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간사] 지배계급의 공세에 맞서,
2학기 뜨거운 대중운동의 바다로 달려갑시다!



2학기의 시작. 하지만 개강의 활기가 캠퍼스에 넘쳐야 하는 시기임에도, 요즘은 너무 뒤숭숭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우선 촛불집회의 열기가 17일간의 올림픽으로 사그라진 후에, 지배계급의 공세는 더더욱 강해지고 있습니다. 기습체포당한 사노련 동지들, 고용허가제 4년을 맞아 강제출국되는 이주노동자들, 성신여대 시설관리노동자들에 대한 일방적인 해고, 아쉽게 끝난 뉴코아 노동자들의 투쟁, 기륭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 이런 가운데 등록금을 내지 못해 자살한 한 학우의 이야기는, 미친 신자유주의 시대의 씁쓸한 이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기업 민영화 정책, 감세정책, 서울학군조정 등 이명박 대통령은 ‘경쟁력’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각종 정책을 실시합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 환율상승/주가하락이 계속 이어지면서, 9월 대란설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경제위기가 증폭되어 갈수록 이명박 정권은 발악하듯이, 민중들을 죽이는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각종 사건들이 잇따라 터지며 혼란한 지금, 우리는 더욱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지배계급들의 공세에 논리적/실천적으로 대응하면서, 우리의 이야기를 펼쳐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조금 더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맞서 싸워야 할 것 같습니다. 정세에 대응할 수 있는 계획을 짜고, 집행을 하고, 평가를 하며 우리와 함께하는 대중들을 만들고 역량을 쌓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항상 전국학생행진 - 캠퍼스 행진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가장 실천적이고 똑똑한 행진활동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배계급의 공세에 맞서, 2학기 뜨거운 대중운동의 바다에 함께합시다! 가장 실력 있는 ‘행진’을 만들어 갑시다.

※ ‘17호 뉴스레터’ 이렇게 활용합시다!

[성명]은 노동자 운동이 나아가야 할 바를 검토하며, 기륭투쟁에 우리가 연대해야 하는 이유를 담은 글입니다. 쟁점들을 살펴보며 계속 투쟁에 연대하도록 합시다. [정세동향1]에서는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민영화/사유화 정책에 대한 쟁점입니다. 지난 대안세계화 학생포럼 때 보았던 내용을 상기하면서, 최근의 동향과 쟁점들을 잘 알고 투쟁에 예비하도록 합시다. [정세동향2]에서는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의 현황과 과제들을 실었습니다. 대안세계화 운동의 이념으로서 국제주의는,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함으로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교육분석]에서는 ‘9월 대란설’의 실체에 대해서 분석한 글입니다. 환율-주식 등 곳곳에서 감지되는 경제위기의 상황에 대해, 그것이 어디서 유래하고 어떤 쟁점들을 가지고 있는지 명확히 알도록 합시다. [기획연재]는 2학기에 연재될 1950 ~ 70년대 한국현대사 내용의 개괄입니다. 특히 지배계급들이 펼치는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의 근원을 찾고, 이에 대한 역사적인 비판을 수행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행진 회원모임과 각 단위에서 일상적인 교육과 토론이 가능하도록, 뉴스레터를 활용하면 좋겠습니다. 내용을 피드백하면서 각종 선전을 한다면, 많은 학우들이 우리의 내용을 알게 될 것 같습니다. 2학기 동안 더욱 긴장감 있고 빠르게 뉴스레터를 발간할 것을 약속드리며, 동지들의 힘찬 투쟁을 기대합니다.

Posted by 행진

2008/09/10 12:08 2008/09/10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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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합시다!
- 기륭투쟁에 부쳐 -




지난 2005년 8월, 구로 지역 공단에 만연한 최저임금과 불법파견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면서, 이에 앞장서고 있는 기륭전자에 대한 노동자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투쟁을 시작한 기륭 여성노동자들의 기나긴 싸움이 어느 덧 1100일을 훌쩍 넘어가려 하고 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심화될수록 비정규직으로 대표되곤 하는 불안정노동의 경향은 일반화될 뿐만 아니라, 다면화ㆍ구체화된다. 이것은 익히 알고 있듯이, 자본의 이윤율이 경향적으로 저하되는 상황을 상쇄하기 위한 전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인데, 그만큼 저들에게는 노동의 불안정화를 보다 ‘구체적인 정세와 구체적인 세력관계에 적합하게 끊임없이 재조직’하는 것이 사활적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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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현재의 구체적인 정세는 어떠한가? 우선, 이명박이 당선될 수 있었던 주요한 근거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경제성장’ 내지 ‘경제위기 극복’이라는 구호에서 알 수 있듯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금융위기를 타개하는 것은 그 어느 분파를 막론하고 지배세력들에게 중요한 과제이다. 그런데 최근의 환율논란이나 이른바 ‘9월 위기설’ 논란에 대한 여ㆍ야의 이전투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들이 이에 대한 실질적인 타개책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하다.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은 ‘(방법상의 차이만 있을 뿐인)한미 FTA'나 ‘비정규직 악법’ 등의 반노동자ㆍ민중적인 의제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민주노총 등이 야심차게 진행해 온 ‘비정규직 전략 조직화사업’이나 이른바 ‘평택투쟁ㆍ한미FTA투쟁’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 것처럼 이에 맞서야 하는 대다수의 운동진영들이 실천적으로 무기력에 빠져 있는 상황이 돌파구를 못 찾고 수년 째 이어지고 있다. 물론, 지난 5월 이후 지속되어 온 촛불시위는 ‘이명박’으로 대표되는 지배세력에 대한 거대한 대중적 불만을 극적으로 드러낸 것이지만, 기존의 사회규범 일반에 대한 불만ㆍ환멸을 넘어서는 지배계급의 전략에 맞서는 구체적인 운동으로 자기 스스로를 재조직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7/8월부터 공안탄압과 각종 기본적인 권리에 대한 심각한 침탈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운동의 기획이 전방위적으로 도모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동안 장기화되어 온 KTX, 이랜드-뉴코아, 기륭, 코스콤 등의 투쟁 역시 이렇다 할 돌파구를 열어제끼지 못하고, 앞으로 예상되는 정권의 각종 탄압의 지속과정을 온 몸으로 맞부딪혀야만 할 것이다. 지금까지 이 투쟁사업장들은 비록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많은 사람들은 아니지만, 강고하고 끈질기게 서로간의 연대투쟁을 이어 온 노력들이 모여 그 투쟁을 지속할 수 있었지만, 정권의 더 큰 물리적 탄압은 정확히 이것마저도 고립시키고 해체시키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공세적인 국정운영’을 천명한 정권의 입장에서 이에 걸림돌이 될 만한 운동진영에 대한 탄압의 가장 현재적인 방식이 바로 이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륭ㆍ이랜드ㆍKTXㆍ코스콤/성신여대 노동자들의 싸움이 남한 노동자 운동의 싸움일 수밖에 없으며, 노동자 운동이 승리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또한 이번 기륭 투쟁에서 우리가 눈 여겨 봐야 할 것 중에 하나는, 남한 자본의 해외이전이라는 문제이다. 사실, 기륭전자의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이 한 달에 받는 월급은 지극히 적은 금액이었기 때문에 “그 까짓 월급 얼마나 된다고, 그걸 안 주고 비인간적으로 저렇게까지 해고 하는가”라는 비난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 한 것이다. 신자유주의 금융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주주들의 주요 목적은 노동자의 임금 몇 푼을 절약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몸살을 줄이고 구조조정하는 그 ‘과정’ 자체만으로도 주식의 가치를 일시적으로 반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구조조정이 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금융네트워크 및 이에 철저하게 포섭되어 있는 다층적인 하청체계의 선을 따라 이뤄지는 것이라면, 기륭전자뿐만 아니라 구로공단ㆍ창원 등지의 제조업 중심의 중소기업들이 이미 동남아ㆍ중국을 비롯한 해외로 공장을 이전시키고 있다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강제하는 불안정노동의 일반화가 낳고 있는 경향 속에 기륭투쟁이 자리 잡아 왔다는 것이며, 이는 앞으로도 여기저기서 끊임없기 제기될 문제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투쟁의 전략이 남한 노동자운동에게 요구되는 것이기도 하다.

