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한국 자본주의의 미성숙한 기원, 1950년대


1. 들어가며

최근 국방부에서 역사교과서의 일부 내용에 대한 수정을 요구함으로서 논란이 되고 있다. 특히 해방전후와 1950년대의 내용이 많은데, 주로 이승만 정권의 행적; 친일파에 대한 온건적 태도, 미국에 의한 원조경제체제의 성립, 독재정권의 수립 등에 대한 것들이었다. 이는 결국 한반도에서 분단체제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1950년대가 이후의 역사에 어떤 의미로 남느냐는 문제를 담고 있는 것으로, 실은 진보학계와 보수학계의 오래된 논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식민지 잔재의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원조에 의지하지 않고 자립적인 경제체제를 성립할 수 있었는가?’, ‘독재체제를 유지하지 않았다면 한국에서 더 나은 정당 제도를 만들 수 있었는가?’, ‘4. 19와 그 이후의 5.16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등등.

이런 논쟁은 그간 반공주의와 군사독재정권의 강력한 탄압 속에서, 한국사회의 성격이라는 문제와 관련한 투쟁의 장소가 되어왔다. 실로 ‘진보적인’ 역사관을 승인 받기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제 부문에서 투쟁해왔으며, 역사의 숨겨진 부분들을 밝히는 성과들을 거두기도 했다. 1980년대 남한에서 본격적으로 마르크스주의가 부활하기 전까지,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의 장소는 역사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마르크스주의적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역사관 논쟁은 계급투쟁에 미달하는 것이었고, 차라리 제대로 된 자유주의를 만들기 위한 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 논쟁에 담긴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고 해도 말이다.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의 도입과 함께 문민화가 진행되고, 진보적 역사관은 한국사회 안에서 일정한 시민권을 얻으면서 ‘보편적인’ 역사관으로 자리 잡는다. 물론 뿌리 깊은 반공주의 이데올로기가 다양하게 분화되는 - 전통적인 안보논리, 경제성장 이데올로기, 역사의 종말 등 - 양상을 보이지만, 신자유주의적 개혁분파를 비롯한 자유주의자들은 ‘진보적 역사관’을 어느 정도 수용하며 심지어 자신의 정통성으로 삼기도 한다.

우리는 이렇게 역사가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논쟁이 공개적으로 등장하는 이유에 대해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 또한 남한에서의 계급투쟁과 그 이념의 장소는 어느 곳에 위치할 것인지 예측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정국에서 좌파는 어떻게 논쟁에 개입할 수 있는가? 이명박 정권 아래에서 반동적인 공세가 증가하는 것에 비판하면서, ‘진보적’인 역사관에 힘을 실어줘야 하는가? 하지만 이른바 진보적 역사관이 지난 10년간의 인민주의자들의 정통성을 확립하는데 이용한 이래, 문제는 현재 논쟁의 구도를 뛰어넘어 과학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다. 즉 세 가지 층위의 문제를 다시 한 번 제기하면서, 계급투쟁 관점의 역사를 복원시킬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는 현재 논쟁이 되고 있는 이승만 정권시기, 특히 1953년에서 1961년까지의 역사를 다룰 것이다. 우리는 역사적 좌파의 관점에서 무엇을 중점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며, 현재의 정세에 개입할 수 있는 단초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현대사에서 1950년대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몇몇 키워드를 중심으로 구성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는 인구성장이 가속화되는 베이비 붐의 시대였고, 전 근대적 형태의 많은 정치 사건들이 터지는 시기였으며,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는 시기였으며, 미국이 한국의 제 1동맹으로 부상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는 모든 부문에서 혼란한 시기였으며, 반공 이데올로기가 제 1의 가치로 떠오른 시기였으며, 삼백산업의 시기였으며, 4.19가 일어나는 시기이기도 했다. 한국전쟁이라는 커다란 단절이 진행된 이후 1950년대는, 각종 사건들의 나열로 기억될 만큼 별 다른 특별하고 중심적인 쟁점이 없는 시기였다. 물론 1950년대에 대한 분석이 이런 사실을 한 번 확인하는 것으로 끝날 수는 없다. 어떤 측면들이 결합하여 우리가 기억하는 1950년대가 되었는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분석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그것은 취약했던 계급투쟁,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모두 자신의 독자적인 전망과 이념을 가지지 못한 데에서 유래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시대가 가지고 있는 미성숙함, 이후 한국 현대사의 불안정한 기원이라는 조건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2. 자본주의의 황금기와 한국

