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행진
Posted by 행진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황두완 2010/03/18 14:17 # M/D Reply Permalink
대학은 직업훈련소가 아니라 사람을 만드는 곳이다. 바꾸어 말하면 인격들 도야하고 이나라 역군이 되어
이나라를 완잔한 민주국가로 만들고 우리 민중의 자내 깨나 염원인 남북 평화통일을 완성하라는 지상명명 배움의 터다. 여러 학생들이 MB철학 부재로 좁디 좁은 한국 땅에서 노가다 사업 즉 흙파는 공사로 젊으과들취업난이 가중되고 잇을 뿐입니다. MB의 아집과 독선으로 젊으니들 취업이 난관에 봉착하엿습니다. 지난 민주정부 10연간 계획하여왓던 러이사와 중국 대륙을 통한 구라파 실크로등와
러시아와 시베리아 공동개발, 러시아의 값싼 가스는 북한을 통과하고 남한이 물류센터로 발전하면 한국이 동남아 하브로 부상하여 동남아 각국은 한국을 통해 값싼 가스와 값 비싼 해상을 이용치 않고 한국을 통해 구하파로 물품을 보낼것입니다.
여러분, 즉 학생들이 탈 정치라는 마술에 중독되어 현실도피애 허우적 거리다가 오늘날 무서운, 총체적 위기에 직면한것입니다. 앞으로 이나라 운명을 좌우할 학생들이 정치 도피면, 이나라 앞날은 볼장 다 볼것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정치란 투표로 결정될 문제입니다.
우리 같은 내일 모래면 90인데 무슨 개인적 희망이 잇겟습니다.
그러나 여러 학생들은 앞날이 청청합니다. 우리 촌로가 바라는 것은 다만 후손에게 평화를 물러주는것이 유일한 소망입니다.
여라분은 조국의 위기를 방관만 할것이 아니라, 적극 참여하여 MB도당의 사기정책에 부레크를 걸고
11년 전의 민주정부로 환원하는것입니다. 곧 닥처올 6.2지자체 선거에서 야권 단일 후보(야5+4)
면 전국 16개 광역단체장 전부를 석권할 뿐만 아니라 기초단체장 80% 이상을 석권할 수 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줌 밖에 안되는 소위 진보를 가장한 진보신당 족속들 즉 노희찬, 심상정, 울산
출신 국회의원 조가놈들 네마리가 수도권 광역단체장 한곳을 양보하고 호남에서 전북이나 전남에서
후보 출마포기를 전제조건을 네세워 결국 야5+4의 회담 자체를 무산시키려고 취후발악도 서슴지
않고 잇습니다. 문제는 노희찬, 심상정을 서울과 경기 광역단체 후보로 내새우면
그쪽 정서가 이치들 받아 주겟습니까? 선거 결과 어부지리는 역적 찌꺼기당 한나라당으로 귀착
될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일찍이 강기갑 대표는 만노당은 기초단체장 세곳과 이희정의원은 16개 광역단체장 중 울산 한곳 요구는 가장 합리적이며 현실성이 잇는 제안입니다. 선거는 이상만 갖이고 결정될 문제가 아니며, 엊그네 야5+4 회의에서 66개 수권 기초단체장 선정에세 민주당이 강남,중구, 광진,중량,양천, 성동,등 서울지역 6개 구청장과 오산, 하남등 5개 시장 후보를 다른 야당과 시민단체 추천 후보에게 내주는 절충안에 부천, 안산등은 경쟁방식으로 선출하는 방식에 합의에 도달한데, 진보신당 노희찬대표도당은 민주당에 사실상 광역단체장을 몰아준다고 야권 단일 후보안을 전면 거부한다. 노대표는 87년, 92년 대선에서 노태우와 얼간이 YS로 부터
팔짜 고칠 수십억대를 받아챙긴 희대의 사기한이며 대선 부로커인 백모놈의 대선 사무장을 자낸자라고 유력한 시민단체 고문이 전한다. 이치들을은 승산도 없으면서 무엇을 빨야고 서울이나 경기를 원하고 잇는가! 자기들 상정인 역적찌거딩으로 부터 대박을 노리고 잇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노희찬도당의 한나라당 용병의삼가는 역적 해위를 숙지하고 잇음에도 민형사상 책임문제로 기피하고 잇을뿐이다. 그러니 여러학생들은 무엇이 두렵단 말인가? 여러분들이 총궐기하여 이치들 파렴치범들의 선거 판도 파괴행위를 규탄만아 아치들 선거 부로커들의 파렴치행위를 막을 수 잇다.
다음은 어떻게 하면 선거 기피증에 중독된 학생들을 선거에 투표관심을 갖게하는가?
97년 12월18일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11월 초 각대학 선거 분위기를 분위기를 알여고
여러 대학에 가보앗더니 대학에 모의 대선 판이 붙엇는데, 처음에는 별로 참가자가 많지
않앗으나 차즘 모의 투표자 증가에 DJ당선을 확신할 수 잇엇다. 권영길 후보 보다 DJ투표자가 앞도하기 때문이다. 2002년 12월 19일 대선에서도 권영길 후보 보다 노무현 후보가
압도으로 많앗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4월 경 부터 모의 투표 계신판 설치면 생소한 신참 투표자들도 호기심 반으로 투표하면, 그동안 투표기피증에 중독된 학생들도 대거 이에 동참하리라 본다. 좋으면 빨리하여라! the sooner, the better 라는 격언이 잇듯이 앞으로
이나라 운명은 여러분의 선거 참가에 잇다고 하여도 지니친 말이 아니다.
야러분들의 대거 참여면 총체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잇기때문이다. 가자 투표장으로!
민주화운공기념사업회, 시민주권, 노모현 재단,한겨레 신문 독자
메일 쓰기
이름으로 검색
현재 편지함
전체 편지함
주소추가
수신허용에 추가
일부 이미지 또는 태그를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원문 다운로드 (주의) 상세설명
일부 이미지 또는 태그를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원문 다운로드 (주의) 상세설명
메일 쓰기
이름으로 검색
현재 편지함
전체 편지함
주소추가
수신허용에 추가
일부 이미지 또는 태그를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원문 다운로드 (주의) 상세설명
메일 쓰기
이름으로 검색
현재 편지함
전체 편지함
주소추가
수신허용에 추가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기념일들 중에는 민중들의 싸움을 통해 생긴 날들이 많습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만든 3.1절, 치열하게 싸운 학생들의 독립운동을 기리는 학생의 날(11월 3일), 광주 민중들의 저항을 잊지 않기 위한 5.18과 같은 날들이 대표적이지요.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역시, 누군가가 하사한 날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타올랐던 여성들의 투쟁으로 쟁취한 날입니다. 기념의 의미가 ‘뜻 깊은 일이나 훌륭한 인물 등을 오래도록 마음에 간직하고 잊지 않는 것’이라면, 아직은 여성의 날을 기념할 수만은 없습니다. 102년 전 그녀들이 외친 여성의 권리는 아직 세상에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여성들의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성의 날을 마음에 간직하고 기념하기에는 현실에서 계속되는 여성들의 싸움이 너무나도 간절합니다.
여성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고, 더 크게 벌여내야 헙니다
2007년, ‘아줌마’라는 말 대신 ‘투사’로 불렸던 그녀들이 있었습니다. 비정규직으로 노동자들이 고통 받지 않는 세상과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이 없는 사회를 그리며 저항한 이랜드 여성 노동자들입니다. 보통 여성들은 출산을 기점으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하다가 자녀들이 어느 정도 자란 후 다시 취업을 하게 되는데 이 때 여성들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임금이 낮고 비정규직인 일자리가 대부분입니다. 이랜드 여성 노동자들의 경우처럼 대형마트의 캐셔(계산원)를 그 예로 들 수 있겠지요.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더욱 힘든 노동 환경에 처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대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미화 노동자들도 또 하나의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대부분이 고령의 여성인 대학교 내 미화 노동자들은 최저임금에도 미달하는 임금을 받으면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꼬박 일합니다. 게다가 휴식공간이나 식비마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그래서 대학교의 미화 노동자들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여기저기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이화여대의 미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기도 하였지요. 하지만 대학 미화 노동자들의 경우에도 노동조합 활동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당한 현실에 맞서 싸울 권리조차 빼앗기고 있는 것이 지금의 여성들의 삶인 것입니다.
이러한 여성들의 현실을 은폐하며 이명박 정부는 여성들이 더 많이 일할 수 있게 하겠다며 퍼플잡이라는 오묘한 이름의 정책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퍼플잡은 지금도 불안정한 여성들의 일자리를 더욱 규칙 없게 만드는 것을 정당화하는 조악한 포장지일 뿐입니다. 여기에 더해 저출산을 해결해야 한다며 여대생들에게 출산을 서약시키고, 낙태 단속을 강화하며 여성들에게 출산할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잊을 만하면 터지는 성폭력 사건을 비롯한 일상적인 성폭력까지…. 이렇게 아직도 여성들은 고된 하루하루의 연속선에 놓여있습니다.
