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호] 학급총량제, 무엇이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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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3일, 1차 예비교사 총궐기가 열렸다. 현재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 하에서 교육부문 역시 많은 문제점들이 드러나고 있고, 그것을 발언하는 자리가 바로 예비교사 총궐기였다. 그 중에서도 학급총량제는 단연 최고의 화두였다. 내년 시행될 예정인 학급총량제. 과연 학급총량제는 무엇이며, 무엇이 문제인가?

학급총량제란 교육인적자원부(이하 교육부)에서 새로 도입하는 제도로, ‘시-도 단위 학급당 학생수’를 기준 연도별 학생수에 따라 학급수를 할당하고 교육감은 그 범위 내에서 ‘학교단위 학급수’를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방식이다. 교육부에서는 학급총량제 실시 취지를 「△시-도간 기본교육여건 편차 완화 △국가가 지원하는 의무교육의 균형성 확보차원에서 점진적으로 학급당 학생 수의 편차를 줄여나가는 방향으로의 재정지원 실시」로 밝히고 있다. 그리고 좀더 현실적인 이유로 저출산 고령화에 의해 학령인구가 감소함에 따라 학급수를 조절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학급총량제가 도입되면, 어떠한 문제가 생기게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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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학급총량제가 시행되면 일부 시-도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시-도에서 학급수가 감소하게 된다. 교육부에서는 학급총량제 실시기한을 ‘일단’ 2012년까지로 잡고 있는데, 2012년까지 서울에서는 2,500여 학급, 부산에서는 무려 3,200여 학급이 사라지게 된다. 이를 연간으로 계산해보면 서울은 연간 426학급, 부산은 연간 546학급이 줄어드는 셈이다. 예정대로 된다면 예비교사들의 교직진출에 있어서 큰 타격이 될 것이 틀림없는데, 이는 교원양성임용의 근간을 흔들게 되는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의 교육 현실은 열악하기 그지없다. 2005년을 기준으로 OECD국가들의 평균 학급당 학생수는 23.9명인데 반해(스위스는 18.7명), 한국의 학급당 학생수는 35.2명이다. 또한 초등기관 교원 1인당 학생수도 OECD평균 16.5명임에 반해, 한국은 30.2명에 달한다. 중요한 점은 학급총량제의 시행 이후에도 학급당 학생수는 30명 이하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인데, 이에 대해 “현행 학급수를 유지하여 학급당 학생수를 떨어뜨리는 것이 올바른 정책적 방향이 아니냐”라고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학령인구의 감소’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가지고 교원구조조정을 진행하겠다는 것이 학급총량제의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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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급총량제를 비판하는 예비교사들의 투쟁은 단순히 TO를 더 획득하는 수준의 투쟁을 넘어선다. 명확히도 학급총량제는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교육부문에 있어 적용된 것이고, 이를 비판하는 투쟁은 바로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이기 때문이다. 학급총량제를 타격하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를 타격하는 것이고, 신자유주의를 철폐시키지 않는 한 학급총량제(와 같은 정책) 역시 철폐시킬 수 없다. 따라서 예비교사들의 투쟁은 분명 반신자유주의 투쟁과 연대의 접합점을 찾게 될 것이다. 물론 학급총량제를 반대하는 투쟁이 곧바로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으로까지 상승하기는 힘들 것이다. 예비교사 진영내에서는 아직까지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측면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예비교사 운동주체들의 노력과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많은 동지들의 연대가 필요하다.

예비교사 운동 진영에서는 오는 10월 13일 2차 예비교사 총궐기를 앞두고 있다. 1차 총궐기와 마찬가지로 ‘학급총량제’를 철폐시키기 위해서(단순히 학급총량제 폐지가 투쟁의 모든 목표는 아님을 다시 한 번 강조해 둔다.) 전국의 많은 예비교사들이 상경을 할 것이다. 이 투쟁을 단지 예비교사들만의 투쟁으로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이들의 투쟁으로 만들어 나가자. 그럴 때만이 예비교사들의 투쟁과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접합점은 더욱 빠르게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학급총량제 폐지!!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

Posted by 행진

2006/10/13 15:30 2006/10/13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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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문화예술운동에 대하여

대학문화예술운동에 대한 짧은 소고와, 전체운동과 부문영역운동과의 관계에 대한 자료 글 두개를 첨부합니다. 각각이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만큼, 꼭 다운로드해서 틈틈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 대학문화예술운동에 대한 단상

■ 문예패 상황에 대한 이야기
■ 대학문화예술운동 어떻게 할까?
■ 문화“예술”운동에서 “문화”예술운동으로의 전화

2. 전체운동과 부문영역 운동의 관계

■ 제기배경
■ 부문운동의 발자취
■ 전체운동이라는 관념상의 굴레
■ 각 부문운동들간의 연대
■ 현시기에 부문운동을 논의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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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13 14:34 2006/10/13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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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재생산의 위기, 그리고 여성의 삶

우리는 자본주의가 야기하는 모순에 주목한다. 신자유주의를 반대하고, 한미FTA를 비판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체제에 비판적이라는 소위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조차 종종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생산양식의 배후에 있는 ‘사회적 노동력의 재생산영역’이다.

자본주의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노동력’이라는 특수한 상품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면서, 많은 사회구성원들은 노예/농노제의 ‘인격적 예속’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여기서 ‘자유롭다’는 것은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즉 ‘법적’으로 자유로운 동시에 ‘생산수단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것이다.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들(즉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 상품을 판매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만이 비로소 노동을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 노동에 대한 대가(즉 임금)을 받는다. 그리고 그 돈으로 의식주와 관계된 상품들을 구입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여기서 노동자들이 노동을 하면서 생산한 가치와, 자신의 노동력 상품을 판매함으로써 받은 대가 사이에는 ‘근원적인 격차’가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적 착취의 원천인 ‘잉여가치’이다. 여기까지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고전적인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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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착취의 장소가 있다. 그것이 바로 종종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치부되는 ‘자본주의적 재생산양식’ 영역이다. 노동력 상품은 한 번 쓰고 버리는 소모품이 아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재생산’되어야 한다. 즉 음식물을 충분히 섭취하고 잠을 충분히 자야 한다. 또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양육되어야 하며, 교육받아야 하며,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아프면 병간호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참혹한 노동현장에서 받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바로 이러한 재생산 과정이 이루어지는 곳이 ‘자본주의적 재생산영역’이며, 그것을 전담하는 사람들이 바로 가정주부들, 즉 여성들인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여성들의 이러한 재생산노동은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도 못했을 뿐더러 충분한 대가를 받지도 못해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착취의 메커니즘이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위와 같이 ‘상품의 생산과정’‘노동인구의 사회적 재생산 과정’ 사이의 ‘분리’를 전제로 한다. 전자의 장소가 공장/사업장이라면, 후자의 장소가 바로 가정인 것이다. 이러한 분리는 여성들만이 가지는 고유한 생계적 불안정성, 경제적 종속, 성별 분업을 야기한다.

