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간사] 신자유주의는 종말 하는가?

- 금융대란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 -

 

사 속에서 2008년 9월은 어떤 식으로 기억될까요? 세계에서 투자은행 4위인 리먼 브라더스의 붕괴, 메릴린치의 뱅크오브아메리카(BOA)매각, 그 전의 페니메이와 프리디맥의 공적 자금 투입, 최대 보험회사인 AIG의 위기설. 거의 100년이 가까운 전통을 지닌 금융자본들의 몰락은 전 세계의 경제를 요동치게 만들었고, 이는 약 81년전 대공황이라는 공포를 다시 한번 상기시켰습니다. 그리고 금융자본들의 몰락을 지켜볼 수 없었던 미국당국은, 막대한 규모의 공적자금을 투입하여 금융자본을 ‘국유화’하고 매각을 알선했습니다.

러한 현상을 두고 일각에서는 이제 신자유주의가 붕괴하고, 케인즈주의가 부활한 것이 아니냐는 호들갑을 떨고 있습니다. 국가에 의한 공적자금의 투입과 국유화는, 시장만능주의를 신봉했던 신자유주의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강조했듯이 국가와 시장을 나누고, 어느 쪽에 힘의 비중이 더 실리는지를 살펴보는 것 자체는 정세분석에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실상 시장만능주의의 신자유주의 시대였다고 해도, 시장의 필수불가결한 타자로서 국가는 민중들의 불만을 관리하고 탄압해왔습니다. 금융우위의 축적구조로서 신자유주의의 그 본질은, 오히려 국가에 의한 공적자금의 투입을 계기로 더욱 선명해졌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습니다.

러나 현재의 정세는 운동주체들에게 구체적인 정세 분석에 입각한, 구체적인 전술과 전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2000년을 관통해왔던 ‘금융위기와 대안좌파의 과소결정’이라는 정세 속에서, 현재의 비가역적인 금융위기는 야만의 도래를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현재의 정세가 신자유주의의 종언이다, 아니다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맨 처음에 던졌던 질문, 2008년 9월을 역사의 긴 맥락에서 바라볼 때에만 이를 정확히 이야기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투쟁 속에서 실천하는 것만이, 정세에 대한 실천적 분석을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가역적인 정세 속에서 운동주체들이 살아가는 데, 비가역적인 정세에서 쓰여진 18호 뉴스레터가 자그마한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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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호 뉴스레터’ 이렇게 활용합시다!

[교육분석 1]은 현재 금융자본들이 줄줄이 도산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무엇을 중점적으로 볼지를 다룬 내용입니다. 특히 문제의 주범인 파생상품에 대한 분석을 담고 있습니다. [교육분석 2]에서는 지배계급의 반격이 가장 노골적으로 나타나는, 교육 구조조정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일어나는 구조조정을 중심으로 핵심적으로 보아야 할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기획연재]는 ‘한국현대사를 만나다_1950년대’입니다. 1950년대의 상황을 분석할 수 있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특히 반공이데올로기와 지배계급의 성립이라는 쟁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보고/입장]은 성신여대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것입니다. 보고를 읽고 쟁점들을 다시 생각하면서, 성신여대에서의 투쟁승리가 다른 비정규직 투쟁에도 확산되기를 바랍니다. [성명]은 전쟁기지 확장이 진행되고 있는 경기도 파주시 무건리의 투쟁에 대한 내용입니다. 군사세계화를 확산하는 현재의 정세에 맞서 싸우자는 결의를 다져 나갑시다!

예정되었던 것 보다 또 발간이 늦어졌습니다.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입장을 내기가 쉽지 않은 부분들이 있었고, 신중을 기하는 작업들이 뉴스레터 발행 연기로 이어져 죄송합니다. 더욱 기민하고 올바른 입장을 내기 위해 언제나 노력하겠습니다.

Posted by 행진

2008/09/30 15:48 2008/09/30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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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분석] 금융위기는 어디에서 도래했는가?



한 시기가 마무리되려 하고 있다. 신호는 몇 년 전부터 있어 왔지만, 최근의 경보음은 그 어느 때보다 컸다. 80년 남짓한 미국 헤게모니의 끝자락에 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전보다는 훨씬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미 정부의 7000억 달러라는 공적자금 투입을 골자로 한 구제금융안이 현실화되면 위기가 봉합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지만, 아무도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진 않다. 이러한 사상 초유의 위기는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가? 


1. 신자유주의의 도래

신자유주의는 전후 세계를 지배한 경제 정책이었던 케인스주의와 그를 뒷받침하는 브레튼우즈 체제가 해체되면서부터 등장한다. 1929년 미국 증시를 폭락시키고 이후 대공황을 불러온 금융자본을 억압하기 위해 미국은 1933년 글래스-스티걸 법을 제정하여 은행, 증권, 보험 등 금융업종간의 칸막이를 쳤다. 특히 고객 예금을 가진 상업은행이 위험이 큰 투자은행의 업무를 하지 못하게 한 것이 핵심이다. 또한 세계2차대전 이후에 케인스주의는 저금리와 완만한 인플레이션을 통해 금융의 이익을 축소하고, 금융자본의 국제 이동을 막았다. 산업자본으로의 투자와 소비를 촉진하기 위한 재정적자 정책 또한 이루어졌다. 세계적인 화폐제도로는 금-달러 본위제와 고정환율제가 유지되었는데, 이를 약속한 것이 1944년의 브레튼우즈 협정이다.
금융 억압, 부채경제를 특징으로 한 케인스주의 정책이 효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법인자본주의가 이윤율을 회복하고, 호황기에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이윤율은 1965년에 정점을 도달, 이후 점차 하락하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마셜플랜과 한국 ·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달러를 마구 찍어낸 결과, 스스로 약속했던 금-달러 본위제 (35달러를 금1온스로 바꾸어주겠다는 약속)를 지키지 못하고 1971년 미국 대통령 닉슨은 금창구를 폐쇄한다.

번영의 시대에 기여했던 원칙인 케인스주의가 70년대의 위기를 막아내지 못하자 이전부터 케인스주의를 비판해왔던, 금융자본을 뒷받침하는 이론들이 힘을 얻는다. 금융자본은 헤게모니를 다시 찾아오려 한 것은 물론이다. 결국 1979년, ‘불의의 일격’ 또는 ‘볼커의 반혁명’ 이라 불리는 사상최대의 금리인상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금리 인상으로 찾아온 금융 자본의 이익 뒤에는 남미의 외채위기를 시작으로 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위기가 뒤따라 왔다.

1980년 글래스-스티걸 법에도 변화가 오고, 규제는 점점 완화된다. 투자은행들은 막대한 차입자금을 첨단 금융상품에 투자해 천문학적 수익을 거뒀고, 이들이 벌어들인 돈은 세계화폐로서의 달러의 지위를 지탱해주었다. 미국 내에서도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어서 간간이 규제 강화 목소리가 제기됐으나 이내 묻히고 말았다. 90년대 클린턴 대통령은 금융 규제를 더 풀었다. 유럽의 은행 겸업화 추세에 뒤쳐지고 있다는 비판에 99년 '그램 리치 브릴리'법을 만들어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일부 겸업하도록 허용했다. 금융자본은 점점 더 세계 곳곳에 깊숙이 침투해갔다. 



2. 파생금융상품

글래스-스티걸 법에 변화가 오기도 전에, 브레튼 우즈 체제가 붕괴하고 고정환율제에서 변동환율제로 국제화폐제도가 변하자 ‘파생금융상품’ 이라는 것이 등장했다. 파생금융상품은 말 그대로 외환·예금·채권·주식 등과 같은 기초자산으로부터 파생된 금융상품을 말한다. 변동환율제로 전환되면서 불안정성이 심화되자 환차손(환율의 변동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손해. 환율이 오르면 수입 회사가 손해를 보고, 환율이 내리면 수출 회사가 손해를 입는다.)을 피하기 위하여 1972년 미국에서 처음 도입되었다.

파생금융상품은 그 종류도 매우 많을뿐더러, 대표적인 상품인 선물(future)·옵션(option)·스왑(swap) 등이 있는데, 이들 파생상품을 대상으로 하는 선물 옵션, 스왑 선물, 스왑 옵션 등 2차 파생상품, 또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3차 파생상품 등, 말 그대로 계속 파생되는 것이 그 특징이다. 모든 파생금융상품을 다룰 수도 없으니, 최근의 위기를 파악하는데 필요한 파생금융상품에 대해 간단히 보도록 하자. 여기에서는 ‘신용파생상품(CDS와 CDO)’과 ‘옵션’ 대해서 보면서 위기를 추적해 보겠다.


- 신용 파생상품

신용 파생상품(credit derivatives)은 점점 더 복잡해진 금융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며, 미국발 위기의 뇌관이었다고 이야기 되고 있다. 신용 파생상품은 본질적으로 대출에 대한 보험처럼 특정 기업의 신용도에 배팅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기본형이 있는데, 바로 신용디폴트 스왑(CDS; Credit Default Swap)과 부채담보부 증권(CDO; 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이다.

먼저 CDO에 대해 보자. 표준적인 CDO는 은행 등 금융회사가 특별목적회사에 대출이나 채권 등 채권증서를 팔고, 특별목적회사는 그것을 쪼갠 뒤 각 조각들과 연계된 증권을 발행하는 방식을 취한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연쇄구조를 파악하려면 이 합성 CDO가 무엇인지에 대해 알면 된다. 메릴린치나 리먼 브라더스, 베어스턴스 등의 투자은행들과 시티그룹, BoA 등 거대 상업은행의 투자은행 자회사들은 주택융자 전문회사나 저축금융기관, 상업은행 등으로부터 주택융자를 사들여 그것을 새로운 증권인 MBS(주택담보증권)로 전환시켰다.

이를 부동산의 ’증권화’ (securitization, 채권과 부동산 등을 담보로 새로운 증권을 발행하는 것)라고 부른다. 투자은행들이 증권화과정에서 막대한 수수료 수입을 챙겼음은 물론이다. 앞서 말했지만 파생상품은 2,3차로 파생되는 것이 특징이다. 증권화 과정 또한 같은 길을 걷는다. 투자은행들은 1차 증권화 과정에서 발행된 MBS에 카드론, 자동차론, 기업대출, 대학생 학자금론 등을 담보로 발행된 다른 증권을 혼합하여 새로 합성 CDO를 만든다.

1970년대부터 현대 금융시장의 발전 속도를 따라잡기를 포기한 규제당국은 금융회사들이 어떤 증권을 사거나 팔 수 있는지에 대해 일일이 결정을 내리고 그런 결정을 규정화하는 대신 ‘신용등급에 의존하는 법규’를 만들었는데, 구체적인 결정을 내리는 일을 신용평가회사들에게 넘긴 것이다. 이렇게 권력을 넘겨받은 무디스, 스탠더드앤푸어스 등의 국제 신용평가회사는 CDO의 조각들을 고평가해 주었다.

