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더 나은 세계’인가?
 : 다보스포럼을 통해 본 세계경제




1. 들어가며 : 다보스포럼과 이명박은 세계 경제를 구원해줄 수 있을까?


 얼마 전 스위스 다보스에서 세계경제포럼이 열리는 기간 동안 [한국 대통령이 다보스서 제일 먼저 연설한 이유], [‘자유시장주의 철옹성’ 다보스 무너지다!] 등의 세계경제와 다보스포럼에 관련된 기사들이 연일 신문들에 주요하게 다뤄지며 보도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다보스에서의 이명박 대통령의 행보를 다룬 인터넷 포털 싸이트 기사들 아래에는 어김없이 네티즌들의 비난 리플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어이없게 다보스포럼에 이명박 대통령이 자신의 큰딸과 손녀를 데리고 갔다더라’ ‘한국에서처럼 국정수행을 졸속적으로 처리하고 왔다더라’ ‘국제무대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외모가 부끄럽다’는 등의 내용들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번 사안에 관련된 기사들에 대한 반응은 기존의 이명박 대통령과 관련된 다른 기사들에 대한 반응과는 확연하게 다른 지점들이 있었다. 가장 많이 찬성을 받은 리플은 대체로 ‘세계경제위기의 심각함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한국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그런 중요함도 모르면서 그저 이명박 대통령을 비난하는 무지한 네티즌들을 나무라는 식이었다. 물론 누구나 인지하듯 현재 세계경제는 정말로 위기이지만, (비록 비난의 내용이 올바르지는 않았다하더라도)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불만과 그로 인한 비난은 잘못된 것이었을까? 그리고 이명박 정부와 다보스포럼의 각국 정부들은 정말 세계 경제를 구원하려는 것일까? 경제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세계정상들은 수많은 노동자 서민들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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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에 들어가기에 앞서 결론부터 밝히자면, 2010년 다보스포럼에서 다뤄진 방향으로는 세계경제의 위기를 극복할 가능성이 무척 낮다는 것이고, 설령 극복이 가능하더라도 상층부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수많은 사람들이 경제위기 극복 시도 속에서 희생양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 글은 다보스포럼에 이어, 11월 서울 G20 회의에서도 다뤄질 (한국을 비롯한) 세계정상국가들의 위기극복전략이 어떠한 것인지 알아보고, 그것을 적확하게 비판하기 위해서 쓰였다. 아무쪼록 이 글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 정부와 다보스포럼, 그리고 앞으로 G20 등에서 다뤄지는 ‘그들만을 위한’ 경제위기극복전략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공유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리고 그를 기반으로 앞으로 더 많은 이들과 함께 ‘대안’을 토론하고 이야기해나갈 수 있었으면 한다.




2. 2010년 다보스포럼에서의 ‘금융규제 논의’와 ‘이명박 대통령의 특별 연설’


2.1. 2010 세계경제포럼의 가장 큰 화두 : 금융규제

 얼마 전, 1월 27일부터 31일까지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은 ‘더 나은 세계: 다시 생각하고, 다시 디자인하고, 다시 건설하자’라는 슬로건 하에서 진행되었다. 학계․정계․재계의 유명인사들 2500여명이 참가한 올 해 ‘다보스포럼’의 핵심의제는 금융규제방안이었다. 특히 정치권 인사들을 중심으로 금융규제에 대한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개막연설에서 “은행가의 할 일은 투기가 아닌 기업대출로 경제성장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하는 것”이라며 “금융업계가 과도한 이윤 추구와 보너스를 지급하는 것에 대해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국제 금융 시스템을 개편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특별연설을 해서 이슈가 되었던 이명박 대통령도 금융기관들의 대마불사(바둑에서 대마는 결국은 살길이 생겨 쉽게 죽지 않는 일, 부실한 금융기관들이 인수합병을 진행하며 규모를 키워 살아남게 되는 일)에 대한 비판과 함께 글로벌 금융안전망을 구축해야 함을 이야기했다. 정치권 인사들뿐 아니라 금융계에서 엄청난 부를 쌓은 소로스 회장(소로스 펀드 매니지먼트)도 금융계를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며, “구체제는 깨졌다. 국제공조를 할 수 있는 글로벌 금융 시스템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금융위기를 사전에 예측해서 유명세를 탔던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도 “금융기관들의 이른바 대마불사 신화는 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과거 다보스포럼에 참석해서 크게 주목을 받아왔던 미국계 초국적 금융기업의 수장들은 대부분 다보스에 아예 오지도 않았다.

 반면 영국 금융기관 로이즈 로드 레빈 회장은 “금융규제 개선은 필요하지만 더 이상 규제는 안 된다”며 금융기관의 입장을 표명했다. 영국 바클레이스 은행장인 로버트 다이아몬드 역시 “은행을 규제하고 은행 업무를 축소하는 것이 글로벌 금융 시스템을 개선시킬 수 있다는 근거는 찾아볼 수 없다”며 금융규제 강화 의견에 반대했다. 구체적인 성과는 없었다. 비공개로 이루어진 회담에서도 새로 만들어질 규제가 전 세계적으로 균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원칙만 확인했을 뿐이다. 그 외에 주제에는 선진국과 개도국의 균형 발전,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줄기차게 이야기했던 아이티 재건을 지원하는 사안, 전 세계적인 실업률 상승, 경기회복 둔화 등이 다루어졌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가장 큰 화두는 금융규제에 대한 발언들과 그에 반발한 금융기관의 입장들의 충돌로 볼 수 있다. 다보스포럼에 참가는 하지 않았지만 오바마 미국 대통령 또한 얼마 전 강력한 은행 규제책을 시사하며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분리를 해야 한다고 발언했고 실제로 정책적으로 옮기려고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2010년 세계경제에서 앞으로 가장 큰 화두는 금융규제에 대한 논의가 될 것으로 보인다.


