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호] 이봐요, 그런 건 개그 아니에요.

이봐요, 그런 건 개그 아니에요.

- 개그콘서트 '남성인권보호소'에 대한 쓴소리 -

바야흐로 개그의 시대다. 별로 안 웃긴 내 친구는 ‘웃긴 것도 권력인 것 같아’라고 푸념을 할 정도다. 요즘 사람들은 얼마나 센스가 넘치는지 웬만한 건 전부 개그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정치인들을 욕해도 그냥 안 하고 우스운 별명을 지어주거나 사진을 합성하거나 해서 반드시 웃음의 소재로 삼고야 만다. 점점 살기 팍팍해지니 뭐든지 웃음으로 승화시켜보려는 노력 같은 걸까?

나 또한 개그욕심 충만한 요즘 사람인지라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하는 것들은 기어코 찾아보고야 만다. 요즘 뜨는 개그 코너가 있다고 해서 뭔가 하고 찾아봤다. 모 개그프로에 나오는 ‘남성인권보호위원회’라는 제목의 코너다. 이 코너에서는 연애관계에서 벌어질법한 상황들을 제법 세세하게 묘사한다. 예를 들면, 여자는 생일에 남자에게 명품 백 사달라고 하면서 남자 생일 때는 정성들인 선물이랍시고 (아무 짝에 쓸모없는)십자수를 준다거나, 같이 여행가자고 해놓고 남자가 기름 값 내면 양심적으로 톨게이트 비는 여자가 내야하는 것 아니냐, 여자들은 그 돈 아끼면 살림살이 나아지냐 뭐 이런 내용이다. 사람들이 연애하면서 충분이 겪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저 정도 불만 쯤 이야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근데 잠깐. 물어보고 싶은 게 생긴다. 저기서 무슨 권리를 보장하라는 거지? 여자보다 돈 덜 쓸 권리 말고 여기서 이야기하는 ‘권리’가 뭐지? 그냥 웃고 넘어가라고 하기엔 뭔가 찜찜한 구석이 많아서 그냥은 못 넘기겠다. 아무리 모든게 웃음의 소재가 되는 시대라고 해도 눈에 들어오고 귀에 들리는 1차적인 자극들에 무조건 웃음으로만 반응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 좀 꼬장꼬장해져볼까? 

이 코너는 어떻게 웃음을 유발하는 걸까? 아마도 남녀관계에 있어서 여성에게만 용인되는 것들이 사실은 남성의 ‘권리’를 빼앗고 있단 말에 사람들이 많이 공감을 하는 것 같다. 근데 이런걸 권리라고 말할 수 있는 건가? 제목도 의미심장하다. 남성인권보호위원회. 남자가 데이트 비용을 더 많이 내는 것을 ‘인권침해’라고 하면서 남성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남성들이 가만히 있지 말고 다 같이 일어나서 외쳐야 한다고 선동(?)하기까지 한다. 실제로 코너가 끝날 때쯤에 무대 위의 배우들은 남성 관객들을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고 함께 구호를 외친다. 배우들은 진정한 남녀평등을 이야기하면서 구호를 외치지만 여성이 데이트비용 더 많이 내고 남성이 돈 덜 쓰는 게 평등일까? 개그 프로에 뭘 그런 것까지 바라냐고 하면 할 말 없지만 실제로도 사람들이 남녀평등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데이트비용 문제나 군대문제인걸 보면 대중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는 방송에서 ‘평등’을 이런 식으로 쓴다는 것은 달갑지가 않다. 방송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여기에 사람들이 보내는 반응을 보면 사회가 남녀평등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볼만 할 것 같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불평등을 만드는 것이 무언가 더 요구하는 여성들, 그에 비해 점점 빼앗기고 있는 남성들의 싸움은 아닐 것인데 왜 이것을 소재로 삼는 코미디에는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는 걸까? 남녀평등으로 나아가는 사회라고 하는 우리 사회가 ‘평등’을 어떤 가치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 아닐까 한다.    
 
