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Results for '뉴스레터'


217 POSTS

  1. 2008/10/30 [선특호_홍보]전국학생행진(건)을 소개합니다! by 행진
  2. 2008/09/30 [18호_발간사] 신자유주의는 종말하는가? by 행진
  3. 2008/09/30 [18호_교육분석1] 금융위기는 어디에서 도래했는가? by 행진 (1)
  4. 2008/09/30 [18호_교육분석2] 막 나가는 교육, 이래도 괜찮나? by 행진
  5. 2008/09/30 [18호_기획연재] 한국 자본주의의 미성숙한 기원, 1950년대 by 행진
  6. 2008/09/30 [18호_투쟁보고] 성신 청소용역노동자들의 투쟁, 승리의 14일에 함께했습니다 by 행진
  7. 2008/09/30 [18호_성명서] 무건리 군사훈련장 확장 계획 즉각 철회하라! by 행진
  8. 2008/09/10 [17호_발간사] 지배계급의 공세에 맞서, 2학기 뜨거운 대중운동의 바다로 달려갑시다! by 행진
  9. 2008/09/10 [17호_성명/입장]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합시다! -기륭투쟁에 부쳐 by 행진
  10. 2008/09/10 [17호_정세동향1] 저들만의 경제성장 정책, 사유화/선진화 방안 by 행진
  11. 2008/09/10 [17호_정세동향2] 이주노동자 투쟁의 현황과 과제 by 행진
  12. 2008/09/09 [17호_교육분석] 9월, 외환위기 대란이 일어난다?! by 행진
  13. 2008/09/09 [17호_기획연재] 한국에서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의 기원에 대해 by 행진 (1)
  14. 2008/07/18 [16호] 7월 30일, 미친소 미친교육을 때려잡읍시다! by 행진
  15. 2008/07/18 [16호] [G8 정상회담 비판] '다른 세계'를 가능케 할 촛불을 밝히자! by 행진
« Previous : 1 :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 15 : Next »

신자유주의에 맞서 평등-자유-연대로 나아가는

                 전국학생행진(건)과 함께 합시다!

 

:: 전국학생행진(건)은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내는 빈곤과 폭력에 문제를 느끼고, 대안을 위해 다양한 실천을 하는 대학생들의 공간입니다. 


  # 전국학생행진(건)은 전 세계 민중들의 삶을 경쟁과 빈곤으로 내몰고 있는 금융세계화-군사세계화에 맞서, 아래로부터의 세계화를 위해 투쟁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http://stulink.jinbo.net/08df/08altforum.hwp


▲ 2008 대안세계화 학생포럼 자료집
            [메인포럼] 다른 세계로 향하는 학생운동 - 대안세계화 운동의 역사와 전망
            [포 럼] 무엇이 당신의 건강을 위협하는가?
            [포 럼] 경제학 비판의 관점에서 보는 07-08년 금융위기
            [포 럼] 평가와 전망: 촛불시위, 어디로 갈 것인가?


# 전국학생행진(건)은 각 지역, 학생회, 학회, 동아리 등에서 회원들이 일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자료를 만들고 토론, 실천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학회학술네트워크

학회학술네트워크는 대안 지식을 생산하고 공부하고자 하는 전국의 모든 학회학술단위와 개인들에게 열려 있는 공간입니다.

자본이 필요로 하는 노동력으로 재생산되기 위함이 아니라, 세계를 분석하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치할 수 있는 힘을 길러내는 대학인으로 살기 위해 올 한해, 신자유주의 비판 세미나 커리큘럼 생산과 경제학비판, 혁명사 학술캠프 등의 활동을 진행하였습니다.

학회학술네트워크의 활동에 함께 하고자 하시는 분들은 싸이월드 클럽에 가입하세요!

club.cyworld.com/aremarching

학회운동에 대한 입장은 2008 전국대학생대회 자료집 _ 학회학술포럼을 참고하세요!

http://stulink.jinbo.net/webbs/download.php?board=pds&id=405&idx=1 


# 전국학생행진(건)에 가입하세요!

전국학생행진(건)의 활동과 생각에 동의하는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습니다.
회원은 전국학생행진(건)의 여러 활동에 참여합니다.
회원은 총회를 비롯한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합니다.
회원은 전국학생행진(건)에서 발간한 매체 및 정보를 받아볼 수 있습니다.
회원이 되시면 각 캠퍼스에서 열리는 회원 모임, 세미나, 토론회에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캠퍼스행진이 아직 없을 경우, 한 달에 두 번 열리는 행진 회원 모임(정세토론, 뉴스레터 읽기)에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Posted by 행진

2008/10/30 16:02 2008/10/30 16:02
, ,
Response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RSS :
http://stulink.jinbo.net/blog/rss/response/134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발간사] 신자유주의는 종말 하는가?

- 금융대란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 -

 

사 속에서 2008년 9월은 어떤 식으로 기억될까요? 세계에서 투자은행 4위인 리먼 브라더스의 붕괴, 메릴린치의 뱅크오브아메리카(BOA)매각, 그 전의 페니메이와 프리디맥의 공적 자금 투입, 최대 보험회사인 AIG의 위기설. 거의 100년이 가까운 전통을 지닌 금융자본들의 몰락은 전 세계의 경제를 요동치게 만들었고, 이는 약 81년전 대공황이라는 공포를 다시 한번 상기시켰습니다. 그리고 금융자본들의 몰락을 지켜볼 수 없었던 미국당국은, 막대한 규모의 공적자금을 투입하여 금융자본을 ‘국유화’하고 매각을 알선했습니다.

러한 현상을 두고 일각에서는 이제 신자유주의가 붕괴하고, 케인즈주의가 부활한 것이 아니냐는 호들갑을 떨고 있습니다. 국가에 의한 공적자금의 투입과 국유화는, 시장만능주의를 신봉했던 신자유주의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강조했듯이 국가와 시장을 나누고, 어느 쪽에 힘의 비중이 더 실리는지를 살펴보는 것 자체는 정세분석에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실상 시장만능주의의 신자유주의 시대였다고 해도, 시장의 필수불가결한 타자로서 국가는 민중들의 불만을 관리하고 탄압해왔습니다. 금융우위의 축적구조로서 신자유주의의 그 본질은, 오히려 국가에 의한 공적자금의 투입을 계기로 더욱 선명해졌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습니다.

러나 현재의 정세는 운동주체들에게 구체적인 정세 분석에 입각한, 구체적인 전술과 전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2000년을 관통해왔던 ‘금융위기와 대안좌파의 과소결정’이라는 정세 속에서, 현재의 비가역적인 금융위기는 야만의 도래를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현재의 정세가 신자유주의의 종언이다, 아니다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맨 처음에 던졌던 질문, 2008년 9월을 역사의 긴 맥락에서 바라볼 때에만 이를 정확히 이야기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투쟁 속에서 실천하는 것만이, 정세에 대한 실천적 분석을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가역적인 정세 속에서 운동주체들이 살아가는 데, 비가역적인 정세에서 쓰여진 18호 뉴스레터가 자그마한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

※ ‘18호 뉴스레터’ 이렇게 활용합시다!

[교육분석 1]은 현재 금융자본들이 줄줄이 도산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무엇을 중점적으로 볼지를 다룬 내용입니다. 특히 문제의 주범인 파생상품에 대한 분석을 담고 있습니다. [교육분석 2]에서는 지배계급의 반격이 가장 노골적으로 나타나는, 교육 구조조정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일어나는 구조조정을 중심으로 핵심적으로 보아야 할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기획연재]는 ‘한국현대사를 만나다_1950년대’입니다. 1950년대의 상황을 분석할 수 있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특히 반공이데올로기와 지배계급의 성립이라는 쟁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보고/입장]은 성신여대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것입니다. 보고를 읽고 쟁점들을 다시 생각하면서, 성신여대에서의 투쟁승리가 다른 비정규직 투쟁에도 확산되기를 바랍니다. [성명]은 전쟁기지 확장이 진행되고 있는 경기도 파주시 무건리의 투쟁에 대한 내용입니다. 군사세계화를 확산하는 현재의 정세에 맞서 싸우자는 결의를 다져 나갑시다!

예정되었던 것 보다 또 발간이 늦어졌습니다.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입장을 내기가 쉽지 않은 부분들이 있었고, 신중을 기하는 작업들이 뉴스레터 발행 연기로 이어져 죄송합니다. 더욱 기민하고 올바른 입장을 내기 위해 언제나 노력하겠습니다.

Posted by 행진

2008/09/30 15:48 2008/09/30 15:48
,
Response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RSS :
http://stulink.jinbo.net/blog/rss/response/133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교육분석] 금융위기는 어디에서 도래했는가?



한 시기가 마무리되려 하고 있다. 신호는 몇 년 전부터 있어 왔지만, 최근의 경보음은 그 어느 때보다 컸다. 80년 남짓한 미국 헤게모니의 끝자락에 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전보다는 훨씬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미 정부의 7000억 달러라는 공적자금 투입을 골자로 한 구제금융안이 현실화되면 위기가 봉합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지만, 아무도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진 않다. 이러한 사상 초유의 위기는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가? 


1. 신자유주의의 도래

신자유주의는 전후 세계를 지배한 경제 정책이었던 케인스주의와 그를 뒷받침하는 브레튼우즈 체제가 해체되면서부터 등장한다. 1929년 미국 증시를 폭락시키고 이후 대공황을 불러온 금융자본을 억압하기 위해 미국은 1933년 글래스-스티걸 법을 제정하여 은행, 증권, 보험 등 금융업종간의 칸막이를 쳤다. 특히 고객 예금을 가진 상업은행이 위험이 큰 투자은행의 업무를 하지 못하게 한 것이 핵심이다. 또한 세계2차대전 이후에 케인스주의는 저금리와 완만한 인플레이션을 통해 금융의 이익을 축소하고, 금융자본의 국제 이동을 막았다. 산업자본으로의 투자와 소비를 촉진하기 위한 재정적자 정책 또한 이루어졌다. 세계적인 화폐제도로는 금-달러 본위제와 고정환율제가 유지되었는데, 이를 약속한 것이 1944년의 브레튼우즈 협정이다.
금융 억압, 부채경제를 특징으로 한 케인스주의 정책이 효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법인자본주의가 이윤율을 회복하고, 호황기에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이윤율은 1965년에 정점을 도달, 이후 점차 하락하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마셜플랜과 한국 ·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달러를 마구 찍어낸 결과, 스스로 약속했던 금-달러 본위제 (35달러를 금1온스로 바꾸어주겠다는 약속)를 지키지 못하고 1971년 미국 대통령 닉슨은 금창구를 폐쇄한다.

번영의 시대에 기여했던 원칙인 케인스주의가 70년대의 위기를 막아내지 못하자 이전부터 케인스주의를 비판해왔던, 금융자본을 뒷받침하는 이론들이 힘을 얻는다. 금융자본은 헤게모니를 다시 찾아오려 한 것은 물론이다. 결국 1979년, ‘불의의 일격’ 또는 ‘볼커의 반혁명’ 이라 불리는 사상최대의 금리인상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금리 인상으로 찾아온 금융 자본의 이익 뒤에는 남미의 외채위기를 시작으로 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위기가 뒤따라 왔다.

1980년 글래스-스티걸 법에도 변화가 오고, 규제는 점점 완화된다. 투자은행들은 막대한 차입자금을 첨단 금융상품에 투자해 천문학적 수익을 거뒀고, 이들이 벌어들인 돈은 세계화폐로서의 달러의 지위를 지탱해주었다. 미국 내에서도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어서 간간이 규제 강화 목소리가 제기됐으나 이내 묻히고 말았다. 90년대 클린턴 대통령은 금융 규제를 더 풀었다. 유럽의 은행 겸업화 추세에 뒤쳐지고 있다는 비판에 99년 '그램 리치 브릴리'법을 만들어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일부 겸업하도록 허용했다. 금융자본은 점점 더 세계 곳곳에 깊숙이 침투해갔다. 



2. 파생금융상품

글래스-스티걸 법에 변화가 오기도 전에, 브레튼 우즈 체제가 붕괴하고 고정환율제에서 변동환율제로 국제화폐제도가 변하자 ‘파생금융상품’ 이라는 것이 등장했다. 파생금융상품은 말 그대로 외환·예금·채권·주식 등과 같은 기초자산으로부터 파생된 금융상품을 말한다. 변동환율제로 전환되면서 불안정성이 심화되자 환차손(환율의 변동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손해. 환율이 오르면 수입 회사가 손해를 보고, 환율이 내리면 수출 회사가 손해를 입는다.)을 피하기 위하여 1972년 미국에서 처음 도입되었다.

파생금융상품은 그 종류도 매우 많을뿐더러, 대표적인 상품인 선물(future)·옵션(option)·스왑(swap) 등이 있는데, 이들 파생상품을 대상으로 하는 선물 옵션, 스왑 선물, 스왑 옵션 등 2차 파생상품, 또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3차 파생상품 등, 말 그대로 계속 파생되는 것이 그 특징이다. 모든 파생금융상품을 다룰 수도 없으니, 최근의 위기를 파악하는데 필요한 파생금융상품에 대해 간단히 보도록 하자. 여기에서는 ‘신용파생상품(CDS와 CDO)’과 ‘옵션’ 대해서 보면서 위기를 추적해 보겠다.


- 신용 파생상품

신용 파생상품(credit derivatives)은 점점 더 복잡해진 금융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며, 미국발 위기의 뇌관이었다고 이야기 되고 있다. 신용 파생상품은 본질적으로 대출에 대한 보험처럼 특정 기업의 신용도에 배팅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기본형이 있는데, 바로 신용디폴트 스왑(CDS; Credit Default Swap)과 부채담보부 증권(CDO; 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이다.

먼저 CDO에 대해 보자. 표준적인 CDO는 은행 등 금융회사가 특별목적회사에 대출이나 채권 등 채권증서를 팔고, 특별목적회사는 그것을 쪼갠 뒤 각 조각들과 연계된 증권을 발행하는 방식을 취한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연쇄구조를 파악하려면 이 합성 CDO가 무엇인지에 대해 알면 된다. 메릴린치나 리먼 브라더스, 베어스턴스 등의 투자은행들과 시티그룹, BoA 등 거대 상업은행의 투자은행 자회사들은 주택융자 전문회사나 저축금융기관, 상업은행 등으로부터 주택융자를 사들여 그것을 새로운 증권인 MBS(주택담보증권)로 전환시켰다.

이를 부동산의 ’증권화’ (securitization, 채권과 부동산 등을 담보로 새로운 증권을 발행하는 것)라고 부른다. 투자은행들이 증권화과정에서 막대한 수수료 수입을 챙겼음은 물론이다. 앞서 말했지만 파생상품은 2,3차로 파생되는 것이 특징이다. 증권화 과정 또한 같은 길을 걷는다. 투자은행들은 1차 증권화 과정에서 발행된 MBS에 카드론, 자동차론, 기업대출, 대학생 학자금론 등을 담보로 발행된 다른 증권을 혼합하여 새로 합성 CDO를 만든다.

1970년대부터 현대 금융시장의 발전 속도를 따라잡기를 포기한 규제당국은 금융회사들이 어떤 증권을 사거나 팔 수 있는지에 대해 일일이 결정을 내리고 그런 결정을 규정화하는 대신 ‘신용등급에 의존하는 법규’를 만들었는데, 구체적인 결정을 내리는 일을 신용평가회사들에게 넘긴 것이다. 이렇게 권력을 넘겨받은 무디스, 스탠더드앤푸어스 등의 국제 신용평가회사는 CDO의 조각들을 고평가해 주었다.

그러나 CDO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쓰인 컴퓨터 모델은 그 바탕이 되는 부채보다 CDO의 조각들을 더 높게 평가하는 것을 복잡한 방식으로 정당화하는 것일 뿐이며, 이런 컴퓨터 모델들 대부분은 사실 CDO거래를 하는 은행들 스스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미국에서 어느 신용평가회사 직원이 이런 모델의 세부적인 내막을 알게 되면, CDO 거래를 하는 은행이 많은 돈을 주고 그를 스카우트 해갔다. 그래도 신용평가회사들은 자신들이 돈을 버는데 방해받지 않으니 이러한 부분에 대해 전혀 손을 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CDS에 대해서 보자. 가장 단순한 형태의 CDS는 대출과 보험을 결합시킨 것으로, 예를 들어 A은행이 B회사에 제공한 대출을 놓고 미국의 투자은행‘C’와 일본의 보험회사‘D'가 CDS 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 이러한 거래에서 보험회사 D는 B회사가 채무불이행(디폴트) 하지 않는 이상 돈을 벌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A은행에 대해 돈을 빌려준 것과 비슷한 위치에 설 수 있다. CDS는 결국 특정 기업이 채무를 불이행할 것인지 아닐 것인지에 대한 여부를 놓고 배팅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도 배팅에서 이긴 쪽이 돈을 지불하게 된다. 은행들은 이런 CDS를 통해 자신들이 기업들에게 빌려준 돈을 되돌려 받지 못할 위험, 즉 신용위험을 외부로 이전시킨다. 은행들은 어느 기업이 채무를 불이행할 경우 해당 대출금을 제3자로부터 지불받을 수 있다. 보험회사인 AIG가 긴급구제 조치를 받을 정도로 급격히 상황이 안 좋아진 것은 이 CDS라는 파생상품에 투자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CDO와 CDS는 밀접한 관계에 있는데, 이는 금융혁신으로 인해 등장한 합성 CDO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CDO와 다른 점은 금융회사가 특별목적회사에 파는 것이 대출이나 채권이 아니라 바로 앞서 설명한 CDS라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특별목적회사의 자산은 CDS가 된다. 이렇게 되자 합성 CDO의 근거가 되는 채권을 갖고 있는 기업은 합성 CDO라는 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특별목적회사의 투자자들은 물론 그 모기업 격인 금융회사도 합성 CDO의 근거가 되는 대출이나 채권을 만져볼 일이 없다.

2000년 이후 주택경기 호황으로 인해 시작된 주택담보대출 - 주택담보증권(MBS) - CDO로 이어지는 파생상품의 연쇄구조는 대출자들이 착실하게 빚을 갚는 구조라면 문제없지만 어느 한 고리에 문제가 발생하면 전체가 위험에 빠지게 된다. 고금리로의 전환과 주택경기의 악화로 대출자들이 빚을 갚을 수 없게 되면서 담보대출로 시작된 파생금융상품 전체가 연쇄적으로 부실해지는 결과를 낳은 것이 바로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다. 신용등급이 가장 낮은 (서브 프라임) 대출자들이 주택을 담보로 해서 돈을 빌리고, 부채의 증권화 → 주택담보부증권(= MBS) 발행 → MBS와 다른 채권을 섞은 CDO 발행. 이 연쇄구조가 주택가격 하락과 금리 인상으로 인해 채무 불이행 급증 → MBS 시장 붕괴 → CDO 시장 붕괴 → 국책 모기지 회사 위기 → 대형 금융기관 파산 → 헤지펀드 손실의 순서로 무너지게 된 것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예만을 들어 아주 쉽게 설명했다. 파생금융상품 시장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금융혁신으로 인해 몇 단계에 걸쳐 금융상품이 파생되었기 때문에 CDO에 투자한 투자자들은 이 증권이 처음에 무엇을 가지고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이러한 그물망은 또한 전 세계에 퍼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지금의 위기의 시발점이 된 MBS가 어디에 숨어있는지 찾아낼 수가 없고, 따라서 이 위기가 어디까지 영향을 미칠 것인지 정확히 예측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옵션

옵션이란 미래의 어느 시점에 어떤 물건을 사거나 팔 수 있는 권리를 가리킨다. 살 수 있는 권리를 콜 옵션, 팔 수 있는 권리를 풋 옵션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한 달 뒤에 일본으로 여행을 갈 계획을 갖고 있다고 해보자. 한 달 뒤의 엔화 가치가 지금보다 떨어진다면 같은 돈으로 더 많은 엔화를 환전해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평상시 꿈꾸어왔던 값비싼 스시를 먹으러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엔화의 가치가 상승한다면 그런 꿈을 접고,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먹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엔화의 가치가 상승할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 오늘부터 한 달 뒤에 미리 정해진 환율로 엔화를 살 수 있는 권리를 누군가로부터 사둘 수 있다. 예를 들어 오늘의 환율이 100엔당 1000원이라고 한다면, 한 달 뒤에도 이 환율로 환전할 수 있는 권리를 오늘 사두는 것이다. 다만 이런 환전의 권리를 사려면 그 대가로 ‘프리미엄’ 이라고 불리는 수수료를 외환 브로커에서 지급해야 한다. 여기까지 했다면 그것은 바로 ‘엔 콜 옵션’ 을 매입한 것이다.