2.2. 다보스포럼에서 이명박의 단독특별연설 : G20과 글로벌 금융안전망 구축

 아시아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올해 11월 G20 정상회의 의장을 맡게 된 이명박은 ‘서울 G20 정상회의, 주요 과제와 도전’이란 제목의 연설을 통해 서울 G20 정상회의의 3대 기본방향을 제시했다. 그와 동시에 일명 조중동을 비롯해서 수많은 일간지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스위스에서 한국의 국위선양을 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에 알려내느라 분주했다. 언론들은 한국이 아시아 최초의 G20의장국이 되었기에 한국 대통령 최초의 다보스포럼 단독특별연설이 가능했다는 것 등을 부각해서 보도하며, G20과 함께 세계적으로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다며 자축했다. (모 경제신문에서 말했듯) 이제 정말 한국은 아시아의 맹주에 올라갈 수 있을 만큼 급이 올라간 국가가 된 것일까? 일단 이명박 대통령이 행한 특별 연설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연설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1. 지난 세 차례 G20 정상회의에서 합의한 사항의 철저한 이행 2. 글로벌 금융안전망(GFSN) 구축 3. 비회원국을 대상으로 한 G20 범위 확장이 그 내용이다.



앞으로
G20 합의사항을 철저히 이행하겠다는 것은 G20에서 단순히 논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세계경제에 대한 강력한 법칙을 만들어내는 곳으로 G20의 위상을 위치 짓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기존 G8 정상회의로는 금융위기에 대한 극복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아시아 및 신흥개도국을 포함해서 세계경제를 이끌어갈 주요한 테이블로서 G20 정상회의를 사고하게 된 현실을 나타내준다. 그러므로 앞으로 G20에서 논의되는 내용들은 G20에 포함 되는 국가를 넘어 실제로 전 세계 경제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고, 이는 앞으로 G20의 논의가 세계의 수많은 노동자 서민들의 삶에도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비회원국을 대상으로 한 G20 범위 확장을 시도하겠다는 것도 실제로 G20에서 논의되는 내용들이 세계경제에 가지는 큰 파급효과를 고려해보았을 때 (비회원국에 대한 포섭과 함께)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 글로벌 금융안전망 구축은 08년 금융위기 이후 상시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된 세계금융시장에 안전망을 만들겠다는 것인데, 이는 얼마 전 오바마 대통령의 강력한 은행규제책에 대한 발언과 비슷한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그러나 국가를 넘어 고도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세계금융시장에서 안전망 구축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실현가능성은 차치하더라도) 금융위기극복을 위해서 미국의 루비니와 같은 경제학자들은 은행들의 겸업화를 일정부분 해체하고 국유화하자는 방향을 냈으나, 오바마 정부에서 현재 실행하고 있는 방향은 앞의 방향에도 미달한다. 현재 오바마 행정부의 개혁 방안은 위기를 불러온 금융자본의 지배구조 자체에 대한 변화가 아니라, 위기에 처한 금융자본에 대한 지원책에 불과하다는 평이다.1) 앞으로 이러한 오바마 정부의 개혁방안에 대해서 더 주시해보아야겠지만,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를 비롯해서 한국의 이명박 정부 등이 G20 정상회의에서 제기 할 글로벌 금융안전망 구축은 자본주의 경제의 총체적인 위기 속에서 그리 큰 효과를 내지 못할 것으로 예측된다. 분명 G20이라는 세계경제를 움직이게 될 큰 배에 이명박 정부가 타게 된 것은 맞지만, 문제는 그 배가 대체 어떤 배냐는 것이다. 과연 이 배가 서서히 침몰하고 있는 배인지, 아니면 앞으로 잘 나아가게 될 배인지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3. 현재 세계 경제는 어떠한 상황인가?


 다보스포럼에 모인 이들은 대체로 세계경제위기에 대해 ‘느린 회복’을 전망했다. 그러나 헤게모니 국가인 미국의 경제회복은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다. 작년 한 해 동안 집중적으로 경기부양책을 편 효과로 미약하나마 회복세를 보이고 있지만, 여기에는 여러 부정적인 변수들이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쌍둥이 적자의 문제가 있다. 동아시아 수출달러 환류-발권이익 메커니즘2)을 통해 소비와 투자를 늘릴 수 있었던 미국은 과도한 부채에 시달리면서 수입을 줄이고 있는데, 미국 이외의 국가들의 경제는 미국보다 더 나빠져 대외수출 역시 줄어들고 있다. 최근 정부지출이 늘어나면서 재정적자 역시 심각한 상황이다. 경기부양책이 경제성장률에 미치는 효과가 감소하는 2010년 후반이 특히 위험할 것이다. 미국 연준은 올해 경제가 완만하게 성장할 것이라 했고, IMF는 더블딥의 위험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폴 크루그먼과 같은 경제학자들도 더블딥 위험이 결코 작지 않다고 경고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 이유로 신규 일자리 창출이 늦춰지면서 소비가 약화되는 점, 신용경색으로 여전히 자본 투자가 많지 않은 점, 과도한 재정적자에 따른 경기부양책 지속 여부 불투명 등을 꼽았다. 작년 금융위기의 여파는 아직 가시지 않았다. 결국 경제가 V자형태로 신속하고 활발하게 회복될 가능성은 별로 없고, U자형(느린 회복), L자형(장기침체), W자형(더블딥) 중의 하나이거나 이들의 조합이 될 것이다. 최근 주택담보 대출금을 갚지 못하는 사태가 늘고 있고, 우량 담보대출의 경우에도 제때 상환하지 못해 집을 압류당한 비율이 지난 3분기에 무려 10%에 달하고 있다. 여기에 역사상 최악의 실업사태까지 겹쳐지면서 장기침체에 가까운 느린 회복과정을 밟을 것이다. 기업이윤이 획기적으로 증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러한 불안요인들이 겹쳐지고, 기업과 금융기관들의 추가부실까지 더해지면, 2차 금융위기가 도래하고 이것이 더블딥으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 현재 대형은행 부실 이후 중소규모 은행의 부도가 이어지고 있고, 미 연방예금보험공사가 문제은행으로 지목하고 있는 은행만도 500개 이상으로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3) 물론 단기간 안에 더블딥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겸업은행체제(상업은행+투자은행)의 성행, 정보기술산업과 최근 주목받고 있는 녹색산업에서, 또 주택시장에서 거품이 형성되고 붕괴될 경우 결코 만만치 않은 경제위기로 돌아올 것임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이러한 전 세계적인 불안은 얼마 전 그리스에서 발발한 정부 재정위기가 글로벌 더블딥의 기폭제로 작용할 수 있다는 예상들이 제출되며 더욱 증폭되고 있다. 그리스를 비롯한 스페인, 이탈리아 등 일부 유로존 국가의 재정악화 문제는 심각한 상황인데, 재정적자뿐 아니라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에 허덕이는 이들 국가의 국채를 가장 많이 보유한 것이 프랑스 독일 등 유로 지역 선진국 금융회사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 등이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선언하면 유럽 지역 은행들까지도 동반 부실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유럽 전역을 공포에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이는 금융위기 및 경기침체에 대응하기 위한 재정 지출 확대와 경기침체로 인한 조세 수입 감소 등으로 09년 이후 유럽 각국의 재정수지가 급격히 악화되었을 때 이미 점쳐진 현상으로 전 세계 경제 상황에 엄존하는 불안요소를 방증한다.