1908년에 하루 10시간만 일하겠다고, 임금을 인상하라고, 노동조합 결정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그녀들의 말이 102년이 지난 지금도 거리에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여성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을 멈추지 맙시다.
대학생들이 나서서 페미니즘을 말합시다!
여성들의 싸움이 소리 없이 계속되고 있는 시대에, 대학생들의 실천이 소중합니다. 대학생은 아직 사회인이라고 하기에도,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위치에 놓여있죠. 하지만 대학이 사회와 분리된 무결한 공간이 아니기에 사회의 문제들이 대학에서는 어떻게 드러나는지, 대학생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아가 대학에서부터 페미니즘이 시작되는 102주년 3.8 세계 여성의 날을 만들어봅시다. 여성의 날을 앞두고 많은 대학생들과 페미니즘을 고민하고 싶어 뉴스레터를 발간합니다. 뉴스레터를 통해 궁금증이 해소되고 고민이 시작되기를 바랍니다. 또, 건강한 토론을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번 뉴스레터는 네 개의 꼭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3.8 세계 여성의 날의 역사>에서는 여성의 날을 만들게 한 여성들의 투쟁이야기를 담았습니다. 102년 전 그녀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이명박 정부의 ‘퍼플잡’을 비판한다!>에서는 현 정부가 여성들에게 제시하는 것들이 얼마나 한계적인지 비판했습니다. <페미니즘이 시작되는 곳_ 여기는 대학입니다.>는 대학에서 왜 페미니즘을 고민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대학에 페미니즘이 필요한 이유, 대학생들이 앞장서서 페미니즘으로 세상을 바꿔야 하는 이유를 담았습니다. <새내기들과 함께 하는 3.8 주간>은 대학에서 3.8을 맞아 해볼 수 있는 여러 아이템을 제안합니다. 전국의 각 대학들에서 여성의 날을 맞아 페미니즘의 씨를 뿌리는 화창한 봄날을 만들어가기를 바랍니다. 페미니즘의 열매가 전국에 주렁주렁 열리기를 고대하며 전국학생행진도 치열하게 살겠습니다!
여성에게 위기를 전가하지 말라!
세상을 바꾸는 싸움을 대학에서부터!
다시, 페미니즘이다!
Posted by 행진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3.8 여성의 날의 유래와 의의
만약 우리가 남성과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면,
노동조합을 만들고 가입할 수 있다면,
산전산후 휴가를 받고 아이를 탁아소에 맡길 수 있다면,
모든 투표에 참여할 수 있다면,
우리의 성(Sexuality)과 수태를 조정할 권리가 있다면
이것 모두는 바로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의 피나는 투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10년 코펜하겐에서 열렸던 3‧8여성의 날 기념대회 연설 中
1908년 3월 8일 루저스 광장, 미국의 방직공장에서 일하던 1만 5천여 명의 여성노동자들은 무장한 군대와 경찰에 맞서 "임금을 인상하라!", "10시간만 일하자!",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보장하라!",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달라!"고 외쳤습니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동시적으로 발생한 경제공황 속에서 미국의 여성노동자들은 쉬지 않고 일하며 국가경제에 이바지할 것을 요구받았지만, 그녀들은 정작 인간이자 노동자, 시민으로서 그 어떤 권리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여성들의 봉기는 비단 미국 뿐 아니라 유럽대륙으로도 퍼져나갔습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 물가가 오르자 '주부들의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여성노동자들은 처음엔 악독한 상인들을 위협하거나 시장의 상품 진열대를 부수기도 했지만, 곧 그런 행동들만으로는 생계비용을 내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정부의 정책을 변화시키는 정치적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여성의 참정권이 필수적임을 깨닫게 되었죠.
여성노동자들의 저항을 기억하고 전 세계 여성들의 연대를 강화하고자, 1910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국제여성노동자회의에서 독일 사회주의자이자 여성운동가인 클라라 제트킨(Clara Zetkin)의 제안으로 '세계 여성노동자의 날'을 정하기로 하였습니다. 세계 여성의 날은 20세기 산업국가에서 열악한 노동현실에 분노한 여성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와 투쟁했던 것을 기억하고 전 세계 여성들의 연대를 도모하고자 여성운동진영이 의식적으로 노력한 성과인 것입니다.
그 후 1년이 지난 1911년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부터 여성의 날이 준비되었습니다. 언론에서는 정부와 사회에서의 여성의 평등에 대한 문제들을 분석했습니다. 드디어 첫 번째 여성의 날,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수많은 여성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바다를 이루었습니다. 거리 곳곳에서는 시위가 열렸고 그를 막으려는 경찰들과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세계 여성의 날은 여성들의 집단적인 저항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여성해방 운동의 역사와 여성의 날
어떤 사람들은 여성의 날에 가장 중요하게 요구한 것은 여성의 투표권이었다고 이야기하면서 지금은 이런 요구들이 달성되었으니 여성의 날은 여성을 위해 이벤트를 열고 선물을 하는 기념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성의 날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면 그런 이야기들은 아주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여성의 날은 전 세계 여성들이 함께 투쟁하고 연대하는 날이며, 그 의미가 여성의 참정권 요구로만 그친 적은 없었습니다.
역사적으로 3․8 여성의 날은 참정권 요구만이 아니라 여성들의 지위향상과 남녀차별 철폐, 여성빈곤 타파, 전쟁 반대 등 당시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모든 억압에 맞서 함께 연대하며 투쟁한 날이었습니다. 1915년 멕시코와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 반대 및 물가안정 운동, 오스트리아․에스파냐에서 일어난 군부독재 반대운동, 1943년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무솔리니 반대시위를 비롯해, 1979년 칠레의 군부정권 반대시위, 1981년 이란 여성들의 차도르 반대운동, 1988년의 필리핀 독재정권 타도 촛불시위 등이 그 대표적인 투쟁입니다.
특히 1917년 여성의 날은 러시아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첫날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더욱 뜻 깊은 날이 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식량 구입을 위해 줄을 서 있던 한 여성이 빵 가게의 유리창에 돌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되었는데, 기나긴 줄을 서 있던 여성노동자들과 병사 부인들이 시위대가 되어 페트로그라드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행렬은 또 다른 곳에서 여성의 날 집회를 하고 있던 여성노동자들과 동맹파업자들과 합류했고, 전쟁과 그로 인한 물가 인상, 노동자들의 비참함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회주의 여성 활동가들은 열악한 여성들의 현실을 적극적으로 알려냈을 뿐만 아니라 여성노동자와 병사아내들 스스로가 조직되어 자신들의 요구를 위해 싸울 수 있는 공간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노동자운동이 여성해방을 자신의 과제로 삼고 이를 위해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 것을 주장했고, 혁명과 여성운동의 결합을 시도했습니다.
이처럼 3․8 여성의 날은 여성해방을 앞당기는 투쟁의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여성들 만의’ 사안과 요구를 넘어서, 민중을 억압하는 폭력에 맞서 전 사회적인 문제제기가 이루어진 저항과 연대의 날이었습니다. 그 시대가 만들어낸 사회적 조건에서 가장 착취 받고 박해 받았던 여성들이 직접적인 행동에 나섰을 때 역사가 바뀌어왔다는 것은 그 동안의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여성, 그리고 사회가 바뀌길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여성의 날의 역사가 말해주는 것은 결코 작지 않죠.
연대의 원리로 투쟁하는 여성의 날을 만들어갑시다!
지금과 같은 신자유주의와 전쟁의 시대에서 여성들은 더욱 빈곤해지고, 더욱 많은 폭력에 노출되고 있습니다. 불안정한 일자리가 늘어나는 가운데, 여성들 대부분은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리면서도 기본적인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그리고 일이 끝나고 난 뒤에는 피곤한 몸을 쉴 틈도 없이 여성이 ‘집안 일’을 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에 시달려야 하죠. 복지와 공공서비스는 축소되거나 그마저도 돈을 주고 사야하는 일이 되었고, 사회가 보장하지 않는 복지의 공백은 다시 여성들의 희생으로 채워집니다. 값 싸게 고용할 수 있고, 쉽게 해고되며, 사회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복지 서비스를 가정에서 무료로 제공하고 있는 여성! 만약 그녀들이 멈춘다면 세계가 어떻게 될까요?