엔 콜 옵션은 환율 변동에 따른 손실을 막아준다는 점에서 보험계약과 같다고 보면 된다. 만약 한 달 뒤에 100엔당 900원으로 엔화의 가치가 떨어진다면 굳이 엔 콜 옵션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 언제 콜 옵션을 행사할지는 매입자가 스스로 선택하면 된다. 사용하지 않을 경우 콜 옵션은 만기가 되어 사라진다. 반대로 100엔당 1100원으로 엔화가치가 상승했을 땐 콜 옵션을 사용하는 것이 유리하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콜 옵션에 붙는 수수료는 매우 높기 때문에, 앞서 예를 들었던 것처럼 외국 여행을 위해 콜 옵션을 사 두지는 않으며, 훨씬 큰 금액을 거래하는 대형 은행이나 기업들이 주로 활용한다. 통화옵션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통화의 변동성이다. 그리고 투기 자본은 이러한 변동성을 예측하여 베팅을 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 최근 심각한 한국의 원-달러 환율의 폭등을 예상하여 달러 콜 옵션을 사두었다면, 엄청난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것이다.

통화옵션에 대해 자세히 본 이유는, 최근 남한에서 ‘키코(KIKO)’ 라는 환헤지(환위험 회피용) 통화옵션상품에 중소기업들이 대거 가입했다가 흑자도산을 하는 등의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키코는 수출기업을 대상으로 환율이 미리 정한 상한선과 하한선 사이에 움직일 경우 약정 금액을 약정 환율로 팔 수 있는 권리를 주는 통화옵션상품이다. 예를 들어 A라는 수출회사가 키코 약정을 달러당 1000원~1050원에 했을 경우, 계약한 달러 가격 내에서 환율이 하락하면 기업에 이익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달러당 1050원에서 1000원으로 환율이 하락했을 경우에도, 여전히 달러당 1050원으로 교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다면, 10억 달러를 수출하여 이를 원으로 바꾸었을 때 500억원의 이익이 발생한다. 만약 달러당 1000원보다 환율이 하락한다면 계약해지가 된다. 문제는 1050원 이상으로 환율이 올라갈 경우인데, 이럴 때 기업은 계약한 금액 내에서 은행에 달러를 팔아야만 한다. 예를 들어 환율이 1100원으로 오르면, 10억 달러를 수출한 기업은 500억원의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기업들이 키코를 구입했을 때는 세계적인 달러 약세일 때라, 환율이 하락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발 금융위기로 외국인들이 주식을 매도하고 달러를 차입하기 어려워지면서 환율은 급등했다. LCD의 광원장치인 밸라이트유닛(BLU)을 제조하는 태산LCD라는 기업은 연 매출 6000억 원을 기록했던 중소기업이었으나, 회생신청서를 내게 되었다. 대다수 기업들은 은행이 투자위험성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고, 약관 자체가 불공정(계약환율 상한선 돌파시에는 2,3배를 물어야 한다.)했다고 이야기하며 구제를 요청했고, 정부의 선별 구제책이 논란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키코로 인한 기업의 손실액은 1조 7천억원에 달하며, 이익은 외국계은행이 60%정도를 가져갔다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파생금융상품은 실물경제까지 뒤흔들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3. 위기에 대처하는 저들의 자세

위기의 시발점이 된 미국은 7000억 달러라는 사상초유의 공적자금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시민들의 반발, 민주당과 공화당 의원 모두와 대선 주자들의 비판을 받았지만 결국 정부와 의회는 28일 구제금융안에 잠정합의했다. 이로써 미 행정부는 앞으로 2년간 7000억 달러로 금융회사를 사들이게 된다. 이는 지난해 미국 GDP의 5%를 차지하는 것이지만 (이미 올 들어 미 정부는 베어스턴스의 JP모건체이스 피인수 중재과정에서 290억 달러, 양대 국책 모기지업체인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의 국유화 과정에서 200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제공했고, 16일 AIG에도 85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실시했다.) 이 금액으로도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어쨌든 이미 AIG는 지분의 79.9%를 미국 정부가 인수하여 거의 국유화를 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졌고 투자은행 빅5 중 살아남은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는 은행지주회사로 전환하게 되었다. 은행지주회사가 되면 상업은행을 인수할 수 있게 되어 예금을 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고, 대신 이전보다 훨씬 엄격한 규제를 받게 된다.

미국뿐만이 아니다. 전 세계 금융시장이 촘촘히 엮여 있기 때문에 한 곳에서 부실이 터지면 다른 나라로 전파되게 마련인 현 세계 경제의 상황에서, 선진국들은 미국의 위기를 막기 위한 다양한 정책 공조에 나선다. 유럽은행 역시 달러공급을 늘리는 등의 조치를 계속 취하고 있다. 미국이 금융자본에 대한 규제를 강화할 수밖에 없게 되자 유럽 각국도 ‘이제 와서’ 글로벌 규제강화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너도 나도 이야기하는 ‘규제 강화’ 는 앞서 말했지만 금융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미국 내에서도 강조되어 왔던 것이며, 실은 지금 미국도 정부가 기업을 살리려고 개입하고 있지, 월가의 탐욕을 막기 위한 처벌과 금지 조항을 차근차근 마련하는 것은 뒷전이다. 또한 규제를 한다고 해서 하락하고 있는 이윤율이 반등할리 만무하고, 당연히 불황이 극복되고 호황이 올 리도 없다. 구제금융과 규제강화는 대안도 무엇도 아니다. 위기를 심화시키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제바람이 분다.’ 거나 ‘규제가 대안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설상가상, 우리는 이들을 비판하기에도 바쁜데 이러한 최소한의 조치가 왜 취해지고 있는지도 파악하지 못한 채 엉뚱한 소리를 계속 하고 있는 정부와 금융기관들이 있는 나라도 있다. 바로 한국이다.

한국의 지배계급은 ‘위기는 기회다!’ 라고 얘기하면서 자신들이 이전에 주장했던 내용을 번복하면서까지 금융화의 길을 계속 가야한다고 외치고 있다.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신청으로 금융위기가 확산된 지난 16일부터 나흘간만 이미 국내의 주식과 펀드 손실액이 20조가 훌쩍 넘었으며, 국민연금의 2조가 넘는 투자손실도 시민들을 불안하게 하고 있는데, 대통령은 펀드를 사겠다고 하고, 은행에는 ‘주가가 내리는 지금, 주식투자를 하셔야 합니다.’라는 식의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바로 엊그제만 해도 노동자들의 파업과 촛불집회 등 그 어떤 저항도 외국인 투자자들 유치가 안 된다며 막았던 정부는 위기로 인해 금융시장에서 외국인 투자자 비율이 줄어들고 있으므로 바람직하다고 하고, 금산분리 완화 방안 등 금융규제 완화책을 강행하겠다고 하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실컷 비웃어주고 넘어가고 싶지만, 이들의 이러한 결정이 또 많은 이들을 절망으로 빠져들게 할 것이다.

 
4. 1930년대가 시사하는 바

 

… ‘허리띠를 더 졸라매시오’ 라는 것이 무책임한 각국 정부 대변인들이 국민에게 하는 충고였다. 그러나 지구 전역의 실업자 수가 4천만 명에 이르게 되자. 그러한 통계 작업도 중단되어 버렸다. 그들은 지금의 사태가 단지 과잉생산의 결과일 뿐이라 말했지만, 그 어디에서도 민중들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못했다.

세계 전역이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 덩어리였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제대로 입지 못한 채 헐벗고 있었지만, 미국에서는 목화밭들을 뒤엎어버렸고, 수천만의 삶들이 굶주리고 있었지만, 캐나다에서는 수확한 밀을 태워버렸다. 길모퉁이에서마다 사람들이 커피 한잔을 마시기 위해 동전 한 닢을 구걸하고 있었지만, 브라질에서는 생산된 커피를 바다에다 무더기로 쓸어 넣었다. 몬트리올의 노동자 거주 지역에서는 어린이들이 구루병으로 앙가발이가 되고 있었지만, 남부에선 오렌지들을 짓밟아버렸다…

- 『닥터 노먼 베쑨』 중, 1930년대 초반 대공황의 상황에서

 

리먼 브라더스가 무너지자마자 많은 금융 전문가와 경제학자들은 1930년대를 돌아보았다. 19세기 말에서 대공황까지의 기간은 당시에 막 탄생한 현대금융이 헤게모니를 쥐었던 시기이다. 당시의 대공황과 지금을 비교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고, 이런 파국의 가능성은 농담일 수도 있다. 우리가 잠시 숨을 고르고 잠깐 1930년대를 돌아보고자 하는 이유는 당연히 어떤 이들처럼 자본주의의 수명을 연장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며, 자본주의를 비판해 온 사람들로서 자본주의의 몰락을 비웃기 위함도 아니다. 우리는 진지하게 위기를 사고해야 한다. 어쨌든 위기는 많은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공황은, 여전히 생산시스템에서 중요하지만 후진적인 부분에 잠재되어 있던 위협과 통제되지 않는 화폐금융 시스템이라는 두 요소의 영향이 누적된 결과였다. 1929년의 경기침체는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불황으로 발전했다. 모든 것은 1929년 중반 보통의 경기침체에서 시작되었다. 산업생산은 1929년 2월에 정점에 달했지만 9월에는 26퍼센트가 하락했다. 엄청나게 폭등했던 주식시장은 10월에 폭락했다. 중앙은행과 은행시스템이 주식 투자자를 구제하러 나섰고, 이전의 패닉에서 그랬던 것처럼 주가는 신속히 안정되었다. 주식시장의 위기가 경기침체나 불황을 촉발한 것은 아니었다. 1930년 초에는 경제활동이 더 이상 하락하지 않고 안정되는 듯했지만 회복되지는 않았다. 1932년 초 위기가 더 심각해졌고 1933년에는 기업이 파산하고 물가가 폭락하며 은행위기가 닥쳐왔다. 경제는 여전히 신용을 필요로 했지만 대출금 상환의 중지로 인해 은행 시스템은 신용창출의 역할을 거의 포기했다. 은행들은 대신 별로 수익이 높지 않지만 덜 위험했던 정부채권의 보유를 선호했다. 1933년 초반 이후 은행위기, 즉 은행들의 파산이 심각해졌다. 루스벨트는 후버에게서 정권을 넘겨받던 바로 그날 밤, 전국적인 차원에서 은행 시스템을 폐쇄한다고 발표했다. 이것이 뉴딜 정책의 시발점이다. 같은 해 글래스-스티걸 법이 제정되었다는 것은 앞서 이야기 했다.

대공황은 방지될 수 있었을까 아니면 필연적이었을까? 다른 정책들이 파국을 막을 수 있었을까? 이러한 질문은 또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먼저 언제가 적극적인 경제개입을 위해 최선의 시기였는지 질문할 수 있다. 위기가 처음 시작된 1932년이었을까? 과열된 경제가 임박한 불황을 예고하던 1929년이었을까? 중앙은행이 만들어지고 그 임무가 확정된 1913년이었을까? 화폐금융 메커니즘이 급성장하던 20세기 초반이었을까,. 아니면 미국경제의 이중성이 나타나기 시작하던 19세기 말이었을까?

또한 우리는 역사를 다시 쓰는 과정에서 제도들을 개혁하는 데까지 나가도 되는 것일까, 아니면 제도적인 틀은 놔두고 대안의 정책만을 생각해보는 정도에서 그쳐야 하는 것일까? 를 질문할 수 있다. 우리는 반드시 당시 미국의 통화시스템 안에서, 그리고 그것이 갖고 있던 문제점들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했던 것이 분명하며 이는 곧 제도에 대해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의 위기는 경제정책의 실수로 인한 것이 아니다. 위기는 이윤율의 하락 때문에 일어났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에 실수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대공황이 경제를 엄청난 위험과 전례 없는 상황에 이르도록 한 데는 몇 가지 요인들이 원인을 제공했다. 화폐금융을 통제할 제도가 늦게 발전한 것은 지배계급의 책임이다. 위기상황에서 지배계급의 경험 부재와 그들의 기득권에 대한 고수는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앞서 제기한 질문들을 현재에 다시 가져와보자. 위기는 분명 이윤율 하락을 이윤량의 증대로 상쇄하려는 금융화로 인해 일어났다. 그러나 우리는 위기가 가장 파괴적인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늦었는가? 아직 늦지 않았는가? 우리는 아주 작은 것만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제도와 체제 전반을 바꿀 수 있는가? 지배계급의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의 탐욕을 제어하지 못하고 우리 역시 편승했을 때 다가올 미래의 모습은 무엇인가?

 

5. 위기 해결의 원칙

 

당시의 관료들이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비난하는 것은 무척이나 순진한 일이다. 지배계급은 그런 식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식과 사건의 예상에 기초하여 행동하지 않으며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들의 이익과 상충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오직 폭력적인 위기만이 대전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 뒤메닐, 레비 《자본의 반격》중

 

30년대의 위기를 겪고도 지배계급은 80년대 남미의 외채위기를, 90년대 동아시아의 외환위기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그 때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이 어떤 괴로움을 겪었는지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시하면서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러한 위기가 어떤 땅에서 어떤 이들을 죽음으로까지 내몰았다 하더라도 지배계급의 이익에는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지배계급에게 폭력적인 위기는 피지배계급에게는 더욱 폭력적인 방식으로 드러난다. 지배계급이 지금처럼 위기 이후, 사후적으로 계속 위기를 처리한다면, 자본주의의 경향과 위기, 대혼란, 위기의 종언, 위기의 종언의 위기, 다시 대혼란…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반복을 끊어내기 위해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위기 해결의 원칙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다른 국가든, 다른 계급이든 간에 위기를 외부로 이전시키는 것을 방관해서는 안 된다. 중심부 국가들이 제3세계로 위기를 수출하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이미 지구의 많은 곳은 야만적인 상황에 처해있다. 이에 대해 중심부 국가들은 최소한의 책임을 져야 하며 이들이 스스로 일어서고자 했을 때 - 그들의 혁명을 막았던 수많은 조치들을 규탄해야 한다.

구조조정과 같은 우리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하려 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 안에서 여전히 공공적 권리들은 지켜져야 한다. 물, 전기, 가스, 주거권은 우리가 위기를 넘어 미래의 삶을 영유하기 위해 지금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유대와 연대의식을 가로막는 방식으로 위기를 해결해서는 안 된다. 여성들이 남성들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이주노동자들이 정주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 결코 아니다. 노동의 조건을 악화시키고 우리의 생존을 힘들게 하는 것은 자본이며, 이윤 극대화라는 자본주의의 정신이다.

인간사회의 발전의 새로운 대안적 경로를 규정하는 것은 분석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원칙을 사회화할 때만 가능하다. 앞서 제시한 몇 가지 원칙은 매우 초벌적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부터 이 원칙을 늘리고, 구체화해야 한다.

Posted by 행진

2008/09/30 15:45 2008/09/30 15:45
,
Response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 하나가 달렸습니다.
RSS :
http://stulink.jinbo.net/blog/rss/response/132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Comments List

  1. KM 2008/12/01 08:44 # M/D Reply Permalink

    글 잘 봤습니다. 근데, 한글파일로도- 항상 같이 따라올라오면 좋을 것 같네요.


[교육분석]막 나가는 교육, 이래도 괜찮나?"

- 08년 대학교육 재편의 천태만상(千態萬象) -




1. 자본의 입맛에 꼬옥 맞춘 대학교육의 천태만상

대학교육에 대한 자본의 입맛은 까탈스럽기 그지없다. "대학 졸업자들을 기업에 적응시키는 재교육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는 둥, "전인교육도 중요하지만 기업 생리에 맞는 교육이 절실하다"는 둥 참 말이 많다. 과거 군사정권의 정당성 확보라는 정치적 목적과 산업자본의 수요 충족이라는 경제적 목적, 그리고 대중들의 계층상승 욕구가 결합되어 양적인 팽창을 거듭해왔던 남한 대학은 대중교육으로 자리잡은 지 이미 10여 년이 지났다. 하지만 자본의 축적위기로 인해 이러한 ‘타협’이 더 이상 불가능해지자, 대학이 이러한 외부적 환경과 수요에 전혀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를 빌미로 대학을 재편하고 있다. ‘다양화/특성화’라는 명분으로 장사가 안 되는 대학과 학과를 대폭 없애고, 기업과의 긴밀한 연계를 통해 경제성장의 수단으로 탈바꿈시키려 하고 있다. 이 때문에 대학교육은 강산도 변한다는 그 시간 동안 변하고 또 변했다. 이러한 변화를 이끄는 데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정부였다. 양적인 구조조정과 편중된 재정지원을 통해 경쟁력 있는 소수만 살아남으라 하고, 지역균형발전을 강조하며 NURI사업을 통해 지방대학의 기업 예속화를 강요하면서 한편 교육개방을 통해 교육시장화를 촉진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교육재편은 현 국면에서 자본이 요구하는 노동력의 재생산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목적과 함께 교육모순의 격화로 인해 표출될 수밖에 없는 대중의 불만을 호도하기 위한 목적이 강하게 반영되는 데, 08년 대학의 캠퍼스에 펼쳐지는 풍경 또한 이러한 설명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까다로운 입맛의 기업들과 함께 만드는 맞춤교육

한창 '계약학과'가 인기란다. 성균관대는 올해부터 대학원과정에 '초고층·장대교량학과(Department of Mega Buildings and Bridges)'와 ‘임베디드소프트웨어학과(Department of Embedded Software)’를 신설하였다. 그리고 조만간 '보험금융석사과정'(MBA) 또한 개설할 예정이다. 서울대 역시 개교 이래 첫 계약학과인 ‘E-MBA(Executive MBA)’를 경영전문대학원 안에 신설하였다. 계약학과는 2003년 개정된 산업교육진흥법 및 산학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에 근거한 것으로서, 기업 혹은 정부기관의 계약을 통해 '실무형 고급 인재' 양성을 목표로 운영된다. 심지어 선발부터 교육과정 개발과 강사진 운영, 졸업생 채용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기업과 대학이 공동으로 기획, 운영하거나 기존 계약학과를 직원의 재교육 프로그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각 대학별로 세부적인 차이가 존재하나, 기업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인재를 교육시켜서 좋고, 대학은 그 반대급부로 각종 지원을 받을 수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따로 없다.

유행에 민감해져라! 학과 통폐합 리모델링

반면 기업의 입맛에 맞지 않는 메뉴들은 점차 메뉴판에서조차 치워지고 있는 추세이다. 연초에 성균관대는 지원자가 적은 사회복지학과를 폐지하려다 구성원의 반발로 취소하기도 했고, 성신여대가 삼성경제(!)연구소에 맡긴 연구용역을 통해 학사 개편을 추진하였다는 사실은 실로 낯 뜨거운 장면에 다름 아니었다. 동국대도 매년 학과별 평가를 통해 평가 결과가 낮은 학과에 대해선 정원을 줄이고, 우수한 학과엔 정원을 늘려주는 '입학정원관리 시스템'을 가동할 예정이다. 주요 평가항목은 입학경쟁률, 재학률, 취업률 등인데, 사실상 사회적 수요에 따른 구조 조정을 단행한다는 것이다. 예감했듯이, 대학본부로부터 정원감축을 통보받은 학과는 철학·사회학·물리학·수학·독어독문학·윤리문화학과·기계공학 등이었다.

이런 현상이 더욱 심각한 지방의 대구가톨릭대의 경우, 3~4년 전부터 실시중인 ‘폐과 예고제’를 통해 철학 등 기초학문 분야 10여개 학과를 이미 없앤 바 있는데, 지방대에서 시작된 폐과 방식의 대학 구조조정이 최근 국립대와 서울지역 사립대에 이르며 점차 확대되고 있는 상황이다. 교과부도 취업률, 장학금 지급률, 교원확보율, 학생 충원율 등을 기준으로 평가해 각 대학에 재정을 차등 배분하는 '우수인력양성사업', ‘우수인력양성대학 교육역량 강화사업’ 등 갖가지 대학정책을 펼치면서 지원금을 미끼로 하여 비인기학과 위주의 구조조정을 부추기고 있는 상황과 맞물려 각 학교들의 학과 구조조정의 움직임은 가속화될 전망이다.

상위서열의 대학이라고 해서 '돈 안 되는 학문'에 대한 구조조정의 흐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서울대 인문대학 또한 국사학과, 동양사학과, 서양사학과의 ‘3사(史)과 통합’을 예고한 바 있고, ‘인문학의 위기 극복’을 들먹이면서 학과 별로 세분화된 전공을 융합하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통합된 학문에 대해 다각적으로 접근해볼 수 있을 것’이라는 일부 기대와는 달리 ‘학부제 전환’ 해프닝의 또 다른 버전에 불과할 것이라는 우려 또한 존재한다. 재정지원과 연동된 정부의 강력한 구조조정의 시책으로 너도나도 학부제 체제로 전환하였다가, 지금에 와서는 원래의 취지에 맞는 제대로 된 내용을 교육하지도 못하고 인기/비인기학과로의 진입을 위한 경쟁만을 초래한 바 있다.