2차 세계전쟁 이후 자본주의 세계체계는 미국에 의한 새판짜기가 진행되는 시기이다. 브레튼우즈 체제의 확립과 전 세계적 고도금융에 대한 통제, 미국식 자유주의가 전 세계적 보편이상으로 성립되는 과정에서 미국 헤게모니가 성립되어 간다. 전쟁 직후부터 시작된 미국 헤게모니에 의한 새판짜기는 1950년대를 통해 확립되어 가고, 세계자본주의의 황금기를 주도한다. 거래비용의 내부화를 특징으로 하는 법인 자본주의와 대량생산-대량소비 체제의 세계화는 황금기를 주도하였고, 이를 가능하게 했던 가장 큰 원인은 한국전쟁과 냉전의 성립이었다. 양차 세계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미국은 세계의 많은 돈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내부적 팽창이라는 특징으로 인해 세계적인 포섭을 진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1949년의 중국혁명과 뒤이은 한국전쟁의 발발은, 세계적 통치성과 포섭이라는 문제를 주요한 쟁점으로 떠오르게 한다. 이에 모든 나라에 대해서 일종의 유효수요를 창출하기 위해서, 중심부에서의 마샬플랜과 주변부 국가들에서의 원조로 특징지어지는 전 세계적 뉴딜을 실시하게 된다. 이를 통해 미국이 보유하고 있던 달러를 방출하고,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으로 자리 잡는다.

전 세계적 뉴딜을 통해서 미국 헤게모니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 자본주의 체계의 특징이 만들어 진다. 그것은 3가지 정도의 특징으로 이야기될 수 있다. 우선 영국헤게모니-제국주의의 실패가 고도금융 때문이라는 판단 때문에, GATT의 틀 속에서 전 세계적 케인즈주의가 실시된다. 고도금융에 대한 통제는 민족국가의 경제적 자율성을 보호하는 조치로 연결되었고, 국가간 통제 아래 자유무역의 원리를 종속시켰다. 물질적 확장이라는 1950년대의 조건은 상대적인 자율성을 가진 국가의 정치체계-경제정책의 실현을 가능하게 했고, 이로부터 이 시기의 두 번째 특징이 도출될 수 있다. 그것은 제국주의 시대가 종료된 이후에 민족국가의 틀이 강화되고, 각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는 작업이 실시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민족주의의 확립과정 - 공동의 역사-언어-문화의 창출 - 임과 동시에, 민족의 형성에 있어서 자유주의가 변형-수용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이 시기의 민족국가 성립이라는 과정이 미국 헤게모니의 보편성 획득이라는 목적에 종속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법인자본주의 모델의 보편적-이상적 표상화라는 작업에 기여한다. 세 번째 특징은 사회복지국가의 모델이 등장하여 정부가 국민들의 일반적 이익에 대한, 보편적인 담지자로 설정되는 과정이다. 이는 케인즈주의적 유효수요의 창출이라는 모델에 바탕을 둔 것으로, 서유럽에서의 사회민주주의와 주변부 국가에서의 발전주의 모델로 분화된다. 이런 세 가지 특징은 미국식 자유주의의 주된 동력이 되었다.

 

우리는 미국 헤게모니의 특징을 살피는 가운데, 이 시기 한국이 세계체계에서 차지했던 위치에 대해 평가할 수 있다. 해방 직후 발전주의적 국가수립이라는 전략이 본격화되지 않은 가운데, 한국전쟁의 발발은 한국이 대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한 최전선으로서 전략적 위치를 제고시켜주게 되었다. 1950년대에는 한국에 대한 전략적 포섭을 진행해야 했지만, 이런 목표에 걸맞는 안정적인 정책; 수출지향 혹은 수입대체 공업화와 같은 명확한 발전전망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특히 자본주의의 세계적 분업체계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지가 애매한 상황에서, 발전주의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불하-원조 정책은 필수재-소비재를 중심으로 ‘생존’을 유지하는 수준에 머물게 된다. 국가 주도의 발전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못하는 것은, 동아시아 세계체계에 한국이 편입되지 못한 조건과도 관련이 된다. 냉전의 시작과 함께 미국은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체계의 성립, 그를 통한 지역 파트너의 형성이 동아시아에 대한 주된 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식민지 역사와 반일-반공을 기초로 하는 이승만 정권의 정통성 확립의 문제는, 한국이 자본주의 세계체계에서 자신의 포지션을 확정짓는 시간을 지연시킨다.

