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G20 투쟁을 전개하자!




4차 캐나다 회의 결과

6월 28일 캐나다 토론토에서 막을 내린 주요 G20 4차 정상회의에서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재정건전성 강화를 위해 선진국들이 2013년까지 재정적자를 절반으로 줄이고 2016년까지 GDP 대비 부채비중을 줄이기로 합의했다. 이는 남부유럽금융위기에 직면하여 재정건전성에 주력해야 한다는 유럽의 의견을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공식발표문에는 "재정적자 감축 노력이 경기 회복을 더디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는 문구가 들어가 남부재정위기를 해소하기위해 재정긴축이 시급한 유럽과 하루빨리 세계경제를 재편해야 자국경제의 붕괴를 막을 수 있는 미국이 재정정책을 두고 대치하고 있다. 또한 은행세에 대한 선진국과 신흥국 간의 갈등 역시 해결되지 못하고 있으며 은행세 안건자체가 폐기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이외에도 글로벌 무역 균등화, 중국 위안화 절상 등의 민감한 사안들이 거론되었지만 효력 없는 합의만 있을 뿐 실질적으로 진행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런 현실은 G20을 통한 국제적공조로 경제위기해소, 금융을 규제하겠다는 저들의 선전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지난해까지 주요국 정부들은 ‘전례 없는 국제 공조’에 따른 공격적 경기 부양으로 경제위기를 물리칠 수 있었다며 득의만만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이제는 찾아볼 수 없다. 지난 3차 회의 때만 하더라도 출구전략을 논의하던 지배계급들은 당장 터진 위기 앞에서 당황하며 출구전략 논의를 미루고 결정한 것이 고작 재정건전성확보, 재정긴축이 필요하다는 합의가 고작이었다. 캐나다 토론토에 모인 G20 정상회의도, 그리고 IMF도 ‘이제는 누가 뭐라 해도 재정건전성을 위해 힘쓸 때’입니다. 라며 해결책도 의지도 없이 그저 말뿐인 선언만 되풀이 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저들은 지금까지 선언된 것들이 5차 서울회의에서 그동안 회의를 통해 합의된 결과물들의 구체적 방안이 도출될 것이라며 온갖 수사를 갖다 붙이고 있다.  하지만 벌써 4번이나 회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위기해소와 금융규제를 위한 제대로 된 합의조차 이뤄내지 못한 G20이 갑자기 5차 회의에서 ‘선언’이상의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또한 각국들의 자국의 이익을 두고 팽팽한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5차 회의가 진행되는 11월 즈음 이 상황이 극적으로 타개될 것이란 희망을 품는다면 이는 공상일 뿐이다. 이와 같이 G20은 어떤 것도 해결해주지 못하고 있지만 각 정권은 G20에 목을 매며 밑도 끝도 없이 G20만이 우리의 살길이라며 전 국민들이 G20을 올림픽처럼 환영해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들이 이토록 G20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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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20을 통해 노리는 것

