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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2/16 [35_후기] 2010 전국대학생대회 by 행진
  2. 2010/02/14 [35_정세동향] 누구를 위한 '더 나은 세계'인가? : 다보스포럼을 통해 본 세계경제 by 행진
  3. 2010/02/14 [35_이슈&쟁점] 국경없는 자본이 정말 우리의 '삶'을 발전시켜 줄 수 있을까? by 행진
  4. 2010/02/14 [35_서평아카이브] 2009년의 무수한 죽음들을 '기억'하며 by 행진
  5. 2010/01/15 [34_발간사] 자아도취에 빠진 정권에 맞서는 2010년을! by 행진
  6. 2010/01/15 [34_정세동향] 중앙대 메가톤급 구조조정,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by 행진
  7. 2010/01/15 [34_이슈&쟁점1] 이명박 신년연설을 통해 본 2010년 예상도 by 행진
  8. 2010/01/15 [34_이슈&쟁점2] 새해 첫날에도 멈추지 않는 노동자 탄압 -노조법 통과에 부쳐- by 행진
  9. 2010/01/15 [34_이슈&쟁점3] 장례를 치러도 용산참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by 행진
  10. 2009/12/19 [33호_발간사] 이명박 당선 2주년을 맞으며 by 행진
  11. 2009/12/19 [33호_입장/성명] 12월18일 세계이주민의 날에 부쳐 by 행진
  12. 2009/12/19 [33호_이슈&쟁점1] 2010년도 학생회 선거 부정 및 파행 사태를 돌아본다 by 행진 (1)
  13. 2009/12/19 [33호_이슈&쟁점2] 노동자, 노조 탄압에 맞서 함께 싸우자! by 행진 (1)
  14. 2009/12/19 [33호_서평아카이브] 지금 내리실 역은 ‘생태위기역’입니다 by 행진
  15. 2009/11/24 [서평 아카이브] <Hi 마르크스, Bye 자본주의> by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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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_후기] 2010 전국대학생대회

  지난 2월 9, 10일 이틀에 걸쳐 중앙대학교에서 "전국대학생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교육투쟁, 정세전망, 대중운동사례발표, 새내기마당, 페민스쿨, 문예마당 등 총 6개의 다채로운 주제로 열린 이번 대학생대회에 전국에서 수백명의 대학생들로 강의실은 발디딜 틈이 없었답니다.^^ 참가자들이 각 주제 별로 참가 후기를 보내주셨으니 그 뜨거웠던 토론의 현장을 직접 느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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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마다 학기 초가 되면 등록금 투쟁으로 온 학교가 떠들썩하지요. 물론 등록금 문제는 이 땅의 서민들을 힘들게 하는 교육비에 대한 문제제기로 의미가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공약도 한 만큼, 살인적으로 치솟는 등록금 문제를 정부가 가장 앞장서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공감해요.
  하지만 대학을 둘러싼 사회의 변화는 단지 등록금만을 문제로 만드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다니는 중앙대만 하더라도 경쟁력 없는 학과를 퇴출시키고 오로지 우리 사회에서 '돈이 될' 것 같은 학문 만을 육성시키는 대학 구조조정이 진행 중이거든요.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하기 위해 열심히 학교를 다닌 것 뿐인데, 학교는 경쟁력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멀쩡한 학과를 없애버리고 있습니다. 너무 억울하다고 이야기하는 학우들을 곁에서 지켜보며 저도 마음 한구석이 편하지 않았지만, 그런 제 마음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서 뭐가 잘못 되었는지 잘 깨닫고 있진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번 대학생대회 교육투쟁마당에 함께 하면서 제가 평소에 고민하면서 답답했던 부분이 뻥~ 뚫린 것 같았어요. 학교 측의 일방적인 행정 때문에 분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대학이 어떤 역할을 요구받고, 또 교육을 어떻게 상품화하는지 보다 체계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달까?^^; 그래서인지 이제는 다른 학우들에게 대학 구조조정을 이야기할 때, '이래저래서 우리가 하는 일이 정당한거야'라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등록금 문제를 넘어서서 모든 사람들에게 '교육'이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하는지 새로운 고민이 들기도 했구요. 이번에 배운 걸 바탕으로 올 한해 중앙대 대학 구조조정 반드시 막아낼거예요~!!!




  올해도 들뜬 마음으로 전국대학생대회에 전일참가 했습니다! 작년, 그러니까 2009년 전국대학생대회에서 얻었던 ‘아, 대중운동은 이렇게 하는 거구나!’ 라는 느낌, 제가 활동하고 있는 공간에서 사업계획을 짤 때 09년 자료집을 뒤적뒤적거리며 마스터플랜을 짜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나면서 올해도 역시 부푼 기대를 안고 달려갔습니다!

  전국대학생대회가 진행되는 이틀 동안 날씨는 흐리고 비가 왔었고, 중앙대학교는 학과 구조조정 때문에 학내 곳곳에 플랑이 나붙어있었습니다. 2010년의 시작이 이만큼 어둡고 답답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메인마당인 정세토론에서 나왔던 자세한 설명들을 통해 저의 이러한 느낌을 비교적 잘 정리해 볼 수 있었습니다. 6월 지방선거가 다가오는데... 지겹게 들었던 “그래 알았다. 그래서 투표할거야? 안 할 거야?”라는 질문. 바로 그 지점에서 ‘운동’의 프레임을 확장할 수 있는 의회주의에 대한 시각이 가장 와 닿았습니다. 시민운동에 관한 이야기는 다소 어려웠지만, 그곳에서 오갔던 어떤 거대한 이야기들은 사실 바로 ‘내가 몸담은 학생사회, 즉 과/학회/동아리에서부터 친구들과 함께 학습하고 토론하며 정치를 복원해나가자!’는 것이었고,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뿌리 깊은 질문에 어느 정도 답해줄 수 있었습니다.



  대중운동 사례발표에서 나왔던 조건과 상황이 각각 다른 3개 대학의 사례들을 보는 것이 현재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내용을 정리해보는 것은 필연적인 것 같습니다. 09년 각 캠에서의 대중운동들을 통해서 과거의 문제의식과 실천들을 돌아보며 현재의 상황에 맞는, 그리고 과거의 편향성을 경계하면서 만들어져가야 할 새로운 운동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또한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서 모범적이고 긍정적인 사례들을 단순히 되풀이하거나 반복하는 것이 대중운동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는 전제하에 각 사례들에 대한 명확한 진단과 전망들을 도출해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각 3학교의 대중운동 사례 모두 중요하지만 특히 눈여겨보았던 것은 성균관대의 사업이었습니다. 이는 대구대 캠의 사회과학대학과 비슷한 상황이라는 동질감이기도 했지만, 박제화되고 침체되고, 형식적인 ‘학술제’에 대한 실망과 함께 훌륭한 자극이 되었습니다. 팀을 구성하고 단 학회 단위별로 제안하고 충분한 참여를 이끌어 낸 것 또한 대구대 캠의 흐름을 만들어 내는 좋은 롤모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후 학내에서의 교육투쟁, 페미니즘, 대학사회라는 의제를 기반으로 한 사업들을 통해서 경제위기의 원인에 대한 진단, 학내 반성폭력 운동의 동의지반, 자유주의적 각 개편들에 대해서 대중들과 소통되고 함께 기획될 수 있는 장을 만들어내는데 있어 여러 가지 가능성등을 모색할 수 있는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연세대 문과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진영이라고 합니다! ^-^
지난 9,10일 처음으로 전국대학생대회에 참여했습니다. 많은 것을 배워가고 싶다는 생각에 무척 설레는 마음으로 왔지만, 아직 많이 부족한 저에게 첫날 2010 교육투쟁과 정세토론은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제 2학년으로 올라가는 만큼 단순히 자신에게 주어진 내용을 학습하는 것뿐만 아니라 본격적으로 대중운동 실력을 쌓고 활동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대중운동실력쌓기 텀을 기대하며 두근두근했습니다. 페민스쿨과 문예마당도 정말 참여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ㅠㅠ; 한 가지밖에 택할 수 없기에 2학년이 되는 활동가들에게 가장 필요할 것 같은 <새내기를 맞이하는 2010가지 방법>에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학내에서 속해 있는 단위들에서 새내기맞이 준비를 한창 하고 있는 중이기는 하지만, '활동가'로서 새내기를 맞이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 제게 2010가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새내기맞이에 대해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 주는 시간이었습니다.

  사실 막연히 '밥 좀 사주고 같이 놀아주고 예뻐해 주다보면 어떻게든 되려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새내기맞이의 A부터 Z까지 시기별로 정~말 상세히 설명해 놓은 자료집과 발제를 통해 비로소 방향이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써있는 대로만 하면 진짜 잘 될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노력도 정말 많이 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
  발제 후 자유롭게 생각을 발언하는 시간에서는, 전국에서 온 동지들의 수많은 고민과 상황 공유가 이뤄졌습니다. 각자 자신이 속한 단위에서 겪은 어려움, 느꼈던 희망, 앞으로의 계획을 함께 나눴습니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고민에 어느 정도 해답을 얻어 가고, 앞으로의 활동의 비전을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양한 사례를 들을 수 있어서 과/반/동아리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 노력하는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조금은 딱딱했던 공통마당, 메인마당에 비해 좀더) 소박하게 서로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중간에 논의가 산으로 가버린 아까운 시간을 보냈던 대중운동 사례 발표 시간의 아쉬움도 풀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새내기를 맞이하는 2010가지 방법>을 통해 많은 것을 얻긴 했지만, 그래도 새내기들을 맞이하는 일은 분명 무척 험난한 길일 거란 생각이 드네요. 많이 부딪히고 속상한 일도 많이 겪겠지만, 올 한 해 정말 열심히 살아가려 합니다. 2007년에는 연세대에서 자기 혼자서만 반 신자유주의 선봉대에 전참했는데 2년 만에 이렇게 많은 동지들이 함께 하고 있는 걸 보라고, 너도 더 많은 사람과 함께 할 수 있게 노력해 나가라고 말했던 같은 캠 선배의 말이 자주 생각나는 요즘입니다. 점점 사람들이 떠나고 약해지고 있는 기층단위들을 다시 세우려고 매일 바쁘게 살아가는 삶에서 크게 보람을 느끼고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역시 걱정보다도 토끼 같은 새내기들을 만날(♡), 그리고 이제 정말로 선배가 될 기대와 설렘이 훨씬 큰 것 같습니다:) 함께 하는 모든 동지들과 함께, 힘차게 달려가는 2010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09년에 처음 새내기를 만나면서, 제일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 페미니즘이었습니다. 새내기들 3명이 모두 재수생 남자아이들이었고, 덕분에 동아리 구성원들은 전체적으로 비상이 걸렸었습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 당시 페미니즘을 09학번들에게 어떻게든 '각인'시키려는 노력은 너무 강압적으로 진행되었고, 덕분에 새내기들은 페미니즘에 대한 필요성은 알겠어도 페미니즘을 삶으로서 접하기보다는 너무 어렵고 까다로운 것으로 기억하게 된 듯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번 페민스쿨은 '미리 접했더라면...'하고 생각할 만큼, 잘 짜여져 있었습니다. 09년도에 저의 페미니즘은 <'사적인 페미니즘'='일상' Vs. '공적인 페미니즘'='연대와 학습'>라는 부당한 대립각 속에서 많은 질곡을 겪곤 했습니다. 이번 페민스쿨은 그 대립각을 적절히 깨는 내용으로 이루어져있었습니다.

  그 동안 페미니즘과 관련된 기획이 '세미나'나 '회의'에서 그치고, 일상에서의 '이야기'로 보충되어왔던 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페민스쿨은 일상의 것을 어떻게 공론화하여 개인에 대한 지탄이 아닌 전체 공동체가 같이 사고해야 할 고민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다양한 방법에 대하여 적절한 예시를 보여주었습니다. 가족과 노동의 경우, 어렵다고 판단되어질 수도 있겠지만, '변혁의 무기로서의 페미니즘'으로 여타 페미니즘의 의제들을 포괄하며 활동에 대한 의욕이 있는 새내기들에게는 다른 부분보다 더 쉽게 페미니즘을 접하게 되는 출발점이 됩니다. 특히 제가 만난 남자 새내기들의 경우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을 가족과 노동을 통해 확장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연애' 와 관련된 부분은 특히 신선하게 다가왔는데, 현재의 공동체가 암묵적으로 규정하는 공동체 내 연애에 대한 '금지'나 '두려움'이 아니라, 어떻게 포괄적인 페미니즘적 인식 속에서 어떻게 대안적인 연애를 만들어가는 공동체가 될 지에 대한 기획들을 제안하는 글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페민스쿨은 다양한 기획과 논의를 제안함으로써 새내기를 페미니즘으로 만나는 것이 어렵고 까다로운 일이 아니라 즐겁고 기대되는 일로 만들어주었던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좀 더 활기차게 페미니즘을 활동 속에 녹여내서, 내년에 페미니즘을 즐겁게 사고하는 새로운 새내기들과 함께 페민스쿨에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10 대학생 대회의 대중운동 실력 기르기 마당은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새내기를 맞이하는 방법, 페민스쿨, 그리고 문화제 기획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캠에서 문화제의 기억이 많지가 않았고, 그것을 기획하는 것에는 어떤 과정들이 필요하며, 어떤 아이디어들을 펼칠 수 있을지 궁금해서 문화제 마당에 갔었습니다. 새내기 마당이나 페민스쿨에 비해서 사람은 적었지만, 소수 정예로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발제를 듣고, 모여서 나름의 기획 회의들도 했었답니다.
  왜 문화운동만이 아니고, 문화와 예술이 같이 들어가 있는 문화예술운동인지에 대한 내용부터 문화제 기획의 실제와 예시가 결합된 것을 보면서, 어떤 생각으로 계획을 내야 하는지 살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서로가 겪었던 문화제의 기억들을 공유도 해보고, 좋았던 기억들뿐만 아니라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야기해보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마지막에는 실제로 문화제 마당에 있는 우리가 기획해보는 기회도 만들었었는데, 20~30분에 모든 계획을 다 하려고 하니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고, 무엇부터 해야 할지 머리가 하얗게 되기도 했었습니다. 3.8 문화제, 해오름제, OO인의 밤 등등 여러 문화제 소스들이 있었고, 그 중에서 하나씩 택하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서로 모여서 기획 의도, 목적, 마스터플랜, 심지어는 문화제 외의 사업들(문화제의 기억들을 모을 수 있는 것)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번 마당을 겪으면서 배우고 생각했던 것은 문화제 기획은 거창하지 않고, 기본적인 부분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진행하는 사업들을 하는데 앞서 가장 먼저 하는 목적을 세우는 것, 의도는 무엇인지 고민하는 부분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겁니다. 문화제 기획을 통해서 문화예술운동이란 무엇이며, 문화제를 통해서 많은 건강한 기억들을 남기는 데에 자신감이 붙은 것 같아서, 대학생 대회 시작할 때 많은 무기들을 만들어 가자는 이야기 중 어느 정도는 달성했다고 봅니다. 모두 그 날 배우고 느꼈던 것으로 대중운동의 바다에 뛰어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행진

2010/02/16 19:32 2010/02/16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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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더 나은 세계’인가?
 : 다보스포럼을 통해 본 세계경제




1. 들어가며 : 다보스포럼과 이명박은 세계 경제를 구원해줄 수 있을까?


 얼마 전 스위스 다보스에서 세계경제포럼이 열리는 기간 동안 [한국 대통령이 다보스서 제일 먼저 연설한 이유], [‘자유시장주의 철옹성’ 다보스 무너지다!] 등의 세계경제와 다보스포럼에 관련된 기사들이 연일 신문들에 주요하게 다뤄지며 보도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다보스에서의 이명박 대통령의 행보를 다룬 인터넷 포털 싸이트 기사들 아래에는 어김없이 네티즌들의 비난 리플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어이없게 다보스포럼에 이명박 대통령이 자신의 큰딸과 손녀를 데리고 갔다더라’ ‘한국에서처럼 국정수행을 졸속적으로 처리하고 왔다더라’ ‘국제무대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외모가 부끄럽다’는 등의 내용들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번 사안에 관련된 기사들에 대한 반응은 기존의 이명박 대통령과 관련된 다른 기사들에 대한 반응과는 확연하게 다른 지점들이 있었다. 가장 많이 찬성을 받은 리플은 대체로 ‘세계경제위기의 심각함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한국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그런 중요함도 모르면서 그저 이명박 대통령을 비난하는 무지한 네티즌들을 나무라는 식이었다. 물론 누구나 인지하듯 현재 세계경제는 정말로 위기이지만, (비록 비난의 내용이 올바르지는 않았다하더라도)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불만과 그로 인한 비난은 잘못된 것이었을까? 그리고 이명박 정부와 다보스포럼의 각국 정부들은 정말 세계 경제를 구원하려는 것일까? 경제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세계정상들은 수많은 노동자 서민들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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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에 들어가기에 앞서 결론부터 밝히자면, 2010년 다보스포럼에서 다뤄진 방향으로는 세계경제의 위기를 극복할 가능성이 무척 낮다는 것이고, 설령 극복이 가능하더라도 상층부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수많은 사람들이 경제위기 극복 시도 속에서 희생양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 글은 다보스포럼에 이어, 11월 서울 G20 회의에서도 다뤄질 (한국을 비롯한) 세계정상국가들의 위기극복전략이 어떠한 것인지 알아보고, 그것을 적확하게 비판하기 위해서 쓰였다. 아무쪼록 이 글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 정부와 다보스포럼, 그리고 앞으로 G20 등에서 다뤄지는 ‘그들만을 위한’ 경제위기극복전략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공유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리고 그를 기반으로 앞으로 더 많은 이들과 함께 ‘대안’을 토론하고 이야기해나갈 수 있었으면 한다.




2. 2010년 다보스포럼에서의 ‘금융규제 논의’와 ‘이명박 대통령의 특별 연설’


2.1. 2010 세계경제포럼의 가장 큰 화두 : 금융규제

 얼마 전, 1월 27일부터 31일까지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은 ‘더 나은 세계: 다시 생각하고, 다시 디자인하고, 다시 건설하자’라는 슬로건 하에서 진행되었다. 학계․정계․재계의 유명인사들 2500여명이 참가한 올 해 ‘다보스포럼’의 핵심의제는 금융규제방안이었다. 특히 정치권 인사들을 중심으로 금융규제에 대한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개막연설에서 “은행가의 할 일은 투기가 아닌 기업대출로 경제성장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하는 것”이라며 “금융업계가 과도한 이윤 추구와 보너스를 지급하는 것에 대해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국제 금융 시스템을 개편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특별연설을 해서 이슈가 되었던 이명박 대통령도 금융기관들의 대마불사(바둑에서 대마는 결국은 살길이 생겨 쉽게 죽지 않는 일, 부실한 금융기관들이 인수합병을 진행하며 규모를 키워 살아남게 되는 일)에 대한 비판과 함께 글로벌 금융안전망을 구축해야 함을 이야기했다. 정치권 인사들뿐 아니라 금융계에서 엄청난 부를 쌓은 소로스 회장(소로스 펀드 매니지먼트)도 금융계를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며, “구체제는 깨졌다. 국제공조를 할 수 있는 글로벌 금융 시스템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금융위기를 사전에 예측해서 유명세를 탔던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도 “금융기관들의 이른바 대마불사 신화는 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과거 다보스포럼에 참석해서 크게 주목을 받아왔던 미국계 초국적 금융기업의 수장들은 대부분 다보스에 아예 오지도 않았다.

 반면 영국 금융기관 로이즈 로드 레빈 회장은 “금융규제 개선은 필요하지만 더 이상 규제는 안 된다”며 금융기관의 입장을 표명했다. 영국 바클레이스 은행장인 로버트 다이아몬드 역시 “은행을 규제하고 은행 업무를 축소하는 것이 글로벌 금융 시스템을 개선시킬 수 있다는 근거는 찾아볼 수 없다”며 금융규제 강화 의견에 반대했다. 구체적인 성과는 없었다. 비공개로 이루어진 회담에서도 새로 만들어질 규제가 전 세계적으로 균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원칙만 확인했을 뿐이다. 그 외에 주제에는 선진국과 개도국의 균형 발전,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줄기차게 이야기했던 아이티 재건을 지원하는 사안, 전 세계적인 실업률 상승, 경기회복 둔화 등이 다루어졌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가장 큰 화두는 금융규제에 대한 발언들과 그에 반발한 금융기관의 입장들의 충돌로 볼 수 있다. 다보스포럼에 참가는 하지 않았지만 오바마 미국 대통령 또한 얼마 전 강력한 은행 규제책을 시사하며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분리를 해야 한다고 발언했고 실제로 정책적으로 옮기려고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2010년 세계경제에서 앞으로 가장 큰 화두는 금융규제에 대한 논의가 될 것으로 보인다.