한국에서 발전주의적 전략이 본격화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를 추진하기 위한 국가의 통치성이 확립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은 자유주의/민족주의/반공주의라는 자본주의적 통치성에 걸맞는 이념을 수용했지만, 이를 통해 민중들을 포섭할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는 전쟁으로 인해 각종 산업기반이 파괴된 문제와 함께, 통치성을 유지하고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할 수 있는 국가장치가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통치를 유지하기 위한 지배계급의 블록이 가지는 애매성, 혹은 일국에서 자본주의적 시초축적을 위한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문제이기도 했다. 따라서 세계체계에서 한국의 위치에 걸맞게 자유주의를 수용하는 양태와 지배계급의 이념을 확립하는 것이, 미국과 국내파트너인 지배계급의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1950년대는 발전주의적 통치를 위한 조건을 만들어가는 한국 자본주의의 기원이 되는 시기이지만, 여러 가지 애매함으로 인해 불안정성과 모호성을 내재하게 된다.


3. ‘대한민국’의 성립과 ‘정치’의 불안정

위와 같은 조건으로 인하여 이 시기에 당면한 문제는, 결국 국가장치-국가권력의 성립을 통해 국내적 통치성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민족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는 작업이었고, 강력한 국가장치와 이데올로기를 통해 구성원을 민족으로서 통합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는 1) 발전주의를 추동할 강력한 정권의 확립문제 2) 국가장치, 특히 폭력적 국가장치의 성립 3) 자유주의-민족주의를 보충하는 이데올로기로서 반공주의의 성립이라는 3가지 차원으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대한민국’을 성립하는 과제를 떠맡은 이런 문제들은, 하지만 당시 ‘한국’이 가지고 있었던 불안정한 조건들로 인해 무능함과 허약함을 드러낸다.

우선 해방 직후의 혁명적인 정세가 사그라진 이후에, 정치는 이승만을 위시한 자유당 정권 / 한국 민주당을 비롯한 군소정당의 분별정립으로 축소된다. 원조경제체계를 벗어나 강력한 발전주의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강력한 독재정권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자유당은 1948년 반민 특위법의 재정/공포를 시작으로 각종 정치 파동을 일으켜 3선까지 성공한다. 이와 함께 이승만을 국부로 하는 가족국가화 전략 등이 실시되기도 하지만, 결코 그에 부합하는 헤게모니를 확립하지는 못한다. 이미 대한민국의 건국 이전에 경찰과 치안경비대, 그리고 관료제와 사법기구와 같은 조직들이 식민지 시기의 국가장치들을 이어받아 만들어진다. 그리고 당시 세출구성의 평균 40%이상이 국방비에 쓰일 정도로, 대 반공군사기지를 위한 군대라는 조직역시 강화된다. 이러한 장치들에는 식민지 시기부터 활동하던 친일파들이 대거 포함되었고, 반공주의와 같은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것이 주된 업무가 된다. 하지만 이런 국가장치의 정당성과 기능은 허약하였으며,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시작으로 정치깡패와 각종 원외단체가 동원되는 상황이다. 1950년대를 특징짓는 또 다른 축인 사회적 소요와 불안정은, 결국 국가장치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유래한다. 반공주의는 당시 전체 자유주의 진영에서 공유하고 있던 이데올로기로서, 특히 식민지에서 해방된 주변부 국가들에서는 일종의 민족 정체성으로 승격된다. 한국에서는 1949년 11월에 국가보안법이 통과됨으로서 본격적으로 그 기틀을 마련한 반공주의는, 한국전쟁과 거창민중학살(1951. 2)과 같은 집단적인 기억들을 통해 민중들에게 체화된다. 반공 이데올로기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보충하는 역할과 함께, 좌파를 비인간으로 취급하는 형상화 작업으로 ‘국민’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해방직후와 1950년대에 걸쳐서 반공주의는 강력하게 작동했지만, 아직 세련되지 않은 극단적인 폭력을 통해서만 유지될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들로 인해 이승만 정권이 집권하고 있던 1950년대에는, 정치적 불안정의 지표가 되는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한국의 國父를 표방했던 이승만은 정권을 잡은 이후에, 전국의 유지ㆍ반공인사와 친일파들을 중심으로 자유당을 결성한다. 이에 토지지주의 기반을 가지는 한국 민주당이 야당으로서 기능하지만, 둘의 이념적 차이와 계급기반은 동일한 것이었다. 하지만 통치성을 마련하기 위한 지배계급들의 연합전략들은, 계속해서 정치적인 분쟁을 가져온다. 우선 한국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져있던 1952년은 2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해였다.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접선거제 아래에서 지지기반이 약했던 이승만은 재선될 가능성이 적었지만, 이승만은 공화민정회ㆍ대한국민회ㆍ대한노동조합총연맹ㆍ농민조합총연맹ㆍ부인회ㆍ대한청년단 등의 어용단체를 만들어 자유당을 발족시켰다. 그 후 이들의 감시와 주도 아래에서 시/읍/면의회 위원선거를 하여 지방의회를 장악하고, 1952년 2월 대통령 직선제를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한다. 지방 의원을 동원하여 국회를 해산하라는 데모를 조직하고, 백골단/땃벌떼 등과 우파 깡패들을 동원해 야당 국회의원을 위협하고 부산에 계엄령을 내린다. 7월 4일 이승만은 경찰과 군으로 국회를 포위하고 직선제 개헌안을 기립표결로 통과시키고, 그 해 8월에 이승만은 2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54년에는 정치의 불안정을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사건인, 사사오입개헌이 발생한다. 그해 5월에 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이 압승하여 개헌안을 통과하는데 필요한 국회의원을 확보하자 이승만은 장기집권에 도전하였다. 1954년 9월 국회에서 3선 제한 조항을 철폐할 것을 핵심으로 하는 개헌안을 제출하였지만, 표결 결과 재적 203석 가운데 135표의 찬성에 그침으로써 개헌선인 136표에서 한 표가 모자라 부결되었다. 이틀 뒤에 열린 국회본회인 135.33에서 사사오입하면 135이므로 개헌안은 통과되었다고 선언하였고, 무리한 개헌으로 이승만 정권의 입지는 약화된다. 1956년 치러진 정/부통령 선거는 전국 곳곳에서 폭력이 끊이지 않고 대구에서는 개표가 중단되는 등 험악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이 선거에서 이승만이 당선되었지만 대통령 후보로 나선 조봉암은 투표자의 약 30%의 지지를 받으면서 이승만과 자유당을 긴장시켰다. 조봉암은 평화통일론을 주장하면서 사회적 민주주의를 내걸면서 반공이데올로기와 무력통일론에 대항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956년 진보당을 창당하였다. 하지만 이에 위기를 느낀 이승만은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국시에 어긋나며 조봉암이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그를 사형시켰다.

