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적 시대인식-집단적 실천으로
대학의 정치를 복원할 학생회를 건설하자!
■ 2009년, 현 시대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1. 금융위기 1년, 위기 전가에 맞선 ‘정치’가 부족했다
1-1. 경기회복론은 노동자 민중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졌다!
지난해 9월 세계 금융위기를 몰고 온 리먼 브라더스 파산사태 이후 1년, 금융위기에서 촉발되어 실물경제에 불어 닥친 후폭풍은 그야말로 거셌다. 수많은 모기지 업체가 파산하였고 메릴린치, AIG 같은 투자은행과 보험회사가 줄줄이 매각되거나 국유화되고, 미국경제를 선도했던 GM, GE의 주가 폭락으로 경제위기는 더욱 심화되었다. 복잡한 그물망으로 연결된 파생금융상품을 타고 위기는 세계 곳곳으로 급격히 전염되었다. 많은 국가들이 단지 주가 폭락하여 개미투자가, 기관투자가 등이 거금의 돈을 공중에서 날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거시적 차원에서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각국 정부는 금리를 대폭 낮추고 수천억 규모의 달러를 공급하는 경기부양책을 내놓으며 활활 타오르는 경제위기의 불을 끄기 위해 난리법석을 피웠다.
최근 세계 경제상황이 호전되고 있다는 보고서와 발표들이 잇따르고 있다. 이들은 지난 1년의 제 조치들에 대한 다양한 평가와 이후 전망을 낙관적으로 그리고 있다. 물론 작년의 금융위기를 예견해 '닥터 둠'으로 불리는 루비니 같은 비관론자들은 경제가 '더블딥'(경기 상승후 재하강) 위험에 직면해 있다는 어두운 전망을 밝히기도 한다. 한국역시 급락세는 일단 진정되었으나 성장세를 확신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분석이 주를 이루지만 전 세계적 경기 반등의 영향으로 한국 경제 역시 지난 상반기를 지나면서 경상수지가 흑자로 돌아서고 주식시장이 급등하는 등 경제 지표가 안정화 국면에 들어섰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한국 경제의 회복이 가능했던 이유의 첫 번째는 자본시장의 거품에 다시 의존하였기 때문이고 둘째는 환율 상승으로 인한 수입 감소로 경상수지가 흑자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2009년 8월 현재 수출은 작년 동기 대비 20% 하락했지만, 수입은 32% 하락하였다. 이 때문에 ‘불황형 흑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심지어 수출 중심의 재벌기업들은 경제 위기 영향을 덜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제 위기로 더욱 많은 이익을 보았다. 시가총액 상위 100개사의 영업이익은 올해 46조 원에 이를 전망인데, 이는 사상 최대 규모의 영업이익을 낸 2004년 53조 원에 버금가는 수치이다.
이렇게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재벌 기업들의 이익이 급등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노동자들의 희생을 강요함으로써 생산비용을 감소시켰고, 정부의 경기부양책의 효과를 톡톡히 보았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했고 부품업체들에 대한 납품단가를 인하함으로써 삭감한 생산비용이 매출액 감소분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한편 상반기 정부의 경기부양책은 대기업들의 소비를 적극적으로 보조해주었다. 국내 노동자들의 소비 감소로 내수를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대기업들의 내수는 약간 늘어나거나 크게 줄지 않을 수 있었다. 재벌기업들이 임금을 삭감하고 그 대신 정부가 노동자들의 세금으로 임금 삭감에 따른 소비 축소를 만회해주며, 재벌기업들의 배를 불려준 것이다. 이것이 정부가 말하는 ‘재정지출 확대하고 조기집행을 서두르면서 경기회복 발판을 마련하였다’는 평가의 진실이다.
최근 여론조사에서도 현재의 경제상황에 대한 기업과 일반 국민의 시각은 엇갈렸는데, 기업들은 바닥을 지난 회복세로 돌아섰다고 말한 반면 국민들은 속도는 줄었지만 아직 경기침체가 이어지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환율 등 수출 환경 개선으로 기업 실적은 좋아졌지만 국민들의 체감 경기는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경기회복과 함께 민중들의 삶은 동반상승하지 않았다. 내년 G20 회의 개최에 대해 "대한민국은 지금 국운 상승의 기회"라며 자화자찬하는 이명박 정부에게 박수칠 수 없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1-2. 위기 전가, 그러나 우리의 정치는 부족했다.
