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흐름은 표면적으로는 민주노총과 같은 합법적 대중조직의 건설이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전노협의 역사적 ‘해소’ 이후 노동운동의 ‘연대성’, ‘변혁성’, ‘비타협성’은 점차 탈각되었고, 민주노총은 제도적 교섭과 산별체계 강화를 주요 과제로 삼게 되었다. 이는 그 때의 최대 당면과제였던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성격’을 규정짓는 것이기도 했다. 즉 민주노총은 노동자 대중의 경제적인 이해를 대변하는 투쟁을 하고, 민주노동당은 의회에서 정치적으로 압박하는 투쟁을 한다는 손쉬운 분업논리(경제와 정치의 분리), 즉 ‘양 날개론’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 대중들의 이해는 경제적 이해와 정치적 이해로 무 자르듯 나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언제나 정세 속에서 그 경계를 가로지르며 재구성되는 것이기에 이러한 기획 자체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 두 조직의 분업관계는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 방침”으로 연결되었는데, 이는 민주노총 조합원 대중을 민주노동당의 입법투쟁에 동원하는 수단쯤으로 여기거나, 민주노동당을 민주노총 단위 사업장의 개별적 이해관계를 실현하기 위한 의회 내의 장치쯤으로 격하시키는 악순환을 야기하였다.
여기에 많은 운동진영이 97년 IMF위기의 본질을 재벌을 비롯한 거대 자본의 경영 방식, 소유 구조 정도의 문제로 편협하게 이해하면서, 노동자들의 높은 투쟁 수위에도 불구하고 수세적인 대중운동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주되게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이라는 민주노총의 노선으로 외화 되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능동적 주체라 할 수 있는 정부를 당장의 구조조정을 유예하거나 그 범위를 줄일 수 있는 협상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다. (노사정위원회 참여 논란 등) 불안정노동이 매우 체계적으로 일반화되어 있는 현재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에 걸맞는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주체 형성을 위한 작업이 전혀 이뤄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제도화/주류화에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위기는 끊임없이 증폭되었고, 갈등은 불완전하게 봉합되었다. 신자유주의가 민중들에게 가하는 폭력은 날로 심해져 갔다. 그러나 이에 민주노동당은 어떻게 대처했는가? 언제나 몇 몇 스타의원을 중심으로 ‘당장 실현 가능해 보이는 정책대안’과 ‘이미지’로 당의 지지율을 올리는데 집착할 뿐이었다. 비가역적인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에 결박되어 개량의 물적 토대를 상실한 한국 자본주의의 현 상황에서 모종의 ‘정책대안적 길’은 지배세력의 위기관리전략에 상당부분 포섭될 수밖에 없다. 또한 미디어를 통한 이미지 쇄신 전략은 노무현, 이명박이 그랬던 것처럼, 대중운동의 자율성을 침식시키고 소수의 정치지도자에 의한 인민주의를 강화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흐름들을 단순히 '개량의 발호'로 치부하면서 개량을 타격하고 전투적인 지도부를 세운다고 해서 현재의 위기가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기존의 운동이 왜 자꾸 제도화되고 있는지, 삶의 궁핍화로 인한 노동자대중의 불만이 정치지도자 개인의 카리스마 내지 이미지에 대한 갈구로 수렴되고 있는지를 근본적으로 따져 물어야 한다. ‘개량이냐 혁명이냐’하는 논쟁은 사실 현재적 위기의 결과일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배계급이 유포하는 신자유주의적 전망과는 다른 전망을 대중들과 공유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한 변혁운동의 자기 과제를 시급히 밝혀야만 한다.
지역을 기반으로 한 <사회운동적 정당>으로 변모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민주노동당의 위기를 진단하기 위해서 시야를 전체 민중운동의 제도화/주류화로 인한 위기로 폭을 넓혀야 함을 강조했다. 2003년의 비정규직 열사정국, 2004년 김선일씨의 죽음과 파병강행, 2006년 평택 미군기지 건설강행과 고 하중근 열사의 죽음, 2007년 이랜드-뉴코아 여성노동자 투쟁의 정체국면……. 게다가 ‘경제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로 대중들의 기존 정치에 대한 환멸적인 열망을 등에 업고 당선된 이명박이 벌써부터 대대적으로 노동자 민중들의 삶을 전봇대마냥 뿌리 뽑겠다고 선포하고 있지만, 이에 가장 단호하게 맞서는 운동의 과제와 전망이 도출되지 않고 있는 지금이다. 안타깝게도 민주노동당을 통한 진보정당운동 실험은 이러한 총체적 난국에 어떠한 해답도 내놓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찌되었든 민주노동당의 분당은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민주노동당 잔류파들은 “국민과 함께하는 재창당”을 기치로, 심상정-노회찬 등 탈당파는 “평등-연대-생태-평화”를 기치로 내걸며 <진보신당 연대회의>를 통한 새 판짜기에 들어갔다. 