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호_발간사] 최근 세태에 대한 단상

 전국학생행진 뉴스레터가 약 한달 만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제법 쌀쌀해진 날씨와 함께 한국사회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런 일들은 우리의 삶에 어떻게 다가왔을까요?

 우선 눈에 띄는 뉴스는 9월 취업자가 7만 1천여 명이 증가하여 10개월 만에 최대폭을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최근 한국이 수출 호조세를 보이며 곧 경기회복이 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과 함께 보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취업자가 증가했다는 뉴스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이 곧 우리의 삶을 나아지게 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여전히 비경제활동인구와 구직 단념자가 늘어나고 있고, 새롭게 창출된 일자리 역시 정부에서 제공하는 임시직이 많습니다. 경기 회복이 되고 있다는 뉴스를 의심스럽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만큼 우리들이 느끼고 있는 빈곤의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10월 17일 ‘세계 빈곤철폐의 날’을 맞아 한국 사회의 빈곤의 문제, 학생운동이 반빈곤 운동과 연대하는 이유를 담은 글을 실었습니다.

 이명박 정권의 지지율은 지난 9월 50%를 넘었다고 집계되고 있습니다. 경기 회복설과 국민 대통합 이데올로기, 그리고 ‘적’이었던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국무총리로 기용한 것이 그 효과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정운찬 총리의 청문회 과정에서 각종 잡음들이 드러났지만 이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방송인 김제동 씨와 손석희 씨가 방송사로부터 퇴출을 당한 것에 대해, 정권의 비민주성이 비난 받는 사태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명박 정권은 높아진 지지율을 바탕으로 지난 9월 25일에는 2010년 G20 정상회의 개최를 확정짓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이 더욱 선진국으로 가고 있다는 믿음을 국민들에게 심어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30호 뉴스레터를 통해 G20의 본질이 무엇인지, 이 회의가 가져다 줄 것은 무엇인지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이 끝난 이후에, 한국 사회 전체의 관심을 끄는 노동자들의 투쟁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노동계에서도 이슈가 되었던 상반된 두 가지 사건이 있었고, 이에 대한 보수언론들의 행태는 눈여겨 볼만 했습니다. 9월 22일 전국공무원노조, 민주공무원노조, 법원공무원노조의 세 단체가 단일 노조로 통합하고, 민주노총에 가입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각종 언론들은 공무원의 정치활동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였고, 다시금 ‘민주노총 죽이기’가 이어졌습니다. 한편 현대자동차 노조에서 ‘중도-실용 노선’이라고 일컬어지는 이경훈 위원장이 당선되자, 노동자들이 스스로 정치파업을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며 아전인수 격의 해석을 했습니다. 위와 같은 굵직한 사건들이 향후 노동운동에 미칠 영향이 무엇인지는 이번 호에 싣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가까운 시일 내에 어떤 상황에서도 ‘노동자 운동 죽이기’를 시도하는 보수언론의 행태를 비판하고, 노동운동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실으려고 합니다.

 역시 최근에 가장 많이 화두가 되었던 사건은 각종 아동 성폭력 사건입니다. ‘심신미약’이라는 이유로 12년의 형량을 받은 가해자 조두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형량이 너무 낮다며 반발하였습니다. 일부에서는 법정 최고형량을 적용해야 한다거나, 화학적 거세를 실시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거센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남성보장인권위원회’라는 방송프로가 버젓이 등장했고, 연애인들의 특정 신체 부위에 대한 명칭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논란들을 보편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페미니즘의 자리는 비어 있고, 각자의 사건은 그저 개별적인 일들로만 남아 있습니다. 모두다 ‘남보원’이 재미있다고 하는 지금, 우리는 대중문화에 나타나는 이런 행태에 딴지를 걸려고 합니다. 그리고 페미니즘의 시각이 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짧은 단상을 실으려고 합니다.

 많은 일들이 한국사회를 지나갔지만 대학은 조용하게만 있습니다. 대학은 각종 사회적 이슈들이 토론되지도, 어떤 행동이 만들어지지도 않는 ‘취업 학원’으로만 남아 있는 것일까요? 최근 전국학생행진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화두가 되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해, 그것의 역사와 쟁점을 되짚어보고 대학 안에서 민주주의를 향한 행동을 만들기 위한 ‘대학인, 민주주의를 말하다’ 포럼을 진행했습니다. 뉴스레터에 당일 포럼의 이모저모를 담아보았습니다.

 이렇듯 30호 뉴스레터는 최근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에 대한 단상, 이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틀을 담은 글을 마련했습니다. 이외에도 30호 뉴스레터부터 연재되는 서평을 실었습니다. 그리고 10월 11일 있었던 레인보우 운동회에서 이주노동자 자원활동가와의 인터뷰를 실었습니다. 대학이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과 무관한 공간이 되지 않도록, 대학에서 다시금 논쟁과 행동이 살아날 수 있는 정치를 복원할 수 있도록 계속 노력을 하겠습니다. 30호 뉴스레터 잘 읽으시고, 점점 추워지고 있는 날씨에 감기 걸리지 않도록 해요. ^^

Posted by 행진

2009/10/15 22:00 2009/10/15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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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20회의보다 세계사회포럼의 개최국이 되고 싶다!


 지난 9월, 2010년 11월 ‘G20’ 정상회의 한국유치가 결정되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특별기자회견까지 열며 이를 크게 선전했다. 야당과 언론에서 ‘과잉홍보’ 라며 이를 경계했지만, ‘G20' 회의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무엇을 논의하는지에 대한 설명과 이에 대한 비판은 없었다. 이명박이 어떤 일을 해도 비꼬는 댓글만이 달렸던 웹사이트에서도 ’이것은 잘했으니 인정해주자‘며 넘어갔다. 'G' 가 붙은 정상회의에 작년 금융위기 전까지 끼지도 못했으며, 언제나 TV를 통해 선진국들이 세계를 좌지우지할 정책방향이 결정하는 것을 볼 수밖에 없었던 한국의 시민들로서는 ’이러한 어마어마한 국제회의를 우리나라에서 한다니! ‘ 라는 놀라움(혹은 감격!!)이 모든 것을 압도하고 있는 듯하다.


G20, 어떤 회의인가?