노무현, 김대중 두 대통령의 갑작스런 죽음에 노동자, 농민, 여성, 학생 등 수많은 시민들로 이루어진 추모행렬은 저 세상으로 가는 마지막 길을 성대히 배웅하였다. 겉으로는 ‘민주주의’, ‘개혁’, ‘진보’라는 수사를 달았지만 실제로는 전 세계의 금융세계화에 적극 편입해 들어가면서 더욱 경제의 불안정성을 심화시켜나갔으며 이와 동시에 불안정노동을 확대시켜 노동자 민중에게 참혹한 삶의 굴레로 몰아넣었던 두 ‘신자유주의 전도사’들은 ‘민주’, ‘평화’, ‘인권’ 등의 화려한 훈장을 받아갔다. 반면, 주주와 경영진의 문제로 파산에 몰린 쌍용자동차의 대대적인 정리해고 시행에 맞서 이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노동자들에 대해 정부와 주요 보수언론들은 ‘집단 이기주의’로 그들을 몰아세우며 여론을 압박해갔고, 목숨을 걸고 평택 공장을 지켰던 쌍용차 노동자들의 투쟁은 ‘당사자’들만의 투쟁으로 초라하게 일단락되었다.
결국 정리해고와 임금삭감 등 경제 위기의 책임을 우리에게 떠넘기는 것은 노동자 민중 스스로의 삶의 조건을 크게 변화시킬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변변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삶의 문제에 있어서는 개개인의 능력과 노력으로 해결해야할 문제이지 함께 부당함에 맞설 생각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여기서 다시 정치/경제, 시민/노동자의 분리도식은 재생산되었다.
2. 2009년을 사는 대학생과 정치의 위기
2-1. 자기계발의 양가성에 내포된 반역의 가능성
대학의 변모: ‘정치의 공간’에서 ‘취업준비기관’으로
2009년을 살아가고 있는 대학생들을 표현하는 말을 딱 한 가지만 꼽으라면 '불안'일 것이다. 매일 신문과 뉴스에서 코스피 지수가 올랐다느니 환율이 안정됐다느니 하는 얘기가 나오지만 대학생들이 생활에서 체감하고 있는 경제위기는 여전하다. 사회 전체적으로 비정규직, 정리해고, 청년실업이라는 말이 일상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청춘'들이 푸른 꿈을 펼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불확실한 미래의 시대, 강요되는 위기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대학인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학이 자치단위 등의 공동체들과 그 내부에서의 활발한 자치활동을 담보하는 ‘정치의 공간’에서 ‘취업준비기관’으로 전락한 것은 꽤 오래전부터 익숙한 풍경이다. 예전에 학생사회는 누군가 나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치(自治)를 통해 직접 발언하고 행동하며 집단적으로 문제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정치의 역량을 강화해 왔다. 대학 내에 다양한 공동체(학생회, 동아리 등 자치단위)내에서 저항을 위한 지식과 실천을 담보해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저항의 경험은 새로운 구성원들에게도 계승될 수 있었다. 하지만 불안정한 노동이 사회 전체로 확산되고 그 결과로서 빈곤이 확산됨으로 인해 대학교육을 훌륭한 성적으로 이수한다고 해도 바로 취업이 되지 않는 상황은 고등교육의 근간 자체를 흔드는 요인이 되었다. 취업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대학인들에게 자신을 돌보는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삶의 양식은 미덕이 되고, 끝을 모르는 경쟁마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소위 ‘멀티족’이라 불리며 영어학원, 헬스, 영화감상, 학점관리 등의 스케줄이 다이어리에 빼곡하게 적혀있는 ‘열심히 사는 대학생’이 그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러한 삶의 양식인 ‘자기계발’은 신자유주의 시대 불안정한 노동/유연한 노동이라는 자본의 요구에 걸맞은 ‘다용도성’을 기르는 것을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라 생각하여 끊임없이 다방면의 지식과 경험을 쌓는 것을 중요한 삶의 자세라 여겨진다. 그리고 대학에서 생산되는 지식이 자본에 적합한 기술로 전락하고, 자치 공동체와 학생운동이 소실된 상황에서 대학인들의 공통의 경험과 지식은 사라지고 있다. 지금까지 구축해왔던 대학인들의 동일성은 해체되고, 대학 안에서도 나이별ㆍ성별ㆍ지역별ㆍ학과별 차이에 따라 분절화ㆍ파편화되어 간다. ‘집단’의 문제를 ‘집단적으로’ 해결하는 법을 모르고, 그 전통이 점차 유실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대학인의 내면적 갈등: 자기계발의 양가성
그러나 이렇게 자기계발에 힘쓰는 대학인 내면에는 모순이 발생한다. 스펙 쌓기로 빡빡한 삶을 잘 살다가도 ‘이게 아니다!’라며 지금 이렇게 굴러가는 사회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불만과 마주치는 것이다. 영어학원, 헬스, 학점관리 등으로 빡빡한 삶의 궤도에서 약간만 벗어난 취미생활과 같은 활동을 하더라도 자기 스스로를 ‘잉여인간’이라 칭하며 한숨 섞인 체념을 하는 정서나, 엄친아/엄친딸이 떵떵거리며 다닌다는 삼성에 취업하고 싶어 하면서도 새벽같이 출근해서 자정이 다되어서야 퇴근하는 그런 삶을 비인간적이라며 고개를 가로젓는 모습. 이는 신자유주의가 강요하는 자기계발의 삶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양가적이다. 대학인의 진보적인 열망을 찾을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여기인데, 자기계발의 한계에 맞닥뜨릴 때 “그렇다면 어떤 자기계발이어야 하는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는 것이며 유의미한/가치 있는 삶에 대한 통찰이 이뤄지게 된다.
