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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제언]

5-6월 정세에 대응하는

대중운동을 만들어나가기 위하여


 

1. 어떤 방향의 운동을 만들어야 할 것인가?

430-메이데이-촛불 1주년으로 이어졌던 지난 4월의 투쟁이 일단락되고 5월이 되었습니다. 현재 각종 경제수치상으로만 보면 경제는 오히려 회복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배계급의 공세가 전면화 되면서 노동자ㆍ민중의 고통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쌍용자동차에 대한 구조조정 계획이 발표되자 회사의 주식이 뛴 사례에서 보이듯이 경제위기의 책임전가를 통해 자본이 살길을 찾는 사례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구조조정의 핵심은 지배계급이 선동하는 것처럼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조금 더 비싼 값에 부실기업을 팔아넘기기 위한 것 입니다. 금융화의 특징인 ‘고용없는 성장’이 지난 상반기에도 계속되었고, 실업의 증가와 불안정노동의 양상은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향후 몇 달간 경제위기의 책임전가 양상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으로 예상되는데, 국회에 계류 중인 비정규법 개악과 최저임금삭감 시도, 쌍용자동차ㆍGM 대우ㆍ위니아만도ㆍ철도에서 나타난 구조조정에 맞서는 투쟁을 힘 있게 조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430-메이데이-촛불 1주년 투쟁을 통해서 확인했듯이 이명박 정권의 공안탄압은 더욱 거세지고 있고, 특히 용산 참사가 각계각층의 연대투쟁으로 벌어지지 않도록 탄압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정권이 극단적인 폭력을 통해 정치의 공간 자체를 축소시키는 지금, 민중들의 정치 공간을 열어젖히는 싸움도 절실히 필요합니다. 6월 10일 민중항쟁을 현재적 의미로 되살리는 투쟁을 대중단위에서부터 기획합시다. 오월 광주 순례단 -> 5.28 - 6월 노동자 총궐기 승리를 위한 서울지역 결의대회 및 서울 민중대회의 흐름을 통해 6월 10일을 전 민중의 투쟁의 날로 만들어갑시다.

 

1 - 1) 비정규직법 개악 & 최저임금법 개악에 맞서 싸웁시다!

5 ~ 6월 중에 처리될 것으로 예상되는 악법 가운데 가장 파급력이 클 것으로 예상되는 것은 비정규직 개악법과 최저임금법 개악입니다. 4월에는 민주당의 반발로 잠시 주춤하긴 했지만, 4월 29일 재보선이 끝난 만큼 조속히 물살을 타고 통과될 것이 예상됩니다. 비정규직 개악안을 반대하는 발언의 주된 얼개가 비정규직으로 고용되는 기간이 2년에서 4년으로 연장되니, 비정규직이 더욱 늘어날 것이라는 추측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배계급의 논리에 말려들지 않고, 대중들에게 문제의 본질을 보다 쉽고 정확하게 알리려면 비정규직 개악안의 구체적인 내용/쟁점/추이와 앞으로의 전개 등등을 예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비정규직법 개악안은 기간제와 파견 노동자의 고용 기간을 현행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하고, 차별신청 기간을 현행 3개월에서 6개월로 연장하는 내용입니다. 한나라당이 내놓은 ‘4년 유예안’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이 법안에 따르면 2년 동안 비정규직으로 일한 이후 4년 동안 비정규직 보호법 적용을 유예할 수 있는 것이라 사실상 6년간 비정규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정부의 ‘4년 연장’이든 한나라당의 ‘4년 유예’든 ‘정규직 채용 종료법’이라는 측면에서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6년 간 비정규직으로 사람을 쓸 수 있는데 굳이 정규직으로 채용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고, 2년마다 해고하고 신규채용하고 교육하는 비용도 줄일 수 있어서 그야말로 ‘비지니스 프렌들리’인 것입니다. 결국 2년이냐, 4년이냐, 6년이냐는 ‘고용안정’과 하등 상관없는 쟁점이며, 문제는 언제든 해고될 수 있는 불안정한 노동양태가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파견허용업무가 늘어난다는 것이 문제인데 오히려 이 같은 것은 쟁점이 안 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한편, ‘벼룩의 간을 빼먹는’ 것도 모자라 최저임금을 삭감하려는 시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임금격차는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단결을 가로막고 있는 여러 가지 장벽 중 하나입니다. 그 중에서도 최저임금은 전 사회적 빈곤의 확산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2009년 최저임금투쟁은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최저임금이 인상되면 재벌들이 자신의 손실을 하청·용역노동자에 떠넘기려는 시도가 그만큼 제한됩니다. 임금삭감 시도 자체가 저지되는 효과도 있습니다. 최저임금 인상은 삭감된 임금을 회복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최저임금 현실화 투쟁은 노동자들이 함께 공동의 목표로 삼는 임금삭감 저지투쟁이 되어야 하고, 생활임금 쟁취 혹은 최저임금 현실화라는 구호를 학생운동의 요구로 받아 안아 함께 제기해야 할 것입니다. 6월 최저임금 위원회의 최저임금결정 시점에 맞추어 반짝 집회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실천을 통해 전 사회적 이슈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여성노동자들은 비정규직법과 최저임금법 개악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될 것입니다. IMF 때와 같이 여성중심의 우선해고를 여성들만의 문제로 둔다면 이는 노동자 전체의 권리 축소로 이어질 것입니다. 자본의 공격은 다양한 차이를 차별로 만드는 분할선들을 타고 옵니다. 페미니즘과 국제주의를 노동자 운동의 이념으로 하여 승리를 약속하는 강고한 연대를 만듭시다.

이런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해설하면서 우리의 요구를 확장시켜 나갑시다. 비정규직 법안 자체를 폐기하고, 해고에 대한 금지와 고용안정을 위한 방안을 마련하고, 최저임금을 현실화 하라는 것으로 초점이 맞추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실업대책을 위해 실시한다는 청년인턴제/공공근로 확대 등의 내용을 함께 연결하여, 노동자들의 문제로만 여겨지는 비정규법/최임법 개악이 실은 대학생 모두의 현재이자 미래임을 이야기하며, 대학생들이 공동으로 투쟁해야 함을 선동합시다.

 

1 - 2) 해고와 구조조정, 임금삭감에 맞서 싸웁시다!

GM대우는 2008년 8천 7백억 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는데, 이 엄청난 손실의 원인은 매출 감소가 아니라 파생상품거래였습니다. GM대우의 미국 경영진들은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파생상품거래를 통해 약 2조 원의 손실을 만들었습니다. 파생상품거래로 인해 생겨난 GM대우 자산 손실분만큼 GM의 자산이 늘어나는 오묘한 시스템을 통해서 자신들의 위기를 극복하려 하고 있습니다. GM 계열사들과 거래한 매출채권(수출하고 받지 못한 대금) 역시 일종의 간접적 자본유출입니다. 초민족적 자본의 부당거래와 수탈로 인해 정상적인 경영이 불가능해지는 상황에서 최악의 구조조정이 생겨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주의적 감상으로 GM대우 살리기 운동 같은 것이 실효성을 가질리 없습니다. GM의 사례에서 보듯이 해고와 구조조정이 국제적인 생산연관에 따라, 전략적으로 필요가 없는 지역들에서는 공장공동화현상도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 이명박 정부는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과 기업의 도산을 막기 위해 공적자금 투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규모의 공적자금은 일차적으로 은행을 중심으로 금융기관에 투입되고 있으며, 한국경제의 금융화를 주도하고 막대한 이윤을 해외로 빼돌린 장본인들에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IMF 환란 이후 국내은행은 배당금으로 엄청난 자금을 해외로 유출했는데, 2008년 5월 유가증권 외국인 배당총액 상위 10대 기업 가운데 국민은행, 외환은행, 신한지주회사가 포함되었습니다. 특히 2위를 기록한 국민은행은 한 해에만 6,700억원을 외국인에게 배당하였고, 이익은 자본에게 손실은 노동자에게 전가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 경제위기 속에서 자본의 수탈도 더욱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저들이 내놓는 정책들이 노동자들을 무력하게 만들기 위한 적극적인 계급투쟁이라면, 이를 반전시킬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민중은 이론가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의 죽음이 세상을 바꿀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최소한 화물연대 조직이 깨져서는 안 된다는 것, 힘없는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린 지 43일이 되도록 아무 힘도 써보지 못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호소하기 위해 선택한 것입니다. (중략)날고 싶어도 날 수 없고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가 행복하고 서로 기대며 부대끼며 살아가길 빕니다. 복잡합니다. 동지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면서 그 속에 저도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박종태 열사의 유서 중 -

 

대한통운에서 택배기사 78명을 집단 해고한 일에 절규하며 돌아가신 故 박종태 열사의 뜻을 이어받는 투쟁을 전국적으로 벌여냅시다. 손실을 만들고 있는 것은 자본인데, 그것의 피해는 열심히 일한 노동자들에게 돌아오는 현실에 대한 발본적인 문제제기를 합시다. 경제위기라 하여 헌법에 보장된 기본적인 권리인 노동권이 축소되어야 하는가, 노동자들 내에서 고통을 분담하라는 저들의 요구는 ‘정당’한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학우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토론합시다. IMF때처럼 해고와 구조조정, 임금삭감에 ‘순응’하지 않을 수 있도록 날카로운 논리와 언어를 대중에게 돌려줍시다. 한시적 해고중단 및 고용안정 특별법 제정을 매개로 경제 살리기는 노동자-서민 살리기여야 한다는 ‘상식’을 유포합시다.

 

1 - 3) 용산참사 100일을 돌아보며, 민중의 생존권과 저항권을 지켜내는 투쟁을 벌입시다!

폭력적인 진압에 의해 5명의 철거민이 돌아가신 지 100여일이 지났지만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부는 사과는 하지 못할지언정,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유가족들을 ‘불법 집단’으로 매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용산참사와 관련된 모든 집회를 탄압하고, 용산범대위 관련자와 여러 운동 단체들에 집단 소환장을 보내는 등 어이없는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었지만 죽인 사람은 없습니다.” 라는 유가족의 절규가 아직도 지속되고 있고, 9일부터 또 다시 농성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농성장을 치면 경찰이 와서 부수어 버리고, 그 자리에 또 다시 농성장을 치는 일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학생운동도 이를 보위하기 위한 투쟁에 함께 해야 할 것입니다.

있던 집을 부수고, 멀쩡한 집을 없애고 그 자리에 가진 자들만을 위한 건물을 새로 짓는 것이 재개발 정책의 본질입니다. 이를 통해 이익을 얻는 것은 건설자본과 부동산 투기, 금융투기를 일삼는 자들일 뿐입니다. 용산 참사 해결 없이는 재개발을 할 수 없다는, 가진 자만을 위한 재개발이 아니라 더욱 살만한 공간을 위한 재개발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우리의 투쟁을 더욱 더 힘 있게 모아야 할 때입니다. 이 투쟁이 아무도 모르게 막을 내리는 것이 지배계급의 바람이기 때문에, 이 투쟁의 불씨가 꺼지지 않게 모든 투쟁하는 민중들이 연대해야 합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 죽음을 강요받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용산 투쟁에서 함께 모아질 수 있도록 합시다.

 

1 - 4) “해고금지! MB악법저지! 용산참사 해결!”을 기치로 6.10 전 민중 항쟁으로 달려가자!

5월 28일, 민주노총 서울본부에서 제안한 “6월 노동자 총궐기 성사를 위한 간부 결의대회”가 있고 이후 ‘민중대회’가 이어집니다. 서울지역 집행간부와 현장간부를 합치면 약 4000명 정도 된다고 하는데, 이 사람들이 조퇴를 기본으로 하여 앞장서서 나서고, 조합원들에게도 함께 거리로 나오자고 제안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 취지입니다. 민주노총에서 6월 10일 총파업과 전 민중항쟁을 선언했지만 이것이 ‘선언’한다고 해서 성사되는 것은 아니기에 서울지역에서부터 기층 조직화에 힘쓰겠다는 계획이고, 이를 노조 이외 운동진영에도 너르게 제안한 상황입니다. 4.30-5.1-.5.2를 디딤돌로, 5월 28일 민중대회를 중간 다리로 하여 6월 10일 광범위한 투쟁을 만들겠다는 계획에 학생운동도 함께 합시다. 학생운동은 1> 기만적인 청년인턴제와 연계하여 노동자민중 내부의 출혈을 강요하는 해고금지! 2> 6월 무더기 처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비정규 최임법 등 악법저지! 3> 정부의 재개발정책 기조가 전혀 바뀌지 않은 채 공안탄압을 받고 있는 용산참사 해결!로 경제위기의 책임전가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합시다. 민중대회 전에 사전대회 격으로 ‘대학생대회’를 개최하고 노학연대의 기치를 세워나갑시다.

작년 5-6월 촛불과 함께 거리로 나왔던 대학생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녀들이 기억하는 촛불 투쟁을 현재적으로 되살릴 수 있는 다양한 기획을 대동제와 5월 한 달 간 벌여냅시다. “그 때 당신은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작년 촛불 이후 과/반에서는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 갔나요?”, “당신을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등등 그/녀들이 다시금 저항을 꿈꿀 수 있도록 직접 발로 뛰며 만나고, 교통의 장을 만들어 냅시다. 경제위기의 한파가 민중들에게만 몰아치고 있는 지금, 해고금지! MB악법 저지! 용산참사 해결!을 기치로 6월 10일 이명박 정권 퇴진 투쟁을 힘차게 벌여냅시다!

Posted by 행진

2009/05/15 01:17 2009/05/15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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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향1]
위기의 책임을 전가하는 자본에게
우리의 몫을 내놓을 수는 없다!


1. 모든 부문으로 구조조정을 확대하라!

5월은 누구의 삶도 쉽사리 보장할 수 없다는 정부의 엄포와 함께 시작되었다. 4월30일 오전 이명박 대통령 주재로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열어 기업 구조조정 추진 계획을 마련했고, 우선 채권단은 금융권 신용공여액 500억 원 이상인 1천500여개 대기업을 대상으로 6월 말까지 신용위험 평가를 실시한다고 발표하였다. 여기서 C등급 판정을 받는 기업은 워크아웃, 즉 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가고 D등급은 퇴출 절차를 밟게 된다. 워크아웃이란, 채권금융기관이 기업의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채무상환능력을 높이는 작업으로 대개 대출금 출자전환, 상환유예, 이자감면, 일부부채 탕감 기간을 주고, 동시에 계열사의 정리, 자산매각, 주력사업 정비, 신규 투자자금 유치를 유도하는 작업이다. 즉 은행이 기업 스스로 회생하기 힘든 상황에 돈을 빌려주거나 빚을 탕감해 줄테니 노동자들을 다시 부려먹어 수익을 내고, 빚을 갚을 수 있는 구조의 기업으로 탈바꿈하라는 요구이다. 한편 퇴출 절차를 밟게 된 기업은 금융기관이 기업 등에 돈을 빌려주거나 보증을 서주는 등의 제공을 중단하겠다는 것으로, 빌려준 돈에 대한 권리를 가진 채권단이 계열사 간 합병이나 지분매각을 통해 회생이나 청산 절차를 밟고, 남은 자본을 회수 혹은 매각하게 됨을 말한다.

이처럼 정부는 이미 평가를 한 건설/조선사와 중대형 해운사에 이어 나머지 업종의 모든 기업으로 자본살리기를 확대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45개 그룹에 대한 재무구조 평가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은 14곳은 다음달 말까지 재무구조 개선 약정과 구조조정에 나설 계획이라고 한다.

 

시장이 신뢰할 수 있는 구조조정 방안이 재무구조개선약정에 반영돼서 구조조정이 일어나는 것이 바람직하다. 채권은행들이 나름대로의 수단을 가지고 있다. 시장에서 신뢰받을 수 있는 구조조정을 못하게 되면 결국 시장에서 응징과 책임추궁이 있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더 무섭다고 생각한다. - 진동수 금융위원장 기자간담회 -

 

위의 말에서 보이듯이 현재의 구조조정 양상은 개별적인 기업의 대응으로 나타나는 것 이상으로 10년 전 IMF 때와 같이 정부가 적극 나서서 구조조정을 실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은행(채권단)을 통한 구조조정 작업이 본격화 되고 있고, 회생절차 마저도 국민들의 예금을 통해 자본살리기를 실시하는 것이다. 물론 은행 건전성 테스트 또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구조조정을 위한 금융권 구조조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구조조정을 전방위적으로 압박하는 지배계급의 모습에서 경제위기는 아직도 미궁 속에 빠져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세계 경제위기 직격탄을 맞은 자동차 산업이 보여주듯 GM대우는 정규직 전환배치를 통한 비정규직 해고, 무급순환휴직으로 사실상 실업자 양성소가 되었으며 쌍용 자동차는 2646명 해고 안을 발표한 후 결국 8일 2400여명 해고절차를 노동부에 신고했다. 코레일은 실적 저조를 만회하기 위해 공기업 중 최대인 5115명 정원 감축을 이사회에서 통과시켰다. 이러한 대규모 구조조정과 전 부문으로의 구조조정 계획은 등급을 통해 살릴 가치가 있는 기업을 선별하여 노동자 민중의 고통을 통한 극복을 시도 하고 있다. 진정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은 벼랑 끝 생사기로에 놓여있음을 보여준다. 아래에서 구체적인 쟁점과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2. 구조조정, 무엇으로 시작되어 어떻게 진행되는가.

우선 가장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쌍용 자동차를 보도록 하자. 2004년 쌍용자동차 인수당시 헐값에 이미 수익을 얻은 상하이차는 이후 지속적인 노동자 해고와 기술유출의 시간만을 보내며 수익을 챙겼고, 경영진은 더 이상의 이윤 통로가 발견되지 않자 먹튀자본의 모습을 보여주며 철수해 버렸다. 수 년 간 방치되어 온 쌍용 자동차는 세계적 경기 침체로 수출조차 막히자 적자가 불어났고, 파산하기 직전 법정관리로 넘어갔다. 기업을 청산하는 가치보다 존속 유지시켜 가동하는 가치가 높다는 법원 판결이후 곧바로 경영진, 정부는 2400여명 해고 절차를 접수했는데, 채권단의 신규자금 2,500억원 수혈이 대규모 인력감축을 통해서만 지급될 수 있다는 조건 때문이었다. 이미 사내 하청업체를 정리해오던 회사 측은 전환배치 이후 일을 쉬게 된 비정규직을 전원해고 했고, 그것도 모자라 전체인원의 1/3을 잘라내겠다는 강수를 고집하고 있다. 먹튀자본으로 무너진 노동자의 삶이 기업 살리기란 이름의 ‘노동자 죽이기’로 옮겨가고 있다.

 

GM대우는 900명 비정규직 일자리에 600명 정규직을 배치하는 전환배치를 완료했고, 남은 300명 비정규직 일자리에 비정규직 600명이 들어가 900명이 돌아가면서 일을 하게 되었다. 라인 속도도 줄이고 가동률도 60% 남짓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심지어

8개월에 1번씩 일을 할수도 있고, 임금은 20~30만원밖에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다. GM대우 회사측은 이마저도 무급순환휴직(임금 지급없이 노동자들이 돌아가면서 일을 쉬는 상황)이라는 이름으로 고용을 보장하는 길이라며 버티지 못할 거면 알아서 나가라고 유도하고 있다. 이처럼 전환배치->무급순환휴직->희망퇴직 강요->정리해고 순으로 인원감축/임금축소/복지후퇴 등 다양한 방법의 손실메우기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충격적이게도 구조조정이 알려지기 시작할 때 GM대우는 지난해 경제위기 속에서도 약 2900억 원의 영업이익을 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파생상품 거래로 인한 손실이 2조3300억 원 규모에 달해 2008년 결산 기준 8757억 원 규모의 당기 순손실을 기록했다는 황당한 내용은 구조조정이 무엇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알게 해준다.

 

이렇듯 대규모 전환배치로 노리는 것은 비정규직을 우선 해고하는 것이고, 차근차근 전체 노동자들을 향한 해고가 다가오고 있다. 단번에 시행되는 집단해고가 노동자의 조직적 투쟁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쌍용 자동차, GM대우에 그치지 않고 구조조정 산업 전반으로 확산될 가능성은 높다. 실제로 GM대우 회사 측이 정규직 임금 10% 삭감과 복지조항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김치 냉장고 ‘딤채’로 유명한 위니아 만도는 전체 생산직 노동자 456명 중 220명을 정리해고 했다. CVC캐피탈이 소유하고 있는 위니아 만도는 2300억원에 달하는 수익을 챙기고, 경영상의 이유로 대규모 해고를 진행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계 초민족 기업인 ‘파카하나핀’의 계열사 파카한일 유압도 197명 중 113명을 정리해고 하겠다며 쟁의가 벌어지고 있는 곳이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매출이 감소하자, 전체 노동자의 57%를 감원하겠다는 막무가내 칼부림이 자행된 것이다. 이처럼 위니아 만도와 파카한일 유압을 소유한 투기자본은 단기 순익 이후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주식가치를 높이고 매각 혹은 청산으로 자본을 챙긴 뒤 철수하기 일보직전에 있다.

 

 

3. 구조조정 저지 투쟁과 경제파탄의 주범 금융화에 맞선 투쟁!

97년 IMF 구조조정 당시 해외매각과 투기자본의 국내 침투는 심각하게 높아졌고, 삶이 팍팍해졌지만 “열심히 일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버틴 채 살아왔다. 10년 전의 칼날이 잔인하다고 느꼈지만, 또 다시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마음을 잡고, 자리를 잡으며 많은 사람들은 눈을 질끈 감고 달려왔다. 그러나 더욱더 황폐해진 삶과 바닥만을 마주한 채 누구의 손도 잡지 못하고 2009년 5월을 우리는 살고 있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선택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모든 형태의 해고와 금융투기 자본을 막아내는 것이다.

 

구조조정은 지배계급의 말처럼 기업을 회생시키고, 경영을 정상화 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고, 인원 감축을 통해 손실을 떠넘기는 것이며, 당장 자금이 필요하면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청산되고 매각된다. 뿐만 아니라 대출자금을 갚기 위해 금융권이나 정부의 지시에 따라 빚을 갚기 위한 구조로 기업을 바꿔내고, 노동자들의 노동 강도를 높이거나 혹은 싼 값에 고용되고 언제든 해고될 수 있는 노동자들을 이용해 진행된다.

 

위기를 기회로! 라는 말은 자신들이 발생시킨 경제위기를 노동자들에게 해고하기 쉽고 더 많이 착취하기 쉬운 형태로 전환하는 기회로만 이용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로 지배계급의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줄 수 없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하게 경제위기는 노동자들이 불러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 확실하게 이야기하면 “경제위기 책임은 노동자에게 없다!”는 명명백백한 사실이다. 자신들이 필요할 땐 쉬지 않고 공장을 돌려 노동자들을 부려먹다가, 전 세계 곳곳을 누비며 금융투기로 입은 천문학적 금액의 손실 그리고 발생시킨 경제위기를 구조조정으로 해결하겠다는 저들에게 결코 우리의 몫을 내어줄 수 없다.

 

또한 투기자본은 바닥으로 꺼진 기업 가치를 높여, 주가를 상승시키기 위해 구조조정을 시행하고 주식이 오르면 되팔아 그만큼의 차익을 남기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특히나 경제위기 상황에서 초민족 투기자본에 헐값으로 매각된 기업들이 이런 상황에 처했고, 수 많은 노동자들의 삶이 파탄났음은 10년 전 역사 속에 교훈으로 남아있다. 구조조정을 불러 온 경제위기의 책임이 노동자에게 없음을 확실히 알려내자. 열심히 일한 대가를 생존권 박탈로 만들어버리는 저들의 공격에 투항이 아닌 투쟁으로 저항하자. 지배계급이 유포하는 고통분담과 양보교섭이 아닌 노동자 민중의 삶을 지켜낼 수 있어야 한다. 자본과 기업살리기가 아닌 노동자 서민 살리기를 요구해야 한다. 우리는 아래와 같은 주장으로 구조조정 저지투쟁과 경제파탄의 주범 금융화에 맞서는 투쟁을 만들어내자.