  G20은 작년 11월, 세계적인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국제공조체제로서 출범하였으며, 참여국의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세계 전체의 85%를 차지하고 있는 것에서, ‘지구촌 최대 규모의 정상급 국제회의’ 혹은 ‘세계유지들의 회의’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G20개최 보도를 언급하는 언론의 설명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다. 그러나 G20의 성격과 문제점을 알기 위해서는 G20이 등장한 맥락을 역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소련 해체 이후, 언론은 세계 국가들의 협력체에 편의상 ‘G’라고 이름 붙였다. G는 ‘Group'의 줄임말로, G8은 8개 국가들의 그룹, G20은 20개 국가들의 그룹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G20은 방금 언급한 G8이 확대된 것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 사우디아라비아, 아르헨티나, 호주, 브라질, 중국, 한국, 인도, 인도네시아, 멕시코, 터키, 유럽연합(EU) 대표부가 추가되었다. G8도 처음부터 8개국이 모였던 것은 아닌데, 1975년 세계 경제대국 6개국(미국·일본·독일·프랑스·영국·이탈리아)으로 시작하여, 1976년 캐나다가 가입해 G7이 되었으며, 1998년 러시아가 가입함으로써 G8이 완성된다.
  그런데 이 G8전에, ‘G'가 붙은 또 하나의 그룹이 먼저 생겨났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G77으로, 이미 G8의 전신이 생기기 훨씬 전인 1964년, 유엔 개발위원회(CNUCED)에서 결성된 개발도상국 협력체를 가리킨다. (현재는 130개국이 참가하고 있다.) 왜 개발도상국들이 이런 그룹을 형성하고, 협력을 꾀했을까? 당연히도 국제회의에서도 힘의 논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경제력, 군사력 등이 우위에 있는 국가들의 이익은 종종 개발도상국들과 상충한다. 그런데 이런 큰 나라들 마음대로 국제질서가 만들어진다면, 개발도상국은 더더욱 빈곤과 지적 차이를 좁힐 수 없게 될 것이 뻔하다. 이에 맞서 자신들의 권익을 제대로 주장하기 위해 힘없는 국가들은 단결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개발도상국의 연합에 맞서 몇몇 국가들이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감독 하에 스스로 부여한 권한으로 국제적 사안들에 대한 결정을 내리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G8이었다. G8은 실제로는 초민족(초국적)기업과 글로벌 금융회사의 이익을 대변함으로써 비난의 표적이 되어왔다. G20 역시 여전히 이런 성격을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는데, 바로 이 G20에 한국이 포함되었고, 영광스럽게도 개최까지 결정된 것이다.


개최국으로서의 이익?
  G20의 일원으로서 또한 개최국으로서 회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고, 이것이 세계경제정책방향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말은 사실일까? 우선 G20 정상회의는 세계금융정책을 논의하기 위한 ‘협의기구’로, 집행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실제 집행력은 IMF, IBRD 등 미 재무부의 영향력 하에 있는 기구들이 가지고 있어 G20은 중상위 국가들을 포섭하기 위한 미국의 상징물 정도가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또한 회의 내에서도 G2가 실질적인 결정자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G2’는 미국과 중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최근에 언론에서 만든 말 중 하나다. 2년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는 ‘중-미간 전략적 경제대화’라는 이름의 회담이 열렸는데, 최근에는 이것이 ‘중-미 전략경제대화’로 이름을 바꾸며 강화되었다. 전 세계의 모든 중요 사안들이 이제 두 강대국(G2)의 협상 테이블에서 논의될 것이며, G2가 합의하면 G20은 별 반대 없이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강대국들의 회의에 낀다고 해서 이 테이블에서 동등해질 수 없으며, 오히려 강대국들의 회의테이블이기 때문에 이런 위계는 더욱 심할 것이다.
  개최국으로서 얻을 수 있는 경제적인 이익은 어떨까? 전례를 보면서 예상을 해보자. 가장 최근에 있었던 미국 피츠버그에서의 G20회담이 지역경제에 미친 영향은 어땠을까? 피츠버그에 살고 있는 한 한국학 학자가 쓴 오마이뉴스의 기사를 보면 (데니스 하트,「모처럼 돈 벌 기회, 시위로 망치지 마」, 9월 24일), 시내의 호텔이란 호텔은 모두 만원이고 음식점들도 크게 붐볐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 회담기간 동안 시내 중심가는 완전히 봉쇄되어, 가게들은 문을 닫고, 버스도 다니지 않았으며 도로와 교량도 폐쇄되었다. 보통은 900명이었던 피츠버그의 경찰력을 3100명으로 증강, 펜실베이니아 주 경찰 1천명을 따로 투입, 주변에 있는 주방위군 2000명 경계 태세 돌입, 도심에 인접한 강을 경비하기 위해 해안 경비대까지 출동... 이렇게 해서 회담장 경비에만 1950만 달러가 들어갔다. 보안문제 외에도 회담 전후로 도시를 정비하고, 도로와 보도를 수리하고, 낙서를 지우고, 빌딩을 청소하고, 쓰레기를 처리하는 등의 비용과 도심에 있는  비어있는 가게를 임시로 예술품 전시나 홍보용 공간으로 대체하면서 든 비용, 예산 부족으로 2006년부터 고장이 난 채로 두었던 시내 중심가의 분수 수리비.. 이 모든 비용을 합치면 2500만 달러에 달한다.
  해외 사례 말고, 2005년 겨울 부산에서 개최되었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의 사례는 어떨까? 개최 전 부산발전연구원의 지역산업연관분석에 따르면, 생산유발효과 4,021억 원, 취업유발효과 6,099명으로 나타났는데, 당시 부산지역 연간 지역총생산은 45조였고, 취업자는 159만 명에 달하고 있었다. 즉, APEC 유치의 경제적 효과는 전체 부산지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에도 못 미치는 미미한 것에 불과할 것이라는 것이 회의 전부터 지적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APEC회의 당시 북구 만덕로와 서면, 해운대 일대의 생계형 노점상들은 쫓겨나고, 슬래브 지붕으로 이루어진 주택가와 고물상, 공단 등은 공사용 가림막으로 가려진 것이 9시 뉴스에도 보도된 바 있었다. 
 이 모든 것을 떠나 한국이 G20의 일원이건 아니건, 개최를 하건 안하건 이 회의를 반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G20의 기본적인 성격, 바로 세계 부자국가들과 거대자본의 이익을 옹호하는 명백한 정치적 성향이 이 회의에 있기 때문이다.


G20의 제일 큰 문제는 이거야!

