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논쟁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



보이지 않는 두려움들이 한국사회를 휩쓸고 있다. 6-70년대 경찰과 군대를 앞세운 군부정권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고 호환, 마마가 휩쓰는 그런 것도 아니다. 여성들에게만 찾아오는 그 두려움은 ‘저출산 정책’이라는 이름하에, ‘생명존중’이라는 이름하에 소리소문 없이 가해지는 폭력이다. 여성들은 자신의 절박한 상황을 주위에 알리지도 못 하며, 오히려 ‘불법’이라는 이유로 진실을 숨겨야 한다.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들은 이제 더 이상 불법 시술은 안 된다는 산부인과 병원들의 대답을 들으며 한 번 좌절하고, 낙태 위험비용이라 하여 400~600만원으로 치솟은 수술비에 또 한 번 좌절하게 되었다. 여성들은 이제 출산율을 적극적으로 낮추는 정책을 시행중인 중국으로 가서 시술을 받는다. 한국에서 600만원을 들여 하는 시술이 안전할지 중국에서 싼값에 하는 시술이 안전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낙태를 금지시켰던 옛 루마니아에서 수십만 명의 여성들이 안전하지 못한 낙태시술로 죽어갔던 일들, 낙태를 하기위해 전 세계를 떠돌 수밖에 없었던 일들이 남한에서도 똑같이 재현되려 하고 있다


낙태를 할 수 없는 두려움. 하지만 진짜 두려움은 낙태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현실을 ‘이야기할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그 절박함 속에는 ‘생명을 죽이기 싫은 마음, 아무에게도 말을 할 수 없는 수치스러움, 내 뱃 속에서 자란 생명이기 때문에 꼭 키우고 싶다는 소망, 포기해야 하는 젊은 인생, 이 생명을 수 개월 더 길러 낳으면 아이나 자신이나 정말 불행한 인생을 살 것이라는 불안한 예감’ 등 너무나 복잡한 마음들이 교차함에도 이런 구체적인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그저 여성들만이 가입할 수 있는 커뮤니티에서, 포털사이트의 익명 게시판에서만 폭발적으로 이야기될 뿐 당당한 여성의 목소리로 나올 틈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이들의 목소리를 막고 있나


최근 낙태논란의 시작을 만든 프로라이프 의사회는 태아 생명 보호를 명분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임신과 출산, 육아를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껏 할 수 있는 사회토양을 만들어 주어야 하며, 산부인과 의사들에게는 낙태시술을 하지 않고도 걱정없이 소신껏 병원운영을 할 수 있는 정상적인 의료환경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낙태근절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에게 핵심은 ‘생명’이고 누구도 개인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 또한 낙태 근절을 위해 미혼모와 사생아, 기형아와 장애아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 제거, 공공 및 사설 보육시설의 확충, 직장 내 임산부와 워킹맘에 대한 처우 개선, 청소년 임신의 경우 남성의 책임 문제, 대국민 성교육과 피임교육 및 낙태 폐해 교육, 생명경시 풍조와 개인주의 제고 등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들 주장의 중심은 생명이기에 그 이외의 여성이 처한 사회경제적인 조건과 권리는 결국 부차적인 것이 된다.