그러나 CDO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쓰인 컴퓨터 모델은 그 바탕이 되는 부채보다 CDO의 조각들을 더 높게 평가하는 것을 복잡한 방식으로 정당화하는 것일 뿐이며, 이런 컴퓨터 모델들 대부분은 사실 CDO거래를 하는 은행들 스스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미국에서 어느 신용평가회사 직원이 이런 모델의 세부적인 내막을 알게 되면, CDO 거래를 하는 은행이 많은 돈을 주고 그를 스카우트 해갔다. 그래도 신용평가회사들은 자신들이 돈을 버는데 방해받지 않으니 이러한 부분에 대해 전혀 손을 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CDS에 대해서 보자. 가장 단순한 형태의 CDS는 대출과 보험을 결합시킨 것으로, 예를 들어 A은행이 B회사에 제공한 대출을 놓고 미국의 투자은행‘C’와 일본의 보험회사‘D'가 CDS 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 이러한 거래에서 보험회사 D는 B회사가 채무불이행(디폴트) 하지 않는 이상 돈을 벌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A은행에 대해 돈을 빌려준 것과 비슷한 위치에 설 수 있다. CDS는 결국 특정 기업이 채무를 불이행할 것인지 아닐 것인지에 대한 여부를 놓고 배팅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도 배팅에서 이긴 쪽이 돈을 지불하게 된다. 은행들은 이런 CDS를 통해 자신들이 기업들에게 빌려준 돈을 되돌려 받지 못할 위험, 즉 신용위험을 외부로 이전시킨다. 은행들은 어느 기업이 채무를 불이행할 경우 해당 대출금을 제3자로부터 지불받을 수 있다. 보험회사인 AIG가 긴급구제 조치를 받을 정도로 급격히 상황이 안 좋아진 것은 이 CDS라는 파생상품에 투자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CDO와 CDS는 밀접한 관계에 있는데, 이는 금융혁신으로 인해 등장한 합성 CDO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CDO와 다른 점은 금융회사가 특별목적회사에 파는 것이 대출이나 채권이 아니라 바로 앞서 설명한 CDS라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특별목적회사의 자산은 CDS가 된다. 이렇게 되자 합성 CDO의 근거가 되는 채권을 갖고 있는 기업은 합성 CDO라는 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특별목적회사의 투자자들은 물론 그 모기업 격인 금융회사도 합성 CDO의 근거가 되는 대출이나 채권을 만져볼 일이 없다.

2000년 이후 주택경기 호황으로 인해 시작된 주택담보대출 - 주택담보증권(MBS) - CDO로 이어지는 파생상품의 연쇄구조는 대출자들이 착실하게 빚을 갚는 구조라면 문제없지만 어느 한 고리에 문제가 발생하면 전체가 위험에 빠지게 된다. 고금리로의 전환과 주택경기의 악화로 대출자들이 빚을 갚을 수 없게 되면서 담보대출로 시작된 파생금융상품 전체가 연쇄적으로 부실해지는 결과를 낳은 것이 바로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다. 신용등급이 가장 낮은 (서브 프라임) 대출자들이 주택을 담보로 해서 돈을 빌리고, 부채의 증권화 → 주택담보부증권(= MBS) 발행 → MBS와 다른 채권을 섞은 CDO 발행. 이 연쇄구조가 주택가격 하락과 금리 인상으로 인해 채무 불이행 급증 → MBS 시장 붕괴 → CDO 시장 붕괴 → 국책 모기지 회사 위기 → 대형 금융기관 파산 → 헤지펀드 손실의 순서로 무너지게 된 것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예만을 들어 아주 쉽게 설명했다. 파생금융상품 시장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금융혁신으로 인해 몇 단계에 걸쳐 금융상품이 파생되었기 때문에 CDO에 투자한 투자자들은 이 증권이 처음에 무엇을 가지고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이러한 그물망은 또한 전 세계에 퍼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지금의 위기의 시발점이 된 MBS가 어디에 숨어있는지 찾아낼 수가 없고, 따라서 이 위기가 어디까지 영향을 미칠 것인지 정확히 예측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옵션

옵션이란 미래의 어느 시점에 어떤 물건을 사거나 팔 수 있는 권리를 가리킨다. 살 수 있는 권리를 콜 옵션, 팔 수 있는 권리를 풋 옵션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한 달 뒤에 일본으로 여행을 갈 계획을 갖고 있다고 해보자. 한 달 뒤의 엔화 가치가 지금보다 떨어진다면 같은 돈으로 더 많은 엔화를 환전해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평상시 꿈꾸어왔던 값비싼 스시를 먹으러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엔화의 가치가 상승한다면 그런 꿈을 접고,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먹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엔화의 가치가 상승할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 오늘부터 한 달 뒤에 미리 정해진 환율로 엔화를 살 수 있는 권리를 누군가로부터 사둘 수 있다. 예를 들어 오늘의 환율이 100엔당 1000원이라고 한다면, 한 달 뒤에도 이 환율로 환전할 수 있는 권리를 오늘 사두는 것이다. 다만 이런 환전의 권리를 사려면 그 대가로 ‘프리미엄’ 이라고 불리는 수수료를 외환 브로커에서 지급해야 한다. 여기까지 했다면 그것은 바로 ‘엔 콜 옵션’ 을 매입한 것이다.

엔 콜 옵션은 환율 변동에 따른 손실을 막아준다는 점에서 보험계약과 같다고 보면 된다. 만약 한 달 뒤에 100엔당 900원으로 엔화의 가치가 떨어진다면 굳이 엔 콜 옵션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 언제 콜 옵션을 행사할지는 매입자가 스스로 선택하면 된다. 사용하지 않을 경우 콜 옵션은 만기가 되어 사라진다. 반대로 100엔당 1100원으로 엔화가치가 상승했을 땐 콜 옵션을 사용하는 것이 유리하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콜 옵션에 붙는 수수료는 매우 높기 때문에, 앞서 예를 들었던 것처럼 외국 여행을 위해 콜 옵션을 사 두지는 않으며, 훨씬 큰 금액을 거래하는 대형 은행이나 기업들이 주로 활용한다. 통화옵션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통화의 변동성이다. 그리고 투기 자본은 이러한 변동성을 예측하여 베팅을 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 최근 심각한 한국의 원-달러 환율의 폭등을 예상하여 달러 콜 옵션을 사두었다면, 엄청난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것이다.

통화옵션에 대해 자세히 본 이유는, 최근 남한에서 ‘키코(KIKO)’ 라는 환헤지(환위험 회피용) 통화옵션상품에 중소기업들이 대거 가입했다가 흑자도산을 하는 등의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키코는 수출기업을 대상으로 환율이 미리 정한 상한선과 하한선 사이에 움직일 경우 약정 금액을 약정 환율로 팔 수 있는 권리를 주는 통화옵션상품이다. 예를 들어 A라는 수출회사가 키코 약정을 달러당 1000원~1050원에 했을 경우, 계약한 달러 가격 내에서 환율이 하락하면 기업에 이익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달러당 1050원에서 1000원으로 환율이 하락했을 경우에도, 여전히 달러당 1050원으로 교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다면, 10억 달러를 수출하여 이를 원으로 바꾸었을 때 500억원의 이익이 발생한다. 만약 달러당 1000원보다 환율이 하락한다면 계약해지가 된다. 문제는 1050원 이상으로 환율이 올라갈 경우인데, 이럴 때 기업은 계약한 금액 내에서 은행에 달러를 팔아야만 한다. 예를 들어 환율이 1100원으로 오르면, 10억 달러를 수출한 기업은 500억원의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기업들이 키코를 구입했을 때는 세계적인 달러 약세일 때라, 환율이 하락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발 금융위기로 외국인들이 주식을 매도하고 달러를 차입하기 어려워지면서 환율은 급등했다. LCD의 광원장치인 밸라이트유닛(BLU)을 제조하는 태산LCD라는 기업은 연 매출 6000억 원을 기록했던 중소기업이었으나, 회생신청서를 내게 되었다. 대다수 기업들은 은행이 투자위험성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고, 약관 자체가 불공정(계약환율 상한선 돌파시에는 2,3배를 물어야 한다.)했다고 이야기하며 구제를 요청했고, 정부의 선별 구제책이 논란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키코로 인한 기업의 손실액은 1조 7천억원에 달하며, 이익은 외국계은행이 60%정도를 가져갔다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파생금융상품은 실물경제까지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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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위기에 대처하는 저들의 자세

위기의 시발점이 된 미국은 7000억 달러라는 사상초유의 공적자금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시민들의 반발, 민주당과 공화당 의원 모두와 대선 주자들의 비판을 받았지만 결국 정부와 의회는 28일 구제금융안에 잠정합의했다. 이로써 미 행정부는 앞으로 2년간 7000억 달러로 금융회사를 사들이게 된다. 이는 지난해 미국 GDP의 5%를 차지하는 것이지만 (이미 올 들어 미 정부는 베어스턴스의 JP모건체이스 피인수 중재과정에서 290억 달러, 양대 국책 모기지업체인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의 국유화 과정에서 200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제공했고, 16일 AIG에도 85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실시했다.) 이 금액으로도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어쨌든 이미 AIG는 지분의 79.9%를 미국 정부가 인수하여 거의 국유화를 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졌고 투자은행 빅5 중 살아남은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는 은행지주회사로 전환하게 되었다. 은행지주회사가 되면 상업은행을 인수할 수 있게 되어 예금을 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고, 대신 이전보다 훨씬 엄격한 규제를 받게 된다.

미국뿐만이 아니다. 전 세계 금융시장이 촘촘히 엮여 있기 때문에 한 곳에서 부실이 터지면 다른 나라로 전파되게 마련인 현 세계 경제의 상황에서, 선진국들은 미국의 위기를 막기 위한 다양한 정책 공조에 나선다. 유럽은행 역시 달러공급을 늘리는 등의 조치를 계속 취하고 있다. 미국이 금융자본에 대한 규제를 강화할 수밖에 없게 되자 유럽 각국도 ‘이제 와서’ 글로벌 규제강화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너도 나도 이야기하는 ‘규제 강화’ 는 앞서 말했지만 금융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미국 내에서도 강조되어 왔던 것이며, 실은 지금 미국도 정부가 기업을 살리려고 개입하고 있지, 월가의 탐욕을 막기 위한 처벌과 금지 조항을 차근차근 마련하는 것은 뒷전이다. 또한 규제를 한다고 해서 하락하고 있는 이윤율이 반등할리 만무하고, 당연히 불황이 극복되고 호황이 올 리도 없다. 구제금융과 규제강화는 대안도 무엇도 아니다. 위기를 심화시키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제바람이 분다.’ 거나 ‘규제가 대안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설상가상, 우리는 이들을 비판하기에도 바쁜데 이러한 최소한의 조치가 왜 취해지고 있는지도 파악하지 못한 채 엉뚱한 소리를 계속 하고 있는 정부와 금융기관들이 있는 나라도 있다. 바로 한국이다.

한국의 지배계급은 ‘위기는 기회다!’ 라고 얘기하면서 자신들이 이전에 주장했던 내용을 번복하면서까지 금융화의 길을 계속 가야한다고 외치고 있다.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신청으로 금융위기가 확산된 지난 16일부터 나흘간만 이미 국내의 주식과 펀드 손실액이 20조가 훌쩍 넘었으며, 국민연금의 2조가 넘는 투자손실도 시민들을 불안하게 하고 있는데, 대통령은 펀드를 사겠다고 하고, 은행에는 ‘주가가 내리는 지금, 주식투자를 하셔야 합니다.’라는 식의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바로 엊그제만 해도 노동자들의 파업과 촛불집회 등 그 어떤 저항도 외국인 투자자들 유치가 안 된다며 막았던 정부는 위기로 인해 금융시장에서 외국인 투자자 비율이 줄어들고 있으므로 바람직하다고 하고, 금산분리 완화 방안 등 금융규제 완화책을 강행하겠다고 하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실컷 비웃어주고 넘어가고 싶지만, 이들의 이러한 결정이 또 많은 이들을 절망으로 빠져들게 할 것이다.