사실 과거 농업사회는 이와는 다른 모습을 띠었다. 즉, 생산과 재생산이 거의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물론 이 때도 성별 분업과 관련된 갈등이 존재하였지만, 가정과 작업장 사이에서 지금과 같은 뚜렷한 구별은 없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 들어와, 생산과 재생산은 별개의 영역으로 분할된다. 그리고 이에 따라 “임금노동”과 “무임금 가사노동”으로 노동 또한 이분화된다.

이러한 재생산노동, 즉 무임금 가사노동은 자본축적에서 막대한 영역을 차지한다. 예를 들면, UNDP의 1995년 인간개발보고서를 보면 1993년 세계경제에서 여성들의 가구노동의 가치는 11조 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물론 이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은 적은 없다.) 따라서 여성들의 재생산노동을 ‘통제’하는 것은 자본과 국가에게 사활적인 일이 된다. 특히 ‘출산’이나 ‘정서적인 보살핌(care)'은 노동의 재생산과정에서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여성의 육체와 감정은 특히 강력하고 특수한 사회적 억압에 의해 통제되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역사적으로 엄청난 이데올로기적/물리적 폭력이 가해졌다.

다들 ‘인클로저 운동’이라는 것에 대해서 들어봤을 것이다. 큰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양모의 생산을 늘리고자, 많은 귀족과 지주들은 소작인들을 모두 쫓아내고 농토를 목축지로 바꾸었다. 인클로저 정책으로 인해 많은 농부들이 선대부터 살던 고향을 떠나 객지로 떠돌게 되었고,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이것은 프롤레타리아가 태동한 역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렇듯 ‘노동력 상품’이라는 존재는 아주 폭력적인 방식을 통해 형성되었다. 그렇다면, ‘무임금 재생산노동자’는 어떠한 역사 속에서 형성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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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보면, 국가는 이미 15,16세기부터 인구,육체,섹슈얼리티,결혼,가족 등에 주목하고 그것들을 통제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한 통제 과정의 폭력성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과거 유럽 전역의 ‘마녀사냥’이다. 출산/낙태/피임에 관한 지식에 관심을 기울인 여성들, 남편에게 반역한 여성들, 결혼을 거부하고 혼외정사를 한 여성들은 모두 마녀로 낙인찍히고 종교재판을 통해 고문, 처형당했다.

이러한 통제가 이루어진 주요 장소는 역시 ‘가족’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가족을 비판할 수 있다. 가족은 전 민중의 ‘사회적 연대’를 ‘사적 유대’로 대체하고 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를 구성원들에게 교육시키는 장소이다. 동시에 여성들의 성별 분업, 그리고 성차별적 이데올로기의 생산이 근원적으로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를 변혁하기 위해서는 가족을 변혁해야 한다. 반면 지배계급으로서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국가장치를 지키는 것이 관건적인 일이다. 단적인 예로, 20세기 복지국가는 가족의 역할을 강화하려는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진행하였다. 이러한 캠페인은 가사노동을 가족과 민족을 위한 사랑의 노동으로 상징시켜냈다. 국가는 사회 서비스를 통해 가내 서비스를 위한 표준을 설정하고자 하였고, 가정에 들어가 주부의 가사노동을 직접 훈련시키고 통제할 목적으로 사회사업가의 네트워크를 창설하였다. 이 시기에 들어 가계를 위한 건강 소책자들이 널리 유통되었고, 보건 관료들은 가사노동의 질을 체크하도록 요구받았다.

기계화/도시화가 가속화되면서, 생산과 재생산은 이제 완전히 별개의 영역으로 확립된다. (‘공장’과 ‘가정’이라는 형태로…) 그리하여 여성들 입장에서는 ‘임금노동’과 ‘재생산노동’을 조화시키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다. 여성들은 점차 노동시장에서 퇴출되어 육아와 가사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생계를 위해 남성 가계부양자에게 경제적으로 더욱 종속되었다. 막대한 양의 가사노동과 자발적인 사랑의 노동이 여성에게 요구되었다. 그리고 가정 내의 종속적 관계로 인해 종종 발생하는 가정폭력은 ‘가족의 프라이버시’라는 베일 속에서 개인적 문제로 간주되었다.

●    ●    ●

앞에서 재생산영역의 메커니즘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제 자본의 위기 속에서 재생산이 어떻게 위기에 처하게 되는지, 그리고 그것은 여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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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가 ‘재생산의 위기’라 부르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핵가족의 위기’이다. 20세기 미국 헤게모니 아래에서 노동자계급에까지 보편화되었던 ‘아메리카적 핵가족’이,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 속에서 덩달아 위기에 처한 것이다.

20세기의 지배적인 가족 형태인 ‘아메리카적 핵가족’ 형태는 과거의 ‘영국적 빅토리아 가족’을 대체하면서 태동하였다. 아메리카적 핵가족을 지탱하는 주요 요소로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 번째는 바로 ‘가족임금(family wage)’이다.(핵가족의 물질적 토대) 남성 가계부양자가 가족 구성원들 전체를 먹여살릴 수 있는 임금분(즉 가족임금)을 받는 대신 여성은 가사일과 소비에만 전념하는 것이 바로 ‘가족임금’으로 유지되는 핵가족의 형태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크게 떠올라 수십 년 동안 잠깐 황금기를 누린) 미국 자본주의 체제는, ‘넉넉하지는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은’ 가족임금 협약을 노동자계급에까지 대대적으로 제안하였다. 그리고 대다수의 노동자들도 이를 적극 받아들였다. “여성들이 노동시장에서 철수하면 노동 공급이 감소할 것이다. 그리하여 가장들의 임금이 인상될 것이다. 이는 여성들을 참혹한 노동현장으로부터 ‘보호’할 수도 있을 것이다.”라는 식의 논리 때문이었다. 가족임금은 현장에서 싸워온 여성노동자들을 가정주부로 전화시켰다. 가족임금은 노동자운동의 전반적인 쇠퇴와 개량화를 이야기함에 있어서도 빼놓을 수 없는 화두이다.

