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6년, 민중들은 인간다운 삶을 위해 끊임없이 싸운다. 불안정노동 철폐, 한미FTA 저지, 평택 전쟁기지 건설 저지… 이것들은 어느 것 하나도 놓칠 수 없는 절박한 사안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투쟁들에 헌신적으로 임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각각의 사안들이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흐름이 만드는 지배계급의 총공세라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들을 낳는 노무현 정권의 본질, 즉 '신자유주의 위기관리정권'이 필연적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는 폭력, 기만, 구조적 무능력을 강력하게 폭로하면서, 이를 민중의 힘으로 심판해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철저하게 이 체제의 ‘구조적 문제’이다. 즉 체제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신자유주의는 해결될 수 없다. ‘계급타협적인 사회협약’이나 ‘실용주의적인 로비활동’ 등으로 빈곤과 불안정노동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 민주화 투사의 명함을 팔고 다니던 김영삼과 김대중, 그리고 노동자의 친구라던 노무현이 민중에게 가한 일을 다시 한 번 똑똑히 기억하라. 민중의 이름을 등에 업고 철저하게 민중을 배신한 이들의 만행은, 90년대 이후 진행된 민주화의 본질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명확하다. 오로지 강력한 투쟁, 그리고 사회변혁을 향한 대중들의 아래로부터의 운동만이 현실을 바꿔낼 수 있다.

‘신자유주의 반대! 노무현 정권 퇴진!’의 기치로, 이러한 역사의 진리를 증명해나가자. 신자유주의 위기관리정권의 분열 책동을 넘어 민중연대를 실현하고, 세상을 바꾸자!

신자유주의의 충실한 집행자, 노무현


93년 집권하면서 과거 군사독재정권과 대비되는 ‘민간정부’의 표상을 얻으려 했던 김영삼 정권의 본질은, “한국자본주의를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연착륙시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김영삼 정권의 대표적인 개혁정책이었던 금융실명제, 각종 세계화 정책들(쌀개방 등)은 바로 이러한 본질의 산물이다. 또 97년 외환위기라는 특수한 정세를 틈타 ‘개혁세력’으로 표상되었던 김대중 정권은 재벌-보수 진영의 강력한 유착관계를 깨뜨릴 수 있는 세력으로 부각되었다. 김대중 정권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 체제의 위기라는 외환위기의 본질을 은폐하고 이를 ‘민족고난’이라는 형이상학적 수사로 치장하였다. 그리고 고통분담이라는 논리로 노동자민중에게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들이밀었다. 이런 가운데 남한 경제는 99년 일시적 호황국면을 맞기도 하였으나, 2000년대부터 다시 불황기에 접어들면서 카드빚/가계부채 급증으로 상징되는 민생파탄의 시대가 도래한다. 그리고 지배세력의 통치성에 균열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IMF에서 강요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김대중 정권 하에서 금융세계화에 전략적으로 조응하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을 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런 상황에서, 02년에 집권한 노무현은, 실패한 김대중 정권과의 '연속성'(똑같은 신자유주의, 똑같은 개혁 이데올로기)과 '차별성'(해결되지 않은 경제위기에 뒤이은 광범위한 정치 불신을 배경으로 한 사회적 갈등과 분열에 대한 대응)을 동시에 획득해야만 했다. 따라서 그는 강화된 386정서(노무현 코드)와 업그레이드된 정치개혁을 강조하였고, ‘참여 정부’로 표상되는 ‘참여 민주주의’를 내세웠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이 말한 개혁 역시 개혁은 개혁이되 신자유주의로의 급속한 개혁이었으며, 노무현이 강조한 참여는 지배체제의 안정이 확보되는 한에서의 제한된 참여였다. 또한 노무현 정권은 노동/자본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사회통합적 노사관계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나, 이것은 결국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한 전략일 뿐이었다. 노무현 정권은 각종 공기업들을 민영화하고, 노동시장이 유연해야 경제가 성장한다며 불안정 노동을 확대해 전체노동자의 60%에 달하는 비정규직을 양산하였다. 이처럼 노무현 정권은 전 세계적인 차원으로 진행되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관리하기 위한 신자유주의 정책의 충실한 집행자이자, 그의 위치에서 충실하게 계급투쟁을 수행한 민중의 착취자였다.