생명존중이라는 말은 당연한 말 같지만 그것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태아도 생명이다’(생명권)라는 말을 앞세워 ‘낙태는 살인이다’라 주장하고 있다.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된 이후부터 생명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명권에 대한 원칙론적 입장은 극단적 결론을 만들어내며 생물학적인 측면으로 논의를 한정짓는다. ‘수정란이 생명이라면, 생명의 맹아를 지닌 정자와 난자가 생명이 아닌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자위를 통해 정자를 배출하는 행위 또한 살인으로서 처벌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명을 죽이는 것이 문제라면 왜 강간에 의한 임신은 처벌받지 않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이들은 쉽게 답할 수 없다. 사회적으로 ‘생명을 헤쳐서는 안 된다’라는 윤리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진지한 고민을 해보지도 않은 채로 여성의 권리를 이에 하위에 있는 것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최근 낙태와 관련된 논쟁은 결국 ‘태아의 생명을 지키자(생명권) vs 여성의 결정권이 먼저다(여성의 임신,출산에 대한 결정권)’라는 좁은 틀로 갇혀버렸다. 이는 여성의 결정권이 ‘내 몸의 문제니까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정도의 이기적인 논리로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여성들이 낙태를 결정하는 이유가 그렇게 단순한 이유일까. 60년대 이후 여성이 인구조절정책의 일환으로 국가의 도구, 출산의 도구로 읽혀졌던 기나긴 역사들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단순히 여성의 결정권을 이기적인 주장만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 동안 여성들의 의견, 여성들의 사회경제적 조건들은 고려하지 않은 상황, 자신의 몸의 일임에도 한 번도 그것에 결정권을 제대로 가져본 적 없던 여성들의 주장을 ‘생명에 대한 책임감이 없는 사람’의 것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그 동안 한 번도 제대로 주목하지 않았던 여성에게 고유한 성욕, 임신, 출산의 문제를 진지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이들은 여성 개인만이 책임져서는 안 될 ‘사회적, 국가적인 문제이지만 무한대로 신성화된 생명권의 압박은 그녀들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듣는 것조차 허용하고 않기 때문이다.


최근 낙태단속을 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주체 중에 생명권에 대한 주창자들도 있지만 정부 또한 빠질 수 없다. 하지만 6-70년대 인구조절정책을 실시하며 낙태를 권장했던 정부가 갑자기 ‘불법낙태’를 단속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최근 프로라이프의사회의 낙태병원 고발이 힘을 받고, 주류 언론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체로 주목할 현상이라서가 결코 아니다. 대통령 직속 산하의 미래기획위원회는 작년 11월 저출산 대책의 일환으로 ‘낙태단속 강화’를 운운했다가 엄청난 논란을 일으킬 뻔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발이 심할 것으로 예상을 한 것인지 실제 제출된 저출산 대책은 ‘여성이 일과 가사를 양립할 수 있는 지원책’으로 한정 되었다. 그런데 올해 2월 프로라이프의사회가 낙태병원을 고발하고 사회적인 파장을 일으키자 이를 명목으로 3월 1일 ‘불법인공임신중절예방 종합대책’을 발표한 것이다.


최근 낙태논란의 근저에 깔려있는 정부와 지배권력들의 핵심은 결국 여기에 있다. 저출산 현상과 여성이 출산을 할 수 없는 조건은 IMF이후 노동자들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에 의해 발생한 가족해체의 위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수많은 여성들이 빈곤해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사회로 진출했고 이로 인해 여성은 집안일에 더해서 바깥일까지 담당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가정을 책임지지 않으면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되는 사회적인 조건은 결국 가정에서 여성이 부담해야 하는 일들을 줄이도록 만들었고, 이로 인해 저출산 현상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회적인 문제를 자신의 책임이 아닌 여성들의 책임으로 교묘하게 돌려놓기 위해 정부관료, 주류언론은 저출산이라는 사회-경제적인 조건에 의한 문제를 ‘개인의 도덕성의 부재’라는 문제로 환원하며 여성을 압박하고 있다. 즉 ‘국가발전을 가로막는 이기적인 여성들에 의한 저출산’이라는 담론으로는 부족하자 이제는 ‘고귀한 생명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는 여성’이라는 논지로 여성들에게 출산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은 성욕, 출산, 양육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기본적인 여성의 목소리들이 ‘생명존중’, ‘저출산의 위기’라는 극단화된 논리 앞에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는 현실. 이제 극단화된 색안경을 잠시 벗어두고 여성에게 반드시 주어져야 할 고유한 권리에 대해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한 번도 주목받지 못하고 국가의 출산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권리, 그래서 제대로 말 한 번 못했지만 이 시대를 만들었고, 사회가 발전하는데 너무나도 필요한 노동을 해왔던 당당한 여성들의 권리를 살펴보자. 그리고 그 권리들이 보장받기 위한 사회적인 장치들은 어떤 모습들일지 알아보자.


