쟁을 만들겠다는 계획에 학생운동도 함께 합시다. 학생운동은 1> 기만적인 청년인턴제와 연계하여 노동자민중 내부의 출혈을 강요하는 해고금지! 2> 6월 무더기 처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비정규 최임법 등 악법저지! 3> 정부의 재개발정책 기조가 전혀 바뀌지 않은 채 공안탄압을 받고 있는 용산참사 해결!로 경제위기의 책임전가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합시다. 민중대회 전에 사전대회 격으로 ‘대학생대회’를 개최하고 노학연대의 기치를 세워나갑시다.

작년 5-6월 촛불과 함께 거리로 나왔던 대학생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녀들이 기억하는 촛불 투쟁을 현재적으로 되살릴 수 있는 다양한 기획을 대동제와 5월 한 달 간 벌여냅시다. “그 때 당신은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작년 촛불 이후 과/반에서는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 갔나요?”, “당신을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등등 그/녀들이 다시금 저항을 꿈꿀 수 있도록 직접 발로 뛰며 만나고, 교통의 장을 만들어 냅시다. 경제위기의 한파가 민중들에게만 몰아치고 있는 지금, 해고금지! MB악법 저지! 용산참사 해결!을 기치로 6월 10일 이명박 정권 퇴진 투쟁을 힘차게 벌여냅시다!

Posted by 행진

2009/05/15 01:17 2009/05/15 01:17
, , , ,
Response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RSS :
http://stulink.jinbo.net/blog/rss/response/187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동향1]
위기의 책임을 전가하는 자본에게
우리의 몫을 내놓을 수는 없다!


1. 모든 부문으로 구조조정을 확대하라!

5월은 누구의 삶도 쉽사리 보장할 수 없다는 정부의 엄포와 함께 시작되었다. 4월30일 오전 이명박 대통령 주재로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열어 기업 구조조정 추진 계획을 마련했고, 우선 채권단은 금융권 신용공여액 500억 원 이상인 1천500여개 대기업을 대상으로 6월 말까지 신용위험 평가를 실시한다고 발표하였다. 여기서 C등급 판정을 받는 기업은 워크아웃, 즉 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가고 D등급은 퇴출 절차를 밟게 된다. 워크아웃이란, 채권금융기관이 기업의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채무상환능력을 높이는 작업으로 대개 대출금 출자전환, 상환유예, 이자감면, 일부부채 탕감 기간을 주고, 동시에 계열사의 정리, 자산매각, 주력사업 정비, 신규 투자자금 유치를 유도하는 작업이다. 즉 은행이 기업 스스로 회생하기 힘든 상황에 돈을 빌려주거나 빚을 탕감해 줄테니 노동자들을 다시 부려먹어 수익을 내고, 빚을 갚을 수 있는 구조의 기업으로 탈바꿈하라는 요구이다. 한편 퇴출 절차를 밟게 된 기업은 금융기관이 기업 등에 돈을 빌려주거나 보증을 서주는 등의 제공을 중단하겠다는 것으로, 빌려준 돈에 대한 권리를 가진 채권단이 계열사 간 합병이나 지분매각을 통해 회생이나 청산 절차를 밟고, 남은 자본을 회수 혹은 매각하게 됨을 말한다.

이처럼 정부는 이미 평가를 한 건설/조선사와 중대형 해운사에 이어 나머지 업종의 모든 기업으로 자본살리기를 확대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45개 그룹에 대한 재무구조 평가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은 14곳은 다음달 말까지 재무구조 개선 약정과 구조조정에 나설 계획이라고 한다.

 

시장이 신뢰할 수 있는 구조조정 방안이 재무구조개선약정에 반영돼서 구조조정이 일어나는 것이 바람직하다. 채권은행들이 나름대로의 수단을 가지고 있다. 시장에서 신뢰받을 수 있는 구조조정을 못하게 되면 결국 시장에서 응징과 책임추궁이 있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더 무섭다고 생각한다. - 진동수 금융위원장 기자간담회 -

 

위의 말에서 보이듯이 현재의 구조조정 양상은 개별적인 기업의 대응으로 나타나는 것 이상으로 10년 전 IMF 때와 같이 정부가 적극 나서서 구조조정을 실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은행(채권단)을 통한 구조조정 작업이 본격화 되고 있고, 회생절차 마저도 국민들의 예금을 통해 자본살리기를 실시하는 것이다. 물론 은행 건전성 테스트 또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구조조정을 위한 금융권 구조조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구조조정을 전방위적으로 압박하는 지배계급의 모습에서 경제위기는 아직도 미궁 속에 빠져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세계 경제위기 직격탄을 맞은 자동차 산업이 보여주듯 GM대우는 정규직 전환배치를 통한 비정규직 해고, 무급순환휴직으로 사실상 실업자 양성소가 되었으며 쌍용 자동차는 2646명 해고 안을 발표한 후 결국 8일 2400여명 해고절차를 노동부에 신고했다. 코레일은 실적 저조를 만회하기 위해 공기업 중 최대인 5115명 정원 감축을 이사회에서 통과시켰다. 이러한 대규모 구조조정과 전 부문으로의 구조조정 계획은 등급을 통해 살릴 가치가 있는 기업을 선별하여 노동자 민중의 고통을 통한 극복을 시도 하고 있다. 진정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은 벼랑 끝 생사기로에 놓여있음을 보여준다. 아래에서 구체적인 쟁점과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2. 구조조정, 무엇으로 시작되어 어떻게 진행되는가.

우선 가장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쌍용 자동차를 보도록 하자. 2004년 쌍용자동차 인수당시 헐값에 이미 수익을 얻은 상하이차는 이후 지속적인 노동자 해고와 기술유출의 시간만을 보내며 수익을 챙겼고, 경영진은 더 이상의 이윤 통로가 발견되지 않자 먹튀자본의 모습을 보여주며 철수해 버렸다. 수 년 간 방치되어 온 쌍용 자동차는 세계적 경기 침체로 수출조차 막히자 적자가 불어났고, 파산하기 직전 법정관리로 넘어갔다. 기업을 청산하는 가치보다 존속 유지시켜 가동하는 가치가 높다는 법원 판결이후 곧바로 경영진, 정부는 2400여명 해고 절차를 접수했는데, 채권단의 신규자금 2,500억원 수혈이 대규모 인력감축을 통해서만 지급될 수 있다는 조건 때문이었다. 이미 사내 하청업체를 정리해오던 회사 측은 전환배치 이후 일을 쉬게 된 비정규직을 전원해고 했고, 그것도 모자라 전체인원의 1/3을 잘라내겠다는 강수를 고집하고 있다. 먹튀자본으로 무너진 노동자의 삶이 기업 살리기란 이름의 ‘노동자 죽이기’로 옮겨가고 있다.

 

GM대우는 900명 비정규직 일자리에 600명 정규직을 배치하는 전환배치를 완료했고, 남은 300명 비정규직 일자리에 비정규직 600명이 들어가 900명이 돌아가면서 일을 하게 되었다. 라인 속도도 줄이고 가동률도 60% 남짓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심지어

8개월에 1번씩 일을 할수도 있고, 임금은 20~30만원밖에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다. GM대우 회사측은 이마저도 무급순환휴직(임금 지급없이 노동자들이 돌아가면서 일을 쉬는 상황)이라는 이름으로 고용을 보장하는 길이라며 버티지 못할 거면 알아서 나가라고 유도하고 있다. 이처럼 전환배치->무급순환휴직->희망퇴직 강요->정리해고 순으로 인원감축/임금축소/복지후퇴 등 다양한 방법의 손실메우기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충격적이게도 구조조정이 알려지기 시작할 때 GM대우는 지난해 경제위기 속에서도 약 2900억 원의 영업이익을 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파생상품 거래로 인한 손실이 2조3300억 원 규모에 달해 2008년 결산 기준 8757억 원 규모의 당기 순손실을 기록했다는 황당한 내용은 구조조정이 무엇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알게 해준다.

 

이렇듯 대규모 전환배치로 노리는 것은 비정규직을 우선 해고하는 것이고, 차근차근 전체 노동자들을 향한 해고가 다가오고 있다. 단번에 시행되는 집단해고가 노동자의 조직적 투쟁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쌍용 자동차, GM대우에 그치지 않고 구조조정 산업 전반으로 확산될 가능성은 높다. 실제로 GM대우 회사 측이 정규직 임금 10% 삭감과 복지조항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김치 냉장고 ‘딤채’로 유명한 위니아 만도는 전체 생산직 노동자 456명 중 220명을 정리해고 했다. CVC캐피탈이 소유하고 있는 위니아 만도는 2300억원에 달하는 수익을 챙기고, 경영상의 이유로 대규모 해고를 진행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계 초민족 기업인 ‘파카하나핀’의 계열사 파카한일 유압도 197명 중 113명을 정리해고 하겠다며 쟁의가 벌어지고 있는 곳이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매출이 감소하자, 전체 노동자의 57%를 감원하겠다는 막무가내 칼부림이 자행된 것이다. 이처럼 위니아 만도와 파카한일 유압을 소유한 투기자본은 단기 순익 이후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주식가치를 높이고 매각 혹은 청산으로 자본을 챙긴 뒤 철수하기 일보직전에 있다.

 

 

3. 구조조정 저지 투쟁과 경제파탄의 주범 금융화에 맞선 투쟁!