앞서 확인한 바 있듯이, 정권의 공안탄압/운동진영탄압은 남한 노동자운동의 실천적인 무기력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미 ‘공세적인 국정운영’ 운운하면서 이런 움직임들이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이는 올 해 가을, 남한 노동자운동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시험대에 올라 있다. 바로 기륭투쟁이 그것이 될 것이다. 기륭 조합원들이 도심의 cctv 철탑에서 고공시위를 전개하고, 그야말로 몸과 마음의 뼈를 깎는 살인적인 단식투쟁을 전개하면서 다시 이른바 ‘사회적 여론’을 타게 되자, 사측에서는 “이만큼 사회적 관심이 집중 되었을 때, 너네가 적당히 양보하여 추석 전에 끝맺는 것이 좋을 것”이라면서 노조에 대한 협박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기륭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절대 이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아주 긴 시간동안 진행된 ‘기륭 투쟁의 승리’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의견은 운동주체들 저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적어도 사측에서 함부로 말하는 것처럼 ‘적당히 양보’하여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분회장 동지를 비롯한 조합원들이 목숨을 걸고 단식투쟁을 진행한 것이 아닐뿐더러, 단적으로 말해서 기륭 투쟁을 중심으로 “단위사업장을 넘어서는 […] 희망을 던”지기 위해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만인 선언ㆍ만인 행동>을 준비하고 있다. 무엇보다 기륭 노동자를 비롯한 비정규직 투쟁을 함께 하고 있는 이들이 지금의 싸움을 이렇게 끝 낼 추호의 마음도 없는 것이다. <만인선언ㆍ만인행동>은 9월 11일 저녁 6시, 서울역 앞에서의 ‘1차 예비 행동’을 시점으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기륭 투쟁은, 비정규직 투쟁은 이제 다시 본격적으로 시작인 것이다.

Posted by 행진

2008/09/10 12:07 2008/09/10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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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동향1]저들만의 경제성장 정책,
사유화/선진화 방안




■ 공공부문 사유화 계획을 밀어붙이고 있는 이명박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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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는 촛불이 사그라지길 기다렸다는 듯 지난 8월 11일, 1차 공기업선진화방안 발표를 시작으로 추석 이후 3차 방안 발표에 이르기까지 원래 계획대로 '공공부문 사유화 계획'을 착착 추진하고 있다. 이는 불과 몇 달 전 이명박 대통령 스스로가 ‘물·전기·가스·의료보험’ 4대 분야 민영화는 없다고 말했던 것과 정확히 반대되는 방향이다. 정부가 추진 중인 공기업 선진화방안의 흐름을 봤을 때, 당시 대통령의 발언은 촛불을 잠재우기 위한 거짓말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애초 대선 시기부터, 그리고 대통령직 인수위 시기에도 이명박 정권은 경제성장의 해법 중 하나로 정부예산을 20조 절감하겠다는 의지를 굳게 내비쳤다. 이 20조라는 규모의 예산 절감은 정권이 주장하듯 그저 정부 부문의 운영 효율화만으로는 불가능하기에 이는 필연적으로 공공부문에 대한 대규모 구조조정과 공공서비스의 축소를 불러올 것이다. 노무현 정권 시기에 진행된 이른바 ‘소프트웨어 구조조정’은 공기업과 정부 산하기관의 운영에 시장 원리를 적용하는 데에 집중한 반면, 이명박 정권은 그에 기반을 두어 ‘하드웨어 구조조정’, 즉 직접적인 예산, 인력, 조직의 축소를 감행할 것이다.

지난 8월 11일 발표된 1단계 '공공부문 선진화' 방안의 핵심은 산업은행, 기업은행 및 자회사의 민영화와 공적 자금 투입기업의 매각 그리고 주택공사와 토지공사의 통합과 자회사 매각 등이다. 이에 대해 재계 등에서는 '강도와 범위가 기대에 크게 못 미친다'고 더 광범위한 민영화를 주문해왔다. 하지만 산업은행 등 금융공기업과 공적자금 투입 기업에 대한 대대적인 민영화 계획은 지주회사로의 전환을 꾀하고 있는 재벌들에 대한 특혜지원, 부동산 관련 공기업의 통합과 대형화 및 관련 자회사의 민영화를 통해 부동산투기의 폭을 넓혀줄 것이다. 금융기관의 민영화 중 첫 대상으로 거론된 산업은행은 총자산이 145조원으로 국내은행 중에 최고로 큰 규모의 자산인데, 이를 매수할 수 있는 것은 해외의 투기자본이 아니면 국내재벌들 뿐이다. 때문에 이명박 정부는 금융기관의 민영화에 앞서 산업자본의 은행소유를 막고 있는 금산분리(금융의 특성(금융기관은 자기자본 비율이 작고 대부분 고객·채권자의 자금으로 영업)을 감안하여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이 결합하는 것을 제한하는 원칙)를 완화 내지 폐지하고, 출자총액제한제도(대규모 기업집단에 속하는 회사가 순자산액의 40%를 초과해 국내회사에 출자할 수 없도록 한 제도)를 완화하여 국내외 독점재벌들이 은행을 소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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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발표된 1,2차 공기업 선진화 방안에서 대상이 된 기업은 319개 검토대상 기관 중 79개 기관이 해당하고 , 민영화, 즉 팔려나가는 대상은 28개이다. 대표적으로 산업은행이나 기업은행 같은 금융공기업이 있고, 공적자금이 투여된 구조조정기업, 대우해양조선이나 현대건설 같은 14개 기업이 있다. 통합을 계획하고 있는 공기업은 31개→14개, 아예 폐지되는 기관 3개, 기능조정 기관 19개로 발표가 났다. 9월 중으로 발표될 3차 추진계획에는 20여 개의 기관이 포함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의 통합, 전력과 발전 부문에 대한 구조개편 등이 포함될 것으로 보여 파장이 클 것이다.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공공부문 사유화 계획 중 우선적으로 살펴보아야 부분은 공기업의 사유화와 매각이다. 현재 국내 공기업 수는 총 102개인데 이 중 시장형 혹은 (준)시장형으로 분류되는 24개의 공기업 - 한전, 가스공사, 철도공사, 지역난방공사, 인천공항공사 등 - 의 대부분이 그 사유화 계획에 포함되어 있다. 정권이 이처럼 경제를 살리기 위한 효율성 제고의 방안으로 에너지 공기업, 부동산 공기업, 교통 공기업을 중심으로 한 공기업들의 매각을 추진하는 이면에는 한국경제의 성장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기업의 안정적인 투자처가 절실하다는 현실이 있다. 또한, 경영권까지 매각이 되지 않더라도 지역난방공사 등은 이미 증시상장이 확대되고 있는 상황에서 공기업의 증시상장이 더욱 가속화될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될 경우,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 공공요금이 인상될 것은 사실 뻔한 일이다.