  G20은 현재 세계의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단을 논의한다고는 하지만, 누구나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나 ‘금융화’의 방향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는 없다. 1차 회의 때부터 주된 의제로 논의되고 있는 ‘금융규제’가 위기의 원인이었던 파생금융상품 시장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나마 첫 회의가 개최되기 전에는 여러 학자들과 운동세력들이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위기를 넘어설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였지만, 첫 회의가 끝난 후에 기대는 완전히 사라졌다. 오히려 G20은 이번 위기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 모델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논의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는 사례가 바로 2009년 6월 뉴욕에서 개최될 예정이던 ‘세계 금융경제 위기와 그 영향에 관한 유엔회의’가 조직적으로 보이콧을 당한 사례이다. 이 회의는 유엔 가입국인 192개국이 참가하는 회의였고, 매우 중요한 의제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또한 G20 회원국들의 참석을 위해 회의 개최를 3주나 연기하기까지 했지만, 주요 지도자들은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이 회의가 보이콧당한 이유는 조지프 스티글리츠라는 온건한 자유주의 경제학자의 보고서를 기초로 준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보고서는 ‘대부분 국가들에서 점증하고 있는 소득 불평등’이 세계경제 위기를 초래한 주요 원인 중 하나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경기 침체와 노동 수입의 감소(임금 디플레이션)에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장을 유지해야 한다는 정치적 필요가 대규모의 가계 부채, 특히 주택 구입을 위한 대출을 양산했다. 즉, 국경을 넘나드는 서브프라임 대출의 ‘증권화’가 자산 거품을 키웠으며 금융기관들은 이것이 초래할 수 있는 ‘해악’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것이 보고서의 내용이다.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은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 현 세계경제에 최선이라는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때문에 한국은 IMF사태를 맞이하였으며, 전 세계 노동자들의 임금은 삭감되었으며, 빈곤층은 늘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G20 정상회의에서는 바로 이것이 위기 탈출의 해법이라고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대안을 상상하기에 반대를 외친다!

 진정한 세계시민이 되는 길은, G20 개최국이 된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논의되는 사안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결정되는 정책방향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다. GDP의 15%밖에 차지하지 못하는, 그래서 오히려 더더욱 앞으로의 세계경제정책에 따라 많은 이들의 생존이 좌지우지될 170여국에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G20의 신자유주의 모델이 계속되면 피해를 보는 이들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다.  
  정상회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대안을 상상하기 때문에, 회의를 반대하는 것이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는 회의 개최가 결정된 직후부터 회의장 안 만을 비추고 있고, 회의장 밖의 목소리에 조명을 돌릴 때는 반대 시위자들을 폭도로 몰고 싶을 때밖에 없다는 것을 이들도 잘 안다. 하지만 이들은 세상 모든 것에 불만을 가지고 폭력을 휘두르러 모이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아닌 다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국가의 지도자만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어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말하기 위해 모인다.
  또한 이들은 이러한 회의를 직접 개최하기도 한다.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에 맞서는 포럼으로 출범하여, 2009년 1월 아홉 번째 회의를 진행한 세계사회포럼이 그것이다. G20에 포함되어 다른 국가들을 착취하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베트남전 참전과 같이 개발도상국을 짓누르며 경제발전을 꾀한 역사를 반성하고 민중의 대안을 논의할 회의장을 내 줄 대한민국을 꿈꾸는 것은 헛된 걸까? 우리는 세계 유지들이 모여 자신의 부를 어떻게 유지하고, 불만의 목소리를 어떻게 잠재울지를 이야기하는 회의를 거부한다! 우리는 민중들의 모여 자신의 삶을 제대로 꾸려가기 위해 세계를 어떻게 바꿀지를 논의하는, 그런 회의 자리를 환영하고 싶다!


* 참고한 글
- 데니스 하트,「모처럼 돈 벌 기회, 시위로 망치지 마」, 9월 24일, 오마이뉴스
- 베르나르 카상,「신자유주의에 매료된 ‘G’그룹의 착각」, 10월 6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김석준,「"아펙 효과 모호하고 추상적, 희망사항만 나열"」, 2005년 11월 14일, 참세상,
- 사회진보연대 정책위원회,「 G20 정상회의와 국제금융질서 개편 논의」, 2008년 12월 2일, 사회화와 노동 413호

Posted by 행진

2009/10/15 21:59 2009/10/15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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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7빈곤철폐투쟁에 날에 함께 합시다!

10월 17일은 UN이 정한 세계빈곤퇴치의 날이다. UN은 2000년 총회에서는 밀레니엄 개발목표를 통해 2015년까지 절대빈곤과 기아를 대폭 감소할 것을 결의했지만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절대빈곤층이 10억명, 전 세계인구의 1/3에 가까운 27억명이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빈곤은 저개발 국가 뿐만 아니라 소위 G20에 들어가 있는 한국에서도 존재하는 현실이다. 남한에서 최저생계비 이하로 살아가는 절대빈곤인구가 10%에 육박하고 있으며, 중위소득 50% 이하인 상대빈곤인구는 15%에 달한다. 결식아동의 숫자가 10만 명을 넘고, 노인빈곤율은 OECD 30개 국가 중 최고에 달해 노인가구 두 가구 중 한 가구꼴로 가난한 삶을 살고 있으며 여성의 빈곤 역시 심하다. 저개발국가의 식량이 빈곤의 최대화두라면, 남한에서 생겨나는 빈곤이 구조적으로 불평등한 삶을 만들어내는 것은 서로 떨어진 것이 아니다. 누가 누구에게 빈곤을 전가하고 빈곤의 나락으로 사람들을 밀어넣고 있는지 1017빈곤철폐의 날을 통해 알고, 이에 저항하는 흐름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현재 남한의 빈곤의 심화와 불평등의 악화는 96-97년 IMF경제위기 이후 본격화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사회구조적으로 정착되어 나라경제가 성장하고 발전하더라도 빈곤인구는 줄어들지 않는다. 위기의 해결책으로 제시되었던 실업과 해고, 구조조정은 노동의 유연화로 비정규직의 양산과 저임금, 불안정 노동이 일상화되게 만들었고 아무리 일을 해도 ‘가난한 노동자(working poor)'가 생기는 악순환의 고리는 2008년 이후 본격화된 경제불황 이후 더욱 고착화되고 있다. 경제불황의 여파는 빈곤층에게 더욱 고통스럽게 영향을 끼쳐 실질소득이 떨어지고 소득불평등과 빈부격차는 더욱 확대되었고 남한은 그 수치가 전세계에서 압도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경제불황과 사회적 안정망의 부족으로 일자리가 줄고, 청년, 중년, 노년, 이주노동자, 정주노동자, 남성, 여성, 장애인, 비장애인이고 할 것 없이 전반적인 계층의 서민들의 삶은 빈곤의 사슬과 고리에 얽혀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경제활성화란 명목으로 부자에게 감세하고, 개발을 통해 건설자본과 땅투기꾼들의 배를 불리며, 중도실용 친서민정책을 펼친다고 보금자리주택과 취업후 등록금상환제, 미소금융 등의 저소득신용대출사업을 정책으로 만들었지만 국민들의 고통을 사회가 함께 책임져주는 것이 아니라 밑지지 않는 선에서 돈벌이로 활용하는 것과 다름아닌 정책들을 만들고 있다. 더욱 가관인 것은 4대강사업을 추진한다면서 22조나 되는 예산을 쓰지만 정작 서민들에게 필요한 복지예산은 축소하고,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수급비와 노동연계복지로 불안정하고 한시적인 희망근로 일자리를 정책이랍시고 내놓으면서 점점 거꾸로 시간을 거스르고 있다. 또한 대학인의 삶 역시 다르지 않은 것 같다.등록금이 1000만원을 웃돌면서 가계엔 자식을 교육시키는 것이 큰 부담과 생계에 위협이 되고 있는 상황에 취업 후에 등록금 갚는 ‘취업 후 등록금 상환제’를 정책으로 내놓고 학교를 졸업하고 돈을 벌어 갚게 하면서 희망으로 움틀 청년들의 시작을 빚으로 얼룩지게 만들고 있다. 더욱이 지금과 같은 경제위기, 해고와 실업이 넘치는 시기에 청년들의 일자리를 청년인턴제로 대체하면서 청년의 노동과 일자리를 보호하기는 커녕 비정규직, 한시적 일자리로 실업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전민중의 노동자들에게 경제위기의 책임을 전가하며 빈곤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2009년 10월, 가난한 사람, 점점 더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서민들에게 닥친 현실은 희망적이지 않다. 더구나 가을의 차디찬 바람을 따라 희망은 저절로 다가오지도 않는다. 희망은 희망을 노래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스스로 권리를 말하고,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하면서 1017 빈곤철폐의 날 투쟁을 가열차게 만들어가자!