두 번째 주요요소는 ‘동반자적 결혼(companionate marriage)’이라는 개념이다.(핵가족의 이데올로기적 토대) 쉽게 말해, 빅토리아 가족에서 일반적이었던 『오만과 편견』 식의 ‘성장소설 연애결혼’에서 헐리우드 영화 식의 ‘데이트 결혼’으로 사랑과 결혼의 형태가 변화한 것이다. 이는 ‘1차 性혁명’에 따른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性이 뭔가 엄숙하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존재였던 것에 반해, 새로운 性혁명은 구애 행위(‘자동차데이트’를 한 번 떠올려보길)와 성적 친밀성을 새롭게 정의하였다. 물론 이는 성을 일부일처식 결혼제도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킨 것은 아니었다. 1차 성혁명은 가부작정 권력의 중심축을 아버지로부터 남자친구·남편으로 이동시켰다.

아메리카 핵가족은 2차 대전 이후 자본주의의 황금기 속에서 전성기를 맞이한다. ‘마이 홈’, ‘마이 카’로 상징되는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이 만인의 꿈으로 자리잡게 된다. 하지만 황금기가 끝난 후, 70년대부터 미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와 이윤율의 저하가 다시 시작하면서 앞에서 서술한 두 가지 주요요소들이 모두 위기를 맞게 된다. 그리하여 ‘재생산의 위기’, ‘핵가족의 위기’가 시작된다.

그 위기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일단 첫 번째 요소인 ‘가족임금’이 해체된다. 자본축적의 위기 속에서 남성 1인이 가족구성원 모두를 위한 생활임금을 획득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해진다. 신자유주의가 야기하는 ‘고용 없는 성장’과 ‘노동의 불안정화’, ‘빈곤의 극심화’ 속에서 이제 대다수 여성들이 노동시장에서 일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게 되었다.

‘2차 성혁명’의 개시로 두 번째 요소인 ‘1차 성혁명’이 해체된다. 1차 성혁명이 결혼/출산/육아의 의미를 ‘낭만적 사랑’으로 재구성한데 비해, 2차 성혁명은 아예 결혼·출산과 性을 완전히 분리시킨다. 피임 기술의 발달로 인해 “성교 = 출산”이라는 등식이 깨졌고, 여러 가지 사회적·문화적 변화 속에서 섹슈얼리티(sexuality)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바야흐로 ‘성해방’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1990년대 이후의 남한의 모습이 이 시기 미국의 모습과 흡사하다.) 하지만 2차 성혁명이 야기한 ‘성해방’은 여성에게 진정으로 해방적인 측면으로만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성해방’을 빌미로 해서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는 흐름이 소비문화의 붐을 타고 범람했으며, 성적 자유주의(Free Sexism)에 따른 남성들의 교묘한 성적 착취 또한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성해방은 여성에게 해방적인가 억압적인가”가 이 시기 페미니즘의 중심적인 이슈였다.

이상이 ‘핵가족의 위기’ 현상이 나타난 배경이다. 물론 재생산의 장소인 가족이 흔들리는 것을 지배계급이 가만히 두고 볼리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신자유주의가 만개한 이후, 가족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가족의 재발견’ 식의 수사들이 난무하게 된다. 현재 한국에서도 정부는 틈만 나면 ‘저출산’을 언급하면서 가족을 지키자고, 사회를 위해 애를 낳자고 호소하고 있지 않는가? 신자유주의로 인한 빈곤의 극심화 속에서, 쇠퇴하는 사회적 유대를 ‘사생활’과 ‘사적 유대’로 보충하고, 또 재생산과정을 다시금 통제하는 데에는, 역시 ‘가족을 강화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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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지배계급의 전략 속에서 고통받는 것은 역시 여성들이다. 현재 ‘핵가족의 위기’ 속에서 여성들은 딜레마에 직면해있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가족임금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여성들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임금노동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가족임금의 보장 여부와 상관없이) 여전히 뿌리깊은 가족임금 ‘이데올로기’로 인해 여성의 노동은 항상 ‘부수적’인 것, 즉 남성생계부양자의 노동에 대한 ‘보충물’로 간주된다. 이는 여성들을 저임금·장시간노동의 늪에 빠뜨린다. 이렇게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출은 여차해서 늘어나지만, 육아와 가사부담이 여성의 책임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또 크게 변화하지 않는다! (이것이 가장 큰 딜레마이다.)

‘가족의 위기’라고 해서 또 다시 과거의 가족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당연히 아닐 것이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재생산양식 모두에서 차별받고 착취받는 여성들의 삶이라고 했을 때, 이 양자의 관계를 재구조화하면서 여성의 삶 전반을 보다 해방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체제는 여성들을 ‘최후의 복지 제공자(last welfare-provider)’로 여기면서, 무임금 재생산 노동자인 여성들의 착취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실제로 여성들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따르는 부담을 전가받는 ‘충격 흡수자(shock absorber)’의 위치에 처해 있다. 구조조정으로 인해 감소한 가계 소득을 보충하기 위해 여성들은 자신의 소비를 줄이고 노동을 더 많이 해야 한다. 또 사회복지가 감소하고 교육, 의료와 같은 서비스가 민영화됨에 따라, 그녀들은 자신의 재생산노동(간병·보육 등 보살핌노동을 포함한 가사노동 전반)을 끊임없이 증가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가사노동 부담의 증가는, 여성들의 가사 외 노동을 ’비정규직‘ 혹은 ’비공식적 고용형태‘로 더욱 주변화할 수밖에 없다.(즉 가정주부라는 이유로 또 노동시장에서 차별받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악순환에 또 악순환이 거듭된다.

물론 이러한 출혈적 착취에는 한계가 있다. 현재 끊임없이 진행되는 구조조정은, 여성이 제공하는 재생산노동이 무한히 ‘탄력적’인 것으로 가정한다. 그리고 여성에게 인내할 수 없는 수준의 노동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이는 결국 재생산노동의 기반 자체를 붕괴시킬 것이다. 현재의 ‘젠더편향적’인 신자유주의적 발전모델은 결코 지속가능하지 않다!

