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후기
                _[홍익대 생활자치도서관] 상해



원래 서울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기획되었던 빈활이 그것의 특성상 이번 용산사태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면서, 사실상 서울 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이번 홍익대에서는 (부분참가자 포함) 총 5명이 빈활 일정에 참가했다.

‘2009년 겨울 반빈곤연대활동 실천단’(이하 ‘빈활단’)은 용산 참사 현장 앞에서 대대적으로 발대식을 열고 기자회견을 가졌다. 각계, 정당, 사회단체 인사들의 격려를 받으며 빈활단은 서울 지역 내 뉴타운-재개발이 한창인 왕십리로 출발하였다. 우리를 맞이한 것은 허름한 건물과, 행여나 용역깡패가 깨부술 것을 대비해서 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여놓은 창문이었다. 그곳에서 과일과 과자 등 세대위 분들의 대접을 받으며 꽤나 겸연쩍어지기도 했다. 한창 지역현황을 소개받고 마을의 거리로 나가 선전활동을 벌였다. 중간중간 용역들의 시비가 무섭기도 했지만, 소리통으로 그리고 재치 있는 락카칠로, 재개발에 반대한다는 우리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사실이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그 후 순천향 병원으로 이동하는 도중(물론 그 후 일정에도 계속 이어지지만) 벌여냈던 지하철 선전선동은 너무나 생소했던 순간이자, 동지들의 격려를 받으며 가장 자신감을 드높였던 순간이기도 했다. 이런저런 일로 즐겁게 웃음을 나누며 도착한 장례식장의 분위기는 우리들의 입을 싹 다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용산사태가 있은 지 대략 2주가 지났음에도, 간담회에 앞서 상영한 영상물을 보면서 유족들은 아직도 흘릴 눈물이 남아있으신지, 연신 소매를 적시셨다. 간담회가 끝나고는 경찰의 움직임을 주시하기 위한 병원 규찰이 있었다. 첫날이라서 그랬는지, 피곤한 줄 모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샜다.

다음날 아침에 빈활단은 ‘쪽방촌’ 동자동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사회활동을 벌이는 ‘동자동 사랑방’에서 사전 교양을 받는 동안에는, 밤사이의 피곤이 몰려오는 바람에 난처했다. 점심식사는 그곳에 있는 공원에서 주민들과 함께 떡국을 먹는 것이었는데, 원래 주민들과 안면을 틔워보려는 계획이 그 떡국 맛만큼 맛깔나게 진행되지는 못한 듯싶다. 이후 쪽방촌 주민과의 심층면접 시간에는 2인1조로 나뉘었고, 나는 기대 반 두려움 반 속에서 어느 한 주민의 장구한 인생사를 꼼짝없이 듣고야(?) 말았다. 그날 너무나 길었던 평가시간에는, 이틀간의 일정 속에서 쌓인 고민들이 속속 터져 나온 시간이었다. 특히 일상 속에서의 여성주의의 실천에 관련해서는, 당장에는 해결할 수 없는 아득한 문제들이 많아 고민과 무기력증에 빠지기도 했다.

다음날 아침에는, 급기야 단원들의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오고야 말았다. 어떻게 식사를 했는지도 모른 채 용산 현장으로 이동해 간담회를 가졌다. 그 후 용산 재개발 지역의 주민들을 만나기 위해 조별로 나뉘어 출발했다. 도중에 만난, 옷가게를 하시던 한 주민 분의 말씀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다음엔 한창 규탄집회가 진행 중인 용산 구청 앞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어제 준비한 재치 있는 퍼포먼스를 선보였지만, 그 참사의 기억이 사무친 분위기는 너무 어둡고 냉랭했다. 집회가 끝난 후 용산 구청 담장에 있는 몇 억짜리(?) 조감도에 각종 예술을 펼쳐낼 때에는 느낌이 꽤나 통쾌했다. 바로 종로로 이동하여 추모집회 전에 선전전을 벌여내는 와중에, 이 몰상식한 공권력은 우리 앞에서 무력행사를 하고 불법으로 채증을 하는 등 각종 미친 짓을 자행했다. 이어진 추모집회에서도, 모임을 겹겹으로 3면을 둘러싸는 등 너무나 비인간적인 행위는 계속되었다. 안타까움과 분노를 뒤로하고 내일을 기약하며, 뒤풀이 장소로 이동했다. 뜨거운 만두와 고기 그리고 각종 안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본격적인 뒤풀이에 앞서, 단원 한명한명의 이번 빈활에 대한 소감을 들었다. 한 동지가 눈물을 흘리며 해준 이야기는, 또 다시 내 마음을 너무나 안타깝게 하고, 분노하게 만들었다. 물론 뒤풀이가 시작됨과 동시에, 이야기하고 노래하고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처음으로 참여했던 빈활 일정 속에서, 생소함에 두려웠기도 했고 위축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자신감과 도전의식으로 문제를 해결했고, 동지들의 칭찬과 격려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새로운 친구들을 많이 사귀어서 너무 좋았다. 서울과 지방 각지에서 나와 같은 뜻을 갖고, 그것을 펼쳐내어 보려는 同志들이었다. 서로 비슷한 고민 속에서 힘들어 하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같이 기뻐하고 슬퍼하며 그것이 감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쌓여만 가는 피로 속에서, 그 바쁜 일정을 소화해 내느라 다들 수고했다 고 말해주고 싶다. 이런 외부활동이 끝날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어서 다음 빈활이 왔으면 좋겠다!