 세계 경제의 침체와 동요는 전반적인 현상이지만 아시아와 남미 등 신흥국에서는 지난 금융위기로 인한 타격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고, 이후에 경기하강속도가 완화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G20 정상회담이 프리미어 포럼(가장 중요한 논의의 장)으로 격상된 것 역시 세계경제에서 신흥국이 차지하는 위치가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로 세계경제를 위기에서 구원할 ‘동력’이 될 수 있을까? 초민족적 투기자본의 대규모 이동이 아무런 규제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현재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신흥국들의 경제 역시 언제 어떻게 무너질지 알 수 없다.4) ‘해외투자’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가려진 ‘투기자본’이 더욱 활개를 치게 되면 기업에 대한 인수합병, 구조조정을 일삼다가, 이윤이 더 이상 나지 않으면 내다버리는 일이 반복될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 노동자들의 권리는 위기관리라는 명분하에 가장 먼저 양보되어야 하는 것으로 취급받을 것이며 이 같은 방식은 금융화 시대가 요구하는 가장 일반적인 경향이 될 것이다. 이번 다보스포럼에서 논의되었던 사안 중 하나가 바로 휴먼 리세션인데, 무고용 경기 회복과 청년실업에 대한 것을 말한다. 당장 미국에서는 25세~54세 미국인 중 5분의 1이 실업 상태이고, 유럽 또한 청년실업이 심각하다. 단적으로 스페인은 14세~25세 인구 중에 42%가 일자리가 없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실업자가 400만 명에 육박하게 되었다. 그러나 금융화 시대의 이러한 일반적 경향을 제어할 해결방안을 다보스포럼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4. 나가며 : 이제 공은 서울 G20회의로 넘어왔다!


 이번에 다보스포럼에서 논의한 내용은 포럼이라는 특성 상 실제로 전 세계 국가에 어떠한 정책적 강제 등으로 작용할 수는 없는 듯하다. 그러나 이명박 한국 대통령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다보스에서의 연설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제 이를 실물화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테이블은 바로 앞으로 6월(캐나다)과 11월(한국)에 열릴 G20 정상회의이다. 이는 G20에서의 논의가 향후 세계 경제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수행할 것을 이미 각 국의 지배자들은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들은 위기 극복을 위해서라면 고용 없는 경제 성장과 더불어 수많은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임금을 삭감하고, 노동조건을 악화시키는 것을 별로 개의치 않고 자행해갈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말하는 경제위기 극복은 수많은 노동자 서민들을 위한 ‘더 나은 세계’가 아니라, G20에 속하는 각 국가의 지배자들과 소수 투기금융자본, 그리고 그 수혜를 받는 자들만을 위한 ‘더 나은 세계’임이 분명하다.

 수많은 노동자 서민들이 G20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중요한 테이블, 혹은 나와는 상관없는 세계 각 국의 대통령들만의 테이블 정도로만 바라보고 있는 지금,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가 중요한 시기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분초를 다퉈가며 다보스 포럼에서 열심히 한국의 국위선양을 하고 있다며 많은 보수신문들에서는 극찬을 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명박은 졸속 국정수행이 아니라, 한국의 지배세력을 위해 더 나은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싸움을 분초를 다퉈가며 살아가고 있다. 서울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가 앞으로 9개 월 가량 남은 지금, 지금이야말로 우리들은 당장 다보스포럼과 G20 정상회의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비판적인 지식을 습득하고, 주위의 더 많은 사람들과 이 사실들을 공유해야하지 않을까.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는 그들만을 위한 ‘더 나은 세계’보다는, 노동자 서민들과 함께 더 많은 이들을 위한 ‘다른 세계’를 만들어가자고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Posted by 행진

2010/02/14 21:43 2010/02/14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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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없는 자본이 정말 우리의
‘삶’을 발전시켜 줄 수 있을까?

- 초민족적 외국투기자본의 노동권 파괴


들어가며


 요즘 한국에서 외국기업의 이름을 듣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 외국에서 한국 기업의 이름을 보는 일도 이제는 흔한 일이 되었다. 그만큼 요즘 기업들과 자본들에게는 국적이 없다. 국경과 지역을 넘나들면서 전 세계에서 자유롭게 기업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의 정부들은 외국 기업이 자유롭게 전 세계에서 기업 활동을 하는 것, 특히 자국에 들어와 투자활동을 벌이는 것을 매우 반갑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경제의 발전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로 우리의 ‘삶’을 발전시켜주었는지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배층들이 만들어놓은 신자유주의 질서 속에서 기업들은 세계 곳곳에서 이윤을 뽑아내지만, 그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처지는 참담하다. 이윤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장이 폐쇄되면서 일자리를 잃고, 기술만 쏙 빼내가고 아무런 투자도 하지 않는 기업 때문에 한꺼번에 몇 천 명이 해고당하기도 하며, 주식시장에서 기업 가치를 올리기 위해 생산비용을 절감하려는 기업주 때문에 임금이 삭감되기도 한다.

이렇게 초민족적인 투기자본들, 그리고 그 기업들이 전 세계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해주는 지금의 체제와 환경은 기업의 주인들과 ‘가진 자’들에게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대다수 노동자들에게는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 노동자들의 삶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왜 그런 일이 생기게 되었고, 여기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어떻게 되어야 할지 고민해보도록 하자.





노동자들이 LA, 파리로 간 이유


 지난 1월 세계 최대 악기박람회인 남쇼(NAMM SHOW)가 열리는 미국 애너하임 컨벤션센터 앞마당에는 전단지를 돌리며 메마른 ‘투쟁가’를 토해내는 콜트악기와 콜텍 노동자들이 있었다. “노동자가 없으면 음악이 없고, 음악이 없으면 삶도 없다!”가 장단 맞춰 쇳소리로 터져 나온다. 인간의 본능을 처절하게 대변하는 음악들이다. 이 노동자들의 일터는 실상 2007년(콜텍 대전 공장)과 2008년(콜트 경기 부평 공장)에 문을 닫았다. 실직자들이 이역만리를 가는 까닭엔, 12시간 비행 거리만큼이나 긴 설명이 필요하다.

