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85년 후반~87년 6월 항쟁 : 개헌 정국과 5공화국의 몰락
85년 4월 대우차 파업, 5월 미문화원 점거 농성, 6월 구로동맹 파업, 7월 소몰이 시위 등을 지나며 형성된 정세는 전두환 정권을 동요시키며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고 이에 5공은 다시금 강경정책으로의 선회를 도모하게 된다. 이러한 지배계급의 공세에 맞서서, 학생운동은 상당히 많은 쟁점들을 담고 있기도 한 개헌 문제를 점차 제기하며 이른바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개헌정국’을 열게 된다.
이러한 정국에서 86년 초 민청련 전 의장 김근태 씨에 대한 고문사실이 폭로되고, 7월에는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폭로, 결정적으로 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계기들은 정권의 도덕적 파산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사건들이었으며 4월의 호헌조치와 맞물려 대중들의 분노는 폭발하였고, 87년 6월 항쟁이 시작되었다. 역사적 사건이었던 6월 항쟁은 지배세력과 제야세력들에 의해 ‘협상된 이행’을 통해 형식적 민주화라는 이데올로기를 남기며 봉합된다.
2-6. 87년 노동자 대투쟁
비록 6월 항쟁은 봉합되어 마무리되긴 했지만, 그 동안 억눌려왔던 노동자들은 6월 항쟁 당시의 대중적 열기 속에 그 분노를 폭발적으로 분출함으로써 6월 항쟁의 봉합으로 조성된 정치적 교착국면의 역동성을 대폭 강화하였다. 그리고 이는 85년 이후의 일시적인 이윤율의 반등에 따른 호황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은 변하지 않았을 뿐더러 억압적인 작업장체제에 대한 불만(그 당시 구호 중 하나가 ‘작업화 신고 조인트 까지 마라’) 역시 조건으로 작용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임금인상’, ‘차별대우 철폐’, ‘민주노조 건설’라는 주요기조로 시작된 노동자대투쟁은 공단이 밀집해 있던 지역에서부터 점차 확산되어 전국을 휩쓸고 올라오면서 수도권과 거의 모든 직종의 노동자들도 투쟁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이는 8월에 접어들며 폭발적으로 고양되고 8월 셋째 주(8.17~23)에 이르러서는 1주일 동안 880건의 파업이 발생하고, 113개의 노조가 새로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8월 말부터 국가의 억압적 통제기구들이 폭력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였고, 9월 초에는 한 주 동안 10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연행되고 200명 가까이가 구속되는 한편, 전경련과 언론 역시 이러한 반열에 동참하기 시작하는 등 공세적인 탄압이 계속되면서 완연한 소강국면으로 접어들다가 9월 말에 일단락된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당시 3개월 동안 파업건수는 3255건, 파업 참가자수는 122만 명이었다.
상술한 87년 노동자들의 대투쟁은 작업장에서 현장 권력에 기반한 민주적 권리의 쟁취, 임금과 노동조건에 대한 개선 등 형식적 민주화가 포괄해내지 못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문제제기를 담고 있었다는 점에서 소위 ‘형식적 민주화’라는 이데올로기에 일정한 파열을 내는 것이었다. 또한 그 이전부터 이미 노조설립과 노조민주화를 위해 초보적이나마 목적의식적인 준비과정이 있어왔던 중에 6월 항쟁이라는 ‘계기’를 만나면서 자연발생적으로 폭발하였다는 점과 함께 투쟁의 전개과정에서도 거의 모든 형태가 초(超)법적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질서정연하게 이루어 졌다는 점에 주목해 볼 수 있다. 덧붙여,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듯이 79-80년의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구조조정 속에서 대공장 남성노동자들이 노동시장의 중심에 서게 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가족이데올로기/가족임금의 강화와 더불어 87년 대투쟁을 중화학공업 남성 노동자들이 주도할 수 있도록 했던 조건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대중적인 대규모 연대 파업 투쟁의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스스로 단련될 수 있었고 ‘노동자가 세상의 주인이다’라는 집단적 이데올로기를 형성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운동과 정치운동의 전폭적인 연대투쟁 속에서 전선을 형성해내는 데에는 사실상 실패했다고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독재타도! 호헌 철폐!”를 구호로 ‘민주vs반민주’ 전선을 형성했던 민중운동이 6·29 선언을 기점으로 ‘전선에서 이탈’한 문제와 함께 사고되어야 하는데, ‘6.29선언’을 통해 지배계급과 함께 양 김씨를 필두로 한 소위 재야세력 역시 이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으며, 지배계급의 이러한 분할관리 전략은 이에 맞서는 대중운동의 폭발로 이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3부.87년 이후 노동운동의 전개와 노동운동의 위기
