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선봉대에서도 ‘폭력투쟁’에 대한 논의가 잠깐 오고갔었는데, 앞으로 학생행진에서 이에 대한 토론을 많이 했으면 한다. 물론 우리의 곤란함이 몇 번의 토론을 통해 일순간에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 곤란함이 어디에서부터 오는지 함께 토론해보면서 그것을 ‘언어화’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각종 오해와 편견의 가능성을 최대한 줄이고, 생산적인 소통과 정치의 가능성을 최대한 높일 수 있다.
그리고 또 ‘폭력’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은, 9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서 얼마간 논의되었던 ‘미시권력’ 혹은 ‘미시파시즘’이라는 화두이다. 물론 캠퍼스 별로 차이가 좀 있다. 어떤 캠퍼스에서는 이 같은 논의가 기층에서 하루를 멀다하고 계속 이야기되어왔어며, 또 어떤 곳에서는 이것들이 별로 큰 관심을 얻지 못했다. 내가 활동해온 캠퍼스에서는 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던 편이다. 하지만 내가 볼 때 그 같은 논의가 그닥 생산적인 모습을 띤 것만은 아니었다. 어떤 때는 차라리 이 같은 것에 대한 관심을 뚝 끊고 그저 하루하루 묵묵하게 열심히 사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국가폭력’의 경우는 사실 너무나 뚜렷한 분노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당위적인 말 이외에는 할 말이 별로 없다.(물론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이에 반해 ‘미시권력’과 ‘미시파시즘’ 같은 주제에 대해서는 말이 좀 많아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것이 뭔지 잘 감이 안 잡히는 분들은, 당대비평의 『우리 안의 파시즘』과 같은 책들을 짬이 날 때 몇 장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당대비평은 1990년대 말, ‘우리 안의 파시즘’ 논의를 학계에 공개적으로 제안하였다. ‘우리 안의 파시즘’이라는 이름 자체가 보여주듯이, 이것의 관심사는 ‘우리의 의식 심층에 내면화된 일상적 파시즘의 위험성’이다. 이 일상적 파시즘의 위험성은 지금도 다양한 곳에서 드러나고 있다고 한다. 반공주의, 민족주의, 규율과 복종을 내면화시키는 학교교육, 가부장주의, 그리고 많은 구성원들이 일사분란하게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학생운동 문화까지… 이러한 주장을 하는 논자들은 이것들이 모두 과거 군사독재에 따른 긴 어둠의 터널에 대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처음 이런 주장을 접했을 때는 신선하고 괜찮은 담론이라는 생각도 좀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적’과 ‘아’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이 세상의 모든 모순들이 설명되지 않고, 세상을 바꾸는 것은 동시에 나 자신을 바꾸는 것이라는 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게 다가왔다. 그리고 실제로 활동을 해나가면서 이런 식의 긴장감도 어느 정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시권력에 대한 탐구는 ‘공동체를 바꾸기 위한 생산적인 정치’로 이어지는 대신, 공동체의 모든 것을 권력의 산물로 환원시키는 ‘환원론적 사고’로 종종 이어지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미시권력의 폭력성에 대해 논할 때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물론 이 세상에는 폭력적인 것이 많다. 국가권력의 폭력성은 말할 것도 없다. 노동자들은 폭력 속에서 죽어간다. 이 사회의 성적(性的) 권력은 성적 폭력을 낳는다. 또 ‘우리 안의 파시즘’ 논의에 착안해보면 이 외에도 여러 가지 폭력들이 있을 수 있겠다. 예를 들어 학번이 높은 선배와 함께 활동을 하면, 선배가 딱히 나한테 뭔가 쓴소리를 하거나 해를 가한 것도 아닌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학번권력’에 자신도 모르게 주눅이 들 때가 종종 있다. 이런 상황 또한 폭력적, 위계적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폭력적인 상황을 문제삼는다며 “폭력적”이라는 수사어를 가져다 붙일 때, 그 “폭력적”이라는 수사어로 인해 실제로 상황들이 놓인 구체적인 맥락과 정황이 삭제될 가능성 또한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구체적 맥락이 삭제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무리하게 일반화된다는 것을 뜻한다. 다양한 상황을 무리하게 ‘일원론적’으로 해석하고, 이 세상의 많은 것들이 한결같이 “폭력적”이라는 수사어로 설명될 수 있다고 여길 때, 이 세상은 너무나 단순해진다. 사회구조가 낳는 ‘권력’이 있고, 이에 따른 ‘폭력’이 있으며, 또 이에 따른 ‘희생자’인 우리들이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가 할 일은 명확하다. 그 권력을 생산하는 구조 자체를 거부하고 그것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많은 폭력들이 과연 이런 방식대로 해결될 수 있을까?