낙태논란이 일고 있는 요즘 여성의 권리는 ‘낙태할 수 있는 권리’로만 읽히고 있는 것 같다. 낙태를 여성의 권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그렇게 단순한 논리가 아님에도 ‘여성은 생명에 대한, 사회적 위기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말에 다소 무력하기도 하다. 그래서 ‘낙태의 위험성’, ‘낙태를 하지 못했을 때의 위험성’들을 더욱더 강조하는 방식으로만 대응하기도 한다. 출산과 관련된 낙태라는 쟁점은 결코 출산만으로 묶이지 않는 여성만이 가져야 하는 고유한 권리로서 ‘성욕, 출산, 양육’이라는 문제를 함께 가져온다. 그 세 가지가 단순히 ‘여성’의 것이기 때문에 ‘여성의 권리’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으면 섹스하지 마라’, ‘즐기는 여성은 당연히 그에 따르는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는 말은 성욕과 출산이 여성에게 부당하게 전가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양육이라는 사회적인 일을 10개월간 아이를 뱃속에서 키우며 생겨난 모성으로 견뎌내야 한다는 사회적인 압박은 출산과 양육이 여성의 선택권 안에 들어오지 않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세 가지를 현재 여성이 온전히 선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의 성욕은 이전만큼 억압되어 있지는 않지만 출산을 위한 한도 내에서만 허용되거나, 남성의 성욕에 대한 대상으로서 상품화되거나 대상화된다. 양육 또한 여성이 갖춰야할 덕목으로 여겨진다. 사회적으로 이미 결정된 내용들 속에 여성의 개인적인 선택권은 온대간대 없다. 핵심은 여성의 문제가 끊임없이 ‘모성’, ‘어머니’, ‘가족’이라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의미부여를 통해 공적인 일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분명 출산과 양육, 그것과 밀접하게 관계 맺는 여성의 성욕이라는 문제는 사회적인 권력임에도 그것은 끝없이 개인화되어 가족 속으로, 여성 혼자 감당할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낙태논란 속에서 정부는 여성이 출산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준다고 지원책을 내놓고 있지만 ‘출산이 여성의 책임’이라는 말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 말을 포기하게 되는 것은 출산을 할 수 있는 여성이 그 결정권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욕에서 시작해서 양육까지 이어지는 그 ‘사회적 과정’을 여성의 개인적인 책임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여성의 선택권이 포함되지 않은 ‘성욕, 출산, 양육’의 문제라고 한다면 아무리 그것이 사회적 과정이라고 하지만 반쪽만을 위한 과정일 수밖에 없다. 하기에 우리는 그 과정 하나하나에 여성의 선택권을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모든 권리들은 여성의 삶과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결정권을 지니지만 현재 중요한 것은 오히려 모호하게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뭉쳐있는 성욕, 출산, 양육 각각에 여성의 특수한 권리들을 부여하는 것이다. 또한 그 선택들을 위한 사회적인 장치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성욕이라는 여성의 자유는 스스로의 성욕을 긍정할 수 있는 자유뿐만 아니라 상품화되거나 남성의 성욕의 대상이 되지 않을 자유를 포함해야 한다. 성욕이 온전히 여성의 권리가 되기 위해서는 출산으로 이어지지 않는 성관계가 긍정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 당당히 여성이 피임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야 한다. 또한 당연하게 그 모든 관계로부터 철수할 수 있는 권리 또한 있어야 한다.

또한 여성에게 출산에 대한 권리가 추가되어야 한다. 그것은 여성의 몸속에 또 하나의 생명이 자라나게 할 것인지, 아닐지를 결정할 권리이며 낙태를 할지, 출산을 할지를 결정할 권리이다. 낙태 또한 여성의 선택권 하에 있어야 하지만 출산을 여성이 선택하는 이유에 주목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성이 출산을 선택할 때는 태아의 생명에 대한 것이 가장 크다. 여성은 자신이 임신을 생명의 출산으로 연장시킬 권리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조건 양육에 대한 책임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양육이란 사회적으로 책임질 일이지 여성이 반드시 책임질 이유는 없다.