각 정권은 G20정상회의가 경제위기를 비롯하여 모든 위기와 문제의 해결사인 마냥 홍보하지만 이는 환상일 뿐이라는 것은 지난회의 결과들이 증명하고 있다. 허나 더 큰 문제는 금융규제안에 대해서 내놓는 각 국의 안들이, 현재 위기의 원인인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억압하고 규제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진전시키려는 방향 속에서 설정되고 딱 그 수준에서 각 국의 이해를 도모하는 방식으로 대립하고 있다는 데 있다. 때문에 그 합의가 무엇이든 금융이윤을 보장하기 위한 저들의 기만은 계속될 것이며 한국에서 진행되는 5차 G20을 성대히 마친다면 우리에게 돌아올 것은 파국일 수밖에 없다. 그들이 말하는 위기극복이란 위기전가와 다를 바 없다. 지난 2차 런던 회의에선 ‘경기부양’이 핵심적으로 논의되면서 신흥개도국들을 지원하기 위한 1조 1천억 달러 출자가 합의되었고 이중 7천5백 불이 IMF에서 확충되었다. 즉 IMF를 통해 신흥개도국들에게 지원을 해주겠다는 것이다. 이는 기존에 IMF의 구제금융을 받았던 나라들이 대부분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된 사실들만 보더라도 ‘지원’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가 결국에는 G20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세계경제 재편의 질서를 신흥개도국들에게 제시하면서 모든 고통을 ‘전가’하겠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없는 것을 우리는 97년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또한 국제금융기구 개혁 등의 구체적인 사안들이 IMF와 기존 국제기구들에게 맡겨졌으며 이는 결국 국제금융기구의 자본과 기능을 강화를 하겠다는 것 그 이상 그이하도 아니다. 더불어 5차 G20정상회의 의장국인 한국은 스스로를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의 ‘가교’로서 역할을 설정하면서, 개도국과 신흥국의 입장을 대변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이렇듯 의장국의 체면상 중립을 표방하고는 있지만, 사실 한국의 역할은 미국이 계획하고 있는 세계경제질서 재편 과정에서 미국의 입장으로 개도국을 잘 달래주는 것에 불과하다. 즉 G20으로 금융을 앞세운 국경 없는 수탈을 이름만 바꾼 채 계속 해나가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3차 피츠버그 정상회의에서부터는 논의된 ‘지속가능한 균형성장’을 위해서 위기 극복 이후에도 글로벌 거버넌스로서 G20을 활용하는 것에 대해 각 국의 정상들이 한 치의 거리낌조차 없이 동의하는 이유이다. 이와 같은 G20의 5차 회의를 성대히 진행해야할 한국정부는 적극적으로 거리의 노점상을 몰아내 디자인 서울로서의 면모를 다지고, 이주노동자들을 단속하며 추악한 한국의 노동현실을 가리려 하고 있다. 또한 한국경제가 안정기에 접었으니 ‘금리인상’을 하라는 IMF와 OECD의 요구까지 모범국가답게 열심히 받아들이면서 서울회의 이전에 이를 추진할 예정이며, 지방선거가 끝나자마자 온갖 공공요금을 인상시키며 노동자민중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물론 이렇듯 G20 스스로가 자신들의 기만성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G20에 자신의 삶을 맡기고 희망을 거는 사람들이 있다. 거센 금융위기에 몸살을 앓았지만 그래도 국민들이 ‘해내야 한다.’는 정부의 이데올로기 공세 역시 만만치가 않기 때문이다.


G20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때문에 G20에 대응하는 우리의 투쟁은 그 목표와 방향이 명확해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요구를 병렬적으로 나열하는 방식으로 투쟁을 진행한다거나, 독재, 반민주와 같이 현 정권의 정책에 대한 일반적 비판이나 G20회의테이블이 약소국 배제하는 절차와 체계를 비판하는 운동으로 G20투쟁의 내용을 채워갈 벌여선 안 될 것이다. 현재 국격 상승과 경제위기 해결을 내걸어 민중들에게 환상을 심으며 본질인 금융세계화 심화를 은폐하고 있는 G20의 본질적인 성격과 그 모순에 대한 비판을 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G20 정부의 이데올로기 공세 속에서 국민들의 희망을 망치고 국익에 반하는 적으로 몰려 고립될 수밖에 없으며 G20의 본질을 흐리고 대응을 지지부진하게 만들뿐이다. G20이 정당성의 확보를 위해 여러 의제를 가져다 붙이고는 있지만 결국 자본과 정권 자신들이 몰고 온 금융위기의 비용을 세계적으로 전가시킴과 동시에, 금융시장을 더욱 더 탄탄하게 만들고 확장시키기 위해 만들어졌음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즉 위기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자신들에게 수많은 이익을 가져다 준 금융세계화의 연명만을 논의하고 있는 곳이 바로 G20인 것이다. 이를 명확히 파악하고 운동을 만들 때 비로소 우리는 G20에 대항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민중운동진영 내에서의 G20대응투쟁은 금융세계화반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G20을 ‘계기’로 투쟁을 벌여낸다는 것은 단순히 G20이 포괄하는 수많은 의제별로 대응하여 따낼 것은 따내고 반대할 것은 반대하자는 이야기부터 사람들이 분노할만한 내용으로 투쟁하자는 대중추수적인 논의들 그리고 11월 투쟁 중간에 거치는 일정정도로 G20을 사고하는 모습 등을 보이고 있다. 이는 아직 운동진영 내에서 G20에 대한 공동대응이 필요하다는 합의 이상의 논의가 진행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G20에 맞선 공동대응을 말하고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의제에만 매몰되거나 G20의 핵심이 금융세계화 심화, 세계경제구조 재편에 있다는 사실을 간과된 채 각자 고립된 실천을 하려는 현재의 양상은 금융세계화에 대한 인식이 부재한 것에서 기인한다. 때문에 의제별로 잘 대응하는 것 말고 왜 G20에 맞서서 ‘공동’의 대응이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합의나,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로 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G20에 맞선 투쟁의 지지부진함이 지속된다면, 운동진영은 결코 민중들의 요구와 융합할 수 없으며 한 발 더 퇴보할 수밖에 없다.