‘폭력’이라는 것에 민감해지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니다. 아니, 이 세상에는 자기가 저지르는 폭력들에 둔감한 사람들, 남한테 상처를 주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우리는 폭력에 대해 충분히 민감해져야 한다.
하지만 폭력에 대해 민감해진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 우리는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폭력에 대한 더듬이를 키우는 것은, 모든 크고 작은 상황에 똑같이 ‘폭력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 결코 아니다. 아니, ‘폭력적’이라는 수사어를 남발하는 것은 폭력에 대한 더듬이를 오히려 ‘둔하게’ 만드는 일이다. 이는 (위에서 검토한 것처럼) 폭력이 생산되는 맥락과 정황을 삭제하고 모든 상황들을 무리하게 획일화하는 방향으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결국 폭력에 대한 민감함을 키움에 있어 관건적인 것은, 각각의 구체적인 폭력‘들’이 생산되는 맥락과 메커니즘, 역사를 세밀하게 분석하고 그것들을 변화시키기 위한 ‘집단적인 정치의 기획’이다. ‘맥락적’, ‘역사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폭력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폭력에 대한 ‘획일적’, ‘초역사적’, ‘초맥락적’ 접근… 미시권력에 대한 관심이 빠질 수 있는 오류가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모든 것을 구조의 문제로 환원시키면서 주체들이 응당 수행해야 할 정치를 불가능하게 한다. 일상의 예를 하나 들어보면, 우리가 기층에서 공동체를 운영하다보면 갖가지 크고 작은 불편함을 종종 느낄 수 있다. 예컨대 후배인 입장에서 선배들과 함께 회의를 진행하다보면 (선배들이 험한 말을 하거나 기타 물리적인 ‘폭행’을 가하는 일이 없다 하더라도) 왠지 모르게 불편해지는 경우가 있다. 이유를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는데 뭔가 자기 목소리가 잘 반영이 안 되는 것 같고 자기가 충분히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회의 분위기가 폭력적이다.” 라거나 “운동 문화가 위계적이다.”라고만 말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말은 문제의 책임이 일정부분은 자기 자신에게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책임에 대해서는 정작 눈을 돌리면서 문제의 모든 원인을 모조리 외부로 환원하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그 불편함이 어디에서 오는지 그 원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그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구체적인 시도를 하지 않는다면 위와 같은 말은 ‘무기력한 불평·불만’에만 그칠 뿐이다. 이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정치를 더 이상 불가능하게 한다.
이전에 내가 과에서 새내기맞이 사업들을 준비할 때, “교양학교”라는 이름이 적절한지 토론이 오고갔던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극히 사소한 문제였는데, 사실 그 때는 이를 둘러싸고 얼마간 심각한 고민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교양”이나 “학교”라는 말은 누가 누구를 일방적으로 가르친다는 의미가 강하니, 이는 선후배간의 위계관계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 문제의 요지였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권력과 폭력에 대한 이러한 식의 논의들은 정작 문제의 핵심 - 지식과 경험의 차이에 기반한 선후배간 권력관계를 “어떻게” 민주화할 것인가 - 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구성원들간의 소모적인 말싸움에 그쳤던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렇다. 폭력과 권력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정작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내리지 않은 채 우리를 둘러싸는 모든 것들을 싸잡아서 의심하고, 그리하여 그것들을 싸잡아서 해체하는 방식으로 - 예컨대 후배한테 가르치는 것은 모두 계몽적인 것이니, 모두가 함께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만 골라서 이야기하자는 식으로 - 이어지기 쉽다.