97년의 경제위기는 96년 이후의 외환위기라는 순환적 위기와 맞물려 발생한 것으로서, 한국 자본주의의 심대한 구조적 위기를 의미한다. 97년 위기 이후, 주된 금융적 축적 경로인 이자, 지대, 배당 가운데 배당액이 차지하는 비율이 크게 증가함으로써 기업지배구조에 큰 변화가 진행되었고, 외국인 투자자의 비율은 매우 높아졌는데 이는 이미 남한사회가 자본 이동과 금융화로부터 이미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금융자본이 선도하는 고정자본의 투자는 기본적으로 늘어나고 있긴 하지만, 이것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방식이 아닌, 기존에 축적된 부를 배타적으로 집중하는 것으로써 경제의 불안정성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재벌들은 구조조정 등을 경험하면서 금융화된 경제 시스템에 적응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3-1. 전노협, 그리고 민주노총의 건설
87년 대투쟁 당시의 ‘노동해방’이라는 구호는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공식적으로 논의된 바는 없지만, 억압당하고 궁핍했던 당시 민중들의 있는 그대로의 요구 그 자체였다. 이러한 배경을 안고 1990년 1월 출범한 전노협은 87년 대투쟁 이후 노동자투쟁의 기본모델로 제시된 ‘대중파업의 일반화’와 더불어 ‘노동조합 문화·일상 활동’의 확보, ‘사업장 현장에서의 통제력’의 확보 그리고 ‘가족임금·가족 이데올로기’ 등을 배경으로 남한 노동운동의 명실상부한 표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전노협은 ①노사협조주의 배격과 자주성과 민주성의 확립, ②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통일, ③기업별 노조의 극복과 산업별 노조의 건설을 표방, ④궁극적으로 경제ㆍ사회구조의 개혁과 조국의 민주화ㆍ자주화ㆍ평화통일 등을 노동운동의 이념-노선으로 삼고 있었다. 물론, 당시 노동운동의 조건과 지형 상 실제로는 개별 기업주를 상대로 하는 단위 사업장 차원의 임금투쟁과, 정치권력을 상대로 하는 노동운동 탄압저지투쟁에 대부분의 운동역량을 투여하게 되면서 전노협의 운동이념은 경제적 조합주의와 정치적 조합주의가 혼재된 상태로서 불분명했다고 할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노사협조주의 배격과 자주성·민주성의 확립’ 및 ‘전투성’이었다.
전노협은 87년 대투쟁의 성과로서 각 지역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성장하던 전투적인 민주노조운동의 ‘지역노동조합협의회(지노협)’을 계승하고 있었는데, 이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업종노동조합협의회(업종협)’이 포괄하고 있던 비제조업 사무직 노동조합들, 그리고 대기업 노동조합들은 참가하지 않았으며 전노협은 ‘제조업과 중소기업 중심’의 연대체로 이해될 수 있다. 이는 87년 이후 자본의 분할지배전략 하에서 각 산업 부문 별로 노동통제양식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에서 일정부분 이해될 수 있으며 몇 년 뒤의 (평가와 쟁점은 일단 뒤로 미뤄두더라도)민주노총이라는 ‘새 그릇’을 만들려고 했던 시도들로 이어지기도 한다. 전노협 중심론전노협 한계론정세전망탄압지속탄압완화민주노총건설시기가능한 늦게가능한 빨리민주노총건설중심전노협3자 대등론산별조직원리산업별업종별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총 건설과 산별노조 이행이라는 쟁점을 둘러싸고 조직발전 논쟁의 격론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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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노협 중심론 |
전노협 한계론 |
정세전망 |
탄압지속 |
탄압완화 |
민주노총건설시기 |
가능한 늦게 |
가능한 빨리 |
민주노총건설중심 |
전노협 |
3자 대등론 |
산별조직원리 |
산업별 |
업종별 |
이러한 논쟁은 ‘91년 투쟁’의 패배를 전후한 ‘노동운동 위기론’의 효과가 작동하는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90년대 초 노동운동 위기 논쟁의 주요 쟁점은 ‘전투성’으로, 지배계급에 의해 노동운동의 전투성이 대대적으로 공격받음과 동시에, 노동운동 내에서도 대기업 노조들을 중심으로 전노협과는 다른 노선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전노협이 출범시기부터 산별노조로의 자기발전전망을 밝혔듯이 당시 모든 노동운동 세력들은 민주노총/산별노조의 대의에 모두 동의하고 있었으나, 한쪽은 무리하고 형식적 조직재편보다 투쟁성을 계승할 수 있는 운동과 그 조건들을 강조하고 조직원리도 가장 광범위한 연대를 확보할 수 있는 산별형태를 주장하였고, 다른 한쪽은 전노협, 업종회의, 대기업노조 모두 포괄하는 전국조직의 건설을 시급한 과제로 인식하며 조직원리도 현실적으로 연대할 수 있는 업종별 단위를 주장하였다. 전자를 ‘전노협 중심론’, 후자를 ‘전노협 한계론’으로 통칭한다.