드러나지 않게 세상을 지탱하고 있었던 여성들은, 이제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움직이려 하고 있습니다. 3월 8일 여성의 날을 기점으로 전 세계의 여성들이 그녀들 스스로의 힘으로 국제적인 연대를 시작한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 아래로부터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여성들의 네트워크인 ‘세계여성행진’(World March of Women)은 2005년에 지구를 횡단하는 릴레이 행진에 나섰습니다. 상파울루에서 3만 여명의 여성들이 ‘인류를 위한 여성의 지구적 헌장’을 선포하며 벌인 대규모 시위는 몇 달 동안 지구촌 50여 개 국을 거쳐 부르키나파소까지 도달했습니다. 다양한 인종과 민족, 각기 다른 직업, 신체적 특징, 성적 지향을 지닌 그녀들은 전 세계를 행진하면서 자신들을 억압하는 다양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국경을 넘는 연대가 가능하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었습니다. ‘세계여성행진’은 올해에도 3‧8 여성의 날에 맞춰 제 3회 국제 행동을 준비하고 있는데, 처음보다 더 많은 국가와 도시에서 전 지구적인 행동에 동참 할 것을 밝혔습니다. 한국 역시 세계의 여성들과 함께하는 행진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2010년에도 신자유주의 속에서 억압받는 전 민중들과 함께 힘차게 투쟁하는 3‧8 세계 여성의 날을 만들어 갑시다!!
Posted by 행진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오늘은 3월 8일, 여성의 날입니다. 언뜻 들으면 여성부에서 급조하여 만들어 낸 날처럼 생각될 수 있으나~, 절대 그렇게 만들어진 날이 아니라는 거, 우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900년대 초반엔 다들 아시겠지만, 노동 환경이 참으로 열악한 시기였습니다. 지금 같은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여성이기 때문에 오히려 임금은 적게 받던 시기였죠(가족을 부양하는 사람은 아버지라고 생각해 남성의 임금이 훨씬 많았기도 했구요, 여...
보라색은 희망일까?
작년 가을, 여성부는 여성들의 경력단절 예방 및 일자리 창출, 여성 경제활동참가 확대 및 지위 향상을 이야기하며 퍼플잡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각각 여성과 남성을 상징하는 빨강과 파랑이 섞인 보라색(purple)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일과 가정의 조화와 남녀평등을 표방하는 퍼플잡(purple job)은 출산과 육아로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던 여성들이 재취업에 나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직업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도 여건에 따라 근무시간과 형태를 조절할 수 있게 하겠다는 유연근무제도이다. 유연근무제도는 단시간 근로, 시차출퇴근제, 집중근무시간제, 요일근무제, 재택근무 등 육아 및 가사노동을 직장일과 병행할 수 있도록 하는 탄력적인 근무형태를 말한다. 시간제 근무 공무원에 대한 시범실시, 단시간 일자리 확산을 위한 기업 지원 등을 통해 유연근무제를 확대하기 위한 계획들이 제출되고 있다.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꾸준히 증가하는 가운데 출산율은 사상 최저치로 떨어지고 있다. 직업을 가지면서도 출산과 육아의 책임을 저버리기가 쉽지 않은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퍼플잡은 과연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여성_ 일도 하고 가정도 돌보고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증가할수록 출산율은 낮아지고 있는데, 이것은 기존의 가족(특히 여성)이 수행하던 돌봄을 더 이상 가족 내에서 해결하기 힘들어지는 상황과 연관이 있다. 또한 여성의 경제활동참가 패턴을 보면 M자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30대 초반을 전후해 경제활동참가율이 갑자기 떨어지고 30대 후반 이후 다시 증가하는 양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출산과 육아가 집중되는 연령대(1990년대 후반까지는 20대 후반, 2000년대 이후에는 30대)에서는 경제활동참가율이 급격히 떨어졌다가 이후에 다시 상승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곧 여성은 출산과 동시에 노동시장에서 이탈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다시 노동시장에 복귀하면 대부분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일하게 된다. 시간제, 파트타이머 등으로 불리는 단시간 노동은 남성에 비해 여성에게 더 적합한 일자리로 여겨지는데 이는 여성이 수행하는 노동에 대해서 남성의 노동을 보조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남성의 노동만으로는 가정을 유지하기 어려운 조건에서 여성의 역할은 재생산 노동의 일차적인 책임자와 가정의 2차 소득원으로만 인식되는 사회구조의 결과이다.
이렇듯 출산과 육아, 가사노동의 부담으로 경제활동을 포기해야만 했던 수많은 여성들의 현실을 어느 정도 해결해줄 것이라 기대되는 퍼플잡은 일견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심각한 저출산-고령화 사회로의 진입과 함께 여성인력이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등장하였고, 이와 동시에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가 꾸준히 증가하는 가운데 정부의 여성정책의 핵심적인 화두는 일과 가정의 양립을 어떻게 가능하게 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정부의 일-가정 양립정책의 내용과 추진 과정은 여성들의 취업과 출산․양육의 이중부담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기보다는 발생하는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조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양육․돌봄과 직장일을 둘러싼 문제에서 여성에게 제시되어온 선택지는 ‘직장을 그만두고 집안일을 할 것인가’와 ‘직장일과 집안일을 병행할 것인가’였을 뿐이다. 재생산 노동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이 가족, 특히 여성에게 부여되는 현실의 본질과 문제점을 건드리지 못한 결과이다. 이러한 정부의 정책은 여성이 갈수록 저임금에 불안정한 일과 턱없이 지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가정을 모두 책임져야 하는 사회적 강요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여성에게 전가되는 재생산 노동의 책임 문제를 전혀 건드리지 않은 채 ‘노동시간 유연화’를 통해서 여성노동 문제를 해결하려하는 일-가정양립 정책(퍼플잡)은 여성에게 이중부담을 강화하고 여성의 일자리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퍼플잡, 뭐가 문제일까?
재생산의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한다
정부가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이 여성들의 출산과 양육으로 인해 경제활동이 단절되는 것이라면 정말로 건드려야 하는 것은 재생산 노동의 책임이 온전히 여성의 몫으로 돌아가는 것의 문제이다. ‘재생산 노동’의 의미에 대해서는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며 여기서는 간단하게만 보도록 하자.
‘생산’이 한 사회의 부를 생산하는 과정을 의미한다면 ‘사회적 재생산’은 단지 그 사회 성원들의 생물학적 재생산뿐만 아니라 그 사회를 유지하는 사회적 행위의 재생산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경제 체제는 재화 및 서비스의 생산과정과 그러한 생산자로서의 인구(노동력)의 사회적 재생산 과정 사이의 특정한 관계를 전제로 하는데, 자본주의 체제는 자본주의적 노동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던 19세기에 숙련 남성노동자 중심의 고용구조를 확립하며 여성, 아동을 비롯한 그 밖의 노동력 취약 계층을 가족으로 돌려보냈다. 이는 기존의 자급자족적 가계로부터 생계수단을 박탈하여 노동시장에 생계를 전적으로 의존하도록 하는 과정인 동시에, 국가 주도 하에 노동 인구의 재생산에 대한 관리와 통제를 강화하려는 시도였다.