학생운동의 실천은 전체 운동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비로소 완성된다. 전체운동에서 반빈곤 운동은 신자유주의 하에 구조적인 문제들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지점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사실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모든 싸움은 넒은 의미에서 반빈곤 투쟁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에  한 실천 역시 신자유주의에 맞선 투쟁으로 정세를 구성하는 투쟁과 맞물리면서 반빈곤운동에 결합하고 전체운동으로의 흐름을 만들며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더불어 빈곤의 문제를 한국사회를 관통하는 세계 전체의 구조적인 문제로 바라보고, 빈곤을 뛰어넘는 반빈곤운동이 이 투쟁에 함께하는 학생운동의 의의라 하겠다.

○ 용산 투쟁과 개발 
경제위기의 초입에 가장 먼저 봄을 잃은 채, 숨 막히는 투쟁의 여름 그리고 가을이 지난다. 지난 1월 20일 용산 한강로에는 살인적인 진압과 그로 인한 참사가 발생했다. 기나긴 투쟁은 해결의 기미는 커녕 점점 시간만 갉아 먹으며 9개월이 되어간다.  경찰의 살인진압으로 발생한 용산참사에 대해 검찰은 모든 책임을 철거민들에게 전가하였다.또한 검찰이 경찰 간부 및 용역 회사 직원들의 진술이 담긴 수사기록 3,000쪽을 공개하지 않고 용산참사의 해결 역시 여전히 표류하고 있다. 자본가 스스로 만들어낸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온 나라를 뒤엎고 서민들일 짓밟는 개발로 온 나라를 삼키었다. 비즈니스 프랜들리, 경제를 살리겠다던 이명박 대통령은 이들과 하나가 되어 나라를 팔아먹기 시작했다. 올 해부터 시작된 개발,10월 9일 시작된 디자인 올림픽, 그리고 더욱더 극렬히 진행될 4대강 정비사업까지 기업들을 배터지게 하려는 정권의 행보는 아직 진행 중이다. 이 땅에 누울자리 하나, 집 없는 서민과 영세자영업자를 빈곤의 나락으로 빠뜨렸던 이명박 대통령은 시장에서 오뎅과 오이를 먹으며 서민경제에 힘쓰겠다는 말을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갈길을 잃은 산화하신 철거민과 주거와 생존의 권리를 잃은 세입자, 노점, 영세상인들의 삶은 정권의 개발정책의 찌꺼기로 탄압받고 있다. 

○ 기본생활권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도입된지 10년,벼룩의 간을 내어먹는 공무원들의 복지급여 횡령과 보건복지가족부의 지침으로 수급자를 줄이기 위한 용산구청의 의료급여1종 수급자를 2종으로 강제 전환하는 것 등 덜도 아니고, 더 복지의 문제점들이 폭발한 한 해였다. 98년 IMF 경제위기 때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을 누릴 권리’가 있다면 법으로 저소득 빈곤층의 생계를 지원해주겠다며 도입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입법 취지와는 다르게 작용하여 수급권자의 권리 무시, 일방하달식 복지행정의 만연한 것이 수급자의 동의없이 복지급여 횡령이나 수급의 강제 전환을 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자신에게 어떠한 수급의 권리가 있는지에 대해 정보를 제공받지 못하고 제도의 오류의 행정상의 실책으로 불합리한 경우가 발생하더라도 공공의 정책이기에 책임지지 않고 수급 당사자의 목소리가 반영될 제도적 장치가 없다. 또한 2010년 최저생계비가 물가상률에도 못 미치는 인상률 2.75%를 보이며 1인 가구 50만 4344원, 4인 가구 132만 6609원으로 결정되었다. 이번 최저생계비 결정은 2000년 도입 이래 최저치의 인상률을 보였고, 물가 상승률에도 못 미치는 예산 짜맞추기로 권리는 장바구니에 물건을 우겨넣듯이 구석에 쳐박혀 있다. 또한 빈곤에 대한 책임을 사회가 아닌 개인과 가족에게 있다고 떠넘겨 빈곤으로 인해 가족 관계가 파탄나는 등 빈곤층에게 이중삼중의 고통의 요소가 되고 있다. 사회적 책임의 방기가 사람들의 삶을 사회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만드는 것과 다름 아니다.

○ 사회서비스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에 사회정책을 가미한 것으로 새로운 대안 국가모델이라고 칭송받는 사회적 투자 즉, 사회투자국가론은 복지를 생산요소로 보고 이에 투자하여 복지와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이론이다. 사회적 투자를 통해 일자리부족과 경제 활동을 가중시키고 인력과 자원이 부족한 사회적서비스를 이를 통해 채우는 방식으로 빈곤과 빈부격차를 해소하겠다는 것이다. 그 시초로 바우처 서비스가 등장했다. 사용자가 돈을 지불에 복지를 사고, 일정한 교육을 받은 저소득층 및 가사노동자인 여성들에게 일과 가정의 양립이라는 것을 강화하며 집 안에서 가사노동자로, 사회에서 시급제 비정규직 임금노동자로 살아가도록 하는 정책으로 유효인력을 확충하여 사회가 힘쓰지 않고 자급자족 할 수 있도록하며 여성에게 이중 삼중의 고통을 남겼다. 허나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사회서비스를 확충하는 정책을 공공기관을 넘어 민간자본들이 투자하여 성장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이에 복지예산은 줄지 않았지만 실질적으로 공공기관의 예산은 축소되었고 나머지 예산을 민간자본에게 투자하면서 돈벌이로 만든 차고 넘치는 양성기관들이 생겨났고 정작 복지의 혜택을 받아야하는 사람들은 복지로부터 더 멀어지게 되었다. 현재 사회서비스 정책은 복지는 권리가 아니라 물건이 되었고 그 안에서 일과 가정의 양립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이 늘어나고, 공공기관의 사회적 책임으로서의 서비스가 아닌 민간자본들의 먹이감이 되어버렸다.