 

첫째로, 위에서 살펴보았듯 많은 구조조정의 경우 투기자본의 먹튀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분명히 알려나가자. 특히 쌍용 자동차의 대규모 해고절차와 GM대우의 향방을 예측하고 투쟁을 조직할 수 있으려면 구조조정 정리해고 반대 투쟁이 바로 금융 투기 자본의 맞서야 함은 핵심중의 핵심이다. 쌍용 자동차 정리해고 안이 나온 후 주가가 오른 사실은, 손실을 노동자 해고로 줄이고, 다시 공장을 가동시켜 이윤을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GM대우 역시 노동자들을 쉬지 않고 부려먹어 수익을 남겼음에도 파생금융상품 손실로 공장가동을 줄이고, 해고로 지어지고 있다. GM 본사가 의도적으로 GM대우의 파생금융상품 손실을 일으켜 그만큼의 자본을 GM 본사로 흡수시킨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구조조정을 통한 노동자 분할은 금융 투기자본이 활개를 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된다. 자동차/조선/건설업 등의 주요산업은 연관되어있는 소재ㆍ부품이 엄청나게 많기에 수많은 하청 업체 노동자들의 고용과 생존 위협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먹튀 자본이 어떤 것도 가지고 나가지 못하게 원청-하청/정규직-비정규직/여성-남성/정주-이주 노동자의 단결을 만들고, 분할에 빠져 각개격파 당하지 않기 위한 이데올로기 싸움을 조직해야 한다. 구조조정 정리해고 반대투쟁은 바로 생존권 투쟁이자 투기자본을 멈추게 하는 투쟁이 되어야만 가능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금융권 신용 공여액이 높은 대기업 그룹에 대한 신용위험 평가가 구조조정을 불러올 수 있음을 긴장하고 바라보아야 한다. 대기업 계열사를 매각하거나 강도 높은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정부는 그만큼 금융권의 건전성과 유동성 확보로 경제위기의 뇌관을 자극하지 않아야 하기에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금융기관에 대한 건전성 테스트와 대기업 그룹이 신용 공여액을 어떻게 갚아나갈 수 있게 하느냐가 맞물려 진행될 수밖에 없다. 노동자 서민의 예금을 마음껏 이용하고, 등급 평가 후회생 가능한 기업에 자금을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모두 민중의 생존과 결정에 따라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4. 나아가며

우리는 IMF 당시 헐값으로 투기자본에 매각된 기업들이 어떻게 회생했고, 지금 또 다시 무엇을 희생시키며 살아남으려 하는지 바라보고 있다. 지배계급과 투기자본이 훑고 지나간 자리, 그곳엔 삶도 터전도 분노도 사라진 굳어버린 땅 뿐이었다. 구조조정, 정리해고 라는 말이 저들에게는 빠르고, 쉽게 곁가지를 쳐내는 것이지만 노동자 민중에게는 자신의 피와 땀을 모조리 빼앗기고 버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위기 극복은 기업과 자본 살리기가 아니라 노동자 민중 살리기가 되어야 합니다” 라고 외치는 우리가! 먹고튀는 자본과 책임회피 정부, 남은 것이라도 빼먹겠다는 저들한테 우직하게 삶을 살아 온 민중들과 함께 새로운 터전을 일궈 나가는 싸움으로 돌려주어야 한다.

Posted by 행진

2009/05/15 01:16 2009/05/15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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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향2]

비정규법 개악안 분석과 투쟁방향




비정규직법 개악, 무엇이 문제인가?

기존 비정규직법의 구성과 내용

2006년 11월 30일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된, 이른바 ‘비정규직보호법’<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이하 <기간제법>과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중 개정법>(이하 파견법) 등을 통틀어 이름붙인 법이다. 당시 노동부장관 이상수는 ‘드디어 비정규직들을 보호하는 길이 열렸다’며 떡을 자르며 자축을 하고, 국민들에게 적극 홍보하였다. 흔히 말하는 정규직 노동자는 ▲정년까지 고용을 보장하며 ▲전일제(full-time)로 일하고 ▲ 고용과 사용이 분리되지 않은 노동자를 말한다. 즉 정규직 노동자는 기간을 정하지 않은 근로계약을 체결하여 정당한 이유가 없는 한 해고할 수 없고, 고용이 정년까지 보장되는 노동자로서 해당 기업에 직접 고용된 노동자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와 달리 비정규직은 ‘어느 범위까지 분류할지’ 여전히 논쟁 지점이 존재하고, 국제적 기준도 통일된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비정규직보호법의 기간제(근로계약 당시 계약기간을 정하고, 기간이 만료되면 해고 혹은 재계약되는 형태), 단시간(흔히 말하는 파트타임), 파견(A회사의 내/외부 다른 회사B가 A회사로 인력을 파견하는 형태) 노동자 등 정규직이라 말할 수 없는 이들은 모두 비정규직 노동자로 볼 수 있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정의는 정규직의 개념과 분할하여 ‘정규직이 아닌!’ 노동(자)의 조건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노동자간의 분할과 경쟁을 끊임없이 조장하는 자본의 시각이 그대로 투영된 것이다. 우리들의 권리가 모래알과 같이 각각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자신들이 그어놓은 조건에 맞지 않으면 비정규 노동자로조차 인정하지 않는 자본의 분할전략을 거부하고, 비정규직을 본질적으로 표현한다면 ‘자본과 노동 간의 비대칭적 권력관계를 본질로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내에서 자본이 고용관계를 외부화하려는 노동’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기간제법> = 비정규직 양산법!

<기간제법>은 한마디로 ‘비정규직 양산법’ 혹은 ‘비정규직 확산법’으로 표현할 수 있다. 현행 비정규직법은 몇 가지 쟁점, 즉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는 독소조항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많이 거론된 것이 “기간제근로의 총 사용시간을 2년으로 제한, 2년 초과시 정규직(무기근로계약) 근로자로 간주한다”는 조항이다. 이를 두고 정부는, 2년 열심히 일하면 정규직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식으로 대대적인 홍보를 벌인 바 있다. 하지만 이 법이 시행된 지 2년이 지난 현 시점의 현실은 그들의 주장이 새빨간 거짓말임을 증명하고 있다.

 

2년 후 정규직화? 2년 내 해고!

앞서 말한 대로 정부의 홍보와는 달리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년 후 정규직으로 전환’된 것이 아니라 ‘2년이 지나기 전에 해고’당했다. 법이 정한대로라면 노동자를 2년 이상 고용할 경우 이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하지만 사용자들은 그 전에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있다. 부당해고가 아닌 단지 재계약하지 않은 채 기간만료로 고용관계가 종료한 것일 뿐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다.

물론 매번 기업/기관에서 2년마다 그 모든 사람들이 모조리 갈아치울 수는 없다. 해당 업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기술, 능력을 다시 가르치는 것 보다는 숙련된 기존의 노동자들을 쓸 수 있는 데까지 쓰는 것이 사용자의 입장에서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약 갱신을 한다. 2년이라는 기간 제한만 있을 뿐 계약 갱신과 갱신의 횟수에 대한 제한이 없기 때문에 계약이 종료되고 다시 재계약을 하면 그만이다. 뿐만 아니라 2년 후 정규직화 한다는 조항에는 많은 예외가 존재한다. 55세 이상 고령자, 전문직, 실업대책 일자리 등은 계속해서 비정규직을 사용할 수가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 수가 줄어든다고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다!

기간제 보호법이 시행된 2007년 7월 이후 비정규직 규모는 감소하고 있다. 2007년 3월에는 비정규직(비율)이 879만명(55.8%)이었으나, 2007년 8월에는 861만명(54.2%), 2008년 3월에는 858만명(53.6%)으로 감소했다. 이것은 정부의 발표로도 확인할 수 있는 바, 비정규직법 시행 1년, 기간제가 줄어들고 용역, 호출근로, 등이 늘어났다는 것이 통계상에 분명하다. 통계청 고용형태별 부가조사 결과를 보면 100인 미만 기업의 경우 기간제(계약직) 노동자는 19만7천여 명이 감소했으나 일부 업체에서 비정규직법 회피용으로 이용하고 있는 용역노동자(10만여 명)를 비롯해 파견노동자(4만4천여명), 일일노동자(17만8천여명) 등은 증가했다. 즉 기간제 노동자들은 간접고용 노동자가 되거나, 가내노동자가 되거나, 실업자가 되었을 확률이 크다.

 

차별시정 신청했다가 돌아오는 건 ‘해고’라는 철퇴!

한편 비정규보호법에는 ‘차별처우 금지ㆍ시정’ 조항이 있다. ‘비정규직(기간제ㆍ단기간ㆍ파견근로자)에 대한 불합리한 차별처우를 금지 노동위원회에 차별시정절차를 마련’하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시행 후 차별시정의 효과는 아예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07년 786건(2740명), 08년 9월 현재 251건(249명)이 접수돼 차별시정제도가 시행된 이후 총 1037건(2989명)이 접수한 것으로 조사되었으나 이것은 철도노조 천여 명이 집단적으로 신청한 것을 개별사안으로 처리해서 수가 많은 것이고, 실제로는 100건도 되지 않는다.

차별시정 신청 자체도 되지 않거니와 차별시정을 통해 문제가 해결되기보다는 오히려 계약 해지되는 사례들도 나타났다. 비정규법 시행 이후 처음으로 차별시정을 신청하고 이를 인정받은 고령축산물공판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 경우인데, 결국 사측의 해고에 차별시정 조치를 포기했다. 사측은 계약기간만료를 이유로 계약을 해지하거나 외주화 할 경우 차별시정이 무력화 된다는 점을 악용해 차별시정 조치를 이행하기는커녕 지방노동위원회의 차별시정 조치 결정 직전,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계약해지를 통보했다.

 

<파견법> = 외주화 촉진법

1998년 2월, 오랜 논란 끝에 <파견법>이 제정되었는데, 당시에도 정부는 <파견법>의 제정이 불법적 간접고용을 규제하고 간접고용 노동자를 보호하는 방안이라 장담하며 늘 그럿듯이 ‘보호법’이라 명명하였다. 하지만 지난 10여년은 ‘안정적인 일자리의 파괴’와 ‘노동기본권의 무력화’ 그리고 ‘저임금·주기적 해고·노예노동의 확산’이었으며, 간접고용은 더욱더 확대되어 갔다. 현재 파견대상업무는 전문지식·기술·경험 또는 ‘업무의 성질 등’을 고려하여 대통령령으로 마음껏 정할 수 있게 되어있다. 04년 정부의 입법안에서는 파견대상업무에 대해 (몇몇 업종만 제외하고 모든 업종으로 확대하는) ‘네거티브 리스트 방식’을 주장하여 노동계의 반발에 부딪치자, 포지티브안(26개 업종만 허용)으로 수정하였다. 이는 형식적으로는 26개 대상업무 수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용적으로는 확대하는 방식이다. 시행령 개정을 통해 언제든 대상업무를 확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1년의 범위 안에서 1회에 한하여 파견기간을 연장할 수 있도록 한 것을 06년 파견법 개악을 통해 연장횟수에 대한 제한을 삭제하였다. 따라서 1회의 파견기간이 1년을 초과하지 않고, 연장된 총 파견기간이 2년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파견기간 연장횟수의 제한이 없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2년 내에 횟수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초단기 파견계약이 더욱더 가능해졌다. 이러한 <파견법>, 무엇이 문제인가?

 

합법적인 중간착취! 사용자는 책임 회피!

파견직을 비롯하여 하청, 도급 등의 외주화 형태로 노동자를 고용하는 행위를 간접고용이라고 한다. 이 경우, 법적으로 (사용회사=)A회사는 해당 노동자를 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노동자에 대해 아무런 의무도 지지 않는다. 노동자는 A회사가 제공하는 노동환경이나 임금, 처우에 대해 문제제기 할 수 없다. 이 노동자는 A회사에게 고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용회사=)B회사에 소속된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고 단체교섭권 등을 획득해도, A회사와는 대화할 수 없다. 또한 노동자들이 파업 등의 쟁의행위를 할 시, A회사는 B회사와의 계약을 끊어도 아무런 법적 하자가 없다. 때문에 노동자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노동할 수밖에 없다. 간접고용은 고용과 사용의 분리를 전제로 하여 중간착취를 합법화하고, 사용자가 책임을 회피하는 탈법을 용인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버젓이 행해지는 불법파견

500일 넘게 철도공사와 파업으로 맞서 싸운 KTX 승무원의 업무 또한 파견업무 허용 대상이 아니었다. 법원이 불법파견판정을 내렸지만, 외주화는 강행됐다. 위법임이 밝혀져도 법원은 실질적인 강제력이 없다. 실상 노동법 자체가 노동자들을 ‘보호’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이 외에 제조업의 직접생산공정업무 또한 파견 통상허용업무에 포함되지 않는다. 일시사용업무에 포함되지만, 실상 상시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에는 불법파견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서 도급계약을 맺었다고 하더라도 그 업체와 2년 이상 고용을 승계하지 않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고용승계를 없애기 위해서 기존업체에서의 근속을 인정하지 않는 방식의 고용승계가 이루어지고 있다.

 

 

경제위기 하 비정규법 개정의 전 사회적 파장

 

비정규직법 때문에 고용창출이 안 된다고?

미국발 금융위기로 한국경제마저 비틀대던 지난 해 11월, 10개 부처 공동 ‘경제난국 극복 종합대책’의 한 방안으로 비정규직법 개정 추진을 발표했다. 곧이어 이영희 노동부장관은 비정규직법으로 인해서 내년이면 100만 명 가까운 노동자들이 해고될 것이라는 걱정을 털어놓으며 ‘비정규법안 개정’을 해야 한다고 한다. 사실상 자신들이 강력히 추진했던 비정규직보호법이 결국에는 비정규직 양산/해고법이라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 법 개정안은 국회로 제출되었고 현재 국회에 계류중이다. 노동운동 진영을 비롯한 국민들의 비판과 불만 때문에 쉽사리 법을 통과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다급함 때문인지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은 ‘노동 유연성 문제’를 금년 말까지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국정 최대과제라 못박기까지 했다. ‘노동시장이 유연해지면 기업의 채용 확대로 오히려 고용 안정성이 높아질 수 있는데, 한번 채용하면 해고가 어렵다보니 기업들이 비정규직 또는 파견근무자를 선호한다’는 이야기이다.

허나 대다수 연구소, 단체들의 의견은 정부와 다르다. 한국노동연구원을 비롯해 고용정보원, 한국은행 등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일자리 및 취업자 감소는 주로 경기적 요인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노사정위 공익위원 역시 “ 비정규직이 감소하고 있는 현상의 주원인은 세계적 불경기라고 판단한다. 불경기 시에 기업은 고용조정이 용이한 비정규직부터 조정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향후 비정규직의 고용불안은 더욱 가중될 것으로 전망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정부가 계속 ‘일자리’ 운운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재벌 위주 경제정책’의 명분을 확보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며 일자리 감소 원인을 비정규직법으로 희석화하고 사용자들의 편법악용을 합법화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비정규직법 영향 분석>

연구기관(자)

발표문

주요 내용

이병희․정성미

한국노동연구원

노동리뷰(2008.7)

기간제근로 감소는 주로 100인 미만에서 발생, 1년 미만 신규채용 감소 현저하게 진행. 비정규직법 영향으로 보기 어렵다.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비정규 입법 시행 효과 및 정책적 대응방향(2008.7)

고용둔화는 비정규직법 제도적 요인보다 한국의 경기악화 영향

윤정향

고용정보원

고용규모 변화로 살펴본 비정규직법 1년 효과(2008)

직접고용 감소, 간접고용 증가

비정규직법 영향으로 비정규직 감소 미비.

유경준

한국개발연구원

비정규직법의 고용효과 분석 - 최근 고용부진과 관련하여(2008.10)

취업자수 증가 추이의 하락 원인은 경기침체 영향. 비정규직법에 따른 고용감소 영향 크지 않음

한국은행 조사국

최근 일자리 창출 원인과 정책과제(2008.8)

고용부진 원인은 경기적 요인(54%), 구조적요인(22%), 제도적 요인(10-20%)으로 진단

악법을 고친다? 좋은 거야, 나쁜거야??

이번에 논란이 되고 있는 ‘비정규직법 개악안’은 기간제와 파견 노동자 고용기간을 현행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하고, 차별신청 기간을 현행 3개월에서 6개월로 연장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한나라당이 내놓은 ‘4년 유예안’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이 법안에 따르면 2년 동안 비정규직으로 일한 이후 4년 동안 비정규직 보호법 적용을 유예할 수 있는 것이라 사실상 6년간 비정규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정부의 ‘4년 연장’이든 한나라당의 ‘4년 유예’든 ‘정규직 채용 종료법’이라는 측면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6년간 비정규직으로 사람을 쓸 수 있는데 굳이 정규직으로 채용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고, 2년마다 해고하고 신규채용하고 교육하는 비용도 줄일 수 있어서 그야말로 ‘비지니스 프랜들리’인 것이다. 결국 2년이냐, 4년이냐, 6년이냐는 ‘고용안정’과는 하등 무관한 쟁점이며, 문제는 언제든 계약해지, 해고될 수 있는 불안정한 노동양태가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것이다.

특히 정규직, 비정규직 가리지 않고 고용보장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심각한 경제위기 상황에서 정부가 비정규직법 개정-기간연장을 통해 조금이라도 고용안정을 시켜보겠다는 것은 수사에 불과하다.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한다고 해서 비정규직 해고가 용이해지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노동자 입자에서는) 4년으로 연장되었다고 해서 해고를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앞서 말했듯 2년에서 4년으로 연장을 하든 안하든 비정규직의 해고는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정부와 자본의 의도는 비정규법안을 통해서 ‘비정규직을 일반화’하는 것이다. 비정규직이 비정상적 고용형태라는 그동안의 인식을 없애고 비정규직을 당연하고도 정상적인 고용형태 즉, ‘상식적인 일자리’로 인정하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나가며 : 비정규악법 개악 막아내고, 경제위기 하 임금삭감/해고 경향에 맞선 투쟁을 만들어 나가자!

 

현 시기 비정규직법 개악은 경제위기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노동권, 생존권을 더욱 축소시키고 파괴시키는 흐름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이미 쌍용자동차, GM대우, 위니아만도 등이 경영 위기의 해결책으로 인원감축, 해고, 임금삭감 등을 진행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난 IMF때와 마찬가지로 정부가 적극 나서서 기업들의 구조조정을 강력히 추진하겠다고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실제 자영업자, 일용직노동자 등 비가시적인 노동영역부터 시작하여 점차 대공장의 조직노동자로 이동하며 가시화되고 있는 ‘대량해고’와 특,야근수당, 보너스 등에서 기본급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는 ‘임금삭감’ 등 실제 현장에서의 계급투쟁은 이미 진행 중이다. 자본의 위기의 책임과 부담을 노동자-민중에게 최대한도로 떠넘기기 위한 전국적 공세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해고와 임금삭감의 경향은 산업예비군의 증대로 이어지고 이는 노동자간의 경쟁과 갈등을 더욱 심화시킬 조건으로서 작용할 것이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법/제도적인 정비로서 진행되는 비정규악법 개악은 6월 국회에서 다시 통과 강행이 예상되는데, 이에 대한 대응이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비정규악법 개악안을 막아내는 것과 함께, 무엇보다도 광범위하게 추진되고 있는 해고/임금삭감에 맞서는 투쟁에 함께 하자!


Posted by 행진

2009/05/15 01:16 2009/05/15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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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_동향] 용산투쟁 100일을 돌아보며


[동향3]
용산투쟁 100일을 돌아보며



지난 4월 30일 경제위기에 맞선 대학생 공동행동의 용산 참사 해결을 위한 투쟁을 연행으로 진압한 경찰은 119주년 노동절, 촛불 1주년까지 3일간 241명을 폭력 연행하였다. 3개 부처의 불법 시위 자제 담화문 발표를 통해 마구잡이 연행을 하더니 무더기 사법 처리를 검토하고 있으며 민중들의 불만이 분출될 지점 어느 곳이든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비단 4월 30일 메이데이 투쟁과정에서 처음으로 접한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지난 1월, 용산에서 정권과 경찰 폭력의 극단을 보았다. 한자리에서 5명의 철거민이 공권력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그 이후, 이 투쟁이 진행되는 속에서도 경찰은 무작위로 체포영장과 소환장을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과 범대위에 보내면서 강경대응을 멈추지 않았다. 또한 매일 용산 현장에서 열리는 추모제는 모두 불법 집회로 간주하였으며, 진행되는 집회마다 모두 막아섰으며 전철연과 범대위에 대한 탄압 역시도 멈출 줄 모르고 진행되었다. 이렇게 어려운 조건과 상황 속에서도 유가족과 전철연동지들, 범대위는 100일이 넘게 힘찬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민중들을 거리로 내모든 재개발 정책

경제위기에 대한 책임 전가와 노동자·민중의 양보할 수 없는 권리가 부딪히는 2009년 계급투쟁의 전장, 우리는 그 첫 번째 피나는 싸움을 용산 철거민들의 목숨을 내던진 투쟁에서 보았다. 가구당 평균 부채가 몇 천만 원씩 쌓이는 속에도 전국이 포크레인으로 파헤쳐지고, 몇 년 새 서울 곳곳의 스카이라인은 몰라보게 변화했다.

경제위기를 극복하겠다며 내놓는 그들의 대안은 무엇인가? 건설경기부양을 위해 부동산 시장을 활성화시키고 일자리를 늘려 경제를 활성화 시키겠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미래에 투자하라는 명목으로 계속해서 투기자본을 유치하고 부동산 정책에서 규제를 완화하는 것, 그래서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는 전혀 무관한 재개발 정책들을 쏟아내고 건설자본과 투기자본에 이익을 최대한도로 보장해주는 것일 뿐이다. 또한 세입자와 원주민에게는 최소한의 보상만을 쥐어주며 주거권을 빼앗거나, 이것으로 가능하지 않을 시 폭력을 자행해서라도 그/녀들이 살고 있는 땅에서 쫓아내는 것 말고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민중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한 정책들이 아니라 건설자본과 투기자본이 더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정책들만이 난무하는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정책들의 핵심은 바로, 빠르게 재개발을 추진하고 세입자들의 보상을 최소화하여 건설자본과 투기자본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윤을 얻게 하는 것이다. 이런 속에서 진행된 용산 재개발 역시도 세입자들의 반발을 살 수 밖에 없었으며 이런 반발의 목소리를 억압하기 위해 강경하게 나서며 건설자본과 투기자본의 손을 들어준 정권과 경찰의 폭력진압 앞에 용산참사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용산참사 100일이 우리에게 남긴 것

1월 20일, 재개발 정책에 반대하고 생존권을 요구하며 망루위에 올라갔던 5명의 철거민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 내려왔다. 이는 망루를 짓고 투쟁을 벌인지 만 하루 만에 발생한 일이었다. 한 장소에서 5명의 열사가 발생한 초유의 사태, 그것도 ‘공권력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용산참사에 수많은 운동세력들이 결집하였고 수천여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광범위한 투쟁을 벌여나갈 것을 결의한 가운데 ‘용산철거민 참사 범국민대책위원회(범대위)’가 구성되었다.

용산 투쟁이 시사한 쟁점은 상당하다. 작년 촛불 정국에 이어 반이명박/반신자유주의 전선을 확장해가는 계기로서 용산투쟁을 만들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 제 운동세력은 범대위에 역량을 헌신했다. 용산 투쟁은 지배계급이 말하는 경제발전이 무엇을 대가로 하는 것인지, 민중들의 저항에 대해 이명박이 취하는 태도가 어떠한지 밝히며 그들의 위기 극복의 전략이 필연적으로 반민중적일 수밖에 없음을 폭로하는 것, 지금까지 어딘가에서 주거권 쟁취 등을 걸고 싸워온 빈민/철거민들의 투쟁을 적극적으로 알려내는 것, 이를 계기로 경제위기가 극적으로 폭발하는 국면에서 신자유주의 광풍에 맞선 노동자 민중들의 저항을 조직해가야하는 임무가 있는 투쟁이었다. 이를 위해 범대위와 운동세력들은 날마다 촛불 추모제를 진행하였고 위협적인 가두투쟁을 진행하는 등 공세적인 투쟁을 펼쳐나갔다.

여론의 총집중과 관심을 받는 속에서 '이명박 퇴진'이라는 구호가 적극 발언되었다. 이 같은 구호는 서민들의 삶을 통째로 앗아간 재개발 정책과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며 불도저식 개발에 눈이 먼 정권에 책임을 묻는 구호였다는 점에서 정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이 용산 참사의 원인이고 근본 문제인지를 제대로 쟁점화/여론화시키지는 못했다.