한편, ‘학문융합 추세에 맞춰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학습 기회를 제공’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도입되어 올해 대학 수시모집에서 상당히 높은 경쟁률을 기록하며 ‘명품 전공’으로 부상하고 있는 곳이 있는데 바로 ‘자유전공학부’이다. 각 대학에서도 자유전공학부 혹은 자유전공학부와 비슷한 성격의 학과 등 전형을 통해 우수 인재를 들여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장학금 등의 각종 특전을 주고 지원을 집중하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여기 지원하는 이들을 끌리게 하는 것은 고시 준비에도 유리하다는 점 때문이다. 실제 몇몇 대학들을 들여다보면 법학전문대학원이나 행정고시나 외무고시 등의 국가고시를 준비하는 데 최적의 조건들을 갖춰 놨다. 로스쿨 진학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한편 재학 중 국가고시 합격자에게 장학금 지원 혹은 고시 관련 특강 등의 프로그램을 제공할 계획이기도 하며, 편법 논란을 피하기 위해 학생들의 과목 선택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전략을 세우기도 한다. 특히 일부 대학에서 이미 시행 중인 자유전공학부가 ‘취업전공학부’로 전락한 선례 또한 있는 마당에 실제 운영은 프리로스쿨, 프리메디컬스쿨, 혹은 고시준비의 과정 그 이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2. ‘자율’이라는 포장지, 까보니 ‘기업화’!

교육내용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최근 들어 사립, 국공립 할 것 없이 '기업화'의 흐름이 도드라지고 있다. 교육기관이 본업이라 할 수 있는 '교육' 보다도 오히려 '돈 벌이'와 '경제적 효율성'에 집착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대학들이여, 마음껏 돈을 벌라!

최근 노골적으로 사학의 영리행위 허용하고 있는 추세인데, 학교기업에서 백화점, 부동산임대업, 골프장, 도박장 운영 등의 업종을 통해 영리사업을 할 수 있게 길을 터놓았을 뿐만 아니라, 대학의 적립금으로 주식투자까지 허용하여 ‘자율’을 내세워 대학의 기업화를 전면 지원하고 있다. 교과부는 작년 대학들의 적립금 투자 규제를 완화한 <사학기관 재무/회계 규칙>을 개정하였다. 개정안은 대학 적립금의 최대 50%까지 수익증권에 투자할 수 있도록 했다. 전체 사립대에 누적된 적립금은 6조 5122억 원(07년 현재)에 달하는데, 이 가운데 50%인 3조가 넘는 어마어마한 돈이 펀드 투자로 사용가능하는 길이 열린 것이다. 실제 연세대는 이화여대와 함께 이미 03년 ‘삼성 아카데미 YES’펀드를 설립하여 ‘공격적인 투자’로 자금운용을 하고 있다. 그 외 대학들의 적립금 자금운용 현황(06년)을 살펴보아도, [고려대](적립금 3784억원) △정기예금, 채권 등 50~60% △사모펀드 20~30% △금융파생상품 5%, [서강대](적립금 1634억원) △정기예금 10% △회사채, 채권형 펀드, 양도성예금증서(CD), 자산유동화증권(ABS), 발행어음 등 90%이며 심지어는 [서울대](적립금 약 2천억원) △채권 40% △주식 15%% △사모펀드 15%, △해외투자펀드 10% △머니마켓펀드(MMF) 10% △금융파생상품 10%의 상황이다.

며칠 전, 국내 최초의 대학기술지주회사 ‘HYU 홀딩스’가 한양대학교 내에 설립되었다. 한양대 산학협력단이 35억여 원을 출자해 설립한 ‘HYU 홀딩스’는 통화잡음제거 기술을 보유한 ㈜트란소노와 과학교육컨텐츠를 보유한 ㈜크레스코 등 2개 자회사를 통해 해당 업계의 기업체에 관련 기술을 판매하게 되며, 2012년까지 12개의 자회사를 설립, 매출 규모 조만간 자본금 100억 원대의 기술지주회사를 설립할 계획이다. 이런 대학기술지주회사는 개정된 <산업교육진흥 산학협력촉진에 관한 법률>에 근거하여, 대학이 직접 기업을 설립하여 대학연구 성과를 이용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도록 한 제도로 지분의 51% 이상을 대학이 소유해야 하고 나머지 49% 이하는 외부 투자자를 끌어들일 수도 있다. 올해 초부터 서울대, 포스텍, 연세대, 고려대 등 10여 곳의 대학들도 ‘학문의 상아탑을 넘어 수익창출기관으로 거듭나겠다’며 앞 다퉈 설립을 적극 추진 중에 있다.

이러한 것들이 ‘록금 외에 별다른 재원확보책이 없는 대학들의 자구책이라 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등록금이 싸지거나 할 것 같지는 않다. 최근 발표된 <대학자율화 2단계 1차 과제>의 ‘사립대학 교비회계 수입의 산학협력단회계 전출 일부 허용’은 대학등록금이 학교교육이 아닌 다른 곳에 사용될 수 있게 하는 방안이다. 국가나 지자체의 재정지원이 있을 경우, 매칭펀드(matching fund) 방식으로 교비회계에서 산학협력단회계로 전출이 가능하기 때문에 산학협력단을 통해 사업을 하다가 손실을 입을 경우 학생들이 낸 등록금으로 조성된 교비회계에서 충당할 수 있게 되어 학생들이 애꿎은 피해를 볼 수도 있다. 특히, 등록금 자율화로 등록금이 계속 오르고, 산학협력이 보다 강화되는 추세 속에 이런 경향은 더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학교법인이 재산을 처분할 때 처분재산이 10억 원 미만인, 경미한(!) 경우 기존의 사전신고가 아닌 사후보고만 하면 되고, 재산처분의 보고가액도 상향 조정하여 앞으로는 보다 많은 액수의 학교법인 재산 처분을 용이하게 해줄 것이다. 이제 여타 사업들처럼 대학도 돈을 벌기 위해 설립하고 운영하고 수지타산이 맞지 않으면 문 닫는 ‘영리법인’이 된 거나 마찬가지이다.

자율화의 최상위버전, 국립대 법인화!

교과부는 23일 국립대의 재정 운영 자율성과 효율성, 투명성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국립대학 재정ㆍ회계법(안)> 제정을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이 법안에 따르면 서울대 등 국립대의 발전기금은 현재 '공익법인의 설립ㆍ운영에 관한 법률'의 적용을 받아 수익사업을 할 수 없고, 사용할 때도 관할 지역 교육청의 관리 감독을 받도록 되어있는데, 이르면 2010년부터 외부에서 기부 받는 발전기금의 경우 앞으로 특수법인을 설치해 교육 목적 수행에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 채권투자나 부동산임대 등 수익사업 용도로 쓸 수 있게 된다. 또한 수익사업을 위해 교비회계와 산학협력단회계, 발전기금회계간 재원 간에 상호 전입/전출을 허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학에 투자한 외부자본에 대해서는 무상으로 건물 및 시설을 사용하여 수익사업을 할 수 있는 길까지 터놓고 있다.

재정회계법은 사실상 국립대 법인화의 사전단계, 과정이라 불린다. 교과부는 전국 54개 국공립 대학 가운데 이미 여건이 되는 대학은 먼저 법인화를 추진하고, 그렇지 않은 대학은 재정회계법으로 돌파한다는 전략 속에서 촛불국면 속에 폐기된 <국립대학법인의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을 올 하반기 법안을 국회에 다시 제출해 통과시킬 계획이다. 이 상황에서 서울대 이장무 총장은 지난 8월, “대학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9월 중 ‘법인화 추진 위원회’를 구성한 뒤 임기(2010년 7월) 안에 서울대의 법인화를 이뤄내겠다”고 밝혀 대학가에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지방대들은 “서울대 법인화 땐 지방 국·공립대 망한다”며, 애당초 독점적 지원과 지위를 가진 서울대가 독자적으로 법인화를 추진할 경우 기업 등의 대규모 기부 등 모든 돈과 힘이 서울대로 빨려 들어가게 되고, 이로 인해 지방의 다른 국·공립대는 존립 자체를 위협받게 된다는 진단 때문이다.

교과부 말대로 ‘정부의 행정 규제가 대폭 축소된다는 점에서 높은 수준의 대학자율화’인 국립대 법인화는 국립대를 국가로부터 독립된 법인으로 전환해 인사, 조직, 재정, 운영 등의 자율성을 확보하도록 하자는 게 핵심이다. 국립대에도 경쟁과 자율의 운영방식을 도입해 경쟁력을 높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국립대 법인은 학내/외 인사가 참여하는 이사회가 최종 의사결정을 내리고 총장은 최고경영자가 되어 대학 운영에 대한 전반적인 권한과 책임을 지게 된다. 최근 종종 튀어나오는 '총장직선제 폐지' 주장도 이러한 맥락에 있다. 강력한 구조조정과 하나의 독립적 기업으로서 학교를 경영해나갈 CEO로서의 총장은 대학법인의 이익을 위해서 강력한 추진력을 발휘하여 학내 구성원들의 휘둘림 없이(!) 대학을 이끌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3. 막 나가는 교육, 이러다 맛 가겠다!

이명박 정부가 내세우는 교육, 대학의 ‘자율화’, ‘다양화’는 이처럼 천태만상(千態萬象; 세상 사물이 한결같지 아니하고 각각 모습·모양이 다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어쩌면 정부의 정책은 성공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상을 제대로 들여다본다면, 이것을 결코 ‘자율적인 운영과 그 결과로서의 다양화’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다양한 모습들이 ‘획일적’으로 대학의 기업화로, 대학교육의 기업예속화로 드러나고 있으며, 이 흐름을 가속화시키는 것은 결코 대학 구성원의 자율적인 동인이 아닌 재정지원이라는 미끼 혹은 학교발전이데올로기의 강조를 통한 ‘강제적’인 구조조정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대학교육의 사사성(私事性)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민주주의의 기지’로서의 대학은 온데간데없고 대학의 운영자들이 독단적으로 판단하고 추진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고, ‘학문의 상아탑’도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허물고 대신에 산학협동이라는 이름으로 자본이 대학을 직접 지배, 통제하면서 ‘자본의 입맛에 맞는’ 지식생산만을 담당하고 있다. 반면,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고양하는 지식을 학습하는 모습은 대학가에서 나날이 모습을 감추고 있다. 이런 ‘우리의 입맛을 잃어버리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에 한 마디 내뱉을 수밖에 없다. “막 나가는 교육, 이러다 맛 가겠다!”

Posted by 행진

2008/09/30 15:38 2008/09/30 15:38
, , , ,
Response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RSS :
http://stulink.jinbo.net/blog/rss/response/131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기획연재]
한국 자본주의의 미성숙한 기원, 1950년대


1. 들어가며

최근 국방부에서 역사교과서의 일부 내용에 대한 수정을 요구함으로서 논란이 되고 있다. 특히 해방전후와 1950년대의 내용이 많은데, 주로 이승만 정권의 행적; 친일파에 대한 온건적 태도, 미국에 의한 원조경제체제의 성립, 독재정권의 수립 등에 대한 것들이었다. 이는 결국 한반도에서 분단체제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1950년대가 이후의 역사에 어떤 의미로 남느냐는 문제를 담고 있는 것으로, 실은 진보학계와 보수학계의 오래된 논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식민지 잔재의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원조에 의지하지 않고 자립적인 경제체제를 성립할 수 있었는가?’, ‘독재체제를 유지하지 않았다면 한국에서 더 나은 정당 제도를 만들 수 있었는가?’, ‘4. 19와 그 이후의 5.16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등등.

이런 논쟁은 그간 반공주의와 군사독재정권의 강력한 탄압 속에서, 한국사회의 성격이라는 문제와 관련한 투쟁의 장소가 되어왔다. 실로 ‘진보적인’ 역사관을 승인 받기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제 부문에서 투쟁해왔으며, 역사의 숨겨진 부분들을 밝히는 성과들을 거두기도 했다. 1980년대 남한에서 본격적으로 마르크스주의가 부활하기 전까지,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의 장소는 역사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마르크스주의적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역사관 논쟁은 계급투쟁에 미달하는 것이었고, 차라리 제대로 된 자유주의를 만들기 위한 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 논쟁에 담긴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고 해도 말이다.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의 도입과 함께 문민화가 진행되고, 진보적 역사관은 한국사회 안에서 일정한 시민권을 얻으면서 ‘보편적인’ 역사관으로 자리 잡는다. 물론 뿌리 깊은 반공주의 이데올로기가 다양하게 분화되는 - 전통적인 안보논리, 경제성장 이데올로기, 역사의 종말 등 - 양상을 보이지만, 신자유주의적 개혁분파를 비롯한 자유주의자들은 ‘진보적 역사관’을 어느 정도 수용하며 심지어 자신의 정통성으로 삼기도 한다.

우리는 이렇게 역사가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논쟁이 공개적으로 등장하는 이유에 대해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 또한 남한에서의 계급투쟁과 그 이념의 장소는 어느 곳에 위치할 것인지 예측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정국에서 좌파는 어떻게 논쟁에 개입할 수 있는가? 이명박 정권 아래에서 반동적인 공세가 증가하는 것에 비판하면서, ‘진보적’인 역사관에 힘을 실어줘야 하는가? 하지만 이른바 진보적 역사관이 지난 10년간의 인민주의자들의 정통성을 확립하는데 이용한 이래, 문제는 현재 논쟁의 구도를 뛰어넘어 과학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다. 즉 세 가지 층위의 문제를 다시 한 번 제기하면서, 계급투쟁 관점의 역사를 복원시킬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는 현재 논쟁이 되고 있는 이승만 정권시기, 특히 1953년에서 1961년까지의 역사를 다룰 것이다. 우리는 역사적 좌파의 관점에서 무엇을 중점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며, 현재의 정세에 개입할 수 있는 단초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현대사에서 1950년대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몇몇 키워드를 중심으로 구성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는 인구성장이 가속화되는 베이비 붐의 시대였고, 전 근대적 형태의 많은 정치 사건들이 터지는 시기였으며,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는 시기였으며, 미국이 한국의 제 1동맹으로 부상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는 모든 부문에서 혼란한 시기였으며, 반공 이데올로기가 제 1의 가치로 떠오른 시기였으며, 삼백산업의 시기였으며, 4.19가 일어나는 시기이기도 했다. 한국전쟁이라는 커다란 단절이 진행된 이후 1950년대는, 각종 사건들의 나열로 기억될 만큼 별 다른 특별하고 중심적인 쟁점이 없는 시기였다. 물론 1950년대에 대한 분석이 이런 사실을 한 번 확인하는 것으로 끝날 수는 없다. 어떤 측면들이 결합하여 우리가 기억하는 1950년대가 되었는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분석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그것은 취약했던 계급투쟁,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모두 자신의 독자적인 전망과 이념을 가지지 못한 데에서 유래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시대가 가지고 있는 미성숙함, 이후 한국 현대사의 불안정한 기원이라는 조건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2. 자본주의의 황금기와 한국

2차 세계전쟁 이후 자본주의 세계체계는 미국에 의한 새판짜기가 진행되는 시기이다. 브레튼우즈 체제의 확립과 전 세계적 고도금융에 대한 통제, 미국식 자유주의가 전 세계적 보편이상으로 성립되는 과정에서 미국 헤게모니가 성립되어 간다. 전쟁 직후부터 시작된 미국 헤게모니에 의한 새판짜기는 1950년대를 통해 확립되어 가고, 세계자본주의의 황금기를 주도한다. 거래비용의 내부화를 특징으로 하는 법인 자본주의와 대량생산-대량소비 체제의 세계화는 황금기를 주도하였고, 이를 가능하게 했던 가장 큰 원인은 한국전쟁과 냉전의 성립이었다. 양차 세계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미국은 세계의 많은 돈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내부적 팽창이라는 특징으로 인해 세계적인 포섭을 진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1949년의 중국혁명과 뒤이은 한국전쟁의 발발은, 세계적 통치성과 포섭이라는 문제를 주요한 쟁점으로 떠오르게 한다. 이에 모든 나라에 대해서 일종의 유효수요를 창출하기 위해서, 중심부에서의 마샬플랜과 주변부 국가들에서의 원조로 특징지어지는 전 세계적 뉴딜을 실시하게 된다. 이를 통해 미국이 보유하고 있던 달러를 방출하고,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으로 자리 잡는다.

전 세계적 뉴딜을 통해서 미국 헤게모니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 자본주의 체계의 특징이 만들어 진다. 그것은 3가지 정도의 특징으로 이야기될 수 있다. 우선 영국헤게모니-제국주의의 실패가 고도금융 때문이라는 판단 때문에, GATT의 틀 속에서 전 세계적 케인즈주의가 실시된다. 고도금융에 대한 통제는 민족국가의 경제적 자율성을 보호하는 조치로 연결되었고, 국가간 통제 아래 자유무역의 원리를 종속시켰다. 물질적 확장이라는 1950년대의 조건은 상대적인 자율성을 가진 국가의 정치체계-경제정책의 실현을 가능하게 했고, 이로부터 이 시기의 두 번째 특징이 도출될 수 있다. 그것은 제국주의 시대가 종료된 이후에 민족국가의 틀이 강화되고, 각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는 작업이 실시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민족주의의 확립과정 - 공동의 역사-언어-문화의 창출 - 임과 동시에, 민족의 형성에 있어서 자유주의가 변형-수용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이 시기의 민족국가 성립이라는 과정이 미국 헤게모니의 보편성 획득이라는 목적에 종속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법인자본주의 모델의 보편적-이상적 표상화라는 작업에 기여한다. 세 번째 특징은 사회복지국가의 모델이 등장하여 정부가 국민들의 일반적 이익에 대한, 보편적인 담지자로 설정되는 과정이다. 이는 케인즈주의적 유효수요의 창출이라는 모델에 바탕을 둔 것으로, 서유럽에서의 사회민주주의와 주변부 국가에서의 발전주의 모델로 분화된다. 이런 세 가지 특징은 미국식 자유주의의 주된 동력이 되었다.

 

우리는 미국 헤게모니의 특징을 살피는 가운데, 이 시기 한국이 세계체계에서 차지했던 위치에 대해 평가할 수 있다. 해방 직후 발전주의적 국가수립이라는 전략이 본격화되지 않은 가운데, 한국전쟁의 발발은 한국이 대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한 최전선으로서 전략적 위치를 제고시켜주게 되었다. 1950년대에는 한국에 대한 전략적 포섭을 진행해야 했지만, 이런 목표에 걸맞는 안정적인 정책; 수출지향 혹은 수입대체 공업화와 같은 명확한 발전전망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특히 자본주의의 세계적 분업체계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지가 애매한 상황에서, 발전주의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불하-원조 정책은 필수재-소비재를 중심으로 ‘생존’을 유지하는 수준에 머물게 된다. 국가 주도의 발전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못하는 것은, 동아시아 세계체계에 한국이 편입되지 못한 조건과도 관련이 된다. 냉전의 시작과 함께 미국은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체계의 성립, 그를 통한 지역 파트너의 형성이 동아시아에 대한 주된 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식민지 역사와 반일-반공을 기초로 하는 이승만 정권의 정통성 확립의 문제는, 한국이 자본주의 세계체계에서 자신의 포지션을 확정짓는 시간을 지연시킨다.

한국에서 발전주의적 전략이 본격화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를 추진하기 위한 국가의 통치성이 확립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은 자유주의/민족주의/반공주의라는 자본주의적 통치성에 걸맞는 이념을 수용했지만, 이를 통해 민중들을 포섭할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는 전쟁으로 인해 각종 산업기반이 파괴된 문제와 함께, 통치성을 유지하고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할 수 있는 국가장치가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통치를 유지하기 위한 지배계급의 블록이 가지는 애매성, 혹은 일국에서 자본주의적 시초축적을 위한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문제이기도 했다. 따라서 세계체계에서 한국의 위치에 걸맞게 자유주의를 수용하는 양태와 지배계급의 이념을 확립하는 것이, 미국과 국내파트너인 지배계급의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1950년대는 발전주의적 통치를 위한 조건을 만들어가는 한국 자본주의의 기원이 되는 시기이지만, 여러 가지 애매함으로 인해 불안정성과 모호성을 내재하게 된다.


3. ‘대한민국’의 성립과 ‘정치’의 불안정

위와 같은 조건으로 인하여 이 시기에 당면한 문제는, 결국 국가장치-국가권력의 성립을 통해 국내적 통치성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민족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는 작업이었고, 강력한 국가장치와 이데올로기를 통해 구성원을 민족으로서 통합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는 1) 발전주의를 추동할 강력한 정권의 확립문제 2) 국가장치, 특히 폭력적 국가장치의 성립 3) 자유주의-민족주의를 보충하는 이데올로기로서 반공주의의 성립이라는 3가지 차원으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대한민국’을 성립하는 과제를 떠맡은 이런 문제들은, 하지만 당시 ‘한국’이 가지고 있었던 불안정한 조건들로 인해 무능함과 허약함을 드러낸다.