 
4. 1930년대가 시사하는 바

 

… ‘허리띠를 더 졸라매시오’ 라는 것이 무책임한 각국 정부 대변인들이 국민에게 하는 충고였다. 그러나 지구 전역의 실업자 수가 4천만 명에 이르게 되자. 그러한 통계 작업도 중단되어 버렸다. 그들은 지금의 사태가 단지 과잉생산의 결과일 뿐이라 말했지만, 그 어디에서도 민중들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못했다.

세계 전역이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 덩어리였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제대로 입지 못한 채 헐벗고 있었지만, 미국에서는 목화밭들을 뒤엎어버렸고, 수천만의 삶들이 굶주리고 있었지만, 캐나다에서는 수확한 밀을 태워버렸다. 길모퉁이에서마다 사람들이 커피 한잔을 마시기 위해 동전 한 닢을 구걸하고 있었지만, 브라질에서는 생산된 커피를 바다에다 무더기로 쓸어 넣었다. 몬트리올의 노동자 거주 지역에서는 어린이들이 구루병으로 앙가발이가 되고 있었지만, 남부에선 오렌지들을 짓밟아버렸다…

- 『닥터 노먼 베쑨』 중, 1930년대 초반 대공황의 상황에서

 

리먼 브라더스가 무너지자마자 많은 금융 전문가와 경제학자들은 1930년대를 돌아보았다. 19세기 말에서 대공황까지의 기간은 당시에 막 탄생한 현대금융이 헤게모니를 쥐었던 시기이다. 당시의 대공황과 지금을 비교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고, 이런 파국의 가능성은 농담일 수도 있다. 우리가 잠시 숨을 고르고 잠깐 1930년대를 돌아보고자 하는 이유는 당연히 어떤 이들처럼 자본주의의 수명을 연장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며, 자본주의를 비판해 온 사람들로서 자본주의의 몰락을 비웃기 위함도 아니다. 우리는 진지하게 위기를 사고해야 한다. 어쨌든 위기는 많은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공황은, 여전히 생산시스템에서 중요하지만 후진적인 부분에 잠재되어 있던 위협과 통제되지 않는 화폐금융 시스템이라는 두 요소의 영향이 누적된 결과였다. 1929년의 경기침체는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불황으로 발전했다. 모든 것은 1929년 중반 보통의 경기침체에서 시작되었다. 산업생산은 1929년 2월에 정점에 달했지만 9월에는 26퍼센트가 하락했다. 엄청나게 폭등했던 주식시장은 10월에 폭락했다. 중앙은행과 은행시스템이 주식 투자자를 구제하러 나섰고, 이전의 패닉에서 그랬던 것처럼 주가는 신속히 안정되었다. 주식시장의 위기가 경기침체나 불황을 촉발한 것은 아니었다. 1930년 초에는 경제활동이 더 이상 하락하지 않고 안정되는 듯했지만 회복되지는 않았다. 1932년 초 위기가 더 심각해졌고 1933년에는 기업이 파산하고 물가가 폭락하며 은행위기가 닥쳐왔다. 경제는 여전히 신용을 필요로 했지만 대출금 상환의 중지로 인해 은행 시스템은 신용창출의 역할을 거의 포기했다. 은행들은 대신 별로 수익이 높지 않지만 덜 위험했던 정부채권의 보유를 선호했다. 1933년 초반 이후 은행위기, 즉 은행들의 파산이 심각해졌다. 루스벨트는 후버에게서 정권을 넘겨받던 바로 그날 밤, 전국적인 차원에서 은행 시스템을 폐쇄한다고 발표했다. 이것이 뉴딜 정책의 시발점이다. 같은 해 글래스-스티걸 법이 제정되었다는 것은 앞서 이야기 했다.

대공황은 방지될 수 있었을까 아니면 필연적이었을까? 다른 정책들이 파국을 막을 수 있었을까? 이러한 질문은 또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먼저 언제가 적극적인 경제개입을 위해 최선의 시기였는지 질문할 수 있다. 위기가 처음 시작된 1932년이었을까? 과열된 경제가 임박한 불황을 예고하던 1929년이었을까? 중앙은행이 만들어지고 그 임무가 확정된 1913년이었을까? 화폐금융 메커니즘이 급성장하던 20세기 초반이었을까,. 아니면 미국경제의 이중성이 나타나기 시작하던 19세기 말이었을까?

또한 우리는 역사를 다시 쓰는 과정에서 제도들을 개혁하는 데까지 나가도 되는 것일까, 아니면 제도적인 틀은 놔두고 대안의 정책만을 생각해보는 정도에서 그쳐야 하는 것일까? 를 질문할 수 있다. 우리는 반드시 당시 미국의 통화시스템 안에서, 그리고 그것이 갖고 있던 문제점들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했던 것이 분명하며 이는 곧 제도에 대해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의 위기는 경제정책의 실수로 인한 것이 아니다. 위기는 이윤율의 하락 때문에 일어났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에 실수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대공황이 경제를 엄청난 위험과 전례 없는 상황에 이르도록 한 데는 몇 가지 요인들이 원인을 제공했다. 화폐금융을 통제할 제도가 늦게 발전한 것은 지배계급의 책임이다. 위기상황에서 지배계급의 경험 부재와 그들의 기득권에 대한 고수는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앞서 제기한 질문들을 현재에 다시 가져와보자. 위기는 분명 이윤율 하락을 이윤량의 증대로 상쇄하려는 금융화로 인해 일어났다. 그러나 우리는 위기가 가장 파괴적인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늦었는가? 아직 늦지 않았는가? 우리는 아주 작은 것만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제도와 체제 전반을 바꿀 수 있는가? 지배계급의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의 탐욕을 제어하지 못하고 우리 역시 편승했을 때 다가올 미래의 모습은 무엇인가?

 

5. 위기 해결의 원칙

 

당시의 관료들이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비난하는 것은 무척이나 순진한 일이다. 지배계급은 그런 식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식과 사건의 예상에 기초하여 행동하지 않으며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들의 이익과 상충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오직 폭력적인 위기만이 대전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 뒤메닐, 레비 《자본의 반격》중

 

30년대의 위기를 겪고도 지배계급은 80년대 남미의 외채위기를, 90년대 동아시아의 외환위기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그 때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이 어떤 괴로움을 겪었는지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시하면서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러한 위기가 어떤 땅에서 어떤 이들을 죽음으로까지 내몰았다 하더라도 지배계급의 이익에는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지배계급에게 폭력적인 위기는 피지배계급에게는 더욱 폭력적인 방식으로 드러난다. 지배계급이 지금처럼 위기 이후, 사후적으로 계속 위기를 처리한다면, 자본주의의 경향과 위기, 대혼란, 위기의 종언, 위기의 종언의 위기, 다시 대혼란…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반복을 끊어내기 위해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위기 해결의 원칙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다른 국가든, 다른 계급이든 간에 위기를 외부로 이전시키는 것을 방관해서는 안 된다. 중심부 국가들이 제3세계로 위기를 수출하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이미 지구의 많은 곳은 야만적인 상황에 처해있다. 이에 대해 중심부 국가들은 최소한의 책임을 져야 하며 이들이 스스로 일어서고자 했을 때 - 그들의 혁명을 막았던 수많은 조치들을 규탄해야 한다.

구조조정과 같은 우리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하려 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 안에서 여전히 공공적 권리들은 지켜져야 한다. 물, 전기, 가스, 주거권은 우리가 위기를 넘어 미래의 삶을 영유하기 위해 지금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유대와 연대의식을 가로막는 방식으로 위기를 해결해서는 안 된다. 여성들이 남성들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이주노동자들이 정주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 결코 아니다. 노동의 조건을 악화시키고 우리의 생존을 힘들게 하는 것은 자본이며, 이윤 극대화라는 자본주의의 정신이다.

인간사회의 발전의 새로운 대안적 경로를 규정하는 것은 분석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원칙을 사회화할 때만 가능하다. 앞서 제시한 몇 가지 원칙은 매우 초벌적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부터 이 원칙을 늘리고, 구체화해야 한다.

Posted by 행진

2008/09/30 15:45 2008/09/30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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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M 2008/12/01 08:44 # M/D Reply Permalink

    글 잘 봤습니다. 근데, 한글파일로도- 항상 같이 따라올라오면 좋을 것 같네요.


[교육분석]막 나가는 교육, 이래도 괜찮나?"

- 08년 대학교육 재편의 천태만상(千態萬象) -




1. 자본의 입맛에 꼬옥 맞춘 대학교육의 천태만상

대학교육에 대한 자본의 입맛은 까탈스럽기 그지없다. "대학 졸업자들을 기업에 적응시키는 재교육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는 둥, "전인교육도 중요하지만 기업 생리에 맞는 교육이 절실하다"는 둥 참 말이 많다. 과거 군사정권의 정당성 확보라는 정치적 목적과 산업자본의 수요 충족이라는 경제적 목적, 그리고 대중들의 계층상승 욕구가 결합되어 양적인 팽창을 거듭해왔던 남한 대학은 대중교육으로 자리잡은 지 이미 10여 년이 지났다. 하지만 자본의 축적위기로 인해 이러한 ‘타협’이 더 이상 불가능해지자, 대학이 이러한 외부적 환경과 수요에 전혀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를 빌미로 대학을 재편하고 있다. ‘다양화/특성화’라는 명분으로 장사가 안 되는 대학과 학과를 대폭 없애고, 기업과의 긴밀한 연계를 통해 경제성장의 수단으로 탈바꿈시키려 하고 있다. 이 때문에 대학교육은 강산도 변한다는 그 시간 동안 변하고 또 변했다. 이러한 변화를 이끄는 데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정부였다. 양적인 구조조정과 편중된 재정지원을 통해 경쟁력 있는 소수만 살아남으라 하고, 지역균형발전을 강조하며 NURI사업을 통해 지방대학의 기업 예속화를 강요하면서 한편 교육개방을 통해 교육시장화를 촉진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교육재편은 현 국면에서 자본이 요구하는 노동력의 재생산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목적과 함께 교육모순의 격화로 인해 표출될 수밖에 없는 대중의 불만을 호도하기 위한 목적이 강하게 반영되는 데, 08년 대학의 캠퍼스에 펼쳐지는 풍경 또한 이러한 설명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까다로운 입맛의 기업들과 함께 만드는 맞춤교육

한창 '계약학과'가 인기란다. 성균관대는 올해부터 대학원과정에 '초고층·장대교량학과(Department of Mega Buildings and Bridges)'와 ‘임베디드소프트웨어학과(Department of Embedded Software)’를 신설하였다. 그리고 조만간 '보험금융석사과정'(MBA) 또한 개설할 예정이다. 서울대 역시 개교 이래 첫 계약학과인 ‘E-MBA(Executive MBA)’를 경영전문대학원 안에 신설하였다. 계약학과는 2003년 개정된 산업교육진흥법 및 산학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에 근거한 것으로서, 기업 혹은 정부기관의 계약을 통해 '실무형 고급 인재' 양성을 목표로 운영된다. 심지어 선발부터 교육과정 개발과 강사진 운영, 졸업생 채용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기업과 대학이 공동으로 기획, 운영하거나 기존 계약학과를 직원의 재교육 프로그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각 대학별로 세부적인 차이가 존재하나, 기업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인재를 교육시켜서 좋고, 대학은 그 반대급부로 각종 지원을 받을 수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따로 없다.