○ 생활임금
얼마 전 보건복지가족부는 복지예산이 사상최대로 높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작년에 비해 8.6% ,추경예산에 비하면 0.7%로 물가 상승률에도 못 미치는 터무니없는 예산 인상이다. 게다가 천원 오른 장애인 연금과 보금자리 주택사업이나 청년인턴제, 희망근로와 같은 비정규직 일자리에 많은 예산을 투입할 예정이라고 하였지만 정작 급하게 필요한 긴급복지지원이라던가 저소득층의 장학금을 삭감하였다. 특히 경제위기에서 복지 예산을 늘려 서민들의 생활을 나아지게 하겠다는 말은 사실상 불안정하고 한시적인 일자리 대책을 우회하고는 서민들의 삶이 변화하지 않는다.지금의 복지는 근로연계의 ‘조건부 수급’ 조항을 두고 있어 사회권으로서 의무로 자활사업에 참여하거나 직업훈련을 받게하고 이를 핑계삼아 기초수급을 탈락시킨다. 권리를 권리로서 온전히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노동력이라도 갖춘 사람들은 수급을 주지 않으려 수급자에게 조건을 부과한다. 더불어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 노동권을 전혀 보장받지 못하거나임금도 수급을 받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정도로 저임금인 것이 현실이다. 사실상 수급자들이 노동을 통해 새로운 삶을 꿈꾸고 싶어도 노동의 현실은 수급과 비수급의 사이를 다람쥐 쳇바퀴 돌듯 돌고 있을 뿐이다. 자본가들 스스로 만들어낸 경제위기, 그리고 과도한 투기로 불러온 금융의 위기는 열심히 일한 노동자들에게 구조조정과 해고, 실업으로 홍수처럼 밀려들어왔다. 더불어 점점 비정규직화 되고 있는 불안정한 일자리가 팽배하는 지금, 복지의 확대가 곧 서민생활의 안정이라고 하기엔 부족하다. 아니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더욱이 노동의 권리에 대한 보장 없이 절대 복지의 확대가 서민과 수급자의 삶과 권리가 향상 될 수 없다.

꿈꾸지도 못했던 미래를 우리의 손으로!
넘치고 넘치는 생산량을 만들어내고 전세계 인구가 단시간 노동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수 있는 시기는 이미 오래전에 와있다. 하지만 여전히 굶주리는 사람들과 강도 높게 장시간 지속되는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 모두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과거엔 공식적인 노예로 백인에게 흑인이, 어른에게 아이가, 남성에게 여성이 함께라는 이름에 숨겨져 수많은 고통을 받아왔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비공식적인 자본가의 노예인 노동자에게 다시금 경제위기 속에서 함께 살자고 이야기하고있다. 함께 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쌍용자동차가 그랬고 거리로 쫒겨난 철거민들도 그랬다. 경기회복이 되고 있다는 언론의 보도는 연일 빵빵 터지는데 우리네 삶은 어떠한가? 물가는 더 치솟고 너무도 비싼 등록금, 벌어도 벌어도, 노동하고 또 노동해고 사는 것이 더 팍팍하다. 구조조정으로 해고와 실업에 처한 수많은 사람들은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픽픽 쓰러져 가는데 누군가의 아파트가, 누군가의 세금이, 누군가의 주머니는 불어간다.

10월 17일 ‘세계빈곤철폐의 날’을 맞아 이젠 저들만의 잔치에서 우리의 삶을 되찾아 와야 한다. 모든 사람은 인간으로서 존엄하고 당당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성별, 나이, 인종, 국적, 장애, 성정체성 등의 차이나 재산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적절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가 있다. 가난하기 때문에 꿈조차 꾸지 못했던 미래를 되찾아오자. 안정된 일자리와 적정한 소득, 살만한 집과 풍요로운 배움, 건강하게 살고 문화를 향유할 권리를 저항과 연대를 통해, 이제 함께 외쳐보자! 

Posted by 행진

2009/10/15 21:56 2009/10/15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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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 이봐요, 그런 건 개그 아니에요.

이봐요, 그런 건 개그 아니에요.

- 개그콘서트 '남성인권보호소'에 대한 쓴소리 -

바야흐로 개그의 시대다. 별로 안 웃긴 내 친구는 ‘웃긴 것도 권력인 것 같아’라고 푸념을 할 정도다. 요즘 사람들은 얼마나 센스가 넘치는지 웬만한 건 전부 개그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정치인들을 욕해도 그냥 안 하고 우스운 별명을 지어주거나 사진을 합성하거나 해서 반드시 웃음의 소재로 삼고야 만다. 점점 살기 팍팍해지니 뭐든지 웃음으로 승화시켜보려는 노력 같은 걸까?

나 또한 개그욕심 충만한 요즘 사람인지라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하는 것들은 기어코 찾아보고야 만다. 요즘 뜨는 개그 코너가 있다고 해서 뭔가 하고 찾아봤다. 모 개그프로에 나오는 ‘남성인권보호위원회’라는 제목의 코너다. 이 코너에서는 연애관계에서 벌어질법한 상황들을 제법 세세하게 묘사한다. 예를 들면, 여자는 생일에 남자에게 명품 백 사달라고 하면서 남자 생일 때는 정성들인 선물이랍시고 (아무 짝에 쓸모없는)십자수를 준다거나, 같이 여행가자고 해놓고 남자가 기름 값 내면 양심적으로 톨게이트 비는 여자가 내야하는 것 아니냐, 여자들은 그 돈 아끼면 살림살이 나아지냐 뭐 이런 내용이다. 사람들이 연애하면서 충분이 겪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저 정도 불만 쯤 이야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근데 잠깐. 물어보고 싶은 게 생긴다. 저기서 무슨 권리를 보장하라는 거지? 여자보다 돈 덜 쓸 권리 말고 여기서 이야기하는 ‘권리’가 뭐지? 그냥 웃고 넘어가라고 하기엔 뭔가 찜찜한 구석이 많아서 그냥은 못 넘기겠다. 아무리 모든게 웃음의 소재가 되는 시대라고 해도 눈에 들어오고 귀에 들리는 1차적인 자극들에 무조건 웃음으로만 반응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 좀 꼬장꼬장해져볼까? 