이런 가운데 대학인들의 자기계발은 단지 자기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자기계발이 아니라 소위 ‘진보적인 것’에 대한 자기계발까지 포함하고 있다. 사회적 기업, 아름다운 가게, 공정무역 상품의 소비, 진보적 지식인에 대한 희구, 환경/생태 문제에 대한 관심 등이 이런 것일 텐데, 그럼에도 이것이 개인의 일상 속의 실천 혹은 지식이나 의식 정도로 그치게 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적 삶의 굴레를 벗어던지게 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자기계발 담론으로 흡수되어 ‘박제화된 진보’로 남는다.
2-2. 대학의 정치는 부재중, 해답은 어디에?
‘집단적 저항’의 경험 부재ㆍ불신과 ‘정치의 공간’의 형해화
이명박 정권에 들어와 신자유주의적 정책들은 한 겹 포장도 하지 않은 채 ‘경쟁’과 ‘시장’을 중심으로 추진되는 한편 모든 국민의 입에는 재갈을 물리고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틀 안에서 공권력을 최대한도로 발동시키고 있다. 너무나 상식적으로, 이런 시대일수록 우리들의 정치와 집단적 저항이 더욱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인들이 저항하지 않는 이유는 집단적 저항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거나, 집단적 저항으로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대학 내 정치의 공간이 축소되거나 유실된 결과라는 측면이 크다. 작년 촛불집회 때 언론에서는 대학생들이 취업과 자기이해에 매몰되어 거리로 나오지 않는다고 비아냥대듯 말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촛불이 켜질 때부터 꺼질 때까지 많은 시민들과 함께 광장을 지켰지만 이전의 모습과 달리 학생회 등의 단위로 묶이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 사례가 거듭 상기시키는 것은 바로, 08-09년 대학은 ‘정치의 공간’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가슴 아픈 현실이다. 정치의 공간이 인터넷 댓글, NGO 활동 등 ‘학교 밖’으로 이동한 상황이다.
집단적 경험의 유실이 정치의 공간을 축소시키고, 이것이 다시 경험을 더욱 왜소하게 만드는 상황. 이 악순환을 이제 끊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대학인들은 진보적 삶에 대한 열망을 표출하고 이것이 대학에서의 자치의 활성화로 수렴되어야 한다.
‘모두’가 살아남기 위한 집단적 저항이 필요하다!
최근에 벌어진 KBS 비정규직은 누구 못지않은 자기계발을 통해 부푼 희망을 안고 언론사에 취직하여도 아무 이유 없이(자본의 위기를 전가하기 위해!) 잘려나가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지금의 청년실업, 비정규직의 문제 등의 위기는 개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구조적 문제이기 때문에 개인의 노력, 행위로는 일정 해소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극복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자기계발은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돌보고 자신의 삶과 일상을 규정하는 조건, 문제를 집단적으로 해결하는 과정을 해체시키는 대신에 취업/승진할 때 기업으로부터 더 높은 점수를 따고 인정받기 위하여 자기자신을 끊임없이 경영해야할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삶의 양식을 내면화시킨다. 이런 과정에 따라 우리의 삶의 문제는 개인 혹은 가족 정도의 바운더리 안에서의 노력을 해결될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 체념하게 만든다.