신자유주의 속에서 파괴되는 민중의 삶


1970년대 세계자본주의는 자본수익성의 감소, 이윤율의 저하라는 위기국면에 봉착하였고 이것을 지연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신자유주가 채택되었다. 신자유주의는 실물경제를 통한 이윤획득과 체제유지가 더 이상 불가능한 자본주의 체제가, 이른바 ‘금융’부문의 팽창을 통해 이윤을 획득하며 위기를 지연시키려는 체제이다. 따라서 상품, 서비스, 화폐 등 자본의 개입이 가능한 거의 모든 부문의 급속한 자유화를 지향하고, 시장개방·민영화·규제 완화·노동시장의 유연화 등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또한 자본주의의 위기를 우회하여 지연시키려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근본적 대안은 될 수 없다. 1970년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의 주요 원인인 미국의 재정적자 심화가, 현 시기 쌍둥이적자(재정적자와 경상수지 적자)로 대표되는 미국경제의 대외불균형이라는 양상으로 되풀이되는 모습은 이러한 체제적 한계점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자본주의의 위기를 그저 ‘지연’시킬 뿐이라는 신자유주의의 ‘내재적 한계’는,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의 개별 국가권력 또한 위기를 근본적으로 타개할 수 없다는 한계로 이어진다. 이미 금융세계화에 편입된 국가 경제는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지배력 하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지배계급이 제시하는 ‘새로운’ 성장 모델 역시 금융세계화를 충실히 따르며 이러한 흐름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신자유주의가 금융세계화라는 전 세계적 ‘글로벌 스탠더드’를 강요하는 지금의 질서 속에서 ‘일국의 독자적인 경제 번영 혹은 블록화’는 불가능에 가깝다. 하기에 노무현 정권 역시 신자유주의적 발전전망에 포섭되기 위한 기회만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러나 설사 남한 사회가 신자유주의적 체제 재편을 완수하고 금융세계화의 흐름에 완벽히 포섭되어 지배계급이 주장하는 것처럼 GDP의 수치가 상승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히려 대다수 민중들의 삶의 질과는 반비례한다. 노무현 정권을 비롯한 지배계급이 제시하는 새로운 성장 모델은 투자환경 개선과 규제완화로 외국계 기업 유치를 유도하면서, 특히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제시되고 있는 지식기반서비스산업(금융거래와 금융화를 보조하는 비즈니스서비스산업, IT/BT 등의 첨단기술산업, 의료·보험 등 공공서비스산업 등)을 통해 초국적 금융자본의 활동과 지배력을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또한 자본유치를 위한 투자환경 개선과 규제완화는 상시적인 구조조정을 통한 불안정 노동의 심화와 이를 제도적으로 완성하기 위한 노동법 개악, 민중들의 기본적 생존권조차 박탈하는 공공분야의 민영화 등을 수반한다. 게다가 저들이 말하는 ‘투자’는 지난 론스타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단기적 이익만을 얻으려는 금융‘투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금융세계화로 일정부분 편입된 남한 경제에서 수출․외자유치를 통해 획득된 자금은 설비투자나 고용창출 없이 주식배당금이나 기술개발에 대한 투자로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GDP와 같은 가시적 경제지표가 상승하여도 민중들의 삶의 조건은 오히려 파괴되어 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하에서의 위기관리 전략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속에서 각 민족국가들은 개별적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금융세계화가 야기하는 민중생존권 파괴는 필연적으로 각종 분노와 불만을 발생시킨다. 그러나 이것은 (금융세계화가 바로 그 원인이기 때문에) 금융세계화의 체제 아래에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따라서 각 민족국가들은 이러한 분노와 불만이 체제 자체를 위협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 모든 쟁점들에 미봉책으로 일관하며 분노와 불만을 ‘관리’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다. 따라서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에 포섭된(혹은 포섭되고 있는) 국가의 성격은 ‘신자유주의 위기관리국가’라고 할 수 있고, 노무현 정권 또한 그렇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신자유주의 위기관리국가의 전략’은 대체로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그중 한 가지는 경찰․군대와 같이 ‘억압적’성격을 가지는 국가장치들을 적극 활용하여 투쟁하는 민중들을 통제하는 방식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지난 5월의 ‘여명의 황새울’이나 7월 포스코 노동자들에 대한 폭력 탄압 등을 들 수 있다. 이처럼 공권력을 동원한 무력행사, 즉 엄청난 수의 경찰이 방패와 곤봉으로 시위대를 구타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연행하는 위기관리 방식에서, ‘국가기구’가 이미 획득하고 있는 ‘공적·합법적’이라는 표상은 그 빛을 발한다. 지배계급은 거대 미디어를 이용하여 ‘소수 몇몇의 이익을 위한 불법 시위대의 이기적 폭력’에 대한 ‘시민일반을 위한 공권력의 합법적/불가피한 무력’이라는 식으로 호도하면서, 공권력이 자행하는 폭력 행사에 당위성을 부여한다. 또한 모든 투쟁을 (자신이 정한) ‘불법/합법’이라는 틀에 맞춰 ‘불법폭력시위’로 규정하면서 문제의 본질을 은폐하며, 민중들의 정치적 발언과 행동을 직/간접적으로 제한한다. (불법/합법 논쟁은, 합법적인 대화와 타협의 자리를 마련하고, 결국엔 ‘현재의 조건’에 타당한 협상안을 정리해서 정권의 의도대로 추진하려는 사회적 합의주의에서도 적극 활용된다.)