앞의 두 권리가 온전히 여성의 권리가 되기 위해서는 양육에 대한 선택권을 여성이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양육이 여성만의 책임이 되지 않고, 사회적으로 책임져져야 하는 이유는 여성에게 출산만 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무조건 산모로부터 아이를 분리시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선택권을 여성 산모에게 주고, 출산과 양육 사이에 어떤 선택이든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적인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10개월간 뱃속에서 자란 아이를 스스로 키울 수 있는 권리가 진정으로 여성의 자유로운 선택권에 의해 결정되기 위해서는 양육을 하는 여성이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특별하게 ‘모성’을 더 지녔고, 더 올바른 여성이라는 사회적인 편견을 제거해야 하며, 그것이 실현될 수 있기 위해 양육하는 여성을 위한 사회적인 조건이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원하지 않는 임신을 피하기 위한 피임에 실패했을 때의 상황으로 보자면 여성의 의사에 따라 낙태의 권리, 출산만 할 권리, 양육까지 함께 할 권리들이 모두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원치 않는 임신의 경우 안전하게 낙태할 수 있는 합법적인 지원이 보장되어야 한다. 원치 않는 임신이었지만 출산하고자 하는 여성에 대해 출산한 여성만이 온전히 양육을 책임지지 않을 수 있는 보육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또한 자신이 양육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육아휴직 기간에 대한 보장이 필요하겠다.



지금 바로! 낙태단속을 멈춰야 한다!


최근 각종 언론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낙태논쟁은 결코 생명의료윤리 수업시간에 주어지는 토론쟁점이 아니다. 바로 지금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이고, 수많은 여성들이 아무 목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 폭력을 감내하고 있다. 정부는 ‘낙태단속 센터’까지 설립해가며 강경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저출산의 위기를 여성에게 전가하기 위해 ‘생명존중’의 이름을 빌어 낙태를 단속하고 있는 이명박 정권의 반 인권적-반 여성적인 정책에 우리는 당당히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흩어져 있는 불만들을 한 곳으로 모아 지금의 흐름을 저지할 수 있는 실질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내야 한다.





또한 이러한 행동 뿐만 아니라 여성이 원치 않는 임신을 중단할 낙태에 대한 권리를 박탈하는 현 상황을 바라보며 그 권리 속에 담긴 더 많은 여성의 권리들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는 ‘여성의 권리라고 하는 것들을 다 들어주고 마음대로 하게 해주면 세상이 엉망이 될 것이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성의 문제만이 아닌 모든 문제들과 저항하며 싸우는 세계의 수많은 여성들이 이 말을 행동으로 반박하고 있다. 오히려 또 다른 세상이란 마치 여성에게도 그렇듯이 자신의 몸, 노동, 감정과 욕구 그 모든 것이 세상 속에서 자유롭지만 그것이 결코 전체에게 해롭지 않은 세상이 아닐까. 우리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거부하는 동시에 이를 통해 그 ‘또 다른 세상’을 조금 더 풍부하게 상상할 수 있어야겠다.

Posted by 행진

2010/03/15 20:54 2010/03/15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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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0/03/20 11:44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1. 행진 2010/03/21 13:19 # M/D Permalink

      네!^^ 참고가 되신다니 반가운 일이네요. 편하게 활용하세요.

[6호] 저출산 대책에 여성은 없다!

