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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년 대학 등록금, 동결 동결 동결 …
성신여대, 고려대, 상지대 등 서울 주요 사립대학들이 11월 속속 내년도 ‘등록금 동결’을 선언하고 나섰다. ‘등록금 동결’은 하나의 유행처럼 퍼져 국립대인 서울대 뿐만 아니라 지방의 주요대학들도 동결 선언에 가세했다. 이는 대학들이 발표한대로 경기침체에 따른 국민들의 경제여건을 고려한 조치로서 미발표 대학들 또한 내년 등록금은 동결 혹은 동결은 아닐지라도 인상폭 최소화와 장학금 확충 등이 실제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학들의 등록금 동결 발표를 바라보는 시선이 썩 따뜻하지만은 않다. 최근 몇 년간 각 대학들은 경쟁하다시피 등록금 인상을 추진해왔고 이에 반대하는 대학생, 국민들에게 ‘학교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혹은 ‘(남는 돈이라 폄훼되는)적립금은 그 나름의 용도 정해져있기 때문에 등록금 인하에 사용할 수 없다’며 냉대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난 10월 말까지만 해도 손병두 대교협회장(서강대 총장)이 등록금규제정책에 대해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주요대학들 또한 09년 등록금인상방침을 정했다고 발표한바 있다. 그런데 갑자기 등록금 동결하겠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니 주머니 사정상 희소식일지라도 찜찜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러한 말 많고 탈 많은 09년도 대학 등록금 동결,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등록금 동결의 배경이 하반기에 폭발한 경제위기였다는 점을 상기하며, 여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경제위기의 폭발, 책임과 비용은 민중에게로
지난 9월 가시화되었던 미국발(發) 금융위기는 전 세계 경제를 침몰시켰고, 한국에서도 실업의 증가와 인플레이션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지배계급은 이에 대해 반동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상황인데, ‘고통분담’ ‘선(先)경제발전’ 등의 이데올로기전과 동반하여 노동자민중을 빈곤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자 하는 법안들을 상정하고 있다. 최저임금법 개정은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이에 따르면 기존 수습기간 3개월간 최저임금의 90% 수준의 임금을 지불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을 6개월로 연장하는 등 마치 임금을 낮춤으로써 일자리를 더욱 많이 늘릴 수 있을 것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그리고 정부는 청년실업과 중소기업 침체 문제를 동시에 해소하기 위한 대책으로 ‘청년인턴제’를 내놓고 있다. 하지만 전반적인 노동유연화를 의도하는 정책들은 자본을 지원하기 위한 ‘눈가리개’일 뿐이며, 노동자의 고용 등 전반적인 노동조건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또한 주류 언론들은 ‘기업입장에서는 고용유연성이 떨어지는 정규직의 채용이 부담스러워 어쩔 수 없이 비정규직을 채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정규직 확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규직의 고용유연화가 이뤄져야만 한다’며 노골적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를 갈라치기 하고 ‘일자리 나누기’를 강권하는 현 상황은 노동자 내부의 각종 분할을 극복하고 연대할 수 있는 방향모색이 중요한 시점임을 지시한다.
09년 교육투쟁을 ‘경제위기의 책임을
지배계급에게 묻는 대학생들의 저항’으로!
09년도 교육투쟁 역시 전체 정세에 대응하는 전체 전략/전술의 구상 하에 배치되어야 하며 그것은 ‘경제위기의 책임을 지배계급에게 묻는 대학생들의 저항’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교육투쟁을 통해 ‘위기 비용의 민중전가 반대’라는 맥락에서 ‘등록금 인하’를 외칠 수 있고, 지배계급이 우리에게 떠넘기는 책임과 위기비용에 반대하는 구호들을 외치며 투쟁의 요구들을 모아나가야 한다.
등록금 동결과 맞교환(swap)된 것은 무엇인가?
다시 돌아가, 등록금 동결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학입장에서도 자기 딴의 재정위기에 시달리고 있고 단순히 한 발 물러선 것이라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동결 선언은 경제위기라는 상황에서 대학들이 정치적 판단을 내린 것이라 할 수 있다. 08년 하반기 경제위기 국면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은 금융위기의 여파로 재정위기를 맞이한 미국, 호주, 한국 등 전 세계 대학들이 공통적으로 제시한 해결책은 구조조정이라는 사실이다. 등록금 동결을 발표한 대학들이 ‘오히려 체질개선의 기회’라 선언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각 대학들이 재정위기를 어떻게 돌파할지를 구체적으로 예상해보자.
등록금 동결을 거래조건으로 묵인되는 대학의 상업화/기업화에 반대하자!
우선 ‘등록금’ 문제에 있어서 등록금넷, 한대련 등의 단체가 주축이 되어 동결을 넘어 “등록금 인하”를 주요 구호로 하여 09년 ‘등록금 대항쟁’을 계획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난 학생회 선거 당시에도 소위 운동권/비운동권이 공통적으로 등록금 문제 해결을 강조한 바 있기에 “등록금 인하”라는 구호는 좌우를 막론하고 공동의 요구로 외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비싼 등록금 깎자!”의 동의지반으로 구성된 투쟁이기 때문에 함께 투쟁에 나서는 주체 내에서도 다양한 쟁점들에 대한 이견 - ‘합리적 대학경영을 위해서는 학과통폐합도 가능하다’, ‘산학협동 강화를 통해 등록금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등록금이 싸지려면 교직원 등의 임금을 깎아야 한다’ 등 - 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굳이 반대하거나 선긋기를 할 필요는 없으나, 등록금/교육비용의 문제로 협소화되는 교육투쟁의 한계와 문제점에 대한 문제제기는 각 캠별 지형과 상황에 근거하여 시의적절하게 이뤄져야 한다. 한편 경제위기 상황은 (적어도 이데올로기적으로) 대학이 적극적인 이익창출을 위한 계획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서울대의 경우 법인화를 위한 각종 절차를 밟고 09년 2월말까지 서울대 법인화의 큰 틀을 마련할 계획이라 발표하였다. 또한 지난 11월 ‘서울대 기술지주 주식회사’를 출범하고 컨퍼런스를 진행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매출 1조원 목표’의 장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예정이며 서울대 이름/로고 등 상표 등록도 하는 등 대학의 ‘(이윤획득 가능한)법인화=기업화=SNU.com’에 최선두에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국립대학재정회계법>이 내년 상반기 국회에 쟁점화될 예정에 있는 상황에서, 등록금 인상에 대한 반대를 매개로 법인화 투쟁이 기존의 상층투쟁의 한계를 극복하고 어떻게 대중투쟁으로 확장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절실하다.
등록금 동결의 위한 교직원 임금삭감?
특히 경제위기의 상황에서 학생의 ‘교육권’과 교직원의 ‘노동권’을 부당하게 대립시키는 대학본부의 도발도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대학 예산 삭감으로 초빙교수, 강의교수 등은 줄이고 대신 시간강사를 늘리는 방식으로 지위가 불안정한 비정규직 교원을 확대하거나 대학시설노동자들에 대한 임금삭감, 구조조정 등이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당한 대립과 해결방식에 맞서 ‘위기 비용의 민중전가 반대’라는 목표에 수렴되도록 하는 투쟁방향과 구체적 대응형태가 각 캠별로 준비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최저임금법 개악과 관련시켜 학내 시설관리노조와의 연계를 통한 기획(ex. “등록금Down!임금Up!” 문화제 등)일 수도 있고, 3.8 여성의 날을 경유하며 여성노동권의 제기와 결부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각 대학에서 등록금 동결과 맞바꾼 각종 위기 모면책들에 대한 조사를 시작으로 함께 대응하기 위한 학내구성원들의 투쟁을 조직하기 위한 구체적 계획을 구상하며 실험을 전개하자!
청년인턴제 등 청년실업 해결의 기만성을 폭로하자!
새삼스럽지만 ‘청년실업’ 문제와 대학 5~6학년생 증가 문제가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26세 이상의 대학생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증가하고 전체 대학구성원 중 4학년이 차지하는 비율이 점차 늘어나 문제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노동부는 청년실업 대책으로 청년 인턴을 고용하는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는 ‘청년인턴제’를 내놓으며 위기를 봉합하려 하고 있다. 우리는 ‘청년인턴제’에 대한 비판을 가시화하여, 과잉교육과 과잉인구의 창출이라는 현 정세를 실업에 대한 문제제기를 통해 알려낼 필요가 있다. ‘청년인턴제’에 대한 정세적인 비판을 통해 정부의 청년실업문제 해결의 기만성을 폭로하고 경제위기의 책임을 명확히 묻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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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기
시리도록 추운 연말. 경제 위기의 폭풍과 물가 오름으로 서민들이 체감하는 08년의 겨울은 더 추운 것 같다. 이 추위를 강타하는?! 따스함을 전하는 손길이 곳곳에서 후원금과 나눔 행사로 한창이다. 정말로 따스한 마음을 모아 이땅에 함게 살아가는 내 이웃에게 전해주는 경우도 있지만, 기업의 이미지를 살리기 위한 술책이나 이제껏 팔리지 않은, 남은 물품들을 나누어 주는 행사가 대부분일 것이라 생각된다. 차디찬 겨울을 녹일 따스한 나눔을 하고, 그래서 세상이 더 살기 좋아질 것처럼 보여지는 것과는 달리 거리로 내몰리는 서민들의 생계는 더욱 불안한 상황에 놓여 있다.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의 기준을 결정하는 한국사회의 빈곤선은 열악한 최저생계비 수준에 머물고 있고 빈곤선이자 각종 사회복지제도의 기준선으로 작동하는 최저생계비는 가구의 수가 늘수록 개개인의 권리를 보장하기보다 그 위기를 가족에게 전가하는 식의 한계적 임금결정 방식이고, 노동자들의 최저한도의 임금기준을 결정하는 최저임금은 시간당 4,000원, 월 836,000원(주 40시간 기준)이라는 낮은 수준으로 결정되었다. 절대적 빈곤율과 상대적 빈곤율 모두 증가하고 있는 지금, 이명박 정부는 좌초된 현실을 경제 활성화를 통해 서민들의 고충을 덜어주겠다고 하고 있으나, 부유층에만 적용되는 종합부동산세, 소득세 등의 감면으로 사회적 불평등을 더욱 악화하는 방향의 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며, 결정적으로는 지난 18일 한나라당 김성조 의원의 대표발의로 한나라당-민주당이 함께 최저임금제도 개악법을 제출하였다.
물가 폭등, 경제위기 상황을 극복할 대안으로 정부와 자본, 보수정당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또 다시 가장 약한 비정규직 저임금 노동자들과 민중들을 희생시키려 하고 있다. 98년 IMF때 온 국민의 금모으기로 위기를 극복하려던 시도, 08년 숭례문 화재 때 국민들의 성금을 모아 숭례문을 재건하자던 이명박 대통령의 막말도 그랬다. 그리고 현재, 최저임금제도 개악법이 다시 경제위기의 상황을 민중에게 전가하여 위기를 극복하려는 시도 역시, 해고나 생계의 위협을 느끼면서 근근히 버텨왔던 노동자들, 고령자, 장애인, 청년신규취업자, 이주노동자 등 민중 전반에게 직격탄을 날리는 것과 다름 아닐 것이다.
1. 최저임금제도란?
최저임금 제도는 노동자에게 최소한의 생활수준을 보장해주고 노동자 내부의 소득격차를 완화하는 것, 따라서 최저임금제는 임금의 최고선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인간다운 생활을 위해 이 정도 이상은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는 최저 수준을 정하는 제도이다. 여기서 ‘최소한의 생활수준’은 법에 따르면 ‘근로자의 생활안정과 노동력의 질적 향상’이 가능한 수준임을 의미하며 최악의 생활을 겨우 면하는 수준이 아닌 ‘인간다운 생활수준’을 의미한다.
남한에서는 1953년에 근로기준법을 제정하면서 제34조와 제35조(당시 근로기준법)에 최저임금제의 실시 근거를 두었으나, 당시 경제가 최저임금제를 수용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이 규정을 운용하지 않고 있다가 70년대 중반부터 지나친 저임금을 해소하기 위하여 정부에서 행정지도를 해왔으나 저임금이 일소되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저임금의 제도적인 해소와 근로자에 대하여 일정한 수준 이상의 안정된 생활을 보장해 주기 위하여 최저임금제의 도입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이 제도를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였다고 판단되는 1986년 12월 31일에 최저임금법을 제정, 공포하고 1988년 1월 1일부터 실시하게 되었다.
국제적으로는 2008년 10월 국제노동기구의「1928년 최저임금결정제도 협약, 제26호」를 비준한 국가는 103개이며 「1970년 최저임금결정 협약, 제131호」를 비준한 국가는 51개국이며, 최저임금제도는 협약 미 비준 국가를 포함해 세계 120여 개국에서 시행되고 있으며, 한국은 지난 2001년 12월 27일 위 두 협약을 모두 비준하였다.
[국가가 노 ․ 사간의 임금결정 과정에서 개입하여 임금의 최저수준을 정하고 사용자에게 그 이상의 임금을 지급하도록 법으로 강제하여 저임금 근로자를 보호하는 제도가 지속적인 상승으로 근로자의 소득향상에 기여했고, 최근금융위기로 중소기업에 부담이 가중되어 최저임금법 위반과 취약계층의 고용기회의 축소 등 부작용이 발생하여, 저소득 근로자의 생활 안정과 취약계층의 고용기회 확대의 균형을 유지하려 한다]던 한나라당 김성조의원의 발의문은, 국내적으로도 국제적으로도 인간다운 생활수준을 보장하는 가장 기초적인 법이며 여전히 부족함을 토로하는 제도였던, 최저 임금제도를 개악함으로 해결 가능하단 말은 어불성설이 아닐까?
2. 남한의 최저임금 수준과 적용범위
남한의 최저임금 수준과 적용범위는 전체 노동자 임금 총액 및 평균임금 대비는 전체 노동자 정액급여의 31~35% 수준이며 임금 총액의 20~25% 수준이며, 다른 나라와 비교해봤을 때 풀타임임금 대비 최저임금 비율은 OECD국가 중 중하위권에 속하고, 제조업 생산직의 시간당 보수비용 대비 최저임금 비율은 20.1%로 스페인과 함께 가장 낮다. 또한 최저임금 영향률의 상승에도 불구하고 법정 최저임금을 보장받지 못하는 인턴이나 비정규직 노동자, 최저임금 위반사업장 종사 노동자가 매우 많으므로 실제로 법정최저임금의 적용을 받는 노동자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최저임금 위반이나 적용제외로 법정 최저임금을 적용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전체 노동자 11.6% 중 정규직은 5.3% 이고 비정규직은 94.8%으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기혼자인 여성은 49.6%, 고졸이하가 89.8%, 55세 이상이 29.2%, 25세 미만이 21.5%로 기혼여성일수록, 학력이 낮을수록, 어리거나, 나이가 많을 수록 최저임금에 미달한다. 법정 최저임금의 수혜자는 4.5%이고 나머지는 최저임금 적용에서 제외되는 노동자들이거나 최저임금법 위반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며, 최저임금 적용대상 노동자 중 기혼자가 무려 73.2%, 35~54살 인구가 40.1%, 55살 이상은 28.9%이다. 이는 실제로 최저임금 적용대상자가 미혼 단신 근로자가 아니라 부양할 가족을 둔 청, 장년기 노동자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3. 최저임금제도 개악법
1) 최저임금 감액적용 확대 및 적용제외
현행 최저임금법은 최저임금법 감액적용 대상으로 3개월 이하의 수습노동자, 감시단속 노동자 등을 규정하고 있으나, 사용자단체와 한나라당 등에서는 60세 이상 고령 노동자를 감액 대상에 포함 하였고, 수습노동자의 감액기간을 6개월로 연장 및 감액율 상향조정, 감시단속 노동자 적용제외 등을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고령을 이유로한 최저임금을 감액. 더군다나 현재의 고령인구 대부분이 국민연금 수혜대상자가 아닌 것을 감안하면 이들에 대한 최저임금 감액적용은 고령인구를 최악의 빈곤으로 몰아넣게 될 것이다. 특히 OECD 발표상 우리나라의 상대적 노인 빈곤율(전체 가구 중위소득의 50% 미만에 속한 고령자 가구)은 2006년 45%로 OECD 국가 중 최상위를 차지하고 있고, 2005년 OECD 평균 상대적 노인 빈곤율이 13%인 점을 볼 때 심각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감시단속 노동자(경비원)들이 대부분 고령의 노동자라는 점을 감안 한다면 최저임금의 목적이 ‘최소한의 생계임금 보장’이라고 했을 때, 연령 등을 이유로 감액․ 적용제외 대상을 확대할 경우 제도의 도입 취지 자체가 위협받게 된다. 정부는 2005년 최저임금법 개정 당시 스스로 ‘연소자, 양성훈련생, 수습노동자 적용제외’를 ‘수습노동자(3개월 미만)감액적용’으로 단일화했었다. 당시 정부는 생산성과 업무숙련도의 차이를 이유로 한 감액은 있을 수 있지만 그 기준이 연령 또는 훈련생 여부가 아니라 수습기간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점을 이야기 했었다. 그러나 그 3개월도 모자라 6개월이나 연소자, 수습, 훈련생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불안정한 노동을 야기시키도록 사용자들 편에 서서 감액기간을 조정하게 합법적으로 배려해주는 정부가 노동자들에게선 고맙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피눈물을 흘리게 할 것 같다.