97년 IMF 구조조정 당시 해외매각과 투기자본의 국내 침투는 심각하게 높아졌고, 삶이 팍팍해졌지만 “열심히 일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버틴 채 살아왔다. 10년 전의 칼날이 잔인하다고 느꼈지만, 또 다시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마음을 잡고, 자리를 잡으며 많은 사람들은 눈을 질끈 감고 달려왔다. 그러나 더욱더 황폐해진 삶과 바닥만을 마주한 채 누구의 손도 잡지 못하고 2009년 5월을 우리는 살고 있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선택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모든 형태의 해고와 금융투기 자본을 막아내는 것이다.

 

구조조정은 지배계급의 말처럼 기업을 회생시키고, 경영을 정상화 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고, 인원 감축을 통해 손실을 떠넘기는 것이며, 당장 자금이 필요하면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청산되고 매각된다. 뿐만 아니라 대출자금을 갚기 위해 금융권이나 정부의 지시에 따라 빚을 갚기 위한 구조로 기업을 바꿔내고, 노동자들의 노동 강도를 높이거나 혹은 싼 값에 고용되고 언제든 해고될 수 있는 노동자들을 이용해 진행된다.

 

위기를 기회로! 라는 말은 자신들이 발생시킨 경제위기를 노동자들에게 해고하기 쉽고 더 많이 착취하기 쉬운 형태로 전환하는 기회로만 이용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로 지배계급의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줄 수 없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하게 경제위기는 노동자들이 불러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 확실하게 이야기하면 “경제위기 책임은 노동자에게 없다!”는 명명백백한 사실이다. 자신들이 필요할 땐 쉬지 않고 공장을 돌려 노동자들을 부려먹다가, 전 세계 곳곳을 누비며 금융투기로 입은 천문학적 금액의 손실 그리고 발생시킨 경제위기를 구조조정으로 해결하겠다는 저들에게 결코 우리의 몫을 내어줄 수 없다.

 

또한 투기자본은 바닥으로 꺼진 기업 가치를 높여, 주가를 상승시키기 위해 구조조정을 시행하고 주식이 오르면 되팔아 그만큼의 차익을 남기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특히나 경제위기 상황에서 초민족 투기자본에 헐값으로 매각된 기업들이 이런 상황에 처했고, 수 많은 노동자들의 삶이 파탄났음은 10년 전 역사 속에 교훈으로 남아있다. 구조조정을 불러 온 경제위기의 책임이 노동자에게 없음을 확실히 알려내자. 열심히 일한 대가를 생존권 박탈로 만들어버리는 저들의 공격에 투항이 아닌 투쟁으로 저항하자. 지배계급이 유포하는 고통분담과 양보교섭이 아닌 노동자 민중의 삶을 지켜낼 수 있어야 한다. 자본과 기업살리기가 아닌 노동자 서민 살리기를 요구해야 한다. 우리는 아래와 같은 주장으로 구조조정 저지투쟁과 경제파탄의 주범 금융화에 맞서는 투쟁을 만들어내자.

 

첫째로, 위에서 살펴보았듯 많은 구조조정의 경우 투기자본의 먹튀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분명히 알려나가자. 특히 쌍용 자동차의 대규모 해고절차와 GM대우의 향방을 예측하고 투쟁을 조직할 수 있으려면 구조조정 정리해고 반대 투쟁이 바로 금융 투기 자본의 맞서야 함은 핵심중의 핵심이다. 쌍용 자동차 정리해고 안이 나온 후 주가가 오른 사실은, 손실을 노동자 해고로 줄이고, 다시 공장을 가동시켜 이윤을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GM대우 역시 노동자들을 쉬지 않고 부려먹어 수익을 남겼음에도 파생금융상품 손실로 공장가동을 줄이고, 해고로 지어지고 있다. GM 본사가 의도적으로 GM대우의 파생금융상품 손실을 일으켜 그만큼의 자본을 GM 본사로 흡수시킨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구조조정을 통한 노동자 분할은 금융 투기자본이 활개를 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된다. 자동차/조선/건설업 등의 주요산업은 연관되어있는 소재ㆍ부품이 엄청나게 많기에 수많은 하청 업체 노동자들의 고용과 생존 위협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먹튀 자본이 어떤 것도 가지고 나가지 못하게 원청-하청/정규직-비정규직/여성-남성/정주-이주 노동자의 단결을 만들고, 분할에 빠져 각개격파 당하지 않기 위한 이데올로기 싸움을 조직해야 한다. 구조조정 정리해고 반대투쟁은 바로 생존권 투쟁이자 투기자본을 멈추게 하는 투쟁이 되어야만 가능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금융권 신용 공여액이 높은 대기업 그룹에 대한 신용위험 평가가 구조조정을 불러올 수 있음을 긴장하고 바라보아야 한다. 대기업 계열사를 매각하거나 강도 높은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정부는 그만큼 금융권의 건전성과 유동성 확보로 경제위기의 뇌관을 자극하지 않아야 하기에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금융기관에 대한 건전성 테스트와 대기업 그룹이 신용 공여액을 어떻게 갚아나갈 수 있게 하느냐가 맞물려 진행될 수밖에 없다. 노동자 서민의 예금을 마음껏 이용하고, 등급 평가 후회생 가능한 기업에 자금을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모두 민중의 생존과 결정에 따라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4. 나아가며

우리는 IMF 당시 헐값으로 투기자본에 매각된 기업들이 어떻게 회생했고, 지금 또 다시 무엇을 희생시키며 살아남으려 하는지 바라보고 있다. 지배계급과 투기자본이 훑고 지나간 자리, 그곳엔 삶도 터전도 분노도 사라진 굳어버린 땅 뿐이었다. 구조조정, 정리해고 라는 말이 저들에게는 빠르고, 쉽게 곁가지를 쳐내는 것이지만 노동자 민중에게는 자신의 피와 땀을 모조리 빼앗기고 버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위기 극복은 기업과 자본 살리기가 아니라 노동자 민중 살리기가 되어야 합니다” 라고 외치는 우리가! 먹고튀는 자본과 책임회피 정부, 남은 것이라도 빼먹겠다는 저들한테 우직하게 삶을 살아 온 민중들과 함께 새로운 터전을 일궈 나가는 싸움으로 돌려주어야 한다.

Posted by 행진

2009/05/15 01:16 2009/05/15 01:16
, ,
Response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RSS :
http://stulink.jinbo.net/blog/rss/response/186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동향2]

비정규법 개악안 분석과 투쟁방향




비정규직법 개악, 무엇이 문제인가?

기존 비정규직법의 구성과 내용

2006년 11월 30일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된, 이른바 ‘비정규직보호법’<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이하 <기간제법>과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중 개정법>(이하 파견법) 등을 통틀어 이름붙인 법이다. 당시 노동부장관 이상수는 ‘드디어 비정규직들을 보호하는 길이 열렸다’며 떡을 자르며 자축을 하고, 국민들에게 적극 홍보하였다. 흔히 말하는 정규직 노동자는 ▲정년까지 고용을 보장하며 ▲전일제(full-time)로 일하고 ▲ 고용과 사용이 분리되지 않은 노동자를 말한다. 즉 정규직 노동자는 기간을 정하지 않은 근로계약을 체결하여 정당한 이유가 없는 한 해고할 수 없고, 고용이 정년까지 보장되는 노동자로서 해당 기업에 직접 고용된 노동자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와 달리 비정규직은 ‘어느 범위까지 분류할지’ 여전히 논쟁 지점이 존재하고, 국제적 기준도 통일된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비정규직보호법의 기간제(근로계약 당시 계약기간을 정하고, 기간이 만료되면 해고 혹은 재계약되는 형태), 단시간(흔히 말하는 파트타임), 파견(A회사의 내/외부 다른 회사B가 A회사로 인력을 파견하는 형태) 노동자 등 정규직이라 말할 수 없는 이들은 모두 비정규직 노동자로 볼 수 있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정의는 정규직의 개념과 분할하여 ‘정규직이 아닌!’ 노동(자)의 조건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노동자간의 분할과 경쟁을 끊임없이 조장하는 자본의 시각이 그대로 투영된 것이다. 우리들의 권리가 모래알과 같이 각각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자신들이 그어놓은 조건에 맞지 않으면 비정규 노동자로조차 인정하지 않는 자본의 분할전략을 거부하고, 비정규직을 본질적으로 표현한다면 ‘자본과 노동 간의 비대칭적 권력관계를 본질로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내에서 자본이 고용관계를 외부화하려는 노동’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기간제법> = 비정규직 양산법!

<기간제법>은 한마디로 ‘비정규직 양산법’ 혹은 ‘비정규직 확산법’으로 표현할 수 있다. 현행 비정규직법은 몇 가지 쟁점, 즉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는 독소조항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많이 거론된 것이 “기간제근로의 총 사용시간을 2년으로 제한, 2년 초과시 정규직(무기근로계약) 근로자로 간주한다”는 조항이다. 이를 두고 정부는, 2년 열심히 일하면 정규직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식으로 대대적인 홍보를 벌인 바 있다. 하지만 이 법이 시행된 지 2년이 지난 현 시점의 현실은 그들의 주장이 새빨간 거짓말임을 증명하고 있다.

 

2년 후 정규직화? 2년 내 해고!

앞서 말한 대로 정부의 홍보와는 달리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년 후 정규직으로 전환’된 것이 아니라 ‘2년이 지나기 전에 해고’당했다. 법이 정한대로라면 노동자를 2년 이상 고용할 경우 이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하지만 사용자들은 그 전에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있다. 부당해고가 아닌 단지 재계약하지 않은 채 기간만료로 고용관계가 종료한 것일 뿐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다.