2.2. 다보스포럼에서 이명박의 단독특별연설 : G20과 글로벌 금융안전망 구축

 아시아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올해 11월 G20 정상회의 의장을 맡게 된 이명박은 ‘서울 G20 정상회의, 주요 과제와 도전’이란 제목의 연설을 통해 서울 G20 정상회의의 3대 기본방향을 제시했다. 그와 동시에 일명 조중동을 비롯해서 수많은 일간지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스위스에서 한국의 국위선양을 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에 알려내느라 분주했다. 언론들은 한국이 아시아 최초의 G20의장국이 되었기에 한국 대통령 최초의 다보스포럼 단독특별연설이 가능했다는 것 등을 부각해서 보도하며, G20과 함께 세계적으로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다며 자축했다. (모 경제신문에서 말했듯) 이제 정말 한국은 아시아의 맹주에 올라갈 수 있을 만큼 급이 올라간 국가가 된 것일까? 일단 이명박 대통령이 행한 특별 연설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연설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1. 지난 세 차례 G20 정상회의에서 합의한 사항의 철저한 이행 2. 글로벌 금융안전망(GFSN) 구축 3. 비회원국을 대상으로 한 G20 범위 확장이 그 내용이다.



앞으로
G20 합의사항을 철저히 이행하겠다는 것은 G20에서 단순히 논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세계경제에 대한 강력한 법칙을 만들어내는 곳으로 G20의 위상을 위치 짓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기존 G8 정상회의로는 금융위기에 대한 극복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아시아 및 신흥개도국을 포함해서 세계경제를 이끌어갈 주요한 테이블로서 G20 정상회의를 사고하게 된 현실을 나타내준다. 그러므로 앞으로 G20에서 논의되는 내용들은 G20에 포함 되는 국가를 넘어 실제로 전 세계 경제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고, 이는 앞으로 G20의 논의가 세계의 수많은 노동자 서민들의 삶에도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비회원국을 대상으로 한 G20 범위 확장을 시도하겠다는 것도 실제로 G20에서 논의되는 내용들이 세계경제에 가지는 큰 파급효과를 고려해보았을 때 (비회원국에 대한 포섭과 함께)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 글로벌 금융안전망 구축은 08년 금융위기 이후 상시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된 세계금융시장에 안전망을 만들겠다는 것인데, 이는 얼마 전 오바마 대통령의 강력한 은행규제책에 대한 발언과 비슷한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그러나 국가를 넘어 고도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세계금융시장에서 안전망 구축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실현가능성은 차치하더라도) 금융위기극복을 위해서 미국의 루비니와 같은 경제학자들은 은행들의 겸업화를 일정부분 해체하고 국유화하자는 방향을 냈으나, 오바마 정부에서 현재 실행하고 있는 방향은 앞의 방향에도 미달한다. 현재 오바마 행정부의 개혁 방안은 위기를 불러온 금융자본의 지배구조 자체에 대한 변화가 아니라, 위기에 처한 금융자본에 대한 지원책에 불과하다는 평이다.1) 앞으로 이러한 오바마 정부의 개혁방안에 대해서 더 주시해보아야겠지만,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를 비롯해서 한국의 이명박 정부 등이 G20 정상회의에서 제기 할 글로벌 금융안전망 구축은 자본주의 경제의 총체적인 위기 속에서 그리 큰 효과를 내지 못할 것으로 예측된다. 분명 G20이라는 세계경제를 움직이게 될 큰 배에 이명박 정부가 타게 된 것은 맞지만, 문제는 그 배가 대체 어떤 배냐는 것이다. 과연 이 배가 서서히 침몰하고 있는 배인지, 아니면 앞으로 잘 나아가게 될 배인지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3. 현재 세계 경제는 어떠한 상황인가?


 다보스포럼에 모인 이들은 대체로 세계경제위기에 대해 ‘느린 회복’을 전망했다. 그러나 헤게모니 국가인 미국의 경제회복은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다. 작년 한 해 동안 집중적으로 경기부양책을 편 효과로 미약하나마 회복세를 보이고 있지만, 여기에는 여러 부정적인 변수들이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쌍둥이 적자의 문제가 있다. 동아시아 수출달러 환류-발권이익 메커니즘2)을 통해 소비와 투자를 늘릴 수 있었던 미국은 과도한 부채에 시달리면서 수입을 줄이고 있는데, 미국 이외의 국가들의 경제는 미국보다 더 나빠져 대외수출 역시 줄어들고 있다. 최근 정부지출이 늘어나면서 재정적자 역시 심각한 상황이다. 경기부양책이 경제성장률에 미치는 효과가 감소하는 2010년 후반이 특히 위험할 것이다. 미국 연준은 올해 경제가 완만하게 성장할 것이라 했고, IMF는 더블딥의 위험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폴 크루그먼과 같은 경제학자들도 더블딥 위험이 결코 작지 않다고 경고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 이유로 신규 일자리 창출이 늦춰지면서 소비가 약화되는 점, 신용경색으로 여전히 자본 투자가 많지 않은 점, 과도한 재정적자에 따른 경기부양책 지속 여부 불투명 등을 꼽았다. 작년 금융위기의 여파는 아직 가시지 않았다. 결국 경제가 V자형태로 신속하고 활발하게 회복될 가능성은 별로 없고, U자형(느린 회복), L자형(장기침체), W자형(더블딥) 중의 하나이거나 이들의 조합이 될 것이다. 최근 주택담보 대출금을 갚지 못하는 사태가 늘고 있고, 우량 담보대출의 경우에도 제때 상환하지 못해 집을 압류당한 비율이 지난 3분기에 무려 10%에 달하고 있다. 여기에 역사상 최악의 실업사태까지 겹쳐지면서 장기침체에 가까운 느린 회복과정을 밟을 것이다. 기업이윤이 획기적으로 증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러한 불안요인들이 겹쳐지고, 기업과 금융기관들의 추가부실까지 더해지면, 2차 금융위기가 도래하고 이것이 더블딥으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 현재 대형은행 부실 이후 중소규모 은행의 부도가 이어지고 있고, 미 연방예금보험공사가 문제은행으로 지목하고 있는 은행만도 500개 이상으로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3) 물론 단기간 안에 더블딥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겸업은행체제(상업은행+투자은행)의 성행, 정보기술산업과 최근 주목받고 있는 녹색산업에서, 또 주택시장에서 거품이 형성되고 붕괴될 경우 결코 만만치 않은 경제위기로 돌아올 것임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이러한 전 세계적인 불안은 얼마 전 그리스에서 발발한 정부 재정위기가 글로벌 더블딥의 기폭제로 작용할 수 있다는 예상들이 제출되며 더욱 증폭되고 있다. 그리스를 비롯한 스페인, 이탈리아 등 일부 유로존 국가의 재정악화 문제는 심각한 상황인데, 재정적자뿐 아니라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에 허덕이는 이들 국가의 국채를 가장 많이 보유한 것이 프랑스 독일 등 유로 지역 선진국 금융회사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 등이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선언하면 유럽 지역 은행들까지도 동반 부실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유럽 전역을 공포에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이는 금융위기 및 경기침체에 대응하기 위한 재정 지출 확대와 경기침체로 인한 조세 수입 감소 등으로 09년 이후 유럽 각국의 재정수지가 급격히 악화되었을 때 이미 점쳐진 현상으로 전 세계 경제 상황에 엄존하는 불안요소를 방증한다.

 세계 경제의 침체와 동요는 전반적인 현상이지만 아시아와 남미 등 신흥국에서는 지난 금융위기로 인한 타격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고, 이후에 경기하강속도가 완화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G20 정상회담이 프리미어 포럼(가장 중요한 논의의 장)으로 격상된 것 역시 세계경제에서 신흥국이 차지하는 위치가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로 세계경제를 위기에서 구원할 ‘동력’이 될 수 있을까? 초민족적 투기자본의 대규모 이동이 아무런 규제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현재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신흥국들의 경제 역시 언제 어떻게 무너질지 알 수 없다.4) ‘해외투자’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가려진 ‘투기자본’이 더욱 활개를 치게 되면 기업에 대한 인수합병, 구조조정을 일삼다가, 이윤이 더 이상 나지 않으면 내다버리는 일이 반복될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 노동자들의 권리는 위기관리라는 명분하에 가장 먼저 양보되어야 하는 것으로 취급받을 것이며 이 같은 방식은 금융화 시대가 요구하는 가장 일반적인 경향이 될 것이다. 이번 다보스포럼에서 논의되었던 사안 중 하나가 바로 휴먼 리세션인데, 무고용 경기 회복과 청년실업에 대한 것을 말한다. 당장 미국에서는 25세~54세 미국인 중 5분의 1이 실업 상태이고, 유럽 또한 청년실업이 심각하다. 단적으로 스페인은 14세~25세 인구 중에 42%가 일자리가 없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실업자가 400만 명에 육박하게 되었다. 그러나 금융화 시대의 이러한 일반적 경향을 제어할 해결방안을 다보스포럼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4. 나가며 : 이제 공은 서울 G20회의로 넘어왔다!


 이번에 다보스포럼에서 논의한 내용은 포럼이라는 특성 상 실제로 전 세계 국가에 어떠한 정책적 강제 등으로 작용할 수는 없는 듯하다. 그러나 이명박 한국 대통령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다보스에서의 연설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제 이를 실물화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테이블은 바로 앞으로 6월(캐나다)과 11월(한국)에 열릴 G20 정상회의이다. 이는 G20에서의 논의가 향후 세계 경제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수행할 것을 이미 각 국의 지배자들은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들은 위기 극복을 위해서라면 고용 없는 경제 성장과 더불어 수많은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임금을 삭감하고, 노동조건을 악화시키는 것을 별로 개의치 않고 자행해갈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말하는 경제위기 극복은 수많은 노동자 서민들을 위한 ‘더 나은 세계’가 아니라, G20에 속하는 각 국가의 지배자들과 소수 투기금융자본, 그리고 그 수혜를 받는 자들만을 위한 ‘더 나은 세계’임이 분명하다.

 수많은 노동자 서민들이 G20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중요한 테이블, 혹은 나와는 상관없는 세계 각 국의 대통령들만의 테이블 정도로만 바라보고 있는 지금,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가 중요한 시기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분초를 다퉈가며 다보스 포럼에서 열심히 한국의 국위선양을 하고 있다며 많은 보수신문들에서는 극찬을 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명박은 졸속 국정수행이 아니라, 한국의 지배세력을 위해 더 나은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싸움을 분초를 다퉈가며 살아가고 있다. 서울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가 앞으로 9개 월 가량 남은 지금, 지금이야말로 우리들은 당장 다보스포럼과 G20 정상회의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비판적인 지식을 습득하고, 주위의 더 많은 사람들과 이 사실들을 공유해야하지 않을까.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는 그들만을 위한 ‘더 나은 세계’보다는, 노동자 서민들과 함께 더 많은 이들을 위한 ‘다른 세계’를 만들어가자고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Posted by 행진

2010/02/14 21:43 2010/02/14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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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없는 자본이 정말 우리의
‘삶’을 발전시켜 줄 수 있을까?

- 초민족적 외국투기자본의 노동권 파괴


들어가며


 요즘 한국에서 외국기업의 이름을 듣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 외국에서 한국 기업의 이름을 보는 일도 이제는 흔한 일이 되었다. 그만큼 요즘 기업들과 자본들에게는 국적이 없다. 국경과 지역을 넘나들면서 전 세계에서 자유롭게 기업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의 정부들은 외국 기업이 자유롭게 전 세계에서 기업 활동을 하는 것, 특히 자국에 들어와 투자활동을 벌이는 것을 매우 반갑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경제의 발전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로 우리의 ‘삶’을 발전시켜주었는지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배층들이 만들어놓은 신자유주의 질서 속에서 기업들은 세계 곳곳에서 이윤을 뽑아내지만, 그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처지는 참담하다. 이윤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장이 폐쇄되면서 일자리를 잃고, 기술만 쏙 빼내가고 아무런 투자도 하지 않는 기업 때문에 한꺼번에 몇 천 명이 해고당하기도 하며, 주식시장에서 기업 가치를 올리기 위해 생산비용을 절감하려는 기업주 때문에 임금이 삭감되기도 한다.

이렇게 초민족적인 투기자본들, 그리고 그 기업들이 전 세계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해주는 지금의 체제와 환경은 기업의 주인들과 ‘가진 자’들에게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대다수 노동자들에게는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 노동자들의 삶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왜 그런 일이 생기게 되었고, 여기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어떻게 되어야 할지 고민해보도록 하자.





노동자들이 LA, 파리로 간 이유


 지난 1월 세계 최대 악기박람회인 남쇼(NAMM SHOW)가 열리는 미국 애너하임 컨벤션센터 앞마당에는 전단지를 돌리며 메마른 ‘투쟁가’를 토해내는 콜트악기와 콜텍 노동자들이 있었다. “노동자가 없으면 음악이 없고, 음악이 없으면 삶도 없다!”가 장단 맞춰 쇳소리로 터져 나온다. 인간의 본능을 처절하게 대변하는 음악들이다. 이 노동자들의 일터는 실상 2007년(콜텍 대전 공장)과 2008년(콜트 경기 부평 공장)에 문을 닫았다. 실직자들이 이역만리를 가는 까닭엔, 12시간 비행 거리만큼이나 긴 설명이 필요하다.

1970년대 세워진 콜트 악기와 자회사 콜텍은 세계 기타 생산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거대했지만, 2006년에 당기순손실을 입는다. 흑자경영 10년만이다. 2007~2008년 사이 국내 공장도 모두 문을 닫는다. 당시 콜트악기 쪽은 “경영적자와 노사 갈등 때문에 폐업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지만, 이에 대해 ‘위장폐업’이 아니냐는 사회적 여론이 거세다. 중앙노동위원회가 해고가 부당하다고 2008년 결정하고 2009년 법원 판결도 쏟아진다. 콜트의 해고 무효 확인 행정소송(2심)에서 노동자들이 승소하고, 민사소송(1심)에서도 “해고가 무효하며 원직 복직시킬 때까지 월평균 임금 등을 지급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판결이 나왔다. 콜텍 역시 지난해 11월 해고가 부당하다는 항소심 판결을 받았다. 복직투쟁 1100일이 다 되어가지만 회사는 뻔뻔하게도 모든 판결에 대해 항소 ․ 상고했다. 결국 회사의 노동자들은 20년 기타 제조 남성 숙련공의 한 달 치 월급을 훌쩍 넘는 200만 원 짜리 왕복 미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이런 ‘원정투쟁’은 급히 유행이 된다. 또 다른 무리가 1월 19일 프랑스 파리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발레오공조코리아(충남 천안) 해고 노동자들이다. 이들의 일터도 지난해 말 사라졌다. 프랑스에 본사를 둔 세계 3대 자동차 부품업체 발레오가 그룹 차원에서 결정한 사항이다. 그리고 이들이 돌아오는 2월엔 승림카본(경기 안산) 해고 노동자들이 한국을 떠난다. 회사 경영권을 쥐고 있는 독일의 다국적 자본 ‘슁크’가 노조와 갈등을 거듭하다 2007년 직장을 폐쇄한 것이다. 우유팩 제조업체인 페트라팩(경기 여주) 해고 노동자들도 2007년 스위스로 원정투쟁을 떠나 석 달간 천막농성, 단식투쟁을 한 적이 있다.

위에서 본 여러 노동자들의 사연은 다른 것 같아도 어딘지 닮아 있다. 자본 철수 이후, 생계는 물론이거니와 책임 ․ 윤리 경영 따위의 호소는 경영진의 귓등에도 닿지 않는다. 무엇보다 국내 경영진은 문제 해결 의지가 없거나 결정권이 없다. 권한 있는 경영진은 만날 수조차 없다. 그림자도 없는 ‘허깨비 자본’은 노동자를 철저히 무력화한다. 그 때문에 발레오공조 ․ 승림카본 노동자들은 결정권 없는 국내 경영진을 넘어 그들의 ‘주인’과 직접 만나고자 한다. 국내 자본인 콜트 ․ 콜텍의 노동자들은 외국의 거래처나 고객을 직접 만나 호소하려 한다. 국경을 넘는 자본의 이동이 자유로워질수록, 근로빈곤층(working poor)의 피할 수 없는 세계 여행도 일반화된다.



외국투기자본, 그게 뭐야?


 수십 명의 구속자와 수천 명의 해고자를 발생시킨 작년의 쌍용차 구조조정은, 외국 투기자본(줄여서 ‘외투자본’이라고 하기도 한다)의 문제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했다. 2004년 쌍용차를 인수한 상하이자동차는 투자는 외면한 채 기술 유출에만 몰두하다 경제위기를 빌미로 회사를 부도내 버렸고, 이후 법정 관리인에 의해 대규모 정리해고가 단행되었다. 상하이 자동차는 이후 검찰 조사에서 기술 유출 등의 범죄 사실이 확인되었지만, 한국 정부가 상하이자동차를 상대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현재 쌍용차는 인수자를 찾기 위해 저비용 생산 구조(저임금 고강도 노동 시스템)를 갖추기 위한 구조조정을 계속 진행하고 있다.

쌍용차만큼 여론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캐리어, 발레오공조, 위니아만도 등 초민족자본이 투자한 제조업 기업들에서 현재 자본 철수가 진행 중이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정리해고의 피해를 겪고 있다. 미국계 초민족 자본인 유티씨의 계열사인 캐리어는 몇 년째 시설투자는 하지 않은 채 수백 명의 노동자를 정리해고하며 영업망만을 유지한 자본 철수 절차에 돌입했고, 프랑스계 자동차 부품 업체인 발레오의 한국 계열사인 발레오공조는 아예 공장 폐쇄를 단행했으며, 초민족적 사모펀드 씨브이씨의 소유인 위니아만도는 자본철수 협박 속에서 노동자를 정리해고 중이다. 현재 구조조정에 대해 투쟁하는 곳 대다수가 초민족자본 투자 기업일 정도로 한국에서 초민족 자본의 문제는 심각한 상태이다.

자본의 자유로운 세계적 이동 때문에, 초민족자본은 한 나라에서 노동자들의 저항을 무력화하는데 유능하다. 노동자들이 정당한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면, 초민족자본은 떠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대응한다. 이들은 세계적 수준의 생산 네트워크를 보유함으로써 한 공장에서 문제가 생기더라도 다른 공장에서 생산을 대체해 버릴 수 있다. 기업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한다. 제어할 고삐가 없는 외투자본들은 밑바닥 경주(race to the bottom)를 벌이며 노동자들에 대한 공격을 전 세계적으로 확대한다. 기준이 엄격한 곳에서 저임금과 해고가 자유로운 곳으로 옮겨 다닐 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권리를 총체적 파괴하고 축소시키며 열악한 조건을 직접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외투자본은 국제적 경제 여건에 따라 공장 폐쇄와 이전을 아주 자유롭게 감행한다. 2008~2009년 세계경제위기에서도 볼 수 있었던 초민족 자본의 국제적 이동은 경제 조건이 어려운 지역에서는 과감하게 공장을 폐쇄하고, 새로운 시장이 열리는 곳에서는 현지에서 자본을 조달하고 본사의 자원을 집중하여 공격적으로 인수 합병을 하고 신규 공장을 건설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본 철수 협박 및 신규 투자 등을 조건으로 노동자들의 권리를 크게 빼앗는 것은 물론이다.

경제위기 과정에서 나타난 초민족 자동차 기업들의 사례를 보면 이들 기업은 하나같이 생산이 감소하는 곳에서는 정리해고 공장폐쇄 등의 구조조정을 감행하며 동시에 시장이 확대될 가능성이 있는 지역에서는 대규모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도요타, 지엠, 폴크스바겐, 혼다, 닛산, 포드, 피아트 등의 자동차기업을 비롯해 최근 국내에서 대규모 해고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캐리어 에어컨, 발레오공조 등도 앞에서는 위기인척, 뒤에서는 새로운 투자를 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더군다나 외국투기기업들은 충분하게 저임금 노동을 이용하며 노동법에 대해서도 특혜를 누린다. 바로 각국 정부들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다. 한국의 경제자유구역(FEZ), 아시아 및 남미의 수출가공구역(EPZ)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지역에서 기업들은 정부의 각종 자금 혜택은 물론 노동법을 면제받기도 한다. 한국에서 2002년에 제정된 경제자유구역법은 구역 내 초민족 기업들에 근로기준법과 파견법의 일부 조항들을 무시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으며, 도미니카공화국, 멕시코, 필리핀 등의 국가에서는 노조활동 탄압, 최저임금 이하의 임금 지불 등에 대해 정부가 눈을 감는다.