유행에 민감해져라! 학과 통폐합 리모델링

반면 기업의 입맛에 맞지 않는 메뉴들은 점차 메뉴판에서조차 치워지고 있는 추세이다. 연초에 성균관대는 지원자가 적은 사회복지학과를 폐지하려다 구성원의 반발로 취소하기도 했고, 성신여대가 삼성경제(!)연구소에 맡긴 연구용역을 통해 학사 개편을 추진하였다는 사실은 실로 낯 뜨거운 장면에 다름 아니었다. 동국대도 매년 학과별 평가를 통해 평가 결과가 낮은 학과에 대해선 정원을 줄이고, 우수한 학과엔 정원을 늘려주는 '입학정원관리 시스템'을 가동할 예정이다. 주요 평가항목은 입학경쟁률, 재학률, 취업률 등인데, 사실상 사회적 수요에 따른 구조 조정을 단행한다는 것이다. 예감했듯이, 대학본부로부터 정원감축을 통보받은 학과는 철학·사회학·물리학·수학·독어독문학·윤리문화학과·기계공학 등이었다.

이런 현상이 더욱 심각한 지방의 대구가톨릭대의 경우, 3~4년 전부터 실시중인 ‘폐과 예고제’를 통해 철학 등 기초학문 분야 10여개 학과를 이미 없앤 바 있는데, 지방대에서 시작된 폐과 방식의 대학 구조조정이 최근 국립대와 서울지역 사립대에 이르며 점차 확대되고 있는 상황이다. 교과부도 취업률, 장학금 지급률, 교원확보율, 학생 충원율 등을 기준으로 평가해 각 대학에 재정을 차등 배분하는 '우수인력양성사업', ‘우수인력양성대학 교육역량 강화사업’ 등 갖가지 대학정책을 펼치면서 지원금을 미끼로 하여 비인기학과 위주의 구조조정을 부추기고 있는 상황과 맞물려 각 학교들의 학과 구조조정의 움직임은 가속화될 전망이다.

상위서열의 대학이라고 해서 '돈 안 되는 학문'에 대한 구조조정의 흐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서울대 인문대학 또한 국사학과, 동양사학과, 서양사학과의 ‘3사(史)과 통합’을 예고한 바 있고, ‘인문학의 위기 극복’을 들먹이면서 학과 별로 세분화된 전공을 융합하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통합된 학문에 대해 다각적으로 접근해볼 수 있을 것’이라는 일부 기대와는 달리 ‘학부제 전환’ 해프닝의 또 다른 버전에 불과할 것이라는 우려 또한 존재한다. 재정지원과 연동된 정부의 강력한 구조조정의 시책으로 너도나도 학부제 체제로 전환하였다가, 지금에 와서는 원래의 취지에 맞는 제대로 된 내용을 교육하지도 못하고 인기/비인기학과로의 진입을 위한 경쟁만을 초래한 바 있다.

한편, ‘학문융합 추세에 맞춰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학습 기회를 제공’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도입되어 올해 대학 수시모집에서 상당히 높은 경쟁률을 기록하며 ‘명품 전공’으로 부상하고 있는 곳이 있는데 바로 ‘자유전공학부’이다. 각 대학에서도 자유전공학부 혹은 자유전공학부와 비슷한 성격의 학과 등 전형을 통해 우수 인재를 들여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장학금 등의 각종 특전을 주고 지원을 집중하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여기 지원하는 이들을 끌리게 하는 것은 고시 준비에도 유리하다는 점 때문이다. 실제 몇몇 대학들을 들여다보면 법학전문대학원이나 행정고시나 외무고시 등의 국가고시를 준비하는 데 최적의 조건들을 갖춰 놨다. 로스쿨 진학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한편 재학 중 국가고시 합격자에게 장학금 지원 혹은 고시 관련 특강 등의 프로그램을 제공할 계획이기도 하며, 편법 논란을 피하기 위해 학생들의 과목 선택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전략을 세우기도 한다. 특히 일부 대학에서 이미 시행 중인 자유전공학부가 ‘취업전공학부’로 전락한 선례 또한 있는 마당에 실제 운영은 프리로스쿨, 프리메디컬스쿨, 혹은 고시준비의 과정 그 이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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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율’이라는 포장지, 까보니 ‘기업화’!

교육내용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최근 들어 사립, 국공립 할 것 없이 '기업화'의 흐름이 도드라지고 있다. 교육기관이 본업이라 할 수 있는 '교육' 보다도 오히려 '돈 벌이'와 '경제적 효율성'에 집착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대학들이여, 마음껏 돈을 벌라!

최근 노골적으로 사학의 영리행위 허용하고 있는 추세인데, 학교기업에서 백화점, 부동산임대업, 골프장, 도박장 운영 등의 업종을 통해 영리사업을 할 수 있게 길을 터놓았을 뿐만 아니라, 대학의 적립금으로 주식투자까지 허용하여 ‘자율’을 내세워 대학의 기업화를 전면 지원하고 있다. 교과부는 작년 대학들의 적립금 투자 규제를 완화한 <사학기관 재무/회계 규칙>을 개정하였다. 개정안은 대학 적립금의 최대 50%까지 수익증권에 투자할 수 있도록 했다. 전체 사립대에 누적된 적립금은 6조 5122억 원(07년 현재)에 달하는데, 이 가운데 50%인 3조가 넘는 어마어마한 돈이 펀드 투자로 사용가능하는 길이 열린 것이다. 실제 연세대는 이화여대와 함께 이미 03년 ‘삼성 아카데미 YES’펀드를 설립하여 ‘공격적인 투자’로 자금운용을 하고 있다. 그 외 대학들의 적립금 자금운용 현황(06년)을 살펴보아도, [고려대](적립금 3784억원) △정기예금, 채권 등 50~60% △사모펀드 20~30% △금융파생상품 5%, [서강대](적립금 1634억원) △정기예금 10% △회사채, 채권형 펀드, 양도성예금증서(CD), 자산유동화증권(ABS), 발행어음 등 90%이며 심지어는 [서울대](적립금 약 2천억원) △채권 40% △주식 15%% △사모펀드 15%, △해외투자펀드 10% △머니마켓펀드(MMF) 10% △금융파생상품 10%의 상황이다.

며칠 전, 국내 최초의 대학기술지주회사 ‘HYU 홀딩스’가 한양대학교 내에 설립되었다. 한양대 산학협력단이 35억여 원을 출자해 설립한 ‘HYU 홀딩스’는 통화잡음제거 기술을 보유한 ㈜트란소노와 과학교육컨텐츠를 보유한 ㈜크레스코 등 2개 자회사를 통해 해당 업계의 기업체에 관련 기술을 판매하게 되며, 2012년까지 12개의 자회사를 설립, 매출 규모 조만간 자본금 100억 원대의 기술지주회사를 설립할 계획이다. 이런 대학기술지주회사는 개정된 <산업교육진흥 산학협력촉진에 관한 법률>에 근거하여, 대학이 직접 기업을 설립하여 대학연구 성과를 이용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도록 한 제도로 지분의 51% 이상을 대학이 소유해야 하고 나머지 49% 이하는 외부 투자자를 끌어들일 수도 있다. 올해 초부터 서울대, 포스텍, 연세대, 고려대 등 10여 곳의 대학들도 ‘학문의 상아탑을 넘어 수익창출기관으로 거듭나겠다’며 앞 다퉈 설립을 적극 추진 중에 있다.

이러한 것들이 ‘록금 외에 별다른 재원확보책이 없는 대학들의 자구책이라 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등록금이 싸지거나 할 것 같지는 않다. 최근 발표된 <대학자율화 2단계 1차 과제>의 ‘사립대학 교비회계 수입의 산학협력단회계 전출 일부 허용’은 대학등록금이 학교교육이 아닌 다른 곳에 사용될 수 있게 하는 방안이다. 국가나 지자체의 재정지원이 있을 경우, 매칭펀드(matching fund) 방식으로 교비회계에서 산학협력단회계로 전출이 가능하기 때문에 산학협력단을 통해 사업을 하다가 손실을 입을 경우 학생들이 낸 등록금으로 조성된 교비회계에서 충당할 수 있게 되어 학생들이 애꿎은 피해를 볼 수도 있다. 특히, 등록금 자율화로 등록금이 계속 오르고, 산학협력이 보다 강화되는 추세 속에 이런 경향은 더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학교법인이 재산을 처분할 때 처분재산이 10억 원 미만인, 경미한(!) 경우 기존의 사전신고가 아닌 사후보고만 하면 되고, 재산처분의 보고가액도 상향 조정하여 앞으로는 보다 많은 액수의 학교법인 재산 처분을 용이하게 해줄 것이다. 이제 여타 사업들처럼 대학도 돈을 벌기 위해 설립하고 운영하고 수지타산이 맞지 않으면 문 닫는 ‘영리법인’이 된 거나 마찬가지이다.

자율화의 최상위버전, 국립대 법인화!

교과부는 23일 국립대의 재정 운영 자율성과 효율성, 투명성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국립대학 재정ㆍ회계법(안)> 제정을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이 법안에 따르면 서울대 등 국립대의 발전기금은 현재 '공익법인의 설립ㆍ운영에 관한 법률'의 적용을 받아 수익사업을 할 수 없고, 사용할 때도 관할 지역 교육청의 관리 감독을 받도록 되어있는데, 이르면 2010년부터 외부에서 기부 받는 발전기금의 경우 앞으로 특수법인을 설치해 교육 목적 수행에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 채권투자나 부동산임대 등 수익사업 용도로 쓸 수 있게 된다. 또한 수익사업을 위해 교비회계와 산학협력단회계, 발전기금회계간 재원 간에 상호 전입/전출을 허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학에 투자한 외부자본에 대해서는 무상으로 건물 및 시설을 사용하여 수익사업을 할 수 있는 길까지 터놓고 있다.

재정회계법은 사실상 국립대 법인화의 사전단계, 과정이라 불린다. 교과부는 전국 54개 국공립 대학 가운데 이미 여건이 되는 대학은 먼저 법인화를 추진하고, 그렇지 않은 대학은 재정회계법으로 돌파한다는 전략 속에서 촛불국면 속에 폐기된 <국립대학법인의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을 올 하반기 법안을 국회에 다시 제출해 통과시킬 계획이다. 이 상황에서 서울대 이장무 총장은 지난 8월, “대학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9월 중 ‘법인화 추진 위원회’를 구성한 뒤 임기(2010년 7월) 안에 서울대의 법인화를 이뤄내겠다”고 밝혀 대학가에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지방대들은 “서울대 법인화 땐 지방 국·공립대 망한다”며, 애당초 독점적 지원과 지위를 가진 서울대가 독자적으로 법인화를 추진할 경우 기업 등의 대규모 기부 등 모든 돈과 힘이 서울대로 빨려 들어가게 되고, 이로 인해 지방의 다른 국·공립대는 존립 자체를 위협받게 된다는 진단 때문이다.