그 동안 재생산영역은 비가시적인 노동이 이루어지는 영역으로 치부되면서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 영역은 무임금 노동이 무한하게 탄력적으로 이루어지는, 대표적인 착취의 영역이었다. 이제 생산과 재생산 사이의 상호연관성을 충분히 인지하면서, 여성들의 삶을 제약하는 조건 전반을 변혁해나가야 한다. 이는 신자유주의의 야만에 맞서 평등-자유-연대의 대안세계를 건설하겠다는 우리의 지향을 이루기 위한, 가장 관건적인 과제이다.

재생산노동과 가족에 대한 고려 없이 여성들의 노동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캐롤 페이트만이 정식화한 것처럼 ‘울스턴크래프트의 딜레마’, 즉 ‘평등과 보호의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여성들은 남성들과 평등하게 되기 위해 자신의 재생산노동을 은폐하거나, 아니면 그것에 대한 보호를 요구해야 한다. 즉 그녀들은 노동시장에서의 형식적 평등을 추구하면서 수퍼우먼이 되거나, 아니면 ‘파트타임직’과 같은 보호조치들을 받아들여서 노동시장에서 주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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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페미니스트로서, 여성의 일을 비가시화하는 현 체제에 맞서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관점을 강하게 견지해야 한다. 그리고 여성권을 쟁취해나가야 한다. 지금도 한미 FTA 등 신자유주의의 폭력이 여성들의 인간다운 삶을 박탈해가고 있다. 대다수의 여성들이 비정규직으로 전락하고, 사회서비스의 유실과 출혈적 구조조정에 따른 ‘충격흡수자’의 역할을 강요받는 상황에서, 사회를 변혁하고 여성해방을 쟁취해나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투쟁하는 여성들이 있기에, 우리는 좌절하지 않는다. ‘정치에 대한 권리’, ‘투쟁할 수 있는 권리’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존엄한 권리이자, 모든 사회변혁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여성해방을 향한 대장정’은 결코 나중으로 미룰 수 없는 현재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여성의 목소리로, 그녀들의 투쟁으로, 세상을 바꾸자!

Posted by 행진

2006/10/13 14:00 2006/10/1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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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맞서기


미국 헤게모니가 처음으로 위기에 처했던 1970년 이후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자본 축적의 위기를 생산과 고용이 아닌 금융적 팽창으로 해결하려 하는 금융세계화는 IMF, 세계은행, GATT 등 국제 금융,무역기구들은 자본의 초민족화를 각국에 강요하면서 금융자본의 영역을 일국차원을 넘어서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이같은 과정에서 기존의 좌파정당과 노조는 선거정치와 코포라티즘에 매몰되면서 제대로 된 대응은커녕 포섭되거나 오히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선봉장이 되기도 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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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WTO가 더욱 강력하게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추동하기 위해 나타나면서 대안세계화 운동이 맹아를 보이기 시작한다. 대안세계화 운동은 세계화에 대해 배타적인 자국산업보호주의와 어설프게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교정하려 한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의 한계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파괴적인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항하여, 대안을 세계화하기 위한 다양한 운동을 다양한 공간에서 펼치고자 하는 대안세계화 운동. 그 대안세계화 운동이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대안세계화 운동의 맹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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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세계화운동의 맹아가 된 사건을 들자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가 발효된 날인 1994년 1월 1일에 멕시코의 치아빠스 지역에서 봉기한 싸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NAFTA로 인해 멕시코 혁명이후 80년 이상을 지속해온 토지공유테를 초국적 자본들의 토지 이용을 용이하게 하려는 이유로 폐지하여 주민들의 생존과 자치를 위해 봉기했던 것이었다. 이들은 멕시코 정부로 인해 고립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들의 투쟁을 인터넷으로 세계에 알려내었다.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강조하는 이들의 투쟁은 무기력하게 세계화에 휩쓸려가던 세계의 운동진영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이들은 자신들의 근거지에서 국제적인 회합을 개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신자유주의 반대투쟁들을 매개하는 데 큰 기여를 했으며, 여전히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후 이러한 흐름은 1998년 OECD가 추진한 다자간투자협정(MAI)에 대한 전세계적인 공동행동으로 이어졌다. 단기성 투기까지도 투자의 권리로 인정하는 등 초국적 자본에 무한한 권리를 부여하려던 이 시도는 전세계적인 사회운동의 저항에 직면하여 결국 무산되는 크나큰 성과를 얻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1999년 WTO의 활동범위를 대폭 확대시키는 뉴라운드의 출범을 무산시켜낸 ‘시애틀 전투’로 이어졌다. 목표, 위상 등 동일하다고 할 수 없는 다양한 단위들의 직접행동이 뉴라운드를 무산시킨 것이다. 이러한 직접행동은 이후 프라하, 제노바 등에서도 이어졌다.

세계사회포럼


시애틀 투쟁은 큰 성과를 남겼지만 해결해야할 여러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WTO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비슷하게 보였던 시애틀 투쟁의 내부에는 신자유주의 자체에 반대하는 각국의 사회운동가들도 있었고, 중국이 WTO에 가입하게 되면 자신들의 임금 등 노동조건이 악화될 것이라는 예상하여 투쟁에 나섰던 미국노총(AFL-CIO)도 있었으며, 단지 ‘미국 중심’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제3세계의 농민들과 노동자들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각자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상이한 판단을 가지고 있는 조건 속에서 새로운 세계화의 전망과 이를 위한 운동이 안정적으로 보장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애틀 투쟁의 성과는 자본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또 다른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대안을 토론하기 위한 ‘세계사회포럼’의 결성으로 이어졌고, 결국 2001년 첫 번째 세계사회포럼이 브라질에서 개최되었다.