이 코너는 어떻게 웃음을 유발하는 걸까? 아마도 남녀관계에 있어서 여성에게만 용인되는 것들이 사실은 남성의 ‘권리’를 빼앗고 있단 말에 사람들이 많이 공감을 하는 것 같다. 근데 이런걸 권리라고 말할 수 있는 건가? 제목도 의미심장하다. 남성인권보호위원회. 남자가 데이트 비용을 더 많이 내는 것을 ‘인권침해’라고 하면서 남성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남성들이 가만히 있지 말고 다 같이 일어나서 외쳐야 한다고 선동(?)하기까지 한다. 실제로 코너가 끝날 때쯤에 무대 위의 배우들은 남성 관객들을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고 함께 구호를 외친다. 배우들은 진정한 남녀평등을 이야기하면서 구호를 외치지만 여성이 데이트비용 더 많이 내고 남성이 돈 덜 쓰는 게 평등일까? 개그 프로에 뭘 그런 것까지 바라냐고 하면 할 말 없지만 실제로도 사람들이 남녀평등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데이트비용 문제나 군대문제인걸 보면 대중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는 방송에서 ‘평등’을 이런 식으로 쓴다는 것은 달갑지가 않다. 방송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여기에 사람들이 보내는 반응을 보면 사회가 남녀평등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볼만 할 것 같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불평등을 만드는 것이 무언가 더 요구하는 여성들, 그에 비해 점점 빼앗기고 있는 남성들의 싸움은 아닐 것인데 왜 이것을 소재로 삼는 코미디에는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는 걸까? 남녀평등으로 나아가는 사회라고 하는 우리 사회가 ‘평등’을 어떤 가치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 아닐까 한다.    
 
그냥 웃고 즐기면 되지 따박따박 말대꾸 한다고 짜증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가다간 뭐가 정말로 지켜져야 하는 가치인지를 구분 못하고 감각적으로 재미있는 것들에만 반응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건 정말 무섭지 않은가? 실제로 인터넷으로 아무리 검색을 해봐도 이 코너에 대한 비판이나 불편함에 대한 글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떤 기사들은 풍자로서 손색이 없는 코너라고 하던데 내 생각에 진짜 풍자는 이런게 아닌 것 같다. 진짜 코미디는 사람들이 불만이라고 느끼는 것을 정확히 꼬집어서 웃음으로 만드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 코너는 풍자를 하려는 건지 말장난을 하는 건지 잘 구분이 안 간다. 진지한 풍자를 하려거든 좀 더 신중했으면 한다. 여성들의 권리를 위한 지금까지의 노력들이 왜 남성들의 권리와 부딪히는 방식으로 받아들여졌는지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런 방식의 ‘풍자’는 소용이 없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권리’라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쓰이는 것이, 남성의 권리가 여성의 권리와 대치되는 상황을 묘사하면서 남성들에게 더 이상 빼앗기지 말자며 웃음을 유발하는 방송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너무 열렬한 호응을 보내서 그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순간의 웃음 뒤에 조금의 찜찜함이라도 남아있었다면 함께 이야기해볼만 한 것 아닌가? 인터넷 상에 그 찜찜함을 털어놓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면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 해보자. 도대체 그 찜찜함이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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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5 21:49 2009/10/15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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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지환 2009/10/20 11:11 # M/D Reply Permalink

    2008년 9월 10일 결혼정보회사 선우 부설 한국결혼문화연구소의 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일반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훨씬 무거운 데이트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객관적인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남성은 여성보다 더 무거운 데이트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지 근본적인 의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는 남성에게 여성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와 함께, 여성을 보호할 책임을 부여했다는 것은 전국학생행진 게시판을 통해 여러 차례 지적했습니다. 즉 남성이 더 무거운 데이트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남성의 가족부양의 책임과 마찬가지로, 여성주의자들이 ‘가부장제’라 부르는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의 잔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글의 중간에 “배우들은 진정한 남녀평등을 이야기하면서 구호를 외치지만 여성이 데이트 비용 더 많이 내고 남성이 돈 덜 쓰는 게 평등일까?” 라고 이야기하셨는데, 진정한 양성평등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남녀가 데이트 비용을 비롯한 경제적인 책임을 균분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남성에게도 여성들처럼 경제적인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권리가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힘든 코미디 프로그램이기는 하지만, <남성인권보호소>에서 말하는 ‘권리’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어째서 ‘권리’인지 이해를 못한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귀하께서는 남성이 더 무거운 데이트 비용을 부담하는 현실이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시려는 것인가요? 만약 전통적으로 여성이 데이트 비용의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것을 ‘권리’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남성이 전통적으로 가사와 육아를 비롯한 돌봄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것도 ‘권리’가 아니라는 주장도 가능할 것입니다. 전통사회에서의 남성 억압과 여성 억압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문제와 관련해서는, 오히려 양성평등을 주장하는 여성주의자들이 보다 뚜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남성인권보호소>를 보며 언짢아하기에 앞서, 왜 지금껏 남성 혼자 더 무거운 데이트 비용을 부담해왔으며, 어째서 많은 이들이 이를 당연하게 생각해왔는지 근본적인 의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2. 아다리 2009/10/20 20:05 # M/D Reply Permalink

    저또한 한지환씨 의견에 공감합니다. 왜 이러한 코메디가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스스로 자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성 스스로가 자신을 약한존재, 보호받아야할 존재로 만든점은 없는지 , 남성이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한적은 없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진정한 양성평등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으로 평등해야 한다는 점에서 가치있고 존중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찜찜하다고 표현하셨는데. 저희도 여성들이 그러한 말하면 찜찜합니다.

    1. 보다가 2009/10/29 20:31 # M/D Permalink

      저 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남/여의 권리가 충돌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분명히 써있지 않나요? 이런 말 할 수 있겠다고.(두번째 문단에 있습니다) 지금 이 글에서 제기하는 것은 '권리'나 '평등'이라는 것이 어떻게 왜곡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제기하는 것 아닙니다. 군 가산점을 성별 갈등으로 치환하고 데이트 비용을 성별 갈등으로 치환하는게 문제라는 겁니다. 이런 코메디가 왜 나왔는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그런 행동을 긍정하지도 않습니다. 이건 사회적 현상이고 이 원인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원인은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상이 그래왔기 때문이겠죠. 남자들이 좋아한다는 청순이 바로 그거 아니었나요? 이 사회가, 남성들의 시선이 여성들을 그렇게 키워왔겠죠. 평등이나 권리라는 말은 이런 지점에서 사용이 되어야 하는 말 입니다.
      저는 남성들에 의해 보호받길 원하지 않는 여성입니다. 군대에 의해서도 경찰에 의해서도 당신들에 의해서도 보호받길 원하지 않습니다. 단지 서로를 인정하고 함께 살기를 원합니다. 사회의 동등한 공동체로서 말이죠. 당신들이야말로 그럴 준비가 되어 있나요? 무거운걸 드는 여자를 보고, 추운 날씨에도 씩씩한 여자를 보고 '그러고도 여자냐'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었는지 자문해보시길 권합니다.
      아, '여자들이 데이트 비용을 더 물리는건 남성 차별이야'라고 이야기하는 동시에 '예쁜여자가 그런다면 참을 수 있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는지 자문해보기도 권해드리죠.