2) 상여금 숙식제공 (현물급여) 포함
현행 최저임금법은 상여금과 각종수당, 현물급여 등을 최저임금 산정에서 제외하고 있지만 사용자 단체와 한나라당은 상여금과 숙식제공과 같은 현물급여를 최저임금 산정기준에 포함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숙식비는 ‘임금’이 아닌 ‘복리후생비용’으로 보는 것이 노동부의 행정적 해석이다. 최저임금에 ‘임금’ 이외의 항목을 포함하자는 것은 특히, 숙식제공의 대상자가 대부분 이주노동자라는 점에서 ‘이주노동자에 대한 최저임금 차별’로 이어지게 된다. 이미 정부의 이주노동자에 대한 심각한 공안 탄압, 최저임금 이하의 임금체불과 인권 침해를 당하고 있는 시점에서 회사는 필요에 의해 숙식을 제공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또 이 비용을 사용자가 부담하고 있는데 이를 최저임금에 포함할 경우 이주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힘겨워질 것이다. 아울러 이는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 철폐에 관한 국제협약> 및 <고용 및 직업에 있어서 차별대우에 관한 협약(ILO 제111호 협약)> 위반하는 것이며 중소기업들이 이주 노동자들을 ‘고임금’이 아닌 ‘인력난’의 차원에서 수요하고 있는 부분에서도 이 같은 조치는 이주노동자의 취업유인을 약화시키고 중소기업에 필요한 인력의 부족 현상을 부추길 가능성이 높다.
3) 지역별 최저임금제 도입
사용자 단체와 한나라 당은 각 지방자체단체 별 혹은 도-농 간 최저임금액을 차등해 적용할 수 있는 지역별 최저임금제 도입을 요구, 검토하고 있다. 지역별 최저임금 차등은 최저임금이 높은 특정지역으로의 노동인력 집중현상을 보이며 지역간 - 도 - 농간 불균형 발전을 부채질 할 것이다. 게다가 여전히 지역에서는 사용자들이 암묵적으로 최저임금 이하나 근근히 최저임금을 맞추는 정도로 임금체계가 불안정한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절대적으로 노동자들의 삶이 위태로워질 것이란건 불보듯 뻔하다. 외국의 경우 미국과 호주, 캐나다, 중국, 브라질 등 국토 규모가 연방 수준으로 넓어 지역 간 노동인력의 이동이 어렵고 경제적 격차가 큰 일부 국가에 한해 도입되고 있는 것을 볼때 이는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불일치하며, 예외적인 사례로 알려진 일본의 경우에도 1978년 이후 지역별 격차가 발생하지 않도록 중앙정부 차원의 정책적 노력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4) 최저임금결정체계
사용자 단체 등은 현행 노-사-공익 각 9인으로 구성되는 위원회 체계를 ‘노-사 배제, 공익위원 결정 체계’로 전환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최저임금결정제도는 각국 실정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으나 임금위원회(심의회), 중재재판소, 의회, 단체협약 효력확장 등 4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이 중 오늘날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으로는 임금위원회(심의회)와 단체협약 효력확장 방식이며, ILO 역시 대표성 있는 사용자단체 및 노동자단체와의 충분한 협의(협약 제4조 2호), 사용자단체 및 노동자단체의 대등한 참여(협약 제4조 3호) 등을 규정하고 있다. 공익위원이 노 - 사의 이익을 모두 대변하며 공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볼수도 없거니와 현재와 같이 공익위원 선출의 민주성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노사 배제’는 노동자와 사측의 갈등 자체를 무마하기 위한 시도라 보여지며,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고 위원회 결정의 공신력을 낮추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4. 나가며
기본적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 받아야 할 제도였던 최저임금제도가 입법취지를 잃고 새로운 개악으로 거듭나버리는 안타까운 현실이 바로 눈앞에 도래했다. 정부와 자본은 최저의 삶을 보장하는 제도마저 무너뜨리려는 시도를 최저임금개악으로 선제 공격을 날렸다. 이제는 건드려서는 안되는 것들까지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 같은 시기에 필요한 것은 우선, 저임금 불안정 노동구조에 대한 분석을 대중운동과 구체적인 실태조사를 통해 임금격차의 현상을 폭로하고 임금결정의 사회적 기준이 어떠한 문제점을 지니는가를 폭로해야 한다. 그리하여 생계비 문제와 연관된 임금 현실화 최저생계비 등 빈곤선을 끌어올려야 한다. 두 번째로는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한 여론화, 의제화를 지역사회 내에서 형성하여 공동의 실천과 토대를 마련해 가야 할 것이며, 세 번째로는 노동자 조직의 틀을 넘어서는 다양한 형태의 조직화를 가능하게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문제는 비단 최저임금개악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최저임금 개악이 통과되면 각종 사회복지제도의 기준선들이 무너져 복지는 바닥으로 내려않을 것이며 소득격차를 완화하는 입법취지를 잃은 최저임금개악법은 더욱 많은 비정규직과 차상위계층, 들을 만들어 내며 그저 최소한의 삶을 보장받았던 사람들 마저 거리로 내몰리고 말 것이다. 뼈빠지게 일하면서 근근히 먹고사는 사회가 아니라 최소한의 현실적인 생활임금을 받고 살수 있는 사회! 생활임금이 현실화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다시금 거리로! 투쟁의 깃발을 올려야 할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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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감동해서 눈물을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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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로 나가면 오고가는 버스마다 ‘여자를 울려라’는 광고를 누구나 봤을 법 하다. 이는 서울 특별시에서 2007년 7월 부터 추진되었던 “여성이 행복한 서울 만들기 프로젝트”, 줄여서 “여행(女幸)”프로젝트의 광고이다. 지하철 역 광고판을 통해서도 ‘길 등 설치, 보도 블럭 개선, 보육도우미제도’ 등을 적극 홍보하고 있다.
“여행(女幸)”프로젝트는 도시 생활 전반에 걸친 서울시의 새로운 여성정책명인데, <돌보는 서울․ 일있는 서울․넉넉한 서울․안전한 서울․편리한 서울> 이렇게 다섯 가지 분야에서 각각의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돌보는 서울’에서는 영․유아 플라자 설치, 급식도우미제도, 노인돌보미 바우처 제도 강화․확대 등의 정책들이 있으며 2010년까지 90개소의 공공보육시설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일있는 서울’ 은 여성들을 위한 창업스쿨, 탄력근무제, 육아휴직 활성화 계획 등이 있으며, ‘안전한 서울’에는 여성친화적 뉴타운 건설과 콜택시 운영 등, ‘편리한 서울’에는 공공시설의 여성화장실 변기 수 확충․편의시설 개선, 여성 우선 주차구획 설치 등 총 90여개의 사업들이 기획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서울특별시 여성가족 정책관(http://women.seoul.go.kr/)을 참고하시라.
여성의 일자리 창출! 바우처제도 강화?
시민의 행복지수를 높여 서울시의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복지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되고 있는 ‘여자를 울려라’프로젝트가 선뜻 반갑지만은 않다. 그 이유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여성의 현실은 실행력 있는 여성정책, 예산, 정책 대상의 확대 등을 통해서 보완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기륭투쟁, 이랜드 투쟁, KTX 투쟁을 통해서 우리가 목격해온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은 여성착취를 등에 업고 자라온 신자유주의가 이미 내재하고 있는 문제이다. 따라서 여성을 위한 사회적 일자리 확대, 직장과 가사의 양립을 위한 보육정책 강화와 같은 직접적인 지원책을 아무리 덧댄다고 해도 근본적인 여성의 위기를 해결할 수는 없다. 또다시 저임금 여성노동자들을 양산하는 악순환을 낳을 뿐이다.
실제로 ‘여행프로젝트’중 여성의 일자리를 창출해주겠다는 다양한 정책들은 가부장제에서 비롯되는 여성억압(성별분업이데올로기)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 없이 육아휴직 활성화, 노인 돌보미바우처 바우처(이용권)는 일정한 자격을 갖춘 계층에 대해 정부가 지불을 보증하는 일종의 전표로서, 특정한 재화나 서비스를 구입할 수 있도록 구매력을 높여주는 소득지원의 한 형태(보건복지부a, 2007)
, 아이돌보미 바우처 제도 등을 정책으로 내놓고 있다. 그런데 이 정책들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실행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은 둘째치더라도, 그간 사회서비스 시장화전략 속에서 우리가 밝혀왔던 바우처제도에 대한 비판, 더욱더 불안정한 일자리로 내몰릴 수 밖에 없는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어 보인다.
바우처제도는 사회서비스 이용자들의 선택권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과 서비스 제공기관의 경쟁을 유도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정부가 도입한 사회서비스 지원방식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바우처제도는 기업 간 경쟁과 비용의 문제 때문에 저소득층은 낮은 수준의 서비스를 이용할 수 밖에 없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들에게는 저임금, 불안정 노동을 강요하게 된다. 서비스 제공기관의 경쟁은 결국 기관에 소속되어 일하는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회서비스 공대위 ‘사회 서비스 공공성 확보를 위한 과제’ 참고.
이렇게 노인·아이돌보미 바우처제도를 더욱 확대·강화하겠다는 ‘여행’의 계획은 2006년부터 실시된 사회서비스 확충전략과 전혀 다르지 않다. 육아, 간병, 노인요양과 같이 전통적으로 가정에서 담당하던 것들을 복지수급자들이 이용권(바우처)을 주고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을 골자로 했던 사회서비스 확충전략은 여성들의 일자리를 창출하겠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여성노동자들을 서비스부문으로 확충하면서 사회서비스를 시장화 할 뿐이고, 노동자에게는 저임금을 강제할 뿐이다. 특히 사회서비스 부문은 여성이 가정에서 손쉽게 하는 일이라는 인식 아래,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저임금을 정당화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경제위기의 부담을 여성에게 전가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지속되는 한, 아무리 여성들의 일자리가 늘어나는 ‘척’해도 빈곤한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은 조금도 나아질 수 없다. 전사회적 이슈인 비정규직의 문제를 여성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그 본질을 밝혀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면, 여성이 일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서울시의 여행프로젝트는 ‘눈가리고 아웅하기’에 다름 아닐 것이다.
시혜가 아닌 여성의 권리로!
‘그 남자에겐 가족을 만날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그 여자에겐 가슴이 조마조마한 길입니다.‘
여행프로젝트 광고 중 ‘길등’편에 나오는 대사이다. 어느 여성이든 으슥한 골목을 지날 때면 한번쯤 불안을 느끼게 되는데, 이러한 여성의 심리를 잘 읊은 광고라는 생각이 든다. 여성에 대한 극단적 폭력인 성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어두운 골목길에 길 등을 설치해준다니 ‘이 정도도 감지덕지지.’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동안 운동으로서 제기되었던 반성폭력의 언어나 페미니즘이 광범위한 대중의 불만을 관리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변모되어가는 것에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지배계급은 신자유주의로 비롯된 정치의 위기와 대중의 불신 속에서 여성의 이미지를 적극 활용하며 정치개혁의 담론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는 ‘여성 친화적 뉴타운 개발’이라는 계획에서도 드러나는데, 무수한 서민들을 내쫓으며 추진되고 있는 뉴타운 개발에 대한 비판을 ‘여성이 행복한 주거환경’이라는 이미지로 포용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어두운 골목길에 길 등을 설치하고, 하이힐이 끼기 쉬운 도로의 보도 블럭을 교체하고, 화장실에 비데를 설치하는 것과 같은 ‘서비스’들이 여성을 위한 권리로서 말해질 수 있는 것들인가. 여기서 우리는 페미니즘이 지배계급의 ‘도덕적 의무’로써의 시혜가 아니라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착취를 폭로할 수 있는 언어임을 다시 확인해야 할 것이다. 마치 서비스 센터처럼 여성의 편의를 봐주는 것으로써 ‘여성이 행복한 도시’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여성 상위시대’라고 하는 여성발전담론이 사회전반에 걸쳐 착취 받고 있는 여성 일반의 현실을 은폐시켰던 것과 비슷하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기만적인 행정일 뿐이다. 여성의 복지를 위한 서비스 일괄은 좋다. 그러나 사회구조적으로 억압되어 있는 여성의 발본적인 권리를 발굴하고 제기하지 못한다면, 페미니즘의 언어는 신자유주의적 통치로 흡수되어 이중 착취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불만을 ‘관리’하는 것에 그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에 맞서, 대안 이념으로서의 페미니즘이 어떠해야 하며, 누구에게 돌려주어야 할 언어인지를 명확히 하자.
누가 위기를 해결하는가
다양한 여성정책이라는 이름으로 페미니즘을 남발하는 지배계급을 보면, 이제 여성주의 혹은 페미니즘이 운동하는 주체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피해갈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일정부분 페미니즘운동의 성과이기도 하지만, 여성들을 방패막음 삼아 발전해온 신자유주의가 이제 더 이상 여성의 현실을 모른 척 하고는 그의 위기를 해결할 수 없음을 말한다.
착취 받고 있는 이 땅의 여성들이 자신의 권리를 되찾는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넘어야할 난관들이 많다. 자본주의 경제를 존속시키기 위해서 지배계급에게 반드시 활용되어야 할 ‘가족’이라는 공간은 여전히 여성들의 발을 묶어두며 재생산 노동을 여성의 몫으로만 유지시켜 왔다. 재생산의 수단으로서 여겨지는 여성의 몸은 오직 도덕적 의무를 다하는 지배계급의 시혜 속에서만 구원이 가능하며, ‘노동의 유연화’를 달성하고자하는 각 기업들은 여성들을 저임금․불안정 노동의 현실로 내몰면서 이윤을 창출해왔다.
즉 저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라도 부족한 노동력을 메워야 할 주체이자, 많은 자녀를 낳아 출산율을 유지하고 가족 해체를 막기 위해 애써야 할 주체로서 이중 삼중의 역할을 여성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폭로하지 않고서 온갖 화려한 수사들을 동원한 ‘여행’프로젝트가 진정 여성을 행복하게 하기에는 공허할 수밖에 없다.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더 이상 참아낼 수 없는 여성의 현실에 대한 폭로였으며, 야만적인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가는 흐름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그녀들이 투쟁할 수 밖에 없었던 진실들, 어떠한 법과 정책도 담보해주지 않았던 여성들의 삶을 기만하며 여성 종속의 자본주의 원리를 은폐시켜버리는 일련의 무수한 여성정책들에 더욱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자! 여성의 이름으로 점점 더 세련되어지는 지배계급의 위기극복 전략에 맞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대다수의 여성들의 권리를 사회에서 갖추어야할 보편적인 권리로 제기할 수 있는 페미니즘과 그 실천들이 절실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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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 심화되는 빈곤에 맞서 희망의 연대로-!
2009 겨울 서울서부지역 反빈곤연대활동을 제안 드립니다.
1. 경제위기에서 벌어지는 빈곤의 폭발적인 증가
경제위기가 심화되고 있다는 소식이 매일 매일 들려옵니다. 미국의 큰 은행들이 파산했고, 한국의 중소기업들이 하나둘 망해가고 있으며, 노동자들의 임금은 동결되고, 반면에 물가는 오르고 있습니다. 경제 위기 상황에 이명박 정부는 서민들에게는 최저임금이 높다며 최저임금을 내리려 하고, 노동유연성이 덜 보장 되었다고 비정규직 기간도 늘리려 하며, 부자와 기업을 위해서는 법인세, 소득세를 인하하고, 종합부동산세는 무력화시켜줬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보편적으로 누려야하는 서비스인 사회공공성 영역마저 사유화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많은 이들의 삶이 힘들어지겠지만, 그 누구보다도 가장 크게 타격을 받을 이들은 한국 사회 1000만에 육박한다는 빈곤층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그/녀들의 일자리인 비정규직도 많은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경제 위기 속에서 언제나 가장 먼저 희생이 되었던 빈곤층, 그리고 빈곤층의 희생 속에 이루어지는 빈곤의 보편화, 그렇기에 바로 지금 이들 빈곤층의 목소리를 모아내는 것은 단지 이들만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2. 경제 위기 상황 속에서 새롭게 ‘가난해져가는’ 사람들에 대한 주목이 필요합니다.