우선 해방 직후의 혁명적인 정세가 사그라진 이후에, 정치는 이승만을 위시한 자유당 정권 / 한국 민주당을 비롯한 군소정당의 분별정립으로 축소된다. 원조경제체계를 벗어나 강력한 발전주의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강력한 독재정권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자유당은 1948년 반민 특위법의 재정/공포를 시작으로 각종 정치 파동을 일으켜 3선까지 성공한다. 이와 함께 이승만을 국부로 하는 가족국가화 전략 등이 실시되기도 하지만, 결코 그에 부합하는 헤게모니를 확립하지는 못한다. 이미 대한민국의 건국 이전에 경찰과 치안경비대, 그리고 관료제와 사법기구와 같은 조직들이 식민지 시기의 국가장치들을 이어받아 만들어진다. 그리고 당시 세출구성의 평균 40%이상이 국방비에 쓰일 정도로, 대 반공군사기지를 위한 군대라는 조직역시 강화된다. 이러한 장치들에는 식민지 시기부터 활동하던 친일파들이 대거 포함되었고, 반공주의와 같은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것이 주된 업무가 된다. 하지만 이런 국가장치의 정당성과 기능은 허약하였으며,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시작으로 정치깡패와 각종 원외단체가 동원되는 상황이다. 1950년대를 특징짓는 또 다른 축인 사회적 소요와 불안정은, 결국 국가장치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유래한다. 반공주의는 당시 전체 자유주의 진영에서 공유하고 있던 이데올로기로서, 특히 식민지에서 해방된 주변부 국가들에서는 일종의 민족 정체성으로 승격된다. 한국에서는 1949년 11월에 국가보안법이 통과됨으로서 본격적으로 그 기틀을 마련한 반공주의는, 한국전쟁과 거창민중학살(1951. 2)과 같은 집단적인 기억들을 통해 민중들에게 체화된다. 반공 이데올로기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보충하는 역할과 함께, 좌파를 비인간으로 취급하는 형상화 작업으로 ‘국민’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해방직후와 1950년대에 걸쳐서 반공주의는 강력하게 작동했지만, 아직 세련되지 않은 극단적인 폭력을 통해서만 유지될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들로 인해 이승만 정권이 집권하고 있던 1950년대에는, 정치적 불안정의 지표가 되는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한국의 國父를 표방했던 이승만은 정권을 잡은 이후에, 전국의 유지ㆍ반공인사와 친일파들을 중심으로 자유당을 결성한다. 이에 토지지주의 기반을 가지는 한국 민주당이 야당으로서 기능하지만, 둘의 이념적 차이와 계급기반은 동일한 것이었다. 하지만 통치성을 마련하기 위한 지배계급들의 연합전략들은, 계속해서 정치적인 분쟁을 가져온다. 우선 한국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져있던 1952년은 2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해였다.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접선거제 아래에서 지지기반이 약했던 이승만은 재선될 가능성이 적었지만, 이승만은 공화민정회ㆍ대한국민회ㆍ대한노동조합총연맹ㆍ농민조합총연맹ㆍ부인회ㆍ대한청년단 등의 어용단체를 만들어 자유당을 발족시켰다. 그 후 이들의 감시와 주도 아래에서 시/읍/면의회 위원선거를 하여 지방의회를 장악하고, 1952년 2월 대통령 직선제를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한다. 지방 의원을 동원하여 국회를 해산하라는 데모를 조직하고, 백골단/땃벌떼 등과 우파 깡패들을 동원해 야당 국회의원을 위협하고 부산에 계엄령을 내린다. 7월 4일 이승만은 경찰과 군으로 국회를 포위하고 직선제 개헌안을 기립표결로 통과시키고, 그 해 8월에 이승만은 2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54년에는 정치의 불안정을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사건인, 사사오입개헌이 발생한다. 그해 5월에 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이 압승하여 개헌안을 통과하는데 필요한 국회의원을 확보하자 이승만은 장기집권에 도전하였다. 1954년 9월 국회에서 3선 제한 조항을 철폐할 것을 핵심으로 하는 개헌안을 제출하였지만, 표결 결과 재적 203석 가운데 135표의 찬성에 그침으로써 개헌선인 136표에서 한 표가 모자라 부결되었다. 이틀 뒤에 열린 국회본회인 135.33에서 사사오입하면 135이므로 개헌안은 통과되었다고 선언하였고, 무리한 개헌으로 이승만 정권의 입지는 약화된다. 1956년 치러진 정/부통령 선거는 전국 곳곳에서 폭력이 끊이지 않고 대구에서는 개표가 중단되는 등 험악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이 선거에서 이승만이 당선되었지만 대통령 후보로 나선 조봉암은 투표자의 약 30%의 지지를 받으면서 이승만과 자유당을 긴장시켰다. 조봉암은 평화통일론을 주장하면서 사회적 민주주의를 내걸면서 반공이데올로기와 무력통일론에 대항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956년 진보당을 창당하였다. 하지만 이에 위기를 느낀 이승만은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국시에 어긋나며 조봉암이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그를 사형시켰다.

정치의 불안정이 지속되는 조건은 국내적 통치성을 확립하려는 지배계급의 기획이 관철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성립하고 세계체계에 편입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려고 했지만, 지배계급의 통치를 담당하는 국가장치-권력의 기능은 너무나 약했다. 하지만 이런 불안정성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는 한국 자본주의와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의 기원이 되는 시기로 평가할 수 있다. 지배계급의 정치를 위해서 국시로 승격되는 반공 이데올로기는, 이후 체제경쟁이라는 요소가 추가되면서 성장을 위한 조건을 변한다. 즉 반공 이데올로기는 ‘정치를 위한 것’에서 ‘경제를 위한 것’으로 전환되면서, 더불어 불안정 했던 통치성이 강화되는 조건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이 두 가지는 다르지 않다. 오히려 자본제 생산양식에 있어서 정치는 경제의 타자라는 말을 그대로 증명하는 것이, 반공 이데올로기의 성립과 그 전화라는 과정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4. 시초축적의 시기

1950년대에 부족하나마 국가장치의 기능이 시작되고,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각종 이데올로기들이 확립되어 대한민국이 성립된다. 국가의 경제정책은 이 시기부터 시작되고 ‘폭력과 강제’를 통한 자본주의의 시초축적이 시작된다. 물론 한국에서 자본주의의 본원적 축적이 진행된 시기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을 수 있다. 조선 시대부터 자본주의로의 길을 향해 나아갔다는 자본주의 맹아론‘이나 아직도 근대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일부 주장을 제외하더라도,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 경영을 위해 실시한 정책들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이냐는 논쟁이 남는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을 이야기하는 세력들이 뉴 라이트 계열의 이론가들이라고 할지라도, 시초축적의 시기에 대한 규정은 역사를 바라보는데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 논쟁은 다루지 않고 1950년대를 미국 헤게모니의 세계체계에 편입되는 시기로서, 자본주의를 담지하는 새로운 계층이 수립하고 자본주의적 착취관계가 확대되는 과정, 생산자계층이 생산수단으로부터 멀어지는 과정 등을 중점적으로 보게 될 것이다.

1950년 4월에 실시된 농지개혁은 시초축적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농지개혁은 비록 대지주와 유산자의 이해관계에 맞춰 유상몰수/유상분배의 방법으로 진행되었지만, 이는 통치 파트너로서 일시적으로 지주계급을 보호하였던 것에 불과하였다. 지주들은 농지개혁을 기정사실화하고 농지방매를 서두르면서, 1945년에서 50년 사이에 이미 50% 이상이 싼 가격에 방매되었다. 유상분배를 통해 분배받았던 지가증권은 전쟁으로 인해 헐값에 팔아넘기는 경우가 많았고, 이를 통해 자본가 계층으로 전환했던 사례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농지개혁을 통해서 정권은 민중들의 토지에 대한 열망을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었지만, 평년작의 30%을 5년간 내야했다. 또한 전쟁으로 농업생산이 떨어진 상황에서 정부가 실시한 임시토지수득세법으로 인해, 농민들은 연간 수확량 가운데 절반 가까이를 착취당했다. 전쟁 동안 연간 100%가 넘게 물가가 오르는 격심한 인플레이션은 전체 물가지수를 낮출 것을 요구받았고, 이러한 가운데 미국에 의한 잉여농산물의 원조와 저곡가 정책이 실시된다. 이에 더해 월 10%를 넘기도 했던 사적 대부 또한 지주-소작인을 모두 붕괴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소작농은 도시의 잉여인구 층으로 지주는 전문직 등으로 전화하였다. 이처럼 농지개혁과 한국전쟁이라는 계기는 농촌에 기반을 두고 있던 세력들이 몰락하고, 발전주의적 공업화를 이루기 위한 계층들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1945년부터 61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31억 달러에 달했던 미국의 원조는, 지주-소작인의 몰락을 대처하는 새로운 계급을 형성하는 계기가 된다. 미국의 경제원조물자는 대부분 삼백공업(면/설탕/밀가루)으로 특징지어지는 소비재 산업의 원료였고, 이를 팔아 획득한 대충자금과 일제가 남기고 간 귀속재산들의 불하는 초기 독점재벌의 성장을 가속화한다. 이에 더해 경제부흥책의 일환으로 제시되었던 총 세출 가운데 31.6%에 달했던 재정투융자와 저환율-저금리 등은 이를 뒷받침했다. 특히 1953년에 창설된 한국산업은행은 산업 부흥 국채를 발행하였고, 이를 통해 대충 자금의 민간 융자 총액 중에서 산업은행을 통한 융자가 전체 75%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최저 3%에서 최고 18.25%에 이르렀던 은행에 의한 금리는 당시 인플레이션 율 보다 낮은 것이었기 때문에, 독점재벌들이 이를 특혜적으로 제공받을 수 있었던 상황은 그 자체로 자본축적에 유리한 것이었다. 국가에 의한 시초축적으로 인해 50년대 15대 재벌들은 총자본 축적을 28배 증가시킬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자금을 자유당의 정치자금으로 헌납하는 등 커넥션을 만들어 간다.

물론 이 시기에 형성된 독점자본이 그 이후 발전주의를 담당하는 세력으로 영속적으로 기능하거나, 세계 자본주의 체계에서 일정한 의미 있는 위치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당시의 원조가 한국을 대반공기지로 만들기 위한 임시적 성격을 띠는 것과 함께, 기본적으로 당시의 국가장치가 온전하게 기능하지 못하는 ‘정치적 불안정’이라는 상황 때문이었다. 그리고 농촌을 기반으로 하던 계층들이 몰락하고, 광범위한 과잉인구 층을 형성하였지만 이들을 포섭하고 규율할 수 있는 노동력 관리 체계 등이 확립되어 있지도 못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미국의 원조가 대폭 축소된 57년의 상황은, 불안정성을 가중 시키며 한국경제를 불황에 빠져들게 했다. 국가의 초긴축정책이라는 상황으로 인해 대다수의 중소자본 역시 몰락하였고, 1960년에는 총 실업률이 34.2%에 이르는 상황이었다. 당시 노동자 평균임금은 2만 153환이었으나 세대 당 생계비는 4만 509환이 되지 않는 상황, 원조 감소로 각종 간접세의 비중이 크게 늘어난 상황은 대중들의 불만을 자극하였다.

이처럼 1950년대는 이후 자본주의를 담지하는 새로운 계층과 기반을 형성하였고, 국가에 의한 경제정책이 시작되어 발전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놓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요인들이 발전주의를 위한 체계적이고 확고한 전략으로 자리 잡은 것은 아니었고, 일종의 실험기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후 더욱 강력한 국가가 완성되어 가고, 반공 이데올로기의 보충물로서 경제성장 이데올로기가 체계화되는 과정에 이르러서야 발전주의의 본격적인 길이 열린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950년대는 말 그대로, 축적을 위한 시초의 시기로 이해하자.


5. 계급투쟁의 지형

1950년대 후반의 일시적인 경제불황과 취약했던 국가장치의 조건 및 정치적 불안정, 그리고 민중들에 대한 체계적인 포섭전략이 부재했던 상황은 4. 19 항쟁이라는 역동적인 상황을 낳는다. 1960년 2. 28 대구시위, 3. 15 부정선거와 마산 봉기, 그 후 김주열 열사의 죽음은 대거 민중들이 참여하는 4. 19 항쟁을 가져온다. 이 결과로 4월 26일 이승만 정권은 하야를 선언하고, 그 후 장면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그 후 혁명적 정치의 부활이라는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고, 장면 정권 아래에서 혼란한 정국이 이어지게 된다. 이런 정세로 인해 결과는 박정희와 군부정권에 의한 5. 16 군사쿠데타로 마무리 되고, 본격적으로 발전주의를 향한 길을 걷게 된다. 이는 1950년대의 계급투쟁 지형에서 유래한다.

이 시기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모두 취약했던 시기로, 미국에 의한 폭력적인 방식으로 국가가 성립되고 한국전쟁이 발발한 상황이 사후적으로 나타난 결과라고 분석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이 시기는 사실상 계급투쟁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로, 결국 역사가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이 없던 시기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배계급은 부족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조직적 기반을 보충하기 위해, 정치깡패 등의 폭력적 ‘비’국가 장치를 통해 반공 이데올로기를 무조건 유포시켰다. 그리고 한국 전쟁과 좌파에 대한 극단적인 색출작업은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의 토대를 잠식했고, 피지배계급의 정치를 위한 조직들은 모두 붕괴하였다. 따라서 사실상 그 기원이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 민주당과 같은 야당세력이 대안세력으로 인식되고, 몇몇 정쟁들에서 드러났던 쟁점이 계급투쟁의 역사를 대처한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선전을 했던 조봉암의 진보당은, 유럽식 모델과 제 3세계적 발전주의 모델을 혼합한 변형된 ‘사회민주주의’를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역시 혁명적 정치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고, 이마저도 극단적 반공주의 아래에서 1959년 조봉암의 사형사건으로 마무리된다. 이후 몇몇 ‘혁신정당’ 들이 자유당-민주당의 북진통일이데올로기에 대항해, 평화통일론을 중심으로 등장하지만 5. 16으로 인해 모두 몰락하고 만다.

결국 사회운동을 위한 이념적 토대와 사회적/조직적 기반들이 모두 부재했다. 또한 시초축적이 진행되고 발전주의적 길 또한 미약했던 이 시기는, 경제적 착취 관계 아래에서 '구조적 힘‘에 기반한 초기 단계의 계급투쟁 역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결국 정치-경제-운동의 불완전성이라는 조건들이 이 당시의 역사를 과소결정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해방전후의 시기에 폭발적인 계급투쟁을 이끌었던 세력들, 빨치산 잔당/학살자 유가족/전향한 노동당원 등이 이 시기에 어떤 식으로 존재했는지는 쟁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 직후의 시기인 1960년대에 통일혁명당/인민혁명당 등 지하조직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혁명세력이 등장하고, 낮은 수준이나마 마르크스주의가 유통되었던 상황은 무엇에 기반 했는지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1950년대는 이런 활동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고, 공개적인 수준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들은 평화통일론을 중심으로 하는 논의들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직 모든 것이 미성숙했던 시기로서 1950년대는, 세계 자본주의 체계에서 한국의 위치도 지배계급의 헤게모니적 통치성도 계급투쟁의 이념도 불안정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또한 이 시기는 불완전하나마 한국 자본주의의 기원이 되는 시기로서,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발전주의의 초석을 닦아 놓는 시기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반공주의 이데올로기가 정치적으로 표출되면서 그 타자로서 경제성장 이데올로기가 내포될 가능성, 그리고 주요 지배계급의 분파로서 지주계층이 몰락하고 자본가 계층이 떠오르는 것, 국가장치가 성립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는 경제정책들이 실시되는 것이 그 가능성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가능성들은 미성숙하게나마 한국 자본주의-자유주의의 기원으로 1950년대를 자리 잡게 한다.

Posted by 행진

2008/09/30 15:30 2008/09/30 15:30
, ,
Response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RSS :
http://stulink.jinbo.net/blog/rss/response/130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투쟁보고] 성신 청소용역노동자들의 투쟁, 승리의 14일에 함께했습니다.


성신여대 사회대학생회장 정아

우리 생애 가장 따뜻한 추석
“명절 치를 일이 깝깝해도 이번 추석은 기펴는거야. 학생도 좋지?” 60년 살도록 이렇게 기쁜 날은 처음이라며거듭 말하시던 날. 본때를 보여줬으니 이제부터 시작이라던 한 조합원 동지는 까치발까지 딛으며 주먹을 하늘로 치켜드셨다. 고된 노동이야 몸에 익은 그녀들이었지만 매일같이 대리석 찬바닥에 몸을 누이며 버텨온 14일의 투쟁은 또 다른 고통과 불안이었다. 하지만 ‘신문에 날 정도로 기가 막힌 일’을 겪고 있는데 어떻게 포기하나며 오고가는 수정이들(성신학생들의 애칭)을 한명 한명을 불러세워 설득하고 알리길 14일. 너른 학교 곳곳이 더 이상 대자보를 붙일데가 없을 정도로 우리들의 투쟁이 빼곡히 가득찬 날에 그토록 고대했던 승리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깨진 플라스틱 그릇이나 쓰다 버리는 거지. 비정규직이라고 우리를 벼룩시장에 판거야 ”

개강을 맞은 대청소를 한다고 바닥을 유리같이 닦아놓은 다음날, 성신여대 청소용역노동자들은 벼룩시장의 신규 채용 광고를 보고서야 자신들의 해고사실을 알았다. 짧게는 2년간 길게는 20년간 성신에서 일해온 노동자들을 해고한 것에 대해 학교측이 밝힌 이유는 ‘노동조합을 만드는 배신행위’를 했다는 것이었다. 성신 재단은 성신여고에서 12년간 일하던 비정규직을 내쫓아 해고판정 받고서도 새로 결성된 노조와 그들과 함께하는 ‘문제 학생들’을 학교 발전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꼽아오다가 기상천외한 해고로 노조파괴를 시도했다.

맡은 구역의 청소를 다했어도 쉬는 것 보다 낫다며 매일 멀쩡한 잔디밭 풀을 뜯게 하는 혹사를 당할때도, 수시로 삼청교육대에 보내버린다는 소리를 들을때도, 행여 눈밖에 날까 지나가는 교직원 뒷통수에다 대고 인사할때도 그저 참고 참기를 몇해, 그래도 출근할 수 있는 반평짜리 대기실이 있다는게 고마웠다는 그녀들은 부당한 해고에 더는 분노를 삭힐 수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투쟁, 노조를 결성한 이후 학교의 부당한 조처가 있을 때 투쟁조끼를 입어보긴 했지만 막상 본부건물을 점거하고 들어가니, 온갖 회유와 건장한 학교 직원들이 휘두르는 욕설과 폭력 등 겪게되는 어려움이 수다했다. 파업 일차가 더해지면서, 투쟁가를 틀면 가사적힌 수첩을 한참을 뒤적거리고 나서야 뒤늦게 따라부르던 노래들을 꽤 익숙하게 따라부를 수 있게 된 이들도 있고, 또 목이 쉬어서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나마 열심히 구호를 외치는 이들도 있었다. 조합원들은 ‘미화원 일생’을 부를때는 모두가 하나같이 ‘꼭 내 이야기 같은’ 가사에 목이 꽉 매인다고 했다. 요즘 대학생인 나에게, 원곡이라는 ‘여자의 일생’은 도통 들어본적 없는 옛 노래이지만 조합원 동지들과 손을 꼭 잡고 이 노래를 연습할 때마다 가수가 아무리 빼어나게 부른다 한들 이보다 더 절절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몇 번씩 들었다.


참을 수가 없도록 노동자의 분노를
성신여대 말을 해라 대답 좀 해 봐라
노동자의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미화원 노동자를 생각하세요
아 총장님 말좀 하세요 눈물로 호소합니다

미화원 일생 - 미화원 일생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학교 가득 하늘색 풍선, 청소 아주머니들이 만난 ‘수정이’들의 지지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용역업체 현장소장의 횡포도 심했다. 꼭두 새벽부터 학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시간까지 노동하면서도 63만원을 받고 일하던 성신의 청소용역노동자들은 나랏법 어드매에 보장도 되어있다던 최저임금이라도 제대로 받아보자고 노조를 만들었다. 우리 학생들은 노조 조직시기부터 함께하면서 대기실에서 또 청소중인 계단에서 청소용역노동자를 만났다. 그렇게 가입원서가 쌓일 때 아직은 불안하던 우리의 확신을 분명히 해주었던 것은 수정이들의 노조건설지지 서명이었다.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활동에 더해서, 같은 성신의 구성원으로서 청소용역노동자들이 합당한 권리를 행사하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는 우리의 운동에 대해 학생들의 공감을 얻어가고 또 이를 확장해가는 과정을 통해 성신청소용역노동자들의 노동이 비로소 합당하게 인정받기 시작했다. 성신여대 청소용역노동자들과 우리 학생들은 비오는 날이면 이명박 욕을 실컷 하면서 같이 부침개도 부쳐먹기도 하고, 3.8 여성의 날 문화제에도 함께가면서 학생과 노동자가 함께 연대한다는 것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던 차에 전면적인 투쟁이냐, 노조활동의 포기냐는 기로를 맞았고 성신의 청소용역노동자들은 망설임없이 투쟁을 선택했다.