이와 관련해 남한 정부는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 ‘인베스트 코리아(Invest KOREA) 본부’를 설치해 개별 외국 자본이 투자하면 어떤 인센티브와 얼마만큼의 지원을 받게 되는지를 구체적으로 산정해 미리 알려주고 있다. 외국인 투자촉진법에 따르면 ‘외국 투자자가 출자한 기업’에 대해 조세․현금․입지 지원 등 각종 파격적인 인센티브가 주어진다.

지식경제부의 외국인 투자기업 정보에 따르면, 1월 현재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투기업은 1만7580개다. 이렇게 많은 외투기업에 관해 남한 정부는 무한한 지원만 제공할 뿐, 자본 철수 등에 뒤따르는 고용 문제 등에는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있다. 투자 유치에는 열심인 정부가 일방적으로 공장을 철수하고 떠나는 외투기업 현황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지식경제부 투자정책과 쪽은 “국내에 들어오는 외국인 투자 자본은 (각종 세제 혜택 등이 주어지기 때문에) 100% 신고하고 있고, 이를 분기별로 발표하고 있다”며 “그러나 자본 철수의 경우에 따로 신고하는 외국 자본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저 짐을 싸서 떠나버리면 그만인 셈이다.

이제 문제를 좀 더 근본적으로 생각해보자. 앞에서도 서술했듯이 많은 사람들은 외투기업들이 자국에 들어오는 것을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 이유가 뭘까? 바로 정부 및 지배층들이 유포하는 ‘경제 살리기’의 해법이 바로 투기자본들이 자유롭게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기업 활동을 하는 것이라는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 08-09 금융위기와 쌍용자동차 사태를 거치면서 그것이 해법이 아님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투기자본들이 자유롭게 전 세계에서 기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지금의 금융구조/금융화가 작년의 위기를 불러온 것이고, 자신의 이윤만을 위해 기술 유출만 하고 발을 빼버린 투기자본 때문에 2500여명의 쌍용차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발레오공조코리아, 페트라팩, 콜트․콜텍, 캐리어 에어컨 등등 수많은 기업들의 노동자들이 각각의 외투기업에 대항해서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작년 쌍용자동차 투쟁도 ‘상하이’라는 초민족적 투기자본에 맞선 싸움이었다. 이런 일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좀처럼 노동자들의 권리가 보장되는 방향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할까?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면서 많은 노동자들의 단결이 필요하다. 각각의 기업주에 맞서서 싸우는 것 뿐 아니라 전 세계 노동자들의 노동권과 생존권을 빼앗아가고 있는 외국투기자본 전반, 외국투기자본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지금의 신자유주의 금융화 체제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흐름을 만들어가야만 진짜 해결을 이루어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11월, 서울에서 G20정상회담이 열린다고 한다. 결국 이 회의는 심각한 문제들을 만들고 있는 투기자본들이 더욱더 활발하게 기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금의 위기상황에 맞는 새로운 시스템과 구조를 만들 것이다. 이렇게 계속되는 규제완화, 시스템 개선 등으로 결국 투기자본들이 더욱 활개 치게 된 것이다. 이 G20을 적극 유치하고 홍보하고 있는 정부, 그리고 이 기회로 우리 경제가 한 발 도약해야 한다며 환영의 손길을 보내고 있는 자본에 맞서서 지금의 금융화 질서에 대한 문제제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나가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앞서 나온 원정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문제, G20에서 논의될 사항 등을 지금 우리의 삶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으로 여긴다면 큰 오산이다. 갈수록 외국투기자본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가 나중에 근무하게 될 기업이 외국투기자본의 기업이 될 지도 모르는 일이고, 갈수록 심화되는 금융화 속에서 투기자본들의 이윤만 보장되고 우리의 권리는 야금야금 없어져 갈 것이다. 우리의 노동의 권리, 안정적인 삶을 살아갈 권리를 원한다면! 지금의 자리에서부터 실천을 시작해나가자.

투기자본들의 횡행,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G20-금융화 체제는 노동자서민의 권리는 안중에도 없이 현 체제의 체질개선을 통해 더욱 안정적으로 이윤을 보장하기 위한 체제에 불과하다. 기업들이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세계화가 아니라 투쟁하는 노동자,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대다수 서민들의 목소리가 반영되고 그/녀들의 권리가 보장되는 아래로부터의 세계화가 바로 우리의 대안이다. 초민족적 투기자본들이 노동자들의 노동권을 보장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만들고, 기업이 철수했을 때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보장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현재 시급한 과제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외국투기자본의 문제점과 외투자본이 노동자들의 권리를 파괴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자신의 공동체에서부터 알려나가고 주변 사람들을 설득해 나가는 것이 일차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Posted by 행진

2010/02/14 21:27 2010/02/14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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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의 무수한 죽음들을 ‘기억’하며

- 당대비평,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 서평 -

                                             


 노무현에 대한 대대적인 애도가 가리키는 것


 2009년 5월, 전 대통령의 자살이라는 사건은 한국 사회에 유례없는 충격과 반향을 가져왔다. 곧 광장과 학교, 지역마다 주요 역의 입구에 분향소가 차려졌다.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 그와 그의 정책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노무현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그가 부족한 게 있었다고 하더라도 상대적으론 존경할만한 대통령이었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노무현의 집권기에 죽어갔던 수많은 농민·노동자들을 기억한다면, 그 때 노무현을 비판했던 진보진영마저 무비판적으로 애도의 물결에 동참하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후자의 입장은 상대적으로 소수였고, 전자에 의해 죽음 앞에서 원칙만을 고수하는 냉혈한으로 비난받기도 하였다. 이 간극을 해결하기 위하여 ‘정치인 노무현’과 ‘인간 노무현’을 분리하여, 전자가 잘못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후자는 기릴 만 하다고 얘기하는 이들도 있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시기적 구분으로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을 가속화한 대통령 재임기의 노무현’과 ‘대통령 집권 이전에 노무현이 추구하였고, 지금 대중들이 그에게 투영하고 있는 가치들’을 구분하여 후자의 의미로 그를 애도하자는 주장도 존재했다.


 그러나 그 중 어떤 입장도 우리 앞에 벌어진 상황을 충분히 설명해 주지는 못했다. 사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이후에 만들어진 추모의 분위기 속에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과잉’이 존재했다. 한 필자의 표현대로 “실제로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그런 대통령 노무현을 대중들은 마치 갖고 있었다가 지금 막 상실한 것처럼 애도했다(정용택, 117p.).” 혹은 노무현과 자신의 처지를 동일시하며,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펑펑 흘렸다. 마치 마음껏 울 계기가 필요했다는 듯이 말이다. 나는 당시에 그의 죽음 자체보다도 죽음 이후에 있던 ‘거대한 울음의 행렬’에 더 놀랐다. 추모에 동참하고 있는 사람들 스스로도 예상치 못했고, 온전히 이해할 수 없던 흐름이었다. 그 추모의 열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시점(2009년 12월)에 출간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의 열 명 남짓한 필자들은 다시금 찬찬히 그 죽음과 추모의 의미를 되짚고 있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어떤 죽음이 대대적으로 애도될 때, 그것은 단지 죽은 자의 사회적 지위 탓으로 돌릴 수 없는 애도하는 자의 정치적 욕망이 투여”(서동진, 20p.)되어 있는 법이다. 그렇기에 이 행위가 옳은지 옳지 않은지를 따지기 이전에 ‘대체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지’를 돌아보는 것이 우리 사회가 위치한 자리와 나아갈 자리를 가늠하기 위해 더 유의미한 시도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노무현의 죽음 앞에서 ‘인간 노무현’에게 정서적 동질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2002년 대선 당시 그는 기존 한국 정당 정치에 대한 환멸의 정서를 대변했다. 상고 졸업, 농촌 출신, 민주화 운동, 인권 변호사, 통기타를 치며 상록수를 부르던 모습 등에서 대중은 기존 정치인과 다른 노무현의 ‘비주류 정서’에 공감을 표하며 ‘변화’를 기대했다. 그는 늘 그의 신념이나 정책 그 자체보다도 탈권위주의적인 언행으로 주목받아 왔다. 그리고 노무현에 대한 추모 분위기 속에서 부각되는 것도 다른 어떤 것이기보다는 이런 노무현 개인의 ‘통치 스타일’이었다. 때문에 ‘정치인 노무현(신자유주의자)’과 ‘인간 노무현(탈권위주의와 진정성)’을 분리해서 보려는 시도가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김원의 지적처럼 노무현의 이 두 가지 측면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노무현의 죽음 이후 인간 노무현과 정치인 노무현을 분리하자고 말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수준은 강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노무현 죽음 이후에도 반복되고 있다. 노무현이 내세운 정치 스타일은 (····) 한국 정치 위기의 다른 면이었다. 기존 보수 정치에 대한 불만과 반감을 지닌 대중은 한나라당과 민주당 보수 양당의 대안 이념 부재, 무능력과 부패 등에 부단히 실망했다. 그 실망의 틈에 등장했던 것이 노무현이었다. 하지만 그가 내세웠던 지역주의와 분열주의 반대, 도덕성, 서민성, 권위주의 역사 청산 등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대안적 정치 이데올로기로 작동할 수 없었다.

- 김원, <우리는 노무현을 지키지 못해 미안해야 하나?> 중에서, 65p.


 노무현 집권기의 실패는 노골적인 경제 대통령 이명박의 당선으로 귀결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명박 역시 나의 불안한 삶을 책임져줄 수는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집권 초기부터 이명박 정권이 보여주는 무능함과 치졸함, 몰상식함에 누구나 극도로 지쳐 있었다. 사람들에게 목 놓아 울 계기가 절실했다는 것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 시점에 갑자기 들이닥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은 ‘내가 붙잡을 수 있는 대안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막막함이자 울음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달라 보이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사람들을 움직인 것은 결국엔 모두 같은 원리였다.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는 현실 정치(때로는 노무현이었고, 때로는 이명박이었던)에 대한 반(反)경향’ 말이다. 다시 말해, 노무현의 죽음과 그에 대한 애도가 가리키는 것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시대에 한국 정치가 봉착한 ‘어떤 한계지점’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금 노무현의 인간적 스타일을 대체할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건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한계지점’을 넘어설 방책이 필요한 것일 텐데, 당장은 누구도 시원하게 그것을 제시해줄 수 없다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 그리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 국면 속에서도, 이 한계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애도의 공동체 속에 배제되고, 망각되는 이들은 누구인가?


 사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 이전에도 다른 무수히 많은 ‘죽음’들이 존재했다. 가장 눈에 띄는 사건은 2009년 초, 서울 한복판에서 공권력의 진압에 의해 여섯 사람이 불에 타 목숨을 잃었던 ‘용산 철거민 참사’일 것이다. 『아무도···죽음』은 용산참사의 기억을 불러와 전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비교하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우리는 두 죽음의 비교를 통해, 노무현에 대한 애도(나아가 김대중에 대한 애도까지도)가 갖는 성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2009년의 광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잠시 2008년 5-7월의 촛불의 기억을 떠올려보아야 한다. 촛불은 그 이전에 있었던 어떤 집단적인 저항의 모습과도 달랐다. 그것은 저항의 새로운 주체와 방식의 발견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성격이 매우 모호한 것이기도 했다. 이른바 ‘개혁 세력’의 집권기 동안 대중들은 역설적이게도 스스로를 주체화할 정치적 언어들을 잃어버렸다. “민주, 개혁, 진보, 노동··· 신성한 기표들의 훼절을 겪고 벌거숭이로 남겨진 대중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김성태, 141p.)” 촛불을 든 대중들은 ‘반MB’라는 모호한 정체성으로 묶여 있었고, 결국 몇 달 간의 집회 끝에도 이렇다 할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다시 뿔뿔이 흩어져갔다. 그리고 2009년 1월 20일의 용산참사. 김성태는 이 사건이 ‘촛불이 어디로 갈 것인가’를 가름하는 시험대(리트머스지)가 될 만한 것이었다고 얘기한다.


 그럼 용산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어떠했나? 참사 당일 저녁부터,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현장으로 달려가 가두시위를 벌였다. 촛불이 잦아든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론도 철거민 쪽에 우호적이었다.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희생된 이들이 매도당하지 않고, 공감해야 할 사회적 고통의 일부로 인지되고 받아들여진다는 것에서 ‘일단’ 안도(김성태, 145p.)”할 만 했다. 그러나 그것은 전 대통령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리며 광장으로 나왔던 사람들에는 한참 미달하는 것이었으며,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운동이 되지는 못했다. 그 이유에 대한 필자들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하나는, “그 불타는 몸은 너무 강렬하기에 시민이 공유할 수 없어서”라는 것이다. 일종의 축제이자 퍼포먼스였던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와 비교했을 때, 죽음에 직면한 결사 항전은 너무나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무엇에서든 유머를 필요로 하게 된 몸들이 되어버린 ‘개그적 소비 사회’의 시민들에게 쾌락 없는 투쟁이란 ‘참아줄 수 없는 진지함’에 다름 아니었다는 것이다.(김진호, 266p.)” 다른 하나는, ‘사유재산’이라는 자본주의의 질서, 혹은 ‘뉴타운’이라는 사람들의 욕망의 대상을 근본적으로 건드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절규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저런 희생은 질서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엄기호, 37p.)”이라는 인식이 용산에 대한 적극적 애도를 어렵게 만들었다.


 즉, “대중들은 용산을 의도적으로 애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외려 그것을 애도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부채감과 상실감은 무의식적으로 남아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노무현·김대중에 대한 추모 행위를 두고 “마땅히 애도되어야 할 대상이 애도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엉뚱하게도 바로 옆의 것이 누가 봐도 너무 과하게 애도되고 있다면, 그 과열된 애도 행위의 배후에는 정작 애도해야 할 것을 애도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슬픔이 감춰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김진호, 101p.)”고 분석하는 것은 (약간은 ‘과장’처럼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의미심장하다.


 책은 주로 용산참사와 노무현, 김대중, 그리고 그 죽음들에 대한 ‘사회적 기억의 비대칭성’을 다루고 있지만, 조금 더 크게 본다면 다른 것들도 눈에 들어오게 된다. 그러고 보면 2009년에는 참 많은 죽음이 있었다. 용산의 철거민들, 투쟁 중에 목을 맨 대한통운 특수고용 노동자 박종태 열사, 쌍용자동차 파업 중에 목숨을 끊었던 여러 노동자와 그 가족들... 그리고 다른 한 편에는 김수환 추기경·노무현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이라는 세 명의 지도자들. 전자의 죽음과 후자의 죽음에 사람들은 많이 다르게 반응했다. 이름도 권력도 가지지 못한, 진정으로 ‘평범한 사람’이었던 이들의 죽음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채로 빠르게 잊혀 갔다.


 사실 노무현 추모 정국 속에서 이처럼 애도되고 있지 못한 ‘다른 이들’의 죽음을 불러오려는 시도들도 존재했다. 엄기호는 이를 ‘초혼의 정치’라 명명한다. 죽은 자에 대한 애도 앞으로 같이 애도되어야 하는 죽은 자들을 불러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는 성공회대 교수의 이광일이 당시 참세상에 기고한 글이 그런 논지에서 쓰인 글이었다.


민주주의는 과거의 경력을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살아 움직이는 지금 이 순간의 부당한 관계들을 문제시하고 그것을 넘고자 하는 실천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죽은 노무현을 잡고 기억하는 것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 고통 받는 용산을, 특수고용 노동자들을, 이주노동자들을, 소수자를, 수탈 받는 환경과 생태의 아픔을 안고 함께 싸우는 것이 진정 그를 살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 이광일, <한 편의 ‘희극’이 ‘비극’으로 끝나다> 중에서, 2009년 6월 1일, 참세상


그러나 전 대통령들의 추모 의례는 이 죽음을 최대한 ‘충돌이 아닌 정상화(‘화해’라는 모호한 이름의)’로 수습하려는 경향이 더욱 컸고, 불편한 다른 죽음들, 평범한 이들의 죽음들은 초대받지 못한 채였다. 이 사실은 지금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준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책마저도 매우 비대칭적으로 죽음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책의 제목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임에도, 대부분의 필자들은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과잉된 애도’가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하는 데에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물론 그만큼 그 추모의 분위기는 놀라운 것이었으며,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불러오기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다. 많은 논쟁이 애매모호하게 마무리된 속에서, 노무현 추모정국을 이렇게 해석하려는 것은 매우 유의미한 시도이다. 그러나 ‘용산’보다도 더 기억되지 못한 다른 죽음들. 2009년에 죽어가야 했던 노동자, 농민들... 2009년 이전에도, ‘민주화 되었다던’ 그 시절, 노무현 정부의 집권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나 곧 잊혔던 수많은 이들.. 그 죽음들을 불러오는 것, 그들의 죽음이 왜 이렇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렸는지를 성찰하는 것, 그 과정이 부족해서 아쉬움이 남는다.



 정치를 만드는 데에 끊임없이 실패하는 우리들


 앞에서 짚은 한계와 연결되어 있는 또 하나의 쟁점은, 이 광범위한 애도의 행위가 참가한 사람들을 ‘정치적 주체’로 만드는 데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엄기호에 따르면 두 전직 대통령과 용산의 죽음을 가르는 그 ‘경계’야말로 우리 사회가 필사적으로 감추고 회피하려는 정치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경계를 넘는 것에 끊임없이 실패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사회에서 정치란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질서를 지키는 것-치안, 혹은 신자유주의 법치라 불리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문학 비평가인 권명아의 시선은 이 ‘광장에서의 애도’에서부터 올해 베스트셀러였던 책과 영화, 『엄마를 부탁해』와 『해운대』에까지 가서 머문다. (다른 필자인 정용택이 영화 『워낭소리』의 흥행에 관해 갖는 입장도 이와 비슷하다는 사실이 인상적이다) 그녀는 “죽음의 책임이라는 모티프가 촛불과 광장과 조문 행렬에서 극장가와 서점가로 이동”했다고 보고 있는데, 이것이 “삶에 대한 새로운 의식이나, 타자의 죽음과 나의 생존의 불가피한 의존과 관계성, 삶의 취약성에 대한 윤리적 의식의 자리를 만들지 못하고 있”(권명아, 74p.)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 매체들에서 각각 죽음을 다루는 방식이 ‘청소’를 통한 삶의 정상화(영화 『해운대』), ‘피붙이’의 죽음에만 감응하는 것(소설 『엄마를 부탁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상실감과 애도가 이처럼 정치적 주체화의 자리가 아닌 ‘다른 자리’에서 수행될 때, 우리는 무력할 수밖에 없으며, 폭력 시스템은 지속된다.


 신학 연구자인 정용택은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대중을 ‘우울증적 주체’로 명명한다. “우울증적 주체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알지 못하면서 그것에 대한 상실감에 시달린다.” 사실상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민주주의의 표상을 노무현에게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중들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잃어버린 노무현이 아니라 실은 민주주의의 부재” 그 자체이다. 문제는 이러한 우울증적 충동이 촛불집회나 추모 행렬과 같은 집합 의례의 형식으로만 남아, 현실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정도로까지 힘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는 2009년의 애도의 광장에 ‘종교’만 남았을 뿐, ‘정치’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124p.)


 필자들의 공통된 문제의식은 놀라울 정도로 과열되어 있었던 대중들의 ‘집단적 애도·추모 의례’가, 이상하리만치 ‘정치’로 이어지지는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마치 2008년 촛불집회 때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리고 나아가 2009년의 수많은 죽음들을 가르는 ‘경계’를 가리킴으로써, 우리의 실패가 무엇 때문인지를 밝히고 있다. 여기가 바로 죽음들에 대한 ‘사회적 기억의 비대칭성’이 연유하는 지점이다. 우리를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어쩌면, 2003년, 잇따른 노동자들의 죽음 앞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던졌던 말, “분신으로 투쟁하는 시대는 갔다. 이제는 민주화된 시대가 아니냐.”하는 논리인 것은 아닐까? 20년에 걸친 ‘민주화 시대’와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의 교직(김성태)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87년의 그 자리에 멈추어 방황하고 있다. 대안 없는 위기의 시대, 여전히 ‘또 다른 구원자’나 ‘대변자’를 갈구하는 눈물을 흘리면서(김원) 말이다.



 이 불안한 세상을 바꾸기 위해 필요한 과정들


 『당비의 생각』 시리즈가 매번 그렇듯이, 이 책 한 권 안에도 통일될 수 없는 다양한 입장들이 존재한다. “(앞으로)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에 있어서는 특히 그렇다. 그 중에서도 가장 구체적으로 진보진영이 해야 할 바를 서술하고 있는 것은 박동천의 글인 <노무현 이후의 한국 정치를 생각한다>라고 하겠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이 말하는 바가, 앞의 다른 글들이 열심히 분석한 것들과 묘하게 어긋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우선은 그의 ‘진보진영’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명박·한나라당으로 표상되는)보수진영’ 대 ‘(노무현·김대중을 포함하는)개혁진영’으로 틀지어져 있다는 것이 그렇다. 이러한 오래 된 구도 속에는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애도가 과연 무얼 말했던 것이고, 무엇을 말하지 못했던 것인지에 대한 성찰은 보이지 않는다.