지난 10월 17일 빈곤철폐의 날을 맞아 10월 초에 빈곤사회연대, 민중의 집, 진보신당 마포, 서부지역 학생행진의 활동가들은 성산동 임대아파트에서 최저임금 / 최저 생계비 현실화를 위한 실천으로서 실태조사를 진행하였습니다. 비록 많은 집을 돌아다니지는 못했지만, 실태조사를 통해 영구임대아파트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어려운 생활고 정부로부터 받는 기초생활수급액이 열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녀들이 제대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임금과 생계비의 2배에 해당하는 금액이 보장되어야 했습니다. 단지 일회성의 실태조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곳 임대아파트에서 기초생활수급을 받고 있는 이들과 함께 향후 거센 공격이 들어올 사회복지적 측면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서울 곳곳에의 뉴타운 붐은 서부지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더 깨끗하고 살기 좋은 주택들을 건립하여, 서울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서는 뉴타운을 건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신촌 아현동에도 뉴타운이 건립 중입니다. 세를 들어 살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한 순간에 용역 깡패들에 의해 위협을 받으며 자신이 살던 곳에서 쫓겨나고 있습니다. 주택보급률은 100%가 넘었지만 실제로 건설되는 그 주택들에서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입니다. 기초생활수급자와 장애인 등 많은 빈곤 계층이 거주하고 있는 동자동 지역도 예외가 아닙니다. 기초생활비가 끊길까봐 처우가 나쁜 비정규직에도 취업하지 못하는 그/녀들에게, 개발의 광풍은 곧 생을 포기하라는 이야기와 똑같습니다.
3. 서울 서부지역에서 반빈곤운동을 만들어가려는 분들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올 겨울 경제위기의 한파 속에서 거리로 내쫓겨날 사람들이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서민들을 집 밖으로 내쫓고 생계 활동을 막아버리는 깨끗한 주거공간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열심히 일해도 빈곤해질 수밖에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대안은 무엇일까요? 가장 기본적인 생계조차 유지할 수 없는 기초생활비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요? 위기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연대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것을 이번 2009 겨울 서부지역빈활을 통해서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다들 아시듯이 단순하게 2박 3일 일정의 빈활을 만들기만 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빈활이라는 하나의 사업으로 서울서부지역에서 반빈곤운동의 방점을 찍고, 빈활 앞 뒤로 다양한 사업들을 배치하면서 이를 지속적으로 이어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를 함께 만들어갈 분들이 필요합니다. 서울 서부지역에서 정세적으로 그리고 새로운 모습의 반빈곤운동을 고민하고 만들어가고자 하는 분들을 아래 자리에 모십니다. 많은 참여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 차기 기획단 회의가 1월 9일(금) 오전 11시 민중의 집에서 열립니다.
[2009 겨울 서울서부지역 反빈곤연대활동]
- 서부빈활기획단(빈곤사회연대, 사회진보연대, 민중의 집, 전국학생행진(건), 연세대학생행진, 홍익대학생행진)
- 일시 및 장소 : [가안] 2월 4일(수) ~ 6일(금) 2박 3일간, 서울 서부지역 곳곳
- 연락 : 연세대학생행진 수진) 010. 2977. 9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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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을 마무리하고 2009년을 맞이하는 지금, 1년의 대중운동을 돌아보고 이에 대한 평가를 진행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이미 많은 캠행진과 단위들에서 대중운동에 대한 평가를 진행한 것으로 알고 있고, 하지 못한 단위들이 있다면 빠르게 평가를 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동지들의 평가를 기반으로 해서 엄밀히 작성된 글은 아니며, 평가를 촉진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된 글이다. 이 글은 전국학생행진(건)(이하 ‘행진’)에서 주되게 이야기해왔던 입장을 정리하고, 대중사업들이 그에 걸맞게 진행되었는지를 평가해 보기 위한 자료로 활용하면 될 것이다. 이를 통해서 09년의 과제들을 도출하고, 더욱 가열찬 대중운동을 만들어 가자!!
1. 08년 정세와 행진의 입장
이명박이 당선될 수 있었던 조건은,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로의 깊숙한 편입과 관련되어 있다. ‘IMF 환란 극복’이라는 수사를 내세우며 등장한 김대중 정권과 그 뒤를 이은 노무현 정권은, 경제위기 극복을 이유로 한국사회를 금융축적에 적합한 구조로 바꾸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추진하였고, 이에 따르는 불만을 인민주의적 통치 형태를 통해 봉합하려고 하였다. 신자유주의적 개혁세력에 대한 불만은 지난 대선에서 ‘경제 대통령’의 이미지를 앞세운 이명박, 즉 지배계급 내 보수분파의 당선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지배세력 내의 개혁분파이든 보수분파이든 장기화된 불황과 같은 ‘특정한 정세’에서 어느 분파가 집권하더라도 대중들이 보내는 지지의 토대는 취약하다. 노무현과는 또 다른 방식의 인민주의적 요소를 동원하여 당선된 이명박 역시 조직된 지지세력을 대규모로 규합할 수는 없었고, 본격화된 경제위기의 심화 속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정책적 대응의 폭 역시 줄어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운동진영은 이명박에 대한 감정적 대응이나 정서적 반대를 넘어, 그 객관적 정세를 정확하게 인식해야 했다. 하지만 경제-정치의 위기와 함께 운동의 위기가 촉발하였고, 운동 세력들은 각개약진하며 ‘반신자유주의 전선’의 합력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
의회주의ㆍ상층력 중심의 교섭력 강화라는 민주노총-민주노동당의 몰정세적 전략은 전체 운동의 위기를 가속화했다. 이것은 소위 ‘종북파’ 논쟁을 거치며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분열로 드러났다. ‘주류’ 당-노조 운동에 대한 비판으로 총자본 대 총노동의 싸움을 강조하는, ‘현장주의’ 세력들이 등장하여 계급정당 건설을 가장 중요한 정치적인 과제로 보고 있지만, 이런 행보가 정세적으로 얼마나 유의미할지는 지켜보아야 할 일이다. 지배계급의 재민주화 전략과 함께 공격을 받았던 학생운동 역시, 전체운동의 위기와 한 치도 떨어져 있지 않다. 90년대 초중반 지배계급으로부터 도덕성에 대한 심대한 타격을 받은 학생운동은, 보편적인 저항정신의 상실 속에서 학생사회의 해체라는 상황으로 끊임없이 침잠할 뿐이다. 위기에 대응하여 학생운동의 과제를 등록금 투쟁과 같이 학생들의 사안으로만 한정해야 한다는 세력이 등장하기도 하고, 노동자 운동에 대한 지원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는 세력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학생사회를 규정하는 다양한 심급의 조건들에 분석과, 운동의 위기라는 상황에 대한 엄밀한 정세 판단이 없이는 학생운동의 위기에 대응하지 못할 것이다. 학생대중들의 상태를 선험적으로 규정하거나 예비노동자로서만 간주하는 편향은, 대중들을 움직이게 하는 구체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해 분석하지 못한 채 위기를 그저 체험하게 된다.
2008년 행진은 운동의 위기라는 상황에 대응하며, 다시금 보편적인 이념과 전망으로 운동을 ‘재건’할 것을 밝혔다. 이는 사회운동의 재건에 복무하는 학생운동이라는 말로 정식화되었다. 이를 위해 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정세적 계기들 속에 운동주체들을 형성할 것을 결의하였으며, 정세적 계기들로서 공공성 투쟁ㆍ불안정노동 철폐 투쟁ㆍ민중생존권 쟁취 투쟁 등에 주목하였다. 특히 이명박이 가시적인 성과를 얻기 위해 공공부문에 대한 구조조정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고, 이에 대한 분석과 투쟁과제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를 밝히기 위해 전국학생투쟁위원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아래로부터의 연대를 강화하여 지역운동을 활성화하자’를 주요한 투쟁방향으로 밝히고, 지구별 차없서 등의 사업에 결합하며 학생운동 세력들과의 연대투쟁을 도모하였다. 물론 지역운동이라는 과제는 08년 상반기에 갑자기 도출되지 않았다. 그것은 신자유주의가 야기하는 다종다기한 분할과 착취전략이 생산과 재생산 영역 전반; 지역을 기반으로 해서 관철되는 방식을 살피고, 반신자유주의 운동의 실내용을 밝혀내는 과정이었다. 또한 운동의 위기를 넘어, 아래로부터 운동 주체형성을 도모하는 거점으로서 지역을 사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역운동이라는 과제를 밝히는 과정에서 지역은 생산 현장에 대비되는 일종의 생활 영역으로 인식되며 부당한 쟁점이 형성되었다. 또한 캠이 속해 있는 지역의 민중운동과 연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으로 인식되기도 하였고, 캠이나 단위의 상황이 어렵기 때문에 지역운동은 힘들다는 평가도 있었다. 사회공공성 쟁취 투쟁이나 불안정노동 철폐 투쟁에 대한 오해도 계속해서 존재했다. 행진은 공공성이라는 것이 국가와 자본의 대립 속에서, 국가의 힘을 강화하는 방식이 아님을 밝히고, 또한 공공부문을 국가와 자본을 벗어난 시민사회 영역으로 보는 제 3섹터론 역시 비판하였다. 이와 함께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하는 것이 공공성 쟁취 투쟁과 등치될 수 없음을 밝히고, 정세적ㆍ전술적 계기로서 그리고 사회 전반에 대한 민중의 통제권을 높이는 투쟁으로서 사회공공성 쟁취 투쟁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사회공공성 투쟁의 ‘실체’가 제대로 밝혀지지 못한 채, ‘민중 통제권’ 쟁취와 같이 원론적인 수준의 인식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조건이 지속되었다. 물론 이는 전체 운동의 연대-연합이 만들어지지 않는 상황, 촛불 정국과 같이 우발적인 정세들로 인해 공공부문에 대한 구조조정이 지연되었던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불안정노동 철폐 투쟁 역시 비정규직 사업장에 연대하며, ‘비정규직 철폐’의 사안으로 한정되는 경우도 있었다. 불안정노동의 심화는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금융우위의 축적구조를 만들어 가기 위해 민중들의 삶 전반이 통제당하는 것을 가리키며, 따라서 불안정노동 철폐 투쟁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대한 반대라는 함의를 가지고 있다. 즉 노동유연화의 결과에 대한 투쟁이 아닌 원인에 대한 투쟁을 강조하는 것이며, 인간학적 차이를 타고 들어오는 분할 착취전략에 맞서 이주노동자ㆍ여성노동자와 같은 새로운 계급주체를 발굴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반기에는 그간 밝혀왔던 입장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정정하고, 가장 큰 정세였던 ‘촛불정국’에 대한 평가를 통해서 운동의 과제를 밝혀나갔다. 촛불정국은 ‘금융위기와 대안좌파의 과소결정’이라는 현 정세를 극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정세였고, 시민들의 저항으로 이명박 정권의 구조조정 공세는 주춤해졌다. 하지만 촛불정국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며 전열을 다진 지배계급은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를 다시 발동시키며, 한미 FTA 체결 촉구ㆍ공공부문 선진화 방안 등을 내세웠다. 이에 행진은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와 대결하고 사유화/시장화 저지투쟁을 통해, ‘反 MB’ 정서를 ‘反 신자유주의’ 연대 운동으로 전화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이와 함께 대안세계화 운동에 복무하는 학생대중운동의 중장기적인 방향을 마련하기 위해, 학생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복구하고 대중운동의 경로를 창출할 것을 결의하였다.
2. 2008년 대중운동을 돌아보며
2008년은 지난 10년간의 신자유주의 개혁분파들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신자유주의적 경찰국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 이명박 정권의 첫 집권기였다. 또한 금융위기라는 형태로 신자유주의의 위기가 가속화되었던 한 해로서, 한편으로는 운동의 위기가 비가역적으로 드러났던 한 해이기도 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행진을 포함한 운동진영은 다사다난(多事多難)한 2008년을 보냈어야 했다.
정권은 집권하기도 전에 ‘선진화’라는 이름으로 공공부문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고, 고교 다양화 300프로젝트/자사고 설립/영어 몰입교육 등 교육부문은 그 시작이었다. 2008년 교육투쟁은 시장화/사유화 저지 투쟁의 전초전이었고, 한해를 관통했던 전술 또한 공공부문에서의 투쟁을 주요한 정세적 계기로서 삼으려 했다. 공공부문에 대한 공격은 해당 부문 노동자들에 대한 구조조정 시도, 공기업의 민영화 정책 등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이는 복지부문을 포함한 재생산 영역 전반에 걸쳐 있는 것으로, 민중의 삶 전반에 걸쳐 통제를 강화하는 시도였다. 행진은 이 중 ‘사회서비스 시장화’ 전략에 주목하여, 재생산에 대한 통제가 여성들의 불안정 노동과 어떻게 맞닿는지를 밝히려고 하였다. 이런 문제의식을 ‘여성운동 네트워크’ 등과 함께 공유하고 ‘3.8 여성의 날’ 투쟁을 함께 진행하며, 사회서비스 시장화 문제를 알려나갔다. 불안정 노동과 성차화된 착취에 주목하면서, 꾸준히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연대를 진행하며 여성노동권을 알려나갔다. 특히 2008년은 경제성장이라는 미명 아래 노동자들에 대한 공격이 심화되고 장기 투쟁사업장이 늘어났던 한 해로서, 기륭/홈에버/재능/대학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헌신적으로 결합해왔다. 또한 민중의 삶 전반에서 빈곤의 문제가 나타남을 인식하고, 주거권-노점 등 생존권 문제에도 주목하였다.
2008년 전국학생투쟁위원회는 위와 같은 문제들을 대사회적으로 알려나가기 위한 투쟁이었다. 행진은 단독으로 ‘허세욱 열사 1주기 투쟁’을 기획하며, 07년을 관통했던 한미 FTA 정세를 알려내었고, ‘4.20 장애인 차별철폐 투쟁’과 ‘빈곤과 차별없는 서울 만들기’ 등의 사업에도 결합하며 투쟁을 만들어 갔다. 그러나 전학투위는 각 학생운동 세력 간의 인식차이를 극적으로 드러낸 투쟁이었는데, 투쟁 방향으로서 ‘지역운동’이라는 언명에 대해 지역과 현장을 부당대립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불안정노동 철폐 투쟁 역시 고용형태로서 비정규직 철폐라는 문제로 협소하게 인식되었는데, ‘총자본 대 총노동’의 투쟁이 중요하다고 인식한 세력들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불완전한 인식 속에서, 당면 투쟁 과제를 ‘단사에 대한 연대투쟁’으로만 한정하였다. 또한 ‘사회서비스 시장화 저지’의 경우에는 거의 논의조차 되지 못하였는데, 이는 운동진영 내에서 재생산 영역/여성노동권과 같은 의제들이 거의 인식되고 있지 못한 현실을 보여주었다. 그간 행진의 문제의식을 아우르며 결성했던 ‘전국학생투쟁위원회’는 당면 정세를 대중들에게 알려내는 선도적인 투쟁으로서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위에서 이야기한 인식차이를 좁히고 논쟁을 만들어 내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다.
메이데이 바로 다음 날인 5월 2일 시작되었던 ‘광우병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문화제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4개월간의 ‘촛불정국’을 만들어 냈다. 신자유주의의 경향으로서 궁핍화와 건강을 지켜주지 못하는 정권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가 과잉결정되며 생성된 ‘촛불정국’은, 운동진영들에 대한 대중들의 불신이 나타나는 계기이기도 했다. 촛불정국 기간 동안 계속해서 ‘시민과 노동자’ 혹은 ‘시민과 운동권’을 나누는 이데올로기가 존재해 왔으며, 시민들의 자발적인 저항을 무조건 찬양하고 조직된 운동진영들의 투쟁을 폄하하거나, 인터넷을 중심으로 새로운 운동의 패러다임이 등장했다는 평가가 있었다. 행진을 비롯한 각 운동진영은 이런 촛불정국의 형세에 뒤늦게(?) 결합하였고, 개입하는 행동 역시 일정한 혼란이 있었다. 물론 시기별 정세에 따라 초반에는 ‘깃발을 숨기고’ 대중들 속에 산개되어 분산된 단위로 선전-선동을 하기도 했으며, 점차 학내의 대중들과 함께 집회에 결합하며 광우병 쇠고기 수입반대와 떨어질 수 없는 한미 FTA 체결 반대와 반신자유주의의 내용을 알려냈다.