그냥 웃고 즐기면 되지 따박따박 말대꾸 한다고 짜증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가다간 뭐가 정말로 지켜져야 하는 가치인지를 구분 못하고 감각적으로 재미있는 것들에만 반응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건 정말 무섭지 않은가? 실제로 인터넷으로 아무리 검색을 해봐도 이 코너에 대한 비판이나 불편함에 대한 글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떤 기사들은 풍자로서 손색이 없는 코너라고 하던데 내 생각에 진짜 풍자는 이런게 아닌 것 같다. 진짜 코미디는 사람들이 불만이라고 느끼는 것을 정확히 꼬집어서 웃음으로 만드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 코너는 풍자를 하려는 건지 말장난을 하는 건지 잘 구분이 안 간다. 진지한 풍자를 하려거든 좀 더 신중했으면 한다. 여성들의 권리를 위한 지금까지의 노력들이 왜 남성들의 권리와 부딪히는 방식으로 받아들여졌는지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런 방식의 ‘풍자’는 소용이 없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권리’라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쓰이는 것이, 남성의 권리가 여성의 권리와 대치되는 상황을 묘사하면서 남성들에게 더 이상 빼앗기지 말자며 웃음을 유발하는 방송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너무 열렬한 호응을 보내서 그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순간의 웃음 뒤에 조금의 찜찜함이라도 남아있었다면 함께 이야기해볼만 한 것 아닌가? 인터넷 상에 그 찜찜함을 털어놓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면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 해보자. 도대체 그 찜찜함이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Posted by 행진

2009/10/15 21:49 2009/10/15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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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지환 2009/10/20 11:11 # M/D Reply Permalink

    2008년 9월 10일 결혼정보회사 선우 부설 한국결혼문화연구소의 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일반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훨씬 무거운 데이트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객관적인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남성은 여성보다 더 무거운 데이트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지 근본적인 의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는 남성에게 여성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와 함께, 여성을 보호할 책임을 부여했다는 것은 전국학생행진 게시판을 통해 여러 차례 지적했습니다. 즉 남성이 더 무거운 데이트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남성의 가족부양의 책임과 마찬가지로, 여성주의자들이 ‘가부장제’라 부르는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의 잔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글의 중간에 “배우들은 진정한 남녀평등을 이야기하면서 구호를 외치지만 여성이 데이트 비용 더 많이 내고 남성이 돈 덜 쓰는 게 평등일까?” 라고 이야기하셨는데, 진정한 양성평등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남녀가 데이트 비용을 비롯한 경제적인 책임을 균분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남성에게도 여성들처럼 경제적인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권리가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힘든 코미디 프로그램이기는 하지만, <남성인권보호소>에서 말하는 ‘권리’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어째서 ‘권리’인지 이해를 못한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귀하께서는 남성이 더 무거운 데이트 비용을 부담하는 현실이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시려는 것인가요? 만약 전통적으로 여성이 데이트 비용의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것을 ‘권리’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남성이 전통적으로 가사와 육아를 비롯한 돌봄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것도 ‘권리’가 아니라는 주장도 가능할 것입니다. 전통사회에서의 남성 억압과 여성 억압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문제와 관련해서는, 오히려 양성평등을 주장하는 여성주의자들이 보다 뚜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남성인권보호소>를 보며 언짢아하기에 앞서, 왜 지금껏 남성 혼자 더 무거운 데이트 비용을 부담해왔으며, 어째서 많은 이들이 이를 당연하게 생각해왔는지 근본적인 의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2. 아다리 2009/10/20 20:05 # M/D Reply Permalink

    저또한 한지환씨 의견에 공감합니다. 왜 이러한 코메디가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스스로 자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성 스스로가 자신을 약한존재, 보호받아야할 존재로 만든점은 없는지 , 남성이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한적은 없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진정한 양성평등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으로 평등해야 한다는 점에서 가치있고 존중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찜찜하다고 표현하셨는데. 저희도 여성들이 그러한 말하면 찜찜합니다.

