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간사] 위기는 어디로?

 [21호 발간사]

붕뜬 시기, 마음을 다잡고 다시 앞으로!



2학기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입니다. 11월에 진행했던 학생회 선거와 대중사업들에 대한 평가도 모두 진행하셨을 것이고, 현재는 굵직한 일정없이 기말고사를 보고 있는 동지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러는 사이에도 정세는 시시각각으로 바뀌며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듭니다. 각종 경제전문단체들에서는 우울한 2009년의 경제전망들을 내놓고 있으며, 더 많은 일자리를 더 창출한다는 명목으로 개악된 최저임금법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많은 대학들이 등록금 동결을 발표하며 고통분담을 한 것처럼 생색내고 있고, 교육부는 전교조와 ‘좌파’ 교과서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고 있습니다.


굵직한 정세도 일정도 없는 것이 요즘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어떤 곳에서 계급투쟁이 터져 나올지 모르고, 일상적인 대중운동이 중요한 만큼 매일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시험이라는 학사일정과 연말이라는 들뜬 분위기에 갇혀 페이스를 잃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긴장감을 회복하고 방중 대중운동을 만들어 가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붕뜬 마음을 다잡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준비를 하는, 잘 사는 겨울방학을 만들기 위한 준비를 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21호 뉴스레터는 긴 시야에서 조망해 볼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 주로 다루었습니다. [정세동향]에서는 지난 11월에 열린 람사르 총회 등을 통해, 현재의 생태위기에 대한 지배계급들의 대응을 살펴보는 글입니다. 현재 건강문제나 생태문제를 둘러싸고 자본주의의 모순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고, 우리에 이에 대해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합니다. [정세전망]에서는 오바마의 당선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짚어보는 글입니다. 섣불리 단정하기에는 너무 이르지만 인민주의적 통치 스타일을 예상해볼 수 있을 것이고, 이에 맞서 인민의 정치적 역량을 높이는 것이 우리의 길이 될 것입니다. [기획연재]에서는 ‘2008, 한국현대사를 만나다: 1960년대’ 편입니다. 발전주의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박정희 정권 시기에 대해 살펴보며, 당시의 경제성장과 계급투쟁 지형에 대해 살펴봅니다.


21호는 글이 적고 발간도 많이 늦어졌습니다. 좀 더 풍부한 대중운동의 무기를 담아, 2008년이 가기 전에 다시 발간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치열한 마음 놓지 않고 ‘학기 말’을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Posted by 행진

2008/12/08 11:58 2008/12/08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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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회말 2아웃 미국, 오바마는 미국의 구원투수가 될 것인가?



  8년만의 공화당 정부가 끝나고, 232년의 백인 대통령 시대가 끝났다. “CHANGE” 와 “Yes, we can.”을 외치던 버락 오바마는 첫 흑인 대통령이 됨으로써 온 몸으로 ‘무언가 변하리라’ 는 것을 증명했다. 대공황에 비견되는 경제위기 상황에서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과 정부가 어떻게 움직일지, 부시 대통령 시절 끊임없었던 군사개입은 축소될 것인지, 세계의 시선은 미국으로 쏠려있고 오바마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그의 정치적인 행보뿐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취향과 가족관계에 이르기까지 폭넓다. 미국인들이 이렇게 ‘변화’를 외치고 실제로 지금의 자본주의의 모습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도저히 미 헤게모니가 유지될 수 없는 상황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망과 꿈을 투영하고 있는 오바마의 미국 정부 하에서 앞으로 과연 무엇이 얼마만큼 변할 것인가? 


무엇인가 변하긴 할 것이다. 


  반전운동을 비롯한 미국의 시민운동, 미국 노총을 비롯한 노동운동은 이번 2008년 대선에 '올인'했다고 한다. 그 유명한 '식코(Sicko)'의 마이클 무어 감독도 오바마를 지지했을 정도다. 이들은 모두 오바마의 정책에 100퍼센트 만족하지는 않는다고 하면서도, 어쨌든 오바마가 당선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미국의 운동세력이 믿었던 것처럼, 어떤 방식으로든 ‘변화’는 올 것 같다. 몇 십 년 전만해도 억울한 죽음 하나도 호소하기 어려웠던 흑인 중에 대통령이 나왔다는 사실은, 브래들리 효과를 두려워한 흑인들이 오바마 선본에 급진적인 요구를 하나도 하지 못했다는 역설적인 상황 속에서도 여러 흑인들의 자존감을 회복시키는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어쨌든 ‘인종문제’ 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어떤 방식으로든 각인된 것도 확실하다.

  또한 부시와 네오콘이 주도해 온, 일방주의적인 미국의 대외정책도 새로운 전환점을 예고하고 있다. 북한과의 관계도 이전과는 달라질 것으로 전망되며, 이라크에서의 미군철수를 공약으로 내세웠던 만큼 이라크 전쟁도 전환기를 맞이할 것이다. 어쨌든 민주당은 역사적으로 공화당보다 군사행동을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해왔던 당이니 말이다.

   앞서 언급한 '식코(Sicko)'의 마이클 무어 감독이 “오바마의 정책은 단일 보편적 보험체계가 아니다. 모두를 포괄하지도 않고, 비영리의 성격도 아니다. 여전히 수십만 달러를 보험기업과 제약기업의 손에 넘길 것"이라고 지적하긴 했으나, 오바마의 주요 공약 중 하나인 국민의료보험제도 도입은 현실화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는 의료보험 혜택을 전 국민에게 확대하겠다고 공약을 내걸었는데, 직장에서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거나 현재 연방 의료보험 프로그램에 자격을 갖추지 못한 개인들을 위한 전국의료보험 신설을 검토하고 있다. 또한 25세 이하 미국 시민들은 부모의 보험으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주겠다는 방침이다.

  노동 분야에서 오바마는 노동자자유선택법안(Employee Free Choice Act)을 지지하고 있다. 이 법안은 다수의 노동자가 서명을 통해 지지할 경우 사용자는 노조결성 요구를 의무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현재 미국에서 노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투표를 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회사의 개입이 심해서 실제로 노조를 만들기가 매우 어렵다. (참고로 한국은 2인 이상 사업장에서 자유롭게 노조를 결성할 수 있다. 물론 회사와 국가에서 노조를 깨기 위한 수많은 시도를 하여 결성된 노조가 유지되는 것이 힘든 경우가 많지만, 법적으로는 미국보다 열려있는 셈이다.) 노동자자유선택법안이 통과되면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노조 결성을 지지한다.’ 는 카드에 서명하기만 하면 되므로 노동조합 결성이 이전보다 쉬워진다. 이 법안은 2003년 민주당을 중심으로 하원에서 발의됐지만, 상원과 백악관이 처리를 미루고 있었는데,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법추진에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부유층을 위한 감세제도의 폐지도 현실화 될 가능성이 높으며, 시간당 최저임금은 9.05달러로 인상시킨다는 것도 공약 중 하나이다.


오바마, 미국 경제의 구원투수가 될 것인가?


  그러나 미국인들이 '변화'를 위해 투표장으로 향했던 그 날에도, 미국 경제는 여전히 암울했다. 위기는 이미 실물경제에 파급되어 제조업을 크게 강타했다. 9월 공장주문은 한 달 전에 비해 2.5% 하락했으며, 자동차와 항공기 부문을 제외하면 하락률은 3.7%로, 1992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실업률도 지난 9월 6.1%로 상승해 2003년 9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재무부는 금융업계의 전망을 종합해 2009회계년도에 전체 재정적자가 1조 4천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집계했으며, 한 비정부기구는 같은 기간 재정적자가 무려 2조 6천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며칠 전에는 내년 1월 20일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 당일 경제 회복과 예산 지출 법안에 바로 서명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기사가 올라오기도 했다. 보통 대통령 취임 2주전은 의회가 열려도 휴식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으나, 이번엔 경제위기 등으로 인해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오바마 행정부 중 가장 주목받았던 부분은 힐러리 클린턴이 국무장관을 맡느냐보다, 재무장관을 비롯한 경제팀 인선이었다. 이를 보더라도 역시 초미의 관심사는 경제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초호화 인선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이 경제팀이 어떻게 지금의 난국을 헤쳐나갈지에 전 세계의 이목이 총집중되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주도해온 미국에서의 변화가 세계 경제 질서의 재편까지 수반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오바마가 구체적으로 어떤 정치학을 가지고 있든지, 그는 미국이 현재 가지고 있는 세계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해야 하고, 특히 경제적인 부분에서의 헤게모니를 잃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그는 9회말 2아웃까지 온 미 헤게모니 하 자본주의의 구원투수이다.