물론 매번 기업/기관에서 2년마다 그 모든 사람들이 모조리 갈아치울 수는 없다. 해당 업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기술, 능력을 다시 가르치는 것 보다는 숙련된 기존의 노동자들을 쓸 수 있는 데까지 쓰는 것이 사용자의 입장에서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약 갱신을 한다. 2년이라는 기간 제한만 있을 뿐 계약 갱신과 갱신의 횟수에 대한 제한이 없기 때문에 계약이 종료되고 다시 재계약을 하면 그만이다. 뿐만 아니라 2년 후 정규직화 한다는 조항에는 많은 예외가 존재한다. 55세 이상 고령자, 전문직, 실업대책 일자리 등은 계속해서 비정규직을 사용할 수가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 수가 줄어든다고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다!

기간제 보호법이 시행된 2007년 7월 이후 비정규직 규모는 감소하고 있다. 2007년 3월에는 비정규직(비율)이 879만명(55.8%)이었으나, 2007년 8월에는 861만명(54.2%), 2008년 3월에는 858만명(53.6%)으로 감소했다. 이것은 정부의 발표로도 확인할 수 있는 바, 비정규직법 시행 1년, 기간제가 줄어들고 용역, 호출근로, 등이 늘어났다는 것이 통계상에 분명하다. 통계청 고용형태별 부가조사 결과를 보면 100인 미만 기업의 경우 기간제(계약직) 노동자는 19만7천여 명이 감소했으나 일부 업체에서 비정규직법 회피용으로 이용하고 있는 용역노동자(10만여 명)를 비롯해 파견노동자(4만4천여명), 일일노동자(17만8천여명) 등은 증가했다. 즉 기간제 노동자들은 간접고용 노동자가 되거나, 가내노동자가 되거나, 실업자가 되었을 확률이 크다.

 

차별시정 신청했다가 돌아오는 건 ‘해고’라는 철퇴!

한편 비정규보호법에는 ‘차별처우 금지ㆍ시정’ 조항이 있다. ‘비정규직(기간제ㆍ단기간ㆍ파견근로자)에 대한 불합리한 차별처우를 금지 노동위원회에 차별시정절차를 마련’하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시행 후 차별시정의 효과는 아예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07년 786건(2740명), 08년 9월 현재 251건(249명)이 접수돼 차별시정제도가 시행된 이후 총 1037건(2989명)이 접수한 것으로 조사되었으나 이것은 철도노조 천여 명이 집단적으로 신청한 것을 개별사안으로 처리해서 수가 많은 것이고, 실제로는 100건도 되지 않는다.

차별시정 신청 자체도 되지 않거니와 차별시정을 통해 문제가 해결되기보다는 오히려 계약 해지되는 사례들도 나타났다. 비정규법 시행 이후 처음으로 차별시정을 신청하고 이를 인정받은 고령축산물공판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 경우인데, 결국 사측의 해고에 차별시정 조치를 포기했다. 사측은 계약기간만료를 이유로 계약을 해지하거나 외주화 할 경우 차별시정이 무력화 된다는 점을 악용해 차별시정 조치를 이행하기는커녕 지방노동위원회의 차별시정 조치 결정 직전,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계약해지를 통보했다.

 

<파견법> = 외주화 촉진법

1998년 2월, 오랜 논란 끝에 <파견법>이 제정되었는데, 당시에도 정부는 <파견법>의 제정이 불법적 간접고용을 규제하고 간접고용 노동자를 보호하는 방안이라 장담하며 늘 그럿듯이 ‘보호법’이라 명명하였다. 하지만 지난 10여년은 ‘안정적인 일자리의 파괴’와 ‘노동기본권의 무력화’ 그리고 ‘저임금·주기적 해고·노예노동의 확산’이었으며, 간접고용은 더욱더 확대되어 갔다. 현재 파견대상업무는 전문지식·기술·경험 또는 ‘업무의 성질 등’을 고려하여 대통령령으로 마음껏 정할 수 있게 되어있다. 04년 정부의 입법안에서는 파견대상업무에 대해 (몇몇 업종만 제외하고 모든 업종으로 확대하는) ‘네거티브 리스트 방식’을 주장하여 노동계의 반발에 부딪치자, 포지티브안(26개 업종만 허용)으로 수정하였다. 이는 형식적으로는 26개 대상업무 수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용적으로는 확대하는 방식이다. 시행령 개정을 통해 언제든 대상업무를 확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1년의 범위 안에서 1회에 한하여 파견기간을 연장할 수 있도록 한 것을 06년 파견법 개악을 통해 연장횟수에 대한 제한을 삭제하였다. 따라서 1회의 파견기간이 1년을 초과하지 않고, 연장된 총 파견기간이 2년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파견기간 연장횟수의 제한이 없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2년 내에 횟수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초단기 파견계약이 더욱더 가능해졌다. 이러한 <파견법>, 무엇이 문제인가?

 

합법적인 중간착취! 사용자는 책임 회피!

파견직을 비롯하여 하청, 도급 등의 외주화 형태로 노동자를 고용하는 행위를 간접고용이라고 한다. 이 경우, 법적으로 (사용회사=)A회사는 해당 노동자를 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노동자에 대해 아무런 의무도 지지 않는다. 노동자는 A회사가 제공하는 노동환경이나 임금, 처우에 대해 문제제기 할 수 없다. 이 노동자는 A회사에게 고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용회사=)B회사에 소속된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고 단체교섭권 등을 획득해도, A회사와는 대화할 수 없다. 또한 노동자들이 파업 등의 쟁의행위를 할 시, A회사는 B회사와의 계약을 끊어도 아무런 법적 하자가 없다. 때문에 노동자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노동할 수밖에 없다. 간접고용은 고용과 사용의 분리를 전제로 하여 중간착취를 합법화하고, 사용자가 책임을 회피하는 탈법을 용인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버젓이 행해지는 불법파견

500일 넘게 철도공사와 파업으로 맞서 싸운 KTX 승무원의 업무 또한 파견업무 허용 대상이 아니었다. 법원이 불법파견판정을 내렸지만, 외주화는 강행됐다. 위법임이 밝혀져도 법원은 실질적인 강제력이 없다. 실상 노동법 자체가 노동자들을 ‘보호’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이 외에 제조업의 직접생산공정업무 또한 파견 통상허용업무에 포함되지 않는다. 일시사용업무에 포함되지만, 실상 상시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에는 불법파견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서 도급계약을 맺었다고 하더라도 그 업체와 2년 이상 고용을 승계하지 않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고용승계를 없애기 위해서 기존업체에서의 근속을 인정하지 않는 방식의 고용승계가 이루어지고 있다.

 

 

경제위기 하 비정규법 개정의 전 사회적 파장

 

비정규직법 때문에 고용창출이 안 된다고?

미국발 금융위기로 한국경제마저 비틀대던 지난 해 11월, 10개 부처 공동 ‘경제난국 극복 종합대책’의 한 방안으로 비정규직법 개정 추진을 발표했다. 곧이어 이영희 노동부장관은 비정규직법으로 인해서 내년이면 100만 명 가까운 노동자들이 해고될 것이라는 걱정을 털어놓으며 ‘비정규법안 개정’을 해야 한다고 한다. 사실상 자신들이 강력히 추진했던 비정규직보호법이 결국에는 비정규직 양산/해고법이라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 법 개정안은 국회로 제출되었고 현재 국회에 계류중이다. 노동운동 진영을 비롯한 국민들의 비판과 불만 때문에 쉽사리 법을 통과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다급함 때문인지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은 ‘노동 유연성 문제’를 금년 말까지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국정 최대과제라 못박기까지 했다. ‘노동시장이 유연해지면 기업의 채용 확대로 오히려 고용 안정성이 높아질 수 있는데, 한번 채용하면 해고가 어렵다보니 기업들이 비정규직 또는 파견근무자를 선호한다’는 이야기이다.

허나 대다수 연구소, 단체들의 의견은 정부와 다르다. 한국노동연구원을 비롯해 고용정보원, 한국은행 등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일자리 및 취업자 감소는 주로 경기적 요인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노사정위 공익위원 역시 “ 비정규직이 감소하고 있는 현상의 주원인은 세계적 불경기라고 판단한다. 불경기 시에 기업은 고용조정이 용이한 비정규직부터 조정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향후 비정규직의 고용불안은 더욱 가중될 것으로 전망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정부가 계속 ‘일자리’ 운운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재벌 위주 경제정책’의 명분을 확보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며 일자리 감소 원인을 비정규직법으로 희석화하고 사용자들의 편법악용을 합법화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비정규직법 영향 분석>

연구기관(자)

발표문

주요 내용

이병희․정성미

한국노동연구원

노동리뷰(2008.7)

기간제근로 감소는 주로 100인 미만에서 발생, 1년 미만 신규채용 감소 현저하게 진행. 비정규직법 영향으로 보기 어렵다.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비정규 입법 시행 효과 및 정책적 대응방향(2008.7)

고용둔화는 비정규직법 제도적 요인보다 한국의 경기악화 영향

윤정향

고용정보원

고용규모 변화로 살펴본 비정규직법 1년 효과(2008)

직접고용 감소, 간접고용 증가

비정규직법 영향으로 비정규직 감소 미비.

유경준

한국개발연구원

비정규직법의 고용효과 분석 - 최근 고용부진과 관련하여(2008.10)

취업자수 증가 추이의 하락 원인은 경기침체 영향. 비정규직법에 따른 고용감소 영향 크지 않음

한국은행 조사국

최근 일자리 창출 원인과 정책과제(2008.8)

고용부진 원인은 경기적 요인(54%), 구조적요인(22%), 제도적 요인(10-20%)으로 진단

악법을 고친다? 좋은 거야, 나쁜거야??