교과부 말대로 ‘정부의 행정 규제가 대폭 축소된다는 점에서 높은 수준의 대학자율화’인 국립대 법인화는 국립대를 국가로부터 독립된 법인으로 전환해 인사, 조직, 재정, 운영 등의 자율성을 확보하도록 하자는 게 핵심이다. 국립대에도 경쟁과 자율의 운영방식을 도입해 경쟁력을 높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국립대 법인은 학내/외 인사가 참여하는 이사회가 최종 의사결정을 내리고 총장은 최고경영자가 되어 대학 운영에 대한 전반적인 권한과 책임을 지게 된다. 최근 종종 튀어나오는 '총장직선제 폐지' 주장도 이러한 맥락에 있다. 강력한 구조조정과 하나의 독립적 기업으로서 학교를 경영해나갈 CEO로서의 총장은 대학법인의 이익을 위해서 강력한 추진력을 발휘하여 학내 구성원들의 휘둘림 없이(!) 대학을 이끌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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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막 나가는 교육, 이러다 맛 가겠다!

이명박 정부가 내세우는 교육, 대학의 ‘자율화’, ‘다양화’는 이처럼 천태만상(千態萬象; 세상 사물이 한결같지 아니하고 각각 모습·모양이 다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어쩌면 정부의 정책은 성공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상을 제대로 들여다본다면, 이것을 결코 ‘자율적인 운영과 그 결과로서의 다양화’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다양한 모습들이 ‘획일적’으로 대학의 기업화로, 대학교육의 기업예속화로 드러나고 있으며, 이 흐름을 가속화시키는 것은 결코 대학 구성원의 자율적인 동인이 아닌 재정지원이라는 미끼 혹은 학교발전이데올로기의 강조를 통한 ‘강제적’인 구조조정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대학교육의 사사성(私事性)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민주주의의 기지’로서의 대학은 온데간데없고 대학의 운영자들이 독단적으로 판단하고 추진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고, ‘학문의 상아탑’도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허물고 대신에 산학협동이라는 이름으로 자본이 대학을 직접 지배, 통제하면서 ‘자본의 입맛에 맞는’ 지식생산만을 담당하고 있다. 반면,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고양하는 지식을 학습하는 모습은 대학가에서 나날이 모습을 감추고 있다. 이런 ‘우리의 입맛을 잃어버리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에 한 마디 내뱉을 수밖에 없다. “막 나가는 교육, 이러다 맛 가겠다!”

Posted by 행진

2008/09/30 15:38 2008/09/30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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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한국 자본주의의 미성숙한 기원, 1950년대


1. 들어가며

최근 국방부에서 역사교과서의 일부 내용에 대한 수정을 요구함으로서 논란이 되고 있다. 특히 해방전후와 1950년대의 내용이 많은데, 주로 이승만 정권의 행적; 친일파에 대한 온건적 태도, 미국에 의한 원조경제체제의 성립, 독재정권의 수립 등에 대한 것들이었다. 이는 결국 한반도에서 분단체제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1950년대가 이후의 역사에 어떤 의미로 남느냐는 문제를 담고 있는 것으로, 실은 진보학계와 보수학계의 오래된 논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식민지 잔재의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원조에 의지하지 않고 자립적인 경제체제를 성립할 수 있었는가?’, ‘독재체제를 유지하지 않았다면 한국에서 더 나은 정당 제도를 만들 수 있었는가?’, ‘4. 19와 그 이후의 5.16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등등.

이런 논쟁은 그간 반공주의와 군사독재정권의 강력한 탄압 속에서, 한국사회의 성격이라는 문제와 관련한 투쟁의 장소가 되어왔다. 실로 ‘진보적인’ 역사관을 승인 받기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제 부문에서 투쟁해왔으며, 역사의 숨겨진 부분들을 밝히는 성과들을 거두기도 했다. 1980년대 남한에서 본격적으로 마르크스주의가 부활하기 전까지,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의 장소는 역사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마르크스주의적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역사관 논쟁은 계급투쟁에 미달하는 것이었고, 차라리 제대로 된 자유주의를 만들기 위한 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 논쟁에 담긴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고 해도 말이다.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의 도입과 함께 문민화가 진행되고, 진보적 역사관은 한국사회 안에서 일정한 시민권을 얻으면서 ‘보편적인’ 역사관으로 자리 잡는다. 물론 뿌리 깊은 반공주의 이데올로기가 다양하게 분화되는 - 전통적인 안보논리, 경제성장 이데올로기, 역사의 종말 등 - 양상을 보이지만, 신자유주의적 개혁분파를 비롯한 자유주의자들은 ‘진보적 역사관’을 어느 정도 수용하며 심지어 자신의 정통성으로 삼기도 한다.

우리는 이렇게 역사가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논쟁이 공개적으로 등장하는 이유에 대해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 또한 남한에서의 계급투쟁과 그 이념의 장소는 어느 곳에 위치할 것인지 예측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정국에서 좌파는 어떻게 논쟁에 개입할 수 있는가? 이명박 정권 아래에서 반동적인 공세가 증가하는 것에 비판하면서, ‘진보적’인 역사관에 힘을 실어줘야 하는가? 하지만 이른바 진보적 역사관이 지난 10년간의 인민주의자들의 정통성을 확립하는데 이용한 이래, 문제는 현재 논쟁의 구도를 뛰어넘어 과학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다. 즉 세 가지 층위의 문제를 다시 한 번 제기하면서, 계급투쟁 관점의 역사를 복원시킬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는 현재 논쟁이 되고 있는 이승만 정권시기, 특히 1953년에서 1961년까지의 역사를 다룰 것이다. 우리는 역사적 좌파의 관점에서 무엇을 중점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며, 현재의 정세에 개입할 수 있는 단초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현대사에서 1950년대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몇몇 키워드를 중심으로 구성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는 인구성장이 가속화되는 베이비 붐의 시대였고, 전 근대적 형태의 많은 정치 사건들이 터지는 시기였으며,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는 시기였으며, 미국이 한국의 제 1동맹으로 부상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는 모든 부문에서 혼란한 시기였으며, 반공 이데올로기가 제 1의 가치로 떠오른 시기였으며, 삼백산업의 시기였으며, 4.19가 일어나는 시기이기도 했다. 한국전쟁이라는 커다란 단절이 진행된 이후 1950년대는, 각종 사건들의 나열로 기억될 만큼 별 다른 특별하고 중심적인 쟁점이 없는 시기였다. 물론 1950년대에 대한 분석이 이런 사실을 한 번 확인하는 것으로 끝날 수는 없다. 어떤 측면들이 결합하여 우리가 기억하는 1950년대가 되었는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분석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그것은 취약했던 계급투쟁,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모두 자신의 독자적인 전망과 이념을 가지지 못한 데에서 유래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시대가 가지고 있는 미성숙함, 이후 한국 현대사의 불안정한 기원이라는 조건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2. 자본주의의 황금기와 한국

2차 세계전쟁 이후 자본주의 세계체계는 미국에 의한 새판짜기가 진행되는 시기이다. 브레튼우즈 체제의 확립과 전 세계적 고도금융에 대한 통제, 미국식 자유주의가 전 세계적 보편이상으로 성립되는 과정에서 미국 헤게모니가 성립되어 간다. 전쟁 직후부터 시작된 미국 헤게모니에 의한 새판짜기는 1950년대를 통해 확립되어 가고, 세계자본주의의 황금기를 주도한다. 거래비용의 내부화를 특징으로 하는 법인 자본주의와 대량생산-대량소비 체제의 세계화는 황금기를 주도하였고, 이를 가능하게 했던 가장 큰 원인은 한국전쟁과 냉전의 성립이었다. 양차 세계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미국은 세계의 많은 돈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내부적 팽창이라는 특징으로 인해 세계적인 포섭을 진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1949년의 중국혁명과 뒤이은 한국전쟁의 발발은, 세계적 통치성과 포섭이라는 문제를 주요한 쟁점으로 떠오르게 한다. 이에 모든 나라에 대해서 일종의 유효수요를 창출하기 위해서, 중심부에서의 마샬플랜과 주변부 국가들에서의 원조로 특징지어지는 전 세계적 뉴딜을 실시하게 된다. 이를 통해 미국이 보유하고 있던 달러를 방출하고,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으로 자리 잡는다.

전 세계적 뉴딜을 통해서 미국 헤게모니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 자본주의 체계의 특징이 만들어 진다. 그것은 3가지 정도의 특징으로 이야기될 수 있다. 우선 영국헤게모니-제국주의의 실패가 고도금융 때문이라는 판단 때문에, GATT의 틀 속에서 전 세계적 케인즈주의가 실시된다. 고도금융에 대한 통제는 민족국가의 경제적 자율성을 보호하는 조치로 연결되었고, 국가간 통제 아래 자유무역의 원리를 종속시켰다. 물질적 확장이라는 1950년대의 조건은 상대적인 자율성을 가진 국가의 정치체계-경제정책의 실현을 가능하게 했고, 이로부터 이 시기의 두 번째 특징이 도출될 수 있다. 그것은 제국주의 시대가 종료된 이후에 민족국가의 틀이 강화되고, 각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는 작업이 실시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민족주의의 확립과정 - 공동의 역사-언어-문화의 창출 - 임과 동시에, 민족의 형성에 있어서 자유주의가 변형-수용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이 시기의 민족국가 성립이라는 과정이 미국 헤게모니의 보편성 획득이라는 목적에 종속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법인자본주의 모델의 보편적-이상적 표상화라는 작업에 기여한다. 세 번째 특징은 사회복지국가의 모델이 등장하여 정부가 국민들의 일반적 이익에 대한, 보편적인 담지자로 설정되는 과정이다. 이는 케인즈주의적 유효수요의 창출이라는 모델에 바탕을 둔 것으로, 서유럽에서의 사회민주주의와 주변부 국가에서의 발전주의 모델로 분화된다. 이런 세 가지 특징은 미국식 자유주의의 주된 동력이 되었다.

 

우리는 미국 헤게모니의 특징을 살피는 가운데, 이 시기 한국이 세계체계에서 차지했던 위치에 대해 평가할 수 있다. 해방 직후 발전주의적 국가수립이라는 전략이 본격화되지 않은 가운데, 한국전쟁의 발발은 한국이 대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한 최전선으로서 전략적 위치를 제고시켜주게 되었다. 1950년대에는 한국에 대한 전략적 포섭을 진행해야 했지만, 이런 목표에 걸맞는 안정적인 정책; 수출지향 혹은 수입대체 공업화와 같은 명확한 발전전망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특히 자본주의의 세계적 분업체계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지가 애매한 상황에서, 발전주의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불하-원조 정책은 필수재-소비재를 중심으로 ‘생존’을 유지하는 수준에 머물게 된다. 국가 주도의 발전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못하는 것은, 동아시아 세계체계에 한국이 편입되지 못한 조건과도 관련이 된다. 냉전의 시작과 함께 미국은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체계의 성립, 그를 통한 지역 파트너의 형성이 동아시아에 대한 주된 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식민지 역사와 반일-반공을 기초로 하는 이승만 정권의 정통성 확립의 문제는, 한국이 자본주의 세계체계에서 자신의 포지션을 확정짓는 시간을 지연시킨다.