  올해, 금융이 지배하는 경제구조로 인한 위기가 파괴적으로 드러나기 전에도 미국의 경제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해 온 이들은 있었다. 이 중 프랑스의 경제학자인 뒤메닐과 레비가 미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한 바 있는데, 이를 살펴보자. 이들은 미국이 효율적인 제국주의 국가로서 나머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미국이 점점 더 외국자산에 종속되고 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미국의 우위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이야기 해 왔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미국 자본주의가 맞닥뜨린 모순의 장기적 과정은 오른쪽과 같은데, 이 고리가 무한정 연장된다면, 미국의 자본가계급은 점차 소득과 부를 빼앗기게 된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미국 자체의 힘도 침식될 것이다. 그러나 미국 자본주의의 미래가 이렇게 될 것 같지는 않으며, 이 말은 곧 새로운 궤적이 추진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는 미국 경제와 사회가 새로운 국면,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단계나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거대한 자본소득(세계 다른 국가들로부터의 유입을 통해 커졌다)과 상대적으로 느슨한 통화정책

부유계급의 소비증가

경상수지 적자 확대

외채 증가

외국으로의 거대한 소득 유출

국내 자본소득의 감소


  현재 미국경제의 구조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하기 위한 핵심적인 요소는 1) 부유층 가계의 지출 축소, 2) 국내 시장을 향한 수요의 방향 전환, 3)국내적으로 조달되는 더 큰 축적률이다. 이러한 경로설정은 가능하지만 그 길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이 길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기업 내의 이윤 유지는 부유층 가계의 소득을 줄이고 투자에 자금을 조달하는 직접적 방식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더 낮은 이자율과 더 적은 배당금 지급을 뜻한다. 그러나 이것은 경영자와 소유자 중 후자의 손을 들어주고자 하는 신자유주의의 근본목표와 모순된다. 둘째로, 국제수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엔, 유로, 위안화 등의 평가절상을 통한 달러가치 하락을 조장하는 것은 이를 위한 수단이긴 하지만 이는 미국의 금융적 지배나 효율적 제국주의 권력으로서의 역량과 모순된다. 또 다른 수단으로서 무역장벽도 가능하겠지만, 이것은 외국이 보복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세계적 지배의 양상과 어울리지 않는다.

  오바마는 이전부터 부시 행정부의 시장근본주의가 위기의 뿌리라며, 시장에 대한 정부의 적절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또한 보호무역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재 확산되고 있는 금융위기가 부시정권의 실정의 문제로만 소급될 수 없다는 점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민주당 출신의 클린턴 대통령이 1992년 대통령에 당선된 후부터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를 비롯한 자유무역이 확산되었고, 글래스 - 스티걸법 폐지하여 상업은행이 투자은행 업무도 병행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금융시장을 자율화하는데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하였다. 오바마의 경제정책 방향과 경제팀의 면면을 보았을 때, 현재로서는 이러한 클린턴의 유산, ‘루비노믹스’를 뛰어넘기가 힘들겠다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루비노믹스는 클린턴 시절 재무장관이었던 로버트 루빈의 정책노선을 가리키는 말로, 균형 예산, 정부의 적절한 시장 개입, 자유무역, 금융규제 완화, 강한 달러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오바마 경제팀의 투 톱인 서머스와 가이트너가 바로 클린턴 행정부 시절 루빈과 함께 일했던, 이른바 ‘루빈 사단’이다. 루빈은 90년대 클린턴 행정부 시절 미국 경제를 초유의 성장과 안정으로 이끄는 데 성공했지만, 한국을 비롯하여 외환위기를 경험한 국가들에겐 루비노믹스는 악몽처럼 기억되기도 한다. 외환위기를 틈 타 아시아 각국의 산업ㆍ기업이 미국 자본에 속속 넘어갔던 경험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루비니스트를 중심으로 강력한 미국을 재건하기 위한 시도가 시작되면 주변국은 금융ㆍ의료ㆍ서비스 등 시장을 더욱 열어젖히도록 요구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전문가들이 새로 출범할 오바마 행정부의 상황이 90년대식의 루비노믹스를 그대로 재현하기엔 현재의 상황이 다르다고 지적하면서, 금융규제 완화보다는 규제, 균형 예산이 아니라 적자 재정(을 통한 경기부양)의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지만 미국의 금융화의 방향을 크게 틀수는 없을 것으로 보이며, 기본적으로 강력한 미국을 만들기 위해 부담을 외부로 수출하는 부분에서는 기존의 루비노믹스를 그대로 재현할 듯하다. 강력한 금융규제와 실물경제 회복을 위한 계획이 필요함에도, 미국의 이러한 태도로 인해 신자유주의 금융화의 방향을 틀고 이를 실현시키기는 어려워 보인다. 비록 오바마가 불참하고 부시가 참가하긴 했지만 G20에서도 미국은 빠르고, 광범위하고, 강력한 규제를 추진하길 원했던 유럽의 입장과 다르게 시간을 가지고 더 조정된 정책 개입을 원했다. 결국 미국은 그 헤게모니를 관철시키기 위해 앞서 ‘부유층 가계의 소득을 줄이고 투자에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이 아니라, ‘세계 다른 국가들에게 더 압력을 행사하는 방식’을 취할 것이다. 


오바마, 전쟁을 종식시킬 것인가? 


  이번 대선에서 경제문제 다음으로 유권자의 주목을 받았던 문제는 이라크 전쟁이다. <CNN>조사결과 응답자의 10퍼센트가 이라크 문제를 관심사로 꼽았다고 한다. 2001년 9월 11일 테러에 대한 응징이었던 아프간과 이라크 전쟁은 최근 급격히 확산하고 있는 경제위기와 함께 미국의 대외적 지도력과 위상이 추락하는 결과를 낳았고, 부시 행정부와 여기에 이은 공화당 매케인 후보의 패배에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오바마는 이라크에서의 철군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새로운 미 정부는 예전보다는 군사행동을 결정하는데 많은 고민을 할 것이다. 대부분이 사람들이 이라크 문제와 대북정책 등 대외정책에서는 항상 공화당보다 민주당에게 많은 희망을 걸어온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오바마가 약속한 7대 외교안보분야 정책목표 중 하나는 ‘알카에다 분쇄 및 테러리즘과의 투쟁’이다. 베트남 전쟁영웅인 매케인조차도 그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그의 애국심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했듯, 오바마 역시 미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미 곳곳에서 “관리 스타일만 바뀔 뿐이다.” 라는 냉소적인 시각의 분석이 쏟아지고 있다. 영국 <타임>은 미국이 오바마의 철군 시간표에 따라 이라크에서 철군을 하겠지만, 2009년까지 이라크에 배치할 두 개 여단을 아프간으로 배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의 진보 저널 <카운터펀치>의 알렌산터 콕번 편집자는 "만약 그(오바마)가 당선된다면 아프간에서 실패해서는 안된다는 약속에 스스로 갇히게 되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꼬집고, "오바마가 승리한다면, 해외에서 가장 즉각적인 결과는 아마도 무뚝뚝한 제국의 재확인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오바마는 반테러전쟁의 중심전선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이고, 여기에 전력을 집중하여 알카에다를 분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전략적 관점에 근거해서, 이라크전은 오히려 반테러전쟁의 역량을 분산시킨 “불필요한 전쟁”이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라크에 주둔한 미군을 재배치하여 중심전선으로 투입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파키스탄에서의 군사행동은 더 확대될 전망이다.

  부통령으로 당선된 조지프 바이든은 오바마는 최대 약점인 대외정책에 대한 경험부족이라는 비난을 불식시키기 위해 선정된 파트너 이며, 이는 대외정책에 대해서 상당부문 바이든에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바이든은 부통령 당선인은 2002년 이라크전 개전에 민주당 당론과 달리 찬성표를 던진 이력을 가지고 있으며, 1990년대 발칸반도에서의 미국의 군사행동을 지지했고, 당시 군사적 개입을 주저하고 있던 클린턴 행정부를 집요하게 압박해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이끌어 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오바마는 그가 흑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오히려 인종문제를 미국에 대한 애국심 혹은 민족주의 - 인종과 일치하지는 않는, 그래서 일반적인 ‘민족주의’로 보이지는 않지만 아메리카적 생활방식에서 비롯되는 민족주의 - 로 해결하려 들 것이다. 오바마를 지지했던 콜린 파월은 NBC-TV의 '언론과의 만남(Meet The Press)'에서 오바마를 공식 지지하기 위해 나와 이렇게 말했다.

  “전 (공화당의 일부 의원들이) ‘오바마는 무슬림이야’라고 말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낍니다. 정답은? 그는 무슬림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입니다. 항상 그랬어요. 그러나 진짜 옳은 대답은, 만약 그렇다면? 이 나라에서 무슬림인 것이 무슨 문제라도 됩니까? 답은 '노'입니다.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미국이 아닙니다. 7살짜리 무슬림계 미국 아이가 앞으로 미국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믿는 것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중략)…이런 식의 행동을 우리가 미국에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목이 메인 채로 이런 일화를 들려주었다고도 한다. 