    2. 한지환 2009/10/30 21:37 # M/D Permalink

      “남성들의 시선이 여성들을 그렇게 키워왔다”고 말씀하셨는데,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 하에서 남녀 모두는 강압적인 성역할만을 요구받아온 피해자임과 동시에 수혜자였으며, 여성이 데이트 비용을 비롯한 경제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것은 분명 그들에게 주어진 ‘면책권’, 즉 권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 하에서 여성이 누렸던 배타적인 권리를 생각하지 않은 채, 여성이 일방적인 피해자였던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절름발이 페미니즘에 근거한 편협한 태도인 것이지요.
      진정한 양성평등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여성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면책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이러한 ‘면책권’을 당연시하고 있으며,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성별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분명한 비판이 가해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인권보호소>가 여기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성별 갈등을 조장하는 것’으로 매도한 전국학생행진 측의 태도는 합리적이지 못한 태도라는 것이 제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아울러 귀하의 말씀처럼 “남성들의 시선이 여성들을 그렇게 키워왔기 때문에” 여성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이라면, 가사와 육아를 비롯한 돌봄 노동과 관련해 남성들이 누려온 ‘면책권’을 논함에 있어, ‘사회로부터 성별 이데올로기를 일방적으로 주입받은 남성들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주장도 성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전통사회에서의 남성 억압과 여성 억압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성별 이데올로기를 비판하셨는데,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전통적인 성별 이데올로기를 포기하지 않은 채 상대 이성(異性)에게 고정적인 성역할만을 강요하는 것은 여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귀하께서는 그러한 성별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스스로 말씀하시지만, 귀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이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여성이 과연 우리 사회에 얼마나 될지 한 번쯤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보아하니 귀하께서도 양성평등 이슈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군요. 시간 나실 때 제가 쓴 에세이「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을 한 번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귀하와는 이야기할 내용이 많을 것 같습니다(http://blog.daum.net/pipaltree/17181029).

    3. 아다리 2009/12/30 14:25 # M/D Permalink

      보다가님의 글을 이제사보는군요. 개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고 하면 변명으로 들릴수밖에 없는 논리의 오류를 펼치시고 계시는데. 이것이 곧 남성=잠재적 성범죄자의 이미지를 덧씌워 버리는 상황인것을 알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자기수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본능입니다. 사회의 동등한 공동체로서 살고싶은것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 글을 비판하는 방향은 아까도 이야기한 이미지를 가지고 호도하는 논조 의 문제 인것입니다. 남성인권보장위원회가 나온이유나 전국학생행진이 이를 비판하는 논조모두 별반 차이가 없는 헐뜯기에 가까운 논조는 색안경을 낀 사람의 눈에 모든것이 그 색깔로 보이는 격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3. 후후 2010/02/16 23:20 # M/D Reply Permalink

    재밌는 토론이군요. 근데 댓글들 달린지가 두달이 다되어가는데 행진은 이에 대한 답을 하지 않으시네요.

[30호] 레인보우 스쿨 운동회 후기

레인보우 스쿨 운동회 후기
 

자면서도 중얼거릴 수 있는 우리말이
누군가에게는 생존과 생계의 문제일 수도 있다!!

성신레인보우스쿨 자원활동가 - 호랑 -


10월 11일 레인보우스쿨 운동회에 참여 했습니다. 세미나를 제외하면 한글교실에 참석한 것이 이번으로 두 번째인데, 앞으로 횟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쌓여갈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습니다 :) 도착해서 치즈타임 케이크로 함께하는 **쌤의 생일파티도 하고, 팀을 표시하는 끈도 묶고 12시가 조금 넘어 운동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으로 다른 지역 선생님들과도 만날 수 있었고 다섯명의 이주노동자분들도 뵈었습니다.

 약식 국민체조, 단체줄넘기와 3인 4각, 피구 로 진행된 운동회의 두번째 순서인 3인 4각을 서래쌤, mns씨와 함께 하게 되었는데 처음으로 이주노동자분과 직접 대면하고 대화를 나눠보았습니다. 어떻게 의사소통을 해야할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잘 이해하셔서 놀랐어요. 저는 외국어를 전공하고 있는 관계로 '하고 싶은 말'과 '할 수 있는 말' 사이의 고민이 얼마나 큰지, 답답한지 그분들만큼 절박하지는 않겠지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태어나서 20년을 써온 언어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수업을 해본 적은 없지만 지극히 간단한 문법에 대해 물어보신다 해도, 제대로 답해드리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글은 배우는 것은 쉽지만 한국어가 얼마나 어려울지 걱정이 됩니다. 선생님이라고 불리우는 것에 맞춰 조금이라도 선생님 답도록 한글 공부도 조금씩 해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맛있는 고기를 구워 먹고 식사시간이 파하기 직전에 이주노조분을 통해 집중단속 얘기를 듣자마자 뭔가가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는 도중 들었던 생각들. 사실 이 한글교실에 참가하기를 결정하면서부터 이어져온 고민과 갈등이었습니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단속행위. 난폭하고 비인도적으로 느껴지지만 체류기간이 끝나고도 머무는 것이 ‘적어도 법적으로는’ 정당하지 않다, 그렇다면 단속은 정당한가? 라고 했을 때 단속 역시 정당하지 못하다는 생각입니다. 단속이 정당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단속 과정에서 ‘그들 역시 법을 어기기 때문’인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미리 고지하고 단속을 한다고 해서 옳게 느껴지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나는 왜 그들의 행동에 반감을 느끼는 것일까?
왜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법을 가지고 고민인가 싶기도 하지만, 이주노동자분들이 계속해서 머물 수 있고 권리를 갖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단지 그분들께 끌리는 인정 때문이라면- 너무 위태로운 것 같습니다. 왜 이런 고민이 드는 걸까요? ‘행동’하는 것이 겁나서 일까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글교실을 하면서 더욱 내가 무엇 때문에 이 일을 하는지, 명확한 신념- 거창하게 신념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분명한 이유가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한 고민을 더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한글교실을 통해서 이러한 갈등과 고민을 뛰어넘어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행진

2009/10/15 21:46 2009/10/15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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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계를 꿈꾸는 대학생들을 위한 "서평 아카이브"

* 아카이브 _특정 장르에 속하는 정보를 모아 둔 정보 창고

전국학생행진의 <서평 아카이브>에서 다른 세계를 꿈꾸는 대학생들을 위한 책을 소개합니다! 디지털 시대가 되었다고 하지만, 서점에 가보면 여전히 새롭게 출판되는 책들은 넘쳐납니다. 이 책의 홍수 속에서 우리에게 다른 세계의 전망을 밝혀줄 책은 무엇일까요? 여러 학교의 필진들이, 교양서, 학술서, 신간소개, 절판되었지만 꼭 읽으면 좋겠는 책들을 간추려 서평 형태로 소개합니다. 매 뉴스레터마다 소개되는 책들을 눈여겨보고, 직접 찾아 읽으면서 대안 세계로 향한 힘찬 한 걸음을 내딛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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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춤을 추는 시대가 아니라
다른 모습도 자연스러울 수 있는 시대를 꿈꾸었던 <프라하의 소녀시대>