1970년대 세워진 콜트 악기와 자회사 콜텍은 세계 기타 생산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거대했지만, 2006년에 당기순손실을 입는다. 흑자경영 10년만이다. 2007~2008년 사이 국내 공장도 모두 문을 닫는다. 당시 콜트악기 쪽은 “경영적자와 노사 갈등 때문에 폐업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지만, 이에 대해 ‘위장폐업’이 아니냐는 사회적 여론이 거세다. 중앙노동위원회가 해고가 부당하다고 2008년 결정하고 2009년 법원 판결도 쏟아진다. 콜트의 해고 무효 확인 행정소송(2심)에서 노동자들이 승소하고, 민사소송(1심)에서도 “해고가 무효하며 원직 복직시킬 때까지 월평균 임금 등을 지급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판결이 나왔다. 콜텍 역시 지난해 11월 해고가 부당하다는 항소심 판결을 받았다. 복직투쟁 1100일이 다 되어가지만 회사는 뻔뻔하게도 모든 판결에 대해 항소 ․ 상고했다. 결국 회사의 노동자들은 20년 기타 제조 남성 숙련공의 한 달 치 월급을 훌쩍 넘는 200만 원 짜리 왕복 미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이런 ‘원정투쟁’은 급히 유행이 된다. 또 다른 무리가 1월 19일 프랑스 파리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발레오공조코리아(충남 천안) 해고 노동자들이다. 이들의 일터도 지난해 말 사라졌다. 프랑스에 본사를 둔 세계 3대 자동차 부품업체 발레오가 그룹 차원에서 결정한 사항이다. 그리고 이들이 돌아오는 2월엔 승림카본(경기 안산) 해고 노동자들이 한국을 떠난다. 회사 경영권을 쥐고 있는 독일의 다국적 자본 ‘슁크’가 노조와 갈등을 거듭하다 2007년 직장을 폐쇄한 것이다. 우유팩 제조업체인 페트라팩(경기 여주) 해고 노동자들도 2007년 스위스로 원정투쟁을 떠나 석 달간 천막농성, 단식투쟁을 한 적이 있다.

위에서 본 여러 노동자들의 사연은 다른 것 같아도 어딘지 닮아 있다. 자본 철수 이후, 생계는 물론이거니와 책임 ․ 윤리 경영 따위의 호소는 경영진의 귓등에도 닿지 않는다. 무엇보다 국내 경영진은 문제 해결 의지가 없거나 결정권이 없다. 권한 있는 경영진은 만날 수조차 없다. 그림자도 없는 ‘허깨비 자본’은 노동자를 철저히 무력화한다. 그 때문에 발레오공조 ․ 승림카본 노동자들은 결정권 없는 국내 경영진을 넘어 그들의 ‘주인’과 직접 만나고자 한다. 국내 자본인 콜트 ․ 콜텍의 노동자들은 외국의 거래처나 고객을 직접 만나 호소하려 한다. 국경을 넘는 자본의 이동이 자유로워질수록, 근로빈곤층(working poor)의 피할 수 없는 세계 여행도 일반화된다.



외국투기자본, 그게 뭐야?


 수십 명의 구속자와 수천 명의 해고자를 발생시킨 작년의 쌍용차 구조조정은, 외국 투기자본(줄여서 ‘외투자본’이라고 하기도 한다)의 문제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했다. 2004년 쌍용차를 인수한 상하이자동차는 투자는 외면한 채 기술 유출에만 몰두하다 경제위기를 빌미로 회사를 부도내 버렸고, 이후 법정 관리인에 의해 대규모 정리해고가 단행되었다. 상하이 자동차는 이후 검찰 조사에서 기술 유출 등의 범죄 사실이 확인되었지만, 한국 정부가 상하이자동차를 상대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현재 쌍용차는 인수자를 찾기 위해 저비용 생산 구조(저임금 고강도 노동 시스템)를 갖추기 위한 구조조정을 계속 진행하고 있다.

쌍용차만큼 여론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캐리어, 발레오공조, 위니아만도 등 초민족자본이 투자한 제조업 기업들에서 현재 자본 철수가 진행 중이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정리해고의 피해를 겪고 있다. 미국계 초민족 자본인 유티씨의 계열사인 캐리어는 몇 년째 시설투자는 하지 않은 채 수백 명의 노동자를 정리해고하며 영업망만을 유지한 자본 철수 절차에 돌입했고, 프랑스계 자동차 부품 업체인 발레오의 한국 계열사인 발레오공조는 아예 공장 폐쇄를 단행했으며, 초민족적 사모펀드 씨브이씨의 소유인 위니아만도는 자본철수 협박 속에서 노동자를 정리해고 중이다. 현재 구조조정에 대해 투쟁하는 곳 대다수가 초민족자본 투자 기업일 정도로 한국에서 초민족 자본의 문제는 심각한 상태이다.

자본의 자유로운 세계적 이동 때문에, 초민족자본은 한 나라에서 노동자들의 저항을 무력화하는데 유능하다. 노동자들이 정당한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면, 초민족자본은 떠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대응한다. 이들은 세계적 수준의 생산 네트워크를 보유함으로써 한 공장에서 문제가 생기더라도 다른 공장에서 생산을 대체해 버릴 수 있다. 기업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한다. 제어할 고삐가 없는 외투자본들은 밑바닥 경주(race to the bottom)를 벌이며 노동자들에 대한 공격을 전 세계적으로 확대한다. 기준이 엄격한 곳에서 저임금과 해고가 자유로운 곳으로 옮겨 다닐 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권리를 총체적 파괴하고 축소시키며 열악한 조건을 직접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외투자본은 국제적 경제 여건에 따라 공장 폐쇄와 이전을 아주 자유롭게 감행한다. 2008~2009년 세계경제위기에서도 볼 수 있었던 초민족 자본의 국제적 이동은 경제 조건이 어려운 지역에서는 과감하게 공장을 폐쇄하고, 새로운 시장이 열리는 곳에서는 현지에서 자본을 조달하고 본사의 자원을 집중하여 공격적으로 인수 합병을 하고 신규 공장을 건설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본 철수 협박 및 신규 투자 등을 조건으로 노동자들의 권리를 크게 빼앗는 것은 물론이다.