금융세계화 비판을 핵심으로 두고 G20에 반대하는 강고한 투쟁이 필요하다!

G20정상회의로 세계경제질서를 좌지우지하려는 지배계급들의 새로운 판짜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저들의 금융규제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만약 성공한다 하더라도 이는 구조조정, 양극화와 같이 민중들을 더욱 착취하는 구조로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이는 현재 노조탄압, 이주민․노점상등의 탄압이 심화와 같은 형태로 강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응하는 우리의 연대와 전략은 생각보다 강고하지 못하다. 만일 G20에 맞선 투쟁이 일회성으로만 그친다거나, G20반대투쟁의 의미를 잘 밝혀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국격상승을 해치는 자들로서 공격당하며 또 다시 한 발 ‘뒤로’ 물러나야 할 판이다. 또한 G20을 두고 개입이냐 혹은 반대냐 혼란 속에서 우리의 선택은 G20에서 저들이 이루려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자체를 반대하는 투쟁을 벌여내는 것이 G20에 대한 올바른 개입이라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더 이상 노동자민중에게 물러설 곳은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 걸음이라도 더 내딛을 수 있는 투쟁과 이를 뒷받침해줄 강고한 연대의 끈이다. 때문에 지금부터 우리는 G20에 맞서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어떠한 실천을 만들어 나갈지, 또 어떠한 쟁점을 만들고 어떻게 대답을 내릴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신자유주의금융세계화에 반대하는 공동의 합의와 계획을 통해 곧 다가올 G20을 예비해야만 한다. 초민족적 자본의 수탈과 이를 옹호하는 G20이 고용없는 성장 속에서 전세계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고 빈곤층을 확산시킬 것임을 폭로하면서, 자본과 정권의 유지를 위한 ‘저들만의’ 협상에 반기를 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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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행진

2010/08/07 16:52 2010/08/07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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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의
 
‘퍼플잡’을 비판한다!


 



보라색은 희망일까?


작년 가을, 여성부는 여성들의 경력단절 예방 및 일자리 창출, 여성 경제활동참가 확대 및 지위 향상을 이야기하며 퍼플잡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각각 여성과 남성을 상징하는 빨강과 파랑이 섞인 보라색(purple)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일과 가정의 조화와 남녀평등을 표방하는 퍼플잡(purple job)은 출산과 육아로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던 여성들이 재취업에 나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직업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도 여건에 따라 근무시간과 형태를 조절할 수 있게 하겠다는 유연근무제도이다. 유연근무제도는 단시간 근로, 시차출퇴근제, 집중근무시간제, 요일근무제, 재택근무 등 육아 및 가사노동을 직장일과 병행할 수 있도록 하는 탄력적인 근무형태를 말한다. 시간제 근무 공무원에 대한 시범실시, 단시간 일자리 확산을 위한 기업 지원 등을 통해 유연근무제를 확대하기 위한 계획들이 제출되고 있다.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꾸준히 증가하는 가운데 출산율은 사상 최저치로 떨어지고 있다. 직업을 가지면서도 출산과 육아의 책임을 저버리기가 쉽지 않은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퍼플잡은 과연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여성_ 일도 하고 가정도 돌보고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증가할수록 출산율은 낮아지고 있는데, 이것은 기존의 가족(특히 여성)이 수행하던 돌봄을 더 이상 가족 내에서 해결하기 힘들어지는 상황과 연관이 있다. 또한 여성의 경제활동참가 패턴을 보면 M자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30대 초반을 전후해 경제활동참가율이 갑자기 떨어지고 30대 후반 이후 다시 증가하는 양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출산과 육아가 집중되는 연령대(1990년대 후반까지는 20대 후반, 2000년대 이후에는 30대)에서는 경제활동참가율이 급격히 떨어졌다가 이후에 다시 상승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곧 여성은 출산과 동시에 노동시장에서 이탈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다시 노동시장에 복귀하면 대부분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일하게 된다. 시간제, 파트타이머 등으로 불리는 단시간 노동은 남성에 비해 여성에게 더 적합한 일자리로 여겨지는데 이는 여성이 수행하는 노동에 대해서 남성의 노동을 보조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남성의 노동만으로는 가정을 유지하기 어려운 조건에서 여성의 역할은 재생산 노동의 일차적인 책임자와 가정의 2차 소득원으로만 인식되는 사회구조의 결과이다.