촛불정국에서 행진은 의미있는 투쟁을 벌여냈다. 촛불집회에 헌신적으로 결합하였고 학내에서 동맹휴업을 주도하며 대중들과 투쟁을 함께 만들어갔다. 또한 ‘미국 농업체계와 광우병’을 주제로 강연회 등의 교육사업을 벌였으며, 광우병 문제의 본질을 알려나가기 위해 노력하였다. 여름에 진행된 ‘대안세계화 학생포럼’과 ‘반신자유주의 촛불 선봉대’ 역시 촛불정국에 대한 개입으로 진행되었으며, 촛불을 전국적으로 퍼뜨리고 노동자 투쟁과 만나는 촛불을 선동하였다. 이를 통해 대중들에게 너르게 퍼져있는 ‘反 MB’ 정서를 ‘反 신자유주의’ 투쟁으로 바꾸어내기 위해 시도했다. 또한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 지구별로 주경복 선본에 결합하며, 이명박 정권의 시장화/사유화 정책을 저지하는 흐름을 만들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조직적ㆍ정치적 성과에 대해서는 평가의 지점이 있다. 특히 주경복 선거와 같은 경우 선거에 결합하는 정세적 근거는 무엇이며, 주경복 선본이 유의미한 연대체였는지, 지역-지구 운동의 활성화에 기여했는지에 대한 평가가 있었다. 이와 함께 촛불정국 속에서 행진은 예를 들면 회원수의 증가 등 눈에 띄는 가시적인 성과를 크게 거두지 못하였다. 물론 단기적인 양적확대가 운동의 성과로 소급될 수는 없을 것이며, 정치적 목표였던 ‘反 신자유주의’ 전선 형성에 행진의 개입이 어느 정도로 유의미했는가를 중심으로 평가를 진행해야 한다. 또한 여타 운동진영에 비해 정세에 빠르게 대응하여 대중을 선동하는 ‘정치선전단’의 역할에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을 것이다. 이는 정세에 대한 바빠른 대응이라는 과제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촛불정국을 거치며 잠시 주춤했던 정권의 시장화/사유화 전략은, 촛불이 사그라들기 무섭게 재개되었다. 8월말부터 정권은 ‘선진화 방안 로드맵’을 발표하며 민영화를 위한 수순을 밟아나갔으며, 비정규직 개악한 확대 시행 및 한미 FTA 체결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이와 함께 ‘新 공안정국’을 조성하며 촛불네티즌과 운동진영에 대한 탄압을 자행하고, ‘사이버 모욕죄’와 ‘집회ㆍ시위 구역 설정’ 등 반동적인 법안들을 상정하려 시도하였다. 하반기 행진은 지배계급의 공세에 맞서는 투쟁에 결합하며 불안정노동 철폐 투쟁에 연대하고 있으며,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흐름들에 동참하며 유의미한 연대-연합을 만들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9월 성신여대에서 벌어진 대학 비정규직 투쟁에 연대하며, 학내에서 대중들을 설득하고 투쟁을 승리로 만든 것은 모범적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성신여대에서의 투쟁은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결합과 시기시기의 전술 수립 속에서 유의미한 대중운동을 만들어 갈 수 있었고, 비정규직 투쟁에 있어 값진 승리를 안겨다 주었다. 행진은 ‘서울 사회공공성 연석회의’ 등의 투쟁에 함께하며, 운동의 연대-연합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이런 연대체를 통해 일제고사 거부 투쟁 등을 함께 했으며, 최근에는 전교조에 대한 탄압과 관련하여 공정택 퇴진운동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하반기를 강타했던 미국발 금융위기에 대해 지배계급들의 허구성을 알려내기 위한, 회원모임-월례포럼-강연회와 같은 일상적인 교육사업을 지속하였다.
물론 행진에서 펼쳐낸 1년의 대중운동이 위에 서술되어 있는 것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1월 전국대학생대회와 총회, 5월의 광주순례단, 7월의 빈곤철폐 현장활동과 문예운동게릴라캠프/교육캠프, 여성행진의 사업들을 진행하였다. 물론 행진 활동가들이 학생회/동아리/문예패/생자도 등 대중단위를 통해서 활동을 벌여나갔으며, 대중과 융합하기 위해 수많은 고민과 노력들을 하였을 것이다. 하반기에 진행한 학생회 선거 평가는 다음 글에서 평가를 할 것이다.
3. 2009년 학생회 선거 평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와 미국발 경제위기 등의 영향을 받아 ‘운동권 총학생회가 부활했다’는 분석이 들려온다. 건국대ㆍ경희대ㆍ고려대ㆍ국민대ㆍ숙명여대ㆍ한국외대ㆍ충남대 등 올해 비운동권 학생회가 수권하던 곳에서 한대련 계열의 선본들이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생회 선거를 둘러싸고 학교 당국의 개입ㆍ부정선거ㆍ세칙에 근거하지 않은 무원칙적인 행위 등이 난무했던 올해, 우리는 학생사회가 일련의 사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자정능력을 잃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했다. 우리는 지금의 상황이 총학생회 중심의 학생대중운동을 벌여내었던 이전의 상황과 같지 않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과반학생회ㆍ단과대 학생회ㆍ각종 위원회 등 총학생회와 톱니를 맞춰야 할 대중단위들은 급속도로 해체되었고, 그 위상 또한 복지를 담당하는 기구 정도로 인식되기도 한다. 또 폭발적인 대중운동의 성과를 학생운동의 자산으로 구조화할 수 있었던 80년대와는 다르게, 지금의 학생대중운동은 촛불 정국으로 터져나온 정권에 대한 불만 등 정치적 쟁점들을 확장하거는 데에 일정 실패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운동권 총학생회가 부활했다’고 분석하는 것은 굉장히 단편적인 분석에 머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소위 비권 학생회라고 부르는 단위들에서도 ‘등록금’과 ‘촛불’에 대해 발언하며, 동맹휴업을 함께 하고 거리에 나섰으며 운동권과 비운동권의 구분이 허구적임을 스스로 말하고 있다. 이런 변화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학생회 선거 시기에 행진에서 내었던 입장들은 얼마나 유효했고, 그것을 실천적으로 풀 수 있었는가?
행진에서는 ‘학생회 선거의 의의와 목표’를 통해 몇 가지 목표를 세웠다. 그것은 경제/정치/운동의 위기 속에서 학생운동 역시 대중과 융합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바꿔내기 위해, 현재 학생운동이 서 있는 조건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그간의 학생회운동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 학생운동/학생회 운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개조’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학인들의 삶을 자기계발이 아닌 자기통치로 이끌기 위한 학생운동의 혁신을 지체 없이 단행하는 장(場)으로 만들 것을 결의하였다. 이를 위해서 1) 학생회라는 공간을 어떻게 대중운동의 경로로, 대안세계화 운동의 거점으로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계획’을 세울 것을 결의하였다. 이는 금융화에 대한 비판을 전면화하고, 대중교육을 비판하면서 지식에 대한 민중의 권리를 옹호하고, 페미니즘을 저항의 언어로 재구성하자는 등 신자유주의 비판을 더욱 구체화하는 것이었다. 2) 학생회라는 공간이 대안세계화 운동의 이념에 걸맞는 조직체계를 갖도록 개조하는 목표를 세웠다. 학생운동을 포함한 전체운동의 위기 속에서 각 운동들은 독자적으로 구조화되어 상호 영향력을 발휘하기 힘든 상황에 처해 있고, 대중운동 없는 대중조직의 분열은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다. 이에 대안세계화운동의 주체형성에 가장 중요한 물적 토대로서 '지역'을 사고하고, 지역에 기반한 사회운동의 활성화를 통해 전체 운동을 혁신해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3) 셋째로 학생회라는 공간을 민주주의를 학습하고 훈련하는 장으로 복원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신자유주의적 사회재편 과정이 만들어내는 폭력과 기본적 권리의 박탈에 맞서 분절화-개별화 되어 있는 대중, 그/녀들간의 상호갈등과 적대로 표상되는 대학사회에서 대학 내 제 구성원들이 보편적 권리를 쟁취하고 삶의 위기를 극복하기위한 직접행동에 나서기 위한 공존과 연대의 원리를 밝힌 것이다. (행진 뉴스레터 선거 특별호 참고)
이런 내용을 담아 ‘위기에 맞서 연대로, 당신은 리얼리스트!’라는 모토를 내걸고, 학생회-학생사회/불안정노동/교육/페미니즘 각론을 제출하였다. 제출된 모토와 각론이 선거지형에서 어떠한 효과를 만들어냈는지를 평가할 때에는 두 가지가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첫 번째는 특히 미국 발 금융위기가 심화된 이후 ‘금융위기’와 ‘연대’라는 화두가 대중들을 설득하고 주체화시킬 수 있었는지가 평가되어야 할 것이고, 두 번째는 대학의 대중의식지형과 운동주체들의 주체적 역량이 더 열악해진 시점에서 ‘선거의 의의와 목표와 모토, 각론이 선거 공간을 통해 쟁점화 되는 것이 물리적으로 가능한 것인가?’라는 문제가 토론되어야 한다. 이는 아직까지 남아있다는 ‘학생회 선거의 물질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엄밀하게 따져보는 것과도 연관될 것이다.
모토가 ‘바른 말’로 남는 것이 아니라 대학인들에게 행동양태를 제안하고 그 과정에서 갈등을 일으킬 수 있어야 할 것인데, 많은 경우 행진의 모토가 추상적이고 바른 말로 남아버렸다는 평가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는 결국 위기가 사람들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포착하고, 대중들의 의식이 존재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위기’에 대한 인식을 하게하고 ‘연대’의 실천태를 구체화하는 작업이 풍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올해 성신여대처럼 미화노동자들과 학생들의 투쟁이 있었던 곳은 상대적으로 풍부하게 모토를 풀어낼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투쟁의 경우 학내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서로의 권리를 지지하고 연대하기에 좋은 조건이기도 했지만 학생활동가들이 지속적으로 선전선동하고, 학생들이 동참하고 지지할 수 있는 실천태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수정이들의 싸움’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금융화에 대한 이해를 강조하는 것은 대중에 대한 교육과 계몽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다종다기 한 전술을 구사하는 과정에서 대중들이 위기에 처한 자본의 속성을 파악하고 그에 맞설 수 있는 다양한 실천, 저항 이데올로기를 구축하는 문제이다. 지금 세계 자본주의가 위기라는 것은 조선일보도 알고 있고, 지배계급부터 모든 운동진영에 이르기까지 ‘위기’를 말하고 있다. 행진이 발전시켜 온 금융・군사세계화에 대한 분석은 정세적인 투쟁 속에서 지배계급의 위기담론과 변별점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행진은 그간 학생회 선거에서 ‘친근하고 세련된 이미지’에 강박당하며 복지 공약을 남발하거나, 은연중에 학내/외를 가르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정책을 낸 것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평가하였다. 학생회 선거를 진행한 각 단위에서는 이주노동자한글학교/대학 비정규직 권리찾기 Project/리얼포럼/펀드 브레이크/빈곤 없는 **대 만들기 등의 공동 공약은 이런 고민에서 제출한 것이다. 즉 소박하더라도 학생사회의 재구조화에 기여하고 대중들과 함께 하며, 신자유주의가 파괴하는 권리들을 되찾기 위한 대중정책을 제시한 것이다. 이런 공약들은 2009년에 각 학생회와 대중단위에서 활용될 것이고, 대중정책을 실천하는 과정 속에서 더욱 발전할 것이다. 물론 복지공약을 남발한 것에 대한 비판이 ‘선본의 선명성을 부각시키는 것’, 입장만을 ‘남발’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학생사회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대중운동을 진행하기 위해 선거를 진행했다면, 대중들과의 융합을 위한 끊임없는 활동태를 고민해야 하며, 싸이클 속에 들어있는 소위 ‘조합사업’에 대한 재정비를 고민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선본의 입장을 강변하는 선거는 대중운동에 대한 긴장감과 실력을 잃어버리는 것이며, 학생사회의 재구조화라는 과제는 하염없이 축소될 것이다. 또한 추후의 과제를 제출하기 위해 진행하는 선거라고 해서, 예상하지 못했던 쟁점과 단위의 정세적인 사건에 대해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편향은 정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빠르게 대응을 하며 선거 시기의 논점을 만들어야 할 것이며, 그것이 학생회 선거라는 열려진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이다.
행진에서 제출한 각론과 대중정책들은 학생회 선거뿐만 아니라, 각 단위에서 진행한 자치학교나 ‘금융위기 해결 실천단’과 같은 사업들을 통해 대중들에게 알려내었다. 대중정책들을 풀어내기 위해 진행된 사업들이 얼마나 의미가 있었으며, 이를 통해 대중운동에 대한 긴장감을 어느 정도 획득할 수 있었는지 꼭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런 평가를 통해서 08년도 대중운동의 성과를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더욱 힘찬 대중운동을 벌여나가야 한다.
4. 남겨진 과제들
연말연초! 현재 계급투쟁의 핵심대립지점은 어디이며, 우리의 대중운동은 어디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는가? 경제위기는 실물경제로 이어져 인천-부평의 GM 자동차 공장이 휴업에 돌입하였고, 공장 공동화 현상 및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대대적인 감축이 예상된다. 대학가에서는 새삼스럽게 청년 실업과 교육연한의 증대가 이슈로 떠오르고 있으며, 정부에서는 ‘청년인턴제’의 도입 등을 통해 문제를 봉합하려고 하고 있다. 정권에서는 우선 금융분야에 대한 위기대응을 하고 있는데, 300억 달러 규모의 한-미 통화swap에 이어, 얼마 전 한-일ㆍ한-중 통화swap 체결을 통해 달러 유동성 위기 우려에 대한 선제적 조치를 취했다. 또한 실물경제의 심각한 타격에 대한 정책으로서 한국은행을 중심으로 한 중소기업에 대한 20조원 기금 조성을 통해 자기자본비율을 높일 수 있도록 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이미 자동차ㆍ건설부문을 선제적으로 하는 이른바 실물경제에 파급되고 있는 위기의 폭이 예상을 넘는 수준이라는 것을 정부에서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최근 한나라당 김성조 의원이 발의한 최저임금법 개악안이 대표적으로 보여주듯이, 지배계급은 경제위기에 대응하여 민중들을 공격하는 대대적인 조치를 취하고 있다. 지역별/연령별(60세 이상) 최저임금 차등부과 및 숙식비 공제 한도를 골자로 하는 이 법안은, 최저임금을 낮춤으로서 더 많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비정규직법 또한 기간제와 파견근로자의 고용기간을 현행 2년에서 연장하고, 32종으로 제한된 파견 허용업무도 확대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등 크게 개악될 예정이다. 일주일에 15시간 미만 일하는 노동자를 기간제 근로자 사용계약에서 제외했지만, 개악안에서는 20시간 미만으로 적용 제외 대상을 확대할 방침이다. 전반적인 노동유연화 기조와 연관된 이러한 정책들은 자본을 지원하기 위한 ‘눈가리개’일 뿐이며, 노동자의 고용 등 전반적인 노동조건은 더욱 악화될 예정이다. 또한 정기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복지예산안에서는 기초수급생활자의 수를 대폭 줄이고, 의료급여의 혜택 역시 축소하고 있다. 복지영역에 대한 공격은 이명박 정권의 큰 기조인 시장화/사유화 흐름과 맞물려, ‘예산 합리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지속적으로 민중들에게 경제성장에 대한 환상을 퍼뜨리며 이데올로기전을 퍼뜨리며, ‘사이버 모욕죄’ 도입과 언론 장악 시도에서 보이듯이 민중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 있다.
이에 대한 운동진영들의 상황은 어떠한가? 한국진보연대 등은 최근 민주당과 함께 ‘민생민주국민회의’를 꾸리고, 사안별 연대를 통한 광범위한 ‘반이명박 정선’을 추동한다는 계획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사안별 연대라는 명목으로 원칙없은 조직확장에만 주력하는 것이 운동의 위기를 절대 극복할 수 없고, 당면정세에 대응한 합력창출마저 왜곡될 가능성이 크다. 원론적으로 다시 강조를 하면 현재 중요한 것은, 운동의 위기를 넘어 다시금 운동을 ‘재건’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념과 전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학생운동 역시 ‘사회운동의 재건’이라는 과제에 복무할 수 있는 재구조화가 필요한 시점이며, 이는 정세적 계기들 속에서만 확립될 수 있다. 이것은 보편적인 ‘반 신자유주의 전선’을 형성한다는 것과 조금도 다른 말이 아니다. 행진에서는 촛불정국을 거치며 확산된 ‘반 MB 정서’를 ‘반 신자유주의 투쟁’으로 전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하였고, 시장화/사유화 저지투쟁이나 촛불 정국 등을 그 계기로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투쟁의 계기들을 찾아나가며 구체적인 언어로 대중들에게 말해야 하며, 구체적인 대중정책으로 융합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해나가야 한다. 일상적으로는 강의실ㆍ자치공간을 돌아다니며 선전선동을 단행하고, 목표와 과제를 잘 설정하는 가운데 이주노동자 한글학교/학내 비정규직 권리찾기/월례포럼/빈활과 같은 실험들을 해나가야 한다. 대중운동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캠 행진의 위상과 임무를 잘 설정하고 활동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중운동을 활동가들끼리 진행하며 자족한다거나, 투쟁 동아리화가 되는 것은 언제나 경계해야 하는 편향이다. 행진의 강화는 행진 활동가들의 강화로, 이는 다시 대중운동의 강화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지금까지 08년 행진의 입장과 대중운동들을 간략하게 돌아보고, 현재의 정세와 09년도 대중운동의 과제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다시 한 번 언급하듯이 이 글은 평가를 위한 하나의 자료일 뿐이며, 엄밀하고 구체적인 평가는 동지들의 몫으로 남겨놓는다. 연말연초의 설레는 기분에 들떠 부유하지 않고, 차분하게 지난 시간의 활동을 되돌아보며 평가와 결의를 하기를 권한다. 09년도 풍성한 대중운동을 결의하며 글을 마친다!!
Posted by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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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발간사]
붕뜬 시기, 마음을 다잡고 다시 앞으로!
