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의 무수한 죽음들을 ‘기억’하며

- 당대비평,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 서평 -

                                             


 노무현에 대한 대대적인 애도가 가리키는 것


 2009년 5월, 전 대통령의 자살이라는 사건은 한국 사회에 유례없는 충격과 반향을 가져왔다. 곧 광장과 학교, 지역마다 주요 역의 입구에 분향소가 차려졌다.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 그와 그의 정책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노무현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그가 부족한 게 있었다고 하더라도 상대적으론 존경할만한 대통령이었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노무현의 집권기에 죽어갔던 수많은 농민·노동자들을 기억한다면, 그 때 노무현을 비판했던 진보진영마저 무비판적으로 애도의 물결에 동참하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후자의 입장은 상대적으로 소수였고, 전자에 의해 죽음 앞에서 원칙만을 고수하는 냉혈한으로 비난받기도 하였다. 이 간극을 해결하기 위하여 ‘정치인 노무현’과 ‘인간 노무현’을 분리하여, 전자가 잘못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후자는 기릴 만 하다고 얘기하는 이들도 있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시기적 구분으로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을 가속화한 대통령 재임기의 노무현’과 ‘대통령 집권 이전에 노무현이 추구하였고, 지금 대중들이 그에게 투영하고 있는 가치들’을 구분하여 후자의 의미로 그를 애도하자는 주장도 존재했다.


 그러나 그 중 어떤 입장도 우리 앞에 벌어진 상황을 충분히 설명해 주지는 못했다. 사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이후에 만들어진 추모의 분위기 속에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과잉’이 존재했다. 한 필자의 표현대로 “실제로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그런 대통령 노무현을 대중들은 마치 갖고 있었다가 지금 막 상실한 것처럼 애도했다(정용택, 117p.).” 혹은 노무현과 자신의 처지를 동일시하며,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펑펑 흘렸다. 마치 마음껏 울 계기가 필요했다는 듯이 말이다. 나는 당시에 그의 죽음 자체보다도 죽음 이후에 있던 ‘거대한 울음의 행렬’에 더 놀랐다. 추모에 동참하고 있는 사람들 스스로도 예상치 못했고, 온전히 이해할 수 없던 흐름이었다. 그 추모의 열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시점(2009년 12월)에 출간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의 열 명 남짓한 필자들은 다시금 찬찬히 그 죽음과 추모의 의미를 되짚고 있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어떤 죽음이 대대적으로 애도될 때, 그것은 단지 죽은 자의 사회적 지위 탓으로 돌릴 수 없는 애도하는 자의 정치적 욕망이 투여”(서동진, 20p.)되어 있는 법이다. 그렇기에 이 행위가 옳은지 옳지 않은지를 따지기 이전에 ‘대체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지’를 돌아보는 것이 우리 사회가 위치한 자리와 나아갈 자리를 가늠하기 위해 더 유의미한 시도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노무현의 죽음 앞에서 ‘인간 노무현’에게 정서적 동질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2002년 대선 당시 그는 기존 한국 정당 정치에 대한 환멸의 정서를 대변했다. 상고 졸업, 농촌 출신, 민주화 운동, 인권 변호사, 통기타를 치며 상록수를 부르던 모습 등에서 대중은 기존 정치인과 다른 노무현의 ‘비주류 정서’에 공감을 표하며 ‘변화’를 기대했다. 그는 늘 그의 신념이나 정책 그 자체보다도 탈권위주의적인 언행으로 주목받아 왔다. 그리고 노무현에 대한 추모 분위기 속에서 부각되는 것도 다른 어떤 것이기보다는 이런 노무현 개인의 ‘통치 스타일’이었다. 때문에 ‘정치인 노무현(신자유주의자)’과 ‘인간 노무현(탈권위주의와 진정성)’을 분리해서 보려는 시도가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김원의 지적처럼 노무현의 이 두 가지 측면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노무현의 죽음 이후 인간 노무현과 정치인 노무현을 분리하자고 말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수준은 강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노무현 죽음 이후에도 반복되고 있다. 노무현이 내세운 정치 스타일은 (····) 한국 정치 위기의 다른 면이었다. 기존 보수 정치에 대한 불만과 반감을 지닌 대중은 한나라당과 민주당 보수 양당의 대안 이념 부재, 무능력과 부패 등에 부단히 실망했다. 그 실망의 틈에 등장했던 것이 노무현이었다. 하지만 그가 내세웠던 지역주의와 분열주의 반대, 도덕성, 서민성, 권위주의 역사 청산 등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대안적 정치 이데올로기로 작동할 수 없었다.

- 김원, <우리는 노무현을 지키지 못해 미안해야 하나?> 중에서, 65p.


 노무현 집권기의 실패는 노골적인 경제 대통령 이명박의 당선으로 귀결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명박 역시 나의 불안한 삶을 책임져줄 수는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집권 초기부터 이명박 정권이 보여주는 무능함과 치졸함, 몰상식함에 누구나 극도로 지쳐 있었다. 사람들에게 목 놓아 울 계기가 절실했다는 것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 시점에 갑자기 들이닥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은 ‘내가 붙잡을 수 있는 대안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막막함이자 울음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달라 보이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사람들을 움직인 것은 결국엔 모두 같은 원리였다.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는 현실 정치(때로는 노무현이었고, 때로는 이명박이었던)에 대한 반(反)경향’ 말이다. 다시 말해, 노무현의 죽음과 그에 대한 애도가 가리키는 것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시대에 한국 정치가 봉착한 ‘어떤 한계지점’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금 노무현의 인간적 스타일을 대체할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건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한계지점’을 넘어설 방책이 필요한 것일 텐데, 당장은 누구도 시원하게 그것을 제시해줄 수 없다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 그리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 국면 속에서도, 이 한계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애도의 공동체 속에 배제되고, 망각되는 이들은 누구인가?


 사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 이전에도 다른 무수히 많은 ‘죽음’들이 존재했다. 가장 눈에 띄는 사건은 2009년 초, 서울 한복판에서 공권력의 진압에 의해 여섯 사람이 불에 타 목숨을 잃었던 ‘용산 철거민 참사’일 것이다. 『아무도···죽음』은 용산참사의 기억을 불러와 전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비교하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우리는 두 죽음의 비교를 통해, 노무현에 대한 애도(나아가 김대중에 대한 애도까지도)가 갖는 성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2009년의 광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잠시 2008년 5-7월의 촛불의 기억을 떠올려보아야 한다. 촛불은 그 이전에 있었던 어떤 집단적인 저항의 모습과도 달랐다. 그것은 저항의 새로운 주체와 방식의 발견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성격이 매우 모호한 것이기도 했다. 이른바 ‘개혁 세력’의 집권기 동안 대중들은 역설적이게도 스스로를 주체화할 정치적 언어들을 잃어버렸다. “민주, 개혁, 진보, 노동··· 신성한 기표들의 훼절을 겪고 벌거숭이로 남겨진 대중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김성태, 141p.)” 촛불을 든 대중들은 ‘반MB’라는 모호한 정체성으로 묶여 있었고, 결국 몇 달 간의 집회 끝에도 이렇다 할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다시 뿔뿔이 흩어져갔다. 그리고 2009년 1월 20일의 용산참사. 김성태는 이 사건이 ‘촛불이 어디로 갈 것인가’를 가름하는 시험대(리트머스지)가 될 만한 것이었다고 얘기한다.


 그럼 용산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어떠했나? 참사 당일 저녁부터,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현장으로 달려가 가두시위를 벌였다. 촛불이 잦아든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론도 철거민 쪽에 우호적이었다.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희생된 이들이 매도당하지 않고, 공감해야 할 사회적 고통의 일부로 인지되고 받아들여진다는 것에서 ‘일단’ 안도(김성태, 145p.)”할 만 했다. 그러나 그것은 전 대통령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리며 광장으로 나왔던 사람들에는 한참 미달하는 것이었으며,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운동이 되지는 못했다. 그 이유에 대한 필자들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하나는, “그 불타는 몸은 너무 강렬하기에 시민이 공유할 수 없어서”라는 것이다. 일종의 축제이자 퍼포먼스였던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와 비교했을 때, 죽음에 직면한 결사 항전은 너무나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무엇에서든 유머를 필요로 하게 된 몸들이 되어버린 ‘개그적 소비 사회’의 시민들에게 쾌락 없는 투쟁이란 ‘참아줄 수 없는 진지함’에 다름 아니었다는 것이다.(김진호, 266p.)” 다른 하나는, ‘사유재산’이라는 자본주의의 질서, 혹은 ‘뉴타운’이라는 사람들의 욕망의 대상을 근본적으로 건드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절규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저런 희생은 질서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엄기호, 37p.)”이라는 인식이 용산에 대한 적극적 애도를 어렵게 만들었다.


 즉, “대중들은 용산을 의도적으로 애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외려 그것을 애도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부채감과 상실감은 무의식적으로 남아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노무현·김대중에 대한 추모 행위를 두고 “마땅히 애도되어야 할 대상이 애도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엉뚱하게도 바로 옆의 것이 누가 봐도 너무 과하게 애도되고 있다면, 그 과열된 애도 행위의 배후에는 정작 애도해야 할 것을 애도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슬픔이 감춰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김진호, 101p.)”고 분석하는 것은 (약간은 ‘과장’처럼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의미심장하다.


 책은 주로 용산참사와 노무현, 김대중, 그리고 그 죽음들에 대한 ‘사회적 기억의 비대칭성’을 다루고 있지만, 조금 더 크게 본다면 다른 것들도 눈에 들어오게 된다. 그러고 보면 2009년에는 참 많은 죽음이 있었다. 용산의 철거민들, 투쟁 중에 목을 맨 대한통운 특수고용 노동자 박종태 열사, 쌍용자동차 파업 중에 목숨을 끊었던 여러 노동자와 그 가족들... 그리고 다른 한 편에는 김수환 추기경·노무현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이라는 세 명의 지도자들. 전자의 죽음과 후자의 죽음에 사람들은 많이 다르게 반응했다. 이름도 권력도 가지지 못한, 진정으로 ‘평범한 사람’이었던 이들의 죽음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채로 빠르게 잊혀 갔다.


 사실 노무현 추모 정국 속에서 이처럼 애도되고 있지 못한 ‘다른 이들’의 죽음을 불러오려는 시도들도 존재했다. 엄기호는 이를 ‘초혼의 정치’라 명명한다. 죽은 자에 대한 애도 앞으로 같이 애도되어야 하는 죽은 자들을 불러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는 성공회대 교수의 이광일이 당시 참세상에 기고한 글이 그런 논지에서 쓰인 글이었다.


