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대학입니다
페미니즘? 여성 우월주의?
‘페미니즘’하면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여성 vs 남성 대결구도, 드세거나 피해의식에 가득 찬 여자, 여성부… 등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살면서 페미니즘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페미니즘은 남성 vs 여성을 상정해놓고 조금이라도 남성의 영역을 더 차지하려는 여성들의 논리가 아니다. 오히려 페미니즘은 이 세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상식을 뒤집는 새로운 관점, 그러면서도 명쾌한 관점을 제공한다.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즘은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충격적이고,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유용할 수 있다. 페미니즘은 하나의 새로운 세계관이자 현실을 분석하는 이론이기에 이것을 통해서 대학생활에서 보이지 않았던 부분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가 부대끼며 살아가는 공동체부터, 취업의 문제까지 페미니즘의 눈을 통해 새롭게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
“원래 다 그래”가 누군가에게 폭력이 되는 순간
어떤 대학생활을 해야 할까 가슴 설레는 시기 누군가는 핑크빛 연애를, 누군가는 술 먹고 밤새 노는 일을, 누군가는 푸른 잔디밭에서 토론하는 문화를 마음에 품고 대학에 들어왔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지만 대학에서의 과/반/학회/동아리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마음의 고향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고향이라고 해서 항상 행복하리라는 법은 없는 법.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면서 누군가는 상처받고 누군가는 소리 없이 떠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생각해보면 모두가 즐거울 수 있는 공동체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사실이다. 그렇다면 무조건 즐거울 것만 같은 대학생활에서 무엇이 문제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술자리 문화
한꺼번에 수많은 선배, 후배들이 만나며 웃고 떠들고 친해지는 3월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술이다. 술 마시고 과실에서 뻗기, 술 마시고 수업 째기, 술 마시고 집기 부수기 등 술과 관련한 온갖 에피소드들이 학기 초 공동체를 가득 채운다. 술자리에서는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최대한 술을 많이 먹고 먹이고, 큰 소리로 FM과 응원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속에서 누군가는 재밌게, 누군가는 불편하게 사람들과 어울린다. 그런데 단순히 개인의 취향에 따라 술자리가 좋고 싫은 것이 아니라 술자리 문화가 남성 중심적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불편해지는 거라면 이것은 개인의 취향을 넘어서는 문제로 사고되어야 한다.
술자리가 남성 중심적이라는 것은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일반적으로 술자리에서 ‘잘 논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남성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다. 때문에 술자리를 주도하는 사람은 그것이 남학우든 여학우든 상관없이 사회적으로‘남성적’이라고 생각되는 면모를 발휘함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보호해주는 사람 없이 만취하는 것이 금기시되고, 통금이 있는 여학우들의 경우 술자리에서 오래 남기 힘들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술자리에서 인간 대 인간으로서 인적네트워크를 쌓는 사람들은 남성적 정체성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여성도 여기에 낄 수는 있지만 결코 ‘여성’으로서 함께하는 것은 아니다. 예쁜 여학우가 남자선배들한테 이쁨 받는 분위기, 같은 과/반 여학우의 외모에 대한 평가 등이 술자리나 과실에서 공공연하게 시작되면 공동체 문화의 남성중심성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특히, 술자리에서의 원치 않는 스킨쉽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점은 남성 중심적인 술자리문화에서 남/녀의 관계가 주로 연애대상으로 생각되는 분위기가 여학우를 성적으로 대상화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동체 운영하기
새터, 개강파티, 세미나, 동아리 활동 등 공동체가 굴러가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대학생들이 스스로 꾸려나가는 자치활동 속에서도 여러 가지 역할이 성별화되어서 나타난다. 사람들을 이끌고 분위기를 주도하고 선배들과의 접대, 단체 연락을 담당하는 역할과 술집 예약/과티 제작/술 취한 사람 챙기기/뒷정리 등의 실무 역할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겠다. 그런데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알리는 대표자 역할과 실무 역할이 분리되어 한쪽에게 몰리는 경우가 많다. 학회를 예로 들어본다면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들어주는 선배와 개인적인 고민이나 연애 상담을 들어주는 선배가 나뉘기도 한다.
이는 마치 가족 내에서 어머니/아버지의 역할 분담을 떠올리게 한다. 사회적으로 여성과 남성에게 요구되는 역할이 대학에서도 적용되면서 알게 모르게 여선배가 공동체에서 일정 이상의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게 만들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누군가에게 고의로 상처를 주려고 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전체 사회에서 보편적인 문화가 남성 중심적이기 때문에 이것이 대학사회에서 그대로 투영된 것일 뿐이다. 이렇게 페미니즘의 눈을 통해서 우리에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그 자체로서 성별 권력관계를 내포할 수 있다는 인식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모두가 행복한 공동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여성 남성을 갈라서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공간 또한 권력관계가 작동하는 공간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해결해나가기 위한 노력을 ‘함께’ 시작하는 것이다!
관계맺음에도 고민과 토론이 필요하다! : 반성폭력 자치규약의 의미
우리가 속한 공간에서도 알게 모르게 성별 권력관계가 작동하고 있었다면, 이것이 개인 잘잘못의 문제를 넘어 우리 사회의 문제라면, 이것을 바꿔나가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변화는 일상의 관계맺음에서부터 고민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와 공동체 문화도 ‘원래 그랬고 당연한 것’이 아니라 ‘구성되어 온 것’으로 다시 인식하는 과정이자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경계를 흐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선배들이 만들어왔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반성폭력 자치규약’이다. 반성폭력 자치규약이란 새터나 엠티, 농활 등 남/녀가 압축적으로 함께 지내는 활동에서 성폭력적인 상황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 구성원들이 합의하는 자치규약이다. 자치규약은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는 금기가 아니라 그것을 구성원들이 공동으로 만들고 합의하는 데 가장 큰 의미가 있다. 공동체에 자치규약이 왜 필요한지, 알게 모르게 누군가에게 폭력이 되는 일들이 일어나지는 않았는지,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일상적인 문화였는지를 이야기하는 데에 가장 큰 의미가 있다.