2학기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입니다. 11월에 진행했던 학생회 선거와 대중사업들에 대한 평가도 모두 진행하셨을 것이고, 현재는 굵직한 일정없이 기말고사를 보고 있는 동지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러는 사이에도 정세는 시시각각으로 바뀌며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듭니다. 각종 경제전문단체들에서는 우울한 2009년의 경제전망들을 내놓고 있으며, 더 많은 일자리를 더 창출한다는 명목으로 개악된 최저임금법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많은 대학들이 등록금 동결을 발표하며 고통분담을 한 것처럼 생색내고 있고, 교육부는 전교조와 ‘좌파’ 교과서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고 있습니다.
굵직한 정세도 일정도 없는 것이 요즘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어떤 곳에서 계급투쟁이 터져 나올지 모르고, 일상적인 대중운동이 중요한 만큼 매일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시험이라는 학사일정과 연말이라는 들뜬 분위기에 갇혀 페이스를 잃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긴장감을 회복하고 방중 대중운동을 만들어 가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붕뜬 마음을 다잡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준비를 하는, 잘 사는 겨울방학을 만들기 위한 준비를 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21호 뉴스레터는 긴 시야에서 조망해 볼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 주로 다루었습니다. [정세동향]에서는 지난 11월에 열린 람사르 총회 등을 통해, 현재의 생태위기에 대한 지배계급들의 대응을 살펴보는 글입니다. 현재 건강문제나 생태문제를 둘러싸고 자본주의의 모순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고, 우리에 이에 대해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합니다. [정세전망]에서는 오바마의 당선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짚어보는 글입니다. 섣불리 단정하기에는 너무 이르지만 인민주의적 통치 스타일을 예상해볼 수 있을 것이고, 이에 맞서 인민의 정치적 역량을 높이는 것이 우리의 길이 될 것입니다. [기획연재]에서는 ‘2008, 한국현대사를 만나다: 1960년대’ 편입니다. 발전주의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박정희 정권 시기에 대해 살펴보며, 당시의 경제성장과 계급투쟁 지형에 대해 살펴봅니다.
21호는 글이 적고 발간도 많이 늦어졌습니다. 좀 더 풍부한 대중운동의 무기를 담아, 2008년이 가기 전에 다시 발간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치열한 마음 놓지 않고 ‘학기 말’을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Posted by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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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회말 2아웃 미국, 오바마는 미국의 구원투수가 될 것인가?
8년만의 공화당 정부가 끝나고, 232년의 백인 대통령 시대가 끝났다. “CHANGE” 와 “Yes, we can.”을 외치던 버락 오바마는 첫 흑인 대통령이 됨으로써 온 몸으로 ‘무언가 변하리라’ 는 것을 증명했다. 대공황에 비견되는 경제위기 상황에서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과 정부가 어떻게 움직일지, 부시 대통령 시절 끊임없었던 군사개입은 축소될 것인지, 세계의 시선은 미국으로 쏠려있고 오바마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그의 정치적인 행보뿐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취향과 가족관계에 이르기까지 폭넓다. 미국인들이 이렇게 ‘변화’를 외치고 실제로 지금의 자본주의의 모습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도저히 미 헤게모니가 유지될 수 없는 상황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망과 꿈을 투영하고 있는 오바마의 미국 정부 하에서 앞으로 과연 무엇이 얼마만큼 변할 것인가?
무엇인가 변하긴 할 것이다.
반전운동을 비롯한 미국의 시민운동, 미국 노총을 비롯한 노동운동은 이번 2008년 대선에 '올인'했다고 한다. 그 유명한 '식코(Sicko)'의 마이클 무어 감독도 오바마를 지지했을 정도다. 이들은 모두 오바마의 정책에 100퍼센트 만족하지는 않는다고 하면서도, 어쨌든 오바마가 당선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미국의 운동세력이 믿었던 것처럼, 어떤 방식으로든 ‘변화’는 올 것 같다. 몇 십 년 전만해도 억울한 죽음 하나도 호소하기 어려웠던 흑인 중에 대통령이 나왔다는 사실은, 브래들리 효과를 두려워한 흑인들이 오바마 선본에 급진적인 요구를 하나도 하지 못했다는 역설적인 상황 속에서도 여러 흑인들의 자존감을 회복시키는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어쨌든 ‘인종문제’ 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어떤 방식으로든 각인된 것도 확실하다.
또한 부시와 네오콘이 주도해 온, 일방주의적인 미국의 대외정책도 새로운 전환점을 예고하고 있다. 북한과의 관계도 이전과는 달라질 것으로 전망되며, 이라크에서의 미군철수를 공약으로 내세웠던 만큼 이라크 전쟁도 전환기를 맞이할 것이다. 어쨌든 민주당은 역사적으로 공화당보다 군사행동을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해왔던 당이니 말이다.
앞서 언급한 '식코(Sicko)'의 마이클 무어 감독이 “오바마의 정책은 단일 보편적 보험체계가 아니다. 모두를 포괄하지도 않고, 비영리의 성격도 아니다. 여전히 수십만 달러를 보험기업과 제약기업의 손에 넘길 것"이라고 지적하긴 했으나, 오바마의 주요 공약 중 하나인 국민의료보험제도 도입은 현실화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는 의료보험 혜택을 전 국민에게 확대하겠다고 공약을 내걸었는데, 직장에서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거나 현재 연방 의료보험 프로그램에 자격을 갖추지 못한 개인들을 위한 전국의료보험 신설을 검토하고 있다. 또한 25세 이하 미국 시민들은 부모의 보험으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주겠다는 방침이다.
노동 분야에서 오바마는 노동자자유선택법안(Employee Free Choice Act)을 지지하고 있다. 이 법안은 다수의 노동자가 서명을 통해 지지할 경우 사용자는 노조결성 요구를 의무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현재 미국에서 노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투표를 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회사의 개입이 심해서 실제로 노조를 만들기가 매우 어렵다. (참고로 한국은 2인 이상 사업장에서 자유롭게 노조를 결성할 수 있다. 물론 회사와 국가에서 노조를 깨기 위한 수많은 시도를 하여 결성된 노조가 유지되는 것이 힘든 경우가 많지만, 법적으로는 미국보다 열려있는 셈이다.) 노동자자유선택법안이 통과되면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노조 결성을 지지한다.’ 는 카드에 서명하기만 하면 되므로 노동조합 결성이 이전보다 쉬워진다. 이 법안은 2003년 민주당을 중심으로 하원에서 발의됐지만, 상원과 백악관이 처리를 미루고 있었는데,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법추진에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부유층을 위한 감세제도의 폐지도 현실화 될 가능성이 높으며, 시간당 최저임금은 9.05달러로 인상시킨다는 것도 공약 중 하나이다.
오바마, 미국 경제의 구원투수가 될 것인가?
그러나 미국인들이 '변화'를 위해 투표장으로 향했던 그 날에도, 미국 경제는 여전히 암울했다. 위기는 이미 실물경제에 파급되어 제조업을 크게 강타했다. 9월 공장주문은 한 달 전에 비해 2.5% 하락했으며, 자동차와 항공기 부문을 제외하면 하락률은 3.7%로, 1992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실업률도 지난 9월 6.1%로 상승해 2003년 9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재무부는 금융업계의 전망을 종합해 2009회계년도에 전체 재정적자가 1조 4천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집계했으며, 한 비정부기구는 같은 기간 재정적자가 무려 2조 6천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며칠 전에는 내년 1월 20일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 당일 경제 회복과 예산 지출 법안에 바로 서명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기사가 올라오기도 했다. 보통 대통령 취임 2주전은 의회가 열려도 휴식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으나, 이번엔 경제위기 등으로 인해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오바마 행정부 중 가장 주목받았던 부분은 힐러리 클린턴이 국무장관을 맡느냐보다, 재무장관을 비롯한 경제팀 인선이었다. 이를 보더라도 역시 초미의 관심사는 경제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초호화 인선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이 경제팀이 어떻게 지금의 난국을 헤쳐나갈지에 전 세계의 이목이 총집중되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주도해온 미국에서의 변화가 세계 경제 질서의 재편까지 수반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오바마가 구체적으로 어떤 정치학을 가지고 있든지, 그는 미국이 현재 가지고 있는 세계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해야 하고, 특히 경제적인 부분에서의 헤게모니를 잃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그는 9회말 2아웃까지 온 미 헤게모니 하 자본주의의 구원투수이다.
올해, 금융이 지배하는 경제구조로 인한 위기가 파괴적으로 드러나기 전에도 미국의 경제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해 온 이들은 있었다. 이 중 프랑스의 경제학자인 뒤메닐과 레비가 미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한 바 있는데, 이를 살펴보자. 이들은 미국이 효율적인 제국주의 국가로서 나머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미국이 점점 더 외국자산에 종속되고 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미국의 우위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이야기 해 왔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미국 자본주의가 맞닥뜨린 모순의 장기적 과정은 오른쪽과 같은데, 이 고리가 무한정 연장된다면, 미국의 자본가계급은 점차 소득과 부를 빼앗기게 된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미국 자체의 힘도 침식될 것이다. 그러나 미국 자본주의의 미래가 이렇게 될 것 같지는 않으며, 이 말은 곧 새로운 궤적이 추진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는 미국 경제와 사회가 새로운 국면,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단계나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거대한 자본소득(세계 다른 국가들로부터의 유입을 통해 커졌다)과 상대적으로 느슨한 통화정책 ↓ 부유계급의 소비증가 ↓ 경상수지 적자 확대 ↓ 외채 증가 ↓ 외국으로의 거대한 소득 유출 ↓ 국내 자본소득의 감소 |
현재 미국경제의 구조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하기 위한 핵심적인 요소는 1) 부유층 가계의 지출 축소, 2) 국내 시장을 향한 수요의 방향 전환, 3)국내적으로 조달되는 더 큰 축적률이다. 이러한 경로설정은 가능하지만 그 길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이 길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기업 내의 이윤 유지는 부유층 가계의 소득을 줄이고 투자에 자금을 조달하는 직접적 방식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더 낮은 이자율과 더 적은 배당금 지급을 뜻한다. 그러나 이것은 경영자와 소유자 중 후자의 손을 들어주고자 하는 신자유주의의 근본목표와 모순된다. 둘째로, 국제수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엔, 유로, 위안화 등의 평가절상을 통한 달러가치 하락을 조장하는 것은 이를 위한 수단이긴 하지만 이는 미국의 금융적 지배나 효율적 제국주의 권력으로서의 역량과 모순된다. 또 다른 수단으로서 무역장벽도 가능하겠지만, 이것은 외국이 보복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세계적 지배의 양상과 어울리지 않는다.
오바마는 이전부터 부시 행정부의 시장근본주의가 위기의 뿌리라며, 시장에 대한 정부의 적절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또한 보호무역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재 확산되고 있는 금융위기가 부시정권의 실정의 문제로만 소급될 수 없다는 점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민주당 출신의 클린턴 대통령이 1992년 대통령에 당선된 후부터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를 비롯한 자유무역이 확산되었고, 글래스 - 스티걸법 폐지하여 상업은행이 투자은행 업무도 병행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금융시장을 자율화하는데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하였다. 오바마의 경제정책 방향과 경제팀의 면면을 보았을 때, 현재로서는 이러한 클린턴의 유산, ‘루비노믹스’를 뛰어넘기가 힘들겠다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루비노믹스는 클린턴 시절 재무장관이었던 로버트 루빈의 정책노선을 가리키는 말로, 균형 예산, 정부의 적절한 시장 개입, 자유무역, 금융규제 완화, 강한 달러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오바마 경제팀의 투 톱인 서머스와 가이트너가 바로 클린턴 행정부 시절 루빈과 함께 일했던, 이른바 ‘루빈 사단’이다. 루빈은 90년대 클린턴 행정부 시절 미국 경제를 초유의 성장과 안정으로 이끄는 데 성공했지만, 한국을 비롯하여 외환위기를 경험한 국가들에겐 루비노믹스는 악몽처럼 기억되기도 한다. 외환위기를 틈 타 아시아 각국의 산업ㆍ기업이 미국 자본에 속속 넘어갔던 경험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루비니스트를 중심으로 강력한 미국을 재건하기 위한 시도가 시작되면 주변국은 금융ㆍ의료ㆍ서비스 등 시장을 더욱 열어젖히도록 요구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전문가들이 새로 출범할 오바마 행정부의 상황이 90년대식의 루비노믹스를 그대로 재현하기엔 현재의 상황이 다르다고 지적하면서, 금융규제 완화보다는 규제, 균형 예산이 아니라 적자 재정(을 통한 경기부양)의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지만 미국의 금융화의 방향을 크게 틀수는 없을 것으로 보이며, 기본적으로 강력한 미국을 만들기 위해 부담을 외부로 수출하는 부분에서는 기존의 루비노믹스를 그대로 재현할 듯하다. 강력한 금융규제와 실물경제 회복을 위한 계획이 필요함에도, 미국의 이러한 태도로 인해 신자유주의 금융화의 방향을 틀고 이를 실현시키기는 어려워 보인다. 비록 오바마가 불참하고 부시가 참가하긴 했지만 G20에서도 미국은 빠르고, 광범위하고, 강력한 규제를 추진하길 원했던 유럽의 입장과 다르게 시간을 가지고 더 조정된 정책 개입을 원했다. 결국 미국은 그 헤게모니를 관철시키기 위해 앞서 ‘부유층 가계의 소득을 줄이고 투자에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이 아니라, ‘세계 다른 국가들에게 더 압력을 행사하는 방식’을 취할 것이다.
오바마, 전쟁을 종식시킬 것인가?
이번 대선에서 경제문제 다음으로 유권자의 주목을 받았던 문제는 이라크 전쟁이다. <CNN>조사결과 응답자의 10퍼센트가 이라크 문제를 관심사로 꼽았다고 한다. 2001년 9월 11일 테러에 대한 응징이었던 아프간과 이라크 전쟁은 최근 급격히 확산하고 있는 경제위기와 함께 미국의 대외적 지도력과 위상이 추락하는 결과를 낳았고, 부시 행정부와 여기에 이은 공화당 매케인 후보의 패배에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오바마는 이라크에서의 철군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새로운 미 정부는 예전보다는 군사행동을 결정하는데 많은 고민을 할 것이다. 대부분이 사람들이 이라크 문제와 대북정책 등 대외정책에서는 항상 공화당보다 민주당에게 많은 희망을 걸어온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오바마가 약속한 7대 외교안보분야 정책목표 중 하나는 ‘알카에다 분쇄 및 테러리즘과의 투쟁’이다. 베트남 전쟁영웅인 매케인조차도 그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그의 애국심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했듯, 오바마 역시 미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미 곳곳에서 “관리 스타일만 바뀔 뿐이다.” 라는 냉소적인 시각의 분석이 쏟아지고 있다. 영국 <타임>은 미국이 오바마의 철군 시간표에 따라 이라크에서 철군을 하겠지만, 2009년까지 이라크에 배치할 두 개 여단을 아프간으로 배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의 진보 저널 <카운터펀치>의 알렌산터 콕번 편집자는 "만약 그(오바마)가 당선된다면 아프간에서 실패해서는 안된다는 약속에 스스로 갇히게 되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꼬집고, "오바마가 승리한다면, 해외에서 가장 즉각적인 결과는 아마도 무뚝뚝한 제국의 재확인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오바마는 반테러전쟁의 중심전선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이고, 여기에 전력을 집중하여 알카에다를 분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전략적 관점에 근거해서, 이라크전은 오히려 반테러전쟁의 역량을 분산시킨 “불필요한 전쟁”이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라크에 주둔한 미군을 재배치하여 중심전선으로 투입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파키스탄에서의 군사행동은 더 확대될 전망이다.
부통령으로 당선된 조지프 바이든은 오바마는 최대 약점인 대외정책에 대한 경험부족이라는 비난을 불식시키기 위해 선정된 파트너 이며, 이는 대외정책에 대해서 상당부문 바이든에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바이든은 부통령 당선인은 2002년 이라크전 개전에 민주당 당론과 달리 찬성표를 던진 이력을 가지고 있으며, 1990년대 발칸반도에서의 미국의 군사행동을 지지했고, 당시 군사적 개입을 주저하고 있던 클린턴 행정부를 집요하게 압박해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이끌어 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오바마는 그가 흑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오히려 인종문제를 미국에 대한 애국심 혹은 민족주의 - 인종과 일치하지는 않는, 그래서 일반적인 ‘민족주의’로 보이지는 않지만 아메리카적 생활방식에서 비롯되는 민족주의 - 로 해결하려 들 것이다. 오바마를 지지했던 콜린 파월은 NBC-TV의 '언론과의 만남(Meet The Press)'에서 오바마를 공식 지지하기 위해 나와 이렇게 말했다.
“전 (공화당의 일부 의원들이) ‘오바마는 무슬림이야’라고 말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낍니다. 정답은? 그는 무슬림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입니다. 항상 그랬어요. 그러나 진짜 옳은 대답은, 만약 그렇다면? 이 나라에서 무슬림인 것이 무슨 문제라도 됩니까? 답은 '노'입니다.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미국이 아닙니다. 7살짜리 무슬림계 미국 아이가 앞으로 미국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믿는 것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중략)…이런 식의 행동을 우리가 미국에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목이 메인 채로 이런 일화를 들려주었다고도 한다.