정말로 선후배 사이의 지식과 경험차를 극복하고 싶으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공동체의 집단적 ‘역량’을 키우는 것이 급선무이다. 이를 위해서는 여러 가지 실천이 필요할 것이다. 예컨대 선배들은 자신들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담론들을 다시 한 번 ‘객관적인 위치’에서 되돌아봐야한다. 그래서, 행여나 자신들이 자신들의 논리적 비약과 실력없음을 ‘학번빨’로 메우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 진지하게 검토해봐야 한다. 그리고 (선후배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지식에 대한 권리를 누릴 수 있고, 누구든지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고 또 다른 이에게 우애롭게 질문할 수 있는 그런 구조를 만들기 위해 모두가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집단적인 학습과 토론이 가능하도록 여러 가지 학술 사업들도 벌이고, 또 상시적으로 그러한 커뮤티케이션이 우애롭게 이루어질 수 있는 공동체 분위기(정확히 말하면 공동체 이데올로기)를 형성해야 할 것이다. 이것들이야말로 진정으로 공동체를 민주화하는 시도들이 아닌가? 하지만 적어도 나의 경험에 비추어봤을 때, 앞에서 언급한 류의 불평·불만들은 이러한 수준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다시 한 번 강조하면, 나는 폭력에 대한 문제제기 그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문제제기의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폭력과 권력에 대한 초역사적·환원론적 인식은 몇 가지 편향으로 이어지는데, 첫 번째로 나타날 수 있는 편향은 바로 일체의 ‘회의주의’이다. 어차피 모든 구조는 폭력적이고 권력의 산물이니, 그 구조의 일원인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없다는 ‘무기력함’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서 이어질 수 있는 또 하나의 편향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모든 것에 대한 ‘거부’이자, ‘탈주’이다. 즉 교양학교는 선배가 후배를 가르치는 자리가 될 수 밖에 없으니 교양학교를 폐기하고 각자의 ‘선택’에 맡겨야 하며, 술자리 문화는 모두 다 폭력적이니 뒤풀이 자리는 아예 갖지 말아야 하며, 집회 문화는 폭력적이고 전체주의적이니 집회에 가지 말자는 이야기까지 나오게 된다. 이러한 편향들은 공동체에서의 모든 정치를 원천봉쇄한다.
위에서 든 사례들이 공동체에서의 소소한 일들이라면(하지만 생각보다 위와 같은 일들이 빈번히 일어나곤 한다.), 좀 더 스케일이 큰(?) 예로는 2003,4년 즈음에 일각에서 제기된 ‘학생회 해체론’을 들 수 있다. 일차적인 초점은 ‘학생회’라는 것에 맞추어졌지만, 이러한 흐름에는 궁극적으로 기존의 학생운동 문화와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거부가 담겨져 있다. 기존의 학생운동 또한 획일적/전체주의적이며, 상명하달식이며, 계몽적이니 이는 대중들의 자율적인 역량 실현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또 지금은 학생사회에서 공통의 합의를 도출하기 힘든 상황이니 학생회 또한 전체 학생들을 무리하게, 폭력적으로 대표하려고 하지 말고 해체해야 한다고 이들은 말한다. 비록 이 학생회 해체 실천은 전국적으로 따져봤을 때는 불과 몇몇 캠퍼스에서만 이루어졌지만, 우리는 이와 비슷한 정서가 생각보다 널리 퍼져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기존 질서에 대한 무한한 불신과 거부, 그리고 탈주… ‘미시권력’과 ‘미시적 폭력’에 대한 접근이 빠질 수 있는 가장 부정적인 결론이 바로 이것이다. 특히 90년대 들어 ‘포스트모더니즘’이라 흔히 부르는 담론들이 남한에 널리 퍼지면서, 이러한 정서를 더욱 널리 퍼뜨리는데 기여하였다. 나 역시도 이러한 담론에 푹 빠져 있는 주위 친구들에게, 어떻게 내 생각을 전할 수 있을지 고민이 든다. 이는 사실 한 개인의 성격 또는 라이프스타일과 깊게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토론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아무튼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간단하다. 흔히들 권력과 폭력을 생산한다며 일체의 질서와 권위를 거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쉽지만, 권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이 세상에 없다. 따라서 권위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해방적인 권위’를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의 공동체를 끊임없이 ‘민주화’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해방적인 권위’라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해보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와 공동체에 “새로운 보편적·해방적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권위로부터의 탈출’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여기서 또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탈출’을 이야기할 것이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객체화하며 따라서 개인을 소외시키고 자율성을 박탈한다고 이들은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또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이데올로기 없는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사는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어떤 이데올로기를 형성할 것인가’가 되어야 한다. 어떤 이데올로기를 만들까? 학생행진의 기치인 ‘평등-자유-연대’의 원리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해방적인 이데올로기를 형성한다는 것은 결코 몇몇 사람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며, ‘집단적인 정치’와 ‘공동체의 총체적인 전화’를 통해서만이 가능할 것이다.