이 와중에 지배계급은 용산 참사가 드러내는 진실을 무마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시도들이 벌였다. 검찰 조사가 은폐되었고, 대신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를 자진사퇴하게 만드는 등 그들이 내줄 수 있는 수준의 양보로 제스처를 취한 후 투쟁의 실질 쟁점들을 묻어 버리려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에서는 용산 투쟁이 단일 쟁점으로는 더 이상 지속시킬 수 없는 투쟁이라거나 용산 투쟁이 침체로 들어선 원인을 민주당과의 공조를 적극적으로 고민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들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용산 투쟁 과정에서 대다수 NGO단위들이 '이명박 퇴진'이라는 기조의 급진성을 핑계로 외면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진보연대 등 주류 운동은 끊임없이 NGO와 민주당과의 공조 흐름에 눈길을 돌렸는데, 이렇듯 강경한 지배계급의 대응을 넘어서는 운동진영의 단결된 맞대응을 조직하지 못한 것이 오히려 더 큰 어려움이었다. 용산 투쟁의 상황은 무기력함에 빠져있고 고립 분산된 전체운동의 조건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민중운동의 위기를 다시금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계속되는 투쟁,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현재 유족들의 사그라지지 않은 분노에 힘입어 투쟁은 100일 넘도록 계속해서 이어져 가고 있다. 지난 4월 하순에서 진행되었던 1차 농성에 이어 또 다시 유가족과 대표자농성이 진행되고 있고, 또 매 규탄 집회와 기자회견마다 정권은 일관된 강경기조로 탄압을 일삼고 있다. 용산 참사의 해결없이는 이러한 비극이 또 다시 반복될 수 밖에 없기에, 또 기세등등해 있는 지배계급이 준비하고 있는 반민중적인 계획들을 좌절시키기 위해서는 용산 투쟁의 쟁점을 계속 붙들고 가며 이후 광범위하게 조직될 민중적 저항의 소중한 불씨로 삼아야 한다.

지난 투쟁의 기간동안 ‘진상 규명’과 ‘공안탄압’ 쟁점으로 인해 풍부하게 발언되지 못했던 재개발 정책의 문제나 각종 투기자본을 유치하고 금융자본에 민중들의 주거권을 팔아넘기려는 프로젝트 파이낸싱의 문제점들을 꾸준히, 풍부히 발언하고 선전해 나가자. 무엇보다 용산 투쟁의 국면을 전환시키기 위한 계기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지금 곳곳에서 벌어지는 노동자들의 투쟁- 경제위기가 강요하는 해고와 임금삭감에 맞선 싸움을 보위하고 고조시켜나가야 한다. 그때까지 우리는 끈질기게 용산 투쟁에 연대하면서 앞으로의 더 크고 공세적인 투쟁을 예비하자!

Posted by 행진

2009/05/15 01:15 2009/05/15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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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79-80경제위기와 노동자 투쟁

 

0. 들어가며

2009년 5월 현재, 우리는 5월 18일을 앞두고 광주 순례단을 떠나게 됩니다. 29년 전 오월혁명의 그 날을 눈앞에 두고, 다시 한 번 역사적인 사건들을 되돌아보고, 광주에서 싸웠던 사람들의 흔적을 느껴보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선 이런 의미 때문에 올해에도 광주로 발길을 향합니다. 그런데 현재 오월혁명에 무장폭동에서 ‘민주화 운동’으로 ‘공식적인’ 지위가 승격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오월혁명을 기억하고 그 흔적을 느끼고 있습니다. 대통령 후보자나 당선자가 묘역에 방문하여 “나는 1980년 광주를 기억하고 있다.”라고 알리는 것은 하나의 통과의례처럼 되었습니다. 이런 추모의례를 통해서 지배계급들은 과거의 아픔을 잊고 상생의 길로 나아가자, 분란을 없애고 경제를 살리는데 온 힘을 모아달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단지 오월혁명을 기념하거나 의례화하는 것을 넘어, 어떤 의미를 가지고 광주를 기억해야 하는 것일까요? 오월혁명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그 정신을 계승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을 구하는 것이 우리가 2009년 광주를 가면서 얻어야할 것입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 지금까지의 민주화 성과들마저 후퇴시키는, 각종 반동적인 행태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촛불집회에 대한 탄압과 용산참사, 그리고 ‘MB 악법’이라고 불리는 각종 악법 제정에서 보여 지듯이, 그들에게 남은 것은 폭력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反 MB 정서가 대중적으로 깊숙하게 퍼져 있는 상황에서 정권의 반동적인 모습들에 초점을 맞춰, ‘민주주의 쟁취’라는 구호가 공공연하게 등장하고, 현재의 상황을 이전의 군부독재정권과 유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80년대와 같은 광범위한 사회운동이 펼쳐져, 비민주적이고 폭력적인 정권의 행동을 막아내고자 하는 열망이 존재합니다. 광범위한 사회운동의 매개체였던 오월혁명을 돌아보는 것은 이런 것을 살펴봄으로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오월혁명을 통해 보고자 하는 또 하나의 정세는 79-80년 경제위기입니다. 사실 70년대에 박정희 정권이 60년대와 비교하여 유신체제ㆍ9차례에 걸친 긴급조치와 같은 비정상적인 수단을 쓴 것은, ‘독점강화ㆍ종속심화’라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던 중화학 공업화 정책, 그리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통치성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후 70년대 말부터 시작된 경제위기는 경제성장 그 자체에 내포되어 있었고, 광범위한 민심이반과 맞물려 정권의 몰락까지 이어집니다. 당시의 경제위기와 분출하던 대중운동에 대한 대응으로 ‘신보수주의적 정책’이 쓰이고, 군부독재정권이 창출됩니다. 이것이 오월혁명이 일어나게 되는 정세였고, 그것은 다시 80년대의 광범위한 대중운동과 그 이념을 만드는 촉매제가 됩니다.

오월혁명을 보며 교훈을 추출하는 것은 단순히 ‘현재에는 없는 어떤 것’을 확인하고 감탄한다거나, ‘망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함만은 아닙니다. ‘오월혁명정신계승’을 외치며 약 30년 전 당시의 경제성장ㆍ위기와 정권에 대한 다양한 불만들이 각자 소진하지 않고, 광범위한 하나의 흐름으로 만들질 수 있었던 그 과정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제시하면 계속 싸워나갔던 주체가 형성되었고, 대중들을 움직일 수 있었던 이념이 만들어진 과정입니다. 물론 경제위기의 성격을 제대로 분석하는 것은 과정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전제입니다. 아래의 글을 통해 79-80년 경제위기와 노동자-민중의 투쟁을 살펴보며, 오월혁명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논의해봅시다.

 

1. 70년대 한국의 중화학 공업화

한국은 對 사회주의권에 대한 자본주의의 최전선 방어지역으로서, 자본주의 세계체계에 밀접하게 포섭될 필요가 있는 지역이었다. 이에 따라 1960년대부터 외국에서 제공되는 차관으로 강력한 발전주의 정책을 추진한 한국은, 세계 자본주의에 대한 종속이 심해지고 독점자본이 성장해갔다. 외자는 수입 대체적 중화학공업화에 투자되어 한국에서 경제성장을 가져왔지만, 노동력을 제외한 모든 생산요소를 초민족적 기업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한국에서는, 원리금 상환을 위한 외한을 얻기 위해 수출을 우선적으로(무조건)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1달러의 수출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평균 1.5달러의 비용이 들어가는 출혈 수출이 이루어졌고, 1960년대 말에 이르면 내적 모순이 심화되고 경제위기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특히 수입대체 중화학부문에서 위기가 발생하는데 차관도입을 둘러싼 무분별한 자본 경쟁으로 인해 과잉생산의 현상을 보이고, 55개사가 은행관리로 넘어가고 10개사가 상환을 이행하지 못하는 대불사태에 빠진다.

60년대 말의 위기에 대응하여 지배계급은 국가에 의한 개입을 강화한다. 60년대 말 부실기업 정리와 국가기업의 민영화를 통해 기업의 합병ㆍ인수를 추진하여 자본의 집중을 이루었고, 수입대체공업화를 넘어 수출지향적인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게 된다. 국가는 독점자본과 적극적이고 체계적으로 결합하였으며, 경제에 대한 폭력적인 개입을 행했다. 우선 70년대 ‘관치금융’이라는 말이 널리 퍼졌듯이 금리와 세제상에서 독점자본은 광범위한 혜택을 받게 된다. 이는 1972년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8.3조치)으로 대표되는데, 주요 내용은 기업사채의 동결과 금리의 대폭적인 인하, 특별금융채권의 발행에 의한 저리대환 및 저금리의 산업합리화자금의 공급이었다. 당시 사채사용량의 60%이상을 점했던 600여개 대기업은 엄청난 특혜를 얻었고, 산업합리화자금은 72-73년 448억 원에 달했다. 이외에도 세제면에서도 특혜가 주어졌는데 이런 식으로 기업이 제공받게 되는 금융특혜는 연간 약 1028억 원에 달했다. 이렇듯 국가는 산업합리화라는 이름으로 자본의 가치파괴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함으로서, 독점자본의 위기를 해소하고 축적을 지속하게 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독점자본은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당시 한국을 둘러싸고 벌어진 내외 정세의 변화가 맞물려 있었다. 69년 닉슨 독트린과 데땅뜨적 분위기에서 냉전체제가 와해되어 가고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가 감소하게 된다. 이에 한국에서는 자주국방과 군수산업 육성이 추진되었는데, 이는 중화학공업화의 중요한 추진 동기가 되었다. 한편 70년대 중심부의 초민족적 자본은 미국을 중심으로 노동생산성 하락과 유가인상에 대응하여 해외로 생산거점을 이동하려 했고, 70년대 이후 스태그플레이션(실업률과 물가의 동시 상승)으로 생산의 고도화를 꾀하고 있었다. 이에 동아시아의 네 마리 용(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이라고 불리는 신흥공업국(NICs)에서 중화학공업부문의 노동집약적 공정을 담당하게 되고, 거기에서 생산된 부품과 반제품을 미국 본국으로 재수출하는 전략이 나타났다. 박정희 정권은 1973년 8월 ‘중화학공업화계획’을 발표해 이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였고, ‘중동 건설’호황을 계기로 기계ㆍ전자ㆍ철강ㆍ비철금속ㆍ석유화학ㆍ조선 등 6개 부문을 전략 산업으로 육성한다. 또한 국민투자기금 전체의 약 68%를 중화학공업부문에 할당했으며, 73~80년 사이 제조업에 대한 산업은행 대출의 약 80%가 중화학공업부문에 투자된다. 이외에도 각종 세제혜택과 ‘수출자유지역’을 설치하여 직접투자를 활성화하려 하였다. 이렇듯 1970년대의 중화학 공업화는 국가지원으로 독점이 성장하는 동시에, 초민족적 자본의 이해에 따라 국제분업체계에 깊숙이 편입해 들어감으로서 종속이 심해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종속은 1960년대에 이어 출혈수출을 강요받는 메커니즘으로 자리 잡는다. 중화학 공업의 생산수단을 도입하기 위해 화폐자본의 수입을 강제받고, 이 과정에서 대외채무의 상환 부담이 더욱 커진다. 이는 대외채무를 갚기 위해 수출을 증가할수록, 역으로 무역수지 적자가 구조화되는 악순환을 초래하고, 금융적ㆍ기술적ㆍ시장적 종속은 더욱 커져간다. 한편 생산수단의 고도화에 따라 70년대 중반부터 기술도입이 급속도로 증가하는데, 이는 원자재에 대한 해외의존과 기술지대를 중심으로 잉여가치의 해외유출을 가속화시키는 것이었다. 한국의 자본은 독점가격 설정과 중동건설 붐으로 들어오는 외회유출, 그리고 노동자ㆍ민중에 대한 수탈체계를 통해 구조적 불안정성이 지속되었다. 그것은 중화학공업화에 따른 자본의 유기적 구성 상승과 이를 이윤량 증대로 극복하려는 자본의 시도와 맞물려, 중화학 공업에 대한 과잉중복투자가 계속되고, 경공업과의 비례관계가 끊기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물가와 실업률의 동시 상승이라는 스태그플레이션 정세가 70년대 계속되었고, 유가 인상은 구조적인 위기를 더 한층 부추겼다. 점차 대외의존도를 높여나갔던 한국에서는 이것이 직접적인 타격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었고, 79년 초유의 경기 위축이 나타나게 되었다. 정부의 중점 육성 사업들에서 가동률이 저하하고, 적자에 빠져들게 되는데, 이에 따라 해외자본의 차입을 갚기 위해 막대한 금융비용이 요구되었다.

 

2. 군부독재정권과 민심이반

1970년대에 국가는 금융적ㆍ세제적 특혜와 각종 정책을 통해 독점자본이 형성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말했다. 국가가 독점자본의 형성에 개입하는 또 다른 방식은 노동자ㆍ민중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여, 발전주의적 성장에 내포되어 있는 모순이 제반의 사회운동과 만나는 것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1972년 10월에 선포된 유신헌법은 노동운동을 비롯한 제반 민중운동에 대한 독점자본가 계급의 억압을 강화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이는 무엇보다 노동에 대한 국가의 통제 강화로 특징지어지는데, 70년 ‘외국인 투자기업의 노동조합 및 노동쟁의 조정에 관한 임시특례법’이 제정되고, 71년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으로 단초를 마련하였다. 이후 대통령의 권한으로 “헌법상의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인 긴급조치가 9차례에 걸쳐 행해졌고, 사회 전체에 대해 준전시상황을 조성하였다.

한국경제는 1970~79년의 10년간에 걸쳐서 연평균 9.4%라는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여, 1960년대의 8.5% 성장률보다 더욱 높은 수치를 나타냈지만, 오히려 민심이반은 가속화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급속한 자본축적과정에서 노동자와 농민이 강요받았던 희생은 1970년대에도 나아질지 몰랐고, 급속도로 양산된 도시빈민들의 정치적 진출이 철저히 억압당했다. 노동자들의 수는 양적으로 크게성장하였는데, 전체 취업자 중 임금노동자의 비율은 1960년 21.8%에서 1980년에는 43.0%로 크게 증가하였다. 중화학 공업의 성장에 따라 1970년대 말에 이르면, 전체 공장노동자의 약 75%가 중화학공업에 종사하였다. 출혈수출을 감내하기 위한 자본의 전략은 폭력적인 노동통제에 기반하여 저임금ㆍ장시간 노동을 계속 감내하게 하는데, 포드주의적 작업방식의 일반화를 통해서 노동에 대한 착취를 증대시키고, 병영적 노동통제를 강화한다. 1970 ~ 81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노동생산성 증가율은 11.1%에 달하지만 실질임금 상승률은 7.8%에 불과해, 가족구성원 모두가 일하지 않고서는 생계를 보조받지 못했다. 그리고 노동자의 주당 평균노동시간은 52.9시간에 달해 절대적인 착취를 당하고 있었다. 이 시기 농민들에 대해서도 60년대 저임금을 위한 저곡가체제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농촌 새마을운동을 통해 유신체제가 정당성을 획득하고, 독점자본이 농업에 침투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후 정권의 주된 농업정책은 농산물 수입개방정책으로 전환된다.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전략 변화와 그에 연동한 한국 자본주의의 자태변환 속에서, 국가는 독점자본의 형성을 지원하기 위해 ‘비정상적’인 통치 행태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경제성장에 따라 민중들의 생활조건이 나아지고 있었을지라도, 여전히 출혈적인 착취방식과 이를 위한 통제는 민중들의 불만을 자극하였다. 곳곳에서 민심이반의 징후들이 나타났고, 점점이 켜진 불만의 목소리들은 이후 한국 사회운동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3. 한국 사회운동의 이념과 양상

1970년대 이후 정권에 대한 민심이반이 광범위하게 나타나면서 다양한 사회운동들이 진출하기 시작한다. 1960년대에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1964년 6.3 투쟁이 조직된 이후,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정권의 3선 개헌 반대 투쟁, 부정시위 반대 투쟁이 조직되었다. 하지만 주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이념에 기반을 둔 학생운동은, 이를 넘어서 자본주의 체계와 노동자ㆍ민중에 대한 착취에 대한 인식을 갖지 못했다. 대중적인 투쟁은 거의 만들어지지 못했고, 학생운동은 써클 형태의 조직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신민당 등 자유주의의 색채를 띤 야당은, 공화당을 매국정당이라고 비판하며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간다. 자유주의자들이 정권에 대한 대안으로 인식되었고, 사상계를 펴낸 장준하, 신민당의 정치인인 김대중‧김영삼, 각종 재야인사들이 혁신적인 인물로 떠오른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의 공간을 열어낸 또 다른 운동의 흐름은 노동자운동이었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재단사인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고 외치며 산화한 이후에, 발전주의적 성장 아래에서 고통 받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전면에 떠오르게 되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1971년에는 파업건수가 전년도에 비해 10배정도 늘어난 1656건을 기록했으며, ‘민중생존권’의 기치를 내걸은 투쟁들이 나타난다.

○ 노동자 민중의 투쟁

1970년대 독점자본을 지원하기 위한 국가의 개입은 노동자ㆍ민중의 권리를 삭감함으로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고, 위에서 보는 것과 같이 각종 악법을 통해 노동자의 단결권과 쟁의활동을 부정하였다. 유신헌법 제 29조에서는 노동 3권을 법률로써 유보시킬 수 있게 했고, 1973년 3월에는 노동관계법을 전면 개정한다. 한편 ‘노사협조주의’를 유포시키며 회사와 노동자들이 공동운명체임을 강조하였고, 유신이 선포된 이후 한국노총은 유신체제 지지를 유도하는 전국 유세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자본과 정권의 노동자들에 대한 공격, 그리고 저임금 및 극한적인 노동조건에 맞서 1970년대 초반에는 산발적인 투쟁이 나타났다. 특히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소규모ㆍ영세사업장을 중심으로 분신사건이 잇따라 일어나는데, 1971년 서울 한국회관 김차오 분신자살 기도, 1973년 서울 조일철강 최재형 자살 기도 사건, 1974년 대구 신철공업사 정세달 자살 사건 등이다. 이런 투쟁은 노동자들의 상태를 사회적으로 알려가는데는 유용했지만, 지속적으로 조직된 힘을 발휘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후 노동운동은 주로 자주적인 민주노동조합을 만들려는 민주노조운동으로, 신흥 민주노조를 결성하는 것과 어용노조를 민주화하는 것이 투쟁의 방향이 되었다. 1972년 5월에는 인천에 있는 동일방직에서 최초의 여성지부장 탄생과 함께 기존의 어용 노조가 민주노조로 바뀌게 되었고, 8월에는 서울의 한국모방(원풍모방) 지부가, 1973년에는 콘트롤데이타지부가, 1974년에는 반도상사 지부가, 1975년에는 YH무역 지부가 신규 민주노조로 속속 결성되었다. 1976년 남성노동자들이 민주노조를 부수려고 할 때 여성노동자들이 농성과 단식투쟁으로 맞선 것은, 주로 경공업과 중소기업 여성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벌어진 1970년대의 민주노조운동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당시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노동공동체’들은 민주노조운동을 위한 조직과 학습을 위한 기본단위로 활용되었고, 투쟁의 성과로 2500개의 노조가 만들어졌다.

이런 투쟁은 생존권을 넘어 정권 및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나아갔고, 당시 성장하고 있던 종교단체나 학생운동과의 연계도 점차 강화되고 있었다. 야학모임에서 성장한 소규모의 정치모임들이 만들어지며, 이후의 운동을 선동하고 학습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1970년대 이후 학생운동에서 노동현장으로 들어가는 활동방식이 일반화되었다. 이런 양상은 농님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1972년 가톨릭농민회가 만들어지며 농민운동이 활성화되었고, 농민운동 활동가를 만들어내는 단체들도 활동하였다. 1976~78년 함평 고구마피해 보상투쟁은 가장 대표적인 농민운동으로, 관료적인 농민지배에 대응한 준법투쟁과 피해보상투쟁이 주된 내용이었다.

 

○ 학생운동

학생운동은 국가의 병영적 대학 통제에 반대하는 1971년의 교련철폐투쟁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런 투쟁이 각 대학으로 번져나가자 정권은 군인들을 학교에 진주시키고, 이후 파쇼정권에 대해 반대하는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의 투쟁을 긴급조치 등을 발동하며 탄압하였다. 1974년에는 개별 대학의 투쟁을 지양하고 전국적 투쟁조직인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을 조직했고, 다른 부문의 운동들과 연관을 맺었다. 학생운동의 성격을 민중적ㆍ민족적ㆍ민주적 운동으로 규정하며 선도적인 투쟁을 벌인 민청학련은, 이후 정권의 탄압을 받아 1000여명이 검거되고 일부에게는 사형과 무기징역까지 퍼져나갔다. 공안은 민청학련의 배후에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가 있다고 지목되었고, 이후 23명을 구속하고 8명에 대한 사형을 언도하였다. 1978년 6월에는 선도적인 광화문 도심시위를 벌이기도 하지만, 당시의 학생운동은 공안탄압 속에서 비공개 이념 써클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학생운동은 민중운동과 결합하기 시작하며 현장 진출이 본격화되었고, 사회 구조에 대한 이론을 학습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이론은 사회전반의 구조적 변혁을 선도할만한 수준이 되지는 못하였으며, 아직 낭만적인 수준에 머물렀다고 평가할 수 있다.

 

○ 재야 및 종교ㆍ지식인의 활동

한국에서 ‘재야’라고 불리는 세력들의 운동은 반유신ㆍ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중심으로 발전해간다. 1973년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은 유신체제 비판에 대한 대중적인 지지를 모을 수 있었고, 이후 긴급조치 1호가 발동하여 탄압을 받게 된다. 이후 1974년 11월에는 ‘민주회복 국민회의’가 만들어졌고, 1976년에는 박정희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3ㆍ1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저명한 야당의 정치인이나 종교계 인사가 중심이 되어 유신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고, 성명을 발표하는 것은 당시 재야운동의 특징이었다. 194년 동아일보와 한국일보에서 노조가 결성된 이후 언론노조운동이 나타나고, 1975년 3월 ‘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만들기도 했다. 종교계와 지식인들도 크게 이 흐름에 포괄될 수 있는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나 재임용에서 탈락한 교수들이 만든 ‘해직교수협의회’의 활동이 대표적이다.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소위 ‘중간계층’의 운동은 형식적 민주주의조차 지키지 않는 정권에 대한 반대투쟁의 성격을 띠었고, 1970년대의 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이 되었다. 이런 상황은 폭발적인 대중운동이 벌어진 1980년대에도 계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투쟁 역시 1970년대에 중요한 흐름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사후적으로 보았을 때 이들이 대중운동의 실질적인 표상으로 자리 잡으며, 87년 이후의 계급투쟁 지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1970년대는 각 부문에서의 투쟁을 통해 운동주체들이 형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운동을 하나의 흐름으로 만들 수 있는 이념과 계기가 마련되는데에는 미달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노골적인 착취가 점점 더 가시화되고 정권의 독재정권의 통치형태가 문제가 되며, ‘민주화’가 모든 운동의 과제로 떠오르게 된다. 그러나 민주화라는 요구가 단지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과정으로 환원될 수 없다면, 이 요구를 통해서 한국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디이며, 어떤 방식으로 계승해나갈 것인지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의 그것은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여지고, 다양한 운동 간에 연대의 시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4. 79-80년 경제위기와 사회운동들의 만남

70년대 말은 경제위기와 정치위기가 동시에 심화되는 시간이었다. 세계 자본주의에 대한 종속을 토대로 독점화가 강화되고 있던 당시의 한국경제는, 출혈적 수출구조로 인해서 중복투자에 따른 과잉자본이 누적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적으로 이자율/달러가치/유가가 오르는 ‘3高’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고, 외채 누적에 따라 ‘외채 위기’가 폭발하게 된다. 이에 따라 70년대 내내 20~30%의 증가율을 보이던 산업생산지수가 1979년 11.7%로 떨어지고, 80년에는 -1.8%를 기록하게 되었다. 제조업 가동률 지수 역시 두 해에 각 7%와 10% 감소하고, 중화학 공업은 1979년 13% 성장에서 80년에는 -3.9%로 축소된다. 박정희 정권은 79년 4월 기존의 성장정책과는 질이 다른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을 시행하게 된다. 이는 수출 지향적 공업화와 재벌 중심적 중화학 공업화의 괴리에 의해 미시적 산업-무역 구조가 왜곡되어 거시적 불안정을 초래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에 따라 거시적인 경제안정화를 위해 인플레이션을 잡고, 임금삭감 및 구조조정으로 당시의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런 정책은 세계적으로 79년 볼커반혁명을 비롯한 ‘신보수주의적 정책’과 기조를 같이하는 것이었으며, 한국에서는 6대 중화학 공업 이외의 산업들이 축소되기 시작한다. 이는 한국경제에서 경제국면이 바뀌는 것을 의미하였고, 발전주의를 토대로 한 자본성장 전략이 이후 신자유주의적 정책으로 바뀌게 된다.