“잡지에서 본 한 장의 사진 때문에라도 특히 이 부분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복무 중인 군인들에 대한 포토에세이였어요. (버지니아의) 알링턴 군인 묘지에 있는 한 어머니가 아들의 무덤 비석에 머리를 묻고 있었습니다. 사진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 비석의 머릿말이었는데, 자주색 하트와 동색 별이었어요. 이라크에서 죽었다는 뜻이죠. 20살이었는데, 그 다음 사진이 뭐였냐면 비석의 제일 윗 부분인데, 그것은 기독교의 십자가도 아니고 이스라엘의 다비드별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초생달과 별로 되어있는 이슬람교도의 표시였어요. 그 병사의 이름은 카림 라샤드 술탄 칸. 그는 미국인이었습니다. 뉴저지에서 태어났고 9·11 당시 14살이었는데 군대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답니다. 그리고 목숨을 바쳤지요. 자, 지금 우리는 이런 식으로 우리 스스로를 분열시키는 행위를 중단해야 합니다.”
그의 말을 듣고 감동했을 미국의 흑인이나 무슬림들이 미국을 지킨다는, 혹은 세계를 구원하고 “악”과 싸우겠다는 명분으로 다시 파키스탄으로, 팔레스타인으로, 이란으로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섬뜩하게 한다. 오바마의 애국심은 파월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결코 전쟁을 끝낼 수 없다.
인민주의자 오바마와 정치의 주체로서 인민 사이에서
오바마가 경제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전쟁을 완전히 종식시키지는 못하더라도, 그래도 공화당보다는 민주당이 낫다, 조금이라도 개혁이 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닌가, 라고 의견을 피력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오바마가 얼마만큼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 에 여러 자료를 분석하고 정리해서 답하는 것으로는, 실은 아무것도 변화할 것이 없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답은 정치를 그에게 온전히 맡긴다는 전제 하에 나오는 대답이기 때문이다.
대공황 당시 노동자들은 구조조정을 피하기 위해 노동자들끼리의 출혈적인 경쟁을 하기보다 파업과 쟁의로 맞섰고, 길고 긴 베트남 전쟁을 끝낸 것은 미국의 정권교체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 일어난 반전운동 때문이었다. 지금 여기에서 금융세계화에 맞선 대안세계화 운동과, 전쟁에 맞선 평화운동이 아니라 오바마의 일거수 일투족에 기대를 품는 것은 정치의 위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준다.
인민들이 무지하고, 스스로 정치의 주체가 되고자 하지 않을 때 인민주의는 발호한다. 그가 이룩한 작은 변화를 보고 감동하는데 그친다면, 우리는 탁월한 인민주의자를 또 한 번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그가 이룩한 작은 변화에 만족한다면, 우리의 현실적인 대안은 오히려 점점 더 이상(理想)으로만 남아 저 멀리 가버릴 것이다. 초국적 제약기업과 보험회사를 통제하지 못하면 하다못해 오바마가 약속한 국민의료보험제도도 본래의 안보다 훨씬 축소될 수 있으며, 미국 사회 내 흑인운동이 침묵한다면 실업에서 의료보험까지 모든 측면에서 불평등이 명백히 남아있는데도 많은 미국인들, 많은 백인들이 인종문제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는 문제라고 점프할 수 있다.
전 세계의 대안세계화 운동은 이미 구체적인 대안을 이야기하고 있다.3) G20을 넘어서는 민주적인 참여와 토론이 필수적이므로 국제 금융ㆍ화폐 질서 개혁을 위한, 세계 모든 정부와 시민사회 ․ 시민조직 ․ 사회운동 등의 대표자가 참여하는 유엔 주최 국제회의를 열자, 모든 통화와 금융상품들은 반드시 금융규제를 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자, 세계적 기업이나 부유한 개인들이 자국의 세금을 피하기 위한 도피처를 제공하는 조세피난처를 폐쇄하자, 등등. 이러한 대안은 운동 없이 관철될 수 없다. 오바마는 한시도 자기 스스로와 자신의 정권이 미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미 흑인역사를 연구한 매러블 교수의 이 말을 빌려올 수 있을 것이다.
“진짜 도전은 오바마가 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진영이 하는 것이다. 우리는 매우 불편하고 보기 드문 상황에 있다”
스스로 뛰어들어 변화를 꿈꾸고, 요구하고, 만들어갈 수 있는 사회운동이 아니라, 60억이 넘는 인구의 운명을 오바마의 정책 방향에 우선 맡겨버리는 현재의 상황에서 역사가 앞으로의 4년을 인민주의자 오바마의 시대로 기록할지 정치의 주체로서 인민들을 기록할지, 모든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Posted by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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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탄소 녹색성장? 람사르 총회?
생태위기의 해법은 어디에 있는가?
람사르 총회를 통해 본 정부의 모순
지난 10월 28일부터 11월 4일까지 경상남도 창원에서 ‘건강한 습지, 건강한 인간(Healthy Wetlands, Healthy People)’ 을 주제로 10차 람사르 협약 당사국총회가 열렸다. 람사르 협약1)은, ‘습지의 보호와 지속가능한 이용에 관한 국제 조약’으로, 165개 당사국, 국제기구, 민간단체 관계자 등 약 1,500명이 참가하는 큰 회의이다. 정부는 2006년부터 람사르 총회를 개최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썼다. 환경선진국으로 도약하겠다는 포부일진대, 그와 동시에 환경 파괴를 지속적으로 대놓고 벌여 국내외로부터 비판받았다.
요 몇 년 간 생태계 파괴 논란을 일으킨 새만금 간척 사업은, 지난달 국무회의를 열어 농지 규모를 70%에서 30%로 축소시키고 그 자리에 산업단지 등을 조성토록 했다. 또, 람사르 총회를 3개월 앞둔 지난 7월, 중앙연안관리심의위원회를 열어 전남 신안군 23개 지구 매립을 승인했다. 인천시, 충남 서산시는 각각 조력발전소를 추진해 습지 파괴를 앞 당기려하고 있다. 지난 6월 환경부는 람사르 총회 사무국에 제출한 ‘새만금 환경 모니터링 보고’에서 “새만금과 같이 연안 습지를 대량 손실시키는 대형 매립 계획에 제한을 가하겠다”고 해놓고 한 달 뒤 낙동강 하구에 대규모 연안 습지 매립을 승인했다.
이명박 정부의 모순된 언행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긴 하다. 시장일 때에는 청계천 개발을 생태적 복원이라고 하다가 당선 된 후 한반도 대운하를 친환경 사업이라고 하지를 않나, 이러니 8월 15일 ‘저탄소 녹색성장’을 새로운 국가 발전의 비전으로 삼겠다. 녹색성장은 온실가스와 환경오염을 줄이는 지속가능한 성장으로, 녹색 기술과 청정에너지로 신 성장 동력과 일자리를 창출하는 신 국가발전 패러다임”이라는 이 대통령의 연설은 많은 사람들을 당혹케 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그는 람사르 개막식 축사로 ‘람사르 모범국가가 되겠다’고 발언 해 또 한 번 폭소를 자아냈다.
저탄소 녹색성장? '고탄소 황색성장!'
정부는 저탄소 녹색성장을 천명해 놓고도 실제로는 반대의 일을 벌이고 있다. 지난 3월 환경부의 업무계획에 제시된 보수적인 온실가스 감축계획도 지나치다며 폐기시켰다. 또 5월에는 상수원 보호지역을 대폭 축소하고 규제를 완화했다. 최근엔 경제가 당장 어려워지니 수도권 그린벨트를 해제해서 공장을 유치하겠다 발표했다. 또 정부는 스스로가 말하는 녹색성장과 배치되게도 “원전산업도 유력한 대안”이라며 “자원빈국의 입장에서 원전을 통해 대체에너지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MB식 저탄소 녹색성장론은 원자력발전소 건설기술을 보유한 대형 건설업체들에 호재로 인식되고 있다. 정부가 계획대로 2030년까지 10~11개의 원자력발전소를 짓게 되면, 이를 지을 수 있는 회사는 원자력 및 화력발전소 건설 실적을 보유한 업체로, 전기공사업 등록과 토건업·산업설비공사업 면허 등을 모두 갖고 있어야 한다. 이는 국내에 거대 건설 기업 5개사뿐이다. 최고의 부가가치업인 것이다. 원자력 경제로의 추진이, 화석연료를 대체하는 저탄소 녹색경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원자력 에너지를 자가 동력원으로 하는 공장이나 핵자동차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원자력 에너지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전력 부문뿐이다. 그런데 전기는 최종 에너지 소비에서 고작 17%를 차지한다. 한국은 수입한 석유의 55%를 석유화학, 섬유제품으로 소비하고 있으며, 36%를 수송부문 에너지로 사용하고 있다. 총 석유 소비에서 발전용으로 사용되는 석유는 3.5%에 불과하기 때문에 고유가의 대책으로 원자력 발전은 터무니없는 이야기이다.
2003-04년 정권의 폭력 탄압에 맞서 싸웠던 부안 핵 폐기장 반대 투쟁을 돌아본다. 정부와 주류 언론에서는 님비 현상으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부안의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땅, 우리나라, 아니 전 세계 어디에도 핵 폐기장이 들어서서는 안 된다”고 말했었다. 생태를 걱정한다는 정부는 안면도, 굴업도, 부안 등지에서 값비싼 사회적 비용을 치루고 20여 년 만에 현금 3천억 원과 각종 특혜제공 약속, 부정선거로 중저준위 핵폐기장 부지를 마련했다. 그러나 정말 위험하고 마땅한 처리방법이 없어서 문제가 되는 사용 후 핵연료 처리 방법에는 아무런 대안이 없는 상태다. 이러한 문제점이 상당 해 유엔 기후변화협약에서는 핵 산업계와 일부 국가의 로비에도 불구하고 원자력을 청정에너지원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정부는 이처럼 원자력의 비중을 과도하게 설정한 반면 기후변화와 에너지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기술인 재생에너지 확대 목표를 낮게 설정했다. 중국조차도 2030년이면 전체 에너지의 20%를 재생에너지로 공급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은 2030년까지 11%라는 목표를 제시했다. 더군다나 그 내용을 보면 재생에너지로 분류할 수 없는 수소에너지, 연료전지, 폐기물 소각열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미 정부는 2011년까지 신재생에너지 5%로 확대할 목표를 제시했는데 그 후 19년간 6%를 더 늘리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2030년까지 111조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게다가 예산의 확보는 어떻게 하는지에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정부의 정책의지가 심히 의심된다.
지속가능한 재생에너지 체제로 전환해야
정부가 각 계의 비판에도 아랑곳 않고 에너지기본계획을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이유는,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공공부문 사유화/시장화를 현실화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민중들의 최소한의 생존권마저 박탈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다. 또 에너지기본계획 5대 비전 중에서 첫 번째로 제시하고 있는 ‘에너지 자립사회 구현’의 ‘자주개발률2) 제고’가 큰 문제이다. 2005년 4.1%였던 자주개발률을 2030년 40%로 높이는 것이 목표다. 그러나 한국의 에너지 자주개발은 전 세계적인 에너지 위기와 분쟁을 가속화할 수도 있다.
이 대통령은 현재 5% 남짓한 에너지 자주개발률을 임기 중에 18%, 2050년에는 50% 이상으로 끌어올리겠다고 천명했다. 새 정부는 대통령 인수위원회 시절, 이라크 쿠르드 지역의 유전을 개발하겠다고 했다가 이라크 중앙정부의 반발을 샀다. 이밖에 가스공사 및 대기업들은 러시아의 서캄차카 유전개발과 사할린 천연가스 도입까지 추진 중이다. 정부와 언론에선 한국은 세계 95위 산유국이라며 자랑스레 홍보한다. 이것이 정녕 자랑스러운 일인가?
한국의 자주개발률 제고는 전 세계적인 에너지 위기와 분쟁을 가속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것이다. 지난 20세기부터 석유를 둘러싼 지정학적 갈등은 전쟁까지 불러왔다. 21세기에 들어와서도 계속되는데, 미국은 대테러전쟁을 빌미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고, 베네수엘라와 이란을 불량국가로 지목하며 위협하고 있다. 이는 석유 자원 확보를 위한 갈등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제국주의 깡패국가의 야망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초민족적 법인자본의 석유 통제가 새로운 전쟁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 자주개발률을 확보를 주장하는 한국정부는 이 행보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겠다는 선언이다. 이미 이라크 파병에서 드러났다. 국익을 위한 참전과 자원 확보 경쟁은 쿠르드 유전 개발권 논란에서 보듯이 평화는커녕 중동의 분쟁을 심화시키고 있다.
에너지 위기는 문제를 발생시킨 화석연료 중심의 에너지 체제를 지속하는 한 해결할 수 없다. 유일하게 가능한 기술적인 해결책은 지속가능한 재생에너지 체제로의 전환이다. 지속가능한 재생에너지에는 태양광, 태양열, 바이오에너지, 풍력, 지열, 해양에너지, 소수력이 포함될 수 있다. 에너지기본계획이 에너지 위기에 맞서는 한국사회의 대안이 될 수 있으려면 화석연료 중심의 에너지 체제를 지속가능한 재생에너지 체제로 전환하는데 집중해야 한다.
물론 기술적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에너지 위기는 사실 국제사회의 협력이나 일국 정부의 정책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문제의 원인이 자본주의 체제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기가 어렵고, 기술적인 조정의 효과도 미미하다. 자본주의 역사는 인력, 축력, 나무를 대체할 수 있는 효율적인 에너지원의 발견과 응용의 역사였다. 19세기 영국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핵심 에너지였던 석탄의 시대가 끝난 후 20세기 미국 자본주의는 석유와 함께 도래한다. 유한한 화석연료의 채굴로 자원고갈이 임박했고, 자원 확보 과정에서 지정학적인 긴장과 분쟁이 심화되어 에너지 위기를 부추기고 있다. 따라서 기후변화와 에너지 위기는 자본주의의 역사와 그 모순과 직접적으로 결부되어 있으며, 문제해결을 위한 근본적인 방책도 체제의 변혁과 떨어뜨려 사고할 수 없다.
문제는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기술문명으로부터의 탈피나, 기술 개발을 위해 연구기관에 호소한다거나, 저탄소 녹색성장과 같은 허구적 정책에 희망을 건다거나, 람사스 회의 같은 전 지구적 회의로 합의를 표방하며 면죄부를 뒤집어쓰는 협약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위의 계획들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다. 환경위기에 맞서는 운동은 반드시 급진적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인류는 45억년 지구의 역사의 끄트머리에 등장한다. 그런데 찰나 동안 이렇듯 인류가 생태계를 비가역적 위기로 몰아가고 있으니 더욱 심각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인류가 만들어 낸 자본주의 체제, 그 체제가 이제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이 위기의 뿌리가 ‘사회적’인 것임을 인정하며 그 해결책 역시 전 세계 차원의 역사적 관계에 대한 변혁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엥겔스의 오래된 이 말, “자연의 전통적 과정에 대한 개입을 조절하는 것은 단순한 지식 이상의 어떤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기존 생산양식의 완전한 혁명과 아울러 동시대 사회질서 전반의 혁명을 필요로 한다.”는 지적을 떠올리며 대안세계화를 향한 생태 운동을 다져나가야 할 때이다.
Posted by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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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며
한국 경제가 어려워지거나 대선이 다가오는 시기, 각종 매체들에서는 의례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에 대한 설문을 실시하곤 한다. 거의 대부분의 설문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 경제를 부흥시킨 대통령으로써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담긴다. 가장 좋은 평가는 ‘민족중흥의 대통령’, ‘한강의 기적’과 같은 단어들을 통해 박정희를 신격화하고, 당시의 경제성장이 추후의 민주주의의 기틀까지 마련했다고 본다. 이런 논의들은 한때 ‘박정희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며, 유명 인사들이 박정희 따라잡기를 하거나 그와 비교되고 싶어 했다. 박정희 신드롬에 대한 일반적인 반론은 1960 ~ 70년대에는 경제성장을 이루어냈을지 몰라도 장기적인 경제구조에 있어서는, 외자 의존적이고 대외 취약성을 지니고 있으며 재벌 중심의 노동 착취적이고 양극화된 구조 형성 등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줬다는 것이다. 또한 군부독재라는 반동적 정치 체제가 추후에 민주주의의 성립이나 사회적 의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한국 사회의 진보를 더디게 가져왔다는 입장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역사에 대해서 평가할 때, 정치/경제/사회/문화와 같은 각각의 영역들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알아보는데 익숙하다. 그리고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각각의 영역이 어느 정도까지 발전했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선을 제시해 놓고 미달한 것과 초과한 것들을 비교한다. 하지만 거듭 이야기하듯이 한국 현대사에서 정치와 경제는 결코 분리된 적이 없고, 역사란 장기적인 경향과 상이하고 불균등한 요소들이 과잉결정되며 형성되는 산물이다. 특히 계급투쟁은 다양한 제 모순들을 결합시키는 매개가 되며, 1960 ~ 70년대 강력한 발전주의가 가능했던 조건 역시 지배계급의 헤게모니가 가능했던 계급투쟁의 결과를 통해 살펴보아야 한다. 경제가 발전한 만큼의 국민 의식성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경제에 비해 정치의 발전이 너무 늦었다는 식의 일반론적인 평가들은, 다양한 요소들에 대한 평가 없이 정치와 경제에 대한 부당대립을 전제하는 자유주의의 오류를 반복하는 것이다. 또한 이 시기는 자본주의의 상이한 발전모델에 대한 연구라는 이름 아래 국내의 경제정책들을 연구하거나, 유교 자본주의론과 같이 관념론적인 국민의 의식에 대해 매몰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세계 자본주의의 규정력 역시 국내 정책의 한 결정요인으로 치부되기도 하고, 역사적 자본주의가 한국에서 어떤 모습을 띠고 나타나는지 잘 밝혀지지 않는다.