저출산이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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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지하철이나 공공시설 게시판을 통해 자주 볼 수 있는 공익광고다. 광고문구도 그럴듯하다. “내 아이를 갖는 기쁨과 나라의 미래를 함께 생각해 주세요. 아이들이 대한민국의 희망입니다.” 그렇다. 아이들은 대한민국의 희망일 뿐만 아니라 모두의 희망이다. 아이들이 적게 태어남은 어떤 사람들에겐 심각한 ‘걱정거리’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체의 사장님은 일손이 부족해서 걱정, 대학의 총장님은 학생이 줄어서 걱정, 교회 목사님은 신도가 안모여서 걱정, 병원장님은 환자가 안 와 걱정... 이렇게 아이들은 이 사회의 유·무형의 조직체들이 끊임없이 자신을 지탱할 수 있도록 기반을 제공해 주는 원동력이다. 그래서 아이를 갖는 기쁨과 나라의 미래를 함께 생각해 달라는 정부의 이 ‘간곡한’ 호소는 사뭇 절절하기까지 하다. 젊은이 한명이 노인 한명을 부담해야 하는 시대가 온다, 젊은 노동인구가 부족해서 국가경쟁력이 위기에 처했다 등 이유도 다양하다. 2년전에 모 단체에서 큰 맘 먹고 내놓은 “1.2.3운동”(결혼 1년 이내에 아이 2명을 30세 이전에 낳아 건강하게 잘 기르자!)에서부터 최근의 비전2030까지, 정부는 마치 제2의 새마을 운동을 벌이는 것 같기도 하다.

“출산 권하는 사회”, 그 자체가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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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들 기억하겠지만 이렇게 야심차게 시작되었던 1.2.3운동은 곧장 ‘센스있는’ 네티즌들의 반발에 부딪쳤다. 결혼 1년안에 임신을 하고 30세 이전에 아이 둘을 가지려면 최소한 27살에는 결혼을 해야 하는데, 연달아 두명의 아이를 갖는 것이 가능하겠냐는 것이다. 그래서 <디시인사이드>등에서는 1.2.3운동의 패러디가 등장하기도 했다. (1.2.3운동: 하나기르기도 힘든데, 둘씩이나 낳자니,  혹시 IQ가 30?), (1,2,3,4운동: 결혼 1년 이내에 아이 2명을 30세 이전에 낳아 40대에 파산하자!) 이 패러디들에는 출산이 곧 많은 가임 여성들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세계최고의 교육열을 자랑하는 우리나라에서 아이를 한명 더 낳는다는 것은 곧 빚을 얼마간 더 짊어짐을 의미하는 것이고, 사회복지에 대한 책임을 공적으로 책임지기를 포기한 신자유주의 시대에 그 부담을 더 말해 뭐하랴?

하지만 정부의 출산장려 정책의 문제점을 단지 경제적 부담의 문제로만 한정해서 보는 것은 분명한 한계를 갖는다. 만약 정부에서 경제적 부담에 대한 부분을 덜어준다면 또는 부담을 덜어주는 어떤 정책적 제스쳐를 취해준다면 “출산 권하는 사회”의 모습은 바람직한 걸까? 그렇지 않다. 사실 정부에서 이리도 출산을 권하는 것은 출산이 여성의 의무임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는 집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씨받이와 같은 악습이 있었던 것도, 여성의 마땅한 의무인 출산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가부장제 사회 나름의 ‘처벌’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여성차별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가임여성/불임여성을 나누어 여성 내부에서 신체를 매개로 한 차별을 제도화 하는 것이다. 정부에서는 국민의 고령화가 가속화 되어 미래 국가 성장동력이 유실되기 때문에 출산을 장려해야 한다고 하지만, 이 또한 엄연히 여성 스스로 통제해야 할 권리인 ‘출산’의 문제를 ‘국가발전’이라는 미명하에 통제하려는 것이다. 이미 대한민국 정부가 상정한 국민개념에는 ‘여성’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이런 “출산 권하는 사회”의 가부장성을 제대로 비판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여연을 비롯한 주류 여성운동 진영은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저출산·고령화대책 연석회의>와 같은 기구에 참여를 하고 있는 형국이다.