한편 정부는 이러한 매각, 축소, 혹은 통폐합에 더불어 공기업의 비효율적인 경영을 개선하고 대국민 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해 ‘경영 혁신’을 추진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를 위해 도입될 시장 원리는 결국 대대적인 내부 구조조정을 뜻할 뿐이다. 민간 기업이 공기업을 인수하도록 유인하기 위해서라도 정부는 기업 가치를 높이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정리해고 등의 구조조정을 감행할 것이고, 특히 이 과정에서 비정규직에 대한 우선적인 구조조정이 예상된다. 당연히 감축된 인원에 대한 신규채용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남아 있는 인원 역시도 민간위탁, 외주화, 자회사 설립 등의 방식으로 간접고용의 형태로 돌리게 될 가능성이 크다. 또 정권이 언급하고 있는 ‘최저가낙찰제’는 이러한 고용불안을 제도적으로 보장해 줄 것이다.

이명박 정권이 빠르게 공기업 사유화 계획을 밀어붙이고 있지만, 이러한 공기업 사유화 방안이 경제성장의 해법이 아닐뿐더러 투기자본에게는 이득을 가져다주고 대부분의 서민들에게는 공공요금 인상과 구조조정의 칼날을 들이댈 것임을, 그로 인해 '양극화'가 더욱 심화될 것임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시민들이 사유화를 반대하는 촛불을 들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촛불이 제기했던 사유화 반대의 움직임을 이어나갈 투쟁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선 사회공공성 투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합의부터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공공부문 사유화 저지투쟁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찾아보자. 그리고 지금까지 정부의 체계적인 공공부문 사유화에 맞선 공공성 투쟁이 어떻게 전개되어왔는지 살펴보면서, 투쟁의 한계를 짚어보고 이를 넘어서기 위한 우리의 전략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 사회공공성 투쟁이란 무엇일까?

한국사회에서 '공공성'의 의미는 여러 사람들에게 공개된 혹은 다수를 위해 존재하는 또한 개인적인 영역이 아닌 집합적인 영역 등 매우 다양하다. 이렇듯 공공성의 의미가 애매모호한 이유는 그 의미가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상황과 권력관계에 의해서 그 의미가 규정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공공성의 의미는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 한정되지 않는 보편적인 속성으로서 공적 영역의 속성, 또는 특정한 집단에만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공공영역을 제공하는 주체는 국가이며, 국가가 어느 정도 중립적인 외관을 띠면서 국민들의 일반이익을 대변한다고 불리는 부문을 공공부문이라고 본다. 그래서 지금의 공기업민영화에 대한 분노도 바로 국가가 이러한 역할을 포기했다는 점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분석만으로는 '왜 국가는 공공부문을 만들었는가? 자본주의 국가에서 공공부문이 등장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한계적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국가에서 공공부문이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 '공공성'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어떠한 작용을 하는지 간단하게 살펴보자.

쉬잔느 드 브뤼노프(Suzanne de Brunhoff)는 '공공부문'이 형성되는 이유를 자본에게 필수적인 (그러나 자본이 스스로 생산할 수 없는) 특수한 상품으로서 '화폐'와 '노동력'의 (재)생산과 관리가 국가적 차원에서 요구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고전경제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국가의 개입이 시장경제의 발전에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시장경제 자체가 국가의 개입을 적극 요청한다는 것이다. 국가는 그 자체로 자본주의의 기능 작용의 핵심에 개입하며 이로써 억압적, 이데올로기적 역할과 구별되는 '경제적 역할'을 갖는다. 브뤼노프는 이러한 국가의 역할을 가리켜 '경제적 국가장치'라 불렀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공부문'이란 '국가/경제와 분리된 독자적인 영역'일 수 없으며, 경제영역의 지배적 생산관계가 직간접적으로 투영되어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공공부문'은 자본축적에 기여하는 국가장치의 기능을 수행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물/에너지/의료/교육 등과 같이 인간으로써 누려야 할 '보편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장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가 사람을 재생산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사회재생산 관련 영역에서의 공적 시스템 구축을 위한 투쟁은 가장 광범위한 투쟁으로 형성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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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공공성은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보편적 권리 실현을 지향해야 하며, 재산권의 재구성과 소유의 사회화를 이루어가야 한다. 또한 우리의 노동이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성찰을 통해 공공부문운영에 대한 문제와 생산수단 사회화를 실현시키는 시스템 전반의 구성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노동자/민중의 통제와 자치를 통해 이룩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사회공공성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은 개개인의 삶을 사회 구성원이 공동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보편적 권리의 실현'이다. 하지만 국가 - 시민사회 - 경제의 도식처럼 사회의 영역을 인위적으로 가르는 담론으로 인해 그 실현이 왜곡되고 있다. 전 사회를 가로지르는 모순의 한 장(場)으로서, 공공영역을 자본의 논리에 팔아치우려는 정권에 맞서 공공영역이 인간의 보편적 권리를 실현할 수 있는 장이 될 수 있도록 민중들의 통제 하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어떤 선험적인 정의(定意)가 아니라 우리의 실천적 활동으로 만들어나가야 하는 정치적인 담론이다.

■ 빼앗길 수 없는 민중의 권리, 사회공공성 투쟁의 쟁점들을 구체적으로 제기하자!