‘권위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식의 마인드는 그것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도 문제이긴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러한 시도가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크게, 그리고 더욱 교묘하게 억압적인 상황을 만들어내기 쉽다는 그 아이러니에 있다. 나 같은 경우 캠에서 운동을 하면서 어떤 이웃 과의 활동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다. 그 과의 경우 ‘학생회장’이라는 직책 자체가 권위적이라는 이유로 학생회장을 세우지 않았다. 그 대신, 모두가 함께하는 집단적 지도체제(?)랄까 뭐 이런 식의 대안 체제를 세웠는데, 적어도 내가 볼 때 그 과는 학생회장이 있던 우리 과보다 훨씬 더 非민주적이고, 권위적이고, 폭력적이었다. 과운위를 주재할 사람이 없어 과 운영을 논의해야 할 공식 자리는 정기적으로 열리지 않았으며, 그 공백을 메운 것은 과에서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몇몇 사람들의 ‘말빨’과 ‘학번’이었다. 새내기맞이 사업이든, 농활 기획이든, 모든 사업들이 몇몇의 인자들에 의해 그 때 그 때 임기응변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들의 운영에 이견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으나, 과운위같은 자리들이 쉽게 열리지 않는 상황에서 이견을 가진 사람들은 사적인 자리 혹은 과 온라인 게시판을 통해 불만을 ‘토해내야’ 하는 부담을 짊어져야 했다. 그리고 실제로 대부분의 성원들은 그러한 부담을 지려고 하지 않았다. 즉 이견을 가진 사람들은 대개 ‘침묵’의 방식을 선택했다. 이 과의 경우 귄위로부터 탈출하고자 했으나, 더욱 교묘하고 비가시적인 방식으로 권위를 재생산한 꼴이 되고 말았다.
(이와 아주 딱 들어맞지는 않은데, 시간이 있으면 다들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영화, 『빌리지』를 한 번 보시길… 이 영화에서도 비슷한 교훈을 끌어낼 수 있다.)
미시권력과 미시적 폭력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그만큼 나 자신이 이에 대해 쌓인 것이 많았나보다. 아무튼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미시적 권력을 바꾸어내기 위한 시도 그 자체가 무조건 파괴적이라고 거칠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나는 폭력과 권력에 대한 관심이 (정치를 통해 구조를 바꾼다는)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채 오히려 정치를 불가능하게 하고, 공동체 구성원들을 ‘과소정치화’하는 방향으로 종종 이어져온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에서 이를 지적한 것 뿐이다. 결국 폭력 문제에 있어서 핵심은 폭력을 감축하기 위한 ‘정치’의 기획이 되어야 한다. 억압적인 권위에 맞서는 해방적인 권위의 기획, 혹은 해방적인 이데올로기의 구축, 이것들도 다 비슷한 맥락에서 말할 것이다.
3. 비폭력-대항폭력-반폭력
앞에서의 논의와 맞닿아있으면서도 또 맥락이 조금 다른 이야기, 하지만 ‘폭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화두를 이야기하겠다. 그것은 바로 ‘투쟁의 폭력성’ 문제이다. 이제까지 활동을 하면서 나는 종종 이런 말들을 접했다. “집회 문화도 또한 폭력적이지 않나요?” “평택에서 꼭 죽창을 들었어야 했나요?” “투쟁문화가 지나치게 과격하지 않나요?”
나는 일단 ‘비폭력주의자’는 아니다. 물론 투쟁을 전개하면서 때때로 ‘비폭력 평화투쟁’ 전술을 구사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노무현 정권이 우리가 하는 촛불시위 같은 것을 과연 ‘평화적’인 투쟁으로 봐줄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시기시기의 전술로 비폭력을 구사하는 수준을 넘어, ‘비폭력주의’를 전면에 내거는 것은 여러모로 부당한 점이 많다. 힘과 힘이 맞부딪히는 투쟁의 시공간에서, 또 기존의 사회 질서를 급진적으로 바꾸려는 운동에서, 완전한 無폭력이란 사실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와 같이 말한다. “국민들의 반발감을 사는 투쟁 말고 좀 평화롭게 투쟁을 해라. 그러면 호응도도 좀 더 높아지질 것 아닌가.” 