한편 정부도 1.2.3운동과 같은 새마을 운동식의 ‘출산선동’이 별로 실효성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작년부터 저출산·고령화에 대응한 ‘실질적인’ 대책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새로마지플랜2010, Dynamic Women Korea 2010, 비전2030 등 이름도 화려하다. 이 정책들에서 여성과 관련해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의 핵심은 바로 “여성인력활용”에 있다. 정부는 여성의 경제활동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출산율이 1.08명으로 세계 최저수준인 상황에서 여성의 경제활동을 지원하는 육아인프라를 구축하여 ‘직장과 가정의 양립기반 조성’이 시급하며, 이를 위해 보육서비스의 양적·질적 향상이 시급하다고 말하고 있다. 나아가 여성인력 개발·활용을 위한 ‘일자리 확대’와 ‘여성 능력개발’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가칭)여성경제활동촉진법’제정안을 마련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화려한 포장지를 천천히 뜯어보다보면 정부가 제공하겠다는 여성 일자리는 대부분 저임금·불안정 노동이 대부분이며, 노동시장에서 성별분업을 고착화시키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즉 정부의 정책들은 또 다시 여성에게 출산의 책임을 강요하면서 현재 신자유주의 경제위기의 책임을 여성의 불안정한 노동을 통해 지연시키고자 하는 속내가 드러날 뿐이다.

“여성인력활용”이 진정 노리는 것


정부는 2010년까지 여성일자리 60만개 창출 및 경제활동 참가율을 55%까지 끌어올리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 불안정한 여성고용 조건이 여성빈곤을 심화시키는 원인임을 지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60만개 일자리 창출계획에는 이를 개선하기 위한 조치가 들어있지 않다. 여성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제시되고 있는 것들의 대부분은 돌봄 도우미, 보육시설 노동자와 같은 사회서비스 분야의 일자리들이다. 이것들은 ‘사회적 일자리’라는 이름으로 그 노동을 수행하는 주부나 여성노인 등 여성노동자에게 저임금을 감내하며 노동할 것과 봉사, 희생정신을 강요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 정부가 사회서비스의 시장화를 부추기는 「사회서비스확충전략」을 들고 나오면서 사회서비스부문의 민간위탁이 가속화될 것으로 보여 이 부문의 저임금·불안정 노동화는 더욱 심각해 질 것으로 보인다.

이 “여성인력활용”의 방안이 갖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점은 노동시장에서의 성별분업을 고착화 시킨다는 데에 있다. 사실상 이 방안들에서 제시하고 있는 ‘여성일자리’라는 것들은 기존에 이미 여성들이 가정 내에서 해 오던 것들이며, 단지 여성의 일자리를 확충해 준다는 말로 포장하면서 노동시장에서 똑같은 일을 반복하도록 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런 일들을 공적 영역에서 부담하여 사회화 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부문(이들은 그저 이런 노동에서 이윤만을 내면 그만이고 공공성 확보에는 관심도 없다!)에 내 맡겨 버림으로써 가사와 양육, 노인요양과 같은 일들의 질만 떨어뜨리고 있다. 게다가 이런 여성노동의 상품화는 계층간의 구매능력의 차이가 다시 저소득층 여성의 가족 내 부담을 늘리는 악순환을 초래할 분만 아니라, 여성노동자 내부의 위계화도 심화시킬 것이다.

출산대책이 아닌 여성이 안정되고 당당히 일할 수 있는 권리를!


현재 정부의 저출산·고령화대책에는 여성의 시각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한미FTA추진과 함께 모든 공공부문을 열어젖히면서 “개방을 향한 경쟁”을 하면서 여성에게는 “바닥을 향한 질주”를 강요하고 있다. 기존에 여성이 전담해 오던 출산과 가사노동에다 이제는 ‘직장과 가정의 양립기반 조성’을 위하여 밖에 나가 돈까지 벌어오라고 한다. “여성인력활용”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에겐 일이 필요하다. 그러나 (남성)자본가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의 힘만 불려주며 국가성장동력에 봉사하는 그런 일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와 존엄성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안정되고 당당한 일자리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가사노동의 온전한 사회화와 공적인 부담을 위한 고민과 함께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내는 여성에 대한 차별, 여성노동의 불안정화에 맞선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필수적이다.

Posted by 행진

2007/03/20 08:03 2007/03/20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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