이명박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공공부문 사유화 정책은 필연적으로 공공성의 파괴를 동반한다. 정권은 공공부문의 구조조정에 발맞추어 혹은 구조조정을 불러오는, 공공성을 약화시키는 정책들을 끊임없이 발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의료․복지 영역의 경우 일명 ‘성장 복지’ 정책으로 경제가 성장해야 복지가 늘어날 수 있다는 식의 논리를 대어 건강보험 당연 지정제를 둘러싼 끊임없는 논쟁을 만들고, 민간보험의 활성화 등을 복지 정책이랍시고 내세우고 있다. 또한 사회복지서비스의 경우엔 ‘민간이 공급’하게 하겠다고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는데, 이러한 계획은 국민건강보험공단, 국민연금공단, 근로복지공단 등의 공기업 축소, 구조조정 계획과 동시에 추진되고 있다. 이와 같은 공공성 파괴 - 공공부문 구조조정의 흐름은 언론부문에서도 마찬가지이며 특히 연기금(국민연금)의 경우에는 펀드매니저가 기금의 운용위원이 되도록 하여 금융화의 능동적인 주체가 되도록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정책들이 실행될 경우 민중은 ‘노동자’로서 일터를 잃어버리거나 불안정한 고용 형태에 무방비로 노출될 것이고, ‘시민’으로서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권리들, 위의 경우에는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들을 빼앗길 것이다. 이명박 정권의 공기업 사유화 전략이 ‘선진화’라는 이름으로 격렬한 반대의 목소리들을 일정 부분 잠재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온갖 규제들은 철폐되고 있으며 노동은 점점 더 불안정해져가고 있고, 선진화라는 허황된 희망 속에 삶의 권리들은 하나하나 좌절되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 정권의 기만적이고 교묘한 공공부문 파괴의 전략의 맞선 투쟁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 우리는 공공성으로 뭉뚱그려지는 ‘사회 복지 확충’급의 요구에 우리의 투쟁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구체적인 의제들 속에서 투쟁의 매개점을 발견하여 이를 신자유주의 반대의 맥락에서 재구성함으로서 운동으로 제기하고 그를 통해 투쟁을 확장시켜야 한다.

특히 사회서비스시장화저지 같은 의제에 주목하면서 여성권을 제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부는 8월부터 치매/중풍 등 장기요양이 필요한 노인을 위한 장기요양보험 제도 시행을 시작했고 이에 수도권 요양시설 확충 대책 추진, 재택서비스 강화, 요양서비스 제공 인력인 요양보호사 · 간호사를 최대 7만 명 양성할 것이라고 발표하는 등 사회서비스에 관련한 다수 정책들을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기간 대다수 노동운동은 ‘재생산 영역’에 대해 갖는 맹목으로 인해 오히려 비판해야할 정부의 사회서비스전략과 맥을 같이하는 대응을 하기도 하는 현실이었다. 지금까지의 사회공공성 강화 투쟁은 보육/의료 등 재생산 영역의 상당부분을 주요 의제로 삼기는 했었지만 여성들이 가족 내에서 수행해왔던 가사노동-돌봄노동은 그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사회공공성 투쟁에서 ‘가족 내에 한정되어 가시화된 적 없는 가사노동이라고 하는 것‘도 말해야한다고 포괄의제를 넓히는 것이 답이 될 수는 없다. 생산과 재생산의 영역을 분리하여 재생산 영역을 가족에 할당하는 구조 하에서는 정책대안을 모색하거나 국가지원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대안적인 상이 확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핵심적으로는 ‘재생산 노동의 사회화’라는 대안적인 상을 모색하는 방안을 사회운동의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교육 역시 공공성 투쟁의 중요한 쟁점으로 다뤄지고 있다. ‘계급화-서열화를 부추기는 교육 시장화 반대‘의 내용을 분명히 하여 민중들의 교육/지식에 대한 권리를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기획과 공간을 늘려가야 한다. 최근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는 사안으로 서울시에서 추진하고 있는 ’국제중 설립'문제가 있는데, 이에 대응하는 투쟁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이나 에너지, 보건의료의 문제 역시 단순히 ‘사회복지 확장’이라는 인식 틀에 갇히지 않는 제기가 필요하다. 에너지에 대한 접근권을 보장하라는 시민단체의 요구에 대해 ’발전량을 높이기 위해 원자력 발전소 추가 건설‘을 하는 식(정부의 국가에너지 기본계획)의 대응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요금 인상 반대‘를 넘어서는 ’지속가능한 방식으로(생산된) 안전하고, 문화적으로 적합한 재화/서비스에 대한 민중의 권리’를 드러낼 수 있는 투쟁을 만들어야한다.



■ 공공성 투쟁의 새로운 전략과 방향을 세우자

공공성을 파괴하는 정책은 공공부문 구조조정으로, 또 반대로 공공부문 구조조정은 공공성 파괴로 이어지게 마련이고 결국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직접적인 구조조정의 위협과 동시에 공공서비스의 상업화로 인한 위협에 이중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 공공부문 노동자들뿐만 아니다. 민중들은 구조조정으로 잘려나가는 노동자들을 보며 고용불안을 체감할 수밖에 없고, 직접적으로는 공공서비스의 박탈로 삶의 질이 저하될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공공성 투쟁은 두 가지 모두에 대한 투쟁이 되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 진영에서는 정부의 이데올로기적 공세와 시민운동의 성장에 따라 시민 - 계급의 분리가 전개되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고 오히려 정부의 그러한 관리 전략에 조응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공공성이라는 담론을 스스로에게서 탈각시켜버렸다. 이후 운동 진영의 공공성 투쟁은 공무원의 집단이기주의적인 행동으로 매도당하기 일쑤였고, 이들을 ‘대신해서’ 공공성 담론을 대표하고 있는 시민운동은 공공성 강화를 국가부문 강화와 동일시하면서 국가 역할의 확대를 주장할 뿐이기에 진정한 민중의 권리로서의 공공성을 전혀 짚어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노동운동의 위기라고 이야기하는 지금, 그리고 공공성 담론을 이미 빼앗겨버린 것 같은 지금, 공공성 투쟁은 어떤 방향으로 무엇을 위해 전개되어야 하는가? 이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일부 운동 진영에서 주장하는 국유화의 문제이다. 공공부문의 비자본적인 성격은 이윤 창출을 유일한 목표로 하는 민간 기업에서 담보할 수 없는 것이기에 국가가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운영해야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인데, 앞서 언급했던 공공부문의 본질을 생각해 볼 때 이는 오히려 부정적인 효과를 낳게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공공부문은 국가와 자본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자본축적을 용이하게 하는 국가의 보조적인 기능에 해당했다. 현재와 같은, 자본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가 개입을 강화한다는 것은 결국 공공부문을 권리로서 사고할 수 없게 할 것이다.