한편 경제위기가 심화되면서 정권의 통치 역시 극단으로 치달아간다. 1978년 9대 대통령선거는 2578명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가운데 1명의 표만이 무효처리되었고(체육관 선거), 78년 12월에 진행된 10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야당이었던 신민당의 지지율이 공화당의 그것을 앞서게 되었다. 정권에 대한 반대 운동은 다양한 곳에서 터져나오게 되었고, 79년 8월 YH무역 노동자들의 투쟁은 정권의 도덕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게 되었다. 사측의 일방적인 공장폐업에 맞서 회사 정상화를 요구하며 진행된 투쟁은,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시작하여 여론의 초점이 되었다. 이에 대해 정권은 강경대응을 하였고, 8월 11일 새벽에 군사작전을 방불케하는 강제해산에 돌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여공이었던 김경숙이 목숨을 잃게 되었고, 이후 김영삼의 당총재 자격과 의원직을 빼앗았다. 이런 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가두시위가 연이어졌고, 다양한 사회운동이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경제위기와 정치위기가 동시에 진행되는 가운데 각 부문의 사회운동 조류들이 모여서 폭발적인 투쟁을 만들어 낸 사건이 바로 ‘부마항쟁’이었다. 80년 경공업 설비투자는 79년의 절반 수준으로 위축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마산ㆍ창원ㆍ부산 등 남해안 일대를 따라 이어졌던 철강ㆍ군수공업에 대한 구조조정이 나타난다. 당시 부산지역에서는 78년 말에 비해 79년 8월 현재에는 제조업체 평균 노동자 수가 27% 줄었고, 각종 산업에서 임금체불과 어음부터 문제도 더욱 심각하게 실시되었다. 이 지역에서 학생운동은 강력한 투쟁을 만들어 내고 있었고, 79년 10월 15일 학생들의 가두투쟁으로 부마항쟁이 시작되었다. 이런 시위는 경남 지역에서 심화된 경제위기와 맞물려 전 민중적 투쟁으로 발전하였고, 경찰서 등 국가기관에 대한 파괴와 방화로 시위의 양상이 더욱 가격해진다. 부산에서 시작한 투쟁은 이후 마산ㆍ창원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수출자유지역의 노동자들과 합세하게 되었다. 부마항쟁은 10월 20일 위수령을 통해서 진압당했지만, 투쟁의 물결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이에 대한 지배계급 내부분파들의 갈등으로 인해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하게 된다.

79-80년 지속된 경제위기와 정치위기는 70년대 성장했던 운동들이 서로 만나고 폭발적인 힘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민주화에 대한 요구는 다양한 사회운동이 거대한 전선운동을 만들 수 있는 ‘이념’이었고, 오월혁명 역시 정세적 계기를 통한 사회운동들의 접합이라는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지배계급의 대응은 반동적ㆍ폭력적인 통치형태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었다. 12ㆍ12 쿠데타를 통해 다시 전두환을 비롯한 군부세력들은, 국력신장과 북한의 위협 그리고 사회적 혼란 일소를 명분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대중운동의 힘이 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더욱 극단적인 폭력을 채택했고, 80년 민주화에 대한 광범위한 요구가 분출했던 ‘서울의 봄’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한 지역을 대상으로 국가의 무시무시한 힘을 보여주는 전략을 택한다. 5월 17일에 시행된 ‘비상계엄전국확대조치’를 실시한 이후 다음날인 5월 18일에 광주에서 작전이 시작된다. 신군부는 공화당 정치인들마저 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이런 상황을 유리하게 재편하기 위해, 시간이 지날수록 전국적으로 분출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각 계층의 민주화 요구를 한 지역에서 압살시키는 방법을 취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발전주의 시대에 소외된 지역으로서, 그리고 군부의 제거대상이었던 김대중이 근거지로 삼고 있었던 호남 지역이 적격지였다.

 

5. 오월혁명의 위상: 역사를 배우며 추출하는 현재의 과제

광주순례단을 떠나기 전에 우리는 오월혁명을 통해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오월혁명을 만들었던 정세적인 조건과 그 보편적인 결과에 대해 좀 더 과학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70년대 한국 자본주의에 내재한 모순에서 발현되었던 79-80년 경제위기와 정권의 반동적인 재편과정, 이런 정세 속에서 70년대 각 사회운동에서 형성된 주체들의 만남을 오월혁명의 정세로 볼 수 있다. 오월혁명에 대해 다루면서 여전히 지역의 대표적인 정치인이었던 김대중에 대한 정치적인 탄압을 그 원인으로 다루는 경우가 있다. 혹은 영화 ‘화려한 휴가’가 보여주는 것처럼 민중들의 자생적인 투쟁만을 예찬하며, 낭만적으로 오월혁명을 다루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오월혁명이 발생하기 이전의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정치의 공간을 열어내고 이를 영속적인 투쟁으로 만들려고 했던 다양한 사회운동들이 존재했고, 다양한 방식의 개입을 통해서 서로 합력을 창출했던 역사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오월혁명은 운동주체들이 79-80년 경제-정치의 위기에 대해 개입하며, 대중들의 민심이반과 융합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오월혁명은 이후 80년대 운동의 이념을 정초했던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오월혁명은 한국사회에 내재해 있던 다양한 모순이 드러났던 투쟁이었고, 자본주의의 모순과 국가권력의 본질을 드러내었다. 한국의 우방으로 인식되었던 미국이 신군부의 등장을 방기하고, 오월혁명을 묵과한 것이 알려지면서 ‘반미’ 감정이 나타나게 되었다. 60~70년대 박정희 정권 기간에 형성되었던 민주주의라는 보편적인 이념은,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인식이나 미국을 바라보는 시각의 과학성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사회운동의 이념으로 들어온 것이나, 주체사상이 빠르게 보급되었던 것도 오월혁명이 남긴 직간접적인 유산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민주화에 대한 과학적 이념) 한편 이후 ‘민주 대 반민주’ 전선의 형성에 있어서 오월혁명은 운동주체들의 공통의 경험과 부채의식으로 남게 되었고, 따라서 전선운동을 매개하는 투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30년이 가까이 되어가는 역사적 사건을 오늘날 돌아보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70년대 말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도입되었던 신자유주의적 정책은, 이제 한 순환을 마감하며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에 따른 경제위기와 이에 따른 노동자ㆍ민중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거세어지고 있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본질적인 전환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시점이다. 또한 이명박 정권은 비정상적인 통치형태를 보이며 경찰력과 공안을 중심으로 하는 억압적 국가장치에 기대고 있으며, 민심이반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는 형국이다. 하지만 이런 국면을 끝내고 대안세계를 만들 수 있는 대중운동의 주체, 합력을 창출할 수 있는 매개로서 이념의 형성은 요원하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경제-정치-운동의 위기라는 ‘3중의 위기’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월혁명의 정신을 계승하고 광주에 떠나면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정세를 매개로 사회를 변혁하기 위한 대중운동을 만들었던 힘을 살펴보는 것이다. 이 힘은 위기에 대한 민중들의 즉자적인 불만을 넘어 이를 긍정적인 방향의 투쟁으로 만들 수 있었던, 주체와 이념의 형성에 있을 것이며, 이것은 2009년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6. 나아가며

지금까지 ‘오월혁명 정신 계승! 경제위기의 책임전가에 맞서자!’라는 2009년 ‘오월혁명 광주순례단’의 기치를 역사적으로 풀어내기 위해, 79-80년 경제위기와 노동자-민중의 투쟁을 살펴보았다. 단순히 한국현대사의 비극적인 사건을 체험하거나 기념하기 위해 광주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면, 당시의 정세를 통해 현재적 교훈을 추출하려는 노력이 어느 때 보다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오월혁명을 가져왔던 이념은 어떻게 대중들의 이데올로기와 융합했으며, 어떻게 과학적으로 정초되었는가? 이것은 비단 오월혁명 광주순례단을 떠나는 것 뿐만 아니라, 이후 현실의 모순을 바꿔내기 위한 투쟁의 과정에서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행진

2009/05/15 01:13 2009/05/15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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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메이데이 투쟁의 결의를 모아
5-6월 더욱 힘차게 투쟁하겠습니다!

 


∥119주년 메이데이 실천단장
수진

대학생의 투쟁으로 민중들의 길을 열자!

4.30·메이데이를 노동자-학생들의 가열찬 투쟁의 날로 만들었습니다.

119주년 메이데이는 끝났지만, 경제위기에 맞선 대학생 공동행동의 투쟁은 계속됩니다!


 

지난 4월 4일, ‘경제위기에 맞선 대학생 공동행동’이 마로니에 공원에서 발족식을 가졌습니다. 각 대학의 공동행동은 한 자리에 모여서 깜깜한 경제위기의 어둠 속에서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 민중들의 생존권을 지켜내는 빛이 될 것을 결의하며 힘찬 투쟁의 첫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그리고 4월 한 달 동안, 전국의 대학과 거리는 공동행동의 활발한 활동으로 들썩였습니다. 공동행동은 민중들의 투쟁이 벌어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함께하며, 경제위기의 책임을 민중들에게 떠넘기는 이명박 정부와 브레이크가 고장난 채 폭주하는 열차와 같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끝내고 대안 세계를 열기 위한 길을 만들어왔습니다.

 

경제위기의 본질을 파헤치고, 학생운동의 대응을 머리 맞대고 함께 논의했던 토론회와 전국 대학생들의 이명박 정부에 대한 요구를 선포하는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청년실업 해결 1만인 행동, 허세욱 열사 추모, 공공부문 선진화와 이명박정부 일자리 정책에 맞선 노동자-학생 공동투쟁, 용산 철거민 투쟁, 비정규직 장기투쟁 촛불문화제, 장애차별철폐의 날, 서울 곳곳에서 열린 차별철폐대행진, 이주노동자 대회, 비정규악법 폐기를 요구하는 기자회견 등으로 너무나 바쁘고 알찬 한 달이었습니다. 이렇게 멈추지 않았던 투쟁들을 총화하고 앞으로의 투쟁을 결의하는 자리로서 4.30 ‘대학생 공동행동 투쟁의 날’을 만들었습니다. 5월 1일 노동절 본대회와 가두투쟁에 함께했고, 5월 2일에는 1년 전 촛불의 뜨거움을 기억하고 그것을 되살리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과 함께 촛불을 들었습니다.

 

투쟁하는 노동자-학생의 앞길이 평탄할 수만은 없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공동행동은 투쟁 속에서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기도 했습니다. 4월 30일 낮에 용산참사 현장으로 달려가 열사들을 추모하며 철거민들을 죽인 이명박정부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를 내려고 했지만, 새카맣게 깔린 전경들은 우리가 유가족/철거민 동지들을 만나는 것조차 가로막으며 곤봉과 방패로 우리를 대했습니다. 그 모습은 100일 전, 용산 철거민들을 죽인 살인경찰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경찰들은 자진 해산하고 있던 공동행동 학생 38명을 강제로 연행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5월 1일과 5월 2일에는 공동행동 학생 5명을 포함하여 200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연행했습니다. 경제위기의 책임 전가로 인해서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민중들의 저항을 강압적으로 막으려는 시도는 곳곳에서 우리를 위협했습니다.

 

그런데 어려움은 이명박과 경찰의 폭력 탄압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노동자와 학생의 끈끈한 연대를 상징하며 매년 대학 안에서 열려왔던 4.30문화제가 원래 예정대로 건국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리지 못하고 후문 밖에서 열려야 했던 것은 이명박의 탄압보다도, 건국대학교측이 경찰에게 ‘시설보호’ 요청을 한 것보다도, 노동자투쟁을 스스로 내쳐버린 학생운동의 탓이었습니다. 건국대 안에서 펄럭이던 ‘우리는 당신들을 초대한 적 없습니다’라는 플랑은 학생운동의 현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에 참으로 마음이 아팠지만, 우리는 그만큼 더 무거운 책임감으로 앞으로 대학 안팎에서 어떤 투쟁을 만들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참 잘 싸웠습니다. 119주년 메이데이를 맞아 터져 나오는 민중들과 촛불의 싸움을 이명박이 그렇게도 노골적으로 막으려고 했던 것은, 그만큼 우리 투쟁이 위협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더욱 더 위협적인’ 싸움을 만들어내기 위해 거리에서, 학교에서, 곳곳에서 만난 시민들과 학우들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대학생들만의 이익에 갇히는 투쟁이 아니라, 민중들과 함께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투쟁과 전망을 만드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더 약한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먼저’ 고통을 전가하는 신자유주의를 이기기 위해서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의 투쟁이 모든 노동자와 학생들의 투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강고하게 연대했습니다. 이명박은 폭력으로 우리의 목소리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저항은 여전히 곳곳에서 살아있고, 더욱 더 강해졌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직 먼 길을 가야합니다. 지난 4월 30일, 절망 속에서 자살을 택한 택배 노동자의 소식은 우리를 너무나도 아프게 했습니다. 그 죽음과 우리의 삶은 거리가 먼 것인가요? 경쟁에서 혼자서 승리해 잘 살 수 있다는 거짓희망에 우리의 삶을 거는 것은 결국 절망과 같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그렇다면 진짜 희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그 거짓희망에 속지 않고 당당하게 나아가는 우리의 투쟁입니다. 택배노동자의 죽음을 잊지 않고 투쟁하겠습니다. 학교에서, 거리에서 확인했던 뜨거움 또한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끄덕였던 학우들과, 촛불을 든 사람들의 눈빛과, 지하철에서 우리 이야기를 경청하며 박수를 보내주었던 시민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이제, 경제위기에 맞선 대학생 공동행동의 투쟁은 다시 시작입니다!

Posted by 행진

2009/05/15 01:12 2009/05/15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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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요즘 경제뉴스를 보면서 가슴이 철렁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주식이 어느 정도로 떨어졌느니, 환율이 폭락했다느니, 어느 회사가 망했다느니, 실업자는 몇 명이라느니.. 여러분들은 이런 뉴스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나요? 그리고 경제위기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주식지수ㆍ환율지수ㆍ경제성장률ㆍ수출증가율 같은 수치들을 바라보면서, ‘경제 문제’는 일종의 숫자놀음처럼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또한 거시적인 수치들을 변화시키는 문제는 ‘경제전문가’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저 수치가 올라가면 더욱 잘 살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수치가 떨어지면 경제적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더욱 치열한 경쟁을 합니다. 하지만 추상적으로 보이는 경제문제 역시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수치로 나타나는 경제문제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사람들의 삶과 애환이 있으며, 때로는 실업과 자살 같이 개인의 삶을 파괴하는 일들도 나타납니다. 특히 2008년 가을부터 본격화되었던 미국발(發) 금융위기로 민중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경제문제를 몇몇 경제전문가들만 담당하게 해선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개개인의 행위를 단순히 합해 놓은 것이 거시적인 경제문제는 아닙니다. 여기에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관계, 여성과 남성의 관계, 금융자본과 실물자본의 관계, 국가 간 관계 등 수많은 관계들이 개입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계들은 경제적 현상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며, 현재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경제적 관계들을 바꾸는 실천을 벌여나가야 합니다. 이는 경제위기에 고통 받는 수많은 사람들의 집단적 행동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결코 개인의 ‘경쟁력’을 높이거나 경제가 풀릴 때까지 참는 것이 해결책이 되지 않습니다. 최소한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고용과 임금을 보장하라고 하는 것, 불안정한 금융자본의 이동을 통제하는 것, 경제위기의 고통을 전가하는 사회적 관계들을 바꾸어나가는 것. 경제위기 속에서 이러한 집단적 실천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본 자료집은 이런 실천을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들을 제시한 것입니다. 현재 경제위기가 어디에서 기인했으며 한국의 상황은 어떠한지를 알아보고, 현재의 위기에 대항하기 위해 핵심적으로 보아야 하는 지점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함께 경제위기가 각 부문에 연결되는 지점들을 살펴볼 것입니다. 경제위기가 여성과 남성에게 다르게 전가되는 모습을 살펴보고, 우리가 다니고 있는 대학에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인지 알아볼 것입니다. 이 자료집이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를 찾는데 많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행진

2009/03/11 14:16 2009/03/11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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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경제위기, 어디에서 왔는가?



지난해 심각한 금융위기가 발생하면서, 곳곳에서 거대 금융자본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불거져 나왔다. 최근엔 거대금융자본 - 초민족 은행 - 을 적으로 삼은 ‘인터내셔널’ 이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개봉하기도 했다. 자본주의의 심장부에서 자본주의의 심장을 적으로 삼는 영화를 만들다니 아이러니하지만 (게다가 정의의 편은 인터폴과 뉴욕지방검사라는 공권력이다!) ‘눈에 보이는 적을 해치워도’ 금융자본의 세계 지배는 계속되는 이 영화를 보고 관객들은 “아무리해도 세상은 안 바뀌는군.” 하고 돌아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 액션영화에 비해 폭력성․선정성이 두드러지지 않는 이 영화에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을 매긴 것은 금융자본을 비판하는 어떤 내용의 영화도 최대한 접근을 차단하고 싶은 정부의 마음이 반영된 것일 게다.

어설프게 초민족 금융자본을 비판한 영화와는 달리 10년도 전부터 진지하게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분석하며, 금융위기가 초래할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파괴를 막고자 했던 이들이 있었다. 바로 신자유주의를 비판해 온 경제학자들, 대안세계화 운동가들이다. 그들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국가는 금융자본의 지배가 쉬워지게끔 온갖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다는 것을 밝혀 케인즈주의 하 큰 정부, 신자유주의 하 작은 정부라는 허구적인 쟁점을 해체하려 하였고, 세계경제포럼(다보스 포럼)에 맞선 시위를 조직하고 세계사회포럼을 개최하여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세계화가 전 인류에게 풍요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줬으며, 금융자본을 비판할 수 있는 경제지식을 시민들에게 돌려주는 교육 사업을 진행하여 비판적 시각과 저항의 언어를 민중들에게 돌려주고자 했다. 남한 전체가 경제위기로 크게 흔들리고 있는 지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비판적 시각’과 ‘저항의 언어’ 가 절실히 필요하다.


1. 경제위기가 도래한 이유

대학생인 나에게 최근 가장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경제 이슈는 뭘까? 우선 몇 달 전에 비해 엄청나게 급등한 환율로 인해 성인이 되어 해외에 한번 나가보겠다는 꿈은 저 멀리 사라졌다. 몇몇 등록금을 동결한 대학이 그 사실을 자랑스레 떠벌리고 있지만 사립대학 등록금은 평균 7.1% 상승하여 물가상승품목 중 상위권을 차지했다. 설상가상으로 자취비용도 점점 더 많이 들지만 부모님의 월급은 동결되거나 삭감되고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것은 더 어려워졌다. 청년실업이 문제된 것이야 옛말이지만, 정부가 내놓은 해결책은 1년짜리 일자리인 ‘청년인턴제’ 이고, 돈 많이 벌 때 임금 팍팍 안올리던 대기업은 위기가 오니까 대졸자 초봉을 깎을 ‘결의’를 했다. 누구든 여기에 몇 줄이고 더 힘든 경제상황을 나열할 수 있겠지만, 이쯤에서 그만하도록 하자. 어쨌든 이렇게 아직 경제활동에 적극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우리의 삶, 그리고 미래까지 팍팍하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누구나 알고 있듯이 작년 9월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한 이후로 점점 더 상황이 심각해지고 있다. 리먼 파산과 더불어 메릴린치, AIG와 같은 투자은행과 보험회사가 매각되거나 국유화되더니, 지금은 메릴린치를 인수하면서 더 세를 키울 거라 여겨졌던 BOA(Bank of America)와 거대금융그룹이었던 시티은행, 미국경제를 선도했던 GM과 GE까지 주가가 폭락하면서 경제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위기가 시작된 이후로 진행상황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이러한 지경에 이른 ‘원인’을 찾을 수는 없다. 조금 더 앞으로 돌아가, 2000년 이후 핵심 키워드를 가지고 위기의 원인을 찾아보자.

IT붐

2000년, 미국은 민주당의 클린턴 행정부 말기, 한창 고어와 부시가 대통령 선거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김대중 정부 하에서 엄청난 구조조정을 통해 IMF위기를 막 극복할 즈음이었다. 지난 몇 년간 세계경제의 희망은 IT산업이었다. 재정적자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고 역플라자 현상이 일어나자 미국으로 많은 양의 자본이 들어오는데, 이러한 자본이 당시 각광받는 산업이었던 IT관련 주식으로 몰리게 되고, IT분야를 중심으로 미국의 주식시장은 크게 성장한다. 당시 Yahoo와 같은 포털사이트 주식이 최고가를 기록하기도 하고, 우리나라도 산업혁명과 IT를 비교하며 산업혁명에는 뒤졌지만 IT혁명에는 뒤질 수 없다며 컴퓨터와 인터넷을 빠르게 보급, IT벤처기업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IT붐을 보고 ‘신경제’라 일컬으며 희망을 갖던 사람들은 그러나 IT붐은 새로운 경제발전 메커니즘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러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만들어낸 거품(버블)이었음을 곧 깨닫게 된다. 어떤 산업이든 기업이든 주식이 실제 가치보다 고평가되면 버블이 생겨난다. 주식의 평가기준은 모호한데, 사람들은 ‘미래수익’을 예상하며 주식에 투자하고, 그러면 그 종목에 또 돈이 몰리기 때문이다. 주식시장의 특성 상 실물영역에서 수익을 내는 것보다 훨씬 단기적인 수익이 많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기업의 이미지’를 잘 설정하여 가치를 순식간에 높이고 거기서 발생하는 주식의 차액을 챙기는 것이 최근 주식투자의 공식이기 때문이다. IT기업들의 가치는 다른 기업보다 훨씬 가상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 대체 인터넷 안의 가상공간은 어느 정도로 새로운 가치를 생산해낼 수 있느냐? - 특히 과하게 고평가된 측면이 있었다. 버블은 언젠가는 꺼지기 마련이고, 2001년 IT주가는 크게 하락, 결국 신경제는 붕괴한다.

부동산의 증권화

IT붐이 꺼지자 미국은 즉시 경기침체에 빠져든다. 여기에서 미국의 FRB는 조치를 취한다. FRB는 오랫동안 경기침체기에는 저금리 정책을 통해 돈을 시중에 풀어 경기 활성화를 꾀하고, 호황기에는 고금리 정책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방지하고자 해 왔다. 의도한 대로 사람들은 은행에서 돈을 많이 빌려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렇게 돈을 빌려서 어디에 투자하느냐가 문제이다. FRB의 저금리 정책은 90년대 후반부터 진행되어온 부동산 호황과 맞물린다. 시장에 풀린 돈은 부동산시장으로 몰리게 된다.

그렇다면 미국 경제의 침체기에 왜 부동산경기는 계속 호황이었을까? 그 이유를 살펴보자. 미국 정부는 다양한 세금제도상의 특전과 보조금으로 주택소유를 지원해왔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미국도 대출을 받아 주택을 구입하는데 여러 혜택을 주었고, 모기지(주택저당금융)론이 바로 그러한 방법이었다. 즉 사람들은 국가정책의 도움으로 부채 증가를 통해 소비를 늘리고 있었는데, 부동산도 그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다. 저금리정책의 영향을 받아 2002년부터 주택경기는 더욱 활성화되고, 모기지론이 급증하게 된다. 그 중 특히 신용등급이 가장 낮은 서브프라임 대출자들의 비율이 크게 늘어나, 2002년 주택 담보 대출 시장의 3.4%만을 차지했던 서브프라임 등급은 2006년 말에는 13.7%가 된다.

이 모기지론이 최근 금융위기의 핵심에 있다. 2002년 이후 금융혁신이 매우 빠르게 진행되어 여러 파생상품들이 생겨나는데, 이 금융혁신의 핵심이 바로 ‘부동산의 증권화’이다. 같은 대출이지만, 남한에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주택을 구입한다면, 미국은 모기지 회사에서 대출을 받는다. 모기지 회사는 은행이 아니라 모기지론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특수한 금융기관인데, 은행이 아니므로 사람들의 예금을 통해 자금을 조달할 수가 없다. 그래서 발명해 낸 것이 바로 모기지를 증권화하여 증권회사에 판매하는 방법이었다. (증권회사는 이것을 가공하여 다른 금융기관에 판매한다.)