생산과 재생산은 특정한 관계를 맺고 생산체제를 지탱하고 있지만, 자본주의 하에서는 이를 분리시킴으로써 재생산 영역을 비가시적이게 만들었다. 즉, 재생산 노동은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수행해야 하며, 누군가 그 비용을 지불해야 하지만 이것을 마치 저절로 주어지는 것처럼 간주해 버렸다는 것이다. 재생산 노동은 엄청난 시간과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필수적인 노동이지만 국가의 경제, 통계에 전혀 반영되지도 않으며, 아무나 적당히 할 수 있는 노동으로 평가절하 되어왔다. 이와 같이 재생산 노동이 무급으로 수행되는 것은 자본에게는 생산비용인 ‘임금’으로부터 그 비용을 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 남성생계부양자모델의 해체에도 불구하고 재생산 노동은 여전히 여성의 책임으로 남아있다. 아니, 오히려 더욱 많은 부담을 전가 받는다. 가계의 실질소득 감소는 추가적인 성원, 특히 여성을 노동시장에 참가하도록 하며, 여성은 주로 저임금의 일자리나 더욱 조건이 열악한 비공식 부문에 참가하게 된다. 또한 여성은 줄어든 가계예산으로 자신과 가족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재생산 노동을 강화한다. 의료, 교육, 주거 등 사회서비스 관련 예산의 삭감은 여성에게 더 많은 돌봄 노동을 수행하게 한다. 구조조정의 효율성 증대란 실상 공적 영역에서 이뤄지던 것을 가계로의 비용 전가를 통해 가능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여성은 더 오래, 더 열심히 가계 안팎에서 일함으로써 구조조정의 충격을 흡수하는 ‘충격흡수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연구들은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을 증가시키고, 사회적 갈등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현재의 발전모델이 지속가능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재생산의 위기’ 차원에서 지속가능성을 문제 삼는다. 현재의 발전모델은 여성의 희생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으며, 여성이 인내할 수 없을 정도의 추가적인 노동을 요구함으로써 결국 재생산의 기반을 무너뜨릴 것이다. 현재의 위기는 구조조정이 기초적 재생산과 갈등적이며, 이러한 갈등이 발전과정 자체를 위협할 정도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재생산의 위기’로 규정된다. 이러한 구조조정은 여성의 노동을 무한하게 탄력적인 것으로 가정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여성의 저임금, 불안정 노동을 확대할 것이다
여성의 노동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용하는 정책을 확대할 것을 주장하는 이들의 가장 기본적인 논리는 한국의 고용구조가 남성들에게 적합한 전일제-장시간노동에 기초해 있으며, 그러한 고용구조로 인해 여성의 노동시장 진입이 어렵고 경력단절 문제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여성노동시장이 확장되었고 남성생계부양자모델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피부양자의 지위에 머무르며 양육을 전담해왔던 여성이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왜냐하면 실제로 작동하지도 않는 남성생계부양자모델은 사회에 이데올로기적으로 아주 단단하게 뿌리내려서 여성의 노동을 남성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한다. 여성의 노동이 부차화되기에는 총체적인 경제위기 속에서 남성의 노동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어진 수많은 여성들이 이미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노동을 수행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성이 일차적인 생계부양자라는 이데올로기는 여성들의 일자리를 대부분 저임금의 불안정한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남성생계부양자모델에 대한 비판은 이로 인해 여성노동자들이 처한 저임금, 불안정노동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더 이상 남성의 노동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으니 여성들도 일해야 한다→하지만 여성들이 남성처럼 풀타임으로 빡세게 일하기에는 가정도 돌봐야 하니 유연한 근로형태를 제시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정책들은 가사와 육아의 일차적 전담자로서의 여성의 역할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더욱 고착화시키는데 기여할 것이라는 점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정책이 확대되면 남성이 여성에 비해 가지고 있는 상대적인 고용과 임금의 안정성이 여성노동의 수준으로 하향화될 가능성이 있다. 보라색을 남녀평등의 색깔이라고 하면서 퍼플잡이 여성고용정책이라는 것을 강조하지만 이것이 남성 여성을 가리지 않고 또 다른 형태의 비정규직을 양산하게 될 것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노동의 형태를 유연하게 한다는 말은 결국 노동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겠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필요한 것은 더 유연한(불안정한!) 노동형태가 아니라 여성이 가정의 모든 일의 일차적인 책임자가 되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재생산 노동을 사회화한다는 것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만들기 위한 논쟁과 대안이다.
퍼플에 레드카드를 던진다!
최근 저출산 문제가 또다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면서 이번에는 여성들의 낙태를 엄격히 단속하겠다는 사람들이 나오는 등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인구가 늘어나던 시절에는 나라에서 여성들에게 낙태를 적극적으로 권장하며 피임도구도 공짜로 줬다던데, 인구가 줄어드니 일차적으로 관리 대상이 되는 것은 또다시 여성의 몸이다. 여성의 몸은 언제나 시대의 필요에 따라 관리되고 강요당해온 것이다.
여성의 노동력도 마찬가지이다. 사상초유의 경제위기 속에서 가장 먼저 그 충격을 완화하고 국가와 사회가 책임지지 않는 재생산 노동까지 책임지며 저임금의 불안정 노동을 강요받는 사람들은 역시 여성들이다. 사실 지금 퍼플잡이 추구하는 여성의 노동은 이미 전부터 진행 중이었다. 여성의 문제에 대해, 재생산 노동의 사회화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들을 이야기하지 못하면 앞으로도 패치워크 하듯이 각종 정책들을 덧대고 포장하는 정부의 논리에 밀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묘한 퍼플에 단호하게 레드카드를 던져야 한다.
Posted by 행진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페미니즘? 여성 우월주의?
‘페미니즘’하면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여성 vs 남성 대결구도, 드세거나 피해의식에 가득 찬 여자, 여성부… 등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살면서 페미니즘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페미니즘은 남성 vs 여성을 상정해놓고 조금이라도 남성의 영역을 더 차지하려는 여성들의 논리가 아니다. 오히려 페미니즘은 이 세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상식을 뒤집는 새로운 관점, 그러면서도 명쾌한 관점을 제공한다.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즘은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충격적이고,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유용할 수 있다. 페미니즘은 하나의 새로운 세계관이자 현실을 분석하는 이론이기에 이것을 통해서 대학생활에서 보이지 않았던 부분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가 부대끼며 살아가는 공동체부터, 취업의 문제까지 페미니즘의 눈을 통해 새롭게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
“원래 다 그래”가 누군가에게 폭력이 되는 순간
어떤 대학생활을 해야 할까 가슴 설레는 시기 누군가는 핑크빛 연애를, 누군가는 술 먹고 밤새 노는 일을, 누군가는 푸른 잔디밭에서 토론하는 문화를 마음에 품고 대학에 들어왔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지만 대학에서의 과/반/학회/동아리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마음의 고향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고향이라고 해서 항상 행복하리라는 법은 없는 법.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면서 누군가는 상처받고 누군가는 소리 없이 떠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생각해보면 모두가 즐거울 수 있는 공동체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사실이다. 그렇다면 무조건 즐거울 것만 같은 대학생활에서 무엇이 문제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술자리 문화
한꺼번에 수많은 선배, 후배들이 만나며 웃고 떠들고 친해지는 3월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술이다. 술 마시고 과실에서 뻗기, 술 마시고 수업 째기, 술 마시고 집기 부수기 등 술과 관련한 온갖 에피소드들이 학기 초 공동체를 가득 채운다. 술자리에서는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최대한 술을 많이 먹고 먹이고, 큰 소리로 FM과 응원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속에서 누군가는 재밌게, 누군가는 불편하게 사람들과 어울린다. 그런데 단순히 개인의 취향에 따라 술자리가 좋고 싫은 것이 아니라 술자리 문화가 남성 중심적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불편해지는 거라면 이것은 개인의 취향을 넘어서는 문제로 사고되어야 한다.
술자리가 남성 중심적이라는 것은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일반적으로 술자리에서 ‘잘 논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남성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다. 때문에 술자리를 주도하는 사람은 그것이 남학우든 여학우든 상관없이 사회적으로‘남성적’이라고 생각되는 면모를 발휘함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보호해주는 사람 없이 만취하는 것이 금기시되고, 통금이 있는 여학우들의 경우 술자리에서 오래 남기 힘들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술자리에서 인간 대 인간으로서 인적네트워크를 쌓는 사람들은 남성적 정체성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여성도 여기에 낄 수는 있지만 결코 ‘여성’으로서 함께하는 것은 아니다. 예쁜 여학우가 남자선배들한테 이쁨 받는 분위기, 같은 과/반 여학우의 외모에 대한 평가 등이 술자리나 과실에서 공공연하게 시작되면 공동체 문화의 남성중심성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특히, 술자리에서의 원치 않는 스킨쉽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점은 남성 중심적인 술자리문화에서 남/녀의 관계가 주로 연애대상으로 생각되는 분위기가 여학우를 성적으로 대상화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동체 운영하기
새터, 개강파티, 세미나, 동아리 활동 등 공동체가 굴러가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대학생들이 스스로 꾸려나가는 자치활동 속에서도 여러 가지 역할이 성별화되어서 나타난다. 사람들을 이끌고 분위기를 주도하고 선배들과의 접대, 단체 연락을 담당하는 역할과 술집 예약/과티 제작/술 취한 사람 챙기기/뒷정리 등의 실무 역할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겠다. 그런데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알리는 대표자 역할과 실무 역할이 분리되어 한쪽에게 몰리는 경우가 많다. 학회를 예로 들어본다면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들어주는 선배와 개인적인 고민이나 연애 상담을 들어주는 선배가 나뉘기도 한다.
이는 마치 가족 내에서 어머니/아버지의 역할 분담을 떠올리게 한다. 사회적으로 여성과 남성에게 요구되는 역할이 대학에서도 적용되면서 알게 모르게 여선배가 공동체에서 일정 이상의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게 만들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누군가에게 고의로 상처를 주려고 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전체 사회에서 보편적인 문화가 남성 중심적이기 때문에 이것이 대학사회에서 그대로 투영된 것일 뿐이다. 이렇게 페미니즘의 눈을 통해서 우리에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그 자체로서 성별 권력관계를 내포할 수 있다는 인식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모두가 행복한 공동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여성 남성을 갈라서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공간 또한 권력관계가 작동하는 공간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해결해나가기 위한 노력을 ‘함께’ 시작하는 것이다!