이는 얼핏 들으면 운동의 발전을 바라는 격려처럼 들리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이는 현실을 완전히 무시하고 당사자들의 삶을 (마치 남 얘기 하듯) ‘타자적’ 시선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집회와 시위의 자유가 물리력으로 원천봉쇄되는 상황에서, 말로는 맨날 민주화를 외치지 실제로는 이전 군사독재정부보다도 더 신속하고 더 잔혹하게 민중들을 고립시키는 국가폭력의 상황에서, 비폭력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에 저항하지 말고 ‘무장해제’하라고 강변하는 것이다. 비폭력주의자들이 순진하게 말하는 것과 달리, 투쟁과 봉기의 현장에서 “대중운동을 완전하게 계획·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폭력/비폭력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당사자의 의도야 어찌되었든) 여러모로 좋지 않은 효과를 가져온다. 가장 단적인 예는, 투쟁방식이 ‘폭력적이냐/폭력적이지 않냐’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이 정작 그 폭력을 낳는 근본원인에 대한 문제제기는 어느새 슬며시 문제의 중심에서 비껴서게 된다는 사실이다. 비폭력주의자들은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폭력에 반대한다.”라고 말하지만, 이들의 이러한 주장은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정권의 합법적 폭력”에 대한 전면적인 문제제기를 방해하는 효과를 낳는다. 그리고 “투쟁현장에서 폭력에 대한 완벽한 통제와 조절”이라는 불가능한 것을 대중에게 강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정치에 대한 대중들의 권리를 침해한다. 흔히들 비폭력주의를 이야기하면서 간디를 언급한다. 하지만 “만일 간디의 권력에 바탕을 둔 성공적인 비폭력 저항 전략이 영국 대신에 히틀러의 독일, 2차 대전 이전의 일본과 같은 다른 적과 부딪혔다면, 그 결과는 자치 부여가 아니라 대학살과 굴복이었을 것이다.(한나 아렌트)”라는 말을 한 번 되새겨 보는 것을 어떨까? 또 “비폭력은 어떤 의미에서는 최악의 폭력이다.”라는 자크 데리다의 말은 또한 어떠한가?
비폭력주의에 대한 경계와 더불어 우리가 생각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는 바로 “대항폭력의 자기파괴적 효과”이다. 대항폭력(counter-violence)이란 “적들의 폭력에 맞서, 적들의 폭력을 제거하기 위한 민중들의 폭력”을 뜻한다. 민중들의 장구한 투쟁 속에서 역사가 진행되어왔다고 우리는 배웠다. 그리고 그 투쟁의 과정에서 적들에게 맞서기 위한 대항폭력의 조직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대항폭력을 동반하는 역사 속의 모든 혁명적 시도들은, ‘집단적 오류’의 위험을 항상 안고 있기도 하다. 특히 이 오류는 ‘집단적’ 오류이며, 그것이 가지는 위험성은 그 어떤 개인적 오류의 위험성보다도 크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적들의 폭력에 맞서는 동시에, 적들에 맞서는 민중들의 대항폭력이 민중들 자신에게 끼칠 수 있는 부정적 결과의 가능성을 함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요새는 대항폭력이든 뭐든 투쟁이 너무 없어서 문제인 때이다. ‘혁명’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지 머리 속에서도 잘 그려지지 않는 때인 만큼, ‘대항폭력의 자기파괴적 효과’라는 것이 그리 쉽게 와닿지는 않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반은 우스갯소리, 반은 푸념조로 “자기파괴적 효과 고민하기 이전에 그 대항폭력이라 불릴 만한 것들을 제발 좀 해봤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은 물론 전체 운동의 위기에 따른 결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항폭력의 위험’을 인지하는 것은 현재의 운동을 만들어감에 있어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꼭 ‘대항폭력’이라고 거창하게 이름붙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종종 스스로의 폭력성에 ‘취하는’ 투쟁주체들의 모습을 투쟁의 현장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적지 않은 이들은 “적은 惡이요, 나는 善이다.”라는 ‘정의로움의 자명성’에 빠져, 스스로가 행하는 폭력 그 자체에 도취하곤 한다. 하지만 “앞에 서 있는 적(에컨대 전경)은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없애야 하는 존재이고, 자신(예컨대 청년학생)은 곧 정의이다.”라는 식의 관념은 ‘맹목’으로 빠질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하다. 이는 명확한 전망과 전략·전술 속에서 폭력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폭력의 잔혹성에 그저 ‘도취’하는 것이다.