모기지회사와 증권회사가 판매하는 증권이 바로 파생금융상품의 일종인 ‘MBS(주택연계증권)'와 ’CDO(부채담보부증권)' 이다. 이러한 증권과 이 증권에서 파생된 또 다른 증권 등이 전 세계 곳곳으로 팔려나갔고, 세계경제는 미국의 주택담보대출자, 모기지 회사, 증권회사, 금융기관, 기관투자가를 비롯하여 증권에 투자한 모든 사람들의 순으로 긴밀히 연결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2007년부터 우리 눈으로 확인했듯이 무너지기 쉬운 연쇄 구조였다.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금융혁신으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채 비율이 급상승하고 있던 것과 동시에, FRB는 2004년부터 2006년 중반까지 여러 번에 걸쳐 기준금리를 1%에서 5.25%까지 인상시켰다. 그러자 결국 주택거품이 폭발했다. 주택판매, 주택건설, 모기지 대출, 주택가격이 모두 급락하기 시작했다. 2007년 2∼3월 모기지 대출회사의 부실화와 파산 위기라는 서브프라임 발 금융위기의 태풍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서브프라임 모기지에 대한 이자율 상향조정의 첫 번째 물결이 강타했다. 금융위기의 신호탄이 쏘아진 것이다.

모기지 대출은 보통 3년 이상 운영되며 3년 이후에는 변동금리로 전환된다. 저금리 기조의 영향으로 서브프라임 대부기관은 처음 2년 동안의 1% 수준의 매우 낮은 미끼금리가 이후에 변동금리가 적용되면 18% 수준까지 재설정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제시하지 않았다. 즉 많은 사람들이 빌릴 당시의 금리가 낮았어도 몇 년 후 변동된 금리대로 돈을 갚아야 한다는 것을 제대로 모른 채, 주택가격의 상승이 낮은 금리를 상쇄해줄 것이라 믿고 (실질금리가 마이너스로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계부채를 계속 늘려왔다.

그런데 금리는 올라가고, 그로 인해 부동산 거품이 꺼져 주택가격이 하락하자 서브 프라임 등급의 대출자들이 돈을 빌릴 당시의 집의 시세보다 훨씬 떨어지게 되고 이들은 집을 팔아도 빚을 갚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흑인, 히스패닉을 중심으로 한 서브 프라임 대출자들은 돈을 갚지 못하여 담보로 잡혀있던 집을 잃고 (당시 연체율이 약 20%로 급상승한다.), 역시 빌려준 돈을 제 기간에 받지 못한 투자 기관과 서브 프라임 모기지 회사도 타격을 입었다. 2007년 4월, 미국 제2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회사인 뉴 센트리 파이낸셜이 파산 신청을 내는 것을 시작으로 이른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가 시작된다.

2007년 8월, 미국에서 역시 급락한 주택 시세로 인해 투자 분을 회수하지 못한 미국 10위권인 아메리카 홈 모기지 인베스트먼트(America Home Mortgage Investment) 역시 파산보호를 신청하고, 프랑스계 투자은행 베엔뻬 빠리바가 서브프라임 관련 두 종류의 펀드에 대한 환매를 중단하자 세계적 연쇄반응이 일어났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채권과 관련된 파생금융상품의 가격폭락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MBS 시장이 사실상 소실되었고, 이는 모든 층위의 부채담보부증권(CDO) 시장을 동결시켰다.

앞서 언급했던 연쇄구조는 빠르게 무너진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세계 경제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회사들이 순식간에 파산위기에 몰리고, 주가가 하락하면서 주식에 투자한 개인들도 손해를 입고, 금융에서 시작된 위기가 실물경제까지 영향을 미쳐 실업이 늘어나고… 하지만 이렇게 금융업에 너무 깊게 발을 들여놓은 회사들이 파산하고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금융은 모든 경제영역과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왜 평범하게 일한 사람들이 소위 ‘금융의 탐욕’으로 먹고 살 권리를 빼앗기게 되는 걸까? 우리는 어느새 금융자본에 지배당하게 되었을까? 이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좀 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필요하다.



2. 왜 금융자본이 경제의 중심에 서게 되었나?

때는 70년대, 미국에서는 71년 닉슨이 금창구를 폐쇄하였고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났으며 미국이 베트남과의 정전을 합의한 2년 뒤인 75년에 베트남 전쟁은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이 난다. 70년대 들어 케인즈주의는 약발이 안 먹히기 시작했고 그동안 케인즈주의를 비판해왔던 세력들이 힘을 얻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이를 ‘신자유주의’라 부르기 시작했다. 결국 1979년, ‘불의의 일격’ 또는 ‘볼커의 반혁명’ 이라 불리는 사상최대의 금리인상이 이루어진다. 남한에서 70년대는 박정희의 시대였다. 79년, 그의 독재는 부마항쟁을 비롯한 민중들의 저항이 아니라, 김재규의 총성으로 끝마치게 되었다. 우리는 아주 나중에서야, 70년대 말에 박정희가 그의 경제정책을 발전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바꾸려 했던 것, 그것이 79년 4월에 실시된 ‘경제안정화종합시책’ 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미국의 대공황 이후 억압받고 있던 금융자본이 반격을 꾀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70년대이다. 보통 70년대를 신자유주의의 과도기, 80년대부터 본격화된다고 본다. 초기에는 대부자본(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 이익을 취하는 자본) 중심의 금융세계화가 진행된다. 이를 또 두 가지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73~79년의 저금리 대부자본 중심의 금융화, 두 번째는 79년부터 86년까지의 고금리 대부자본 중심의 금융화이다. 마지막 단계인 86년 이후부터는 증권시장에 대한 규제가 풀리면서 가공자본 중심으로 금융화가 전개된다.

대부자본 중심의 금융화

70년대 초반, 미국 경제는 자국 내 투자가 기대한 만큼 수익을 내지 못하자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려 이제 막 고도성장을 하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산업자본에 저금리로 돈을 빌려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79년까지의 저금리는 실질 금리가 마이너스에 다다를 정도의 초저금리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미국은행이 입는 손해는 커지고, 이와 동시에 달러가 시장에 엄청 풀리고 여러 가지 국제 정세가 더해져 달러의 가치는 급격히 하락한다. 이에 대해 미국 재무부는 특단의 조치를 택한다. 이것이 79년 ‘볼커 반혁명’이다. 이로부터 금융화의 두 번째 국면이 전개된다. 이 조치로 인하여 마이너스였던 실질금리는 82년 최고 8~9%까지 상승한다. 금리가 높으니 당연히 전 세계의 달러들은 다시 미국으로 집중되기 시작하고, 금리가 높아지니 제 3세계 국가들은 갑자기 엄청난 이자를 감당해내야만 하게 되고, 결국 산더미 같은 빚을 감당하지 못한 채 ‘외채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더 이상 빚을 갚을 능력도 없는 제 3세계 국가들은 국가파산을 하거나 아예 돈 갚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멕시코와 아르헨티나의 구제금융조치와 모라토리움 선언들을 떠올려 보면 된다.) 이렇게 남미를 중심으로 제 3세계 국가들의 경제는 완전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자 초기엔 고금리를 받았던 은행들도 위기에 처한다. 돈을 빌려간 사람이 파산신고를 하고 더 이상 돈을 갚지 못하겠다고 하면 은행은 원금조차 돌려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당시 고금리에, 가뜩이나 산업도 잘 되지 않으니 새롭게 돈을 대출하지도 않는다. 빌려가는 사람도 없고, 돈을 빌려간 사람은 돈을 갚지 않아 미국의 은행들이 줄줄이 파산하기 시작하기 시작한다.

마지막 금융화의 단계는, 86년 무렵, 즉 대부자본이 줄줄이 파산하고 고금리 정책이 끝이 나는 시기부터 시작한다. 이전에 산업자본들은 대부분 은행에서 돈을 빌려서 재정을 마련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금리가 높으니 은행에서 더 이상 돈을 빌려서 쓰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그 재정은 어디서 마련하게 되었을까? 미국의 법인자본이 생겨날 때 취했던 방법, 바로 주식을 발행하는 것이다. 게다가 86년 이전에는 ‘유로달러’ 시장으로 재기를 노렸던 영국이, 이번에는 자국의 주식시장을 전면적으로 개방하고 각종 금융규제 조치를 철폐 하는 ‘빅뱅’을 일으켰다. 이에 각국도 앞 다투어 주식시장을 개방하고 금융규제를 없앰으로써 이제 은행 중심의 금융화 국면은 끝이 나고 증권시장 중심의 금융화가 도래하게 된다.

가공자본이 경제를 지배하는 사회로

이제 가공자본, 즉 주식시장이 경제를 지배하는 사회가 된다. 이전 시기는 대부자본이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형식, 은행이 중심이 된 금융세계화였다. 반면, ‘가공자본’ 이란 말은 현실의 가치를 가지지 않고, 장래 수익을 낳게 하는 원천으로서 가공적인 자본의 형태를 말한다. ‘미래소득에 대한 청구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대부자본과 다르다. 대표적인 것이 주식인데, 예를 들어 내가 어떠한 주식에 일정한 돈을 투자를 하면, 투자한 돈에 대한 이자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 기업이 낸 이윤에 대해 자신이 투자한 만큼의 돈을 받게 된다.

그러나 주식은 이중적인 성격을 갖는데, 한편으로 금융자본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주식을 사야 산업자본이 원활하게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공자본(주식)을 통해 주주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배당금, 경영권, 시세차익이다. 본래 금융세계화 전에는 앞서 설명한 대부자본을 비롯하여 배당금, 시세차익을 노린 가공자본의 이동이 철저히 금지되고, 경영권만을 목적으로 한 가공자본의 이동은 허용된다. 여기서 배당금과 시세차익을 노린 주식투자를 금융적 목적의 주식투자, 즉 포트폴리오 투자라 하고 경영권을 목적으로 한 주식투자를 산업적 목적의 주식투자, 즉 해외직접투자(FDI)라 한다. 이 두 형태의 가공자본을 구분하는 기준은 조금 애매한데, 다소 인위적인 기준을 설정하여 대충 10% 또는 15% 정도 이상의 주식을 보유하면 금융적 목적이 아닌 경영권을 획득하기 위한 투자로 간주되어 허용된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핵심은 이러한 가공자본을 비롯한 금융에 대한 규제를 없애는 것, 즉 금융해방이다. 지금까지 대부자본(은행)이나 가공자본(주식)에 가했던 온갖 규제들을 풀고 자유화하는 것인데, 국제적 이동 뿐 아니라 국내적으로도 그러하다. 예컨대 은행은 과거에 주식시장에 투자하지 못했으나 점차 이를 가능케 하고, 이자율의 상한선 규정도 풀리고, 은행이 부동산시장에 투자하지 못했던 것을 풀고, 이런 세세한 제도들을 하나하나 다 없애가는 것이다. 미국에서 글래스-스티걸 법은 80년대부터 점점 해체되어가다, 99년에 완전히 폐지되었고, 남한에서는 겸업은행을 만들고자 하는 자본시장통합법이 최근 발효되었다. 물론 그 전부터 각종 규제가 해체되어 왔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규제를 푸는 목표는 물가나 환율의 안정을 통해 금융자본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다.

앞서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을 분리해서 이야기했는데, 60년대 말에 이윤율이 하락하면서 초민족 법인기업은 외형상으로는 산업자본이지만 금융그룹처럼 움직이게 된다. 즉 ‘산업을 지배적인 요소로 하지만 금융그룹’ 이 되어간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자동차 회사인 GM, 가전제품회사인 GE 등도 금융적 활동을 통해 돈을 벌었고, 바로 최근까지 금융부문에서 낳는 이윤이 40% 이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리고 최근 이 회사들의 위기는 이러한 금융부문으로의 무분별한 확장이라고 이야기된다.) 남한에서도 쉽게 예를 찾을 수 있다. 전통적인 자동차 회사인 현대에서 ‘현대 캐피탈’이 나오고, 이 활동으로 많은 이윤을 남기는 사례가 그러하다.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금융자본의 이익이 여러 제도와 이념을 통해 비호되고, 전통적인 산업자본도 금융그룹의 성격을 띠면서, 금융은 거의 모든 부문을 지배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삶 구석구석까지 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금융의 헤게모니 역전 전략은 사회제도도 변화시킨다. 단적으로 IMF구조조정과 같이 위기에 처한 국가의 체질개선 조치가 있다. 선진국들은 위기에 처한 제 3세계 국가들을 도와준다는 명목 하에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국가경제의 구조를 바꾸도록 종용한다. IMF는 외채위기를 겪고 있는 나라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돈을 갚기 위한 효율적인 경제구조로 재편하라는 압력 또한 가한다. 여기서 말하는 ‘효율적인’이란 얼마나 그 나라에서 돈이 나오느냐, 이지 그 나라의 국민이 얼마나 잘 사느냐가 아니다. 따라서 구조조정은 보통 사람들에게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일어난다. 예를 들어 M&A (기업들을 인수, 합병하는 것)를 보자. IMF에 의한 인수합병 절차는 단순히 부실기업을 정리하고 하나로 뭉쳐서 경쟁력 있는 기업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기업들을 정리 및 다운사이징하여 금융적 가치를 높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즉, 투자 가치를 상승 시키는 것이다. 또한 해고와 임금삭감을 통한 구조조정은 위기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이 아니라,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명목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수많은 위기극복 전략 중 평범한 노동자들에게 가장 고통을 많이 전가하는 방식이었다. 그 뒤에 다시 승승장구한 기업이 많았지만, 매번 ‘IMF보다 힘들다’는 말들이 나왔던 것을 떠올려보자.

또한 각국의 금융시장들은 철저히 개방된다. 물론 여기서 명목은 그 나라에 투자를 유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개방된 그 나라의 주식시장에 거대자본들이 들어와서 거품을 형성하여 재미를 보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이제 ‘신흥공업국’ 은 ‘신흥시장’으로 변화하는데, ‘신흥공업국’이 산업 영역에서 새롭게 부상한 국가를 뜻한다면, ‘신흥시장’ 은 새로운 ‘주식시장’ 을 의미한다.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신흥시장이 바로 남한과 대만이고, 이러한 국가들에서 외국자본은 자국에서 경제상황이 안 좋아지면 바로 자본을 회수하고, 최근이 바로 그러한 상황이다. 환율이 몇 달 사이에 두 배 가까이 폭등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신흥시장에서 외환위기의 위험성은 항상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각국의 목적은 자신들의 나라를 금융자본이 들어오고 싶은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외국자본들에 의해서 자국의 존망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제 3세계 국가들은 점점 더 금융화를 가속화하게 된다. 위험을 피하기 위해 위험요소를 더욱 끌어들이는, 생명을 건 줄타기를 하며 생존해나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3. 사이비 대안 말고 진짜 대안을!

우리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 많은 것들을 평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30여년의 역사가 자연스럽게 흘러온 것처럼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이 흐름이 당연하다고 우리에게 끊임없이 이야기해 왔다. ‘문제가 있는 건 알지만 우리도 막을 수 없어’ ‘이것 말고 무슨 대안이 있단 말이야?’ 등등의 얘기들을 끊임없이 속삭이면서, 혹은 윽박지르면서 말이다.

위기가 심화되고 실업률이 높아지면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추진했던 세력들도 뭔가 대책을 마련하려고 하고 있다. 최근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은 ‘일자리 나누기(Job sharing)’ 는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정책으로, 온갖 언론에서도 이 정책이 가장 현실적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자본은 하나도 내주는 것이 없이 노동자들이 임금을 동결하거나 삭감하면서 해고를 막는 방법이다. 위기의 부담은 노동자들이 나눠서 지는 것이다.

청년실업이 더욱 심해지면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나온 청년인턴제도, 1년짜리 비정규직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한다. (우습게도 한나라당 김문수 같은 자들이 청년인턴제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청년실업 문제의 해결도 나이든 노동자들이 빨리 일자리를 그만두고 그 자리를 젊은 사람들로 채우라는 이데올로기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또 다시 노동자 내부에서의 싸움을 부추기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던 경제학자들과 활동가들은 이러한 사이비 대안이 아니라, 진정한 대안을 찾으려 해 왔다. ‘위기라고 해서 사람들을 생존의 벼랑 끝으로 내몰면 안 돼. 기업에 투여하는 공적자금을 평범한 사람들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기금으로 주자.’ ‘돈 많은 사람만 더 돈을 많이 불릴 수 있는 구조를 바꿔야 해. 금융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들에게는 세금을 많이 걷자.’ ‘이런 상황을 우선 사람들에게 알려야만 해. 교육 사업을 하자’ 등등으로 말이다. 이런 시도 중 현실화된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 하지만 이런 문제의식으로 유럽에서는 자본의 이익을 비호하는 유럽헌법을 부결시켰으며, 남미에서는 FTA와는 다른 대안무역협정을 맺기도 하였다.

남한에서는 아직 크게 이렇다 할 성과를 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계의 활동가들은 WTO협정에 반대하는 남한 농민들의 활동으로 희망을 얻기도 하고, 몇몇 이들은 작게나마 자신의 권리를 찾기도 했다. 너무나 거대한 문제인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맞서는 대안은 실은 가장 구체적인 사람들의 삶에서부터 나와야 한다. ‘우리의 삶이 구체적으로 나아지려면 어떻게 제도가 바뀌어야 하는가? 어떤 사고방식을 바꾸어야 하는가?’ 이렇게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가보자.

이 글에서 ‘금융자본’의 이익을 보장하는 것이 사람들의 삶을 팍팍하고 만드는 원인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우리는 이 원인에 맞선 실천을 고민해야 한다. 더 구체적으로 공부를 해갈수록, 그리고 구체적으로 노동자 민중이 어떤 부분에서 힘에 겨워하고 있는지를 직접 보고 알아갈 수록 우리가 무엇에 맞서야 하는지가 명확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의 결론인 ‘금융자본에 맞서자!’라는 막연한 방향성은 점점 더 구체화 될 것이다. 출혈적인 경쟁만을 해 왔던 지금까지의 삶의 원리를, 더 많은 사람들이 정당한 권리를 누리며 살 수 있는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삶으로 만들어가자. 그러면 우리의 세계는 더 크게 열릴 것이다.

Posted by 행진

2009/03/11 14:06 2009/03/11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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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전망] 


왜 미국경제가 기침을 하면
한국경제는 몸살에 걸리나요?




1. 들어가며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의 경제상황은 계속 요동치고 있다. 미국 발 금융위기로 시작된 현재의 위기는 실물경제에도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며 확산되고 있다. 위기의 진원지인 미국에서는 최대 자동차 업체인 제너럴모터스(GM)와 크라이슬러가 위기를 맞아 미 재무부에 자금요청을 하고 또 추가지원을 요청하고 있다. 경제위기에 대응해 오바마 정부는 ‘신뉴딜 정책’과 제로 금리를 기반으로 한 ‘무제한 달러 공급’을 핵심으로 하는 경기부양책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이미 수천억 규모의 금융 구제안이 시행중인 미국 정부가 재정적자를 감당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이것이 금융위기의 2라운드 혹은 ‘디플레이션’으로 상황이 더욱 악화될 가능성도 있다. 또한 헝가리ㆍ크로아티아ㆍ루마니아ㆍ불가리아 등 동유럽 국가들이 집단 채무불이행(디폴트)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면서 동유럽발(發) ‘2차 세계 금융대란’의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이들 국가가 서유럽 은행에서 대출받은 자금은 총 1조6000억 달러(국제결제은행 추산)에 이르는데, 만약 이들 국가가 연쇄적으로 채무불이행 선언을 하게 되면 서유럽 은행들의 부실채권은 급격히 늘어나고, 이는 다시 서유럽의 금융불안을 낳을 가능성이 높다.

최근 언론에서 계속해서 보도되고 있는 1,500원대로 치솟은 환율, 초민족자본의 탈출 러시, 외화유동성 부족 등 널려있는 악재들은 ‘제2차 금융위기’를 떠올릴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외에도 한미 FTA와 자본시장통합법으로 미국 중심의 금융세계화에 더욱 깊숙이 발을 들여놓으려는 한국으로서는 불황이 장기화될 것이며 동시에 미국보다 더욱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 뻔하다. 이 글에서는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지를 한국과 미국의 경제관계의 역사를 훑어보면서 파악하고, 몇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국경제의 향방을 가늠해보도록 한다.

2. 한국과 미국 경제관계의 역사와 본질

한국이 미국과 정치ㆍ경제ㆍ군사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아는 사실이다. 1945년 한국의 해방 이후 주변에 있던 소련과 중국은 현실 사회주의의 2대 강국이었고, 미국은 동아시아에 사회주의의 물결이 넘치지 않도록 전략을 세웠다. 경제적으로는 한국에 소비물품 중심의 원조를 하였고, 정치ㆍ군사적으로는 주한 미군을 배치하고 한국 정치에 대한 관여를 심하게 한다. 이것은 1950년대까지 이어지는 데 자본주의 세계의 최강국으로서 미국의 좋은 이미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한국인들의 당장의 배고픔을 면하게 하여 사회주의로 경도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한편 단순한 원조정책은 1960년대 이후 한국경제의 구조를 미국경제의 구조와 긴밀히 연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방향은 지금까지도 한국 경제의 특징으로 남아있지만, 이후 세계 자본주의의 모습이 변화함에 따라 함께 변화해간다. 이것은 세계 자본주의가 호황에 있을 때에는 한국의 경제상황 역시 나아지지만, 현재와 같은 경제위기가 닥쳤을 때에는 ‘미국경제가 기침을 하면, 한국경제는 감기에 걸리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여기에서는 한국경제가 미국에 편입되어 가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서, 한미 경제관계의 본질이 무엇인지 살펴보겠다.

□ 1960년대 초~1970년대 말: 발전주의의 시대

냉전시기 동아시아가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한 가장 좋은 해결책은 바로 자본주의의 싹을 무럭무럭 기르는 것이었다. 이에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경제구조가 확립되어 가는데, 한국ㆍ대만ㆍ홍콩ㆍ싱가폴은 ‘동아시아의 4마리 용’으로서 급격하게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해 들어간다. 1965년 체결된 한일회담은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받거나 수출자유무역지구를 설립하여 외국으로부터 직접투자를 받기도 한다. 이렇게 모인 자본을 바탕으로 군부독재정권이었던 박정희 정권은 ‘조국 근대화’라는 명목아래 강력한 국가 중심적 경제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런 정책은 주로 자본을 집중하여 한 산업에 투자하는 방식이었고, 이로 인해 한국만의 독특한 기업형태인 ‘재벌’이 등장한다. 당시 추구했던 공업화의 내용은 1960년대 노동집약적 경공업에서 1970년대 중화학 공업으로 바뀌는데, 이러한 산업들은 미국ㆍ유럽ㆍ일본과 같은 세계자본주의의 중심부에서 발달한 산업들에 비해 이윤창출이 작은 부분들이었다.

한편 지금도 한국경제의 가장 큰 특징인 수출중심의 경제구조는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자국시장을 활짝 열어주되 한국에 시장개방을 강요하지 않았다. 한국은 적극적으로 수출주도 산업화 정책을 추진하였고 자국시장은 개방하지 않으면서도, 소비제품을 중심으로 미국에 대한 수출을 꾸준히 늘릴 수 있었다. 한국경제는 미국의 지원과 국가중심의 강력한 경제정책으로 신흥공업국(NICs)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1960~1970년대의 한국경제를 일컬어 ‘발전주의 정책’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사회는 급격히 변하기 시작한다. 점차 노동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하고, 농촌에서 유입된 인구로 도시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그리고 국가 중심의 동원을 강화하고 자본주의 체제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반공주의’가 강화된다. 이런 반공주의는 미국의 영향 아래 있던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던 이데올로기였고, 이를 위해 국가를 중심으로 한 폭력과 억압이 심화된다.

□ 1980년대~1990년대 중반: 미국의 개방 압력과 3저 호황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배와 독일ㆍ일본 등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의 추격으로 인해 미국은 최강대국으로서의 면모를 잃어나간다. 또한 경제가 계속 악화되며 1970년대 물가와 실업률이 동시에 올라가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하게 된다. 이에 미국은 1980년대부터 케인즈주의 경제정책을 포기하고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실시한다. 또한 쌍둥이적자(무역적자, 재정적자)에 시달리게 되자 미국은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제 3세계 국가들에게 노골적인 경제적 압박을 가한다. 이는 라틴아메리카 등에서 경제위기를 기회로 미국 자본이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경제구조를 바꾸어나간다. 물론 냉전이 지속되는 시기라 정치적으로 의미가 있던 한국은 라틴 아메리카와 같이 완전한 경제적 압박을 하지는 못한다. 한편 무역적자를 타개하기 위해 일본의 엔화를 평가절상하는 내용의 플라자협약은, 80년대 중반 한국에서 ‘3저호황’(저금리, 저달러, 저유가)으로 나타나게 된다. 즉 저금로 많은 자본을 빌릴 수 있고, 저달러로 수입 비용이 줄어들며, 저유가로 생산단가가 낮춰지게 된 것이다. 3저 호황으로 무역 흑자가 발생하기도 하는데, 이를 토대로 한국의 구조조정은 늦추어진다.