개강 날, 노조와 연대단위가 붙이는 자보만큼 학교도 전 교직원을 동원해서 선전전을 했다. 등교하는 학생들은 학교본부가 붙인 대자보와 청소용역노동자가 붙인 대자보사이를 번갈아보며 갸웃거렸다. 하지만 올해들어 학생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장사 안되는’ 학과를 통폐합하면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할때도 그랬듯이 ‘경쟁력 확보’니 ‘학교 발전‘니 하는 말을 명분으로 삼지만 그저 듣기에나 좋은 말뿐이라는 것을 이내 알 수 있었다. 많은 여성노동자들이 자녀들의 등록금을 감당하기 위해 불안정한 일자리나마 선택할 수 밖에 없지만 교육비는 어마어마하고 여성들이 받는 임금은 그를 감당할 수 없이 형편없이 낮다는 것에도 많은 수정이들이 공감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며가며 청소용역노동자들의 투쟁을 본 학생들이 지정된 핸드폰 번호로 보낸 응원의 문자가 곳곳에 게시되고 건물전면을 덮는 대형 플랑카드에 청소용역노동자들의 투쟁의 정당함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가득히 모아졌을 때, 투쟁하는 청소용역노동자들은 직접 학생들에게 띄우는 편지를 써서 부착하는 것으로 답했다. ‘부끄럽다 나 못한다’ 하다가도 용기 내어 들어간 강의실에서 지지를 요청하는 발언을 하고 가면, 학생들은 건물 로비에 승리를 바라는 메시지를 담은 포스트 잇을 붙여놓는 것으로 답했다.

투쟁 14일차, 청소용역노동자의 유니폼과 같은 하늘색 풍선을 학교 곳곳에 수백개를 매달았던 날, 시선을 옮기는데 마다 마주칠 수 밖에 없는 투쟁지지 풍선을 외면할 수 없던 학교는 끝내 손을 들었다. 승리의 주역인 성신분회 조합원들은 ‘의리 빼면 시체’답게 제일먼저 연대해온 동지들과 수정이들에게 감사의 인사와 함께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며 향후 투쟁을 약속했다. “그동안 겪은 설움을 생각하면 점거14일은 양에도 안차지만 어서 돌아가서 학교를 깨끗이 청소해야 한다는 내 프로의식이 있으니 학교는 다행인줄 알라” 는 말로 ‘연약한 여성’이라는 말도, ‘청소가 누구나 쉽게하는 무가치한 일’이라는 말도 가당치 않음을 쩌렁쩌렁 선포하는 조합원들이었다.



 
여성리더십을 키운다는 대학 그리고 청소 용역 여성노동자들의 현실

3일이면 나가떨어질 줄 알았던 ‘아줌마’들이 임금의 절반씩을 중간 착취 당해온 지긋지긋한 하청 용역 인생을 끝내자고 말했을 때 ‘당연’하게 여겨지던 많은 것이 고발되기 시작했다. 하청 용역구조를 단박에 엎진 못했지만 몇 해전부터 적극적으로 움직임이 일고 있는 대학내 청소용역 노동자의 투쟁을 진척시켜 나가는데 성신여대의 사례는 원청 사용자인 학교로부터 합의문을 받아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여전히 비정규직인 조합원들에게는 매해 계약해지 시점이 돌아오겠지만 회사가 교체되더라도 노동조건을 훼손하면 계약을 해지한다는 약속과 더불어 고용안정에 대한 책임을 학교가 인정할 수 밖에 없음을 합의문을 통해 시인한 것이다. 몇 년 씩 학교에서만 일했는데 얼굴도 본적 없는 용역회사한테 가서 따지라는 말이 억울했던 조합원들로서는 바라마지 않던, 그리고 너무나 합당한 약속을 받아낸 것이다.

학교비정규직 노동자의 90% 이상이 여성이며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의 절반은 평균 임금이 85만원 수준이라고 한다. 그마저도 청소용역 노동자들은 사무직에 근무하는 학교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을 훨씬 밑도는 임금을 받고 있다. 반평 좁은 대기실에서 옷 갈아입을 때조차 관리자들이 벌컥벌컥 문을 열고, 남자 화장실도 청소하는데 창피한줄이나 알겠냐며 여성으로 취급하지도 않다가도, 툭하면 ‘집에 가서 애나보라’는 모욕적인 언사를 들었던 여성노동자들. 소장 눈에 나서 행여 내쫓길까 ‘애보는 건 쉬운건지 아냐’며 항변 한마디 못하고 매해 재계약 시기마다 떨어야했던 불안정한 일자리속의 여성 노동자들. 여성의 일이라고 여겨지는 재생산 노동에 대한 부당한 평가에 터무니없는 저임금을 강요 받아야 했던 여성 노동자들. 성신여대는 재학생들에게 여성 리더를 키운다며 각종 자기계발 프로그램들을 제시하며 성공한 여성에 대한 환상을 부추겼지만 학교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명백한 현실, 이땅의 대부분의 여성들이 처한 불안정노동과 빈곤을 감출 수는 없었다.


“ 앞으로도 함께하자 ”

투쟁을 하면서 사흘만에 6000천이 넘는 지지 서명을 받았지만 그저 감동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광범위하게 형성된 학내의 지지여론을 이어가는 동시에 직접 수정이들이 할 수 있는 실천들은 기획하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생존권이 위협받는 나이 많은 여성노동자에 대해 보편적으로 느끼는 안타까운 정서를 넘어 사회가 제시하는 여성발전에 대한 환상에 ‘균열’을 내기 위해서는 연대의 의사를 표현하면 혹시나 불이익이 당하진 않을까 고민하는, 그리고 비정규직이 안되기 위해 더욱 도서관으로 향하려는 인식들과 대결하는 다양한 실천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성신 투쟁은 학생운동 기층의 기반조차 사라지고 있는 지금, ‘대학생들을 다시 봤다’는 다소 성급한 낙관을 뒤로하고 ‘운동의 기반’을 다시 만들기 위한 작업들과, 학생운동과 노동자운동이 활성화될 수 있는 대중정책의 기획과 실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이번 성신의 투쟁은 청소용역에 종사하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조직하는 활동과 학생운동 활동가들이 대학에서 불안정노동을 제기하는 운동이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를 지속적으로 고민해야한다는 과제를 남겼다. 성신여대에서는 올해에 들어서만 학생들이 이미 2차례의 본부 점거 투쟁을 벌였던터라 조합원들이 ‘우리가 도중에 멈춘다면 연대하던 학생들이 위험해질 수 있다‘ 며 투쟁의 결의를 다지곤 했는데 이를 함께하는 학생들은 언제나 가슴뭉클했다. 승리를 자축하면서 “앞으로도 함께하자”고 했던 약속을 이제 어떤 내용으로 풀어갈까를 고민하는 것이 모두의 몫일 것이다. ‘밀착’만을 지상 과제로 하는 노학연대의 관계가 아니라 노-학 서로의 운동을 재구조화할 수 있는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학생운동과 노조의 자활력을 배가할 수 있는 교육사업, 당장 자신의 사업장에 투쟁사안이 없어도 불안정노동과 빈곤에 맞서 투쟁하는 이들의 문제를 노조의 문제로 받아 안을 수 있는 일상적인 연대가 필요할 것이다. 학생운동의 역량이 기여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헌신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가뭄에 단비 같은 귀한 승리를 마주하고서 많은 활동가들이 ‘성신여대의 모델‘을 확산하자고 말하고 있지만 위에 대한 실천이 담보되고서야 정말로 대학 청소노동자 투쟁의 활로를 열 수 있을 것이다. 성신여대도 아직 많은 과제들을 갖고 있다. 투쟁승리 이후, 모처럼 풍성한 가을을 즐기러 간 북한산 소풍에서 질렀던 ‘막걸리잔 치켜들며 지르는 환호성’을 오래도록 지켜내기 위해서는 정말 지금부터가 승부이지 않을까. 처음에 노조를 만들고 최저임금에서 사천원 더 받는 79만원이 그토록 벅찼다던, 하지만 멈추지 않고 다른 투쟁을 만들어내고 또 끝끝내 승리를 거머쥔 그녀들이 오늘 다시 결의하듯이 이제 시작임을 잊지 않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osted by 행진

2008/09/30 15:17 2008/09/30 15:17
, , ,
Response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RSS :
http://stulink.jinbo.net/blog/rss/response/129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성명] 무건리 군사훈련장 확장 계획
즉각 철회하라!



지난 9월 16일, 국방부와 군은 오현리 주민들의 동의도 없이 주민들의 재산에 대한 감정평가를 강제적으로 실시하였다. 이 감정평가는 무건리 사격 훈련장 확장 예정지에 대한 토지보상을 위한 것으로서, 그 부지에 포함된 주민들의 땅을 강제로 수용하기 위한 첫 번째 수순이다. 경찰은 이러한 일방적인 감정평가에 항의하는 주민들 7명을 폭력적으로 연행하고, 파주경찰서 앞에 모여 연행자의 석방을 평화적으로 요구하던 주민과 사회단체 회원들 28명마저 불법 연행하였다. 그리고 18일에는 주민 3명과 화물연대 조합원 1명, 김종일 무건리 공대위 집행위원장과 이재희 무건리 공대위 상황실장에 대해 구속영장까지 청구하였다.

주민들의 요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훈련장 확장을 강행하는 모습이나 이에 대한 저항을 폭력으로 탄압하는 모습은 여러모로 평택의 대추리, 도두리의 그것과 닮아있다. 실제로 무건리 사격장은 평택 전쟁기지 확장 사업과 더불어 지난 1996년 확장 사업 계획이 발표되었고, 평택 대추리-도두리 주민들이 강제로 마을에서 이주당한 2007년 4월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이는 평택 전쟁기지 건설이 그러했듯, 무건리 군사훈련장 확장 또한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기조 아래 동북아 군사 질서를 재편하려는 기획 선상에 놓여있음을 의미한다.

노무현 정권이 평택을 미군기지로 내놓으며 미국의 새로운 군사전략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하위 파트너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였듯, 이명박 정권 또한 무건리 훈련장 확장을 통해 그 질서를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최근 미국발 금융위기가 세계경제를 큰 혼돈에 빠뜨리고 있는 속에서도 금산분리 완화, 자본시장통합법 국회 처리를 강행하는 등, 신자유주의 금융-군사 세계화에 더욱 적극적으로 편입하려 하고 있다. 이는 풀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격으로, 필연적으로 빈곤과 전쟁을 야기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민중의 생존과 평화에 직결되는 문제이다.

신자유주의 군사 세계화에 반대하며 동북아 민중의 평화를 요구했던, 평택 대추리의 뜨거운 함성과 처절했던 투쟁의 외침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명박 정권은 오현리 주민들이 요구하는 생존권과 평화의 권리가 확산되는 것을 폭력적인 탄압으로 가로막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이러한 행보가 다시금 주민들과 전민중의 분노를 불러일으켜, 그 분노가 빈곤과 전쟁에 반대하는 들불로 번져나가게 될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명박 정권은 동북아 민중의 생존과 평화의 권리를 무너뜨리는
무건리 군사훈련장 확장 계획을 즉각 철회하라!
빈곤과 전쟁을 세계화하는 신자유주의 금융·군사세계화 반대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osted by 행진

2008/09/30 15:01 2008/09/30 15:01
, ,
Response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RSS :
http://stulink.jinbo.net/blog/rss/response/128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발간사] 지배계급의 공세에 맞서,
2학기 뜨거운 대중운동의 바다로 달려갑시다!



2학기의 시작. 하지만 개강의 활기가 캠퍼스에 넘쳐야 하는 시기임에도, 요즘은 너무 뒤숭숭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우선 촛불집회의 열기가 17일간의 올림픽으로 사그라진 후에, 지배계급의 공세는 더더욱 강해지고 있습니다. 기습체포당한 사노련 동지들, 고용허가제 4년을 맞아 강제출국되는 이주노동자들, 성신여대 시설관리노동자들에 대한 일방적인 해고, 아쉽게 끝난 뉴코아 노동자들의 투쟁, 기륭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 이런 가운데 등록금을 내지 못해 자살한 한 학우의 이야기는, 미친 신자유주의 시대의 씁쓸한 이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기업 민영화 정책, 감세정책, 서울학군조정 등 이명박 대통령은 ‘경쟁력’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각종 정책을 실시합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 환율상승/주가하락이 계속 이어지면서, 9월 대란설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경제위기가 증폭되어 갈수록 이명박 정권은 발악하듯이, 민중들을 죽이는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각종 사건들이 잇따라 터지며 혼란한 지금, 우리는 더욱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지배계급들의 공세에 논리적/실천적으로 대응하면서, 우리의 이야기를 펼쳐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조금 더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맞서 싸워야 할 것 같습니다. 정세에 대응할 수 있는 계획을 짜고, 집행을 하고, 평가를 하며 우리와 함께하는 대중들을 만들고 역량을 쌓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항상 전국학생행진 - 캠퍼스 행진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가장 실천적이고 똑똑한 행진활동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배계급의 공세에 맞서, 2학기 뜨거운 대중운동의 바다에 함께합시다! 가장 실력 있는 ‘행진’을 만들어 갑시다.

※ ‘17호 뉴스레터’ 이렇게 활용합시다!

[성명]은 노동자 운동이 나아가야 할 바를 검토하며, 기륭투쟁에 우리가 연대해야 하는 이유를 담은 글입니다. 쟁점들을 살펴보며 계속 투쟁에 연대하도록 합시다. [정세동향1]에서는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민영화/사유화 정책에 대한 쟁점입니다. 지난 대안세계화 학생포럼 때 보았던 내용을 상기하면서, 최근의 동향과 쟁점들을 잘 알고 투쟁에 예비하도록 합시다. [정세동향2]에서는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의 현황과 과제들을 실었습니다. 대안세계화 운동의 이념으로서 국제주의는,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함으로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교육분석]에서는 ‘9월 대란설’의 실체에 대해서 분석한 글입니다. 환율-주식 등 곳곳에서 감지되는 경제위기의 상황에 대해, 그것이 어디서 유래하고 어떤 쟁점들을 가지고 있는지 명확히 알도록 합시다. [기획연재]는 2학기에 연재될 1950 ~ 70년대 한국현대사 내용의 개괄입니다. 특히 지배계급들이 펼치는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의 근원을 찾고, 이에 대한 역사적인 비판을 수행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행진 회원모임과 각 단위에서 일상적인 교육과 토론이 가능하도록, 뉴스레터를 활용하면 좋겠습니다. 내용을 피드백하면서 각종 선전을 한다면, 많은 학우들이 우리의 내용을 알게 될 것 같습니다. 2학기 동안 더욱 긴장감 있고 빠르게 뉴스레터를 발간할 것을 약속드리며, 동지들의 힘찬 투쟁을 기대합니다.

Posted by 행진

2008/09/10 12:08 2008/09/10 12:08
,
Response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RSS :
http://stulink.jinbo.net/blog/rss/response/127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성명]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합시다!
- 기륭투쟁에 부쳐 -




지난 2005년 8월, 구로 지역 공단에 만연한 최저임금과 불법파견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면서, 이에 앞장서고 있는 기륭전자에 대한 노동자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투쟁을 시작한 기륭 여성노동자들의 기나긴 싸움이 어느 덧 1100일을 훌쩍 넘어가려 하고 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심화될수록 비정규직으로 대표되곤 하는 불안정노동의 경향은 일반화될 뿐만 아니라, 다면화ㆍ구체화된다. 이것은 익히 알고 있듯이, 자본의 이윤율이 경향적으로 저하되는 상황을 상쇄하기 위한 전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인데, 그만큼 저들에게는 노동의 불안정화를 보다 ‘구체적인 정세와 구체적인 세력관계에 적합하게 끊임없이 재조직’하는 것이 사활적이라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렇다면 현재의 구체적인 정세는 어떠한가? 우선, 이명박이 당선될 수 있었던 주요한 근거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경제성장’ 내지 ‘경제위기 극복’이라는 구호에서 알 수 있듯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금융위기를 타개하는 것은 그 어느 분파를 막론하고 지배세력들에게 중요한 과제이다. 그런데 최근의 환율논란이나 이른바 ‘9월 위기설’ 논란에 대한 여ㆍ야의 이전투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들이 이에 대한 실질적인 타개책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하다.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은 ‘(방법상의 차이만 있을 뿐인)한미 FTA'나 ‘비정규직 악법’ 등의 반노동자ㆍ민중적인 의제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민주노총 등이 야심차게 진행해 온 ‘비정규직 전략 조직화사업’이나 이른바 ‘평택투쟁ㆍ한미FTA투쟁’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 것처럼 이에 맞서야 하는 대다수의 운동진영들이 실천적으로 무기력에 빠져 있는 상황이 돌파구를 못 찾고 수년 째 이어지고 있다. 물론, 지난 5월 이후 지속되어 온 촛불시위는 ‘이명박’으로 대표되는 지배세력에 대한 거대한 대중적 불만을 극적으로 드러낸 것이지만, 기존의 사회규범 일반에 대한 불만ㆍ환멸을 넘어서는 지배계급의 전략에 맞서는 구체적인 운동으로 자기 스스로를 재조직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7/8월부터 공안탄압과 각종 기본적인 권리에 대한 심각한 침탈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운동의 기획이 전방위적으로 도모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동안 장기화되어 온 KTX, 이랜드-뉴코아, 기륭, 코스콤 등의 투쟁 역시 이렇다 할 돌파구를 열어제끼지 못하고, 앞으로 예상되는 정권의 각종 탄압의 지속과정을 온 몸으로 맞부딪혀야만 할 것이다. 지금까지 이 투쟁사업장들은 비록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많은 사람들은 아니지만, 강고하고 끈질기게 서로간의 연대투쟁을 이어 온 노력들이 모여 그 투쟁을 지속할 수 있었지만, 정권의 더 큰 물리적 탄압은 정확히 이것마저도 고립시키고 해체시키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공세적인 국정운영’을 천명한 정권의 입장에서 이에 걸림돌이 될 만한 운동진영에 대한 탄압의 가장 현재적인 방식이 바로 이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륭ㆍ이랜드ㆍKTXㆍ코스콤/성신여대 노동자들의 싸움이 남한 노동자 운동의 싸움일 수밖에 없으며, 노동자 운동이 승리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또한 이번 기륭 투쟁에서 우리가 눈 여겨 봐야 할 것 중에 하나는, 남한 자본의 해외이전이라는 문제이다. 사실, 기륭전자의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이 한 달에 받는 월급은 지극히 적은 금액이었기 때문에 “그 까짓 월급 얼마나 된다고, 그걸 안 주고 비인간적으로 저렇게까지 해고 하는가”라는 비난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 한 것이다. 신자유주의 금융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주주들의 주요 목적은 노동자의 임금 몇 푼을 절약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몸살을 줄이고 구조조정하는 그 ‘과정’ 자체만으로도 주식의 가치를 일시적으로 반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구조조정이 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금융네트워크 및 이에 철저하게 포섭되어 있는 다층적인 하청체계의 선을 따라 이뤄지는 것이라면, 기륭전자뿐만 아니라 구로공단ㆍ창원 등지의 제조업 중심의 중소기업들이 이미 동남아ㆍ중국을 비롯한 해외로 공장을 이전시키고 있다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강제하는 불안정노동의 일반화가 낳고 있는 경향 속에 기륭투쟁이 자리 잡아 왔다는 것이며, 이는 앞으로도 여기저기서 끊임없기 제기될 문제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투쟁의 전략이 남한 노동자운동에게 요구되는 것이기도 하다.