경제위기 과정에서 나타난 초민족 자동차 기업들의 사례를 보면 이들 기업은 하나같이 생산이 감소하는 곳에서는 정리해고 공장폐쇄 등의 구조조정을 감행하며 동시에 시장이 확대될 가능성이 있는 지역에서는 대규모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도요타, 지엠, 폴크스바겐, 혼다, 닛산, 포드, 피아트 등의 자동차기업을 비롯해 최근 국내에서 대규모 해고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캐리어 에어컨, 발레오공조 등도 앞에서는 위기인척, 뒤에서는 새로운 투자를 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더군다나 외국투기기업들은 충분하게 저임금 노동을 이용하며 노동법에 대해서도 특혜를 누린다. 바로 각국 정부들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다. 한국의 경제자유구역(FEZ), 아시아 및 남미의 수출가공구역(EPZ)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지역에서 기업들은 정부의 각종 자금 혜택은 물론 노동법을 면제받기도 한다. 한국에서 2002년에 제정된 경제자유구역법은 구역 내 초민족 기업들에 근로기준법과 파견법의 일부 조항들을 무시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으며, 도미니카공화국, 멕시코, 필리핀 등의 국가에서는 노조활동 탄압, 최저임금 이하의 임금 지불 등에 대해 정부가 눈을 감는다.

이와 관련해 남한 정부는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 ‘인베스트 코리아(Invest KOREA) 본부’를 설치해 개별 외국 자본이 투자하면 어떤 인센티브와 얼마만큼의 지원을 받게 되는지를 구체적으로 산정해 미리 알려주고 있다. 외국인 투자촉진법에 따르면 ‘외국 투자자가 출자한 기업’에 대해 조세․현금․입지 지원 등 각종 파격적인 인센티브가 주어진다.

지식경제부의 외국인 투자기업 정보에 따르면, 1월 현재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투기업은 1만7580개다. 이렇게 많은 외투기업에 관해 남한 정부는 무한한 지원만 제공할 뿐, 자본 철수 등에 뒤따르는 고용 문제 등에는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있다. 투자 유치에는 열심인 정부가 일방적으로 공장을 철수하고 떠나는 외투기업 현황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지식경제부 투자정책과 쪽은 “국내에 들어오는 외국인 투자 자본은 (각종 세제 혜택 등이 주어지기 때문에) 100% 신고하고 있고, 이를 분기별로 발표하고 있다”며 “그러나 자본 철수의 경우에 따로 신고하는 외국 자본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저 짐을 싸서 떠나버리면 그만인 셈이다.

이제 문제를 좀 더 근본적으로 생각해보자. 앞에서도 서술했듯이 많은 사람들은 외투기업들이 자국에 들어오는 것을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 이유가 뭘까? 바로 정부 및 지배층들이 유포하는 ‘경제 살리기’의 해법이 바로 투기자본들이 자유롭게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기업 활동을 하는 것이라는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 08-09 금융위기와 쌍용자동차 사태를 거치면서 그것이 해법이 아님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투기자본들이 자유롭게 전 세계에서 기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지금의 금융구조/금융화가 작년의 위기를 불러온 것이고, 자신의 이윤만을 위해 기술 유출만 하고 발을 빼버린 투기자본 때문에 2500여명의 쌍용차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발레오공조코리아, 페트라팩, 콜트․콜텍, 캐리어 에어컨 등등 수많은 기업들의 노동자들이 각각의 외투기업에 대항해서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작년 쌍용자동차 투쟁도 ‘상하이’라는 초민족적 투기자본에 맞선 싸움이었다. 이런 일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좀처럼 노동자들의 권리가 보장되는 방향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할까?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면서 많은 노동자들의 단결이 필요하다. 각각의 기업주에 맞서서 싸우는 것 뿐 아니라 전 세계 노동자들의 노동권과 생존권을 빼앗아가고 있는 외국투기자본 전반, 외국투기자본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지금의 신자유주의 금융화 체제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흐름을 만들어가야만 진짜 해결을 이루어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11월, 서울에서 G20정상회담이 열린다고 한다. 결국 이 회의는 심각한 문제들을 만들고 있는 투기자본들이 더욱더 활발하게 기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금의 위기상황에 맞는 새로운 시스템과 구조를 만들 것이다. 이렇게 계속되는 규제완화, 시스템 개선 등으로 결국 투기자본들이 더욱 활개 치게 된 것이다. 이 G20을 적극 유치하고 홍보하고 있는 정부, 그리고 이 기회로 우리 경제가 한 발 도약해야 한다며 환영의 손길을 보내고 있는 자본에 맞서서 지금의 금융화 질서에 대한 문제제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나가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앞서 나온 원정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문제, G20에서 논의될 사항 등을 지금 우리의 삶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으로 여긴다면 큰 오산이다. 갈수록 외국투기자본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가 나중에 근무하게 될 기업이 외국투기자본의 기업이 될 지도 모르는 일이고, 갈수록 심화되는 금융화 속에서 투기자본들의 이윤만 보장되고 우리의 권리는 야금야금 없어져 갈 것이다. 우리의 노동의 권리, 안정적인 삶을 살아갈 권리를 원한다면! 지금의 자리에서부터 실천을 시작해나가자.

투기자본들의 횡행,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G20-금융화 체제는 노동자서민의 권리는 안중에도 없이 현 체제의 체질개선을 통해 더욱 안정적으로 이윤을 보장하기 위한 체제에 불과하다. 기업들이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세계화가 아니라 투쟁하는 노동자,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대다수 서민들의 목소리가 반영되고 그/녀들의 권리가 보장되는 아래로부터의 세계화가 바로 우리의 대안이다. 초민족적 투기자본들이 노동자들의 노동권을 보장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만들고, 기업이 철수했을 때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보장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현재 시급한 과제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외국투기자본의 문제점과 외투자본이 노동자들의 권리를 파괴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자신의 공동체에서부터 알려나가고 주변 사람들을 설득해 나가는 것이 일차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Posted by 행진

2010/02/14 21:27 2010/02/14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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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의 무수한 죽음들을 ‘기억’하며

- 당대비평,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 서평 -

                                             