    1. 보다가 2009/10/29 20:31 # M/D Permalink

      저 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남/여의 권리가 충돌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분명히 써있지 않나요? 이런 말 할 수 있겠다고.(두번째 문단에 있습니다) 지금 이 글에서 제기하는 것은 '권리'나 '평등'이라는 것이 어떻게 왜곡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제기하는 것 아닙니다. 군 가산점을 성별 갈등으로 치환하고 데이트 비용을 성별 갈등으로 치환하는게 문제라는 겁니다. 이런 코메디가 왜 나왔는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그런 행동을 긍정하지도 않습니다. 이건 사회적 현상이고 이 원인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원인은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상이 그래왔기 때문이겠죠. 남자들이 좋아한다는 청순이 바로 그거 아니었나요? 이 사회가, 남성들의 시선이 여성들을 그렇게 키워왔겠죠. 평등이나 권리라는 말은 이런 지점에서 사용이 되어야 하는 말 입니다.
      저는 남성들에 의해 보호받길 원하지 않는 여성입니다. 군대에 의해서도 경찰에 의해서도 당신들에 의해서도 보호받길 원하지 않습니다. 단지 서로를 인정하고 함께 살기를 원합니다. 사회의 동등한 공동체로서 말이죠. 당신들이야말로 그럴 준비가 되어 있나요? 무거운걸 드는 여자를 보고, 추운 날씨에도 씩씩한 여자를 보고 '그러고도 여자냐'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었는지 자문해보시길 권합니다.
      아, '여자들이 데이트 비용을 더 물리는건 남성 차별이야'라고 이야기하는 동시에 '예쁜여자가 그런다면 참을 수 있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는지 자문해보기도 권해드리죠.

    2. 한지환 2009/10/30 21:37 # M/D Permalink

      “남성들의 시선이 여성들을 그렇게 키워왔다”고 말씀하셨는데,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 하에서 남녀 모두는 강압적인 성역할만을 요구받아온 피해자임과 동시에 수혜자였으며, 여성이 데이트 비용을 비롯한 경제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것은 분명 그들에게 주어진 ‘면책권’, 즉 권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 하에서 여성이 누렸던 배타적인 권리를 생각하지 않은 채, 여성이 일방적인 피해자였던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절름발이 페미니즘에 근거한 편협한 태도인 것이지요.
      진정한 양성평등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여성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면책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이러한 ‘면책권’을 당연시하고 있으며,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성별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분명한 비판이 가해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인권보호소>가 여기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성별 갈등을 조장하는 것’으로 매도한 전국학생행진 측의 태도는 합리적이지 못한 태도라는 것이 제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아울러 귀하의 말씀처럼 “남성들의 시선이 여성들을 그렇게 키워왔기 때문에” 여성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이라면, 가사와 육아를 비롯한 돌봄 노동과 관련해 남성들이 누려온 ‘면책권’을 논함에 있어, ‘사회로부터 성별 이데올로기를 일방적으로 주입받은 남성들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주장도 성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전통사회에서의 남성 억압과 여성 억압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성별 이데올로기를 비판하셨는데,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전통적인 성별 이데올로기를 포기하지 않은 채 상대 이성(異性)에게 고정적인 성역할만을 강요하는 것은 여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귀하께서는 그러한 성별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스스로 말씀하시지만, 귀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이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여성이 과연 우리 사회에 얼마나 될지 한 번쯤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보아하니 귀하께서도 양성평등 이슈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군요. 시간 나실 때 제가 쓴 에세이「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을 한 번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귀하와는 이야기할 내용이 많을 것 같습니다(http://blog.daum.net/pipaltree/17181029).

    3. 아다리 2009/12/30 14:25 # M/D Permalink

      보다가님의 글을 이제사보는군요. 개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고 하면 변명으로 들릴수밖에 없는 논리의 오류를 펼치시고 계시는데. 이것이 곧 남성=잠재적 성범죄자의 이미지를 덧씌워 버리는 상황인것을 알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자기수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본능입니다. 사회의 동등한 공동체로서 살고싶은것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 글을 비판하는 방향은 아까도 이야기한 이미지를 가지고 호도하는 논조 의 문제 인것입니다. 남성인권보장위원회가 나온이유나 전국학생행진이 이를 비판하는 논조모두 별반 차이가 없는 헐뜯기에 가까운 논조는 색안경을 낀 사람의 눈에 모든것이 그 색깔로 보이는 격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3. 후후 2010/02/16 23:20 # M/D Reply Permalink

    재밌는 토론이군요. 근데 댓글들 달린지가 두달이 다되어가는데 행진은 이에 대한 답을 하지 않으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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