두번째 후기
                _[연세대학생행진] 현승



며칠 전 술자리에서 친구가 교회에서 주최하는 봉사활동을 다녀온 소감을 이야기 해주더군요. 시골에 사는 가난한 농부들을 보면서 자기 처지에 대해 감사하게 되었다고요.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자각하며 살 것이라고. 하지만 그런 식의 단순한 구제활동이 그들 삶의 근본적인 어떠한 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 친구의 말이 안타깝게 들렸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에게 이번 ‘2009 겨울 서울 재개발지역 반빈곤 연대활동’은 굉장히 뜻 깊은 활동이었습니다. 철거민, 쪽방촌 사람들. 말 그대로 단어 그 자체의 뜻으로만 이해되던 그들의 삶이 저에게 직접 와 닿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그 체험을 저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만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투쟁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많이 남았습니다.

첫째 날, 10시에 모여 일정을 공유한 뒤 11시에 용산 참사현장에서 기자회견을 가졌습니다. 그 뒤 지하철을 타고 왕십리 뉴타운까지 가는 동안, 지하철 선전전을 가졌습니다. 비록 미온한 반응들이었지만, 시민들에게 정부와 투기자본의 악랄한 행패들을 알려낼 수 있다는 것이 뜻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학업에 대해서 애정 어린(?) 관심을 쏟아주신 몇몇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도 차암 감사드립니다.

왕십리 뉴타운 재개발지역에 도착해서는 허름한 건물에서 철거촌 주민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철거촌 주민분들은 저희를 배후세력이라고 하시면서 정말 반갑게 맞아주시더군요. 그 분들은 얼마 전까지 정말 평범한 ‘시민’들이었습니다. 집이 헐린다는 통보를 듣기 전 까지는요. 그리고 이들은 이제 ‘폭도’입니다. 경찰세력을 동원해, 용역깡패들을 동원해 강제 해산 시켜야하는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시민과 폭도, 정부에게 이 개념들은 그 잘난 ‘국익’을 위해 마음대로 바꿔 사용할 수 있는 종이 한 장 차이에 지나지 않는 용어들인가 봅니다. 지도부 분들은 재개발 관련법들에 대해 상당히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지도부를 제외한 분들은 자세하게는 아시지 못한 것 같아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쿠바 혁명에서 체 게바라가 읽고 쓸 줄 모르는 병사를 받지 않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의 투쟁이 일부 식자층 지도부가 이끄는 투쟁이 아니라 대중이 주체가 되는 투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왕십리 뉴타운 재개발 지정 구역을 한 시간 가량 돌아본 뒤 선전전을 마치고 순천향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곳곳에서 모인 개발지역 철거민 주민들과 함께 개발정책 문제를 주제로 간담회를 열었는데, 간담회 시작에 앞서 십분 남짓한 영상을 시청했습니다. 영상은 재개발로 인해 내몰린, 심지어는 죽임까지 당한 철거민들에 대한 영상이었습니다. 영상은 정말 감동적이었는데 초등학교 5학년 때 가을동화라는 드라마로 울고 난 이후에 스크린을 통해서는 눈시울을 적신 적 없었던 저의 대기록이 깨질 뻔 했습니다.

둘째 날에는 전철연 분들을 호위하기 위해서 3교대로 병원 규찰을 돈 뒤, 약간은 피곤한 몸으로 동자동에 갔습니다. 쪽방촌 주민들과 만나기 전 사전 교양을 학습했는데 놀라운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지역 주민들과 함께 떡국을 끓여먹고 2인 1조로 구성 되어 쪽방에 들어갔습니다. 쪽방의 환경은 정말 암담했습니다. 동남아시아에만 남아있을 것 같았던 풍경이 서울 중심에서 재연되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방문한 쪽방 할아버지께서는 평생 직장을 가져보지 못한 자신의 처지와 쪽방촌 주민들의 상황에 대해서 진솔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매우 체념적이셨습니다. 자신의 삶은 어떤 방법으로라도 더 좋게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게 그 분의 생각이었습니다.

면접내용을 공유한 뒤, 몇몇 동지들이 활동가 분들과 아웃리치 활동을 하는 사이 동자동 근처 봉사기관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주로 종교단체 차원에서 이들 노숙인들을 돕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선교의 목적을 지닌 기관이다 보니 여기저기서 노숙자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접해 들었습니다. 순천향 병원에 다시 돌아가 전체 평가를 가진 뒤 다시 규찰을 돌고 잠에 들었습니다. 저는 개인사정으로 인해 마지막 날 일정을 소화하지 못했는데 아쉬움이 남네요.