민주주의는 과거의 경력을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살아 움직이는 지금 이 순간의 부당한 관계들을 문제시하고 그것을 넘고자 하는 실천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죽은 노무현을 잡고 기억하는 것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 고통 받는 용산을, 특수고용 노동자들을, 이주노동자들을, 소수자를, 수탈 받는 환경과 생태의 아픔을 안고 함께 싸우는 것이 진정 그를 살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 이광일, <한 편의 ‘희극’이 ‘비극’으로 끝나다> 중에서, 2009년 6월 1일, 참세상


그러나 전 대통령들의 추모 의례는 이 죽음을 최대한 ‘충돌이 아닌 정상화(‘화해’라는 모호한 이름의)’로 수습하려는 경향이 더욱 컸고, 불편한 다른 죽음들, 평범한 이들의 죽음들은 초대받지 못한 채였다. 이 사실은 지금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준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책마저도 매우 비대칭적으로 죽음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책의 제목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임에도, 대부분의 필자들은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과잉된 애도’가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하는 데에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물론 그만큼 그 추모의 분위기는 놀라운 것이었으며,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불러오기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다. 많은 논쟁이 애매모호하게 마무리된 속에서, 노무현 추모정국을 이렇게 해석하려는 것은 매우 유의미한 시도이다. 그러나 ‘용산’보다도 더 기억되지 못한 다른 죽음들. 2009년에 죽어가야 했던 노동자, 농민들... 2009년 이전에도, ‘민주화 되었다던’ 그 시절, 노무현 정부의 집권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나 곧 잊혔던 수많은 이들.. 그 죽음들을 불러오는 것, 그들의 죽음이 왜 이렇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렸는지를 성찰하는 것, 그 과정이 부족해서 아쉬움이 남는다.



 정치를 만드는 데에 끊임없이 실패하는 우리들


 앞에서 짚은 한계와 연결되어 있는 또 하나의 쟁점은, 이 광범위한 애도의 행위가 참가한 사람들을 ‘정치적 주체’로 만드는 데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엄기호에 따르면 두 전직 대통령과 용산의 죽음을 가르는 그 ‘경계’야말로 우리 사회가 필사적으로 감추고 회피하려는 정치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경계를 넘는 것에 끊임없이 실패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사회에서 정치란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질서를 지키는 것-치안, 혹은 신자유주의 법치라 불리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문학 비평가인 권명아의 시선은 이 ‘광장에서의 애도’에서부터 올해 베스트셀러였던 책과 영화, 『엄마를 부탁해』와 『해운대』에까지 가서 머문다. (다른 필자인 정용택이 영화 『워낭소리』의 흥행에 관해 갖는 입장도 이와 비슷하다는 사실이 인상적이다) 그녀는 “죽음의 책임이라는 모티프가 촛불과 광장과 조문 행렬에서 극장가와 서점가로 이동”했다고 보고 있는데, 이것이 “삶에 대한 새로운 의식이나, 타자의 죽음과 나의 생존의 불가피한 의존과 관계성, 삶의 취약성에 대한 윤리적 의식의 자리를 만들지 못하고 있”(권명아, 74p.)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 매체들에서 각각 죽음을 다루는 방식이 ‘청소’를 통한 삶의 정상화(영화 『해운대』), ‘피붙이’의 죽음에만 감응하는 것(소설 『엄마를 부탁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상실감과 애도가 이처럼 정치적 주체화의 자리가 아닌 ‘다른 자리’에서 수행될 때, 우리는 무력할 수밖에 없으며, 폭력 시스템은 지속된다.


 신학 연구자인 정용택은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대중을 ‘우울증적 주체’로 명명한다. “우울증적 주체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알지 못하면서 그것에 대한 상실감에 시달린다.” 사실상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민주주의의 표상을 노무현에게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중들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잃어버린 노무현이 아니라 실은 민주주의의 부재” 그 자체이다. 문제는 이러한 우울증적 충동이 촛불집회나 추모 행렬과 같은 집합 의례의 형식으로만 남아, 현실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정도로까지 힘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는 2009년의 애도의 광장에 ‘종교’만 남았을 뿐, ‘정치’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124p.)


 필자들의 공통된 문제의식은 놀라울 정도로 과열되어 있었던 대중들의 ‘집단적 애도·추모 의례’가, 이상하리만치 ‘정치’로 이어지지는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마치 2008년 촛불집회 때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리고 나아가 2009년의 수많은 죽음들을 가르는 ‘경계’를 가리킴으로써, 우리의 실패가 무엇 때문인지를 밝히고 있다. 여기가 바로 죽음들에 대한 ‘사회적 기억의 비대칭성’이 연유하는 지점이다. 우리를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어쩌면, 2003년, 잇따른 노동자들의 죽음 앞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던졌던 말, “분신으로 투쟁하는 시대는 갔다. 이제는 민주화된 시대가 아니냐.”하는 논리인 것은 아닐까? 20년에 걸친 ‘민주화 시대’와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의 교직(김성태)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87년의 그 자리에 멈추어 방황하고 있다. 대안 없는 위기의 시대, 여전히 ‘또 다른 구원자’나 ‘대변자’를 갈구하는 눈물을 흘리면서(김원) 말이다.



 이 불안한 세상을 바꾸기 위해 필요한 과정들


 『당비의 생각』 시리즈가 매번 그렇듯이, 이 책 한 권 안에도 통일될 수 없는 다양한 입장들이 존재한다. “(앞으로)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에 있어서는 특히 그렇다. 그 중에서도 가장 구체적으로 진보진영이 해야 할 바를 서술하고 있는 것은 박동천의 글인 <노무현 이후의 한국 정치를 생각한다>라고 하겠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이 말하는 바가, 앞의 다른 글들이 열심히 분석한 것들과 묘하게 어긋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우선은 그의 ‘진보진영’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명박·한나라당으로 표상되는)보수진영’ 대 ‘(노무현·김대중을 포함하는)개혁진영’으로 틀지어져 있다는 것이 그렇다. 이러한 오래 된 구도 속에는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애도가 과연 무얼 말했던 것이고, 무엇을 말하지 못했던 것인지에 대한 성찰은 보이지 않는다.


 “현재 한국의 진보에는 대안이 없는 것이 탈이 아니라 너무나 많은 것이 문제”라는 말에는 나도 동감한다. 그러나 바로 이어, 그렇기 때문에 이제 “무수히 불거져 나와 있는 제안과 묘안과 비책과 처방들을 어떻게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엮어 낼 것인가(박동천, 257p.)”가 중요하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힘들다. 인물 중심의 정치로 국회의원 선거에 대비하자는 것도 그렇다. 다른 필자들이 짚고 있는 맥락에서 보았을 때,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더 정교한 정책 대안’이나 ‘서민을 대리해 줄 다수의 국회의원들’은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수많은 물음들이다. 민주화 20년이 이명박 정부의 탄생으로 귀결되었고, 이명박 역시도 대안이 아님이 판명되었다면, 이제는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가? 무엇이 바뀌어야 내 삶이 나아질 수 있는가? 08-09년 그렇게 많은 이들이 광장에 나왔음에도, 왜 그 경험이 스스로의 삶을 바꾸고 세상을 흔드는 ‘정치’가 되는 데에는 실패하고 있는가? ‘정치’를 만들기 위해 나는 나의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 등등..


 우리의 아픔이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지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지금 우리에게 부족하다. 손쉽게 대안을 만들어내는 일보다도, 이 아픔의 ‘보편성’을 설명할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더욱 절실하다. 노무현을 ‘아름다운 순교자’나 ‘서민의 대변자’로 불렀듯이 또 다른 구원자나 대변자를 필요로 할 때에 그 시도는 필연적으로 실패에 이를 것이다. “진정 필요한 건 구원자가 아니라, 새로운 정치를 구성하기 위한 자기 조직화이다.(김원, 67p.)” 그리하여 '진짜 평범한 사람들'의 죽음을 우리의 아픔으로 느끼며, ‘이제 그만!’이라고 외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에게 다른 세계가 가능해질 것이다.


 2009년, 우리는 한 시대의 종언을 목도했다. 그러나 어떤 세계가 시작될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이 폐허 같이 불안한 세상에 ‘맨몸’으로 각자 부딪히며 살아야 하는 걸까? 그런 삶은 서러운 울음을 동반하는 것이거나, 어떤 계기가 오기까지 울음을 꾹꾹 눌러 참는 그런 것 밖에는 될 수 없지 않을까? 『아무도··죽음』은 이 불안한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인상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2010년대를 시작하며,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Posted by 행진

2010/02/14 21:11 2010/02/14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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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행진

2009/06/11 19:41 2009/06/11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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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우리가 요구하는

'민주주의'는 무엇입니까?




‘차악이 아닌‘대안이 필요한 때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전 국민적인 추모행렬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재임 시절 내내 논란이 되었던 그의 말과 행동들이 이제는 ‘그리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모두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말은 “모두 이명박 탓이다.”라는 말로 바뀌고 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그리움과 이명박 정권에 대한 분노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일까요? 추모의 열기가 사라지고 난 자리에는 또 다시 허망함만 남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무능력하다’고 평가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차악’으로서 국민들은 ‘실용주의 경제대통령’ 이명박 정권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추모하는 가운데, 이명박 정권에 대한 실망감을 발견하고 있는 당신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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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이라면 누구나 자유, 평등, 민주주의, 서민경제를 이야기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우리 삶과 미래를 ‘책임’지지는 못했다는 사실이 당신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직장 동료들 간의 눈치경쟁이 심해지고, 물가는 오르는데 임금은 낮아지고, 언제 어떻게 해고될지 몰라 불안해하는 것이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지만 우리를 ‘대변’해줄 것으로 기대했던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고통을 분담하자’는 것뿐입니다. 점점 더 팍팍해지는 세상
, 나와 상관없이 돌아가는 것만 같은 이 세상에서 우리 손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없을까요? 이명박 정권에 대한 실망과 좌절이 또 다시 ‘차악’이 누구인가를 찾는 것이 되어서는 반복되는 악순환을 끊어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직접 대안이 됩시다.