정치의 불안정이 지속되는 조건은 국내적 통치성을 확립하려는 지배계급의 기획이 관철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성립하고 세계체계에 편입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려고 했지만, 지배계급의 통치를 담당하는 국가장치-권력의 기능은 너무나 약했다. 하지만 이런 불안정성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는 한국 자본주의와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의 기원이 되는 시기로 평가할 수 있다. 지배계급의 정치를 위해서 국시로 승격되는 반공 이데올로기는, 이후 체제경쟁이라는 요소가 추가되면서 성장을 위한 조건을 변한다. 즉 반공 이데올로기는 ‘정치를 위한 것’에서 ‘경제를 위한 것’으로 전환되면서, 더불어 불안정 했던 통치성이 강화되는 조건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이 두 가지는 다르지 않다. 오히려 자본제 생산양식에 있어서 정치는 경제의 타자라는 말을 그대로 증명하는 것이, 반공 이데올로기의 성립과 그 전화라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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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시초축적의 시기

1950년대에 부족하나마 국가장치의 기능이 시작되고,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각종 이데올로기들이 확립되어 대한민국이 성립된다. 국가의 경제정책은 이 시기부터 시작되고 ‘폭력과 강제’를 통한 자본주의의 시초축적이 시작된다. 물론 한국에서 자본주의의 본원적 축적이 진행된 시기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을 수 있다. 조선 시대부터 자본주의로의 길을 향해 나아갔다는 자본주의 맹아론‘이나 아직도 근대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일부 주장을 제외하더라도,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 경영을 위해 실시한 정책들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이냐는 논쟁이 남는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을 이야기하는 세력들이 뉴 라이트 계열의 이론가들이라고 할지라도, 시초축적의 시기에 대한 규정은 역사를 바라보는데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 논쟁은 다루지 않고 1950년대를 미국 헤게모니의 세계체계에 편입되는 시기로서, 자본주의를 담지하는 새로운 계층이 수립하고 자본주의적 착취관계가 확대되는 과정, 생산자계층이 생산수단으로부터 멀어지는 과정 등을 중점적으로 보게 될 것이다.