 “현재 한국의 진보에는 대안이 없는 것이 탈이 아니라 너무나 많은 것이 문제”라는 말에는 나도 동감한다. 그러나 바로 이어, 그렇기 때문에 이제 “무수히 불거져 나와 있는 제안과 묘안과 비책과 처방들을 어떻게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엮어 낼 것인가(박동천, 257p.)”가 중요하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힘들다. 인물 중심의 정치로 국회의원 선거에 대비하자는 것도 그렇다. 다른 필자들이 짚고 있는 맥락에서 보았을 때,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더 정교한 정책 대안’이나 ‘서민을 대리해 줄 다수의 국회의원들’은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수많은 물음들이다. 민주화 20년이 이명박 정부의 탄생으로 귀결되었고, 이명박 역시도 대안이 아님이 판명되었다면, 이제는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가? 무엇이 바뀌어야 내 삶이 나아질 수 있는가? 08-09년 그렇게 많은 이들이 광장에 나왔음에도, 왜 그 경험이 스스로의 삶을 바꾸고 세상을 흔드는 ‘정치’가 되는 데에는 실패하고 있는가? ‘정치’를 만들기 위해 나는 나의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 등등..


 우리의 아픔이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지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지금 우리에게 부족하다. 손쉽게 대안을 만들어내는 일보다도, 이 아픔의 ‘보편성’을 설명할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더욱 절실하다. 노무현을 ‘아름다운 순교자’나 ‘서민의 대변자’로 불렀듯이 또 다른 구원자나 대변자를 필요로 할 때에 그 시도는 필연적으로 실패에 이를 것이다. “진정 필요한 건 구원자가 아니라, 새로운 정치를 구성하기 위한 자기 조직화이다.(김원, 67p.)” 그리하여 '진짜 평범한 사람들'의 죽음을 우리의 아픔으로 느끼며, ‘이제 그만!’이라고 외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에게 다른 세계가 가능해질 것이다.


 2009년, 우리는 한 시대의 종언을 목도했다. 그러나 어떤 세계가 시작될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이 폐허 같이 불안한 세상에 ‘맨몸’으로 각자 부딪히며 살아야 하는 걸까? 그런 삶은 서러운 울음을 동반하는 것이거나, 어떤 계기가 오기까지 울음을 꾹꾹 눌러 참는 그런 것 밖에는 될 수 없지 않을까? 『아무도··죽음』은 이 불안한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인상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2010년대를 시작하며,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Posted by 행진

2010/02/14 21:11 2010/02/14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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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34호] 발간사

자아도취에 빠진 정권에 맞서는 2010년


“어둠 속에서 새로운 밝음을 찾아냈습니다.”

2010년 1월 1일, 이명박 대통령은 작년의 간략한 평가와 올해의 의지가 담긴 짧은 신년사를 발표했습니다. 역대 대통령들이 형식적으로라도 새해에는 자신의 과오를 고쳐나가겠다는 식으로 발표한 것과는 달리, 그의 메시지에는 오히려 ‘자신감’이 묻어나왔습니다. 이명박 정권은 예전부터 그랬듯이 올 한해도, 설사 전 국민적 반발을 사는 일이 있어도 ‘자신감’을 갖고 세계로 뻗어나가는 선진적인 국정 운영을 해 나가겠지요. 그의 말대로 G20 정상회의 의장국이자 주최국이 되고, 원자력 발전소 수출의 길을 열어 한국이 선진 일류국가로 도약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날이 갈수록 사회양극화가 심화되고 불안정노동이 확대되는 우리 사회의 서민들이 과연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이명박 정권에게 ‘밝음’은 선진화고, 일류국가겠지만 이를 근거로 추진하려는 정책들은 우리의 삶을 어둡게 할 것임이 분명합니다. 단적인 예지만, 국가 품격을 높이기 위해 노사화합을 강요하면서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희생을 전가하기도 하고, 공기업선진화를 내세우며 각종 사회서비스의 질을 떨어뜨리고 비용을 높일 수도 있습니다. 국가를 앞세운 담론들은 역사적으로 양극화를 심화시키면서 가진 자들을 더 배부르게 만든 것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말한 선진화/일류국가 담론의 숨은 의의를 잘 경계하면서 2010년을 시작했으면 합니다.

이번 뉴스레터는 올해의 첫 발간호인만큼, 이명박 정권이 새해 벽두부터 포부를 밝힌 선진화 담론을 주목하면서 올 한해를 넓게 바라보자는 취지로 기획되었습니다. 정세동향으로는 중앙대에서 진행되려 하는 메가톤급 대학 구조조정에 대한 분석을 실었습니다. ‘백화점식 학과 재편’, ‘경쟁력 없는 학과 퇴출’을 이야기하며 계획되는 구조조정의 목적은 ‘일류대학’이었습니다. 대통령이 ‘일류국가’를 이야기하는 논리와 매우 비슷합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대학이 어떤 곳으로 기능하고 있는지, 우리에게 교육과 학문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의견을 담았습니다. 중앙대에서 구조조정이 성공적으로(?) 완료된다면 다른 학교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데, 이번에 실린 정세동향을 참고하면서 이후의 상황을 슬기롭게 대비합시다.
이어서 연초부터 정신없이 일어난 여러 사건들에 대해 입장을 담았습니다. 일단 서두에 언급한 대통령 신년사와 연설을 토대로 이 정권이 지금의 상황을 평가한 것과 향후 방향을 밝힌 부분을 정리해 봤습니다. 올 한해를 관통할 정부의 기만적 담론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으니 확인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새해 첫 날에 통과된 노조법 개악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고민한 내용을 실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에 대한 권리가 어째서 중요할 수밖에 없는지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마지막으로, 극적으로 타결되어 얼마 전 장례를 치른 용산참사에 대한 입장을 담았습니다. 총리가 유감 표명을 했지만 정부가 진심으로 이 사건을 책임지려는 것은 아닙니다. 용산참사가 어째서 끝나지 않은 싸움인지, 우리가 앞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일로영일’(一勞永逸, 지금의 노고를 통해 오래 안락을 누린다)이란 말을 하며 일류국가 도약을 위해 서로 노력하자고 했습니다. ‘혹세무민’(惑世誣民,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미혹하게 하여 속임)이란 이런 상황을 이야기하는 걸까요. 가진 자들을 위한 서민들의 노고를 이제는 멈춰야 합니다. 우리를 더 불행하게 할 선진화 담론에 맞서 보편적인 권리를 쟁취하는 싸움을 2010년 학생사회에서부터 힘차게 만들어 갑시다!!

Posted by 행진

2010/01/15 01:58 2010/01/15 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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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 메가톤급 구조조정,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중앙대 메가톤급 구조조정안이 지난 12월 29일에 발표됐다. 18개 단과대학을 10개로, 77개 학과(학부)를 40개로 줄이는 한국 대학 사상 초유의 대규모 학과 구조조정안을 두고 시대의 흐름에 따른 바람직한 또는 어쩔 수 없는 변화다, 기업의 논리로 학문의 다양성을 침해한다는 찬/반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를 바라보는 대학교들은 중앙대 뿐만 아니라 모든 대학들이 장기적으로 추구해야할 방향임이 틀림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고, 어떻게든 대학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에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이것이 중앙대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시작되었고 앞으로 거세어질 대학의 거대한 변화,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계열별 경쟁을 유도하는 5계열 책임부총장제

"일류 대학을 만들고 싶은데 지금처럼 백화점식 학과를 갖고 어떻게 경쟁하겠나? 너무 다양해 선택과 집중이 안 되고, 시대 흐름에 뒤처지는 분야도 있으니 중앙대 특성에 맞게 구조조정하자는 것이다. 힘들더라도 일부 손대는 차원이 아니라 미래를 보고 백지 위에 다시 그려야 제대로 된 개혁이 된다고 보았다. 그동안 많은 준비를 해왔다. 단과 대학별 구조조정위원회도 구성했고, 본부 구조조정위도 가동했다. 심지어 외부 컨설팅 회사에 외국 대학들과 비교해 미래 지향적 대학 모델을 만들어달라고 해 그 의견도 이번 안에 담았다."
- 중앙대 박범훈 총장 인터뷰

선택과 집중을 통한 경쟁력 강화, 행정적 편의 개선. 이것이 중앙대학교에서 말하는 주된 구조조정의 이유다. 이를 위해 핵심적으로 현재 단과대 체제가 5계열 책임부총장제로 재편된다. 각 학과에 대한 평가를 통해 집중육성학과 7개, 개편대상학과 26개, 통폐합대상 28개 학과를 선정하여 18개인 단과대를 10개로 줄인다. 이를 ▲인문·사회·사범 ▲자연·공학 ▲의·약학 ▲경영·경제 ▲예·체능 등 5개의 계열별로 묶어 5명의 '책임 부총장'이 예산과 교원임용, 인사, 교육, 연구지원 등 모든 권한을 가지게 된다. 그 목표는 ‘명품학과 12~15개를 집중육성하기 위한 자율 경쟁체제 도입’이라 한다. 학교본부가 그 이상을 공개하고 있지 않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각 계열 간/학과 간에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라는 정도는 누구든 예상할 수 있다.

"기업이든 대학이든 투입한 자원에 비해 가장 큰 효과를 내는 것이 경영이다. (대학과 기업은) 다를 게 없다."
- 박용성 이사장 인터뷰 中 [조선일보, "대학이 문화센터냐… 학과 완전히 다시 짜겠다.", 2009.06.09]

 학교본부가 제시한 이번 구조조정안의 핵심은 ‘평가’이다. 평가를 통해서 학과 통폐합을 이끌어내고, 평가를 통해서 학과 간 경쟁을 유발하며, 평가를 통해서 학과를 죽이고 살리는 학교 ‘경영원리’가 구조조정 혹은 학문단위 조정으로 표현된 것일 뿐이다. 그 중심에 5계열 책임부총장제가 있다. 각각의 부총장이 예산 및 연구지원을 차등화해서 단위별 경쟁을 시키기 위해서는 ‘상시적인 평가’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이들 학과/학문을 평가할 것인가? 소위 잘 나가는 경쟁력 있는 학과는 대폭적인 재정지원을 받고 이외의 학과들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당장에 폐과시킬 경우 예상할 수 있는 강력한 반발을 최소화하면서 합법적으로 도태시키겠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경쟁력 있는 학과라는 것은 곧 취직에 유리한 학과, 기업이 원하는 지식을 가르치는 학과를 의미한다. 대학에서 생산하고 유통하는 지식을 이윤추구를 중심으로 재편시키는 힘, 상시적인 평가는 대학의 기업화를 추동할 것이다.

 사실 현재 발표된 구조조정안 자체만 보아서는 각 과가 어떻게 변화할지 제대로 예측할 수 없고, 노골적으로 경쟁력 있는 학과만 남기겠다는 의도를 투명하게 읽기는 어렵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위에서 말한 것들이 대학교의 운영원리 자체를 바꾼다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앞으로 어떤 식으로 이 대학이 변화할 지를 예측가능하게 해준다. 즉, 당장의 구조조정 계획안에서 살아남은 과도 이러한 시스템 하에서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될 시에 충분히 ‘사실상 포기학과’가 될 수 있다는 것이고, 오히려 지금 제출된 구체적인 안 자체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아니, 5계열 책임부총장제라는 대학 운영원리가 의미하는 바를 통해서만 구체적인 학과 개편의 맥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시대에 따른 학문 수요의 변화, 대학 기업화는 필연인가

“비싼 등록금 받고 사회에 나가서 써먹지도 못하는 지식을 가르치는 것은 죄 받을 일이다. 교수들 스스로 뒤떨어진 것 인정하고 매달려야지, 그렇지 않고 예전처럼 안일하게 가르쳐 졸업생을 실업자로 만들어 놓으면 학문 분야도 손해가 된다.”
- 중앙대 박범훈 총장 인터뷰

그렇다면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경쟁력 없는 학과가 도태되는 것이 문제인가? 이러한 질문은 학문과 교육이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인재를 생산하는 데 가장 큰 목적이 있다는 관점을 기반으로 한다. 즉, 학문의 수요자가 기업과 사회라는 것이다. 일면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대학을 나와도 취직하기가 어렵다’는 불만과 ‘대학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은 얼핏 보면 같은 것이지만 전혀 다른 것이다. 대학을 나와도 취직하기 어렵다는 것은 대학에서 실용적인 학문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또한 대학이 너무 많기 때문도 아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고용 없는 성장이 지속되고 있는 이 사회 전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대학에서 아무리 기업에서 써먹기 좋은 실용적인 지식을 가르친다 해도, 너도 나도 그러한 변화를 꾀하는 가운데 대학을 나와도 취직하기 어렵다는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학교가 아닌, 내가 다니는 학교만 기업이 원하는 방식으로 재편될 때 내가 더 좋은 곳에 취직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이에 비해 대학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은 전 사회적인 문제로 여겨지지만 사실 정확히 ‘기업만’의 문제이다. 금융화되는 사회에서는 소수의 고급지식노동자가 필요한 한편, 그 외의 모든 일자리가 불안정해지는 가운데 이에 적응할 수 있는 노동자가 필요하다. 이러한 노동자를 만들어내는 것은 기업과 정부에게 굉장히 중요한 일인데 이를 담당하는 것이 교육체계, 그 중에서도 고등교육기관인 대학인 것이다. 때문에 대학의 변화는 변화된 산업구조에 맞는 노동력을 생산하기 위한 필수조건이 된다. 대학구조조정이 ‘시대의 변화에 따른 학문수요의 변화’라는 말로 포장되어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회 전반적인 문제인 실업을 개인의 스펙 부족으로 정당화하고, 대학의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가운데 대학은 조금 더 기업이 원하는 노동력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배출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지식과 교육은 이윤추구를 위한 것으로만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학문수요는 결국 기업경영에 필요한 지식이고, 사회가 요구하는 교육은 일상적으로 평가받고, 잘리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를 계발하는 것을 당연한 삶의 원리로 삼는 수 많은 노동자군을 생산할 수 있는 교육을 말하는 것이다.
대학의 기업화는 시대의 흐름에 따른 어쩔 수 없는 변화가 아니라, 명확하게 기업의 입장에서 필요한 대학의 변화다.


대학 위기의 원인

 대학구조조정이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는 배경은 교육에 대한 위와 같은 관점이 밑거름이 되는 한편, 실제로 많은 대학들이 입학정원을 채우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립학교의 비대화․부실화는 사학 자본들의 난립과 경쟁으로 인해 심화․확대되었으며, 경쟁력 이데올로기가 학생, 교직원사회에 퍼지면서 대학과 학문이 죽어가고 있다. 이러한 대학의 위기는 어디에서부터 왔을까. 한국에서 대학은 과거 산업 자본의 수요 충족과 대중들의 계층상승 욕구가 결합하여 양적인 팽창을 거듭했다. 고도의 산업성장과정에서 대학은 국가와 자본에게 고급 노동력의 공급을, 개인에게는 부와 지위의 획득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줌으로 해서 양적팽창의 정당성을 확보해왔다. 하지만 불황으로 인해 이제 대학에서 양산한 노동력을 모두 수용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제 대학은 ‘과잉노동력’을 양산하며 계층상승은커녕 안정적인 일자리조차 보장해주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1980년대까지 정부는 고등교육의 확대를 제어하는 방향으로 일관하다가 5공화국 들어 이른바 7․30교육개혁조치로 대학의 문호를 개방한다. 이후로 꾸준하게 대학의 규모가 증가하다 90년대 중반에 또 한 차례의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95년 5․31교육개혁조치의 일환으로 대학설립준칙주의가 도입되면서 96년도 이후부터 사립대학을 중심으로 대학정원과 대학수가 증가했고, 1990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약 10년 만에 대학생 수가 2배 가까이 늘어났다. 대학의 양적 팽창은 산업성장과정에서 시장의 필요와 정부의 정책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 대학의 변화는 필연이 아니라, 자본과 정부의 ‘선택’이었다.

 때문에 현재 대학의 위기라고 불리는 상황은 자본과 정부의 선택이 이제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게 된 것일 뿐이고, 때문에 새로운 재편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대학이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점점 기업의 입맛에만 맞는 지식을 생산하고 그것을 이 사회에 필요한 지식과 동일시하는 현상, 서로가 서로를 밟고 올라서기 위해서 경쟁하는 천편일률적인 ‘인재’만을 길러내는 것이 진정한 대학의 위기 아닐까. 

우리에게 교육과 학문은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학문의 수요자는 기업인가? 아니, 학문에 공급자와 수요자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관점 자체가 이미 기업의 시선으로 교육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교육은 기업이 원하는 노동자로 자라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삶을 내가 통제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 즉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지식을 얻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대학의 구조조정이 위험한 이유는 결국 모든 교육과정이, 세상에서 ‘지식’이라고 인정받는 것들이 모두 ‘기업이 원하는 노동자’가 되기 위해서만 존재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지금 중앙대학교에서는..

 12월 29일의 구조조정안 발표는 중앙대학생들에게 충격적이었다. 08년 때부터 조금씩 구조조정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이에 학생대표자들이 총장님께 사실 확인을 요구했는데 총장님의 대답은, ‘허위사실 유포하는 자를 데려오라’였다. 시간이 지난 지금, 어떠한 이야기도 듣지 못했던 학생들에게 날벼락 같은 학과통폐합 계획안이 언론을 통해 뿌려진 것이다. 일찍부터 학생들은 학교에 구조조정에 대한 계획을 함께 논의하고자 수차례 요구했다. 그런 요구를 무시하고 특히 구성원들이 학교에 없는 ‘방학’기간에 구조조정 계획안을 발표한다는 것은 대화하겠다는 의지조차 사라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개편 대상 학과를 평가하는 기준도 명확하게 공개하지 않았고, 학우들에게 돌아온 것은 평가된 ‘결과’일 뿐이었다. 학교는 방학동안 의견수렴 기간을 거쳐 3월에 최종안을 결정한다는 입장이지만 방학 기간을 통해 그것이 얼마나 가능할지 의문이다.
 대학 자체를 뒤바꾸는 대규모 구조조정계획에 대해 중앙대 학생들은 ‘구조조정에 맞선 학생대책위원회’를 꾸리고 긴급 토론회, 질의서 발송, 학생 요구안 수합, 확대운영위원회 개최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번 구조조정계획이 어떤 변화를 의미하는 것인지 학내 구성원들이 ‘정보’를 알 수 있고, 토론할 수 있도록 각 과별 간담회 등을 기획하고 있다.

더욱 본격화될 대학구조조정에 맞서, 대학 기업화의 진실을 폭로하자!

 “향후 10년간 대학과 기업의 불편한 동거가 아니고 찰떡 궁합의 행복한 상생이 될 것입니다.
10년을 지켜보신 후에 이와 관련된 글 하나를 써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 드립니다.”

-경향신문 기사 ‘대학과 기업의 불편한 동거’에 대한 반박, 중앙대학교 이사장 박용성

  중앙대학교 이사장은 자신만만하다. 개혁의 결과는 기업 개혁의 결과와 같이 실적으로 증명하겠다는 것이다. 그 실적은 중앙대의 대학서열 상승, 취업률 등으로 나타날 것이다. 중앙대 구조조정은 앞으로 대학이, 교육기관의 발전이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어떤 대학이 필요한지 대중들에게 강력하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때문에 이 싸움은 중앙대 학우들만의 문제가 아니며 모든 대학생,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문제다. 우리 모두, 우리들에게 필요한 학문과 교육에 대한 논쟁을 시작할 때다!   



[참고자료]

1. 인문/사회계열
1.1. 인문대학
민속학과가 폐지되고 역사학과에 통폐합 될 예정이다. 아시아문화학부, 유럽문화학부가 기존 학과들의 통합을 통해 신설되었다. 아시아문화학부 내에는 인도문화가 신설되었다. 이번 구조조정에서 기초학문분야인 인문학을 육성하겠다고 학교 본부는 천명했고, 실제로 완전폐지의 경우는 거의 없었다.

1.2. 사회과학대학
낮은 평가를 받은 복지계열학과가 사회복지학부로 통합되었고 신문방송학과와 광고홍보학과가 합쳐진 미디어홍보학부가 생겨났다. 공공인재학부 역시 이곳으로 배치되었으며 도시계획․부동산학과가 안성 캠퍼스의 도시 및 지역계획학과에서 변경되었다. 심리학과, 문헌정보학과, 사회학과는 좋은 평가를 받아 학과체제로 존속되었지만 정치외교학과/국제관계학과는 낮은 평가를 받았다는 이유로 폐과대상이 되었다.