<구조조정 · 해고반대! MB악법저지!>
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합시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경제위기라고 하지만 소수의 재벌들과 투기꾼들에게는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건당 수수료 30원을 올려달라는 노동자들의 요구가 ‘부담스럽다’는 대한통운은 문자로 78명을 해고했고 박종태라는 ‘특별하지 않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부실기업 쌍용자동차는 부실운영의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돌리며 26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해고하겠다고 윽박지르고 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은 바로 그 날, 회사의 협박으로 인해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쌍용자동차의 한 노동자가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결국 26일 오전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전직 대통령의 죽음이라는 사상초유의 사태로도 가릴 수 없는 수많은 죽음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죽음을 확산하면서 저항할 권리마저 빼앗을 MB악법이 국회통과를 앞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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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을 수놓은 노동자-민중의 투쟁은 생존권과 민주주의를 외치는 가장 위력적인 투쟁이었습니다. 민주주의는 틀에 가두어지지 않는 것, 누구에게 대신 맡길 수도 없는 것입니다. 더 많은 권리를 다수의 민중들이 쟁취해온 역사, 그 자체가 살아 숨쉬는 민주주의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요구는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민주주의의 전제 중에서도 기본 전제인 생존권이 파괴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명확하게 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더 이상 빼앗기지 않는 것, ‘민주공화국’이라 자처하는 국가가 정말로 노동자-민중을 살리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가 외쳐야할 진짜 민주주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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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행진

2009/06/01 13:51 2009/06/01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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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 고병권이 쓴 '민주주의'

    Tracked from 그린비출판사 2011/05/26 17:28 Delete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무엇인가’를 묻는 책들이 태풍처럼 출판계를 흔들어놓고 있다.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바람이 채 가라앉기 전에, 뒤를 이어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 바람이 불고 있다. 이제 여기에 다시 고병권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바람을 추가해야 한다. 그러나 고병권이 몰고 올 바람은 일시적으로 불고 지나갈 바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해서 되돌아올 바람이다. 그것은 한국의 정치·사상 지형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파열을 내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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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행인 2009/06/04 20:52 # M/D Reply Permalink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예전부터 중간점(·)이 네모(ㅁ)로 깨진 채로 그냥 올라올 때가 종종 있더군요. 한글에서 쓴 글을 바로 웹으로 옮길 때 그렇게 되는 건데, 한글에서 작성할 때부터 중간점을 유니코드 문자표의 그것으로 쓰든지 아니면 아예 쉼표로 처리하면 안 깨진다더군요. 그냥 아주 조금 거슬려서 얘기해둡니다^^;;

[선특호]2009 학생회 선거 의의와 목표

  2009 학생회 선거 의의와 목표

 

0.들어가며

2009년 하반기, 미국발 금융위기를 시작으로 신자유주의 금융화 정책의 모순이 전 세계적으로 폭발하고 있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금융 위기는 현재 빠르게 실물경제로까지 파급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지배계급은 위기의 책임을 놓고 끊임없이 이전투구하기에 바쁘고, 그럴수록 대중들은 자신의 삶을 해결하지 못하는 정치 일반에 대한 환멸과 무관심을 갖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지배정치의 위기가 정치 일반의 위기로 확산된다는 것인데, 체제를 변혁하기 위한 ‘운동’ 역시도 대중들에게 세상을 바꾸기 위한 하나의 대안으로 받아들여지기보다는 지배정치와 별반 다를 것 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우리는 경제/정치/운동의 위기 속에서 학생운동 역시 대중과 융합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바꿔낼 것인가? 우선 현재 학생운동이 서 있는 조건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그간의 학생회운동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 학생운동/학생회 운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개조’를 시작해야한다. 09년 학생회 선거는 붕괴된 대중운동의 기반을 다시 세우기 위한, 대학인들의 삶을 자기계발이 아닌 자기통치로 이끌기 위한 학생운동의 혁신을 지체 없이 단행하는 장(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09년 학생회 선거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개조하고 무엇을 혁신할 것인가?

첫째로 우리는 학생회라는 공간을 어떻게 대중운동의 경로로, 대안세계화 운동의 거점으로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이는 금융화에 대한 비판을 전면화하고, 대중교육을 비판하면서 지식에 대한 민중의 권리를 옹호하고, 페미니즘을 저항의 언어로 재구성하자는 등 신자유주의 비판을 더욱 구체화할 때 가능하다. 우리는 09년 학생회 선거를 통해서 신자유주의 비판을 구체화하고 이를 대중적으로 외화하기 위한 선거활동, 그리고 대중정책을 통해 '집단적 자기 통치'를 실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학생회'를 올바르게 세우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학생회라는 공간이 대안세계화 운동의 이념, 그에 입각한 정세분석(대중이데올로기 분석), 그에 잘 대응할 수 있는 조직체계를 갖도록 개조해야한다. 학생운동을 포함한 전체운동의 위기 속에서 각 운동들은 독자적으로 구조화되어 상호 영향력을 발휘하기 힘든 상황에 처해 있고, 대중운동 없는 대중조직의 분열은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다. 지금은 기존의 운동 구조/양식을 뛰어넘을 수 있는 새로운 '주체화 경로'를 발굴해야 하는 시급한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대안세계화운동의 주체형성에 가장 중요한 물적 토대로서 '지역'을 사고하고, 지역에 기반한 사회운동의 활성화를 통해 전체 운동을 혁신해 나가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학생회라는 공간을 민주주의를 학습하고 훈련하는 장으로 복원해야 한다. 신자유주의적 사회재편 과정이 만들어내는 폭력과 기본적 권리의 박탈에 맞서 분절화-개별화 되어 있는 대중, 그/녀들간의 상호갈등과 적대로 표상되는 대학사회에서 대학 내 제 구성원들이 보편적 권리를 쟁취하고 삶의 위기를 극복하기위한 직접행동에 나서기 위해서는 그/녀들간의 차이, 적대, 갈등을 넘어 자율과 공존, 연대의 원리를 강화하고 다수가 공동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책임 있는 논쟁과 의사소통의 과정을 담보해내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09년 학생회 선거를 통해서, 무너진 정치적 지반을 복구하고 민주주의를 학습하는 장으로써 학생회를 만들어 나가자!

1. 학생운동의 조건을 확인하자
  1-1. 지금은 어떤 시기인가?
  1-2. 학생대중이데올로기 분석

2. 09년 학생회 선거, 학생운동의 개조를 위한 실험의 장으로!
  2-1. 대중정책으로 대중운동의 경로를 만들어내자!
  2-2. '학생회 운동'을 지역에 기반한 사회운동으로 개조하자!
  2-3. 학생회를 민주주의 학습의 장으로 만들어가자!

3. 09년 학생회선거의 의의와 목표
 
3-1. 학생회선거의 의의
  3-2. 정치적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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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행진

2008/10/30 18:35 2008/10/30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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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특호]2009 학생회선거 총론


 2009 학생회선거 총론



프롤로그 : 2008년을 돌아보다

# 2MB 정권 첫 해

경제성장이라는 부푼 꿈을 안고 이명박 정권이 출범했다. 인수위 시절부터 한반도 대운하와 영어 몰입교육으로 시끄러웠지만, 경제성장이라는 대의 앞에 이명박은 굴하지 않았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로 인한 위기는 전 세계로 확산됐다. 갈 곳 잃은 투기자본이 몰린 덕에 곡물가와 유가는 폭등했다. 한국도 이를 비껴나지는 못했다. 라면, 우유, 과자 등의 가격이 폭등하는 것을 시작으로, 민중들은 경제위기의 한파를 온몸으로 느꼈다. 그럼에도 경제 대통령 이명박은 여전히 장밋빛 미래를 포기하지 않았고, 당초의 경제성장률 목표를 7%에서 6%로 낙관적으로 다잡았다. 서민경제를 위해 물가를 잡겠다며 50여 개의 생필품 관리품목을 발표했지만, 한편으로는 공기업 민영화와 학교 자율화, 의료보험 민영화, 금산분리법 완화 등의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이명박 정부의 ‘경제성장’이 ‘비지니스 프렌들리’라는 기조대로 기업과 자본을 위한 것이지, 민중들을 위한 것이 아님을 명확하게 보여줬다.

이랜드, 기륭, 코스콤 등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계속됐지만, 이명박은 탄압과 폭력으로 답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절박한 심정으로 세운 천막은 공권력에 의해 수시로 철거당했고, 故이철복 열사는 사측의 구타로 사망했고, 비인간적인 단속에 쫓기던 이주노동자는 두 다리가 부러졌다.

그렇게 민중들을 내몰았지만, 애초에 그/녀들의 탓이 아니었기에 경제위기는 극복될 수 없었다. 이명박 정권은 어떻게 해서든 활로를 뚫어야 했다. 한-미 FTA를 조속히 추진하기 위해, 국민들의 건강과 안전을 팔아 넘기는 협상을 감행한다. ‘광우병위험통제국’인 미국에서 연령 제한을 풀고, 뼈까지 포함하여 쇠고기가 수입된다.

 

# 뿔난 시민들, 광장에서 촛불을 들다

청계천에 촛불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소라 광장에는 급식으로 나올 미국산 쇠고기를 먹기 싫다는 여중생, 정부의 정책 때문에 아침밥도 못 먹고 0교시부터 야자까지 학교에서 답답해하던 여고생, 치솟는 등록금과 실업률에 불안한 대학생, 광우병에 불안하고 의료민영화에 더 불안한 노동자, 도무지 서민을 염두에 두지 않는 2MB가 원망스러운 자영업자들이 모였다.

정부는 ‘광우병은 괴담’이라고 일축했고, 뿔난 국민들은 ‘끝장을 보자’며 계속해서 거리로 뛰쳐나왔다. 광장에 뛰쳐나온 시민들의 목소리가 너무나 많아서 잘 들리지 않았는지, 정부는 ‘배후세력이 있다.’ ‘광우병이 발생하면 수입을 중단하겠다.’는 동문서답만을 내놓았다.

보름이 넘게 광장에서 촛불이 타올랐지만, 정부는 꿈쩍하지 않았고, 마침내 촛불들은 이명박을 만나야겠다고 폴리스라인을 벗어나 거리로 나섰다. 정부는 본질을 드러냈다. 시민들에게 물대포, 곤봉이 날아왔다. 촛불은 급속도로 번졌다. 대학생, 주부, 종교인, 노동자들이 합세했고 ‘대운하 반대’ ‘의료 민영화 반대’ 등 보다 많은 구호들이 광장에서 거리에서 울려 퍼졌다. 촛불은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올라, 100회가 넘게 계속되었다. 정부는 물산업지원법 입법 예고를 유보하는 등 시장화/사유화 조치들에 일정 제동을 건 것처럼 보였다.

 

# 2MB의 반격

이명박은 ‘아침이슬’을 들으며 어떻게 촛불을 흩뜨리고 자신의 계획을 추진할 것인지 생각했던 것 같다. 정부의 정책 방향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공기업 선진화’라고 이름을 바꿔 사유화/시장화 계획을 진행하고, 비정규악법을 확대 시행하고, 한미 FTA 비준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공정택의 당선에 힘입어 일제고사, 국제중 설립, 자립형 사립고 등의 교육 정책도 추진되었고, 경기활성화를 위해 부동산에 대한 규제가 풀렸다.

그와 동시에 촛불들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었다. ‘사회주의노동자연합(사노련)’의 사무실, 자택을 압수․수색하고, 참여연대, 환경연합의 압수․수색에 이어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간부를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했다. 언론 통제․장악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PD수첩에 대한 수사가 이뤄지고, KBS 사장 임명에 반대했던 직원들은 좌천되었다. YTN도 마찬가지이다. 시위대 진압을 위한 캡사이신 분사기가 보급되어 사실상 최루액이 부활했다는 논란이 일어났다. 한나라당은 집단소송제와 사이버모욕죄를 신설하였다.