  “잡지에서 본 한 장의 사진 때문에라도 특히 이 부분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복무 중인 군인들에 대한 포토에세이였어요. (버지니아의) 알링턴 군인 묘지에 있는 한 어머니가 아들의 무덤 비석에 머리를 묻고 있었습니다. 사진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 비석의 머릿말이었는데, 자주색 하트와 동색 별이었어요. 이라크에서 죽었다는 뜻이죠. 20살이었는데, 그 다음 사진이 뭐였냐면 비석의 제일 윗 부분인데, 그것은 기독교의 십자가도 아니고 이스라엘의 다비드별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초생달과 별로 되어있는 이슬람교도의 표시였어요. 그 병사의 이름은 카림 라샤드 술탄 칸. 그는 미국인이었습니다. 뉴저지에서 태어났고 9·11 당시 14살이었는데 군대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답니다. 그리고 목숨을 바쳤지요. 자, 지금 우리는 이런 식으로 우리 스스로를 분열시키는 행위를 중단해야 합니다.”

  그의 말을 듣고 감동했을 미국의 흑인이나 무슬림들이 미국을 지킨다는, 혹은 세계를 구원하고 “악”과 싸우겠다는 명분으로 다시 파키스탄으로, 팔레스타인으로, 이란으로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섬뜩하게 한다. 오바마의 애국심은 파월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결코 전쟁을 끝낼 수 없다.

 

인민주의자 오바마와 정치의 주체로서 인민 사이에서


  오바마가 경제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전쟁을 완전히 종식시키지는 못하더라도, 그래도 공화당보다는 민주당이 낫다, 조금이라도 개혁이 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닌가, 라고 의견을 피력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오바마가 얼마만큼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 에 여러 자료를 분석하고 정리해서 답하는 것으로는, 실은 아무것도 변화할 것이 없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답은 정치를 그에게 온전히 맡긴다는 전제 하에 나오는 대답이기 때문이다. 

  대공황 당시 노동자들은 구조조정을 피하기 위해 노동자들끼리의 출혈적인 경쟁을 하기보다 파업과 쟁의로 맞섰고, 길고 긴 베트남 전쟁을 끝낸 것은 미국의 정권교체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 일어난 반전운동 때문이었다. 지금 여기에서 금융세계화에 맞선 대안세계화 운동과, 전쟁에 맞선 평화운동이 아니라 오바마의 일거수 일투족에 기대를 품는 것은 정치의 위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준다.

  인민들이 무지하고, 스스로 정치의 주체가 되고자 하지 않을 때 인민주의는 발호한다. 그가 이룩한 작은 변화를 보고 감동하는데 그친다면, 우리는 탁월한 인민주의자를 또 한 번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그가 이룩한 작은 변화에 만족한다면, 우리의 현실적인 대안은 오히려 점점 더 이상(理想)으로만 남아 저 멀리 가버릴 것이다. 초국적 제약기업과 보험회사를 통제하지 못하면 하다못해 오바마가 약속한 국민의료보험제도도 본래의 안보다 훨씬 축소될 수 있으며, 미국 사회 내 흑인운동이 침묵한다면 실업에서 의료보험까지 모든 측면에서 불평등이 명백히 남아있는데도 많은 미국인들, 많은 백인들이 인종문제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는 문제라고 점프할 수 있다. 

  전 세계의 대안세계화 운동은 이미 구체적인 대안을 이야기하고 있다.3) G20을 넘어서는 민주적인 참여와 토론이 필수적이므로 국제 금융ㆍ화폐 질서 개혁을 위한, 세계 모든 정부와 시민사회 ․ 시민조직 ․ 사회운동 등의 대표자가 참여하는 유엔 주최 국제회의를 열자, 모든 통화와 금융상품들은 반드시 금융규제를 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자, 세계적 기업이나 부유한 개인들이 자국의 세금을 피하기 위한 도피처를 제공하는 조세피난처를 폐쇄하자, 등등. 이러한 대안은 운동 없이 관철될 수 없다. 오바마는 한시도 자기 스스로와 자신의 정권이 미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미 흑인역사를 연구한 매러블 교수의 이 말을 빌려올 수 있을 것이다.

  “진짜 도전은 오바마가 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진영이 하는 것이다. 우리는 매우 불편하고 보기 드문 상황에 있다”

  스스로 뛰어들어 변화를 꿈꾸고, 요구하고, 만들어갈 수 있는 사회운동이 아니라, 60억이 넘는 인구의 운명을 오바마의 정책 방향에 우선 맡겨버리는 현재의 상황에서 역사가 앞으로의 4년을 인민주의자 오바마의 시대로 기록할지 정치의 주체로서 인민들을 기록할지, 모든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Posted by 행진

2008/12/08 11:56 2008/12/08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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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보스코프스키 2008/12/15 01:57 # M/D Reply Permalink

    그림이 안 보이네요... 처리 부탁요.

 

저탄소 녹색성장? 람사르 총회?

생태위기의 해법은 어디에 있는가?



람사르 총회를 통해 본 정부의 모순


지난 10월 28일부터 11월 4일까지 경상남도 창원에서 ‘건강한 습지, 건강한 인간(Healthy Wetlands, Healthy People)’ 을 주제로 10차 람사르 협약 당사국총회가 열렸다. 람사르 협약1)은, ‘습지의 보호와 지속가능한 이용에 관한 국제 조약’으로, 165개 당사국, 국제기구, 민간단체 관계자 등 약 1,500명이 참가하는 큰 회의이다. 정부는 2006년부터 람사르 총회를 개최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썼다. 환경선진국으로 도약하겠다는 포부일진대, 그와 동시에 환경 파괴를 지속적으로 대놓고 벌여 국내외로부터 비판받았다.


요 몇 년 간 생태계 파괴 논란을 일으킨 새만금 간척 사업은, 지난달 국무회의를 열어 농지 규모를 70%에서 30%로 축소시키고 그 자리에 산업단지 등을 조성토록 했다. 또, 람사르 총회를 3개월 앞둔 지난 7월, 중앙연안관리심의위원회를 열어 전남 신안군 23개 지구 매립을 승인했다. 인천시, 충남 서산시는 각각 조력발전소를 추진해 습지 파괴를 앞 당기려하고 있다. 지난 6월 환경부는 람사르 총회 사무국에 제출한 ‘새만금 환경 모니터링 보고’에서 “새만금과 같이 연안 습지를 대량 손실시키는 대형 매립 계획에 제한을 가하겠다”고 해놓고  한 달 뒤 낙동강 하구에 대규모 연안 습지 매립을 승인했다.


이명박 정부의 모순된 언행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긴 하다. 시장일 때에는 청계천 개발을 생태적 복원이라고 하다가 당선 된 후 한반도 대운하를 친환경 사업이라고 하지를 않나, 이러니 8월 15일 ‘저탄소 녹색성장’을 새로운 국가 발전의 비전으로 삼겠다. 녹색성장은 온실가스와 환경오염을 줄이는 지속가능한 성장으로, 녹색 기술과 청정에너지로 신 성장 동력과 일자리를 창출하는 신 국가발전 패러다임”이라는 이 대통령의 연설은 많은 사람들을 당혹케 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그는 람사르 개막식 축사로 ‘람사르 모범국가가 되겠다’고 발언 해 또 한 번 폭소를 자아냈다.


저탄소 녹색성장? '고탄소 황색성장!'

정부는 저탄소 녹색성장을 천명해 놓고도 실제로는 반대의 일을 벌이고 있다. 지난 3월 환경부의 업무계획에 제시된 보수적인 온실가스 감축계획도 지나치다며 폐기시켰다. 또 5월에는 상수원 보호지역을 대폭 축소하고 규제를 완화했다. 최근엔 경제가 당장 어려워지니 수도권 그린벨트를 해제해서 공장을 유치하겠다 발표했다. 또 정부는 스스로가 말하는 녹색성장과 배치되게도 “원전산업도 유력한 대안”이라며 “자원빈국의 입장에서 원전을 통해 대체에너지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MB식 저탄소 녹색성장론은 원자력발전소 건설기술을 보유한 대형 건설업체들에 호재로 인식되고 있다. 정부가 계획대로 2030년까지 10~11개의 원자력발전소를 짓게 되면, 이를 지을 수 있는 회사는 원자력 및 화력발전소 건설 실적을 보유한 업체로, 전기공사업 등록과 토건업·산업설비공사업 면허 등을 모두 갖고 있어야 한다. 이는 국내에 거대 건설 기업 5개사뿐이다. 최고의 부가가치업인 것이다. 원자력 경제로의 추진이, 화석연료를 대체하는 저탄소 녹색경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원자력 에너지를 자가 동력원으로 하는 공장이나 핵자동차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원자력 에너지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전력 부문뿐이다. 그런데 전기는 최종 에너지 소비에서 고작 17%를 차지한다. 한국은 수입한 석유의 55%를 석유화학, 섬유제품으로 소비하고 있으며, 36%를 수송부문 에너지로 사용하고 있다. 총 석유 소비에서 발전용으로 사용되는 석유는 3.5%에 불과하기 때문에 고유가의 대책으로 원자력 발전은 터무니없는 이야기이다.