같은 땅을 딛고 서있지만 다른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는 전 세계 사람들의 삶은 누구에게나 호기심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그녀들의 삶에 대하여 호기심으로만 바라보는 것을 넘어 인간으로서 연대의 감정을 갖는 사람은 드물다. 작은 남한에서 태어나 경기도 부천시의 작은 동네가 전부인 줄 알았던 어린 시절, 다른 문화 속에서 다른 말을 하며 살아가는 이국 사람들도 모두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사실상 정부가 없고, 교통질서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길거리가 곧 집인 베트남에 갔을 때 이곳이 ‘제 3의 다른 곳’이 아니라 ‘여기도 바로 이 자체로 삶’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바로 내 옆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고 숨쉬고, 먹고, 자고, 이야기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뚜렷한 자아가 형성되기 전 까지 십 수 년 동안 받아온 교육의 힘이란 실로 거대하다. 대한민국에서 초중등 교육을 이수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생각, 국가와 민족에 대한 생각이 비슷비슷하다. 우리는 나와 정반대의 생각을 배우며 자란 소년 소녀들의 삶은 어떠할지 상상할 수 있을까? 아니, 아마도 그러한 삶이 있다는 것부터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나와 다른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마음을 좁게 먹는다. ‘지금’이 아닌 것에 대해서도 가능성을 크게 열어두지 않는다. 돈에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이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돈이 지배하는 세상을 뒤집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어렵다. 오히려 이 세상에 잘 적응하기 10개월짜리 캐나다 어학연수를 다녀온 사람을 만나기가 훨씬 쉽다.

책은 다른 삶을 만나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이다. <프라하의 소녀시대>는 1980년대에 태어나 한국 사회에서 자라온 20대라면 만나보지 못했을 네 여성1)의 삶을 통해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저자의 아버지는 각 나라 공산당의 이론 정보지인 ≪평화와 사회주의 제문제≫의 일본 공산당 대표로 선발되어 가족 모두가 프라하에서 지내게 된다. 그래서 저자는 5년간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에서 수학했다. 일본에 돌아가서도 사춘기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을 잊지 못하던 저자는 1980년대 후반 이후 동구 공산주의 정권의 붕괴를 지켜보면서 친구들이 무사히 살고 있는지 걱정스러워 결국 1995년, 특히 친했던 그리스인 리차, 루마니아인 아냐, 유고슬라비아인 야스나를 찾아 나선다. 그렇게 30년 만에 만난 친구들은 각자 조국의 운명처럼 너무도 다른 날들을 살아가고 있었다.

<프라하의 소녀시대>는 저자와 친구들의 소녀시절 이야기와 현재가 교차되며 등장한다. 저자가 5년간의 프라하 생활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왔을 때 겪었던 공산주의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 간의 차이에 대한 혼란스러움, 그리고 급물살처럼 흘러간 동유럽 친구들의 살아온 날들이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진다. 글의 전개는 논픽션이라는 것을 믿기 어려울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책에서는 공산주의 사회가 어떠한 지 그 어떤 교과서나 영화보다도 실감나게 말해주고 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자란 아이들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란 아이들은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을까?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에 일본에 돌아온 저자가 프라하의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는, 같은 시기, 다른 두 사회를 살아가는 중학생들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우리가 그동안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자유’가 더욱 빛을 발하는 공간이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라 공산주의 사회임을 알 수 있다. 개인의 다양성이 존중되는 곳도 자본주의 사회일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뚱뚱하거나, 키가 작거나, 얼굴에 주근깨가 많은 것도 모두 개인의 다양성이라면, 진정 개인의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는 자본주의 국가인 일본이 아니라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였다. 우리는 단지 화려한 쇼윈도에 진열된 패션상품들에 현혹되어 진정한 인간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법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당시 프라하는 사회주의 계획경제로 인해 상품은 그다지 다양하지 않지만 지금의 남한 사회보다 더욱 다양한 것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곳이었던 것 같다.

<프라하의 소녀시대>에서는 ‘문화’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떠해야 하는지 고민하게끔 한다. 사람이 살아가며 만들어내는 것이 모두 문화인데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문화의 범위는 과연 어느 정도인가. 오늘날 대중적으로 접할 수 있는 문화를 ‘대중문화’라 칭하는데, 이것은 대중적으로 쉽게 접할 수 없는 문화의 영역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프라하에서 저자와 친구들은 사흘에 한 번은 연극이나 오페라, 콘서트에 갔다고 한다. 주말이면 미술관이나 박물관, 전람회에 가는 것이 당연했고. 하지만 2009년의 대한민국에서는 극소수만이 사흘에 한 번 연극이나 오페라를 즐길 수 있을 뿐이다. 사람이 창조하는 모든 것이 문화일 텐데 우리는 지금 문화예술에도 귀천이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너무 쉽게 말하고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던 ‘문화’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부터 던져보자.

글을 맺기 전에 이 책이 픽션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책은 언제나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지만, 책에 등장하는 그/그녀들의 가치관이 결코 ‘억지로’ 주입된 것이 아니라 삶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체득된 것이라는 점이 책 속의 한 줄 한 줄에서 더욱 많은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필연이라고 믿었던 지금 이 곳에서의 삶의 모습이 형체도 알아 볼 수 없게 녹아내리는 얼음동상과도 같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물로 또 다른 멋진 얼음동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저자의 삶을 통해서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책으로 60억 지구인들의 60억 가지 이야기를 모두 느낄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얼마나 좁은 생각 속에서 자라 왔는지를 뜨겁게 고민할 수 있기를 바라며.

ps.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삶을 보기 위해 곧바로 배낭 메고 세계 일주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함께 다른 세상을 배우고, 만들어 갈 ‘소돌프’2)들이 넘쳐날 테니, 그 마주침 속에서 시작하자.

1)  작가가 찾아 떠나는 친구는 세 명이지만 이 과정에서 작가 자신의 삶 또한 엿볼 수 있기 때문에 작가를 포함하여 네 여성이라 하였다.
2) ‘동지’를 뜻하는 체코어. 즉, 혁명가들끼리 서로를 부르는 말인데, 이미 10월 혁명이 반세기가 지난 당시 소련에서 ‘동지’라는 말은 상당히 일상용어로 자리 잡고 있었다. 책 속 저자와 친구들에게도 익숙한 단어.

Posted by 행진

2009/10/15 21:42 2009/10/15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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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황소 2009/10/28 04:47 # M/D Reply Permalink

    제, 제목에 심대한 오타가....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