 

# 불안에 잠식당한 시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파생상품의 그물망을 타고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미국 정부는 7000억 달러를 투입하여 사태를 진정시키려 하고 있으나, 꼬리에 꼬리를 문 파생상품들 덕에 피해 금액이 산출조차 되지 않는 상황이다. 실물경제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미국에서는 정리해고 바람이 분다고 한다. 코스피 지수가 1000을 붕괴하고, 개미투자자들은 엄청난 손해를 보았다. 옆집 누구네 펀드가 반토막 났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환율과 코스피는 한때 만났다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 정부는 계속해서 국민연금을 풀어 주식을 사들이고 있다.

 

# 누가 답을 갖고 있는가?

한 때 이명박은 국내 경제와 증시가 호전될 것이라는 자신의 믿음을 강하게 표현했다. 그러나 금융세계화에 동참하여 경제를 발전시키겠다는 이명박의 구상은 갈수록 불투명해지고 있다.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는 "금고와 장롱 속 달러 내놓는 것이 애국"이라면서 IMF때의 사기극을 떠올리게 했고, 한나라당 의원들은 '외화통장 만들기'운동을 제안했다. 한국은행은 금융시장 불안이 국내 경기 둔화를 더 가속시킬 수 있다며 금리 0.75% 포인트를 대폭 인하했지만, 피부로 느껴지는 불안을 없애주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CMA, 미국에 맞설 수 있는 경제권이라는 브릭스 등이 거론되고 있지만, 그 나물에 그 밥이다.

국민들이 경제위기에 허덕이는 사이에 진행된 국정감사는 더 큰 환멸을 안겨주었다. 한 해 열심히 씨 뿌리고 농산물을 기르는 농민들에게 돌아가야 할 쌀 직불금이 고위공직자와 부동산업자들에게 돌아갔다고 한다. IMF 이후 10년 동안 신자유주의 개혁에 앞장섰던 자들이 이명박과 다른 양 거드름을 피우고 있고, 이명박 뒤에 줄 서 있는 자들은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겠다’면서 정말로 시계를 10녀 뒤로 돌리는 것 같다.

지금, 그 누구도 현 시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정부와 언론이 내놓는 대책은 변죽만 울릴 뿐이다. 어느 정치인이, 어느 경제학자가 답을 내려줄 것을 기대하며, 불안한 미래에 나의 오늘을 내맡길 순 없다.


. 2008년 금융위기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극복할 수 있는가?
 
1. 2008년 금융위기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극복할 수 있는가?
 
2. 2008년, 우리는 촛불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3. 미래는 오직 현실을 직시하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 실천전략
 
1. 2009년 금융위기에 대해 집단적으로 분석, 토론하는 학생회를 건설하자!
     - 경제위기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자!

  2. 각종 분할에 맞서 '연대'로 생동하는 학생회를 건설하자!
     - 금융화를 떠받치는 교육을 비판하고, 민중의 지식권을 쟁취하자!
     - 끝없이 불안한 미래, 불안정노동과 빈곤에 맞서자!
     - 여성인력활용전략의 허구성을 밝히고 진짜 페미니즘을 발언하자!

  3. 진정한 민주주의에 한 걸음 다가가는 학생회!

[한대련 비판]: 다극화 시대 경제블록 형성, 남북경협은 탈출구가 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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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행진

2008/10/30 18:26 2008/10/30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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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촛불은

‘이명박 퇴진’으로 <집중>하고,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어야 합니다!

 

 

지난 6월 10일 촛불집회에 전국적으로 100만명이 모여 “이명박은 물러가라”를 외치자, 정부는 부랴부랴 급한 불을 끄겠다고 미국과 추가협상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국민들의 요구와는 전혀 무관하게 30개월 이상 쇠고기에 대한 수출입업자들의 자율규제를 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역시 “그 나물에 그 밥”인 인사들로 내각개편을 하겠다며 어물쩡 넘어가려 하고 있습니다. 국민과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겠다며 고개를 조아리던 이명박 정부가 여전히 회복 불가능한 ‘소통불능’의 상태임이 증명된 것입니다.

 

다시 보수세력의 총공세가 시작되다.

그런데 촛불집회가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간 사이,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본심이 다시금 드러나고 있습니다. 100만 촛불의 기세에 눌려 눈치만 살피던 이들이 며칠 전부터 촛불 시민들을 맹비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얼마 전 열린 OECD 장관회의에서 “우리는 지금 인터넷의 힘이 부정적으로 작용할 경우 어떤 악영향을 끼치는가 경험하고 있다”고 말하며 광우병 쇠고기 반대 여론의 진원지인 인터넷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이런 대통령의 발언이 있자마자 경찰은 촛불집회 인터넷 생중계를 통해 시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던 '아프리카TV' 운영사 나우콤의 대표 문용식씨를 저작권법 위반을 이유로 갑자기 구속했습니다. 이에 한 술 더 떠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은 촛불집회에 대해 ‘천민 민주주의’라고 맹비난을 쏟아내며 경찰의 폭력진압을 칭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대표적인 보수논객이자 소설가인 이문열은 “촛불집회에 반대하는 의병운동을 일으켜야 할 때”라며 폭력사태를 선동하고 나서기 까지 했습니다.

 

슬그머니 국회로 기어 들어가려는 야당의 기회주의

이렇게 이명박 대통령과 그의 지지자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촛불집회를 공격하는 동안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의 기회주의가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아직 쇠고기 협상 문제의 어떤 것도 해결된 것이 없는데도 이들은 국회 등원 의사를 내비치며 발을 빼려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촛불집회도 이제 할 만큼 했으니, 공을 국회로 넘겨서 ‘정상적인’(?) 절차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김대중, 노무현 두 전 대통령들도 “그만하면 됐다, 국회로 돌아가라”, “퇴진 구호는 헌정질서에 반하는 일”이라고 말하며 한 마디씩 거들고 나섰습니다.

민주 시민 여러분! 도대체 우리는 뭘 믿고 국회로 공을 넘길 수 있겠습니까? 광우병 위험물질에 대한 규제는 하나도 건드리지 않은, 게다가 미국 축산자본과 국내 수입업자들에 의해 휴지조각이 될 것이 뻔한 정부의 자율규제안을 믿고서 말입니까? 아니면 역시 30개월이냐 아니냐에 갇혀있을 뿐인 야당의 ‘가축전염병예방법 개정안’을 믿고서 말입니까? 얼마 전 홈에버 매장에서 미국산 쇠고기의 원산지를 속여 판 것이 드러나면서 이런 방안들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인지 폭로되지 않았습니까? 정부의 미친 교육자율화, 미친 공기업 민영화, 미친 대운하 정책 그 어떤 것도 폐기되지 않았는데, 뭘 믿고 절반 이상이 한나라당인 국회가 해결해 주길 바랄 수 있단 말입니까?

지난 16일에는 서울 강북구 의회에서 진보신당 의원이 발의한 ‘공공기관 내 미국산 쇠고기 사용금지에 관한 결의안'이 부결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황당한 것은 표결에 참여한 6명의 민주당 의원 중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반대 또는 기권 표를 던졌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장외투쟁이니 쇠고기 재협상이니 외쳐대던 민주당의 파렴치한 이중 플레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이럴진대, 야당이 국회로 기어들어간다 한들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명박 정부에게 더 이상 기대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얼마나 더 기다려야, 얼마나 더 속아야 한단 말입니까? 지난 세 달 동안 속은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대운하 계획 유보 한다고 했지만, 국토부 산하에 사업 준비단 만들어서 비밀리에 추진했습니다. 건강보험 민영화 안한다고 말했지만, 실질적으로 건강보험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의료 산업화 정책은 막힘없이 추진하고 있습니다. 쇠고기 협상은 한미FTA와 무관하다고 했지만, 주미대사가 직접 미국 축산자본들 앞에 가서 한미FTA체결을 위해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약속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아무리 화물차를 몰아봐야 기름값도 안 나와 일손을 놓아버린 화물 노동자들에게 오히려 ‘업무개시 명령’을 내리겠다고 협박을 하고 있는 게 이 나라 정부입니다. 만약 우리가 여기서 촛불을 놓아버린다면 얼마나 더 험한 꼴들이 이어지겠습니까?

 

■ 아직 촛불을 끌 때가 아닙니다! 전국 곳곳에서 ‘이명박 퇴진’의 횃불을 듭시다!

지난 한 달간, 우리는 ‘건강’과 ‘안전’에 대한 권리는 누군가가 대리해 줄 수 없고 시민들의 직접행동을 통해서만 지켜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우리의 ‘건강’과 ‘안전’에 대한 권리를 파괴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 삶의 모든 권리를 빼앗아 ‘가진 자’들의 입에 넣어주려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삶에 가져다 줄 타격은 학교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바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런 정책들을 이명박 정부가 알아서 철회해 주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더 많은 우리의 민주주의로, 학교, 직장, 가정, 거리 어디에서라도 이명박을 끌어내릴 ‘촛불’, 아니 ‘횃불’을 듭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안합니다!

① 주말에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집중집회가 있는 날에는 최대한 시간을 내서 참가합시다.
(집회 일정은 www.antimadcow.org에서 확인하세요!)

② 집중집회가 없는 평일 저녁에는 각 지역의 거점마다 작은 촛불집회를 열어 퇴근길, 하교길의 사람들과 함께 촛불집회를 이어갑시다. (당신이 있는 바로 그 곳이 바로 “서울광장”입니다!)

③ 고유가, 다단계 하청구조를 못 이겨 파업에 나선 화물연대와 건설노조에 지지와 연대의 메시지를 보냅시다.
(화물연대 : www.unsunozo.org/hwamul 건설노조 : www.kfcitu.org )

④ 모든 집집마다 “광우병 반대”, “대운하 반대”, “의료 민영화 반대” 등의 현수막 걸기 운동을 합시다.

Posted by 행진

2008/06/23 20:30 2008/06/23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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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조건

- 87년 6월 항쟁을 중심으로 -





1. 들어가며


 오월혁명이 열어놓은 계급투쟁의 문은, 1980년대 비가역적인 대중운동을 만들었다. 1980년대는 한국전쟁 이후로 가장 폭발적인 대중운동이 만들어진 시기였으며, 민주주의의 급진적인 쟁점을 제기한 시기였다. 투쟁이 만들어놓은 담론과 정세가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게 유통되었으며, 지배계급이 짜놓은 세상을 벗어나 민중들의 대안과 변혁이론이 활기를 찾았다. 활발한 대중운동은 1987년 직선제 쟁취라는 성과를 거두어 냈으며, 이후의 운동에도 큰 준거를 만들어 놓는다. 대중운동의 측면에서 우리는 많은 부분, 1980년대의 정세에 빚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1980년대의 정세들을 오월혁명이나 유월항쟁, 혹은 몇몇 상징적인 사건들만 살펴봄으로서 알 수는 없을 것이다. 혹은 '그 때는 그랬다더라'라는 식으로, 회고적인 추억담에 젖는 것만으로도 80년대의 정세를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변혁적인 이론과 담론이 대중들과 융합되었던 방식 자체에 있으며, 그러한 융합은 어떤 조건들에서 만들어졌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 융합은 운동주체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였으며, 운동의 담론이 멀리 떨어진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닌 대중적인 언어가 될 수 있도록 하였다. 그것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라고 이야기 할 수 있으며, 우리가 1980년대의 정세에서 살펴야 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했던 조건에서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 과학적으로 당시의 정세를 분석하고, 정세 속에서 운동을 만들어왔던 방식을 더욱 강하게 사고해야 한다. 다시 한 번 '세가지 층위'의 문제로 돌아와, 당시의 조건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2. 레이거노믹스와 동아사아 체계


 1980년대는 레이거노믹스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였다. 그것의 본격적인 시작은 1979년, 연방준비은행(FRB)의 공격적인 금리인상 조치로 시작된다. 미국은 이 조치를 통해서 달러에 대한 수요를 촉진하고, 전 세계의 달러를 미국으로 끌어 모았다. 그리고 금리인상 조치는 전후 노동자에 대한 포섭을 위해서 추진하던 정책을 포기하고, 금리생활자와 소유자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경제체제를 재편하게 된다. 이런 신자유주의적 재편 과정 전반은 1980년대 공화당의 레이건이 추진한,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 체계로 상징된다.