관계맺음에도 고민과 토론이 필요하다! : 반성폭력 자치규약의 의미
우리가 속한 공간에서도 알게 모르게 성별 권력관계가 작동하고 있었다면, 이것이 개인 잘잘못의 문제를 넘어 우리 사회의 문제라면, 이것을 바꿔나가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변화는 일상의 관계맺음에서부터 고민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와 공동체 문화도 ‘원래 그랬고 당연한 것’이 아니라 ‘구성되어 온 것’으로 다시 인식하는 과정이자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경계를 흐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선배들이 만들어왔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반성폭력 자치규약’이다. 반성폭력 자치규약이란 새터나 엠티, 농활 등 남/녀가 압축적으로 함께 지내는 활동에서 성폭력적인 상황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 구성원들이 합의하는 자치규약이다. 자치규약은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는 금기가 아니라 그것을 구성원들이 공동으로 만들고 합의하는 데 가장 큰 의미가 있다. 공동체에 자치규약이 왜 필요한지, 알게 모르게 누군가에게 폭력이 되는 일들이 일어나지는 않았는지,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일상적인 문화였는지를 이야기하는 데에 가장 큰 의미가 있다.
<반성폭력 자치규약 예시>
* 여/남은 성차별적 언행이나 서로를 대상화하는 언행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있습니다. * 성적 소수자는 성차별적 언행이나 성적 소수자를 적대시하는 언행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있습니다. * 여성은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여성다움’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가집니다. * 여성은 불쾌한 신체접촉을 당하지 않을 권리를 가집니다. * 여성은 여/남이 함께 즐거운 술자리를 즐길 권리가 있습니다. * 여/남은 성적 고정관념과 성역할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있습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합시다. - 누군가에게 술 취한 사람을 보살피는 역할, 술자리 준비와 뒤처리를 전담시키지 맙시다. * 성폭력을 목격하거나 성차별적 언행을 보았을 때, 분위기에 편승하거나 방관하지 말고 누구나 이의를 제기합시다. 이의제기는 과민반응이 아니라 모두가 성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하는 당연한 권리입니다. * 상대방의 싫다는 표현을 진지하게 받아들입시다. 더불어 성폭력, 성차별로 인한 불쾌감은 그 자리에서 분명하게 표현합시다. * 여/남의 최소한의 독립된 공간을 보장합시다. |
여대생에게 취업과 결혼
그렇다면 이제 대학생활에서 더 시야를 넓혀보자. 알파걸․골드미스 등 이제 여성우위시대가 도래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많이 들려오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해서 사회로 나갈 때 여성들은 가장 절실하게 ‘여성’인 자신을 느끼게 된다. 같은 스펙을 가지고도 더욱 취업하기 어렵고, 여러 가지 취업 준비 중에 성형수술이 한 축을 차지하기도 한다.
한 때는 여대생이 취직이 잘 안 되는 것이 불합리하기는 하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 아니겠냐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기도 했다. 똑같은 비용을 들여서 고용을 해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여성도 직업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시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여성들에게 가정을 꾸리는 것과 직장 일을 하는 것은 대립되는 것처럼 여겨지고, 여러 가지 이유로 여전히 여성은 노동시장에서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여성에게 일과 가정은 어떤 의미일까?
출산서약
저출산이 사회적인 문제로 떠오르면서 성신여대에서는 저출산 관련 특강을 열며 여대생들이 저출산 문제 해결의 일주체가 될 것을 서약하게 하는 일이 있었다.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증가하면서 출산율은 더욱 낮아지고 있는데 이것은 여성이 직장 일을 하면서는 가족 내에서 여성이 수행했던 육아나 가사노동을 병행하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여성의 경제활동참가 패턴을 보면 M자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30대 초반을 전후해 경제활동참가율이 갑자기 떨어지고 30대 후반 이후 다시 증가하는 양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출산과 육아가 집중되는 연령대(1990년대 후반까지는 20대 후반, 2000년대 이후에는 30대)에서는 경제활동참가율이 급격히 떨어졌다가 이후에 다시 상승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곧 여성은 출산과 동시에 노동시장에서 이탈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일과 가정이 대립되는 현재의 상황은 이미 전 사회적인 문제인데 출산서약은 저출산의 원인을 여성들이 이기적이거나 의식수준이 낮기 때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결심하면 저출산이 해결될 것처럼 대학이 앞장서서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취집
한편, 지난 해 사상 최대의 취업난 속에서 ‘취집’이라는 신조어가 유행했다. 이는 집에 취업한다는 뜻으로 힘겹게 취업하는 준비할 게 아니라 결혼이자 하자는 자조석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보면서 여성은 가족 부양의 부담도 적고 참 좋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성도 일을 하지 않고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조건에서 가장이 아니기 때문에 부담이 적을 수 있겠지만 또한 가장이 아니어서 취업하기도, 해고되기도, 정규직이 되기도 힘든 것이 여성의 현실이다.
일과 가정을 함께 꾸릴 수 있는 진정한 방법
최근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도록 전일제가 아닌 파트타임, 재택근무와 같은 형태의 고용형태를 늘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거세게 제기되고 있다. 이는 일자리를 늘리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국 정규직을 줄이고 불안정한 일자리를 늘리는 명분이라는 비판 또한 거세다. 그렇다면 대체 진정한 문제 해결의 방법은 무엇일까. 가정을 꾸려야 하는 여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불안정한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성만이 가정을 꾸리는 데 필요한 노동을 해야 한다는 관념을 깨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일을 하면서 제대로 대우받고, 가정을 꾸릴 수 있는 방식으로 사회가 변화해야 한다.
대학에서부터 다시 페미니즘을 시작하자!
이렇게 대학의 일상생활에서부터 대학졸업 이후의 노동까지 여전히 함께 해결해야할 문제가 많이 남아있다. 대학생활이나 취업 등의 문제에서 여대생은 다른 경험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여성의 문제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단순히 여성만의 문제를 넘어 전체 사회의 문제로 이야기되어야 한다. 그러나 남성중심적 공동체 문화나 여성의 노동에 대한 권리가 대학에서 화두가 되거나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별로 존재하지는 않은 것이 현실이다.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유명한 정치가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발 딛은 대학에서부터, 일상에서부터 고민하고 토론하는 것으로부터 변화의 첫걸음을 시작하자!
Posted by 행진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한지환 2010/02/21 13:50 # M/D Reply Permalink
전국학생행진은 애당초 잘못된 전제를 바탕으로 젠더(Gender) 문제와 관련된 논의를 진전시키고 있습니다. “이제는 여성도 직업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시대”, “여성도 일을 하지 않고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조건”이라는 주장은, 우리 사회의 현실을 여성 편향적으로 바라본 결과일 뿐입니다. 제가「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에서 소개한 통계자료와 뉴스클리핑 게시판에 올린 언론보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남성의 전통적인 책임을 당연시하는 전통적인 성별 이데올로기로 인해 여성에게 요구되는 가족부양의 책임은 여전히 미미한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전국학생행진의 논리대로라면, 오늘날 남성도 돌봄 노동을 일정 정도 분담한다는 사실을 내세워 “남성이 일과 가정의 양립을 강요받고 있다”는 주장도 충분히 가능할 것입니다. 즉 예나 지금이나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가 강요한 성적(性的) 억압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남녀 모두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일과 가정의 양립’과 관련해 “진정한 문제 해결의 방법은 (…) 가정을 꾸려야 하는 여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불안정한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성만이 가정을 꾸리는 데 필요한 노동을 해야 한다는 관념을 깨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물론 그 동안 젠더 문제를 논하며 물질적 구조에만 얽매어 온 일부 회원들의 편협한 태도를 고려할 때, 임지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의 말처럼 “은밀하게 고무된 담론이야말로 그 어떤 검열 제도보다 더 효과적인 통제 수단이라는 점”을 전국학생행진이 지적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남성에게 가족부양의 1차적 책임이 요구되는 현실 속에서, 남녀가 ‘돌봄 노동’을 균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남성에게 불합리한 이중(二重) 부담을 지우려는 시도로 비추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국학생행진의 주장은, 바깥에서 더 많은 시간을 일하고 더 무거운 부담감과 책임감을 느껴야하는 남편이 가정에서 아내와 돌봄 노동을 똑같이 분담해야 한다는 말로 해석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젠더 문제를 공정하고 균형적인 시각에서 다루고자 한다면, 여성을 억압하는 성별 이데올로기의 이면에 남성을 억압하는 또 다른 성별 이데올로기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번 뉴스레터를 읽어보면, 전국학생행진은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 하에서의 남성 억압을 일부 인정하는 듯하지만, 여전히 남성에게 요구된 치사적 역할(致死的 役割, lethal role)과 여성에게 허락된 면책권을 논함에 있어 공정한 시각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 ‘세계 여성의 날’ 행사를 진행함에 있어서는 그 동안의 편파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보다 공정하고 균형적인 시각을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덧붙여서, 합당한 이유 없이 댓글을 삭제하는 몰지각한 행동은 더 이상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만약 불가피한 사정으로 댓글을 삭제해야 한다면 공지를 통해 삭제 여부와 그 이유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rlgl 2010/03/05 00:41 # M/D Reply Permalink
한지환님의 댓글을 읽고 몇글자 적어봅니다.