특히 지금과 같이 일상적인 정치 활동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일수록 폭력투쟁(폭투)이 ‘물신화’되기 쉽다. 즉 대중정치를 통해 자신의 운동을 증명받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자, 스스로의 선도성을 인정받는 것에 급급해 몰정세적으로 폭투에 집착하는 것이다. 하지만 폭력에 대한 이러한 물신화와 집착은, 폭력을 행사한 대중들이나 그 폭력을 지켜본 대중들을 모두 공포에 빠뜨리기 십상이다. 그리고 이는 대중들을 정치로부터 소외시킨다. 즉 정치가 불가능해지는 조건이 또 다시 형성되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투쟁을 해나감에 있어 (1)비폭력주의, 그리고 (2)대항폭력의 물신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극복해야 한다. 물론 이는 결코 만만하지 않다. 특히 ‘대항폭력의 물신화’를 극복한다는 것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 우리는 사려 깊게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폭력주의를 공공연하게 선언하는 것 못지않게, 대항폭력의 물신화를 비판하는 것 역시 잘못하다가는 ‘비폭력주의’와 공명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비폭력’과 ‘대항폭력’ 사이에서의 끊임없는 동요 상황을 지양하고 ‘反폭력’을 실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런데 이 ‘반폭력’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저마다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대단히 논쟁적인 부분인데, 일단 아래 적은 것은 이 글을 쓴 사람의 개인적인 의견이라는 것을 특히 헤아려주셨으면 한다. 그만큼 이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 반폭력이라는 것을 비폭력과 대항폭력과는 다른 또 다른 투쟁 ‘방식’ 또는 투쟁 ‘프로그램’으로 여기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의 이해는 실천적으로 문제가 좀 있지 않나 생각되는데, 이러한 관념은 기존의 투쟁 방식 자체가 어쨌든 문제라는 생각을 그 배후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태도는 ‘비폭력주의’로 경도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즉 투쟁 방식이 결국 문제이니 바뀌어야 한다는 식으로…) 그래서 나는 위와는 다른 방식으로 반폭력에 접근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즉 반폭력이라는 것을 비폭력/대항폭력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제3의 투쟁 형식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비폭력과 대항폭력 사이에서의 동요로 인해 정치가 한없이 불가능해지는 상황 속에서, 다시금 우리의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모든 실천”으로 일반화하여 이해하자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즉 반폭력이란 정치가 불가능한 시대에, 정치를 다시금 작동시키는 일체의 이론과 실천, 이념과 운동을 가리킨다는 것이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입장인 것이다.
흔히들 ‘폭력’이라고 하면 폭력의 ‘정도’를 나타내는 잔혹성에 주목한다. 예컨대 어느 집회에서 노동자가 경찰폭력에 얼마만큼 상처를 입었다든지, 혹은 반대로 경찰이 노동자의 죽봉에 큰 상처를 입었다든지…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는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일 수 있다. 폭력이 때때로 잔혹하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힌다는 것은 사실 ‘상식’이기 때문에,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왜 다시 이 폭력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폭력은 종종 정치를 더 이상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폭력이 낳는 공포의 효과이든, 비폭력주의이든, 아니면 대항폭력의 자기파괴적 효과이든, 이러한 것들은 정치를 stop시킨다. 이는 절망스러운 상황인데, 사실 ‘정치에 대한 권리’는 인간의 모든 권리 중 가장 핵심적인 권리이기 때문이다. 정치에 대한 권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싸울 수 있고, 목소리를 외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제 정치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할 일은 명확하다. 어떻게든 정치를 다시 작동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당연한 사실이 바로 ‘반폭력’의 핵심이 아닐까, 이렇게 나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폭력에 반대한다는 것, 그것은 결국 ‘정치’를 통해 폭력의 가능성을 감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정세적인 반폭력의 시도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어떤 집단이 명확한 전략·전술도 없이 무모한 ‘때려박고보기식’ 폭력전술로 대중들로부터 욕을 얻어먹고 있는 상황이라고 가정하자. 이럴 때 다수 대중들의 편에 서서 이 집단의 폭력성을 같이 매도하는 것은 문제의 해결이 도움이 안 될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그 집단이 그러한 폭력전술을 사용한 ‘이유’가 있을 것인데, 그 집단의 폭력성/비폭력성이 쟁점이 되면 그 ‘이유’는 어느새 관심사에서 더욱 멀어지게 되고 이는 정치가 소멸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특히 ‘대항폭력의 자기파괴적 효과’를 극복하겠다는 사람들이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이 이것이다. 