 공급주의 경제학과 통화주의로 상징되는 레이거노믹스는, 기존에 유효수요를 강조했던 케인즈주의에서 벗어나 공급주의 경제학에 따르는 정책을 실시한다. 그에 따라 소득세에 대한 조세감면, 경제정책에서 재정보다는 통화를 중시하는 통화주의 정책, 재정의 축소, 자본에 부과됐었던 각종 규제에 대한 철폐 등이 시행된다. 이런 정책들이 시행되면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정책과, 그에 따른 금융부문에 대한 안정화정책이 중요하게 된다. 이에 따라 파산한 지역의 금융기관들이 통폐합되는 방식으로, 금융업들이 거대화하고 통합되어 간다. 이것은 금융소유자들에게 더욱 많은 소득을 보장해주는 방식으로 사회가 재편된 것으로, 아메리카 드림(America Dream)의 신화가 깨지게 된다. 이것은 전후 성립되었던 노사협조체제가 붕괴되고 노동자에 대한 탄압이 심화되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확인될 수 있다. 특히 항공 관제사들의 연대파업에 대하여 전원해고의 초강경정책을 시행했던 사건은 레이거노믹스의 단면을 보여준다. 미국에서 전면적으로 실시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말미암아 사회의 빈곤화가 확산되고, 조직된 운동단위들은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레이거노믹스의 등장은 국내적으로 어떤 경제이론과 정책을 택하고, 시행하느냐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헤게모니 국가로서의 위상을 유지하려고 하는 미국 정책기조의 변화는, 세계체계 상에서의 변화로 이어지게 된다. 79년 금리인상조치는 라틴아메리카에 위기를 몰고 왔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수입대체공업화를 추진해기 위해 끌어놓았던 외채의 상환부담이 커졌고, 국가의 채무불이행(default)으로 인해 많은 국가가 파산신청을 한다. 많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국제 통화기금(IMF),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의 직접적인 영향권 아래 들어가게 된다. 이후 1980년대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대대적인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실행되고, 국가를 매개로 하는 발전주의적 경제성장의 꿈은 환상으로 판명이 난다. 그리고 미국에 대한 자원공출기지의 역할을 넘어, 국유기업의 민영화 등을 통해 초국적 금융자본이 이윤을 얻는 창구로서 활용된다.

 경제가 과잉된 지역으로서 라틴아메리카에 비해, 동아시아는 냉전 아래 정치가 과잉된 지역으로서 여전히 포섭의 필요성이 남아 있는 지역이었다. 전 세계적인 위기에 대응하여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다층적 하청체계가 기존의 발전주의적 방식을 넘어서 구조조정 되었다. 1980년대에는 동남아시아 지역이 저임금을 이용해 사양사업을 이전받는 방식으로 다층적 하청체계에 편입되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동아시아 지역 국가들 간의 연관성은 더욱 증대하였고, 지역 안에서 노동/자본의 흐름이 증가하게 된다. 일본과 4개 신흥공업경제국가(NIES)들은 과잉 투자된 자본을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고, 산업 고도화 전략을 추진하기에 이른다. 또한 수출지향공업화와 함께 내수시장을 확대하고, 금융 중심지화 등의 전략을 추진한다. 이런 정책들로 인해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전 세계적인 1980년대의 위기를 유예할 수 있었고, 대대적인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도 늦추어진다.

 한편 동아시아를 ‘정치의 과잉’상태로 몰고 갔던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 국가들과 같이 이윤율의 저하경향이 나타나고 정당성에 있어서도 위기를 맞게 된다. 한편 레이건은 군사 케인즈주의를 더욱 강화하며, 정부의 재정지출을 집중적으로 군수 부문에 돌려서 유효수요를 창출하게 된다. ‘별들의 전쟁’이라고 부르는‘제 2차 냉전’은 소련을 다시 군비경쟁 속에 빠뜨리고, 이를 버티지 못해 1980년대 동안 급격히 쇠락하고 만다. 전후 미국 헤게모니를 이끌었던 이데올로기로서 반공주의는,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로 인해 그 근거가 취약해지게 된다. 이후 현실사회주의의 비가역적 붕괴는, 이 지역들에서 신자유주의 정책들이 도입되는 것을 뜻했다.

 이렇게 전후에 세계체계 수준에서의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발전모델들이 등장한 것과 대조적으로, 1980년대의 시작은 각종 모델들이 신자유주의로 수렴되는 양상을 띠게 된다. 신자유주의가 갖는 파괴적인 효과에 대한 전 세계적인 이데올로기는, 지구화와 국경 없는 세계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국적인 발전모델이 더 이상 유용하지 않음을 이야기하며, 전 세계적인 경쟁의 중요성을 설득하는 논리들이 퍼져나갔다.



3. 경제 안정화 정책의 시작


 전 세계적으로 시작된 신자유주의 물결은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1979년에서 80년대 초반까지 한국에서는 중화학 공업에 대한 중복투자와, 수출이 성장 할수록 외채가 증가하는 조건 속에서 1960 ~ 70년대와 같은 경제성장은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 경제불황이 가속화되는 조건은 한국에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제했고, 이것은 1979년 4월 ‘경제안정화종합시책’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수출지향적 공업화와 재벌 중심적 중화학 공업화의 괴리에 의해 미시적 산업-무역 구조가 왜곡되고, 거시적 불안정을 초래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 정책은 당시 금융자본의 투자를 보장하기 위한 선결조치로서 인플레이션을 잡는 것이 목표가 되었고, 경남지역의 군수공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실시하는 계기가 된다. 이런 계기들은 YH 여공노동자들의 투쟁, 부마 항쟁, 오월혁명과 같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서는 대규모의 대중운동을 불러오게 된다. 그리고 그간 발전주의 정책과 통치를 추진해왔던 박정희 정권이 그 정당성을 잃고 몰락하는 계기가 된다.

 박정희 정권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정권에서도 여전히 한국의 불황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전 세계적인 고금리 정책의 기조 속에서 외채원리금의 상환액은 계속 증가했고, 석유파동으로 인해서 인플레이션은 계속 증가하였다. 또한 미국의 보호무역주의로 인해서, 발전주의를 가능하게 했던 수출지향공업화 전략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된다. 이런 조건들은 동아시아 세계체계 수준에서의 구조조정과 변화를 강제했으며, 한국에서는 산업고도화 전략과 내수시장 확대 전략이 시작된다. 1980년대 반도체 산업이 시작되고,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의 등장과 함께 마이카 붐이 일며 내수시장을 확대하게 된다. 그리고 정권의 경제정책의 기조는 경제안정화 정책으로, 1982년에서 86년에 걸치는 기간에 등장하는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으로 나타나게 된다.

 ‘안정화 정책’ 속에서 정권의 가장 큰 목표는 인플레이션을 잡는 것과, 산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통해서 자본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 세계적으로 추진되었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그 흐름을 같이 하는 정책이었다. 물가를 잡는 것은 신자유주의를 주도한 금융자본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안정적인 수입을 얻는데 필요한 선결조건이었다. 그리고 산업 간 구조조정을 통해서 자본의 규모를 키우는 것이, 자본의 세계에서 시민권을 얻기 위한 필수적인 전략이었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서 중화학공업에 대한 중복투자를 피하고, 실질임금을 동결하고 농산물 가격을 통제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이런 과정이 대중운동과 재생산 영역에 대한 억압과 통제를 통해 이루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결과 1984년에는 인플레이션을 잡는 데에 어느 정도 성장하였다.

 산업 구조조정 정책으로 1차적으로 1980년에 2회에 걸친 투자조정이 실시되었고, 발전설비ㆍ자동차ㆍ중전기ㆍ디젤엔진ㆍ전자교환기 등을 중심으로 중복상태에 있는 업체들을 정부가 직권으로 통합-조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런 통합전략은 1980년대에 계속되었으며 이를 통해 부실기업을 정리하고, 재벌을 중심으로 하는 기업의 대형화와 독점화를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부에 의한 금융ㆍ세제상의 특혜가 엄청나게 이루어져, 총 19조원에 이르는 규모의 비용이 지원되었다. 이렇듯 한국에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실시하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발전주의적 통치의 유산들을 활용하는 방식이었다.

 1985년 엔화에 대한 달러화의 약세를 기본으로 하는 플라자 협약의 체결은, 한국에서도 저환율을 가져오게 한다. 중동의 석유카르텔이 무너지며 석유파동이 진정되고, 국제적인 저금리가 실시되는 상황은 한국 경제에 유리한 상황을 가져온다. ‘저환율-저금리-저유가’를 중심으로 하는 3저 호황은 1986 ~ 88년 기간 동안 한국의 경제 성장을 이끌게 된다. 이런 조건으로 인하여 한국은 라틴아메리카와 같이 국제기구들이 중심이 되는, 강력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국가를 매개로 하는 노동을 비롯한 사회 각 부문에 대한 강력한 구조조정이 잠시 유예되게 된다.


4. 신자유주의에 맞는 국가장치의 역할은?


 우리가 흔히 신자유주의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는, 국가와 시장의 역할 중에서 시장의 역할이 더욱 강해지는 것이다. 국가 재정과 조세가 축소되고, 특히 반주변 국가들에서는 국가가 주도하는 산업화 전략이 더 이상 실시되지 않는 조건들은 그런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한국에서는 흔히 신자유주의의 시작을 1997년 IMF의 구제금융이 실시된 이후로 생각하기 쉽고, 강력한 국가장치가 온존하고 있었던 1980년대의 한국을 신자유주의 사회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전후에 같은 반주변에 있었던 국가들에서도, 그 발전모델이 동일하지 않았듯이 신자유주의로의 변환하는 과정 또한 동일한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이는 라틴아메리카가 국제기구들의 직접적인 개입을 통해서, 1980년대에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실시한 것에 대비되는 것이었다.