앞서 확인한 바 있듯이, 정권의 공안탄압/운동진영탄압은 남한 노동자운동의 실천적인 무기력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미 ‘공세적인 국정운영’ 운운하면서 이런 움직임들이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이는 올 해 가을, 남한 노동자운동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시험대에 올라 있다. 바로 기륭투쟁이 그것이 될 것이다. 기륭 조합원들이 도심의 cctv 철탑에서 고공시위를 전개하고, 그야말로 몸과 마음의 뼈를 깎는 살인적인 단식투쟁을 전개하면서 다시 이른바 ‘사회적 여론’을 타게 되자, 사측에서는 “이만큼 사회적 관심이 집중 되었을 때, 너네가 적당히 양보하여 추석 전에 끝맺는 것이 좋을 것”이라면서 노조에 대한 협박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기륭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절대 이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아주 긴 시간동안 진행된 ‘기륭 투쟁의 승리’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의견은 운동주체들 저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적어도 사측에서 함부로 말하는 것처럼 ‘적당히 양보’하여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분회장 동지를 비롯한 조합원들이 목숨을 걸고 단식투쟁을 진행한 것이 아닐뿐더러, 단적으로 말해서 기륭 투쟁을 중심으로 “단위사업장을 넘어서는 […] 희망을 던”지기 위해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만인 선언ㆍ만인 행동>을 준비하고 있다. 무엇보다 기륭 노동자를 비롯한 비정규직 투쟁을 함께 하고 있는 이들이 지금의 싸움을 이렇게 끝 낼 추호의 마음도 없는 것이다. <만인선언ㆍ만인행동>은 9월 11일 저녁 6시, 서울역 앞에서의 ‘1차 예비 행동’을 시점으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기륭 투쟁은, 비정규직 투쟁은 이제 다시 본격적으로 시작인 것이다.

Posted by 행진

2008/09/10 12:07 2008/09/10 12:07
, ,
Response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RSS :
http://stulink.jinbo.net/blog/rss/response/126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정세동향1]저들만의 경제성장 정책,
사유화/선진화 방안




■ 공공부문 사유화 계획을 밀어붙이고 있는 이명박 정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명박 정부는 촛불이 사그라지길 기다렸다는 듯 지난 8월 11일, 1차 공기업선진화방안 발표를 시작으로 추석 이후 3차 방안 발표에 이르기까지 원래 계획대로 '공공부문 사유화 계획'을 착착 추진하고 있다. 이는 불과 몇 달 전 이명박 대통령 스스로가 ‘물·전기·가스·의료보험’ 4대 분야 민영화는 없다고 말했던 것과 정확히 반대되는 방향이다. 정부가 추진 중인 공기업 선진화방안의 흐름을 봤을 때, 당시 대통령의 발언은 촛불을 잠재우기 위한 거짓말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애초 대선 시기부터, 그리고 대통령직 인수위 시기에도 이명박 정권은 경제성장의 해법 중 하나로 정부예산을 20조 절감하겠다는 의지를 굳게 내비쳤다. 이 20조라는 규모의 예산 절감은 정권이 주장하듯 그저 정부 부문의 운영 효율화만으로는 불가능하기에 이는 필연적으로 공공부문에 대한 대규모 구조조정과 공공서비스의 축소를 불러올 것이다. 노무현 정권 시기에 진행된 이른바 ‘소프트웨어 구조조정’은 공기업과 정부 산하기관의 운영에 시장 원리를 적용하는 데에 집중한 반면, 이명박 정권은 그에 기반을 두어 ‘하드웨어 구조조정’, 즉 직접적인 예산, 인력, 조직의 축소를 감행할 것이다.

지난 8월 11일 발표된 1단계 '공공부문 선진화' 방안의 핵심은 산업은행, 기업은행 및 자회사의 민영화와 공적 자금 투입기업의 매각 그리고 주택공사와 토지공사의 통합과 자회사 매각 등이다. 이에 대해 재계 등에서는 '강도와 범위가 기대에 크게 못 미친다'고 더 광범위한 민영화를 주문해왔다. 하지만 산업은행 등 금융공기업과 공적자금 투입 기업에 대한 대대적인 민영화 계획은 지주회사로의 전환을 꾀하고 있는 재벌들에 대한 특혜지원, 부동산 관련 공기업의 통합과 대형화 및 관련 자회사의 민영화를 통해 부동산투기의 폭을 넓혀줄 것이다. 금융기관의 민영화 중 첫 대상으로 거론된 산업은행은 총자산이 145조원으로 국내은행 중에 최고로 큰 규모의 자산인데, 이를 매수할 수 있는 것은 해외의 투기자본이 아니면 국내재벌들 뿐이다. 때문에 이명박 정부는 금융기관의 민영화에 앞서 산업자본의 은행소유를 막고 있는 금산분리(금융의 특성(금융기관은 자기자본 비율이 작고 대부분 고객·채권자의 자금으로 영업)을 감안하여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이 결합하는 것을 제한하는 원칙)를 완화 내지 폐지하고, 출자총액제한제도(대규모 기업집단에 속하는 회사가 순자산액의 40%를 초과해 국내회사에 출자할 수 없도록 한 제도)를 완화하여 국내외 독점재벌들이 은행을 소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려고 한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금까지 발표된 1,2차 공기업 선진화 방안에서 대상이 된 기업은 319개 검토대상 기관 중 79개 기관이 해당하고 , 민영화, 즉 팔려나가는 대상은 28개이다. 대표적으로 산업은행이나 기업은행 같은 금융공기업이 있고, 공적자금이 투여된 구조조정기업, 대우해양조선이나 현대건설 같은 14개 기업이 있다. 통합을 계획하고 있는 공기업은 31개→14개, 아예 폐지되는 기관 3개, 기능조정 기관 19개로 발표가 났다. 9월 중으로 발표될 3차 추진계획에는 20여 개의 기관이 포함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의 통합, 전력과 발전 부문에 대한 구조개편 등이 포함될 것으로 보여 파장이 클 것이다.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공공부문 사유화 계획 중 우선적으로 살펴보아야 부분은 공기업의 사유화와 매각이다. 현재 국내 공기업 수는 총 102개인데 이 중 시장형 혹은 (준)시장형으로 분류되는 24개의 공기업 - 한전, 가스공사, 철도공사, 지역난방공사, 인천공항공사 등 - 의 대부분이 그 사유화 계획에 포함되어 있다. 정권이 이처럼 경제를 살리기 위한 효율성 제고의 방안으로 에너지 공기업, 부동산 공기업, 교통 공기업을 중심으로 한 공기업들의 매각을 추진하는 이면에는 한국경제의 성장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기업의 안정적인 투자처가 절실하다는 현실이 있다. 또한, 경영권까지 매각이 되지 않더라도 지역난방공사 등은 이미 증시상장이 확대되고 있는 상황에서 공기업의 증시상장이 더욱 가속화될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될 경우,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 공공요금이 인상될 것은 사실 뻔한 일이다.

한편 정부는 이러한 매각, 축소, 혹은 통폐합에 더불어 공기업의 비효율적인 경영을 개선하고 대국민 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해 ‘경영 혁신’을 추진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를 위해 도입될 시장 원리는 결국 대대적인 내부 구조조정을 뜻할 뿐이다. 민간 기업이 공기업을 인수하도록 유인하기 위해서라도 정부는 기업 가치를 높이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정리해고 등의 구조조정을 감행할 것이고, 특히 이 과정에서 비정규직에 대한 우선적인 구조조정이 예상된다. 당연히 감축된 인원에 대한 신규채용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남아 있는 인원 역시도 민간위탁, 외주화, 자회사 설립 등의 방식으로 간접고용의 형태로 돌리게 될 가능성이 크다. 또 정권이 언급하고 있는 ‘최저가낙찰제’는 이러한 고용불안을 제도적으로 보장해 줄 것이다.

이명박 정권이 빠르게 공기업 사유화 계획을 밀어붙이고 있지만, 이러한 공기업 사유화 방안이 경제성장의 해법이 아닐뿐더러 투기자본에게는 이득을 가져다주고 대부분의 서민들에게는 공공요금 인상과 구조조정의 칼날을 들이댈 것임을, 그로 인해 '양극화'가 더욱 심화될 것임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시민들이 사유화를 반대하는 촛불을 들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촛불이 제기했던 사유화 반대의 움직임을 이어나갈 투쟁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선 사회공공성 투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합의부터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공공부문 사유화 저지투쟁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찾아보자. 그리고 지금까지 정부의 체계적인 공공부문 사유화에 맞선 공공성 투쟁이 어떻게 전개되어왔는지 살펴보면서, 투쟁의 한계를 짚어보고 이를 넘어서기 위한 우리의 전략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 사회공공성 투쟁이란 무엇일까?

한국사회에서 '공공성'의 의미는 여러 사람들에게 공개된 혹은 다수를 위해 존재하는 또한 개인적인 영역이 아닌 집합적인 영역 등 매우 다양하다. 이렇듯 공공성의 의미가 애매모호한 이유는 그 의미가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상황과 권력관계에 의해서 그 의미가 규정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공공성의 의미는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 한정되지 않는 보편적인 속성으로서 공적 영역의 속성, 또는 특정한 집단에만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공공영역을 제공하는 주체는 국가이며, 국가가 어느 정도 중립적인 외관을 띠면서 국민들의 일반이익을 대변한다고 불리는 부문을 공공부문이라고 본다. 그래서 지금의 공기업민영화에 대한 분노도 바로 국가가 이러한 역할을 포기했다는 점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분석만으로는 '왜 국가는 공공부문을 만들었는가? 자본주의 국가에서 공공부문이 등장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한계적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국가에서 공공부문이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 '공공성'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어떠한 작용을 하는지 간단하게 살펴보자.

쉬잔느 드 브뤼노프(Suzanne de Brunhoff)는 '공공부문'이 형성되는 이유를 자본에게 필수적인 (그러나 자본이 스스로 생산할 수 없는) 특수한 상품으로서 '화폐'와 '노동력'의 (재)생산과 관리가 국가적 차원에서 요구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고전경제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국가의 개입이 시장경제의 발전에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시장경제 자체가 국가의 개입을 적극 요청한다는 것이다. 국가는 그 자체로 자본주의의 기능 작용의 핵심에 개입하며 이로써 억압적, 이데올로기적 역할과 구별되는 '경제적 역할'을 갖는다. 브뤼노프는 이러한 국가의 역할을 가리켜 '경제적 국가장치'라 불렀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공부문'이란 '국가/경제와 분리된 독자적인 영역'일 수 없으며, 경제영역의 지배적 생산관계가 직간접적으로 투영되어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공공부문'은 자본축적에 기여하는 국가장치의 기능을 수행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물/에너지/의료/교육 등과 같이 인간으로써 누려야 할 '보편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장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가 사람을 재생산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사회재생산 관련 영역에서의 공적 시스템 구축을 위한 투쟁은 가장 광범위한 투쟁으로 형성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회공공성은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보편적 권리 실현을 지향해야 하며, 재산권의 재구성과 소유의 사회화를 이루어가야 한다. 또한 우리의 노동이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성찰을 통해 공공부문운영에 대한 문제와 생산수단 사회화를 실현시키는 시스템 전반의 구성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노동자/민중의 통제와 자치를 통해 이룩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사회공공성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은 개개인의 삶을 사회 구성원이 공동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보편적 권리의 실현'이다. 하지만 국가 - 시민사회 - 경제의 도식처럼 사회의 영역을 인위적으로 가르는 담론으로 인해 그 실현이 왜곡되고 있다. 전 사회를 가로지르는 모순의 한 장(場)으로서, 공공영역을 자본의 논리에 팔아치우려는 정권에 맞서 공공영역이 인간의 보편적 권리를 실현할 수 있는 장이 될 수 있도록 민중들의 통제 하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어떤 선험적인 정의(定意)가 아니라 우리의 실천적 활동으로 만들어나가야 하는 정치적인 담론이다.

■ 빼앗길 수 없는 민중의 권리, 사회공공성 투쟁의 쟁점들을 구체적으로 제기하자!

이명박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공공부문 사유화 정책은 필연적으로 공공성의 파괴를 동반한다. 정권은 공공부문의 구조조정에 발맞추어 혹은 구조조정을 불러오는, 공공성을 약화시키는 정책들을 끊임없이 발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의료․복지 영역의 경우 일명 ‘성장 복지’ 정책으로 경제가 성장해야 복지가 늘어날 수 있다는 식의 논리를 대어 건강보험 당연 지정제를 둘러싼 끊임없는 논쟁을 만들고, 민간보험의 활성화 등을 복지 정책이랍시고 내세우고 있다. 또한 사회복지서비스의 경우엔 ‘민간이 공급’하게 하겠다고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는데, 이러한 계획은 국민건강보험공단, 국민연금공단, 근로복지공단 등의 공기업 축소, 구조조정 계획과 동시에 추진되고 있다. 이와 같은 공공성 파괴 - 공공부문 구조조정의 흐름은 언론부문에서도 마찬가지이며 특히 연기금(국민연금)의 경우에는 펀드매니저가 기금의 운용위원이 되도록 하여 금융화의 능동적인 주체가 되도록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정책들이 실행될 경우 민중은 ‘노동자’로서 일터를 잃어버리거나 불안정한 고용 형태에 무방비로 노출될 것이고, ‘시민’으로서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권리들, 위의 경우에는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들을 빼앗길 것이다. 이명박 정권의 공기업 사유화 전략이 ‘선진화’라는 이름으로 격렬한 반대의 목소리들을 일정 부분 잠재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온갖 규제들은 철폐되고 있으며 노동은 점점 더 불안정해져가고 있고, 선진화라는 허황된 희망 속에 삶의 권리들은 하나하나 좌절되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 정권의 기만적이고 교묘한 공공부문 파괴의 전략의 맞선 투쟁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 우리는 공공성으로 뭉뚱그려지는 ‘사회 복지 확충’급의 요구에 우리의 투쟁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구체적인 의제들 속에서 투쟁의 매개점을 발견하여 이를 신자유주의 반대의 맥락에서 재구성함으로서 운동으로 제기하고 그를 통해 투쟁을 확장시켜야 한다.

특히 사회서비스시장화저지 같은 의제에 주목하면서 여성권을 제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부는 8월부터 치매/중풍 등 장기요양이 필요한 노인을 위한 장기요양보험 제도 시행을 시작했고 이에 수도권 요양시설 확충 대책 추진, 재택서비스 강화, 요양서비스 제공 인력인 요양보호사 · 간호사를 최대 7만 명 양성할 것이라고 발표하는 등 사회서비스에 관련한 다수 정책들을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기간 대다수 노동운동은 ‘재생산 영역’에 대해 갖는 맹목으로 인해 오히려 비판해야할 정부의 사회서비스전략과 맥을 같이하는 대응을 하기도 하는 현실이었다. 지금까지의 사회공공성 강화 투쟁은 보육/의료 등 재생산 영역의 상당부분을 주요 의제로 삼기는 했었지만 여성들이 가족 내에서 수행해왔던 가사노동-돌봄노동은 그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사회공공성 투쟁에서 ‘가족 내에 한정되어 가시화된 적 없는 가사노동이라고 하는 것‘도 말해야한다고 포괄의제를 넓히는 것이 답이 될 수는 없다. 생산과 재생산의 영역을 분리하여 재생산 영역을 가족에 할당하는 구조 하에서는 정책대안을 모색하거나 국가지원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대안적인 상이 확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핵심적으로는 ‘재생산 노동의 사회화’라는 대안적인 상을 모색하는 방안을 사회운동의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교육 역시 공공성 투쟁의 중요한 쟁점으로 다뤄지고 있다. ‘계급화-서열화를 부추기는 교육 시장화 반대‘의 내용을 분명히 하여 민중들의 교육/지식에 대한 권리를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기획과 공간을 늘려가야 한다. 최근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는 사안으로 서울시에서 추진하고 있는 ’국제중 설립'문제가 있는데, 이에 대응하는 투쟁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이나 에너지, 보건의료의 문제 역시 단순히 ‘사회복지 확장’이라는 인식 틀에 갇히지 않는 제기가 필요하다. 에너지에 대한 접근권을 보장하라는 시민단체의 요구에 대해 ’발전량을 높이기 위해 원자력 발전소 추가 건설‘을 하는 식(정부의 국가에너지 기본계획)의 대응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요금 인상 반대‘를 넘어서는 ’지속가능한 방식으로(생산된) 안전하고, 문화적으로 적합한 재화/서비스에 대한 민중의 권리’를 드러낼 수 있는 투쟁을 만들어야한다.



■ 공공성 투쟁의 새로운 전략과 방향을 세우자

공공성을 파괴하는 정책은 공공부문 구조조정으로, 또 반대로 공공부문 구조조정은 공공성 파괴로 이어지게 마련이고 결국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직접적인 구조조정의 위협과 동시에 공공서비스의 상업화로 인한 위협에 이중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 공공부문 노동자들뿐만 아니다. 민중들은 구조조정으로 잘려나가는 노동자들을 보며 고용불안을 체감할 수밖에 없고, 직접적으로는 공공서비스의 박탈로 삶의 질이 저하될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공공성 투쟁은 두 가지 모두에 대한 투쟁이 되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 진영에서는 정부의 이데올로기적 공세와 시민운동의 성장에 따라 시민 - 계급의 분리가 전개되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고 오히려 정부의 그러한 관리 전략에 조응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공공성이라는 담론을 스스로에게서 탈각시켜버렸다. 이후 운동 진영의 공공성 투쟁은 공무원의 집단이기주의적인 행동으로 매도당하기 일쑤였고, 이들을 ‘대신해서’ 공공성 담론을 대표하고 있는 시민운동은 공공성 강화를 국가부문 강화와 동일시하면서 국가 역할의 확대를 주장할 뿐이기에 진정한 민중의 권리로서의 공공성을 전혀 짚어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노동운동의 위기라고 이야기하는 지금, 그리고 공공성 담론을 이미 빼앗겨버린 것 같은 지금, 공공성 투쟁은 어떤 방향으로 무엇을 위해 전개되어야 하는가? 이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일부 운동 진영에서 주장하는 국유화의 문제이다. 공공부문의 비자본적인 성격은 이윤 창출을 유일한 목표로 하는 민간 기업에서 담보할 수 없는 것이기에 국가가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운영해야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인데, 앞서 언급했던 공공부문의 본질을 생각해 볼 때 이는 오히려 부정적인 효과를 낳게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공공부문은 국가와 자본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자본축적을 용이하게 하는 국가의 보조적인 기능에 해당했다. 현재와 같은, 자본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가 개입을 강화한다는 것은 결국 공공부문을 권리로서 사고할 수 없게 할 것이다.

이를 넘어서기 위해 제기해야 할 쟁점은 실질적 통제권의 확보일 것이다. 공공부문이 국가 소유로 남고, 사회 복지와 같은 노동력 재생산 비용의 사회화가 강화된다 하더라도 공공부문이 민중의 실질적인 통제 하에 놓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국가 역할의 확대와 이데올로기적 개입의 통로가 될 뿐 공공성 강화와는 연결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와 같은 소유나 사회화의 문제는 실질적인 민중 통제권의 쟁취 속에서만 그 의미를 획득한다. 그렇다면 ‘실질적’인 ‘통제’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결국 기술의 개발 단계에서부터 적용의 단계까지 전 과정을 노동자의 고용을 보장하고 환경 파괴를 저지하며 자본의 통제권을 축소할 수 있도록 노동자․민중이 개입해낼 수 있는 시스템을 말한다. 이러한 민중 통제의 시스템이 구축될 경우, 노동자의 고용과 환경 파괴가 부딪히지 않는, 안전성의 확보와 장애인 이동권이 만나는, 전 민중의 삶의 질이 확장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은 민중 통제의 쟁취는 전 민중적인 연대 전선의 구축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것은 그저 국회에 ‘진보적’ 정당이 몇 석을 차지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전사회적으로 노동자․민중의 목소리가 얼마나 힘을 가지느냐의 문제이고, 이는 전 민중의 연대전선의 구축에 달려있다. 그러나 97년 이후 강화된 시민 - 계급의 분리 속에서 심지어는 노동자조차도 노동자로서의 정체성보다 몰계급적 시민, 즉 사교육비를 더 벌어야 하고 질 높은 의료 서비스를 받기 위해 민간 보험을 알아보러 다니는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강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물론 97년 이후 세련된 방식으로 삶에 깊숙이 침투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공세의 탓이기도 하지만 노동운동이 개인의 삶을 포괄하는 진정한 ‘계급’운동으로 나아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며, 이는 곧 노동운동이 구체적 삶의 양상을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요원해 보이는 공공부문에서의 전사회적 연대전선의 구축은 그러나, 오히려 ‘공공부문’이기에 더욱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공공부문 구조조정과 공공성의 파괴는 당연히도 서로 분리되어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기에 소위 노동자적인 이해와 시민적인 이해는 일치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제까지 지배 계급의 공세 속에 그 일치는 힘겨웠지만, 그 공세가 강력했다는 것은 동시에 그 부분이 바로 신자유주의의 약한 고리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을 뜻하기도 한다. 하기에 공공부문은 이제까지 평행선을 이루어왔던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이 만날 수 있는 접합점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결합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는 없다. 지배 계급의 저 세련된 ‘초계급적 시민의 이해’라는 말에 무너지지 않으려면 노동자계급의 투쟁 과제로서 공공성을 인식하고, 동시에 그것이 ‘시민적’ 요구이기도 함을 알려내고 결합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Posted by 행진

2008/09/10 12:06 2008/09/10 12:06
, , , ,
Response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RSS :
http://stulink.jinbo.net/blog/rss/response/125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정세동향2] 이주노동자 투쟁의 현황과 과제



0)들어가며

2008년 8월 17일, 고용허가제 도입 4년이 되던 날, 이주 노동자들과 연대동지들의 정리 집회 앞에 버젓이 놓인 플래카드에는 이주 노동자들을 범죄 집단화 하며 추방해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범죄를 저지른 개인이 어느 한 집단의 특성으로 쉽게 일반화 하는 현실에는 다른 집단에 대한 타자화/적대가 실려 있다.1) 이러한 분할과 그에 따른 배제는 위기에 대한 분노를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지 못하게 하며 그럼에 신자유주의의 위기관리 전략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이데올기와 함께 경제위기라는 상황들이 맞물려 이주 투쟁의 여러 쟁점들을 형성하게 된다. 이번 글에서는 고용허가제 시행 4년을 맞아 이주 노동자 투쟁의 현황과 견지해야할 지점들을 돌아보고자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이명박 정권 등장 이후 이주 노동자 운동에 대한 탄압

지난 3월 노동부와 법무부의 보고를 받던 이명박 대통령은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지나친 온정주의가 만연해서는 안된다", "불법체류 노동자들이 활개치고 돌아다니게 해서는 안된다" 라며 강경대응을 지시했다. 도대체 언제 법무부와 노동부가 이주 노동자들에 대해서 '지나친 온정주의'를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이명박 정권의 대응을 보노라면 이전의 대응이 온정적이었던 것 마냥 느껴질 만큼 가혹하기는 하다. 법무부는 이전에 보기 힘든 재빠름으로 지역별 이주 노동자들의 수를 촘촘히 파악했으며 5~7월 집중단속 기간에 지역에 8~9천명에 달하는 '할당량'을 주문했다.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들려오는 소식에 따르면 각 보호소(라는 이름의 수용소)의 상황은 칼잠을 자야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더욱이 우려스러운 점은 이러한 합동/집중 단속이 시기를 넘어 일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살인적 단속과 추방이 반복되는 것은 4년째 진행된 고용허가제가 이주 노동자들의 삶을 전혀 보장해주고 있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다.