그러나 앞선 자기계발의 양면성은 자기계발 속에서도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개인적 욕망과 사회적 기여를 하고자 하는 진보에 대한 열망이 혼합되어 있다고 했다. 자기계발하는 삶의 한계성, 나아가 이것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불만과 부정을 통한 ‘어떤 자기계발을 할 것인가?’라는 내면적 고민에 우리는 주목하고 이 열망이 개별적인 실천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집단적인 토론과 실천의 장에서 함께 함으로써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집단적 저항’은 대규모의 대학생, 군중이 지금당장 거리로 뛰쳐나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의 시대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과 합의를 만들어 나가는 토론(집단적 인식과 집단적 토론)을 모두가 함께 해나가는 과정, 그리고 그 결과로서 서로의 삶이 함께 변하는 것이어야 한다. 집단적 저항이 대학의 정치를 복원시키기 위한 핵심적 과제이다. 이를 통해서만 다양한 기제를 통해 개개인으로 분할착취, 관리되고 있는 노동자 민중 그리고 학생. 이러한 자본의 전략에 맞서 연대할 수 있다.
‘여기’가 살아나기 위한 정치의 복원이 필요하다!
지금 대학은 정치가 실종된 상태이다. 대학 내에서 집단적인 고민, 논쟁과 실천이 부족하다보니 소속 학과가 사라지는데도, 성차별적 문제가 횡행하는데도 어떠한 움직임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대학/학생사회는 공동체의 다양한 문제를 토론하고 논쟁하면서 해결해나가는 정치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쟁점들에 대해 개인의 진보적 활동에 그칠 것이 아니라 문제에 직면해있는 구성원들과 함께 하는 ‘정치의 장’을 복원시키는 것에서부터 민주주의와 진보는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를 개별적으로 학습한다고 사회가 민주화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 등 이념을 함께 공유하고 토론하면서 이를 구체적인 현실에 적용하는 실천해야 한다.
특히 대학(교육)이라는 공간은 인터넷 동호회 등과 달리 이데올로기 재생산이 이뤄지는, 즉 계급투쟁이 이뤄지는 곳이라 할 때 대학 내 정치의 복원은 대학을 넘어 전 사회적인 정치의 위기를 완화시킬 수 있는 파급력을 가진 (여전히) 유효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다시금 대학이 ‘정치의 공간’으로, 정치의 공간이 생겨날 수 있도록 하자! 물론 이런 과정이 하루 이틀 사이 큰 성과로 나타날 수 없다. 학생회, 그리고 이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장’을 만들고 이런 논쟁과 저항의 경험을 축적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학생회 선거는 이런 기획의 시작에 있다. 선거에서부터 논쟁의 장을 열어나가자!
■ 2010년대를 예비하는 대학인의 실천전략 : 정치의 복원
금융위기 1년, 어찌하였든 위기는 봉합되었다. 지배계급의 위기를 일시적으로나마 벗어나기 위한 전략은 경제 위기의 책임과 비용을 노동자 민중에게 떠넘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추진되고 있는 (위기의 원인인) 금융화에 기댄 위기 극복이라는 아이러니한 해결책으로 지금의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를 결코 극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계속적으로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은행의 위기나, 달러의 위상 하락과 같은 문제가 여전히 잠복해있고 이것이 이후 더욱 큰, 더욱 파괴적인 위기의 양상으로 표출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지배계급은 위기 전가에 대한 불만과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동자, 여성, 학생 등 분할하여 관리하고 있는데, 여기에 맞서는 주체들의 대응은 각각 ‘이해 당사자’로 분리되어 서로 개별적인 문제해결에 급급하고 있는 것이다. 정권에 대한 불만 또한 광범위하게 존재하지만 한번 타고 사그라지는 촛불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특히 대학이 ‘정치의 공간’으로서의 성격이 탈각되어 있는 조건에서, 대학인들은 자기계발적 삶의 한계 속에서 진보적 실천을 꿈꾸지만 개별화된 실천을 함으로써 기존의 강력한 자기계발의 담론의 벽을 쉽게 넘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의 대안이다!
단발적인 촛불 그리고 시대에 대한 개별화된 불만과 저항으로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도, 지배계급의 공세를 막아낼 수도 없다. 신자유주의가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민중들의 삶의 문제 그리고 그것이 필연적으로 배태하는 민주주의의 후퇴에 맞서기 위해 우리에게는 어떤 전략과 전술이 있어야 하는가? 특정 개인에 대한 증오나 그리움으로 대체될 수 없는 노동권, 지식권/교육권, 여성권, 평화권 등과 같은 권리를 매개로 우리 스스로의 삶에 대한 발언권, 결정권, 통제권을 요구해야 한다. 또한 지금의 집단적인 저항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조건을 복구하기 위한 대학인 모두의 행동이 요구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노동자 민중들의 삶을 빈곤하게 만들고 불만을 가중시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들을 함께 논하고 밝히면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나갈 ‘우리의 힘’을 키워나는 것이야 말로 이명박 시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다.