 1980년대 한국에서는 가시적이고 대대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이 실시되지는 않지만, 그를 위한 초석이 준비되어가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주도한 세력은 발전주의 시대에 경제성장의 담지자였던 국가로서, 발전주의 시대에 마찬가지로 군부 권위주의 정권에 의한 폭력적인 방식의 구조조정을 실시하게 된다. 구조조정을 실시하기 위한 국가의 통제력은, 비단 재벌과 같은 경제부문 뿐만 아니라 정치형태나 민중의 일상생활까지 뻗치게 된다. 1979년 12. 12 군사쿠데타를 통해서 집권의 계기를 마련한 전두환과 신군부는, 박정희 정권 시기보다 더욱 강력해진 국가폭력/국가장치를 활용한다.

 경제불황과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시작, 박정희 정권의 몰락과 1970년대 대중운동의 성장 등이 과잉되어 만들어진 정세는 ‘서울의 봄’으로 상징되는 거센 민주주의 투쟁을 불러일으킨다. 이에 신군부는 계엄확대를 내용으로 하는 5. 17 군사쿠데타를 실시하고, 광주 지역에 대한 대규모의 군부투입으로 국가장치의 거대한 힘을 보여준다. 그리고 대중운동을 억압하기 위해 사회 각 부문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되어, 김대중/김영삼을 비롯한 야당과 재야인사들에 대한 연행을 시작하고 교수들에 대한 해직을 단행한다. 1980년 5월 31일에는 대통령의 자문ㆍ보좌기관이라는 구실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하고, 신군부가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 기구는 1980년 9월 1일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까지는 정당법과 선거법을 개정하는 등 제 5공화국을 준비하는 기구로, 그 이후에는 국회의 권한을 대행하며 입법기구로서 행사하게 된다.

 대통령이 입법부와 사법부를 거의 자의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던 제 5공화국 정권은, 폭력적 국가장치를 강화하며 통치성의 기반으로 삼아나간다. 반공법을 국가보안법에 통합시켜 공안을 강화했으며, 제 3자 개입금지 조항을 비롯해 각종 독소 조항이 포함된 노동관계법이 마련되었다. 이에 따라 1980 ~ 87년까지 국가보안법ㆍ반공법ㆍ정치정화법ㆍ사회보호법ㆍ집시법으로 검거된 사람의 수는 1만 2천여 명에 이른다. 사회기강의 확립과 사회악의 일소라는 명목으로 공직자들을 대량해고하고, ‘삼청교육대’의 대량검거를 통해서 4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가혹행위로 내몰았다. 하나회를 중심으로 하는 군부세력들은 권력의 요지에 배치되며, 전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이처럼 5공화국은 그 통치형태에 있어서 극단적인 국가의 폭력에 의존하게 된다.


 한편 신군부는 폭력적 국가장치와 반공주의로만은 부족한 민중들에 대한 통치를 보충하기 위해, 새로운 통치의 방식을 도입한다. 이는 주로 재생산의 영역에서 일어났던 변화들로, 조국 근대화론을 벗어나 새로운 근대성(소비적 근대성)을 확립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우선 중화학공업이 한국의 주요 수출산업으로 자리 잡고, 이에 종사하는 남성노동자들에 대한 필요가 증대된다. 산업고도화 속에서 남성이 버는 임금만으로 가족이 먹고 살아갈 수 있다는(가족임금제도),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이 등장하게 되었고 핵가족 이념이 퍼지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재생산의 기본단위로서 가족의 역할을 제고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남한에서 핵가족을 이루기 위한 물질적인 토대는 지극히 약했고, 국가의 취약한 복지지원으로 인해 가족임금제도를 뒷받침해주지도 못한다. 따라서 1980년대 가족형태의 변화는, 중심부국가에서와는 달리 노동자-민중을 강력하게 포섭하는 기제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의 등장과 확산은, 노동운동의 포섭을 위한 포석이라는 성격을 띤다. 즉 노동운동의 목표를 사회의 변혁보다는, 가족을 유지할 수 있는 더욱 많은 임금쟁취에만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 그리고 1970년대의 노동자운동을 이끌었던 여성노동자들은 가정으로 돌아가라는 압력을 받게 되고, 여성활동가들의 투쟁을 역사 속에서 잊혀지게 하는 계기로 작동하게 된다. 특히 여성운동에 대한 국가의 주류화 전략과 함께, 여성들이 투쟁의 주체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은 더욱 심해진다고 할 수 있다

 가족에 대한 개입이외에도 신군부는 민중들의 재생산 영역에 대한 대대적인 개입을 시도하게 된다. 언론기본법을 제정하여 각종 지방지를 폐지하고, 민간방송국을 KBS로 흡수 통합하는 등 신문과 방송 등 언론에 대한 탄압이 심화되었다. 정치인사와 재야의 명망가들을 체포하는가 하면, 대학에서는 교수에 대한 해직 바람이 일어났다. 그리고 사회기강의 확립과 사회악의 일소라는 명목으로 공직자에 대한 대량검거를 벌이고, 사회를 공포분위기로 몰아넣었다. 이런 폭압적인 정책과 함께 1982년 3S(Screen, Sex, Sports) 정책으로 대표되는 유화정책 혹은 우민화 정책을 쓰기도 한다. 각종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오락거리를 제공했던 이러한 정책은, 민중들이 정치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전략이었다. 그리고 두발자유화-교복자율화와 서열제를 폐지하여 중등교육의 '자율화'를 시도하고, 많은 대학들이 설립되며 대학교육이 대중들에게 개방된다. 이러한 교육정책은 산업고도화에 따른 노동력 수급문제를 해결하고, 1980년대 중반 이후에 3저 호황에 따른 혜택의 일부를 민중들에게 개방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와 함께 교육정책을 통해서 민중들을 포섭하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제 5공화국 정권은 박정희 정권과 외견상 매우 흡사하지만, 무엇을 위한 통치였는가에 따라서 그 성격을 달리했다고 할 수 있다. 즉 박정희 정권에서는 발전주의 정책을 실시하기 위한 군부통치를 실시한데 반해서, 전두환 정권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위한 초석으로서 군부통치를 실시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신군부는 가족에 대한 개입과 우민화 정책 등, 재생산 영역에 대한 포섭과 배제를 시도한다. 이것은 발전주의의 폭력적 억압만으로는 민중들을 포섭할 수 없게 된 것에 따른, 통치성의 변화양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의 연합이라는 일반적인 반주변 국가의 신자유주의 통치성에 비해, 전두환의 군부통치는 민주화 투쟁의 형태로 나타난 대중운동을 포섭할 수 없었다. 신자유주의 군부정권이 그 후에 활용했던 전략은, 일종의 ‘합의된 이행’으로 나타나고 군부 통치는 종식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지고, 문민정부가 들어섰다고 해서 1980년대와 같은 통치스타일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미지와는 달리, 현재에 와서도 국가장치의 개입은 지속된다. 특히 구조조정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대중운동을 억압하는 국가장치의 역할은 1980년대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고 이데올로기적인 개입도 시도되고 있다. 그리고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재생산 영역에 대한 통제는, 현재에 와서 그 비중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980년대의 통치 방식은 여전히 우리에게 끝나지 않은 쟁점이다.



5. 비가역적 대중운동의 폭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듯이 1980년대는 민주화 투쟁으로 대표되는 대중운동이 폭발하는 시기였다. 민주화 쟁취 투쟁으로 상징되는 1980년대의 대중운동은, 단순히 착취의 모순과 ‘참을 수 없는 최소’에 대해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들고 일어난 투쟁은 아니었다. 또는 민주화라는 최소강령이 가져온, 광범위한 대중동원과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의 참여 때문에 일어난 투쟁도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대중운동을 평가하는 관점은 1970년대의 점 조직적이고 일회적인 투쟁, 혹은 낭만적인 투쟁에 대한 평가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1980년대 대중운동의 역동성은 오히려, 유신철폐운동과 민주노조 쟁취 및 사수로 대표되는 1970년대 운동의 성과들을 집적한 결과였다. 즉 유신만 아니면 된다는 투쟁에서 모순의 지점을 포착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이념적 발전이 있었다. 그리고 투쟁의 역량을 보존할 수 있는 대중조직들의 건설과 그 형태에 대한 논쟁, 그런 조직적인 발전을 통해서만 1980년대의 대중운동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대중운동이 폭발하는 정세를 만들어 낸 것은, 1979년 부마항쟁과 1980년 5월의 오월혁명을 통해서였다. 이러한 투쟁을 단순히 군부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반대, 혹은 김영삼-김대중이라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에 대한 신망으로 평가하는 것은 투쟁을 가져온 정세에 대한 몰 자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요소가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경제성장의 담지자로서 국가라는 발전주의적 주체가 붕괴하고,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시작됨에 따른 착취양상의 변화와 1970년대의 대중운동들이 조우한 결과가 만들어 낸 정세이다. 그리고 폭발한 정세를 포섭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신군부 정권의 등장이, 1980년대의 대중운동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1980년대 초반 노동운동에서는 신규노조 건설, 어용노조 민주화,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 등을 내건 투쟁이 나타난다. 해태제과 노동자들의 8시간 노동제 쟁취투쟁, 청계피복 노동자들의 투쟁, 3500명의 광부가 참여한 사북 투쟁 등이 있다. 이에 전두환 정권은 ‘제 3자 개입금지’를 포함한 노동법을 개악하며, 노동운동에 대한 연대를 가로막고 규제를 강화했다. 그리고 1981년 청계피복 노조ㆍ반도상사 노조ㆍ콘트롤데이타 노조 등의 민주노조를 해산시켰다. 이런 계기들은 노동운동이 단지 노조를 결성하고, 임금인상이나 노동조건개선 같은 경제투쟁만의 한계를 인지하게 되었다.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이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으며, 정치의식과 계급의식에 대한 고양이 이루어졌다. 1983년 유화국면을 계기로 노동운동의 활동가들은 블랙리스트 철폐운동으로 노동운동의 불시를 지폈고, 해고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를 결성하여 노동법 개정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노학연대투쟁이 활발히 전개되기도 한다.