이번에 논란이 되고 있는 ‘비정규직법 개악안’은 기간제와 파견 노동자 고용기간을 현행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하고, 차별신청 기간을 현행 3개월에서 6개월로 연장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한나라당이 내놓은 ‘4년 유예안’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이 법안에 따르면 2년 동안 비정규직으로 일한 이후 4년 동안 비정규직 보호법 적용을 유예할 수 있는 것이라 사실상 6년간 비정규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정부의 ‘4년 연장’이든 한나라당의 ‘4년 유예’든 ‘정규직 채용 종료법’이라는 측면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6년간 비정규직으로 사람을 쓸 수 있는데 굳이 정규직으로 채용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고, 2년마다 해고하고 신규채용하고 교육하는 비용도 줄일 수 있어서 그야말로 ‘비지니스 프랜들리’인 것이다. 결국 2년이냐, 4년이냐, 6년이냐는 ‘고용안정’과는 하등 무관한 쟁점이며, 문제는 언제든 계약해지, 해고될 수 있는 불안정한 노동양태가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것이다.

특히 정규직, 비정규직 가리지 않고 고용보장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심각한 경제위기 상황에서 정부가 비정규직법 개정-기간연장을 통해 조금이라도 고용안정을 시켜보겠다는 것은 수사에 불과하다.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한다고 해서 비정규직 해고가 용이해지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노동자 입자에서는) 4년으로 연장되었다고 해서 해고를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앞서 말했듯 2년에서 4년으로 연장을 하든 안하든 비정규직의 해고는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정부와 자본의 의도는 비정규법안을 통해서 ‘비정규직을 일반화’하는 것이다. 비정규직이 비정상적 고용형태라는 그동안의 인식을 없애고 비정규직을 당연하고도 정상적인 고용형태 즉, ‘상식적인 일자리’로 인정하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나가며 : 비정규악법 개악 막아내고, 경제위기 하 임금삭감/해고 경향에 맞선 투쟁을 만들어 나가자!

 

현 시기 비정규직법 개악은 경제위기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노동권, 생존권을 더욱 축소시키고 파괴시키는 흐름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이미 쌍용자동차, GM대우, 위니아만도 등이 경영 위기의 해결책으로 인원감축, 해고, 임금삭감 등을 진행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난 IMF때와 마찬가지로 정부가 적극 나서서 기업들의 구조조정을 강력히 추진하겠다고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실제 자영업자, 일용직노동자 등 비가시적인 노동영역부터 시작하여 점차 대공장의 조직노동자로 이동하며 가시화되고 있는 ‘대량해고’와 특,야근수당, 보너스 등에서 기본급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는 ‘임금삭감’ 등 실제 현장에서의 계급투쟁은 이미 진행 중이다. 자본의 위기의 책임과 부담을 노동자-민중에게 최대한도로 떠넘기기 위한 전국적 공세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해고와 임금삭감의 경향은 산업예비군의 증대로 이어지고 이는 노동자간의 경쟁과 갈등을 더욱 심화시킬 조건으로서 작용할 것이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법/제도적인 정비로서 진행되는 비정규악법 개악은 6월 국회에서 다시 통과 강행이 예상되는데, 이에 대한 대응이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비정규악법 개악안을 막아내는 것과 함께, 무엇보다도 광범위하게 추진되고 있는 해고/임금삭감에 맞서는 투쟁에 함께 하자!


Posted by 행진

2009/05/15 01:16 2009/05/15 01:16
, , ,
Response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RSS :
http://stulink.jinbo.net/blog/rss/response/185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26호_동향] 용산투쟁 100일을 돌아보며


[동향3]
용산투쟁 100일을 돌아보며



지난 4월 30일 경제위기에 맞선 대학생 공동행동의 용산 참사 해결을 위한 투쟁을 연행으로 진압한 경찰은 119주년 노동절, 촛불 1주년까지 3일간 241명을 폭력 연행하였다. 3개 부처의 불법 시위 자제 담화문 발표를 통해 마구잡이 연행을 하더니 무더기 사법 처리를 검토하고 있으며 민중들의 불만이 분출될 지점 어느 곳이든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비단 4월 30일 메이데이 투쟁과정에서 처음으로 접한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지난 1월, 용산에서 정권과 경찰 폭력의 극단을 보았다. 한자리에서 5명의 철거민이 공권력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그 이후, 이 투쟁이 진행되는 속에서도 경찰은 무작위로 체포영장과 소환장을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과 범대위에 보내면서 강경대응을 멈추지 않았다. 또한 매일 용산 현장에서 열리는 추모제는 모두 불법 집회로 간주하였으며, 진행되는 집회마다 모두 막아섰으며 전철연과 범대위에 대한 탄압 역시도 멈출 줄 모르고 진행되었다. 이렇게 어려운 조건과 상황 속에서도 유가족과 전철연동지들, 범대위는 100일이 넘게 힘찬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민중들을 거리로 내모든 재개발 정책

경제위기에 대한 책임 전가와 노동자·민중의 양보할 수 없는 권리가 부딪히는 2009년 계급투쟁의 전장, 우리는 그 첫 번째 피나는 싸움을 용산 철거민들의 목숨을 내던진 투쟁에서 보았다. 가구당 평균 부채가 몇 천만 원씩 쌓이는 속에도 전국이 포크레인으로 파헤쳐지고, 몇 년 새 서울 곳곳의 스카이라인은 몰라보게 변화했다.

경제위기를 극복하겠다며 내놓는 그들의 대안은 무엇인가? 건설경기부양을 위해 부동산 시장을 활성화시키고 일자리를 늘려 경제를 활성화 시키겠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미래에 투자하라는 명목으로 계속해서 투기자본을 유치하고 부동산 정책에서 규제를 완화하는 것, 그래서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는 전혀 무관한 재개발 정책들을 쏟아내고 건설자본과 투기자본에 이익을 최대한도로 보장해주는 것일 뿐이다. 또한 세입자와 원주민에게는 최소한의 보상만을 쥐어주며 주거권을 빼앗거나, 이것으로 가능하지 않을 시 폭력을 자행해서라도 그/녀들이 살고 있는 땅에서 쫓아내는 것 말고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민중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한 정책들이 아니라 건설자본과 투기자본이 더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정책들만이 난무하는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정책들의 핵심은 바로, 빠르게 재개발을 추진하고 세입자들의 보상을 최소화하여 건설자본과 투기자본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윤을 얻게 하는 것이다. 이런 속에서 진행된 용산 재개발 역시도 세입자들의 반발을 살 수 밖에 없었으며 이런 반발의 목소리를 억압하기 위해 강경하게 나서며 건설자본과 투기자본의 손을 들어준 정권과 경찰의 폭력진압 앞에 용산참사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용산참사 100일이 우리에게 남긴 것

1월 20일, 재개발 정책에 반대하고 생존권을 요구하며 망루위에 올라갔던 5명의 철거민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 내려왔다. 이는 망루를 짓고 투쟁을 벌인지 만 하루 만에 발생한 일이었다. 한 장소에서 5명의 열사가 발생한 초유의 사태, 그것도 ‘공권력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용산참사에 수많은 운동세력들이 결집하였고 수천여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광범위한 투쟁을 벌여나갈 것을 결의한 가운데 ‘용산철거민 참사 범국민대책위원회(범대위)’가 구성되었다.

용산 투쟁이 시사한 쟁점은 상당하다. 작년 촛불 정국에 이어 반이명박/반신자유주의 전선을 확장해가는 계기로서 용산투쟁을 만들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 제 운동세력은 범대위에 역량을 헌신했다. 용산 투쟁은 지배계급이 말하는 경제발전이 무엇을 대가로 하는 것인지, 민중들의 저항에 대해 이명박이 취하는 태도가 어떠한지 밝히며 그들의 위기 극복의 전략이 필연적으로 반민중적일 수밖에 없음을 폭로하는 것, 지금까지 어딘가에서 주거권 쟁취 등을 걸고 싸워온 빈민/철거민들의 투쟁을 적극적으로 알려내는 것, 이를 계기로 경제위기가 극적으로 폭발하는 국면에서 신자유주의 광풍에 맞선 노동자 민중들의 저항을 조직해가야하는 임무가 있는 투쟁이었다. 이를 위해 범대위와 운동세력들은 날마다 촛불 추모제를 진행하였고 위협적인 가두투쟁을 진행하는 등 공세적인 투쟁을 펼쳐나갔다.

여론의 총집중과 관심을 받는 속에서 '이명박 퇴진'이라는 구호가 적극 발언되었다. 이 같은 구호는 서민들의 삶을 통째로 앗아간 재개발 정책과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며 불도저식 개발에 눈이 먼 정권에 책임을 묻는 구호였다는 점에서 정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이 용산 참사의 원인이고 근본 문제인지를 제대로 쟁점화/여론화시키지는 못했다.

이 와중에 지배계급은 용산 참사가 드러내는 진실을 무마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시도들이 벌였다. 검찰 조사가 은폐되었고, 대신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를 자진사퇴하게 만드는 등 그들이 내줄 수 있는 수준의 양보로 제스처를 취한 후 투쟁의 실질 쟁점들을 묻어 버리려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에서는 용산 투쟁이 단일 쟁점으로는 더 이상 지속시킬 수 없는 투쟁이라거나 용산 투쟁이 침체로 들어선 원인을 민주당과의 공조를 적극적으로 고민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들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용산 투쟁 과정에서 대다수 NGO단위들이 '이명박 퇴진'이라는 기조의 급진성을 핑계로 외면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진보연대 등 주류 운동은 끊임없이 NGO와 민주당과의 공조 흐름에 눈길을 돌렸는데, 이렇듯 강경한 지배계급의 대응을 넘어서는 운동진영의 단결된 맞대응을 조직하지 못한 것이 오히려 더 큰 어려움이었다. 용산 투쟁의 상황은 무기력함에 빠져있고 고립 분산된 전체운동의 조건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민중운동의 위기를 다시금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계속되는 투쟁,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현재 유족들의 사그라지지 않은 분노에 힘입어 투쟁은 100일 넘도록 계속해서 이어져 가고 있다. 지난 4월 하순에서 진행되었던 1차 농성에 이어 또 다시 유가족과 대표자농성이 진행되고 있고, 또 매 규탄 집회와 기자회견마다 정권은 일관된 강경기조로 탄압을 일삼고 있다. 용산 참사의 해결없이는 이러한 비극이 또 다시 반복될 수 밖에 없기에, 또 기세등등해 있는 지배계급이 준비하고 있는 반민중적인 계획들을 좌절시키기 위해서는 용산 투쟁의 쟁점을 계속 붙들고 가며 이후 광범위하게 조직될 민중적 저항의 소중한 불씨로 삼아야 한다.