인문대학과 사회과학대학의 대부분의 학과들이 학부제 모집으로 통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번 구조조정안에서 전반적으로 학부제 모집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유독 인문/사회계열, 자연계열에서 저평가를 받은 것으로 짐작되는 학과들이 학부제로 묶이는 경향을 보였다. 학교 측은 ‘기초학문분야 육성을 위해’ 학문단위 광역화를 실시한다고 하지만 뚜렷한 목표나 전략이 없이 단지 비슷하기에, 또는 행정적인 편의라는 이유로 묶는 학부 광역화는 걱정되는 부분들이 많다.

1.3. 사범대학
체육교육과와 가정교육과가 폐지되었다. 그 이유는 평가안에서 ‘下’ 등급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신 국어교육과, 수학교육과가 신설. 교육학과의 경우는 낮은 평가를 받았지만 1년 간 유예기간이 주어졌다고 한다.

2. 경영/경제계열
경제학과, 경영학과, 통계학과가 한데 묶였다. 또 글로벌지식학부가 신설되었다. 글로벌지식학부의 경우 총 정원이 145명이며 교육과학기술부와 중앙대가 처음으로 도입한 학과이다. 실업계 고교 출신 직장인들 중 3년 이상 일한 사람들에 한해 수능성적 없이 입학할 수 있게 한 제도. ‘학사MBA’라 불리고 있으며 경영학을 배우며 평일 야간, 주말 등에 주로 운영된다.

3. 자연/공학계열
흑석캠퍼스의 자연대학과 안성캠퍼스의 응용생명과학부가 통합되어 자연과학대학이 되고 공과대학이 같은 계열로 묶이게 되었다.

3.1. 공과대학
공과대학은 신설되는 학과가 많고 그만큼 없어지는 과도 많다. 건축학부만이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고, 건설환경공학과, 도시공학과가 폐과되며 건설플랜트공학과가 신설된다. 건설플랜트공학은 건설환경공학과 도시공학의 성격과는 전혀 다른, 공학 인프라 구축-해외 담수시설, 원전 플랜트 공사 등- 을 주되게 연구한다. 두산건설, 두산인프라코어 등의 존재를 생각했을 때 대학에서 생산된 지식이 두산 계열사에 직접적으로 제공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기계공학부와 신설학과가 합쳐져 E/S공학부가 신설된다. 추가되는 전공은 로봇공학, 의료공학으로서 기계공학부의 세부전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3가지 전공이 동등한 지위로 설정이 되어있다. 전자전기공학부와 컴퓨터공학부가 합쳐지고 인공지능 전공이 신설되어 IT공학부가 생겨난다. 마지막으로 화학신소재공학부와 신설된 에너지환경공학의 구성으로 에너지공학부가 탄생한다. 공과대학은 그 어느 단과대학보다 학과 통폐합-재배치가 많은데 이는 ISB계열을 주력사업에 둔 두산그룹이 공과대학을 많이 신경 쓰고 있다는 이야기다. 특히 건설플랜트공학과, E/S학부, 에너지공학부 등의 신설에서 두산그룹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즉 두산그룹의 사정에 따라, 또는 시장상황에 따라 앞으로도 학과 재조정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불안정성에 처할 가능성이 높을 수 있다.

3.2. 자연과학대학
지난 10월 19일 문제의 한국일보 기사에서 ‘사실 상 포기’대상에 들어갔었던 자연과학대학이 공과대학과 같은 계열로 묶이게 되었다. 수학과와 물리학과가 합쳐져 수학물리학부를 신설되고, 99년 정경대에서 적을 옮겼던 통계학과는 또다시 자연과학대학에서 나와 경제․경영 계열로 가게 되었다. 또한 화학과와 생명과학과를 합쳐 화학생물학부를 만든다. 2캠퍼스의 산업과학대학/생활과학대학의 과들이 응용생명과학부로 재편되는데, 생명공학과를 통합시켜 의생명공학 전공을 새로이 두게 되었다. 앞서도 지적했다시피, 자연과학대학 역시 ‘순수학문 육성을 위해 학부제로 광역모집’되는 주된 단위가 되었다.

4. 예체능계열
4.1. 예술대학
공연영상창작학부와 디자인학부, 미술학부, 음악학부, 전통예술학부로 구성된다. 이 중 공연영상창작학부는 문예창작, 연극, 영화, 사진, 현대무용 전공으로 나뉜다. 연극, 영화전공의 경우 이미 3년 전에 미디어공연영상대학으로 바뀐 적 있는 연극영화학부가 다시 분리되어 구조조정되는 다소 어이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2006년 당시 학교 측은 정경대 신문방송학과와 예술대 연극학과, 영화학과 3과를 통합하여 미디어공연영상대학을 만들었다. 당시 미공영대는 연극․영화학과가 수도권 대학 특성화 사업에 선정되면서 받은 정부지원 121억 원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창조적 융합 교육을 위해’, ‘공연 영상 중심의 교육을 통한 차세대 전문 인력 육성’이 그 목표였다고 한다. 그러나 3년 만에 계획은 뒤바뀌어 신문방송학과는 사회계열로, 연극․영화학과는 예술대로 재편성되었다.

4.2. 체육대학
안성 캠퍼스의 사회체육학부와 흑석 캠퍼스 사범대학 체육교육과가 통합되어 체육학부 단일 학부 대학으로 구성된다. 사회체육학과의 성격이 강할 것으로 보이며 체육교육과의 특성은 거의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Posted by 행진

2010/01/15 01:54 2010/01/15 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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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신년연설을 통해 본 2010년 예상도


■“2009년, 우리가 얻은 것은 자신감입니다.”

  집권 3년차를 맞는 이명박 대통령은 4일 신년연설에서 '더 큰 대한민국'을 내세우며 2010년 국정운영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구체적으로 보면, 올해 3대 국정운영기조로 ▲글로벌 외교 강화 ▲경제 활력 제고 및 선진화 개혁 ▲친서민 중도실용을, 5대 국정과제로 ▲경제회생 ▲교육개혁 ▲정치선진화 개혁 ▲전방위 외교 및 남북관계 변화를 각각 제시했다.

  지난 해 신년연설의 기조 및 과제와 비교해보면 내용에 있어서 큰 틀에서는 차이가 없었으나, 지난 해 연설에서 '위기'를 29차례나 언급하면서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기 위한 국민들의 고통분담 강조에 중점을 두었다면, 올해 연설은 '대한민국'을 14차례, '변화'를 13차례 언급하면서 2010년을 향한 긍정적, 희망적인 비전을 중점적으로 전달했다. '세계 최초로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G20 정상회의 2010년 개최국', '원자력 수출 협정 체결'은 대한민국의 변화된 위상을 보여주었고, '선진 일류국가'라는 브랜드에 '외환보유고 6위', 사상최대 무역흑자, 내년 경제 성장률 4.5% 예상' 등 희망적인 수치들을 새겨 넣었다.


■  “올해 우리 정부는 '일자리 정부'로 자리매김하겠습니다.”

  여러 정책 중에서 이명박 정부는 일자리 창출에 중점을 두면서 스스로를 ‘일자리 정부’라 명명하며 특히 이 부분을 강조했다. 그러나 실제 조사에 따르면 2010년 정부가 창출하는 일자리의 월평균 임금은 최저임금(83만6천원. 2009년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며 초단기 일자리가 대부분이어서 2010년에도 정부의 일자리 정책은 결국 더 많은 불안정 노동을 양산할 것으로 예상된다. 일자리를 20만개 창출하겠다고 발표하고 있으나 수치만 높여서 강조할 뿐, 실제로는 올해에도 작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자리 정책이 시행될 것이라고 예상되고 있다.

  작년을 돌이켜보면, 정부에서 일자리 정책 중 매우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청년인턴 사업은 이로 인해 6만 6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혜택을 봤지만 몇 개월이 지나고 곧 다시 일자리를 잃었다. 이러한 땜질식 일자리 대책으로 일시적으로 공식 실업자 수를 낮추면서 정부는 경제 위기 속에서도 OECD국가 중 실업률이 매우 낮은 편에 속한다고 선전하지만, 공식 실업자 수에 취업준비생이나 구직단념자 등을 포함한 ‘사실상 실업자’는 지난 11월 300만 명을 넘어서고 있어 사실상 실업률이 12.6%를 기록했다. 정부가 발표하는 공식 실업률(3.3%)의 4배 가까이 되는 실업률이 은폐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용 없는 성장’ 속에서 정부가 추진하는 일자리 정책은 결국 당장 실업률을 끌어내리기 위한 불안정 일자리 만들기에 불과했다.

  올해 연설에서 추가적으로 실업 해결책이라고 제시한 ‘직업 훈련 체제 강화’나 ‘노동력 수요-공급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한 통합정보망 구축’ 등 어느 것도 궁극적인 원인에 대한 처방을 비껴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신년 연설에서 실업과 단기적 취업을 오갈 수밖에 없는 현재 사람들의 불안정한 상황을 ‘복수 직업 시대’라 포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평생 하나의 직장만 갖는다는 고루한(!) 생각에서 벗어나 일자리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 경제 수단이 아닌 ‘자아실현’ 수단으로서 일자리를 바라볼 것을 당부하지만, 자아실현은커녕 경제 수단에도 미달하는 것이 현재 사람들의 일자리이다.


■ “'일로영일(一勞永逸)'의 자세로 선진 일류국가로 가는 초석을 확실히 다지겠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신년 연설에서 드러나는 자신감은 지지율 상승에 힘입은 것이다. 올해는 임기중반을 통과하는 해로 초기의 지지율을 다시 되찾기 위한 이미지 쇄신을 꾀하고 있다. 그 결과 촛불집회,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사태이래로 급격히 하락했던 국정 수행에 대한 지지율은 50%대를 회복했으며, 모 언론사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70%에 가까운 사람들이 내년 우리 경제가 좋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일로영일의 마음으로 나라의 기초를 튼튼히 닦겠’다고 말하면서 신년화두를 ‘일로영일’로 삼았다. 청와대가 올해의 사자성어로 뽑은 ‘일로영일(一勞永逸)’이란 ‘지금의 노고를 통해 이후 오랫동안 안락을 누린다’라는 뜻이 담긴 것으로, 정책을 택함에 있어서 지금 당장의 효과도 중요하지만 먼 미래 후손의 안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뜻에서 이 사자성어를 택했다고 청와대는 그 취지를 밝혔다. 마치 이명박 대통령 스스로는 당장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후대의 경제번영까지 생각할 줄 아는 ‘현인’으로 승격시켰으며, 이에 대조하여 생존권을 지켜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사람들을 당장의 잇속밖에 차릴 줄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로 격하했다. 올해에도 다시 한 번 어떠한 저항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밀어붙이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올해는 또 어디서 용산에서와 같은 불꽃이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갈지, 쌍용자동차 공장에서처럼 매캐한 최루액이 쏟아져 내릴지 모를 일이다. 분명한 것은 ‘잘 살기’ 위해 추진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경제성장 정책이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짓밟을 것이라는 것이다.

  당장의 노고와 어려움은 고통분담으로 함께 이겨내자고 말한다. 신년 연설에서 ‘세계에서 경제위기를 가장 잘 극복한’ 것은 ‘고통을 분담하려는 정부의 정책에 국민들이 너무도 잘 참고 잘 호응해’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2년 연속 임금 동결을 감내해준 공무원들에게 감사의 말까지 보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처럼 과대 포장된 2010년 경제성장률을 마치 고통을 분담하여 대한민국 특유의 저력으로 경제위기를 잘 이겨낸 결과 얻어진 것으로 만들면서, 더 큰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올해에도 아낌없는(!) 고통분담을 주문했다. 그러나 최근 5년간 경제위기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국내 기업의 매출이 꾸준히 증가했던 것에 반해, 평균 임금인상률은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최저 수준으로 1.7%(물가상승률을 적용하면 사실상 ‘삭감’이다)에 머물렀다는 점을 볼 때, 그토록 지난 해 호소했던 ‘고통분담’이 민중에 대한 일방적인 책임 전가에 불과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 우리 목을 조여 올‘선진화’라는 환상을 벗어던지자!

  신년을 맞이하여 모 언론사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10년 안에 선진국 대열에 진입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이 과반수에 이르렀다. G20 개최, 원자력 수출 등 지난 해 쏟아져 나왔던 몇몇 상징들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선진 일류 국가’로서의 이미지에 사로잡히게 했다. 그러나 이처럼 정부에서 유포하는 ‘선진국’이라는 이미지에 집단적으로 도취되어 있다면 정부에서는 끊임없이 이러한 환상을 부추기면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당장의 고통 감내, 즉 ‘일로영일’ 정신을 내세워 우리의 생존권을 공격해 올 것이다.

  출구전략에 대한 논의가 곳곳에서 쏟아져 나오지만 여전히 전세계적으로 경기 침체는 계속되고 있고 더블딥 가능성까지 점쳐지고 있는 상황에서 세계 경제와 연동되어 작동되고 있는 우리나라가 유일하게 경제위기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얼마간은 경제위기가 계속될 것인데, 경기 침체의 장기화는 실업, 부채 증가 등 사람들이 삶의 질을 점점 더 악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선진화’, ‘선진화’를 외치면서 더 악화된 삶의 조건마저 장밋빛 미래를 위해 감내하게 만들 것이고 이에 대한 저항은 ‘생각, 행동양식의 선진화’를 내세우면서 다시 억압당할 것이다.

  “오늘 소담스런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으며 새해의 시작을 축복하는 듯합니다.”라는 말로 시작된 신년 연설에서처럼 그날은 유례없이 많은 눈이 내렸던 하루였다. 새해 첫 근무일에 예상치 못한 폭설로 서울의 온 교통은 마비되었지만 어쨌든 눈은 그러한 세상사에는 초연한 듯 쏟아져 내렸다. 이처럼 생존권을 보장하라고 외치는 우리의 목소리 위에도 ‘선진국’이라는 새하얀 이미지가 뒤덮으려 하고 있다. 정부는 지금 당신의 고통은 대한민국이 아직 선진화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처럼 이야기하면서 경제성장에 방해가 되는 어떤 걸림돌도 제거할 기세이지만 ‘선진국’이라는 이미지는 언젠가는 녹아 없어져버릴 환상일 뿐이다. 경제 위기 시기 어느 때보다도 거세질 노동에 대한 공격에 맞서 진짜 우리의 삶을 선진화시켜낼 수 있는 대안을 이야기하자. 경제위기에 따른 고통분담을 명분으로 노동자들의 탄압이 정당화될 수 없음을, 정부의 일자리 정책이 사실상 단기간, 저임금 일자리 양산에 불과함을 적극 알려내자. 우리의 생존권은 선진화 정책에 의해 오히려 억압될 것임을 폭로해내는 2010년을 만들어가자.


Posted by 행진

2010/01/15 01:46 2010/01/15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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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에도 멈추지 않는 노동자 탄압
- 노조법 통과에 부쳐-



1. 신년과 함께 찾아온 노조법 통과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꿈을 안겨줘야 할 2010년 1월 1일, 새해가 밝기도 전에 우리는 노조법 날치기 소식을 전해 들어야 했다. 개정은 없을 것이라던 임태희 노동부장관이 하루 만에 입장을 바꿔 노조법을 꼭두새벽에 통과시킨 것이다. 이번 노조법 개정안처리과정에서는 노동부장관의 말 바꾸기부터 자기당위원의 출입을 막은 환노위 회의까지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들이 벌어졌다. 정권에게 있어선 이번개정안 통과는 더 이상 법의 테두리에는 노동자들이 있을 곳은 존재치 않는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개정안에는 복수노조 시행 유예, 타임오프제, 복수노조 단일창구화, 노조전임자임금 지급 금지를 골자로 하고 있다. 본 개정안이 시행될 경우 민주노조는 그 존립마저 위기에 처하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정권과 여당, 경영계는 전임자임금지급이 노조의 자율성을 훼손하고 노사관계를 망친다며 지급 금지를 강도 높게 주장 해왔다. 이번 개정안 날치기통과로 전임자임금 지급금지는 올해 7월 1일로 시행되게 된다. 하지만 지난 96년 제정된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는 그동안 노동계 및 학계 등의 강력한 반발과 폐지요구 속에 13년 동안 계속 유예되었던 조항이다. 사용자와 노동자의 불평등한 권력관계 속에서 노동자들이 자신들에게 보장된 권리들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장선이 노동조합이다. 더욱이 한국은 고강도 장시간노동이 일반화되어 있고 300인 이하사업장 노조가 전체노조의 90%를 차지하는 열악한 상황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일을 하며 노조활동까지 병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노조전임자는 노조운영, 노무관리 외에도 민주노조로서 정치적 활동과 조합원 조직, 교육활동에 있어 없어선 안 될 존재이다. 게다가 정부의 주장과는 달리 대부분의 노조전임자 급여는 투쟁과 단체협상의 결과물로 쟁취해왔던 권리이다. 민주노조 와해와 같은 목적이 있지 않은 이상 회사가 나서서 전임자 임금을 지급하는 경우는 드물다. 설령 회사의 개입이 있다 하더라도 이는 부당노동행위로 현행법상에서도 처벌이 가능하다. 하지만 정권과 여당은 이런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향후 7월부터 전임자 임금지급이 금지된다면 노조는 전임자임금부담으로 인해 운영에 있어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소속노조의 노동조합비로 운영되는 상급단체 역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자연스레 노동조합 전체의 무력화로 이어질 것이다. 또한 전체 노조전임자 임금이 노동조합비보다 많은 상황이라는 점에서 노조의 약화는 피할 수 없다. 이런 정황들을 보더라도 정권은 겉으로는 법과질서 노조의 자율성을 말하지만 노조에 경제적 압박을 가하여 활동을 축소하고 약화시키겠다는 것이 속셈임을 보여주고 있다.

- 유급근로시간면제제도(타임오프제)
이번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시행될 타임오프제는 노조전임자의 업무시간에 있어 노조활동 시간을 보장해주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얼핏 보면 전임자임금이 금지되는 와중에 전임자의 임금지급이 가능한 활동시간을 보장해줌으로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 보인다. 하지만 타임오프제는 전임자의 ‘기업의 노무관리를 대행하는 활동’ 에 있어서만 인정되며 전임자의 노조 교육 및 정치활동을 배제하고 있다. 이는 노조전임자의 역할을 노무관리수준으로 제약하고 있어 전임자임금만 금지되었을 현행법보다 더 후퇴한 것이다. 수많은 워크샵에서도 타임오프제가 노조의 자율성을 훼손할 치명적인 제도임이 지적되었다. 게다가 개악안이 통과한 것도 모자라 시행령 예고안에는 노조전임자수 제한규정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는 전임자의 활동자체와 그 숫자를 법적으로 규제하여 노조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겠다는 정권과 여당의 의도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
 복수노조 자체는 노조결성의 자유라는 차원에서 보장되어야 할 기본적 권리다. 군사정권 하에서는 민주노조 설립을 막기 위해 법적으로 단일노조를 강제되어왔다. 민주화이후 노동계는 복수노조를 강력히 요구해왔다. 하지만 정권과 사측은 이를 노조 전임자임금지급 문제와 연동시켜 노사 간 타협과 흥정거리로 전락시켜왔다. 13년 동안 이를 유예시키며 버텨온 정권은 복수노조 허용시기가 가까워 오자 이를 무력화 시키고자 교섭창구 단일화라는 카드를 들고 나온 것이다. 복수노조가 있어도 교섭권을 한 창구로 만드는 교섭창구 단일화는 교섭권을 두고 노노간 싸움을 야기하여 실질적으로 복수노조를 허용치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자율적 단일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과는 달리 노조의 권리를 보장하겠다고 하지만 노조 간 경쟁 상황에서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단일화 실패 시 조합원 수 산정 시점까지 약 1달의 여유동안 사측은 언제든 어용노조를 만들 수 있게 하는 조항까지 담고 있어 노조탄압을 부추기고 있다. 현안대로 시행될 시 노조 간의 이해가 상충될 때 힘과 규모가 약할 수밖에 없는 비정규, 여성과 같은 소수노조의 발언권 자체가 소멸될 위험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창구단일화는 노사 간 교섭에 노조의 참여를 막고 있어 노동3권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에 다름없다. 이번 개악안에 의해 복수노조허용은 그 실질적 효과를 잃게 될 수밖에 없으며 오히려 노동자들 간의 경쟁, 대립과 어용노조의 난립으로 이어질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2. 현 정권의 노골적인 노조 말살정책

 비단 이번 날치기뿐만이 아니다. 정권은 작년 통합공무원노조가 민주노총에 가입하자 정치활동을 벌이는 노조에 가입했기 때문에 공무원노조를 불법이라 규정하였다. 이후 노동조합설립을 반려하였으며 사무실압수수색/폐쇄 등 수단을 가리지 않고 노조를 탄압하였다. 철도파업에서도 다를 바는 없었다. 공사의 일방적인 협약에 맞서 철도노조가 파업은 합법적인 절차를 거친 준법투쟁이었다. 하지만 정권은  공공부분 선진화정책에 반대하는 정치적 파업이기 때문에 이를 불법파업으로 규정하였다. 여론과 대통령은 철도파업을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한 이기적인 불법파업이라며 철도노조를 몰아세웠다. 공무원, 철도의 사례에서 보여주듯이 공공부분선진화 노조의 파업을 공권력으로 탄압하는 것을 넘어 노조자체를 와해시키려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더 이상 자신들의 국가정책에 적극적인 방해요소가 될 수 있는 민주노조자체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의지를 보여준다. 전태일의 분신부터 시작된 노동운동자체를 사회적 악으로 규정하고 파업과 같은 활동부분의 통제를 넘어 노조자체를 와해시키려 하는 현 정권의 탄압은 더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번 신년연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명박 대통령은 노동자들이 참고 노력하면 경제위기가 해결되고 좋은날이 온다며 ‘일로영일’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주장은 지난 97년 IMF당시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IMF 고통분담 속에서 기업과 주주들은 민중들의 고통위에 살아남았지만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노동권의 전반적인 후퇴와 전 국민의 빈곤화, 실업대란이었다. 정권은 지난 97년IMF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이익보장을 위해 민주노조의 투쟁을 말살하고 민중들에게 고통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97년의 파괴된 서민경제가 회복되지 않은 만큼 민중들의 삶은 더 나락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한 민중들의 불만 관리는 정권의 최우선 목표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기만적인 서민정책과 함께 더 강도 높은 노조말살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3. 노조가 노동권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것은 정당한 권리이다.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만드는 것이며 국가는 노조의 권리를 보장하고 노동자들의 노동권을 보장할 의무를 지닌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이와 같은 의무를 지켰던 정권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전태일의 분신 이후 본격화된 노동운동과 민중들의 투쟁은 항상 정권의 모진 탄압을 받아 왔다. 자본과 정권의 힘 앞에 미약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노동이 보장되기 위해선 연대와 단결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현실 속에서 연대와 단결을 모아내는 노동자들의 공간이 바로 노조였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은 좋아졌다고 이정도면 된 것 아니냐고 한다. 하지만 정권은 시기별로 파견법, 비정규직보호법, 노조법개정안 등 계속해서 노조와 노동운동을 탄압해왔다. 이는 작년 말부터 더욱 심화되어 이젠 노골적으로 노조를 말살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노조의 시작이 노동권의 시작이었듯이 노동권에 대한 말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때문에 노동자들의 파업은 단순히 그들만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넘어 이 사회 전체 노동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인 것이다.