대책없는 대항폭력으로 대중적 쟁점이 완전 와해된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떻게든 그 쟁점의 의미를 다시 되살리는 일이다. 폭력/비폭력의 논쟁이 첨예하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쟁점을 전환한다든지 등의 실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시도가 기존의 대항폭력에 대한 ‘반정립’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이러한 행동은, 자기 자신을 현재의 사태와는 상관없는 제3자로 자리매김하는 일종의 ‘알리바이’ 형성이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또 다른 예로, 어떤 노동자들의 사업장 점거 투쟁이 “일부 폭력배들의 이기주의적 태도”라는 식으로 언론에 의해 매도당하고 있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답은 명확하다. 그 노동자들의 투쟁이 정당하다고 선전선동 열심히 하고, 또 우리의 몸을 이끌고 직접 그 현장으로 가는 것이다. 그리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역사를 돌이켜봤을 때, 우리는 그간 수많은 국가와 자본의 폭력들을 마주하였다. 그 속에서 많은 이들이 심지어는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이에 맞서는 대항폭력을 벌이는 과정에서도 종종 무서운 상황들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희망적이게도, 그 모든 경험들이 ‘정치의 중단’으로 이어졌던 것은 아니다. 80년 광주에서 윤상원 열사는 광주를 지키기 위해 기어이 총을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눈앞의 적을 쏴죽이기 위한 잔혹의 도구는 아니었다. 1주일만 버티면 광주를 지킬 수 있고, 광주를 ‘전국화’할 수 있다는 그 확고한 믿음 속에서 윤상원 열사는 총을 들었다. 물론 80년 광주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또 다시 한 판 싸움이 벌어졌다. 저들은 “일부 북괴들의 국가전복 시도”로 광주의 의미를 깎아내리기에 급급했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광주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광주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한 80년대의 싸움이야말로 적들의 폭력에 맞섰던 진정한 의미에서의 반폭력이었던 것이다. (어떤 책을 읽다가, “광주항쟁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비폭력 저항정신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라는 김대중의 언급을 접한 적이 있다. 어이가 없었다. 김대중, 당신은 과연 광주 근처에라도 가본 것인가?)
사파티스타가 무장단체라고 해서 사파티스타를 폭력단체라고 말할 수 없음은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다 공감할 것이다. 더 이상의 예를 들지 않아도 나의 생각이 전달되었으리라 믿는다. 아무튼 함께 많은 고민을 했으면 좋겠다. 나 역시도 낼 아침에 자고 일어났을 때, 또 다시 생각이 조금 바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어려운 주제인데, 함께 머리를 맞대고 ‘폭력’을 정치의 장에 올려놓자.
(비폭력, 대항폭력, 반폭력 하니까 얼마 전에 봤던 영화 하나가 생각이 난다. 바로 『엑스맨3』이다. 다들 시간날 때 비디오를 빌려서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영화 안 본 사람들이 많으니 내용을 말할 수는 없겠고…^^ 아무튼 나는 엑스맨 군단의 ‘천인공노’할 만행에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내가 봤을 때 돌연변이와 非돌연변이 사이의 모순과 갈등은 노동과 자본 사이의 갈등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그 모순을 없애기 위해서 非돌연변이를 없앨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당부분 ‘돌연변이로서의 동일성/非돌연변이에 대한 적개심’으로 정체성을 형성하는 마그네토 쪽의 정치학에도 문제가 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마그네토 쪽의 입장 또한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일이다. 마그네토 그 자신도 어린 시절 아우슈비츠와 인종절멸(genocide)라는 끔찍한 폭력을 경험하지 않았는가? 非돌연변이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불신은 여기에 연유한다. 그리고 영화를 봐도 엑스맨 쪽보다 마그네토 쪽에 동조하는 사람수가 훨씬 더 많지 않은가? 마그네토 쪽의 투쟁적인 노선에는 엄연히 그 ‘역사’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엑스맨 군단은 감히 ‘선한 얼굴’을 하면서 그러한 역사를 깡그리 무시하였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엑스맨 군단에게는 올바른 ‘국가관’도 없는 것 같다. 인자를 국가장치에 파견해서 스스로를 NGO化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저들은 영화 말미에 가서는 감히(!) 국가폭력 ‘동맹’을 맺어 돌연변이들을 ‘절멸’시키는 기획에 동참한다. 그러면서도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저들은 마그네토 쪽의 과격성과 폭력성을 운운하지만, “비폭력은 어떤 의미에서 최악의 폭력이다.”라는 말을 몸소 실천하고 말았다. 나는 착한 얼굴을 가장하면서 나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그런 사람들을 제일 싫어한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역사의 시계방향을 거꾸로 돌려놓는 사람들이다.)