여기저기서 진보정당과 민중운동의 향후 진로를 주제로 논쟁이 폭발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우리는 지난 시기 동안 민중운동이 남겨온 오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제대로 된 고민과 실천을 감행해야 한다. 이는 당연히도 지난 두 달간 분당 사태를 겪으며 당 사수파와 분당파 모두가 범한 오류(당내 민주주의 훼손과 몰정세적 대북관 / 당의 우경화를 재촉하는 탈이념 공세)를 반성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런 측면에서 2월 3일 당 대의원 대회에서 심상정 비대위가 제출한 혁신안은 ‘혁신’이라는 목표에 한참 미달하는 안이었다. 비정규직, 여성, 이주노동자 등 대중운동 조직화를 위한 역량투여에 대한 구상 없이 오로지 총선 득표만을 노린 전략공천을 내세운다거나, 지역운동의 기반인 당 지역위원회를 폐지하겠다는 발상은 그들이 내세운 “평등-연대-생태-평화”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민주노동당 지역위원회는 작년 이랜드 투쟁에서 그랬던 것처럼 지역을 거점으로 한 사회운동에 있어 매우 소중한 공간이다. 정책정당화라는 미명하에 이를 폐지하는 것은 오히려 민주노동당의 위기를 부채질 하는 것이다. 만약 비대위의 혁신안이 부결된 것을 ‘다행’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면 바로 이런 점에서 그러할 것이다. 또한 두 의원의 탈당 선언 이후 기존 민주노동당 이외의 시민사회 인사들과 명망가들을 모아내겠다고 하면서 임종인, 고진화 등 보수정당에 몸담았던 인물들에게까지 러브콜을 보내는 등 사회운동 강화에 기여하는 정당으로의 방향과는 반대로 갔던 행태들에 대해서도 재고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총선을 목표로 당장의 '당'적인 질서에 모든 것을 수렴시키는 '긴박당한 논의'가 아니다. 오히려 냉혹한 현실로 다가온 전체 민중운동의 위기 속에서 새로운 이념과 전략의 모색을 위한 진지하고 집단적인 자기성찰과 평가를 단행해, 그야말로 <혁신>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하게 사고해야 할 지점은 그간 노동자운동이 신자유주의 위기관리전략에 끊임없이 부침을 겪게 했던 남성생계부양자-가족임금모델의 폐기와 이에 기초한 “대공장 남성 정규직 노동자”라는 상징을 대체할 새로운 계급주체의 형성이다. 이에 비정규직․여성노동자․이주노동자․비공식노동자 등 신자유주의에 의해 끊임없이 배제되고 그 권리가 박탈당한 민중들이 앞으로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주체여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이들에게 전략공천을 통해 비례대표를 할당하는 수준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사회운동의 강화를 주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이은 2차 공공부문 구조조정에 들어갈 것을 선포한 바, 이는 민중들의 보편적인 삶의 권리를 철저하게 박탈하는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다. 물/전기/가스와 같은 공공재는 물론, 교육/의료/사회서비스 등 각종 기본권들이 박탈될 것이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가 ‘실용주의’와 ‘작은정부’를 내걸면서 각 지자체를 중심으로 공공부문을 대거 민간위탁하려는 움직임이 뚜렷이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정책은 앞서 말한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주체들의 권리를 우선적으로 배제할 것이다. 이에 맞서려는 진보정당은 단지 정책대안 제시와 교섭력 확보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당-노조의 부르주아적 분업구조를 깨고 지역을 거점으로 이들을 당당한 투쟁의 주체로 세워내야 할 것이다. 7월 1일부터 그 범위가 확장되는 비정규악법 등의 불안정노동에 맞서는 투쟁을 염두에 두었을 때도 이는 매우 당연한 결론이다.
이른바 ‘정당운동’은 그 자체만으로는 완결적일 수 없다. 오히려, 앞서 밝힌 운동의 새로운 전략들을 스스로 자기과제로 부여안고, 전체 운동 속에서도 ‘노동조합-정당운동’의 이분법 속에 수렴되지 않는 다양한 급진적 운동들과 조우했을 때 정당운동의 자기근거가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당 내-외부의 운동 양자가 동시에 지향해 나갈 때 가능할 것이다. 가장 단호하고 변혁적인 반신자유주의 전선의 형성에 기여하는 정당, 즉 지역을 기반으로 다양한 계급주체들을 조직화하는데 힘 쓰는 <사회운동적 정당>을, 시대는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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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 관련된 다양한 진영의 입장들을 링크해 둔 것입니다. 참고 바랍니다.
▶손석춘, "떠나는 사람들, 더는 민노당을 죽이지 마라", 오마이뉴스, 08.02.05
▶정성희, "심상정-노회찬, 패권의식과 출세주의로 딴살림", 프레시안, 08.02.17
▶조현연, "민노당은 죽었다. 종북파는 있다", 레디앙, 08.01.14
▶조승수, "진보의 재구성이 필요하다", 레디앙, 08.01.08
▶김세균, "진보정당 운동의 전면적인 재구성이 필요하다", 참세상, 08.01.14
▶박성인, " '21C 시대정신'을 구현할 '21C 사회주의 정당' 건설을!", 노동자의 힘, 08.02.12
▶단병호, "아직 위기 본질 통찰 못하고 있다", 레디앙, 08.02.20
▶금민, "문제는, '종북패권주의'가 아니다", 08.01.14
▶박승호, "천영세 체제, 또 다른 '쿠데타'를 획책", 프레시안, 08.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