이를 넘어서기 위해 제기해야 할 쟁점은 실질적 통제권의 확보일 것이다. 공공부문이 국가 소유로 남고, 사회 복지와 같은 노동력 재생산 비용의 사회화가 강화된다 하더라도 공공부문이 민중의 실질적인 통제 하에 놓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국가 역할의 확대와 이데올로기적 개입의 통로가 될 뿐 공공성 강화와는 연결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와 같은 소유나 사회화의 문제는 실질적인 민중 통제권의 쟁취 속에서만 그 의미를 획득한다. 그렇다면 ‘실질적’인 ‘통제’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결국 기술의 개발 단계에서부터 적용의 단계까지 전 과정을 노동자의 고용을 보장하고 환경 파괴를 저지하며 자본의 통제권을 축소할 수 있도록 노동자․민중이 개입해낼 수 있는 시스템을 말한다. 이러한 민중 통제의 시스템이 구축될 경우, 노동자의 고용과 환경 파괴가 부딪히지 않는, 안전성의 확보와 장애인 이동권이 만나는, 전 민중의 삶의 질이 확장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은 민중 통제의 쟁취는 전 민중적인 연대 전선의 구축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것은 그저 국회에 ‘진보적’ 정당이 몇 석을 차지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전사회적으로 노동자․민중의 목소리가 얼마나 힘을 가지느냐의 문제이고, 이는 전 민중의 연대전선의 구축에 달려있다. 그러나 97년 이후 강화된 시민 - 계급의 분리 속에서 심지어는 노동자조차도 노동자로서의 정체성보다 몰계급적 시민, 즉 사교육비를 더 벌어야 하고 질 높은 의료 서비스를 받기 위해 민간 보험을 알아보러 다니는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강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물론 97년 이후 세련된 방식으로 삶에 깊숙이 침투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공세의 탓이기도 하지만 노동운동이 개인의 삶을 포괄하는 진정한 ‘계급’운동으로 나아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며, 이는 곧 노동운동이 구체적 삶의 양상을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요원해 보이는 공공부문에서의 전사회적 연대전선의 구축은 그러나, 오히려 ‘공공부문’이기에 더욱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공공부문 구조조정과 공공성의 파괴는 당연히도 서로 분리되어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기에 소위 노동자적인 이해와 시민적인 이해는 일치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제까지 지배 계급의 공세 속에 그 일치는 힘겨웠지만, 그 공세가 강력했다는 것은 동시에 그 부분이 바로 신자유주의의 약한 고리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을 뜻하기도 한다. 하기에 공공부문은 이제까지 평행선을 이루어왔던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이 만날 수 있는 접합점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결합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는 없다. 지배 계급의 저 세련된 ‘초계급적 시민의 이해’라는 말에 무너지지 않으려면 노동자계급의 투쟁 과제로서 공공성을 인식하고, 동시에 그것이 ‘시민적’ 요구이기도 함을 알려내고 결합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Posted by 행진

2008/09/10 12:06 2008/09/10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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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동향2] 이주노동자 투쟁의 현황과 과제



0)들어가며

2008년 8월 17일, 고용허가제 도입 4년이 되던 날, 이주 노동자들과 연대동지들의 정리 집회 앞에 버젓이 놓인 플래카드에는 이주 노동자들을 범죄 집단화 하며 추방해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범죄를 저지른 개인이 어느 한 집단의 특성으로 쉽게 일반화 하는 현실에는 다른 집단에 대한 타자화/적대가 실려 있다.1) 이러한 분할과 그에 따른 배제는 위기에 대한 분노를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지 못하게 하며 그럼에 신자유주의의 위기관리 전략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이데올기와 함께 경제위기라는 상황들이 맞물려 이주 투쟁의 여러 쟁점들을 형성하게 된다. 이번 글에서는 고용허가제 시행 4년을 맞아 이주 노동자 투쟁의 현황과 견지해야할 지점들을 돌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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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명박 정권 등장 이후 이주 노동자 운동에 대한 탄압

지난 3월 노동부와 법무부의 보고를 받던 이명박 대통령은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지나친 온정주의가 만연해서는 안된다", "불법체류 노동자들이 활개치고 돌아다니게 해서는 안된다" 라며 강경대응을 지시했다. 도대체 언제 법무부와 노동부가 이주 노동자들에 대해서 '지나친 온정주의'를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이명박 정권의 대응을 보노라면 이전의 대응이 온정적이었던 것 마냥 느껴질 만큼 가혹하기는 하다. 법무부는 이전에 보기 힘든 재빠름으로 지역별 이주 노동자들의 수를 촘촘히 파악했으며 5~7월 집중단속 기간에 지역에 8~9천명에 달하는 '할당량'을 주문했다.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들려오는 소식에 따르면 각 보호소(라는 이름의 수용소)의 상황은 칼잠을 자야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더욱이 우려스러운 점은 이러한 합동/집중 단속이 시기를 넘어 일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살인적 단속과 추방이 반복되는 것은 4년째 진행된 고용허가제가 이주 노동자들의 삶을 전혀 보장해주고 있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다.

2) 고용허가제

이주 노동자들은 86년 아시안 게임과 87년 노동자 대투쟁2) 이후 본격적으로 한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시 어떠한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정책도 없던 정부는 계속되는 이주 노동자들의 유입과 더불어 열악한 상황에 대한 저항들에 1993년 11월 산업연수생 제도라는 궁색한 변명을 내어 놓게 된다. 명백한 노동자를 일을 배우려온 학생들로 만들어 교육에 대한 대가로서 저임금/고강도 노동을 요구하는 산업연수생 제도는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여러 자생적 투쟁을 거쳐 01년 평등노조 이주지부 건설/명동성당 농성등 여러 투쟁을 일으키게 된다. 당시 36만에 육박하던 이주노동자들의 80%가 미등록 상태가 되고 정부는 03년 고용허가제를 준비하게 된다.3)  하지만 고용허가제는 이주 노동자들의 정주를 막고 등록에 따른 통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고용허가제 시행 4년을 맞아도 결국 되풀이 되는 비극에 대해서 밖에 할말이 없는 것은 고용허가제가 기존의 문제를 한치도 해결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자본의 필요에 따른 불안정 저임금 노동의 안정적인 재생산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4)

이에 맞서는 투쟁들 또한 유례없는 탄압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고용허가제와 더불어 이주 노동자들을 옥죄는 출입국 관리법 또한 영장 없이도 불심검문과 단속을 가능하게 하는 내용을 골자로 9월 이후 법무부가 국회에 제출할 예정에 있다. 이는 기본적인 절차마저 무시함으로서 반인권적 단속과 추방을 탄압으 도구로 삼던 출입국 관리소등의 행동을 법제화 하겠다는 의도이다. 이주 노조 설립이후 끊이지 않았던 지도부에 대한 단속도 반복되어 지난 5월 2일 이주노조 지도부 2인이 단속 이후 강제 출국되는 사건도 있었다. 더욱이 이번 지도부 강제 추방은 지난 3인 지도부 강제 출국 이후 농성을 지속하며 간신히 쌓아올린 이주 노조의 지역 기반마저 위협하고 있다.

3)이주 노동자들의 손으로 노동을 허가하는 싸움을!!