그런데 89년 폴란드를 시작으로 소련ㆍ헝가리ㆍ체코 등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한다. 미국에 대한 한국의 정치적 의미는 퇴색하였고, 미국의 한국시장 개방 압력은 가속화되었다. 어릴 때 들어봤을 법한 무시무시한 수퍼 301조’는 미국이 불공정한 무역행위를 하는 국가에 보복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이다. 그 ‘수퍼 301조 협약’을 89년 미국과 한국은 맺는다. 92년에는 자본시장이 개방되면서 미국계 초민족자본의 ‘국내 증권시장 투자‘가 가능해졌고,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이 타결되면서 농업 등의 분야가 대폭 개방된다. 95년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하면서 이에 가입하였고, 96년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하며 신자유주의 세계경제에 강력하게 편입해 들어간다. 이런 흐름들 속에서 세계화나 경쟁 같은 담론들이 강하게 유포되어 가고, 국내 법제도 역시 신자유주의를 주도하는 미국계 금융자본에 유리하게 바뀌어 간다.

□ 1990년대 후반~2000년대: IMF 구조조정과 금융세계화로의 편입

90년대 중반 이후 ‘4마리의 용’이라고 불리던 동아시아 국가들은 금융자본의 불안정성에 타격을 받게 된다. 97년 12월 급격히 줄어든 외환보유고를 지탱할 능력이 없었던 한국정부는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다. IMF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맺은 ‘IMF 구조조정 협약’을 계기로 한국경제는 이전과는 다른 체제에 진입한다. 즉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깊숙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한국 주식시장과 외환시장은 거의 완전히 개방되었고, 한국기업에 대한 외국인 주식의 총 보유한도가 점점 증가하게 된다. 기업들에 대한 구조조정 과정에서 미국계 자본은 적극적인 투자/투기를 통해 헐값에 매입하게 된다. ‘바이 코리아’(Buy Korea)의 결과 투자자들은 엄청난 수익을 올렸고 그 수익률 또한 막대했다. 그 결과 외국인 보유 상장주식가액은 91년 당시 약 2.4조원 대, 97년 10조 원대였다가 99년에는 약 76.6조 원으로 대폭 증가하였다. 2000년 주식시장 거품이 거지면서 그 해 12월에는 약 56.6조 원까지 하락했지만 이후 다시 증가하여 04년 173.2조 원, 05년에는 급기야 260.1조 원에까지 이른다. 그리고 외국은행 자회사 및 외국증권사 현지법인 설립이 허용되었고, WTO 양허계획에 맞춰 각종 규제와 제도가 철폐되었다.

2003년 이후로 여러 국가들의 다자간 협상을 특징으로 하는 세계무역기구와 도하개발아젠다(DDA)는 제 3세계 국가들을 중심으로 저항에 부딪힌다. 이 때문에 국가와 국가가 직접협상(양자간 협상)하는 자유무역협정(FTA)이 증가하는데, 한국에서는 2004년 한-칠레 FTA를 시작으로 동시 다발 FTA를 추진하고 있다. 그 내용은 DDA가 포괄하는 협정의 대상과 개방 수위를 훨씬 높여, 한국의 경제구조를 완전히 바꾸는 것이다. 특히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과의 FTA는 한국경제의 구조를 완전하게 금융자본이 가장 쉽게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바꿔놓을 것이다. 한미 FTA가 시행된다면 이미 그 불안정성이 가시화된 세계 자본주의에 긴밀하게 통합하게 되며, 한국에서 초민족적 자본의 활동과 지배력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초민족적 자본의 이득 면에는 민중의 삶과 권리가 파괴되는데, 이미 IMF 이후 비정규직이 확대되는 등 노동 불안정성이 심화되었고, 복지제도가 공격 받으면서 빈곤층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의 수는 한국인구의 6분의 1에 가깝게 되었다.



3. 향후 한국경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위에서 한국경제가 미국경제와 긴밀하게 연관되는 상황을 역사적으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런 연관은 향후 한국경제가 나아가는 방향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세계경제가 요동치고 주식시세가 급격하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롤러코스터 시세’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당장 하루하루의 전망도 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여기에서는 다만 몇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향후 경제위기의 방향을 예측할 수 있는 단상을 제시하도록 하겠다.

키워드 ① : 동아시아와 미국경제

1980년대 이후 미국 경제가 쌍둥이 적자에 시달리면서도 계속해서 세계 최강국으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동아시아의 역할이 크다. 2000년대 들어 미국의 이중 적자를 메워주고 있는 메커니즘으로서 동아시아 외환보유고 증가에 기반을 둔 달러환류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이것은 동아시아에서 생산된 제품을 판매하여 얻은 달러가 미국의 증권시장에 다시 투자되거나, 그나마 안정적이라고 여겨지는 미국으로 자본이 도피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동아시아는 이에 걸맞은 체계로 바뀌어 가는데, 기존의 신흥공업국에서 벗어나 금융자본의 유출입을 쉽게 하는 신흥시장으로 탈바꿈한다. 미국에 의한 달러환류가 가능한 이유는 미국의 달러가 다른 통화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치가 높은 것이고,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미국의 발권이익(seigniorage, 액면가치와 발행비용의 차액)때문이다.

동아시아 달러환류 메커니즘의 중요성이 커질 수 있었던 이유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외환보유고가 1990년대 말 금융위기의 이후에 급격히 증가했던 데에서 기인한다. 이것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정부정책상 외환보유고를 증가시키기 위해 통화안정채권이나 외평채의 발행을 통해 인위적으로 달러보유액을 늘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거대하게 늘어난 외환보유고는 집중적으로 미국 재무부 증권에 투자되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동아시아의 지속적인 생산이 줄곧 미국 시장의 팽창에 의존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미국 시장의 성장지속과 동아시아의 성장지속은 서로에 대한 긍정적 이해관계를 갖게 된다. 동아시아에서 외환보유고가 늘어나게 되는 주원인 중 하나는 미국에 대한 무역수지 흑자이면서, 또한 이를 가지고 미국 경제의 소비의 지속을 지탱해주는 메커니즘이 형성되는 것이다. 한편으로 IMF 구조조정 등으로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세계적 금융위기의 가능성에 매우 취약하게 노출되어 있었지만, 이에 대비할 수 있는 장치나 제도가 매우 취약한 상황이다. 이렇게 금융위기에 매우 취약한 상황에서, 외환위기 가능성을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체적으로 외환 보유고를 늘리는 것뿐이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동아시아는 미국의 경제위기를 떠안는, ‘미국의 금고’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메커니즘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이미 미국 내에서도 경제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달러의 가치가 유지될 수 있는지 장담할 수 없다. 이는 수출달러 환류를 가능하게 했던 미국의 지위, 즉 세계자본주의의 최종 소비자로서 미국의 지위가 언제 소멸하게 될지 모른다는 뜻이다. 미국 재무부와 연준의 경제위기 극복방향은 은행에 대한 구제금융과 인수ㆍ합병을 주도함으로서 금융자본을 구제하고 있다. 이는 미국에서 정책기조가 약간 바뀌었다고 해도 여전히 현재의 위기를 몰고 온 ‘금융화’를 더욱 지원한다는 것으로, 근본적으로 신자유주의 체제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에서 시작하는 세계 경제의 불안정성은 더욱 심화되고, 그 직격탄을 맞는 것은 미국 경제와 긴밀하게 연결된 동아시아일 것이다.

키워드 ② : 자본시장통합법은 한국경제의 돌파구가 될 수 있나?

장기화되는 경제위기 상황에서 한국의 5대 증권사를 미국 월스트리트의 투자은행처럼 거대한 ‘금융투자회사’ 로 만들어, 금융시장을 발전시키겠다는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자본시장통합법)이 지난 2월 4일부로 시행되었다. 07년 7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자본시장통합법은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에 관련된 기존의 6개법을 통합하고 관련 제도를 크게 바꾼 것이다. 자본시장통합법의 핵심은 지금까지 증권사ㆍ자산운용사ㆍ종금사ㆍ선물회사ㆍ신탁회사 등이 각각 판매하는 금융상품도 다르고 적용받는 법률도 달랐지만 이제 업종의 벽을 허물겠다는 것이다. 즉 증권사가 지금까지 선물사, 종금사에서 하던 일도 할 수 있고, 법에 규정되어 있지 않은 새로운 금융상품도 자유롭게 판매하며, 결제송금서비스도 할 수 있게 된다. 또한 CMA(자산관리계좌)와 같은 방식으로 노동자의 임금도 금융의 변화에 긴밀히 연결시켜, 증권사(투자은행)가 모든 노동자를 금융투자자가 되게 한다.

또한 이명박 정권은 자본시장통합법 시행의 후속조치로 각종 법령 개정을 추진하여 법 시행에 따른 제반조건을 보완하고,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를 완화하고 있다.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은행주식 보유규제 및 금융지주회사 제도 합리화 방안>(금산분리완화방안)의 요지는, 국내외 산업자본(기업)이 현재 4%로 되어 있는 시중은행 지분 보유한도를 10%까지 늘릴 수 있고, 국민연금 등 공적연기금이나 사모펀드도 일정 요건을 갖추면 은행을 인수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증권회사나 카드회사를 자회사로 둔 금융지주회사가 제조업까지 자회사로 둘 수 있게 허용했고, 이에 따라 금융과 비금융회사들이 섞여 있는 기업집단(=재벌)이 금융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할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는 기업과 금융회사가 함께 위험을 공유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지주회사는 금융회사와 비금융회사를 동시에 보유할 수 없도록 규제해 왔다. 하지만 금산분리가 완화된다면 재벌체제가 더욱 강고해지는 것은 물론 기업의 부실, 금융의 부실이 서로에게 전이될 수 있어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동반 위기 폭발의 가능성이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

금융시장 활성화와 금융투자기관 대형화를 초래할 자본시장통합법으로 한국에서의 금융화는 한층 더 강화될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금융위기로 증권시장 중심의 금융세계화가 급격히 붕괴되어 이미 작년 미국의 5대 투자은행이 파산하거나 독자 생존을 포기했고, 자본시장과 투자은행 육성이라는 목표는 무색해진 상황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자본시장통합법은 한국경제의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지속되는 이윤율 하락과 금융거품까지 붕괴하고 있는 상황에서 금융시장 육성으로 한국경제가 독자회생할리는 없다. 이번 경제위기의 시발점이 통제되지 않는 파생상품의 확산으로 형성된 금융거품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오히려 금융시장 육성은 금융위기의 위험도를 더욱 높일 것이다. 자본시장 육성을 통해 금융세계화에 때맞지 않게 편승하는 조치는 한국 경제의 불안정성을 확대하고, 민중의 생존의 위기를 심화시킬 뿐이다.

키워드 ③ : 한-미 통화스왑(SWAP)은 환율불안을 해결할 것인가?

2008년 10월 한국과 미국은 300억 달러 규모의 통화스왑(맞교환) 계약을 체결하였고, 이것이 치솟았던 환율을 크게 하락시키고 1000선을 붕괴시킨 코스피를 급반등시킨 계기가 되었다. 이 계약은 한국에 달러가 부족할 때 한국은행이 미국 연방준비기금(FRB)에 원화를 제공하면 달러를 받고, 계약만기 시에는 다시 빌린 달러를 돌려주고, 원화를 돌려받을 수 있는 것이다. 최대 300억 달러까지 이렇게 하는 것이 가능한데, 미국은 규모 확대까지는 아니더라도 기한 연장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빌린 달러의 2%에 해당하는 금액을 수수료로 미국에 지불해야 한다. 이명박은 이러한 통화스왑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미국 국채 매각 카드로 ‘협박’까지 했다고 하지만, 역으로 말하면 이제 통화스왑으로 인해 미국의 국채를 자연스럽게 매입해야할 상황이 되었다.

미국은 한국을 비롯해 브라질ㆍ멕시코ㆍ싱가포르와 통화스왑을 체결했고, 비슷한 시기 긴급경제구제책으로 쓰이는 7000억 달러 또한 국채 발행으로 해결했다. 이렇게 미국뿐 아니라 다른 국가에서도 달러가 중요시되면서 미국경제가 위기임에도 불구하고 달러강세를 지속시키고 있다. 위기는 당장 지연될 수 있겠지만 이러한 상황은 미국을 중심으로 서로의 배를 쇠사슬로 묶어둔 것과 같이 다 같이 재앙을 맞이하게 될 수 있다.

무엇보다 통화스왑은 환율불안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외환사정이 호전되려면 현재로서는 그 유일한 길이 경상수지 흑자를 통한 외환확보인데 이에 대한 전망이 별로 밝지 않다. 지금은 1997~98년과는 다른 상황이다. IMF 구제금융 이후에는 원화의 평가절하와 수출 호조가 뒤따랐다. 미국 등 아시아 외 지역경제의 상대적인 안정 속에서 당시 막 붐이 일던 정보기술 제품의 대대적인 수출이 가능하였기에 대규모 무역수지 흑자가 발생한 것이다. 이에 반해 지금은 비록 원화가치가 하락했다 하더라도 다른 나라나 지역의 경제도 부진하여 수출이 크게 늘지 않거나 오히려 줄어들어 무역수지 흑자 규모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4. 무엇을 할 것인가?

한국정부와 자본은 한미 FTA 체결과 자본시장통합법 시행 등을 통해, 금융규제를 점차 완화가고 금융세계화로의 편입을 강행하고 있다. 한국경제는 더더욱 미국계 초민족적 금융자본에 종속되고, 해외 투자자들이 한국에서 자본을 유출시키면 환율이 급등하고 한국경제는 극도로 불안정해지는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미국발 금융위기가 중첩되어 한국경제는 더욱 위험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금융위기로 인한 투자손실은 물론이고, 미국의 경기침체로 인해 무역적자가 증가하면서 외환위기가 재발할 가능성도 증가하고 있다. 이런 우울한 전망은 금융위기의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한국경제는 벌써 환율인상ㆍ물가인상ㆍ신용경색ㆍ주식시장 하락ㆍ금리인상 등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다. 본격적으로 경제위기가 발생하면 자본이탈ㆍ거대자본 파산 역시 예상할 수 있고, 이는 실물경제 전 부분에 걸친 고용불안과 임금 삭감으로 민중들을 고통스럽게 만들 것이다. 이미 IMF 때 우리는 ‘환란(患亂)’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주류 경제학자나 경제전문가들이 금융선진화를 이야기하며 미국경제로의 긴밀한 통합을 이야기하고 있는 현재,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혹자는 박정희 정권 시절과 같이 국가 중심의 경제정책을 실시하고, 이를 통해 실물(산업)자본을 키우는 것이 현재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 역시 미국 중심의 세계 자본주의와의 긴밀한 연관 속에 가능한 것이었고, 이 시기에 만들어진 유산이 현재 위기의 원인이 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이미 경제구조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긴밀히 편입되어 있는 상황에서, ‘정부의 의지’만으로 상황을 역전시킨다는 것은 전혀 가능하지 않다. 한편 세계최강대국이 미국이 아닌 중국으로 이전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 경제에 편입하는 것이 대안이라는 의견 역시 제시되고 있다. 2008년 7월말 현재 중국의 미국 재무부 증권 보유액은 5187억 달러로 외국인 보유액의 20%를 차지하고 있고, 2007년 말 미국의 대 중국 무역적자는 2562억 달러 수준이었다. 하지만 중국 금융이 양적인 면에서 크게 확대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오히려 중국이 강하게 미국경제의 운명에 맞물려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그것은 중국의 외환보유고의 상당부분이 대미 수출 시장 팽창에 의존하고, 이는 다시 미국 소비시장 팽창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경제 역시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경제 위기 부담을 계속 넘겨받으며 미국 경제를 지탱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의 성장은 새로운 최강대국이 형성되는 과정이 아니라, 그 양적인 팽창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으로는 매우 취약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미국경제와 긴밀하게 연관되어왔던 한국경제는, 현재 금융위기 속에서 ‘감기’를 넘어 ‘몸살’, ‘중병’에 걸릴 지경이다. 한미 FTA에 반대하고 미국에 반대한다는 목소리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단순히 ‘반미감정’에 호소하는 일부 ‘반미세력’들의 이야기는 아니다. 현재 국가가 민중들의 삶을 책임지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한미 FTA에 반대하고 미국에 반대한다는 목소리는 불안정한 금융세계화에 몸을 내맡기지 않겠다는 생존의 목소리이다. 현재 우리는 이런 목소리를 높여 나가며 한국과 미국의 부정적 관계를 끊어낼 방법을 찾아야 한다. 현재의 메커니즘이 만들어진 정확한 이유에 대해서 분석을 해야 하며, 근본적으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넘어설 대안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의 시작이다!

Posted by 행진

2009/03/11 13:51 2009/03/11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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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1] 


경제위기가 남성과 여성에게 다른 이유




1. 경제위기와 여성의 관계

너는 아직도 페미니즘 얘기하니?
요즘 세상에 여자가 어디서 차별받는다고.

알파걸, 골드미스가 판을 친다는 세상에도 차별받는 여성들이 있을까? 있다. 단지 ‘몇몇이 있을’ 뿐 아니라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러하며 앞으로 그러할 가능성을 갖고 있다. 특히 경제위기는 여성에게 이중, 삼중의 고통을 안겨주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기는지에 대해서 함께 알아보는 것이 이번 글의 주제이다.

<잠깐 질문>

그러기에 앞서 첫 번째 질문을 던지자면, 우리는 왜 여성이 ‘더’ 착취 받는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하는 것일까? 절대 ‘더 불쌍한 사람’을 가려내기 위한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역사가 인간의 권리를 확장시켜왔지만 많은 경우에 이것은 ‘여성’의 권리를 확장시키는 것과는 별개로 존재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투표권이 그러하다. 우리는 투표권이 여성에게도 주어졌을 때 비로소 투표권은 ‘평등’해 졌다고 얘기할 수 있었다. 이렇듯 결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권리라는 것은 없는데, 경제위기 하에서 성별 간에 다른 방식으로 착취가 진행되고 있다면 그 내용에 대해서 정확히 알아야만 경제위기 하에서 발생하는 착취와 동시에 여성에게 더욱 부과되는 착취를 함께 없앨 수 있다. 경제위기만 극복하면 여성에 대한 착취가 자연스럽게 없어진다고 믿는다던지 경제위기부터 해결하고 여성에 대한 또 다른 착취를 없애겠다는 것은 별로 믿지 못 할 얘기가 아닐까?

여성 노동의 신화

사실 자본주의 아래서 여성이 ‘부수적인 노동력’으로 취급받은 역사는 매우 길다. 생산력이 급격히 높아진 자본주의 하에서 많은 노동력 없이도 충분한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는데 이때 생산의 바깥으로 가장 먼저 밀려난 사람들은 여성이었다. 이와 동시에 여성은 집에서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하는 사람으로 정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여성은 자본주의 시장구조에서 담보되지 않는 ‘재생산’의 영역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노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어머니의 숭고한 역할이자 여자에게 잘 어울리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에 생물학적인 근거를 들이대기도 하는데, 세계 대전 당시에 많은 공장과 일터에서는 여성들만이 일했었다는 사실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이것이 ‘생물학적 차이’의 결과라는 것은 아직까지 제대로 밝혀진 바가 없다. 즉, ‘힘이 세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은 아빠’, ‘연약하고 늘 모든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람은 엄마’라는 것은 환상일 가능성이 클 것이다.

이런 배경은 경제위기 하에서 여성들이 더욱 착취받기 쉬운 빌미를 제공한다. 이후에 사례를 통해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여성에겐 특수한 역할이 있다는 환상이 있는 사회 속에서 늘 ‘더’ 요구 받는 것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번의 경제위기 이전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IMF만 생각해보더라도 여성들은 직장에서 우선해고 1순위였고, 그 이유는 언제나 ‘경제가 어려우니 집으로 돌아가라’였다. 경제가 호황일 때는 여성 취업률이 높아지지만 나빠지면 가장 먼저 여성 취업률이 떨어지는 상황, 과연 자연스러운 차이에 의한 것일까? 그럼 이제 구체적으로 어떤 사례를 살펴보자.


2. 여성, 어디서 일하고 있나?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에 의한 대량 실업이 발생했다. 연일 뉴스와 신문에서는 ‘고개 숙인 아버지’ 이야기가 나왔고 한 광고에서는 '아빠, 힘내세요‘라는 노래를 불렀다. 경제위기 아래 수많은 여성들이 우선해고 대상에 오르고 직장을 잃고 다시 가정경제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피땀을 흘렸음에도 응원 받는 사람은 단지 ’가계를 책임‘진다는 남성 노동자 뿐 이었다. 경제위기와 함께 가장 빠르게 증가하는 것은 실업자, 반대로 이야기하면 직장이 필요한 사람이다. 최근 많은 50대 이상 여성들이 직장을 갖기를 희망 한다. 사람들은 중년, 고령의 여성들이 직장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속된말로 ‘애들 학원비나 벌’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이러한 사람들의 판단은 임금수준으로 고스란히 드러난다.

특출난 직능이 없는 50대 여성이 구할 수 있는 직장은 어떠한 것이 있을까? 대형 할인매장, 청소업무, 보험판매사, 주방보조 등이 떠오른다. 앞서 열거한 대부분의 직업은 기본급이 없거나 봉급이 최저임금의 수준을 유지한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정당한 노동을 수행함에도 불구하고 낮은 임금을 받는 것은 여성이 맡는 역할에 대한 사회적 편견 때문이다. 때문에 여성들이 종사하는 일자리는 어느 곳보다 빠르게 비정규직화, 외주화 되어 왔고 가장 저렴하고 쉽게 자를 수 있는 노동력으로 고령의 여성노동자들이 활용되고 있다.

여성의 섬세함이 21세기형 리더십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대부분의 여성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은 참담하다. 2004년 OECD에서 실시한 국가별 남녀 임금격차를 보면 한국의 남녀 임금격차는 40%로 OECD국가 평균 20%를 훌쩍 웃도는 수준이다. 분위별로 보면 소득의 상위 20% 남녀 임금격차는 30%이하인데 이것은 평균이하의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일수록 성별간의 임금 차별이 더 심각하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현상은 ‘차이’일까 ‘차별’일까? 동일한 생산성을 갖고 있음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더 낮은 임금을 받는다면 차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생산성’을 확인받을 수 있어야 할 텐데 한국노동연구원의 ‘여성인력과 생산성’(2000)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성별 임금격차 가운데 38% 정도만 생산성 격차로 설명되고 나머지 62%는 설명되지 못하고 있다. 즉 62% 정도의 여성들은 단지 성별에 의해 차별받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여성 노동자의 70%가 비정규직이고, 비정규직의 70%가 여성노동자’라는 집계를 통해서도 여성이 더욱 취약하고 열악한 업종에 분포되어 있으며, 이는 여성의 노동이 저평가된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기에 많은 여성노동자들은 ‘최저임금’을 임금으로 받고 있다. 최소한의 임금이 왜 열심히 일한 사람의 전체 임금이 되어야 할까? 심지어 많은 사업장에서는 이조차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데 지킨다 할지라도 그 임금은 별로 현실적이지 않다. 청소 업무를 하는 많은 여성노동자들은 용역업체에 근무하며 한주 5일, 공식/비공식 노동을 포함해 하루 10시간 이상의 일을 한다 해도 많은 경우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80여만 원의 돈을 받는다. 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80만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병원에 가야 한다 던지 급전이라도 생길라치면 어떻게도 여유를 만들기 힘든 돈이다. 충분히 일하고도 살만큼 받지 못하는 것, 일을 하면서도 빈곤할 수밖에 없는 많은 노동자들의 현실이다.