2003-04년 정권의 폭력 탄압에 맞서 싸웠던 부안 핵 폐기장 반대 투쟁을 돌아본다. 정부와 주류 언론에서는 님비 현상으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부안의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땅, 우리나라, 아니 전 세계 어디에도 핵 폐기장이 들어서서는 안 된다”고 말했었다. 생태를 걱정한다는 정부는 안면도, 굴업도, 부안 등지에서 값비싼 사회적 비용을 치루고 20여 년 만에 현금 3천억 원과 각종 특혜제공 약속, 부정선거로 중저준위 핵폐기장 부지를 마련했다. 그러나 정말 위험하고 마땅한 처리방법이 없어서 문제가 되는 사용 후 핵연료 처리 방법에는 아무런 대안이 없는 상태다. 이러한 문제점이 상당 해 유엔 기후변화협약에서는 핵 산업계와 일부 국가의 로비에도 불구하고 원자력을 청정에너지원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정부는 이처럼 원자력의 비중을 과도하게 설정한 반면 기후변화와 에너지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기술인 재생에너지 확대 목표를 낮게 설정했다. 중국조차도 2030년이면 전체 에너지의 20%를 재생에너지로 공급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은 2030년까지 11%라는 목표를 제시했다. 더군다나 그 내용을 보면 재생에너지로 분류할 수 없는 수소에너지, 연료전지, 폐기물 소각열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미 정부는 2011년까지 신재생에너지 5%로 확대할 목표를 제시했는데 그 후 19년간 6%를 더 늘리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2030년까지 111조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게다가 예산의 확보는 어떻게 하는지에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정부의 정책의지가 심히 의심된다.


지속가능한 재생에너지 체제로 전환해야


정부가 각 계의 비판에도 아랑곳 않고 에너지기본계획을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이유는,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공공부문 사유화/시장화를 현실화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민중들의 최소한의 생존권마저 박탈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다. 또 에너지기본계획 5대 비전 중에서 첫 번째로 제시하고 있는 ‘에너지 자립사회 구현’의 ‘자주개발률2) 제고’가 큰 문제이다. 2005년 4.1%였던 자주개발률을 2030년 40%로 높이는 것이 목표다. 그러나 한국의 에너지 자주개발은 전 세계적인 에너지 위기와 분쟁을 가속화할 수도 있다.

이 대통령은 현재 5% 남짓한 에너지 자주개발률을 임기 중에 18%, 2050년에는 50% 이상으로 끌어올리겠다고 천명했다. 새 정부는 대통령 인수위원회 시절, 이라크 쿠르드 지역의 유전을 개발하겠다고 했다가 이라크 중앙정부의 반발을 샀다. 이밖에 가스공사 및 대기업들은 러시아의 서캄차카 유전개발과 사할린 천연가스 도입까지 추진 중이다. 정부와 언론에선 한국은 세계 95위 산유국이라며 자랑스레 홍보한다. 이것이 정녕 자랑스러운 일인가?


한국의 자주개발률 제고는 전 세계적인 에너지 위기와 분쟁을 가속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것이다. 지난 20세기부터 석유를 둘러싼 지정학적 갈등은 전쟁까지 불러왔다. 21세기에 들어와서도 계속되는데, 미국은 대테러전쟁을 빌미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고, 베네수엘라와 이란을 불량국가로 지목하며 위협하고 있다. 이는 석유 자원 확보를 위한 갈등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제국주의 깡패국가의 야망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초민족적 법인자본의 석유 통제가 새로운 전쟁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 자주개발률을 확보를 주장하는 한국정부는 이 행보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겠다는 선언이다. 이미 이라크 파병에서 드러났다. 국익을 위한 참전과 자원 확보 경쟁은 쿠르드 유전 개발권 논란에서 보듯이 평화는커녕 중동의 분쟁을 심화시키고 있다.


에너지 위기는 문제를 발생시킨 화석연료 중심의 에너지 체제를 지속하는 한 해결할 수 없다. 유일하게 가능한 기술적인 해결책은 지속가능한 재생에너지 체제로의 전환이다. 지속가능한 재생에너지에는 태양광, 태양열, 바이오에너지, 풍력, 지열, 해양에너지, 소수력이 포함될 수 있다. 에너지기본계획이 에너지 위기에 맞서는 한국사회의 대안이 될 수 있으려면 화석연료 중심의 에너지 체제를 지속가능한 재생에너지 체제로 전환하는데 집중해야 한다.

물론 기술적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에너지 위기는 사실 국제사회의 협력이나 일국 정부의 정책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문제의 원인이 자본주의 체제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기가 어렵고, 기술적인 조정의 효과도 미미하다. 자본주의 역사는 인력, 축력, 나무를 대체할 수 있는 효율적인 에너지원의 발견과 응용의 역사였다. 19세기 영국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핵심 에너지였던 석탄의 시대가 끝난 후 20세기 미국 자본주의는 석유와 함께 도래한다. 유한한 화석연료의 채굴로 자원고갈이 임박했고, 자원 확보 과정에서 지정학적인 긴장과 분쟁이 심화되어 에너지 위기를 부추기고 있다. 따라서 기후변화와 에너지 위기는 자본주의의 역사와 그 모순과 직접적으로 결부되어 있으며, 문제해결을 위한 근본적인 방책도 체제의 변혁과 떨어뜨려 사고할 수 없다.


문제는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기술문명으로부터의 탈피나, 기술 개발을 위해 연구기관에 호소한다거나, 저탄소 녹색성장과 같은 허구적 정책에 희망을 건다거나, 람사스 회의 같은 전 지구적 회의로 합의를 표방하며 면죄부를 뒤집어쓰는 협약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위의 계획들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다. 환경위기에 맞서는 운동은 반드시 급진적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인류는 45억년 지구의 역사의 끄트머리에 등장한다. 그런데 찰나 동안 이렇듯 인류가 생태계를 비가역적 위기로 몰아가고 있으니 더욱 심각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인류가 만들어 낸 자본주의 체제, 그 체제가 이제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이 위기의 뿌리가 ‘사회적’인 것임을 인정하며 그 해결책 역시 전 세계 차원의 역사적 관계에 대한 변혁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엥겔스의 오래된 이 말, “자연의 전통적 과정에 대한 개입을 조절하는 것은 단순한 지식 이상의 어떤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기존 생산양식의 완전한 혁명과 아울러 동시대 사회질서 전반의 혁명을 필요로 한다.”는 지적을 떠올리며 대안세계화를 향한 생태 운동을 다져나가야 할 때이다.  


Posted by 행진

2008/12/08 11:50 2008/12/08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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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발전주의의 시대1: 1960년대

 

발전주의의 시대1: 1960년대를 중심으로



0. 들어가며

한국 경제가 어려워지거나 대선이 다가오는 시기, 각종 매체들에서는 의례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에 대한 설문을 실시하곤 한다. 거의 대부분의 설문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 경제를 부흥시킨 대통령으로써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담긴다. 가장 좋은 평가는 ‘민족중흥의 대통령’, ‘한강의 기적’과 같은 단어들을 통해 박정희를 신격화하고, 당시의 경제성장이 추후의 민주주의의 기틀까지 마련했다고 본다. 이런 논의들은 한때 ‘박정희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며, 유명 인사들이 박정희 따라잡기를 하거나 그와 비교되고 싶어 했다. 박정희 신드롬에 대한 일반적인 반론은 1960 ~ 70년대에는 경제성장을 이루어냈을지 몰라도 장기적인 경제구조에 있어서는, 외자 의존적이고 대외 취약성을 지니고 있으며 재벌 중심의 노동 착취적이고 양극화된 구조 형성 등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줬다는 것이다. 또한 군부독재라는 반동적 정치 체제가 추후에 민주주의의 성립이나 사회적 의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한국 사회의 진보를 더디게 가져왔다는 입장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역사에 대해서 평가할 때, 정치/경제/사회/문화와 같은 각각의 영역들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알아보는데 익숙하다. 그리고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각각의 영역이 어느 정도까지 발전했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선을 제시해 놓고 미달한 것과 초과한 것들을 비교한다. 하지만 거듭 이야기하듯이 한국 현대사에서 정치와 경제는 결코 분리된 적이 없고, 역사란 장기적인 경향과 상이하고 불균등한 요소들이 과잉결정되며 형성되는 산물이다. 특히 계급투쟁은 다양한 제 모순들을 결합시키는 매개가 되며, 1960 ~ 70년대 강력한 발전주의가 가능했던 조건 역시 지배계급의 헤게모니가 가능했던 계급투쟁의 결과를 통해 살펴보아야 한다. 경제가 발전한 만큼의 국민 의식성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경제에 비해 정치의 발전이 너무 늦었다는 식의 일반론적인 평가들은, 다양한 요소들에 대한 평가 없이 정치와 경제에 대한 부당대립을 전제하는 자유주의의 오류를 반복하는 것이다. 또한 이 시기는 자본주의의 상이한 발전모델에 대한 연구라는 이름 아래 국내의 경제정책들을 연구하거나, 유교 자본주의론과 같이 관념론적인 국민의 의식에 대해 매몰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세계 자본주의의 규정력 역시 국내 정책의 한 결정요인으로 치부되기도 하고, 역사적 자본주의가 한국에서 어떤 모습을 띠고 나타나는지 잘 밝혀지지 않는다.