본 글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전반부라고 할 수 있는 1960년대에 대해서 다룰 것이다. 이 시대는 한국 자본주의의 미성숙한 기원으로서 1950년대를 넘어, 본격적인 발전주의 프로그램이 작동하는 시기로 다룰 것이다. 발전주의라는 단어는 1960년대를 다루는데 있어서 특히 중요한 키워드가 될 것이다. 발전주의는 자본주의의 경제성장 이데올로기 일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미국 헤게모니의 물질적 확장기에 나타난 반주변부 국가들의 상황 전반을 지칭하는데 쓸 것이다. 1960년대의 한국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데에는 발전주의 프로그램 이외에 어떤 요인들이 개입하는지 살펴보고, 이것을 역사에 대한 일반화된 관점에서 어떤 식으로 파악할 수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단순히 역사를 해석하는 것을 넘어서 민중들에게 끊임없이 환기되는 발전에 대한 환상과, 그 한국적 현상으로서 ‘박정희 신드롬’을 끊어내는데 일조할 수 있기를 바란다.
1. 발전주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국 현대사를 크게 두 시기로 구분 짓는다면 그것은 대략 1945 ~ 1979년까지의 발전주의 시대, 1979 ~ 현재까지 이어지는 신자유주의 시대로 나뉠 것이다. 이런 시기구분은 역사적 자본주의의 세계사적 경향에 따르는 것으로, 여기서 사용하는 발전주의라는 용어는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장소를 갖는 한정된 의미이다. 사회주의 진영과의 대결에 봉착한 미국 헤게모니에 전 세계적인 포섭메커니즘이 쟁점으로 떠오르게 되고, 물질적 확장 국면에서 이를 가능하게 하는 물질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것은 미국의 원조와 그 변형된 정책형태들을 중심으로, 일국적 차원에서 자국민들을 포섭하는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포섭된 지역에서 국가는 경제 발전과 국민들의 복지를 위한 담지자로 기능할 수 있었고, 이런 국가들은 UN과 NATO를 중심으로 하는 전 세계적 국가간 체계의 틀을 통하여 냉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성장을 기본적으로 포함하는 일련의 포섭 프로그램은, 세계 체계에서 국가들이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상이하게 나타났다. 그것은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중심부 국가들의 사민주의와 라틴 아메리카와 동북아시아를 주로 포함하는 반주변부 국가들의 발전주의였다.
그렇다면 발전주의를 규명하는데 있어서 반주변부라는 용어가 갖는 함의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은 유의미한 일이다. 세계자본주의의 헤게모니는 단지 중심부 국가의 축적체계가 전달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심부형 축적체계와 함께 주변부형 축적체계: 플랜테이션 단종 농업, 가내 수공업, 무기 밀매 등이 있기 마련이고, 이는 자본주의 세계체계를 구성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반주변부는 중심형 축적체계와 주변부형 축적체계가 동시에 나타나는 지역으로서, 주변부로부터 자신들의 민주적인 부가 유출되는 것을 막는 동시에, 중심부로의 편입을 시도하지만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지역이다. 1950 ~ 70년대 반주변부의 축적체계는 전체 산업에서 공업 비율의 증가로 나타났고, 이는 곧 선진국에 대한 따라잡기 전략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장기간에 걸친 소득 추이를 살펴볼 때, 공업화‧산업화는 선진국에 대한 따라잡기보다는 반주변적인 국가의 위치를 공고하게 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독점적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선도적인 산업과 생산재 부문을 독점하고 있는 중심부 국가에 비해, 반주변부의 공업화는 중심부 국가들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고, 주변부 국가의 따라잡기 전략을 회피하기 위해 계속해서 중심부 국가에 대한 종속이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중심부 국가와 주변부 국가 사이의 완충지대로서 자본주의 세계체계에서 독특한 역할을 부여받는 반주변부 국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듯 중심/반주변/주변으로 나뉘어지는 것은 기본적으로 장기간에 걸친 세계체계에서 부에 대한 접근도에 따라 달라진다. 아리기에 따르면 중심에서의 독점적 부, 반주변에서의 민주적 부, 주변에서의 비부(非富)가 세계체계에서 각 나라가 차지하는 위치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어떤 축적체계를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와 함께, 헤게모니의 국가 간 체계라는 문제, 어떤 방식으로 노동자 운동을 포섭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포함된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1960년대는 냉전 시기로서, 대 사회주의권에 대한 경계가 중요한 문제였다. 특히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은 소련‧중국과 같은 거대 사회주의 국가가 인접해 있던 지역으로서,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방어를 위한 최전선으로서 전략적 위치였다. 이에 따라 이들 지역이 세계체계의 부에 대한 상대적인 접근을 용이하게 할 필요가 있었고, 원조나 차관의 형태로 자본주의적 시초축적에 필요한 자본을 마련, 비선도산업 부문에 대한 자본과 기술 이전 등이 이루어졌다. 또한 인민주의자들의 출현에 대한 경계와 계급투쟁이 극단적인 형태로 퍼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국내적으로 강력한 정치적 억압기제를 도입하였다. 이를 통해 동아시아 지역, 특히 대만과 한국은 주변부에서 벗어나 반주변부로 편입될 수 있었다.
미국 헤게모니 시기 반주변부의 존재와 그 행위양식은, 이 시기의 통치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반주변부라는 완충지대를 설정해 놓음으로서 사회주의 국가들의 위험을 막는 한편, 그 지역의 경공업이나 중간재 공업에서 생산된 잉여가치를 끊임없이 중심부 국가로 이전하였다. 이런 가치이전 메커니즘은 반주변부 국가가 중심부 국가로 올라서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한편, 주변부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에 대한 접근을 용이하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주변부 국가들의 발전주의는 ‘발전에 대한 환상’을 매개로 구성원들을 통합하고, 자본주의 세계체계에 포섭된 인민으로 기능하게 했다. 이 시기에 발전이란 곧 공업화‧산업화로 상징되었고, 또한 근대화로 상징되었다. 강력한 국가의 성장정책과 반공이데올로기의 실현은 국가를 경제성장의 담지자로 기능하게 하였고, 국가를 매개로 하는 발전주의 전략은 독특한 성장전략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발전주의란 미국 헤게모니의 물질적 확장기에 반주변부에서 나타난 축적체계 및 이데올로기로서, 국가를 매개로 하는 성장전략으로 구성원들을 통합하고 자본주의 세계체계에 편입될 수 있었던 전략이었다.
2. 군부독재의 시기
1950년대 후반의 경제불황에 따른 관료자본의 위기와 정치적 불안정이 심화되는 상황은 4. 19 항쟁을 낳고, 이후 장면정권이 등장하게 된다. 장면 정권과 민주당을 중심으로 하는 당시 지배계급의 응집력은 매우 취약한 상태였고, 지배계급 안에서 헤게모니를 잡을 수 있는 분파가 등장하지 못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국가장치의 기능을 완전히 확립하지 못한 1950년대의 상황에서 기인하는 것이었고, 원조경제 아래에서 성장한 관료자본을 포섭하지 못했던 민주당 정권의 기반의 문제였다. 이러한 가운데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민중운동이 활성화되어, 59년 말 558개였던 노조가 60년대 말이 되면 914개로 증가하고, 노동쟁의 총건수 역시 41건에서 218건으로 증가한다. 또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등의 단체를 중심으로 하는 통일운동과 담론이 확산되었다. 이에 민주당은 시위규제법과 반공특별법 등을 제정하고, 경찰을 동원한 진압‧검거‧투옥으로 맞서지만 이를 효과적으로 봉쇄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이 주도하는 군부세력에 의한 군사정변이 발발하고, 5월 20일 ‘국가재건 최고회의’가 설치되며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행사하게 된다. 그 해 7월 초대 의장이었던 장도영이 퇴진하고,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하게 된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혁명공약을 발표하고 새로운 통치기반을 만들기 위한 작업을 실시하였다. 1962년 3월 ‘정치활동 정화법’을 제정하여 기존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하였고, 각종 정당 및 사회단체들을 해산하였다. 국회와 지방의화를 해산하고 집회‧시위‧결사를 금지하였고, ‘언론‧출판보도의 사전 검열 명령’ 등을 통해 언론과 출판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였다. 또한 사치외제품 소각ㆍ불량배 및 용공분자의 색출 검거ㆍ부정축재자 처리 요강 등을 통해 쿠데타의 정당성과 지지를 획득하고자 한다. 이와 함께 군부세력은 1961년 6월 헌법적 효력을 가지는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재정하고,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공화당 창립준비를 하며 제 3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기반을 닦아나갔다. 이러한 작업을 거치며 1962년 3월 22일 대통령 윤보선의 사퇴로 박정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고, 1963년 10월 선거를 실시해 그해 12월 17일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하는 제3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60년대 당시에 군부통치가 실시된 것은 몇 가지 필연성을 가진다. 우선 1950년대 자본주의가 미성숙한 조건에서 관료자본의 이해를 뒷받침할만한 지배계급의 분파가 출현하지 못했고 정당정치 역시 미숙한 상태였다는 점을 이야기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군부는 당시 억압적인 국가기구의 성장 속에서, 한국전쟁을 통해서 엄청나게 성장하였다. 반공이라는 이념과 어느 분파보다 조직적인 정비를 갖추고 있던 군부는, 당시 어떤 사회세력보다도 근대적인 조직이었다. 그런데 이런 국내적인 상황과 함께 그 당시 군부통치는 한국만의 고유한 역사가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해두어야 한다. 5.16 군사정변은 주한미군사령부와 미국무성에게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해 11월 박정희의 방미를 계기로 미국과의 협조관계를 다져나간다. 당시 미국의 행동은 한국에서의 군부통치를 최소한 용인했으며, 일각에서 제기되는 것과 같이 군사정변을 유도했다는 음모설마저 제기하기에 충분했다. 당시 미국은 1940 ~ 50년대 라틴아메리카에서 좌파적 성향을 띠는 인민주의자들이 집권하는 것을 막으려는 목적에서, 일종의 예비쿠데타를 일으키고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도록 하였다. 미국은 친미적인 군부정권들을 통해서 라틴아메리카의 자원들과 1차 산품들을 들여올 수 있었으며, 그 지역에서 수입대체공업화를 실시하도록 한다. 수입대체공업화는 라틴아메리카에 고정자본과 설비를 들이는 것을 강제하며, 그 자체로 착취의 메커니즘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잉여이전의 메커니즘은 그 지역을 미국 헤게모니를 위한 경제적인 앞마당으로서 기능하게 하였다.
한국에서의 군부통치는 라틴아메리카의 그것과는 약간 다른 것으로, 이는 ‘경제의 과잉’이라는 정세에 있던 라틴아메리카에 비해 동아시아의 정세는 ‘정치의 과잉’이었기 때문이었다. 거대 사회주의권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었던 동아시아 지역은, 강력한 반공주의를 매개로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권의 실질적ㆍ상징적 위협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이런 필요성은 원조 경제시대부터 이어져온 막대한 국방비 지원으로 나타났고, 지원이 차관으로 넘어간 이후에도 국방비와 관련된 지출의 규모는 상당히 컸다. 또한 베트남 전쟁에의 참전을 계기로 한국군의 현대화를 약속했고(브라운 각서), 1966년 한미행정협정(SOFA 협정)을 체결하여 주한 미군의 지위에 관해 합의했다. 또한 동아시아 지역은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전시장(show case)으로서 기능할 필요가 있었고, 수출지향공업화를 통해 고성장을 추구하며 반공주의를 매개로 국가 구성원들을 통제해 나간다. 당시에 일련의 정책들을 추진하며 발전주의적 통치성을 확립할 수 있었던 세력은 군부밖에 없었고, 1961년 실질적으로 군부통치가 시작된 이래 1987년에야 독재체제가 마무리 될 수 있었다. 이처럼 반주변부의 발전주의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통치집단으로는 군부가 적격이었지만, 라틴 아메리카와 동아시아에서 실시했던 군부통치의 목적은 약간 달랐다고 할 수 있다.
3. 자본주의 세계체계로의 편입
군부통치의 확립과 억압적 국가장치의 기능이 강화되는 과정은, 1950년대와는 달리 정치적 안정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 1960년대에는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하여 국가가 경제성장을 주도했으며, 70년대까지 소위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하였다. 1ㆍ2차 경제개발계획 기간 동안 9.6%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을 이룩하였고, 1960년대 전체에 걸쳐 수출은 1962년 5500만 달러에서 8억 8200만 달러로 연평균 40%를 넘는 수출신장률을 기록하였다. 제조업 생산의 구성 비율에서도 1950년대 대부분을 차지하던 소비재 중심의 공업화로부터, 시멘트ㆍ화학섬유ㆍ정유ㆍ비료 등 점차 수입 대체적 중화학공업의 비율이 증가한다. 이러한 ‘발전’은 그 성격이 어떠했든지 간에, 그 후에 어떤 영향을 주었든지 간에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그 시기 경제성장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경제성장의 이유는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당시의 객관적인 시대 조건을 해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기본적인 작업 같아 보이지만, 또한 현재까지 제대로 밝혀지지 못한 부분이기도 하다. 당시의 시대 상황에 대해 규명하면서 박정희의 리더십을 강조하는 가장 반동적인 평가부터, ‘동아시아 모델론’ㆍ‘유교적 자본주의’와 같이 일국적 모델을 대상으로 하는 가설들, 이후 한국경제의 불황까지 무리하게 연결하는 모든 평가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계속 강조하였듯이 한국은 대 사회주의권의 최전선 방어지역으로서, 자본주의 세계체계에 밀접하게 포섭될 필요가 있는 ‘정치의 과잉’인 지역이었다. 정치ㆍ군사적으로 긴밀한 연관관계를 갖는 것과 함께 일정 정도의 경제개발과 종속적인 경제 구조를 이룩하고, 국가 구성원들에게 발전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며 세계사적 포섭을 진행해야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우선 미국을 필두로 하는 중심부 국가들의 자본수출 양식이 원조에서 차관으로 변화한다. 이는 미국의 무모한 대외팽창정책과 그에 따른 군사비지출ㆍ원조로 말미암아 매년 30억 달러 이상의 적자가 누적됨으로서, 원조제공 방식을 중선의 무상증여에서 유상차관방식으로 변화시킨 것과 관련이 깊다. 또한 동북아에서는 일본을 미국 헤게모니의 하위파트너로 종속시킴으로써, 대소방위체제를 구축하고 일본의 대한진출을 적극적으로 주도한다. 이에 따라 5. 16 군사정변 직후부터 적극적인 한일회담이 추진되기 시작하고, 1962년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통하여 가장 중요한 안건인 대일청구권 문제가 비밀리에 타결된다. 한일회담은 어업협정 및 몇 개의 실무적인 사항들을 처리한 후에,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으로 조인되고 그 해 12월 비준서가 교환되어 효력이 발휘된다. 한일협정의 청구권은 무상공여 3억 달러ㆍ정부차관 2억 달러ㆍ민간차관 1억 달러를 약속하는 것으로,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하위체계의 기틀을 다지는 동시에 차관경제로서 한국의 재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는 급속한 자본축적을 위해 자본수입이 절실히 필요했던 국내독점자본의 요구와 맞물리면서 수입대체 중화학 공업화와 수출산업체제로의 재편을 위한 축적의 조건들이 정비된다.
차관이 국내에 자본을 조달하는 중요한 방식이 되고, 세계 자본주의와의 연관성이 더욱 커지는 ‘개방체제’로 전환되어감에 따라 국내의 축적 조건도 그에 걸맞는 방식으로 바뀌어 간다. 본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1966)에 따르면, 투자재원의 72.2%를 내자로 27.8%를 외자로 조달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62년 1월 증권거래법을 제정하여 증권시장의 활성화를 꾀하고, 동년 6월에는 구 10환을 1원과 교환하고 일정액 이상의 소지금을 금융기관에 강제 예치하도록 하는 ‘통화개혁’, 내자조달을 목적으로 하는 국채발행을 실시하지만 오히려 금융경색 만을 초래한다. 결국 1963년 대외의존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계획내용을 대폭 수정하여, 외자도입을 위한 국내의 투자기반을 조성하기 시작한다. 63년 재정안정화 계획이 부활되었고, 64년 비현실적으로 낮았던 환율을 일시에 두 배 정도 올려 단일변동환율제를 채택하였다. 그리고 1965년의 한일협정 체결과 금리현실화 조치, 1966년 ‘외자도입법’ 제정과 1967년의 GATT 가입 및 무역자유화 조치 등을 실시한다.