4. 가장 어려운 점 : 폭력과 페미니즘
나는 어떠한 집회가 “폭력적”이었으며 따라서 “반여성적”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갑갑해진다. 그리고 머리 속이 복잡해진다. 현재의 투쟁 문화나 사수대 문화 등이 남성과 여성에게 동일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더욱이 남성인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여성들의 경험을 나의 언어로 재단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동시에 가만히 입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다. 내가 볼 때 “폭력적=반여성적”이라는 도식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성들의 투쟁을 소외시키는 효과를 낳는 동시에, 여성들을 수동적이고 무력한 주체로 재생산하는 효과를 또한 낳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위와 같은 말을 하는 여성 동지에게 “몰정세적”이라는 식으로 일방적으로 비난하거나, 혹은 현실에서 국가폭력에 맞서 대항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여성들의 예를 들면서 너의 말은 ‘현실에서의 여성들의 삶’과 맞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후자의 방식은 정말 좋지 않은 방식이라고 생각되는데, 여성들이 여성들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여성들 내부에서의 차이와 갈등을 온전히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그것을 그 자체로 자신의 논쟁에 이용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사실 남자들의 경우 남자이기 때문에, 이런 고민에서는 자유로운 것이 사실이다.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집회에서의 반여성적 상황이라고 해도 하나로 일반화하여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컨대 발언이나 노래 도중에 나오는 반여성적 언어들의 경우 비교적 문제가 명확한 편이며, 그것은 분명 문제제기를 강력하게 해야 하는 문제이다. 이에 반해 투쟁을 함에 있어서 불가피하게 나오는 상황들, 그리고 적지 않은 여성들이 이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들은 이보다 좀 더 어렵다. 길을 열기 위해 사수대를 동원한다든지, 무기를 이용해서 적들과 투쟁한다든지의 상황이 그러하다. 이런 상황들도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저마다의 맥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또 무리하게 일반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세세한 부분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개입할 것인지, 적지 않은 고민이 든다. 실제로 이에 대한 판단과 감정은 여성들 사이에서도 저마다 상이할 것이다.
결국은 투쟁의 현장에서 남성들이 ‘보편’으로 떡하니 가운데 자리잡고 그 보편의 주변에 수많은 여성들이 ‘특수’로 자리잡을 수밖에 없는 그 구도를 근본적으로 무너뜨리는 것이 관건적이다. 그리고 “폭력 집회=반여성적”이라는 규정은 주체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러한 도식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다시금 곤란한 지점이 생기는 것 같다. 지금의 투쟁 문화는 남성들의 경험이 강하게 ‘보편성’을 형성하고, ‘이 보편성에 적응할 수 있는 여성들/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여성들이 분열하고 갈등을 겪는 형국이다. 그리고 투쟁 문화 전반을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반여성적으로 규정하거나, 아니면 투쟁 문화에 대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현실과 적합하지 않은 것이라며 깡그리 무시하는 것 모두 ‘위의 구도’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핵심은 ‘특수’로 치부되고 있는 여성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살리고, 또 이 목소리들 사이의 차이에 주목하면서, 이 차이 속에서 ‘연대(!)’를 만듬으로써 ‘새로운 보편성’을 위한 조건을 마련하는 일이다. 물론 이것이 여성들만의 임무는 결코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최종적으로 목표하는 바는 바로 여성을 ‘온전한 투쟁과 정치의 주체’로 세워내는 것이다.
정말 어렵다… 이러한 작업은 어떻게 보면 ‘포스트모던’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사회 구조와 일상의 공간 전반을 깡그리 다 바꿔야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막막하기도 하다.
어쨌든, 이 땅의 모든 여성들이 당당하게 투쟁할 수 있고, 당당히 적들에 맞서 싸우면서 스스로의 존엄성을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사회구조의 형성은 결코 미래로 유예할 수 없는 현재의 우리 운동의 시급한 과제이다. 물론 기존의 투쟁 문화 또한 바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아무쪼록 ‘비타협성’과 ‘급진성’이라는 투쟁의 정수를 기각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이들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고 자신의 분노감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도록 ‘보편적인 투쟁의 형상을 일정부분 변화시키는 작업’ 또한 요구된다.
글을 쓰면서 제일 어려운 부분이었다. 비록 글을 쓰고 있지만, 나 역시도 수많은 여성들이 투쟁의 현장과 일상에서 느끼는 ‘고통스런 불확실성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나누고 있는지, 최소한 그것을 함께 느끼려고 노력을 했는지, 다시 한 번 반성해봐야겠다. 함께 고민하고, 함께 곤란한 지점들을 언어화하고, 서로의 경험을 존중하면서 새로운 연대와 운동의 가능성을 모색해보자고, 사실 너무나 당연한 말을 덧붙이면서 이만 글을 줄일까 한다. 아…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폭력은 너무나 어려운 주제이다. 행진 동지들과 함께 이 난관을 해결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