-역할과 과제

이주 노동자는 앞서 이야기한 탄압들과 여러 요인들이 맞물려 스스로 투쟁하기 어려운 조건에 있다. 투쟁의 주체들이 대부분 미등록 이주 노동자의 신분으로 공개적인 활동을 펼치기 힘든 상황 이며 투쟁하는 것 자체가 비자 외 활동으로 분류되어 신분이 위협받게 된다. 이러한 법적 제도적 조건 이외의 것들도 존재한다. 이주 노동자들의 출신국이 다양함에 따라 주체들 간의 의사소통문제가 그 하나이며 한국어/한글에 대한 어려움 또한 존재한다. 이러한 조건들은 종종 이주 노동자들의 투쟁이 스스로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제한하며 연대단위와의 긴장감을 필요로 하게 한다. 이러한 조건들을 걷어내는 투쟁과 연대가 앞으로의 이주 투쟁에 있어서 우리가 해결해야 할 지점이다. 탄압을 막아 내는 투쟁들을 함께 진행하며 언어 장벽의 곤란함을 포함하는, 그것을 넘어서 이주 노동자들이 온전히 스스로의 투쟁에 나설 수 있게 하는 과정들이 필요할 것이다. 더불어 현실에서 노동하고 있는 이주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노동권을 보장하기 위한 노동비자/노동허가제 쟁취를 위한 싸움을 확산 시켜야 한다. 사업주의 입장에서의 고용을 허가하는 것이 아닌 노동자의 입장에서 노동권의 보장을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쟁취되었을 때, 그리고 쟁취하는 과정에서 이주 노동자들의 운동이 온전히 바로설 수 있는 출발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4)나아가며

국제주의/분할과 배제 그리고 시민권/신자유주의와 이주 노동/이주노조운동의 역사와 사례 등 이주 노동자들의 투쟁과 함께 이야기 할 수 있는 것들은 다양할 것이다. 이번 뉴스레터에서는 고용허가제 4년을 넘기고 있는 이주 노동자들의 현황에 대해 소개하는 수준에서 다루어 보았다. 이주 노동과 관련한 경제적 분석과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공세들이 작동하는 것이 현실에서 탄압과 투쟁들로 나타나게 된다. 그렇기에 위에 나열한 의제들과 그 작동을 연결해 사고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5)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위해 이주를 선택한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것은 살기위해 노동하는 노동자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처럼 아이러니이다. 하지만 결국 모두 '인간답게 살겠다'라는 처절한 외침들임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 목소리들을 짓밟는 작금의 현실이 신자유주의가 야만임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 [제7의 인간]에서 존 버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도시화된 국가의 경제에 관한 한 이민 노동자들은 불사(不死)의 존재, 끊임없이 대체 가능하므로 죽음이란 없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태어나지도 않으며, 양육되지도 않으며, 나이 먹지도 않으며, 지치지도 않으며, 죽지도 않는다.

이러한 끊임없는 단속과 강제 추방 속에서 모두가 힘들어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출국을 각오하고 싸우며 강제추방 후에도 본국의 노동자들과 투쟁하고 있는 동지들을 떠올리며, 그 뒤를 이어,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투쟁할 동지들과 어깨를 걸자. 투쟁하는 노동자들 또한 불사의 존재이며, 계속 추방되더라도 다시 태어나고, 일어서며, 지혜로워지며, 죽지도 않는다. 투쟁.

--------------
1)이주 노동자들의 주요 출신국의 범죄율이 소위 선진국들보다 현저히 낮으며 이중 많은 부분을 생계형 범죄가 채우고 있다. 이는 미등록 이주 노동자들의 상황에 대한 표현이다. 각 유형별에 있어서 최근에 위장결혼의 증가율이 높다는 점 또한 주목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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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87년 투쟁의 성과로 임금상승과 노동시간 단축이 추진되자 자본은 유순한 '외부'의 도입-이주 노동자-과 내부에서의 외부 창출-비정규 노동을 비롯한 여러 분할-을 꾀하게 된다.


3) 04년 시행을 앞두고 이주 노동자들은 모두 신고를 해야 했고 이를 피하려던 장기 미등록 이주 노동자들은 이후 대대적으로 진행된 단속에 쫓기다 목숨을 잃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수가 적지 않았다.


4)미등록 이주 노동자의 숫자는 20만 명으로 고용허가제 시행 당시보다 두 배 가량 증가했다.

5) 관련한 자료로 행진 학술자료실 108번에 등록되어 있는 글들을 참고

Posted by 행진

2008/09/10 12:02 2008/09/10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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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분석]9월, 외환위기
 대란이 일어난다?!


요즈음 하루가 멀다하고 인터넷 포털사이트 메인에는 ‘9월 위기설’ 에 대한 기사가 올라온다. 환율이 폭등한 날에는 ‘9월 위기설 현실화 되나’ 정부의 개입으로 환율이 안정세를 찾으면 ‘위기설 불씨는 여전’ 정도로 헤드라인이 뽑히고, 이와 동시에 ‘위기설 근거 없다’라는 내용의 기사는 환율 폭등 때는 ‘그래도 없다’ 로 안정세를 찾을 때는 ‘거봐 없잖아’ 식으로 계속 업데이트 된다. 여러 입장들의 기사가 올라오지만 공통되게 전제하고 있는 생각이 있는데, 하나는 바로 ‘위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는 것, 다른 하나는 ‘현 상황이 ’위기‘ 라고 명명되는 순간 정말 큰일이 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지금 위기가 도래했다고 본다. 이는 이론적으로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 국면이라는 측면에서 그렇고, 경험적으로는 궁핍화가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경제기사들 속에서 알 수 있다. 몇 년 전부터 지배계급도 ‘양극화’가 문제라고 얘기해왔고, 최근에는 양극화뿐만 아니라 아무 구제도 못 받는 ‘샌드위치 계층’도 문제라고 하고, 주택담보금을 갚지 못해 주택경매는 늘어났다고 하고, 추석특수 같은 것은 옛말이라고 하고… 이런 이야기가 매일 올라오는데, 대체 어떤 ‘위기’가 안 왔다는 것일까?

지금이 구조적 위기라 하더라도, 그냥 그렇게 ‘아, 이미 위기라니까 그러네.’ 라며 정리하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다. 구조적 위기 국면에 돌입한 순간 한꺼번에 모든 경제지표가 바닥을 치지는 않고, 또 세계체계적 관점에서 보면, 주변부에서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지금의 체제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지금 우리에게는 좀 더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남한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사람들이 우려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겠다. 그렇다면 지금 우려하고 있는 ‘9월 위기’ 즉 ‘아직 안 온 위기’ ‘절대 안 왔으면 하는 위기’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이것부터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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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이 많아서 파일을 등록합니다.

Posted by 행진

2008/09/09 21:12 2008/09/09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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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한국에서 '경제성장
 이데올기'의기원에 대해