이렇게 시작한 세계사회포럼은 참여자들의 구성, 조직화 방식과 형태, 주요 이슈 등 모든 측면에서 그 이전의 국제적 운동들과 다른 특징을 보였다. 세계사회포럼은 정당이나 노조 등 기존에 있었던 모든 유형의 운동들도 참여했고, 지방-지역-민족-초민족적 형태로 결성된 집단들도 포함되었다. 또한 이 모두를 총괄하고 지도하는 상부단위를 만들지 않고 활동을 벌여나갔으며, 중심부 국가와 주변부 국가의운동이 결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여성, 이주자, 노동, 반전 등 서로 다른 문제들이 하나의 모순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운동들이 서로 다른 운동들과의 결합 속에서 자신의 실천과 사고방식을 변화시켜나가는 방향으로 전체운동의 수평적 교류를 실험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새로운 운동의 원리는 전 세계 사회운동이 ‘세계사회포럼 호소문’을 통해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모든 인민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요구목록’을 재작성하는 원칙들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계사회포럼에서는 1) 상호배제적인 권리가 아니라 상호증식적인 권리, 2) 따라서 보편화(확장)될 수 있으며, 3) 인문들의 자율적인 운동을 통해 쟁취될 수 잇는 권리라는 원칙 속에서 모든 인민들의 권리가 재작성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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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회포럼은 기존의 운동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저항의 보편성, 새로운 저항의 주체를 형성하지 못했던 한계를 넘어,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을 국제적인 수준에서 보편적인 언어와 행동으로 정식화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한편, 현재 세계사회포럼에서는 단순히 운동의 전망과 입장에 대한 토론과 공유, 즉 말 그대로 ‘포럼’에서 더욱 전진하여 보다 적극적인 형태의 투쟁을 벌여낼 방안 등을 중심으로 자기발전을 꾀하고 있다. 또한 올해에는 3대륙 (라틴아메리카-베네수엘라, 아프리카-말리, 아시아-파키스탄) 에서의 잇따른 개최를 통해 보다 활발한 교류와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유럽의 대안세계화 운동


유럽연합을 출범시킨 마스트리히트조약, 유럽연합을 확대하려는 암스테르담조약(1997)·니스조약(2000)에 이어 2004년 회원국 정상들이 그 초안에 서명한 헌법조약은 유럽연합을 지지하는 다양한 조직들을 단일화하고 체계화하여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를 제도적으로 공고화하려는 데 주된 목적이 있었다. 게다가 유럽연합은 입법권과 집행권을 모두 기술관료집단인 각료평의회와 집행위원회가 장악한 반면 유럽의회는 실제로 자문기관에 불과하여 ‘민주주의의 결핍’이 드러났다. 무엇보다 유럽헌법조약은 유럽의 시민들이 직접 선출한 제헌의회에 의해 제정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헌법’일 수 없었다. 또 유럽중앙은행이 완전한 독립성을 보장받고 유럽경제인회의와 같은 초민족자본가단체가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우위가 명시됨으로써 유럽의 외교정책에 대한 미국의 지배가 보장된다.

한편 유럽헌법조약에서 제시되는 ‘시민권’의 내용도 지극히 제한적인 것이었다. 조약에 따르면 노동자의 기본권은 노사정 협약에 의해 크게 제약되고 피임·낙태·이혼과 같은 여성의 기본권도 카톨릭의 권위에 의해 제약된다. 특히 유럽연합의 시민은 회원국의 국적을 지닌 자로 한정됨으로써 유럽 이외 국가 출신의 이주자를 배제하고 있다.

경제위기와 그에 뒤이은 유럽통합은 결과적으로 전후 호황기에 구축된 노동 안정성과 사회복지 모델의 쇠퇴를 의미했다. 이러한 ‘사회적 민족국가’의 위기 속에서 한정된 일자리와 복지 서비스를 종족 공동체의 성원에 국한하여 배분함으로써 위기의 충격을 완화하고 낙후된 삶의 질을 회복해야 한다는 요지의 인민주의적 선동이 가세하면서 이주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이 점증한다. 프랑스 민족전선, 이탈리아 북부동맹, 오스트리아 자유당 등 극우정당은 이민 반대나 유럽연합 반대와 같이 인종주의와 인민주의적 반세계화 논리를 동원하여 세계화와 유럽연합으로 인해 피해가 가장 극심한 하층 노동자와 청년실업층으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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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금융거래과세시민연합>(ATTAC)이나 <공산주의재건당>(PRC)과 같이 대안세계화 운동을 추동하는 핵심적 사회운동들은 유럽헌법조약에 반대하여 ‘대안적 유럽’을 주창하며 노동권과 여성권을 핵심으로 시민권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광범하게 조직하고 있다. <금융거래과세시민연합>은 금융세계화에 대한 발본적 이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인식하게 시민교육운동을 자신의 주된 과제로 천명하는 한편 정당이나 노조의 사회운동적 개조, 사회운동적 마르크스주의의 부흥에 복무함으로써 오늘날 유럽에서 대안세계화 운동의 진원이 되고 있다. 공산주의재건당은 ‘자율적이고 동시에 세계에 개방된 유럽, 자본주의적 세계화와는 다른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모델을 가진 유럽’을 주창하며 노동자운동과 페미니즘과의 결합, 정당의 사회운동적 개조를 이러한 전망 속에서 구현하고 있다. 이들이 주축이 된 유럽의 사회운동들은 2004년 10월에 열린 유럽사회포럼에서 채택한 사회운동 호소문을 통해 유럽헌법조약이 구현하고자 하는 유럽에 명백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흐름은 유럽통합의 신자유주의적인 기획인 유럽헌법조약 체결시도에 맞선 투쟁을 조직하는데 큰힘이 되었으며 네덜란드와 프랑스에서 유럽헌법조약의 부결이라는 결과를 이끌기도 했다.