한국에서 발전주의적 전략이 본격화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를 추진하기 위한 국가의 통치성이 확립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은 자유주의/민족주의/반공주의라는 자본주의적 통치성에 걸맞는 이념을 수용했지만, 이를 통해 민중들을 포섭할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는 전쟁으로 인해 각종 산업기반이 파괴된 문제와 함께, 통치성을 유지하고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할 수 있는 국가장치가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통치를 유지하기 위한 지배계급의 블록이 가지는 애매성, 혹은 일국에서 자본주의적 시초축적을 위한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문제이기도 했다. 따라서 세계체계에서 한국의 위치에 걸맞게 자유주의를 수용하는 양태와 지배계급의 이념을 확립하는 것이, 미국과 국내파트너인 지배계급의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1950년대는 발전주의적 통치를 위한 조건을 만들어가는 한국 자본주의의 기원이 되는 시기이지만, 여러 가지 애매함으로 인해 불안정성과 모호성을 내재하게 된다.


3. ‘대한민국’의 성립과 ‘정치’의 불안정

위와 같은 조건으로 인하여 이 시기에 당면한 문제는, 결국 국가장치-국가권력의 성립을 통해 국내적 통치성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민족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는 작업이었고, 강력한 국가장치와 이데올로기를 통해 구성원을 민족으로서 통합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는 1) 발전주의를 추동할 강력한 정권의 확립문제 2) 국가장치, 특히 폭력적 국가장치의 성립 3) 자유주의-민족주의를 보충하는 이데올로기로서 반공주의의 성립이라는 3가지 차원으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대한민국’을 성립하는 과제를 떠맡은 이런 문제들은, 하지만 당시 ‘한국’이 가지고 있었던 불안정한 조건들로 인해 무능함과 허약함을 드러낸다.

우선 해방 직후의 혁명적인 정세가 사그라진 이후에, 정치는 이승만을 위시한 자유당 정권 / 한국 민주당을 비롯한 군소정당의 분별정립으로 축소된다. 원조경제체계를 벗어나 강력한 발전주의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강력한 독재정권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자유당은 1948년 반민 특위법의 재정/공포를 시작으로 각종 정치 파동을 일으켜 3선까지 성공한다. 이와 함께 이승만을 국부로 하는 가족국가화 전략 등이 실시되기도 하지만, 결코 그에 부합하는 헤게모니를 확립하지는 못한다. 이미 대한민국의 건국 이전에 경찰과 치안경비대, 그리고 관료제와 사법기구와 같은 조직들이 식민지 시기의 국가장치들을 이어받아 만들어진다. 그리고 당시 세출구성의 평균 40%이상이 국방비에 쓰일 정도로, 대 반공군사기지를 위한 군대라는 조직역시 강화된다. 이러한 장치들에는 식민지 시기부터 활동하던 친일파들이 대거 포함되었고, 반공주의와 같은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것이 주된 업무가 된다. 하지만 이런 국가장치의 정당성과 기능은 허약하였으며,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시작으로 정치깡패와 각종 원외단체가 동원되는 상황이다. 1950년대를 특징짓는 또 다른 축인 사회적 소요와 불안정은, 결국 국가장치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유래한다. 반공주의는 당시 전체 자유주의 진영에서 공유하고 있던 이데올로기로서, 특히 식민지에서 해방된 주변부 국가들에서는 일종의 민족 정체성으로 승격된다. 한국에서는 1949년 11월에 국가보안법이 통과됨으로서 본격적으로 그 기틀을 마련한 반공주의는, 한국전쟁과 거창민중학살(1951. 2)과 같은 집단적인 기억들을 통해 민중들에게 체화된다. 반공 이데올로기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보충하는 역할과 함께, 좌파를 비인간으로 취급하는 형상화 작업으로 ‘국민’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해방직후와 1950년대에 걸쳐서 반공주의는 강력하게 작동했지만, 아직 세련되지 않은 극단적인 폭력을 통해서만 유지될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들로 인해 이승만 정권이 집권하고 있던 1950년대에는, 정치적 불안정의 지표가 되는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한국의 國父를 표방했던 이승만은 정권을 잡은 이후에, 전국의 유지ㆍ반공인사와 친일파들을 중심으로 자유당을 결성한다. 이에 토지지주의 기반을 가지는 한국 민주당이 야당으로서 기능하지만, 둘의 이념적 차이와 계급기반은 동일한 것이었다. 하지만 통치성을 마련하기 위한 지배계급들의 연합전략들은, 계속해서 정치적인 분쟁을 가져온다. 우선 한국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져있던 1952년은 2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해였다.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접선거제 아래에서 지지기반이 약했던 이승만은 재선될 가능성이 적었지만, 이승만은 공화민정회ㆍ대한국민회ㆍ대한노동조합총연맹ㆍ농민조합총연맹ㆍ부인회ㆍ대한청년단 등의 어용단체를 만들어 자유당을 발족시켰다. 그 후 이들의 감시와 주도 아래에서 시/읍/면의회 위원선거를 하여 지방의회를 장악하고, 1952년 2월 대통령 직선제를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한다. 지방 의원을 동원하여 국회를 해산하라는 데모를 조직하고, 백골단/땃벌떼 등과 우파 깡패들을 동원해 야당 국회의원을 위협하고 부산에 계엄령을 내린다. 7월 4일 이승만은 경찰과 군으로 국회를 포위하고 직선제 개헌안을 기립표결로 통과시키고, 그 해 8월에 이승만은 2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54년에는 정치의 불안정을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사건인, 사사오입개헌이 발생한다. 그해 5월에 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이 압승하여 개헌안을 통과하는데 필요한 국회의원을 확보하자 이승만은 장기집권에 도전하였다. 1954년 9월 국회에서 3선 제한 조항을 철폐할 것을 핵심으로 하는 개헌안을 제출하였지만, 표결 결과 재적 203석 가운데 135표의 찬성에 그침으로써 개헌선인 136표에서 한 표가 모자라 부결되었다. 이틀 뒤에 열린 국회본회인 135.33에서 사사오입하면 135이므로 개헌안은 통과되었다고 선언하였고, 무리한 개헌으로 이승만 정권의 입지는 약화된다. 1956년 치러진 정/부통령 선거는 전국 곳곳에서 폭력이 끊이지 않고 대구에서는 개표가 중단되는 등 험악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이 선거에서 이승만이 당선되었지만 대통령 후보로 나선 조봉암은 투표자의 약 30%의 지지를 받으면서 이승만과 자유당을 긴장시켰다. 조봉암은 평화통일론을 주장하면서 사회적 민주주의를 내걸면서 반공이데올로기와 무력통일론에 대항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956년 진보당을 창당하였다. 하지만 이에 위기를 느낀 이승만은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국시에 어긋나며 조봉암이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그를 사형시켰다.

정치의 불안정이 지속되는 조건은 국내적 통치성을 확립하려는 지배계급의 기획이 관철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성립하고 세계체계에 편입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려고 했지만, 지배계급의 통치를 담당하는 국가장치-권력의 기능은 너무나 약했다. 하지만 이런 불안정성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는 한국 자본주의와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의 기원이 되는 시기로 평가할 수 있다. 지배계급의 정치를 위해서 국시로 승격되는 반공 이데올로기는, 이후 체제경쟁이라는 요소가 추가되면서 성장을 위한 조건을 변한다. 즉 반공 이데올로기는 ‘정치를 위한 것’에서 ‘경제를 위한 것’으로 전환되면서, 더불어 불안정 했던 통치성이 강화되는 조건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이 두 가지는 다르지 않다. 오히려 자본제 생산양식에 있어서 정치는 경제의 타자라는 말을 그대로 증명하는 것이, 반공 이데올로기의 성립과 그 전화라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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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시초축적의 시기

1950년대에 부족하나마 국가장치의 기능이 시작되고,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각종 이데올로기들이 확립되어 대한민국이 성립된다. 국가의 경제정책은 이 시기부터 시작되고 ‘폭력과 강제’를 통한 자본주의의 시초축적이 시작된다. 물론 한국에서 자본주의의 본원적 축적이 진행된 시기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을 수 있다. 조선 시대부터 자본주의로의 길을 향해 나아갔다는 자본주의 맹아론‘이나 아직도 근대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일부 주장을 제외하더라도,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 경영을 위해 실시한 정책들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이냐는 논쟁이 남는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을 이야기하는 세력들이 뉴 라이트 계열의 이론가들이라고 할지라도, 시초축적의 시기에 대한 규정은 역사를 바라보는데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 논쟁은 다루지 않고 1950년대를 미국 헤게모니의 세계체계에 편입되는 시기로서, 자본주의를 담지하는 새로운 계층이 수립하고 자본주의적 착취관계가 확대되는 과정, 생산자계층이 생산수단으로부터 멀어지는 과정 등을 중점적으로 보게 될 것이다.

1950년 4월에 실시된 농지개혁은 시초축적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농지개혁은 비록 대지주와 유산자의 이해관계에 맞춰 유상몰수/유상분배의 방법으로 진행되었지만, 이는 통치 파트너로서 일시적으로 지주계급을 보호하였던 것에 불과하였다. 지주들은 농지개혁을 기정사실화하고 농지방매를 서두르면서, 1945년에서 50년 사이에 이미 50% 이상이 싼 가격에 방매되었다. 유상분배를 통해 분배받았던 지가증권은 전쟁으로 인해 헐값에 팔아넘기는 경우가 많았고, 이를 통해 자본가 계층으로 전환했던 사례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농지개혁을 통해서 정권은 민중들의 토지에 대한 열망을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었지만, 평년작의 30%을 5년간 내야했다. 또한 전쟁으로 농업생산이 떨어진 상황에서 정부가 실시한 임시토지수득세법으로 인해, 농민들은 연간 수확량 가운데 절반 가까이를 착취당했다. 전쟁 동안 연간 100%가 넘게 물가가 오르는 격심한 인플레이션은 전체 물가지수를 낮출 것을 요구받았고, 이러한 가운데 미국에 의한 잉여농산물의 원조와 저곡가 정책이 실시된다. 이에 더해 월 10%를 넘기도 했던 사적 대부 또한 지주-소작인을 모두 붕괴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소작농은 도시의 잉여인구 층으로 지주는 전문직 등으로 전화하였다. 이처럼 농지개혁과 한국전쟁이라는 계기는 농촌에 기반을 두고 있던 세력들이 몰락하고, 발전주의적 공업화를 이루기 위한 계층들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1945년부터 61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31억 달러에 달했던 미국의 원조는, 지주-소작인의 몰락을 대처하는 새로운 계급을 형성하는 계기가 된다. 미국의 경제원조물자는 대부분 삼백공업(면/설탕/밀가루)으로 특징지어지는 소비재 산업의 원료였고, 이를 팔아 획득한 대충자금과 일제가 남기고 간 귀속재산들의 불하는 초기 독점재벌의 성장을 가속화한다. 이에 더해 경제부흥책의 일환으로 제시되었던 총 세출 가운데 31.6%에 달했던 재정투융자와 저환율-저금리 등은 이를 뒷받침했다. 특히 1953년에 창설된 한국산업은행은 산업 부흥 국채를 발행하였고, 이를 통해 대충 자금의 민간 융자 총액 중에서 산업은행을 통한 융자가 전체 75%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최저 3%에서 최고 18.25%에 이르렀던 은행에 의한 금리는 당시 인플레이션 율 보다 낮은 것이었기 때문에, 독점재벌들이 이를 특혜적으로 제공받을 수 있었던 상황은 그 자체로 자본축적에 유리한 것이었다. 국가에 의한 시초축적으로 인해 50년대 15대 재벌들은 총자본 축적을 28배 증가시킬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자금을 자유당의 정치자금으로 헌납하는 등 커넥션을 만들어 간다.