 
이렇듯 출산과 육아, 가사노동의 부담으로 경제활동을 포기해야만 했던 수많은 여성들의 현실을 어느 정도 해결해줄 것이라 기대되는 퍼플잡은 일견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심각한 저출산-고령화 사회로의 진입과 함께 여성인력이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등장하였고, 이와 동시에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가 꾸준히 증가하는 가운데 정부의 여성정책의 핵심적인 화두는 일과 가정의 양립을 어떻게 가능하게 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정부의 일-가정 양립정책의 내용과 추진 과정은 여성들의 취업과 출산․양육의 이중부담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기보다는 발생하는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조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양육․돌봄과 직장일을 둘러싼 문제에서 여성에게 제시되어온 선택지는 ‘직장을 그만두고 집안일을 할 것인가’와 ‘직장일과 집안일을 병행할 것인가’였을 뿐이다. 재생산 노동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이 가족, 특히 여성에게 부여되는 현실의 본질과 문제점을 건드리지 못한 결과이다. 이러한 정부의 정책은 여성이 갈수록 저임금에 불안정한 과 턱없이 지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가정을 모두 책임져야 하는 사회적 강요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여성에게 전가되는 재생산 노동의 책임 문제를 전혀 건드리지 않은 채 ‘노동시간 유연화’를 통해서 여성노동 문제를 해결하려하는 일-가정양립 정책(퍼플잡)은 여성에게 이중부담을 강화하고 여성의 일자리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퍼플잡, 뭐가 문제일까?


재생산의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한다


정부가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이 여성들의 출산과 양육으로 인해 경제활동이 단절되는 것이라면 정말로 건드려야 하는 것은 재생산 노동의 책임이 온전히 여성의 몫으로 돌아가는 것의 문제이다. ‘재생산 노동’의 의미에 대해서는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며 여기서는 간단하게만 보도록 하자.

‘생산’이 한 사회의 부를 생산하는 과정을 의미한다면 ‘사회적 재생산’은 단지 그 사회 성원들의 생물학적 재생산뿐만 아니라 그 사회를 유지하는 사회적 행위의 재생산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경제 체제는 재화 및 서비스의 생산과정과 그러한 생산자로서의 인구(노동력)의 사회적 재생산 과정 사이의 특정한 관계를 전제로 하는데, 자본주의 체제는 자본주의적 노동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던 19세기에 숙련 남성노동자 중심의 고용구조를 확립하며 여성, 아동을 비롯한 그 밖의 노동력 취약 계층을 가족으로 돌려보냈다. 이는 기존의 자급자족적 가계로부터 생계수단을 박탈하여 노동시장에 생계를 전적으로 의존하도록 하는 과정인 동시에, 국가 주도 하에 노동 인구의 재생산에 대한 관리와 통제를 강화하려는 시도였다.

생산과 재생산은 특정한 관계를 맺고 생산체제를 지탱하고 있지만, 자본주의 하에서는 이를 분리시킴으로써 재생산 영역을 비가시적이게 만들었다. 즉, 재생산 노동은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수행해야 하며, 누군가 그 비용을 지불해야 하지만 이것을 마치 저절로 주어지는 것처럼 간주해 버렸다는 것이다. 재생산 노동은 엄청난 시간과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필수적인 노동이지만 국가의 경제, 통계에 전혀 반영되지도 않으며, 아무나 적당히 할 수 있는 노동으로 평가절하 되어왔다. 이와 같이 재생산 노동이 무급으로 수행되는 것은 자본에게는 생산비용인 ‘임금’으로부터 그 비용을 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 남성생계부양자모델의 해체에도 불구하고 재생산 노동은 여전히 여성의 책임으로 남아있다. 아니, 오히려 더욱 많은 부담을 전가 받는다. 가계의 실질소득 감소는 추가적인 성원, 특히 여성을 노동시장에 참가하도록 하며, 여성은 주로 저임금의 일자리나 더욱 조건이 열악한 비공식 부문에 참가하게 된다. 또한 여성은 줄어든 가계예산으로 자신과 가족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재생산 노동을 강화한다. 의료, 교육, 주거 등 사회서비스 관련 예산의 삭감은 여성에게 더 많은 돌봄 노동을 수행하게 한다. 구조조정의 효율성 증대란 실상 공적 영역에서 이뤄지던 것을 가계로의 비용 전가를 통해 가능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여성은 더 오래, 더 열심히 가계 안팎에서 일함으로써 구조조정의 충격을 흡수하는 ‘충격흡수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연구들은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을 증가시키고, 사회적 갈등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현재의 발전모델이 지속가능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재생산의 위기’ 차원에서 지속가능성을 문제 삼는다. 현재의 발전모델은 여성의 희생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으며, 여성이 인내할 수 없을 정도의 추가적인 노동을 요구함으로써 결국 재생산의 기반을 무너뜨릴 것이다. 현재의 위기는 구조조정이 기초적 재생산과 갈등적이며, 이러한 갈등이 발전과정 자체를 위협할 정도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재생산의 위기’로 규정된다. 이러한 구조조정은 여성의 노동을 무한하게 탄력적인 것으로 가정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여성의 저임금, 불안정 노동을 확대할 것이다