2학기의 시작과 함께 ‘2008, 한국현대사를 만나다’의 연재가 다시 시작됩니다. 주로 다루게 될 부분은 1950년대에서 1970년대로, 발전주의 시대의 한국이 될 것입니다. 이때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반공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남한’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 세계체계 속에 한국이 강하게 포섭되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또한 요즘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더욱 극성을 부리며 출현하고 있는, ‘경제성장 이데올로기’가 출현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것은 각종 경제정책이 시작되고, 실제로 한국에서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던 물질적 조건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했던 국가장치들의 현대화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도입이라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무능했던 시절로 평가받는 1950년대에도 꾸준한 경제상승이 있었고, 그 이후 ‘한강의 기적’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부동의 대통령으로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물론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일국의 경제정책만으로는 불완전한 것이었고, 세계적 통치성의 개입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우리의 총론에 따라서 이후의 연재에서 꾸준히 살펴볼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경제성장 이데올로기’가 현재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신에게 내재적인 ‘부당한 대립물’을 토대로 계속 재생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 평가할 때 ‘경제는 잘 했지만, 정치는 잘 못했다.’라는 식의 평가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로, 이명박 정권은 경제에 봉사하는 정치를 만들겠다는 선언을 하기도 합니다. 국가와 시장, 성장과 분배, 민주주의와 독재 등은 한국에서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를 만드는데 있어서 ‘비적대적 모순’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들입니다. 이명박 정권은 수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와 그를 토대로 하는 정책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런 방법은 민중들에게 끊임없이 두 가지 대립물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하고, 그런 식으로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를 내재화합니다. 우리는 이와 맞서야 하고, 본질을 볼 수 있는 ‘역사과학’을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1. 국가와 시장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가장 고전적인 방법은, ‘국가와 시장’ 혹은 ‘정치와 경제’를 끊임없이 대립시키는 방법일 것입니다. 각 개인의 자율성을 바탕으로 하는 사적인 시민영역과, 거기서 생기는 각종 갈등과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공적 기구라는 국가영역이라는 도식은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체제의 기본적인 관계설정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순수한 도식은 역사적으로 나타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가능하지도 않았습니다. 국가를 ‘부르주아지의 공동업무를 처리하는 위원회’로 설정한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도, 이런 도식은 은연중에 재생산되었습니다. 그것은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를 건축학적으로 나누는 도식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서로 영향은 미치지만 두 개의 영역이 ‘순수하게’ 나눠 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론들은 역사를 평가할 때 마찬가지로 드러나게 됩니다.

한국의 경제성장과 IMF 구제금융 이후의 위기를 분석할 때, 가장 기본적인 틀은 ‘시장 중심론’과 ‘국가 중심론’의 대결입니다. 시장 중심론자들과 같은 경우 정경유착과 재벌에 대한 특혜적인 지원 등이 시장의 정상적인 기능을 저해하였고, 그것이 장기적으로 경제위기를 낳았다고 간주합니다. 국가 중심론자들은 정부를 매개로 한 강력한 경제정책이 한국에서 발전을 이끄는 원동력이었고, 세계화 이후 급격한 시장 개방과 그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 경제위기의 원인이 되었다고 간주합니다. 이런 틈을 비집고 국가와 시장의 보완이라는 절충론이 대두하고, ‘유교식 자본주의’와 같은 문화 중심론의 주장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런 주장들은 끊임없이 국가영역과 시장영역을 대립시키면서, 국가 혹은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정책들이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냅니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개인들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토대로 하는 시장영역이 먼저 만들어지고, 그것을 조정하기 위해 국가영역이 만들어졌다는 식의 선후관계로 구성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체계를 만들어냈던 ‘본원적 축적’은 항상 국가에 의한 억압과 강제; 도시로의 강제 이주, 식민지 건설, 규율체제의 확립, 강력한 폭력을 바탕으로 하는 이주자와 여성에 대한 배재 등을 동반했습니다. 세계적인 차원에서 자본의 축적체계를 만드는 과정은, 그를 뒷받침하는 헤게모니적 기획으로서 ‘국가간 체계’를 반드시 성립해야 했습니다. 그런 기획은 부에 대한 접근 정도를 기본을 하는 ‘세계체계’를 만들어냈고, 중심/반주변/주변에 대한 배제와 포섭이 나타납니다. 한국 자본주의에서 경제성장과 위기의 역사는, 이런 세계체계에서의 포섭과 배제의 메커니즘을 빼놓고는 절대 설명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시장중심론과 국가중심론을 끊임없이 대립시키는 것은, 일국의 경제정책에 따라 경제성장이 가능하다는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심어줍니다.


2. 성장과 분배

한국의 ‘성장과 분배’라는 쟁점은 토착적인 이데올로기 지형을 형성할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고정관념으로 남아 있습니다. 흔히 성장담론은 파이를 키워야 함께 나눠먹을 수 있다는 ‘선성장 후분배’를 이야기하고, 분배담론은 파이에 대한 분배가 경제성장을 자극할 수 있다는 ‘선분배 후성장’을 이야기합니다. 정확하게 대치되는 양자의 담론은 국가의 복지정책ㆍ경제정책 등과 결부되어 좌/우파를 나누는 기준, 한국에서 따라야 할 경제모델로 전용되기도 합니다. 신자유주의 시기에는 성장담론이 우세하게 됩니다. 경제위기의 원인을 너무 많은 분배정책으로 일할 동기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며,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성장 위주의 정책을 써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성장과 분배’라는 대립물은 부르주아 경제학의 관점에서도 엄밀하지 못한 개념에 불과합니다. 역사적 자본주의의 물질적 국면에서 정부지출을 늘리는 성장정책(케인즈주의), 금융적 확장 국면에서 금융자본의 안정적인 투기를 가능하게 하는 금리 인상과 같은 안정화정책(신자유주의)이 부르주아 경제학의 기본 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성정과 안정’ 담론이 제 3세계에서는 ‘성장과 분배’ 담론으로 나타나는 것은, 계급투쟁을 억압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담론일 뿐입니다. 경제학 비판에서 가정하듯이 전체 국민소득에 대한 이윤 몫(Π/Y)과 노동 몫(W/Y)은,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적 계급투쟁으로 인해서 거의 동일하게 유지가 됩니다. ‘성장과 분배’ 담론이 중심이 된다면 이윤 몫과 노동 몫을 중심으로 하는 계급투쟁이 주된 담론이 될 수 밖에 없고, 경제정책과는 별다른 관계가 없어집니다.

한편 ‘성장과 분배’ 담론은 가치체계의 부당한 대립을 상정하기도 합니다. ‘성장 = 자유중시’, ‘분배 = 평등중시’라는 식으로 자유와 평등이 서로를 억압할 수밖에 없다는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합니다. 게다가 시장과 경제는 자유를 담지하고, 국가와 정치는 평등을 담지한다는 관념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이것은 대중들의 봉기적 권리인 ‘인권의 정치’를 억압하는 효과를 만들어 냅니다. 사람들은 정치가 자유와 평등 각자가 서로 다른 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 즉 자유와 평등 중 하나에 대한 억압이나 제한이 다른 것의 그것을 불가피하게 초래한다는 점을 잊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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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독재와 민주주의

한국 현대사에서 경제성장에 대한 논의는,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정치체계의 문제와 곧장 연결되곤 합니다. 박정희 정권부터 전두환 정권에 이르는 시기와 동시에 일어났던 급격한 경제성장은, 군부독재체제가 가장 효율적인 정치체계라는 일반화로 이어집니다. 80년대의 가열찼던 민주화 투쟁은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비가역적으로 만들지만, 여전히 암묵적으로는 군부독재체제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기도 합니다. 이명박 정권 시기에 빈발하고 있는 공안정국의 조성과 ‘정치를 경제에 봉사하게 한다’라는 논의는, 이런 향수를 신자유주의적으로 변용한 인민주의적 행태이기도 합니다. 다른 한편 독재체계와 강력한 정권을 바탕으로 했던 경제성장이, 장기적으로 비효율을 낳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국사회가 민주주의 체계였다면 비록 성장은 조금 늦게 되었을지라도, 탄탄한 경제구조를 만들어서 IMF의 외환위기와 같은 것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은 IMF 이후에 재벌 투명성 제고와 전문 경영인 도입 등, 경제선진화 방향으로 귀결됩니다. 이런 주장은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을 돕는데 활용되고는 합니다.