위 댓글을 읽어보니 과연 본문을 읽고 쓰신 댓글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위 글 어디에도 '여성이 억압받는 현실은 남성 때문이다'라는 말은 없는데다가 돌봄노동에 대해서도 남녀가 균등하게 나눠서 하면 된다는 말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여성 남성을 갈라서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공간 또한 권력관계가 작동하는 공간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해결해나가기 위한 노력을 ‘함께’ 시작하는 것이다!' 이 문구만 봐도 나와있고...
위 글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성별 권력관계'에 대해서 지적하고 그것이 여성에게 폭력적으로 가해지는 방식을 설명해 놓은 것이라고 저는 이해했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ㅎㅎ
한지환 2010/03/05 12:40 # M/D Permalink
제가 주장하려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신 것은 오히려 귀하인 것 같군요. 물론 전국학생행진은 여성 억압을 ‘남성’의 탓이라고 주장하지 않았고, 저 역시 그와 관련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전국학생행진의 입장을 비판한 이유는, 전국학생행진이 젠더(Gender) 문제를 다루면서 전통사회가 남성에게 가한 성적(性的) 억압과 여성에게 허락한 면책권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전통사회에서의 남녀관계를 ‘성별 권력관계’로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즉 전국학생행진의 생각과 달리, 여성주의자들이 ‘가부장제’라 규정한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는 남성에게 일방적인 권력을 허락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여성에게만 폭력적으로 적용된 시스템도 아니었다는 것이 제가 주장하려는 바입니다. ‘절름발이 페미니즘’에 얽매이지 않는 공정하고 균형적인 시각에서 전통사회에서의 남녀관계를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전국학생행진은 남녀가 돌봄 노동을 균분해야 한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른바 ‘일과 가정의 양립’과 관련해 “여성만이 가정을 꾸리는 데 필요한 노동을 해야 한다는 관념을 깨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전국학생행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여성에게 돌봄 노동의 1차적 책임을 지우는 전통적인 성별 이데올로기를 비판한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는 여성을 일방적으로 희생시킨 것이 아니라 남녀 모두에게 각자 정해진 성역할만을 강요했으며, 따라서 남녀 모두는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의 피해자임과 동시에 수혜자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전통사회에서 돌봄 노동과 관련해 남성에게 허락된 면책권은 그들이 부담해야 했던 ‘치사적 역할(致死的 役割, lethal role)’에 따른 반대급부였으며, 따라서 전통사회가 남성에게 가한 성적 억압에 대한 고찰 없이 여성에게 요구되는 돌봄 노동의 1차적 책임만을 문제 삼는 것은 불공평한 처사라는 것입니다.
저도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제대로 읽지 않고 댓글을 적을 만큼 경솔한 사람은 아닙니다. 저는 자유주의적 남성운동가로서 전통적인 남녀관계를 지배와 피지배, 억압과 피억압의 관계로 규정하는 여성주의의 이분법적인 틀 자체에 이의를 제기한 것입니다. 보아하니 귀하께서는 저의 주장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신 것 같은데,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자유게시판에 올린「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rlgl 2010/03/07 05:10 # M/D Reply Permalink
한지환님이 무슨 말씀 하시는지 잘 알았고, 다시 답변드리고 싶어서 글을 씁니다.
그런데 글을 쓰면서 한가지 주의하셔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한지환님께서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이야기 하실때 '절름발이 페미니즘'이라는 표현과 함께 '공정하고 균형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 표현은 상당히 주관적인 의견인 것 같습니다.
한지환님이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남성 여성에게 모두 억압적인 가부장제를 반대하자'라면 그 입장을 이어나가 페미니즘에 대한 심도있는 공부와 함께 입장을 발전시킬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라 단순히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을 가하기 위한 논쟁이라면 아무리 이야기가 진행된다 하더라도 그다지 생산적인 논쟁이 될 수 없을 것 같네요.
님의 글을 읽고 생각나는 구절이 있어 첨부해 봅니다.
'... 모든 여성이 이 사회의 피해자만은 아니며, 젠더만이 아니라 결혼 여부, 계급, 세대, 인종, 민족, 국가 같은 다양한 맥락에서 다양한 섹슈얼리티를 구성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섹슈얼리티 강의 두번째 中
위에 인용한 구절이 한지환님이 남기신 댓글에 대한 대답이 어느정도는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저도 읽어보시면 좋을만한 책 몇 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새 여성학 강의, 동녘, 한국여성연구소, 2005
섹슈얼리티 강의 두번째, 동녘, 한국성폭력상담소 기획/변혜정 편저, 2006
이 두가지는 페미니즘 입문서 격인 책이니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한지환 2010/03/07 11:01 # M/D Permalink
몇몇 여성주의자들이 전통사회에서의 남성 억압에 대해 거론하기는 하지만, 그들 역시 남성 억압을 ‘여성 억압의 부산물’ 정도로 간주할 뿐입니다. 페미니즘을 앞세워 저의 주장을 비판하신 귀하께서도, 앞서 전통사회에서의 남녀관계가 ‘성별 권력관계’였으며, 그러한 권력관계가 여성에게 폭력적으로 적용되었다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즉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를 ‘가부장제’라 지칭하고 전통사회에서의 남녀관계를 ‘지배와 피지배의 권력관계’로 규정하는 급진적 페미니즘을 비롯한 여성학 이론의 틀을 깨뜨리지 않는 한, 남성 억압은 여성 억압과 결코 동등하게 다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여성학 이론에 바탕을 둔 편파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젠더(Gender) 문제를 객관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릴 수 있는 ‘남성학(男性學, Men's Studies)’, 나아가 여성학과 남성학을 아우르는 ‘성학(性學, Gender Studies)’ 이론을 계발해야 한다는 것이 제가 주장하려는 바입니다. 제가「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에서도 지적했듯이, 기존의 여성학 이론만 가지고는 우리 사회의 젠더 문제를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아울러 남성주의(男性主義, Masculism)와 관련해 보다 구체적이고 자세한 설명을 원하신다면 다음 책들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젠더 문제를 다룸에 있어 좋은 참고가 되리라 믿습니다.
『남성의 역사』(솔, 2001)
『남자 만세 : 여자가 정말 모르는 남자에 대한 진실과 거짓』(예담, 2002)
『남자의 이미지 : 현대 남성성의 창조』(문예출판사, 2004)
『페미니즘에 대한 남성학과 남성운동』(원미사, 2007)
그리고 알려주신 책들은 기회가 되면 꼭 읽어보겠습니다.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rlgl 2010/03/08 01:02 # M/D Reply Permalink
한지환님께 다시 답변드립니다.
한지환님의 말씀대로라면 페미니즘이 편파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성학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이 말은 님이 말씀하신 논리와도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님의 논리대로라면 어느 한 성을 중심으로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이 편파적이라는 건데 그건 남성학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보여집니다.
또 한가지 더 이야기 하고 싶은 점은 한지환님과 댓글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느낀 점인데 계속 이야기가 '여성과 남성의 경쟁'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고 이는 분명 주의해야 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 억압의 원인이 남성 자체 때문은 아닌것이고,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남성 억압의 원인이 페미니즘이 아니라는 사실은 공감하실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한지환님도 글에서 말씀하셨듯 한지환님이 생각하시는 남성 억압의 원인이 '성별 이데올로기'라면 그 비판의 초점은 페미니즘이 아닌 '성별 이데올로기'에 맞춰져야 할 것입니다.
또한 사회적으로 퍼져있는 성별 이데올로기가 한지환님 말씀대로 남성에게도 폭력적일 수 있다는 점은 사실일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여성이냐 남성이냐'하는 이분법적 기준을 넘어서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사회, 경제적 문제들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한지환님이 글에서 언급하신 페미니즘에 대한 의견이나 어느 페미니스트들의 입장들이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페미니즘과, 그리고 제가 알고 있는 행진의 페미니즘과 다른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한지환 2010/03/08 11:44 # M/D Permalink
저의 글을 제대로 읽지 않으신 것 같은데, 남성학(男性學, Men's Studies)이나 여성학(女性學, Women's Studies)만으로는 우리 사회의 젠더(Gender) 문제를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젠더 연구가들은 궁극적으로 이 둘을 아우르는 ‘성학(性學, Gender Studies)’을 추구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날 적지 않은 이들이 여성주의를 젠더 문제를 다루는 유일한 방편으로 여기며,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에 대한 여성주의자들의 편파적인 해석을 객관적인 진리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이것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에 대한 여성주의자들의 해석이 편파적이라는 저의 지적에 동의하실 수 없다면 여기에 대해서는 좀 더 이야기를 나누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귀하께서도 앞서 전통사회에서의 남녀관계를 ‘여성에게 폭력적으로 적용되는 성별 권력관계’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실제로 여성주의의 여러 노선들은 귀하와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젠더 문제와 관련된 논의를 진전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아는 여성주의’와 ‘귀하께서 알고 계신 여성주의’가 다른 것 같다는 지적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귀하께서 이 분야에 얼마나 오래 천착하신 분인지는 모르지만, 저도 이 분야에 대해 귀하나 이곳 회원들 못지않게 공부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저라고 해서 여성주의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섣불리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는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의 대화가 ‘여성과 남성 간의 경쟁’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성운동 혹은 여성운동이라는 것 자체가 남녀 각자에게 합당한 몫을 나누어주려는 사회적 움직임이고, 그로 인해 이를 놓고 대화를 나누다보면 그렇게 느끼는 이들이 종종 있지만, 그것은 참으로 쓸데없는 걱정일 것입니다.