본 글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전반부라고 할 수 있는 1960년대에 대해서 다룰 것이다. 이 시대는 한국 자본주의의 미성숙한 기원으로서 1950년대를 넘어, 본격적인 발전주의 프로그램이 작동하는 시기로 다룰 것이다. 발전주의라는 단어는 1960년대를 다루는데 있어서 특히 중요한 키워드가 될 것이다. 발전주의는 자본주의의 경제성장 이데올로기 일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미국 헤게모니의 물질적 확장기에 나타난 반주변부 국가들의 상황 전반을 지칭하는데 쓸 것이다. 1960년대의 한국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데에는 발전주의 프로그램 이외에 어떤 요인들이 개입하는지 살펴보고, 이것을 역사에 대한 일반화된 관점에서 어떤 식으로 파악할 수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단순히 역사를 해석하는 것을 넘어서 민중들에게 끊임없이 환기되는 발전에 대한 환상과, 그 한국적 현상으로서 ‘박정희 신드롬’을 끊어내는데 일조할 수 있기를 바란다.



1. 발전주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국 현대사를 크게 두 시기로 구분 짓는다면 그것은 대략 1945 ~ 1979년까지의 발전주의 시대, 1979 ~ 현재까지 이어지는 신자유주의 시대로 나뉠 것이다. 이런 시기구분은 역사적 자본주의의 세계사적 경향에 따르는 것으로, 여기서 사용하는 발전주의라는 용어는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장소를 갖는 한정된 의미이다. 사회주의 진영과의 대결에 봉착한 미국 헤게모니에 전 세계적인 포섭메커니즘이 쟁점으로 떠오르게 되고, 물질적 확장 국면에서 이를 가능하게 하는 물질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것은 미국의 원조와 그 변형된 정책형태들을 중심으로, 일국적 차원에서 자국민들을 포섭하는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포섭된 지역에서 국가는 경제 발전과 국민들의 복지를 위한 담지자로 기능할 수 있었고, 이런 국가들은 UN과 NATO를 중심으로 하는 전 세계적 국가간 체계의 틀을 통하여 냉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성장을 기본적으로 포함하는 일련의 포섭 프로그램은, 세계 체계에서 국가들이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상이하게 나타났다. 그것은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중심부 국가들의 사민주의와 라틴 아메리카와 동북아시아를 주로 포함하는 반주변부 국가들의 발전주의였다.

그렇다면 발전주의를 규명하는데 있어서 반주변부라는 용어가 갖는 함의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은 유의미한 일이다. 세계자본주의의 헤게모니는 단지 중심부 국가의 축적체계가 전달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심부형 축적체계와 함께 주변부형 축적체계: 플랜테이션 단종 농업, 가내 수공업, 무기 밀매 등이 있기 마련이고, 이는 자본주의 세계체계를 구성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반주변부는 중심형 축적체계와 주변부형 축적체계가 동시에 나타나는 지역으로서, 주변부로부터 자신들의 민주적인 부가 유출되는 것을 막는 동시에, 중심부로의 편입을 시도하지만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지역이다. 1950 ~ 70년대 반주변부의 축적체계는 전체 산업에서 공업 비율의 증가로 나타났고, 이는 곧 선진국에 대한 따라잡기 전략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장기간에 걸친 소득 추이를 살펴볼 때, 공업화‧산업화는 선진국에 대한 따라잡기보다는 반주변적인 국가의 위치를 공고하게 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독점적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선도적인 산업과 생산재 부문을 독점하고 있는 중심부 국가에 비해, 반주변부의 공업화는 중심부 국가들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고, 주변부 국가의 따라잡기 전략을 회피하기 위해 계속해서 중심부 국가에 대한 종속이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중심부 국가와 주변부 국가 사이의 완충지대로서 자본주의 세계체계에서 독특한 역할을 부여받는 반주변부 국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듯 중심/반주변/주변으로 나뉘어지는 것은 기본적으로 장기간에 걸친 세계체계에서 부에 대한 접근도에 따라 달라진다. 아리기에 따르면 중심에서의 독점적 부, 반주변에서의 민주적 부, 주변에서의 비부(非富)가 세계체계에서 각 나라가 차지하는 위치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어떤 축적체계를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와 함께, 헤게모니의 국가 간 체계라는 문제, 어떤 방식으로 노동자 운동을 포섭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포함된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1960년대는 냉전 시기로서, 대 사회주의권에 대한 경계가 중요한 문제였다. 특히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은 소련‧중국과 같은 거대 사회주의 국가가 인접해 있던 지역으로서,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방어를 위한 최전선으로서 전략적 위치였다. 이에 따라 이들 지역이 세계체계의 부에 대한 상대적인 접근을 용이하게 할 필요가 있었고, 원조나 차관의 형태로 자본주의적 시초축적에 필요한 자본을 마련, 비선도산업 부문에 대한 자본과 기술 이전 등이 이루어졌다. 또한 인민주의자들의 출현에 대한 경계와 계급투쟁이 극단적인 형태로 퍼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국내적으로 강력한 정치적 억압기제를 도입하였다. 이를 통해 동아시아 지역, 특히 대만과 한국은 주변부에서 벗어나 반주변부로 편입될 수 있었다.

미국 헤게모니 시기 반주변부의 존재와 그 행위양식은, 이 시기의 통치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반주변부라는 완충지대를 설정해 놓음으로서 사회주의 국가들의 위험을 막는 한편, 그 지역의 경공업이나 중간재 공업에서 생산된 잉여가치를 끊임없이 중심부 국가로 이전하였다. 이런 가치이전 메커니즘은 반주변부 국가가 중심부 국가로 올라서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한편, 주변부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에 대한 접근을 용이하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주변부 국가들의 발전주의는 ‘발전에 대한 환상’을 매개로 구성원들을 통합하고, 자본주의 세계체계에 포섭된 인민으로 기능하게 했다. 이 시기에 발전이란 곧 공업화‧산업화로 상징되었고, 또한 근대화로 상징되었다. 강력한 국가의 성장정책과 반공이데올로기의 실현은 국가를 경제성장의 담지자로 기능하게 하였고, 국가를 매개로 하는 발전주의 전략은 독특한 성장전략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발전주의란 미국 헤게모니의 물질적 확장기에 반주변부에서 나타난 축적체계 및 이데올로기로서, 국가를 매개로 하는 성장전략으로 구성원들을 통합하고 자본주의 세계체계에 편입될 수 있었던 전략이었다.