지난 투쟁의 기간동안 ‘진상 규명’과 ‘공안탄압’ 쟁점으로 인해 풍부하게 발언되지 못했던 재개발 정책의 문제나 각종 투기자본을 유치하고 금융자본에 민중들의 주거권을 팔아넘기려는 프로젝트 파이낸싱의 문제점들을 꾸준히, 풍부히 발언하고 선전해 나가자. 무엇보다 용산 투쟁의 국면을 전환시키기 위한 계기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지금 곳곳에서 벌어지는 노동자들의 투쟁- 경제위기가 강요하는 해고와 임금삭감에 맞선 싸움을 보위하고 고조시켜나가야 한다. 그때까지 우리는 끈질기게 용산 투쟁에 연대하면서 앞으로의 더 크고 공세적인 투쟁을 예비하자!

Posted by 행진

2009/05/15 01:15 2009/05/15 01:15
, , ,
Response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RSS :
http://stulink.jinbo.net/blog/rss/response/184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 [교육]79-80경제위기와 노동자 투쟁

 

0. 들어가며

2009년 5월 현재, 우리는 5월 18일을 앞두고 광주 순례단을 떠나게 됩니다. 29년 전 오월혁명의 그 날을 눈앞에 두고, 다시 한 번 역사적인 사건들을 되돌아보고, 광주에서 싸웠던 사람들의 흔적을 느껴보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선 이런 의미 때문에 올해에도 광주로 발길을 향합니다. 그런데 현재 오월혁명에 무장폭동에서 ‘민주화 운동’으로 ‘공식적인’ 지위가 승격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오월혁명을 기억하고 그 흔적을 느끼고 있습니다. 대통령 후보자나 당선자가 묘역에 방문하여 “나는 1980년 광주를 기억하고 있다.”라고 알리는 것은 하나의 통과의례처럼 되었습니다. 이런 추모의례를 통해서 지배계급들은 과거의 아픔을 잊고 상생의 길로 나아가자, 분란을 없애고 경제를 살리는데 온 힘을 모아달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단지 오월혁명을 기념하거나 의례화하는 것을 넘어, 어떤 의미를 가지고 광주를 기억해야 하는 것일까요? 오월혁명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그 정신을 계승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을 구하는 것이 우리가 2009년 광주를 가면서 얻어야할 것입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 지금까지의 민주화 성과들마저 후퇴시키는, 각종 반동적인 행태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촛불집회에 대한 탄압과 용산참사, 그리고 ‘MB 악법’이라고 불리는 각종 악법 제정에서 보여 지듯이, 그들에게 남은 것은 폭력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反 MB 정서가 대중적으로 깊숙하게 퍼져 있는 상황에서 정권의 반동적인 모습들에 초점을 맞춰, ‘민주주의 쟁취’라는 구호가 공공연하게 등장하고, 현재의 상황을 이전의 군부독재정권과 유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80년대와 같은 광범위한 사회운동이 펼쳐져, 비민주적이고 폭력적인 정권의 행동을 막아내고자 하는 열망이 존재합니다. 광범위한 사회운동의 매개체였던 오월혁명을 돌아보는 것은 이런 것을 살펴봄으로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오월혁명을 통해 보고자 하는 또 하나의 정세는 79-80년 경제위기입니다. 사실 70년대에 박정희 정권이 60년대와 비교하여 유신체제ㆍ9차례에 걸친 긴급조치와 같은 비정상적인 수단을 쓴 것은, ‘독점강화ㆍ종속심화’라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던 중화학 공업화 정책, 그리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통치성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후 70년대 말부터 시작된 경제위기는 경제성장 그 자체에 내포되어 있었고, 광범위한 민심이반과 맞물려 정권의 몰락까지 이어집니다. 당시의 경제위기와 분출하던 대중운동에 대한 대응으로 ‘신보수주의적 정책’이 쓰이고, 군부독재정권이 창출됩니다. 이것이 오월혁명이 일어나게 되는 정세였고, 그것은 다시 80년대의 광범위한 대중운동과 그 이념을 만드는 촉매제가 됩니다.

오월혁명을 보며 교훈을 추출하는 것은 단순히 ‘현재에는 없는 어떤 것’을 확인하고 감탄한다거나, ‘망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함만은 아닙니다. ‘오월혁명정신계승’을 외치며 약 30년 전 당시의 경제성장ㆍ위기와 정권에 대한 다양한 불만들이 각자 소진하지 않고, 광범위한 하나의 흐름으로 만들질 수 있었던 그 과정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제시하면 계속 싸워나갔던 주체가 형성되었고, 대중들을 움직일 수 있었던 이념이 만들어진 과정입니다. 물론 경제위기의 성격을 제대로 분석하는 것은 과정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전제입니다. 아래의 글을 통해 79-80년 경제위기와 노동자-민중의 투쟁을 살펴보며, 오월혁명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논의해봅시다.

 

1. 70년대 한국의 중화학 공업화

한국은 對 사회주의권에 대한 자본주의의 최전선 방어지역으로서, 자본주의 세계체계에 밀접하게 포섭될 필요가 있는 지역이었다. 이에 따라 1960년대부터 외국에서 제공되는 차관으로 강력한 발전주의 정책을 추진한 한국은, 세계 자본주의에 대한 종속이 심해지고 독점자본이 성장해갔다. 외자는 수입 대체적 중화학공업화에 투자되어 한국에서 경제성장을 가져왔지만, 노동력을 제외한 모든 생산요소를 초민족적 기업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한국에서는, 원리금 상환을 위한 외한을 얻기 위해 수출을 우선적으로(무조건)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1달러의 수출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평균 1.5달러의 비용이 들어가는 출혈 수출이 이루어졌고, 1960년대 말에 이르면 내적 모순이 심화되고 경제위기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특히 수입대체 중화학부문에서 위기가 발생하는데 차관도입을 둘러싼 무분별한 자본 경쟁으로 인해 과잉생산의 현상을 보이고, 55개사가 은행관리로 넘어가고 10개사가 상환을 이행하지 못하는 대불사태에 빠진다.

60년대 말의 위기에 대응하여 지배계급은 국가에 의한 개입을 강화한다. 60년대 말 부실기업 정리와 국가기업의 민영화를 통해 기업의 합병ㆍ인수를 추진하여 자본의 집중을 이루었고, 수입대체공업화를 넘어 수출지향적인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게 된다. 국가는 독점자본과 적극적이고 체계적으로 결합하였으며, 경제에 대한 폭력적인 개입을 행했다. 우선 70년대 ‘관치금융’이라는 말이 널리 퍼졌듯이 금리와 세제상에서 독점자본은 광범위한 혜택을 받게 된다. 이는 1972년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8.3조치)으로 대표되는데, 주요 내용은 기업사채의 동결과 금리의 대폭적인 인하, 특별금융채권의 발행에 의한 저리대환 및 저금리의 산업합리화자금의 공급이었다. 당시 사채사용량의 60%이상을 점했던 600여개 대기업은 엄청난 특혜를 얻었고, 산업합리화자금은 72-73년 448억 원에 달했다. 이외에도 세제면에서도 특혜가 주어졌는데 이런 식으로 기업이 제공받게 되는 금융특혜는 연간 약 1028억 원에 달했다. 이렇듯 국가는 산업합리화라는 이름으로 자본의 가치파괴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함으로서, 독점자본의 위기를 해소하고 축적을 지속하게 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독점자본은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당시 한국을 둘러싸고 벌어진 내외 정세의 변화가 맞물려 있었다. 69년 닉슨 독트린과 데땅뜨적 분위기에서 냉전체제가 와해되어 가고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가 감소하게 된다. 이에 한국에서는 자주국방과 군수산업 육성이 추진되었는데, 이는 중화학공업화의 중요한 추진 동기가 되었다. 한편 70년대 중심부의 초민족적 자본은 미국을 중심으로 노동생산성 하락과 유가인상에 대응하여 해외로 생산거점을 이동하려 했고, 70년대 이후 스태그플레이션(실업률과 물가의 동시 상승)으로 생산의 고도화를 꾀하고 있었다. 이에 동아시아의 네 마리 용(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이라고 불리는 신흥공업국(NICs)에서 중화학공업부문의 노동집약적 공정을 담당하게 되고, 거기에서 생산된 부품과 반제품을 미국 본국으로 재수출하는 전략이 나타났다. 박정희 정권은 1973년 8월 ‘중화학공업화계획’을 발표해 이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였고, ‘중동 건설’호황을 계기로 기계ㆍ전자ㆍ철강ㆍ비철금속ㆍ석유화학ㆍ조선 등 6개 부문을 전략 산업으로 육성한다. 또한 국민투자기금 전체의 약 68%를 중화학공업부문에 할당했으며, 73~80년 사이 제조업에 대한 산업은행 대출의 약 80%가 중화학공업부문에 투자된다. 이외에도 각종 세제혜택과 ‘수출자유지역’을 설치하여 직접투자를 활성화하려 하였다. 이렇듯 1970년대의 중화학 공업화는 국가지원으로 독점이 성장하는 동시에, 초민족적 자본의 이해에 따라 국제분업체계에 깊숙이 편입해 들어감으로서 종속이 심해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종속은 1960년대에 이어 출혈수출을 강요받는 메커니즘으로 자리 잡는다. 중화학 공업의 생산수단을 도입하기 위해 화폐자본의 수입을 강제받고, 이 과정에서 대외채무의 상환 부담이 더욱 커진다. 이는 대외채무를 갚기 위해 수출을 증가할수록, 역으로 무역수지 적자가 구조화되는 악순환을 초래하고, 금융적ㆍ기술적ㆍ시장적 종속은 더욱 커져간다. 한편 생산수단의 고도화에 따라 70년대 중반부터 기술도입이 급속도로 증가하는데, 이는 원자재에 대한 해외의존과 기술지대를 중심으로 잉여가치의 해외유출을 가속화시키는 것이었다. 한국의 자본은 독점가격 설정과 중동건설 붐으로 들어오는 외회유출, 그리고 노동자ㆍ민중에 대한 수탈체계를 통해 구조적 불안정성이 지속되었다. 그것은 중화학공업화에 따른 자본의 유기적 구성 상승과 이를 이윤량 증대로 극복하려는 자본의 시도와 맞물려, 중화학 공업에 대한 과잉중복투자가 계속되고, 경공업과의 비례관계가 끊기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물가와 실업률의 동시 상승이라는 스태그플레이션 정세가 70년대 계속되었고, 유가 인상은 구조적인 위기를 더 한층 부추겼다. 점차 대외의존도를 높여나갔던 한국에서는 이것이 직접적인 타격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었고, 79년 초유의 경기 위축이 나타나게 되었다. 정부의 중점 육성 사업들에서 가동률이 저하하고, 적자에 빠져들게 되는데, 이에 따라 해외자본의 차입을 갚기 위해 막대한 금융비용이 요구되었다.