이처럼 개별 국가가 억압적 성격의 국가기구를 통해 분노와 불만을 관리하는 방식은, 전 세계적으로 금융세계화에 대한 분노와 불만을 관리하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군사세계화와도 맞닿아 있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중심축인 미국은 천문학적 국방비를 쏟아 붓고, 세계 곳곳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재편하며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신속성과 정밀성, 기동성을 강화하고 있다. 이처럼 미국이 막대한 예산을 들여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테러’와 ‘악의 축’과 같은 인류 공통의 적에 대한 ‘정의로운 개입’이라거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성전’을 위해서가 절대 아니다.

금융세계화의 본질이 전 세계적인 자본의 자유로운 투자와 이동이라는 점에서, 그 착취 양태는 개별 국가 경계에 따라 결정되거나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여 나타난다. 따라서 그에 따른 불만과 저항도 국가라는 경계 안에 매몰되지 않고, 때때로 개별 국가의 지배계급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금융세계화를 작동하는 중심축인 미국과 초국적 자본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의 목소리로 나타난다. 또한 금융세계화에서 제외된 지역(그것이 자의적이든, 자의적이 아니든)은 ‘배제와 포섭’이라는 신자유주의의 기본 전략에 따라 차별과 불평등을 겪게 되고, 여기에서 발생하는 분노와 불만 세력 또한 미국에게는 위협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한 국가에서 체제적으로 나타날 때는 북한이나 이란과 같은 ‘악의 축’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불만과 저항의 세력들을 무력으로 억압하여 금융세계화를 뒷받침하고, 때로는 무력을 먼저 앞세워 금융세계화를 관철시키는 수단으로써 군사세계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금융세계화와 군사세계화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다시 개별 국가의 위기관리 전략으로 돌아가면, 대중들의 정치적 실천에 대한 억압적 통제와 더불어 신자유주의 위기관리 국가를 지탱하는 또 하나의 축은 ‘인민주의’이다. 근시안적 미봉책으로 일관하는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국가권력은 대중들이 제기하는 쟁점에 대해 어떠한 해결책도 내놓지 못한다. 따라서 이러한 자신들의 정치적 무능함을 은폐하고 회피하기 위해 허구적인 쟁점을 던지고, 미디어와 스타 정치인을 동원하여 정치를 희화화하는 수단으로 인민주의를 활용한다. 흔히 ‘포퓰리즘’이라고 알려진 인민주의는 자유주의, 보수주의, 사회주의 식의 체계적인 정치이념이나 전략이 부재하다. 대신에 그저 모든 권력의 정당성의 근원인 다수 인민들에게 직접 무엇인가를 호소하고, 이를 통해 끊임없이 ‘적과 아’ 사이의 허구적인 대립구도를 설정하여 기존 정치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을 동원한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되는 쟁점은 그야말로 문제의 본질과는 상관없는 허구적인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 해결과는 거리가 먼 대중조작적 정치 ‘스타일’ 혹은 ‘공학’일 따름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역기반이 없고 현실 정치판에서 안정적인 지지기반을 갖지 못한 노무현은 인민주의 정치 스타일의 가장 극단적인 방식을 택함으로써 이를 해결하려 한다. 즉 정당을 통해 안정적인 지지 세력을 규합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아예 정당정치, 의회정치라는 것 자체를 우회한다. 지구당을 폐지하는 등 정당을 통한 대중들과의 접촉을 포기하고, 대신 텔레비전, 인터넷 등의 미디어를 통해 대통령 그 자신이 광범위한 대중들과 직접 접촉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이미지의 형성’은 필수이다. 예컨대 노무현은 이회창이 절대 따라 할래야 할 수 없는 자신의 고유한 이미지 - TV에 나와 기타를 치며 상록수를 부르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 -를 창조해냈다.) 또한 ‘한나라당 = 보수 vs 열우당 = 개혁’ 식의 허구적인 대립 구도를 만들고 상대방의 부정부패와 스캔들을 들추어내는 등의 과정을 통해 ‘가상의 적’을 만든 다음, 그곳에 모든 대중들의 원한을 집중시키기에 바쁜 정권의 모습은 ‘원한의 정치’라는 인민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신자유주의 반대! 노무현 정권 퇴진!