남미의 대안세계화 운동


1990년대 후반부터 촉발되기 시작한 라틴아메리카의 새로운 사회운동은 기존 정당과 노동조합이 선거정치에 매몰되거나 코포라티즘을 수용하면서 대중운동을 분할하는 상황을 극복하고 신자유주의적 금융-군사 세계화에 정면으로 맞서는 한편, 다양하게 분출하고 있는 사회운동 간의 연대를 강화하고자 했다. 이들은 지난 해 11월 아르헨티나 마르 델 플라타에서 열린 미주정상회의에 즈음하여 ‘미주지역자유무역협정(FTAA)’ 체결 논의를 중단시켰는데, 당시 차베스 대통령은 정상회의장 안팎에서 ‘미주대륙을 위한 볼리바리안 대안(ALBA)’을 주장한 바 있다. 물론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권을 비롯한 역내 좌파 정권의 미래는 ‘무적의 제국’으로서 자신의 권력과 ‘신자유주의 정책의 비가역성’이라는 신화를 유지하기 위한 미국의 간섭과 자본의 초민족화라는 구조적·객관적 조건에 의해 크게 제약된다. 실제로 FTAA 협상 타결 실패 이후 미국은 하위-지역 협정을 병행 추진하며 경제통합을 시도 중이다. 도미니카공화국-중앙아메리카-미국 자유무역협정(DR-CAFTA)을 법제화하고 파나마와 여타 안데스 3개 국가들과 양자간 자유무역협정을 추진 중이다. 한편 역내에서 미국의 전략적 파트너인 브라질은 남미공동시장(MercoSur) 8개 회원국을 확대 규합한데 이어 2004년 10월에는 안데스공동체(CAN)와 정치·경제 협정을 수립했다. 또 2004년 12월에는 총 12개국이 남미공동체(SACN)를 결성하는데 합의했다. 이에 거의 대부분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자주적인 경제정책을 실용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미국·브라질과 협상중이거나 모종의 협정에 가입하고 있다. 따라서 ALBA가 실질적으로 역내 국가들에 끼치게 될 영향력이 얼마나 클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의 새로운 사회운동들은 최근 들어 각 국에서 좌파 정권이 줄을 이어 등장하고 있는 현상이 남미 대륙에서 폭발하고 있는 자유무역, 군사주의, 사유화 정책에 반대하고, 자연자원과 식량주권을 지켜내기 위한 사회운동의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또 ‘좌파 정권에 대한 정치적 자율성’과 ‘각국 정부가 신자유주의를 수용하지 않도록 압박’하는 것을 재천명하며 대안적 지역통합의 노력을 구체화하고 있다. 특히 미주사회동맹이 제출한 ‘미주대륙을 위한 대안’은 차베스 대통령이 제시한 ALBA와 최근 볼리비아 모랄레스 대통령이 발의한 인민무역협정(TPC)에도 참조되었다. 라틴아메리카 사회운동들은 ALBA 협정이 ‘아래로부터의 참여’를 바탕으로 한다는 취지와 다르게 각 국 정상들이 주도하는 협정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지적하지만 신자유주의에 바탕을 둔 미국 주도의 FTAA가 아닌 다른 형태의 지역적인 교류의 가능성을 이러한 시도를 통해 제시하며 FTAA 반대 투쟁을 조직하는데 이를 활용하고 있다.

대안세계화 운동을 만들어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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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 각각의 운동들이 민중적 대안을 만들어가기 위해 관계를 맺으면서 활동해나가는 대안세계화운동은 앞으로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미FTA와 평택미군기지 확장 등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고착화하기 위한 시도에 맞서서 어떻게 운동을 해나갈 것인가가 바로 이와 관련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전국학생행진(준) 역시 자신의 공간, 영역에서 다양한 단위들과 민중적 대안을 만들기 위한 교육과 그에 기반한 구체적 실천들이 바로 우리가 만들어 나가는 대안세계화의 모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행진

2006/10/13 13:50 2006/10/13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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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FTA, 금융세계화, 한국경제

노무현 정권은 한미 FTA 체결이 ‘수출증대’와 ‘외국인 투자 증대’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한국 경제의 위기를 극복하고 민생경제를 다시 살려낼 것이라고 역설한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될까? 물론 우리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이 글은 정부의 논리를 비판하면서 금융의 세계화가 한국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간략하게 살피게 될 것이다.

사실 굳이 정교하게 논리를 펼치지 않더라도, 즉 이제까지의 ‘경험’에 기초해 생각해봤을 때도 FTA는 대안이 될 수 없다. 미국과 NAFTA를 체결한 멕시코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봐도 이는 분명하다. 또 IMF 협약 이후 한국 경제가 살아났는가?

과거 김대중 정권은 한국 경제가 ‘IMF 조기졸업’에 성공했다면 자신의 개혁을 자랑하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그것은 기업매각, 금융개방, 그리고 (소위 ‘벤처붐’을 타고 잠깐 빛을 발한) 정보통신 분야에 대한 대대적인 투기성 투자가 만든, 그야말로 일시적 효과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의 대가는 무엇이었는가? 그 일시적인 효과를 위해, 김대중은 한국 경제를 금융세계화에 깊숙이 편입시켰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한국 경제에 유입된 초민족 금융자본은 한국 경제의 종속성과 불안정성을 더욱 극단적으로 심화시킨다. 그리고 소위 ‘주주의 권리’를 행사하면서 온갖 반민중적 정리해고/구조조정/불안정노동化를 추동해내고, 이로써 엄청난 이윤을 누린다. 하지만 이러다가도 한국 경제 내에서의 수익성이 떨어질 기미가 보이면 거침없이 한국 경제 밖으로 빠져나온다. 이러한 자본유출로 인해 한국 경제는 궁극적으로 파국에 치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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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바로 금융세계화의 원리에 대한 요약 설명이다. 이제 이것을 보다 구체화하면서, FTA를 옹호하는 정부의 논리를 하나하나 반박해보기로 하자.

너무나도 진부한, ‘수출증대’ 논리


WTO개방을 옹호할 때마다, 쌀개방의 필연성을 설파할 때마다, 정부의 논리는 한결같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수출주도형 제조업으로 먹고산 나라이기 때문에, 쇄국정책을 고수하지 않고 세계 흐름의 대세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쌀과 같은 것을 조금 양보하더라도, 대신 자동차나 TV를 많이 팔아 외화를 벌자는 것이다. 이 논리는 너무나도 진부하면서도, 그리고 단순하면서도, 또 너무 자명하여 논쟁을 ‘봉합’하는 효과를 불러온다.

하지만 금융자본의 동학에 주목할 때, 우리는 정부가 계속 강조하는 ‘비교우위’ 논리 - 농업을 양보하는 대신 자동차를 미국에 수출하기 - 가 얼마나 시대착오적인지 알 수 있다.