90년대 중반을 지나며 대공장의 민주화 바람이 불고 이로 인해 ‘대공장을 주요 동력으로’ 즉각적으로 산별로 이행하자는 의견이 등장하게 되면서, ‘전노협 한계론’은 더욱 힘을 받게 되고, 이것은 다시 ‘先민주노총, 後산별’로 이어지며 이는 다시 ‘先민주노총 後 노동법 개정투쟁’으로도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과정과 논쟁에 대한 평가는 잠시 미루고 이러한 논의의 과정이 점차 주도권 다툼으로 진행되면서 수차례의 논의와 결정 번복이 이어지며 상층 중심의 논의-결정 구조의 경향을 보이게 되었으며 현장 노동자들과 분리되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는 점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는 이후 민주노총 건설 이후의 상층 지도부 중심의 의사결정 구조를 고착화하는데 일조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미조직 노동자 조직화, 산업별 노조 건설, 전체 노동조합운동 통일 등의 과제가 놓여 져 있는 상황에서 1995년 민주노총은 명실상부한 남한 노동운동의 단일한 센터로써 출범했다. 민주노총은 87년 이후 형성된 민주노조의 총결집이며, 한국노총과 대당되는 새로운 노동운동을 선포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마지막으로, 전노협의 건설과정과 전노협 해소-민주노총 건설의 과정과 그 간의 논쟁에 대한 ‘잠정적인 평가’를 진행해 보자. ‘과연 민주노총이 전노협을 계승한 것이냐’라는 문제는 결국 ‘현재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 노동운동의 위기를 어디까지 소급할 것인가’라는 매우 핵심적인 쟁점이다. 이 쟁점에 대한 특정한 입장은 ‘전노협이 특정 정치세력에 의해 청산 당했다’고 보는 입장이며 반대의 특정한 입장은 ‘전노협의 발전적 해소로서 민주노총의 건설’을 바라보는 입장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①전노협 스스로가 그 건설과정에서 전체 노동자 운동을 결집시켜내지 못한 측면이 존재하고 이 한계를 스스로 극복하기 위해서 민주노총으로의 발전전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 이 점은 결국에는 당시 노동자들의 이데올로기의 문제이며,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7~80년대 노동운동이 대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체계적 조직화를 진행해야한다는 ‘전망’을 못한 상황에서 아무런 대비 없이 ‘자연발생적’인 87년 대투쟁을 맞이했었던 점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동반되어야 할 문제이다. ②그리고 이에 따라 경로 상의 차이가 존재하고 이념적 쟁점이 잠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민주노총으로의 총단결이라는 전망 속에서의 금속 산별재편에 역량을 투여하려 했다는 점을 봤을 때 이 양자의 입장은 현재의 민주노총의 위기를 소급하고 평가하는데 있어서 생산적 결론을 이끌어내기 어려운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전노협의 해소와 민주노총의 건설에 대하여, 어쨌든 한국노총을 대체하는 민주노조 운동 조직의 건설과 명실상부한 남한 노동운동의 내셔널센터 설립이라는 긍정적 평가와 더불어, “민주노조운동 내부의 변혁지향적인 부분의 꿈이 민주노조운동 내부의 힘 관계에 밀려 좌절당하는, 그리하여 흔히들 ‘전노협정신’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변혁지향적인 흐름이 크게 희석화되고 약화되는 대가를 지불”한 것이라는 잠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3-2. 96-97년 총파업 그리고 IMF에 대한 투쟁과 그 논쟁들
IMF 경제위기와 그에 대한 투쟁 및 그 논쟁들을 살펴보기 전에, 97년 11월 시작된 이른바 ‘IMF경제위기’ 이후 지배계급의 노동관리전략을 매우 간략하게 살펴보자. 기본적으로 초민족적인 금융자본이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사회구조의 체질을 만들어내야 한다. 97년의 경제위기 이후 기존의 과잉자본을 금융화된 방식으로 배타적으로 수탈하는 방식이 고착화되면서, 불안정한 층위의 고용이 증폭되면서 전반적인 민중들의 생활양식 역시 불안정화(궁핍화)되어 간다. 즉, 자본축적 과정에서의 자본의 운동으로 인한 대량실업과 궁핍화는 ‘비정규직’, ‘양극화’만으로 환원된다기보다는 다양한 형태의 (쉽게 말해 전반적인 궁핍화와 정규직노동의 불안정화까지 포함하는)불안정노동화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기업의 분사, 해외로의 자본이전, 해외자본의 국내투자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 아웃소싱(외주화)이 주된 그 방식으로 출현하는 것도 이 당시부터이다.