2006년 현재 남한 사회에서 지배계급이 보여주고 있는 행보는,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반민중적 흐름의 일관된 목적 아래에서, 금융-군사세계화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금융세계화로의 편입 전략은 한-미 FTA로, 그것을 예비하기 위한 체제 정비와 노동권 약화는 비정규개악안과 노사관계로드맵으로, 금융세계화를 뒷받침하기 위한 군사세계화는 평택 전쟁기지 건설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또한 최근의 ‘바다이야기’ 문제만 보더라도, 정작 중요한 핵심들은 건드려지지 않고 있은 채 지배계급 사이에서 소모적인 논쟁들만 이루어되고 있는 실정이다. 사행성 게임업체에 관한 문제의 핵심은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한 빈곤, 실업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을 ‘로또’나 ‘도박’에 대한 허황된 꿈으로 관리하는 동시에, 이러한 투기성 산업 육성을 통해 민중들을 ‘두 번’ 착취하는데 있다. 따라서 한나라당의 ‘권력형 도박게이트’라는 규정은 문제의 본질은 비껴간 채, 노무현 정권의 ‘개혁세력’이라는 이미지조차 해체함으로써 반사이익을 얻기 위한 전략에 불과하다. 이러한 본질을 비켜난 저들의 허구적인 이전투구 속에서, 신자유주의 금융-군사세계화가 만들어내는 갖가지 중대한 문제들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허구의 쟁점에 민중들의 불만이 동원되고, 민중들이 가상의 적을 향해 원한을 불태우고 있을 때, 노무현 정권은 한편에서 조용히 민중들의 삶의 파괴하는 신자유주의 금융-군사세계화의 정책들을 착착 진행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맞서야 할 적이다.

각각의 사안들은 관통하는 근본적 원인인 신자유주의, 그리고 그것을 기획․집행하는 정권에 반대하는 것은 우리 민중들이 임해야 할 공통적이고 본질적인 정치적 목표이다. 이러한 목표를 뚜렷하게 세우고 투쟁에 임할 때, 각각의 투쟁들은 개별적인 사안의 차원을 넘어 ‘시대적 보편성’이라는 커다란 무기를 얻을 수 있다. 만약 ‘시대적 보편성’이라는 것이 잘 머리 속에 그려지지 않는다면, 80년대 거대한 민중의 반역을 이끌었던 시대의 보편성, ‘민주주의’를 기억하라. 80년대 이루어졌던 모든 크고 작은 투쟁들은 결국 ‘민주주의’를 향한 민중들의 거대한 행진이었다. 80년 광주에서 우리는 동지들의 죽음을 목도했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주는 부끄러움을 민주주의에 대한 책임감으로 승화시켰다. 80년대의 거대한 흐름이 마무리 된 후, 90년대 민중운동은 보편적인 지향성을 상실한 채 끊임없이 표류해오지 않았는가? 이제 이러한 현실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오로지 ‘보편적인 투쟁’ 속에서 민중들의 광범위한 연대를 이끌 수 있고, 희망을 만들 수 있다.

또 우리는 노무현 정권의 지지도가 끊임없이 추락하고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식의 시니컬한 우스갯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이 때, 反노무현 전선을 강화하는 것의 정세적 의미를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한다. 현재 노무현은 만인의 희화화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문제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생산적인 흐름으로 이어지지 않은 채 감정적인 적대와 원한, 증오만을 재생산하면서 오히려 퇴행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정권 퇴진 기치에 대한 맹신에서 벗어나, ‘노무현 정권 퇴진’의 기치를 진정으로 ‘정세적’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식의 원한과 적대가 어떻게 정치를 불가능하게 하고 운동을 후퇴시키는지 우리는 이번 5.31 지방선거에서 확인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노무현이 왜 퇴진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명확하게 폭로할 수 있는 투쟁을 벌여나가야 한다. 노무현 정권 퇴진!의 기치가 신자유주의 반대!의 기치와 짝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권 퇴진 투쟁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어떤 이가 대통령이 되든 민중을 탄압할 수밖에 없는 현재의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민중들의 대안 세상을 만들자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신자유주의 반대! 노무현 정권 퇴진! 의 기치로, 민중의 강력한 반격을 만들어 나가자! 신자유주의 위기관리정권을 심판하고, 대안세계를 만들어나가자.

Posted by 행진

2006/09/07 07:39 2006/09/07 07:39
, ,
Response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RSS :
http://stulink.jinbo.net/blog/rss/response/18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