사실 정부의 논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이미 한미FTA는 대단히 해학적이다. 농업에서 피해가 생긴다는 것은 정부도 사실 어느 정도 인정하는 것이고 다만 제조업에서 대미 수출이 증가할 것이라는 것이 정부가 자신있게 제시하는 근거인데, 여러 가지 통계는 이조차도 ‘근거 없는 낙관’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설령 관세를 철폐해서 미국시장 진입이 좀 용이해진다고 해도 이미 미국의 수입관세는 불과 2~3%에 그친다. 따라서 이를 철폐한다 하더라도 그 효과는 미미할 것이다. 반면 미국보다 높은 국내 관세가 철폐된다면 미국 제품의 국내시장 경쟁력은 보다 강화될 것이다. 제품별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자동차의 경우만 봐도 FTA 이후 한국에 유리한 결과가 낳을 것이라 장담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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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기서는 농업은 어떻고, 제조업은 어떻고 등 분야별 손익계산을 따지는 이런 식의 논의를 지양할 것이다. 대신 여기서는 보다 본질적인 비판을 가하고자 한다. 즉 초민족적 금융자본 주도의 신자유주의 속에서, 이미 ‘수출경제’라는 말 자체가 ‘형용모순’인 것이다! IMF 프로그램으로 한국 경제가 금융자유화된 이후, 현재 한국 경제는 외국계 초민족적 금융자본이 지배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주식의 매입을 통해 회사의 실질적인 막후 지배자로 자리잡는다. 특히 김대중 때의 공기업 사유화 및 해외매각 정책으로 인해, 거대 핵심 공기업의 주식 또한 외국계 초민족자본이 대거 장악하고 있다. 이는 더 이상 ‘민족자본’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수출이 아무리 증가해도, 그것이 일국 경제상의 성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예컨대 IMF 위기 이후 구조조정이라는 극약처방을 내리고 환율을 대거 평가절하하면서 제조업의 수출이 잠깐 증가하기도 하였지만, 이 시기에도 경제성장률(GDP)는 여전히 저조했다. 이미 초민족자본이 수출부문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황에서, 수출증가는 내수 소비 및 투자로 연결되지 않는다.

분배 악화와 빈곤 심화


신자유주의와 FTA가 야기하는 노동자들의 권리 파괴 또한 금융자본의 동학과 연결지을 때 그 본질을 더 잘 파악할 수 있다. 흔히들 신자유주의 속에서 이루어지는 정리해고/비정규직化를 두고 노동자들 임금이 몇 푼이나 된다고 사람들을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자르나?”라는 의문을 가질 만하다. 하지만 주주들(즉 금융자본가들)의 주요 목적은 노동자의 임금 몇 푼을 절약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몸살을 줄이고 구조조정(downsizing)하는 그 ‘과정’ 자체만으로도 주식의 가치를 일시적으로 반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허리띠를 잠시만 졸라매자,”라는 약속은 영구적인 구조조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 금융자본가들의 투기적 이윤 속에서 민중들은 최소한의 삶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다.

경제를 분석함에 있어서, 우리는 (주식과 외환시장이 주요 무대인) ‘금융 영역’과 ‘실물경제 영역’을 일정 부분 분리해서 사고할 필요가 있다. 뉴스를 보면 항상 말미에 주가 변동 일일보고가 나온다. 그것도 일기예보와 함께 연달아 나오는데, 사람들을 이를 보면서 주가가 한 나라 경제의 중추를 이루는 아주 핵심적인 수치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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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의 본질을 ‘성장과 고용·분배’라고 간단하게 설정해보자. 이렇게 봤을 때 금융영역의 성장과 주가의 상승이 실물경제의 활성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정부는 한미FTA를 통해 더욱 더 규제벽을 낮추고 투자를 유치하려 한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유입되는 해외자본 중 단지 5%만이 생산자본으로 투입된다. 나머지 대부분을 이루은 초민족적 금융자본은 공장을 지어 상품을 생산하고 고용을 창출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 이들은 새롭게 산업을 형성하는 것보다는 기존의 기업들을 인수·합병(M&A)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 이는 주식시장에서의 초과이윤을 창출하는 주요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투기를 위한 자본이 엄청나게 넘나드는 동안, 정작 일자리는 오히려 줄어들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늘어나는 그런 역설적 상황이 도래하게 된다. ‘고용 없는 성장'과 ‘빈부의 양극화’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특징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한미FTA가 이러한 경향을 극단으로 밀어붙일 것은 자명하다.

소위 '재벌 개혁'에 대해


김대중 때 신자유주의 개혁이 힘을 얻은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재벌개혁’에 대한 기대였다. 물론 이는 허구적이었다. 현실에서는 재벌의 폐해라 불려졌던 독점적 성격이 없어지지도 않았던 것이다. 초민족 금융자본에게 중요한 것은 개혁이 아니라 어쨌던 이윤이며, 초민족 금융자본은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할 것이다. 실제로, 금융화 속에서 대우와 같이 공중분해되고 여기저기 팔린 것도 있는 반면, 상위 몇 개 그룹은 오히려 이전보다 독점적 성격이 강화되었다. 재벌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인수·합병, 즉 ‘빅딜’이 이루어졌고 그것을 지탱하기 위해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양 엄청난 공적 자금이 투입되었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했듯, 기업을 인수·합병하면 그 기업의 상장 가치가 치솟기 마련이며 여기서 이익을 얻는 것은 주주권을 가진 초민족적 금융자본들이다. 민중들이 그 부담을 감내하는 동안, 금융자본들은 너무나 위험한 ‘돈놓고 돈먹기’를 하는 것이다.