1> 96-97 총파업과 쟁점들
96년 12월 26일, 김영삼 정권의 노동법과 안기부법의 날치기 통과에 맞서, 민주노총 주도 하에 40여 일간 총파업 투쟁이 전개되었다. 김영삼 정권의 이러한 시도는 단기적으로는 97년 대선에서의 정권재창출을 위한 포석이었으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금융화세계화 질서로의 편입 속에서 나타나는 필연적인 구조조정인 ‘노동유연화’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96-97 총파업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의 모든 투쟁을 총괄하는 한편, 그 이후 김대중 정권에서 본격화될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선 투쟁의 서곡이었다.
96년 12월 26일에서부터 40여 일간 3,206개 노조에 연인원 359만7,011명에 이르는,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정치총파업이었던 96-97 총파업은 ①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을 비교적 효과적으로 결합시켰다. ②민주노총 주도의 조직적 준비를 통한 전술운용(자연발생성X)이었다. ③1980년대 이후 세계 노동운동의 역사상 유래가 없는 정치총파업이었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 공세로 고통받던 전 세계의 많은 노동자들을 고무시켰다. ④대중적 정치 총파업투쟁을 통해 정권의 존립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세력적 접근전이 가능했다는 점을 확인했다는 성과를 남긴 바 있다. 반면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한계’를 보이기도 했는데 단적으로 1997년 1월 18일, 민주노총 지도부의 ‘유연한 전술’이라는 명목으로 수요파업으로 전환된 이후, 주도권을 상실하다가 결국 3월 국회에서 노동악법 재개정이 통과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게다가 96-97 총파업이 허무하게 종결된 이후, 그간 손실 만회 명분으로 ‘생산성 향상 협력 선업’ 등 자본의 헤게모니 재장악이 지속되었다.
당시 총파업 전술 및 총파업 결과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는 뚜렷한 쟁점이 존재한다. <사회적 조합주의 vs 전투적 조합주의>라는 96-97총파업에서의 구도는 각각 “96-97 투쟁은 ‘승리’했으며 그 결과 노동법 날치기 통과를 저지해냈다”와 “‘지도부의 무능’으로 인하여 ‘패배’했다”는 평가로 이어지며, 이는 97년 이후 노동운동에 대한 평가에서도 지속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전자의 경우 총파업의 성과를 지속시키기 위한 ‘진보정당 건설’을 주요과제로 삼게 되며, 후자의 경우 주로 무능력한 지도부를 타격하고 ‘전투적 지도부 수립’을 주요 과제로 삼기도 한다. 이러한 구도의 쟁점에 대한 평가는 여러 관점에서 있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인식이 일천했던 당시의 전략적 취약성이라는 점에서 주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이른바 IMF경제위기 이후 김대중 정권이 전면적으로 실시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노사정위원회 수립에 대한 대응과 그 쟁점에서도 드러난다.