독재와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는 ‘한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물음과도 연결되고는 합니다. 이에 대한 연원은 한국전쟁 전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북한과 휴전 중인 상황에서는 민주주의적 가치보다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하는 안보체계의 확립이 더욱 우선적인 과제라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경제성장을 통해, 체제경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났던 형태는 1971년부터 나타났던 유신체제일 것입니다. 유신체제 아래에서 한국식 민주주의는 정식화되어 각종 국가장치들을 통해서 재생산되었고, 여전히도 그런 영향은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ㆍ평등’과 같은 가치들보다는 안보가 여전히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으로, 진보세력과 보수세력의 쟁점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일반적인 경향인 궁핍화ㆍ과잉인구의 증가는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의문을 낳게 하고, 정치가적 인민주의자들의 등장은 정치에 대한 환멸자체를 낳게 합니다. 이처럼 ‘독재와 민주주의’라는 쟁점은 한국 현대사에서 복잡하게 얽혀있는 쟁점입니다.

하지만 통치스타일에서 나타나는 독재와 민주주의라는 쟁점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자본주의와 함께 나타나는 정치 체제는, 그것이 자본축적과 노동력의 재생산을 담당하는 부르주아 독재체제일 수 밖에 없습니다. 발전주의 시대 제 3세계에서는 국가를 매개로 하는 강력한 경제정책 및 공업화 전략(수입대체공업화 or 수출지향공업화)이 나타나고, 이를 위해서 군부독재체제가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제 3세계의 구조조정을 담은 매뉴얼로 ‘워싱턴 콘센서스’가 제시되고, 구조조정에 따른 민중들의 저항을 무마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진보’세력들에 의한 민주화가 추진됩니다. 이처럼 한국에 적합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쟁점을 놓고 나타나는, ‘독재와 민주주의’라는 쟁점은 ‘자본축적에 걸 맞는 통치성’을 우회하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에서 군부독재체계에 맞서, 거대한 민주화 투쟁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느냐는 쟁점이 등장합니다. 물론 이에 대해서 결과론적으로 민주화가 되었을 것이다거나,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만들었을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당한 평가가 아닙니다. 군부독재폐기라는 강령을 내걸고 싸운 투쟁에 대해서는, 몇 번이고 그 의미의 중요성을 평가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대중들의 이데올로기적 반역과 군부독재라는 정세가 만나 이루어진 계급투쟁이었고, 역사를 움직여나가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 후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된 역사에 대해서는, 연속적으로 일어난 지배계급들의 계급투쟁에 주목해야 합니다. 즉 1990년대 재민주화 전략과 세계화라는 새로운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의 도입, 그에 뒤이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라는 계급투쟁을 주목해야 합니다.


4.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의 기원

-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 -

위와 같은 대립물들은 발전주의 시대와 관통하는 1950 ~ 70년대를 거치면서 발전해왔고, 고유한 방식으로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했습니다. 각 시대를 특징짓는 기조와 경제정책들은 그런 대립물들을 물질화시켰고, 자본주의 세계체계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전략적 위치는 그것을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즉 한국현대사에서의 극단적인 반공 이데올로기는, 경제성장이라는 자신의 타자를 통해서만 공고하게 작동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경제와 정치에 대해서 이중의 잣대를 들이미는 일련의 평가들은, 원칙적으로 잘못된 역사 인식을 낳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선 정치에서의 민주화를 달성했으니, 이제는 경제에서의 민주화를 달성하자는 단계론적 진보사관 역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1950 ~ 70년대의 역사를 통해서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와 반공이데올로기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1950년대 삼백산업으로 대표되는 소비재 중심의 공업화, 1960년대 1-2차 경제개발계획과 경공업 중심의 공업화, 1970년대 3-4차 경제개발계획과 중공업 중심의 공업화. 발전주의 시대의 일련의 공업화 정책들은 일견 상관없어 보이는 반공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사람들의 무의식에 경제성장에 대한 가치를 주입시킬 수 있었습니다. 수출지향공업화,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다층적 하청체계로의 편입 등은 현실사회주의 국가에 맞서 자본주의 세계체계로 편입되어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데올로기들은 발전주의 시대에 폭발적인 계급투쟁이 전개되는 것을 막았고, 한국사회를 반동적으로 재편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의 ‘한국현대사를 만나다’ 기획연재에서, 그런 구체적인 계기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국현대사를 만나다’ 기획연재를 통해서 질문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관계가 확립된 사회에서는 경제성장이라는 것이 역사를 움직이고,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거의 유일한 동력처럼 간주됩니다. 즉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사회에 고유한 것이고, 한국에서는 발전주의와 신자유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위와 같은 대립물들을 기반으로 경제성장 이데올로기가 만연합니다. 또 다른 한축에 있던 반공이데올로기는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가지면서,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이는 흔히 경제주의로 빠졌던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도 나타났던 오류로, 생산력의 발전을 역사를 움직인 최초의 동역학으로 간주하는 경향입니다.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하며 자본주의로 수렴되는 과정에는,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라는 매개항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경제성장이 역사를 발전시키는 최초의 동력 및 결정점으로 파악하는 것은, 역사를 단선적으로 파악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를 정확히 전도시켜 정신적인 힘이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관념론에 불과합니다. 역사는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단선적인 모델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다양한 요소들이 개입하는 복잡한 비선형체계입니다. 물론 자본주의의 역사에서는 이윤율의 저하와, 궁핍화 및 과잉인구의 발생과 같은 장기적인 경향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요인들을 벗어버리고 투명하게 나타났던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일련의 정세 속에서 다양한 제 모순들이 결합하여, 역사를 이끌어가는 힘이 됩니다. 여기서 계급투쟁은 다양한 제 모순들을 결합시키는 매개고리가 되며, 따라서 역사를 움직여가는 힘은 계급투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식민지로부터의 해방 이후 강력했던 피지배계급들의 계급투쟁을, 다양한 기획을 통해 억압하며 지배계급들의 계급지배를 강화할 수 있었던 시기가 바로 발전주의 시대, 즉 1950 ~ 70년대입니다. 경제성장이데올로기와 그에 대한 타자로서 항상 전자를 뒷받침했던 반공이데올로기 역시, 이런 계급투쟁의 산물로서만 파악해야 좀 더 정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지나간 역사를 공부하면서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계급투쟁입니다. 이것을 통해서만 우리는 역사의 동학을 바르게 평가할 수 있고, 또 정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을 회복하는 것 많이, 현재 경제성장이데올로기를 매개로 계급지배를 실현하는 이명박 정권에 대해 저항하는 무기로서 역사를 자리잡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Posted by 행진

2008/09/09 21:08 2008/09/09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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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나가다 2008/09/28 07:35 # M/D Reply Permalink

    이제까지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
    이것을 어떻게 증명하시겠습니까?
    태클이 아니라, 역사의 동인이 무엇이었냐를 판단하는 건 역사에서 무엇을 볼것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