이런 정책들과 함께 베트남에의 참전은, 한국이 자본주의 세계체계에 편입되는 가장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1963년 소규모의 의무부대와 태권도 교관을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1964년 파병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하여 1973년까지 총 4만 7천여명이 베트남전에 참전하였다. 브라운 각서(1966.3.4)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참여의 대가로 한국에 대해 개발자금 1억 5천만 달러의 차관 제공, 한국군의 현대화와 베트남전에 소요되는 물품 중 한국제품 구입 등을 약속하였다. 1966 ~ 70년에 연평균 3억 3천6백만 달러의 군사원조를 받았고, 베트남에서의 송금 등으로 1965 ~ 73년간 10억 달러의 외화를 획득할 수 있었다. 또한 한진그룹 등의 독점자본과 대거 노동력 진출이 이루어져, ‘베트남 특수’로 부를 수 있는 경제성장의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이와 함께 1966년에는 한미행정협정(SOFA)이 체결됨으로서, 정치ㆍ군사적인 연관관계도 확고하게 다져나갈 수 있었다. 이렇듯 미국 헤게모니의 유지를 위해 시작되었던 베트남 전쟁에 한국이 참전한 것은, 자본주의 세계체계로 편입되는 과정이 결코 순수한 경제적인 부분으로 한정될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차관경제에 걸맞는 방식으로 축적조건이 재편됨에 따라 외자가 대거 들어와, 제2차 경제개발계획 기간 동안 도입된 외자는 제1차 기간에 비해 7배를 상회하는 액수였다. 이러한 외자는 수입 대체적 중화학공업화에 투자되어, 수입해 오던 주요 소비재와 원자재를 직접 생산하였다. 공장건설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 대부분은 막대한 규모의 차관도입이나 초민족적 기업과의 합작으로 건설된 것으로서, 노동력을 제외한 모든 생산요소를 초민족적 기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차관은 상환을 요하는 것으로서 원리금 상환을 위한 외환을 얻기 위해서는, 수출을 우선적으로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국가는 보조금ㆍ금융과 세제상의 지원 등을 통해 수출지원 체제를 확립하였고, 1달러의 수출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평균 348원(1.5달러)의 비용이 들어가는 출혈 수출이 이루어졌다. 이렇듯 수입대체 혹은 수출지향 공업화를 추진하여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것은, 경제 자립화와는 전혀 거리가 먼 것으로 자본주의 세계체계에 오히려 더욱 긴박 당하고 대외 종속성이 커지게 된 것을 의미한다.
4. 발전주의와 국가
일반적으로 자본주의가 완성되고 발전해 가는 과정은, 자본주의적 국가형태가 완성되고 발전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국가가 성장하고 억압적ㆍ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가 만들어지는 것은, 자본이 성숙하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완성된 이후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국가형태(민족국가)를 필수적으로 요구하며, 국가는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를 포함하는 사회구성체와 그 구성원들을 재생산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특히 자본의 시초축적 단계에서는 적극적인 경제정책을 통해 자본의 재생산을 돕고, 구성원들에게 자본제 생산에 걸맞는 규율과 통제를 강요한다. 2차 세계전쟁 이후에 식민지였던 많은 지역들이 민족국가로서 독립하고 자본주의 세계체계에 편입되지만, 대다수의 국가들은 선진국에 대한 ‘따라잡기’를 위한 시초축적을 시도할 수 없었다. 그것은 미국 헤게모니의 ‘자유기업’ 이념이 보편적인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고, GATT나 IMF 같은 국제기구들을 통해 대다수 주변부 국가들에게 ‘자유무역’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나라들에게 제공되는 각종 원조는 구호물자 이상의 것이 아니었고, 지속적인 수탈구조는 주변부형 자본주의 양식의 발달 과정이기도 했다. 또는 강력한 시초축적을 통한 경제성장을 할 수 있는 정세가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이와 반대로 1949년 중국혁명 이후 동아시아의 정세는, 미국에 의해 강력한 시초축적을 통한 경제성장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1950년대에 국가의 역할이 어느 정도 확립되고 농지개혁과 일종의 인클로저, 재정ㆍ금융정책, 원조물자에 대한 관리, 초기 독점재벌에 대한 지원 등을 실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를 강력하게 추동할 수 있는 지배분파가 확립되지 않았고, 1950년대의 경제성장이란 미약한 시초축적으로서의 의미만 있었다. 1960년대 등장한 군부세력은 국가를 매개로 강력한 발전주의 정책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1960년대 국가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을 넘어 독점자본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조치를 통해 재벌체제를 성립하고, 1ㆍ2차 경제개발계획을 통해 사회간접자본과 수출 진흥 정책을 마련한다. 이런 경제정책들과 함께 민중들의 저항을 폭력적으로 막고, 국가장치의 기능을 강화해 간다. 이와 함께 교육ㆍ양육ㆍ가족 등 재생산의 영역에 대한 개입을 시도하고,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와 그 쌍둥이로서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하게 설파한다.
국가는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해나가는 과정에서 자본의 재생산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자본 축적을 지원하였다. 우선 재정정책을 통한 지원을 살펴보면, 1961년 572억 원이었던 일반재정 규모는 1970년에 이르면 5977억 원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이런 자금의 20 ~ 30%는 재정투융자라는 명목으로 독점자본에게 지원되었으며, 제조업 부문에 전체의 45.9%가 사회간접자본 부문에 전체의 47.8%가 투자되었다. 그리고 제조업 전체 투자의 60%가 수입대체산업인 화학섬유ㆍ정유ㆍ비료ㆍ시멘트ㆍ금속 등에 투자되었다. 국가는 1962년 수출산업에 대한 특별감가상각, 65년 조세감면규제법 등을 실시함으로서 60년대 전 시기에 걸쳐 법인체에 대해 18.3%에 달하는 조세감면을 행했다. 차별적인 독점자본에 대한 세제혜택은 자본들 간의 불균등발전을 강화하였고, 간접세를 중심으로 민중들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였다. 국가가 중앙은행을 비롯한 시중은행들에 대한 적극적인 규제를 실시한 관치금융 역시 독점자본을 지원하는 방법이었다. 독점자본에 대한 대출 금리는 60년대 기간 내내 도매물가상승률과 비교하였을 때 비슷한 수준이었고, 때로는 실질금리가 마이너스가 되기도 하여 정책금융을 대출받는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특혜였다. 독점자본에 대한 지원책들과 더불어 많은 수의 국가기업이 설립되고 운영되어, 1968년의 경우 매출액 규모 상위 100개 기업 중 국가기업이 18개를 차지하고 총매출액이 34.3%에 이르렀다.
국가가 자본축적을 적극적으로 지원함으로써 독점자본이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되어, 2차 계획 기간 동안 10대 재벌의 부가가치 생산이 연평균 28%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1960년대 수입대체적 중화학공업 부분에 진출한 독점자본들은, 거대한 규모의 생산설비를 도입하여 건설되었고, 국가는 이들 품목에 대해 수입규제조치를 실시하여 독점적인 지위를 보장하였다. 또한 출혈수출에 따르는 결손을 보장받기 위하여 국내의 판매가격을 고가에 설정하여 초과이윤을 수취할 수 있었다. 독점적 판매가격의 보장과 함께 이 시기 독점자본의 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전 민중에 대한 수탈이었다. 1960년대 수출공산품은 대게 노동집약적 산업의 생산품이었고, 자본축적의 주된 기반은 저임금 노동력이었다. 이것은 1960 ~ 70년 사이에 노동생산성이 연평균 12.9%의 비율로 증가하고 있었음에 비해, 실질임금은 고작 4.2%의 증가율에 머문 것에서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1950년대 미국 잉여농산물의 광범위한 원조는 국내 농업과 공업 간의 분업관련을 완전히 파괴하고,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광범위한 과잉인구가 되도록 강제했다. 과잉인구의 압박은 저임금을 강제하는 강력한 요인이 되었고, 국가에 의한 노동운동의 통제와 저곡가 정책 또한 저임금구조를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국가는 자본의 재생산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노동력의 재생산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며 민중들의 삶을 통제해 나간다.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는 베이비붐이 나타났던 시기로서, 4 ~ 4.5% 정도의 높은 출산율을 가져온다. 이에 대해 인구정책의 일환으로 가족계획사업 10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1962년부터 실시하게 된다. 전국에 가족계획 상담소를 설치하여 면당 1명 이상의 가족계획 요원을 배치하고, 피임법 등 보건‧의료 기술을 도입하기도 한다. 이에 따라 1962년 2.9% 정도였던 인구성장률은 그 뒤 크게 낮추어진다. 교육제도와 정책은 자본주의에 걸맞는 노동력을 재생산함과 동시에, 1960년대에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통해 국민들을 규율하고 통제해 나간다. 이와 함께 당시 주변부에서 반주변부로 성장하고 있던 한국에서, 교육제도는 ‘발전에 대한 환상’을 국민들에게 내재화하는 기제가 되었다. 이것은 고등교육에 대한 접근이 곧 계층상승을 이룰 수 있는 지름길이었던 현실과 관계가 깊은 것이었고, 노동력에 대한 선별적인 통제의 방식이었다. 1960년대 이후 급속한 경제성장은 이를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조건을 마련하여, 1960년대 초중반에 초등교육이 거의 무상 의무교육이 되었고 1968년에는 중학교 입시가 폐지되기도 하였다. 이런 대중교육의 확산은 산업고도화에 따른 노동력의 수급 필요성 때문이기도 하였다. 인구‧교육 정책과 함께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통해 여성을 노동집약적 산업에 대거 투입하게 한다. 여성노동자들의 ‘빠르고 싼 손’은 발전주의적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되었던 동시에, 노동력에 대한 통제에서 성차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도입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 자본주의의 특징으로 국가가 주도하는 강력한 경제성장을 들고, 이런 강력한 국가가 부활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제위기의 해결책인 것처럼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발전한 나라들의 역사에서 국가의 강력한 경제정책과 민중들에 대한 폭력은 일반적인 것으로, 오히려 질문은 한국에서 국가에 의한 강력한 발전주의 정책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묻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자본주의 세계체계에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차지하는 전략적 위치, 하위 파트너로서 동아시아 세계체계로의 편입, 지배계급 안의 강력한 분파의 형성이라는 조건들이 결합되어 생성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국가가 강력한 경제정책과 민중들의 재생산 영역을 통제함으로서, 한국에서는 독점자본이 강화되고 자본주의 세계체계로 강하게 편입되어 간다. 이것은 ‘독점강화 종속심화’라는 당시 한국 자본주의의 상황을 조성하였다.
5. 계급투쟁의 지형에 대하여
이승만 정권의 무능력과 50년대 말의 원조경제 위기는 4. 19 항쟁이라는 민중들의 우발적인 저항을 낳았고, 이는 계급투쟁이 남한에서 부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민주당 집권기간 동안 학생시위는 총 1835건에 연인원 96만 9630명이 참가했으며, 노동운동 역시 활발하게 일어나게 된다. 한편 통일의제를 중심으로 하는 ‘혁신세력’이 등장하며 진보당‧민혁당‧근민당이 중심이 되어, 1960년 사회대중당이 발기하였다. 사회대중당은 남북한의 교류를 통한 통일과 한반도 내의 모든 외국세력의 철수 등을 주장했으며, 민자통 등이 중심이 되어 판문점에서 북한대학생들과의 회합 등을 주선하기도 했다. 이런 계급투쟁의 가능성은 5.16 군사정변과 그 이후 정권의 탄압으로 봉쇄되고, 발전주의를 통해 남한의 민중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해간다. 물론 정권의 폭력과 포섭전략만으로 당시 계급투쟁이 미비했던 조건을 설명할 수는 없다. 이와 함께 보편적인 이념과 담론이 부족했다는 것과, 계급투쟁을 촉발시킬 주체와 조직이 성숙하지 못한 조건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한편 해방 이후 폭발적인 계급투쟁을 만들어 낸 좌파세력들 가운데 월북하지 못한 세력들에게 4.19 항쟁은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1960년대에는 64년의 ‘인민 혁명당’ 사건, 67년의 ‘동백림 사건’(동베를린 간첩단 사건), 68년의 ‘통일 혁명당’ 사건 등 중앙정보부에 의해 공개된 사건들이 있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 조선 로동당의 지령을 받고 국가전복을 시도한 간첩사건으로 발표되었지만, 자세한 사건의 내막은 아직까지도 밝혀져 있지 않고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가혹한 고문 등이 쟁점이 되기도 한다. 최근에 진실위 등에서 당시 사건들이 중앙정보부의 과장에 따른 사건이라고 발표하며, 민주화 투쟁의 일환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진실은 알 수 없고 추후의 계급투쟁과 관련하여 이러한 사건들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당시 지하조직을 통한 지식인‧혁명가 중심의 운동이 말해주는 것은, 당시 계급투쟁의 조건이 굉장히 열세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마르크스주의는 지하에 잠복해 있던 시기로서, 대중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1964년 6.3 한일회담 반대 투쟁은 군사정변 이후 1960년대에 가장 규모가 컸던 대중투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비밀리에 처리되던 한일회담이 대중들에게 알려지면서, 1964년 3월 야당은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고 전국 순회 유세에 들어갔다. 그 해 3월 24일에는 서울에 있는 대학생 5천여 명이 시위를 전개하여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26일에는 전국 16개 도시에서 4만 3천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청사회라는 조직이 중앙정보부와 공화당의 지원을 받아 학원사찰을 해온 것이 드러나면서, 한일회담 반대와 함께 학원사찰 중지‧구속학생 석방‧중앙정보부 해체‧매판자본 몰수와 대중생존권 등이 투쟁의 의제로 등장하였다. 6월 3일에 한일회담 반대투쟁은 절정에 달해 1만 5천여 명이 가두시위에 참가했으며, 정권은 계엄령을 내림으로서 사태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6.3 한일회담 반대투쟁은 이후의 대중운동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1967년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은 압승을 거두었으며, 69년에는 3선 개헌을 통해 이후 유신체제로 가는 밑바탕을 닦아 놓는다. 1960년대 발전주의 정책은 국가를 성장과 발전의 담지자로 만들기에 충분했으며, 변혁세력들에게 보편적인 이념과 전망이 부재하였다. 하지만 6.3 투쟁을 계기로 추후 계급투쟁의 지형과 관련한 몇 가지 가능성들을 감지할 수 있었다. 6.3 투쟁 이후 서울대의 ‘한국사회연구회(한사)’ 등 써클 형태의 조직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대학생이 아직 지식인‧특권층으로 인식되고 학생대중운동이 불가능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써클 형태의 결사체로서 학생운동이 조직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상황은 1970년대까지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신민당 등 자유주의의 색채를 띤 야당은, 공화당을 매국정당이라고 비판하며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간다. 이것은 자유주의자들이 발전주의자(보수주의자)의 대안으로 인식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사상계를 펴낸 장준하, 신민당의 정치인인 김대중‧김영삼, 각종 재야인사들이 혁신적인 인물로 떠오른다. 어찌보면 당시 정세에서 이런 상황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이후 ‘진보 대 보수’ 혹은 ‘민주 대 반민주’와 같은 전선형성에 있어서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불철저한 판단을 내리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 영향은 현재까지 남아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1960년대는 차관경제로의 편입과 국가에 의한 강력한 발전주의 정책으로, 세계 자본주의 체계에 대한 종속이 심해지고 독점자본이 성장했던 시기였다. 군부정권은 발전주의 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며 민중들을 포섭했고, 강력한 반공주의를 토대로 계급투쟁을 무력화했다. 강력한 지배계급의 공세에 비해 변혁세력의 이념과 역량은 너무나 미약했다. 이러한 가운데 1960년대 말에 내적 모순이 심화되고, 그 발현으로서 일련의 위기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68년 말 외자기업 중 55개사가 은행관리로 넘어가고, 69년에는 10개사가 상환을 이행하지 못하는 대불사태에 빠진다. 이것은 주로 수입대체 중화학부문에서 발생하였는데, 차관도입을 둘러싼 무분별한 자본 경쟁으로 인해 과잉생산의 현상을 보인 것이다. 게다가 출혈수출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차관에 대한 상환압박은 국제수지 위기로 나타나게 된다. 70년대로 넘어오게 되면 미 헤게모니가 위기를 노출하며, 한국에서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조건들이 점차 사라져간다. 경제위기가 나타나는 가운데 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은 폭발적인 노동쟁의를 가져오고, 빈민들의 운동도 성장하게 된다. 이것은 통일담론 중심의 학생‧지식인 운동과는 결이 다른, 노동자 운동이 독자적으로 성장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계급투쟁의 지형이 새롭게 형성되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Posted by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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