 노무현에 대한 대대적인 애도가 가리키는 것


 2009년 5월, 전 대통령의 자살이라는 사건은 한국 사회에 유례없는 충격과 반향을 가져왔다. 곧 광장과 학교, 지역마다 주요 역의 입구에 분향소가 차려졌다.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 그와 그의 정책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노무현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그가 부족한 게 있었다고 하더라도 상대적으론 존경할만한 대통령이었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노무현의 집권기에 죽어갔던 수많은 농민·노동자들을 기억한다면, 그 때 노무현을 비판했던 진보진영마저 무비판적으로 애도의 물결에 동참하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후자의 입장은 상대적으로 소수였고, 전자에 의해 죽음 앞에서 원칙만을 고수하는 냉혈한으로 비난받기도 하였다. 이 간극을 해결하기 위하여 ‘정치인 노무현’과 ‘인간 노무현’을 분리하여, 전자가 잘못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후자는 기릴 만 하다고 얘기하는 이들도 있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시기적 구분으로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을 가속화한 대통령 재임기의 노무현’과 ‘대통령 집권 이전에 노무현이 추구하였고, 지금 대중들이 그에게 투영하고 있는 가치들’을 구분하여 후자의 의미로 그를 애도하자는 주장도 존재했다.


 그러나 그 중 어떤 입장도 우리 앞에 벌어진 상황을 충분히 설명해 주지는 못했다. 사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이후에 만들어진 추모의 분위기 속에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과잉’이 존재했다. 한 필자의 표현대로 “실제로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그런 대통령 노무현을 대중들은 마치 갖고 있었다가 지금 막 상실한 것처럼 애도했다(정용택, 117p.).” 혹은 노무현과 자신의 처지를 동일시하며,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펑펑 흘렸다. 마치 마음껏 울 계기가 필요했다는 듯이 말이다. 나는 당시에 그의 죽음 자체보다도 죽음 이후에 있던 ‘거대한 울음의 행렬’에 더 놀랐다. 추모에 동참하고 있는 사람들 스스로도 예상치 못했고, 온전히 이해할 수 없던 흐름이었다. 그 추모의 열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시점(2009년 12월)에 출간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의 열 명 남짓한 필자들은 다시금 찬찬히 그 죽음과 추모의 의미를 되짚고 있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어떤 죽음이 대대적으로 애도될 때, 그것은 단지 죽은 자의 사회적 지위 탓으로 돌릴 수 없는 애도하는 자의 정치적 욕망이 투여”(서동진, 20p.)되어 있는 법이다. 그렇기에 이 행위가 옳은지 옳지 않은지를 따지기 이전에 ‘대체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지’를 돌아보는 것이 우리 사회가 위치한 자리와 나아갈 자리를 가늠하기 위해 더 유의미한 시도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노무현의 죽음 앞에서 ‘인간 노무현’에게 정서적 동질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2002년 대선 당시 그는 기존 한국 정당 정치에 대한 환멸의 정서를 대변했다. 상고 졸업, 농촌 출신, 민주화 운동, 인권 변호사, 통기타를 치며 상록수를 부르던 모습 등에서 대중은 기존 정치인과 다른 노무현의 ‘비주류 정서’에 공감을 표하며 ‘변화’를 기대했다. 그는 늘 그의 신념이나 정책 그 자체보다도 탈권위주의적인 언행으로 주목받아 왔다. 그리고 노무현에 대한 추모 분위기 속에서 부각되는 것도 다른 어떤 것이기보다는 이런 노무현 개인의 ‘통치 스타일’이었다. 때문에 ‘정치인 노무현(신자유주의자)’과 ‘인간 노무현(탈권위주의와 진정성)’을 분리해서 보려는 시도가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김원의 지적처럼 노무현의 이 두 가지 측면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노무현의 죽음 이후 인간 노무현과 정치인 노무현을 분리하자고 말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수준은 강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노무현 죽음 이후에도 반복되고 있다. 노무현이 내세운 정치 스타일은 (····) 한국 정치 위기의 다른 면이었다. 기존 보수 정치에 대한 불만과 반감을 지닌 대중은 한나라당과 민주당 보수 양당의 대안 이념 부재, 무능력과 부패 등에 부단히 실망했다. 그 실망의 틈에 등장했던 것이 노무현이었다. 하지만 그가 내세웠던 지역주의와 분열주의 반대, 도덕성, 서민성, 권위주의 역사 청산 등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대안적 정치 이데올로기로 작동할 수 없었다.

- 김원, <우리는 노무현을 지키지 못해 미안해야 하나?> 중에서, 65p.


 노무현 집권기의 실패는 노골적인 경제 대통령 이명박의 당선으로 귀결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명박 역시 나의 불안한 삶을 책임져줄 수는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집권 초기부터 이명박 정권이 보여주는 무능함과 치졸함, 몰상식함에 누구나 극도로 지쳐 있었다. 사람들에게 목 놓아 울 계기가 절실했다는 것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 시점에 갑자기 들이닥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은 ‘내가 붙잡을 수 있는 대안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막막함이자 울음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달라 보이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사람들을 움직인 것은 결국엔 모두 같은 원리였다.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는 현실 정치(때로는 노무현이었고, 때로는 이명박이었던)에 대한 반(反)경향’ 말이다. 다시 말해, 노무현의 죽음과 그에 대한 애도가 가리키는 것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시대에 한국 정치가 봉착한 ‘어떤 한계지점’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금 노무현의 인간적 스타일을 대체할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건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한계지점’을 넘어설 방책이 필요한 것일 텐데, 당장은 누구도 시원하게 그것을 제시해줄 수 없다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 그리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 국면 속에서도, 이 한계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애도의 공동체 속에 배제되고, 망각되는 이들은 누구인가?


 사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 이전에도 다른 무수히 많은 ‘죽음’들이 존재했다. 가장 눈에 띄는 사건은 2009년 초, 서울 한복판에서 공권력의 진압에 의해 여섯 사람이 불에 타 목숨을 잃었던 ‘용산 철거민 참사’일 것이다. 『아무도···죽음』은 용산참사의 기억을 불러와 전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비교하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우리는 두 죽음의 비교를 통해, 노무현에 대한 애도(나아가 김대중에 대한 애도까지도)가 갖는 성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2009년의 광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잠시 2008년 5-7월의 촛불의 기억을 떠올려보아야 한다. 촛불은 그 이전에 있었던 어떤 집단적인 저항의 모습과도 달랐다. 그것은 저항의 새로운 주체와 방식의 발견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성격이 매우 모호한 것이기도 했다. 이른바 ‘개혁 세력’의 집권기 동안 대중들은 역설적이게도 스스로를 주체화할 정치적 언어들을 잃어버렸다. “민주, 개혁, 진보, 노동··· 신성한 기표들의 훼절을 겪고 벌거숭이로 남겨진 대중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김성태, 141p.)” 촛불을 든 대중들은 ‘반MB’라는 모호한 정체성으로 묶여 있었고, 결국 몇 달 간의 집회 끝에도 이렇다 할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다시 뿔뿔이 흩어져갔다. 그리고 2009년 1월 20일의 용산참사. 김성태는 이 사건이 ‘촛불이 어디로 갈 것인가’를 가름하는 시험대(리트머스지)가 될 만한 것이었다고 얘기한다.