물론 신자유주의의 전세계적 추세와 한국 재벌의 속성 사이에는 분명 ‘긴장감’이 있다. 그래서 재벌의 투명성 이야기가 종종 나오는 것인데, 이는 어디까지나 ‘자본 내부의 헤게모니 다툼’일 뿐이다. 재벌개혁의 핵심은 재벌의 족벌적 연계를 끊고 재벌을 금융세계화에 걸맞게 법인자본으로 전화시키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혁의 최대 수혜자는 초민족적 금융자본일 뿐이다. 법인자본의 핵심은 소유와 경영의 분리이며, 금융화의 핵심은 경영에 대한 소유의 우위라는 이 두 가지 원리를 종합적으로 파악해보자. 문제의 본질이 너무 훤히 보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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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다시 삼성을 두고 다들 왈가왈부하고 있다. 재벌의 비대화를 막고 투명한 경영을 위해 순환출자를 금지하자는 것이 참여연대를 비롯한 신자유주의자들의 생각이다. 삼성의 경우… 1995년 반도체 호황 때문에 삼성전자가 갑자기 커져버리면서 이건희 일가의 지분을 다 합쳐도 삼성을 지배할 수 없게 되자, 이재용의 지분을 늘려 에버랜드를 지배할 수 있게 만들었다. 에버랜드가 순환출자를 통해서 삼성을 지배하는 실질적인 지주회사이기 때문이다. 그런대 만약 참여연대가 주장하는 것처럼 이재용의 지분과 순환출자를 무효화한다면, 삼성은 ‘외국계 기관투자가들’에게 지배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액주주운동, 그리고 김영삼 정권 때의 ‘금융실명제’가 가지는 본질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참여연대식의 주장에 반대해서 재벌의 긍정성에 주목하자는 웃지 못할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재벌이 법인화한다 하더라도 이건희가 누리는 지배적 지위에는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적어도 민중들이 보기에는… 물론 소유와 경영을 동시에 가져가려는 그 사람들의 욕심은 한도 끝도 없겠지만…) 90년대 들어 금융실명제 등이 시행되면서 ‘개혁’의 긍정성에 주목하자는 흐름이 운동 사회 내부에서조차 나왔지만, 이제 우리는 ‘재벌개혁 vs. 재벌수호’라는 논쟁지형이 가지는 허구성을 낱낱이 폭로해야 한다. 요컨대 ‘재벌해체’ 논쟁은 허구적인 측면이 많으며, 양자 입장 모두 민중의 권리와는 하등 관계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이젠 현실을 바로 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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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아르헨티나가 이미 겪은 절망적 상황이 바로 머지 않아 닥칠지 모르는 우리의 절망적 미래이다. 결과가 불 보듯 뻔한데, 아직까지도 FTA에 찬성할 것인가? 이젠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볼 때이다. 금융세계화는 한국 경제를 붕괴시킬 것이며, 민중들에게 절망을 안겨줄 것이다. 정부는 어설픈 통계자료를 가지고 억지 주장을 펼치는 행동을 즉각 중단하라. 그리고 자신의 반민중성에 보다 솔직해져라. 물론 우리는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백하지 않은가?

Posted by 행진

2006/10/13 13:36 2006/10/13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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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5호를 발간하며

이번 뉴스레터 5호를 관통하는 주제는 ‘한미 FTA 저지’ 입니다.

5호를 제작하면서, 편집국에서는 방침을 하나 세웠습니다. 이번 5호 기사들은 전반적으로 ‘짧게’ 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A4 3쪽을 넘지 않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대부분’ 그 약속을 지키게 되었네요. (어떤 기사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는데, 그렇다고 너무 핀잔주지 마세요.^^)

앞으로 계속 평가를 하면서, 개선을 해나가야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피드백이 필요합니다. 행진 사이트에 뉴스레터용 게시판을 따로 만들자는 의견도 있었는데, 어떨까요? 아무쪼록 많은 의견을 주세요. 글을 써주시겠다는 분들,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글 분량의 경우 어느 정도가 적당할지, 판단을 명쾌하게 내리기가 힘드네요. 따지고 보면 A4 3쪽도 그리 적은 분량은 아니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글을 쓰는 입장에서 계속 욕심이 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뉴스레터만큼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도 없기 때문에, 자꾸 이런 저런 말들을 걸고 싶어지는 것이지요.

변명 아닌 변명을 위해, 얼마 전 한 책에서 읽은 문구 하나를 인용합니다. 때때로 글이 좀 길어지더라도, 너그러이 용서해주세요.^^ 풍부한 내용을 압축적으로 담을 수 있도록, 정곡을 찌르는 글을 쓸 수 있도록, 앞으로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이해할 수 있는 것과 이해할 수 없는 것 사이에 이야기가 있다.
 즉, 이 세상에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 김정환 시인의 어느 글에서 발췌한 문구

첫 번째 글, 「FTA, 금융세계화, 한국 경제」는 한미 FTA가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서술했습니다. 여러 가지 통계를 동원하기보다는 정부의 논리 저변에 깔려있는 이데올로기를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데 더욱 초점을 맞췄어요. 이제 더 이상 정부의 허구적인 선전선동에 속지 맙시다.

두 번째 글,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전 세계의 대안세계화 운동」은 전 세계에 걸쳐 용감하게 싸우고 있는 민중들의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싸움은 국제적인 보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들이 자본과 폭력의 세계화를 강요한다면, 평등-자유-연대의 세계화로 되갚아줍시다.

세 번째 글, 「재생산의 위기, 그리고 여성의 삶」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우리들이 꼭 고민해나가야 하는 내용의 글입니다. 페미니스트로서 신자유주의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를 ‘젠더인지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여성해방을 향한 행진은 결코 미래로 유예할 수 없는 현재의 과제일 것입니다.

네 번째 글, 「문화예술운동에 대하여」에서는 전체운동과 부문운동영역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문화예술운동의 현 시기 경향성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서술한 두 개의 문서를 첨부하였습니다. 꼭 다운받아서 읽어보세요. 각각의 파일들은 행진 자료실에도 올려다놓을게요.

마지막 글, 「학급총량제, 무엇이 문제인가?」는 이번 예비교사총궐기의 최대 쟁점이었던 ‘학급총량제’에 대한 해설을 담았습니다. 정부는 교사수를 늘리고 학급당 학생수를 떨어뜨려 교육환경을 개선하는 대신, ‘학령인구의 감소’라는 명분을 들이밀며 구조조정을 감행하려하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신자유주의가 야기하는 폭력적인 현실의 단편입니다. 그렇기에 예비교사들의 투쟁은 단지 예비교사들만의 자기이해추구적 싸움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학급총량제를 막아내고, 신자유주의를 철폐합시다!

그리고 뉴스레터를 제작하는 와중에, 북핵 사태가 불거졌습니다. 북핵 문제는 결코 우회할 수 없는 현 시기의 핵심 정세입니다. 일단 북핵 문제에 대한 전국학생행진의 입장서를 첨부합니다. 그리고 조만간 토론 자료를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끝으로, 지금 나오고 있는 음악은 민중문화운동연합의 1989년 앨범, 『현장의 소리1』에 실린 「밥, 자유, 평등, 평화」입니다. 밥, 자유, 평등, 평화… 그리고 인간답게 살기 위한 권리! 이것들이야말로 민중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들입니다. 소박하기 그지 없나요? 하지만 정말 절실한 것들이기도 합니다.

세월이 흘러도 결코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고, 그 속에 우리의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멈출 수 없습니다. 역사에 대한 책임감으로, 평등-자유-연대에 대한 갈망으로, 오늘을 살아갑시다.

한미 FTA 저지! 신자유주의 반대!

음악 가사 열기

Posted by 행진

2006/10/13 08:27 2006/10/13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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