 1985년은 대우노동자들의 투쟁을 시작으로 노동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난 한 해였다. 일상적인 투쟁을 통해서 노조민주화 세력을 결집하고, 대대적인 대중동원을 통해서 승리로 이끈 이 투쟁은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전형처럼 되었다. 이어 여러 현장에서 노조민주화를 위한 단체행동이 이어졌고, 6월에는 구로동맹파업이 일어나게 된다. 대우 어패럴노조의 탄압에 맞서 연대투쟁을 벌인 이 투쟁은, 10개 노조에서 약 2500명이 참여한 한국전쟁 이후에 일어난 첫 동맹파업이었다. 구로동맹파업은 그간 일상적인 노동운동이 가져온 결과였고, 경제투쟁의 구호를 넘어 정치적 요구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구로동맹파업을 계기로 서노련(서울노동운동연합)과 같은 비합법ㆍ비공개 노동운동 단체들이 잇따라 생겨났으며, 선진노동자의 정치역량을 급증시키는데 초점을 맞추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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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로 동맹 파업의 모습



 학생운동은 기존의 추상적ㆍ낭만적인 투쟁에서 벗어나, 조직적ㆍ이념적으로 투쟁의 역량을 온존하며 1980년대의 투쟁을 이끌어 간다. 이것은 1980년부터 대중운동 단위로서 학생회를 건설하는 움직임으로 나타났으며, 기존의 이념써클에서 벗어나 학회와 같은 대중조직들을 건설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병영집체훈련의 폐지를 요구하는 목소리에서 시작하여 '계엄해제', '유신잔당 퇴진', '정부주도 개헌 중단' 등의 슬로건을 내걸고 투쟁을 진행한다. 이런 가운데 1984년 학원자율화 조치를 계기로 재적학생들의 복학을 포함하는 학원민주화 운동이 벌어지고, 학교마다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를 건설한다. 그리고 각급 학생회의 연대투쟁을 벌어내며 ‘전국학생대표자기구회의’를 만들고, ‘청계피복노조 합법성쟁취대회’에 연대하며 노학연대 투쟁을 만들어 간다.

 1985년 4월에는 학생들의 전국적 연대조직으로 ‘전국학생총연합회(전학련)’을 결성하고, ‘민족통일ㆍ민주쟁취ㆍ민중해방을 위한 투쟁위원회(삼민투)’를 결성하기도 한다. 이를 중심으로 그해 5월 투쟁을 벌이고, 미문화원의 점거농성을 주도하기도 한다. 이는 오월혁명을 진압하고 등장한 전두환 정권과 그들을 지원한 미국의 책임을 공개적으로 문제 삼은 사건이고, 이후의 ‘반미’ 투쟁의 선도적인 위치를 부여받는다. 1986년에는 학생운동의 이념적 분화가 일어나며 '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 투쟁위원회‘(자민투) 계열과 제헌의회 구성을 주장하는 ’전국 반제반파쇼 민족민주 투쟁위원회‘(민민투) 계열로 분화되기에 이른다. 특히 ’강철서신‘의 확산을 계기로 이념적 지향성을 발전시킨 자민투 계열은, 그 영향력을 확대하며 학생운동의 주류세력으로 부상한다. 1986년 4월에는 ’반전반핵 양키고홈‘, ’전방입소반대투쟁‘ 등을 벌이며 이재호ㆍ김세진 열사가 분신하셨고, 1986년에는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을 발족하는 가운데 건국대 사태가 발생하기도 한다.

 학생운동-노동운동으로 대표되는 변혁적 대중운동에 더해, 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의 큰 축을 이루었던 것은 명망가를 중심으로 하는 재야운동과 야당의 싸움이었다. 재야운동은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결성을 계기로 ‘해직교수협의회’, ‘해직언론인협의회’ 등의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조직을 결성했다. 재야운동은 지역과 명망가를 중심으로 하는 운동을 벌였고, 1985년에는 민민협과 국민회의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으로 통합되어 활동을 벌였다. 신민당을 중심으로 하는 야당은 김대중-김영삼이라는 두 대부를 중심으로, 야권의 몸짓을 불려 제 제도권 내에서 5공화국 정권을 위협했다. 특히 1985년 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야권의 위상을 확고부동하게 다졌다. 힘을 다진 신민당은 1986년 개헌운동을 주도하고, 외국에 여론을 알리는 식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활용하기도 한다.



6. 87년 6월, 그리고 그해 가을


 경제안정화 정책을 토대로 꾸준하게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초석을 닦아놓은 전두환 정권은, 폭력적/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를 동원하여 통치를 시도한다. 그러나 변혁적 대중운동의 성장과 ‘지배계급 블록의 이반’이 점점 거센 저항을 만들어내며, 민주화 투쟁의 형태로 단일화되며 전두환 정권을 위협한다. 1986년부터 시작된 3저 호황은, 그 효과가 지속된 기간만큼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속도를 늦추었다. 또한 1980년대 후반에 취약성을 드러내며 붕괴하기 일보직전에 있었던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은, 정치의 과잉이라는 조건을 약화시키는 계기로 작동해 갔다. 1980년대 중반부터 형성된 조건들은, 신군부 정권이 집권할 수 있는 정당성 및 존립기반을 극도로 취약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신군부 정권은 ‘합의된 민주화로의 이행’을 실시하지 않았고, 정권 말기에 이르러 대중운동에 대한 탄압을 높여나간다.

 1986년 10월 유성환 의원을 ‘국시발언’ 사건으로 구속하고, 민통련 사무실을 강제폐쇄하고 이돈명 가톨릭정의평화위원장을 전격구속하기도 한다. 그리고 명망 정치인들에 대한 탄압을 시도하고, 1987년 4월 신민당 대회에 조직폭력배를 동원하여 해산하기도 한다. 변혁운동에 대해서는 86년 14개 노동단체에 대하여 해산명령을 내리고, 건국대 사태에서 1271명의 최대 구속자수를 발생시키며, 강한 탄압을 시도한다. 이어 전국노동자연맹추진 사건ㆍ마르크스레닌주의당 사건ㆍ반제동맹당 사건 등 조직 사건을 계속 터뜨려 반공주의를 대중들에게 심어놓는다. 반공주의는 ‘금강산댐 사건’을 조작하고 ‘평화의 댐’건설 발표에서 절정에 달한다. 대중운동에 대한 탄압과 함께 1987년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여 민주화의 열망을 무너뜨린다.

 신군부 정권은 기간 내내 고문과 조작은폐로 미비한 통치성을 보완하려고 한다. 하지만 1986년 부천 성고문 사건이 밝혀지고,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폭로로 도덕성에 타격을 받는다. 조작사건들에 대한 폭로는 수많은 대중들이 참여하는 투쟁을 만들어 냈고, 민주화 쟁취에 대한 강한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1987년 2월 7일과 3월 3일 ‘박종철군 추모대회’와 ‘고문추방 민주화대행진’에 수만의 대중들이 참여하여 ‘직선개헌’과 ‘정권타도’를 외쳤다. 그후 호헌조치에 대해 야당과 재야세력들이 중심이 되어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가 출범하고, 투쟁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1987년 5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되었다고 발표하고, 이는 6월 항쟁을 들불처럼 타오르게 한다. 6. 10 ‘국민대회’, 18일 ‘최류탄 추방대회’, 26일 ‘국민평화대행진’으로 이어진 6월 항쟁에는 수백만의 대중들이 참여하는 투쟁이었다.

 폭발적인 대중운동은 결국 직선제 내용을 골자로 하는 6. 29 선언으로 이어졌고, 야당과 재야운동이 이에 동의함으로서 6월 항쟁은 일단 마무리되었다. 6월 항쟁은 물론 거대한 대중운동의 힘을 보여주며, 직선제라는 성과를 거두어내긴 하였다. 하지만 6. 29 선언은 지배계급들 간의 합의된 이행으로, 일반적인 신자유주의 정권이 수립되는 것과 비슷한 양상을 나타냈다. 반주변부 국가에서 신자유주의 정권을 추진하는 세력이 군부권위주의에서, 재야와 야당운동에 그 기원을 두는 인민주의 세력에게로 넘어간 것을 뜻한다. 6. 29 선언 이후에 부르주아운동 세력들이 비판적 지지와 후보 단일화를 놓고 과잉쟁점화 되었지만, 사실 김영삼-김대중이 아닌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 자체가 큰 의미를 갖는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그해 가을에 일어났던 노동자대투쟁을 의도적으로 망각하며, 변혁적 대중운동을 약화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간 것이다.

 87년 7월 울산의 현대엔진 노동자들이 민주노동조합을 결성투쟁을 시작으로 한 노동자 대투쟁은, 경남 공업지대를 비롯한 전국 공단지대로 퍼져나갔다. 8월 들어 하루 400건이 넘는 쟁의가 터져 나왔고, 20일에는 하루 500건, 29일에는 743건이 되면서 절정에 달한다. 이에 정부와 독점자본은 노동조합 주요 간부를 체포하고, 파업깨기꾼과 경찰을 동원하여 농성노동자들을 강제해산 하는 등 폭력적으로 진압한다. 정부에 종속되어 있던 언론은 이데올로기적 공작을 시도하고, 야당에서도 시위자제를 요청하는 상황에 이른다. 이로 인해서 9월 중순 무렵에는 노동자대투쟁의 열기가 거의 마무리 되었고, 노동운동은 향후 투쟁을 모색하게 된다.

 87년 가을 노동자대투쟁을 기억하는 방식은, 그 후 한국 대중운동의 양상에 중요한 쟁점을 남긴다. 민주화 쟁취라는 단일한 전선으로 모였던 대중들은, 이를 토대로 분할되었으며 야당과 재야운동은 지배계급으로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낸다. 야당과 재야의 활동에 과잉되어 서술되었던 6월 항쟁에 대한 기억은, 노동자대투쟁을 이기적이고 너무 앞서간 투쟁으로 기억하게 한다. 그리고 변혁적 대중운동을 분리시키고 12월의 대선에 매몰된 논쟁은, 정치와 민주주의의 영역을 제도권이라는 틀로 묶어 놓는다. 이런 기억방식은 변혁세력들을 시민의 영역에서 분리시키며, ‘운동권 VS 시민’이라는 부당한 대결구도를 확대재생산한다. 이에 따라 80년대 제기되었던 숱한 쟁점들은 더 이상 급진화되지 못하고, 제도권으로 편입되어 생명력을 잃는 경우가 많아진다. 한편 노동자대투쟁을 계기로 노동운동의 주력군은, 대공장 남성노동자로 바뀌어 간다. 노동자대투쟁은 그 후의 노동운동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되지만, 이런 주체화 방식으로 인해서 1970년대부터 지속된 영세사업장/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망각되어 간다.