물론 이 시기에 형성된 독점자본이 그 이후 발전주의를 담당하는 세력으로 영속적으로 기능하거나, 세계 자본주의 체계에서 일정한 의미 있는 위치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당시의 원조가 한국을 대반공기지로 만들기 위한 임시적 성격을 띠는 것과 함께, 기본적으로 당시의 국가장치가 온전하게 기능하지 못하는 ‘정치적 불안정’이라는 상황 때문이었다. 그리고 농촌을 기반으로 하던 계층들이 몰락하고, 광범위한 과잉인구 층을 형성하였지만 이들을 포섭하고 규율할 수 있는 노동력 관리 체계 등이 확립되어 있지도 못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미국의 원조가 대폭 축소된 57년의 상황은, 불안정성을 가중 시키며 한국경제를 불황에 빠져들게 했다. 국가의 초긴축정책이라는 상황으로 인해 대다수의 중소자본 역시 몰락하였고, 1960년에는 총 실업률이 34.2%에 이르는 상황이었다. 당시 노동자 평균임금은 2만 153환이었으나 세대 당 생계비는 4만 509환이 되지 않는 상황, 원조 감소로 각종 간접세의 비중이 크게 늘어난 상황은 대중들의 불만을 자극하였다.

이처럼 1950년대는 이후 자본주의를 담지하는 새로운 계층과 기반을 형성하였고, 국가에 의한 경제정책이 시작되어 발전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놓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요인들이 발전주의를 위한 체계적이고 확고한 전략으로 자리 잡은 것은 아니었고, 일종의 실험기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후 더욱 강력한 국가가 완성되어 가고, 반공 이데올로기의 보충물로서 경제성장 이데올로기가 체계화되는 과정에 이르러서야 발전주의의 본격적인 길이 열린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950년대는 말 그대로, 축적을 위한 시초의 시기로 이해하자.


5. 계급투쟁의 지형

1950년대 후반의 일시적인 경제불황과 취약했던 국가장치의 조건 및 정치적 불안정, 그리고 민중들에 대한 체계적인 포섭전략이 부재했던 상황은 4. 19 항쟁이라는 역동적인 상황을 낳는다. 1960년 2. 28 대구시위, 3. 15 부정선거와 마산 봉기, 그 후 김주열 열사의 죽음은 대거 민중들이 참여하는 4. 19 항쟁을 가져온다. 이 결과로 4월 26일 이승만 정권은 하야를 선언하고, 그 후 장면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그 후 혁명적 정치의 부활이라는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고, 장면 정권 아래에서 혼란한 정국이 이어지게 된다. 이런 정세로 인해 결과는 박정희와 군부정권에 의한 5. 16 군사쿠데타로 마무리 되고, 본격적으로 발전주의를 향한 길을 걷게 된다. 이는 1950년대의 계급투쟁 지형에서 유래한다.

이 시기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모두 취약했던 시기로, 미국에 의한 폭력적인 방식으로 국가가 성립되고 한국전쟁이 발발한 상황이 사후적으로 나타난 결과라고 분석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이 시기는 사실상 계급투쟁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로, 결국 역사가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이 없던 시기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배계급은 부족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조직적 기반을 보충하기 위해, 정치깡패 등의 폭력적 ‘비’국가 장치를 통해 반공 이데올로기를 무조건 유포시켰다. 그리고 한국 전쟁과 좌파에 대한 극단적인 색출작업은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의 토대를 잠식했고, 피지배계급의 정치를 위한 조직들은 모두 붕괴하였다. 따라서 사실상 그 기원이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 민주당과 같은 야당세력이 대안세력으로 인식되고, 몇몇 정쟁들에서 드러났던 쟁점이 계급투쟁의 역사를 대처한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선전을 했던 조봉암의 진보당은, 유럽식 모델과 제 3세계적 발전주의 모델을 혼합한 변형된 ‘사회민주주의’를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역시 혁명적 정치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고, 이마저도 극단적 반공주의 아래에서 1959년 조봉암의 사형사건으로 마무리된다. 이후 몇몇 ‘혁신정당’ 들이 자유당-민주당의 북진통일이데올로기에 대항해, 평화통일론을 중심으로 등장하지만 5. 16으로 인해 모두 몰락하고 만다.

결국 사회운동을 위한 이념적 토대와 사회적/조직적 기반들이 모두 부재했다. 또한 시초축적이 진행되고 발전주의적 길 또한 미약했던 이 시기는, 경제적 착취 관계 아래에서 '구조적 힘‘에 기반한 초기 단계의 계급투쟁 역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결국 정치-경제-운동의 불완전성이라는 조건들이 이 당시의 역사를 과소결정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해방전후의 시기에 폭발적인 계급투쟁을 이끌었던 세력들, 빨치산 잔당/학살자 유가족/전향한 노동당원 등이 이 시기에 어떤 식으로 존재했는지는 쟁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 직후의 시기인 1960년대에 통일혁명당/인민혁명당 등 지하조직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혁명세력이 등장하고, 낮은 수준이나마 마르크스주의가 유통되었던 상황은 무엇에 기반 했는지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1950년대는 이런 활동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고, 공개적인 수준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들은 평화통일론을 중심으로 하는 논의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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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모든 것이 미성숙했던 시기로서 1950년대는, 세계 자본주의 체계에서 한국의 위치도 지배계급의 헤게모니적 통치성도 계급투쟁의 이념도 불안정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또한 이 시기는 불완전하나마 한국 자본주의의 기원이 되는 시기로서,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발전주의의 초석을 닦아 놓는 시기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반공주의 이데올로기가 정치적으로 표출되면서 그 타자로서 경제성장 이데올로기가 내포될 가능성, 그리고 주요 지배계급의 분파로서 지주계층이 몰락하고 자본가 계층이 떠오르는 것, 국가장치가 성립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는 경제정책들이 실시되는 것이 그 가능성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가능성들은 미성숙하게나마 한국 자본주의-자유주의의 기원으로 1950년대를 자리 잡게 한다.

Posted by 행진

2008/09/30 15:30 2008/09/30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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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보고] 성신 청소용역노동자들의 투쟁, 승리의 14일에 함께했습니다.


성신여대 사회대학생회장 정아

우리 생애 가장 따뜻한 추석
“명절 치를 일이 깝깝해도 이번 추석은 기펴는거야. 학생도 좋지?” 60년 살도록 이렇게 기쁜 날은 처음이라며거듭 말하시던 날. 본때를 보여줬으니 이제부터 시작이라던 한 조합원 동지는 까치발까지 딛으며 주먹을 하늘로 치켜드셨다. 고된 노동이야 몸에 익은 그녀들이었지만 매일같이 대리석 찬바닥에 몸을 누이며 버텨온 14일의 투쟁은 또 다른 고통과 불안이었다. 하지만 ‘신문에 날 정도로 기가 막힌 일’을 겪고 있는데 어떻게 포기하나며 오고가는 수정이들(성신학생들의 애칭)을 한명 한명을 불러세워 설득하고 알리길 14일. 너른 학교 곳곳이 더 이상 대자보를 붙일데가 없을 정도로 우리들의 투쟁이 빼곡히 가득찬 날에 그토록 고대했던 승리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깨진 플라스틱 그릇이나 쓰다 버리는 거지. 비정규직이라고 우리를 벼룩시장에 판거야 ”

개강을 맞은 대청소를 한다고 바닥을 유리같이 닦아놓은 다음날, 성신여대 청소용역노동자들은 벼룩시장의 신규 채용 광고를 보고서야 자신들의 해고사실을 알았다. 짧게는 2년간 길게는 20년간 성신에서 일해온 노동자들을 해고한 것에 대해 학교측이 밝힌 이유는 ‘노동조합을 만드는 배신행위’를 했다는 것이었다. 성신 재단은 성신여고에서 12년간 일하던 비정규직을 내쫓아 해고판정 받고서도 새로 결성된 노조와 그들과 함께하는 ‘문제 학생들’을 학교 발전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꼽아오다가 기상천외한 해고로 노조파괴를 시도했다.

맡은 구역의 청소를 다했어도 쉬는 것 보다 낫다며 매일 멀쩡한 잔디밭 풀을 뜯게 하는 혹사를 당할때도, 수시로 삼청교육대에 보내버린다는 소리를 들을때도, 행여 눈밖에 날까 지나가는 교직원 뒷통수에다 대고 인사할때도 그저 참고 참기를 몇해, 그래도 출근할 수 있는 반평짜리 대기실이 있다는게 고마웠다는 그녀들은 부당한 해고에 더는 분노를 삭힐 수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투쟁, 노조를 결성한 이후 학교의 부당한 조처가 있을 때 투쟁조끼를 입어보긴 했지만 막상 본부건물을 점거하고 들어가니, 온갖 회유와 건장한 학교 직원들이 휘두르는 욕설과 폭력 등 겪게되는 어려움이 수다했다. 파업 일차가 더해지면서, 투쟁가를 틀면 가사적힌 수첩을 한참을 뒤적거리고 나서야 뒤늦게 따라부르던 노래들을 꽤 익숙하게 따라부를 수 있게 된 이들도 있고, 또 목이 쉬어서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나마 열심히 구호를 외치는 이들도 있었다. 조합원들은 ‘미화원 일생’을 부를때는 모두가 하나같이 ‘꼭 내 이야기 같은’ 가사에 목이 꽉 매인다고 했다. 요즘 대학생인 나에게, 원곡이라는 ‘여자의 일생’은 도통 들어본적 없는 옛 노래이지만 조합원 동지들과 손을 꼭 잡고 이 노래를 연습할 때마다 가수가 아무리 빼어나게 부른다 한들 이보다 더 절절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몇 번씩 들었다.


참을 수가 없도록 노동자의 분노를
성신여대 말을 해라 대답 좀 해 봐라
노동자의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미화원 노동자를 생각하세요
아 총장님 말좀 하세요 눈물로 호소합니다

미화원 일생 - 미화원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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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가득 하늘색 풍선, 청소 아주머니들이 만난 ‘수정이’들의 지지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용역업체 현장소장의 횡포도 심했다. 꼭두 새벽부터 학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시간까지 노동하면서도 63만원을 받고 일하던 성신의 청소용역노동자들은 나랏법 어드매에 보장도 되어있다던 최저임금이라도 제대로 받아보자고 노조를 만들었다. 우리 학생들은 노조 조직시기부터 함께하면서 대기실에서 또 청소중인 계단에서 청소용역노동자를 만났다. 그렇게 가입원서가 쌓일 때 아직은 불안하던 우리의 확신을 분명히 해주었던 것은 수정이들의 노조건설지지 서명이었다.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활동에 더해서, 같은 성신의 구성원으로서 청소용역노동자들이 합당한 권리를 행사하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는 우리의 운동에 대해 학생들의 공감을 얻어가고 또 이를 확장해가는 과정을 통해 성신청소용역노동자들의 노동이 비로소 합당하게 인정받기 시작했다. 성신여대 청소용역노동자들과 우리 학생들은 비오는 날이면 이명박 욕을 실컷 하면서 같이 부침개도 부쳐먹기도 하고, 3.8 여성의 날 문화제에도 함께가면서 학생과 노동자가 함께 연대한다는 것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던 차에 전면적인 투쟁이냐, 노조활동의 포기냐는 기로를 맞았고 성신의 청소용역노동자들은 망설임없이 투쟁을 선택했다.