요번 빈활을 통해서 만난 분들과 둘러본 곳들은 전국적인 범위로 봤을 때 매우 작은 부분일 것입니다. 하지만, 빈곤층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빈곤이라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절실히 느끼게 해준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감상에 젖는 것으로 멈춘다면, 앞서 말한 봉사 활동을 갖다온 제 친구와 아무런 다른 점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되는 것이 정념으로만 가득 찬 투쟁이 아닌 과학적인 투쟁인 것이라는 것을 알고 좀 더 공부해 나가고 좀 더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결의를 다져 나갈 때, 반 빈곤 연대활동은 아직 끝나지 않은 연장선상에 있을 것입니다.



세번째 후기
                _[서울대학생행진] 동렬


안녕하세요. 동렬입니다. 反빈곤 연대활동을 다녀오게 되었어요. 지루하니 구구절절하게 일정을 늘어놓지는 않을게요.^^  고민들을 좀 늘어놓으려고 하는데, 고민은 회의 때 나오는 고민들에 대한 것이에요. 제가 알기로는 고 학번 분들도 인정하는 ‘현장활동’ 최대의 이슈인 ‘성별분업’과 ‘연대란 무엇인가’ 에 대한 고민인데요. 

밤에 규찰(프락치들 못들어오게 지키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도중 한분과 이야기를 나누었었는데 전철연의 집중집회를 나가려면 부부 중(흠 전철연의 구성원 중 대부분이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진 부부여서요.) 한분만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보통 남성분들이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하시고, 여성분들은 투쟁과 재생산을 담당하시고요. 물론 현실적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의 노동이 가치를 잘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라든지 하는 것 말이죠. 하지만 이런 상황은 명백히 고착화된 성별분업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런 조건을 인정할 수는 있지만 이런 상황을 긍정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그분들에게 계속(최소한 현장활동 때라는 아주 극히 짧은 시간이라도 하여도) 개입을 하고 그런 언어들을 발굴해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이때까지의 그런 개입들과 실험들이 축적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좀 아쉽네요. 그래서 나온 고민이 자꾸 나오고 해결책도 두루뭉수리하게 나는 것같습니다. 다음부터는 그런 실험들을 기록하고 축적했으면 좋겠네요. 아무리 많은 실험이 이루어져도 하나도 새겨지지 않으면 다시 해야 하잖아요? 사실 후배들은 우리들의 말을 들을 수도 있지만 한 5~6년 쯤 지나면 우리들의 글밖에는 안 남겠지요 --; 한 가지 제안하자면 이번과 같은 상황(용산참사라는 정세 하에서 급히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투쟁하는 분들에게 힘을 드리고 사람들에게 최대한 많이 알려하는 그런 상황)에서는 힘들었겠지만 여름 빈활 또는 농활 같이 9박10일 또는 그 이상의 시간으로 가는 현장활동에서는 재생산 노동을 일정에 추가했으면 좋겠네요. 작년 여름 빈활 같이 한조를 취사 준비와 설거지를 담당하게 한 것을 일정표에 글자를 넣었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만으로 어떤 효과가 생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은 그래도 조그마한 효과는 있지 않을까요?? 

그 다음이 ‘연대란 무엇인가’ 라는 화두에 관한 이야기에요. 저는 사실 이런 활동에는 어느 정도 강조점을 찍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깐 조직적 목표와 정치적 목표중 하나에 힘을 실어야 한다는 것이 될 수 있겠죠. 무엇에 방점을 찍느냐는 그 상황에 대한 정세적인 판단이 필요한 것인데 저는 이번 빈활에서 방점을 찍은 부분은 투쟁하는 분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과 함께 대시민 선전전을 하는 것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실 평가회의 때 제가 제기하고 싶었던 것은 어떻게 하면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줄 수 있었나.(규찰은 정말 좋았다고 생각해요. 몸은 힘들었지만 동지들과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하고, 12시간씩 두 조로 하시는 동지들의 일부라도 쉴 수 있으셨던 것은 어느 정도 힘이 되셨을 거니까요.)나 빈활에서 만들고자 한 흐름이 잘 만들어졌나? 그렇다면 어떻게 이어가야 할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나 주어진 일정에 수동적으로 결합했다. 라는 것은 ‘연대’라는 말을 좀 소극적으로 해석된 측면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기획단계부터 모든 사람이 모여서 회의하는 것은 어느 정도 비효율적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사람이 능동적이 되는 것도 아닌 거 같거든요. 빈활에 능동적으로 연대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알고 행동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빈활의 취지에 공감하고 그 목적을 공유한 후 행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구체적이지 않은 ‘수동’이라는 단어만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은 생산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이 빈활의 어떠한 부분이 빈활의 목적에 맞았나. 또는 그 취지에 맞지 못하고 효과를 내지 못했는지를 평가하는 것이 우리가 제대로 ‘연대’ 했는가를 아는 척도가 된다고 생각해요. 능동/수동은 일정으로 때울 수 있는 것이 아니기도 하구요.

Posted by 행진

2009/02/08 23:06 2009/02/08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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