이렇게 비현실적인 최저임금은 그 비현실성이 인정되어 몇 년간 인상을 시켜왔는데, 최저임금을 임금으로 받고 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이것을 수포로 돌리려는 일이 있으니 최근 최저임금법이 개악된다는 소식이다. 지금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최저임금에 대한 준수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고 각 지역이나 나이에 따라 다르게 구성할 수 있다는 등의 내용을 갖는데, 이는 실제로 최저임금조차 앞으로는 더욱 보장하지 않겠다는 말일 뿐이다. 앞으로 최저의 임금선을 갖고 있는 노동자들의 삶은 어떻게 더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3. 우리는 일하고 싶다!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많은 여성들은 경제위기 아래서 더욱 극심한 착취에 노출되어 있다. 여대생의 삶 역시 결코 화려하지만은 않은데 최근 경제위기와 함께 취직 대신 결혼을 고려하고 있는 여대생이 늘고 있다는 뉴스를 보아도 그렇다. ‘취집’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는 지금, 여성에게 결혼과 취직이 동일시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언젠가부터 여성들에겐 꽤나 많은 평등이 주어진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형식적인 평등이 확립된 것처럼 보이는 사회에서 왜 아직도 여성들은 차별받고 있는가? 우리는 이에 대해서 고민해 보아야만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출산과 육아를 여성노동자만 걱정하지 않는 세상, 여성노동이 저평가 되지 않는 세상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경제위기는 소수 몇몇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생사의 경계로 몰아넣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여성은 그 충격을 줄이는 완충망 역할을 사회와 가정 양쪽에서 기대 받으며 갖가지 요구를 강요당하고 있다. 자본의 무한 증식 속에서 만들어진 오늘의 경제위기는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 그 답은 더 많은 사람들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데 있다. 더 많은 이윤, 더 많은 효율로는 누구의 삶도 나아지지 않는다. 여성이 경제위기 하에서 더 착취 받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우리의 대안이다.

Posted by 행진

2009/03/11 13:36 2009/03/11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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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2] 

교육, 실업, 경제위기의 삼각함수




0. 대학 천태만상(千態萬象)

  캠퍼스에 봄이 흘러넘치면, 각 대학에서는 설렌 모습의 새내기들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활기가 넘치는 캠퍼스의 한 편에는 또 다른 걱정이 솟아난다. IMF 이후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하기 쉽지 않으면서 대학은 일종의 ‘취업 학원’으로 변모하였고, 많은 대학인들의 최대 관심사는 더 좋은 직장을 구하는 것이 되었다. 최근 경제위기가 더욱 심해지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강화되었고, ‘낭만이 넘치는 캠퍼스’의 모습은 3월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사라진다. 낭만이 사라진 공간에서 남은 것은 학점관리ㆍ어학점수관리ㆍ경력관리와 같이 길고 긴 스펙관리에 들어가게 된다. 현재 대학인들은 자기계발의 환상과 도태의 공포 속에서 적극적으로 자기의 노동력을 경영하고 관리하며, '열심히 사는 대학생'으로 자신의 투자가치를 높이고 있다.

확대

한편 우리가 다니고 있는 대학의 모습 역시 10년도 채 안 되는 변화의 모습이다. 기업의 이름을 딴 건물이 들어서고, 단과대 건물에 기업의 실험실과 연구실이 버젓이 들어오고, 학내에 각종 상업 시설이 들어오는 모습. 학부제 도입ㆍ졸업인증시험ㆍ영어점수 획득 등 학사과정이 더욱 엄격해 지는 모습. ‘평생직장’은 없다며 직장을 잡은 후에도 주말에는 영어학원에 나가는 등 ‘평생교육’을 받는 모습. 캠퍼스에 5~6학년과 졸업생들이 많아지고, 더 이상 기초과학에는 관심이 없게 된 모습. 이러한 모습은 어디에서 기원하고, 어떤 본질을 가지고 있는가? 2009년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이 예상될 정도로 경제위기가 심화되는 가운데, 대학교육의 모습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 이러한 지점들을 예상하며 대학을 다니는 것은 우리가 공부하는 것들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리고 경제위기 상황에서 어떤 행동들을 해야 하는지, 그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다.  

 

1. 교육은 어떤 의미를 갖느냐?

  흔히 대학은 ‘진리의 상아탑’이라고 불렀고, 대학인들은 ‘지식인’으로 불리던 때가 있었다. 대학은 학문연구를 하는 기관으로 각종 세상사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진리를 추구한다고 ‘생각되었’다. 혹은 대학은 ‘가난한 수재들의 공동체’로서 유일하게 계층상승을 이룩할 수 있는 방법, 개천에서 용 나는 장소로 생각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2008년 대학 진학률은 83.8%에 이르며 아무도 대학인을 지식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모든 대학인들이 취직에 매달려 있는 상황에서 ‘진리의 상아탑’은 옛말이 되었다. 그리고 사회적인 재원과 자원을 갖추고 있어야만 좋은 대학에 들어간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캠퍼스의 낭만’과 같은 말도 옛말이 되었다. 그런데 대학의 모습이 많이 바뀌었어도 사실 그 본질은 경성제국대학이 성립된 1920년대나,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1970~80년대나, 2000년대 현재나 크게 다르지는 않다. 현재의 모습은 오히려 대학의 본질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시기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대학의 본질을 제대로 살피기 위해서 우리는 ‘근대경제체제=자본주의체제’라는 요인을 함께 살펴봐야만 한다. 근대 시민혁명 이후 사람들은 자유와 평등과 같은 가치들을 내면화하였고, 이를 위해서는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지배계급이나 귀족들만 독점하고 있던 지식을 분배할 것을 요구하였고, 19세기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핵심적인 과제 중 하나는 ‘지식의 분배’였다. 한편 산업혁명 이후 기계제 생산 방식이 널리 확산되며, 그전까지는 숙련 노동자들이 가지고 있던 핵심적인 기술과 노하우가 기계로 넘어가게 된다. 예를 들어 그 전까지 무기를 만드는데 있어서 대장장이의 기술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고, 이런 기술은 도제 과정을 거친 몇 명 제자에게만 전수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기계로 무기를 만들게 되면서,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게 되었고, 기계를 관리ㆍ운영하는 방식이 더욱 중요해진다. 또한 대규모 기계제에 적합한 대규모의 노동자들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를 육성하는 교육이 필요로 했다. 이를 필요로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기계를 이용하여 생산을 하는 자본이었다.

이렇게 지식의 배분을 원하는 시민들의 투쟁과 교육된 노동자들을 원하는 자본의 요구가 만나며 초등교육을 중심으로 한 대중적 학교교육이 확대된다. 노동자들에게 들어가는 교육의 비용을 줄이는 것은 ‘공교육’을 이용하는 것인데, 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드는 비용을 국가가 전담하며 ‘대중교육’ 확장되어 간다. 초등교육 기관에서는 기본적인 글 읽기 및 산수와 같은 노동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상식만을 제공한다. 한편 20세기에 들어서면 생산과정을 관리하고 이를 유통ㆍ판매 등과 연결하기 위해 회계ㆍ재무관리ㆍ마케팅 등의 활동이 주목받기 시작한다. 이런 일들을 담당하는 중간관리자 계층이 등장하게 되고, 이들을 양성하게 위해 중등교육ㆍ고등교육 역시 확대된다. 상급학교로 진출함으로서 사무ㆍ관리를 담당하는 지식노동자가 되는 것은 육체노동자에 비해 고임금을 보장하였고, 중등 이상의 학교교육은 빈곤과 실업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층상승의 통로로 인식된다. 이로 인해 노동자의 지위와 임금이 학력에 의해 규정되기 시작한다. 이는 형식적으로는 모든 대중에게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본의 필요에 따라 대중들 내부의 경쟁을 강화하고,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분할을 교육을 통해 정당화한다.

미국과 서유럽과 같은 중심부 국가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던 대중교육은,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미국식 자본주의가 전 세계로 확대되는 과정에 발맞추어 확대된다. 한국 역시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자본주의 체계로 빠르게 변화해가고, 대학 역시 자본주의체제에 부합하는 노동력을 양성하는 기관으로 기능한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대학의 역사와 기능은 자본주의체제의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대학은 자본주의에서 필요로 하는 지식을 생산하는 공간으로서, 그리고 이에 적합한 노동력을 생산하는 공간으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경제위기의 양상과 이에 대한 대응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가 다니는 대학이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 것인지 알아보는데 필수적이다.  

 

2. 금융화에 발맞추는 대학

  2009년 많은 대학들에서 등록금 동결을 선언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높은 등록금에 힘들어 하고 있다. 등록금은 이미 물가인상을 주도하는 전 사회적인 문제로 인식되고 있고, 사실 신자유주의에 맞춰 대학이 변해가는 징후는 바로 등록금 인상이었다. 즉 대학의 자율성을 높인다는 미명 아래 재정을 차등지원하고, 알아서 살아남기를 강요하는 과정에서 등록금이 인상되었다. 한편 높은 등록금을 부추기는 원인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좀 더 복잡한 교육의 변화과정을 보아야 한다. 그것은 흔히 말하는 대학 구조조정인데, 구조조정의 방향은 전 사회적으로 진행되는 '금융화'와 발맞추게 된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는데 1) 대학의 운영 자체를 금융자본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만드는 것 2) 대학에서 가르치는 지식 및 통제 방식이 변해가는 것. 이런 두 가지 모습은 서로를 보충해가며 현재 대학의 모습을 특징짓는다.

최근 가장 대표적인 현상은 대학 내 산학협력단이 주식회사 형태의 자회사를 설립할 수 있도록 하여, 대학이 직접 기업을 설립하고 수익을 얻을 수 있게 한 대학기술지주회사이다. 대학기술지주회사 설립과 관련하여 2008년 2월 통과된 ‘산업교육진흥 및 산학협력촉진에 관한 법률’은 최근 더욱 완화되어 더욱 많은 대학이 회사를 설립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2월 국내 최초의 대학기술지주회사인 한양대의 ‘HYU홀딩스’가 첫 매출을 기록하였고, 서울대 역시 ‘서울대 기술지주 주식회사’를 출범하여 ‘매출 1조원 목표’의 장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예정이다. 또한 경희대와 고려대 및 동국대 등도 2009년 안 설립을 추진 중이고, 각 대학이 보유하고 있는 기술가치를 평가하고 있다. 이에 대학은 일종의 기업이 되어 자금구조를 최대한의 수익을 얻는데 사용하고, 기업과의 연계를 더욱 노골적으로 강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학에서 생산되는 지식 역시 기업에서 바로 쓸 수 있는 것을 만들어 내는데, 이미 이공계의 대학원 과정을 중심으로 진행된 산학협동 과정이 사회과학ㆍ인문과학에도 침투하여 지식의 상품화 현상이 강해진다. 이런 과정에서 돈이 되지 않는 학문은 다른 분야에 통폐합되거나, 더욱 기업의 입맛에 맞추는 지식을 생산하게 된다.

대학에서 적극적으로 수익을 창출하려는 지점은 갖가지 지점에서 나타난다. 최근에 금융의 불안정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며 주춤해지기는 했지만, 많은 대학에서는 자금을 주식투자와 같이 단기간에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곳에 투자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리고 자금을 구하기 위해 동문이나 교직원들에게 발전기금 명목으로 기부를 받거나, 심지어 등록금의 일부를 사용하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또는 캠퍼스 내에 상업시설을 유치하는 현상이 늘어나고 있고, 최근에는 '잡 셰어링'이라는 명목으로 학내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고 구조조정을 하려는 시도들 역시 나타나고 있다. 이렇듯 대학의 재단이 기업의 소유가 되며 둘 사이의 연계가 강화되는 것을 넘어, 현재는 대학이 적극적으로 '금융투기'의 주체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학교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상품화하고 있고, 이는 학교의 발전이 곧 구성원들의 발전과 동일하다는 '학교 발전이데올로기'로 이어진다. 학교 발전이데올로기는 대학과 그 구성원들의 배타적인 이익을 옹호하는 기관으로 변모하고, 이런 전략과 위배되는 행동을 하거나 반대하는 세력들을 '외부세력'으로서 배제한다.

경제위기 속에서 대학의 금융화ㆍ기업화 현상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혹자는 대학이 많은 돈을 버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고 이야기할 수도 있고, 대학의 경쟁력이 높아져야 학생들도 잘 되는 것 아니냐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경제위기의 원인이었던 금융화에 대학들이 발맞추는 것은, 사회 전체적으로는 '장작을 지고 불 속에 들어가는' 결과를 초래할 따름이다. 또한 대학의 지식이 단기적으로 기업의 수익을 창출하는데 맞춰짐에 따라, 지식의 내용과 사회에 대한 장기적인 기여도는 낮아질 수밖에 없다. 현재 점점 기업이 되어가고 있는 대학의 모습 속에서, 우리 자신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3. 대학은 실업률 관리기관?

  2009년 2월 대학의 졸업식장의 풍경을 취재하는 기사들은 '실업', '취업난', '졸업자 감소'와 같은 단어들이 뒤따르는 대학의 우울한 자화상이 담겨있었다. 대졸취업률이 역대 최저에 치달은 상황에서, '잡 셰어링(job sharing)'을 통해 대졸 초입을 깎고 신규인력을 창출할 것을 강력하게 권고 하고 있다. 몇몇 신문에서는 한국의 대학 진학률이 84%에 달하는 현재 상황에서 요즘 같은 불경기에도 대한민국 대다수 학생이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문제라고 이야기하며, 기술ㆍ기능을 연마해 빨리 사회 적응에 나서야 한다고 설교하였다. 하지만 학력격차는 노동시장에서 곧 임금격차로 나타나고, 상급학교에 진출하지 못하면 할 수 있는 일 자체의 폭이 줄어든다! 따라서 실업이 늘어나는데도 불구하고 대학진학률이 이렇게 상승한 이유는 문화ㆍ의식이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캠퍼스에 '장수생'들이 많아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이 금융자본 중심의 경제구조에 깊숙이 들어가면서 주식ㆍ양도성예금ㆍ모기지 등 금융관련 상품이 증가하고, 벤처사업을 육성한다며 1996년 코스닥 시장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금융을 육성하여 한국경제가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사람들의 말과 달리, 금융자본은 새로운 가치가 만들어지는 영역이 결코 아니다. 따라서 금융시장을 육성함으로서 사람들을 많이 고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대부분 외국인 투자자들의 행위에 따라 주식의 허구적인 가치가 상승ㆍ하강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고용 없는 성장'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게다가 최근 경제위기의 양상은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이 실물자본에까지 옮겨가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고, 고용되어 있던 노동자들도 해고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실업은 개개인이 능력 없는 탓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단순히 '눈높이'를 낮추는 것으로 해결할 수도 없다. 문제는 금융자본의 이익에 초점이 맞춰진 현재 경제체제의 문제이고, 몇몇 경제전문가들이 좋은 정책을 제시하는 것으로 현재의 체제를 바꿀 수 없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취업률이 최고의 홍보수단이 된 대학들은, 심각해진 실업문제와 관련하여 대안을 내놓고 있다. 숙명여대는 취업하지 못한 졸업자와 졸업예정자를 위한 무상 프로그램인 '학사 후 과정(Post-Bachelor Program)'을 시행하고 있다. 동문멘토링ㆍ취업캠프 등 프로그램으로 '백수 졸업자'의 취업 지원을 하는 학교들도 있는데, 한국외대는 7월 '졸업생 업그레이드 프로그램'을 개설하여 어학강좌와 경영회계실무 등을 교육할 예정이고, 성공회대도 내년 여름방학부터 '모의회사프로그램'이라는 졸업자 취업지원제도를 시행한다 한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학생들의 취업을 지원한다는 측면도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양산되고 있는 '예비실업자'들을 학교에 묶어놓아 취업률 통계를 관리하는 방법이다. 한편 이것은 정부에서 취업자에 대한 지원을 강화한다는 내용을 담은 '포뮬러 펀딩(Formula Funding)' 등과 맞물려 정부지원을 획득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정부에서 실시하며 이미 그 부작용이 드러나고 있는 '청년 인턴제 정책'과 맞물려, 각 대학의 실업대책 역시 낮은 임금의 임시직을 양산하는 것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자본주의에 걸맞은 노동력을 양성하며 급격히 증가한 한국의 대학은 경제위기 상황에서 '실업률을 관리하는 기관'으로 변하고 있다. 그리고 대학인들에게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정한 노동시장에 들어가서, 계속 일하고 싶다면 끊임없이 개인의 경쟁력과 스펙을 쌓아야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억지로' 교육을 받아야 하는 기간은 무한히 늘어나고, 실업 인구는 적체되어 가고 있다. 대학들은 실업문제를 결코 해결하지 못하며 문제를 유예하고 봉합하는 데 적극 동참할 뿐이다.  

 

4. 어떤 대학생활을 할 것인가?

  우리가 대학에 다니는 이유는 무엇인가? 혹은 무엇 때문에 대학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진리 추구’ 혹은 ‘학문 연구’라고 대답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을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은 더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 혹은 남들이 다 가니까 어쩔 수 없어서라는 대답을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실적인 목표’도 현재의 상황에서는 달성하기 어려워 보인다. 경제위기 속에서 실업률은 점차 증가하지만, 역설적으로 교육을 받는 시기는 점점 늘어간다. 대학은 금융화ㆍ기업화에 적극적으로 편입하며 경제위기에 대응한다고 하지만, 일부 사람들만이 그 혜택을 받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런 과정에서 인간을 자유롭게 해야 할 지식은 오히려 인간을 구속하고 있다.

현재 더욱 중요한 것은 개인의 경쟁력을 높이고 스펙을 쌓는 것 보다, 대학에서 지식을 습득하고 공부를 하는 것의 의미를 좀 더 근본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최소한 아직 대학생활의 여유가 남아 있다면, 졸업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았다면 위와 같은 것들을 성찰할 수 있는 활동을 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취업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변혁적인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것, 거리에 몸을 맡기고 사회적 문제를 풀어나가는 실천을 하는 것, 최대한 학내에서 자치활동을 많이 해보는 것. 이를 통해서 대학에서 쏟아지는 엄청난 지식에 짓눌리지 않게, 교육을 받는 것이 더욱 많은 사람에게 행복한 일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더 이상 대학을 ‘진리의 상아탑’이라고 부르지 않고, 대학 자체가 기업이 되고 있는 현재. 대학-실업-경제위기의 삼각함수를 풀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보자!

Posted by 행진

2009/03/11 04:40 2009/03/1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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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세계화 운동을 남한 곳곳에 뿌리내릴

전국학생행진 본조직 출범을 선언하며!!


경제위기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지난 해 서브프라임 사태로 촉발되어 실물부문의 경기침체로 확장되고 있는 지금의 위기는 장기화된 불황을 향해 치닫고 있다. 1970년대 이후 초민족적 자본은 자신들의 이윤놀음을 위해 노동권, 주거권, 식량, 생태 등 인간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을 자신들의 질서로 종속시키고 파괴해 왔다. 전반적인 이윤율 하락 경향 속에서 적절한 실물 투자처를 찾지 못한 자금이 철저하게 금융의 논리에 종속되어 투자되고, 금융지주회사가 산업자본을 소유하는 형태로 지배구조가 변해온 것이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본질이다. 파생상품을 확산시키면서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금융거품을 형성해 온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친 덫에 걸려 체제 자체를 위협할 ‘위기’를 불러온 것이다.

그러나 지배계급들은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리면서, 민중들의 고혈을 짜내 위기를 지연하려고 하고 있다. 경제위기 때마다 등장하는 ‘고통분담’, ‘노사화합’ 이데올로기는 대규모 해고와 임금삭감, 불안정노동의 확산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된다. 이미 비정규직 해고 및 정규직의 ‘희망퇴직’, 조업단축이나 잔업특근 축소로 인한 임금삭감 등의 일이 개별 사업장에서 나타나고 있다. 정부는 ‘일자리 창출’을 이야기하면서도 청년인턴제 실시, 최저임금법 개악,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악,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대한 법률 개악 등을 통해 저임금-불안정 노동자들을 확대하는 자본의 전략에 적극 동조하고 있다. 또한 ‘자본시장통합법’ 등을 통해 불안정한 세계 금융질서에 더욱 더 밀착하면서 경제를 회생시키겠다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

이러한 지배계급의 공세를 막아내기에 현재 운동진영은 너무나 앙상한 모습이다. 91년 소련의 붕괴와 함께 계급투쟁이 역사적 패배를 맞이하면서 80년대 초중반이 지나야 시작된 남한 사회주의 운동은 너무나도 빨리 위기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념과 운동의 혁신’을 꾀하지 못하고 97년 외환위기를 맞이한 변혁운동은 ‘신자유주의’라는 지배계급의 전략에 맞설 ‘피지배계급의 재조직화와 주체형성의 전략’을 밝히지 못하면서 파견법, 정리해고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자본의 경쟁이 격화되면서 부문간・기업간 격차도 커졌는데 이러한 분할선을 따라 노동자・민중들은 분열되어 연대와 단결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또한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의 부재로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우선해고를 수용했다. 최근에 벌어진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은 이러한 역사적 과오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었다.

지배계급의 위기가 곧바로 민중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가져다줄 보증수표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조, 당 할 것 없이 각급 대중조직이 대중과 운동의 융합의 표상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은 새로운 계급주체 형성에 실패한 것에 대한 결과이다. 대중운동이 일시적으로 고양된다 하더라도, 이를 분명하게 전체운동 상의 조직적인 성과와 전략적인 혁신으로 나아갈 수 없는 현실, 이는 학생운동이라 하여 크게 다르지 않다. 학생운동은 신자유주의에 맞선 민중들의 요구를 학생대중의 보편적인 요구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학생‘부문’의 문제를 강조하면서 대규모 조직력에 대한 환상에 빠지거나, 대중운동 차원에서 의미없는 분별정립을 하면서 끊임없이 축소되어왔다. 다양한 계기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터져 나올 대중운동을 담을 그릇으로서, 또한 이를 급진화시킬 대중조직이 실천적으로 붕괴하고 있는 현실에서 전국학생행진의 초기 문제인식인 ‘反신자유주의 대중운동 협의체’라는 전술도 수정을 요구받았다.

건설준비위원회로서의 3년을 거쳐 본조직으로 출범하는 전국학생행진은 이제껏 지속되어 온 운동의 위기를 끊어낼 이념의 혁신과 재건을 도모하는 학생활동가 조직으로서 자기역할을 분명히 할 것이다. 노동자민중의 인종/성별/나이/학력 등의 차이를 차별로 만들어 전 세계적 착취구조를 만드는 지배계급들에 맞서, 차이를 권리로 확장하는 가운데 특정 부문의 이익을 넘어 노동자민중의 단결을 확대하는 것이 대안세계화 운동의 문제의식이다. 우리가 속한 공간에서, 때로는 그 공간을 뛰어넘어 대중의 한 가운데에서 운동을 다시 조직해 내면서, 어느 것 하나 양보할 수 없는 민중들의 권리를 세계화하는 첫 발을 내 딛자. 이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의하는 바이다.

전국학생행진은
금융화와 궁핍화에 맞서고, 금융세계화를 보호하고 통치성을 유지하기 위해 전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반대하면서
민중의 생존권과 평화권을 위해 투쟁한다!
또한 페미니즘 없이는 어떠한 운동도 지속될 수 없음을 분명히 인식하며
여성에 대한 모든 폭력에 저항하고, 여성권과 노동권을 쟁취한다!
마지막으로 교육의 시장화 흐름에 반대하며 집단적 자기통치의 조건으로 민중의 지식권을 쟁취한다!

이를 위해,
학생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복구하고
정세분석 및 토론, 대중정책 기획, 실험 및 평가를 통해
대안세계화 운동의 기지가 될 공간과 주체를 형성할 것을 결의한다!

폭력과 착취로 연명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현재적 형태인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종식시키고 민중들의 대안이 거대한 물줄기로 쏟아져 내리게 할 장구한 싸움이 단단한 기반 위에 설 수 있도록 전국학생행진 회원 모두는 견결하게 투쟁할 것이다.


2009년 2월 22일

전국학생행진 본조직 출범총회 참가자 일동


Posted by 행진

2009/03/11 04:34 2009/03/11 0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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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

경제위기의 책임을 우리에게 전가하지 말라!