 

2. 군부독재정권과 민심이반

1970년대에 국가는 금융적ㆍ세제적 특혜와 각종 정책을 통해 독점자본이 형성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말했다. 국가가 독점자본의 형성에 개입하는 또 다른 방식은 노동자ㆍ민중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여, 발전주의적 성장에 내포되어 있는 모순이 제반의 사회운동과 만나는 것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1972년 10월에 선포된 유신헌법은 노동운동을 비롯한 제반 민중운동에 대한 독점자본가 계급의 억압을 강화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이는 무엇보다 노동에 대한 국가의 통제 강화로 특징지어지는데, 70년 ‘외국인 투자기업의 노동조합 및 노동쟁의 조정에 관한 임시특례법’이 제정되고, 71년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으로 단초를 마련하였다. 이후 대통령의 권한으로 “헌법상의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인 긴급조치가 9차례에 걸쳐 행해졌고, 사회 전체에 대해 준전시상황을 조성하였다.

한국경제는 1970~79년의 10년간에 걸쳐서 연평균 9.4%라는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여, 1960년대의 8.5% 성장률보다 더욱 높은 수치를 나타냈지만, 오히려 민심이반은 가속화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급속한 자본축적과정에서 노동자와 농민이 강요받았던 희생은 1970년대에도 나아질지 몰랐고, 급속도로 양산된 도시빈민들의 정치적 진출이 철저히 억압당했다. 노동자들의 수는 양적으로 크게성장하였는데, 전체 취업자 중 임금노동자의 비율은 1960년 21.8%에서 1980년에는 43.0%로 크게 증가하였다. 중화학 공업의 성장에 따라 1970년대 말에 이르면, 전체 공장노동자의 약 75%가 중화학공업에 종사하였다. 출혈수출을 감내하기 위한 자본의 전략은 폭력적인 노동통제에 기반하여 저임금ㆍ장시간 노동을 계속 감내하게 하는데, 포드주의적 작업방식의 일반화를 통해서 노동에 대한 착취를 증대시키고, 병영적 노동통제를 강화한다. 1970 ~ 81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노동생산성 증가율은 11.1%에 달하지만 실질임금 상승률은 7.8%에 불과해, 가족구성원 모두가 일하지 않고서는 생계를 보조받지 못했다. 그리고 노동자의 주당 평균노동시간은 52.9시간에 달해 절대적인 착취를 당하고 있었다. 이 시기 농민들에 대해서도 60년대 저임금을 위한 저곡가체제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농촌 새마을운동을 통해 유신체제가 정당성을 획득하고, 독점자본이 농업에 침투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후 정권의 주된 농업정책은 농산물 수입개방정책으로 전환된다.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전략 변화와 그에 연동한 한국 자본주의의 자태변환 속에서, 국가는 독점자본의 형성을 지원하기 위해 ‘비정상적’인 통치 행태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경제성장에 따라 민중들의 생활조건이 나아지고 있었을지라도, 여전히 출혈적인 착취방식과 이를 위한 통제는 민중들의 불만을 자극하였다. 곳곳에서 민심이반의 징후들이 나타났고, 점점이 켜진 불만의 목소리들은 이후 한국 사회운동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3. 한국 사회운동의 이념과 양상

1970년대 이후 정권에 대한 민심이반이 광범위하게 나타나면서 다양한 사회운동들이 진출하기 시작한다. 1960년대에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1964년 6.3 투쟁이 조직된 이후,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정권의 3선 개헌 반대 투쟁, 부정시위 반대 투쟁이 조직되었다. 하지만 주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이념에 기반을 둔 학생운동은, 이를 넘어서 자본주의 체계와 노동자ㆍ민중에 대한 착취에 대한 인식을 갖지 못했다. 대중적인 투쟁은 거의 만들어지지 못했고, 학생운동은 써클 형태의 조직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신민당 등 자유주의의 색채를 띤 야당은, 공화당을 매국정당이라고 비판하며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간다. 자유주의자들이 정권에 대한 대안으로 인식되었고, 사상계를 펴낸 장준하, 신민당의 정치인인 김대중‧김영삼, 각종 재야인사들이 혁신적인 인물로 떠오른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의 공간을 열어낸 또 다른 운동의 흐름은 노동자운동이었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재단사인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고 외치며 산화한 이후에, 발전주의적 성장 아래에서 고통 받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전면에 떠오르게 되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1971년에는 파업건수가 전년도에 비해 10배정도 늘어난 1656건을 기록했으며, ‘민중생존권’의 기치를 내걸은 투쟁들이 나타난다.

○ 노동자 민중의 투쟁

1970년대 독점자본을 지원하기 위한 국가의 개입은 노동자ㆍ민중의 권리를 삭감함으로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고, 위에서 보는 것과 같이 각종 악법을 통해 노동자의 단결권과 쟁의활동을 부정하였다. 유신헌법 제 29조에서는 노동 3권을 법률로써 유보시킬 수 있게 했고, 1973년 3월에는 노동관계법을 전면 개정한다. 한편 ‘노사협조주의’를 유포시키며 회사와 노동자들이 공동운명체임을 강조하였고, 유신이 선포된 이후 한국노총은 유신체제 지지를 유도하는 전국 유세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자본과 정권의 노동자들에 대한 공격, 그리고 저임금 및 극한적인 노동조건에 맞서 1970년대 초반에는 산발적인 투쟁이 나타났다. 특히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소규모ㆍ영세사업장을 중심으로 분신사건이 잇따라 일어나는데, 1971년 서울 한국회관 김차오 분신자살 기도, 1973년 서울 조일철강 최재형 자살 기도 사건, 1974년 대구 신철공업사 정세달 자살 사건 등이다. 이런 투쟁은 노동자들의 상태를 사회적으로 알려가는데는 유용했지만, 지속적으로 조직된 힘을 발휘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후 노동운동은 주로 자주적인 민주노동조합을 만들려는 민주노조운동으로, 신흥 민주노조를 결성하는 것과 어용노조를 민주화하는 것이 투쟁의 방향이 되었다. 1972년 5월에는 인천에 있는 동일방직에서 최초의 여성지부장 탄생과 함께 기존의 어용 노조가 민주노조로 바뀌게 되었고, 8월에는 서울의 한국모방(원풍모방) 지부가, 1973년에는 콘트롤데이타지부가, 1974년에는 반도상사 지부가, 1975년에는 YH무역 지부가 신규 민주노조로 속속 결성되었다. 1976년 남성노동자들이 민주노조를 부수려고 할 때 여성노동자들이 농성과 단식투쟁으로 맞선 것은, 주로 경공업과 중소기업 여성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벌어진 1970년대의 민주노조운동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당시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노동공동체’들은 민주노조운동을 위한 조직과 학습을 위한 기본단위로 활용되었고, 투쟁의 성과로 2500개의 노조가 만들어졌다.

이런 투쟁은 생존권을 넘어 정권 및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나아갔고, 당시 성장하고 있던 종교단체나 학생운동과의 연계도 점차 강화되고 있었다. 야학모임에서 성장한 소규모의 정치모임들이 만들어지며, 이후의 운동을 선동하고 학습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1970년대 이후 학생운동에서 노동현장으로 들어가는 활동방식이 일반화되었다. 이런 양상은 농님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1972년 가톨릭농민회가 만들어지며 농민운동이 활성화되었고, 농민운동 활동가를 만들어내는 단체들도 활동하였다. 1976~78년 함평 고구마피해 보상투쟁은 가장 대표적인 농민운동으로, 관료적인 농민지배에 대응한 준법투쟁과 피해보상투쟁이 주된 내용이었다.