▷집단적 시대인식을 하는 학생회!
시대를 과학적으로 인식하며 정권과 자본의 폭력성에 대항하는 지식을 함께 학습하자! 이것은 현 시대의 빈곤과 경쟁, 각종 폭력이 발생하는 우리 일상을 제대로 분석하고, 이에 맞선 저항하기 위한 기본 중 기본이다. 대학인들이 개별적으로 책, 인터넷 활동 등을 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학생회 활동을 하는 몇 몇의 사람들만 학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위기를 고민하고 걱정하는 이들 모두가 함께 시대인식을 공유하고 토론하는 계기, 공간을 열 수 있어야 한다.
ㅇ청년실업
: 청년실업의 문제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이 문제가 자본주의 안에서는 절대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지배계급이 제시하는 기만적인 해결책들(금융화를 비롯한 청년실업 해결을 이야기하는 정책/제도)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적극 알려내면서 은폐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폭로해 가야한다.
ㅇ대학의 금융화
: 대학 또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흐름에 조응하며 자태변화한 지 오래되었다. 금융화가 요구하는 지식과 노동력에 맞게 대학의 운영원리, 교육과정 등을 총체적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이러한 대학의 변화에 주목하여 금융화의 문제를 폭로해야 한다.
▷집단적 토론과 논쟁을 기획하는 학생회!
정치를 복원하기 위해 ‘집단화’하는 기획이 중요하다. 현재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대중들의 불만을 한 곳으로 수렴하며 발전시켜 나갈 공간을 건설하는 것은 정치의 조건을 쌓아나가는 주춧돌이 될 것이다. 또한 토론과 논쟁을 가능하게 할 전제로서 정보와 지식의 공유가 중요하다. 이러한 집단적 토론/논쟁을 학생회가 주도해나가자!
ㅇ대항공간을 만드는 학생회!
: 빈곤과 억압, 착취의 폭력에 불만을 느끼는 대학인들을 집단화시켜야 한다. 각 사안/의제에 대한 다양한 쟁점들을 함께 토론하는 공동체를 건설하자.
ㅇ대항담론을 가져오는 학생회!
: 대항공간에 함께 하는 모든 이들이 학습하고 고민하는데 필요한 각종 정보와 지식이 공유될 수 있어야 토론과 자치의 실험은 활성화될 수 있다.
▷집단적 저항의 키워드로서 페미니즘을 실현하는 학생회!
‘페미니즘’은 여성들의 자기계발 방법론이 아니다. 공동체를 재건하고 정치를 복원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 원리 원칙이다. 여/남간의 성적 차이를 긍정하며 이런 차이를 고려한 공동체를 만드는 ‘정치학’이 바로 페미니즘일 것이다. 왜냐하면 여성에게 불합리하거나 폭력적인 상황을 발생케 하는 것, 결국 여성을 배제하는 남성중심적 문화 속에서 공동체는 결코 온전히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적 차이가 권력의 차이로 연결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관계맺음 방식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이를 위해 페미니즘은 우리가 다시금 되찾아야 할 저항의 언어/해답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ㅇ여성노동권을 적극 발언하자!
: 여성의 노동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여성에게 일과 가정 모두를 책임져야 한다고 강요하는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폭로하자. 또한 투쟁하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의 싸움에 연대하며 학생사회에 알려내자.
ㅇ공동체에서 페미니즘을 함께 고민하고 논쟁할 수 있는 기획을 마련하자!
: 페미니즘을 고민할 수 있는 토론의 장을 열고 대중들이 처한 상황과 인식 양태에 맞는 언어와 실천을 발굴하고 이를 공유하고 토론하는 계기를 마련하자. 관련한 학습할 수 있는 공부방 등 구체적인 형태의 사업을 기획하자.
ㅇ여성에 대한 폭력으로서 성폭력에 반대하자!
: 수년간 잊힌 반성폭력 규약을 재개정하는 등의 계기를 마련하여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서 성폭력, 특히 최근 이슈화되는 극단적 폭력의 형태가 발생하기 않게 하려면 사회적으로 여성이 성적 대상화 되는 문제나 폭력의 대상이 되는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Posted by 행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