 그럼 용산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어떠했나? 참사 당일 저녁부터,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현장으로 달려가 가두시위를 벌였다. 촛불이 잦아든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론도 철거민 쪽에 우호적이었다.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희생된 이들이 매도당하지 않고, 공감해야 할 사회적 고통의 일부로 인지되고 받아들여진다는 것에서 ‘일단’ 안도(김성태, 145p.)”할 만 했다. 그러나 그것은 전 대통령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리며 광장으로 나왔던 사람들에는 한참 미달하는 것이었으며,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운동이 되지는 못했다. 그 이유에 대한 필자들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하나는, “그 불타는 몸은 너무 강렬하기에 시민이 공유할 수 없어서”라는 것이다. 일종의 축제이자 퍼포먼스였던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와 비교했을 때, 죽음에 직면한 결사 항전은 너무나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무엇에서든 유머를 필요로 하게 된 몸들이 되어버린 ‘개그적 소비 사회’의 시민들에게 쾌락 없는 투쟁이란 ‘참아줄 수 없는 진지함’에 다름 아니었다는 것이다.(김진호, 266p.)” 다른 하나는, ‘사유재산’이라는 자본주의의 질서, 혹은 ‘뉴타운’이라는 사람들의 욕망의 대상을 근본적으로 건드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절규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저런 희생은 질서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엄기호, 37p.)”이라는 인식이 용산에 대한 적극적 애도를 어렵게 만들었다.


 즉, “대중들은 용산을 의도적으로 애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외려 그것을 애도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부채감과 상실감은 무의식적으로 남아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노무현·김대중에 대한 추모 행위를 두고 “마땅히 애도되어야 할 대상이 애도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엉뚱하게도 바로 옆의 것이 누가 봐도 너무 과하게 애도되고 있다면, 그 과열된 애도 행위의 배후에는 정작 애도해야 할 것을 애도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슬픔이 감춰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김진호, 101p.)”고 분석하는 것은 (약간은 ‘과장’처럼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의미심장하다.


 책은 주로 용산참사와 노무현, 김대중, 그리고 그 죽음들에 대한 ‘사회적 기억의 비대칭성’을 다루고 있지만, 조금 더 크게 본다면 다른 것들도 눈에 들어오게 된다. 그러고 보면 2009년에는 참 많은 죽음이 있었다. 용산의 철거민들, 투쟁 중에 목을 맨 대한통운 특수고용 노동자 박종태 열사, 쌍용자동차 파업 중에 목숨을 끊었던 여러 노동자와 그 가족들... 그리고 다른 한 편에는 김수환 추기경·노무현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이라는 세 명의 지도자들. 전자의 죽음과 후자의 죽음에 사람들은 많이 다르게 반응했다. 이름도 권력도 가지지 못한, 진정으로 ‘평범한 사람’이었던 이들의 죽음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채로 빠르게 잊혀 갔다.


 사실 노무현 추모 정국 속에서 이처럼 애도되고 있지 못한 ‘다른 이들’의 죽음을 불러오려는 시도들도 존재했다. 엄기호는 이를 ‘초혼의 정치’라 명명한다. 죽은 자에 대한 애도 앞으로 같이 애도되어야 하는 죽은 자들을 불러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는 성공회대 교수의 이광일이 당시 참세상에 기고한 글이 그런 논지에서 쓰인 글이었다.


민주주의는 과거의 경력을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살아 움직이는 지금 이 순간의 부당한 관계들을 문제시하고 그것을 넘고자 하는 실천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죽은 노무현을 잡고 기억하는 것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 고통 받는 용산을, 특수고용 노동자들을, 이주노동자들을, 소수자를, 수탈 받는 환경과 생태의 아픔을 안고 함께 싸우는 것이 진정 그를 살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 이광일, <한 편의 ‘희극’이 ‘비극’으로 끝나다> 중에서, 2009년 6월 1일, 참세상


그러나 전 대통령들의 추모 의례는 이 죽음을 최대한 ‘충돌이 아닌 정상화(‘화해’라는 모호한 이름의)’로 수습하려는 경향이 더욱 컸고, 불편한 다른 죽음들, 평범한 이들의 죽음들은 초대받지 못한 채였다. 이 사실은 지금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준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책마저도 매우 비대칭적으로 죽음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책의 제목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임에도, 대부분의 필자들은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과잉된 애도’가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하는 데에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물론 그만큼 그 추모의 분위기는 놀라운 것이었으며,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불러오기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다. 많은 논쟁이 애매모호하게 마무리된 속에서, 노무현 추모정국을 이렇게 해석하려는 것은 매우 유의미한 시도이다. 그러나 ‘용산’보다도 더 기억되지 못한 다른 죽음들. 2009년에 죽어가야 했던 노동자, 농민들... 2009년 이전에도, ‘민주화 되었다던’ 그 시절, 노무현 정부의 집권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나 곧 잊혔던 수많은 이들.. 그 죽음들을 불러오는 것, 그들의 죽음이 왜 이렇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렸는지를 성찰하는 것, 그 과정이 부족해서 아쉬움이 남는다.



