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요, 그런 건 개그 아니에요.
- 개그콘서트 '남성인권보호소'에 대한 쓴소리 -
바야흐로 개그의 시대다. 별로 안 웃긴 내 친구는 ‘웃긴 것도 권력인 것 같아’라고 푸념을 할 정도다. 요즘 사람들은 얼마나 센스가 넘치는지 웬만한 건 전부 개그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정치인들을 욕해도 그냥 안 하고 우스운 별명을 지어주거나 사진을 합성하거나 해서 반드시 웃음의 소재로 삼고야 만다. 점점 살기 팍팍해지니 뭐든지 웃음으로 승화시켜보려는 노력 같은 걸까?
나 또한 개그욕심 충만한 요즘 사람인지라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하는 것들은 기어코 찾아보고야 만다. 요즘 뜨는 개그 코너가 있다고 해서 뭔가 하고 찾아봤다. 모 개그프로에 나오는 ‘남성인권보호위원회’라는 제목의 코너다. 이 코너에서는 연애관계에서 벌어질법한 상황들을 제법 세세하게 묘사한다. 예를 들면, 여자는 생일에 남자에게 명품 백 사달라고 하면서 남자 생일 때는 정성들인 선물이랍시고 (아무 짝에 쓸모없는)십자수를 준다거나, 같이 여행가자고 해놓고 남자가 기름 값 내면 양심적으로 톨게이트 비는 여자가 내야하는 것 아니냐, 여자들은 그 돈 아끼면 살림살이 나아지냐 뭐 이런 내용이다. 사람들이 연애하면서 충분이 겪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저 정도 불만 쯤 이야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근데 잠깐. 물어보고 싶은 게 생긴다. 저기서 무슨 권리를 보장하라는 거지? 여자보다 돈 덜 쓸 권리 말고 여기서 이야기하는 ‘권리’가 뭐지? 그냥 웃고 넘어가라고 하기엔 뭔가 찜찜한 구석이 많아서 그냥은 못 넘기겠다. 아무리 모든게 웃음의 소재가 되는 시대라고 해도 눈에 들어오고 귀에 들리는 1차적인 자극들에 무조건 웃음으로만 반응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 좀 꼬장꼬장해져볼까?
이 코너는 어떻게 웃음을 유발하는 걸까? 아마도 남녀관계에 있어서 여성에게만 용인되는 것들이 사실은 남성의 ‘권리’를 빼앗고 있단 말에 사람들이 많이 공감을 하는 것 같다. 근데 이런걸 권리라고 말할 수 있는 건가? 제목도 의미심장하다. 남성인권보호위원회. 남자가 데이트 비용을 더 많이 내는 것을 ‘인권침해’라고 하면서 남성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남성들이 가만히 있지 말고 다 같이 일어나서 외쳐야 한다고 선동(?)하기까지 한다. 실제로 코너가 끝날 때쯤에 무대 위의 배우들은 남성 관객들을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고 함께 구호를 외친다. 배우들은 진정한 남녀평등을 이야기하면서 구호를 외치지만 여성이 데이트비용 더 많이 내고 남성이 돈 덜 쓰는 게 평등일까? 개그 프로에 뭘 그런 것까지 바라냐고 하면 할 말 없지만 실제로도 사람들이 남녀평등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데이트비용 문제나 군대문제인걸 보면 대중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는 방송에서 ‘평등’을 이런 식으로 쓴다는 것은 달갑지가 않다. 방송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여기에 사람들이 보내는 반응을 보면 사회가 남녀평등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볼만 할 것 같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불평등을 만드는 것이 무언가 더 요구하는 여성들, 그에 비해 점점 빼앗기고 있는 남성들의 싸움은 아닐 것인데 왜 이것을 소재로 삼는 코미디에는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는 걸까? 남녀평등으로 나아가는 사회라고 하는 우리 사회가 ‘평등’을 어떤 가치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 아닐까 한다.
그냥 웃고 즐기면 되지 따박따박 말대꾸 한다고 짜증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가다간 뭐가 정말로 지켜져야 하는 가치인지를 구분 못하고 감각적으로 재미있는 것들에만 반응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건 정말 무섭지 않은가? 실제로 인터넷으로 아무리 검색을 해봐도 이 코너에 대한 비판이나 불편함에 대한 글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떤 기사들은 풍자로서 손색이 없는 코너라고 하던데 내 생각에 진짜 풍자는 이런게 아닌 것 같다. 진짜 코미디는 사람들이 불만이라고 느끼는 것을 정확히 꼬집어서 웃음으로 만드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 코너는 풍자를 하려는 건지 말장난을 하는 건지 잘 구분이 안 간다. 진지한 풍자를 하려거든 좀 더 신중했으면 한다. 여성들의 권리를 위한 지금까지의 노력들이 왜 남성들의 권리와 부딪히는 방식으로 받아들여졌는지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런 방식의 ‘풍자’는 소용이 없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권리’라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쓰이는 것이, 남성의 권리가 여성의 권리와 대치되는 상황을 묘사하면서 남성들에게 더 이상 빼앗기지 말자며 웃음을 유발하는 방송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너무 열렬한 호응을 보내서 그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순간의 웃음 뒤에 조금의 찜찜함이라도 남아있었다면 함께 이야기해볼만 한 것 아닌가? 인터넷 상에 그 찜찜함을 털어놓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면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 해보자. 도대체 그 찜찜함이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Posted by 행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