4. 연대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우리에게 노동권이라는 말은 아직도 어색한 말이다. 노동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회에서 노동권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 그 이상 그 이하일 수도 없다. 하지만 정권과 여론은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노동자들의 파업과 투쟁을 집단이기주의, 불법폭력행위로 몰아가면서 자신들의 정책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을 사회저해세력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들이 조장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노동권을 빼앗기고 있으며 우리의 노동권을 지킬 수 있는 방법들을 점점 더 잃어가고 있다. 850만 명이 비정규직인 사회, 경제위기속에서 기업의 이윤을 지키기 위해 노동자들부터 해고되는 사회에서 정부의 反노동정책에 맞선 노조의 투쟁은 노조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권의 노조공격은 노동권 일반에 대한 공격이며 이에 맞선 노조의 투쟁은 이 땅 노동권의 최후 보루이다. 정권의 탄압이 완성될 경우 우리의 노동은 더 이상 권리가 아닌 고역으로 전락 될 수밖에 없다. 시작부터 파행을 거듭하고 있는 2010년, 우리의 내일은 어둡기만 하다. 하지만 넋 놓고 구경하고 있다간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생존조건에도 미달하는 열악한 저질의 일자리 일수 밖에 없다. 돌아오는 7월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를 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누군가의 권리가 아닌 우리 모두의 노동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노동권의 최후보루인 노동조합을 지키는 싸움에 우리 모두 함께하자!!!


Posted by 행진

2010/01/15 01:36 2010/01/15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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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를 치러도
용산참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355일 만이다. 삶의 터전을 떠날 수 없어 망루에 올랐지만 살아서 내려올 수 없었던 그 철거민들의 장례를 치르는데 꼬박 일 년이 걸렸다. 언제나 회피하려고만 했던 정부가 자신의 책임을 일부 인정하면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던 용산참사는 이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당연한 권리를 박탈당한 채 외로움 싸움을 벌이다 산화한 고인들의 장례를 늦게나마 치를 수 있게 된 건 분명 다행인 일이다. 냉동고에 있는 아버지, 남편의 주검을 곁에 두고 장례식장에서 일 년을 지낸 유가족의 고통도 조금은 덜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용산참사는 자본의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 내달리는 우리 사회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하지만 시민들의 주거권을 축소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던 뉴타운/재개발의 문제를 고발하는 대가는 결코 적지 않았다. 정부의 거듭된 탄압을 견디면서도 이 문제의 해결을 바란 양심 있는 사람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총리의 불만족스런 유감 표명을 끌어내는 일조차 난망했을 것이다. 이렇듯 용산 문제가 다른 궤도에 접어든 데에는 많은 시민들의 지지와 성원의 힘이 컸다. 다만 서울시가 연말에 갑자기 태도를 달리하며 협상을 요구한 일은 어딘지 미심쩍다. 일 년 가까이 아무런 진전도 없었던 데서 볼 수 있듯 용산참사를 망각시키려는 정부의 의지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달라진 것처럼 보이는 서울시와 정부의 태도 이면에 숨겨진 계산법은 무엇일까.


선거를 앞둔 서울시의 이미지 관리

서울시와 용산범대위는 작년 수차례 대화를 진행했지만 번번이 정부 사과 부분에서 막혔다. 사과 얘기가 나올 때마다 서울시는 "우리 소관이 아니다"라며 문제를 회피하기에 급급했다. 용산참사는 돈 없는 사람들을 내쫒으면서 도시를 '디자인'하는 정부가 빚어낸 학살이기 때문에, 정부에게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하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서울시의 퇴짜로 대화는 번번이 결렬되었고, 그 동안에도 용산과 관련된 기자회견․캠페인․문화제는 불법으로 간주되어 참가자들이 연행당하는 등 정부의 탄압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연말이 되자 서울시는 갑자기 용산범대위와 물밑 접촉을 하며 대화 재개를 요구했다.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서울시의 '협조적'인 자세는 정부가 그토록 기피하려 애쓰던 책임 인정의 문제를 이끌어냈다. 갑자기 진행된 대화에서 일 년을 두고 싸웠던 핵심 사안 중 하나가 합의된 것이다. 어딘가 변한 것처럼 보이는 서울시의 달라진 태도는 올해 그들이 생각하는 '중요한 일정'과 관련이 있다. 6월에 예정된 지방 선거에서 서울시장에 출마하는 경쟁자들의 상호견제가 벌써부터 뜨거워지는 가운데 현 서울시장인 오세훈의 마음은 조급하다. 만약 용산참사가 해를 넘겨 올해까지 사회적으로 쟁점화 된다면, 쟁쟁한 라이벌과의 선거 경쟁에서 오세훈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장례를 치른 것을 이유로 용산 문제가 더 이상 불거지지 않기를 소망하고 있다. 그리고 한 술 더 떠서 서울시가 도움을 주려 노력했기 때문에 고인의 장례나마 치를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일관되게 용산 문제를 억압해왔던 서울시는 정부 사과를 제외한 다른 핵심 쟁점을 오히려 무마시키면서 자신이 해결에 앞장섰다는 거짓말로 추락한 이미지를 개선시키려 한다. 오세훈과 서울시가 진심으로 사건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면 일 년 동안의 숱한 탄압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번 협상으로 유가족에게 마치 자선사업이라도 한 것처럼 광고하는 서울시의 의도는 지방선거 재선을 위한 이미지 만들기에 다름 아니다. 장례 하루 전 처음으로 빈소를 찾아가 유족들에게 "유사한 사례가 발생되지 않도록 …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한 오세훈의 속내는 따로 있었다.


살인 재개발은 계속 된다

핵심 쟁점이었던 정부의 사과는 받아냈지만 용산범대위가 요구한 다른 문제들의 해결은 아직 요원하기만 하다. 용산 범대위는 △대통령 사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특별검사제 도입 △명예 회복 및 정신적, 물질적 피해에 대한 배상을 위한 특별법 제정 △재개발 관련 법제도 개선 △전철연과 범대위에 대한 공안 탄압 중단 등을 요구했다. 대통령이 아닌, 그것도 참사가 일어날 당시에 임기가 아니었던 총리의 사과가 정부의 완전한 책임을 공표했다고 보긴 어렵다. 더욱이 '떼잡이', '도심 테러리스트' 운운하며 구속한 용산의 철거민들에게 징역 *년의 중형을 선고하는 등 철거민들에 대한 정부의 탄압은 계속되고 있다. 재개발 법안(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도 11군데 개정하긴 했지만 보상을 조금 늘리거나 집행력이 없는 분쟁 조정 기구를 세우는 등 실효성이 없고 형식만 갖춘 것이라며 전문가들에게 비판받고 있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제 2, 제 3의 용산참사를 불러올 '살인 재개발'이 지금도 버젓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작년과 올해 주요 건설사들이 재개발하며 분양하는 지역만 봐도 서초구, 동대문구 제기동/답십리, 옥수, 동작구 흑석동, 성동구 금호동, 마포구 아현동 등으로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여기에 서울시가 5년 이후를 보며 계획하는 재개발 지구까지 포함한다면 사실상 도시 전체에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용산이 분명하게 보여주었듯이 개발을 통해 이득을 얻는 자, 그리고 얻어맞고 쫓겨나도 하소연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 개발이익을 둘러싼 가진 자들의 동맹은 삼성물산․대림건설․포스코 같은 자본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직접 개발에 투자하거나 승인/감독하며 계획을 세우는 지자체, 용역깡패의 불법적 행위를 묵인하고 동조하는 경찰, 사법적으로 이 모든 과정을 비호하는 검찰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을 포함한다. 있던 곳에서 묵묵히 삶을 일궈온 사람들을 내몰고 세워진 휘황찬란한 건물에 그 평범한 사람들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돈이 없어 살던 곳을 잃고, 다시 형편에 맞는 집을 찾아 헤매다 어딘가 정착할 그곳도 결국은 재개발이다. 주거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다면,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절박한 심정으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무엇을 위한 개발인가?

4일에 있었던 대통령의 신년연설은 “잘 될 것”이라는 자화자찬과 추상적 의지만 가득했다. 그가 이야기 한 ‘일로영일(一勞永逸, 지금의 노고를 통해 오래 안락을 누린다)’이란 말에는 우리가 먼 훗날엔 마치 안락을 누릴 수 있을 것처럼 믿게 만드는 환각효과가 있다. 그리고 기약할 수 없는 미래를 담보로 현실의 고통을 정당화한다. 지금도 경제 위기 하에서 대기업들의 영업이익은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지만, 노동자 서민들은 실업과 구조조정, 실질임금 하락, 복지예산 감축 등으로 삶이 피폐해지고 있다. 고생하는 사람과 안락을 누리는 사람은 서로 일치되지 않는다. 서울시가 이야기하는 재개발 담론은 집을 빼앗기는 사람과 그럼으로써 이익을 얻는 자를 만드는 구조를 은폐한다는 점에서 대통령의 연설과 닮았다.
장례를 치른 이후 건설자본과 서울시는 그 동안 중단된 용산 재개발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보수 언론에서는 철거민들의 보상 문제로 몰아가지만, 용산이 제기하는 것은 철거 당사자나 보상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용산참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답게 산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묻는 것과 같다. 우리는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권리들을 보장받고 있는가. “올 부동산투자 이렇게 하세요”(2010.01.01, 머니투데이), “한강변 재개발․재건축 최고 블루칩”(2009.12.31, 해럴드경제) 같은 기사를 보며 돈 벌 궁리를 하는 사람들에게 집은 곧 자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집은 곧 생활이며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하는 보편적인 권리로서 주거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용산참사는 보상금을 둘러싼 철거민들만의 문제로 남고, 집은 사는(Buy) 것이 된다. 보상금이 합의 된 지금, 정부와 개발사들은 용산 문제가 완전히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용산범대위는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했다. 장례를 치렀어도 용산참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인들은 이제 없지만, 자본을 위한 재개발은 없어지지 않았다. 2010년에도 멈추지 않을 살인 재개발에 맞서, 끝나지 않은 용산참사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알려 나가자!!



Posted by 행진

2010/01/15 01:14 2010/01/15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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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당선 2주년을 맞으며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지 2년이 되었다.
  이명박은 취임한 이후 100일이 되지 않아 촛불정국이라는 거대한 반격을 맞았고, 그해 가을에는 미국발 경제-금융위기로 자신이 공약했던 경제성장에 대한 약속이 산산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2009년 1월 용산에서 철거민 다섯 분의 죽음은, 이명박 식의 몰아붙이기 국정 운영에 대한 분노를 자아냈다. 하지만 현재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이명박 정권의 지지율은 40~50%로 이전의 대통령들에 비해 높은 지지도를 보이고 있다. 지난 6월에 소위 ‘친서민 행보’를 보이며 국정 운영에 쇄신을 꾀했고, 더블딥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경기가 회복되는 모습을 보였다. 이명박 정권에 맞서는 다양한 흐름들이 존재했지만 이를 모두 공권력으로 짓밟았고, 특히 2009년 여름에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을 살인적으로 진압했다. 이후 정권은 4대강 살리기 사업 등 자신이 추진했던 정책을 과감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한국 사회는 이대로 이명박 정권이 의도했던 바대로 신자유주의적 재편을 더욱 가속화할 것인가?
  한국 사회에 대해 행정부의 성격이 갖는 영향력은 엄청나다. 특히 강력한 경찰력을 바탕으로 압도적인 공권력을 행사하는 이명박 정권 아래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정권의 통치 역시 다양한 요인들; 경제적 조건, 이데올로기적 조건, 사회.문화적 조건, 국제 역학의 조건들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권의 의지 자체가 한국 사회의 성격을 규정짓지는 못하며, 일견 강고해 보이는 이명박 정권에 불안정한 요인들은 수 없이 많다.

  우선 경기침체의 위험성이 상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이명박 정권이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였고, 최근 국정 지지율이 오를 수 있었던 것 역시 각종 경제 지표가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0년 달러의 경착륙 가능성이 존재하며 이로 인한 더블딥 현상이 나타날 수 있고, 경기 침체 시기에 비상적으로 썼던 조치들을 환류시키는 ‘출구전략’ 역시 논란의 대상이다. 대규모 금융위기에 따른 후유증들은 쉽게 가시지 않을 것이며, 경제위기의 가능성은 정권의 통치를 가능하게 했던 물질적 기반들을 갉아먹을 것이다. 현재 미국이 아프팍에서 겪고 있는 난항과 전쟁 동맹에 참여하는 한국의 포지션, 보스워즈의 북한 방문과 북한 무기 압류와 같은 사안들은 향후 국제 정세를 다른 국면으로 끌고 갈 가능성이 존재한다. 국제 관계 속에서 한국의 위치가 어떻게 설정되느냐에 따라, 한국의 경제․정치적 조건들이 달라질 수 있다.

  여러 가지 조건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민중들의 민심이반이다.
  몰아붙이기 국정 운영이 필연적으로 낳을 수밖에 없는 민중들의 반감, 노동 악법으로 인한 노동 조건의 후퇴, 교육.복지 예산의 삭감으로 인한 빈민들의 불만 등.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불만의 지점들이 언제, 어떤 계기를 통해서든 폭발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특히 경제위기라는 조건은 현 정권의 국정 운영 기조를 더욱 강화할 수밖에 없는데, 무리한 국정 운영이 어떤 지점에서 임계에 도달할지도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물론 민중들의 민심이반과 계급투쟁에서의 전화를 꾀하는 일이, 민중들의 불만이 2008년 촛불정세처럼 자연 발생적으로 터져 나오거나, 한나라당을 제외한 광범위한 세력들과의 공존을 통해서 달성될 수 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다양한 민중들의 불만을 모아낼 수 있는 민중운동의 역량 강화이며, 현 시기 계급투쟁에 있어서 핵심적인 쟁점이 되고 있는 노동 관련 악법들을 막아내기 위한, 노동운동의 대응이 시급하다고 보인다.

  당면한 문제에 대한 투쟁을 통해서만 전체 민중운동의 역량이 증진될 수 있다.
  전국학생행진 역시 노동자.사회 운동에 연대하며 정권의 강력한 규정력을 뒤집을 수 있는 투쟁을 만들어야 한다. 또한 기만적인 ‘취업 후 상환제’나 대학의 기업화.상업화와 같이, 대학이라는 공간을 타고 들어오는 계급투쟁에 맞설 수 있는 학생사회를 만드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말 많고 탈 많았던 이명박 당선 2주년, 정권의 성격 및 그들이 처한 조건을 명확히 분석하고, 앞으로의 정세를 만들어 가기 위한 대응을 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뉴스레터 33호에서는 다음과 같은 글들을 실었다. 우선 12월 18일 세계이주민의 날을 맞이하여 진정으로 이주자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방법들이 무엇인지 논의한다. 2010년 학생회 선거에서는 유난히 부정적인 모습이 많이 보도되었다. 이런 현실에서 주요한 쟁점은 무엇이고 학생사회의 정화능력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계획이 무엇인지 다루도록 하겠다.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복수 노조 허용, 통합 공무원 노조 탄압 등 각종 노동 악법들이 쟁점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해 노동 악법을 막아내며 노동기본권을 쟁취하는 싸움의 의미를 되짚어보도록 하자. 마지막으로 뉴스레터 기획 [서평 아카이브 3]으로 존 벨라미 포스터의 <생태계의 파괴자 자본주의>에 대한 서평을 싣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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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9 23:49 2009/12/19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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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8일 세계이주민의 날에 부쳐

 _ 권리 없는 기념이 아닌 진정한 다문화 세상을 위하여!





 1990년 12월 18일에 UN과 그 회원국 40여개 국가들은 이주노동자들이 학대받고 있고 인권을 침해당하고 있으며 그들의 인간성을 부정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주민의 인권을 반드시 법에 의해 보호하고 보장해야 한다는 의도로 모든 이주민과 그 가족의 권리보호에 관한 UN 협약이 발효되었고 12월 18일이 세계이주민의 날로 선포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주민, 이주노동자의 권리는 오히려 역행하고 있다. 얼마 전 국제엠네스티에서 한국의 이주노동자 상황에 대해 정부가 이들을 ‘일회용품’ 취급한다고 지적했던 것처럼 이주노동자들을 기계, 도구, 노예, 동물로 바라보는 것, 매해 진행된 집중단속에서 수많은 인권침해가 되풀이 하고 있다. 또한 국회에는 출입국관리법을 개악해 이주노동자들의 사진과 지문을 게시해 입국부터 이주노동자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려고 하고 있다.

 또한 한국은 주요한 노동력 수입국가지만 여전히 이주노동자와 노동의 권리를 인정하고 보호하고 있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 정부는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범죄자화 하고 악선전하면서 범죄조직, 이주민들을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조직과 연결시키고, 소수 외국인의 폭행을 언론에서 모든 이주노동자가 그렇다는 식으로 선정적인 보도를 통해 이주노동자들을 한국사회로부터 소외시키고 억압하고 있다. 또한 한국사회의 다문화를 이야기 하면서 수많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강제 단속해 추방하고 있다. 이주민과 정주민간의 결혼을 통해 출산을 장려하고 다문화된 사회를 위한 정책들을 펼치고 있지만 결혼여성이주민, 합법 노동자가 아니면 불법으로 내몰고 결혼을 빙자해 정주민을 등쳐먹는 사람으로 내몰며 다문화로 나아가는 길에 덫을 걸어 두는 모순적인 행태를 펼치고 있다.

 이에 우리는 세계 이주민의 날을 맞아 이주노동자들의 권리보장은 커녕 더욱더 악화되는 정부와 자본에 맞선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 한국 사람들이 외국에 나가 사는 것, 국적을 얻기 위해 출산원정을 가는 것처럼 이주민들이 한국에 오는 것에도 전 세계적으로 이동하는 자본의 이동과 부합해 있는데 강대국들이 주변국을 수탈해 빈곤 할 수밖에 없는 나라에서 일자리를 찾아 전 세계를 누빌 수밖에 없다. 한국으로 일하러 오게 된 이주노동자들이 그저 한국인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정주민이 가지 않는 한국경제의 밑바닥 3D업종에서 비지땀을 흘려 한국의 경제를 떠받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정부는 마음껏 병원에 갈 수 없는 이주노동자들의 건강할 권리와 인간적 존엄성, 2개월의 구직제한과 3번의 직장변경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을 정당한 노동권에 대한 임금보장과 합법적으로 일 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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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9 23:48 2009/12/19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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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도 학생회 선거 부정 및 파행 사태를 돌아본다
-학생회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들을 제안한다!