 정치를 만드는 데에 끊임없이 실패하는 우리들


 앞에서 짚은 한계와 연결되어 있는 또 하나의 쟁점은, 이 광범위한 애도의 행위가 참가한 사람들을 ‘정치적 주체’로 만드는 데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엄기호에 따르면 두 전직 대통령과 용산의 죽음을 가르는 그 ‘경계’야말로 우리 사회가 필사적으로 감추고 회피하려는 정치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경계를 넘는 것에 끊임없이 실패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사회에서 정치란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질서를 지키는 것-치안, 혹은 신자유주의 법치라 불리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문학 비평가인 권명아의 시선은 이 ‘광장에서의 애도’에서부터 올해 베스트셀러였던 책과 영화, 『엄마를 부탁해』와 『해운대』에까지 가서 머문다. (다른 필자인 정용택이 영화 『워낭소리』의 흥행에 관해 갖는 입장도 이와 비슷하다는 사실이 인상적이다) 그녀는 “죽음의 책임이라는 모티프가 촛불과 광장과 조문 행렬에서 극장가와 서점가로 이동”했다고 보고 있는데, 이것이 “삶에 대한 새로운 의식이나, 타자의 죽음과 나의 생존의 불가피한 의존과 관계성, 삶의 취약성에 대한 윤리적 의식의 자리를 만들지 못하고 있”(권명아, 74p.)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 매체들에서 각각 죽음을 다루는 방식이 ‘청소’를 통한 삶의 정상화(영화 『해운대』), ‘피붙이’의 죽음에만 감응하는 것(소설 『엄마를 부탁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상실감과 애도가 이처럼 정치적 주체화의 자리가 아닌 ‘다른 자리’에서 수행될 때, 우리는 무력할 수밖에 없으며, 폭력 시스템은 지속된다.


 신학 연구자인 정용택은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대중을 ‘우울증적 주체’로 명명한다. “우울증적 주체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알지 못하면서 그것에 대한 상실감에 시달린다.” 사실상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민주주의의 표상을 노무현에게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중들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잃어버린 노무현이 아니라 실은 민주주의의 부재” 그 자체이다. 문제는 이러한 우울증적 충동이 촛불집회나 추모 행렬과 같은 집합 의례의 형식으로만 남아, 현실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정도로까지 힘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는 2009년의 애도의 광장에 ‘종교’만 남았을 뿐, ‘정치’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124p.)


 필자들의 공통된 문제의식은 놀라울 정도로 과열되어 있었던 대중들의 ‘집단적 애도·추모 의례’가, 이상하리만치 ‘정치’로 이어지지는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마치 2008년 촛불집회 때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리고 나아가 2009년의 수많은 죽음들을 가르는 ‘경계’를 가리킴으로써, 우리의 실패가 무엇 때문인지를 밝히고 있다. 여기가 바로 죽음들에 대한 ‘사회적 기억의 비대칭성’이 연유하는 지점이다. 우리를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어쩌면, 2003년, 잇따른 노동자들의 죽음 앞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던졌던 말, “분신으로 투쟁하는 시대는 갔다. 이제는 민주화된 시대가 아니냐.”하는 논리인 것은 아닐까? 20년에 걸친 ‘민주화 시대’와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의 교직(김성태)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87년의 그 자리에 멈추어 방황하고 있다. 대안 없는 위기의 시대, 여전히 ‘또 다른 구원자’나 ‘대변자’를 갈구하는 눈물을 흘리면서(김원) 말이다.



 이 불안한 세상을 바꾸기 위해 필요한 과정들


 『당비의 생각』 시리즈가 매번 그렇듯이, 이 책 한 권 안에도 통일될 수 없는 다양한 입장들이 존재한다. “(앞으로)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에 있어서는 특히 그렇다. 그 중에서도 가장 구체적으로 진보진영이 해야 할 바를 서술하고 있는 것은 박동천의 글인 <노무현 이후의 한국 정치를 생각한다>라고 하겠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이 말하는 바가, 앞의 다른 글들이 열심히 분석한 것들과 묘하게 어긋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우선은 그의 ‘진보진영’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명박·한나라당으로 표상되는)보수진영’ 대 ‘(노무현·김대중을 포함하는)개혁진영’으로 틀지어져 있다는 것이 그렇다. 이러한 오래 된 구도 속에는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애도가 과연 무얼 말했던 것이고, 무엇을 말하지 못했던 것인지에 대한 성찰은 보이지 않는다.


 “현재 한국의 진보에는 대안이 없는 것이 탈이 아니라 너무나 많은 것이 문제”라는 말에는 나도 동감한다. 그러나 바로 이어, 그렇기 때문에 이제 “무수히 불거져 나와 있는 제안과 묘안과 비책과 처방들을 어떻게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엮어 낼 것인가(박동천, 257p.)”가 중요하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힘들다. 인물 중심의 정치로 국회의원 선거에 대비하자는 것도 그렇다. 다른 필자들이 짚고 있는 맥락에서 보았을 때,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더 정교한 정책 대안’이나 ‘서민을 대리해 줄 다수의 국회의원들’은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수많은 물음들이다. 민주화 20년이 이명박 정부의 탄생으로 귀결되었고, 이명박 역시도 대안이 아님이 판명되었다면, 이제는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가? 무엇이 바뀌어야 내 삶이 나아질 수 있는가? 08-09년 그렇게 많은 이들이 광장에 나왔음에도, 왜 그 경험이 스스로의 삶을 바꾸고 세상을 흔드는 ‘정치’가 되는 데에는 실패하고 있는가? ‘정치’를 만들기 위해 나는 나의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 등등..


 우리의 아픔이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지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지금 우리에게 부족하다. 손쉽게 대안을 만들어내는 일보다도, 이 아픔의 ‘보편성’을 설명할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더욱 절실하다. 노무현을 ‘아름다운 순교자’나 ‘서민의 대변자’로 불렀듯이 또 다른 구원자나 대변자를 필요로 할 때에 그 시도는 필연적으로 실패에 이를 것이다. “진정 필요한 건 구원자가 아니라, 새로운 정치를 구성하기 위한 자기 조직화이다.(김원, 67p.)” 그리하여 '진짜 평범한 사람들'의 죽음을 우리의 아픔으로 느끼며, ‘이제 그만!’이라고 외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에게 다른 세계가 가능해질 것이다.


 2009년, 우리는 한 시대의 종언을 목도했다. 그러나 어떤 세계가 시작될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이 폐허 같이 불안한 세상에 ‘맨몸’으로 각자 부딪히며 살아야 하는 걸까? 그런 삶은 서러운 울음을 동반하는 것이거나, 어떤 계기가 오기까지 울음을 꾹꾹 눌러 참는 그런 것 밖에는 될 수 없지 않을까? 『아무도··죽음』은 이 불안한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인상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2010년대를 시작하며,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Posted by 행진

2010/02/14 21:11 2010/02/14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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