2) 고용허가제

이주 노동자들은 86년 아시안 게임과 87년 노동자 대투쟁2) 이후 본격적으로 한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시 어떠한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정책도 없던 정부는 계속되는 이주 노동자들의 유입과 더불어 열악한 상황에 대한 저항들에 1993년 11월 산업연수생 제도라는 궁색한 변명을 내어 놓게 된다. 명백한 노동자를 일을 배우려온 학생들로 만들어 교육에 대한 대가로서 저임금/고강도 노동을 요구하는 산업연수생 제도는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여러 자생적 투쟁을 거쳐 01년 평등노조 이주지부 건설/명동성당 농성등 여러 투쟁을 일으키게 된다. 당시 36만에 육박하던 이주노동자들의 80%가 미등록 상태가 되고 정부는 03년 고용허가제를 준비하게 된다.3)  하지만 고용허가제는 이주 노동자들의 정주를 막고 등록에 따른 통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고용허가제 시행 4년을 맞아도 결국 되풀이 되는 비극에 대해서 밖에 할말이 없는 것은 고용허가제가 기존의 문제를 한치도 해결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자본의 필요에 따른 불안정 저임금 노동의 안정적인 재생산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4)

이에 맞서는 투쟁들 또한 유례없는 탄압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고용허가제와 더불어 이주 노동자들을 옥죄는 출입국 관리법 또한 영장 없이도 불심검문과 단속을 가능하게 하는 내용을 골자로 9월 이후 법무부가 국회에 제출할 예정에 있다. 이는 기본적인 절차마저 무시함으로서 반인권적 단속과 추방을 탄압으 도구로 삼던 출입국 관리소등의 행동을 법제화 하겠다는 의도이다. 이주 노조 설립이후 끊이지 않았던 지도부에 대한 단속도 반복되어 지난 5월 2일 이주노조 지도부 2인이 단속 이후 강제 출국되는 사건도 있었다. 더욱이 이번 지도부 강제 추방은 지난 3인 지도부 강제 출국 이후 농성을 지속하며 간신히 쌓아올린 이주 노조의 지역 기반마저 위협하고 있다.

3)이주 노동자들의 손으로 노동을 허가하는 싸움을!!

-역할과 과제

이주 노동자는 앞서 이야기한 탄압들과 여러 요인들이 맞물려 스스로 투쟁하기 어려운 조건에 있다. 투쟁의 주체들이 대부분 미등록 이주 노동자의 신분으로 공개적인 활동을 펼치기 힘든 상황 이며 투쟁하는 것 자체가 비자 외 활동으로 분류되어 신분이 위협받게 된다. 이러한 법적 제도적 조건 이외의 것들도 존재한다. 이주 노동자들의 출신국이 다양함에 따라 주체들 간의 의사소통문제가 그 하나이며 한국어/한글에 대한 어려움 또한 존재한다. 이러한 조건들은 종종 이주 노동자들의 투쟁이 스스로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제한하며 연대단위와의 긴장감을 필요로 하게 한다. 이러한 조건들을 걷어내는 투쟁과 연대가 앞으로의 이주 투쟁에 있어서 우리가 해결해야 할 지점이다. 탄압을 막아 내는 투쟁들을 함께 진행하며 언어 장벽의 곤란함을 포함하는, 그것을 넘어서 이주 노동자들이 온전히 스스로의 투쟁에 나설 수 있게 하는 과정들이 필요할 것이다. 더불어 현실에서 노동하고 있는 이주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노동권을 보장하기 위한 노동비자/노동허가제 쟁취를 위한 싸움을 확산 시켜야 한다. 사업주의 입장에서의 고용을 허가하는 것이 아닌 노동자의 입장에서 노동권의 보장을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쟁취되었을 때, 그리고 쟁취하는 과정에서 이주 노동자들의 운동이 온전히 바로설 수 있는 출발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4)나아가며

국제주의/분할과 배제 그리고 시민권/신자유주의와 이주 노동/이주노조운동의 역사와 사례 등 이주 노동자들의 투쟁과 함께 이야기 할 수 있는 것들은 다양할 것이다. 이번 뉴스레터에서는 고용허가제 4년을 넘기고 있는 이주 노동자들의 현황에 대해 소개하는 수준에서 다루어 보았다. 이주 노동과 관련한 경제적 분석과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공세들이 작동하는 것이 현실에서 탄압과 투쟁들로 나타나게 된다. 그렇기에 위에 나열한 의제들과 그 작동을 연결해 사고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5)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위해 이주를 선택한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것은 살기위해 노동하는 노동자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처럼 아이러니이다. 하지만 결국 모두 '인간답게 살겠다'라는 처절한 외침들임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 목소리들을 짓밟는 작금의 현실이 신자유주의가 야만임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 [제7의 인간]에서 존 버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도시화된 국가의 경제에 관한 한 이민 노동자들은 불사(不死)의 존재, 끊임없이 대체 가능하므로 죽음이란 없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태어나지도 않으며, 양육되지도 않으며, 나이 먹지도 않으며, 지치지도 않으며, 죽지도 않는다.

이러한 끊임없는 단속과 강제 추방 속에서 모두가 힘들어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출국을 각오하고 싸우며 강제추방 후에도 본국의 노동자들과 투쟁하고 있는 동지들을 떠올리며, 그 뒤를 이어,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투쟁할 동지들과 어깨를 걸자. 투쟁하는 노동자들 또한 불사의 존재이며, 계속 추방되더라도 다시 태어나고, 일어서며, 지혜로워지며, 죽지도 않는다. 투쟁.

--------------
1)이주 노동자들의 주요 출신국의 범죄율이 소위 선진국들보다 현저히 낮으며 이중 많은 부분을 생계형 범죄가 채우고 있다. 이는 미등록 이주 노동자들의 상황에 대한 표현이다. 각 유형별에 있어서 최근에 위장결혼의 증가율이 높다는 점 또한 주목할 부분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2) 87년 투쟁의 성과로 임금상승과 노동시간 단축이 추진되자 자본은 유순한 '외부'의 도입-이주 노동자-과 내부에서의 외부 창출-비정규 노동을 비롯한 여러 분할-을 꾀하게 된다.


3) 04년 시행을 앞두고 이주 노동자들은 모두 신고를 해야 했고 이를 피하려던 장기 미등록 이주 노동자들은 이후 대대적으로 진행된 단속에 쫓기다 목숨을 잃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수가 적지 않았다.


4)미등록 이주 노동자의 숫자는 20만 명으로 고용허가제 시행 당시보다 두 배 가량 증가했다.

5) 관련한 자료로 행진 학술자료실 108번에 등록되어 있는 글들을 참고

Posted by 행진

2008/09/10 12:02 2008/09/10 12:02
, ,
Response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RSS :
http://stulink.jinbo.net/blog/rss/response/124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교육/분석]9월, 외환위기
 대란이 일어난다?!


요즈음 하루가 멀다하고 인터넷 포털사이트 메인에는 ‘9월 위기설’ 에 대한 기사가 올라온다. 환율이 폭등한 날에는 ‘9월 위기설 현실화 되나’ 정부의 개입으로 환율이 안정세를 찾으면 ‘위기설 불씨는 여전’ 정도로 헤드라인이 뽑히고, 이와 동시에 ‘위기설 근거 없다’라는 내용의 기사는 환율 폭등 때는 ‘그래도 없다’ 로 안정세를 찾을 때는 ‘거봐 없잖아’ 식으로 계속 업데이트 된다. 여러 입장들의 기사가 올라오지만 공통되게 전제하고 있는 생각이 있는데, 하나는 바로 ‘위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는 것, 다른 하나는 ‘현 상황이 ’위기‘ 라고 명명되는 순간 정말 큰일이 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지금 위기가 도래했다고 본다. 이는 이론적으로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 국면이라는 측면에서 그렇고, 경험적으로는 궁핍화가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경제기사들 속에서 알 수 있다. 몇 년 전부터 지배계급도 ‘양극화’가 문제라고 얘기해왔고, 최근에는 양극화뿐만 아니라 아무 구제도 못 받는 ‘샌드위치 계층’도 문제라고 하고, 주택담보금을 갚지 못해 주택경매는 늘어났다고 하고, 추석특수 같은 것은 옛말이라고 하고… 이런 이야기가 매일 올라오는데, 대체 어떤 ‘위기’가 안 왔다는 것일까?

지금이 구조적 위기라 하더라도, 그냥 그렇게 ‘아, 이미 위기라니까 그러네.’ 라며 정리하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다. 구조적 위기 국면에 돌입한 순간 한꺼번에 모든 경제지표가 바닥을 치지는 않고, 또 세계체계적 관점에서 보면, 주변부에서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지금의 체제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지금 우리에게는 좀 더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남한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사람들이 우려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겠다. 그렇다면 지금 우려하고 있는 ‘9월 위기’ 즉 ‘아직 안 온 위기’ ‘절대 안 왔으면 하는 위기’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이것부터 살펴보자.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양이 많아서 파일을 등록합니다.

Posted by 행진

2008/09/09 21:12 2008/09/09 21:12
, , ,
Response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RSS :
http://stulink.jinbo.net/blog/rss/response/121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기획연재]한국에서 '경제성장
 이데올기'의기원에 대해



2학기의 시작과 함께 ‘2008, 한국현대사를 만나다’의 연재가 다시 시작됩니다. 주로 다루게 될 부분은 1950년대에서 1970년대로, 발전주의 시대의 한국이 될 것입니다. 이때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반공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남한’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 세계체계 속에 한국이 강하게 포섭되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또한 요즘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더욱 극성을 부리며 출현하고 있는, ‘경제성장 이데올로기’가 출현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것은 각종 경제정책이 시작되고, 실제로 한국에서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던 물질적 조건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했던 국가장치들의 현대화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도입이라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무능했던 시절로 평가받는 1950년대에도 꾸준한 경제상승이 있었고, 그 이후 ‘한강의 기적’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부동의 대통령으로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물론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일국의 경제정책만으로는 불완전한 것이었고, 세계적 통치성의 개입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우리의 총론에 따라서 이후의 연재에서 꾸준히 살펴볼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경제성장 이데올로기’가 현재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신에게 내재적인 ‘부당한 대립물’을 토대로 계속 재생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 평가할 때 ‘경제는 잘 했지만, 정치는 잘 못했다.’라는 식의 평가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로, 이명박 정권은 경제에 봉사하는 정치를 만들겠다는 선언을 하기도 합니다. 국가와 시장, 성장과 분배, 민주주의와 독재 등은 한국에서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를 만드는데 있어서 ‘비적대적 모순’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들입니다. 이명박 정권은 수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와 그를 토대로 하는 정책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런 방법은 민중들에게 끊임없이 두 가지 대립물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하고, 그런 식으로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를 내재화합니다. 우리는 이와 맞서야 하고, 본질을 볼 수 있는 ‘역사과학’을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1. 국가와 시장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가장 고전적인 방법은, ‘국가와 시장’ 혹은 ‘정치와 경제’를 끊임없이 대립시키는 방법일 것입니다. 각 개인의 자율성을 바탕으로 하는 사적인 시민영역과, 거기서 생기는 각종 갈등과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공적 기구라는 국가영역이라는 도식은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체제의 기본적인 관계설정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순수한 도식은 역사적으로 나타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가능하지도 않았습니다. 국가를 ‘부르주아지의 공동업무를 처리하는 위원회’로 설정한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도, 이런 도식은 은연중에 재생산되었습니다. 그것은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를 건축학적으로 나누는 도식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서로 영향은 미치지만 두 개의 영역이 ‘순수하게’ 나눠 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론들은 역사를 평가할 때 마찬가지로 드러나게 됩니다.

한국의 경제성장과 IMF 구제금융 이후의 위기를 분석할 때, 가장 기본적인 틀은 ‘시장 중심론’과 ‘국가 중심론’의 대결입니다. 시장 중심론자들과 같은 경우 정경유착과 재벌에 대한 특혜적인 지원 등이 시장의 정상적인 기능을 저해하였고, 그것이 장기적으로 경제위기를 낳았다고 간주합니다. 국가 중심론자들은 정부를 매개로 한 강력한 경제정책이 한국에서 발전을 이끄는 원동력이었고, 세계화 이후 급격한 시장 개방과 그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 경제위기의 원인이 되었다고 간주합니다. 이런 틈을 비집고 국가와 시장의 보완이라는 절충론이 대두하고, ‘유교식 자본주의’와 같은 문화 중심론의 주장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런 주장들은 끊임없이 국가영역과 시장영역을 대립시키면서, 국가 혹은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정책들이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냅니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개인들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토대로 하는 시장영역이 먼저 만들어지고, 그것을 조정하기 위해 국가영역이 만들어졌다는 식의 선후관계로 구성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체계를 만들어냈던 ‘본원적 축적’은 항상 국가에 의한 억압과 강제; 도시로의 강제 이주, 식민지 건설, 규율체제의 확립, 강력한 폭력을 바탕으로 하는 이주자와 여성에 대한 배재 등을 동반했습니다. 세계적인 차원에서 자본의 축적체계를 만드는 과정은, 그를 뒷받침하는 헤게모니적 기획으로서 ‘국가간 체계’를 반드시 성립해야 했습니다. 그런 기획은 부에 대한 접근 정도를 기본을 하는 ‘세계체계’를 만들어냈고, 중심/반주변/주변에 대한 배제와 포섭이 나타납니다. 한국 자본주의에서 경제성장과 위기의 역사는, 이런 세계체계에서의 포섭과 배제의 메커니즘을 빼놓고는 절대 설명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시장중심론과 국가중심론을 끊임없이 대립시키는 것은, 일국의 경제정책에 따라 경제성장이 가능하다는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심어줍니다.


2. 성장과 분배

한국의 ‘성장과 분배’라는 쟁점은 토착적인 이데올로기 지형을 형성할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고정관념으로 남아 있습니다. 흔히 성장담론은 파이를 키워야 함께 나눠먹을 수 있다는 ‘선성장 후분배’를 이야기하고, 분배담론은 파이에 대한 분배가 경제성장을 자극할 수 있다는 ‘선분배 후성장’을 이야기합니다. 정확하게 대치되는 양자의 담론은 국가의 복지정책ㆍ경제정책 등과 결부되어 좌/우파를 나누는 기준, 한국에서 따라야 할 경제모델로 전용되기도 합니다. 신자유주의 시기에는 성장담론이 우세하게 됩니다. 경제위기의 원인을 너무 많은 분배정책으로 일할 동기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며,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성장 위주의 정책을 써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성장과 분배’라는 대립물은 부르주아 경제학의 관점에서도 엄밀하지 못한 개념에 불과합니다. 역사적 자본주의의 물질적 국면에서 정부지출을 늘리는 성장정책(케인즈주의), 금융적 확장 국면에서 금융자본의 안정적인 투기를 가능하게 하는 금리 인상과 같은 안정화정책(신자유주의)이 부르주아 경제학의 기본 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성정과 안정’ 담론이 제 3세계에서는 ‘성장과 분배’ 담론으로 나타나는 것은, 계급투쟁을 억압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담론일 뿐입니다. 경제학 비판에서 가정하듯이 전체 국민소득에 대한 이윤 몫(Π/Y)과 노동 몫(W/Y)은,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적 계급투쟁으로 인해서 거의 동일하게 유지가 됩니다. ‘성장과 분배’ 담론이 중심이 된다면 이윤 몫과 노동 몫을 중심으로 하는 계급투쟁이 주된 담론이 될 수 밖에 없고, 경제정책과는 별다른 관계가 없어집니다.

한편 ‘성장과 분배’ 담론은 가치체계의 부당한 대립을 상정하기도 합니다. ‘성장 = 자유중시’, ‘분배 = 평등중시’라는 식으로 자유와 평등이 서로를 억압할 수밖에 없다는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합니다. 게다가 시장과 경제는 자유를 담지하고, 국가와 정치는 평등을 담지한다는 관념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이것은 대중들의 봉기적 권리인 ‘인권의 정치’를 억압하는 효과를 만들어 냅니다. 사람들은 정치가 자유와 평등 각자가 서로 다른 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 즉 자유와 평등 중 하나에 대한 억압이나 제한이 다른 것의 그것을 불가피하게 초래한다는 점을 잊게 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3. 독재와 민주주의

한국 현대사에서 경제성장에 대한 논의는,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정치체계의 문제와 곧장 연결되곤 합니다. 박정희 정권부터 전두환 정권에 이르는 시기와 동시에 일어났던 급격한 경제성장은, 군부독재체제가 가장 효율적인 정치체계라는 일반화로 이어집니다. 80년대의 가열찼던 민주화 투쟁은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비가역적으로 만들지만, 여전히 암묵적으로는 군부독재체제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기도 합니다. 이명박 정권 시기에 빈발하고 있는 공안정국의 조성과 ‘정치를 경제에 봉사하게 한다’라는 논의는, 이런 향수를 신자유주의적으로 변용한 인민주의적 행태이기도 합니다. 다른 한편 독재체계와 강력한 정권을 바탕으로 했던 경제성장이, 장기적으로 비효율을 낳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국사회가 민주주의 체계였다면 비록 성장은 조금 늦게 되었을지라도, 탄탄한 경제구조를 만들어서 IMF의 외환위기와 같은 것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은 IMF 이후에 재벌 투명성 제고와 전문 경영인 도입 등, 경제선진화 방향으로 귀결됩니다. 이런 주장은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을 돕는데 활용되고는 합니다.

독재와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는 ‘한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물음과도 연결되고는 합니다. 이에 대한 연원은 한국전쟁 전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북한과 휴전 중인 상황에서는 민주주의적 가치보다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하는 안보체계의 확립이 더욱 우선적인 과제라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경제성장을 통해, 체제경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났던 형태는 1971년부터 나타났던 유신체제일 것입니다. 유신체제 아래에서 한국식 민주주의는 정식화되어 각종 국가장치들을 통해서 재생산되었고, 여전히도 그런 영향은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ㆍ평등’과 같은 가치들보다는 안보가 여전히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으로, 진보세력과 보수세력의 쟁점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일반적인 경향인 궁핍화ㆍ과잉인구의 증가는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의문을 낳게 하고, 정치가적 인민주의자들의 등장은 정치에 대한 환멸자체를 낳게 합니다. 이처럼 ‘독재와 민주주의’라는 쟁점은 한국 현대사에서 복잡하게 얽혀있는 쟁점입니다.