개강 날, 노조와 연대단위가 붙이는 자보만큼 학교도 전 교직원을 동원해서 선전전을 했다. 등교하는 학생들은 학교본부가 붙인 대자보와 청소용역노동자가 붙인 대자보사이를 번갈아보며 갸웃거렸다. 하지만 올해들어 학생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장사 안되는’ 학과를 통폐합하면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할때도 그랬듯이 ‘경쟁력 확보’니 ‘학교 발전‘니 하는 말을 명분으로 삼지만 그저 듣기에나 좋은 말뿐이라는 것을 이내 알 수 있었다. 많은 여성노동자들이 자녀들의 등록금을 감당하기 위해 불안정한 일자리나마 선택할 수 밖에 없지만 교육비는 어마어마하고 여성들이 받는 임금은 그를 감당할 수 없이 형편없이 낮다는 것에도 많은 수정이들이 공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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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며가며 청소용역노동자들의 투쟁을 본 학생들이 지정된 핸드폰 번호로 보낸 응원의 문자가 곳곳에 게시되고 건물전면을 덮는 대형 플랑카드에 청소용역노동자들의 투쟁의 정당함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가득히 모아졌을 때, 투쟁하는 청소용역노동자들은 직접 학생들에게 띄우는 편지를 써서 부착하는 것으로 답했다. ‘부끄럽다 나 못한다’ 하다가도 용기 내어 들어간 강의실에서 지지를 요청하는 발언을 하고 가면, 학생들은 건물 로비에 승리를 바라는 메시지를 담은 포스트 잇을 붙여놓는 것으로 답했다.

투쟁 14일차, 청소용역노동자의 유니폼과 같은 하늘색 풍선을 학교 곳곳에 수백개를 매달았던 날, 시선을 옮기는데 마다 마주칠 수 밖에 없는 투쟁지지 풍선을 외면할 수 없던 학교는 끝내 손을 들었다. 승리의 주역인 성신분회 조합원들은 ‘의리 빼면 시체’답게 제일먼저 연대해온 동지들과 수정이들에게 감사의 인사와 함께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며 향후 투쟁을 약속했다. “그동안 겪은 설움을 생각하면 점거14일은 양에도 안차지만 어서 돌아가서 학교를 깨끗이 청소해야 한다는 내 프로의식이 있으니 학교는 다행인줄 알라” 는 말로 ‘연약한 여성’이라는 말도, ‘청소가 누구나 쉽게하는 무가치한 일’이라는 말도 가당치 않음을 쩌렁쩌렁 선포하는 조합원들이었다.



 
여성리더십을 키운다는 대학 그리고 청소 용역 여성노동자들의 현실

3일이면 나가떨어질 줄 알았던 ‘아줌마’들이 임금의 절반씩을 중간 착취 당해온 지긋지긋한 하청 용역 인생을 끝내자고 말했을 때 ‘당연’하게 여겨지던 많은 것이 고발되기 시작했다. 하청 용역구조를 단박에 엎진 못했지만 몇 해전부터 적극적으로 움직임이 일고 있는 대학내 청소용역 노동자의 투쟁을 진척시켜 나가는데 성신여대의 사례는 원청 사용자인 학교로부터 합의문을 받아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여전히 비정규직인 조합원들에게는 매해 계약해지 시점이 돌아오겠지만 회사가 교체되더라도 노동조건을 훼손하면 계약을 해지한다는 약속과 더불어 고용안정에 대한 책임을 학교가 인정할 수 밖에 없음을 합의문을 통해 시인한 것이다. 몇 년 씩 학교에서만 일했는데 얼굴도 본적 없는 용역회사한테 가서 따지라는 말이 억울했던 조합원들로서는 바라마지 않던, 그리고 너무나 합당한 약속을 받아낸 것이다.

학교비정규직 노동자의 90% 이상이 여성이며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의 절반은 평균 임금이 85만원 수준이라고 한다. 그마저도 청소용역 노동자들은 사무직에 근무하는 학교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을 훨씬 밑도는 임금을 받고 있다. 반평 좁은 대기실에서 옷 갈아입을 때조차 관리자들이 벌컥벌컥 문을 열고, 남자 화장실도 청소하는데 창피한줄이나 알겠냐며 여성으로 취급하지도 않다가도, 툭하면 ‘집에 가서 애나보라’는 모욕적인 언사를 들었던 여성노동자들. 소장 눈에 나서 행여 내쫓길까 ‘애보는 건 쉬운건지 아냐’며 항변 한마디 못하고 매해 재계약 시기마다 떨어야했던 불안정한 일자리속의 여성 노동자들. 여성의 일이라고 여겨지는 재생산 노동에 대한 부당한 평가에 터무니없는 저임금을 강요 받아야 했던 여성 노동자들. 성신여대는 재학생들에게 여성 리더를 키운다며 각종 자기계발 프로그램들을 제시하며 성공한 여성에 대한 환상을 부추겼지만 학교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명백한 현실, 이땅의 대부분의 여성들이 처한 불안정노동과 빈곤을 감출 수는 없었다.


“ 앞으로도 함께하자 ”

투쟁을 하면서 사흘만에 6000천이 넘는 지지 서명을 받았지만 그저 감동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광범위하게 형성된 학내의 지지여론을 이어가는 동시에 직접 수정이들이 할 수 있는 실천들은 기획하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생존권이 위협받는 나이 많은 여성노동자에 대해 보편적으로 느끼는 안타까운 정서를 넘어 사회가 제시하는 여성발전에 대한 환상에 ‘균열’을 내기 위해서는 연대의 의사를 표현하면 혹시나 불이익이 당하진 않을까 고민하는, 그리고 비정규직이 안되기 위해 더욱 도서관으로 향하려는 인식들과 대결하는 다양한 실천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성신 투쟁은 학생운동 기층의 기반조차 사라지고 있는 지금, ‘대학생들을 다시 봤다’는 다소 성급한 낙관을 뒤로하고 ‘운동의 기반’을 다시 만들기 위한 작업들과, 학생운동과 노동자운동이 활성화될 수 있는 대중정책의 기획과 실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이번 성신의 투쟁은 청소용역에 종사하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조직하는 활동과 학생운동 활동가들이 대학에서 불안정노동을 제기하는 운동이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를 지속적으로 고민해야한다는 과제를 남겼다. 성신여대에서는 올해에 들어서만 학생들이 이미 2차례의 본부 점거 투쟁을 벌였던터라 조합원들이 ‘우리가 도중에 멈춘다면 연대하던 학생들이 위험해질 수 있다‘ 며 투쟁의 결의를 다지곤 했는데 이를 함께하는 학생들은 언제나 가슴뭉클했다. 승리를 자축하면서 “앞으로도 함께하자”고 했던 약속을 이제 어떤 내용으로 풀어갈까를 고민하는 것이 모두의 몫일 것이다. ‘밀착’만을 지상 과제로 하는 노학연대의 관계가 아니라 노-학 서로의 운동을 재구조화할 수 있는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학생운동과 노조의 자활력을 배가할 수 있는 교육사업, 당장 자신의 사업장에 투쟁사안이 없어도 불안정노동과 빈곤에 맞서 투쟁하는 이들의 문제를 노조의 문제로 받아 안을 수 있는 일상적인 연대가 필요할 것이다. 학생운동의 역량이 기여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헌신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가뭄에 단비 같은 귀한 승리를 마주하고서 많은 활동가들이 ‘성신여대의 모델‘을 확산하자고 말하고 있지만 위에 대한 실천이 담보되고서야 정말로 대학 청소노동자 투쟁의 활로를 열 수 있을 것이다. 성신여대도 아직 많은 과제들을 갖고 있다. 투쟁승리 이후, 모처럼 풍성한 가을을 즐기러 간 북한산 소풍에서 질렀던 ‘막걸리잔 치켜들며 지르는 환호성’을 오래도록 지켜내기 위해서는 정말 지금부터가 승부이지 않을까. 처음에 노조를 만들고 최저임금에서 사천원 더 받는 79만원이 그토록 벅찼다던, 하지만 멈추지 않고 다른 투쟁을 만들어내고 또 끝끝내 승리를 거머쥔 그녀들이 오늘 다시 결의하듯이 이제 시작임을 잊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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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행진

2008/09/30 15:17 2008/09/30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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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무건리 군사훈련장 확장 계획
즉각 철회하라!



지난 9월 16일, 국방부와 군은 오현리 주민들의 동의도 없이 주민들의 재산에 대한 감정평가를 강제적으로 실시하였다. 이 감정평가는 무건리 사격 훈련장 확장 예정지에 대한 토지보상을 위한 것으로서, 그 부지에 포함된 주민들의 땅을 강제로 수용하기 위한 첫 번째 수순이다. 경찰은 이러한 일방적인 감정평가에 항의하는 주민들 7명을 폭력적으로 연행하고, 파주경찰서 앞에 모여 연행자의 석방을 평화적으로 요구하던 주민과 사회단체 회원들 28명마저 불법 연행하였다. 그리고 18일에는 주민 3명과 화물연대 조합원 1명, 김종일 무건리 공대위 집행위원장과 이재희 무건리 공대위 상황실장에 대해 구속영장까지 청구하였다.

주민들의 요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훈련장 확장을 강행하는 모습이나 이에 대한 저항을 폭력으로 탄압하는 모습은 여러모로 평택의 대추리, 도두리의 그것과 닮아있다. 실제로 무건리 사격장은 평택 전쟁기지 확장 사업과 더불어 지난 1996년 확장 사업 계획이 발표되었고, 평택 대추리-도두리 주민들이 강제로 마을에서 이주당한 2007년 4월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이는 평택 전쟁기지 건설이 그러했듯, 무건리 군사훈련장 확장 또한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기조 아래 동북아 군사 질서를 재편하려는 기획 선상에 놓여있음을 의미한다.

노무현 정권이 평택을 미군기지로 내놓으며 미국의 새로운 군사전략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하위 파트너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였듯, 이명박 정권 또한 무건리 훈련장 확장을 통해 그 질서를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최근 미국발 금융위기가 세계경제를 큰 혼돈에 빠뜨리고 있는 속에서도 금산분리 완화, 자본시장통합법 국회 처리를 강행하는 등, 신자유주의 금융-군사 세계화에 더욱 적극적으로 편입하려 하고 있다. 이는 풀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격으로, 필연적으로 빈곤과 전쟁을 야기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민중의 생존과 평화에 직결되는 문제이다.

신자유주의 군사 세계화에 반대하며 동북아 민중의 평화를 요구했던, 평택 대추리의 뜨거운 함성과 처절했던 투쟁의 외침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명박 정권은 오현리 주민들이 요구하는 생존권과 평화의 권리가 확산되는 것을 폭력적인 탄압으로 가로막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이러한 행보가 다시금 주민들과 전민중의 분노를 불러일으켜, 그 분노가 빈곤과 전쟁에 반대하는 들불로 번져나가게 될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명박 정권은 동북아 민중의 생존과 평화의 권리를 무너뜨리는
무건리 군사훈련장 확장 계획을 즉각 철회하라!
빈곤과 전쟁을 세계화하는 신자유주의 금융·군사세계화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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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행진

2008/09/30 15:01 2008/09/30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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