 

○ 학생운동

학생운동은 국가의 병영적 대학 통제에 반대하는 1971년의 교련철폐투쟁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런 투쟁이 각 대학으로 번져나가자 정권은 군인들을 학교에 진주시키고, 이후 파쇼정권에 대해 반대하는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의 투쟁을 긴급조치 등을 발동하며 탄압하였다. 1974년에는 개별 대학의 투쟁을 지양하고 전국적 투쟁조직인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을 조직했고, 다른 부문의 운동들과 연관을 맺었다. 학생운동의 성격을 민중적ㆍ민족적ㆍ민주적 운동으로 규정하며 선도적인 투쟁을 벌인 민청학련은, 이후 정권의 탄압을 받아 1000여명이 검거되고 일부에게는 사형과 무기징역까지 퍼져나갔다. 공안은 민청학련의 배후에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가 있다고 지목되었고, 이후 23명을 구속하고 8명에 대한 사형을 언도하였다. 1978년 6월에는 선도적인 광화문 도심시위를 벌이기도 하지만, 당시의 학생운동은 공안탄압 속에서 비공개 이념 써클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학생운동은 민중운동과 결합하기 시작하며 현장 진출이 본격화되었고, 사회 구조에 대한 이론을 학습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이론은 사회전반의 구조적 변혁을 선도할만한 수준이 되지는 못하였으며, 아직 낭만적인 수준에 머물렀다고 평가할 수 있다.

 

○ 재야 및 종교ㆍ지식인의 활동

한국에서 ‘재야’라고 불리는 세력들의 운동은 반유신ㆍ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중심으로 발전해간다. 1973년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은 유신체제 비판에 대한 대중적인 지지를 모을 수 있었고, 이후 긴급조치 1호가 발동하여 탄압을 받게 된다. 이후 1974년 11월에는 ‘민주회복 국민회의’가 만들어졌고, 1976년에는 박정희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3ㆍ1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저명한 야당의 정치인이나 종교계 인사가 중심이 되어 유신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고, 성명을 발표하는 것은 당시 재야운동의 특징이었다. 194년 동아일보와 한국일보에서 노조가 결성된 이후 언론노조운동이 나타나고, 1975년 3월 ‘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만들기도 했다. 종교계와 지식인들도 크게 이 흐름에 포괄될 수 있는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나 재임용에서 탈락한 교수들이 만든 ‘해직교수협의회’의 활동이 대표적이다.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소위 ‘중간계층’의 운동은 형식적 민주주의조차 지키지 않는 정권에 대한 반대투쟁의 성격을 띠었고, 1970년대의 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이 되었다. 이런 상황은 폭발적인 대중운동이 벌어진 1980년대에도 계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투쟁 역시 1970년대에 중요한 흐름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사후적으로 보았을 때 이들이 대중운동의 실질적인 표상으로 자리 잡으며, 87년 이후의 계급투쟁 지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1970년대는 각 부문에서의 투쟁을 통해 운동주체들이 형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운동을 하나의 흐름으로 만들 수 있는 이념과 계기가 마련되는데에는 미달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노골적인 착취가 점점 더 가시화되고 정권의 독재정권의 통치형태가 문제가 되며, ‘민주화’가 모든 운동의 과제로 떠오르게 된다. 그러나 민주화라는 요구가 단지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과정으로 환원될 수 없다면, 이 요구를 통해서 한국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디이며, 어떤 방식으로 계승해나갈 것인지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의 그것은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여지고, 다양한 운동 간에 연대의 시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4. 79-80년 경제위기와 사회운동들의 만남

70년대 말은 경제위기와 정치위기가 동시에 심화되는 시간이었다. 세계 자본주의에 대한 종속을 토대로 독점화가 강화되고 있던 당시의 한국경제는, 출혈적 수출구조로 인해서 중복투자에 따른 과잉자본이 누적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적으로 이자율/달러가치/유가가 오르는 ‘3高’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고, 외채 누적에 따라 ‘외채 위기’가 폭발하게 된다. 이에 따라 70년대 내내 20~30%의 증가율을 보이던 산업생산지수가 1979년 11.7%로 떨어지고, 80년에는 -1.8%를 기록하게 되었다. 제조업 가동률 지수 역시 두 해에 각 7%와 10% 감소하고, 중화학 공업은 1979년 13% 성장에서 80년에는 -3.9%로 축소된다. 박정희 정권은 79년 4월 기존의 성장정책과는 질이 다른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을 시행하게 된다. 이는 수출 지향적 공업화와 재벌 중심적 중화학 공업화의 괴리에 의해 미시적 산업-무역 구조가 왜곡되어 거시적 불안정을 초래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에 따라 거시적인 경제안정화를 위해 인플레이션을 잡고, 임금삭감 및 구조조정으로 당시의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런 정책은 세계적으로 79년 볼커반혁명을 비롯한 ‘신보수주의적 정책’과 기조를 같이하는 것이었으며, 한국에서는 6대 중화학 공업 이외의 산업들이 축소되기 시작한다. 이는 한국경제에서 경제국면이 바뀌는 것을 의미하였고, 발전주의를 토대로 한 자본성장 전략이 이후 신자유주의적 정책으로 바뀌게 된다.

한편 경제위기가 심화되면서 정권의 통치 역시 극단으로 치달아간다. 1978년 9대 대통령선거는 2578명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가운데 1명의 표만이 무효처리되었고(체육관 선거), 78년 12월에 진행된 10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야당이었던 신민당의 지지율이 공화당의 그것을 앞서게 되었다. 정권에 대한 반대 운동은 다양한 곳에서 터져나오게 되었고, 79년 8월 YH무역 노동자들의 투쟁은 정권의 도덕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게 되었다. 사측의 일방적인 공장폐업에 맞서 회사 정상화를 요구하며 진행된 투쟁은,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시작하여 여론의 초점이 되었다. 이에 대해 정권은 강경대응을 하였고, 8월 11일 새벽에 군사작전을 방불케하는 강제해산에 돌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여공이었던 김경숙이 목숨을 잃게 되었고, 이후 김영삼의 당총재 자격과 의원직을 빼앗았다. 이런 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가두시위가 연이어졌고, 다양한 사회운동이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경제위기와 정치위기가 동시에 진행되는 가운데 각 부문의 사회운동 조류들이 모여서 폭발적인 투쟁을 만들어 낸 사건이 바로 ‘부마항쟁’이었다. 80년 경공업 설비투자는 79년의 절반 수준으로 위축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마산ㆍ창원ㆍ부산 등 남해안 일대를 따라 이어졌던 철강ㆍ군수공업에 대한 구조조정이 나타난다. 당시 부산지역에서는 78년 말에 비해 79년 8월 현재에는 제조업체 평균 노동자 수가 27% 줄었고, 각종 산업에서 임금체불과 어음부터 문제도 더욱 심각하게 실시되었다. 이 지역에서 학생운동은 강력한 투쟁을 만들어 내고 있었고, 79년 10월 15일 학생들의 가두투쟁으로 부마항쟁이 시작되었다. 이런 시위는 경남 지역에서 심화된 경제위기와 맞물려 전 민중적 투쟁으로 발전하였고, 경찰서 등 국가기관에 대한 파괴와 방화로 시위의 양상이 더욱 가격해진다. 부산에서 시작한 투쟁은 이후 마산ㆍ창원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수출자유지역의 노동자들과 합세하게 되었다. 부마항쟁은 10월 20일 위수령을 통해서 진압당했지만, 투쟁의 물결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이에 대한 지배계급 내부분파들의 갈등으로 인해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하게 된다.

79-80년 지속된 경제위기와 정치위기는 70년대 성장했던 운동들이 서로 만나고 폭발적인 힘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민주화에 대한 요구는 다양한 사회운동이 거대한 전선운동을 만들 수 있는 ‘이념’이었고, 오월혁명 역시 정세적 계기를 통한 사회운동들의 접합이라는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지배계급의 대응은 반동적ㆍ폭력적인 통치형태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었다. 12ㆍ12 쿠데타를 통해 다시 전두환을 비롯한 군부세력들은, 국력신장과 북한의 위협 그리고 사회적 혼란 일소를 명분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대중운동의 힘이 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더욱 극단적인 폭력을 채택했고, 80년 민주화에 대한 광범위한 요구가 분출했던 ‘서울의 봄’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한 지역을 대상으로 국가의 무시무시한 힘을 보여주는 전략을 택한다. 5월 17일에 시행된 ‘비상계엄전국확대조치’를 실시한 이후 다음날인 5월 18일에 광주에서 작전이 시작된다. 신군부는 공화당 정치인들마저 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이런 상황을 유리하게 재편하기 위해, 시간이 지날수록 전국적으로 분출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각 계층의 민주화 요구를 한 지역에서 압살시키는 방법을 취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발전주의 시대에 소외된 지역으로서, 그리고 군부의 제거대상이었던 김대중이 근거지로 삼고 있었던 호남 지역이 적격지였다.