 

‘정치의 축제’가 ‘정치에 대한 불신의 장’으로?

“지성의 전당이자 기성사회에 대한 '소금' 역할이 기대돼왔던 대학 내 학생회 선거가 최근 부정과 비리로 얼룩지고 있다. 후보 자격 시비는 단골 메뉴가 됐고 대리, 부정 투표에다 이권과 조직폭력배 개입까지 점입가경이다.” 
[연합뉴스 2009년 12월 8일]

  ‘대학 정치의 축제’로 불렸던 대학 학생회 선거, 올해는 선거 부정 및 파행 사태가 전국적으로 급증하였다. 서울대 총학생회 선거에서는 선거관리위원들이 투표함의 봉인을 뜯고 사전에 열어보며 표계산을 했다는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되고, 이 문제를 제기한 선거운동본부(이하 선본)에서는 선관위실에 도청기를 몰래 장착하여 녹음된 파일을 그 증거물로 제출하여 논란이 되었다. 한편 성균관대에서는 한 선본의 후보가 성폭력 가해자라는 문제제기가 있어 자진사퇴했다가, 선거가 무산되고 재선거가 실시되자 다시 후보등록을 하여 재출마했다. 이 선거 투표과정에서 선관위를 사칭한 이가 선관위 아이디를 받아내 전자시스템에 접속해 3백여 명분의 대리투표를 하고, 학내 한 건물에서는 유사 투표지 수백 장이 흩뿌려지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진행되었다. 이에 선관위는 “선거결과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선거를 강행하였다.

  물론 선거 부정 및 파행 사태가 올해 처음 발생한 것은 아니다. 학생사회 내의 자치활동과 학생회운동이 급격히 쇠퇴하면서 동반된, 최근 몇 년간 계속된 낯설지 않은 문제였다. 이 글에서 문제를 드러내는 것은 올해 유난히 많이 발생했다는 양적문제라거나 언론에 많이 보도되었다는 외부적 요인 이상의 이유에서이다. 가속화되고 있는 학생사회 내 ‘정치의 부재’ 문제와 학생회에 대한 학우 전반의 신뢰가 극도로 낮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선본의 부정행위, 선관위의 비민주적이고 비공정한 선거 운영은 이런 현상을 더욱 심화시켜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작년 같은 촛불투쟁이 재점화된다 하더라도 (구성원간의 치열한 토론을 토대로) 학생회의 깃발을 내세우며 거리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개별 주체들이 알아서 판단하고 거리로 나서는 경우가 더 증대될 것이라는 말이다. 또한 이런 경향에 맞서 학생들의 집단적인 움직임, 학생사회를 다시 왁자지껄한 대학생들의 정치의 장으로 세워내기 위해 헌신해왔던 많은 이들의 무수한 노력들을 한숨에 무위로 돌려놓을 수도 있다. 그러하기에 태평하게 ‘비평’하고 그칠 수 없는 어떤 실천이 요청되는 문제 상황일 수밖에 없다.


민주성과 공정성의 부재

  선거에서 두드러진 첫 번째 문제는 ‘민주성과 공정성의 부재’였다. 홍익대 총학생회 선거에서도 봉인된 투표함이 개표 전 이미 뜯겨있었다는 제기가 들어와 개표가 연기되기도 하였다. 이에 선관위에서는 “명부와 표 개수가 일치하니 개표를 속개한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성균관대 총학생회 선거에서도 선관위는 이와 유사한 입장으로 투표를 강행했다. 이런 선관위의 문제 처리방식에 대한 학우 일반의 여론은 선관위와 대별되었다. “내 표가 사라졌을 지도 모르고, 내 표가 다른 표로 바꿔치기 되었을 수도 있는 이 선거는 무효다!”,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던 총학생회에서 어떻게 이런 비민주적 판단을 할 수 있는가!” 이러한 반응은 선관위 책임론으로 이어져 ‘선관위 사퇴’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비록 이런 (결코 긍정적이지 못한!) 문제 때문이라 할지라도 많은 이들의 관심이 학생회 선거로 집중되었다. 그/그녀들은 ‘의아함’, ‘말도 안 됨’이라는 반응을 대체로 보였다. 첫째, ‘선거’라는 일반적인 민주주의의 형식적 내용에 동의하는 상식적인 사람으로서 부정한 방법까지 동원하여 선거운동을 한 선본과 납득할 수 없는 처리과정을 보여준 선관위에 대한 불신이다. 둘째, “기성 정치판과 다를 바 없다”는 반응처럼 여전히 관념 속에 존재하는(물론 많이 사그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기대를 걸고 있던 범주에서라도!) ‘대학생들의 정치’가 지닌 의로움, 정당함, 신선함이라는 표상이 다시 한 번 깨진 것이다. 이런 점은 선거에 한 표를 행사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학내 구성원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더러워진’ 선거에 대한 불신은 결국 무관심 혹은 적극적인 선거거부의 행동으로 이어졌다. ‘선거-연장투표-재선거-연장투표’의 지난한 과정을 거친 서울대 총학생회 선거가 끝내 투표율 미달로 무산된 것은 이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민주성과 공정성’은 선거로 당선된 선본이 ‘대표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제 요소이다. 과정이 미심쩍은 선거의 결과에 그 누가 신뢰를 보내겠는가.

선관위/선본들은 학생회 신뢰회복을 진정으로 고민했는가?

  선관위와 선본들에게 몇 가지의 질문을 던져보자. 사태의 심각성과 그 성격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가, 사태에 대한 ‘선관위/선본으로서 책임’을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그리고 현 시기 학생회의 방향과 신뢰회복을 위한 핵심과제가 무엇인가? 대체로 이들은 선거/투표에서 발생한 문제들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판단은 일차적으로 학우들의 반응(이런 선거가 신뢰를 받을 수 있는가?)에 준거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직접 발언하거나 혹은 인터넷 게시판, 대자보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문제제기하였다. 상당한 불만이 존재함을 느낄 수 있었음에도 선본이나 선관위는 함구하거나 단순한 해명을 내놓았을 뿐이었다.
  선관위든 선본이든 ‘선거가 차질 없이 진행, 완료되는 것’ 이상의 책임을 보여주었어야 했다. 특히 선거 또한 학생회를 중심으로 학생사회의 정치를 만들어가는 과정 중 하나이고 그 첫 발걸음이라는 점을 핵심적으로 사고했어야 했다. 부정/비리에 대한 고발과 상호비방이 불러일으킬 효과를 고려하여 선거완료 혹은 선거당선의 목표를 넘어서, 사태가 발생한 현 시점에서 ‘학생회에 대한 학우들의 불신을 긍정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단기/중장기적) 대책을 마련하고 실행하는 데에 온 힘을 다했어야 했다.

“지금 이대로라면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 진상규명과 재투표만으로는 절대 회복되지 않을 서울대 총학생회의 위상과 서울대 학생사회의 신뢰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 그 사실 자체는 의혹과 혼란으로 얼룩진 지금의 상황에서 분명하다 말할 수 있는 딱 한 가지입니다.” 
[서울대 학생행진 입장자보 “부정선거 의혹 진상규명과 학생사회 신뢰 회복을 위해 총운영위원회에 제안합니다!” 中]

  덧붙여, 적어도 이런 점을 인식했다면 이른바 ‘진보적’ 단체라 하더라도 “가재는 게편”격으로 선거가 무산, 파행된 것에 대해 ‘아쉬움’, ‘안타까움’으로 표현하지 말았어야 했다.

“2010 학생회가 학우들의 힘으로 잘 건설된 곳도 있고, 이러저러한 사건들로 안타깝게 파행이 되거나 투표율 미달로 보궐로 넘어간 단위가 있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

“부산대 총학생회는 같은 경향의 선관위가 학생회칙을 어기고 휴학생도 피선거권을 갖도록 세칙을 개정하는 무리수를 둬 선거가 무산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지방의 주요 국공립대 학생회 선거에서도 대부분 ‘운동권’ 후보가 당선했다.”  [레프트21]

무엇보다 큰 문제는 학생자치활동 내에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할 자정능력의 위기이다!

“한국외대 용인캠퍼스의 경우 3명의 후보가 나와 비방유인물 시비로 1명이 중도사퇴했고 최종 선거 결과, 낙선자측이 타 후보와 선관위원장간 대화 녹취록을 공개하며 법원에 선거무효소송과 학생회장 효력정치 가처분 신청을 낼 태세다. 경상대 총학생회장 선거 과정에서도 낙선 후보가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선거인 명부 등 자료에 대한 증거보전신청을 서울 법원에 냈다.”  [연합뉴스 2009년 12월 8일]

  “어떻게 이런 비상식적인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가?”와 같은 당위적인 언사가 아니라 현실적 차원에서 생각하면 부정선거나 비리문제는 충분히 발생가능하다. 일각에서 분석하는 ‘총학생회의 각종 이권 개입 가능성’, ‘경력을 이용한 정계 진출 및 취업에 유리함’ 등의 이유도 한 몫 하는 듯하다. 그 해결책으로 “예산집행에 대한 투명성을 높이고 '작은 정권'인 총학을 견제할 기구를 학생들이 만들도록 해줘야한다”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견제기구가 있다고 해서 혹은 법적 규제가 있다고 해서 기존 정치판에 비리가 근절되는 것이 아니듯이, 보다 근원적인 진단과 처방을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제기해야 할 질문은 “이런 비상식적 문제를 학생자치를 통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가?”이다. 나아가 “학생자치 내 ‘자정능력’을 복구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위 질문은 보다 실천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불신과 한탄의 모습이 언론과 각종 학내 구성원이 참여로 운영되는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분출되지만, 거기서 잠깐 웅성이다 또 금방 흩어지고 게시판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른 정보들과 관련한 글들로 도배되고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는 지금의 학생사회 (정치)의 단면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굳이 ‘선거’ 문제가 아니더라도 학내 구성원의 성폭력 사태에 대한 해결, 대학본부의 일방적인 학과 구조조정, 등록금 인상에 대처하는 대학인들의 모습 등의 다른 쟁점에 대해서도 학생회 및 자치단위들의 입장과 해결노력 그리고 대학인들의 행동양태는 크게 다르지 않다. 학생사회를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제 문제들에 대해 대학인들이 목소리를 한데 모으고 함께 해결하기 위한 토론과 논쟁의 장을 열어 휘발성 불만과 의견으로 그치는 현 상황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이 절실하다. 이것을 그저 ‘화려했던 80-90년대 대학가의 유물’로만 남겨둔 채 스쳐지나갈 것인가?

‘적극적인’ 대학생들이 할 일

  꽁꽁 얼어붙은 학내 연못마냥, 세찬 바람에 움츠러든 어깨마냥 그렇게 나의 생각을 내 안에 가둬놓고 겨울을 보내지는 말자. 인터넷 댓글이나 단짝 친구들과의 수다만이 아닌, 좀더 적극적인 문제해결 방식을 고민하자! 이도저도 아닌 반응이나 무관심은 선거 부정과 파행 사태를 더욱 심화, 지속시키는데 일조할 뿐이다. 그 속에서 학생/학생사회 내에서의 나의 목소리와 권리는 더욱 축소되고 소외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다시금 대학인이 ‘자치(自治)’를 되살리기 위한 작은 노력이다. 단지 겨울방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올 2010년 한해 줄곧 이어져야 할 우리의 ‘실천’이다.

  하나, 학생회에 대한 신뢰회복과 학생회 선거의 위상과 역할에 관한 고민을 나누자! 

  -지난 선거에서 소속되어 있는 학생회에 부정, 비리 등의 문제가 있었다면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맞을지를 주제로 이야기 나눠보자. 이는 단지 ‘문제처리’의 기술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하기에 학생회 선거 그리고 학생회의 역할과 활동방향이 어떠해야하는지를 함께 토론할 때 보다 근원적인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소속되어있는 학생회가 위의 문제를 겪지 않았더라도 (앞서 봤듯) 학생사회의 문제에 대처하는 양상, 그 문제점은 동일하다. 학내 문제사안(학내 구조조정, 성폭력, 자치활동 규제/탄압 등)에 대해 어떻게 해결해야하는지, 여기서 학생회의 역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토론해보자.

  둘, 위의 이야기를 함께 토론하고 논쟁할 ‘공간’을 마련하자!

  -대중단위 LT나 자치단위의 토론자리가 있다면 좋다. 예를 들어, 함께 내년 학생회를 준비하는 집행부들과 함께 학생회의 상과 역할에 대해 다시금 토론해보기도 하고, 만약 3월 재선거가 예정되어 있다면 개강 시기 학생회 차원에서 학내에 유의미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리를 구상해보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굳이 학생회 활동을 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소속된 다양한 공간에서 ‘특별 토론’을 계획할 수 있을 것이다. 2월 새내기맞이 사업을 구상하고 준비하면서 학생사회의 정치 등을 토론하고 이를 근거로 사업의 방향을 잡는 것도 유의미한 시간이 될 것이다. 독자 여러분들의 활발한 토론을 기대한다.

Posted by 행진

2009/12/19 23:41 2009/12/19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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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나가다 2009/12/21 11:24 # M/D Reply Permalink

    이번 문제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던 사람입니다. 제가 접할 수 있는 정보는 오직 인터넷 뿐이지만, 이를 통해 제가 판단한 것과 글에서 보여진 입장과는 약간 다른 부분이 있네요. (물론 전반적으로는 동의하지만)
    글에서 언급한 성균관대 같은 경우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은 글에서 지적한 것처럼 재선거 과정에서 대리투표와 유사 투표지 발생이 아니라, 두 선본이 비도덕적인 행위로 인해 자격이 박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선거과정에서 다시 등록했다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학생사회가 어떤 문제제기도, 어떠한 자정능력도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는 것 아닐까요? 사실상 재선거의 그 짧은 기간동안 새롭게 후보등록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거란 생각을 해 볼 때, 재선거라는 것은 오직 자격이 박탈된 선본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준다는 의미밖에 없는 것이었죠. 그렇게 본다면 글에서 지적한 문제는 이에 비하면 부수적인 사태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오히려 재선거가 이미 시작되어버린 상황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춰 본다면 (양선본과 선관위 등 선거를 운영하는 누군가의 의도적인 소행이라고 보기 힘든) 위와 같은 범행은 어떻게든 처리하고 정상적으로 선거를 진행시키는게 원칙상 맞지 않을까요? (전적으로 외부자의 입장에서 드리는 말씀이니 실제 학내 상황과는 맞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지엽적인 문제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선거파행이라는 대처하는 세밀한 방식에 있어서 유념해야 할 부분인 것 같아 지적하고 갑니다.

노동자, 노조 탄압에 맞서 함께 싸우자!



더욱 더 거세지는 정부의 공공부문 노동자, 노동조합 탄압

  지난 11월 28일 공공부문 선진화 워크샵에서 이명박은 노사관계선진화를 운운하며 “적당히 타협하고 가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노조탄압의 수위를 높이기를 촉구 했다. 대통령 말 한마디에 공공기관들에서는 철도를 비롯해 사회보험(건강보험), 발전, 가스 등에서도 잇단 단협해지를 통보 하였다. 심지어 노동연구원은 단협해지가 실제로 자행된 데 이어 직장폐쇄까지 단행하는 등 감사원 감사, 기획재정부 경영평가, 노동부의 단체협약개악 과정에서 정부주도 하에 계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공공과 민간을 가리지 않고 전체 사업장으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또한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은 노동부로부터 노조설립신고서 반려 통보하며 과거에 민중의례를 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이야기하더니, ‘신고제’인 노조설립을 ‘허가제’로 마음대로 바꾸고 급기야 노조사무실을 강제 폐쇄하고 위원장을 해임하기에 이르렀다. 전교조 역시 시국선언 교사에 대한 탄압과 조합비 원천징수 금지 조항의 신설이라는 치졸한 공격을 받고 있는 등 정부는 노조를 말살하고 무력화해 노동자들의 저항 없이 공공부문 사유화의 수순을 밟아 나가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를 막아서는 노동자들의 노동3권을 불법으로 매도하여 부정하고 노동자, 노동조합 죽이기에 힘쓰고 있다.

투쟁으로 일어선 철도

  11월 24일, 철도공사가 일방적이고 기습적인 단협해지를 통보하였다. 이는 철도노동조합이 설립된 지 64년 만에 처음 있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공기업 선진화 방안에 따라 5000여명을 해고한다는 사측의 억지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건 투쟁을 26일  파업으로 돌입 하였다. 철도조합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힘 있게 파업대오를 유지하며 쟁의행위찬반투표에서 76.6%의 높은 파업찬성률로 파업을 결의, 높은 조직률을 유지하며 강고한 대오를 형성, 사측의 악랄한 회유 협박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파업참가자가 늘어나는 등 단체협약을 위반하고, 합법적인 파업임에도 조합원을 직위 해제했다는 등의 이유로 허준영 철도공사 사장 등 65명의 간부에 대한 법적대응을 했다. 그러나 법을 운운하는 경찰은 법을 지키기는커녕 간부 15명에 대해 체포영장을 신청하고 문자 메시지를 통해 출석통지를 하며 파업을 접으라 협박을 하는 등 급기야 12월 1일 수사관 54명, 경찰기동대 5개 중대를 동원해 철도노조 사무실을 압수수색하고 ‘파업주동자 검거전담자’를 편성해 13일 김기태 위원장을 구속하고 파업에 가담한 철도노조 간부들에게 진짜 불법을 저지르고 단체협약을 위반하고 교섭을 회피하는 철도공사와는 다르게, 노동권을 지키고자한 정당한 투쟁엔 불법을 덧씌워 흠집을 내어 단체행동권을 부정하고 불구속 입건했다.

  단체협약은 한 해 20여 명이 넘게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열악한 철도 현장을 개선하기 위해 투쟁해 온 철도노동자들의 땀과 눈물이다. 철도공사는 171개 단협 조항 중 120 조항에 대해 근무체계 변경, 비연고지 전출허용(2002년 민주노조가 들어서면서 7년 동안 사라진 제도로, 사측의 자의적인 전출 강요하는 제도), 정원 관련 협의권 삭제, 휴일 휴가제도 변경, 전임자 축소, 성과성 연봉제(개별근로계약으로서 노조를 통한 집단적 임금협상이 아닌 회사와 노동자간 개별임금협상방식으로 임금협상을 노조가 아닌 개인이 하게 하여 노조의 역할을 축소시키려는 것) 및 정년 연장 없는 임금피크제(임금이 최고조에 달하는 시기인 정년퇴임을 앞두고 임금을 점차적으로 줄여나감으로써 퇴직금 인하 등 실질적인 임금삭감안), 직무성과급제 도입 등을 개악하거나 삭제할 것을 요구하며 노동조합을 사측의 입맛에 맞게 길들이기 위한 개악안을 관철하려는 과정에서 노동조합이 강하게 저항하자 급기야 단협을 해지한 것이다. 이에 맞선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은 철도노조 사상 유례 없이 8일 이라는 파업을 단행하였다. 이에 위협감을 느낀 이명박은 철도공사를 제치고 자기가 직접 앞으로 나와 파업투쟁에 탄압을 진두지휘하며 ‘실업자가 만연한 때에 파업이 웬말이냐, 어렵게 살려놓은 경제를 또 위기에 빠트릴 수 없다’ 민중들의 귀에 캔디 같은 말과 언론과 자본, 정부가 함께 이데올로기 공세와 법적 탄압으로 파업을 중단시키며 준법파업을 불법으로 매도해 노동조합을 무력화하고 파업권을 말살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내보이고 있다.