1950년 4월에 실시된 농지개혁은 시초축적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농지개혁은 비록 대지주와 유산자의 이해관계에 맞춰 유상몰수/유상분배의 방법으로 진행되었지만, 이는 통치 파트너로서 일시적으로 지주계급을 보호하였던 것에 불과하였다. 지주들은 농지개혁을 기정사실화하고 농지방매를 서두르면서, 1945년에서 50년 사이에 이미 50% 이상이 싼 가격에 방매되었다. 유상분배를 통해 분배받았던 지가증권은 전쟁으로 인해 헐값에 팔아넘기는 경우가 많았고, 이를 통해 자본가 계층으로 전환했던 사례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농지개혁을 통해서 정권은 민중들의 토지에 대한 열망을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었지만, 평년작의 30%을 5년간 내야했다. 또한 전쟁으로 농업생산이 떨어진 상황에서 정부가 실시한 임시토지수득세법으로 인해, 농민들은 연간 수확량 가운데 절반 가까이를 착취당했다. 전쟁 동안 연간 100%가 넘게 물가가 오르는 격심한 인플레이션은 전체 물가지수를 낮출 것을 요구받았고, 이러한 가운데 미국에 의한 잉여농산물의 원조와 저곡가 정책이 실시된다. 이에 더해 월 10%를 넘기도 했던 사적 대부 또한 지주-소작인을 모두 붕괴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소작농은 도시의 잉여인구 층으로 지주는 전문직 등으로 전화하였다. 이처럼 농지개혁과 한국전쟁이라는 계기는 농촌에 기반을 두고 있던 세력들이 몰락하고, 발전주의적 공업화를 이루기 위한 계층들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1945년부터 61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31억 달러에 달했던 미국의 원조는, 지주-소작인의 몰락을 대처하는 새로운 계급을 형성하는 계기가 된다. 미국의 경제원조물자는 대부분 삼백공업(면/설탕/밀가루)으로 특징지어지는 소비재 산업의 원료였고, 이를 팔아 획득한 대충자금과 일제가 남기고 간 귀속재산들의 불하는 초기 독점재벌의 성장을 가속화한다. 이에 더해 경제부흥책의 일환으로 제시되었던 총 세출 가운데 31.6%에 달했던 재정투융자와 저환율-저금리 등은 이를 뒷받침했다. 특히 1953년에 창설된 한국산업은행은 산업 부흥 국채를 발행하였고, 이를 통해 대충 자금의 민간 융자 총액 중에서 산업은행을 통한 융자가 전체 75%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최저 3%에서 최고 18.25%에 이르렀던 은행에 의한 금리는 당시 인플레이션 율 보다 낮은 것이었기 때문에, 독점재벌들이 이를 특혜적으로 제공받을 수 있었던 상황은 그 자체로 자본축적에 유리한 것이었다. 국가에 의한 시초축적으로 인해 50년대 15대 재벌들은 총자본 축적을 28배 증가시킬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자금을 자유당의 정치자금으로 헌납하는 등 커넥션을 만들어 간다.

물론 이 시기에 형성된 독점자본이 그 이후 발전주의를 담당하는 세력으로 영속적으로 기능하거나, 세계 자본주의 체계에서 일정한 의미 있는 위치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당시의 원조가 한국을 대반공기지로 만들기 위한 임시적 성격을 띠는 것과 함께, 기본적으로 당시의 국가장치가 온전하게 기능하지 못하는 ‘정치적 불안정’이라는 상황 때문이었다. 그리고 농촌을 기반으로 하던 계층들이 몰락하고, 광범위한 과잉인구 층을 형성하였지만 이들을 포섭하고 규율할 수 있는 노동력 관리 체계 등이 확립되어 있지도 못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미국의 원조가 대폭 축소된 57년의 상황은, 불안정성을 가중 시키며 한국경제를 불황에 빠져들게 했다. 국가의 초긴축정책이라는 상황으로 인해 대다수의 중소자본 역시 몰락하였고, 1960년에는 총 실업률이 34.2%에 이르는 상황이었다. 당시 노동자 평균임금은 2만 153환이었으나 세대 당 생계비는 4만 509환이 되지 않는 상황, 원조 감소로 각종 간접세의 비중이 크게 늘어난 상황은 대중들의 불만을 자극하였다.

이처럼 1950년대는 이후 자본주의를 담지하는 새로운 계층과 기반을 형성하였고, 국가에 의한 경제정책이 시작되어 발전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놓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요인들이 발전주의를 위한 체계적이고 확고한 전략으로 자리 잡은 것은 아니었고, 일종의 실험기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후 더욱 강력한 국가가 완성되어 가고, 반공 이데올로기의 보충물로서 경제성장 이데올로기가 체계화되는 과정에 이르러서야 발전주의의 본격적인 길이 열린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950년대는 말 그대로, 축적을 위한 시초의 시기로 이해하자.