2. 군부독재의 시기

1950년대 후반의 경제불황에 따른 관료자본의 위기와 정치적 불안정이 심화되는 상황은 4. 19 항쟁을 낳고, 이후 장면정권이 등장하게 된다. 장면 정권과 민주당을 중심으로 하는 당시 지배계급의 응집력은 매우 취약한 상태였고, 지배계급 안에서 헤게모니를 잡을 수 있는 분파가 등장하지 못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국가장치의 기능을 완전히 확립하지 못한 1950년대의 상황에서 기인하는 것이었고, 원조경제 아래에서 성장한 관료자본을 포섭하지 못했던 민주당 정권의 기반의 문제였다. 이러한 가운데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민중운동이 활성화되어, 59년 말 558개였던 노조가 60년대 말이 되면 914개로 증가하고, 노동쟁의 총건수 역시 41건에서 218건으로 증가한다. 또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등의 단체를 중심으로 하는 통일운동과 담론이 확산되었다. 이에 민주당은 시위규제법과 반공특별법 등을 제정하고, 경찰을 동원한 진압‧검거‧투옥으로 맞서지만 이를 효과적으로 봉쇄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이 주도하는 군부세력에 의한 군사정변이 발발하고, 5월 20일 ‘국가재건 최고회의’가 설치되며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행사하게 된다. 그 해 7월 초대 의장이었던 장도영이 퇴진하고,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하게 된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혁명공약을 발표하고 새로운 통치기반을 만들기 위한 작업을 실시하였다. 1962년 3월 ‘정치활동 정화법’을 제정하여 기존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하였고, 각종 정당 및 사회단체들을 해산하였다. 국회와 지방의화를 해산하고 집회‧시위‧결사를 금지하였고, ‘언론‧출판보도의 사전 검열 명령’ 등을 통해 언론과 출판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였다. 또한 사치외제품 소각ㆍ불량배 및 용공분자의 색출 검거ㆍ부정축재자 처리 요강 등을 통해 쿠데타의 정당성과 지지를 획득하고자 한다. 이와 함께 군부세력은 1961년 6월 헌법적 효력을 가지는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재정하고,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공화당 창립준비를 하며 제 3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기반을 닦아나갔다. 이러한 작업을 거치며 1962년 3월 22일 대통령 윤보선의 사퇴로 박정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고, 1963년 10월 선거를 실시해 그해 12월 17일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하는 제3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60년대 당시에 군부통치가 실시된 것은 몇 가지 필연성을 가진다. 우선 1950년대 자본주의가 미성숙한 조건에서 관료자본의 이해를 뒷받침할만한 지배계급의 분파가 출현하지 못했고 정당정치 역시 미숙한 상태였다는 점을 이야기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군부는 당시 억압적인 국가기구의 성장 속에서, 한국전쟁을 통해서 엄청나게 성장하였다. 반공이라는 이념과 어느 분파보다 조직적인 정비를 갖추고 있던 군부는, 당시 어떤 사회세력보다도 근대적인 조직이었다. 그런데 이런 국내적인 상황과 함께 그 당시 군부통치는 한국만의 고유한 역사가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해두어야 한다. 5.16 군사정변은 주한미군사령부와 미국무성에게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해 11월 박정희의 방미를 계기로 미국과의 협조관계를 다져나간다. 당시 미국의 행동은 한국에서의 군부통치를 최소한 용인했으며, 일각에서 제기되는 것과 같이 군사정변을 유도했다는 음모설마저 제기하기에 충분했다. 당시 미국은 1940 ~ 50년대 라틴아메리카에서 좌파적 성향을 띠는 인민주의자들이 집권하는 것을 막으려는 목적에서, 일종의 예비쿠데타를 일으키고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도록 하였다. 미국은 친미적인 군부정권들을 통해서 라틴아메리카의 자원들과 1차 산품들을 들여올 수 있었으며, 그 지역에서 수입대체공업화를 실시하도록 한다. 수입대체공업화는 라틴아메리카에 고정자본과 설비를 들이는 것을 강제하며, 그 자체로 착취의 메커니즘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잉여이전의 메커니즘은 그 지역을 미국 헤게모니를 위한 경제적인 앞마당으로서 기능하게 하였다.

한국에서의 군부통치는 라틴아메리카의 그것과는 약간 다른 것으로, 이는 ‘경제의 과잉’이라는 정세에 있던 라틴아메리카에 비해 동아시아의 정세는 ‘정치의 과잉’이었기 때문이었다. 거대 사회주의권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었던 동아시아 지역은, 강력한 반공주의를 매개로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권의 실질적ㆍ상징적 위협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이런 필요성은 원조 경제시대부터 이어져온 막대한 국방비 지원으로 나타났고, 지원이 차관으로 넘어간 이후에도 국방비와 관련된 지출의 규모는 상당히 컸다. 또한 베트남 전쟁에의 참전을 계기로 한국군의 현대화를 약속했고(브라운 각서), 1966년 한미행정협정(SOFA 협정)을 체결하여 주한 미군의 지위에 관해 합의했다. 또한 동아시아 지역은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전시장(show case)으로서 기능할 필요가 있었고, 수출지향공업화를 통해 고성장을 추구하며 반공주의를 매개로 국가 구성원들을 통제해 나간다. 당시에 일련의 정책들을 추진하며 발전주의적 통치성을 확립할 수 있었던 세력은 군부밖에 없었고, 1961년 실질적으로 군부통치가 시작된 이래 1987년에야 독재체제가 마무리 될 수 있었다. 이처럼 반주변부의 발전주의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통치집단으로는 군부가 적격이었지만, 라틴 아메리카와 동아시아에서 실시했던 군부통치의 목적은 약간 달랐다고 할 수 있다.



3. 자본주의 세계체계로의 편입

군부통치의 확립과 억압적 국가장치의 기능이 강화되는 과정은, 1950년대와는 달리 정치적 안정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 1960년대에는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하여 국가가 경제성장을 주도했으며, 70년대까지 소위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하였다. 1ㆍ2차 경제개발계획 기간 동안 9.6%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을 이룩하였고, 1960년대 전체에 걸쳐 수출은 1962년 5500만 달러에서 8억 8200만 달러로 연평균 40%를 넘는 수출신장률을 기록하였다. 제조업 생산의 구성 비율에서도 1950년대 대부분을 차지하던 소비재 중심의 공업화로부터, 시멘트ㆍ화학섬유ㆍ정유ㆍ비료 등 점차 수입 대체적 중화학공업의 비율이 증가한다. 이러한 ‘발전’은 그 성격이 어떠했든지 간에, 그 후에 어떤 영향을 주었든지 간에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그 시기 경제성장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경제성장의 이유는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당시의 객관적인 시대 조건을 해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기본적인 작업 같아 보이지만, 또한 현재까지 제대로 밝혀지지 못한 부분이기도 하다. 당시의 시대 상황에 대해 규명하면서 박정희의 리더십을 강조하는 가장 반동적인 평가부터, ‘동아시아 모델론’ㆍ‘유교적 자본주의’와 같이 일국적 모델을 대상으로 하는 가설들, 이후 한국경제의 불황까지 무리하게 연결하는 모든 평가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계속 강조하였듯이 한국은 대 사회주의권의 최전선 방어지역으로서, 자본주의 세계체계에 밀접하게 포섭될 필요가 있는 ‘정치의 과잉’인 지역이었다. 정치ㆍ군사적으로 긴밀한 연관관계를 갖는 것과 함께 일정 정도의 경제개발과 종속적인 경제 구조를 이룩하고, 국가 구성원들에게 발전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며 세계사적 포섭을 진행해야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우선 미국을 필두로 하는 중심부 국가들의 자본수출 양식이 원조에서 차관으로 변화한다. 이는 미국의 무모한 대외팽창정책과 그에 따른 군사비지출ㆍ원조로 말미암아 매년 30억 달러 이상의 적자가 누적됨으로서, 원조제공 방식을 중선의 무상증여에서 유상차관방식으로 변화시킨 것과 관련이 깊다. 또한 동북아에서는 일본을 미국 헤게모니의 하위파트너로 종속시킴으로써, 대소방위체제를 구축하고 일본의 대한진출을 적극적으로 주도한다. 이에 따라 5. 16 군사정변 직후부터 적극적인 한일회담이 추진되기 시작하고, 1962년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통하여 가장 중요한 안건인 대일청구권 문제가 비밀리에 타결된다. 한일회담은 어업협정 및 몇 개의 실무적인 사항들을 처리한 후에,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으로 조인되고 그 해 12월 비준서가 교환되어 효력이 발휘된다. 한일협정의 청구권은 무상공여 3억 달러ㆍ정부차관 2억 달러ㆍ민간차관 1억 달러를 약속하는 것으로,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하위체계의 기틀을 다지는 동시에 차관경제로서 한국의 재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는 급속한 자본축적을 위해 자본수입이 절실히 필요했던 국내독점자본의 요구와 맞물리면서 수입대체 중화학 공업화와 수출산업체제로의 재편을 위한 축적의 조건들이 정비된다.

차관이 국내에 자본을 조달하는 중요한 방식이 되고, 세계 자본주의와의 연관성이 더욱 커지는 ‘개방체제’로 전환되어감에 따라 국내의 축적 조건도 그에 걸맞는 방식으로 바뀌어 간다. 본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1966)에 따르면, 투자재원의 72.2%를 내자로 27.8%를 외자로 조달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62년 1월 증권거래법을 제정하여 증권시장의 활성화를 꾀하고, 동년 6월에는 구 10환을 1원과 교환하고 일정액 이상의 소지금을 금융기관에 강제 예치하도록 하는 ‘통화개혁’, 내자조달을 목적으로 하는 국채발행을 실시하지만 오히려 금융경색 만을 초래한다. 결국 1963년 대외의존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계획내용을 대폭 수정하여, 외자도입을 위한 국내의 투자기반을 조성하기 시작한다. 63년 재정안정화 계획이 부활되었고, 64년 비현실적으로 낮았던 환율을 일시에 두 배 정도 올려 단일변동환율제를 채택하였다. 그리고 1965년의 한일협정 체결과 금리현실화 조치, 1966년 ‘외자도입법’ 제정과 1967년의 GATT 가입 및 무역자유화 조치 등을 실시한다.