그리고「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을 읽어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제가 궁극적으로 깨뜨리려 하는 것은 ‘가부장제’라고 불리는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와 그에 따른 성별 이데올로기이며, 이 점에 있어서는 여성주의자들과 입장을 같이합니다. 저도 여성주의가 남성 억압의 원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여성주의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에 반대하지도 않는다는 것이지요.
누차 강조하지만, 제가 여성주의를 비판하는 이유는 그러한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에 대해 여성주의자들이 잘못된 해석을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전통사회에서의 남녀관계를 ‘여성에게 폭력적으로 적용되는 성별 권력관계’로 섣불리 규정하거나, 전통사회에서의 남성 억압에 대한 언급 없이 여성 억압만을 문제 삼는 여성주의자들의 태도는 자유주의적 남성운동가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위 글에서 전국학생행진은 여성에게 요구되는 돌봄 노동의 책임을 문제 삼았지만, 그러한 책임이 남성 가장(家長)에게 요구되는 가족부양의 책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문제라는 사실을 간과한 채 “여성만이 가정을 꾸리는 데 필요한 노동을 해야 한다는 관념을 깨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라는 것입니다. 또한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남성 억압이 뿌리 깊게 남아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이제는 여성도 직업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시대”, “여성도 일을 하지 않고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조건”이라고 섣불리 단정 짓는 것은 우리 사회의 현실을 여성 편향적으로 바라본 결과일 뿐입니다. 이런 잘못된 인식을 깨뜨리지 않는 한, 남성 억압은 여성 억압과 동등하게 다루어질 수 없으며, 나아가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를 깨뜨려는 노력도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둘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쭉 훑어보면, 귀하께서는 한편으로는 전통사회에서의 남녀관계를 ‘여성에게 폭력적으로 적용되는 성별 권력관계’라고 말씀하시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남녀 모두가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의 피해자’라고 말씀하시는데, 엄밀히 말해 이 두 주장은 병립할 수 없는 주장입니다. 전자와 같은 인식을 깨뜨리지 않는 한, 남성 억압은 기껏해야 ‘여성 억압의 부산물’로 간주될 수밖에 없습니다. 급진적 페미니즘에서 이야기하는 남성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계급, 세대, 인종 등을 막론하고 ‘여성’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권리와 혜택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는 여성을 일방적으로 희생시킨 것이 아니라, 남녀 모두에게 각자 정해진 성역할만을 강요하고 그에 따른 반대급부를 제공했으며, 따라서 전통사회를 ‘가부장제 사회’ 혹은 ‘남성 중심적 사회’라고 규정하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라는 저의 지적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셨으면 합니다.
아울러 제가 알려드린 책들은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귀하께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rlgl 2010/03/09 13:25 # M/D Reply Permalink
마지막으로 정리격의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한지환님께서 말씀하신 성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여성 남성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전제 하에 가능하겠죠? 물론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바도 궁극적으로는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일겁니다.
또한 저는 물론 성별 이데올로기 속에서 여성과 남성 모두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는 분명히 말했으나 그 착취의 방식과 정도가 같다고 이야기 한 적은 없습니다.
이점은 분명히 이해하셔야 할 부분이구요.
또한 한지환님께서 여태까지의 글에서 거듭 말씀하시는 '여성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권리와 혜택'이라는 것이 '남자는 밖에서 돈벌어오지 않느냐'류의 경제적 종속에 관한 이야기를 예로 드시는 것 같은데 '대부분의 가정에서 남성 수입을 가지고 여성들을 먹여살릴 수 있다'는 관념이 실제 사회에서도 적용되고 있는지에 대한 조사를 더 해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남성의 경제력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것이 과연 혜택일지에 대해서도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지환 2010/03/09 17:26 # M/D Permalink
말씀하신 ‘남녀의 동등한 권리(혹은 의무)’는 성학의 전제가 아니라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성학 역시 ‘남녀의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기는 하지만, 문제는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에 대해 그들이 잘못된 해석을 내리고 있으며, 그로 인해 기존의 여성학 이론만으로는 우리 사회의 젠더 문제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 하에서 정당한 권리를 박탈당한 것은 비단 여성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벌써 여러 차례 지적한 줄로 압니다.
그리고 “남성과 여성에 대한 착취의 방식과 정도가 같지 않다”는 말씀은 결국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 하에서의 여성 억압이 남성 억압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라는 뜻 아닙니까? 저를 비롯한 자유주의적 남성운동가들은 그러한 인식 자체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귀하께서 남성주의에 대해 더 공부하실 필요가 있다고 말씀드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가정에서 남성들의 수입을 가지고 여성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관념이 실제 사회에서도 적용되고 있느냐”고 물으셨는데, 결국 귀하께서도 여느 여성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맞벌이’를 거론하시는군요. 이것은 앞서「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에서 상세히 다룬 문제이며, 지난 2월 21일에 남긴 첫 번째 댓글에서도 지적한 내용입니다.
「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에서 소개한 각종 통계자료와 언론보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 사회에서 남성 전업주부는 여전히 15만 명 남짓한 데에 반해, 전업주부로 일하는 여성은 600만 명이 훨씬 넘습니다. 설령 맞벌이 부부라 해도 여전히 남성의 생계 기여도가 여성의 그것보다 훨씬 더 높으며, 근로시간 역시 남성이 여성에 비해 눈에 띄게 긴 것이 현실입니다. 즉 맞벌이 가구라 할지라도 여성은 여전히 2차적 가족부양자 및 보조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흔히 ‘Gold Miss’라 불리는)조차 자신보다 높은 경제력과 지위를 갖춘 남성만을 배우자감으로 고려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지요.
즉 남성의 ‘치사적 역할’과 이를 뒷받침하는 성별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있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맞벌이’를 내세우며 남성의 전통적인 경제적 책임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젠더 문제를 여성 편향적으로 해석한 결과일 뿐입니다. 이는 오늘날 남성도 돌봄 노동을 일정 정도 분담한다는 이유로 여성에게 가해지는 돌봄 노동의 부담을 부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리고 남성의 전통적인 책임과 관련해 여성에게 허락된 면책권과 이른바 ‘이성(異性)에 의해 보호받을 권리’를 권리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가사와 육아를 비롯한 돌봄 노동과 관련해 남성에게 허락된 면책권 역시 권리가 아니라는 주장도 가능할 것입니다. 여성의 전통적인 성역할이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가 여성에게 허락한 권리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최근 대두되고 있는 ‘돌봄의 권리’라는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지 L. 모스 박사의 지적처럼, 여성은 남성의 전통적인 책임에 얽매임 없이 자신들의 고정된 역할과 ‘어머니와 교육자’라는 확고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반면 남성은 자신의 능력과 적성에 관계없이 그러한 성역할을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는 남녀 모두에게 각자 정해진 성역할만을 강요하고 그에 따른 반대급부를 지급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바입니다. 남성에게 주어진 반대급부는 권리인 데에 반해, 여성의 그것은 권리로 간주할 수 없다는 식의 편파적인 주장은 결국 ‘절름발이 페미니즘’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 역시「한국 여성에게 고하는 글」에서 자세히 설명한 내용이며, 제가 소개해드린 책의 저자들도 비중 있게 다룬 문제입니다. 시간 있으실 때 저의 글과 제가 소개해드린 책들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rlgl님. 저는 귀하께서 저의 글을 꼼꼼히 읽어보셨다고 생각하고 대화를 나누었던 것인데, 이제 보니 저의 글을 한 번도 훑어보지 않으신 것 같군요. 상대가 주장하려는 내용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어떻게 생산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먼저 저의 글을 찬찬히 읽어보신 뒤, 그래도 미진한 부분이나 하실 말씀이 있다면 또 댓글을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쿄 2010/03/17 20:13 # M/D Reply Permalink
한지환/
당신은 지금 대화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당신은 이미 당신의 절대적 옳음을 정해놓았고 그걸 바꿀 생각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여기에 당신의 주장에 무릎을 꿇으라는거지요. 그래서 당신의 주장에 반박하는 rlgl에 대해 "당신은 내 글을 읽지 않았다"고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엔 두분 사이 논쟁의 문제는 '이해'의 문제가 아닙니다. 일단 한지환님은 페미니즘 이론의 전제 자체의 폐기를 요청하고 있는데 제가 보기에 그건 사회학적, 인류학적 무지에서 비롯된 억지에 불과하고, 도리어 '현실'에 대해 표피적으로만 환기시키며 자신의 주장을 동어반복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한지환씨는, 페미니즘 논쟁의 전제 자체에 대해 숙지를 하고와서, 진정한 형이상학적 논쟁의 장으로 오셔야, 논쟁을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여기서 확실히 필요한건 '현실'이니, '전통'이니 어쩌구하는 땡깡이 아니라, 이론적 논쟁이며, 이론적 논쟁에는 1차 텍스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전제되어있어야 합니다. 한지환씨는 지금 억지만 부리고 있으며, 도리어 저는 한지환씨가 마지막에 뱉은, "상대가 주장하려는 내용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어떻게 생산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라는 말을 한지환씨에게 묻고 싶군요. 남성으로서 한 말씀드리자면 한지환씨의 '남성주의'는 사회학적 논쟁 토대에서 전혀 발도 들여놓지 못한 땡깡에 가깝습니다. 차라리 쇼펜하우어적이고 유심론적인 마초이스트라고 주장하십시오! 그럼 대충 인정이라도 할텐데 말이죠. 논쟁의 기본적인 자세조차 되어있지 못해보입니다. 자유주의 남성주의라니. 순수사회학 이론가들조차 '남성주의'에 대해서는 토대조차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게 뭐 껍데기라도 있기라도 한다면, 이미 '남성주의'는 자유주의 안에도 포함되지 못함을 아셔야 할 것 같습니다. 고작해야 근세기적 전통주의이론에 엉덩이 붙일 수 있을까요? 그러나 만야 그렇다면 정말 재미없네요. 그게 바로 사람들이 이렇게 열성적인 한지환씨에게 댓글을 잘 달아주지 않는 이유입니다. 이론적으로도 전혀 위협적이지 않고 또 재미도 없으니까요.