2> IMF 구조조정에 맞서는 투쟁과 쟁점들
먼저, ‘IMF 외환위기의 성격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의 구도는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나는데, ①70년대 세계 공황을 기점으로 자본의 과잉축적의 위기(장기불황)의 한 부분으로서 한국 자본주의의 경제위기를 설명하려는 시도 ②미국 초국적 금융자본의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가치수탈 전략에 의해 나타난 것으로 설명하려는 시도 ③재벌들의 ‘무분별한’ 과잉투자 내지는 도덕적 해이 문제 등으로 설명하려는 시도 등이 존재했다. 이와도 연결되어 있는 두 번째 논쟁의 양상으로 ‘노사정위 참가 등 노동운동은 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은 좀 더 세분화된 구도로 나타나는데, ①신자유주의 개혁의 피해를 완화하는 사후적 대책마련에 집중하는 입장(참여연대, 장하성 등) ②임금투쟁에서 고용안정을 위한 투쟁으로 집중점을 옮겨 미조직 노동자를 조직하자는 입장(김유선 등) ③공황기 경제정책의 대안적 노선은 케인즈주의 일 수밖에 없으며, 노동운동은 고용문제를 중심으로 투쟁해야한다는 입장(임영일 등) ④사회화를 확대-심화하여 변혁적 전망을 창출하자는 입장(김성구, 김세균 등-내부쟁점존재) ⑤‘사회적 조합주의’를 대안적 이념으로 삼고 운동을 만들어가자는 입장(한노사연, 김유선 등) ⑥결국에는 산별노조 건설과 진보정당 건설이 가장 중요하다는 입장(노회찬 등) 등이다.
IMF 구조조정에 맞서는 투쟁은 이러한 논쟁들과 맞물려 치열하고 다양한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데, ‘대략의 굵직굵직한’ 투쟁들과 현상들만 축약해도 그 투쟁의 수위와 동력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투쟁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공세를 제대로 저지시켜 내지 못한 채, 개별적인 투쟁으로 고립되어 각개 격파되고 만다. 지면관계 상 여기서는 그 흐름을 순차적으로만 나열한다.(첨부된 파일을 확인하시길 바란다).
*95.11. 1기 위원장 권영길→96-97 총파업→97.11. IMF위기→노사정위 참가→98.2. 지도부 총사퇴, 비대위원장 단병호→파견법 제정→98.3. 2기 위원장 이갑용→98.5. 노사정위 불참/총파업→98.6. 총파업 철회, 노사정위 복귀→98.7. 총파업 선언/노사정위 탈퇴→총파업 철회/노사정위 복귀→98.9. 현대자동차 정리해고저지 투쟁→99.2. 협약 불이행으로 노사정위 탈퇴→(민주노총 합법화)→99.9. 3기 위원장 단병호→99.4. 지하철 민영화 저지 파업투쟁→00.3~4. 자동차3사 노조 연대파업→00.5. 총파업→00.6~8. 롯데호텔투쟁→00.10. ASEM 반대 투쟁→00.12. 한국통신 파업→01.2. 대우자동차 투쟁→01.5.1. 민주노총,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 및 김대중 정권퇴진투쟁 선언’→02.2~4. 철도·전력·가스 민영화 반대투쟁→민주노총 지도부의 한전파업에 대한 일방적인 철회선언→03.1~3. 배달호열사 투쟁→03.봄. 전쟁·파병반대 투쟁→03.4. 철도노조 파업→03.5. 화물연대 파업→03.7. 철도, 금속, 보건 투쟁→03.11. 이용석열사 투쟁→04.4. 4기 위원장 이수호→05.2.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사태’→05. 울산플랜트 투쟁→05.10. 민주노총 ‘비리사태’→06.2. 비대위원장 조준호→06.5. 평택 투쟁→07.2. 5기 위원장 이석행→07.7~ 이랜드-뉴코아 여성비정규직 투쟁
4>민주노총의 비가역적 위기와 혼돈, 그리고 새로운 모색
지난 2005년 2월 초의 이른바 ‘대의원대회 폭력사태’와 10월 ‘비리사건’은, 소위 한국노총을 대체하는 노동자들의 자주적·민주적 조직으로서의 ‘민주노총’이 자신의 구조적인 한 번의 순환을 이미 다했음을 온 몸으로 보여준 것 이었다. 무엇보다 이는 ‘민주노조 운동’의 표상으로서의 민주노총이 그것을 상실했음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 준 것이었을 따름이었으며, 사실상 96~97 총파업 패배와 98년 민주노총의 정리해고제·파견노동제 노사정합의, 그리고 98년 노동운동 위기극복 논쟁 및 노사정위 참가논란에서부터 누적되어온 위기가 폭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노동운동의 위기 심화 과정에서, 민주노총 내에서 주되게 등장했던 문제제기는 소위 ‘개량적 지도부 타격-전투적 지도부 수립’론이었다. 