●  ●  ●

2009년 들어 두번째 뉴스레터 <경제위기의 책임을 우리에게 전가하지 말라!>가 드디어(!) 발간되었습니다. 요 몇 주간에도 온갖 일들로 세상은 시끌벅적하였습니다. 용산참사로 드러난 정권의 위기관리책의 본질, 여성상위시대니 뭐니 하였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허구적인 이데올로기였을 뿐임은 강호순 사건 등 급증하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살인의 위협과 함께 경제위기의 1차적 방패막이로 '활용'되는 여성의 처지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덧붙여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을 '함부로' 다루는 조중동 보수언론은 그 사건을 다룰 자격도 없으며(그래서도 안 되고) 진보진영 또한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천박한지를 전국민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러는 한편 하나의 큰 흐름으로 경제위기라는 객관적 조건 속에서 정부/자본의 전략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고 이제 출정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불안정한 요소들이 존재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엄중한 시대인식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우리 내부를 분열시키고 경쟁시키는 지배계급에 맞서 공동의 요구와 공동투쟁을 만들기 위한 '치열함'과 더불어 긴 호흡과 장기적 시야를 가지며 '냉철함'을 동시에 요구하는 정세가 바로 지금 2009년 2월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정세동향1]에서는 3주간 전국에 촛불을 밝히고 있는 용산참사에 대한 행진의 입장과 그 구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용산참사가 본질적으로는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부동산, 건설경기 부양책에 따른 무분별한 재개발 정책에 원인이 있으며 이에 대한 정확한 문제제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세동향2]에서는 최근 경제위기 상황에서 다시금(?) 여성에 대한 차별상이 가시화되고 있는 와중에, 일자리 창출의 해결책이라 제기되는 사회서비스 일자리 확충정책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피며 이것이 여성에 대한 차별을 재생산할 따름이며 진보진영 내/외를 아울러 여성의 권리에 대한 재인식이 필요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정세동향3]에서는 지난 호에서 간략히 제시하였던 '이스라엘, 침략을 중단하라!'를 결산하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활동보고]에서는 2/4-6에 서울내 재개발지역을 돌아다니며 용산참사의 문제점을 공유, 토론하고 시민들에게 선전해내는 활동을 벌인 '2009 겨울 반빈곤연대활동'의 참가자 후기를 수록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입장/성명]에서는 2년 전 우리 사회에 하나의 충격을 던져주었던 여수의 외국인보호소의 화재참사를 추모하며 여전히 개선의 의지없이 오히려 이주노동자와 이주민들을 탄압하고 기만하는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행진의 입장을 담았습니다.

  길것만 같았던 겨울방학도 어느덧 말미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봄바람이 불면 캠퍼스를 가득 메울 09학번 새내기와 함께할 힘찬 2009년을 생각하며 얼마 남지 않은 방학을 '철저한 준비'의 시기로 알차게 보냅시다!

Posted by 행진

2009/02/08 23:20 2009/02/08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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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진 사람들을 위한 재개발정책
 
이명박정부와 오세훈시장은 물러나라!


20일 용산참사가 발생한 이후, 검찰은 경찰차장을 소환하는 등 사고의 진상을 규명하겠다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백 번 조사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용역과 합동작전을 펼친 경찰의 불도저식 진압으로 죄 없는 철거민 5명이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국민의 지팡이’를 자처하는 이들에게 짓밟혔다. 이들의 죽음은 우연한 사고가 아니다. 경찰특공대와 용역의 합동진압은 이명박 대통령과 오세훈 시장의 도시개발정책을 보호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건설업계를 비롯한 대기업들에게 돈줄을 제공하기 위해 제 발로 걸어 나가지 않는 서민들을 소탕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정부와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지금 추진하고 있는 개발정책을 멈추지 않는다면, 용산참사는 언제 어디서든 발생할 수 있다.

용산 4구역은 오세훈 시장이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개발정책을 이어받아 개발하고 있는 곳이다. 서울시는 성냥갑 아파트가 둘러싸고 있는 한강변에 공원과 상권을 조성하고 주상복합형 초고층 빌딩 아파트를 세워 매력적인 금융・산업・주거단지를 시민에게 돌려주겠다고 했다. 이름 하여 ‘한강 르네상스’이다. 주위의 용산, 잠실, 흑석, 여의도, 난지 등의 재개발과 연계하여 획기적인 환경의 용산 국제 업무지구(용산 랜드마크), 국제 금융지구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대대적인 개발정책이 과연 누구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것인가? 새로 들어서는 초고층 빌딩에는 누가 들어가게 되는가? 수주를 따는 건설업계에는 누가 투자하여 이익을 얻게 되는가?


1995년부터 2000년까지 용산4구역 땅값 10배 상승
대기업과 국민연금, 서울시까지 투자자로 나서

용산미군기지 이전계획이 발표되면서 용산은 서울의 최대개발지역으로 떠올랐다. 용산 국제업무지구 개발 사업자는 삼성물산과 국민연금 컨소시엄인데, 우리투자증권사의 평가에 따르면 이 공사를 수주한 삼성물산은 2010년부터 매년 867억 원 이상 씩 영업이익을 낼 것이라고 한다. 개발지역이 코레일(옛 철도청)이 소유한 부지이기 때문에 코레일도 8조원 이상의 이익을 볼 것이라는 예측이 있다. 또한 이 개발을 추진하기 위해 민간 건설업체들부터 코레일, 서울시까지 지분을 갖고 참여하는 프로젝트회사(SPC)가 만들어졌다. 서울시는 사업의 공공성을 강화하고 개발을 잘 관리하겠다는 이유로 5% 지분을 가졌지만, 그 이익을 집값 때문에 걱정하는 사람들, 수많은 영세상인들에게 돌려주지는 않는다. 서울시가 말하는 사업의 공공성은 그저 말 뿐이고 기존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물갈이하여 사업을 원활하게 추진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이러한 개발사업으로 95년까지 3.3㎡당 500만~600만 원 선이었던 용산 4지구의 땅은 최소 10배가 올라 이제는 1억 원이 넘는 곳도 있다. 개발을 앞두고 부동산 투기 세력들이 대거 몰려든 통에, 원래 살던 사람들이 토지를 소유하는 비율은 절반으로 떨어졌다.


대책없이 쫓겨나는 사람들

한강 주변 재개발로 인해 한강 가판노점을 비롯하여 영세자영업자들과 신규아파트(지은 지 2년, 7년 밖에 되지 않았다)에 살던 주민들이 자신이 사는 곳을 정리해야 했다. 뉴타운 개발의 경우 원래 살던 주민들이 재정착하는 비율이 20%도 안 된다는 통계에서 볼 수 있듯이, 재개발은 대다수의 서민들에게 이사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문제는 정부가 부족한 재원을 핑계로 건설자본이나 투기세력에게 개발을 맡기기 때문에, 떠나는 사람들은 제대로 보상도 못 받고 더 열악한 곳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건설업체가 개발이익의 20% 정도를 개발부담금으로 내야 하지만, 이 돈은 개발지역의 기본적인 시설을 만드는 데에도 빠듯해서 세입자들의 권리를 보장하지는 못한다. 결국 영세한 자영업자들은 더 낮은 보증금을 찾아 열악하고 낯선 곳에서 장사를 시작해야 한다. 용산에서 먼저 보상받고 나간 세입자들은 철거반원들의 협박이 두려워 낮은 보상비도 받아들였다고 한다. 철거민 5명의 죽음은 단지 마지막까지 남아서 저항하고 있는 일부 세입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서민들의 집을 허물고 영세상인 내쫓는 재개발정책을 막아내자!

이명박 대통령과 오세훈 시장이 이 사건을 두고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 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 몰상식한 재개발을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철거민들 사망 직후 용산구청에서는 “구청에 와서 생떼거리를 쓰는 사람은 민주시민 대우를 받지 못하오니 제발 자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적혔던 간판을 재개발된 용산의 조감도로 바꾸어 놓았다. 행정당국은 그 조감도에서 용산의 힘찬 미래를 보았겠지만, 우리는 쫓겨나는 사람들이 무겁게 내쉬었을 한숨을 본다.
살고자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짓밟은 정부가 국민들의 안전한 삶을 보장해줄 수 없다. 서민의 집을 허물고 영세상인 내쫓는 재개발정책을 막아내고 정부에게 책임을 묻자!



2/

재개발정책으로 일자리, 문화, 환경을 한 번에?
그들이 원하는 것은 부동산금융시장의 거품!

 

역대 정권들의 부동산・건설부양 정책의 진실

용산참사 현장에 국회의원들이 앞 다투어 방문했다. 민주당은 ‘MB악법 저지’ 때와 마찬가지로 한나라당, 이명박 정부에게 책임을 물으며 선을 긋고 있지만,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부동산 정책 또한 이명박 정권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외환위기 이후 역대 정권들은 경기가 침체될 때마다 주택 재개발 활성화, 분양가 자율화, 건설업체 자금지원 등의 조치를 발표하였고, ‘국토균형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전국을 투기처로 만들었다. 집값이 폭등하면 잠시 부동산시장 안정정책을 내놓기도 했지만, 그 효과는 미미했다. 이렇게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내놓은 길 위에서 이명박 정부가 더욱 적극적인 부동산 부양대책을 내놓고 있다.


개발이익은 민간업체가 독점하고, 손실은 국민들이 때운다

현재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건설사 지원대책’으로, 정부는 대한주택보증과 신용보증기금을 통해 9조원에 달하는 공적자금을 건설업체에 지원할 예정이다. 또 아파트 미분양이 늘고 선박수주 실적이 저조해지는 등 건설업체들이 자금난에 몰리자 이를 구제하기 위해 금융권의 지원프로그램(대주단)이 생겨나서, 이 협약에 가입하면 건설업체가 최장 1년간까지 채무상환을 미루고 자금지원을 받을 수 있다. 용산 국제업무단지처럼 대규모 자금이 필요한 개발사업에 사용되는 금융기법 ‘프로젝트 파이낸싱’
(PF: 금융기관이 개발사업의 현금흐름을 보고 대규모 사회간접자본 건설 등 특정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자금을 지원하는 금융기법) 시장도 지난 몇 년간 부동산 경기의 호황을 타고 확산되었다. 물론 이렇게 부동산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기 위해 발버둥쳤던 정책들이, 당장에는 금융위기와 실물경기 침체로 부동산 가격도 하락하면서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의 금리인하와 각종 부동산규제 완화조치에 ‘향후 1-2년 뒤에는 경기가 살아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더하여, 미분양 아파트를 담보로 한 자산유동화증권(ABS), 기업구조조정부동산 투자회사(CR리츠) 등의 펀드가 조성되었고, 신용보증기금에서도 건설사 등의 회사채를 묶어 프라이머리 채권담보부증권(CBO)를 발행하였다. 건설경기 침체와 내수경기 불황으로 위기에 봉착한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역시 아직 절대적으로 큰 규모는 아니지만 이미 관련 증권상품이 시중에 팔려왔고 향후에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 정부는 재개발정책과 규제완화로 ‘일자리창출, 문화, 환경’을 다 잡겠다고 하지만, 정작 본심은 부동산과 금융시장의 거품을 키우는데 있다. 이러한 정책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처럼 각종 변수에 따라 위험성을 확대하고, 개발이익이 나면 그 이익은 민간업체에게, 부실과 피해가 닥치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린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2010년 이후 경제에 회복국면이 있을지라도, 2004년 때보다 이윤율이 낮을 것이고 그 이후 또 위기가 발생할 것이라는 예측을 참고한다면, 이명박 정부가 키우는 거품은 결국 재가 되어 국민들의 뒤통수를 칠 것이다.


또 다른 위기를 준비하는 정부의 부동산 정책_
우리는 거품이 아니라 주거권을 원한다!

노무현 정권이 동북아 금융허브라는 망상에 빠져 부동산, 주식, 펀드 분야에서 엄청난 거품을 만들었던 과오를, 이명박 정권은 이름만 바꾸어서 반복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은 집을 ‘사는 곳’이 아니라 ‘사는(買) 것’으로 만들고, 서민들의 주거상태를 더욱 열악하게 만든다. 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뉴타운 개발사업은 기존에 있던 저렴한 주택가를 밀어버리고 브랜드 아파트를 세워서 세입자들이 더 열악한 곳으로 이주하게 한다. 소득격차에 따라서 도시 안에 부자들의 장벽을 치는 일이 노골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부동산과 금융시장의 긴밀한 유착관계가 전통적인 의미의 부동산 투기세력들 뿐 아니라 내 집 마련을 위해 평생을 바치는 더 많은 서민들까지도 각종 대출상품과 부동산펀드를 통해 발을 들여놓게 한다는 것이다.

정부와 서울시는
일자리창출, 문화, 환경 내걸고 재개발사업을 추진하지만, 이 공사가 만들어낼 대다수의 일자리는 이미 열악한 건설노동자들의 현실과 다르지 않다. 서민들의 집과 일터를 짓밟고 이룩한 용산의 ‘문화’는 참혹한 현실을 가린 신기루일 뿐이며, 2년 7년 된 아파트를 허물어 최고층빌딩을 새로 짓겠다는 발상이 진정으로 환경을 보호해줄리 없다. 아름다운 말로 치장한 정부의 정책은 국민들을 속이고 있다. 또 다른 위험을 키우는 부동산 정책에 반대하고, 서민들이 쾌적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자!

Posted by 행진

2009/02/08 23:20 2009/02/08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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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성의 출혈적인 착취를 동반하는
사회서비스 일자리 창출전략을 거부한다!


최근 여대생들 사이에서 ‘취집’이란 말이 신조어로 등장하고 있다. ‘취직+시집’이 합쳐진 말로, 불황기 조혼 트렌드를 반영하는 말이다. 결혼정보업체에 여대생 회원들이 급증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불황속에서 여대생들의 취업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라고 분석된다. 직업소개소에는 막일이라도 좋으니 일을 달라는 중년 여성들로 붐비고, 그녀들은 아이돌보미․식당청소일․가사도우미등 저임금에 단기일자리라도 마다않고 일을 소개받는다. 그녀들이 갖게 되는 일이라고는 ‘직업’이라기보다 ‘알바’와 비슷한 불안정한 일자리들뿐 이지만, 경제위기 속에서 애들 학원비라도 벌려면 당장 손에 10만원이라도 쥐어져야 하는 상황이다. 직업소개소를 찾는 여성들 중에는 불경기에 직업을 잃은 여성들 또한 많다. 경제위기가 심화된 지난해 말에 여성을 우선 해고하는 사례가 크게 늘어났다. 28일 ‘한국 여성민우회 고용평등상담실‘이 발표한 2008년 주요 상담사례 분석 결과에 따르면 성차별 해고 상담건수가 12월에 10배로 늘어났다고 한다. 사내커플인 여성에게 임신을 했으니 사표를 쓰라며 업무를 주지 않거나, 연차를 쓰면 연봉계약을 할 때 인사고과에 반영하겠다고 협박하는 등 다양한 성차별 해고 사례가 접수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경제위기 상황에서 여성에 대한 우선적인 해고가 이뤄지고 있는 경향성을 보여준다.

누가 여성발전 담론을 운운하는가.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이 착취당하는 현실을 은폐하면서 여성의 권익이 향상됐다고 호언장담하던 지배계급의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었음이 위기 속에서 드러나고 있다. 위기의 방패막이로 활용되며 구조조정에서 가장 먼저 잘려나가는 여성노동자들은 더 열악한 조건의 노동시장으로 내몰리고 있고, 청년실업의 절망 속에서 취업하기가 더욱더 힘든 여대생들의 ‘취집’은 연령대를 막론하고 여성노동의 불쾌한 진실들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경제위기의 쓰나미 속에서 그녀들은 생계를 유지하기위해 각개격파하고 있는 중이다. 

사회서비스 확충전략! 여성의 불안정한 일자리 양산

정부는 갖가지 일자리 창출 계획을 내세우는 가운데, 여성인력 활용정책․ 서울시 ‘여행’ 프로젝트 등 특히 여성을 위한 일자리를 만드는 것을 주요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서비스 확충전략과 맞닿은 일련의 여성일자리 창출계획은 이름만 바뀌었을 뿐 사실상 사회서비스 시장화 전략을 확대하는 방식에 불과하다. 

2006년, 노무현 정부가 <사회서비스 확충전략>을 발표한 이래 사회서비스 담론이 확장되었고, 2007년부터는 정부의 계획대로 사회서비스 사업이 시행되고 있다. 이 사업을 그대로 받아 안은 이명박 정부는 현재의 경제위기 속에서 70여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며 가장 적극적인 전략으로 사회서비스부문을 택했다. 작년보다 1만 5,500여개가 늘어난 12만 5,500여개의 사회서비스 일자리를 창출하겠단 계획이다. 사회서비스는 설비투자 비용의 부담이 없고 대인서비스라는 특성 때문에 비교적 빨리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사회서비스의 특성을 이용해서 정부는 공적투자 없이 사회서비스 일자리 창출을 통한 소비확대를 도모하고 있지만 이는 공익적 일자리의 확대로 추구되어야할 보육, 간병등의 사회서비스 분야에 싸고 유연한 여성노동력을 적극 활용하고 있으며, 실업자와 빈민․영세자영업자층까지도 흡수하는 노동력 관리전략을 구사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정부가 말하는 사회서비스 확충전략의 핵심은 바로 바우처 제도의 확대이다. 바우처제도에서 사회서비스 이용자는 정부가 지불을 보증하는 일종의 전표를 지원받고, 여기에 일정액의 본임부담금을 지불하면 특정 서비스 기관에서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는 방식이다. 이렇게 정부는 사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필요한 공적 시설을 직접 만들지 않고 비영리 단체, 기업등에 위탁하여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는데, 이는 정부가 주체로서 서비스를 제공하고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바우처를 통해 살수 있는 서비스 공급시장을 구축하는 것을 말한다. 즉, 국가가 적극적으로 책임져야할 사회공공성 확대로서의 사회서비스 제공을 서비스 기관들에게 일정 전가하는 방식으로 아웃소싱 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러한 바우처제도는 서비스 지원방식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고, 급여의 형태나 재원․서비스 전달체계와 연관된 사회복지 서비스 분야의 전반적인 변화를 초래하게 된다. 결국 사회공공성 강화를 위한 사회서비스 확충이 아니라 사회서비스 ‘시장화’ 전략이다.
 
 돌봄의 상품화와 돌봄노동자의 노동권 박탈
 
 사회서비스는 그동안 일정하게 비공식 부문의 노동으로서 충당되어왔고, 그 비용은 개별 가족에게 전가되어 왔다. 따라서 그동안 가족이 책임져온 재생산 영역을 공식화하여 사회적으로 드러내는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가족 보살핌의 책임이 사회적으로 평등하게 보장되어야만 누구나 가족 재생산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고, 그런 일을 전담하던 여성들도 원하는 노동을 할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서비스 확충은 기본적으로 여성의 요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서비스 확충전략이 ‘돌봄 노동’을 사회화하는 데 목표가 있기보다는 관련 서비스 및 노동자를 통제․관리하기 위한 발판이 되고 있고, 이미 수행되어온 ‘돌봄 노동’의 일부를 제도화하고 있다. 또한 대체로 여성들이 간병인, 보육교사, 가사도우미등의 사회서비스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데, 정부는 이들에 대한 평가제도를 통해 자격화하는 계획만 있을 뿐 돌봄노동을 수행하는 여성노동자에 대한 노동권 보장은 빠져있다. 현재 간병노동자의 고용형태는 노동자성 조차 인정받지 못한채, 직업소개소를 통해 병원이나 가정에 파견되어 병원이나 소개소의 관리감독을 받고 있지만 임금은 환자나 보호자에게 받는 등 노동기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특수고용이라 할 수 있다.

서비스 제공기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1년도 안되는 단기간 계약직 노동을 강요받고 있는데다 파트타임 형태의 불안정한 노동을 하고 있다. 서비스 이용자의 집에가서 몇시간 동안 일을 하고 또 다른 이용자의 집으로 가서 일을 하며 수요를 찾아 전전하고 있지만, 노동시간에 따라 시간급을 받는 방식이니 임금이 불안정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노동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고 일이 있을때만 일을 하는 방식은 노동자가 아무리 많이 일하고 싶어도 바우처 이용자가 없으면 실직상태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는 사회서비스 이용 발생의 불확실성과 불균등성을 개별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시스템 때문에 발생한다. 이런 방식으로 사회서비스가 확장된다면 시장화 논리에 따라 서비스 제공기관들의 경쟁이 심해지면서 서비스 노동자들의 임금 및 노동조건은 더욱 하락할 것이다.


상품화된 서비스를 넘어서 진정한 ‘사회’서비스를 요구하자

최근 산업 예비군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민운동․민중운동 진영에게도 사회서비스는 유력한 일자리 창출 분야로서 부각되고 있다. 민생민주국민회의(준), 민주노총, 진보신당 등은 공공부문에서 사회서비스 일자리 창출로 경제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서비스 분야가 제조업이나 건설업에 비해 취업유발 효과가 크다는 근거를 들어 일자리 창출 요구로서 사회서비스 확충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가 대부분 성별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둔 불안정하고 저임금의 노동이라도 선택 할 수 밖에 없는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을 간과하고, 정부 정책 비판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여성과 민중들의 요구는 다시 지배계급의 의도안으로 포섭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시장원리로 사회서비스를 확대하려는 정부정책에 포섭되지 않는 사회서비스를 요구해야 한다. 사회복지, 보건의료, 교육, 문화 분야 외에 공공재적 서비스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사회서비스 확충을 요구할 때만이 사회서비스 사업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사회서비스에 대한 요구가 왜 확대되는가라는 기본적인 물음을 다시 던지며 이 문제를 바라보자. 빈곤과 저임금․불안정 노동이 확대되면서 가족이 담당하던 돌봄의 책임은 유지되기 어려워지고, 인구고령화로 노인인구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사회서비스의 확대에 대한 요구를 드높였다. 그러나 지배계급이 이에 대한 대책으로 내세우는 정책은 노동자들을 더욱 저임금과 불안정 노동의 굴레에 밀어넣고 있는 기만적인 사회서비스 확충전략이었다. 따라서 정부의 사회서비스 시장화전략이 위기를 해결할 한 줄기 빛이 될 가능성이 없음을 확인했다면, 우리는 사회서비스 정책의 허구성과 그들의 거짓된 선전의 부당성을 알려나가는 작업을 중단해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우리의 사회공공성보장으로서의 사회서비스 요구가 무엇을 근거로 왜 공적 영역에서 사회서비스가 제공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제기하지 못한 채 일자리 창출 담론에 그친다면 일자리로서의 사회서비스는 언제든 축소될 수 있다. 따라서 시장활성화 전략 하에 추진되고 있는 현행 사회서비스 제도가 바로 저임금 노동시장 확대의 종착지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이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요구는 전민중의 보편적 권리이자 여성의 권리로서 보육, 간병, 노인돌봄의 공적책임을 사회적으로 인식시킬 수 있는 투쟁이 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빈곤층에 대한 보편적이고 공적인 사회서비스 확충의 요구와 사회서비스 일자리 노동자의 노동권 확보라는 구체적인 방향 또한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현장 노동자들의 현실에 기반을 둔 구체적인 요구안 마련을 통해 어떤 사회서비스 제도와 일자리를 만들 것인지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3.8여성의 날 투쟁에서부터 경제위기 여성전가에 대해 맞서자!

정부는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을 삭감하면서 기만적인 임금-고용의 빅딜을 강요하고 있다. 공공부문에서 구조조정을 통해 절감된 비용으로 청년들에게 1만 8천개의 일자리를 만들어 주겠다는 청년 인턴제 시행, 노동자 파이 나누기 식의 잡쉐어링(job sharing) 정책으로 정부는 노동자들을 회유하고 있다. 저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가 위기극복전략의 탈을 뒤집어 쓰고 확장되고 있고, ‘조금씩 양보해서 경제위기를 극복하자‘며 지배계급이 말하는 고통분담 이데올로기는 노동자들의 희생을 동반한다. 전체적으로 하향 평준화 되고 있는 열악한 노동자들의 현실속에서 우리는 여성노동권을 어떻게 발언해야 할까.

여성이 일할 권리를 온전히 돌려받는 것은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이기적으로 여성만을 특권화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들의 연대로 합력을 창출해야할 이 어려운 시기에 여성노동권을 쟁취하기위한 투쟁은 노동자계급을 분할하려는 전략도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경제위기를 극복하려는 지배계급들의 극복전략에 맞서 구조적으로 여성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극대화하는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밝히고, 여성노동권을 발언하지 못한다면 노동자 민중의 근본적인 권리확장은 불가능할 것이다. 

 올해로 101주년을 맞는 3.8여성의 날 투쟁에서부터 여성들의 출혈적인 착취를 동반하는 지배계급의 위기극복전략에 맞서는 투쟁을 만들어 나가자. 경제위기 극복전략으로써 정부의 사회서비스 일자리 창출계획은 여성노동자들을 더욱더 거친 벼랑끝으로 내몬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각개격파하고 있는 여성들의 연대를 모아낼 수 있는 3.8 투쟁을 벌여내야 할 것이다.
                                                   
 

Posted by 행진

2009/02/08 23:11 2009/02/08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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