이런 정책들과 함께 베트남에의 참전은, 한국이 자본주의 세계체계에 편입되는 가장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1963년 소규모의 의무부대와 태권도 교관을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1964년 파병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하여 1973년까지 총 4만 7천여명이 베트남전에 참전하였다. 브라운 각서(1966.3.4)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참여의 대가로 한국에 대해 개발자금 1억 5천만 달러의 차관 제공, 한국군의 현대화와 베트남전에 소요되는 물품 중 한국제품 구입 등을 약속하였다. 1966 ~ 70년에 연평균 3억 3천6백만 달러의 군사원조를 받았고, 베트남에서의 송금 등으로 1965 ~ 73년간 10억 달러의 외화를 획득할 수 있었다. 또한 한진그룹 등의 독점자본과 대거 노동력 진출이 이루어져, ‘베트남 특수’로 부를 수 있는 경제성장의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이와 함께 1966년에는 한미행정협정(SOFA)이 체결됨으로서, 정치ㆍ군사적인 연관관계도 확고하게 다져나갈 수 있었다. 이렇듯 미국 헤게모니의 유지를 위해 시작되었던 베트남 전쟁에 한국이 참전한 것은, 자본주의 세계체계로 편입되는 과정이 결코 순수한 경제적인 부분으로 한정될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차관경제에 걸맞는 방식으로 축적조건이 재편됨에 따라 외자가 대거 들어와, 제2차 경제개발계획 기간 동안 도입된 외자는 제1차 기간에 비해 7배를 상회하는 액수였다. 이러한 외자는 수입 대체적 중화학공업화에 투자되어, 수입해 오던 주요 소비재와 원자재를 직접 생산하였다. 공장건설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 대부분은 막대한 규모의 차관도입이나 초민족적 기업과의 합작으로 건설된 것으로서, 노동력을 제외한 모든 생산요소를 초민족적 기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차관은 상환을 요하는 것으로서 원리금 상환을 위한 외환을 얻기 위해서는, 수출을 우선적으로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국가는 보조금ㆍ금융과 세제상의 지원 등을 통해 수출지원 체제를 확립하였고, 1달러의 수출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평균 348원(1.5달러)의 비용이 들어가는 출혈 수출이 이루어졌다. 이렇듯 수입대체 혹은 수출지향 공업화를 추진하여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것은, 경제 자립화와는 전혀 거리가 먼 것으로 자본주의 세계체계에 오히려 더욱 긴박 당하고 대외 종속성이 커지게 된 것을 의미한다.



4. 발전주의와 국가

일반적으로 자본주의가 완성되고 발전해 가는 과정은, 자본주의적 국가형태가 완성되고 발전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국가가 성장하고 억압적ㆍ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가 만들어지는 것은, 자본이 성숙하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완성된 이후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국가형태(민족국가)를 필수적으로 요구하며, 국가는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를 포함하는 사회구성체와 그 구성원들을 재생산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특히 자본의 시초축적 단계에서는 적극적인 경제정책을 통해 자본의 재생산을 돕고, 구성원들에게 자본제 생산에 걸맞는 규율과 통제를 강요한다. 2차 세계전쟁 이후에 식민지였던 많은 지역들이 민족국가로서 독립하고 자본주의 세계체계에 편입되지만, 대다수의 국가들은 선진국에 대한 ‘따라잡기’를 위한 시초축적을 시도할 수 없었다. 그것은 미국 헤게모니의 ‘자유기업’ 이념이 보편적인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고, GATT나 IMF 같은 국제기구들을 통해 대다수 주변부 국가들에게 ‘자유무역’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나라들에게 제공되는 각종 원조는 구호물자 이상의 것이 아니었고, 지속적인 수탈구조는 주변부형 자본주의 양식의 발달 과정이기도 했다. 또는 강력한 시초축적을 통한 경제성장을 할 수 있는 정세가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이와 반대로 1949년 중국혁명 이후 동아시아의 정세는, 미국에 의해 강력한 시초축적을 통한 경제성장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1950년대에 국가의 역할이 어느 정도 확립되고 농지개혁과 일종의 인클로저, 재정ㆍ금융정책, 원조물자에 대한 관리, 초기 독점재벌에 대한 지원 등을 실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를 강력하게 추동할 수 있는 지배분파가 확립되지 않았고, 1950년대의 경제성장이란 미약한 시초축적으로서의 의미만 있었다. 1960년대 등장한 군부세력은 국가를 매개로 강력한 발전주의 정책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1960년대 국가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을 넘어 독점자본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조치를 통해 재벌체제를 성립하고, 1ㆍ2차 경제개발계획을 통해 사회간접자본과 수출 진흥 정책을 마련한다. 이런 경제정책들과 함께 민중들의 저항을 폭력적으로 막고, 국가장치의 기능을 강화해 간다. 이와 함께 교육ㆍ양육ㆍ가족 등 재생산의 영역에 대한 개입을 시도하고,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와 그 쌍둥이로서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하게 설파한다.

국가는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해나가는 과정에서 자본의 재생산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자본 축적을 지원하였다. 우선 재정정책을 통한 지원을 살펴보면, 1961년 572억 원이었던 일반재정 규모는 1970년에 이르면 5977억 원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이런 자금의 20 ~ 30%는 재정투융자라는 명목으로 독점자본에게 지원되었으며, 제조업 부문에 전체의 45.9%가 사회간접자본 부문에 전체의 47.8%가 투자되었다. 그리고 제조업 전체 투자의 60%가 수입대체산업인 화학섬유ㆍ정유ㆍ비료ㆍ시멘트ㆍ금속 등에 투자되었다. 국가는 1962년 수출산업에 대한 특별감가상각, 65년 조세감면규제법 등을 실시함으로서 60년대 전 시기에 걸쳐 법인체에 대해 18.3%에 달하는 조세감면을 행했다. 차별적인 독점자본에 대한 세제혜택은 자본들 간의 불균등발전을 강화하였고, 간접세를 중심으로 민중들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였다. 국가가 중앙은행을 비롯한 시중은행들에 대한 적극적인 규제를 실시한 관치금융 역시 독점자본을 지원하는 방법이었다. 독점자본에 대한 대출 금리는 60년대 기간 내내 도매물가상승률과 비교하였을 때 비슷한 수준이었고, 때로는 실질금리가 마이너스가 되기도 하여 정책금융을 대출받는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특혜였다. 독점자본에 대한 지원책들과 더불어 많은 수의 국가기업이 설립되고 운영되어, 1968년의 경우 매출액 규모 상위 100개 기업 중 국가기업이 18개를 차지하고 총매출액이 34.3%에 이르렀다.