 

5. 오월혁명의 위상: 역사를 배우며 추출하는 현재의 과제

광주순례단을 떠나기 전에 우리는 오월혁명을 통해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오월혁명을 만들었던 정세적인 조건과 그 보편적인 결과에 대해 좀 더 과학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70년대 한국 자본주의에 내재한 모순에서 발현되었던 79-80년 경제위기와 정권의 반동적인 재편과정, 이런 정세 속에서 70년대 각 사회운동에서 형성된 주체들의 만남을 오월혁명의 정세로 볼 수 있다. 오월혁명에 대해 다루면서 여전히 지역의 대표적인 정치인이었던 김대중에 대한 정치적인 탄압을 그 원인으로 다루는 경우가 있다. 혹은 영화 ‘화려한 휴가’가 보여주는 것처럼 민중들의 자생적인 투쟁만을 예찬하며, 낭만적으로 오월혁명을 다루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오월혁명이 발생하기 이전의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정치의 공간을 열어내고 이를 영속적인 투쟁으로 만들려고 했던 다양한 사회운동들이 존재했고, 다양한 방식의 개입을 통해서 서로 합력을 창출했던 역사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오월혁명은 운동주체들이 79-80년 경제-정치의 위기에 대해 개입하며, 대중들의 민심이반과 융합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오월혁명은 이후 80년대 운동의 이념을 정초했던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오월혁명은 한국사회에 내재해 있던 다양한 모순이 드러났던 투쟁이었고, 자본주의의 모순과 국가권력의 본질을 드러내었다. 한국의 우방으로 인식되었던 미국이 신군부의 등장을 방기하고, 오월혁명을 묵과한 것이 알려지면서 ‘반미’ 감정이 나타나게 되었다. 60~70년대 박정희 정권 기간에 형성되었던 민주주의라는 보편적인 이념은,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인식이나 미국을 바라보는 시각의 과학성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사회운동의 이념으로 들어온 것이나, 주체사상이 빠르게 보급되었던 것도 오월혁명이 남긴 직간접적인 유산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민주화에 대한 과학적 이념) 한편 이후 ‘민주 대 반민주’ 전선의 형성에 있어서 오월혁명은 운동주체들의 공통의 경험과 부채의식으로 남게 되었고, 따라서 전선운동을 매개하는 투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30년이 가까이 되어가는 역사적 사건을 오늘날 돌아보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70년대 말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도입되었던 신자유주의적 정책은, 이제 한 순환을 마감하며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에 따른 경제위기와 이에 따른 노동자ㆍ민중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거세어지고 있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본질적인 전환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시점이다. 또한 이명박 정권은 비정상적인 통치형태를 보이며 경찰력과 공안을 중심으로 하는 억압적 국가장치에 기대고 있으며, 민심이반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는 형국이다. 하지만 이런 국면을 끝내고 대안세계를 만들 수 있는 대중운동의 주체, 합력을 창출할 수 있는 매개로서 이념의 형성은 요원하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경제-정치-운동의 위기라는 ‘3중의 위기’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월혁명의 정신을 계승하고 광주에 떠나면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정세를 매개로 사회를 변혁하기 위한 대중운동을 만들었던 힘을 살펴보는 것이다. 이 힘은 위기에 대한 민중들의 즉자적인 불만을 넘어 이를 긍정적인 방향의 투쟁으로 만들 수 있었던, 주체와 이념의 형성에 있을 것이며, 이것은 2009년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6. 나아가며

지금까지 ‘오월혁명 정신 계승! 경제위기의 책임전가에 맞서자!’라는 2009년 ‘오월혁명 광주순례단’의 기치를 역사적으로 풀어내기 위해, 79-80년 경제위기와 노동자-민중의 투쟁을 살펴보았다. 단순히 한국현대사의 비극적인 사건을 체험하거나 기념하기 위해 광주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면, 당시의 정세를 통해 현재적 교훈을 추출하려는 노력이 어느 때 보다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오월혁명을 가져왔던 이념은 어떻게 대중들의 이데올로기와 융합했으며, 어떻게 과학적으로 정초되었는가? 이것은 비단 오월혁명 광주순례단을 떠나는 것 뿐만 아니라, 이후 현실의 모순을 바꿔내기 위한 투쟁의 과정에서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행진

2009/05/15 01:13 2009/05/15 01:13
, , , ,
Response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RSS :
http://stulink.jinbo.net/blog/rss/response/183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430-메이데이 투쟁의 결의를 모아
5-6월 더욱 힘차게 투쟁하겠습니다!

 


∥119주년 메이데이 실천단장
수진

대학생의 투쟁으로 민중들의 길을 열자!

4.30·메이데이를 노동자-학생들의 가열찬 투쟁의 날로 만들었습니다.

119주년 메이데이는 끝났지만, 경제위기에 맞선 대학생 공동행동의 투쟁은 계속됩니다!


 

지난 4월 4일, ‘경제위기에 맞선 대학생 공동행동’이 마로니에 공원에서 발족식을 가졌습니다. 각 대학의 공동행동은 한 자리에 모여서 깜깜한 경제위기의 어둠 속에서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 민중들의 생존권을 지켜내는 빛이 될 것을 결의하며 힘찬 투쟁의 첫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그리고 4월 한 달 동안, 전국의 대학과 거리는 공동행동의 활발한 활동으로 들썩였습니다. 공동행동은 민중들의 투쟁이 벌어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함께하며, 경제위기의 책임을 민중들에게 떠넘기는 이명박 정부와 브레이크가 고장난 채 폭주하는 열차와 같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끝내고 대안 세계를 열기 위한 길을 만들어왔습니다.

 

경제위기의 본질을 파헤치고, 학생운동의 대응을 머리 맞대고 함께 논의했던 토론회와 전국 대학생들의 이명박 정부에 대한 요구를 선포하는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청년실업 해결 1만인 행동, 허세욱 열사 추모, 공공부문 선진화와 이명박정부 일자리 정책에 맞선 노동자-학생 공동투쟁, 용산 철거민 투쟁, 비정규직 장기투쟁 촛불문화제, 장애차별철폐의 날, 서울 곳곳에서 열린 차별철폐대행진, 이주노동자 대회, 비정규악법 폐기를 요구하는 기자회견 등으로 너무나 바쁘고 알찬 한 달이었습니다. 이렇게 멈추지 않았던 투쟁들을 총화하고 앞으로의 투쟁을 결의하는 자리로서 4.30 ‘대학생 공동행동 투쟁의 날’을 만들었습니다. 5월 1일 노동절 본대회와 가두투쟁에 함께했고, 5월 2일에는 1년 전 촛불의 뜨거움을 기억하고 그것을 되살리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과 함께 촛불을 들었습니다.

 

투쟁하는 노동자-학생의 앞길이 평탄할 수만은 없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공동행동은 투쟁 속에서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기도 했습니다. 4월 30일 낮에 용산참사 현장으로 달려가 열사들을 추모하며 철거민들을 죽인 이명박정부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를 내려고 했지만, 새카맣게 깔린 전경들은 우리가 유가족/철거민 동지들을 만나는 것조차 가로막으며 곤봉과 방패로 우리를 대했습니다. 그 모습은 100일 전, 용산 철거민들을 죽인 살인경찰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경찰들은 자진 해산하고 있던 공동행동 학생 38명을 강제로 연행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5월 1일과 5월 2일에는 공동행동 학생 5명을 포함하여 200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연행했습니다. 경제위기의 책임 전가로 인해서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민중들의 저항을 강압적으로 막으려는 시도는 곳곳에서 우리를 위협했습니다.

 

그런데 어려움은 이명박과 경찰의 폭력 탄압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노동자와 학생의 끈끈한 연대를 상징하며 매년 대학 안에서 열려왔던 4.30문화제가 원래 예정대로 건국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리지 못하고 후문 밖에서 열려야 했던 것은 이명박의 탄압보다도, 건국대학교측이 경찰에게 ‘시설보호’ 요청을 한 것보다도, 노동자투쟁을 스스로 내쳐버린 학생운동의 탓이었습니다. 건국대 안에서 펄럭이던 ‘우리는 당신들을 초대한 적 없습니다’라는 플랑은 학생운동의 현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에 참으로 마음이 아팠지만, 우리는 그만큼 더 무거운 책임감으로 앞으로 대학 안팎에서 어떤 투쟁을 만들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참 잘 싸웠습니다. 119주년 메이데이를 맞아 터져 나오는 민중들과 촛불의 싸움을 이명박이 그렇게도 노골적으로 막으려고 했던 것은, 그만큼 우리 투쟁이 위협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더욱 더 위협적인’ 싸움을 만들어내기 위해 거리에서, 학교에서, 곳곳에서 만난 시민들과 학우들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대학생들만의 이익에 갇히는 투쟁이 아니라, 민중들과 함께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투쟁과 전망을 만드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더 약한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먼저’ 고통을 전가하는 신자유주의를 이기기 위해서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의 투쟁이 모든 노동자와 학생들의 투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강고하게 연대했습니다. 이명박은 폭력으로 우리의 목소리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저항은 여전히 곳곳에서 살아있고, 더욱 더 강해졌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직 먼 길을 가야합니다. 지난 4월 30일, 절망 속에서 자살을 택한 택배 노동자의 소식은 우리를 너무나도 아프게 했습니다. 그 죽음과 우리의 삶은 거리가 먼 것인가요? 경쟁에서 혼자서 승리해 잘 살 수 있다는 거짓희망에 우리의 삶을 거는 것은 결국 절망과 같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그렇다면 진짜 희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그 거짓희망에 속지 않고 당당하게 나아가는 우리의 투쟁입니다. 택배노동자의 죽음을 잊지 않고 투쟁하겠습니다. 학교에서, 거리에서 확인했던 뜨거움 또한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끄덕였던 학우들과, 촛불을 든 사람들의 눈빛과, 지하철에서 우리 이야기를 경청하며 박수를 보내주었던 시민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이제, 경제위기에 맞선 대학생 공동행동의 투쟁은 다시 시작입니다!

Posted by 행진

2009/05/15 01:12 2009/05/15 01:12
, ,
Response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RSS :
http://stulink.jinbo.net/blog/rss/response/182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