노동조합 탄압
 - 복수노조와 전임자임금 지급/교섭창구 단일화(교섭단위 사업장 축소)와 전임자 임금 지급 문제

  11월 25일로 노사정 6자 대표자회의에서 민주노총, 한국노총, 한국경영자총협회, 대한상공회의소, 노동부, 노사정위원회는 복수노조와 전임자 임금 문제에 대해 임태희 노동부 장관은 회의가 끝난 후에 “노동부는 현행법이 내년 1월 1일 발효되는 것을 전제로 산업현장의 혼란을 줄일 시행 방안을 준비한다”고 선언하며 “현행법을 개정하지 않고 내년부터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법에는 복수노조 허용에 따른 교섭창구 단일화 방안을 노동부 장관이 마련토록 위임해놓고 있다”고 주장하며 정부는 교섭창구 단일화와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에 대한 노동계의 반발이 거세고 법안 처리과정에서 논란이 예상되자 국회를 우회해서 ‘행정적’으로 사태를 정리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국회 입법조사처는 행정법규를 통해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를 강제하겠다는 노동부의 방침에 대해, “위헌 소지가 크다”는 견해를 밝히고 “교섭창구 단일화를 의무화하는 것은 노동자와 노조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것이므로 법률에 근거해 규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현행법을 개정하지 않으면 교섭창구 단일화 관련 조항이 자동 삭제됨에 따라 교섭창구 단일화 없이 복수노조가 허용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해석과 함께 임태희 노동부장관의 견해에 대해 교섭창구 단일화를 의무화한 규정도 아니고, 노동부 장관에게 교섭창구 단일화의 방법과 절차를 위임한 것이 아니라 법률 시행을 위해 준비를 하고 정책 수립을 할 국가의 의무를 규정한 것이어야 한다고 노동부의 입장과는 완전히 반대의 해석을 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노동부는 국회를 거치지 않고 법을 시행하려는 것일까? 그 이유는 복수노조 허용과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가 정치적 쟁점이 되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이미 지난 6월 비정규직법 개정을 위해 여야 정당과 양대 노총이 참여하는 ‘비정규직법 5인 연석회의’를 진행했지만 합의가 무산되고 법안 개정이 이루어지지 않고 이번 국회에서도 4대강 예산, 세종시 수정 등 여야 정당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법안이 대기 중인  상황에서 노동계가 강력하게 반발하는 복수노조와 전임자 임금 문제가 추가될 경우 ‘정상적인’ 법처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부와 자본은 민주노조에서 요구했던 내용들을 변경해 복수노조를 허용 하되 교섭창구를 단일화하여 다수노조의 지위를 상실하였을 경우에 참여의 권리를 박탈시키고, 한 사업장만의 협상을 통해 산업별로 확대시키려던 노동자들의 투쟁을 축소시키고, 노조 설립시 노무관리 비용의 증가를 명목으로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시켜 복수노조 허용이 보장하는 노동권의 확장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는 식으로 애초에 논의되었던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이 보장되지 않는 방식으로 기업별 노사관계를 강화하고 노동자의 기업에 대한 귀속감을 고취시켜 현장에 대한 노조의 통제력을 약화시키고 어용노조를 통해 사측의 입맛에 맞는 결과를 낳는 방식으로 노동자들의 노동의 권리를 무자비하게 짓밟고 있다. 이제 정부와 사측은 지난여름 쌍용차투쟁처럼 복수노조가 합법화되지 않아도 사측 구사대 모임을 결성해 노조를 공격하는 방식을 뛰어넘어 아예 대놓고 기업을 위한 노조를 만들려하고 있는 것이다. 13년 만에 처음으로 연대 총파업을 선언했던 한국노총 지도부가 야합에 동참하면서 노조로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정부와 자본에 타임오프제(타임오프제는 전임자에 대한 급여지원 금지를 원칙으로 하되, 교섭, 노사협의, 고충처리 등 대통령령이 정하는 노사업무 종사자에 대해서는 근로시간을 면제해 주는 제도)를 제안하고 대상 업무에 ‘통상적 노조관리 업무’를 포함하는 수정안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지도부들의 합의에 한국노총 산하 연맹들은 공식 의결구조를 거쳐 ‘합의파기, 재협상, 지도부 사퇴’ 한국노총 조합원들의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

노동 탄압과 경제위기 고통전가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에 적극적으로 연대하자!

  정부와 자본의 총체적인 노동에 대한 공격은 점점 가속도가 붙고 있고 하나로 똘똘 뭉쳐 노동자 계급을 분할하기 위한 모든 수를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이에 맞서 노동권을 지켜내고, 확장해야 할 노동자들은 아직까지 강력한 힘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복수노조 허용의 전제 조건으로 교섭창구 단일화와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를 제시한 것은 다수의 노조 사이에 경쟁을 심화하고 단결을 저해하기 위함이며 과반수 노조에 대표권을 부여한다는 방식은 애초에 복수노조 허용의 취지로 논의된 단결의 자유와는 거리가 멀며 사업장에서는 기업이 어용노조를 조직하여 노동자들의 직접 행동 자체를 불가능하게 할 우려도 충분한 상황에서 교섭창구 단일화와 전임자 문제는 노동3권을 침해하고 노조활동을 제약하려는 정부와 자본의 공세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한다.
  또한 12월 1일, 검찰은 철도노조파업에 대해 “절차상 문제가 없지만 해고자 복직 등을 담고 있어 공기업 선진화 방안 저지를 위한 ‘정치투쟁’으로 봐야 한다”면서 헌법이 보장하는 파업권을 부정하여 ‘불법’으로 규정해 수사한 것은 검찰 스스로가 ‘정치적’인 공안탄압을 자행하고 있음을 인정하였다. 또한 검찰은 헌법에 쟁의권을 포함한 노동3권을 보장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은 교섭 회피 자체를 부당노동행위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리며 철도공사의 교섭 회피라는 노골적인 탄압과 폭력 그리고 불법적 태도에 대한 법적인 정당성에 대한 물어야 한다. 합법적 틀로서 투쟁의 정당성을 확보하려했던 철도노조의 투쟁에서 공공부문 선진화라는 이름으로 사유화되는 공공부문에 대해 전체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상승시키는 계기로의 전환을 제기하며 철도 파업을 봉합하기 위해 이명박이 담화에 나서 '청년실업'을 운운했던 기만적인 공격에 대응하여야 한다. 출혈경쟁을 강요하는 지배계급의 논리에 반대하면서, 높은 청년실업률을 명분으로 노동자들의 탄압을 정당화하지 말아야함과 지금의 공공부문과 노동자 노조에게 가해지는 탄압이 전체노동자들에게 또 다른 화살이 될 것이란 것을 알려 나가자!

Posted by 행진

2009/12/19 23:35 2009/12/19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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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09/12/21 09:25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지금 내리실 역은 ‘생태위기역’입니다.

<생태계의 파괴자 자본주의>
존 벨라미 포스터 지음 / 추선영 옮김 / 책갈피 / 초판 2007.7.5







전 지구적 생태 위기

  경제성장과 이윤이 모든 것에 앞선다고 생각했던 근시안적 태도의 결과로 2009년, 민중들이 직면한 위기는 실로 막대하다. 전 세계의 생존 가능성 문제가 수시로 신문과 뉴스에 오르내리고 있다.
  서서히 침몰하는 몰디브 섬에서 어업과 관광업에 종사하던 주민 40여만 명이 입은 심각한 타격. 폐국 위기에 처한 남태평양 투발루. 인근 국가에서 이주를 받아주지 않아 물이 차오르는 섬 안에서 도리 없이 죽어가고 있는 반 이상의 국민들도 있다. 2009년 12월 15일자 경향 신문은 “기후변화 앞에 평평해진 세계”라는 헤드라인 기사를 실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서둘러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 15차 UN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 참석했다. 이번 회의에는 농민과 노동계도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기후가 농업에 미치는 영향이 크고, 온실가스를 감축하기 위해 향후 금융 및 산업구조가 재편될 경우 노동자들부터 변화를 겪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을 기회로 덴마크, 미국, 영국 등은 밀실 협의를 통해 최빈국이나 섬나라 민중에게 위기를 전가하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의 전 지구적 생태 위기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경향 신문의 헤드라인처럼 이대로도 ‘기후변화 앞에서’ 전 세계는 평평해질 수 있을까?

  21세기의 첫 몇 년 동안 지구에 대한 자본주의의 전쟁이 새로운 국면에 돌입했다. 2001년 미국의 중심에서 일어난 9.11 사건 역시 같은 맥락이다. 그 이후, 전 세계 민중들은 중동을 통제하기 위해 미국이 수차례 일으킨 전쟁과 지구온난화가 상징하는 생태 위기의 가속을 보아왔다.
  생태계가 계속해서 파괴되고 있지만, 속류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다고 자기 방어를 하고 있다. ‘저탄소 녹색성장’을 대안으로 삼아 비용이 들지 않는 에너지를 채택하면 된다고 선전하거나, 에너지 가격을 다시금 조정하는 과정에서 에너지에 관련한 금융 시장을 재편하는 것이 이들의 주목적이다.

  지금의 위기 상황. 사회주의가 가지는 긍정적인 의미는 어떤 전환과정에나 필요한 근본적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사회주의는 이윤에 대항할 뿐 아니라 ‘스스로 자본의 역량을 넘어섬을 입증하는 방식으로, 지금의 생태 위기의 원인도 정면으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저자는 밝힌다. 대안세계를 꿈꾼다면, 생태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어떻게 만나게 할 것인지를 밝히는 문제는 시급한 과제이다.

계급 對 생태?

  계급을 배제한 환경주의는 한계를 가진다. 오늘날 많은 저명한 환경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운동이 계급투쟁보다 우위에 있고, 계급투쟁을 극복한 대표적 운동이라고 자임하는 정치적 관점을 가진다. (사실 역으로도 같다. 현재 대다수 노동운동의 관점도 이와 상이하거나, 미달하기도 한다.) 영국 녹색주의 지도자 조나단 포리트는 독일 녹색당의 등장을 "좌와 우로 나뉘어 장황한 논쟁이나 하는 계급투쟁의 불변이라는 신화"를 끝장냈다고 선언했다. 이들은 환경문제의 원인을 대부분 소비자의 소비 습관, 출산율, 산업화의 특징으로만 돌리고 만다.
  우리는 급속한 환경 파괴가 자본주의 사회와 (계급투쟁을 규정하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축적 과정의 고유한 일부라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오직 지구만 대변하고 계급과 그 밖의 사회적 불평등을 무시하는 생태 운동은 인간의 생산적 에너지, 건조 환경, 지구의 생태 자체의 무제한적 상품화를 지향하는 자신들의 관점으로 환경문제를 대체할 뿐이다. 이 과정에서 세계 자본주의의 지배적 힘의 관계는 강화된다.

  저자는 고목림이 처한 위기와 미국 태평양 북서부의 목재 산업에 관련된 사례를 검토함으로써, 위의 주장이 어떻게 현실적으로 타당하게 드러나는지를 확인시켜 준다. 여기서 노동-환경주의 전략이 합의되지 않은 채로 투쟁을 지속한다면, 노동자와 환경운동가가 일자리와 생태를 부당하게 견주는 데에 국가장치는 필연코 개입하여 부당한 쟁점을 부추기며 제 몫을 챙겨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 對 생태!

  차등적 가치 평가는 자본주의 경제와 국가에게는 매우 핵심적 요소다. 레이건 행정부 시절 예산관리국은 "노동자의 직업상 위험 증가에 따라 지급되는 수당"을 근거로 인간 생명의 가치를 달러로 환산한 적이 있다. 이런 전제하에서 미국 노동자들의 생명의 가치는 기업의 CEO 1년 연봉을 훨씬 밑도는 금액밖에 되지 않았다.
  일부 경제학자들 역시 인간 생명 가치를 개인의 소득 능력을 기초로 산정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러면 여성의 생명은 남성의 생명보다, 흑인의 생명은 백인의 생명보다 훨씬 못한 것이 된다. 이 말을 환경적 용어로 옮기면 가난한 사람들이 위험에 처하면 그 위험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된다는 뜻이다. 즉, 심한 오염 유발 시설을 가난한 이웃 나라로 이전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접근이다. 이는 사실 매우 보편적으로 실천되고 있는 현상이다.
  - 본문 105-106쪽

  생태학과 자본주의가 대립한다는 관점은 현재의 생태 위기의 원인을 인간 본성에 돌리거나 근대성, 산업주의, 경제 발전 등에 돌리는 태도와는 구별된다. 저자는 자본주의가 내적으로 생태를 파괴할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책 전반에서 상세히 서술한다. 저자의 의도는 독자로 하여금 자본주의와 생태계가 두 발로 설 수 있다는 것이 왜 허구인지, 자본주의 사회가 어떻게 환경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점점 더 심화시켜 나가고 있는지를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의도를 잘 드러내고 있지만, 생태 위기를 유발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 메커니즘 자체를 더 철저히 분석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을 남긴다. 행동 원칙으로서 저자는 오늘날 환경 운동 전반이 겪고 있는‘일자리 對 자연’이라는 걸림돌을 계급에 기반한 진보적 대응을 통해 넘어설 것을 촉구하고 있지만, 이 책만으로 생태 위기의 계급적 기원을 드러내기엔 미달하는 부분이 많다.
  생태 위기에 맞서 진보적이고 계급 지향적으로 대응하려면 생태적 전환 강령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말은 추상적이지만, 이는 즉각적으로 실천적인 쟁점을 촉구한다. 이것은 우리의 과제이기도 하다. 공동의 강령을 중심으로 ‘어떻게 힘을 합칠 지’는 우리의 몫이다.

  마르크스주의를 ‘일반화’시키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 대안 세계화 운동을 온전히 실행해내지 못한다면, 다른 모든 것들 - 멸종, 산재 사망, 자신의 신체에 대한 여성의 직접 통제권 문제, 유독성 폐기물을 빈곤층 거주지에 내다 버리는 문제, 황폐한 도시, 제3세계 빈곤, 오존층 파괴, 지구 온난화, 방사능 오염, 사막화, 토양침식, 수자원 오염 등 - 과 분리된 현재의 경제학처럼 삶과 사회를 다른 한편에 놓아둔 채, 투쟁을 위한 투쟁을 하는 과오를 범할 것이다.

적극적으로 대안세계화 운동을 지지하며

  최근 경제학자들이 이 비판에 대응하기 시작해, 자연에 경제적 가치를 부여하거나 환경을 시장 체제에 좀 더 완전히 통합시키는 등의 작업에 몰두하는 환경경제학의 하위 분야가 급속히 성장 중이다. 많은 이들이 의문을 제기한다. 치료가 병보다 더 위험한 것은 아닐까? 자본주의 시장 체제를 근본적으로 전환하지 않은 채 자연환경을 자본주의 시장 체제에 흡수하려 한다면, ‘성에 안 차는 과거의 식민주의를 새로운 식민주의가 대체하듯 경제가 환경을 지배하는 또 다른 제국을 만드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환경경제학 연구의 실제 목적은 하나다. 지구에 가격 매기기. “환경을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분석할 수 있는 일종의 상품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경제 환원주의의 모순은 오랜 역사에서 여성을 억압하고, 인종을 차별하고, 통제권을 소실케 하며, 군사와 금융의 세계화를 촉진해왔다. 생태의 문제도 다르지 않다. 나는 ‘자연자본’이라는 신상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자연을 자본화하는 신자유주의에 제동을 거는 일은, 기간 전국학생행진에서 실천해온 운동과 일맥이라 생각한다.

  또한 역자가 서문에서 밝혔듯, 남한의 독특한 위상은 운동적 가능성을 내포한다. 전투적 노동운동의 역사와 새만금 간척 사업에 대한 반대가 상징하는 강력한 생태 운동, 그리고 통일 문제와 결부돼 반제국주의 투쟁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남한 사회는 (전 세계 독점금융자본의 헤게모니와 미 제국의 지배에 여전히 종속된 채) 갑작스럽게 다른 방향으로 튀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의 생태 위기를 뒷전에 두지 않고 남한 사회에 걸맞은 계급투쟁과 생태주의가 무엇이 될 것인가를 사고하는 일은, 우리가 발 디딘 현재 사회에 제대로 조응하는 유물론적 실천으로서의 한 걸음이 될 것이다. <생태계의 파괴자 자본주의>는 (완성된 제언의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 많은 과제를 남겨두지만, 그런 의미에서 더욱 운동가들에게 유익한 도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행진

2009/12/19 21:52 2009/12/19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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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뭐라 해도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어렵기만 하다.

 처음 마르크스를 알게 된 것은 중 3때였던 것 같다. 친구가 들고 있었던 공산당 선언이( 물론 읽지는 않았다.) 느낌만으로도 좋은 책이란 것을 알 수 있었고, 그 후 마르크스에 대한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몇 년 뒤 대학을 들어오고 나름 머리가 컸으니 하고 싶은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을 때는 나의 사랑 마르크스는 할배로 변하고 말았다. 도대체 마르크스 할배는 왜 이런 걸 적었단 말인가. 혼자서 이를 갈면서 오기로 쉬운 해설서부터 시작해볼까 하고 마음먹은 후 지난 학기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원숭이도 이해시킬 수 있다는 제목에 혹해 책을 봤지만 결국 다 읽지 못하고 책장을 덮고 말았다.(결코 필자가 원숭이 보다 지능이 낮은 건 아니다.) 사실 지난해 경제 위기 이후 자본주의의 위기다 뭐다 해서 자본론에 대한 쉬운 해설서를 표방하고 있는 책들이 시중에 간간이 나오곤 했지만 정작 대중들을 만족시킬 만한 해설서는 부족했다. 그런 의미에서 강상구씨의 책 「Hi, 마르크스 Bye, 자본주의」는 추천할 만한 책이다. 물론 해설서 한 권을 읽음으로써 심오하고도 오묘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이해했다 하는 것은 오만의 극치이다. 하지만 책 한권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가 어떠한 메커니즘을 가지고 돌아가는지 조금이라도 이해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을 읽는다 해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모두 알았다 할 순 없지만 정신없이 읽는 사이에 우리는 사람들의 노동력이 착취 받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무서운 사실만은 확실히 깨닫게 될 것이다.

노동자에게 노예와 같은 삶을 강요하는 자본주의 사회

 책에서 정의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을 중심으로 생산이 이루어지며, 자본 주변에 사람이 모여서 인간관계를 맺고 생산하는 사회이다. 즉, 인간의 삶이 자본에 종속되어 돌아가는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특징은 생산의 목적이 이윤 추구에 있다는 점이다. 이윤 추구의 목적 속에 인간이 향유하기 위해 노동력으로 만든 생산물은 모두 상품이 되어 소비되고 자신이 만든 생산물을 사기 위해 인간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화 시켜 팔 수밖에 없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은 이뿐만이 아니다. 화폐를 사용하는 이유는 교환의 편이성 때문이지만 겉모습으로만 보기에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지금의 세상은 돈에 신적인 지위를 부여했고, 사람들은 돈을 수단이 아닌 인생을 살아가는 목적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이를 마르크스는 화폐의 물신성이라 한다. 비본질적인 것이 본질적인 것을 지배하는 현상,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돈에 구속되는 것은 인간이 인간의 생산물에 구속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노동의 결과물에 대해 낯설어 진다는 것인데, 자신의 의지와 운동의 결과물이 생산물라면 당연히 자신의 일부로 받아 들여 져야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생존을 담보로 자신의 노동을 팔수밖에 없는 현실에 처한다. 문제는 여기에서 자신의 노동을 판매한다는 것이 단순히 노동의 대가로 임금을 받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자는 임금을 받는 과정에 있어서 노동을 하는 주체 즉 인격을 판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격이 가질 수 있는 재산(소유)을 포기하고 인격으로서의 자유의지를 포기한다. 노동의 대가는 당연히 노동을 실천한 사람의 것이지만 빵에 대한 대가로 자신의 인격을 판매 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는 소유의 주체가 아니게 되었으므로 그 행위의 결과는 그의 것이 아니게 된다. 이는 노예제에서의 노예의 인격성 부인과 그에 따른 재산권 박탈과 유사하다.

자본은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피와 오물을 뒤집어 쓰고 태어난다.

 “자본은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피와 오물을 뒤집어 쓰고 태어난다.” 이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한 말이다. 자본주의는 나쁜 거였어. 사람보다 돈이 우선되는 사회는 분명 잘못된 거야. 이는 개발 이익을 노린 무분별한 개발 때문에 벌어졌던 용산 참사에서도 주주들의 이익을 보전하기 위해 회사의 위기를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떠넘긴 쌍용 자동차 사태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노동이 모든 가치를 창조한다고 한다. 자본주의 생산의 3대 요소라 불리는 토지, 자본, 노동 중 인간의 노동이 없다면 다른 것이 아무리 많다하더라도 무용지물이다. 상품 생산의 본질적 부분인 노동력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가치 창조의 핵심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폭력과 착취의 야만성을 교묘히 감춘 채 돌아가고 있는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되는가? 우리는 지금의 화려한 자본주의를 지탱하고 있는 근간이 유명한 CEO나 기업주가 아닌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동력이라는 것을 말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자와 민중은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우리는 집 한 채 가지기 위해서 수십년을 일해야 하고 언제 해고될지 몰라 불안에 떨어야 한다. 자본주의가 가진 잘못은 확실하다. 부동산이다 주식이다 서점을 가득 메운 돈 불리는 방법에만 열중하는 사람들에게 확실히 말하자. 당신들이 하루 아침에 버는 돈은 노동자들의 피와 땀의 대가라는 것을 말이다. 화려함 속에 감추어진 자본주의 착취의 더러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책.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현재에도 유효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자본론이 너무 어려워 읽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의 지적 수준을 부끄러워 하지 말고 쉬운 것부터 시작해보자. Right Now~

Posted by 행진

2009/11/24 20:02 2009/11/24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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