하지만 통치스타일에서 나타나는 독재와 민주주의라는 쟁점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자본주의와 함께 나타나는 정치 체제는, 그것이 자본축적과 노동력의 재생산을 담당하는 부르주아 독재체제일 수 밖에 없습니다. 발전주의 시대 제 3세계에서는 국가를 매개로 하는 강력한 경제정책 및 공업화 전략(수입대체공업화 or 수출지향공업화)이 나타나고, 이를 위해서 군부독재체제가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제 3세계의 구조조정을 담은 매뉴얼로 ‘워싱턴 콘센서스’가 제시되고, 구조조정에 따른 민중들의 저항을 무마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진보’세력들에 의한 민주화가 추진됩니다. 이처럼 한국에 적합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쟁점을 놓고 나타나는, ‘독재와 민주주의’라는 쟁점은 ‘자본축적에 걸 맞는 통치성’을 우회하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에서 군부독재체계에 맞서, 거대한 민주화 투쟁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느냐는 쟁점이 등장합니다. 물론 이에 대해서 결과론적으로 민주화가 되었을 것이다거나,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만들었을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당한 평가가 아닙니다. 군부독재폐기라는 강령을 내걸고 싸운 투쟁에 대해서는, 몇 번이고 그 의미의 중요성을 평가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대중들의 이데올로기적 반역과 군부독재라는 정세가 만나 이루어진 계급투쟁이었고, 역사를 움직여나가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 후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된 역사에 대해서는, 연속적으로 일어난 지배계급들의 계급투쟁에 주목해야 합니다. 즉 1990년대 재민주화 전략과 세계화라는 새로운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의 도입, 그에 뒤이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라는 계급투쟁을 주목해야 합니다.


4.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의 기원

-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 -

위와 같은 대립물들은 발전주의 시대와 관통하는 1950 ~ 70년대를 거치면서 발전해왔고, 고유한 방식으로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했습니다. 각 시대를 특징짓는 기조와 경제정책들은 그런 대립물들을 물질화시켰고, 자본주의 세계체계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전략적 위치는 그것을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즉 한국현대사에서의 극단적인 반공 이데올로기는, 경제성장이라는 자신의 타자를 통해서만 공고하게 작동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경제와 정치에 대해서 이중의 잣대를 들이미는 일련의 평가들은, 원칙적으로 잘못된 역사 인식을 낳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선 정치에서의 민주화를 달성했으니, 이제는 경제에서의 민주화를 달성하자는 단계론적 진보사관 역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1950 ~ 70년대의 역사를 통해서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와 반공이데올로기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1950년대 삼백산업으로 대표되는 소비재 중심의 공업화, 1960년대 1-2차 경제개발계획과 경공업 중심의 공업화, 1970년대 3-4차 경제개발계획과 중공업 중심의 공업화. 발전주의 시대의 일련의 공업화 정책들은 일견 상관없어 보이는 반공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사람들의 무의식에 경제성장에 대한 가치를 주입시킬 수 있었습니다. 수출지향공업화,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다층적 하청체계로의 편입 등은 현실사회주의 국가에 맞서 자본주의 세계체계로 편입되어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데올로기들은 발전주의 시대에 폭발적인 계급투쟁이 전개되는 것을 막았고, 한국사회를 반동적으로 재편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의 ‘한국현대사를 만나다’ 기획연재에서, 그런 구체적인 계기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국현대사를 만나다’ 기획연재를 통해서 질문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관계가 확립된 사회에서는 경제성장이라는 것이 역사를 움직이고,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거의 유일한 동력처럼 간주됩니다. 즉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사회에 고유한 것이고, 한국에서는 발전주의와 신자유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위와 같은 대립물들을 기반으로 경제성장 이데올로기가 만연합니다. 또 다른 한축에 있던 반공이데올로기는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가지면서,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이는 흔히 경제주의로 빠졌던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도 나타났던 오류로, 생산력의 발전을 역사를 움직인 최초의 동역학으로 간주하는 경향입니다.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하며 자본주의로 수렴되는 과정에는,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라는 매개항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경제성장이 역사를 발전시키는 최초의 동력 및 결정점으로 파악하는 것은, 역사를 단선적으로 파악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를 정확히 전도시켜 정신적인 힘이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관념론에 불과합니다. 역사는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단선적인 모델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다양한 요소들이 개입하는 복잡한 비선형체계입니다. 물론 자본주의의 역사에서는 이윤율의 저하와, 궁핍화 및 과잉인구의 발생과 같은 장기적인 경향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요인들을 벗어버리고 투명하게 나타났던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일련의 정세 속에서 다양한 제 모순들이 결합하여, 역사를 이끌어가는 힘이 됩니다. 여기서 계급투쟁은 다양한 제 모순들을 결합시키는 매개고리가 되며, 따라서 역사를 움직여가는 힘은 계급투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식민지로부터의 해방 이후 강력했던 피지배계급들의 계급투쟁을, 다양한 기획을 통해 억압하며 지배계급들의 계급지배를 강화할 수 있었던 시기가 바로 발전주의 시대, 즉 1950 ~ 70년대입니다. 경제성장이데올로기와 그에 대한 타자로서 항상 전자를 뒷받침했던 반공이데올로기 역시, 이런 계급투쟁의 산물로서만 파악해야 좀 더 정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지나간 역사를 공부하면서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계급투쟁입니다. 이것을 통해서만 우리는 역사의 동학을 바르게 평가할 수 있고, 또 정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을 회복하는 것 많이, 현재 경제성장이데올로기를 매개로 계급지배를 실현하는 이명박 정권에 대해 저항하는 무기로서 역사를 자리잡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Posted by 행진

2008/09/09 21:08 2008/09/09 21:08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Comments List

  1. 지나가다 2008/09/28 07:35 # M/D Reply Permalink

    이제까지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
    이것을 어떻게 증명하시겠습니까?
    태클이 아니라, 역사의 동인이 무엇이었냐를 판단하는 건 역사에서 무엇을 볼것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 아닙니까?

7월 30일, 미친소 미친교육을 때려잡읍시다!



촛불을 꺼지지 않았다! 서울시교육감 선거로 옮겨 붙은 촛불!

촛불이 켜진지 두 달이 훌쩍 지난 지금, "촛불을 꺼졌다"며 강경하게 대응하는 정부와 "촛불은 꺼지지 않았고, 꺼져서도 안 된다"며 물러서지 않는 다수의 시민들이 거리에서 대치하고 있다. 이렇게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이는 촛불집회가 오는 30일 실시될 서울시교육감 선거로 옮겨 붙고 있다.

최근 촛불 집회 현장에서는 교육감 선거 참여를 촉구하는 플래카드와 스티커가 눈에 띈다. 시민들은 '미친교육 이명박 심판의 날, 7월 30일 시민직선 서울시교육감선거'라고 적힌 스티커를 몸에 붙이고 다니거나 '서울시교육감은 우리 손으로 뽑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다니며 선거 참여를 독려했다. 아고라 토론방에서는 일찍부터 홍보가 시작되어 누리꾼들은 서울시교육감의 권한, 문제점, 후보공약, 행동요령 그리고 부재자 투표방법 등을 알리며 투표 참여를 촉구하는 중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촛불의 초심 '미친소 미친교육'

사실, 촛불이 교육감선거에 '옮겨 붙었다'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왜냐하면 '광우병 쇠고기' 수입에 대한 재협상을 요구했지만 이명박은 기만으로 일관하며 결코 항복 선언을 하지 않았고, 따라서 비록 '교육'감 선거이기는 하지만 시민들이 직접 투표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이기에 시민들은 이를 통해 뻔뻔한 이명박 정권에 대한 심판을 해야 한다는 판단을 했다. 얼마 전 진중권 교수가 "현 정권이 저렇게 까불 수 있는 것은 앞으로 대선이나 총선은 4,5년 남았기 때문"이라며"그런 의미에서 대중이 직접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하게 합법적인 기회가 바로 교육감 선거"이고, 7월 30일 서울시교육감 선거를 촛불의 승리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만들자고 제안했던 것도 이 맥락에서였다.

하지만 촛불집회 초반 참가자의 다수를 점하며 이슈화되었던 중고생들, 이들의 아이콘으로서의 '촛불소녀'에 대한 기억을 되새겨봤을 때, 미친교육에 대한 분노는 '이미 촛불 속에' 들어있었다. 이명박 정권이 후보시절부터 시작해 파장을 일으켰던 갖가지 교육정책과 4.15 학교자율화 조치로 대표되는 학교시장화 정책에 대한 분노는 5월 광우병 투쟁이 촉발될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였다. '미친소 미친교육' 그 자체가 촛불이었던 것이다.

'미친소 미친교육'을 위한 환상의 커플 2MB-서울시교육청

그동안 서울시 교육정책은 이명박 교육정책의 판박이였다. 아니, 너무 막 나가서 중앙정부조차도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미친교육의 선봉'이었다. 4.15학교자율화 조치가 발표되기 이전부터 서울시 교육청은 일제고사 부활, 0교시 수업 및 야간 자율학습 부활, 우열반 편성 등을 공언한 바 있다. 학원의 심야교습 시간을 연장하고, 방과후 학교를 학원에 개방하며, 영어 몰입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서울시민들의 사교육 부담을 가중시켰다. 특목고/과학고/자사고는 물론, 국제중까지 신설해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입시지옥에 빠뜨리려한 것 또한 두말할 나위 없는 서울시교육청의 업적이었다.

서울시교육청의 영향력은 서울이라는 공간을 넘어서 대학민국 수도(首都)로서 다른 시/도교육청의 모범이자 지표가 되어 지역간 '미친교육' 경쟁을 부추겼다. 또한 전교조를 촛불집회의 배후로 지목하고, 각 학교 교사들을 동원해 촛불집회에서 청소년들의 참가를 감시하였으며, 교총과 함께 미국산 쇠고기 학교급식 반대운동을 저지하면서 촛불을 끄려했던 주체도 바로 서울시교육청이었다는 것은, 촛불 밝혔던 모든 시민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7월 30일을 '미친소 미친교육' 심판의 날로!

7월 30일 서울시교육감 선거는 '서울'이라는 공간과 '교육'이라는 영역을 초월한 '대정권 심판의 장'이다. 특히 최근에 극심한 탄압으로 분위기가 하강되고 있는 반정권 촛불집회가 다시금 초심(미친소 미친교육)으로 돌아가 더욱 더 많은 시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하나의 전환점이자 확산의 계기가 될 수 있도록 만들자! 그리고 2MB의 환상의 커플, 서울시교육감 선거에서 투표는 기본이고 적극적인 투표 권유, 지역별 선거운동을 통해 '미친소 미친교육'에 브레이크를 걸어 하반기 재차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는 '교육을 시장판으로 만드는 정책'을 저지하고 사회공공성 투쟁 승리를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자! 7월 30일을 '미친소 미친교육' 심판의 날로!

Posted by 행진

2008/07/18 00:29 2008/07/18 00:29
, ,
Response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RSS :
http://stulink.jinbo.net/blog/rss/response/119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G8 정상회담 비판]
‘다른 세계’를 가능케 할 촛불을 밝히자!


 

세계적인 운동과 세계적인 탄압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리가 장대비 속에서 66번째 촛불시위를 벌인 12일, 일본과 각국 일본대사관에서는 G8 정상회의에 반대하는 동시다발 시위가 전개되었다. ‘G8 반대 세계행동의 날’로 선포된 이 날, 각국의 많은 시민들은 그간의 운동을 갈무리하고 향후의 투쟁을 결의하는 한편, 홋카이도 도야코에서 정상회의가 열린 7월 7~9일과 그 앞뒤 기간 동안 주최국인 일본이 시위대에 가한 폭력적인 진압을 비판했다. 일본경찰은 시위참가자 강제해산과 연행은 물론, 평화롭게 행진하고 있던 시위대의 트럭 창문을 깬 후 운전자를 끌어내는 등 과도한 폭력을 사용하기도 하고, 아예 각국 활동가들의 비자승인이나 입국을 거부하고 억류 및 출국조치를 하면서 원천봉쇄에 나서기도 했다.

물론 G8이나 여타 국제회의에 반대하는 운동에 대한 탄압은 올해 일본에서만의 일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2001년 제노바에서 열린 G8 회담 당시에는 무장한 경찰이 시위에 참가 중이던 한 청년을 총으로 쏘아 살해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저들이 전 세계 민중들이 요구하는 생존과 안정, 자유와 평등을 폭력적으로 묵살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해법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 마치 군홧발로 촛불시민들을 짓밟으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유린한 이명박 정권처럼 ‘신자유주의 경찰국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 일본, 그리고 그 비호 뒤에 모인 열강들은 전 세계 민중들로부터 대체 무엇을 지키고자 했던 것일까?

G8의 본질과 대안세계화 운동의 대응

선진 8개국의 모임(Group of Eight)을 뜻하는 G8은 미국, 독일, 일본, 영국, 프랑스, 캐나다, 이탈리아, 러시아로 구성되어있으며, 이들의 GDP는 세계의 60% 가량을 차지하고 군사비 지출은 90%에 육박한다. 따라서 G8은 구속력을 갖는 공식 국제기구는 아니지만, 이들이 연례 회담을 통해 결정하는 사항들은 IMF와 WTO의 ‘지침’이 되며 세계 정치경제의 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1차 석유위기와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 이후 국제 통화체계의 위기, 인플레이션, 경기침체 등에 직면한 중심부 국가들이 상호대립을 피하고 직접적인 정책조율을 도모하기 위해 1975년 결성된 G6(캐나다는 1976년, 러시아는 1996년부터 참가했다.)은 지금까지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선도하는 우두머리 역할을 해왔다. 1980년대에 고금리 정책과 노동유연화, 사회보장제도 해체 등으로 대표되는 레이거노믹스의 확산도, 1990년대 이후 IMF와 세계은행 강화를 매개로 한 워싱턴 컨센서스의 강요도 모두 이들의 협의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주변부 국가들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는 이러한 조치들은 보통 ‘외채탕감’이나 ‘발전원조’, ‘환경과 문화다양성의 보전’과 같이 자못 ‘휴머니즘적’인 언사로 꾸며져 의제로 올라가곤 했다. 하지만 이러한 화려한 수사 뒤에는 언제나 지원대상이 되는 국가들에 대한 폭력적인 구조조정과 무역․투자 자유화의 강요가 도사리고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러한 G8의 본질을 폭로하며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항하는 사회운동은 1999년 G8 정상회의가 열린 독일 쾰른에서 대규모 반대시위가 조직되면서 본격화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국제적인 직접행동으로 시애틀 WTO 각료회의를 저지한 경험, 2001년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하다’는 기치 하에 시작된 세계사회포럼의 경험은 G8에 대항하는 운동이 보다 발전할 수 있게 했다. 2001년 이탈리아 제노바 G8에 맞서 10만 민중의 강력한 시위가 벌어지고, 또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 칸쿤 WTO 각료회의와 미주자유무역지대(FTAA)를 무산시킨 투쟁,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대대적인 투쟁이 전개된 것은 그 직접적인 성과다. 그리고 이러한 대안세계화 운동은 ‘호화로운 만찬장에서 제3세계의 기아를 근심하는’ G8 정상들은 물론, 그들에 대한 읍소를 통해 빈곤과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을 퍼트리는 NGO적 경향(2005년 G8 개최국인 영국의 블레어 총리는 아프리카 원조, 에이즈 퇴치와 같은 의제를 전면에 내세워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를 표방하며 대안세계화운동을 무력화하고자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채탕감을 요구하는 ‘빈곤을 역사 속으로(Make Poverty History)’와 같은 NGO와 엘튼 존, 마돈나, U2 등 유명가수들이 출연한 대규모 공연 '라이브 에이드(Live Aid)'가 G8 반대투쟁의 자리를 대신했다.) 모두를 비판한다. 작년 독일 로스톡 G8 반대투쟁은 “제노바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기치 아래,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끝장내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것은 오직 전 세계 민중들의 단결과 연대뿐임을 분명히 했다.

저들이 극복할 수 없는 경제위기와 생태위기

올해 G8 정상회의의 주요 화두는 국제적인 금융 불안과 유가 및 곡물가 폭등으로 대표되는 인플레이션, 온실가스 배출과 지구온난화였다. 이는 현 시기 자본의 편에서 볼 때 사활적인 문제를 보여주는 것이다. 먼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부터 비롯된 미국 발 금융위기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는 달러가치를 상승시키기 위한 환율조정 등 중심부 국가 간의 정책공조가 필요하다. 또한 유가를 잡기 위한 석유증산 요청, 소비국의 에너지 절약 강제, 곡물가를 잡기 위한 농산물 수출규제 완화, 바이오연료 사용 감축 등 역시 절실하다. 중국, 인도 등 신흥경제국의 성장세를 감소시키지 않으면서도 온실가스 배출량을 축소할 수 있는 타협과 기술개발 역시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핵심적인 과제다. 이러한 문제들은 서로 얽히고설켜 어느 하나만 골라 해결할 수도 없는 실정이다. (* 아래 그림 참조.)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결과적으로 도야코 회의는 이 복잡한 실타래를 풀어내지 못했다. 금융불안정 및 인플레이션의 주범인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투기 규제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고, 제3세계 식량위기의 주요한 원인인 바이오연료 문제에 대해서는 “식량 안보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토의정서’ 만료 후의 온실가스 배출량 감소목표는 “가능한 한 빨리 배출량 증가를 막는다”는 모호한 표현으로 처리되었다. 하지만 이는 단지 국가들 간의 이해관계로 인한 갈등 때문에 ‘해결책’이 합의되지 못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앞서 거론한 글로벌 정책공조가 순탄히 합의된다 해도 현재의 경제위기와 생태위기, 그로 인한 정치적․사회적 위기는 결코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경제는 이윤율 하락을 반등시킬 생산혁신을 조직할 능력이 없고, 달러 발권이익을 통한 위기의 지연은 쌍둥이적자의 누적으로 인해 지속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중심부 국가 간 정책공조 역시 당장의 경착륙은 막을 수 있을지언정, 이는 오히려 1970년대 남미 외채위기나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 등의 형태로 수차례 반복된 주변부의 금융위기를 야기하여, 세계경제의 토대를 더욱 무너뜨릴 것이다. 이 과정에서 물가상승과 식량위기, 그에 뒤따르는 고통전가로 인해 민중들의 고통은 가중될 것 역시 자명하다. 또한 지구온난화로 대표되는 생태위기마저도 투자와 이윤확대의 계기로 활용하려는 자본의 전략은 환경정화비용을 위해서도 더 높은 경제성장, 따라서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논리로써 생태위험을 증폭시키고 착취를 강화할 뿐이다. (이상의 주장은 곧 있을 <2008 대안세계화 학생포럼>에서 훨씬 상세하게 분석될 것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은폐하고 위기를 지연하려는 G8은 기만과 무능의 잔치일 뿐이다.

이명박을 고꾸라트리고 대안세계를 향해 행진하자!

기만과 무능이라면 G8에 결코 뒤지지 않을 이명박 대통령 역시 폭락한 지지율을 회복하기 위한 콩고물을 얻어먹고자 정상회의에 참가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촛불집회 때문에 한국경제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는 케케묵은 논리를 다시 한 번 꺼내들며 촛불시민들을 공격했다. 또한 8월 초 방한을 앞둔 부시 대통령과의 회동을 갖고 그의 임기 내에 한미FTA를 비준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부시는 “쇠고기 문제로 인해 (한미FTA에 대한) 의지가 약해진 게 아니라 오히려 더 강해졌다”라고 말하며 든든한 우군이 되어줄 것임을 약속했다. 이로써 이명박 대통령은 현 정권에 쇠고기 재협상의 의지란 조금도 없음을 천명했고, 최근 스태그플레이션 사태에 대해 자신이 가진 해법이란 오직 한미FTA 체결을 통해 위기로 치닫고 있는 세계경제에 더욱 깊숙이 편입되는 것 말고는 없음을 인정했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오직 더 많은, 더 밝은 촛불뿐이다. 우리는 한미FTA 반대투쟁으로, 공공부문 민영화 저지투쟁으로, 비정규직 철폐투쟁으로 촛불을 확산시키고 끈질기게 이어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촛불은 격렬한 탄압에 굴하지 않고 시애틀에서, 제노바에서, 홋카이도에서 용감히 싸운 전 세계 사회운동과 만나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끝장내는 투쟁으로 발전해야 한다. 촛불이 꺼진다면 한국에서 대안세계화 운동의 건설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고, 또한 이명박 정권을 진짜로 퇴진시킬 수 있는 민중들의 깊고 너른 역량과 구체적인 전망은 대안세계화 운동의 전진 속에서 창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osted by 행진

2008/07/18 00:14 2008/07/18 00:14
, , , ,
Response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RSS :
http://stulink.jinbo.net/blog/rss/response/118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 Previous : 1 :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 15 : Next »