국가가 자본축적을 적극적으로 지원함으로써 독점자본이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되어, 2차 계획 기간 동안 10대 재벌의 부가가치 생산이 연평균 28%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1960년대 수입대체적 중화학공업 부분에 진출한 독점자본들은, 거대한 규모의 생산설비를 도입하여 건설되었고, 국가는 이들 품목에 대해 수입규제조치를 실시하여 독점적인 지위를 보장하였다. 또한 출혈수출에 따르는 결손을 보장받기 위하여 국내의 판매가격을 고가에 설정하여 초과이윤을 수취할 수 있었다. 독점적 판매가격의 보장과 함께 이 시기 독점자본의 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전 민중에 대한 수탈이었다. 1960년대 수출공산품은 대게 노동집약적 산업의 생산품이었고, 자본축적의 주된 기반은 저임금 노동력이었다. 이것은 1960 ~ 70년 사이에 노동생산성이 연평균 12.9%의 비율로 증가하고 있었음에 비해, 실질임금은 고작 4.2%의 증가율에 머문 것에서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1950년대 미국 잉여농산물의 광범위한 원조는 국내 농업과 공업 간의 분업관련을 완전히 파괴하고,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광범위한 과잉인구가 되도록 강제했다. 과잉인구의 압박은 저임금을 강제하는 강력한 요인이 되었고, 국가에 의한 노동운동의 통제와 저곡가 정책 또한 저임금구조를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국가는 자본의 재생산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노동력의 재생산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며 민중들의 삶을 통제해 나간다.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는 베이비붐이 나타났던 시기로서, 4 ~ 4.5% 정도의 높은 출산율을 가져온다. 이에 대해 인구정책의 일환으로 가족계획사업 10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1962년부터 실시하게 된다. 전국에 가족계획 상담소를 설치하여 면당 1명 이상의 가족계획 요원을 배치하고, 피임법 등 보건‧의료 기술을 도입하기도 한다. 이에 따라 1962년 2.9% 정도였던 인구성장률은 그 뒤 크게 낮추어진다. 교육제도와 정책은 자본주의에 걸맞는 노동력을 재생산함과 동시에, 1960년대에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통해 국민들을 규율하고 통제해 나간다. 이와 함께 당시 주변부에서 반주변부로 성장하고 있던 한국에서, 교육제도는 ‘발전에 대한 환상’을 국민들에게 내재화하는 기제가 되었다. 이것은 고등교육에 대한 접근이 곧 계층상승을 이룰 수 있는 지름길이었던 현실과 관계가 깊은 것이었고, 노동력에 대한 선별적인 통제의 방식이었다. 1960년대 이후 급속한 경제성장은 이를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조건을 마련하여, 1960년대 초중반에 초등교육이 거의 무상 의무교육이 되었고 1968년에는 중학교 입시가 폐지되기도 하였다. 이런 대중교육의 확산은 산업고도화에 따른 노동력의 수급 필요성 때문이기도 하였다. 인구‧교육 정책과 함께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통해 여성을 노동집약적 산업에 대거 투입하게 한다. 여성노동자들의 ‘빠르고 싼 손’은 발전주의적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되었던 동시에, 노동력에 대한 통제에서 성차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도입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 자본주의의 특징으로 국가가 주도하는 강력한 경제성장을 들고, 이런 강력한 국가가 부활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제위기의 해결책인 것처럼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발전한 나라들의 역사에서 국가의 강력한 경제정책과 민중들에 대한 폭력은 일반적인 것으로, 오히려 질문은 한국에서 국가에 의한 강력한 발전주의 정책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묻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자본주의 세계체계에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차지하는 전략적 위치, 하위 파트너로서 동아시아 세계체계로의 편입, 지배계급 안의 강력한 분파의 형성이라는 조건들이 결합되어 생성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국가가 강력한 경제정책과 민중들의 재생산 영역을 통제함으로서, 한국에서는 독점자본이 강화되고 자본주의 세계체계로 강하게 편입되어 간다. 이것은 ‘독점강화 종속심화’라는 당시 한국 자본주의의 상황을 조성하였다.



5. 계급투쟁의 지형에 대하여

이승만 정권의 무능력과 50년대 말의 원조경제 위기는 4. 19 항쟁이라는 민중들의 우발적인 저항을 낳았고, 이는 계급투쟁이 남한에서 부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민주당 집권기간 동안 학생시위는 총 1835건에 연인원 96만 9630명이 참가했으며, 노동운동 역시 활발하게 일어나게 된다. 한편 통일의제를 중심으로 하는 ‘혁신세력’이 등장하며 진보당‧민혁당‧근민당이 중심이 되어, 1960년 사회대중당이 발기하였다. 사회대중당은 남북한의 교류를 통한 통일과 한반도 내의 모든 외국세력의 철수 등을 주장했으며, 민자통 등이 중심이 되어 판문점에서 북한대학생들과의 회합 등을 주선하기도 했다. 이런 계급투쟁의 가능성은 5.16 군사정변과 그 이후 정권의 탄압으로 봉쇄되고, 발전주의를 통해 남한의 민중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해간다. 물론 정권의 폭력과 포섭전략만으로 당시 계급투쟁이 미비했던 조건을 설명할 수는 없다. 이와 함께 보편적인 이념과 담론이 부족했다는 것과, 계급투쟁을 촉발시킬 주체와 조직이 성숙하지 못한 조건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한편 해방 이후 폭발적인 계급투쟁을 만들어 낸 좌파세력들 가운데 월북하지 못한 세력들에게 4.19 항쟁은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1960년대에는 64년의 ‘인민 혁명당’ 사건, 67년의 ‘동백림 사건’(동베를린 간첩단 사건), 68년의 ‘통일 혁명당’ 사건 등 중앙정보부에 의해 공개된 사건들이 있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 조선 로동당의 지령을 받고 국가전복을 시도한 간첩사건으로 발표되었지만, 자세한 사건의 내막은 아직까지도 밝혀져 있지 않고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가혹한 고문 등이 쟁점이 되기도 한다. 최근에 진실위 등에서 당시 사건들이 중앙정보부의 과장에 따른 사건이라고 발표하며, 민주화 투쟁의 일환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진실은 알 수 없고 추후의 계급투쟁과 관련하여 이러한 사건들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당시 지하조직을 통한 지식인‧혁명가 중심의 운동이 말해주는 것은, 당시 계급투쟁의 조건이 굉장히 열세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마르크스주의는 지하에 잠복해 있던 시기로서, 대중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1964년 6.3 한일회담 반대 투쟁은 군사정변 이후 1960년대에 가장 규모가 컸던 대중투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비밀리에 처리되던 한일회담이 대중들에게 알려지면서, 1964년 3월 야당은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고 전국 순회 유세에 들어갔다. 그 해 3월 24일에는 서울에 있는 대학생 5천여 명이 시위를 전개하여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26일에는 전국 16개 도시에서 4만 3천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청사회라는 조직이 중앙정보부와 공화당의 지원을 받아 학원사찰을 해온 것이 드러나면서, 한일회담 반대와 함께 학원사찰 중지‧구속학생 석방‧중앙정보부 해체‧매판자본 몰수와 대중생존권 등이 투쟁의 의제로 등장하였다. 6월 3일에 한일회담 반대투쟁은 절정에 달해 1만 5천여 명이 가두시위에 참가했으며, 정권은 계엄령을 내림으로서 사태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6.3 한일회담 반대투쟁은 이후의 대중운동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1967년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은 압승을 거두었으며, 69년에는 3선 개헌을 통해 이후 유신체제로 가는 밑바탕을 닦아 놓는다. 1960년대 발전주의 정책은 국가를 성장과 발전의 담지자로 만들기에 충분했으며, 변혁세력들에게 보편적인 이념과 전망이 부재하였다. 하지만 6.3 투쟁을 계기로 추후 계급투쟁의 지형과 관련한 몇 가지 가능성들을 감지할 수 있었다. 6.3 투쟁 이후 서울대의 ‘한국사회연구회(한사)’ 등 써클 형태의 조직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대학생이 아직 지식인‧특권층으로 인식되고 학생대중운동이 불가능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써클 형태의 결사체로서 학생운동이 조직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상황은 1970년대까지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신민당 등 자유주의의 색채를 띤 야당은, 공화당을 매국정당이라고 비판하며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간다. 이것은 자유주의자들이 발전주의자(보수주의자)의 대안으로 인식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사상계를 펴낸 장준하, 신민당의 정치인인 김대중‧김영삼, 각종 재야인사들이 혁신적인 인물로 떠오른다. 어찌보면 당시 정세에서 이런 상황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이후 ‘진보 대 보수’ 혹은 ‘민주 대 반민주’와 같은 전선형성에 있어서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불철저한 판단을 내리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 영향은 현재까지 남아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1960년대는 차관경제로의 편입과 국가에 의한 강력한 발전주의 정책으로, 세계 자본주의 체계에 대한 종속이 심해지고 독점자본이 성장했던 시기였다. 군부정권은 발전주의 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며 민중들을 포섭했고, 강력한 반공주의를 토대로 계급투쟁을 무력화했다. 강력한 지배계급의 공세에 비해 변혁세력의 이념과 역량은 너무나 미약했다. 이러한 가운데 1960년대 말에 내적 모순이 심화되고, 그 발현으로서 일련의 위기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68년 말 외자기업 중 55개사가 은행관리로 넘어가고, 69년에는 10개사가 상환을 이행하지 못하는 대불사태에 빠진다. 이것은 주로 수입대체 중화학부문에서 발생하였는데, 차관도입을 둘러싼 무분별한 자본 경쟁으로 인해 과잉생산의 현상을 보인 것이다. 게다가 출혈수출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차관에 대한 상환압박은 국제수지 위기로 나타나게 된다. 70년대로 넘어오게 되면 미 헤게모니가 위기를 노출하며, 한국에서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조건들이 점차 사라져간다. 경제위기가 나타나는 가운데 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은 폭발적인 노동쟁의를 가져오고, 빈민들의 운동도 성장하게 된다. 이것은 통일담론 중심의 학생‧지식인 운동과는 결이 다른, 노동자 운동이 독자적으로 성장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계급투쟁의 지형이 새롭게 형성되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Posted by 행진

2008/12/08 11:47 2008/12/08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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