한지환 2010/03/18 01:55 # M/D Permalink
우선 쇼펜하우어적이라느니 마초(Macho)적이라느니 페미니즘 이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다느니 하는 말들은 터무니없는 중상이라 여기고 그냥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제가 쓴 글의 내용 가운데 어느 부분을 근거로 그런 결론을 내리신 것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그리고 ‘페미니즘 논쟁의 전제’를 운운하셨는데, 자유주의적 관점을 비롯한 남성주의의 여러 노선들은 페미니즘 이론의 그러한 전제 자체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기존의 페미니즘 이론으로는 젠더 문제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으며 이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설명을 드렸습니다. 현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이론을 내세우며 이를 덮어놓고 믿으라고 하는 것은 이른바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특히 우리 사회의 비주류라고 할 수 있는 힘없는 학생단체인 전국학생행진이 그런 오류를 범하는 것은 ‘누워서 침 뱉기’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경솔하고 어리석은 행동일 것입니다.
또한 저의 주장은 비단 저 혼자만의 사견이 아닙니다. 제가 주장한 내용들은 이미 1960~70년대부터 서구의 수많은 남성학자와 남성운동가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한 내용들이며, 거기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제가 소개해드린 책들을 읽어보시면 알 수 있으실 것입니다. “순수사회학 이론가들조차 남성주의에 대해서는 토대조차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는데, 대체 어느 순수사회학 이론가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는 것인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물론 여성학과 여성운동에 비해 남성학과 남성운동이 상대적으로 후발주자인 것은 사실이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학문 내지 사회운동을 귀하 혼자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존재가 부인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귀하께서 남성학과 남성운동에 대해 얼마나 공부를 하셨다고 이런 식으로 함부로 말씀하시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이런 유치한 행동은 결국 귀하의 한계를 보여줄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셨으면 합니다.
imperator 2010/03/29 11:04 # M/D Reply Permalink
저는 한지환씨의 주장에 더 공감이 가는군요.
대한민국 남성으로서 품어왔던 의문점들을 잘 파헤쳐주셨네요. 여성 입장에서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주장이구요.
저도 주위에서 진보적이란 소릴 듣는 20대 민주당 지지자지만 이 문제에 대해선 학생행진과 회원들이 무리수를 두고 있단 생각이 듭니다.
글 잘 읽고 갑니다.
* 연세대 3.8 여성의 날 실천단 기조
- 성폭력은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 일상의 변화로, 성폭력 없는 공동체를 만들자!
- 여대생의 이름으로, ‘일과 가사의 양립’ 퍼플잡 반대한다!
- 페미니즘으로, 대학을 다시금 움/직/이/자/!
* 실천단 계획
● 2월 마지막 주
- 2월 28일 실천단 초동주체모임(광장사업 준비, 자료집 기획, 실천단 첫 교양 기획을 논의합니다.)
● 3월 첫 주
- 실천단 자료집을 발간합니다.
- 3월 3일 저녁에 실천단 사전 교양을 진행하고, 광장사업 자보를 함께 만듭니다.
- 3월 4,5일 낮에 중도 앞에서 광장사업을 진행합니다.
- 3월 8일 102주년 여성의 날 문화제 참석합니다. 각 과/반에서 새내기학교 일정으로 넣어서 많은 새내기들과 함께 참여할 예정입니다. 여성의 날 장소에는, 광장사업 때 활용했던 자보들을 게시합니다.
● 3월 둘째 주
- 실천단 차원의 강연회를 진행합니다. (연사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 과/반에서 페민스쿨(여성주의 토크박스)을 진행합니다.
성균관대
Posted by 행진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3.8 여성의 날까지 다양한 행사들이 예정되어 있지만 주요하게 함께할 수 있는 일정들을 소개하려 합니다. 이외의 일정들은 추후에 소개드리겠습니다!
3월 6일 (토)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다양한 부스행사와 문화제가 진행됩니다!
-장소: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사전행사
▶돌봄노동자 희망대회_ 오후 1시
: 여성의 재생산 노동을 강요하는 것에 더해 이를 시장화하고, 여성의 노동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드는 사회서비스 정책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모아냅시다! 돌봄노동자들이 겪는 차별과 문제들에 대해 생생한 증언을 듣고, 돌봄노동자들의 노동권을 보장하기 위한 실천을 모아낼 수 있도록 합니다. 또한 여성에게 가해지는 돌봄노동의 부담을 사회화 할 수 있는 요구들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돌봄노동자 희망대회'에 함께합시다!
▶부스행사 _ 오후 1시 부터 쭉~
: ‘퍼플잡이 아닌 안정된 일자리에서 일할 권리를!(가)’ 퍼플잡 반대 선언운동을 비롯해서 기념품과 자료집을 판매합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부스행사가 준비됩니다!
▶기자회견 _ 오후 2시 30분
"출산강요반대! 퍼플잡 반대! 여성에게 일과 가정의 양립을 강요하는
이명박 정권 규탄! 대학생기자회견"이 진행됩니다!
102주년 3.8 세계여성의 날 전국여성대회_ 오후 3시
지난해 이명박 정부는 “일자리 창출 및 여성들의 경력 단절 예방”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퍼플잡'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여성에게 일과 가정을 양립할 것을 강요함과 동시에 노동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드는 정책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또한 저출산 해결을 명목으로 여성들의 출산을 통제하려는 정권의 태도는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를 박탈하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저출산 문제의 원인은 출산과 양육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해왔기 때문임을 밝혀야 합니다. 이제 여성들이 출혈적으로 수행해오던 재생산 노동에 가치를 부여하고, 이것을 사회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구조를 고민해야함을 이야기 합시다. 많은 시민들과 함께 다양한 공연을 보면서 여성들의 노동의 권리와 재생산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즐거운 실천을 만들어 갑시다!
*여성대회 주요요구*
- 여성 노동유/연화 강화시키는 유연근무제ㆍ여성해고반대!
여성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일자리 확충!
- 사회서비스 시장화 저지! 돌봄노동의 사회적 책임 강화!
- 4대강 예산 반대! 축소된 민생 복지 예산 확보 및 강화!
- 낙태단속강화 반대! 출산 강요 반대! 여성의 몸에 대한 자기결정권 쟁취!
- 보육ㆍ교육 공공성 강화!
- 생산의 주체, 여성농민의 권리는 식량주권 보장으로!
- 장애여성, 이주여성, 성소수자, HIV-AIDS 감염인의 노동권 보장!
-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 2010 지방선거, 여성의 권리 실현하는 여성정치 세력화!
3월 8일 (월)
102주년 3.8 여성의날 문화제 _ 오후 6시
Posted by 행진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