<반성폭력 자치규약 예시>
* 여/남은 성차별적 언행이나 서로를 대상화하는 언행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있습니다. * 성적 소수자는 성차별적 언행이나 성적 소수자를 적대시하는 언행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있습니다. * 여성은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여성다움’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가집니다. * 여성은 불쾌한 신체접촉을 당하지 않을 권리를 가집니다. * 여성은 여/남이 함께 즐거운 술자리를 즐길 권리가 있습니다. * 여/남은 성적 고정관념과 성역할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있습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합시다. - 누군가에게 술 취한 사람을 보살피는 역할, 술자리 준비와 뒤처리를 전담시키지 맙시다. * 성폭력을 목격하거나 성차별적 언행을 보았을 때, 분위기에 편승하거나 방관하지 말고 누구나 이의를 제기합시다. 이의제기는 과민반응이 아니라 모두가 성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하는 당연한 권리입니다. * 상대방의 싫다는 표현을 진지하게 받아들입시다. 더불어 성폭력, 성차별로 인한 불쾌감은 그 자리에서 분명하게 표현합시다. * 여/남의 최소한의 독립된 공간을 보장합시다. |
여대생에게 취업과 결혼
그렇다면 이제 대학생활에서 더 시야를 넓혀보자. 알파걸․골드미스 등 이제 여성우위시대가 도래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많이 들려오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해서 사회로 나갈 때 여성들은 가장 절실하게 ‘여성’인 자신을 느끼게 된다. 같은 스펙을 가지고도 더욱 취업하기 어렵고, 여러 가지 취업 준비 중에 성형수술이 한 축을 차지하기도 한다.
한 때는 여대생이 취직이 잘 안 되는 것이 불합리하기는 하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 아니겠냐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기도 했다. 똑같은 비용을 들여서 고용을 해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여성도 직업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시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여성들에게 가정을 꾸리는 것과 직장 일을 하는 것은 대립되는 것처럼 여겨지고, 여러 가지 이유로 여전히 여성은 노동시장에서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여성에게 일과 가정은 어떤 의미일까?
출산서약
저출산이 사회적인 문제로 떠오르면서 성신여대에서는 저출산 관련 특강을 열며 여대생들이 저출산 문제 해결의 일주체가 될 것을 서약하게 하는 일이 있었다.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증가하면서 출산율은 더욱 낮아지고 있는데 이것은 여성이 직장 일을 하면서는 가족 내에서 여성이 수행했던 육아나 가사노동을 병행하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여성의 경제활동참가 패턴을 보면 M자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30대 초반을 전후해 경제활동참가율이 갑자기 떨어지고 30대 후반 이후 다시 증가하는 양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출산과 육아가 집중되는 연령대(1990년대 후반까지는 20대 후반, 2000년대 이후에는 30대)에서는 경제활동참가율이 급격히 떨어졌다가 이후에 다시 상승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곧 여성은 출산과 동시에 노동시장에서 이탈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일과 가정이 대립되는 현재의 상황은 이미 전 사회적인 문제인데 출산서약은 저출산의 원인을 여성들이 이기적이거나 의식수준이 낮기 때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결심하면 저출산이 해결될 것처럼 대학이 앞장서서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취집
한편, 지난 해 사상 최대의 취업난 속에서 ‘취집’이라는 신조어가 유행했다. 이는 집에 취업한다는 뜻으로 힘겹게 취업하는 준비할 게 아니라 결혼이자 하자는 자조석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보면서 여성은 가족 부양의 부담도 적고 참 좋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성도 일을 하지 않고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조건에서 가장이 아니기 때문에 부담이 적을 수 있겠지만 또한 가장이 아니어서 취업하기도, 해고되기도, 정규직이 되기도 힘든 것이 여성의 현실이다.
일과 가정을 함께 꾸릴 수 있는 진정한 방법
최근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도록 전일제가 아닌 파트타임, 재택근무와 같은 형태의 고용형태를 늘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거세게 제기되고 있다. 이는 일자리를 늘리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국 정규직을 줄이고 불안정한 일자리를 늘리는 명분이라는 비판 또한 거세다. 그렇다면 대체 진정한 문제 해결의 방법은 무엇일까. 가정을 꾸려야 하는 여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불안정한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성만이 가정을 꾸리는 데 필요한 노동을 해야 한다는 관념을 깨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일을 하면서 제대로 대우받고, 가정을 꾸릴 수 있는 방식으로 사회가 변화해야 한다.
대학에서부터 다시 페미니즘을 시작하자!
이렇게 대학의 일상생활에서부터 대학졸업 이후의 노동까지 여전히 함께 해결해야할 문제가 많이 남아있다. 대학생활이나 취업 등의 문제에서 여대생은 다른 경험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여성의 문제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단순히 여성만의 문제를 넘어 전체 사회의 문제로 이야기되어야 한다. 그러나 남성중심적 공동체 문화나 여성의 노동에 대한 권리가 대학에서 화두가 되거나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별로 존재하지는 않은 것이 현실이다.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유명한 정치가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발 딛은 대학에서부터, 일상에서부터 고민하고 토론하는 것으로부터 변화의 첫걸음을 시작하자!
Posted by 행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