7. 민주주의라는 쟁점


 1980년대를 민주주의의 시기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히 대통령 직선제에 한정된 절차적 민주주의를 얻기 위해 싸웠기 때문만이 아니다. 우선 1980년대에는 그간 한국사회를 지배해왔던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와 발전주의 신화에 맞서, 다양한 수준과 의제에서 민주주의라는 문제를 제기해왔다. 편의상 몇 가지 부문들로 나눈다면 우선 군부독재체제의 종결과 민중들의 정치참여에 대한 요구, 즉 정치적인 수준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있었다. 사회경제적으로는 1980년대 터졌던 각종 비리사건의 정세와 맞물려, 독점재벌 체제와 그 착취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다. 그리고 ‘민족자주’ 세력들이 미국이 한국의 민주화를 저해하는 원흉으로 인식하며, 세계체계 수준에서의 민주주의라는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이런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들은, 타도해야 할 대상을 분명히 하는 전선체에 대한 필요를 부각시키고 ‘민주 대 반민주’라는 1980년대의 전선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것이며, 제기되었던 쟁점들을 해결하려는 다양한 담론들이 87년 이후에도 제기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들은, 단순히 의제와 문제설정의 수준에서 제기되었던 것들은 아니었다. 그것은 민중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전혀 없고 근대적인 시민권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던 조건 속에서, 권리를 찾는 과정이 단순히 ‘절차적’인 것이 한정된 것이 아닌 그 극단까지 밀고 나아졌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서 거리에서의 ‘봉기’의 권리가 가능하게 되었고, 정치의 주체로서 시민권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시민’들은 다양한 담론을 생산하며 대안적인 세계에 대한 상을 만들어 갈 수 있었으며,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를 얻는 세력이었다. 이런 과정에는 1970년대부터 꾸준하게 운동을 조직해왔던 다양한 분파들이, 대중정치를 통해서 대중들과 융합하려는 시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런 융합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시작되었다는 정세와, 1980년대 이후에 확산된 변혁이론이 조우하게 되는 과정 속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서 1980년대에는 정치적 대리주의가 아닌, 시민과 운동주체의 융합이라는 현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1980년대를 민주주의의 시기였다고 이야기하는 이유일 것이며, 386이라는 특이한 집단을 만들어내는 이유였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것이 1980년대의 투쟁을, 완전한 아름다움으로 이야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1980년대 변혁이론의 수준과 조직 장치들 안에는 많은 공백과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고, 이것들은 혁명적으로 전화되지 못하고 부르주아지들에 의해 포섭되는 것이 그 후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정세와 이데올로기적 반역이 조우하면서 나타난, ‘시민 = 운동주체’라는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했던 조건과 주체들의 행동이다.

 1987년 광범위한 대중들의 참여를 통해서 가능했던 직선제 쟁취는, 6. 29 선언이라는 지배계급들의 합의된 이행으로 마무리되었고 야당 세력들은 곧 군부정권과 타협을 한다. 광범한 재야 및 야당 혹은 중산층들은 7, 8, 9 노동자 대투쟁은 너무 멀리 나아간 투쟁, 혹은 계급적 이해관계에 매몰된 투쟁이라며 전선에서 이탈한다. 노동자대투쟁의 결과적 패배가 의미하는 것은, 대중과 운동주체가 융합했던 ‘혁명’의 조건이 의도적으로 파괴되어 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직선제가 쟁취되었으니 다른 수준에서의 민주주의는, 제도정치 밖의 운동이 아닌 제도정치를 더욱 충실히 하는 것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담론들이 생겨난다. 더 이상 정치의 공간은 거리가 아니며, 대의 민주주의적 정당정치를 통해서 이루어야 한다는 담론들이 급격히 확산된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과 그 이후의 포스트모던 담론들의 확산은, 거대담론과 구조를 바꾸는 것이 아닌 일상생활에서의 정치를 확산해야 한다는 담론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1980년대 운동 과정에서 나타났던 공백과 모순에 대한 발견은, 이런 담론들을 더욱 정당화하는 기제로 ‘악용’되기도 했다. (그런 문제제기가 정당하지 않았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미디어와 정보기술의 발달, 그리고 ‘제 3의 물결’로서 정보화담론의 확산은 소통과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정보는 곧 돈이라는 허상 속에서, 정치의 문제는 인터넷과 같은 온라인 공간에서의 소통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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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년 노동자 대투쟁. 그러나 6.29선언의 '합의된 이행'의 결과,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과의 실질적 연결고리는 끊어지고 만다.


 이렇듯 1987년 이후로 계급투쟁의 약화를 위해 꾸준하게 사용해온 전략 중 하나는, 거리의 정치를 다른 공간들로 이동시키는 작업이었다. 그 공간들은 정당과 제도권 정치가 되었고, 일상과 미시적인 권력들이 되었으며, 미디어와 인터넷 그리고 시민운동이 되었다. 물론 이러한 공간들이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거나, 그 공간에서는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들은 조직화 된 운동주체들을 구시대(근대, 산업사회, 군부독재)의 산물이라고 끊임없이 치부해왔으며, 다양한 주체들이 모이는 것을 가로막아왔다. 그리고 투쟁 과정에서 ‘시민’들의 일상과 그것이 파괴되는 과정을 미디어 등을 통해 묘사하며, 혁명적 정세를 가져왔던 변혁이론들은 ‘권’들이나 하는 허구적인 논쟁인 양 치부해버렸다. 이런 담론들은 굉장히 정치적인 것이었으며, 조직화된 운동 주체들의 시민권을 박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조건들은 혁명을 가능하게 했던 변혁이론과 대중과의 융합을 가로막았으며, ‘운동권 ≠ 시민’이라는 등식을 끊임없이 재생산했다.

 이렇듯 거리에서의 민주주의와 조직화된 운동주체들을 구시대의 산물로 간주하고, 운동권과 시민을 분리시키는 담론들은 1980년대 대중운동의 성과들을 소실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즉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일상’과 ‘소통’을 파괴하는 것에 대한 저항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끊임없이 분리되며 무기력해질 뿐이었다. 그리고 1980년대의 대중운동을 통해 각 사회부문들에 제기했던 민주주의의 담론이,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되고 변질되어 간 것이다. 운동과 시민을 분리했던 전략들이, 기실 신자유주의 통치성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은 현재에 와서 분명해 보인다. 그 속에서 우리가 얻은 것은 끊임없는 빈곤화와 불안정 노동, 기본권조차도 보장받지 못하는 삶,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불안감, 정치적 과정으로부터의 끊임없는 배제뿐이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다시 민주주의라는 쟁점은, 민주주의를 만들었던 운동주체와 대중의 융합은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다가오고 있다.



8. 마침 - 광우병소고기 수입반대 투쟁과 관련하여 -


 역사의 방향은 잘 짜여진 시나리오처럼, 혹은 뭔가 커다란 기계적 동력에 의해 가는 방향이 결정되어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 중첩된 모순들의 과잉결정에 의해, 때로는 우발적으로 보일지도 모르는 계기들을 통해 그 방향이 결정되어 간다. 2008년 5 ~ 6월 현재의 정세는, 이러한 역사의 우발성을 어느 때보다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광우병소고기 수입 반대에서 시작한 촛불집회는, 대중들의 분노를 상승시켜 다시 거리에서의 역동적인 정치로 나아갔다. 30개월 이상 된 광우병소고기 수입반대 투쟁은 열기가 더욱 고조 되어가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은 21년 전 6월 항쟁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먹거리에서 오는 일상적인 죽음의 불안’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최소’를 쟁취하기 위해 시작한 이 싸움은, 다양한 의제와 담론들이 표출하는 정치의 공간을 만들어 내었다. 광우병 소고기 수입반대 뿐만 아니라 한미 FTA 반대, 공공부문 민영화 반대, 이명박 정권 퇴진과 같이 다양한 요구들이 분출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공간이다. 그런 공간 속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대중들이 서로의 목소리를 내고, 투쟁의 성격과 방향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는 공간이 되고 있다. 거리의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은 정치와는 전혀 무관한 자발적 시민이라고 이야기하더라도, 이미 다양한 이야기의 경합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현재의 정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시민들의 자발성과 창발성이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다는 것이다. 살인적인 교육정책에 고통 받는 10대들이 촛불을 들었고, 안전한 먹거리를 원하는 가족들이 촛불을 들었고, 인터넷 서핑을 즐기던 이들이 촛불을 들었고, 평소에 불만이 많던 이들이 촛불을 들었다. 그간 운동주체로서 조직되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정세에 참여하고, 각자의 목소리를 내면서 논쟁을 하는 것은 분명 고무적인 일이다. 그런데 많은 일간지나 매체들에서는 시민들의 자발성을 찬양하면서 이들을 신세대로 내세우고 있다. 그에 반해 기존의 조직에서 활동하고 이념을 가지고 있는 '운동권'들을 구세대로 내세우고, 이들은 그 조직적 형태나 의제에서 한물 간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렇게 기존의 운동주체들과 시민들이 의도적으로 분리되는 가운데, '운동권들이 참여하면 시위의 순수성이 떨어진다.'라는 담론까지 생겨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지점에서 기존의 운동주체들은, 그간 대중들과 융합하지 못했던 활동들에 대한 평가와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존의 당사자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한 투쟁이나, 조직보존적인 활동을 넘어 많은 의제들을 적극적으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시민 ≠ 운동권'이라는 담론을 재생산하는 것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고 특정한 효과를 노리고 의도적으로 퍼지고 있다는 데 있다. 이런 담론은 운동주체들을 시민의 영역에서 끊임없이 분리해 냄으로서, 더욱 급진적인 요구들이 터져 나오는 것을 가로막고 시민의 주체를 개인으로 한정짓고 있다. 사실 개인으로서 시민권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은, 많은 경우 지불능력이 있는 소비자 혹은 중산계급에 맞춰진다. 이들이 소비자 혹은 중산계급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조건들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끊임없이 파괴되어가고 그 존립이 위태로워진다. '시민 ≠ 운동권'을 분리시키는 담론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효과는, 사실 빈곤화에 치닫고 있는 전민중이 아닌 특정한 계층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운동을 만드는 것을 뿐이다. 1980년대 민주주의의 정세를 만들 수 있었던 조건들 중 하나는, 19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에 터져 나왔던 대중운동을 계속 조직해내고 목소리를 모아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혁이론이 논쟁하는 가운데 한국 사회에 대한 인식의 정도를 높여나가고, 더 나은 대안을 그릴 수 있던 조건이 있었다. 그런 투쟁의 조건들로 인해서 노동자, 빈민, 농민, 학생 등 여러 주체들의 목소리를 모아내고 직선제 쟁취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이다. 투쟁의 조건들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조직된 운동주체들을 시민의 영역에서 분리하는 것이, 어떤 위험한 효과를 나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진정한 민주주의의 조건들을 만들기 위해서는, 현재 대중들의 분노가 폭발하고 있는 원인들을 살펴봐야 한다.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불만의 근원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싸움의 본질이 무엇인지 살펴야 한다. 이를 위해 여전히 3가지 층위에서 과잉 결정되는 정세를 분석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고, 그 근원이 신자유주의가 가져오는 총체적인 권리의 파괴라는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 즉 현재의 정세를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맥락에서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하고, 더 많은 권리들을 찾기 위한 싸움을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속에서 민중들이 각종 재화와 자신의 생애에 대해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사라짐을 밝히고, '더 많은 민주주의'를 얻기 위한 싸움을 만들어가자고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이 속에서 운동주체들이 대중과 융합하려는 조건들을 만들고, '봉기적 권리'로서 시민의 권리를 급진적으로 밝혀나가자. 이런 노력들을 통해서만 대중들의 투쟁이 열어놓은 '역사의 관문'에, 더 많은 민주주의와 대안세계화를 들일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놓을 수 있다.


Posted by 행진

2008/06/10 17:23 2008/06/10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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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08/06/20 14:55 # M/D Reply Perma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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