5. 계급투쟁의 지형

1950년대 후반의 일시적인 경제불황과 취약했던 국가장치의 조건 및 정치적 불안정, 그리고 민중들에 대한 체계적인 포섭전략이 부재했던 상황은 4. 19 항쟁이라는 역동적인 상황을 낳는다. 1960년 2. 28 대구시위, 3. 15 부정선거와 마산 봉기, 그 후 김주열 열사의 죽음은 대거 민중들이 참여하는 4. 19 항쟁을 가져온다. 이 결과로 4월 26일 이승만 정권은 하야를 선언하고, 그 후 장면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그 후 혁명적 정치의 부활이라는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고, 장면 정권 아래에서 혼란한 정국이 이어지게 된다. 이런 정세로 인해 결과는 박정희와 군부정권에 의한 5. 16 군사쿠데타로 마무리 되고, 본격적으로 발전주의를 향한 길을 걷게 된다. 이는 1950년대의 계급투쟁 지형에서 유래한다.

이 시기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모두 취약했던 시기로, 미국에 의한 폭력적인 방식으로 국가가 성립되고 한국전쟁이 발발한 상황이 사후적으로 나타난 결과라고 분석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이 시기는 사실상 계급투쟁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로, 결국 역사가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이 없던 시기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배계급은 부족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조직적 기반을 보충하기 위해, 정치깡패 등의 폭력적 ‘비’국가 장치를 통해 반공 이데올로기를 무조건 유포시켰다. 그리고 한국 전쟁과 좌파에 대한 극단적인 색출작업은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의 토대를 잠식했고, 피지배계급의 정치를 위한 조직들은 모두 붕괴하였다. 따라서 사실상 그 기원이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 민주당과 같은 야당세력이 대안세력으로 인식되고, 몇몇 정쟁들에서 드러났던 쟁점이 계급투쟁의 역사를 대처한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선전을 했던 조봉암의 진보당은, 유럽식 모델과 제 3세계적 발전주의 모델을 혼합한 변형된 ‘사회민주주의’를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역시 혁명적 정치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고, 이마저도 극단적 반공주의 아래에서 1959년 조봉암의 사형사건으로 마무리된다. 이후 몇몇 ‘혁신정당’ 들이 자유당-민주당의 북진통일이데올로기에 대항해, 평화통일론을 중심으로 등장하지만 5. 16으로 인해 모두 몰락하고 만다.

결국 사회운동을 위한 이념적 토대와 사회적/조직적 기반들이 모두 부재했다. 또한 시초축적이 진행되고 발전주의적 길 또한 미약했던 이 시기는, 경제적 착취 관계 아래에서 '구조적 힘‘에 기반한 초기 단계의 계급투쟁 역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결국 정치-경제-운동의 불완전성이라는 조건들이 이 당시의 역사를 과소결정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해방전후의 시기에 폭발적인 계급투쟁을 이끌었던 세력들, 빨치산 잔당/학살자 유가족/전향한 노동당원 등이 이 시기에 어떤 식으로 존재했는지는 쟁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 직후의 시기인 1960년대에 통일혁명당/인민혁명당 등 지하조직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혁명세력이 등장하고, 낮은 수준이나마 마르크스주의가 유통되었던 상황은 무엇에 기반 했는지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1950년대는 이런 활동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고, 공개적인 수준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들은 평화통일론을 중심으로 하는 논의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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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모든 것이 미성숙했던 시기로서 1950년대는, 세계 자본주의 체계에서 한국의 위치도 지배계급의 헤게모니적 통치성도 계급투쟁의 이념도 불안정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또한 이 시기는 불완전하나마 한국 자본주의의 기원이 되는 시기로서,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발전주의의 초석을 닦아 놓는 시기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반공주의 이데올로기가 정치적으로 표출되면서 그 타자로서 경제성장 이데올로기가 내포될 가능성, 그리고 주요 지배계급의 분파로서 지주계층이 몰락하고 자본가 계층이 떠오르는 것, 국가장치가 성립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는 경제정책들이 실시되는 것이 그 가능성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가능성들은 미성숙하게나마 한국 자본주의-자유주의의 기원으로 1950년대를 자리 잡게 한다.

Posted by 행진

2008/09/30 15:30 2008/09/30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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