여성의 노동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용하는 정책을 확대할 것을 주장하는 이들의 가장 기본적인 논리는 한국의 고용구조가 남성들에게 적합한 전일제-장시간노동에 기초해 있으며, 그러한 고용구조로 인해 여성의 노동시장 진입이 어렵고 경력단절 문제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여성노동시장이 확장되었고 남성생계부양자모델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피부양자의 지위에 머무르며 양육을 전담해왔던 여성이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왜냐하면 실제로 작동하지도 않는 남성생계부양자모델은 사회에 이데올로기적으로 아주 단단하게 뿌리내려서 여성의 노동을 남성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한다. 여성의 노동이 부차화되기에는 총체적인 경제위기 속에서 남성의 노동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어진 수많은 여성들이 이미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노동을 수행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성이 일차적인 생계부양자라는 이데올로기는 여성들의 일자리를 대부분 저임금의 불안정한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남성생계부양자모델에 대한 비판은 이로 인해 여성노동자들이 처한 저임금, 불안정노동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더 이상 남성의 노동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으니 여성들도 일해야 한다→하지만 여성들이 남성처럼 풀타임으로 빡세게 일하기에는 가정도 돌봐야 하니 유연한 근로형태를 제시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정책들은 가사와 육아의 일차적 전담자로서의 여성의 역할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더욱 고착화시키는데 기여할 것이라는 점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정책이 확대되면 남성이 여성에 비해 가지고 있는 상대적인 고용과 임금의 안정성이 여성노동의 수준으로 하향화될 가능성이 있다. 보라색을 남녀평등의 색깔이라고 하면서 퍼플잡이 여성고용정책이라는 것을 강조하지만 이것이 남성 여성을 가리지 않고 또 다른 형태의 비정규직을 양산하게 될 것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노동의 형태를 유연하게 한다는 말은 결국 노동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겠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필요한 것은 더 유연한(불안정한!) 노동형태가 아니라 여성이 가정의 모든 일의 일차적인 책임자가 되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재생산 노동을 사회화한다는 것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만들기 위한 논쟁과 대안이다.




퍼플에 레드카드를 던진다!


최근 저출산 문제가 또다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면서 이번에는 여성들의 낙태를 엄격히 단속하겠다는 사람들이 나오는 등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인구가 늘어나던 시절에는 나라에서 여성들에게 낙태를 적극적으로 권장하며 피임도구도 공짜로 줬다던데, 인구가 줄어드니 일차적으로 관리 대상이 되는 것은 또다시 여성의 몸이다. 여성의 몸은 언제나 시대의 필요에 따라 관리되고 강요당해온 것이다.

여성의 노동력도 마찬가지이다. 사상초유의 경제위기 속에서 가장 먼저 그 충격을 완화하고 국가와 사회가 책임지지 않는 재생산 노동까지 책임지며 저임금의 불안정 노동을 강요받는 사람들은 역시 여성들이다. 사실 지금 퍼플잡이 추구하는 여성의 노동은 이미 전부터 진행 중이었다. 여성의 문제에 대해, 재생산 노동의 사회화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들을 이야기하지 못하면 앞으로도 패치워크 하듯이 각종 정책들을 덧대고 포장하는 정부의 논리에 밀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묘한 퍼플에 단호하게 레드카드를 던져야 한다.









Posted by 행진

2010/02/21 05:19 2010/02/21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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