이러한 입장을 ‘거칠게’ 요약하면, 정규직/비정규직 간의 반목을 전투적 지도부의 연대투쟁의 의지와 지도방침으로 돌파하고, 정권·자본과의 협상을 중지하고 투쟁으로 현장을 강화하자는 입장이었다. 반면, ‘사회적 조합주의’를 주창하는 세력들은 현장 투쟁의 저조, 민주노총의 주요 조직 기반인 정규직 노동자들의 이데올로기를 알리바이 삼아 ‘전투적 조합주의’적 입장을 급진적인 입장으로 ‘규정’하고, 현실 가능한 수준에서의 최대한의 방어를 모색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지난 시간동안 겪어야 했던 ‘민주노총의 위기’는 비단 어느 정파가 지도부를 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없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신자유주의 사회재편의 광풍이 노동자 민중의 목을 조르고 있는 97년 이후의 시공간 속에서 교섭을 위해 대중을 동원하는데 급급한 모습이라던가 ‘구조조정은 이미 대세’라는 시대인식을 가지는 세력에 대해서 비판해야 함은 당연하다. 하지만, 지도부가 '더 투쟁적'이라고 해서 작금의 노동운동의 현실들이 얼마나 발본적으로 바뀔 수 있을까. 사실 최근 몇 년간 민주노총 지도부 선거 결과로 압축되는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대중이데올로기 역시 ‘실리주의’에서 한 치도 자유로울 수 없으며, 이는 근본적으로 신자유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운동적 대안의 부재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지난 2005년 대의원대회 사태와 비리사건 직후, 민주노총 내외에서 형성되었던 이데올로기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류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이른바 노동언론, 민주노총 내부의 (비)공식적인 회의 자리에서조차도 대부분의 논자들과 세력들이 이 상황을 ‘정파 간의 대립으로 인한 노동운동의 위기’로 인식하였다. 이로 인해 현장 조합원들 사이에서는 ‘대체 무엇 때문에 저러는 것이냐, 다 똑같다!’는 식의 냉소적인 관점이 확산되어왔다. 이에 따라 진지하고 생산적으로 노동운동의 혁신을 위해 제기하는 입장들마저도 ‘정파갈등’으로 치환되고 말았다. ‘지도부 사퇴 vs 비사퇴’, ‘사회적 교섭 vs 총파업 투쟁’ 등으로 형성된 논쟁 속에 갇혀, 정작 반신자유주의 노동운동의 대안을 모색하는 혁신의 내용들은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들은 운동의 위기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라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민주노총의 위기는 어느 한 개인의 도덕성, 하필 어느 한 단위 정규직노조의 이기심, 어느 정파 하나에 국한된 문제라기보다는 80년대 이후 노동자운동의 역사(‘구조-조건’ 그리고 그 구조에 따른 '주체’간의 운동)속에서 누적된 구조적인 위기의 반영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 노동운동의 실질적인 과제를 무엇으로 하고 그에 맞는 투쟁과 조직화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에 대한 실질적인 논쟁을 벌여내지 못한 책임을 그 누구도 회피할 수 없다. ’민주노총의 위기‘는 기실 작금의 우리가 겪고 있는 ‘전체운동의 위기’의 표상이지 않은가. 2006년 한 해 동안에만 총파업 선언은 열 번도 넘게 있었다. ‘사회적 교섭 vs 총파업 투쟁’ 이라는 부당한 쟁점으로 드러나고 있는 ‘사회적 조합주의 vs 전투적 조합주의’라는 논쟁으로 소급되는 이면의 핵심 문제는 ‘신자유주의에 맞서 노동자 대중의 정치를 어떻게 복구할 것인가’라는 질문의 전략적·이념적 취약성이 자리잡고 있다. 노동자운동의 고민은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4부. [소결]노동운동 위기극복을 위하여
(4부.[소결]의 경우, 첨부파일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웹상으로는 축약 하더라도 분량이 꽤 많기 때문입니다.)
4-1.민주노총의 산별노조 전환
4-2.사회운동적 노조주의
4-3.지역노동자 운동
4-4.여성노동권
4-5.반신자유주의 노동운동에 적합한 투쟁과제의 모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